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는 법이다만, 안 깨물어도 늘 아픈 손가락도 있는 법인기라.
외할머니는 그렇게 말씀하셨다.
-그니까 예서 니가 느그 엄마 좀 이해해 주면 좋겠다카이. 덜 챙긴다꼬 덜 사랑하고 그런 기가 아이거든, 하모.
핏줄이 다 같은 핏줄일 수 없는 것처럼, 외조모에겐 당신 딸이 손녀보다 더 중할 터였다. 그리고 모친에게는 쌍둥이 중 그녀가 아닌 다른 한쪽이 더 중요했다.
결국 그녀를 가장 중히 여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일까. 그 사람만 바라보고 그에게만 오롯이 매달리게 된 건. 단 한 사람, 누군가에게만은 가장 소중하고 중요한 존재가 되고 싶었다.
하지만 단지 그 바람 때문만은 아니었다. 가족에게서 얻지 못했던 애정, 충족되지 못했던 감정적인 교류와 정서적인 유대가 늘 절실했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를 사랑했다. 진심으로 좋아해서 마음을 표현했고, 번번이 거절당하고도 또 고백해 결국은 그와 연인이 되었다.
이해할 수 없는 일들, 혼자 상처받고 감내해야 했던 순간들이 적지 않았다. 분명 연인인데도 여전히 저 혼자만의 짝사랑인 것처럼 외롭고 서글펐던 적이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고립감은 약혼을 한 뒤로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바닥없는 외로움과 소외감은 앞으로도 쭉 계속될 것이다. 결혼을 해서도, 한 집에서 부부로 살아가는 동안에도 달라지는 건 없을 것 같았다. 확신이나 다를 바 없을 만큼 강렬한 예감이었다.
한동안 모든 게 괜찮은 줄 알았다. 외로움과 고립감, 납득할 수 없던 것들, 모두 그가 한국에 돌아오고 나서는 죄다 해갈됐다고 믿었다. 하지만 도저히 묵과할 수 없고, 납득도, 이해도 할 수 없는 새로운 문제까지 불거지며 이제는 완전히 지쳐 버렸다. 더는 버틸 여력이 없었다.
“아….”
엉망으로 구겨진 시트에서 몸을 일으키는 순간 억눌린 신음이 튀어나왔다. 찐득한 것이 허벅지 안쪽을 타고 흐르며, 다리 사이가 욱신거리는 동통이 엄습해왔다.
수없이 겪은 감각이지만 그날따라 더 쓰리고 아팠다. 늘 쾌감과 동반된 아픔이었지만 오늘만은 쾌락의 기억이 씻은 듯 흐려지고 있었다. 어쩌면, 마지막임을 홀로 다짐하며 안겼기에 그런지도 몰랐다.
실내는 적막하기 그지없었다. 늘 그렇듯, 격렬한 정사가 끝나고 눈을 떴을 때 침대 위에 남은 건 그녀밖에 없었다. 예서는 체액으로 얼룩진 다리를 간신히 가누어 욕실로 향했다.
거울 너머, 붉은 열꽃이 점점이 핀 알몸이 있었다. 턱이 조금 아파 고개를 위로 들자 희미한 손자국이 보였다. 키스를 피하려 뿌리치자, 그가 강제로 턱을 잡고 우악스럽게 혀를 밀어 넣었을 때 생겼을 것이다.
거울 속 제 눈가에 눈물이 보이자 곧바로 몸을 돌렸다. 보기 싫었다. 웬만한 방보다 더 넓은 욕실을 홀로 독차지하고, 장미 향 가득한 대리석 욕조에 오랫동안 몸을 담그는 동안에도 눈물은 멈추질 않았다. 잔뜩 부어오른 속살도 여전히 쓰라렸다.
두 시간이 넘도록 욕조에 있다가 머리를 말리고 옷을 갈아입었다. 옷과 가방을 챙기고, 다이어리 종이를 하나 찢어낸 다음 거실 테이블에서 그의 이니셜이 새겨진 만년필을 집어 들었다. 아주 오래전, 그녀가 실수로 떨어뜨려 금이 가게 한 펜은 그가 조부의 친구분으로부터 선물 받은 것이었다.
그때 펜을 빌려준다고 불쑥 내밀었을 때 받지 않았더라면. 그럼 그를 학교 밖에서 다시 만날 일은 없지 않았을까. 펜을 돌려주기 위해 만나지 않았다면 단둘이 밥을 먹을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럼 그저, 멀리서 동경하는 마음만으로 끝났을지도.
편지를 쓰는 데만도 한참이 걸렸다. 단 몇 문장을 쓰는 데 30분 가까이 소요되었다. 마무리한 편지를 가지런히 탁자에 올려둔 후, 긴 로비를 지나 현관 계단을 내려가는 다리가 후들거렸다.
조용한 오열과 거듭된 다짐이 진을 잔뜩 빼놓은 듯했다. 오랫동안 켜켜이 쌓였던 속내를 종이 위에 몇 번이나 곱씹으며 최대한 간결하고 담담하게 풀어내는 동안, 기어이 심신이 갉아 먹히고 뼛속까지 소모된 것 같았다.
그때 휴대폰이 진동했다. 액정 화면 위로 ‘주혁 선배’란 글자가 떠 있었다. 예서는 받지 않고 꼿꼿이 동그란 자갈밭을 걸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결국 빌라 앞 분수대 앞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인적 없는 빌라 단지는 고적하다 못해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야트막한 산의 능선을 등진 복층동 건물은 단 몇 가구만이 붙어 있었고,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전체적인 경관이 아름다웠다. 그중 가장 안쪽에 위치한 한주혁 소유의 독채를 포함한 모든 가구의 창이 멀티필름 블라인드로 가려져 있었다.
사생활이 철저히 보호되어 안에 사람이 있는지, 빈 세대인지조차 알 수 없다. 무수히 존재할 보안 CCTV는 값비싼 조형물과 조각 작품에 가려져 그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많은 이가 살고 싶어 하는 이 빌라 단지는 그 이름만으로도 부의 상징이었고 선망의 대상이었다. 외부 출입이 철저히 통제되는 벽 안쪽은 그들만의 작은 세계나 다름없었다.
-뭐? 약혼을 다시 생각해 보고 있다고? 너 미쳤어? 세상에, 복을 발로 차도 정도가 있지!
-도대체 왜? 나 같으면 오늘, 아니, 바로 몇 시간 전 만난 정략결혼이라도 당장에 할 텐데 넌 그것도 아니잖아. 무려 4년을 사귄 CC에다 약혼까지 했는데 갑자기?
-야, 그래. 선배가 좀 차갑고 무심하긴 하지. 아무리 그래도 여자 문제나 주사, 마약, 도박 같은 이슈가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이제 와서 약혼을 엎겠다는 거야. 너무 성급하게 결정하지 말고 대화를 좀 해 봐.
그 대화란 것을 해 보기 위해 어제 여기에 왔었다. 그리고 더한 상처를 받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의 입에서만은 나올 거라 상상도 못 했던 말이었다. 그 한마디는 곧바로 비수처럼 날아와 깊숙이 꽂혔다.
[어딨어? 전화는 왜 계속 안 받아.]
계속되던 진동이 멈추고 문자가 날아들었다. 답장이 없자 한참 뒤 통화음이 다시 울렸다. 예서는 분수대에서 몸을 일으켜 옥외 엘리베이터로 이 악물고 걸었다. 단지가 어찌나 넓은지 차 없이 바깥세상으로 나가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계속해서 전화가 울렸다. 애써 무시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서자마자 단지 후문에서 대기 중인 보안요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들 중 하나가 그녀에게 다가와 말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정중한 말씨였지만 그녀와 후문 사이를 가로막는 몸짓은 단호해 보였다. 아직 식도 올리지 않았건만 사모님이란 호칭이 자연스러웠다.
“한 본부장님께서 방금 연락을 해 오셨습니다. 사모님과 연락이 되지 않으니 혹시 112동에 무슨 일이 있는지 살피라고 하셨습니다만… 괜찮으신지요.”
“네. 보시는 것처럼… 괜찮습니다. 이만 가볼게요.”
그때 직원의 손에 들려 있던 휴대폰이 크게 울었다. 한주혁일 것 같았다. 그 예감대로, 직원은 통화를 종료하자마자 다시 그녀와 후문 앞을 막아섰다.
“사모님, 정말 죄송합니다. 괜찮으시다면 본부장님과 직접 통화로 아무 일 없다고 말씀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 후 목적지를 말씀해 주시면 저희가 업무 차량으로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아뇨, 말씀은 감사하지만 제가 알아서 가겠습니다.”
예서는 단호하게 덧붙였다.
“그리고 본부장님과 통화할 생각도 없습니다. 직원분들께서는 지시받은 대로 업무를 하고 계실 뿐이란 건 잘 알지만, 저는….”
본부장님의 아랫사람이 아니며, 이 시간 이후로 아무 사이도 아니게 될 겁니다.
차마 뒷말은 나오지 않아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죄송하다고 거듭 사과하며 황망히 후문을 빠져나왔다. 다행히 보안실에서도 더는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그녀는 결국 그런 존재였다. 늘 사랑받기 위해 애썼던 모친에겐 그다지 아프지 않은 손가락, 그리고 사랑하는 남자에게는 버겁고 피곤한 손가락. 다른 놈에게 넘기긴 아깝지만 온전히 가지기는 싫은 존재.
더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지 않았다. 누구에게든. 그래서 이제는 그렇게 살지 않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버거운 짐, 필요로 하지 않는 존재로서의 굴레를 죄다 벗어던지고 차라리 홀로 서고 싶었다.
무작정 단지를 나와 정처 없이 걷는 내내, 눈가가 자꾸만 젖어 들었다. 열기가 치솟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잠시 서서 눈을 감았다 떴을 때였다. 눈이 소리 없이 내려앉고 있었다. 4년 전, 한주혁을 처음 봤던 날이 떠올랐다. 눈송이 한가운데 꼿꼿하게 선 채, 그와 시선이 맞닿았던 순간이 어제 일처럼 선명했다.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모습이었다. 평생 잊을 수 없을 거라 믿었다. 동시에, 기억을 잃어서라도 뇌리에서 지워 버리고 싶은 단상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