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가게 입구 쪽을 보고 걷던 한주혁이 고개를 돌렸다. 그가 보일 듯 말 듯 엷게 미소를 지었다. 막 그에게 다가가려던 예서의 심장이 다시금 콩콩 뛰었다. 단둘만의 식사라니 새삼 실감이 나지 않았다.
“왔어?”
“안녕하세요, 선배.”
하지만 설레던 것도 잠시, 가방 속의 펜을 생각하니 가슴이 다시금 무거워졌다. 예서는 안으로 들어가 예약된 자리에 앉기까지 불안감에 시달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위치가 위치라 그런지 외국인들도 꽤 많았다.
자리는 맨 안쪽 아늑한 구석이었고, 커다란 화분이 일종의 파티션 역할을 해 주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주혁이 맞은편에 앉는 동안 이쪽을 흘끔흘끔 조심스럽게 살피는 눈길이 끊이질 않았다. 입구로 들어설 때부터 집중된 시선이었다.
감탄과 찬탄이 어우러진 눈빛들은 그가 예서의 눈길을 따라 식당 안을 쓱 훑어보고 나서야 하나씩 거둬졌다. 동행이 있는데도 빤히 바라볼 정도로 뻔뻔스러운 손님은 없었다.
“가리는 거 없으면 내가 알아서 주문해도 돼?”
그가 메뉴판을 보지도 않고 예서에게 물었다. 그녀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가방을 열어 펜을 꺼내는 손끝이 긴장으로 덜덜 떨렸다. 한주혁이 버터밀크와 블루베리 팬케이크, 이탈리안 오믈렛과 프렌치토스트, 음료를 주문하고 서버에게 메뉴판을 돌려줬을 때였다.
“Hey, Hyeok! What’s up?”
한 무리의 외국인들이 한주혁에게 다가와 살갑게 아는 척을 해왔다. 적절히 절제된 몸짓과 깔끔한 복장, 슬랭을 쓰지 않는 어투는 어딘가 한주혁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한주혁이 조금은 성가신 듯 무심하게 영어로 대꾸하자 예서는 저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어렸을 때 잠깐 미국에 살았다던데 발음이 진짜 좋네. 그나저나 외국인 친구들도 있나…?
“동네 친구들.”
그가 예서의 속을 읽은 것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예서가 아, 고개를 끄덕이자 친구 중 하나가 불쑥 물었다. 한주혁이 그녀를 소개해 주지 않자 알아서 물어보겠다는 듯 거침이 없었다.
“Hi. How are you doing? You are… his girlfriend?”
“No. She's not. Get off, now.”
꺼지라는 말에, 친구들은 그녀에게도 손을 흔들어 보이며 사라졌다. 예서는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당연히 그의 여자친구가 아니니까 아니라고 한 것뿐인데 왜 이렇게 기분이 이상할까. 너무 똑 부러지게 아니라고 부정한 것도 같았다. 그때 냅킨 위에 올려둔 펜에 다시 신경이 쏠리며 심장이 두근대기 시작했다.
“저, 선배… 어떡하죠. 제가 실수로 펜을 떨어뜨려서 스크래치가 났어요.”
굳이 과외 학생을 언급하진 않았다. 어쨌든 자신이 관리를 잘 못 한 덕에 벌어진 일이라 여긴 탓이다. 예서가 펜의 화이트 골드 아랫부분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기분 탓일까. 가늘게 긁힌 자국이 좀 더 선명해진 것 같았다.
“정말 죄송해요. 오늘 밥은 제가 사고…. 이것도 제가…. 만약 보수가 가능하다면 좋겠지만…. 이 제품 한국 지사에 문의를 넣어 보려 했는데 휴일이라 월요일까지 기다렸다 전화를….”
침이 꼴깍꼴깍 넘어가는 바람에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예서는 고개를 떨구고 중얼거리듯 말을 이어갔다. 차마 시선을 마주 볼 수 없었다.
“괜찮아. 그냥 줘.”
“네? 하지만 아끼는 거라고…. 할아버지 친구분께서 특별 주문해서 선물해 주신 거니까 내일 그 분 생신 때 가져가야 한다고 하셨….”
“주머니에 꽂기만 할 거니까 그 정도 스크래치는 보이지도 않겠지. 오래되기도 했고.”
한주혁은 펜을 넘기라는 듯 왼손을 쓱 내밀었다. 정말로 상관이 없는 건지 무덤덤한 얼굴, 차분한 눈빛이다. 예서는 우물쭈물하다 재차 물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굉장히 비싼 제품이던데….”
“내가 산 게 아닌데 뭐. 말했잖아, 선물 받은 거라고.”
그는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10초 안에 안 주면 그땐 물어내라고 할까 싶은데.”
그는 손을 내민 채 성마르게 말했다. 한 점의 장난기도 없는 얼굴에, 예서가 반사적으로 펜을 그에게 내밀었다. 커다란 손이 앞으로 더 뻗어왔다.
하지만 그는 펜을 집어 드는 대신 그녀의 손목을 잡아 손바닥이 위로 오게 돌렸다. 예서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난폭하거나 거칠지는 않았다. 오히려 의사가 환자의 상처를 살피듯 부드럽고 안온한 손길이었다.
“선….”
“여기. 어쩌다 이런 거야?”
한주혁이 손목 안쪽의 흉터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제 만년필에 생긴 것보다 그녀의 살갗에 난 스크래치에 더 신경을 쓰는 눈빛이었다.
“아, 그건….”
예서가 당황해 손목을 당겨오려고 했지만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다지 힘을 준 것 같지도 않은데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어, 어릴 때 난 거예요.”
“어디서?”
한주혁이 다시 물었다. 취조하는 눈빛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궁금한 것처럼 보였다.
“유원지 계곡에서요.”
“어쩌다가?”
“근처에 폭포가 있었는데 갑자기 폭우가 내리면서 댐이 무너지는 사고가 있었어요. 그래서 애들끼리 잠시 조난을 당했는데 어떤 아이가 떨어질 뻔해서…. 그 애를 잡아주다 어디 베였던가… 그랬던 것 같아요.”
예서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꼬박꼬박 대답했다. 당혹감에 살짝 흔들리는 눈망울이 강아지처럼 보였다. 주혁은 손을 놓아줄 생각도 않고 쓴웃음을 지었다.
바보.
“선배…? 저 이 손 좀….”
기억도 못 하는 헛똑똑이.
민예서의 동공이 조금씩 더 출렁였다. 그녀가 한 번 더 힘을 주자 그제야 손목이 스르르 풀렸다. 한주혁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펜을 집어 들어 냅킨 옆에 놓았다.
때마침 서버가 다가와 주문한 음식을 하나씩 내려놓았다. 한주혁이 먼저 커트러리를 집어 들며 엷게 웃었다.
“많이 먹어.”
“네? 네….”
많이 먹어- 인사치레일 텐데도 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엄마에게도 한 번을 들어 보지 못했던 말이기 때문일까.
“부족하면 말해. 내가 살 거니까.”
“아뇨. 지금도 충분히 많아요. 그리고 이건 역시 제가 사는 게….”
“펜 때문이라면 신경 쓰지 마. 처음부터 내가 낼 생각이었고.”
그 천연덕스러운 태도에 예서가 눈을 깜빡였다.
방금은… 대체 뭐였지? 어쩌다 흉터가 생겼는지 물어볼 수는 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의한 불쾌감도 별반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손목을 계속 잡고 있었던 몸짓이나, 손을 놓아주기 직전 입가에 어렸던 조소는 도통 이해하기 어려웠다. 자초지종을 물을 때의 심각한 눈빛, 그리고 비웃음에 가까운 미소 사이의 괴리가 너무도 묘했다.
“저, 선배.”
예서가 제 몫의 팬케이크 위에 시럽을 뿌려주는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가 왜? 눈으로 묻듯 시럽 병을 거둬가며 그녀를 마주 보았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주혁은 더 묻지 않았다. 예서는 얼떨떨한 얼굴로 블루베리 컴포트와 바나나 토핑이 올려진 팬케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그리고 저도 모르게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한주혁을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의 땡그래진 눈동자를 보고는 피식 웃었다.
“맛있어?”
“네. 진짜 맛있어요…!”
과장이 아니었다. 입에서 살살 녹는다는 표현이 이런 걸 말하는구나 싶었다. 부드럽고 그윽한 풍미가 지금까지 먹었던 팬케이크와는 차원이 달랐다. 예서는 방금 전까지 석연치 않았던 마음도 잊고 팬케이크를 먹는 데만 집중했다.
그러다, 너무 먹는 데만 열중한 게 민망했는지 고개 들어 맞은편에 시선을 주었다. 한주혁은 포슬포슬해 보이는 오믈렛도 그녀의 개인 접시에 덜어주었다.
“여기 오믈렛도 유명해.”
이번에도 그는 옅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까의 그 쓴웃음이 거짓말 같았다. 양쪽 귓불이 화끈거렸다. 데이트도 아닌데 자꾸 데이트처럼 가슴이 콩닥거리며 뛰었다.
예서는 입술을 소리 없이 오물거리면서도, 자꾸 느슨해지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
갑자기 왈칵 눈물이 터진 건 닭 다리를 한 입 베어 물었을 때였다.
한주혁이 옆자리에서 먹는 치킨을 보고 갑자기 주문을 해 버렸다. 배가 불렀지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닭을 보자 군침이 돌았다.
긴장도 풀릴 만큼 풀려 순조롭기만 하던 식사 자리가 뜻밖의 상황으로 흘러간 건 그가 그녀의 앞접시에 닭 다리만 모아서 놓았을 때였다.
“선배. 혹시… 다리는 싫어하세요?”
“아니?”
한주혁은 가슴살을 집어 들며 산뜻하게 부정했다. 두껍게 튀겨진 껍데기가 그의 입 속에서 파사삭 부서졌다.
“닭 다리 싫어하는 사람도 있나? 닭 자체를 싫어한다면 모를까.”
“그럼 왜 저한테만….”
“그냥 너 많이 먹으라고. 제일 맛있는 부위니까.”
“네? 다리가 제일 맛있는 부위였어요?”
“아무래도 그렇지. 가슴살은 뻑뻑하지만 단백질 함량이 제일 높으니까 다이어트식으로 인기가 많은 거고.”
“아, 그렇구나. 몰랐어요.”
지금까지 가족 외, 다른 사람들과는 치킨을 통째로 시켜서 먹었던 적이 없어서 처음 듣는 말이었다. 동시에, 지지난달 정우가 한국에 있을 때 모친이 치킨을 사 왔던 때가 떠올랐다. 엄마가 다리와 윙은 다 정우에게 줬던 것 같은데. 잘못 봤나….
“제일 좋은 건 후배에게 양보해야지. 그러니까 많이 먹어.”
별 뜻 없이 한 말일 터였다. 이어지는 따스한 말 역시.
“아팠다며. 아직도 얼굴이 해쓱해 보이는 것 같아서 원기 보충하라고.”
마지막 말이 아니었다면 눈물까진 흘리지 않았으리라. 그저 좀 감동 받고, 알고 보니 따뜻하고 다정한 면도 있는 사람이었구나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을 듣는 순간 갑자기 가슴 깊은 곳이 북받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