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갈증
희미한 달빛이 이서윤의 하얀 얼굴을 따라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빛의 주인을 닮은 매끈한 선을 문도하는 그저 홀린 듯 바라봤다.
잠이 들었다가 문득 깼을 뿐이다. 그러나 이 광경이 믿기지 않아서 그저 멍하니 시선만 이서윤에게 흘려보낸다. 눈을 감으면 그녀가 안 보이니까.
아직도 문득문득 이 모든 게 환상 같을 때가 있다. 그는 여전히 이서윤의 옆집에서 피를 흘리며 죽어가고 있을 뿐이고, 이 모든 것은 뻔뻔한 그의 영혼이 만들어 낸 꿈이라고.
덜컥 겁이 나서 서둘러 조금 떨어져 자고 있던 이서윤에게 손을 뻗었다. 품 안에 가득 안고 그녀의 체취를 맡아야 비로소 살아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으응…….”
깨지 않도록 슬그머니 팔을 뻗었는데도 이서윤이 잠결에 웅얼거렸다. 그에게서 등 돌린 채 자고 있던 이서윤이 희미하게 팔을 움찔거린다.
그녀의 배에 팔을 두른 채 천천히 몸을 웅크렸다. 그렇게 그가 완전히 그녀에게 닿기 직전, 졸음기가 가득한 이서윤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안 돼……. 가만히 있어.”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덜컥 멈추었다. 뻗었던 팔도 서둘러 빼낸다. 이서윤은 꿈이라도 꾸는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그 말을 안 들을 수는 없다.
혹여, 그녀의 꿈속에서 자신이 또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다시 갈증이 시작된다. 그녀에게 닿지 못하면 매번 그의 귀에서는 악마 같은 속살거림이 그의 영혼을 충동질하곤 했다. 당장이라도 그녀를 쥐고, 품에 가두고, 그 하나만 바라보게 만들라는 파괴적인 음성이다.
이런 본능은 에스퍼의 능력에 따라 크기가 다르다고 했다. 그러니 하필이면 문도하에게 걸린 이서윤의 운명은 퍽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이를 악물며 문도하는 충동을 참아 냈다. 가끔 이럴 때면 차라리 두 팔을 자르고 싶어질 때가 있었다. 그러면 적어도 그녀를 상처 입히진 못할 테니까.
결국, 끓어오르는 갈증을 참지 못한 문도하가 일어나려는 참이었다. 가물가물 눈을 깜빡이며 이서윤이 잠에서 깨어났다.
“……문도하?”
“응.”
순한 낯을 뒤집어쓴 그가 얌전히 대답했다. 어정쩡하게 몸을 세우고 있는 그가 의아한지 이서윤이 몸을 돌려 시선을 보낸다. 아직 반쯤 꿈속을 여행 중인 얼굴이다.
“왜 안 자.”
그러면서 문도하에게 팔을 뻗었다. 홀린 듯 그녀의 손에 얼굴을 가져다 대자 거짓말처럼 갈증이 가라앉는다.
이서윤은 그대로 문도하를 품에 끌어당겼다. 커다란 그의 몸이 가녀린 그녀의 품에 들어가려면 한껏 구겨진 볼썽사나운 모습이 되어야 했다. 그러나 그따위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팠어?”
그녀가 묻는 건 또 영혼에 통증이 있냐는 점이겠지. 고민을 거듭해도 그녀가 걱정하는 통증과는 사뭇 궤가 다른 일이었다. 이건 그냥 끊임없는 그의 욕심에 관한 것이었으니까.
“응.”
그렇지만 문도하는 그런 척 한껏 그녀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욕심껏 팔을 뻗어 이서윤을 그러안기도 했다. 거의 평생 나약한 모습을 외부로 내보이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온 그였다. 하지만 이서윤의 앞에만 서면 그는 언제나 한없이 나약한 인간이었다.
그의 거짓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서윤은 그렇게 다시 잠들 때까지 그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 *
“오늘은 몇 시에 퇴근이지?”
“음……. 좀 늦을 것 같은데. 다음 주 물건 발주목록 정리를 좀 해야 해. 아직 처음이라 어렵네.”
머리를 빗어 내리던 이서윤이 거울 속의 그와 눈을 마주치며 대답했다. 생글 웃는 눈매에 시선이 박힌다. 괜히 그녀가 집요한 시선을 눈치챌까 봐 문도하는 슬쩍 그녀의 손을 쥐었다. 하필 빗을 쥐고 있던 손이라 이서윤의 눈에 의문이 서린다.
“내가 해 줄게.”
“그래.”
어느덧 허리를 넘길 때까지 자란 긴 머리가 이서윤의 등에서 찰랑거렸다. 조심스럽게 빗을 쥔 문도하가 슬그머니 고운 머리칼을 빗어 내렸다. 매일 같이 빗을 사수한 덕에 썩 능숙한 손놀림이다.
폭포수같이 흐드러진 머리칼을 아프지 않도록 슬쩍 쥐면서 그는 일부러 느릿느릿 움직였다. 조금이라도 이 시간을 더 만끽하고 싶었다. 최근의 서윤은 너무 바빴으니까.
“내가 좀 도와줄까?”
“아니. 일단 혼자 해 볼래. 필요한 게 생기면 얘기할게.”
“그래. ……너무 무리는 하지 말고.”
“응.”
이서윤은 작은 카페를 하나 맡아서 운영하고 있었다.
어느 날 그가 능력을 써도 바로 고통받지 않을 정도가 되자 이서윤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일을 하고 싶다고. 일단 고개를 끄덕였지만, 문도하는 초조한 감정을 숨기려 애써야 했다.
심정 같아서는 고운 손에 쓸모없는 일거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점점 집에 가만히 있는 게 퍽 지겨운 듯 굴었다. 그러다 어느 날 불쑥 문도하의 곁마저 지겹다고 떠날까 봐 그것이 두려웠다.
다행히도 명민한 그녀는 적절한 타협점을 찾아 주었다. 퍽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그녀는 문도하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카페를 하나 차려주면 열심히 수익을 내서 조금씩 갚아 보겠다고. 언제 문도하에게 그녀가 필요할지 모르니 필요하다면 마음껏 휴가를 낼 수 있어야 한다는 의견도 함께.
카페에서 그냥 일하는 것이 아니라 운영을 하는 건 퍽 다행인 일이었다. 적어도 이서윤이나 그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아진다는 소리니까. 일전과 같이 손님이라는 것들이 그녀에게 함부로 구는 일은 미리 방지할 수 있으리라.
다만 여전히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힘든 사고방식이었다. 그의 재산은 곧 이서윤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서윤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퍽 어려운 듯 굴었고, 문도하는 그 감정을 존중했다.
카페만큼은 그녀의 명의로 만들어주고 싶었으나 면밀하게 서류를 검사당하는 바람에 수포가 되었다. 오픈한 지 이제 겨우 두어 달밖에 되지 않았지만, 그녀는 참으로 꼼꼼하게 상환계획과 장부를 그에게 보여 주곤 했다.
“카페 일은……, 재밌어?”
“응. 아르바이트할 때도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잘 맞는 것 같아.”
“……다행이네.”
다정하게 대답하면서도 문도하는 자꾸만 갈증을 느꼈다. 요즘 들어 조금씩 심화되고 있는 갈증이다. 바로 옆에 이서윤이 있는데도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 가야겠다.”
“그래.”
자연스럽게 그녀를 따라나서면서 그는 차 열쇠를 챙겼다. 녹슨 시야는 급속도로 좋아지고 있었다. 덕분에 이서윤이 움직이는 곳마다 데려다주겠다는 핑계를 댈 수 있었다.
“참, 새벽에.”
“……응.”
새벽녘 그를 덮친 심각한 갈증을 떠올린 문도하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자신이 아직도 이런 어두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면 이서윤이 도망갈지도 모른다. 잘 숨기고, 누르고, 될 수 있으면 없애야 했다. 그래야 그녀가 곁을 허락해 줄 테니까.
“지금은 괜찮아?”
“응.”
다행스럽게도 이서윤은 이상한 걸 느끼진 못했는지 그 부분을 추궁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볼 뿐. 특히 그의 가슴께를 바라보는 눈길이 사뭇 심각했다.
“흐음. 이건 잘 안 없어지네.”
“아직도, 있어?”
“응.”
이서윤의 눈에는 문도하의 영혼에 간 균열이 선명하게 보인다고 했다. 그가 자신을 죽이고 이서윤에게 손을 내민 이후부터 계속.
영혼이 끔찍한 몰골이라는 소리를 듣고도 문도하는 그저 웃음을 숨기기 급급했다. 그 사실이 무척이나 기꺼웠기 때문이다. 이토록 그녀가 필요하다는 걸 의도하지 않아도 계속 보여 줄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진지하게 대답하는 그녀의 얼굴에 수심이 어린다.
온몸에 빼곡하던 영혼의 아픔은 어느덧 많이 사라지고 가슴에 남은 커다란 균열만 눈에 띈다고 했다. 영혼을 억지로 부술 수 없기에 문도하는 양가적 감정에 시달려야 했다. 계속 이대로 이서윤이 자신을 걱정해 줬으면 하는 마음과 저 얼굴에서 어둠을 걷어 주고 싶다는 마음이 계속 교차한다.
“가자. 오늘은 조금 일찍 나서고 싶다고 했잖아.”
“그러자.”
그는 일단 이 상황에서 도망치는 걸 택했다. 이서윤이 지금 무엇을 자책하는지는 똑똑히 알고 있었다. 아마 좀 더 강도 높은 가이딩을 해주지 못해 죄책감을 느끼는 것일 테지.
이 또한 문도하에게는 의문이었다. 그가 한 짓을 생각한다면 설령 이서윤이 평생 손만 잡는 것으로 만족하라 한들 그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텐데 말이다.
그가 앞서 걷자 이서윤은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아 쥐었다. 그 당연하다는 듯한 행동으로 문도하는 큰 위안을 느꼈다.
그러니, 그는 언제까지고 얌전히 목줄을 찬 채 기다릴 수 있었다.
* *
평일 오후라 가게 안은 한적했다. 손님 대신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헤아리던 서윤은 옆에 불쑥 내밀어지는 커피잔을 보곤 웃음을 지었다.
“고마워.”
“잘돼 가?”
바지로 된 유니폼을 멋들어지게 차려입은 강하나가 서윤이 앉아 있던 테이블의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가슴에 달린 명찰에는 매니저라는 직함이 달려 있었다.
언제 문도하의 곁으로 달려가야 할지 모르니 가게 운영을 전반적으로 도와줄 사람이 필요했다. 그 순간 서윤이 가장 먼저 떠올린 건 강하나였다. 그녀와 같이 아르바이트에 이골이 났으면서도 믿을 수 있는 사람. 그녀가 사라졌을 때 유일하게 찾아 헤매 준 사람.
“응. ……아직은 적자이긴 한데. 괜찮아지겠지.”
“그러게. 내 평생직장이 되어야 하는데. 분발해 줘야 해, 사장님.”
“사장님 소리 하지 말래도.”
일부러 놀리듯 말하는 강하나는 처음엔 서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런 중책을 고작 친분으로 맡을 수 없다는 아주 건실한 이유였다. 고민하던 서윤은 문도하와의 상의 끝에 자신이 가이드인 걸 강하나에게 알렸다.
맨 처음 만날 당시처럼 문도하가 서윤이 가이드임을 알리는 걸 싫어할 것이라 여겼기에 퍽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는 선선히 그녀의 말에 동의해 주었다.
그녀가 문도하의 가이드라는 소리를 하자 강하나는 무척이나 놀랐다. 한참을 이 굉장한 소식에 놀라워하던 그녀는 묘한 깨달음을 얻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이상하던 문도하의 태도와 그간 서윤의 고생이 이제야 납득이 간다는 듯이.
이런 고백을 할 정도로 그녀를 믿는다는 소리에 강하나는 결국 카페의 매니저가 되어 주었다. 마침 일자리를 찾고 있었으니 서로에게 잘된 일이었다.
“날씨 좋다.”
“그러게.”
둘은 한참 햇살 아래에서 두런두런 수다를 떨었다. 평일 오전이라 한적하다. 몬스터 사태가 어느 정도 가라앉은 후로는 소비심리도 퍽 좋아져서 오후에는 제법 바쁘기도 했다. 그러니 지금은 이 한가로움을 듬뿍 즐길 작정이었다.
이래저래 예전과는 너무 다른 여유였다. 아직 마음에는 삼촌이라는 오래된 가시가 하나 박혀 있긴 하지만 버틸 만했다.
문도하의 가이드로 주목받은 것에 비해 그녀의 얼굴은 대외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다. 그가 세심하게 서윤을 보호해 준 덕분이었다. 소소한 삶을 바란다는 그녀의 소망은 이제는 이뤄지기 힘든 것이 되었으나, 문도하는 이를 최대한 존중해 주고 싶어 했다.
그러니 운이 좋다면 이대로 죽을 때까지 삼촌의 소식은 듣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먼저 나서서 삼촌을 찾고 싶지는 않았다. 어릴 적 그녀를 그렇게 학대한 것에 대해 사과조차 받고 싶지 않았다. 용서할 이유도 마음도 없으니 그저 이제는 삼촌이 서윤의 인생에 없는 사람이기를 바랐다. 이대로 바닷가에 쓸려 다니는 자갈처럼 닳아서 없어지기를.
이따금 예전처럼 사립 탐정 같은 사람이 또 튀어나올까 봐 무섭기도 했다. 그러나 문도하가 그녀의 주변에는 늘 경호 인력이 있을 것이라 얘기해 주어서 겨우 안온하게 보낼 수 있었다. 예전에는 속박으로만 느껴졌을 것들이 이제는 든든한 보호막처럼 느껴진다는 게 퍽 아이러니하다.
“오늘 발주목록 같이 정리하자고 했지?”
“응. 그런데 혹시 괜찮으면 그거 내일 해도 될까?”
“난 괜찮아.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조심스러운 강하나의 질문에 서윤은 대번 고민에 빠진 얼굴이 되었다. 무슨 일이 있기도 했고, 또 없기도 했으니까.
얼마 전부터 서윤은 고민에 빠졌다. 다름 아닌 가이딩 때문에.
이제 문도하는 서윤이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도 종종 그녀를 끌어안곤 했다. 이따금 무척 조급한 얼굴로 그녀를 잡아당기며 품에 가두는데, 뭐가 그를 자극하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사무친다는 듯 문도하가 그녀를 끌어안는 타이밍에는 영 일관성이 없었다.
서윤이 괜히 분주하게 돌아다니느라 눈을 마주쳐 주지 않으면 제 몫이라 주장하며 바쁜 그녀의 손을 일부러 빼앗아 가기도 했다. 기가 막혀 그를 쳐다보면 살갑게 웃으며 입맞춤을 한다.
퇴근하고 돌아온 뒤에는 말없이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는다. 아직도 불안해하는 게 여간 티 나는 것이 아니다.
그래도 퍽 늘어난 스킨십 덕분에 그의 상태는 빠르게 안정되고 있었다. 가슴에 남은 큰 균열은 영 차도가 없었지만 말이다. 이대로 사라지기는 하는 건지, 어쩌면 영영 후유증처럼 남는 건 아닌지 걱정이다.
그녀가 가진 고민은 결국 하나로 귀결되었다. 가이딩을 좀 더 제대로 해 줘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거라면 이리도 불안하게 제 곁을 맴도는 문도하도, 그 가슴에 아프게 벌어진 자국도 치유할 수 있지 않을까.
“고민이 있긴 해.”
“그래?”
느리지만 그래도 착실하게 서윤은 앞으로 걷고 있었다. 자신의 운명이 가이드라는 걸 받아들인 지금은 예전보다는 훨씬 편안하게 인생을 걷고 있는 셈이다.
진지하게 그녀의 말을 경청하는 강하나를 보면서 서윤은 흐린 미소를 지었다. 새벽녘의 애처로운 문도하의 잔상이 오늘따라 진하게 그녀를 따라다녔다.
“그런데, 곧 해결될 거야.”
“그래. 서윤이 넌 강하니까.”
애매하기 짝이 없는 고민 상담에도 강하나는 그저 같은 미소를 돌려주었다. 그 시선에 담긴 따스한 온기에 흐릿하기만 하던 서윤의 미소도 점점 힘을 지니며 진해진다.
“고마워.”
가이딩을 하며 휘둘린 경험은 그녀에게 저항감을 심어주었다. 하지만 타인의 영혼을 보듬는 일을 이해하고 나니 그걸 정면으로 바라볼 용기가 생겼다.
둘의 가슴을 가로지르는 이 커다란 상처들을 이제는 보듬어 줄 때도 된 것 같았다.
* *
“오늘……, 무슨 일 있었어?”
“응? 아니, 아무 일도.”
“…….”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둘러대는 이서윤의 태도에 문도하는 입매를 굳혔다. 아무 일도 없다고 하기엔 이서윤은 분명 무척 허둥대고 있었으니까.
본래 말한 시간보다 그녀는 일찍 퇴근했다. 서둘러 그런 이서윤을 데리러 간 문도하가 일이 일찍 끝난 것이냐 물었으나 그건 아니라는 대답만 들었을 뿐이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혹 컨디션이 좋지 않은 건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집에 와서는 별다른 말도 없이 쌩하니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보통 때라면 온종일 무슨 일이 있었는지 조금쯤 대화를 나누곤 했었기에 차이가 두드러졌다. 매번 문도하에게 오늘은 아프지 않았는지 물어봐 주었는데, 그 또한 없었다.
씻고 나온 그녀를 붙잡고 재차 이상한 부분을 물었으나 그녀는 그저 아무 일도 없다는 소리만 할 뿐이다.
이서윤이 무언가를 분명 숨기고 있었다.
그 사실을 상기하자 심장에서 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서둘러 등 돌려 그 모습을 숨기면서 문도하는 자연스럽게 욕실로 향했다. 차가운 물을 오래도록 맞으면서 고민한다. 이서윤에게 갑작스럽게 저런 혼란을 심어 줄 만한 일이 뭐가 있을까.
오늘 유난히 무례하게 구는 손님이 있었나. 혹 가게 재정에 대해 쓸데없는 걱정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매니저를 맡겨 둔 강하나와 의견 충돌이 있던 건 아닌가. 이런저런 가정이 지나갔다.
혹시, 자신 때문일까.
무언지는 몰라도 이서윤이 자신 때문에 저런 혼란스러움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니 손끝이 유난히 차갑다. 머리로 쏟아지는 차가운 물이 문제가 아니었다. 그의 심장에서 시작된 한기가 몸을 마르게 하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추스르고 욕실 밖으로 나왔다. 원인도 알기 전에 이렇게 얼어버리는 건 무척 멍청한 짓이었다. 일단 이서윤을 보러 가야 했다.
그러나 문도하는 마치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소파에 앉아 자신을 기다리는 그녀를 보고 덜컥 걸음을 멈췄다. 옷을 갖춰 입고 기세 좋게 이서윤을 찾으러 나온 걸음은 금방 무색해졌다.
“왔어? ……오래 씻네.”
“…….”
손끝이 하얗게 되도록 제 손을 모아 쥔 이서윤이 그를 바라보았다. 긴장으로 바짝 얼어 있는 그 얼굴을 보니 입술이 굳었다.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한 문도하는 홀린 듯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옆에 앉으라는 듯 소파에 손을 톡톡 두드리는 그녀와 고운 손을 번갈아 본다. 그리곤 무작정 그녀의 발치에 털썩 앉았다.
“그렇게 앉지 말라니까.”
부담스럽고 또 미안하니 이서윤은 그녀의 발치보다는 옆에 앉아 달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그러나 사실 그는 이 자세가 무척 좋았다. 이렇게 앉아 그녀를 올려다보노라면 어느새 따뜻한 손길이 그의 어깨를 도닥여 주었기 때문이다. 운이 좋다면 그녀의 무릎에 얼굴을 묻은 채 마음껏 그 온기를 갈구할 수도 있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거지?”
“그게…….”
말끝을 흐리는 그녀를 보니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었다. 훔쳐본 이서윤의 감정은 확연하게 당황스러움을 내포하고 있었다. 분명 뭔가 뜻하지 않은 일이 생긴 게 분명하다.
“내가, 또, 잘못했어?”
부디 돌이킬 수 있는 일이기를.
“아니야, 그런 거.”
다행스럽게도 그의 얼굴을 슬며시 감싼 그녀는 문도하의 우려가 틀렸음을 선언해 주었다. 그러자 이번엔 혼란이 그를 덮친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런 게 아니고, 그냥, ……어색해서 그랬어.”
“뭐가?”
다급하게 재촉하자 시선을 슬쩍 피했던 이서윤이 무척이나 곤란하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평소의 환한 미소와는 조금 다른 표정이다.
“……가이딩을, 좀 더 하는 편이 좋을 것 같아서.”
곧이어 떨어지는 결론에 문도하는 저도 모르게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생각하기에도 퍽 멍청한 음성이 튀어 나간다.
“어?”
“가이딩을, 다음 단계로 나아가야겠다고.”
“왜?”
순수한 의문이었다. 왜 갑자기 이서윤이 이런 얘기를 꺼내게 된 걸까. 분명 그녀의 마음엔 항상 깊은 가이딩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는데.
생각을 거듭하던 문도하가 돌연 얼굴을 사납게 굳힌다.
“혹시, 어떤 새끼가 네게 그따위 헛소리를 한 거라면…….”
맨 처음 이서윤의 존재가 알려진 후에 문도하는 참으로 많은 개소리가 귀에 흘러들어 오는 걸 감내해야 했다.
이서윤의 등장은 문도하를 떨어지지 않는 총탄처럼 마구잡이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과도 같았다. 당연하게도 이서윤의 신변에 많은 시선이 쏠렸다.
그녀의 안전을 국가적 차원에서 ‘관리’해야 한다는 소리는 그나마 신사적인 제안이었다. 이서윤이라는 개인에 대해 거주의 자유를 박탈하는 입법을 추진하자는 소리도 등장했다. 혹시 모를 암살의 위협을 막고자 감옥과도 다름없는 곳에 상주시키자는 의견도 심심찮게 나왔다.
물론 이제는 모두 사라진 목소리들이다. 서윤의 귀에 들어가는 일조차 없도록 문도하가 자비 없이 굴었기에.
그러나 그러한 일이 인류를 위한 것이라 믿는 정신병자들은 박멸해도 끊임없이 나타나는 법이다. 그러니 그중 하나가 성공적으로 이서윤에게 접근해 그녀를 매도했을지도 모른다. 조금 더 효율적으로 행동하라는 식으로.
매서운 분노가 문도하의 눈동자에서 타올랐다. 그의 눈가를 손끝으로 쓸어 주던 이서윤이 다시 흐릿한 미소를 보여 주었다. 안심하라는 듯.
“아니. 아무도 내게 그런 걸 강요하진 않았어. 오늘은 손님도 얼마 없었는걸.”
“그럼 왜 갑자기…….”
“갑자기는 아니야. 계속 생각은 하고 있었어.”
“…….”
서서히 이서윤의 안을 맴돌던 혼란과 불안이 옅어졌다. 지그시 눈을 마주쳐 오는 이서윤의 눈동자는 단단했다. 그 어느 상황에서도 제 발로 걷는 걸 포기하지 않았던 강한 그녀처럼.
“……무리할 필요 없어.”
주저하면서도 문도하는 그녀를 걱정했다. 아침에도 가슴의 균열을 우려하더니 내내 신경 쓰고 있던 걸까. 하지만 그는 정말 괜찮았다. 이따금 파고드는 고통이야 어차피 오래된 나쁜 습관처럼 떼려야 뗄 수 없는 감각이었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오히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이서윤이 그와 함께하는 걸 후회하기라도 한다면 그걸 더 견디지 못할 듯싶었다. 그러니 지금 상태가 차라리 낫다. 무언가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치밀어서 문도하는 마른침을 삼키며 이서윤의 쏟아지는 시선을 맞이했다.
다만 그녀는 좀 전보다 더 단단해진 의지로 말할 뿐이다.
“무리하는 건 아니야. 시간이 좀 필요해서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고, 이제 시기가 된 것 같아.”
“…….”
“내가 그러고 싶어.”
덤덤하게 선언하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번에도 쿵 심장이 떨어져 내렸다. 다만 아까와는 사뭇 다른 감각이었다.
“정말……?”
참으로 볼품없게도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 가슴이 터질 것 같은 감각을 대체 무어라 형언해야 하는지 문도하는 알 수 없었다. 기대를 억지로 죽이고 있던 터라 더욱더 간절했다.
단순히 가이딩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서윤이, 그 모든 일을 딛고 일어서 그에게 손을 뻗어 주었다는 점이 중요했다.
마침내 그들이 함께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어서.
“응. 네가 그만 아팠으면 좋겠어.”
그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슬며시 눈을 접어 웃는 이서윤과 하염없이 눈을 마주친다. 늘 흐릿하게 미소 짓던 그녀가 환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사실 하나로 눈이 멀어 버릴 것만 같다. 구원이 있다면 바로 이 순간이 아닐까.
홀린 듯 그녀를 올려다만 보던 문도하가 서서히 움직였다. 이윽고 입술이 맞닿았다. 촉촉한 소리가 귓바퀴에 오래도록 머무른다. 무척 따듯한 감각이었다.
“네가 또 무서워할까 봐, ……무서워.”
서로의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문도하는 흡사 고해성사하듯 속삭였다. 그 한마디에 담긴 깊은 감정을 매만지듯 서윤은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내 몸이 내 몸이 아닌 것 같던 두려움과 수치는 여전히 그녀의 기억 속에 똑똑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다를 것이라는 기대도 분명히 있다.
“날 무섭게 할 거야?”
“아니.”
그녀의 나직한 질문을 문도하는 바로 부정한다. 절대 그러지 않겠다는 의지가 시선을 타고 건너왔다. 지금 이 순간 참으로 깊게도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래. 믿어.”
기이할 정도로 충족된 기분이었다. 늘 홀로 추위에 떨던 영혼을 누군가가 따스하게 감싸주는 기분이기도 했다. 알 수 없는 고양감에 그들은 한참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지척에 닿는 시선과 체온이 점점 달아올랐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좀 전의 산뜻한 접촉과는 다르게 처음부터 농밀했다. 그의 뜨거운 혀가 서윤의 입술 사이를 조심스럽게 파고들었다. 어느새 단단하게 목 뒤를 받쳐 준 커다란 손에서는 뜨거울 정도의 정염이 느껴졌다.
느릿한 움직임은 신중하게 서윤을 달랬다. 입술을 애태우며 간지럽히더니 어느덧 불쑥 들어와 입천장의 단단한 부분을 훑기도 했다. 점막이 서로 닿는 감각이 이렇게도 자극적일 줄은, 서윤은 꿈에도 몰랐다.
예상보다도 더 살갗을 간지럽히는 감각이 잊고 있던 두려움을 조금씩 자극하기도 했다. 그게 못내 두려워 손아귀에 힘을 주면 문도하가 슬쩍 물러나며 그녀의 목덜미를 뭉근하게 문질러 주었다.
그 감각이 포근해 또 몸에 힘이 탁 풀린다. 슬쩍 더 벌어진 입 사이로 들어온 혀가 그녀에게 뜨겁게 닿았다. 입으로 쾌감을 받아 마시는 감각에 왜 한참이나 멀리 떨어진 발끝이 오므라드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아…….”
“이서윤.”
“응…….”
“이서윤.”
슬쩍 허리를 두른 그의 팔이 서윤을 잡아당겼다. 막 씻고 나와 촉촉한 몸이 서로에게 들러붙었다. 다시 서로의 숨결로 살아간다는 듯 입술이 맞붙었다. 그의 단단한 가슴에 한없이 파묻힐 것 같았다.
조금씩 기울어지는 몸을 의식할 겨를도 없었다. 한참 입에 감각을 집중하던 서윤은 어느새 등 뒤로 소파가 푹신하게 닿는 걸 느꼈다. 어찌나 세심한 손동작으로 그녀를 움직이는지, 등이 한껏 파묻히고 나서야 자신이 반쯤 누워 있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툭툭 잠옷의 단추가 하나둘 풀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게 못내 야살스러워 고개를 틀자 이번엔 그녀의 긴 목에 뜨거운 입술이 닿았다. 촉촉한 소리가 단추가 풀리는 소리와 합심해 그녀의 귓가를 희롱한다.
“으…….”
“추워?”
“모르겠어.”
맨살에 닿는 공기는 분명 쌀쌀했다. 하지만 그 위를 맴도는 문도하의 뜨거운 손길을 생각하면 추운 것 같지는 않았다. 고개를 흔들며 애매한 답을 하자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었던 문도하가 몸을 일으켰다.
그 순간 시야가 불쑥 위로 솟았다.
“아……!”
“침대로 가자.”
힘든 기색도 없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린 문도하가 다시금 입 맞춰 왔다. 서윤이 얼결에 그의 목에 두 팔을 둘러 매달린다. 안심하라는 듯 서윤을 든든하게 받쳐 든 그가 막힘없이 움직였다.
그들이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등 뒤에서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침대에서는 풀썩 소리가 났다. 매일 같이 잠드는 공간이지만 이렇게 낯설 수가 없었다. 서윤이 길 잃은 시선을 보낼 때마다 문도하는 괜찮다는 소리를 그녀의 귓가에 흘려주었다.
낮은 목소리가 고막에 닿으며 산산이 부서질 때마다 서윤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어색함과 두려움이 치밀 때마다 그녀는 참지 않았다. 마음껏 손을 뻗어 그의 팔과 목을 잡아당겼다. 그러면 문도하는 반드시 그녀에게 다가와 자상한 입맞춤을 이리저리 내려 주었다. 미간에, 볼에, 입술 끝에.
“아직 추워?”
“아니…….”
제 상의를 거침없이 벗어 던진 문도하가 자상하게 서윤의 머리를 쓸어 올리며 물었다. 정염 가득한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애정 또한 담겨 있다. 그 목소리 덕분에 서윤은 더는 춥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가 다시 팔을 뻗자 순순히 아래로 내려간 문도하가 계속해서 작은 입맞춤을 목덜미에 남겼다. 아까 슬쩍 풀렸던 단추 사이로 그녀의 빗장뼈가 한껏 드러나 있다. 도드라진 뼈에 입술이 슬쩍슬쩍 흔적을 남겼다.
가슴골 사이에서 어느덧 그의 높은 코가 노닐었다. 남아 있는 단추를 입으로 툭툭 풀어헤치며 문도하는 거침없이 움직였다. 활짝 열린 잠옷 사이로 서윤의 하얀 살갗이 드러났다. 배꼽 근처까지 내려간 입술의 행방이 그녀는 사뭇 신경 쓰인다.
“으응…….”
“이서윤.”
그는 이따금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다는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럴 때면 서윤은 힘없이 팔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헤집었다. 어느새 잠옷 상의는 사라졌지만 추운 감각은 없었다.
풀썩 천 자락 스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바지도 자취를 감추었다. 하나 남은 속옷이 아슬하게 골반에 걸쳐 있었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는 기색 하나 없이 이번엔 그녀의 갈비뼈 사이를 헤집었다.
“아읏!”
“아파?”
“으응…….”
부정도 긍정도 아닌 소리가 입에서 흘러나간다. 그가 슬쩍 이를 세워 긁는 곳에서는 자꾸만 이상한 감각이 톡톡 튀었다. 단단한 이가 스치고 지난 자리에 그의 높은 콧대가 살짝 닿으면 그게 또 그리도 자극적이었다.
너무 낯설어서 도망치듯 허리를 뒤틀었다. 문도하는 순순히 그녀가 몸을 움직이게는 해주었으나, 하던 일을 멈춰 주지는 않았다.
“예뻐.”
그의 눈은 몽롱하게 풀려 있었다. 한 꺼풀 가려지지도, 수치로 얼룩지지도 않은 그녀의 감정이 훤히 보인 까닭이다. 형언할 수 없는 황홀한 색채가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그의 손길에, 입맞춤에 선연하게 반응하는 그녀에게 그저 예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는 게 한탄스러울 정도였다.
“이서윤, 정말 예뻐.”
“아…….”
두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얇은 허리가 금방 쏙 잡혀 들어 올려진다. 몸이 휘도록 들어 올린 그녀의 골반에 다시 이를 세웠다. 베갯잇을 꼭 쥔 손마디가 애처로웠다. 본능에 휩쓸리지 않도록 노력하면서 문도하는 신중하게 그녀의 감정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조금씩 치밀던 그녀의 두려움은 아스라이 멀어진다.
그걸 확인하고 나서야 그는 잇새로 그녀의 속옷을 물었다. 슬쩍 아래로 내려가자 서윤의 허리가 움찔거리는 감각이 손바닥으로 느껴진다. 조금 당황한 얼굴에는 미약한 기대가 서려 있었다. 그게 못내 사랑스러워서 그는 그녀의 속옷을 완전히 벗겨 내었다.
“너무, 쳐다보지 마……!”
“하지만 예쁜걸.”
촉촉하게 이슬을 머금은 그녀의 중심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부끄러웠는지 서윤이 팔을 뻗어 그의 머리칼을 덧없이 쓸어내린다. 귓가에 그녀의 조막만 한 손이 스칠 때마다 문도하는 그저 심장이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조금 더 천천히 해야 했다. 당장이라도 매섭게 움직이고 싶어 하는 본능을 추슬렀다. 그녀가 수월하게 길을 열 수 있도록 그는 오금을 쥐고 끈질기게 애무를 이어나갔다. 욕정을 주체할 수 없을 정도가 되면 그제야 그녀의 허벅지를 한 움큼 입에 물었다.
아프지 않을 정도로 턱에 힘을 주며 조금씩 허벅지 안쪽에 그의 흔적을 남겼다. 빨갛게 자리 잡은 수많은 흔적이 무척 큰 만족감을 선사했다.
만류하듯 그를 제지하는 서윤의 팔에서는 점점 힘이 빠졌다. 그가 허벅지를 혀로 핥을 때마다 툭툭 터져 나오는 쾌감의 색채가 꼭 그의 정신을 나가게 할 것만 같았다.
“흐읏!”
그러다가 허벅지의 한 곳을 슬쩍 물자 서윤에게선 미처 막지 못한 신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 순수한 반응에 문도하는 허리가 움찔거릴 정도로 큰 자극을 느꼈다. 그녀가 그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이 못내 실감 나는 순간이었다.
“으응, 기분이, 이상해……!”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문도하는 홀린 듯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기대로 움찔거리며 그를 유혹하던 중심부를 향해서.
“아……!”
잘 다물린 꽃잎 사이로 감히 혀를 쿡 찔러 넣었다. 왈칵 쏟아져 나오는 물이 서윤이 느낀 자극을 단적으로 보여 주었다. 작게 솟아오른 열매를 입에 넣어 뭉근하게 빨아올리자 서윤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아! 안 돼, 으응! 하지, 마……!”
“하지 마……?”
그 소리에 순순히 고개를 들어 올린 문도하가 몽롱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리 사이에서 솟은 문도하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친 서윤은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가 저도 모르는 사이 마구 손으로 헤집은 덕에 문도하의 단정한 머리칼이 엉망이 되어있었다.
그렇다고 대답만 하면 바로 물러날 듯 묻는 문도하를 보면서, 서윤은 왜인지 말문이 턱 막혔다.
그 의미를 잘 알아들었다는 듯 문도하는 희미한 미소를 지은 채 다시 그녀의 중심부를 파고들었다.
“아응!”
다시금 뭉근한 쾌감이 아래쪽을 달궜다. 허리 근육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감각이 들었다. 베개를 부여잡은 손에는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천장의 하얀 벽지에 이상하게 천둥이 치고 지나간 듯 얼룩이 보였다.
그녀가 달뜬 숨을 한참이나 내쉬고 나서야 문도하는 겨우 떨어졌다. 이제 시작인 걸 빤히 아는데도 서윤은 무척이나 기진맥진했다. 전력으로 달리기를 한 듯 몽롱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도 예전처럼 정신이 어딘가에 저당 잡혀 휘둘리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하…….”
아래에선 깊은 정염이 담긴 숨을 내쉬며 문도하가 움직였다. 퉁 튕겨 올라온 그의 거대한 성기가 기대를 숨기지 못한 채 꿈틀거리는 게 눈에 들어온다.
서윤 또한 이 다음을 못내 기대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괜찮아?”
“응…….”
두 손을 뻗어 서윤의 얼굴을 쥔 문도하가 신중하게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칼이 붙어 있는 걸 세심하게도 떼어내 주었다. 달뜬 얼굴을 한 서윤의 얼굴이 새겨지듯 그의 눈에 담겼다.
“이서윤.”
“……문도하.”
자꾸만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를 놀리듯, 서윤이 웃음기 머금은 목소리로 그를 마주 불러 보았다. 그 반응에 한 방 먹었다는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던 그가 더없이 환한 미소를 돌려주었다.
홀린 듯 다시 자석처럼 입술이 맞닿았다. 단단한 그에게 바짝 밀착하자 가슴이 무겁게 눌렸다. 허리 뒤로 팔을 넣어 서윤을 단단하게 지탱해 준 그가 살짝 입술을 떼어내곤 말했다.
“들어갈게.”
한계가 왔는지 목소리가 아주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끝이 살짝 갈라지는 음성에 서윤의 등에서는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가 조심스럽게 그녀 사이에 자리를 잡고는 천천히 움직인다.
“아……!”
입구에 뭉툭한 것이 닿았다. 더할 나위 없이 뜨거운 온도를 품은 기둥이 조금씩 조금씩 그녀의 안으로 진입했다. 툭 하고 열린 입구는 욕심껏 그를 삼켰다. 처음부터 조금 버거운 느낌이 들더니 갈수록 더욱 두꺼운 기둥이 계속해서 길을 열었다.
한참이나 촉촉하게 젖은 덕에 아프지는 않았다. 다만 끝없이 그녀를 가르고 들어오는 감각은 여전히 생소하다. 다시금 덜컥 겁을 먹은 그녀가 문도하에게 매달렸다.
“쉬……. 아프면 말해.”
“으응.”
“괜찮아.”
귓가에 촉 입맞춤을 하는 자상한 목소리가 그녀의 몸에 서서히 힘을 풀어주었다. 그렇게 노곤해져 이대로 침대에 들러붙는 액체가 되고 말 거라는 기이한 감각마저 들 무렵, 드디어 그가 다시 움직였다.
“흐…….”
“이서윤.”
“으응. 흐응…….”
칭얼거리듯 서윤은 이마를 계속 문도하의 단단한 어깨에 비볐다. 아래가 한없이 뜨겁고 간지럽고 또 애타는 감각이 계속된다. 허리를 두른 팔은 단단하게도 그녀를 지탱해 주었다. 골반이 한계까지 활짝 벌어졌을 무렵, 드디어 둘은 서로를 깊이 끌어안을 수 있었다.
“하…….”
그녀를 그러안고 있는 팔뚝에 힘줄이 툭툭 돋아 오른 것이 보였다. 그것을 더듬더듬 손가락 끝으로 만져 보았다. 부드러운 그의 피부를 쿡 누르면 이내 단단한 근육에 가로막혀 반탄력이 느껴졌다.
서윤은 한참을 그렇게 신기한 물건을 만지듯 문도하의 어깨와 팔을 어루만졌다. 영혼이 깊게 연결된 기분이다. 의식조차 못 하고 있던 영혼의 존재가 그의 앞에서만큼은 그 존재감을 뽐낸다. 서로를 따스하게 어루만지는 감각이 무척이나 좋았다.
그녀의 위에 있는 문도하의 조각 같은 얼굴에도 어느새 땀이 촉촉하게 솟아 있었다.
“움직여도 돼?”
마찬가지로 서윤의 얼굴을 하염없이 관찰하던 문도하가 코끝으로 그녀의 볼을 쿡 찌르며 물었다. 아주 오랜만의 교접이라서 문도하가 한층 그녀의 상태를 신경 쓰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 사실을 깨닫자 무서움과 두려움이 아득하게 밀려난다. 그가 정말 서윤을 절대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깊은 믿음이 대신 그 자리를 채웠다. 아주 단단하고 환하게 빛나는 믿음이었다.
“응.”
깊이 시선을 마주치며 서윤은 웃었다. 문도하도 그런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하.”
“아……!”
그의 허리가 크게 뒤로 물러났다가 다시 전진했다. 몸을 크게 울리는 감각에 서윤은 전율했다. 누군가가 머릿속을 쾌감으로 이루어진 망치로 쾅쾅 내려치는 감각마저 느껴진다.
그런 그녀의 감각을 문도하 또한 여과 없이 전해 받았다. 맨 처음 그녀의 환한 빛을 목도했을 때처럼 문도하는 이 미지의 감각을 들이마시는 데 여념이 없었다.
가이딩이라는 게 이토록 환희에 찬 감정을 선사할 줄이야.
이성을 잃으면 안 되는데 자꾸만 흐르듯 움직이는 허리를 자제할 수가 없었다. 다행스럽게도 품에 있는 서윤 또한 그와 같은 것을 느끼고 있었다. 진지하게 서로를 바라보며 서로의 영혼을 갈구하고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깊게 연결되고 싶다는 순수한 욕망으로.
“응, 으응, 아, 흣…….”
“이서윤. ……이서윤.”
“아응! 빨, 라……!”
이 순간 문도하는 다른 의미로 자신의 머리가 돌아 버렸다고 생각했다. 이서윤을 안고 있었지만, 그녀가 너무 부족했다. 끝도 없이 고개를 쳐드는 욕심이 자꾸만 이서윤을 삼키려 했다.
그 감각이 사뭇 두려워 도망가고 싶을 때면 서윤이 따뜻하게 손을 뻗어 주었다. 괜찮다고, 다 괜찮을 거라고. 언제고 그를 받아 줄 것이라는 상냥함을 남기면서.
그의 눈시울에서 자꾸만 이상하게 뻑뻑한 감각이 들었다.
“아, 아! 아읏……! 문, 도하, 으응……!”
그들은 한참 서로를 절실히도 끌어당겼다.
어느 순간 서윤은 무척 크게 눈을 떴다. 슬쩍 벌어진 입술 사이에선 흐릿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전율에 몸을 떨던 서윤이 풀썩 침대로 가라앉았다.
문도하는 노곤하게 풀어진 그녀의 눈매를 바라보며 손을 잡는다. 그대로 끌어와 욕심껏 그 손바닥에 입을 맞추었다. 계속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허리는 어느덧 끝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흣…….”
서윤이 지친 나머지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힐 즈음이 돼서야 그에게도 때가 도래했다. 치밀어 오르는 욕정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나른하게 벌어지는 그녀의 입술은 순순히 그의 침입을 허락해 주었다.
“하…….”
“으응…….”
뜨거운 기운이 탁 풀어지는 느낌이 났다. 위에서 헐떡이는 문도하가 어쩐지 몹시 겁먹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심정을 알 것도, 모를 것도 같아서 서윤은 두 팔을 뻗어서 그의 머리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포근한 품에 얼굴을 묻은 문도하가 한참을 그렇게 움직이지 못한 채 그녀에게 매달렸다. 커다란 몸이 둥글게 말린 게 애처로워서 서윤도 자꾸만 그를 끌어당겼다.
서로의 영혼을 보듬으면서, 그들은 그렇게 밤을 지새웠다.
더 밝고 따스한 나날이 그들의 앞을 채워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