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어딘가 의미심장한 그 말에 예서의 가슴이 또 한 번 출렁였다. 아까부터 계속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팬케이크 하우스에서부터 지금까지 쭉, 술 한 방울 없던 건전한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취한 것처럼 자꾸만 얼굴이 발개지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잔뜩 달아오른 양 뺨을 숨기려 고개를 한강 변으로 돌렸다. 보랏빛과 오렌지빛이 은은하게 아른거리고 있었다. 강 너머 인공적인 조명과 달빛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대교 아래 반사된 수면이 무척 아름다웠다.
마치 꿈속에 있는 것처럼 로맨틱한 광경이었다. 세 시간 전 약속 장소로 향할 때만 해도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못 했는데.
한주혁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앞의 전망에만 시선을 두고 있었다. 하지만 거리감이 느껴지진 않았다. 그녀가 다시 입을 열면 곧바로 이쪽으로 주의를 돌릴 것처럼 편안한 분위기였다.
학교에서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입을 다물고 있으나, 열고 있으나 대하기 어렵고 차가운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뭐라 표현해야 할까. 편하지는 않지만 꼭 불편하지만도 않았다. 평소와는 다른 한주혁의 분위기 때문인지, 예외적인 지금의 상황 탓인지, 혹은 둘 다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래서일까. 생각지도 않았던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선배는 있으세요? 누구 만나는 사람요.”
하지만 그쪽에서 먼저 던졌던 질문이다. 되돌려 물어도 괜찮지 않을까.
“아니. 그런 사람 없어.”
그가 그녀를 돌아보곤 선선히 답했다.
“좋아하는 사람도.”
“아… 네.”
이상한 안도감이 예서의 속을 채웠다. 뭐지, 이건. 누구나 좋아하는 톱스타가 열애 스캔들을 부인했을 때 묘하게 안도 되는 심정 같았다. 두 사람은 티포트가 텅텅 빌 때까지 차를 다 마시고 나서도 한참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늘의 만남, 그리고 레스토랑에서 갑자기 왈칵 쏟아냈던 눈물과 안도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은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였다.
***
시간은 어느덧 10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선배와 헤어지고 집으로 올라가는 발걸음이 이상하게 가벼웠다. 구름 속을 걷고 있는 것처럼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 나와줘서 고마웠어. 오래 붙들어둬서 미안했고.
그는 택시를 타고 가던 길에 그녀를 아파트 입구 앞에서 내려주었다.
-아니에요. 좋은 곳에서 맛있는 거 사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펜은… 그렇게 돼서 정말 죄송해요.
-괜찮아. 그럼 잘 들어가.
그는 택시 문이 닫히기 전까지 다정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서둘러 씻고, 책상에 앉고 나서도 그 얼굴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자정이 가까워 잠자리에 드는데 채린이 톡으로 말을 걸어왔다. 아까 레스토랑에서 심심하다는 그녀의 톡에 지금 누구 만나는 중이니 다시 연락하겠다고 둘러댔던 게 그제야 생각이 났다.
[미안해, 채린아. 아까 들어왔는데 깜빡했어.]
[누구 만났는데?]
벌떡 일어나 앉아 자판을 두드리던 손이 우뚝 멎었다. 사실대로 말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저 펜을 돌려주러 만났다가 마침 저녁때라 같이 밥 먹었다, 어쩌다 보니 차까지 마셨다, 선배니까 후배 밥 사주는 거라고 하더라- 문제 될 게 없지 않을까?
[어? 왜 말을 못 해? 민예서 너 혹시 소개팅했어?]
[아냐. 웬 소개팅.]
[그럼 누굴 만났길래 말을 못 해?]
그런데도 스스럼없이 말이 나오질 않았다. 다른 핑계를 생각하기도 전에 채린이 대뜸 말을 이었다.
[소개팅 아니면 우리 몰래 누구 썸 타던 사람이라도 만났어?]
[그게 아니라 사실은 중학교 동창! 넌 모르는 애라서….]
예서는 몇 마디 더 둘러대곤 대화를 마무리했다. 불을 끄고 자리에 눕는데 다시금 그가 떠올랐다. 한 폭의 그림 같던 강변의 야경과 그 속에서 더 그림처럼 어른거리던 한주혁의 잔상도 뇌리를 계속 맴돌고 있었다.
-많이 먹어.
-그냥 너 많이 먹으라고. 제일 맛있는 부위니까. 아팠다며.
그 다정한 음색은 눈을 감아도 생생했다. 누군가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지, 어떻게 좋아하게 됐는지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벌써부터 막막했다. 좋아하는 것까지는 아니라도 호감은 확실히 생겨나 있었다.
많이 먹으라고 해줘서? 나 생각해서 닭 다리를 다 몰아줘서…?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먹을 것 좀 챙겨줬다고, 따뜻한 말 몇 마디 건네줬다고 호감 이상의 감정이 생기다니 말이 되는 소린가.
하지만 정말로 그랬다. 엄마에게도 평생 들어본 적 없던 한마디 말이었다.
정우가 없을 때는 치킨 같은 건 시켜 본 적도 없었다. 모친이 인근 시장에서 종종 통닭을 사 왔을 때도 닭 다리는 늘 그가 다 먹었던 기억이 또렷했다.
-어디 보자, 다리. 이건 다 정우 꺼. 원래 다리는 다 남자가 먹는 거야.
엄마가 늘 그렇게 말하며 통닭을 부위별로 나눠줬기에, 지금도 기억이 남아 있었다. 돌아보니 엄마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늘 그랬던 것 같았다. 아빠가 살아 계실 때도.
“아빠….”
잠꼬대 같은 소리가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대학 부교수였던 아버지는 어릴 적 쌍둥이를 똑같이 대했다. 둘이 싸웠을 때 엄마가 정우 편을 들면 아빠는 그녀에게 다가와 안아주고 달래주곤 했었다. 가끔 엄마와 크게 다툴 때도 있었다.
-딸은 귀하게 키우고 아들은 강하게 키워야 되는데 당신은 왜 반대야? 자꾸 정우만 감싸고 도니까 예서는 기가 죽고 정우 녀석은 계속 어리광만 피우잖아. 오냐오냐할 거면 똑같이 하든가.
아빠는 그녀를 무척 예뻐했었다. 어린이집에 가기 전에 손수 얼굴을 씻겨주고, 무릎에 앉혀 큼직한 방울끈으로 머리를 묶어주던 손길은 무척이나 다정했었다.
-우리 예서, 많이 먹어. 정우 와서 뺏어 먹기 전에 얼른.
자애롭고 따뜻한 얼굴 위로 누군가의 엷은 웃음이 어른거렸다. 전혀 닮지 않은 사람이고 아빠와 아무 연관이 없는데도, 너무도 그리워 꿈에서 다시 보고 싶었다.
주혁 선배… 다가가기 어렵고 차가운 줄만 알았는데.
실은 그렇게 다정한 사람이었다니. 그 따뜻한 면모의 발견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이유는 몰랐지만 어쨌든 그랬다.
***
새벽같이 일어난 주혁은 동이 트기도 전에 한강 변으로 차를 몰았다. 평소 주차장에서 조용히 자고 있는 애스턴 마틴 컨버터블은 오랜만에 막힘없는 도로를 질주했다.
그는 차에서 내려 간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트랙을 향했다. 인적은 거의 없었지만 꼭두새벽부터 나와서 달리던 몇몇 사람들이 그에게서 시선을 뗄 줄 몰랐다. 운전 중일 때는 차가, 걸을 때는 그의 존재 자체가 주변의 시선에서 자유로울 틈이 없었다.
주혁은 그 시선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듯, 트랙에 서서 손을 흔드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40대 초반의 남자도 간편한 러닝 차림이었다.
“형.”
“야, 네 덕분에 오랜만에 새벽 별도 봤다.”
“가끔은 그것도 좋지 않나요. 어쨌든 일찍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단어만 깍듯할 뿐 친구 대하듯 건조한 태도였다. 스무 살 가까이 연상인 사촌, 한종한은 너스레를 떨었다. 이럴 때만은 정신과 전문의 가운을 입고 있을 때보다 훨씬 앳되어 보였다.
“VIP 고객에게 내가 맞춰드려야지 어떡하겠냐. 네가 좀 바빠야 말이지.”
“진료일을 미뤄도 됐겠지만 고민이랄까- 요즘 좀 특이한 일이 생겨서 그 얘기를 해 보고 싶어서요.”
“특별한 일?”
남자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주혁은 그의 직업적 호기심을 잠시 연기시킬 요량으로 먼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먼저 갑니다.”
“어, 야! 같이 가!”
늘 정면만 보고 달리던 평소와 달리, 오늘은 강변 쪽으로도 간간이 시선이 갔다. 일출을 앞둔 보랏빛 수평선 위로 누군가의 말간 눈이 떠올랐다.
한 시간 가까이 달리고 나서야 7시가 넘어가며 강가에도 활기가 어렸다. 두 사람은 주차장 옆 카페 야외석에 마주 보고 앉았다.
새소리만 가득할 뿐 주위엔 아무도 없었다. 한종한은 아내와 두 아이 얘기를 한참 즐겁게 떠들다 진료실에서처럼 안경을 꺼내 썼다. 반쯤 들이킨 커피잔을 내려놓는 얼굴엔 어느새 장난기가 걷혀 있었다.
“이제 얘기해볼래? 아까 말했던 그 고민.”
“그럴까요, 선생님.”
주혁이 설핏 웃었다. 하지만 양쪽 팔꿈치를 간이 테이블에 기대고 손을 깍지 낀 동작은 진중해 보였다.
“요즘 자꾸 신경 쓰이는 사람이 생겼어요. 같은 과 후배인데….”
그가 말을 마칠 때까지 닥터 한은 묵묵히 경청했다. 다른 장소, 다른 사람이었다면 등짝 한번 후려치며 한껏 놀렸을 것이다.
야야, 더 말할 것도 없어! 너 그 후배 좋아하는 거야! 드디어 너도 연애를 하게 되려나 보다, 새끼. 혹시 CC 되는 거 아냐? 근데 요즘도 CC란 말을 쓰나?
하지만 지금은 신성한 상담 중이었다. 때와 장소가 이런 건 내담자가 원해서일 뿐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어제는 그럴 일이 있어서 저녁 내내 같이 있었죠. 다섯 시간 정도.”
“단둘이?”
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여상한 태도였지만 그 역시 이례적인 일임은 잘 알 터였다. 한종한은 어느새 주먹으로 턱을 받치고 있었다. 어떤 임상적인 문제에 집중할 때 나오는 무의식적인 버릇이다.
“그렇게 오래 있었을 정도면, 아주 좋은 시간이었던 듯한데.”
“미묘했어요.”
주혁의 입가가 살짝 비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