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새삼, 그가 얼마나 잘생긴 사람인지 가슴이 뻐근하도록 절감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선배는 왜 여친이 없을까? 마음만 먹으면 누구든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가 단단히 작정하면 넘어오지 않는 여자가 과연 있기나 할지.
“아, 미안. 중요한 전화라서.”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는 카페로 향하는 내내 누군가와 장시간 통화를 나눴다. 주로 듣고 있기만 한데다, 간간이 대꾸하는 말도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군요. 그럼 도커 & K 컨테이너 쪽은요?”
도커? 컨테이너? 혹시 항만 해운업 쪽…?
“네, 특히 금융 코어 쪽에 신경 써 주세요. 요즘 동종업계에 안 좋은 사례가 계속 터지고 있으니까요.”
금융 코어? 은행 쪽 관련 일인가?
“아, 안녕하세요, 조교님.”
“어, 그래….”
과 조교가 맞은편에서 걸어오다 두 사람을 보고 눈을 크게 떴다. 한주혁과 민예서라니? 다소 의아한 기색이 뚜렷했지만 이내 수긍한 듯 보였다.
“집에 같이 가나 봐? 그럼 잘 들어가.”
방향이 지하철역 쪽이다 보니 우연히 동행하게 된 거라 여긴 듯했다. 한주혁은 통화에 열중하느라 그에게 고개만 까딱 숙여 보였다.
대로를 건너 카페로 향하는 동안, 예서는 끊이지 않는 시선들을 의식하며 묘한 기분에 휩싸였다. 조교처럼 둘 다 아는 사람과 다시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하지만 스쳐 가는 사람들마다 한주혁에게 한 번씩은 반드시 눈길을 주었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훤칠한 키, 독보적인 외모 때문이리라.
“미안. 중요한 통화라서 좀 길어졌어.”
그는 카페에 다 와서야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으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선배.”
두 사람은 창가에 자리를 잡았다. 새로 생긴 카페는 꽤 넓고 아득했지만 그들이 앉은 쪽은 조도가 낮아 환하진 않았다.
그래서 다행이었다. 안 그래도 자리를 잡기까지 이쪽을 흘끔흘끔 보는 내부 이목도 강렬했는데 창 바깥에서까지 시선이 건너오면 얼굴이 너무 따가울 것 같았다. 그에 비하면 자신은 너무 평범하니 사귀는 사이로 보이지는 않겠지만, 부담스러운 건 부담스러운 거니까.
“이 카페 앱 있어? 여기서 주문하고 픽업할까 하는데.”
“네. 저도 있어요. 이번엔 정말 제가 살 테니까 메뉴 정해서 알려만 주세요.”
“난 플랫 화이트.”
“다른 건요?”
일부러 디저트를 사라고 여기까지 왔으니 아무리 배가 불러도 케이크 하나쯤은 시키지 않을까. 하지만 한주혁은 고개를 저었다.
“이거면 됐어. 더는 못 들어갈 것 같아.”
“그럼… 중간에 봐서 더 시키세요.”
오래지 않아, 주문 메뉴가 준비됐다는 알람이 앱에서 울렸다. 예서는 혼자 가져올 수 있다고 했지만 어느새 음료 트레이는 한주혁의 손에 있었다.
그녀가 시킨 바닐라 더블은 진득한 바닐라 휘핑이 무척 달콤했다. 어쩌다 보니 거품이 입가에 묻었는지 한주혁이 티슈를 건네주었다.
“오른쪽에 묻었어.”
“아, 감사합니다.”
“그쪽 말고 좀 더 옆에.”
“네….”
어린애도 아니고 칠칠치 못한 것 같아서 조금 창피했다. 은은한 조명 아래 확 달아오른 뺨이 잘 보이지 않을 거라 생각하며 티슈로 입을 벅벅 문지를 때였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한주혁이 피식 웃었다.
“참 이상해. 나는 너랑 단둘이 있으면 이상하게 식욕이 돋고….”
그가 잠깐 틈을 두고 말했다.
“너는 늘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아.”
“네? 제, 제가요?”
당황한 나머지 말도 더듬어 나왔다. 뺨의 열기가 이젠 귓불로 옮겨간 듯 뜨거웠다.
“응. 뭐랄까… 데이트라도 하고 있는 것처럼.”
“네에?”
“농담이야.”
그는 엷게 웃으며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러다 예서의 경직된 얼굴을 느꼈는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정말 농담이었어. 혹시 불쾌했다면 미안해.”
진중한 목소리였다. 그녀가 정말 언짢았을까 봐 안색을 살피는 시선에는 일말의 웃음기도 없었다.
“아, 아니에요. 불쾌하지 않았어요.”
“그래? 다행이다.”
화제는 곧 팀 과제로 옮겨갔다. 미묘했던 분위기도 잠시, 대화가 다시 활기를 띠고 매끄럽게 흘러가게 되었다. 예서는 다행이라 여겼다. 그러면서도, 조금 전 정곡을 찔린 듯한 긴장은 가슴 언저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 짜릿함은 시간이 흘러도 빗물 고인 웅덩이처럼, 그 자리에 계속 잔류해 있을 것만 같았다.
***
시간이 꽤 늦어 있었다. 예서는 엄마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 액정 화면의 시계를 확인했다.
-예서 너 오늘 일찍 와서 집 청소 싹 해두기로 했잖아! 10시가 넘도록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야?
“죄송해요, 엄마! 시간이 이렇게 늦은 줄 몰랐어요.”
모친은 혀를 차며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한주혁이 눈치 빠르게 가방을 챙겨 들자 예서도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느덧 10시가 넘은 것도 모르고 두 시간이 넘도록 카페에 앉아 있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두 사람이 전철역으로 향하던 중 그가 택시 정류장에 시선을 주었다. 저번처럼 택시를 잡아 중간에서 내려줄 생각으로 입을 막 열기 직전, 예서가 버스 정류장을 가리켜 보였다. 버스 한 대가 막 정차한 참이었다.
“선배! 저는 저거 타고 갈게요. 집 바로 앞에 서는 버스거든요.”
“아… 그래.”
“오늘 저녁 잘 먹었습니다. 그럼 다음에 뵐게요!”
예서는 그의 대답도 듣지 않고 부리나케 버스를 향해 뛰어갔다. 주혁은 한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버스에 올라타 뒷좌석 어딘가 앉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버스가 다시 출발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쓴웃음을 지었다.
1초만 더 빨리 택시 얘길 꺼낼걸.
이상하게 허전했다. 마치 데이트가 끝나고, 좀 더 함께 있고 싶은 사람이 먼저 가 버려서 혼자 남겨진 기분 같았다.
그는 차들로 빽빽한 도로에서 몸을 돌렸다. 집에 바로 갈지, 잠시 사무실에 들를지 고민하며 건물 차양 아래 서 있을 때였다. 그때 버스 정류장에 막 도착한 여자의 통화 목소리가 그의 귀에 꽂혀왔다.
“그렇다니까. 한주혁이랑 민예서, 단둘이 카페에 앉아 있더라구.”
어느 과 누구더라. 팀 과제 조원 중 하나인 타 과 여학생이었다. 마침 건물 쇼윈도 창이 꺼지는 바람에 정류장 쪽에서는 그의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모르지, 10분 전쯤 나갔는데 각자 집에 갔는지, 아니면 다른 데 갔는지…. 혹시 둘이 비밀 CC인가? 아무리 봐도 분위기가… 묘했어. 그렇다니까?”
가십을 좋아하는 사람 특유의 톤에다, 이젠 씩씩거리기까지 했다.
“와, 둘이 아무도 모르게 CC였으면…. 진짜 소름 끼친다. 안 그래? 누구? 아, 민예서도 누구 만나는 사람 없어. 얼굴도 꽤 예쁘고 스타일은 괜찮은 것 같은데 꾸밀 줄 모르는 답답한 스타일이잖아. 어, 버스 온다! 내일 학교에서 자세히 말해 줄게!”
여자는 통화를 마치고 황망히 버스를 향해 달려갔다. 주혁은 그녀가 탄 버스의 뒤꽁무니를 길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 민예서가 탄 버스를 볼 때와는 눈빛이 사뭇 달랐다. 입술 사이로 조소와 한숨이 동시에 새어 나왔다.
골치 아프게 됐네.
내일 두 학과는 물론, 상경대 전체에 소문이 퍼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용이 이리저리 와전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그는 경험상 악소문과 루머, 사실 왜곡을 본능적으로 퍼뜨리는 부류에 대해 잘 알았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온갖 가십에 시달려 왔기에 그런 쪽으로는 감이 빠른 편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인이 박여 상관없었다. 하지만 민예서의 주변이 시끄러워지는 건 원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괜한 소문으로 둘 사이가 어색하거나 껄끄러워지는 게 싫었다.
***
다음날 조새은과 이동환, 그리고 타 과의 송유영은 팀 과제 단체톡방을 들여다보며 제각기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한주혁이 불쑥 말을 걸어온 것이다.
[이른 시간부터 미안한데 오늘 저녁 다들 시간 되나요?]
일찌감치 도서관으로 향하던 예서의 눈도 동그래졌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중요한 과제니까 밥 한번 먹을까 해서요. 내가 사겠습니다. 예서는 어제 우연히 마주쳐서 같이 먹었거든요.]
[저 시간 돼요! 4시에 끝나는데 도서관에서 공부나 하고 있죠, 뭐]
[앗, 선배. 저도 됩니다.]
송유영에 이어 이동환이 선뜻 답변을 해왔다. 새은도 몇 분 뒤 답했다.
[저도 되긴 한데… 예서는 그럼 오늘 빠져야 되나요? 그건 아니죠?]
[그럴 리가. 예서도 시간 되면 다시 합류해.]
왜인지 안도감이 들었다. 어제 같이 먹었다고, 오늘 그녀만 빠지게 하는 건 아무래도 이상할 테니까. 동시에 말도 안 되는 서운함도 들었다.
어제 단둘이 먹은 건 역시… 선배에겐 별 의미가 없었던 거였구나. 그냥 같은 조라서 챙겨준 거였구나.
[어쩌죠. 오늘 과외가 있어서 어려울 것 같아요. 저는 어제 사주셨으니까 오늘은 네 분이서 즐거운 시간 되세요!]
밝게 웃는 이모티콘을 덧붙였지만 표정은 왜인지 씁쓸했다.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었다. 얼토당토않은 감정이란 걸 아는데도 그랬다.
정신 차려, 민예서. 네가 뭐라도 돼?
결국 글은 한 자도 쓰지 못하고 밤잠을 설쳤던 자신과는 달리, 그에게는 특별한 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갑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았다. 한껏 들떴던 마음이 서늘하게 가라앉으며, 뭔가가 심장 한가운데를 콕 찔러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