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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3)화 (14/124)

<13화>

주혁은 일행을 어제의 즉석 떡볶이집으로 이끌었다. 메뉴도 민예서와 똑같은 걸로 시켰지만 적당히 1인분을 먹을 뿐, 전날처럼 식탐은 부리지 않았다. 민예서와 단둘이 있을 때처럼 식욕이 폭발하지가 않았다.

“경영학과는 진짜 좋겠네요. 조별 과제할 때 선배가 이렇게 밥도 사주시고.”

“어? 아닌데. 우리 과 원래 이런 문화 없어요. 전 이렇게 팀플 리더가 밥 사주신 건 처음이에요.”

송유영의 말에, 이동환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조새은도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한마디 거들었다.

“저도 처음이에요. 요즘은 다 각자 플레이니까 선후배라고 밥 사주고 그런 거 없죠, 뭐. 우리 큰언니가 나랑 열한 살 차이 나는데 그때만 해도 선배들한테 많이 얻어먹었다던데. 하하하- 감사합니다, 주혁 선배님!”

“고맙긴.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더 좋은 거 살게.”

주혁은 너스레를 떠는 새은에게 담담히 응대했다. 타 과인 송유영이 냅킨으로 입을 예쁘게 닦다가 불쑥 물었다. 그들이 듣기에도 평소보다 훨씬 간드러진 목소리였다.

“근데 선배, 듣던 것보다 훨씬 털털하고 벽이 없으신 것 같아요. 단순히 밥을 사주셔서가 아니라… 음, 솔직히 이렇게 같이 밥 먹는 것 자체가 어려운 타입? 그런 느낌이었거든요.”

“그랬나요.”

“사실 저도 그렇게 느끼긴 했어요, 선배. 지금이니까 말하지만 그전에는 진짜 말도 붙이기 어려웠다고 해야 되나, 좀 차가운 인상이셨거든요.”

이동환도 한마디 거들자 주혁은 차분하게 덧붙였다.

“그랬나. 앞으로는 사회성을 좀 더 키워야겠네.”

“선배, 그런 의미에서 편하게 말 놓으시면 안 될까요? 요즘 아무리 선후배 간에도 안 친하면 존대한다지만 이렇게 팀플하면서 밥도 같이 먹는데.”

새은의 제안에 주혁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이미 말 놓고 있는데.”

“아, 어미는 그런데 호칭이요! 저랑 동환이한테 계속 새은 씨, 동환 씨, 부르시잖아요.”

“그럼 새은 후배, 동환 후배- 이렇게 부를게. 그럼 됐지?”

“주혁 선배. 그럼 저도 그렇게 편하게 불러주세요. 과는 달라도 새은 씨 말처럼 같은 조도 됐고 이렇게 밥도 같이 먹게 됐잖아요.”

“송유영 씨에겐 좀 이른 것 같아요.”

송유영이 코맹맹이 소리를 내며 눈을 깜빡였지만 주혁은 그 제안을 정중히 거절했다.

“이 후배들은 학기 초부터 봐왔지만 송유영 씨는 초면이니까요. 조금 시간이 걸려도 이해해 주면 좋겠습니다.”

“아, 네…. 알겠어요. 이해해요!”

송유영은 잠깐 동요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웃어 보였다. 새은은 왠지 통쾌함을 누르지 못하고 속으로 혼자 피식거렸다.

야, 누울 자리 보고 뻗어라. 주혁 선배가 얼마나 철벽인데. 원래 동기인 복학생들, 그것도 남자한테만 허물없이 말을 놓는데 너처럼 대놓고 추근거리는 애한테도 틈을 줄 것 같냐?

“예서도 오늘 또 왔으면 좋았을 텐데. 에휴, 원체 바쁜 친구라.”

동환이 지나가듯 예서를 언급하자 새은의 뇌리에 불이 반짝 켜졌다. 그러고 보니 예서에게는 처음부터 예서야, 거리낌 없이 이름을 불렀던 것 같았다.

원래 둘이 알았던 사이였나? 내가 알기론 아닌데. 한번 물어볼까?

새은은 호기심에 잠시 고심했지만 결국 접어두기로 했다. 송유영 앞이니 말을 아끼는 편이 좋을 듯했다. 송유영은 딱 봐도 한주혁에게 꼬리를 치고 있었고, 전형적인 속물 느낌이라 과제 외의 이슈는 일절 언급하고 싶지 않았다.

“다 먹었으면 커피 사줄게. 가자.”

“네? 커피까지요?”

“어제 예서랑도 갔어. P 쇼핑몰에 카페 새로 생겼길래.”

한주혁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덧붙였다.

“어제 커피는 예서가 샀지만.”

“앗, 그럼 커피는 저희가 사드릴게요.”

“됐어. 커피까지 확실히 사줄게.”

그는 돌아서며 싱긋 웃었다. 의미심장한 눈빛이 우연인지, 의도적인 것인지 송유영의 시선과 맞닿았다. 그는 송유영의 얼굴이 발개지기 직전 눈길을 돌렸다.

“에이, 그럼 더치로 해요. 선배! 밥도 얻어먹었는데 커피까지 쏘시게 하는 건 좀 그렇죠.”

“그래요, 선배. 아무리 선배가 부자라도 저희도 염치가 있죠.”

새은의 말에 송유영의 귀가 쫑긋 섰다. 주혁은 조금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부자는 아니지만… 그래, 그럼 커피는 각자 부담하는 걸로.”

넷이 가게를 나와 카페로 향할 때였다. 송유영은 새은에게 은근히 달라붙어 들릴락 말락 속삭였다.

“새은 씨. 아까 주혁 선배 부자라고 했잖아. 선배네 어떤 집안인데?”

“어? 나도 모르지. 은근히 여유가 있어 보여서 그냥 해 본 말이야.”

“아, 그렇구나. 난 또, 잘 아는 줄 알았네.”

송유영은 실망한 듯 중얼거리다 다시 새롱거렸다.

“역시 은근히 그래 보이지? 명품도 안 두르고 차도 없는데 이상하게 부티가 느껴지더라. 외모 자체가 그렇지만 말이야. 혹시 알고 보면 엄청난 금수저 집안이 아닐….”

“야, 이동환! 같이 가. 왜 너만 앞서가는데?”

새은은 자꾸만 들러붙는 송유영에게서 슬쩍 떨어져 애먼 동환에게 성질을 부렸다.

“아니 선배랑 얘기하다 보니 그랬지. 왜 갑자기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다행히 송유영의 음험한 속삭임은 거기서 멈췄다. 대신, 이번에는 만만해 보이는 동환에게 다가가 여우처럼 옆에 붙었다. 새은은 내심 혀를 차며 미간을 찡그렸다.

어휴, 보면 볼수록 가까이하고 싶지 않은 타입이야. 이번 팀 과제만 끝나면 다신 엮일 일 없겠지.

하지만 송유영의 호기심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각자 커피와 차를 앞에 두고 둘러앉았을 때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주혁 선배, 혹시 이런 거 물어봐도 될지 모르겠는데…. 실례인 줄 알지만 이런 자리가 언제 또 올지 몰라서요.”

“뭔데요?”

“부모님이 뭐 하시는지 여쭤봐도 돼요?”

송유영은 뻔뻔할 정도로 천연덕스럽게 물어놓고는 머쓱한 듯 깔깔 웃었다.

“저기, 너무 사적인 질문 아니에요? 팀 과제에서 그게 무슨 상관….”

“괜찮아.”

보다 못한 새은이 끼어들려 했지만 당사자인 한주혁은 담담하게 저지했다.

“물어봐도 상관없어요. 새은 후배 말대로 팀 과제와 아무 관련이 없긴 하지만.”

커피잔을 내려놓는 얼굴 위로는 아무 감정도 엿보이지 않았다.

“의약품 관련 쪽이에요.”

“의약품…?”

“약 제조라고 해야 되나….”

“아, 그럼 약국 하시는 거예요?”

새은이 못 마땅해하던 것도 잊고 불쑥 끼어들었다. 동환도 뒤이어 거들고 나섰다.

“예서 어머니도 약사신데.”

“맞아. 예서네도 약국 하잖아.”

갑자기 예서로 화제가 튀었지만 송유영은 눈앞의 한주혁에게만 집중하고 있었다.

“우와. 역시 사짜 집안이셨구나! 어쩐지. 약국도 잘 되는 곳은 웬만한 개업의만큼 수익이 좋잖아요.”

“그것도 요즘은 옛날얘기죠.”

시종일관 눈을 반짝이는 송유영이 얄미워서인지 새은의 목소리가 계속 불퉁해졌다.

“잘 나가는 전문직도 양극화가 심각한 시대잖아요. 요즘 사무실 월세 내는 것도 허덕이는 의사랑 변호사도 그렇게 많다는데. 아, 선배네가 그렇다는 건 절대 아니고요.”

“그 말이 맞아.”

한주혁이 선선히 수긍해 보였다. 불쾌한 기색은 전무했지만 이 이상 제 신상에 대해 말하고 싶은 눈치는 아니었다.

“잠깐 과제 논의하고 9시 전에 일어날까요? 어제 예서랑은 얘기가 좀 길어졌지만 오늘은 좀 짧게.”

“어제 예서랑도 여기서 과제 얘기했어요? 와, 진짜 지독한 모범생들.”

이동환이 스트로를 쭉, 소리 나게 빨아들이며 혀를 내둘렀다. 한주혁은 피식 실소하곤 노트북을 꺼내 펼쳤다.

“기말고사 대신인 과제니까.”

그리고 의미심장하게 덧붙였다.

“목적은 우리 팀 전원, A+ 달성이고.”

조별이라도 발표 능력 여부를 감안해 개별 점수를 받게 되어 있었다. 심드렁하게 노트를 펼쳐 들던 이동환이 눈을 깜빡거렸다.

“예에? 난 B+만 받아도 감지덕지라 생각했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마케팅 관리니까요.”

“야, 이왕 하는 거 목표는 높이 잡고 다 같이 빡세게 해야지.”

새은이 눈을 부라리고 나서야 이동환도 입을 다물었다. 네 사람은 정확히 9시가 될 때까지 조장이 미리 찾아둔 사례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고 나서야 해산할 수 있었다.

송유영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같은 과 친구들의 단톡방에 호기심 어린 질문들이 떠 있었다.

[아까 한주혁이 저녁 사줘서 먹는다더니 어떻게 됐어? 아직도 다 같이 있음?]

[완전 좋겠다! 경영학과 진짜 부럽다. 우리 과엔 왜 저런 선배가 없는 거야.]

[그럼 결국 민예서, 걔랑은 아무것도 아니었던 거지? 처음부터 조장이라고 다 밥 살 거였고 걔는 우연히 만나서 하루 먼저 먹었다고 했다며.]

송유영은 코웃음 치며 성마르게 자판을 두드렸다.

[응. 알고 보니 아무 사이도 아니었더라. 그보다 한주혁, 집이 약국한대. 솔직히 더 대단한 집안인 줄 알았는데 조금 실망. 그래도 잘 나가는 대형약국이면 꽤 부자긴 하겠지?]

[헐. 약국? 병원장 아들쯤은 되는 줄 알았는데.]

[야, 약국도 목 좋고 병원 근처 대형이면 돈 존나 잘 벌지 않아? 그런 약국집 아들일 듯? 아무리 봐도 돈 냄새가 나는 분위기잖아.]

[역시 그렇겠지? 근데 왜 국산 차도 없지? 그 정도 살면 집에서 하나 뽑아줄 만도 한데.]

송유영이 그렇게 가십에 열을 올리는 동안, 같은 시간 집에 도착한 새은도 침대에 벌렁 드러누워 대화창을 켰다. 지금쯤 예서도 과외를 끝내고 집에 와 있을 시간이었다. 그날 밤 일을 간략히 전하는 동안에도 하품이 연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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