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다시, 만남 (21/27)

8. 다시, 만남

의미 없이 던지던 시선 끝에는 그녀의 낡은 주방 의자가 있었다.

“…….”

눈을 깜빡여도 보이는 건 여전했다. 간신히 일궈 낸 그녀의 작은 보금자리에는 이서윤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마치, 지금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다시 눈을 깜빡인다. 멍하니 침대에 기대 있던 몸도 조금 움직였다. 박남일 실장의 손에 이끌려 집에 돌아온 지 꼬박 3일째 되는 날이었다.

갇혀 있었을 때 그녀는 그대로 정신이라도 놓은 채 사라지고 싶었지만, 쉬운 일은 아니었다. 드문드문 현실로 끌어 올려지는 의식은 그녀가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사실만 차갑게 알려줄 뿐이었다.

그러니 어느 날 피투성이가 되어 돌아온 문도하가 이상한 소리를 뱉었을 때만 해도 이서윤은 그저 침묵했다. 두 번 다시는 속지 않기로 했으니까.

하지만 그대로 침몰하려 했던 서윤을 막아서듯, 그녀가 조금씩 깨어날 수밖에 없는 일만 벌어졌다.

박남일 실장이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영영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문도하의 현관문이 열렸다.

그리곤 이 집으로 돌아왔다.

멍하니 부엌 쪽만 바라보던 서윤은 문득 허기를 느꼈다. 갑자기 무척이나 배가 고팠다. 실장은 퍽 걱정스러운 낯으로 그녀의 냉장고를 채워 넣고 나갔지만, 지금까지는 들여다볼 의지가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참으로 오랜만이었다. 서윤이 스스로 식사를 찾아 먹은 것은.

* *

식사를 스스로 챙겼다고 해서 서윤의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돌아온 건 아니었다. 애초에 갑작스레 집에 돌아오게 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마지막으로 본 집 안은 도둑이 헤집어 놓은 듯 엉망이었는데, 그런 흔적도 없이 정리되어 있었다. 그러니 이 현실 또한 가짜에 불과하다.

단조로운 나날이 지나간다. 그래도 집에 돌아온 게 심리적으로 안정이 되는지, 안으로 침잠하려는 노력은 자꾸 수포로 돌아갔다. 어쩔 수 없이 정신이 문득문득 들 때면 서윤은 대문을 바라봤다. 그렇게 점점 대문 쪽을 바라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이대로 놓아준다고. 그럴 리가 없어.

굽힐지언정 부러지기를 택했던 그녀이기에 이제 저 문을 열고 들이닥칠 문도하를 버텨낼 재간이 없었다. 그녀는 이미 산산조각이 나 버렸으니까. 엉망인 모습 그대로 끼니만 간신히 채우며 서윤은 차라리 그가 빨리 들이닥치기를 바랐다. 조금 움직이게 되었으니 도로 가져가겠다며 마구잡이로 이곳에 들어오길.

그러다 문득 맨 처음 문도하가 이 집에 들어올 때 우그러트렸던 현관문이 멀쩡하다는 걸 발견한다. 새 대문으로 바꾼 모양이었다.

문도하의 흔적이 지금 당장은 눈앞에 없었다. 그 사실에 묘한 감상이 든다. 습관적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그제야 마지막 남은 샌드위치를 어제 먹었다는 걸 기억해 냈다.

박남일 실장은 식량이 떨어질 즈음 다시 그녀를 챙겨주러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문도하는 그녀에게 자유롭게 살라고 했다.

정말일까.

홀린 듯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핸드폰을 들었다. 당연하게도 전원이 들어오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 충전 단자를 연결했다. 한참 뒤에 켜진 핸드폰을 보던 서윤은 충동적으로 실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오지 마세요.

박남일 실장은 알겠다는 문자 대답을 끝으로 정말 나타나지 않았다.

* *

이틀을 내리 굶었다. 혹시 몰라 핸드폰을 계속 충전기에 연결해 두었지만, 그사이 박남일 실장이 다시 연락해오는 일도 없었다. 서윤은 일부러 대문 쪽으로는 다가가지도 않은 채 계속 웅크리고 있었다.

냉장고는 진작에 비었고 마실 것도 여의치 않았다. 간간이 부엌의 수돗물이나 마시면서 서윤은 그렇게 기다렸다. 그런데도 아무도 오지 않는다.

이대로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왜 자신을 내버려 두는 걸까.

역시 이상했다. 문도하는 이미 서윤을 손아귀에 넣었다. 인형 놀이라도 하는 듯 잘 먹이고 잘 씻기며 간수하고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서윤의 정신 건강을 위했다면 진즉에 이 모든 비극이 일어나지 않았으리라. 이제 와서 행동이 이토록 변한다는 게 말이 안 됐다.

두 번 다시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으려 했는데, 자꾸만 잊고 있던 무언가가 반짝였다.

서윤은 벌떡 일어나 화장실로 달려갔다. 도무지 이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뭐라도 해야 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하는 샤워는 무척이나 개운했다.

* *

날이 밝자 배가 무척 고프다는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현관문 앞에 선 서윤은 한참을 고민했다. 나가려고 옷을 껴입은 지는 오래였으나 앞에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는 것처럼 굴었다.

그렇게 제 안의 두려움을 눌러 내는데 성공한 서윤이 마침내 손을 뻗었다.

거짓말처럼 문은 쉽게도 열렸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보는 햇살에 무심코 눈을 찡그렸다. 머리가 핑 도는 감각이 느껴져 그녀는 무심코 다리를 움직였다. 바깥으로 내딛는 첫걸음은 무척이나 간단했다.

“아…….”

꽤 오랜만에 듣는 자신의 목소리가 낯설었다. 이상한 기분에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걸 이겨내 두 발로 딛고 선 서윤은 세상으로 나갔다. 철제 계단이 통통 울리는 소리가 퍽 오랜만이다.

동네는 여전히 한적했다. 햇살이 따스하게 내리쬐었고, 군데군데 마른 풀이 버석거리는 소리를 내며 겨울바람에 흔들렸다.

마트까지 가는 동안 그녀는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듯한 기분에 어쩐지 울고 싶을 무렵 마트에 도착한다. 마트 안에서는 몇몇 사람들이 장을 보고 있었다. 울고 싶은 기분도 그걸 보니 살얼음처럼 녹았다.

“1,400원입니다.”

홀린 듯 빵을 하나 계산하고 나온다. 그녀의 빈약한 지갑은 여전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핸드폰으로 은행 잔고를 확인해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게 그녀가 이 동네를 잠시 떠나기 전과 똑같았다.

바스락 소리를 내는 빵을 하나 들고 다시 터덜터덜 집으로 향했다. 문득문득 뒤를 돌아보지만 여전히 아무도 없었다. 돌아가는 길에는 동네에 사는 듯한 주민을 몇 마주쳤다. 늘 그랬듯 살가운 인사 따위가 오가지는 않았다. 괜히 무언가 켕기는 사람처럼 서윤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아무것도 아닌 일상이 낯설었다.

조금만 더 가면 그녀의 집이 나온다. 흔들리는 걸음을 열심히 옮기던 서윤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집이 아닌 다른 방향으로 뛰었다.

미친 사람처럼 동네를 헤치고 안쪽으로 나아갔다. 이상했다. 왜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 것 같을까. 왜 그녀를 이대로 놓아준 것 같은가.

서윤은 절박하게 뜀박질했다. 어리석은 것 같지만 계속해서 다리를 재촉했다. 그녀는 이미 몇 번이나 어리석었으니 여기에 한 가지를 보탠다고 해서 더 나빠질 것도 없었다.

그렇게 몬스터를 만났던 동네 안쪽까지, 서윤은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은 채 올 수 있었다.

“헉, 허억.”

걷는 것도 어색한 몸인지라 뜀박질이 무척 버거웠다. 무릎을 짚은 채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당연하게도 몬스터는 흔적도 없었다. 노란색 폴리스 라인 비닐의 일부가 전봇대에 감긴 채 애처롭게 휘날리고 있을 뿐이다.

거뭇거뭇한 바닥에서 위치를 가늠하며 한참 서 있던 서윤은 생각했다. 여기서 문도하가 그녀를 구했다. 그리고 여기서, 그녀를 나락으로 보냈다.

그녀의 안전에 무척 민감하게 반응하던 문도하라면 이곳에 다시 돌아오는 걸 탐탁지 않게 여겼을 것이다. 최소한 갑작스럽게 뜀박질을 하는 그녀를 감시하는 사람들이 따라와야 정상이었겠지.

그런데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마치 그녀가 보냈던 오지 말라는 문자에 정말 나타나지 않았던 박남일 실장처럼.

진짜, 해방이구나.

이제야 실감이 났다. 왜인지는 몰라도 문도하가 정말 그녀를 놓아준 것이다. 아무것도 강요하지 않고 아무것도 쥐여 주지 않은 채, 이전처럼 돌아갈 수 있도록.

“하, 하하.”

헛웃음이 나왔다. 겨울바람이 잘못 스며들기라도 한 것처럼. 이게 비록 일시적인 변덕이라도, 비록 곧 사라질 자유라도 중요하지 않다. 그저 지금 이 순간 그녀가 무척 자유롭다고 느낀다는 점이 중요했다.

그런데 대체 뭐가 문제인지,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기분이었다.

* *

차근히 진정하고 나서야 비로소 주변이 보였다. 이틀 만에 허기를 해결하고 잠까지 푹 잔 서윤은 멍하니 한가로운 오전을 보냈다.

오랜만에 핸드폰을 들었다. 새삼 적막이 신경 쓰인 탓이다. 의미 없이 손가락을 움직여 뉴스가 나올 법한 채널을 찾아 틀었다. 이상하게 자꾸만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의도와는 사뭇 다른 소식이 들린다.

―……비상 체제에 들어섰습니다. 이번 임시대책위원회의 발표에 따르면 몬스터의 생존 시간이 늘어남에 따라 새롭게 편성되는 위험지역이 늘어날 전망입니다. 자세한 위치와 범위에 대한 것은 추후 발표될 예정입니다.

“…….”

―한편 일각에서는 이러한 문도하 헌터의 실종이 정신 폭주로 인한 것이라는 가설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로서 최장 시간을 기록한 문도하 에스퍼는…….

심장이 쿵 하고 내리막길로 떨어지는 감각이 들었다.

‘문도하의 실종’이라는 단어가 귀에 콱 박혀 든다. 홀린 듯 손가락을 움직여 서윤은 비로소 지금 한국을 뜨겁게 달구고 있는 뉴스들을 찾았다. 실종된 문도하와 갑작스럽게 늘어난 몬스터들. 세상은 혼란에 빠져 있었다.

그러고 보면 여태 이걸 생각하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저 자유롭게 밖을 오간다는 사실에 심취한 나머지 중요한 걸 잊었다. 문도하가 그날 피투성이로 돌아온 이유는 무엇인지, 지금 그는 어디 있는지와 같은 것들.

뉴스에서는 협회장의 갑작스러운 사망 사실도 보도하고 있었다.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이라고 했다. 갑작스럽게 몬스터 사태를 대비해야 할 수뇌부가 둘이나 사라진 것과 마찬가지였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몬스터의 범람’이라는 글자는 땅에 발붙이고 사는 인간 모두에게 히스테릭을 불러일으키는 단어였다. 어릴 적의 악몽이 다시 시작되는 것인지 덜컥 겁이 났다. 그녀의 동네는 이미 몬스터가 한번 나타나기까지 한 위험지역이었으니까.

어쩐지 어제 갔던 마트에는 이상하게 빈 매대가 많았다. 사재기 열풍이라도 일어난 모양이었다. 지금 당장은 어딘가로 떠날 수도 없는데 어찌해야 한단 말인가.

무엇보다, 세상이 이 모양인데 자신은 정말 이대로 가만히 있어도 되는 걸까.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어쩌면 이걸 알고 문도하가 그녀를 놔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 탓이다. 온 세상을 인질로 하여 그녀를 협박할 작정으로 움직인 건 아닐까.

속이 답답한 나머지 꼭 뒤집어질 것만 같았다. 분노일지 좌절인지 모를 기이한 기분 속에서 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오래도록 고민하던 서윤은 결국 박남일 실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 맞기를 기다리다가 지친 아이가 된 심정이었다.

―네. 이서윤 씨.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조금 시간이 걸리긴 했어도 박남일 실장은 전화를 받았다. 첫마디부터 피로가 덕지덕지 녹아 있는 목소리였다. 그 바쁜 듯한 모습에 잠시 주춤한 서윤은 이를 악물었다. 문도하에게 직접 연락하고 싶지는 않으니 할 수 없다.

“……그 사람 지금 어디 있나요.”

어쩌면 서윤이 먼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불확실한 가정 속에서 서윤은 한껏 불안함을 키워 갔다. 기대하며 뛰어올랐다가 사정없이 처박히는 경험은 이제 싫었으니까.

하지만 잠깐의 침묵 끝에 박남일 실장은 담담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도 모릅니다.

“……네?”

―도하 님은, 현재 행방이 묘연합니다. 클랜 측에서도 수색을 펼쳤지만 실패했습니다.

“거짓말.”

저도 모르게 믿을 수 없다는 표현이 훅 튀어 나간다. 그녀의 반응에도 실장은 화를 내지 않았다. 그저 담담함 속에 미처 감추지 못한 서글픔을 내보였을 뿐이다.

―사실입니다. 도하 님이 사라지시기 전에 지시한 건 이서윤 씨에 대한 것밖엔 없습니다.

“…….”

맥박이 뛰는 소리가 휴대전화 너머로 전해질 것만 같았다. 그가 무슨 생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실장의 말은 문도하의 실종이 오롯이 그녀로 인해 이뤄졌음을 내포하고 있었다.

행여 그녀를 탓하기라도 하는 건 아닌지, 저도 모르게 이불을 쥐고 있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두려움이 엄습한다. 머지않아 온 세상이 그녀를 손가락질하게 될 것이 뻔했다.

―이서윤 씨.

그는 대체 뭘 원하고 이런 짓을.

―이서윤 씨가 문도하 님의 가이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제 없습니다. 저를 제외하면 말이죠.

“……네?”

두려움을 잘라내듯 실장은 덤덤히 사실을 알려주었다. 뜻밖의 소식에 몸이 꽁꽁 얼어버리는 것 같은 감각이 들었다.

―협회장이 사망했다는 뉴스는 보셨습니까?

“네.”

―그렇군요……. 게다가 이서윤 씨가 가이드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도 대부분 사라졌습니다. 정확히는 공식적인 기록이 남아 있지 않는 거죠. 그러니 추후 삼촌분이 주장한다 한들 증명할 길이 없을 겁니다.

얕은 숨소리가 끈질기게 방 안을 채웠다. 모든 핍박에도 불구하고 여기 그녀가 살아 있다고 주장하기라도 하는 듯이.

소록소록 내려앉는 숨소리가 그녀를 둘러싼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그녀를 해치지 못하도록.

입이 몇 번이나 달싹였지만 소리가 나오지는 않았다. 차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감사 인사라도 해야 하는가. 문도하가 이러는 이유를 궁금해야 할까.

얕은 숨을 헤치고 문득문득 거센 감정이 그녀를 툭툭 건드렸다. 그 압박에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그녀는 가까스로 마음에 걸리는 사실을 내뱉는다.

“하지만, 뉴스에서, 위험하다고…….”

―……당장 방어라인이 위험하냐 물으시는 거라면, 네, 맞습니다. 지금도 사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거든요.

“…….”

―하지만 곧 괜찮아질 겁니다. 애초에 도하 님 혼자 동시에 모든 국토를 방어하고 있던 것도 아니고, 그래서도 안 되는 일이죠. 이번 혼란도 우리는 이겨낼 겁니다. 조금 힘들어도 말입니다.

최전방에서 싸워 온 사람답게 실장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서윤도 그걸 잡고 일어날 수 있을 정도로 단단한 의지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서윤은 흔들렸다. 정말 이렇게 방관하고 있어도 괜찮을 걸까.

―그리고 이서윤 씨 동네는 안전할 겁니다. ……저번 몬스터 사태로 조치를 많이 취해 두었거든요.

“그런가요.”

가까스로 대답하는 그녀의 음성에서 죄책감을 읽은 것일까, 실장은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옳다는 확신을 심어주고 싶다는 것처럼.

―그냥, 이서윤 씨 자신에 대한 것만 생각하세요.

그 말을 끝으로 실장은 통화를 끝냈다. 수화기 너머에서는 쉴 새 없이 실장을 찾는 음성이 들렸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게 사실인 듯했다.

화면이 꺼진 휴대전화를 든 채로 서윤은 하염없이 생각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할지, 그녀가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에 관한 것들을.

S급 에스퍼의 능력은 말 그대로 전무후무한 것이었다. 한창 위험할 때 그의 존재가 이 나라의 방어라인 구축에 핵심이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모든 에스퍼들의 능력이 쓸모없는 건 아니었다. 인류는 충분히 지금까지 경험을 쌓아 왔으니까. 그러니 문도하가 없어도 세상은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발생할 희생은, 어찌한단 말인가. 문도하가 있었다면 없었을 피해들이었다. 어쩌면 수천이 넘는 생명도 구할 수 있을지 몰랐다. 문도하를 데려와 그걸 가능하게 할 수 있는 건 서윤의 능력이었다.

자꾸만 그 사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렇게 가만히 있는 것 자체가 죄악은 아닐까. 지금이라도 문도하를 찾아내야 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럴수록 그녀 마음에 웅크리고 있는 상처 입은 자신이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녀가 흘리는 눈물은, 과연 대의라는 명분 하에 무시되어야만 하나.

답답했던 문도하 집의 현관문을 떠올린 순간 서윤은 다짐했다. 이번만큼은 이기적으로 살겠다고. 그동안 사정없이 밟힌 자신을 위해서라도.

굳게 다짐을 하고 나서야 겨우 이불을 찢을 듯 쥐고 있던 손끝에 힘이 빠져나갔다.

“휴…….”

아무도 모른다고 했다. 그러니 억울한 비난도 그녀의 몫이 아니게 되리라. 그 사실을 깨닫자 조금 더 진정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 모든 고뇌의 순간 내내 계속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얼마 전에 깨달은 가슴 속의 공백은 그 사이를 무정하게도 통과하는 겨울바람 때문에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건 죄책감일까, 아니면 가이드의 본능인가.

그녀는 결국 통화가 끝날 때까지 문도하는 어찌 되는 건지 묻지 못했다.

가이드가 없는 그는, 어떻게 되는 걸까.

* *

일주일 가까이 아슬아슬한 평화가 그녀를 보듬었다. 뉴스에서는 연신 안 좋은 소식만 들렸다. 망가졌던 루어를 수복하는 과정에서 작업자들이 몬스터의 습격을 받았다거나, 한 번도 몬스터가 출현하지 않았던 도시에 몬스터가 출현했다거나.

비단 한국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일본에서는 연이어 대형종이 출몰하더니 어제는 기어코 도시 하나를 포기하고 시민들이 철수한다는 뉴스마저 나왔다. 항만을 끼고 있어 본래는 크게 번성했던 서쪽의 대도시였다. 관광과 물류의 중심이던 그곳은 이제 몬스터가 활개 치는 유령 도시가 되어버렸다. 바야흐로 세계는 다시 혼란을 목전에 두고 있었다.

그 와중에 안전할 거라는 실장의 말은 사실인지 그녀의 동네가 피해를 입는 일은 없었다. 바닷가에서 이렇게 가까운 편인데 퍽 다행인 일이었다. 저번 사건 때문에 정부에서 무언가 조치를 취한 걸까?

“또 가네…….”

다만 그녀와는 다르게 사람들 사이에서는 점점 불안함이 퍼지고 있었다. 정부가 발표한 안전 라인에 따르면 여전히 이 동네는 위험한 곳이었다. 발표가 난건 3일 전이었는데, 그 이후로 계속 이사 나가는 사람들이 벌써 다섯 가구나 되었다.

몬스터가 활동하지 않는 낮 시간을 노려 이사 가는 행렬은 퍽 분주히 움직였다. 언제 일본 꼴이 날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사람들을 지배했다. 이대로라면 혼자만 한가롭게 이 적막한 동네에 남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왜 움직일 생각이 들지 않을까.

손에 쉰 따뜻한 커피를 한 모금 넘겼다. 마트가 있는 곳은 아직 안전지역이라 발품만 판다면 굶어 죽진 않으리라는 한가한 생각만 덧없이 흩어졌다. 그러고 보면 일자리도 다시 구해야 할 터다.

이런저런 생각이 흩어지는 걸 서윤은 그저 방관했다. 당장 다음 달 생활비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으로 돌아왔다. 그럼에도 왜인지 걱정이 쉽게 자리 잡질 못하고 사라졌다. 아마도 걱정이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야 할 가슴 한구석이 뻥 뚫린 탓이리라.

이해할 수 없는 감정 때문에 서윤은 검은빛 도는 커피의 표면을 바라보았다. 매끈한 수면에는 서윤의 하얀 얼굴이 비쳤다.

사실 이전과 같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도, 이 집도. 그리고 문도하도.

* *

저녁이 되자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얼어 있는 땅을 촉촉이 보듬는 지나가는 비였다. 이렇게 비도 오고 사방이 어두운 걸 보니, 꼭 문도하를 처음 만났던 밤 같았다.

이불을 어깨에 걸치고 앉은 채 서윤은 먼 곳에서 들어오는 가로등 불빛을 헤아렸다.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는 밤이었다. 철제 계단을 건드리는 빗방울 소리가 퍽 어지러운 탓일 수도 있겠다.

한참 멍하니 어둠에서 울려 퍼지는 빗소리에 집중하던 서윤은 문득 한쪽 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침대가 붙어 있는 벽이다. 건너편에는 아무도 살지 않는 빈 공간이 있을 방향.

“…….”

벽에는 삭막할 정도로 장식 하나 없었다. 시선을 끌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서윤은 계속 그 벽을 응시했다. 그냥 아까부터 이상하게, 무언가가 느껴졌다.

꼭 누군가의 숨소리 같은.

어깨에서 이불이 스르륵 밀려 내려갔다. 소리 없이 몸을 일으킨 서윤은 아예 벽 쪽으로 다가가 가만히 손끝으로 그곳을 더듬는다. 바싹 귀를 대어 봐도 들리는 건 작은 빗소리뿐이다.

숨소리라니, 잘못 들은 거겠지. 하필이면 문도하를 처음 만난 날과 비슷해서 괜히 신경이 곤두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문도하를 떠올린 순간, 거짓말처럼 귓가에 작은 음성이 스쳤다.

【도……ㅇ, 줘…….】

그녀가 이토록 신경을 기울이고 있지 않았다면 작은 빗소리조차 이기지 못했을 희미한 소리였다. 덕분에 서윤은 놀라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몸을 일으켰을 뿐이다.

밤에는 웬만해선 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몸이 절로 움직였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스르륵 그림자처럼 발을 움직여 현관 밖으로 나간다. 맨발에 조금씩 튀는 빗물이 차가웠다.

그렇게 딱 두 걸음 더 움직여 옆집 현관문 앞에 섰다.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빗소리를 덮는 심장의 고동이 그녀를 일깨운다.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이 울컥 마음에서 솟아올랐다.

겨울 공기를 하얗게 수놓는 입김이 눈에 확연히 띌 무렵, 서윤은 미친 사람처럼 현관문을 두드렸다.

“나와!”

쾅쾅 소리가 고요한 밤의 적막을 깨부순다. 몬스터가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저 안에는 몬스터 따위보다 더 위험한 사람이 있을 게 뻔했으니까.

한참이나 격하게 문을 두드렸으나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안쪽은 오로지 정적만 채우고 있다는 것처럼. 희미하게 들리는 환청 같은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착각과 같았던 숨소리도 없었다. 그런데도 서윤은 멈추지 않고 계속 문을 두드렸다.

이러다간 얼어 있는 주먹이 현관문의 차가운 온기에 깨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무렵, 그녀는 무심코 현관의 손잡이를 잡았다. 두드린 것이 무색하게 처음부터 잠겨 있지 않았는지 어이없게도 문이 열린다.

그걸 깨닫자마자 그녀는 거침없이 그것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뜻밖에도 그녀를 맞이한 건 지독한 피 냄새였다.

그곳에는 피투성이가 된 문도하가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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