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4)화 (5/124)

<4화>

-예서 너 정우한테 왜 그래?

“엄마, 그게 아니라….”

-혼자 있는 동안 좀 어질러 놓을 수도 있지. 엄마도 가만있는데 네가 왜 오빠한테 잔소리야? 응?

모처럼 밝았던 음색에 단단히 날이 서 있었다. 내 아들 누가 해코지라도 해 봐라, 가만있나! 모친의 내면이 육성으로 들리는 것 같았다.

-그만해. 오빠 오랜만에 한국 나왔잖아. 하루라도 맘 좀 편히 있게 해 주라고. 응?

예서가 소리 없이 한숨만 내쉬자 이 약사는 한술 더 떠 명령했다.

-오빠한테 그럴 거면 네가 나가. 다음번에 정우 올 동안, 고시원이든 어디든 네가 나가 있으라고. 그럼 분란 생길 일도 없잖아!

눈물이 핑 돌았다. 설마 진심일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서러움에 목이 메이는 것 같았다. 예서는 입술을 꼭 깨물고 감정을 추스르려 애썼다.

“알았어요. 안 그럴게요….”

-오빠 바꿔봐.

약속이나 한 듯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며 정우가 나왔다.

“엄마가 다시 바꿔 달래.”

예서가 휴대폰을 넘겨주자 그는 눈을 부라리며 폰을 낚아채듯 가져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이 약사가 뭘 사주겠다고 했는지 정우는 금세 안색이 확 밝아지며 모친의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예서는 한숨을 내쉬며 거실에 널린 쓰레기부터 하나씩 집어 들었다. 닫힌 문 너머로 웃음소리가 간간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흡사 알콩달콩 달콤한 대화를 나누는 연인 같았다.

두 사람은 늘 사이가 좋았다. 저만큼 친구처럼 허물없고 가까운 모자지간도 없을 것이다. 예서는 그런 둘을 볼 때마다 늘 소외감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섞이지 못하고 늘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스스로가 이방인 같았다.

우리 정우. 우리 아들. 금쪽같은 내 새끼.

우리 예서, 우리 딸이란 말을 들어본 적이 있던가. 그녀의 기억이 맞다면, 엄마는 단 한 번도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없었다.

***

봄 캠퍼스는 일종의 축제 분위기였다. 막 개강했을 때 특유의 들뜨고 설레는 것과는 또 다른 공기가 경영학과 건물을 중심으로 휘돌고 있었다. 봄바람처럼 따사로운 그 대기는 특히 2, 3학년 여학생들 주변에서 더 활발한 기운을 내뿜었다.

“주혁 선배 돌아온 거 들었어? 대박. 나 이번에 휴학하기로 한 거 번복했잖아. 진짜 다행이다, 흑흑.”

“야, 너 이번에 마케팅 관리 듣지? 나 가을 학기에 들으려고 그건 빼놨는데 신청할걸! 주혁 선배, 마케팅 관리 수업 듣는대! 같이 듣는 애들 부럽다….”

“진짜? 2학년 때 안 들었나 봐? 미친, 근데 그거 시험 대신 제출하는 조별 과제 있잖아. 어떻게든 선배랑 같은 조 돼야지! 마케팅 관리 조별 과제 엄청 빡세다던데, 주혁 선배 전체 수석으로 들어와서 A+, A 이하로 학점 받은 역사가 없잖아.”

“그게 맘대로 되겠어? 서로 선배랑 같은 조 하려고 혈안이 될 텐데 결국 선배의 간택을 받아야…. 나는 그냥 눈 호강 하는 걸로 만족하련다.”

동경은 동경이고 그를 최대한 저 유리한 쪽으로 활용하겠다는 야심, 그저 같은 공기를 마시며 바라만 보고 있어도 좋다는 애틋한 감성, 과사 라운지는 봄 아지랑이처럼 몽글몽글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다. 예서도 그중 하나였지만 동기들의 것과는 좀 달랐다.

잘 됐다. 이따 오후에 9천 9백 원 돌려줘야지.

아예 작은 지퍼백 안에 천 원짜리 지폐 아홉 장, 오백 원짜리 동전 하나, 백 원짜리 동전 네 개를 넣어두고 가방에 챙겨 다니고 있었다. 교내에서 마주치면 바로 주려고 했지만 개강 나흘째인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점심이 끝나고 마케팅 관리 수업 시간이 됐을 때 예서는 친구들과 나란히 강의실에 들어섰다. 한주혁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맨 뒤에 앉아 있었다. 정작 그는 아이패드에 시선을 고정한 채 누구에게도 관심을 두지 않는 분위기인데도, 선후배들은 저들끼리 대화하면서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고 맴돌았다.

“선배, 무슨 그래프인데 그렇게 열심히 보세요? 헉, 다 영어다.”

“주식 아냐? 우량주면 좀 알려주라.”

그러다가도 누가 눈치껏 말을 걸면 의외로 눈살을 찌푸리거나 싫어하는 기색을 보이진 않았다. 눈은 화면에서 떼지 않으면서도 간간이 대꾸도 해 주는 편이었다.

“야, 우량주란 게 알려진 순간부터 이미 늦은 거야. 학생 때는 모의 주식이나 해.”

다른 복학생이 한주혁의 대답을 가로채자 2학년 후배가 불쑥 물었다. 두 눈 가득 그에 대한 선망이 어려 있었다.

“주혁 선배. 선배는 졸업하고 계획이 어떻게 되세요? 뭐 하실 건지….”

“뭐 하긴. 군대 가고 취업해야지. 딱히 더 공부할 생각은 없으니까.”

이번엔 한주혁 본인이 직접 답하고 덧붙였다.

“나라고 뭐 특별히 다른 길을 가겠어? 다 똑같지.”

“그, 그렇긴 하지만….”

남자 후배는 머쓱하게 웃으면서도 한주혁의 머리부터 손목에 찬 시계까지 빠르게 훑었다. A. Lange & Söhne 로고가 새겨진 시계는 외조부의 유품이라는 그의 말마따나 한눈에 봐도 세월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검은색 맨투맨 티셔츠와 바지, 가방은 모두 국내 중고가 브랜드였다. 휴대폰과 노트북도 수년 전에 나온 구형 모델인데다 차도 끌지 않는다. 수려한 외모야 집안 골라 나오는 게 아니라지만, 아무리 봐도 범상치 않았다. 암만해도 대단한 집 금수저의 냄새가 나는데 말이야. 근데 행색은 또 아니고.

“이제 자기 자리로 가. 교수님 오실 시간 다 됐잖아.”

그가 저를 에워싼 동기들을 무심히 둘러보았다. 다들 마지못해 주섬주섬 일어나면서도, 한마디씩 하는 걸 잊지 않았다.

“그나저나 조별 과제 떨어지면 저랑 해요, 선배. 저 진짜 열심히 할게요. 네?”

“나나! 나는 얘 복학 때부터 미리 선점해뒀어. 주혁아, 나는 진짜 버리면 안 된다. 알았지?”

“앗, 저는 주혁 선배, 교환학생 가기 전부터 부탁드려놨다고요!”

한주혁은 당사자를 가운데에 두고 저들끼리 투닥거리는 모양새를 보고 어이가 없다는 듯 픽, 웃었다. 그 순간 한주혁이 예서 쪽을 바라보며 둘의 시선이 정면으로 마주쳤다.

“……!”

심장이 두근, 내려앉는 느낌에 예서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팩 돌려 버렸다. 귓불이 발갛게 달아오른 건 마침 창 너머로 따가운 봄 햇살이 비쳐 든 까닭이리라. 예서는 여전히 콩닥콩닥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막 강의실로 들어서는 교수님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

중간 브레이크 때 돈을 돌려주려 했지만 여의치가 않았다. 한주혁은 복도 창턱에 삐뚜름히 기대서서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그의 자리에 놓으려고 해도, 아까의 동기들이 빈자리마저 에워싸고 있어서 도무지 틈이 보이지가 않았다.

잠깐 양해를 구하며 틈새를 비집고 들어가려 할 때였다. 그나마 한주혁과 가장 친해 보이는 박성준이 화장실에 다녀오는 모양인지 강의실 뒷문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저, 선배. 이거… 주혁 선배 좀 전해 주실래요? 저번에 카페에서 커피 사고 현금 거스름돈 가져가지 않으신 거예요. 직접 드리려고 했는데 통화 중이라서요.”

“어, 그래? 알았어. 전해 줄게.”

박성준은 작은 지퍼백을 선선히 받아 들어 재킷 주머니에 쏙 집어넣었다.

“그러고 보니 예서 너 꽤 오랜만이다. 작년 말에 채린이랑 본 게 마지막인 거 같은데. 학기 중에는 카페 알바 안 하지? 이번에 과외 새로 소개받았다며?”

“네, 채린이가 소개해줬어요.”

“그래. 진짜 너처럼 부지런히 사는 2학년도 없을 거야.”

교수님이 다시 앞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두 사람의 대화도 거기서 끝났다. 어쨌든 그를 통해 한주혁에게 9천 9백 원이 전달될 테니 다행이었다. 예서는 마음의 작은 짐을 내려놓고 다시 수업에만 집중하려 애썼다. 이 수업은 특히 더 필기할 것들이 많았다.

그래서 대각선 뒤, 간간이 제 뒤통수를 향해오는 시선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

개강하고 한 달 반이 훌쩍 넘은 어느 날, 예서는 새벽녘에 오한으로 깨어났다. 4월로 넘어가서도 겨울 침구를 그대로 쓰고 있어 이불이 두꺼운 편이었는데도 전신이 바들바들 떨렸다.

“몸살 났나….”

개강하자마자 과외 아르바이트에, 하루 최소 두세 시간 약국을 돕고 밤에는 글까지 쓰느라 너무 무리했던 탓일까. 애써 일어나 보려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오늘은 과외가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오전에는 중요한 마케팅관리와 재무관리 수업이 있었다.

애써 세수를 하고 몸을 추슬러 보려고 했지만 거동이 여의치가 않았다. 조금만 서 있어도 침대에 몸을 눕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예서는 한참 동안 침대에서 끙끙거리고 있다 7시 반 알람이 울리고, 모친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원래대로라면 모친 대신 약국을 열었어야 할 시간이었다.

“엄마….”

“어머! 너 약국 문 안 열었어? 지금이 몇 신데!”

“죄송해요. 몸살 난 것 같아서 도저히 못 나가겠어요. 약 있으면 좀….”

“아니, 오전 단골손님들 다 떨어져 나가면 어떡하려고! 하루만 문이 닫혀 있어도 다른 데로 가 버린단 말이야!”

이 약사는 빽 소리부터 지르다 예서가 하얗게 질려 비틀거리는 걸 보고 나서야 쯧, 혀를 찼다.

“그러게 늦게까지 안 자고 그러더니…. 어린애도 아닌데 이제 제 몸은 제가 좀 챙겨야지. 그래 가지고 학교는 가겠어?”

“오전 수업은 못 갈 것 같아요….”

“약은 꺼내놓을 테니까 그거 먹고, 밥 없으면 죽이라도 시켜 먹어. 네가 문 안 열었으니 빨리 나가봐야겠다.”

모친은 욕실에 들어가 화장도 하는 둥 마는 둥 서둘러 집을 나섰다. 예서는 식탁 위에 놓인 약봉지를 멀거니 보다가 다시 방으로 비틀비틀 걸었다. 그나마 모친이 약사라 약이라도 얻어먹을 수 있어 다행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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