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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8)화 (9/124)

<8화>

뭔가 툭 터진 것 같았다. 혹은 무언가가 끊어진 듯도 했다. 정신이 들고 보니 위생장갑을 낀 손에 닭 다리를 든 채 울고 있었다.

꼴사납게 엉엉 소리를 낸 건 아니었지만,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감각은 또렷했다. 턱 끝에 매달려 있던 눈물방울이 티셔츠의 가슴팍에 뚝 떨어졌다.

“어… 왜 이러지.”

“왜 그래.”

한주혁이 냅킨을 한 움큼 쥐어 그녀에게 건넸다. 예서가 냅킨을 받아 들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한주혁도 적잖이 놀란 듯, 심상찮은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진심으로 염려하는 것처럼 보였다.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면 눈물을 닦아주기라도 할 것처럼.

“혹시… 다리 싫어해?”

예서가 냅킨으로 눈가를 닦자 그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싫어하는데 내가 억지로 다 몰아준 건가? 그랬다면 미안해.”

“아… 아니에요. 그런 거.”

“그럼? 혹시 맛이 없어서?”

예서가 눈을 크게 떴다. 냅킨으로 입을 가리고 있지 않았다면 풉,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하지만 한주혁은 웃음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녀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가 금세 울음을 그치고 마음을 추스르려는 기색을 보여 안도하는 감정도 엿보였다.

“아니에요. 맛있어요, 정말로.”

“…….”

“원래 치킨 좋아해요. 가슴살보다 다리를 더 좋아하기도 하고요….”

그는 두 손을 맞잡아 턱을 받친 채 예서의 말이 이어지길 기다렸다. 단 한 순간도 그녀의 얼굴에서 떠나지 않는 시선이 조금은 부담스러웠다. 하지만 그 반대의 감정이 더 컸다. 그래서 붉어진 눈과 코 막힌 목소리를 가까스로 수습하고 침착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냥… 좀 감정이 북받쳤던 것 같아요. 요즘 몸도 안 좋았고 힘든 일이 있었는데….”

하지만 쿵, 쿵, 뛰는 심장은 그대로였다.

“선배님이 너무, 그… 친절하게 대해 주시니까 저도 모르게….”

늘 쌍둥이 오빠인 정우만 걱정하고, 그녀가 아프다 해도 괜찮냐 한 번 묻지도 않던 모친이 떠올랐다. 가족도 해 주지 않는 걱정과 다정한 말이 너무 고마워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쳐 오른 것 같았다.

“그랬구나.”

한주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하지만 한쪽 입매에 신랄한 냉소 같은 것이 떠올라 있었다.

“큰일은 아니라서 다행이지만, 별로 좋은 현상은 아닌데.”

“네? 무슨….”

“아냐. 아무것도.”

대체 어떤 환경에서 살고 있는 거지? 이 정도의 작은 친절, 따뜻한 말 몇 마디에 너무 쉽게 감동하는 거 아냐? 너무 쉬워 보이잖아. 남자들 앞에서 좀 조심하는 게 좋겠어.

그는 속엣말을 삼키고 낮은 한숨으로 얼버무렸다.

“사실 나는 울지 말라는 말, 별로 좋게 보지만은 않아. 때론 울고 싶으면 울고, 눈물이 나오면 나오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속도 후련해지고.”

“…….”

“아무튼 싫어하는 게 아니었다니까… 많이 먹어. 아프지 말고.”

“…감사합니다.”

하지만 그의 권유대로 닭 다리를 두 개 이상 먹을 순 없었다. 팬케이크와 오믈렛으로 이미 정량을 한참 넘긴 뒤라 더는 속에서 받지를 않았다. 나머지를 깔끔하게 먹어 치운 한주혁은 그녀가 화장실에 간 사이 계산까지 마친 상태였다.

“아, 제가 계산하려고 했는데….”

“내가 산다고 그랬잖아. 펜은 신경 쓰지 말라고. 그보다….”

그가 손목시계를 흘깃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디저트 먹으러 갈까?”

“네? 디, 디저트요?”

방금 먹은 게 디저트 겸 저녁 아니었나? 팬케이크에 오믈렛, 그리고 치킨. 순서가 좀 뒤바뀌긴 했지만.

“왜? 저녁에 바쁜 일 있어? 아직 7시도 안 됐는데.”

“저는 괜찮지만 선배는 다른 일정 없으세요? 토요일 밤인데 누구 만날 약속 같은 거….”

“지금 만나고 있잖아.”

한주혁이 설핏 웃었다. 어쩐지 자꾸 핀트가 안 맞는 대화가 즐거운 듯 보였다.

“내가 몸이 두 개도 아니고, 너 만나면서 다른 사람하고 또 볼 수가 있나?”

왜일까. 그 순간 예서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했다. 북소리 같기도 하고 징 같기도 한 파장이 전신에 퍼져가고 있었다.

“배부르면 커피만 마셔도 되고. 걷기는 좀 멀어서 택시 탈 건데, 괜찮지?”

그녀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한주혁이 레스토랑 문을 열어주곤 곧장 대로변으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정신이 들었을 땐 그와 나란히 택시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저, 선배. 지금 어디로….”

“여기서 꽤 가까워. 한강 뷰 야경 좋아해?”

“한강 뷰요…?”

“난 뭐가 좋은지 잘 모르겠는데 여자들은 꽤 좋아하더라고.”

왜일까. 그가 언급한 여자들이란 말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누굴까. 여자들이란…. 그러고 보니 그는 정말 만나는 사람이 없는 걸까?

“큰어머니와 고모님들 단골 가게야.”

“아, 그, 그렇군요.”

까닭 모를 안도감이 가슴에 퍼졌다. 택시는 눈 깜짝할 새 한남오거리를 건너 가파른 언덕 위를 올라, 아담한 단독주택처럼 생긴 건물 앞에 멈춰 섰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주인이나 매니저로 보이는 여성이 그에게 반갑게 아는 척을 해왔다. 집안 어르신들 단골이라더니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야외석으로 안내받아 탁 트인 테라스로 들어서자마자 입이 딱 벌어졌다. 동호대교와 한남대교 사이, 달빛을 받아 신비롭게 반짝거리는 한강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와….”

저절로 경탄의 소리가 나왔다. 한주혁은 야경을 마주 본 소파 끝에 먼저 앉아 메뉴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일부러 정면을 비워둔 걸로 보아, 그녀에게 명당자리를 양보한 것 같았다. 예서는 잠깐 머뭇거리다 그 자리에 앉았다. 어느 쪽에 앉아도 뷰가 근사할 것 같았지만 그의 호의를 존중하기 위해서였다.

“난 홍차. 디저트는 살구 타르트, 밀페이바닐라. 너는?”

“선배. 여기는 제가 계산할게요. 아까 밥은 제가 얻어먹었으니까 디저트는 당연히 제가….”

메뉴판을 넘겨받아 들여다보던 예서가 말을 뚝 멈췄다. 장소와 뷰 때문에 비쌀 거란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한주혁이 말한 메뉴만 이미 5만 원이 넘어가 있었다. 과외와 아르바이트로 직접 용돈을 벌어 빠듯하게 생활하는 그녀로서는 꽤 거금이었다.

“저, 저는… 하하.”

물만 마시겠다 하면 민폐겠지. 어쩔 수 없이 가장 저렴한 레몬 라임 소다를 주문하고 서빙 직원에게 메뉴판을 넘겨줄 때였다.

“계산은 신경 쓰지 마. 이미 선불이 돼 있어.”

“네? 언제….”

그제야 그가 택시에서 바삐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던 기억이 났다. 계좌로 미리 결제하고 있었던 건가.

“그럼 최소한 제 몫이라도 톡으로 보내드릴게요. 이렇게 얻어먹기만 하는 건….”

“넌 후배잖아. 난 선배고.”

한주혁이 야경을 향했던 시선을 그녀에게 돌렸다.

“후배가 선배에게 좀 얻어먹으면 어때.”

조금은 정색하는 것 같은 눈매에 예서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때 테라스 난간의 조명등 색깔이 바뀌며 사위가 좀 더 어두워졌다. 달빛에 반사된 한주혁의 눈 속에 한순간 달이 비쳤다가 흩어진 것 같았다.

“네, 선배…. 그럼 잘 먹겠습니다.”

예서는 결국 폰을 테이블 한쪽에 내려놓았다. 야경 탓일까. 어쩐지 묘해진 지금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한순간 데이트 같다는 생각에 내심 스스로를 꾸짖기도 했다.

데이트라니. 혹시 사귀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무슨 헛생각이야.

마침내 디저트와 차, 음료가 고풍스러운 접시에 담겨져 나왔을 때 예서의 눈은 한 번 더 커졌다. 기하학적인 접시 무늬가 무척 정교하고 세련되어 명품 컬렉션 같았다. 예서는 혹시나 깰까 싶어 조심스럽게 잔을 받쳐 들며 그에게 불쑥 물었다.

“선배. 저 궁금한 거 있는데….”

“궁금한 거 있는데.”

동시에 같은 말이 튀어나왔다. 예서가 소다를 목 너머로 넘기고 재빨리 말했다.

“선배가 먼저 말하세요.”

“좀 사적인 건데 괜찮을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질문을 전혀 물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사귀는 사람 있어? 아니면 좋아하는 사람.”

꿀꺽, 예서의 목울대가 다시 움직였다. 그녀가 그에게 물으려던 질문과 똑같았다.

“아뇨. 사귀는 사람은 없어요. 좋아하는 사람도….”

순간 대답이 막히는 바람에, 신기하다기보다 당황스러웠다. 분명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 게 확실한데 왜 말끝이 흐려지는 걸까.

“그래?”

한주혁은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는 찻잔을 입에 머금고 반씩 나눈 디저트를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웠다. 이렇게 대식가인 줄은 미처 몰랐기에 의외였다. 가끔 학생 식당에서 봤을 때도 특별히 많이 먹거나 식사 외 뭔가를 먹고 있는 모습은 본 적이 없었기에 더 그랬다.

“더 시킬까?”

“전 괜찮아요. 배가 아직 불러서….”

“그래? 난 이상하게 자꾸 들어가네.”

“선배, 원래 밖에서는 이렇게 많이… 드세요?”

“아니.”

그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나도 오늘이 처음이야, 이렇게 식탐 부린 거.”

“아, 정말요?”

“응. 음식은 연료일 뿐이라 생각해서 먹는 거 별로 관심 없거든. 커피는 좋아하지만.”

그럼 오늘따라 배가 많이 고팠던 거구나. 쉴 틈 없이 들어가서 깜짝 놀랐네.

“이상하게 너랑 있으니까 계속 배가 고프네. 이유는 모르겠지만.”

한주혁이 그녀를 보고 엷게 웃었다. 음험하진 않았지만 묘한 미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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