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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0)화 (11/124)

<10화>

“굉장히 편안했지만… 동시에 불편하기도 했죠.”

그리고 잠시 침묵을 지켰다. 왜 불편했는지, 한종한도 굳이 묻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 후배와 그렇게까지 오래 있을 생각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 뜻밖의 편안함에 오히려 불편함을 느꼈다는 뜻일까.

어쩌면 다른 신체적 동요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극히 건강한 20대 남자가 호감 가는 이성과 단둘이 있을 때면, 당연히 느낄 법한 반응 말이다. 어느 쪽이든 꽤 고무적인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 모순적인 감정이 동시에 든 건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시선을 사촌의 어깨 너머 수평선에 고정한 채 덧붙였다. 허물없이 보이던 것도 잠시, 어느새 진료실에서의 대화처럼 선을 긋고 거리를 벌린 태도였다. 한편으로는 아이러니했다. 가장 내밀한 속내를 드러내기 위해, 역으로 사적인 친근감을 거세하고 있다니.

어쩌면 라포(rapport, 신뢰를 바탕으로 한 교감관계)의 밸런스를 맞추려는 무의식의 일환일지도 몰랐다. 사촌이라는 관계를 떠나, 상담자와 내담자로서 보다 정밀한 분석이 이루어지고 정확한 의미가 도출되기를 기대하는 심리에서 비롯된 무자각적 감정일지도.

“다음번에 만날 때는 어떨지 알아보고 싶더군요. 그때도 편하면서 불편한 느낌일지. 아니면 다른 뭔가가 더 느껴질지.”

“그런 바람은 지극히 자연스럽다고 생각해. 어쩌면 상대방도 너처럼 느꼈을지 모르고.”

“아, 그럴까요.”

주혁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 부분은 미처 생각지 못한 듯했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한종한은 컵 안에서 녹아가는 얼음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환자의 이야기가 이어지길 기다렸지만 주혁은 거기서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여기까지인 듯했다. 한종한은 잠깐 망설이다 결국 속내를 토해냈다.

“그나저나 너 이렇게 웃는 거, 정말 오랜만에 보는 것 같다. 아니… 처음인가?”

이랬던 적이 있었나, 열심히 과거를 반추해봤지만 역시 없었던 듯했다.

“네가 이렇게… 다른 사람 얘기하면서 즐거워 보이는 건 처음이야.”

“…그랬나요?”

다음 순간 그는 왜인지 침묵을 지켰다. 화면이 페이드 아웃 되며 서서히 잦아드는 것처럼 온기를 띠었던 얼굴도 평소의 무감한 가면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르신들은 모두 건강하시지? 할아버지는 얼마 전 어머니랑 뵈러 갔지만.”

다음번 면담 때는 그 후배와 좀 더 돈독한 관계가 되어 있으려나. 불가능한 일은 아닐 듯했다. 편안하면서도 불편한 그 감정이 보다 확실한 것으로 구체화된다면 말이다.

한종한은 화제를 그의 가족들 근황으로 돌리며 상담자로서의 대화를 갈무리했다. 부디 그 후배의 존재가 주혁에게 독이 아닌 약이 되기만을 바랐다. 물론 그 여학생에게도 주혁이 좋은 사람이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아쉽게도,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

그로부터 보름 남짓 흘렀다. 부산했던 중간고사 기간도 지나가고, 5월의 봄축제가 다가오자 모두가 설레하는 게 느껴졌다. 학생회 간부인 채린 외 동기들도 한창 준비에 열을 올리며 들떠 있었다.

예서는 강의실에 들어서며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는 그녀도 학생회에 참여해 활발히 활동을 해 볼 예정이었다. 인맥을 쌓고 정보를 얻으려는 생각보다는, 다양한 사람을 만나는 재미도 느껴보고 여러모로 알찬 경험이 될 거란 기대 때문이었다.

하지만 축제 기간에 약국 일을 좀 더 도우라는 모친의 요구와 부족한 통장 잔고를 떠올리자 이번에도 그 바람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축제면 어떤 과목은 휴강도 하고 그러겠네. 잘됐다. 미스 조, 휴가 그때 몰아서 줄 테니까 네가 좀 나와 있으렴. 어차피 요즘은 다들 취업 준비로 스펙 쌓기다, 개인주의다 해서 축제 별 의미도 없고 규모도 확 줄었다며.

모친은 그녀가 항변하려는 기미를 보이자, 얼마 전 건너편에 대형약국이 생기는 바람에 가뜩이나 없던 손님도 점점 줄고 있다고 하소연을 늘어놓았다. 어쩔 도리가 없었다.

채린이 올 때까지 먼저 자리를 잡아두고 시무룩해 있는데 갑자기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드는 순간 한주혁의 눈길과 부딪쳤다. 그는 창가에 서서 그녀를 주시하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복학생 선배들이 그의 시선을 따라 예서 쪽을 돌아보기 직전, 한주혁은 재빨리 고개를 돌리며 뭔가 말했다. 그러자 선배들이 다들 반색하며 웅성거렸다. 한주혁이 일부러 그들의 주의를 돌릴 만한 화제를 꺼낸 것 같았다.

예서는 황급히 교재를 펼쳐 아무 페이지나 들여다보는 척했다. 귓불까지 홧홧해서 견딜 수 없었다.

지난 보름 동안 이런 순간이 꽤 여러 번 있었다. 그럴 때마다 주문에 걸린 듯, 그의 것과 뒤얽힌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늘 먼저 시선을 돌리는 건 그였다.

처음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없는 듯, 속을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예서를 조용히 바라보다 누군가 말을 시키거나 휴대폰이 울릴 때면 기다렸다는 듯 자리를 떠나거나 주의를 돌리곤 했다. 아주 가끔은 외부의 접근 없이 바로 시선을 떼어 내고 사라질 때도 있었다.

물어볼 틈도 없었다. 과 사무실이나 도서관, 복도에서 마주칠 때 한번 물어봐야지, 생각도 했지만 그럴 기회조차 전무했다.

2주 전 함께 저녁을 먹고 시간을 보냈던 게 꿈 같았다. 그 이후로는 그와 정면으로 맞닥뜨리는 일 자체가 없었다. 마치 일부러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럴 리가 없잖아. 선배가 나를 왜… 피하겠어.

갑자기 머릿속에서 뭔가 뚝 끊어졌다. 설마. 내가 그날 뭔가… 실수라도 했나? 정떨어질 만한 일을? 아니면 역시 펜 때문에?

예서가 열강 중인 교수에게 멍하니 시선만 고정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학생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여기저기 이동하기 시작했다.

“예서야, 뭐 해! 눈 뜨고 졸아?”

“어? 어, 아니.”

옆자리의 채린이 어깨를 살짝 꼬집을 때야 비로소 제정신이 돌아왔다. 예상대로 기말고사를 갈음한 마지막 조별 과제가 하달된 모양이었다. 교수가 잠시 자리를 비운 LCD 화면에는 ‘탈세계화 현상에 대비한 글로벌 마케팅 전략 연구와 근거 사례’란 주제가 떠 있었다.

“와, 어떡하냐. 이번 과제, 제목부터 역대급이다. 야, 우리가 갈까?”

채린의 부름에 새은과 경준, 승빈, 미주가 고개를 저었다.

“기다려, 우리가 건너갈게.”

맨 앞자리에 앉은 동기들이 가방을 부리나케 챙기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 앉아 있던 경제학과 여학생 둘이 채린에게 다가왔다.

“우리도 같이하면 안 될까? 첫 팀플은 낄 데가 없어서 그냥 우리끼리 했는데 이번 과제는 난이도가 꽤 있어 보이거든. 교수님이 5인 1조지만 4인이나 6인까진 괜찮다고 하셨으니까.”

“아, 이미 같이할 사람들이 있는데 어쩌지? 이미 여섯이라 인원 초과하면 안 될 것 같은데 인원이 부족한 다른 조에 가면….”

혹시 다른 조에 남는 자리가 없을지, 채린이 난감한 얼굴로 주위를 빠르게 돌아보았다. 난이도가 있는 만큼, 잘 모르는 타 과 학생들을 위해 성실함이 보장된 동기들을 포기할 순 없었다. 하지만 다른 조는 이미 인원이 맞게 채워진 상태였다.

“어쩔 수 없는 것 같아. 여덟 명 다 같이 가위바위보로 정하든가… 그렇게 하자.”

예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대로 우왕좌왕하고 있다가는 교수님이 돌아와 임의로 정해 주겠다며 중재하실 게 뻔했다.

“아니, 난 예서랑 할 거야.”

“나도, 나도! 무조건 예서랑 같이 할래.”

“난 예서랑 1학년 때부터 쭉 같이 해와서 너무 잘 맞아.”

친구들이 성적이 좋은 예서와 함께할 기회를 양보할 기색을 보이지 않자 타 과 여학생들의 표정도 점점 굳어갔다. 그때 누군가 다가와 그들 틈에 끼어들었다.

“잠깐만.”

한주혁이 평소처럼 덤덤한 얼굴로 좌중을 둘러보고 있었다.

“우리도 여섯 명인데 이쪽에 합류할게. 그럼 총 열네 명이니까 5인, 5인, 4인으로 나누면 공평하겠지? 조원 구성도 가위바위보로 공평하게.”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두 어안이 벙벙해서 말문이 막힌 표정이었다. 순조롭게 조를 짜서 앉아 있던 다른 사람들도 죄다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지난번처럼 한주혁과 당연하게 한 조가 됐던 복학생 선배들도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주혁아, 갑자기 왜. 그냥 우리끼리 6인조로 하고 이 친구들은 4대 4로 나누면….”

“아냐. 공평성을 따지면 이게 맞는 것 같아.”

그때 주혁의 절친인 박성준이 끼어들며, 한주혁을 둘러싼 복학생들 사이에 빠르게 논의가 오갔다.

“이번 과제 꽤 어려워서 인원수가 많을수록 유리한데 4인조는 아무래도 불공평하지.”

“아까 교수님이 만약 4인조가 생기면 감안해 주겠다고 하셨잖아.”

“그래. 그러니까. 가산점 받는 4인조가 둘이나 생기면 그것도 결국 형평성에 어긋나는 거지. 야, 교수님 스타일 몰라? 우리 같은 6인조가 있는 걸 뻔히 아시는데 가산점을 그렇게 후하게 주려고 하시겠냐고.”

“그래, 네 말이 맞다.”

그때 교수가 반쯤 열린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안으로 들어섰다. 재빨리 상황을 간파한 그는 안경을 추켜올리며 짓궂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4인조가 둘 생겼나? 그럼 가산점은 무효야. 5분 내 최대 5인조 다수로 만들어.”

그는 5분 더 쉴 명분이 생겨 좋다는 듯 교탁 뒤에 앉아 텀블러를 느긋하게 집어 들었다. 상황은 5분이 지나기도 전에 끝나 버렸다. 3학년 과대가 사다리 타기 앱을 돌린 결과, 열네 명은 깔끔하게 세 조로 분리되었다.

탄식과 절망이 동시에 새어 나왔다. 조를 다 짜놓고 앉아 있던 학생들이 그들 쪽을 흥미진진하게 관전하고 있었다.

“잠깐만. 과 톱 두 명이 다 한 조로 들어갔는데? 이거 다시 하면 안 돼?”

“헉! 뭐야, 주혁 선배랑 예서가 한 조네? 우와, 이건 좀…. 브레인 둘 다 가 버리면 어떡해요!”

“그냥 이대로 해. 제비뽑기 결과잖아.”

교수가 텀블러를 놓고 일어서는 기척이 보이자 한주혁이 차분하게 나섰다.

“예서는 몰라도 난 이제 에이스 아냐. 휴학을 자주 해서 머리가 잘 안 돌아가거든.”

“응…? 너 저번에도 국제경영학, 4학년들 제치고 혼자 A+ 받았잖아.”

“그거야 암기 위주였으니까. 외우는 건 어차피 각자 하는 거고, 이런 브레인스토밍 스타일의 과제는 약해.”

“뭐? 말이 되냐, 그게.”

그때 교수가 다시 연단에 서서 주의를 환기시켰다.

“자, 조별 편성 끝났으면 앉아. 과제 관련해서 설명 좀 더 해 주고, 끝나기 10분 전에는 질문도 받을 테니까 조별로 앉아도 되고.”

다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한주혁은 제자리로 돌아가 가방을 챙겨 들고 예서의 뒷자리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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