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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2)화 (3/124)

<2화>

어머니가 도착하는 즉시 다시 집으로 달려가 방학 때는 아르바이트, 학기 중에는 등교 준비를 서둘러 하느라 아침은 그야말로 전쟁통이었다. 어떤 날은 미리 등교 준비까지 마치고 약국에서 바로 길을 나설 때도 있었다.

그날따라 오전 손님들이 많아서 더 정신이 없었다. 이경은 약사는 9시가 가까워서야 후문을 통해 조제실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 많았어?”

“조금. 엄마 오셨으니까 이제 알바 갈게요.”

“잠깐만 앉아 봐, 예서야.”

하얀 약사 가운으로 갈아입은 모친은 서둘러 코트를 걸치는 딸을 붙잡아 앉혔다.

“미스 조, 당분간 집안 사정으로 6시면 퇴근해야 된다니까 알바 끝나면 바로 와. 알았지?”

“아… 며칠이나요?”

“길어야 1, 2주겠지 뭐.”

이 약사는 한숨을 내쉬며 컴퓨터를 켜고 당일 주문할 의약품 목록을 살펴보았다. 이제 막 하루가 시작됐는데도, 두 눈은 벌써부터 움푹 들어가 있다.

여전히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고 선이 고운 엄마였지만 요즘은 약국 여닫는 시간을 무리해 연장한 탓인지 많이 피곤해 보였다. 그나마 그녀가 활짝 웃을 때는 1년에 두세 번, 쌍둥이 오빠 정우가 한국에 와서 머물 때뿐이다.

“네… 알았어요.”

예서는 담담히 그러겠다고 답했다. 하루 종일 카페에서 일하고 저녁에 또 약국에서 자정까지 일해야 하는 상황이지만 아무런 불평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방을 메고 다시 일어서려 하자 이 약사가 다시 붙잡았다.

“아 참. 그리고 정우 말인데 다음 주 개강 전에 잠깐 한국 오잖아. 12월에 윈터 브레이크 때는 못 들어왔으니깐.”

“네.”

“정우 있을 때는 네 방, 정우 쓰라고 내주자. 응? 걔도 다 컸는데 엄마랑 같이 쓰기 얼마나 불편하겠어. 엄마도 불편해서 그래.”

이번에는 선뜻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휴일도 없이 약국에서 살다시피 하는 모친이 불편할 리 없었다. 민정우가 뒤에서 찔렀을 게 뻔했다.

“왜. 싫어? 겨우 일주일인데.”

“아뇨, 싫은 건 아닌데 저도 개강이라 좀 바빠서….”

오히려 겨우 일주일이니까 잠만 주무시는 엄마 방에 있어도 되지 않을까. 굳이 제 방에 있어야 되나 싶어 당황스러웠다.

“어쩔 수 없잖니. 아무리 유학비 때문에 방 두 개짜리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곤 해도, 제 방이 없어졌으니 얼마나 서러울 거야. 타국에서 힘들게 공부하는 오빠 생각도 좀 해 주련. 응? 어쩌다 한 번 들어올 때만 네 방 좀 쓰게 해 주자.”

“…….”

“엄마 부탁 좀 들어줘. 응? 약국 요즘 장사도 잘 안되는데 너랑 정우 뒷바라지하느라 얼마나 힘든지 알잖니. 인생이 고달파서 죽겠어. 그저 정우 무사히 졸업해서 제 앞가림할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예서는 이번에도 입술만 감쳐물었다. ‘너랑 정우 뒷바라지’에서 저는 빼야 하는 게 아니냐고 반문하려던 말을 안으로 꼭 눌러 삼켰다.

학비는 한 학기도 장학금을 놓치지 않으려고 아등바등, 용돈은 아르바이트로 다 충당하고 있지만 엄마 그늘에서 사는 건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민정우가 그 비싼 미국 땅에서 쾌적한 월세 스튜디오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도 굳이 언급하지 않았다.

“알았어요. 그렇게 할게요….”

“그래. 정우 좀 봐주렴. 어릴 때부터 몸도 약하고, 그래서 재수도 제대로 못 하고 먼 데까지 보냈잖니. 혼자 멀리서 고생하는데 가끔 올 때만이라도 동생이다 생각하고 잘 좀 챙겨줘.”

어쩔 때는 오빠처럼, 어쩔 때는 동생처럼 챙기라는 모순된 강요가 가슴에 콕콕 박혔다.

엄마, 그럼 나는? 나는 왜 항상 챙기는 쪽만 되어야 해요? 챙기고 이해하고 배려하고, 늘 양보만 하고….

민정우가 미국으로 유학길을 떠나기 전, 그렇게 항변해 본 적이 있었다. 그때 엄마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기막혀하다 결국은 울음을 터뜨리고 오열했었다.

-넌 어떻게 애가 그리 이기적이야? 넌 네 오빠가 가엾지도 않니? 몸 약해서 공부도 제대로 못 하고 재수도 못 할 거 같고, 아무리 봐도 미국밖에 갈 데가 없어서 그러는데. 그것도 엄마가 스펙도 못 만들어줘서 결국 아이비리그 명문대도 아니고 이름도 없는 데 보내서 속상해 죽겠어. 근데 넌 어떠니? 대한민국 제일 좋은 대학에 다니면서 이렇게 엄마 집에서 더운밥 먹고 편히 살고 있잖아!

그녀의 합격 소식에 이 약사는 안타까운 얼굴로 뒤돌아서서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찍어냈었다. 당시에는 몰랐다. 네가 아니라 정우였다면 훨씬 더 좋았을 텐데. 우리 정우 기죽어서, 속상해서 어떡하니. 그런 심정이었던 것을, 그때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민정우가 미국으로 떠나고부터 모친이 딸에게만 손수 밥상을 차려준 적도 없었다. 며칠에 한 번 밥과 국을 해두는 게 전부였지만, 한 번도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홀로 힘들게 일하는 모친에게 다 큰 자녀가 밥투정이라니 말도 안 된다고 믿었다. 힘들게 일하시는 이유가 오롯이 정우의 뒷바라지를 위해서란 것 또한 이해하려 애썼다.

-내가 널 얼마나 의지하고 든든하게 생각하는데. 그런데 네가 이러면 난 누굴 믿고 사니? 응? 정우가 저런데 너까지 그렇게 철없이 굴면 난 어떡하라고! 오빠가 없을 때는 네가 장녀잖아.

-죄송해요, 엄마….

결국 예서가 잘못했다고 비는 것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그 이후로는 늘 착하고 의젓한 딸, 모친이 의지하고 든든하게 여길 수 있는 장녀가 되기 위해 애썼다.

내가 더 잘하면 돼. 내가….

그러면 엄마가 정우를 아끼는 것만큼 자신도 사랑해 줄 터였다. 그것은 어릴 적부터 늘 그녀의 일상을 지배해오는, 무의식적인 믿음이었다.

***

예서는 학교 앞 카페에 도착해 약국에서 그랬듯 청소부터 시작했다. 며칠 전 내린 눈의 흔적이 교정 입구로 이어지는 길목 곳곳에 널려 있었다. 아직 개강 전인 학교 앞은 한산했지만 오후부터는 교내 평생교육원 문화센터 수강생들로 꽤 복작거릴 터였다.

창 너머, 맞은편 지붕 위의 잔설을 보며 성에가 낀 창문을 열심히 닦을 때였다. 저만치서 키 큰 남자가 보였다. 머플러를 가볍게 맨 얼굴이 넓게 각진 어깨, 건장한 몸에 비해 무척 작아 보였다.

한주혁…?

가슴이 콩콩 뛰었다. 어디선가 갑자기 나타난 한주혁이 한 손을 코트에 찔러넣고, 여유로운 몸짓으로 교정을 향하고 있었다. 오늘도 개강 전에 볼일이 있는 모양이었다. 예서는 창을 닦던 손짓을 멈춘 채 크고 기다란 옆선을 감탄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모델처럼 완벽한 비율, 절도 있고 우아함을 잃지 않는 속보에 찬탄하던 것도 잠시, 예서가 깜짝 놀라 미간을 좁혔다. 한주혁이 갑자기 그 자리에 우뚝 멈춰서서 그녀 쪽을 돌아보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예서가 히익, 놀라 재빨리 창에서 돌아서서 카운터 뒤로 몸을 숨겼다.

내가 훔쳐본 걸 알았나. 아니, 나는 그냥 창문을 닦고 있었을 뿐이….

그때, 띠링 하고 문이 열리는 경쾌한 종소리가 울렸다. 예서는 너무 몰라 손님에게 인사하는 것도 잊고 어버버 입을 벌렸다. 한주혁이 문가에 서 있었다.

“아, 안녕하, 아니, 어서 오….”

그는 곧장 카운터로 다가와 예서를 내려다보았다. 키가 어찌나 큰지 고개를 한참 젖혀야 간신히 시선이 맞닿을 지경이었다.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더 크게 느껴졌다.

“코르타도 뜨거운 거요.”

“네? 코르… 뭐라고 하셨죠?”

한주혁은 메뉴가 손글씨로 적힌 까만 보드를 올려다보았다. 말이 카페지 구움 과자와 빵 위주의 베이커리에 가까워 메뉴라고 해봤자 커피 종류는 몇 가지 없었다. 그는 담담히 주문을 정정했다.

“오늘의 커피. 뜨거운 걸로.”

“아, 네네. 테이크아웃….”

“매장용 컵에 주세요. 마시고 가게.”

“네? 네. 모닝 타임 할인돼서 2, 2천 원입니다.”

마시고 간다고? 어디 가던 길이던데 급한 용건이 아니었나?

예서는 저도 모르게 허둥거렸다. 왜인지 새빨개진 얼굴로 허둥지둥 카드를 돌려주면서는 그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한주혁은 카드를 받아 넣은 뒤에도 테이블 쪽으로 가지 않고 오도카니 선 채, 예서의 일거수일투족을 물끄러미 주시했다.

“저… 시간 좀 걸리니까 앉아 있으시겠어요?”

미칠 것 같았다. 죄지은 것도 아닌데 그의 시선 앞에서 자꾸만 죄인처럼 기가 죽었다. 그는 속내를 알 수 없는 시선을 그녀에게서 떼고 카운터 앞 초콜릿과 젤리 등으로 주의를 돌렸다. 앉아 있으라고 권하든 말든, 네가 내 눈길에 긴장해 실수 연발을 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묘하게 오만한 태도였다.

예서는 돌아서서 원두를 분쇄기 안에 넣었다. 카페는 대형 프랜차이즈가 아닌 영세한 개인 가게였다. 원두를 따로 분쇄하는 옛날 방식이라 첫 드리핑에는 최소 5분 정도 시간이 걸렸다.

열 손가락에 두툼한 장갑이라도 낀 것처럼 손끝이 둔하게 느껴졌다. 자칫했다간 손에서 컵이라도 떨어뜨릴 것 같아, 예서는 간신히 손에 힘을 주고 머그잔을 꺼냈다. 한주혁은 청개구리처럼 커피가 다 내려왔을 때에야 어슬렁어슬렁, 구석의 테이블에 가 앉았다.

“저… 커피 나왔습니다.”

한주혁이 고개를 비뚜름하게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이상할 정도로 길어 예서는 다시 허둥지둥 덧붙였다.

“저기… 셀프예요. 오셔서 직접 가져가셔야….”

방문객도 아니고 재학생인데 셀프인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설마 1년 만의 복학이라 까먹었을 리도 없고.

한주혁은 느릿느릿 다시 카운터로 걸어와 그녀를 지그시 응시했다. 지독하게 잘생겼지만 미치도록 사람의 숨통을 조이는 눈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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