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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1)화 (12/124)

<11화>

예서는 그때까지도 멍하니 있다가 채린이 팔꿈치를 툭 치면서 속삭일 때야 현실로 돌아왔다.

“야, 나 어떡하냐. 너랑 떨어져 버렸다. 흑흑….”

“그러게.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지…. 뿔뿔이 흩어지긴 했지만 그래도 다들 열심히 하는 선배들이니까 걱정 마.”

채린은 울상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농땡이 부리거나 잔머리 굴릴 만한 멤버는 아무도 없었다. 예서는 원래 친했던 동기 조새은, 타 과에서 온 송유영과 동기인 이동환, 그리고 한주혁과 같은 조가 되었다.

사다리 타기 결과가 그러하니 누구도 더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뜻하지 않은 결과에 예서도 내심 얼떨떨했지만 잠자코 수업에만 집중했다. 채린과 떨어져서 아쉽긴 해도 한주혁과 같은 조가 된 것 자체는 기뻤다. 다시 그와 자연스럽게 얘기할 수 있을 거란 생각에 두근거리기도 했다.

수업 종료 직전, 그는 자연스럽게 리더가 되어 모임 장소와 시간을 정했고 다들 그에 이의가 없었다. 2주 뒤인 발표일까지 매끄럽게 잘 흘러갈 것 같아서 마음이 놓였다.

“예서야.”

채린과 새은을 뒤따라 강의실을 나서려는 순간 한주혁이 그녀를 불렀다. 예서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날 이후 대화를 나누는 건 처음이었다.

“잘 됐다, 같은 조가 돼서.”

담담하지만 부드러운 음성이었다. 그녀를 보는 눈빛도 보름 전과 똑같이 다정하고 친근했다.

“아… 네.”

예서는 수초간 눈을 깜빡이다 제 페이스를 되찾고 웃어 보였다.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선배.”

“예서야, 빨리 와-”

복도에서 채린의 부름이 들렸다. 예서는 그럼 나중에 뵐게요, 덧붙이며 돌아섰다. 안도감이 물밀듯 밀려오며 강의실을 나서는 발걸음이 날아갈 듯 가벼웠다. 지난 보름 동안 한 번도 마주치지 않았던 건 역시 우연이었던 거다.

다행이다. 그날 내가 뭔가 실수한 게 아니었어. 그럼 그동안 멀리서만 시선이 부딪친 것도… 우연이겠지?

***

조별 과제는 예상대로 물 흐르듯 매끄럽게 진행되었다. 다음 모임에서 논의할 1차 미션은 각자의 브레인스토밍 아이디어와 글로벌 마케팅의 실제 사례 조사, 두 가지였다.

이틀 뒤 같은 조인 새은과 도서관에서 자료를 찾아 정리할 때였다. 그녀가 문자를 확인하더니 울상이 되어 속삭였다.

“예서야, 우리 호두가 아프대!”

“진짜? 어쩌다가-”

“몰라. 갑자기 토하고 축 늘어져서 엄마가 지금 병원 데려가신다는데 나 이거 집에서 마저 하면 안 될까? 걱정돼서 못 있겠어.”

“응응, 얼마 안 남았으니까 내가 마무리할게. 빨리 가 봐. 별일 아니었으면 좋겠다.”

새은은 고맙다고 몇 번이나 말하고 가방을 챙겨 부리나케 도서관을 나갔다. 예서는 새은이 애지중지 여기는 반려견이 많이 아프지 않길 바라며 다시 자료로 눈길을 돌렸다.

정리를 대강 마쳤을 땐 벌써 7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예서는 가방을 챙겨 도서관 밖으로 나왔다. 앉아만 있을 땐 몰랐는데 막상 움직이니 허기가 졌다.

후문 분식집에서 라면이라도 먹고 갈까. 아니면 김밥? 아니면….

갑자기 김이 모락모락 나는 새빨간 쌀떡과 어묵, 양배추 범벅이 눈에 선했다. 달고 매콤하면서도 살짝 텁텁한 맛이 떠오르자 배가 더 고팠다.

“떡볶이 먹고 싶다.”

과 건물을 지나는데 혼잣말이 툭 튀어나왔다. 그때 저만치서 동기 두 명이 얘기를 주고받으며 맞은편에서 오고 있었다. 예서는 저도 모르게 커다란 나무 뒤로 숨었다. 둘 중 한 명이 얼마 전까지 계속 곤란하게 추근댔던 남학생인 까닭이었다.

다시 떡볶이 생각이 났다. 이왕 먹을 거면 라면 사리랑 삶은 달걀도 넣어 팔팔 끓여 먹고 싶었다. 그럼 다른 쪽 골목의 즉석떡볶이 집에 가야 하는데 혼자 2인분짜리 냄비를 끌어안고 먹는 건 무리다. 하필 채린도 일이 있어서 수업 뒤 바로 귀가하고 없었다.

“어떡하지. 칼칼하고 매운 떡볶이… 너무 먹고 싶은데.”

“어, 나도.”

귀에 익은 저음이 뒤통수에 와닿았다. 예서가 펄쩍 뛰며 뒤를 돌아보았다. 따스한 숨결, 체취에 깜짝 놀랐지만 정작 당사자는 덤덤하니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주혁 선배?”

“도서관에 있다가 집에 가나 봐. 저녁은 아직이고?”

“네? 네….”

한주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엷게 웃어 보였다.

“잘됐다. 나도 마침 칼칼하고 매운 떡볶이가 먹고 싶었거든. 같이 가자.”

그가 두 손을 재킷 주머니에 찔러넣고 후문 쪽을 가리켜 보였다. 예서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즉석떡볶이라니 한주혁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선배도 떡볶이… 드세요?”

“당연히 먹지.”

그는 아주 이상한 말을 들었다는 듯 설핏 웃었다. 그리고 곧장 예서의 손에 있던 에코백을 성큼 제 손에 옮겨 들었다.

“무거워 보이는데 들어줄게.”

“아, 책이랑 자료가 꽤 무거워요!”

“그러니까 들어주는 거지. 가벼우면 굳이 왜 들어줘.”

한주혁이 여상하게 말하며 앞장서서 후문 쪽으로 향했다. 착각일까. 마치 그녀가 거절하고 가 버릴까 봐 미리 짐을 가져간 것만 같았다.

그 정도로 떡볶이가 먹고 싶었던 걸까. 하긴, 아무리 선배라도 혼자 떡볶이 불판 앞에 앉아 있는 건 좀….

한주혁이 보글보글 끓는 떡볶이 팬 앞에 앉아 홀로 주걱을 뒤적이는 모습을 떠올리자, 갑자기 웃음이 확 터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텔 파인 다이닝에나 어울릴 법한 외모와 카리스마여서, 분식집에 앉아 있는 그의 모습은 좀처럼 상상이 되질 않았다. 분명 그의 장대한 기골은 지하 분식집의 낮은 천장에 닿고야 말 것이다. 그 모습을 상상하니 다시 웃음이 났다.

예서가 웃음을 터뜨리자 앞서가던 한주혁이 홱 돌아보았다. 뜨악한 표정이었지만 불쾌해 보이진 않았다.

“왜?”

반달처럼 곱게 접은 눈이 오히려 유쾌해 보였다. 그날, 팬케이크 하우스와 한강 변 테라스에서의 미소가 겹쳐 보였다.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보다 저번에 제가 비싼 거 얻어먹었으니까 이번엔 제가 살게요.”

너무 싼 걸로 보답하나 싶었지만 그는 선뜻 답했다.

“그래. 잘 먹을게.”

그는 지하 분식집으로 내려가는 계단 앞에서 상체를 한껏 구부리며 웃었다. 이번에는 선뜻 호의를 받아들이는 모습에 왠지 안심이 되었다.

***

그는 이번에도 우아하고 품위 있게 식탐을 과시했다. 각종 토핑을 추가한 스페셜 즉석떡볶이 2인분에 이어, 짜장 떡볶이와 치즈를 올린 볶음밥까지 시켜서 홀랑 해치웠다.

“선배, 혹시 점심 안 드셨어요?”

“아니. 먹었어. 먹었는데… 오늘도 자꾸 식탐이 생기네.”

한주혁은 혼자 4인분 정도를 해치우고 나서야 수저를 내려놓았다. 허겁지겁 게걸스러운 티도 없이, 팬과 접시를 소리 없이 비운 채였다.

“저번에 너랑 저녁 먹었을 때도 그랬는데. …우연인가? 이상하게 너랑 있으면 식욕이 강해지는 것 같아.”

그가 신기하다는 듯 엷게 웃었다. 예서도 고개를 갸웃거렸다. 같이 밥 먹으면 상대방의 식욕을 돋우는 뭔가가 내게 있었나? 뭐, 그 반대의 경우보단 낫겠지만.

예서가 화장실에 들렀다 오는 길에 계산을 하러 카운터에 갔을 때였다. 한주혁이 어느새 그녀의 가방을 들고 뒤에 서 있었다.

“나가자. 내가 계산했어.”

“네? 이건 제가 산다고 분명히 말씀드렸는데….”

예서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아무리 선배라도 계속 일방적으로 빚지는 건 싫었다. 설령 상대가 그녀보다 훨씬 여유가 있어 보인다 해도.

“내가 너무 많이 먹었잖아.”

“그래도요. 계좌번호 불러주시면 바로 이체해 드릴….”

“그럼 디저트 사줄래?”

한주혁이 그녀의 가방을 제 어깨에 메면서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지하철역 앞에 카페 새로 오픈했던데. 좀 걸어야 되지만. ”

“아, 저는….”

예서는 잠시 망설였다. 오늘은 늦어도 8시까진 귀가해 그동안 밀린 소설을 쓸 계획이었다. 과외 아르바이트에 중간고사, 약국 일 도우는 데 바빠 한동안 통 쓰지 못했다.

“왜? 다른 일정 있어…?”

말꼬리를 길게 끄는 눈에 한순간 서글픔이 어렸다. 예서의 심장이 콩콩 뛰었다. 어딘지 아쉬워하는 기색에 미묘한 감정이 밀려왔다.

어떡하지.

그와 더 있고 싶었다. 글 쓰는 것도 중요하고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딱 하루만 미루면 안 될까. 글은 내일도 쓸 수 있지만 선배와는 이게 마지막 단둘만의 시간일지도 모르니까.

지난번은 펜 때문에, 오늘은 어쩌다 보니 집에 가는 길에 마주쳤다. 마침 선배도 떡볶이가 먹고 싶었던 차에, 같이 먹을 사람이 눈앞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다음번’이 또 있을지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다.

“네…. 그럼 카페로 가요.”

“그래.”

한주혁이 싱긋 웃었다. 한일자로 다물고 있던 입매가 다시 휘어지며 눈이 반달처럼 접혔다. 예서의 가슴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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