<14화>
[말도 마. 주혁 선배 진짜 조용하게 사람 압박하는 거 진짜…. 한 시간 내내 기가 쏙 빨렸어. 그래도 완전 컴팩트하게 열공한 느낌이라 보람은 있더라]
[그랬구나. 고생했어.]
[근데 선배 부모님도 약국 하시나 봐. 송유영 걔가 대놓고 부모님 뭐 하시는지 물어봐서 기함했는데 선뜻 대답해 주더라. 너도 몰랐지?]
답문은 조금 틈을 두고 돌아왔다.
[응. 몰랐어. 새은아, 엄마가 부르셔서 가봐야 할 것 같아. 내일 학교에서 보자!]
[응응 잘 자.]
하암, 하품이 다시 나오며 손에서 단말기가 툭 떨어졌다. 카페에서 그들을 차분하게 압박하던 한주혁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비현실적으로 멋지고 근사하며 스마트하긴 했지만, 나중에 회사에서 그런 상사를 만나면 꽤 버거울 듯했다.
매일 매일 퇴사가 절실할지도. 외모는 정말 최곤데 말이지.
***
과제는 무사히 끝났다. 개별 점수는 며칠 후에 나오겠지만 전원이 최소 A에서 A+를 받을 것 같았다. 깐깐하기로 정평이 난 교수가 발표 내내 열심히 경청하며 흡족한 얼굴이었던 까닭이다.
다들 수고했다며 밝은 얼굴로 강의실을 나섰지만, 저번처럼 다 같이 모여 회포를 나누거나 여유를 갖지는 못했다. 시험을 갈음한 미션 하나만 끝났을 뿐 다른 과목의 과제가 산재해 있었다. 다음 주부터 본격적인 기말고사가 시작되기도 했다.
주혁은 도서관 별관 나선계단에 걸터앉아 있다가 창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민예서가 절친인 채린, 새은과 나란히 광장을 가로질러 도서관 본관을 향하고 있었다.
그는 그녀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뒷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날 이후로는 둘 사이의 접점이 없었다. 조별 과제로 다 같이 만난 적은 많았지만 단둘이 있었던 순간은 전무했다. 시선조차 맞닿은 적이 없었다.
착각일까. 일부러 그를 피하는 듯한 느낌은.
평온하던 가슴에 불쾌한 파문이 일었다. 그는 느릿느릿 자리에서 일어났다. 요 근래 찾아온 적 없던 스산함이 뇌 어딘가를 눌러오기 시작했다. 적어도 약을 먹기 시작한 뒤로는 한 번도 맞닥뜨리지 않았던 압박감이었다.
***
민예서는 친구들이 하나씩 자리를 뜨고 나서도 창가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었다. 꼿꼿하게 등을 세우고 공부에 몰입한 뒷모습이 그린 듯 단정했다.
흐트러진 것은 느슨하게 묶어 늘어뜨린 머리카락밖에 없었다. 늑골까지 흘러내린 머리칼은 풍성하고 윤기가 흘러 반짝거렸다. 그 흐트러짐마저 의도적으로 연출된 양, 한 폭의 초상화처럼 우미하고 섬세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똑바로 의자에 대고 있던 등과 어깨가 허물어지며 고개가 책상 위에 스르르 기울어졌다. 작고 귀여운 뒤통수에 졸음이 한껏 묻어나며, 아무렇게나 늘어졌던 머리칼 끝이 둥글게 말려 어깨 위로 넘어갔다. 새근새근, 유약한 숨결이 시각을 초월해 제 심장에까지 전이되는 착각마저 일었다.
갑작스러운 열기에, 말아쥐고 있던 주먹을 폈다. 손바닥이 땀으로 끈적거리고 있었다. 유월로 넘어가도 더위를 느낀 적은 단 하루도 없었지만 오늘만은 달랐다. 물론 기온과는 무관한 열이다. 보다 정확히는 흥분이었다.
6시가 넘은 도서관은 가방과 책만 둔 채 빈 자리가 띄엄띄엄 있었고 민예서가 자리한 창가 쪽은 서고로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았다. 그때 민예서와 간격을 두고 옆에 앉아 있던 학생이 가방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 부산함에도 민예서는 고개를 들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둥근 어깨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것으로 보아 깊이 잠든 것 같았다.
주혁은 자리가 나자마자 가방을 올려두고 민예서 바로 옆자리에 앉았다. 따가운 햇살을 피해 거의 끝까지 내린 블라인드 사이로 노을빛이 투과해 들어왔다. 솜털처럼 부들거리는 머리카락이 그 빛에 반사돼 샛노랗게 반짝거렸다. 고개가 반대쪽으로 돌려져 있어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민예서의 팔꿈치에 닿을 듯 말 듯 쌓인 자료들 맨 위에 노트 하나가 있었다. 다이어리에 가까운 크기의 노트에는 깨알처럼 작은 글씨로 ‘설정집’이라 쓰여 있었다. 왜일까. 갑자기 나쁜 충동이 엄습했다.
정신이 들었을 때는 노트를 제 앞으로 가져와 슬그머니 펼치고 있었다. 무엇에 대한 설정이든, 남의 노트를 가져와 몰래 훔쳐보다니 말도 안 되는 짓거리였다. 하지만 이성과 행동은 완전히 따로 놀기 시작했고 그에게는 그걸 바로 잡을 의지조차 없었다.
연필 하나 떨어지는 소리도 없이 사위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심지어 민예서조차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깊이 잠들어 있었다.
두 번째 페이지부터 중세 검의 종류, 소드 마스터, 마물과 마법에 대한 설명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연금술에 대해 영국 과학잡지 원문을 프린트해 붙여놓은 조각도 보였다.
The start of Western alchemy may generally be traced to ancient and Hellenistic Egypt, where the city of Alexandria was a center of alchemical knowledge, and retained its pre-eminence through most of the Greek and Roman periods…(중략) (, 24-31)
그는 노트에서 잠시 고개를 들었다. 중세 검과 소드 마스터, 마물과 드래곤, 연금술과 관련된 교양과목이 있던가? 영문학과? 철학과? 아니, 이건 아무리 봐도 판타지 소설 속 세계관과 설정이었다.
이런 게 취향인가…?
그가 뭔가를 깨달은 듯 노트 속 내용으로 시선을 되돌렸다. 설정집이란 걸 보니 뭔가의 설정인 건 확실한데 무엇의 설정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판타지 소설을 쓸 리는 없고.
의아함을 접어두고 끝부분을 펼쳐보았다. 마지막 몇 장에는 잠꼬대 같은 낙서가 한가득 적혀 있었다.
장학금. 힘내자! 아아 회계 원리. 세상에서 제일 짜증 나. 이것만 아니면 다른 과목은 다 괜찮은데. 제발 졸업전에 S&U(pass/fail) 꿀 과목이 더 많아졌음 좋겠다. 만년필도 짜증 나. 만년필계의 에르메스 티발디. 사람 마음 헷갈리게 왜 닭 다리는 주고 그런 건데. 밥을 사줄 거면 날 잡아서 한꺼번에 다 사주지 왜 나만 먼저…. 장난하나. 재수 없어.
주혁이 지그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마터면 웃음이 터져 나올 뻔했다. 민예서를 세상에서 가장 짜증 나게 하는 존재가 회계학, 그리고 자신이라니.
맨 끝장에는 여름 학기 수강 신청 계획이 적혀 있었다. 여름에도 쉬지 않고 학교에 올 생각인 건가? 하여간 부지런하네.
다시 앞장으로 돌아와 그를 저격한 낙서를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어느새 입가에 남아 있던 웃음기가 가시며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는 노트를 조심스럽게 제자리에 돌려놓고 아직도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민예서의 뒤통수를 바라보았다. 어찌나 작고 귀여운 머리통인지, 품에 꼭 안고 쓰다듬으면 비단처럼 보드라울 것 같았다.
그때 창문의 아래쪽, 블라인드가 마저 내려오지 않은 사이로 매미처럼 커다란 벌레가 날아와 들러붙었다. 민예서의 고개가 향한 쪽이었다. 그 상태로 눈이라도 뜨면 깜짝 놀랄 것 같았다.
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민예서의 반대쪽으로 향했다. 그는 벌레가 보이지 않게 블라인드를 마저 내린 뒤에도 그 자리에 잠시 서 있었다. 가지런히 모은 손등 위로, 곤히 잠든 민예서의 옆얼굴이 빼꼼히 보였다.
동그란 이마와 단아한 눈썹, 귀여운 콧날 아래 앙증맞은 입술은 아기의 것처럼 도톰했다. 깨어 있을 때만큼이나 사랑스럽고 예쁜 얼굴이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서고에 가려진 창가 쪽을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뺨에 매달린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떼어 내 귀 뒤로 넘겼다. 손이 저절로 움직이고 있었다. 깨우면 안 된다는 생각보다, 어떻게든 닿고 싶다는 바람이 더 컸다. 그 열망은 민예서의 얼굴을 눈에 담으면 담을수록 멋대로 몸집을 더 부풀리고 있었다.
고개를 좀 더 기울이자 좋은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향수처럼 인공적인 향과는 달랐다. 민예서가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마다 꽃향기가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사람의 숨결에서 이런 체취가 나올 수 있다니.
엄지손가락 끝이 저절로 입술 선을 훑고 있었다. 붉고 도톰한 구순의 감촉이 아기의 것처럼 보드라웠다. 맛은 어떨까. 제 입술 아래서, 그리고 혀끝에서 어떤 맛이 느껴질지 너무도 알고 싶었다.
정신이 들었을 땐 이미 그 입술에 제 것을 살며시 겹치고 있었다. 만에 하나 누가 보지 못하도록, 쭉 뻗은 한 팔로 어깨 너머 책상을 짚어 얼굴 쪽은 가린 채였다. 누군가 그들을, 정확히는 민예서의 잠든 얼굴을 본다는 생각만으로도 신경이 바짝 곤두서고 있었다.
그의 입술이 아슬아슬, 민예서의 것을 닿을 듯 말 듯 쓸다가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민예서의 어깨가 희미하게 움찔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입술을 떼지는 않았다.
깰 테면 깨라지.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어떻게 되든 정말 상관없었다. 될 대로 되라는 심리보다는, 차라리 들켜 버렸으면 싶은 마음이었다.
입술을 살짝 뗐다가 다시 그녀의 것을 머금었다. 믿을 수 없을 만큼 촉촉하고 부드러웠다. 어느덧 제 것이 품은 열기가 옮겨갔는지, 민예서의 입술도 온기를 입고 있었다. 혀를 밀어 넣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정말로 깨어날 것 같아서 그럴 수 없었다.
한심한 새끼. 언제는 깨도 상관없다며.
스스로에게 조소를 던졌다. 자신이 정확히 뭘 원하는지 알 수 없었다. 모든 게 늘 흑백논리처럼 뚜렷했고 정답은 늘 명확히 나와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 민예서에 대해서만은 그렇지 않았다.
이대로 제 혀를 넣어도, 그녀의 것과 격렬하게 얽혀들어도 아무것도 모른 채 깨어나지 않기를 원하는 동시에, 지금이라도 눈을 뜨고 저지하길 바라기도 했다. 이중적인 마음을 다스릴 수 없어 힘이 드는 건 오롯이 그의 몫이었다.
혀를 밀어 넣기 직전, 그는 입술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보호막으로 감싸듯 어깨 위를 두른 팔도 천천히 물렸다. 민예서는 끝까지 눈을 뜨지 않고 고른 숨소리만 내보내고 있었다.
주혁은 그런 그녀를 잠시간 내려다보다가 자리를 떠났다. 방금 전까지 도둑 키스를 하려던 사람답지 않게, 곱지 않은 눈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