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3)화 (4/124)

<3화>

그는 카운터 앞에 진열된 쿠키 한 통을 집어 들어 예서 앞에 내려놓았다.

“이것도.”

“네? 네.”

묘하게 말이 짧았지만 그것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예서는 그가 다시 내미는 카드를 받아 들고 결제한 뒤 이번에는 곧바로 돌려주려 그에게 내밀었다.

한주혁은 잠시 가만히 서 있다가 조금 뒤에야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팔을 카운터 기계 바로 앞까지만 뻗은 채 멈췄다. 예서 쪽에서 반사적으로 더 팔을 뻗었지만 거리가 있어서 그의 손에 닿지를 않았다. 예서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당최 의도를 알 수 없는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한주혁은 그녀 쪽에서 더 다가오는 게 당연한 일이라는 듯, 담담하게 예서를 응시하고 있었다. 너무 뻔뻔스러워 정말로 그게 당연한가, 한순간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예서는 결국 카운터에서 몸을 틀어 그의 손에 카드를 내려놓았다. 손가락이 닿는 순간, 한주혁의 손이 카드를 빼지 않고 수초간 그대로 있었다. 예서의 눈이 더 커지자 그제야 카드를 받아 드는 시선이 아주 잠깐, 그녀의 오른쪽 손목 안을 훑은 것도 같았다.

“여기… 쿠키도요.”

“포장인데요.”

“네? 아, 네….”

진작 말을 할 것이지. 예서는 카운터 아래서 주섬주섬 작은 종이봉투를 꺼내 쿠키를 가지런히 넣었다. 포장지를 접어 쟁반 위에 올려놓는 순간, 한주혁이 다시 말했다.

“쇼핑백은 없어요? 가방이 꽉 차서 안 들어갈 것 같은데.”

“100원인데 괜찮….”

“네. 쇼핑백으로요.”

예서는 인상 쓰지 않으려고 표정 관리를 하며 종이 가방을 곱게 펴서 쿠키를 다시 옮겨 담았다. 그러고는 100원 결제를 위해 다시 카드를 요청하려 할 때였다. 한주혁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머그잔을 턱짓해 보였다.

“이거부터 좀 마시고요.”

한주혁은 그녀의 대답은 기다리지도 않고 한 손엔 쇼핑백을, 다른 손에는 커피잔이 든 트레이를 들고 구석 테이블로 가 버렸다. 예서는 그 뒷모습을 멀뚱멀뚱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등 돌린 채 의자에 기대앉아 잔을 입가로 가져갔다. 그 뒷모습이 한 폭의 그림 같았지만 한편으로는 의구심도 들었다. 그동안 한주혁에 대해 무조건 좋은 말만 들은 것은 아니었다.

-난 사실 그 선배 별로야. 머리도 좋고 잘생겼고 진짜 멋있긴 한데 왠지 좀… 거부감이 든달까. 나는 특별하고, 내가 원해서 아웃사이더가 됐다는 느낌이 조금 재수 없어. 엄청 차갑기도 하고. 그래서 싫어하는 남자 선배들도 꽤 있었대.

-난 그래서 더 좋던데. 일부러 허세 떠는 게 아니라 타고난 성격이 그런 것 같아. 유치한 동기들이나 아재 같은 선배들보단 훨씬 낫지, 뭐.

-그리고 그 선배들도, 한주혁 물고 뜯고 씹다가도 막상 눈앞에선 아무 말도 못 하더래. 입 뻥긋 안 해도 포스가 장난이 아니잖아.

-좀 차갑긴 해. 사생활도 알려진 게 없고. 몸에 두른 건 은근히 명품들 같은데 차는 없으니 금수저는 또 아닌 거 같은데…. 정체가 뭘까?

하지만 진상이란 말은 없었는데.

방금 한주혁이 보인 태도는 다소 진상에 가까웠다. 쇼핑백을 뒤늦게 요구한 건 그럴 수 있다 쳐도, 왕처럼 손을 최소한만 내밀고 카드를 갖다 바치길 원하는 모양새는 확실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상하잖아. 꼭 내 손을 더 가까이에서 보려던 것처럼.

문득 손목 안쪽, 희미한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13년 전, 유원지 계곡의 조난 사고에서 한 아이의 손을 꼭 붙잡고 버티다 어딘가에 깊이 베였던 흔적이다. 당시 모친은 쌍둥이 오빠만 챙기느라 그녀의 몸 상태는 전혀 살피지 않았었다.

소독 처리도 없이 반창고만 붙이고 있다 떼어 냈을 때는 얽은 것처럼 보기 싫은 자국이 생겨 있었다. 흉터는 세월이 흐르면서 점차 옅어졌지만 완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손목 안쪽이라 눈에 잘 띄지 않아 다행일 따름이었다.

“예서 씨? 안 바쁘면 이거 가져가서 정리해 줘.”

“아, 네네!”

점주가 조리실에서 나와 바닥에 비품 상자를 내려놓았다. 예서는 바닥에 앉아 냅킨과 스트로, 일회용 컵 등을 능숙하게 정리해 수납장에 넣었다. 홀의 유일한 손님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어 오히려 다행이다 싶었다.

빈 상자를 가게 뒤편에 두고 돌아왔을 때 한주혁은 이미 떠난 후였다. 그가 앉았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카운터 앞에는 빈 잔과 트레이, 만 원짜리 지폐 하나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뭐야, 이게…? 설마 쇼핑백값?”

예서가 황망히 가게 밖으로 나가봤지만 한주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천 원짜리만 됐어도 그러려니 했을 텐데 만 원 지폐라 당황스러웠다.

“아니… 카드로 백 원 결제도 되는데 굳이 왜. 나머지 9천 9백 원은 어떡하라고….”

예서는 한숨을 폭 내쉬곤 제 동전 지갑에서 백 원을 꺼내 카운터 수납기에 넣고, 만 원짜리는 가방에 집어넣었다. 개강하면 마주치게 될 테니 그때 돌려주면 되려니 싶었다.

어쩌면, 개강 전 한 번은 더 카페에 들릴 수도 있으리라.

***

주혁은 텅 빈 카운터 앞에 잠시 서 있다가 결국 발길을 돌렸다. 한 손에 쇼핑백을 들고, 한 어깨에 랩탑 가방을 멘 채 다시 교정을 향하는 얼굴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가 거대한 조각 석상을 스쳐 갈 때였다. 석상 너머에서 걸어오던 남학생 중 하나가 고개를 기울여 카페 쪽을 굽어보았다.

“어, 저기 민예서 있다. 오늘은 오전 근문가? 야, 가서 뭐라도 하나 사자.”

“엥? 너 1+1 쿠폰 있다고 S 커피 가자고 했잖아.”

“그건 이따 쓰면 되지. 이렇게 한가한 시간에 민예서 얼굴이나 좀 보게. 아침부터 예쁜 거 보면 기분 좋잖아.”

그가 실실 웃자 다른 남학생이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어우, 씨발. 그렇게 좋은데 전화번호도 못 따고 뭐 했냐. 일부러 경영학과 여자애들이랑 친해져서 쟤한테 접근해 보려고 애쓴 시간이 아깝다.”

“어떡하냐, 철벽도 그런 철벽이 없는데. 부모님 일 돕고 알바하느라 누구 만날 시간이 없다잖아. 얼굴, 몸매 다 진짜 내 취향인데…. 키는 보통인데 얼굴 작고 다리가 길어서 비율도 존나 좋아.”

“백날 좋으면 뭐 하냐? 보는 게 단데.”

“대신 경영학과 기웃거린 덕에 여자애들 연줄 생겼잖아. 나 사실 요즘은 한규리랑….”

주혁은 그들의 수다가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시시덕거리던 남학생들은 막 카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는 남자들이 사라진 문짝을 수초간 더 노려보다 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카운터 앞에 서서 주문을 받는 민예서의 옆 선이 보였다.

주혁의 입술 끝에 조소가 떠올랐다. 그는 뒤돌아서서 교정 안으로 향했다. 어느덧, 혼자만의 생각에 잠긴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

개강을 사흘 앞둔 날에야 약국 근무 시간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예서가 카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그동안 못 한 공부를 위해 학교 도서관으로 향할 때였다. 모친 이 약사에게서 부재중 통화가 와 있었다.

“엄마, 전화하셨어요?”

-응, 예서야. 오늘 최대한 일찍 들어가서 오빠 저녁 좀 챙겨. 엄마 오늘 하루 종일 약사회 모임 있는데 갈비랑 찜닭 다 해놨으니까 냄비 넣고 졸이기만 하면 돼. 아 참, 잡채는 재료 손질해뒀으니까 프라이팬에 직접 좀 볶고.

이 약사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한 톤 올라가 있었다. 그 사근사근한 말투와 늘 웃음 띤 얼굴은 이틀 전 정우를 공항 리무진 버스로 데려올 때부터 변함이 없었다.

차가 있었을 때도 자신에게는 한 번도 마중 오거나 배웅해 준 적이 없었는데.

-남은 건 웬만하면 네가 다 먹어 버려. 누구든 먹어 치워 버려야 냉장고에 공간이 생길 거 아니니. 정우 한국에 있을 동안만이라도 매일 새 반찬 해줘야지.

먹어 버려. 먹어 치워 버려. 모친은 그녀에게 늘 그렇게 말했다. 많이 먹어- 그런 말은 늘 정우에게만 하셨던 것 같다.

-혹시 밥통에 밥 남았어도 그건 얼려놓고 새로 해. 알았지?

“네, 알았어요.”

예서는 과거의 서운했던 기억을 애써 떨쳐 버리고 순순히 대답했다. 통화를 끊자마자 도서관에 가려던 방향을 전철역으로 틀었다. 어린애도 아니고 어련히 알아서 먹을 텐데 한 끼니라도 소홀히 할까 봐 전전긍긍, 정우를 걱정하는 모친이었다.

어쩔 수 없지. 엄마 말씀대로 며칠만 있다 가는 거니까.

좋은 쪽으로 생각하려던 것도 잠시, 예서는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먹다 남은 음식 냄새가 코를 찔렀다.

식탁 위에는 먹다 만 자장면과 반찬 등 일회용 용기가 그대로였고, 과자 봉지와 음료수 페트병, 과일 껍질이 집 안 곳곳에 널려 있었다. 정우는 예서의 방에 있던 PC를 거실 한복판에 끌어와 게임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예서가 오든지 말든지 거들떠보지도 않는 모습이 철없는 중학생 같았다.

“민정우. 집 안 꼴이 이게 뭐야. 좀 치워가면서 놀면 안 돼?”

“어? 어. 미안…. 이따 할게. 잠깐만 이것부터….”

“시켜 먹었으면 치워야지. 저녁 먹으려면 이것들 다 정리해 줘.”

정우는 예서가 몇 번이나 독촉하자 짜증이 났는지 마우스를 홱 집어던졌다. 두 눈에는 불만이 가득 담겨 있었다.

“아, 진짜. 좀 이따 한다고 했잖아!”

“엄마가 저녁 해 주라고 하셔서 일부러 빨리 왔는데 주방을 이렇게 어질러 놓으면 어떡해. 세탁기 앞엔 수건을 왜 저렇게 잔뜩 던져놨어? 수건 한 번 쓸 때마다 새 거 꺼내는 버릇, 아직도 못 버렸어?”

“씹. 너 왜 이렇게 사람을 못살게 들들 볶아대? 어?”

그때 정우의 휴대폰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그는 구원자라도 만난 듯 덥석 폰을 쥐고 엄마, 아이처럼 찡찡대는 소리를 냈다.

“엄마! 민예서 때문에 내가 진짜 못 살겠어! 내가 머리가 아파서 좀 자고 있다가 이제 일어났거든. 민예서가 점심 먹은 거 안 치워놨다고 막 뭐라고 하는데 너무 짜증 나. 나 이제 한국 안 들어올 거야. 아, 몰라! 다시는 안 들어온다고!”

허우대만 멀쩡할 뿐, 하는 언행은 초등학생이나 다름없었다. 폰 너머로 예서 당장 바꿔보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받아, 정우는 퉁명스럽게 내뱉고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쾅 닫아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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