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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나에게 반하지 않았다 (1)화 (2/124)

<1화>

4년 전, 2월은 조금은 고달프고 우울하지만 막연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던 시기였다. 그날은 겨울의 끝자락을 아쉬워하듯 오전부터 눈이 내렸다. 한주혁은 그 눈송이 한가운데 서 있었다.

처음 시선이 맞닿았을 때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심장이 멎는 듯한 충격에 이어, 공기마저 흐름을 달리했던 그 순간은 아마도 살면서 가장 강렬한 1초였을 것이다. 평생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세상에서 그렇게 잘생긴 남자는 본 적이 없었다. 아니, 잘생겼다는 표현이 너무 단순하게 느껴질 만큼 아름다운 사람이었다.

길게 뻗은 속눈썹은 그녀의 것보다 더 길었고 무의식적으로 거만하게 치켜든 턱선은 어딘가 현실과는 괴리가 있어 보였다. 소담하게 내리는 눈송이가 그의 비현실적인 외양과 절묘하게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 같았다.

하지만 예서의 눈을 사로잡은 것은 독보적인 외모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초면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 때문이었다.

큰 키에 검은색 코트를 받쳐 입은 남자는 창 너머, 50미터 정도의 거리에서 그녀를 길게 보다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고는 곧바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혹시 아는 사람인가, 수초간 기억을 더듬어 보다 모르는 얼굴이라 결론을 내리곤 미련 없이 돌아서는 모습이었다.

“와, 봤어? 한주혁이야! 경영학과에 그 한주혁! 이게 무슨 일이야. 이 동네 놀러 온 날 딱 마주치네?”

“대박! 1년 사이 키가 더 큰 거 같다. 이제 190 넘는 거 아니야?”

“진짜 잘생겼다…. 컬럼비아대 교환학생 갔다더니 이제 온 건가? 하도 휴학을 징검다리로 해서 올해는 복학할 거란 얘긴 들었는데 진짜였네. 아무리 봐도 외모는 재벌 집 금수저인데, 진짜 정체가 뭐지?”

“같은 학교 애들도 모르는데 우리가 어떻게 알겠어. 과사에 들르려나? 빨리 안에 가 보자. 이거, 빨리 좀 계산해 주세요.”

“네, 잠시만요….”

여학생들은 굿즈 상자를 집어 들고 빨리 계산해달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예서는 바코드를 찍고 카페 로고가 새겨진 백을 꺼내는 등 두 손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인근의 타 학교 학생으로 짐작되는 여자애들은 톱스타라도 본 것처럼 호들갑을 떨며 교정 안으로 바삐 들어서기 시작했다. 캠퍼스 안으로 사라진 남자의 뒤를 헐레벌떡 쫓는 모습은 방송국 앞에서 연예인과 맞닥뜨린 팬들이 우르르 몰려가는 현장이나 다름없었다.

한주혁을 처음으로 본 날이었다. 정확히는 13년 만의 재회였지만, 예서의 뇌리에는 10분 전 눈에 담았던 한주혁의 잔상만이 부유하고 있었다.

“예서야, 나 비품 정리 다 했다! 손님 많았어? 이야, 눈 아직도 내리네? 올겨울 마지막 눈이겠지? 소복소복 엄청 예쁘게 쌓이겠다!”

함께 아르바이트하는 절친 송현주가 앞치마에 손을 문지르며 깡충깡충 뛰어오다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 야, 무슨 일 있었어?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

“응? 아, 아니. 이벤트 굿즈 사러 온 손님들이 있었는데, 그거 때문에 잠깐 정신이 없어서 그런가 봐.”

예서는 현주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운터 뒤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양 볼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는 잠깐 머뭇거리다 현주에게 운을 떼 보았다.

“현주야. 너 한주혁 선배 알지. 아까 그 선배가 이 앞에 지나쳐갔어.”

“뭐? 진짜? 복학한다더니 진짠가 보네. 이번에 복학하면 3학년인가. 실제로 보니까 어땠어? 사진하고 똑같아? 응?”

두 사람은 작년에 입학했기에 그 유명한 한주혁을 직접 본 적은 없었다. 그는 작년 봄 학기는 교환 학생, 가을 학기는 장기 배낭여행과 이런저런 개인 일로 휴학하여 학교에 온 적이 전무했다. 재작년 마지막 학기도 집안 사정으로 휴학한 바가 있어 프로 휴학러란 별명도 생겼다.

“응. 엄청 잘생겼더라. 키도 크고.”

“우와, 그럼 3월부터 보는 건가. 같은 수업 듣는 것도 많겠지? 잠깐만. 그러고 보니 예서, 너….”

현주는 눈을 크게 뜨고 설레발을 치다가 취조하듯 친구를 빤히 바라보았다.

“너 얼굴 빨개진 거 혹시 그 선배 때문이야? 설마, 첫눈에 반했어?”

“어? 아냐, 그런 거.”

“아니긴. 귓불까지 빨간데. 이거 봐, 이거 봐.”

현주가 놀리듯 귀를 살짝 잡아당기자 예서가 움찔, 어깨를 떨며 진저리를 쳤다.

“아니라니까. 잘생긴 것도 있는데… 완전히 낯설지가 않아. 꼭 어디서 만난 적 있는 것처럼.”

“뭐? 어디서?”

“모르겠어. 다른 선배들이 보여준 사진으로만 봤는데 이상하게 낯이 익어….”

예서의 말에 현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거 그런 거 아냐? 왜, 연예인들 길 가다 마주치면 분명 처음 보는 건데도 우리 쪽에서는 낯이 익고 친근하게 느껴지잖아. 저쪽은 전혀 아닌데 일반인들 입장에서는 너무 익숙한 얼굴이니까.”

“그건 좀… 그 정도로 그 선배 사진을 자주 본 것도 아닌걸.”

“그렇지? 그럼 결국 답은 하나네. 첫눈에 반했나 보다. 민예서 알고 보니 완전 외모지상주의였네?”

현주는 큭큭, 크게 소리 내며 웃었다.

“그런 거 아니라니까.”

“이해한다, 이해해. 하긴 남녀노소 저 얼굴에 안 반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 주혁 선배, 이태원 쪽엔 얼씬도 안 한다잖아. 이태원 일대 한번 뜨면 남자들도 아주 난리가… 흠흠.”

그때 안쪽에서 점주가 나오는 기척이 들렸다. 그제야 현주는 들뜬 목소리를 가라앉히고 직원 모드로 돌아갔다. 예서도 카운터에 서서 먼지를 털고 유리창을 닦는 등 다시 분주히 움직였다.

그렇게 의식 한구석으로 밀어놓은 한주혁과 다시 마주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

-어어, 엄마아! 살려주세요! 죽기 싫어!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폭풍 한가운데를 뚫고 귓전을 찢었다. 무너지는 바위 위에 아이들이 여럿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여덟 살의 예서는 이 악물고 양손에 바짝 힘을 주고 있었다. 두 발은 위쪽으로 기울어진 나뭇가지 사이에 끼워놓고, 두 손으로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누군가의 손목을 꽉 그러쥔 채였다. 어린 마음에도 절대 놓아서는 안 된다는 걸 아는 까닭이었다.

하지만 팔이 너무 아팠다. 힘이 점점 빠져나가며, 당장이라도 놓고 싶을 만큼 손가락이 저려 왔다. 손목을 잡힌 아이가 비탈 아래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시피 축 늘어져 있어서 더 그랬다.

-야, 눈 좀 떠 봐! 자면 어떡해!

예서는 귀청이 떨어져라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이들의 절규와 악귀처럼 몰아치는 세찬 비바람 소리에 묻혀 제 귀에도 잘 전달되지 않았다. 그때 사이렌 소리가 꿈결처럼 아득히 울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아이의 눈도 반짝 떠졌다. 고개를 치켜들자 둘의 시선이 부딪쳤다. 긴 속눈썹 아래 말갛고 큰 눈동자가 예서의 눈을 곧장 파고들었다.

순간, 바람의 방향이 바뀌며 빗물이 예서의 눈 속을 찔러왔다. 예서는 눈을 꼭 감으면서도 양쪽 손 중 어느 것도 놓치지 않으려고 악으로 버텼다. 다행히 사이렌 소리가 더 커지는가 싶더니 형광색 유니폼을 입은 남자들이 언덕 위로 쏜살같이 올라와 위태롭게 매달린 아이들부터 구조하기 시작했다.

-이제 손 놓아도 된다! 하이고, 누나가 동생 구하겠다고 이 고사리손으로 끝까지 붙잡고 있었구만.

중년 남자가 예서의 손 아래 매달린 사내아이를 단번에 땅으로 끌어 올렸다. 아이는 너무 놀랐는지 그대로 푹 쓰러져 버렸다. 가물가물, 의식은 남아 있어 가늘게 뜬 눈은 여전히 예서에게 붙박여 있었다. 검은 정장을 입은 어른들이 달려와 남자애를 단번에 안아 들었다.

난데없이 조난당한 아이들의 엄마, 아빠, 교사들까지 언덕 위로 몰려오며 현장은 삽시간에 안도와 염려의 아비규환이 되었다. 다행히 사상자는 없었지만 길을 앞장섰던 인솔 교사는 크게 다쳐 들것에 실려 갔으며, 작은 부상을 입은 아이들은 부모의 보호 아래 차량이 대기 중인 곳까지 이동했다. 그 중엔 예서의 쌍둥이 오빠 정우도 있었다.

짝, 비로 젖은 뺨에서 커다란 마찰이 일었다. 뒤늦게 달려온 엄마는 서럽게 우는 정우를 품에 안은 채 예서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정우 잘 챙기라고 했지! 저 아래 떨어져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는데 오빠는 나 몰라라, 엉뚱한 애나 구해 주고 앉아 있어?

-엄마, 난 오빠가 어디 있는지도 몰랐….

-시끄러워! 정우에게 무슨 일이라도 있었으면 너 절대 가만 안 뒀어! 계집애가 제 오빠보다 키도 크고 힘이 세면 잘 챙겨야 할 거 아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난데없이 뺨을 얻어맞은 아픔보다 서러움이 더 컸다. 정우는 나뭇가지를 잡고 단단히 매달려 있었던 편이라 다친 데 하나 없이 무사했다. 오히려 다칠 뻔한 건 그녀였다. 제 앞에서 떨어질 뻔했던 남자애를 한참 잡고 있느라 두 팔이 빠질 것처럼 아팠다.

손가락도 시큰거렸고, 버티던 중 나뭇가지에 긁혔는지 손목 안쪽으로 긴 생채기가 나 있었다. 찢긴 살 위로 피가 흘렀지만 모친은 정우를 달래느라 그녀 쪽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예서가 돌아서서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릴 때였다. 버스와 구급차 앞에 정신없이 모여 섰던 인파 틈으로 누군가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검은색 대형 세단의 차창 너머, 아까 구해줬던 그 아이가 머리를 기대고 앉아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

귀에 익은 또 다른 사이렌 소리에 예서의 눈이 번쩍 뜨였다. 본능적으로 휴대폰을 집어 들어 알람을 끄곤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6시,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이라 방 안은 어두웠다.

예서는 손등으로 눈을 비비고 잠시 멀거니 앉아 있었다. 갑자기 왜 그날 일이 꿈에 나타났을까. 10년도 더 된 옛날 일인데.

꿈에서 깨기 직전, 창 너머로 그녀를 지그시 응시하고 있던 사내아이가 떠올랐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정확한 생김새는 기억도 나지 않았다. 구조요원이 제 동생이라 착각했을 만큼, 키도 작고 왜소했던 아이였는데.

왜일까. 정확한 이목구비는 흐린 기억 속에 묻혀 버렸는데도, 참 예쁜 아이였다는 기억만은 또렷이 남아 있었다.

혹시 여자애 아니었을까? 남자애치고는 정말 너무 예뻤는데.

상념을 깨우듯 다시 사이렌이 요란하게 울기 시작했다. 예서는 두 번째 알람을 끄고 침대 아래로 발을 디뎠다. 간밤에 새벽 1시가 넘도록 글을 쓰느라 잠이 한참 부족했지만, 더 잘 여유가 없었다.

예서는 모친이 뭐라 하기 전에 재빨리 씻고 옷을 갈아입은 뒤 집 밖으로 나섰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서 상가건물 약국까지는 걸어서 5분도 되지 않는다. 모친이 출근하는 8시 반까지 약국 문을 열고 구석구석 깨끗이 청소한 다음, 숙취해소제와 간단한 상비약을 찾는 이른 아침 손님을 맞이하는 게 그녀의 역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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