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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자각 (24/27)

11. 자각

목걸이가 그들에게 돌아온 이후로 문도하는 퍽 말수가 줄었다. 심지어 묘하게 거리감마저 느껴질 정도다. 서윤의 손을 잡는 빈도가 줄어든 게 무척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그가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어쩌면 문도하도 서윤처럼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때 이른 봄바람을 억지로 부여잡고 있었다는 점을.

멍하니 흘러가듯 이대로 사는 것도 방법이었다. 애써 다른 모든 건 외면하면서 안온하게 걷는 삶 말이다. 과거와는 둘 사이가 확실히 달라지기도 했으니. 하지만 서윤은 여전히 머뭇거린다. 이상하게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은 대체 무엇을 확인받고 싶은 걸까.

처음부터 문도하의 상태 때문에 급히 돌아왔던 곳이다. 그런 그의 상태가 퍽 호전된 걸 확인한 이상 점점 서윤의 거처가 애매해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문도하와 영영 멀어지는 건 이제 고려할 수 없게 되었다. 그걸 위해 피 흘리던 그의 손을 억지로 잡고 일으킨 건 서윤이었으니.

그러니 결국, 이건 영원히 그를 떠나겠다는 선택이 아니었다.

덕분에 더더욱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때가 되었다는 생각에는 힘이 실렸다. 그저 각자의 삶을 살면서 간간이 가이딩을 하는 관계 말이다. 서윤은 그게 맞다고 느꼈다.

“할 말이 있어.”

며칠째 날이 흐리던 어느 오후. 서윤이 문도하를 붙잡고 이야기를 시작한 건 그 이유였다.

“……응.”

무언가를 예감한 것처럼 문도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옆에서 실장이 두고 간 서류를 읽고 있던 그의 얼굴이 한층 딱딱하게 굳었다.

“이제 거의 다 나았으니까, 나는 이사를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

“이전처럼 무작정 고집을 부리진 않을게. 안전한 곳으로 집을 알아봐 줘.”

화제를 꺼내면서 서윤은 기이한 예감을 느꼈다. 이 집을 떠나겠다고 선언하는 그녀를 문도하가 가로막지 못하리라는 예감을.

“그래.”

들고 있던 서류를 접고 그녀의 눈을 마주친 문도하는 예상대로 순순히 대답했다. 흘러들어 오는 눈길엔 짙은 감정이 깔려 있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그 말을 끝으로 문도하는 아무런 첨언을 하지 않았다. 서윤이 원하는 대로 모든 것이 정확히 흘러가리라 확신을 주는 것처럼. 어쩌면 그녀가 영영 떠나겠다고 한들 가로막지 않을지도 몰랐다.

그렇게 서윤이 말을 꺼낸 이후로 문도하의 상태는 급속도로 ‘정상’에 가까워졌다. 그녀 없이 스스로 잘 걸을 수 있다는 걸 서윤에게 알려주고자 하는 것처럼.

* *

“……사실, 대형종의 출몰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습니다.”

일전에 말했듯 며칠이나 지난 후에야 다시 돌아온 박남일 실장은 피로에 찌든 모습이었다. 잠도 거의 못 잤노라 말하며 희미하게 웃는 게 무척 초연한 얼굴이다.

한참 묻지도 않은 국제 정세에 대해 길게 늘어놓던 그는 각오를 다진 얼굴로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모든 게 이 한마디를 위한 사정 설명이었다는 것처럼.

“그동안 도하 님에 대한 건 제가 비밀에 부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전의 오만한 외양을 되찾은 문도하는 이제 서윤의 손을 먼저 잡아 오는 일이 없었다. 언제든 나갈 준비가 된 것처럼 완벽한 차림을 하고는 소파에 길게 기대어 있었다. 긴 다리를 꼬고 무심히 실장을 바라보는 얼굴은 한때 처절하게 아팠던 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덕분에 확신을 얻은 걸까, 실장은 다시 결연하게 그의 의중을 물었다.

“도하 님. 다시 에스퍼 생활을 하실 겁니까.”

아니라는 말이 떨어지면 목숨을 걸고서라도 그를 숨겨 줄 기세였다. 고개를 슬쩍 기울인 문도하는 시선을 서윤에게 돌리는 일도 없이 선선히 대답한다.

“해야지.”

“아…….”

맥이 탁 풀린 얼굴로 실장은 오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 속에 실린 죄책감을 서윤은 쉽게 읽을 수 있었다. 몬스터와 싸우다가 영혼이 내몰린 그를, 낫자마자 다시 바닷가로 밀어 넣는 심정이겠지.

그리고 왜인지 서윤 또한 비슷한 감각을 떨칠 수 없었다.

“다만 시기는 내가 정해.”

“네. 그럼 일단 생존 사실은 알려도 될까요.”

“그렇게 해.”

두 사람은 적절한 시기에 관한 걸 한참 토론했다. 그녀가 관여할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적당히 빠지려는데 실장이 서윤을 붙잡았다.

“아, 이서윤 씨.”

“네.”

“……거처에 대한 건 전해 들었습니다. 이서윤 씨 짐들은 제가 알아서 새집으로 옮겨 두어도 될까요? 아시다시피 그 동네가 이젠 썩 안전하진 않아서…….”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왜인지 한껏 긴장하던 실장은 서윤이 순순히 대답하자 활짝 미소를 지었다. 문도하는 옆에서 다시 실장이 가져온 서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둘의 대화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참, 그리고.”

“네?”

“그, 강하나라는 분이 계속 연락을 주셔서요. 괜찮으시면 서윤 씨가 무사하다고, 흠흠, 직접 말씀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뜻밖의 소식에 서윤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하나가 어떻게 박남일 실장에게 연락을 했던 걸까.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강하나에게 한 연락이 그녀에겐 퍽 걱정스럽게 다가왔을 것이란 생각이 스쳤다. 참으로 미안한 일이 아닐 수 없어서 서윤은 강하나에게 꼭 연락을 해 봐야겠다는 마음을 굳혔다.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서윤의 싱숭생숭한 마음만 빼고.

* *

박남일 실장이 돌아가고 나서 서윤은 바로 강하나에게 연락을 했다. 예상대로 서윤이 그렇게 전화만 하고 사라지는 바람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설마하니 강하나가 자신이 일하던 카페까지 찾아가서 수소문을 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에 미안한 마음은 한층 커졌다.

그래서 강하나가 오랜만에 얼굴을 보자고 했을 때 서윤은 쉽게 거절하지 못했다.

문도하와 이 집에서 지낸 지도 벌써 몇 주가 지났다. 그동안 한 번도 떨어진 적이 없었기에 조금 걱정이 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은 그리 길지 않았다. 이제는 서재에서 아예 자리를 잡고 일을 시작한 문도하를 보면 그녀의 역할이 희미해졌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잠깐, 친구 좀 만나고 올게.’

‘……그래.’

예상대로 문도하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잠깐 서윤의 얼굴에 머문 시선은 몹시 무거웠으나, 그 대답을 끝으로 더는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오랜만에 나온 바깥세상은 몹시 한적했다. 아무리 도심이라지만 뒤숭숭한 뉴스를 보니 사람들이 절로 위축된 모양이다. 황량한 겨울 거리는 덕분에 더욱 쌀쌀함을 뽐내고 있었다.

“그랬구나……. 고생 많았어, 서윤아.”

“아니야. 고마워, ……날 계속 찾아 줘서.”

겨울 거리에서 다시 만난 강하나는 여전히 햇살 같은 친구였다. 적당한 카페에 가서 자리를 잡은 그들은 그간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한참 대화를 나눴다.

자신이 문도하의 가이드라는 사실만 빼 둔 서윤은 그저 인연이 있어서 도움을 받았다는 말로 근황을 얼버무렸다. 그 과정에 있던 수많은 아픔들을 아직 입에 담기는 퍽 어려웠다.

강하나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는 걸 알아차린 모양이지만 캐묻지 않았다. 그저 서윤이 무사히 있다는 사실이 기껍다는 듯. 그래서 더욱 고마웠다.

그동안은 그녀가 납치를 당하든 사라지든 세상의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으리라 여겼는데. 이렇게 그녀를 신경 써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게 생각보다 꽤 나쁘지 않은 느낌이다.

말주변이 없는 자신이 지금만큼 바보 같았던 적이 없는 것 같다. 강하나에게 느끼는 이 고마움을 말로 다 전하기가 힘들었으니까. 우물쭈물 손에 쥔 따뜻한 커피잔만 잡으며 어색하게 굴자 강하나가 다시 아무렇지도 않게 화제를 돌린다.

“그럼 집에는 언제 돌아가?”

“응?”

“잠깐 사정이 있어서 그 집에 머무르고 있었다며. 그건 잘 해결된 거야?”

“응…….”

그녀가 나오기 전 멀쩡하게 일하고 있던 문도하가 생각났다. 눈에 띄게 갈라져 있던 그의 영혼은 이제 많이 치유되었다. 여전히 실금 같은 균열은 있었으나 이전과 같은 처참한 상태는 아니었으니까.

능력을 쓰기 시작하면 또 악화할지 모르지만, 그녀가 영영 떠나는 건 아니니 괜찮을 터다. 가끔씩 만나 가이딩을 해주다 보면 언젠가는 완벽하게 치유가 되리라. 그렇다면 서윤도 좀 더 안온하게 살아갈 수 있겠지.

“다시 일도 시작해야겠네. 요새 뒤숭숭해서 아르바이트 구하기가 쉽지가 않더라고.”

“그렇지.”

그러니 강하나의 말은 전부 맞았다. 애초에 문도하와는 사이좋게 동거를 이어나갈 만한 사이도 아니었다. 이번엔 고집을 꺾어 집을 얻었으나 일을 해서 갚아 나갈 작정이었다. 그걸 가이딩의 대가로 받기는 싫었다.

예전과 같은 이유는 아니었다. 이번엔 그의 목숨을 가지고 저울질을 하는 느낌이 퍽 불쾌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녀의 선택은 옳았다.

그런데도 대체 뭘까, 이 허전한 감각은.

* *

어색한 시간을 보낼까 봐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 수다는 밤늦도록 이어졌다. 일터가 아니라 밖에서 만난 강하나는 더 유쾌한 성격이었다. 서윤조차 몇 번이나 크게 웃을 정도로 그녀에게는 이야깃거리가 많았다.

덕분에 집에만 처박혀 있던 서윤도 세상 돌아가는 일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 뉴스가 전하는 것보다 사람들이 느끼는 패닉은 덜하다거나, 국민 클랜과 함께하는 클랜 연합이 생각보다 일을 잘하고 있다거나 하는 것들을 말이다.

특히 감옥에 간 사장이 어떤 험한 꼴을 보고 있는지 전해 들을 때는 미묘한 심정이었다. 오래전 기억을 꺼내듯 그런 일도 있었지, 하고 생각하는 자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장을 보며 키웠던 두려움이나 수모 같은 것들은 어느새 덧없이 부서져 더는 그녀를 가로막질 못하고 있었다. 언젠가는 삼촌에 대한 것도 이렇게 느낄 수 있을까.

그렇게 한참을 즐겁게 시간을 보내느라 문도하에게 말한 것보다 귀가 시간이 한참 늦었다. 그녀가 돌아다니는 것에 대해 문도하는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경호를 붙인다거나 주기적으로 연락을 요구할까 봐 살짝 걱정했으나 놀랍도록 아무런 간섭이 없었다. 이대로 서윤이 영영 돌아가지 않아도 잡지 않을 것처럼.

예전과는 무척 달라진 자유에 신이 나야 하는데 이상하게 마음만 불편하다. 강하나와 헤어지고 나서 핸드폰을 급히 봤으나 아무런 연락도 와 있지 않았다. 전화를 먼저 해 볼까 하던 서윤은 이내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었다.

“…….”

만약 서윤이 필요했다면 연락을 했겠지.

덕분에 문도하에게 돌아가는 길은 무척 굴곡진 여정이 되었다. 오르막을 오를 땐 세상 버거운 결단을 내리는 듯하다가 내리막을 갈 땐 아이러니하게도 길을 걷고 있다는 게 기꺼운 감각이 들었다.

허전한 가슴을 통과하는 겨울바람이 서늘하다. 하지만 기온 자체는 그리 낮지 않아서 봄이 멀지 않은 곳에서 손을 흔드는 듯했다.

그렇게 먼 길을 돌아 서윤은 도착했다. 다시, 문도하의 현관문 앞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옆집에서 쓰러져 있는 문도하를 발견하러 갈 때처럼 가슴이 아팠다. 어쩐지 발이 쉽사리 움직이질 않았다. 이대로 뒤돌아 간다는 선택지가 있다는 걸 이성이 알려주는 것처럼.

하지만 서윤은 도망치는 대신 손을 뻗어 현관문의 손잡이를 건드렸다. 그때와는 다르게 손 아프게 문을 두드릴 필요는 없었다.

경쾌한 기계음과 함께 현관문이 활짝 열렸다.

“…….”

집 안은 온통 어두컴컴했다. 그녀가 나간 후로 빛 따윈 한 번도 없었다는 것처럼.

“왜 그러고 있어.”

어두컴컴한 현관문 앞에는 문도하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윤이 나갈 때 봤던 것과 같은 완벽한 차림으로.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서윤은 한 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둘 사이가 한 뼘 정도의 거리를 남겼을 때, 문도하가 스르륵 아래로 추락했다.

털썩 그의 두 무릎이 바닥에 매섭게 닿았다. 눈에 띄게 떨리는 그의 팔이 한참을 서윤의 주위를 맴돌다가 겨우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갑게 식은 체온이 그녀에게 흘러들어 왔다. 그게 애처로워 뿌리치지 않자 문도하의 손에 겨우겨우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그가 양팔을 둘러 이서윤의 허리를 그러안았다. 그녀의 배에 높은 콧대가 폭 파묻혔다. 절실하게 매달리는 것처럼.

“가지 마.”

이제 막 돌아온 서윤에겐 맞지 않는 인사였다. 말없이 그런 문도하를 내려다보던 서윤이 잡히지 않았던 한쪽 손을 들었다. 슬그머니 문도하의 볼을 쓸어 준다. 분명 나갈 때는 괜찮았던 그의 영혼이 다시 크게 갈라져 있었다.

상처를 보듬듯 그의 얼굴을 계속 쓸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영혼의 균열이 서서히 사라져 간다. 이렇게 빠르게 균열이 낫는 건 처음 보았다. 그래서 서윤은 실감했다.

이게, 내 능력이구나.

문도하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고작 이 한마디를 할 자격밖엔 없다는 것처럼. 그저 두 눈을 감고 애처로이 서윤에게 매달려 있을 뿐이다. 선고를 기다리는 사형수같이.

그가 많이 나아졌으니, 떠나려 했는데.

【날 버리지 마.】

귓가로 들리는 음성이 서윤을 흔들었다. 여느 때처럼 오만하고 완벽한 차림을 한 문도하가 무릎을 꿇은 채 애원했다. 그 어색한 광경을 보면서 서윤은 문득 벼락같이 깨달았다.

내가, 가이드구나.

퍽 애잔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건 아픔이 깔린 가시밭길과도 같았다. 언제부턴가 가슴에서 찰랑이던 먹먹한 감정이 기어코 범람했다. 막아도 막아도 그 위로 튀어 오르고야 마는 바닷가의 파도처럼.

망설이던 서윤은 두 팔을 들어 그런 문도하의 머리를 그러안았다. 아프기만 하던 둘의 인생이 앞으로는 그러지 않기를 바라면서.

차갑기만 하던 문도하에게 조금씩 온기가 돌았다.

문도하, 나의 에스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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