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절친 현주에게 오전 수업 못 가게 됐다고 문자를 보내고 다시 드러누웠다. 한참을 잤다가 깼을 때는 정오가 막 지나 있었다. 몸이 으슬으슬 춥다 못해 이가 덜덜 떨렸다. 아무리 옷을 껴입고 이불을 뒤집어써도 오한이 가시지를 않았다. 병원까지 갈 힘도 없었다.
예서는 찬장을 열고 즉석밥과 김, 참치 캔을 꺼내 느릿느릿, 다 죽어가는 손으로 밥을 데웠다. 식욕은 없었지만 약을 먹으려면 빈속을 채워야 했다. 잘 가누지도 못하는 손으로 밥을 밀어 넣는데 갑자기 서러운 생각에 눈물이 찔끔 났다.
딸보다 약국을 더 걱정하는 듯했던 이 약사의 태도가 못내 서운했다. 정우가 아프다고 해도 그랬을까. 쌍둥이 오빠는 기침만 몇 번 해도 큰 병에 걸린 것처럼, 병원에 직접 데려가고 손수 죽을 끓여 살뜰하게 보살피는 모친이었다.
즉석밥을 간신히 절반쯤 비우고 약을 먹었다. 아무래도 오후 수업도 못 갈 것 같았다. 자판 두드릴 힘을 쥐어짜 ‘오후도 못 갈 듯. 나중에 필기 부탁해’라고 보내자 현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예서야, 많이 아파? 괜찮아?
걱정하는 듯한 목소리에 그래도 위안이 되었다.
“그냥 몸살이야. 내일은 나아지겠지….”
-오늘 마케팅 관리 조별 과제 나왔는데 우리 조에 네 이름도 넣었어. 다들 한주혁 선배한테 달라붙어서 어찌나 난리를 치던지. 으휴… 그저 쉽게 묻어가려고. 아무튼 잘 쉬고 내일은 꼭 와야 돼. 알았지?
“알았어….”
-아, 참. 너 밥은 제대로 먹었어? 내가 뭐라도 사 가지고 갈까?
“아냐, 밥 먹었어. 약도 먹고…. 이제 자려고. 고마워.”
현주는 잔소리를 좀 더 늘어놓다 통화를 끊었다. 베개에 힘없이 머리를 올려놓자마자 스르르 눈이 감겼다. 의식이 한순간 깊고 바닥없는 블랙홀 속으로 끌려 들어가는 것 같았다.
현주와의 통화에서 들었기 때문일까. 갑자기 한주혁 선배의 얼굴이, 천천히 꺼져가는 의식 속에서 선연히 떠올랐다. 돈을 돌려준 뒤로는 그와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개강과 동시에 카페 아르바이트는 그만두었고, 일부러 찾아가서 아는 척할 만큼 친하지도 않았다.
다만, 유일하게 함께 듣는 수업 중 가끔 시선이 느껴졌다. 착각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느낌에 고개를 돌릴 때면 늘 한주혁이 있었다.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친 적은 없었다.
그저 한주혁은 제 지정석이나 다름없는 책상에 앉아 창 너머, 어딘가 먼 곳을 응시하고 있거나 책상 위 책에 눈길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리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이쪽을 돌아본 적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는 그랬다. 그런데 사흘 전은 달랐다. 마치 그녀가 돌아볼 것을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처음부터 시선이 맞닿았다. 한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으며 시간이 멈추는 것 같았던 그 순간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한 손으로 턱을 괸 채, 알 수 없는 무감한 눈으로 예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하는 내면을 관통하듯 곧고 거침없는 시선이었다.
예서는 뭔가에 홀린 듯 수초간 그를 바라보다 현주의 속삭임에 고개를 돌렸다. 아무 의미도 없는데 뭔가 의미라도 있는 것처럼, 기묘한 한순간이었다.
***
주혁은 조별 과제를 같이 하자며 좀비처럼 들러붙는 사람들을 피해 멀찌감치 비상구 계단으로 향했다. 경영학관 건물과 학생회관은 3층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학생회관 스터디 라운지는 점심시간 동안 텅 빈 듯 조용해 혼자 있기 좋았다.
그때 귀에 익은 이름이 들려왔다.
“우앙, 예서야. 많이 아파? 괜찮아?”
민예서?
주혁이 고개를 돌렸다. 민예서의 친구던가, 늘 붙어 다니던 2학년 여학생이 학생회관 후문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진짜 밥 먹긴 한 거야? 약이야 약국이니까 당연히 있겠지만 너네 쌍둥이 오빠 없을 때는 집에 밥도 없잖아. 진짜 괜찮은 거지? …알았어. 내일 오전에 다시 톡 보낼게.”
통화가 끊기자 다른 여학생이 바나나 우유를 두 개 사 들고 와서 불쑥 물었다.
“예서 오후에도 못 온대? 그 모범생이 수업을 쨀 정도면 진짜 아픈가 보다. 어떡해. 병문안이라도 가야 되나.”
“봐서 저녁에 죽이라도 사 가지고 들러볼까 싶은데…. 걔네 엄마가 계시면 좀 그래서. 친구들 집에 오고 이런 거 싫어하시잖아.”
“그래? 예서 오빠한테는 안 그러신 것 같던데. 저번에 미국 유학 갔다던 쌍둥이 오빠가 한국 들어왔을 때는 오빠 친구들 불러서 저녁 먹인다고 예서 보고 빨리 집에 들어와서 도우라고 전화로 닦달하시던데.”
“남의 부모님 흉보긴 싫지만… 예서네가 좀 그렇더라. 요즘에도 그렇게 아들딸 차별하는 집이 있다니까. 에휴…. 아무튼 일단 밥이나 먹으러 가자.”
“잠깐만, 지금 메뉴 보는데… 와! 오늘 예술회관 메뉴, 진짜 예술이다! 돈가스 메밀 샐러드 3종 세트! 빨리 가자, 빨리!”
여학생들은 발등에 불붙은 것처럼 빠르게 반대쪽으로 사라졌다. 주혁은 그제야 그늘에서 나와 학생회관 쪽으로 느릿느릿 방향을 틀었다. 어쩐지, 오늘 수업에서 안 보인다 싶더니 아팠던 거였나.
호젓한 라운지에 도착한 뒤에도, 본의 아니게 엿들은 얘기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
하루 푹 자고 나니 머리가 조금은 맑아진 것 같았다. 그래도 오한은 여전히 남아 있었고, 아침부터 청승맞은 빗방울이 떨어져 공기가 더 찬 것 같았지만 도저히 하루 더 결석할 여유가 없었다.
예서가 오전 수업 전 교정에 들어설 때였다. 박성준이 한 손에 커피잔을 들고 경영학관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
“어! 예서야. 어제 너 아팠다며? 괜찮아? 얼굴이 해쓱하네.”
“네, 괜찮….”
예서는 괜찮다고 대답하려다 박성준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는 지퍼백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벌써 보름, 아니, 한 달도 더 전에 그에게 전해 준 것 같았는데 저게 왜 아직도?
“야, 어떡하냐. 오전에야 주머니에 있는 거 발견한 거 있지! 이거 비 올 때만 입는 옷이라서 그동안 까맣게 잊어 버리고 있었어. 이따 주혁이 보면 주려고 했는데 내가 지금 교수님하고 면담이 있어서 말이야. 또 까먹을까 봐 걱정되기도 하고, 미안한데 네가 직접 주라. 진짜 미안하다!”
“네? 아….”
박성준은 그녀의 손에 지퍼백을 다시 턱 올려주고 바삐 어디론가 향했다. 예서는 9천 9백 원이 든 투명 백을 망연자실 바라보다가 폭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야 나흘 전의 묘한 시선을 알 것 같았다.
그래서 쳐다본 거였구나. 돈을 왜 안 주나 해서.
그러다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럴 리는 없을 것 같은데….
카페에서 당당히 이것저것 주문하던 한주혁의 모습이 떠올랐다. 평소 누구 눈치를 보지도 않고, 꿀리는 일도 없이 늘 제 페이스대로 행동하는 타입이었다. 만약 돌려주길 원했다면 먼저 요구하지 않았을까.
그 순간 다시 시선을 느꼈다. 포럼 건물 쪽에서 막 나오던 한주혁이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예서는 저도 모르게 반색하며 그에게 뛰듯이 달려갔다. 그는 그녀가 제 앞까지 오는 동안,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고 유유히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선배!”
“안녕.”
담담한 인사말에 예서는 손에 들고 있던 지퍼백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거… 9천 9백 원 돌려드릴게요. 개강 전에 R 카페에서 백 원짜리 쇼핑백 가져가신다고 만 원짜리 놓고 간 적 있으시잖아요. 너무 늦게 드려서 죄송해요.”
그날 성준 선배에게 좀 전해달라 부탁했었다는 말까지는 하지 않았다. 한주혁은 그녀가 내미는 투명 백을 내려다볼 뿐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주머니에서 두 손을 빼지 않는 걸 보면, 받아 들 의향이 없는 것처럼도 보였다.
뭐지. 혹시 너무 늦게 줘서 화났나.
그때 한주혁이 갑자기 풉,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예서가 쫙 펼친 손바닥을 아래서 받치고 다른 손으로 그녀의 손가락을 안으로 말았다. 갑작스러운 터치에 예서는 흠칫 놀랐다가 한주혁의 웃음에 잠시 넋을 잃었다.
처음 보는 미소였다. 늘 삐뚜름하니 한쪽 입술을 당겨 조소와 실소를 오가던 그였는데. 이렇듯 제대로 웃는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괜찮으니까 너 가져.”
“네? 하지만….”
“9만 9천 원도 아니고 99만 원도 아니고 9천 9백 원인데. 너 커피 좋아하잖아. 이걸로 마셔.”
“아, 예서야! 마침 잘됐다!”
그때 한 여학생이 예서를 발견하고 반가운 듯 요란스럽게 달려왔다. 한 손에는 서류 바인더, 다른 손에는 볼펜이 들려 있었다.
“서머 캠퍼스 알바 신청할 거라 그랬잖아? 조교님이 그러는데 사서 자리가 벌써부터 경쟁률이 높다 못해 박 터진대, 아주. 혹시 모르니까 수기로 미리 인적 사항 작성해 둬.”
“어… 알았어.”
예서는 돈이 든 지퍼백을 일단 주머니에 넣고 펜과 바인더를 받아 들었다. 한주혁은 제삼자가 끼어들자 한 걸음 물러나 비켜섰다. 하지만 돌아서서 제 갈 길 가지 않고 그 자리에 여전히 남아 있었다. 바인더를 건넨 동기는 뒤에서 누가 부르는지 잠깐만, 덧붙이곤 다시 후다닥 달려가 버렸다.
“이거 볼펜 다 닳았나 봐. 안 나오네….”
“이거 써.”
예서가 가방에서 필기구를 꺼내려다 당황해 그를 올려다보았다. 꽤 비싸 보이는 만년필이 갑자기 어디서 나왔는지, 한주혁이 덤덤한 얼굴로 펜을 코앞에 내밀고 있었다.
“아. 감, 감사합니다.”
펜을 받아 들고 바인더 위에 이름과 학과, 연락처를 적을 때였다. 이번에는 저 멀리서 송현주와 강채린이 우다다 몰려오고 있었다. 현주는 한주혁을 보지 못했는지 예서를 보자마자 꼭 끌어안고 우쭈쭈, 등을 토닥거렸다.
“예서야! 다행이다. 많이 아팠어? 오구, 우리 애기 얼굴 좀 봐. 완전 반쪽이 됐네?”
“약은 먹었어? 야, 아직도 열나는 것 같은데?”
강채린까지 가세해 두 여자는 친구를 끌어안고 이마를 짚어 보는 등, 요란을 떨고 나서야 예서를 놓아주었다. 다른 친구가 바인더를 도로 가져가고 나서야 예서는 펜을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한주혁은 그새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