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어… 선배 어디 갔지? 혹시 주혁 선배 못 봤어?”
“응? 방금 현주가 인사할 때까지는 여기 서 있었는데. 그보다 어제 마케팅 수업에서 팀 과제 조 짜는데, 교수님이 이번에 새로운 베네핏을 만든 거 있지. 이번 학기부터 팀 리더한테는 가산점을 더 높여 준다는 거야! 근데 그 점수가 너무 파격적이야. 그래서 다들 서로 리더하겠다고 난리도 아니었어. 아니, 깜냥도 안 되는 이동환까지 나서는데 진짜….”
“일단 들어가서 얘기하자. 이동환 걔는 DHL로 약자 써서 말하라니까?”
예서는 동기들에게 에워싸여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서도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한주혁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 손에 든 펜을 가방 뒷주머니에 넣고는 다시 한숨을 흘렸다.
9천 9백 원은 그렇다 쳐도 또 돌려줄 게 생겨 버렸네….
예서는 하루 종일 가방을 몇 번이나 여닫았지만, 평소 쓰지 않는 뒷주머니는 한 번도 열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펜에 대해서는 자연스레 까맣게 잊고 말았다. 펜에 대해 떠오른 것은 그날 일과를 마치고 과외 학생 집으로 가는 길, 펜의 주인에게서 문자가 날아왔을 때였다.
[민예서. 안녕?]
예서는 전철 안에서 무심코 폰을 들여다봤다가 눈을 크게 떴다. 누구지? 모르는 번호인데.
[펜 언제 돌려줄 건가 해서]
그 순간 한주혁의 얼굴이 떠올랐다. 가방 뒷주머니에 넣어둔 펜 역시도.
[돈은 안 줘도 되지만 그건 아끼는 거라. 할아버지 친구분이 대학 입학 선물로 주신 거야.]
히익, 예서가 당황해서 곧바로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문자를 연이어 보내고 있으니 통화도 가능할 것 같았다. 상대방은 한참 후에나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아, 주혁 선배. 죄송해요. 지금 막 생각났어요.”
사실 그전에 생각이 났다고 해도, 그날은 더 마주치지도 않았고 연락처도 모르니 돌려주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예서가 내일 학교에서 주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그가 말을 이었다.
-내 이름 새겨서 특별히 커스터마이징 해 주신 거라서 말이야.
단조롭고 나른한 톤의 목소리였다. 화가 난 건지, 언짢은 건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음색에 예서가 당황하며 가방에서 꺼내든 펜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펜의 몸체는 다이아몬드처럼 번쩍거리는 장식이 촘촘하게 붙어 있었고, 하부에 Hyeok, Han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죄송해요, 선배. 내일 드릴….”
-내일은 수업 하난데 교수님 일정상 휴강됐어. 그거 때문에 일부러 학교까지 가는 건 어려울 것 같은데.
“아, 내일이 금요일이네요. 그럼 아무래도 월요일에….”
-어쩌지. 하필 일요일이 그 펜 선물해 주신 할아버지 친구분의 생신이시거든. 잘 쓰고 있다고 보여드려야 좋아하실 것 같아서 일요일에 그 펜이 꼭 필요한데.
“아….”
어떡하지. 예서가 난처함에 말을 잇지 못하자 한주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토요일에 받아야 할 것 같은데.
다행히 토요일에는 과외가 없었지만 오후 4시까지는 약국에 붙어 있어야 했다. 파트 타임 직원이 주말에도 나오긴 하지만, 매주 토요일에는 그녀까지 합세해 그 주의 약품 사입과 재고 정리에 손을 보태야 한다.
“그럼… 제가 4시 이후에나 시간이 되니까 그때 선배 집 근처까지 가져다드릴게요. 혹시 어디쯤이세요?”
부디 너무 멀지 않기만을 바랐다. 사실 펜을 안 받고 가 버린 건 선배 쪽인데. 한편으로는 뭔가 정당하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전에 카페에서도 느꼈지만 한주혁에게는 상대방의 의혹과 반발심을 허물어뜨리는 타고난 분위기가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냉정함과 오만함은 수면 위로 드러난 일부라고 해야 할까. 막상 일대일로 교류하게 되면 상대방이 미처 깨닫기도 전에 제가 원하는 쪽으로 상황을 몰아가는 기운이 느껴졌다.
-너는?
“네? 저는 보광동이요.”
-그래? 가깝네.
“정말요? 다행이다. 그럼 어디로….”
-그럼 공평하게 중간에서 만날까. 이태원 어때.
“전 좋아요.”
예서는 반색했다. 이태원이라면 걸어서 가도 될 만큼 가까운 거리다. 비탈길을 한참 올라가야 해서 다리가 아프긴 하지만.
“그럼 4시 반쯤 이태원역 몇 번 출구에서 볼까요?”
-팬케익 좋아해?
“네? 팬… 팬케익이요?”
뜬금없는 물음이 당황스러웠다. 설마하니 저녁이라도 먹자는 건 아니겠지. 하지만 그의 이어지는 말은 예서의 의혹을 비켜나지 않았다.
-거기 팬케익 잘하는 집 있거든. 싫어하지 않으면 거기로 가자. 시간은 5시쯤? 자세한 건 문자로 보낼게.
“선배, 자, 잠깐만요. 저는 그냥 펜만 드리고 가는 줄 알았….”
-늦게 줬으니 밥이라도 사야 하지 않나.
“제, 제가요?”
조금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저도 모르게 속엣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선배. 그때 선배가 펜을 빌려주신 것 자체는 정말 감사해요. 하지만 펜을 돌려드리려고 보니 이미 가고 없으시더라고요. 그럼 완전히 제 잘못만은 아닌….”
-왜. 나 밥 사 주기 싫어…?
“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커피 사 드리면 안 될까요, 다시 입을 떼려는 순간 한주혁이 말했다. 피식, 희미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그럼 내가 사줄게.
“…….”
-그럼 됐지? 토요일 5시. 장소는 문자로 다시 보낼게.
“네… 네.”
얼떨결에 대답이 흘러나왔다. 통화는 곧바로 끊겼다. 예서는 내릴 역을 지나쳐 버렸음을 뒤늦게 깨달았다. 다행히 시간은 여유가 있어서 과외엔 늦지 않겠지만 스스로가 바보 같았다.
한심해, 민예서. 뭐에 홀린 것처럼 멍청하게….
과외 학생의 집을 향하는 동안에도 한주혁과의 대화가 뇌리에서 사라지질 않았다. 사실 밥을 사는 건 상관없었다. 생활비와 용돈은 과외와 공공기관 사무 보조, 행사 커피 판매 등 공부 시간 외의 간헐적인 아르바이트로 충당했기에 늘 빠듯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밥값 한 번쯤 못 낼 정도는 아니다.
하지만 갑자기 억하심정에 불퉁한 말이 튀어나왔고 얼떨결에 그에게 밥을 얻어먹게 되었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토요일에 주혁 선배랑 단둘이 저녁이라니…?
얼떨떨했지만 싫지는 않았다. 아니, 싫기는커녕 가슴이 두근거렸다. 데이트도 아니고, 고작 밥 한번 같이 먹을 뿐인데도 이상하게 설렜다.
***
그로부터 하루 뒤, 그 설렘은 단번에 공포와 난처함으로 바뀌었다.
금요일 저녁, 다른 과외 학생이 그녀의 필통을 구경한답시고 케이스를 열다가 놓쳐서 바닥에 떨어뜨리고 만 것이다. 그 많은 펜 중에 하필 한주혁의 만년필이, 막 간식을 들고 방문 너머로 들어오던 학생 어머니의 슬리퍼에 밟혀 버렸다.
펜을 집어 들어 다시 케이스에 넣을 때만 해도 별일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다음날, 약국에 나가기 전 펜을 따로 꺼내두는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헉. 이게 뭐야?”
다이아몬드 같은 장식이 촘촘하게 박힌 몸체 뒤편에 긁힌 자국이 나 있었다. 하필 그의 이름인 Hyeok, Han 쪽에 나 버렸다. 글자에 흠집이 나 있진 않았지만 바로 아래쪽이다 보니 스크래치가 눈에 안 띌 수가 없었다.
“아. 어떡해…! 하필 왜 필통에 옮겨둬서….”
미치겠네, 민예서. 이 바보야. 커스텀된 것이라 배상 자체가 안 될 텐데 어떡해!
예서는 머리를 쥐어뜯다 안경 케이스 안에 펜을 넣고 약국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일찌감치 약국 문을 열고 옷을 갈아입은 파트타임 직원에게 다가갔다.
“어, 예서야. 왜 이렇게 빨리 나왔어?”
“저, 수민 언니. 이거 많이 비싼 거예요? 실수로 떨어뜨려서 스크래치가 살짝 나 버렸는데….”
조수민은 예서가 내미는 펜을 받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으응? 글쎄. 난 에루샤라던가 패션 쪽이 전문이라 필기구는 전혀 모르는데? 뭐 몽블랑 그런 건가? 잠깐만. 검색 한번 해 볼게. Tibaldi…?”
수민은 폰을 잠깐 들여다보다가 오오! 감탄사를 내뱉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우와. 이거 만년필계의 에르메스라는데? 잠깐만, 이거 봐봐. 여기 사진이랑 같은 모델 아니야? 화이트 골드와 루테늄, 로듐의 블랙 투톤은 한화 약 5천만 원짜리 한정판 제품으로 여기에 특별 커스텀 주문까지 들어가면 5천 5백만 원까지 가격이 뛰게 된다… 와!”
사진 속 펜은 확실히 한주혁의 것과 똑같았다. 수민은 이 작은 펜 하나가 에르메스 가방값이라니 믿을 수가 없다며 연신 혀를 내둘렀다. 그때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바람에 수민은 카운터로 재빨리 향했고, 예서는 재고실에 들어섰다.
약품 상자를 하나씩 꺼내면서도 납덩이가 들어찬 것처럼 마음이 무거웠다. 어쩌지. 왠지 모조품은 아닐 것 같은데. 설마 그 정도로 비싼 거면….
한숨이 절로 나왔다. 밥을 얻어먹는 건 고사하고, 엄청난 분노를 사게 될지 모른다는 염려에 벌써부터 눈앞이 캄캄했다.
***
이걸 어떻게 보상하고 사과해야 되나, 전전긍긍 조바심에 팬케이크 브런치 가게 앞에 도착했을 때였다. 마침 한주혁도 가게 건물 뒤쪽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꽤 경사진 비탈길인데도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유유히 걸어오는 품새는 평지 위에서보다 더 가뿐해 보였다. 아직 10분 전인데 벌써 오다니 의외였다.
시간 약속을 엄수하는 편이라 넉넉히 도착했건만 한주혁도 그럴 줄이야. 어쩌다 보니 일찍 온 것일지도 모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