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시선을 멍하니 거실로 고정했다. 그런 그가 이상한지 안쪽을 흘끔대던 실장이 그의 주의를 끌었다.
“도하 님?”
“왜.”
반사적으로 대답하면서도 그의 눈길은 여전히 안쪽을 향했다. 이미 식사가 끝나고 방에 들어가 버린 이서윤을 바라보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어제 그녀가 내다 버리지 않은 작은 인형을 눈으로 훑을 뿐.
자꾸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보는 문도하가 이상했는지 박남일 실장이 불안한 얼굴을 했다. 겨우 시선을 떼어 그가 들고 있는 태블릿을 눈짓하자 그가 자료를 뒤졌다.
아직까지 거실에 무사히 놓여 있는 인형을 보고 문도하가 느낀 건 애처롭게도 작은 희망이었다.
이서윤이 그의 선물을 그녀의 방으로 들인 것도, 고맙다는 인사를 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떨어지지 않도록 방치했을 뿐인데도 그게 못내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앞으로 무언가를 더 받아 주지 않을까.
아무리 문도하가 인간관계에 서툴다 한들, 그녀와의 관계를 조금이라도 긍정적으로 바꾸고 싶다면 이따위로 두루뭉술하게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자각은 있었다. 좀 더 근본적인 것을 해결하지 않으면 영원히 분노의 눈길 이상의 것은 허락되지 않으리라.
그러려면 일단 실장의 의견에 따라야 했다. 생각지도 못한 봉제 인형이 무사히 살아남는 것을 보았으니 그의 말은 효과가 있었다. 역시 가장 먼저 이서윤의 주거를 해결해야 하는 게 맞는 듯하다.
그녀가 이 공간을 벗어난다는 생각을 하면 불안함이 뇌수를 점령했으나 애써 이를 악물었다. 그녀가 이따위 우울이 아니라 환한 빛을 두르고 있었으면 해서.
이서윤의 본질적인 소망을 다 들어줄 수는 없었으나 조금이라도 나아질 가능성이 있다면 기꺼이 행할 예정이었다.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갈증은 이상하게도 급속도로 그의 몸을 침투해서, 지금은 꼭 사막이 몸 안에 들어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일단 그렇게 그녀를 원래 있던 곳으로 되돌리고 난 후에는 그의 말을 조금 들어 달라 할 작정이었다. 우선은 그녀를 도구 취급하며 굴었던 과거를 조금이라도 만회하고 싶다고.
박남일 실장에게도 의견을 구했다. 그는 흡사 울 것 같은 얼굴로 괜찮은 생각이라고 말해 문도하에게 의문만 남겼다.
바로 그의 계획을 이서윤에게 말해 놓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눈만 마주치면 음울하게 짙어지는 그녀의 감정은 확연한 거부감을 띠고 있어서 자꾸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당장 이서윤에게 이런 말들을 꺼내 봐야 통하지 않으리라는 것처럼.
실제로 그가 몬스터의 위협 때문에 돌아가지 못하는 당위성을 설명했을 때도 그녀의 경계만 사고 끝났다. 그러니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야 하겠지.
그걸 위해서는 해결해야 하는 문제가 있었다. 우선 이서윤에게 드리워진 위험을 전부 제거하는 것.
사립 탐정이 주장한 대로 이서윤의 집을 뒤진 건 그녀의 주변을 맴돌던 사이비 무리가 맞았다. 다섯이 넘는 인원이 그녀의 집으로 향하는 게 미리 심어 두었던 CCTV에서 확인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확인한 이서윤의 집은 잔뜩 헤집어져 그들이 확연하게 뭔가를 찾고 있었다는 티가 났다. 그리고 문도하가 그녀에게 주었던 목걸이가 사라졌다.
여러모로 이상한 정황이었다. 뜬금없이 사이비 무리가 그녀를 납치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아니라면 그녀가 이렇게 적극적인 타깃이 된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만약 그들이 그녀를 납치하겠다고 마음먹은 게 맞다면, 왜 하필 이 시점인지가 의문이다.
그래서 문도하는 그들을 좀 더 깊게 파보라고 지시한 참이었다. 일반적인 사이비 종교가 아니라 또 다른 단체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그런데, 조사를 진행할수록 이상한 점이 나왔다.
“이게 전부라고?”
“네. 소유주의 행적에는 특별한 것이 없습니다. 정치 쪽에 연줄도, 사기 전과도 없습니다.”
“음…….”
사이비가 어떻게 형성이 되었든 제일 처음 그걸 만든 놈은 있기 마련이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교단을 소유한 사람을 파다 보면 대략적으로 윤곽이 나올 것이라 여겼다. 하지만 정말이지 어느 날 갑자기 멀쩡하게 잘 살던 이가 미쳐서 교단을 설립하기라도 한 양 자료가 깨끗했다.
이럴 땐 둘 중 하나였다. 이서윤이 정말 말도 안 되는 무리의 타깃이 되었거나, 사이비 교단이 더 높은 곳에 연줄이 있어서 문도하조차 실체를 알아내기 어렵거나.
뭔가 기분 나쁜 예감에 문도하는 설핏 인상을 썼다. 그녀에게 풀리지 않는 의혹의 손길이 뻗쳐있다는 사실이 못내 불안했다.
* *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클랜에는 비상이 걸렸다.
협회가 관리하는 방어라인이 또 뚫린 채 발견된 것이다. 노이로제에 걸린 클랜 연합에서 눈에 불을 켜고 찾아낸 성과였다. 이번엔 아예 뻥 뚫려 버린 방어라인의 모습은, 이곳을 부수고 들어온 몬스터가 대체 몇 마리나 되는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최근 들어 벌써 세 번째였다. 이쯤 되면 협회가 방어라인 관리를 포기한 건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도 정부와 협회는 대외적으로 정보가 새지 않게 하는 데만 급급하고 해결은 클랜 연합에 미루는 실정이었다. 애초에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에스퍼가 직접 나서야 하는 일이긴 했지만, 어쩐지 그들이 짠 판 위에서 놀아난다는 기분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규모가 크군.”
“네. 루어 수십 기가 파괴되었습니다. ……근처에 있는 CCTV가 하필 어제 낙뢰로 인해 고장 났었다고 하더군요.”
“하.”
코끝에 바닷물의 비린내가 불쾌히 스쳤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은 간혹 이 바닷물 냄새를 그립다고 표현하긴 했으나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거의 평생을 몬스터의 피비린내 섞인 바닷물 내음만 맡고 살던 문도하에게는 당연한 감상이었다.
철썩이는 파도는 죽음의 교향곡이나 마찬가지였다. 오늘처럼 파도가 높은 날은 물결 사이에 모습을 숨긴 몬스터가 날뛰기 쉬웠다. 덕분에 도심에 있어도 비가 내리는 음울한 날은 뼈마디가 욱신거렸다. 마치 더 큰 능력을 쓰기 위해 준비하는 것처럼.
방어라인이 또 뚫렸다는 소리에 당연히 클랜 측에서는 조사 인원을 파견했다. 두 번까지는 우연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세 번은 이제 더러운 필연으로 취급되기 마련이었다. 협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않는 건 클랜이 살아남기 위한 제 1수칙이기도 했다.
보고를 듣던 문도하는 사건 발생 위치가 심상치 않아 마지못해 출동 요청을 받아들였다.
현장에 도착한 직후 그는 뭔가가 조작되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방어라인 근처를 살폈으나, 이곳의 루어가 망가진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만 알아냈을 뿐이다. 정말 몬스터가 침투했다면 지금도 시시각각 도심을 향해 움직이고 있으리라.
“전류가 흐르긴 했네요.”
낙뢰로 인해 고장이 났다는 CCTV를 살피던 전류계 에스퍼가 눈을 가늘게 뜨고 말했다. 의심쩍다는 말투가 이게 정말 낙뢰인지 사람의 짓인지 알게 뭐냐는 뉘앙스를 담고 있다.
“루어 내장 기록 칩은 이미 다 수거해 갔습니다.”
다른 쪽에서 망가진 루어를 헤집던 국민 클랜의 연구원은 좋지 않은 소식을 전했다. 내장 칩도 그들의 소관이 아니긴 했으나 협회가 오기 전에 엿볼 수 있으면 많은 도움이 됐을 텐데 말이다.
국가의 존망이 달린 일인 만큼 루어들의 발동 방향은 중앙 시스템에서 관리한다. 그러니 하다못해 망가진 루어의 중앙 전산 기록에 접근할 수 있으면 좋겠으나,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시스템 조작은 가이드의 명단과 함께 협회가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큰 권한이었기에 간섭에 무척 예민하게 반응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몬스터가 부술 당시, 이 루어가 몬스터를 끌어들이는 방향으로 가동 중이었던 건 아니냐는 의혹에는 대놓고 반발할 게 뻔했다.
사실 이게 협회의 수작질이라 한들 문도하로서는 모든 게 권태로울 뿐이었다. 대체 뭘 노리기에 한 기에 천문학적 가격을 자랑하는 루어를 수십 기나 파괴해가면서 이런 일을 벌였겠는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사안이 있기나 한지 의문이었다.
분명 그랬는데, 막상 루어가 뚫린 위치의 좌표를 듣고 눈에 금방 살심이 들었다.
만약 몬스터가 침투한 게 맞다면, 그 예상 경로에 이서윤이 살던 동네가 있었다. 지리적으로도 또 가까운 곳이어서, 그걸 깨달았을 때는 그저 협회를 다 없애 버리고 싶다는 충동마저 들었다.
이해할 순 없었지만 이서윤은 아무래도 그녀가 살던 동네를 소중히 여기는 듯했다. 몬스터가 나타나도 돌아가겠다는 말부터 꺼낼 만큼 말이다. 그래서 그는 도심에 마련한 집을 억지로 안겨 주기보다는 원래 있던 곳으로 이서윤을 돌려놓으려 했다. 낡은 맨션은 이미 문도하가 매입한 지 오래였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또 그 동네에 몬스터가 출몰하기라도 하면 이제 그곳은 본격적으로 유령 도시화가 될 것이다. 쓰레기 같은 인간들에게 둘러싸여 사는 건 무척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빈 도시에 덩그러니 이서윤만 살게 놔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어쩌면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정부에서 나서서 도시 자체를 철수시키려고 할지도 모른다.
“일단은 수색조를 다시 편성하지.”
“네. 클랜 연합 측에 바로 안건 올리겠습니다.”
빤히 예상되는 그림에 문도하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이게 협회의 수작이든 실수든 꼭 수습해야 하는 이유가 생겨 버린 것이다.
부서진 루어를 보면서 문도하는 담담히 다음 행보를 생각했다. 이참에 이서윤의 동네를 완전히 안전구역으로 만들어 버려야겠다는 과감한 계획을 말이다. 가이드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에스퍼는 염려증 환자 같은 수준이 된다더니, 그가 딱 그렇게 굴고 있었다.
그게 여전히 머저리 같은 짓이라는 데에는 이견이 없지만 그만둘 수도 없었다.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우울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문도하는 덤덤히 이서윤의 하얀 얼굴을 그렸다. 이제는 습관으로 굳어진 짓이었다.
며칠 못 들어가겠군.
* *
―며칠 못 들어갈 것 같아.
“……그런가요?”
―……돌아가면…….
“네.”
―아니, 아니야. ……밥 거르지 않도록 해.
별로 지키고 싶지 않은 일이라 서윤은 그저 침묵했다. 얼마간의 공백을 두고는 이내 전화가 끊어졌다.
그녀는 바다에 오래 잠수라도 한 듯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한숨같이 흘러나온 숨결이 아무도 없는 거실에 무겁게 깔린다. 문도하가 온통 밝혀 두었던 집 곳곳의 전등은 꺼 버렸다. 어둡게 생활하던 게 오랜 습관이기도 했고, 그저 밝은 곳에 노출된 기분이 과히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손에 든 핸드폰을 힘없이 소파에 떨어트린 서윤은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무릎에 한쪽 뺨을 대고 기대니 자연스럽게 거실의 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그 위의 하얀 강아지 인형도.
통화를 하는 내내 울렁이던 감각이 다시 그녀를 괴롭혔다. 쓸데없이 집에 돌아올 수 없다는 사실을 전화까지 해서 알려주는 문도하. 한 손에 어울리지도 않는 인형을 들고 오는 문도하. 그녀가 즐겨 먹는 인스턴트 커피의 브랜드를 기억하는, 문도하.
전부 부질없는 단상이라는 듯 아지랑이처럼 여러 가지 모습의 문도하가 지나간다. 이렇게 서윤이 끊임없이 그를 생각하게 할 작정이었다면 성공적이다. 결국 서윤은 문도하를 완전히 무시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저 인형을 테이블에서 떨어지지 않게 옮겨 둔 것이 그녀의 최선이었다. 이대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넘어갈 순 없는 노릇이니까.
갑자기 태도가 이상해진 문도하를 의식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서윤은 그녀의 집에 강제로 들이치는 그를 선연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게는 그게 단지 목숨을 위한 갈급이었을지 모른다는 추측이 들 때면 한쪽에서 분연히 일어나 소리치는 상처 입은 자신이 있다.
상처는 언젠가는 낫는다. 서윤은 그것이 문도하와 자신 사이에서는 절대 통용되지 않을 것이라 선을 긋고 싶진 않았다. 다만 깊게 패인 자국은 시간이 흘러도 흉터를 남기게 마련이었다. 바로 그게 문제였다.
그 흉터를 보고도 무시하는 사람이라면 서윤은 그 옆자리를 버텨낼 자신이 없다. 인생이 풍랑이라면 적어도 손에 쥐고 의지할 판자 조각이라도 하나 있어야 버틸 수 있었다. 그저 폐에 들이차는 절망만 마시고 살기엔 그녀는 너무 연약한 한낱 인간이었다.
하지만 혹시 그가 변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가정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스스로가 바보 천치 같았다. 한 번 당해 놓고도 또다시 희망을 부여잡는 손은 미련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이 상황에서는 문도하가 그런 사람이기를 기대하는 것밖엔 빠져나갈 길이 요원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절벽 끝에 내몰렸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버거워서 마치 방어 자세를 취하듯 말이다.
우울했다. 그저 물에 폭 젖은 두꺼운 천이 그녀를 둘둘 말아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서윤은 결국 인형을 계속 바라보질 못하고 눈을 감았다. 정말 일방적으로 미워하기만 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어렴풋하게 깨닫고 만 문도하를 향한 연민은 끈질기게도 서윤의 발목을 잡고 있었다. 어쩌면 이게 가이드의 본능이라는 지긋지긋한 감각일지도 모르겠다. 그게 어느 쪽이든 달갑지 않다. 홀로 서는 것만 생각할 수 있던 때로 돌아갈 순 없을까.
정말 아이러니하게도 문도하가 변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볼수록 서윤은 더욱더 이 집에서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 *
오늘 하루 박남일 실장은 그야말로 누가 코를 베어 가도 모를 정도로 바빴다. 일단 문도하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게 그를 가장 바쁘게 하는 원인이었다.
‘혼자 가시겠다고요?’
‘그래. 최대한 빨리 끝내고 올 테니, ……이서윤을 좀 돌봐 줘.’
그러더니 그는 어제 수색조를 이끌고 휙 떠나 버렸다. 박남일 실장으로서는 다소 이해하지 못할 일이었다. 아무리 몬스터 예상 침투 루트에 이서윤의 집이 있다고는 하지만 문도하까지 나설 일인가 싶었던 것이다. 어차피 그녀는 지금 안전한 곳에 있으니까 말이다.
지금의 그는 흡사 저번 몬스터 사건 때 산을 뒤지고 다니던 문도하 같았다. 그렇게 이 잡듯 수색을 하고도 결국 몬스터가 이서윤 앞에 나타났으니, 그저 이번에도 그 에스퍼의 감이라는 게 발동한 건 아닌지 예상할 뿐이다.
게다가 이참에 주변 루어를 다 살펴보고 오겠다는 문도하의 선언에 급히 주변 도시나 클랜 지부에 빠짐없이 협조 공문도 보내 두어야 했다. 그래도 천만다행인 건 각 지부가 무척 협조적으로 나와 준 덕분에 문도하가 돌아오는 시간도 당겨질 듯싶었다. 아마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돌아오지 않을까.
문제는 문도하의 부재를 노리기라도 한 듯 일거리가 실장에게 밀려들었다는 점이다. 제가 일정 부분 결재 권한을 넘겨받은 상태였기에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다른 도시나 해안가 어딘가에 있을 문도하를 찾아 나서야 했을지도 모른다.
“실장님, 오셨어요?”
“그래. ……다들 저녁 메뉴 좀 미리 생각해 놔.”
“또 야근입니까? 이번엔 또 왜요.”
거기에 더해서 문도하는 박남일 실장이 행여 놀까 봐 걱정되었는지 말도 안 되는 일거리까지 던져 놓고 갔다. 벌써부터 이걸 대체 어디에 협조 요청을 보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어서 위가 다 시큰거린다.
“우리 도하 님이, 루어를 사고 싶대.”
“……바닷가에 박는 그 루어 말하는 겁니까?”
“그래.”
“아니죠. 혹시 낚시에 취미가 생기신 건 아닙니까. 일반적인 루어를 말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아니, 몬스터를 낚는 그 루어 맞아.”
간절한 얼굴이 된 그의 팀원들이 재차 물었지만 그는 굳은 안색으로 현실을 알려줘야만 했다. 예상대로 아주 격한 반응이 돌아온다.
“그걸 개인이 어떻게 삽니까!”
“……그러게 말이다.”
방어라인의 핵심인 몬스터 루어는 당연하겠지만 무척 비싸다. 그렇다고 돈이 있으면 살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나라는 루어에 해안가 방어를 의존하고 있는 형국이었고, 덕분에 생산되는 루어는 최우선적으로 국가를 상대로 판매되었다. 그러니 개인이 이를 구입하는 건 말도 안 되는 발상으로 취급된다.
바로 어제까지는.
이제 그 말도 안 되는 일을 현실로 만들어야 하는 박남일 실장과 팀원들은 금세 얼굴이 시커멓게 죽었다.
“저 좀 봐주십쇼, 실장님.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단 말입니다.”
“어쩔 수 없지, 취소해.”
“하, 정말. 친구 놈이 짤려서 위로주 쏘기로 했는데 뭐라고 합니까.”
팀의 막내가 우는소리를 했다. 생각해보니 어제부터 오늘은 중요한 약속이 있다고 야근이 없는 게 맞는지 몇 번이나 물었더랬다. 그도 설마하니 문도하가 이런 지시를 내리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에 조금 미안한 낯이 되었다.
“아, 맞다. 실장님도 아는 놈입니다. 왜 일전에 E급 가이드 명단 부탁했던 그 친구 있잖아요.”
“……그 명단?”
“네. 그때 우리 일 도와주고는 얼마 안 있다가 별 듣도 보도 못한 부서로 발령이 나더니, 이번에 실적이 부족하다고 권고사직을 당했다질 뭡니까. 협회면 준공무원이나 마찬가지인데 해고가 말이 됩니까, 예?”
“……으음.”
오랫동안 방치된 듯 낡은 문서고에서나 겨우 찾아냈던 ‘그 E급 명단’ 얘기를 듣는 순간, 어쩐지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문도하의 곁에 너무 오래 있던 탓일까, 그에게도 무언가의 예감 능력이 생긴 건 아닌지 하는 의심이 들 정도로.
이래저래 너무 공교롭다는 생각이 자꾸 스쳤다. 그 협회의 인맥이 이런 일을 당한 건 그저 우연일 수도 있는데 말이다. 아직까지 고작 E급인 이서윤이 문도하의 운명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실장을 제외하면 없었다.
갑작스럽게 지끈거리는 골을 문지르며 실장은 고뇌했다. 문도하가 신신당부까지 했으니 이서윤이 밥을 잘 먹는지 확인하러 가야 하는데, 그의 감이 자꾸만 경고를 보냈다.
이걸 어찌해야 한다.
그때 다른 팀원 한 명이 구르듯 사무실로 뛰쳐 들어오며 외쳤다.
“실장님! 내일 비정기 감사 들어온다는데요?”
“……뭐? 미친 거 아냐?”
회사원이라면 ‘감사’ 두 글자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나 국민 클랜의 감사실은 엄격하기로 소문나 실장의 위장병에 일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상한 건 하나 더 있었다. 비정기 감사를 들이닥치면 닥치는 거지 미리 알려주는 건 또 뭐란 말인가.
“감사실 동기 놈이 찔러준 겁니다.”
“아, 젠장.”
차라리 모르고 맞았으면 몰라도 이미 알고 있는데 준비를 안 할 순 없었다. 차오르는 두통을 고개를 흔들며 털어낸 실장은 재빠르게 우선순위를 정리한다.
“저녁부터 주문해.”
울상이 된 팀원들을 뒤로한 채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는 실장도 딱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 *
‘죄송합니다, 이서윤 씨. 오늘은 조금 늦을 것 같습니다만…….’
‘괜찮아요.’
‘많이 늦어질 것 같아서요. 먼저 주무시면 부엌에 물건만 조금 내려 두고 가겠습니다.’
저녁 식사 시간 즈음 걸려 온 박남일 실장의 전화였다. 어제부터 집에 돌아오지 않는 문도하를 대신해 그녀를 돌보려는 듯 아주 극성이었다.
통화를 마치면서도 그는 밥을 챙겨 먹으라고 신신당부했다. 문도하와는 다른 종류의 곤란함이 서윤을 잠식한다. 강하나의 따스한 태도가 그녀의 위안이 되었던 것처럼, 서윤은 실장 같은 서글서글한 태도에는 약했다.
심지어 그의 눈에는 연민과 함께 진심 어린 걱정이 늘 서려 있었다. 클랜의 사람이라면 서윤이 문도하의 가이드로서 기능하도록 무작정 강제하기만 할 것이라 여겼는데 말이다. 그래서일까, 이런 온정 있는 실장의 태도가 의외였다.
물론 순수한 걱정만 있다고 믿는 건 아니었다. 반쯤은 이서윤이 헛짓하지 않고 있는지 확인차 들르는 것이겠지만, 불편한 마음은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늦은 밤이 되도록 TV 앞에서 멍하니 시간을 죽이던 그녀는 슬슬 들어가서 자는 척을 할 결심을 했다. 마주치는 것보단 그게 나을 듯싶어서.
그 때 누군가가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시계를 얼핏 보니 늦은 밤이긴 했다. 다만 새벽에나 겨우 올 것처럼 말하던 실장의 말보다는 확연히 이른 시간이다. 생각보다 일이 일찍 끝났지만 혹시 그녀가 잘까 봐 평소처럼 초인종을 누르진 않았나 보다 여상히 생각하며 서윤은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감시하러 오는 목적도 있을 텐데 그냥 얼굴만 빨리 보이고 들어갈 작정이었다.
그렇게 현관문 앞으로 힘없이 걸어가는데. 다시 한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그 순간 진득한 위화감이 느껴진 서윤은 털레털레 걸어가던 걸음을 딱 멈추었다.
하지만 그녀의 발소리를 듣기라도 한 듯, 밖에 있던 사람은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곤 말했다. 놀랍게도 그녀가 아는 목소리였다. 이곳에서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자매님, 안에 계십니까?”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윤은 현관 쪽을 응시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는다. 뜬금없는 자매님 소리에 서윤은 숨마저 죽인 채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는 발걸음을 죽이며 거실에 아무렇게나 놓았던 핸드폰을 집어 왔다. 그녀의 물건이 아닌 듯 꺼림칙한 건 마찬가지지만 빈손으로 문밖의 저 인물을 상대하는 것보단 나을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저 사람이 여기 있지?
반사적으로 손에 쥔 핸드폰을 바라본다. 저 문밖이 빠짐없이 경호되고 있을 거라는 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도 실장은 아까 통화에서 아무런 언질이 없었다. 설마 사이비와 국민 클랜과 긴밀한 관계일 리는 없을 텐데 뭘까.
그녀의 앞을 가로막는 저 답답한 철문을 방패막이처럼 사용해야 하는 이 순간이 싫다.
“나가게 해 드리겠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실장에게 연락하려던 순간 들리는 소리에 그녀는 멈칫했다. 이곳에서 나갈 수 있다는 소리에 솔깃하는 건 사실이지만, 저 말을 믿는 건 아니었다. 목소리를 헷갈린 게 아니라면 분명 사이비 종교를 전도하던 그 사람이었다. 그런 수상한 인물을 뭘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심지어 저 말은 서윤이 이곳에 억류되었다는 걸 아는 뉘앙스였다. 국민 클랜과 문도하를 적으로 돌려서 뭘 어쩔 셈일까.
“여기 계시다가는 영원히 이렇게 갇혀 계실 텐데요.”
다만 서윤 자신의 상태는 생각보다 절박했던 모양이다. 정확히 그녀의 우려를 찌르는 사이비의 말에 그녀는 홀린 듯 대답하고 말았다. 이 순간이 꼭 TV로 다른 이의 이야기를 보는 걷는 것만 같았다.
“……무슨 꿍꿍이죠.”
“그저 이웃에 계시던 자매님이 고초를 겪으시는 게 안타까워 그럽니다.”
“…….”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입을 열어 버린 것도 후회하고 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워 삼키는 걸 보니 역시 제정신이 아닌 사람인 게 분명하다.
집 안쪽을 곁눈질하며 서윤은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오래도록 그녀의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밖에서는 헛웃음 흘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뭐지?
“잠시만 물러나 계시겠습니까?”
의아하게 현관문을 바라보는 그 순간, 갑자기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저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 만큼 무서운 소리였다. 쇠가 거칠게 마찰하는 소리가 꼭 천둥소리 같았다. 한쪽에서는 무언가가 위협적으로 쉭쉭거리는 소리마저 들렸다.
이내 굳게 닫혀 있는 철문이 해체되기 시작했다.
“무슨……!”
그야말로 무식한 방법이었다. 단단한 물건을 마구 파헤치는 소리가 나더니 현관 이음새가 있는 구석이 붉게 달아오른다. 철옹성 같던 현관문이 볼품없이 찌그러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주머니에 숨긴 서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바로 아무 방이나 뛰어 들어가 문을 잠그려는 찰나, 조금 벌어진 틈으로 사이비와 눈이 마주쳤다. 환하게 웃고 있는 그 눈은 서윤이 독 안에 든 쥐라는 걸 무척 잘 알려주고 있었다.
바짝 굳어 버린 서윤이 겨우 거실 끝까지 물러났을 무렵, 쾅 하는 굉음을 내며 현관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
“자매님.”
유례없이 활짝 열린 족쇄 앞에서 사이비가 인자한 웃음을 띠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 웃음과는 참으로 어울리지 않게도 그의 뒤에 잔뜩 몰려 있는 사람들은 손에 중장비를 하나씩 들고 있었다. 그 위협적이고 당황스런 장면 앞에서 서윤은 큰 공포를 느꼈다. 마치 몬스터를 목도하는 것 같은 순간이다.
지금이라도 안쪽으로 뛰어 들어가고 싶었다. 하지만 현관문을 저렇게 파괴한 자들이 금방이라도 뛰어와 그녀를 산산조각 낼 것만 같아 무서웠다. 머뭇거릴 게 아니라 바로 구조 전화라도 했어야 했다고 후회만 주워 삼킨다. 뭔가가 잘못되고 있었다.
공포에 질린 그녀를 살피던 사이비가 뒤를 보더니 손짓했다. 손짓 한 번에 직접적인 위협으로 다가왔던 사람들이 우르르 계단을 타고 밖으로 사라졌다. 그러자 곧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고요한 적막이 둘 사이에 내려앉는다. 험상궂은 이들과는 다르게 시종일관 자상하게 웃고 있는 그가 이상하게 부각된다.
아까부터 꿈 같다고 생각하던 감상이 좀 더 극대화되었다.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연신 넘어갔다.
검게 그을린, 현관문이었던 쇳조각을 바라보며 서윤은 허공을 응시했다. 비현실적인 일이 벌어지는 순간은 꼭 산소가 부족한 머리처럼 멍하기만 하다. 정신 차리고 지금이라도 방 안으로 뛰어 들어가야 한다는 본능의 외침이 그녀를 일깨웠다. 매캐한 쇠 녹은 냄새가 코를 찌른다.
“자유를 원하지 않으십니까?”
하지만 그 한 마디에 마법처럼 몸이 덜컥 멈췄다.
떨리는 눈동자를 들어 사이비와 눈을 마주한다. 환한 낮에 길거리에서 보았던 것처럼 그는 인자하고 선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의 약한 곳을 파고드는 뱀 같은 작자들 아니랄까 봐, 그는 지금 서윤에게 가장 필요한 걸 제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대체 여길 어떻게 왔는지, 그녀에게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는 무언지. 응당 지나가야 할 수많은 물음이 그저 파도의 포말인 듯 아스라이 사라진다. 그녀의 시선은 어느새 환하게 뚫린 대문 밖의 세상에 고정되어 있었다.
멍청하고 또 멍청한 짓이었다.
그런데도 서윤은 앞으로 스르륵 움직이는 발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벌써 세뇌라도 당한 양 경직된 몸이 잘만 움직인다. 더듬더듬 외줄 타기 같은 곡예를 부리고 나자 발에 차가운 금속 조각들이 채였다.
자그락거리는 것들을 밟아가며 그녀는 계속 발을 내디뎠다. 이상하게 지금 저 밖을 밟아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스스로의 행동이 비이성적이라는 자각과 본능의 충동질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렸다.
일전에 문도하에게 잡혀 밟지 못했던 곳을 기어코 밟고 나자 사이비가 옆으로 정중하게 물러나며 길을 틔워 주었다. 뻥 뚫린 앞을 보니 이제야 덜컥 겁이 난다.
“…….”
“자, 가시죠.”
이번엔 그녀의 퇴로를 막고 선 사이비가 앞을 손짓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들었다. 하지만 문도하의 집이 아닌 곳을 밟자마자 이상하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 든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서윤은 혼란을 숨기지 못한 채 걸음을 옮겼다.
* *
문도하의 예상보다 수색은 빨리 끝났다. 당초 근처의 방어라인은 죄다 살펴볼 생각으로 일정을 잡아서 며칠은 족히 걸리리라 예상했다. 하지만 박남일 실장의 적극적인 공문 덕분인지 국민 클랜 지부는 대대적으로 이런 그의 행보를 지원했다. 벌써 세 번이나 반복된 일을 더 이상 좌시하기 힘들어진 것도 사실이라서 아예 사건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취지였다.
덕분에 급히 국민 클랜 본사 건물로 돌아온 문도하는 넥타이를 매만지며 빠르게 사무실로 향했다. 그와 같이 갔던 이들은 내일 아침 차편을 타고 돌아올 예정이었으나 이상하게 몸이 달았다. 당장이라도 서윤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 한달음에 달려왔다. 어차피 숙면은 그와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 몸을 혹사하는 것도 자연스럽다.
바로 어제 지시한 일이니 별 성과는 없겠으나 루어에 대한 것도 궁금했다.
그가 개인적으로 루어를 구입하려는 건 다름 아닌 서윤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그 동네를 좋아하는 모양이니 확실하게 안전한 곳으로 만들어 버릴 계획이다. 루어로 동네를 둘러 버리는 미친 짓을 해서라도.
거칠게 실장의 사무실을 열고 들어가자 반쯤 졸며 서류를 보던 실장의 팀원들이 하나둘 황급히 벌떡 일어났다.
“실장은?”
“아, 좀 전에 문도하 님 집에 가신다고 가셨습니다.”
그가 여기 있는 걸 확인하고 왔는데 아무래도 길이 엇갈린 모양이다. 아마 실장으로서는 문도하가 내일 다른 파견 인원과 같이 온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테니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는 전해야 할 서류를 가까이 있던 팀원에게 한 아름 안겨 주었다. 새로운 일거리를 받아 드는 팀원들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갔지만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그저 서둘러 발걸음을 돌렸을 뿐이다.
어서 빨리 이서윤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굳이 클랜에 들를 필요는 없었는데, 박남일 실장에게 볼일이 있어서 시간을 낭비한 게 못내 아까웠다. 차를 주차해둔 곳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성급하다. 몸 상태만 조금 더 괜찮았다면 날아서라도 갔을 텐데.
그 때, 아무도 없는 클랜 1층의 광활한 로비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기척이지만 또 다른 야근하는 직원이겠거니 싶어서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인물이 정확히 그를 향해 말을 걸자 어쩔 수 없이 걸음이 딱 멈춘다.
“문도하 님, 잠깐 시간 되십니까?”
문도하처럼 빈틈없는 슈트 차림을 한 인물은 이강덕 이사였다.
하늘에 뜬 달이 분주히 퇴장을 준비할 정도로 늦은 새벽녘이었다. 대형 클랜답게 야근을 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는 게 역시 흔한 일은 아니었다. 심지어 그게 이사급의 인물이라니. 퍽 위화감이 느껴졌다.
갑작스럽게 그를 엄습하는 불길함에 문도하는 인상을 찡그렸다.
“바쁘니, 나중에.”
그저 하루나 이서윤을 보지 못했다는 초조함에 잠식된 탓이리라. 슬그머니 올라오는 그의 불안은 어차피 모두 이서윤과 관련 있었다. 그러니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그녀의 하얀 얼굴을 마주하면 전부 괜찮아질 것이었다.
하지만 미련 없이 뒤돌아서는 문도하를 따라오지도 않은 채 이강덕 이사는 다시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마치, 이 한 마디면 그가 바쁜 걸음마저 멈추고 돌아설 걸 안다는 듯이.
“요새 사이비 종교 하나를 파고 계신다지요?”
우뚝 걸음이 멈췄다.
그 순간 이사의 얕은 수작에 걸려들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반사적으로 나온 행동이다. 잠깐 동안 매끈한 클랜 건물의 바닥을 바라본 문도하가 결국 천천히 돌아섰다. 이 정도 기본적인 위장도 못 하고 몸이 말이 아니긴 하군.
아까 다가왔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던 이사가 만면에 친절한 미소를 걸었다. 타인이 입가에 균열을 걸든 말든 그와는 상관이 없었기에 문도하는 그저 분주히 고민했다.
이 시간에 자신을 불러내어 말하는 용건치곤 퍽 대담하기 짝이 없지 않은가.
“적당히 하는 게 좋을 거야.”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이며 문도하는 나지막이 경고했다. 그가 국민 클랜의 이사 직함을 달고 있지 않았다면 진즉에 목을 졸랐을 것이다. 건방지게 그의 앞에서 세 치 혀를 놀린 죄를 물으려고.
그가 이서윤 근처에 붙어 있는 사이비 종교를 파고 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극비에 속했다. 단순히 그가 연막으로 뿌린 행적을 주운 것과는 차원이 다른 정보력이라는 소리다. 문도하의 일정이나 정보망을 염탐했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건 마치 대놓고 시비를 거는 것과도 같았다.
게다가 이강덕 이사는 하필이면 자꾸 이서윤과 관련된 사안을 걸고넘어지는 탓에 대단히 거슬렸다.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전 그저, 작은 도움이 드리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그러더니 점잖은 척 뒷짐에 들고 있던 서류를 내밀었다. 다만 그 이상 다가오는 일 없이, 흡사 맹수에게 먹이를 주는 모양새였다. 어처구니없는 짓거리에 문도하는 그저 머리를 쓸어 올렸다. 같잖은 짓을 하는군.
가볍게 눈길을 서류로 보냈다. 그것만으로도 이강덕 이사의 손에 있던 서류가 거칠게 그의 앞으로 날아온다. 일부러 서류를 틀어서 잡아당긴 탓에 이강덕 이사는 손끝을 스치는 거친 종이에 베여 인상을 썼다. 조소를 날린 문도하는 일부러 과시라도 하듯 두 손을 쓰지 않고 허공에서 서류를 촤르륵 넘겼다.
“정말, 작은 도움이군.”
서류의 내용은 별것 없었다. 박남일 실장이 이미 알아낸 것처럼 사이비 교주의 대략적인 신원 정도. 심지어 그들이 파악해둔 교단의 지부 목록보다 빠진 곳이 더 많은 엉성한 자료였다.
혹시나 싶어서 자제하던 능력까지 과시했는데 소득이 없었다. 일단 문도하가 뭔가를 판다는 사실을 입수한 건 가상한 노력이나 정작 성과는 없지 않은가. 짜증스럽게 서류를 손으로 잡아챈 문도하가 가치 없다는 듯 서류를 탁 닫았다.
“그런데 이런 건 왜 알아보십니까?”
어느새 겁도 없이 다가온 이강덕 이사가 은근슬쩍 그의 의중을 묻는다. 고작 이 정도 자료를 가지고 생색을 내고자 함은 아닐 테고, 그저 거래를 원하는 것인가. 저번부터 권력인지 뭔지 모를 것을 위해 성가시게 구는 이강덕 이사를 차갑게 바라보는데 그의 핸드폰이 울렸다.
슬쩍 보니 박남일 실장이라 지체 없이 전화를 받는다. 하지만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몹시 다급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도하 님! 이서윤 씨가!
자세한 내용을 듣기도 전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 *
맨 처음 기절한 채 들어갔던 탓에 문도하의 집을 벗어나고 나서야 그곳이 고급 맨션이라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주변은 넓게 공터가 형성되어 있었고 그곳에 홀로 우뚝 선 건물은 마치 죄인의 탑 같았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어째 높다 싶었는데 최상층에 위치한 곳이었던 모양이다. 내려오며 문이 몇 개 더 있는 것을 보았으나 인기척은 없었다. 문도하의 성격상 아래층을 아예 비워 놓은 모양이다.
맨션 앞에는 낡은 승용차가 여러 대 멈춰서 있었다. 서윤은 사이비가 이끄는 대로 그중 하나에 올라탔다. 아까부터 제 발로 걷고 있긴 하지만 기이하게 잡혀가는 기분을 떨쳐낼 수가 없다. 기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만약 서윤이 제 발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들 그들이 그냥 돌아가진 않았을 것 같았으니까.
준비된 차량을 보니 위기감이 한층 그녀를 엄습했다. 대체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내려왔는지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느끼고 있던 것 이상으로 억압된 상황이 숨 막혔던 걸까. 일단은 얌전히 사이비가 손짓하는 대로 움직였다. 주머니의 핸드폰이 들키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아까 연장을 들고 있던 다른 무리들은 차에 없었고, 그녀를 끌고 내려온 사이비만 옆에 동승했다. 다만 차가 출발하자 바로 뒤따라오는 차가 있는 것을 보니 벌써부터 못내 후회가 되었다.
이 일대에 문도하의 눈길은 없는 걸까?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건지 사뭇 두려웠다.
“……어딜 가는 건가요.”
“저희 교단의 교육장으로 갑니다, 자매님.”
서윤은 저도 모르게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호랑이를 피하자고 늑대에게 달려온 꼴이다. 마른침을 한 번 삼킨 서윤은 그래도 문도하보다는 말이 통하는 듯 보이는 사이비에게 물었다.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일인가요. 자유라고 하셨던 것 같은데요.”
단체 생활을 하게 된다면 어쩌면 빈틈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문도하와 척을 지어 가면서까지 서윤을 데리러 온 걸 보면 어쩌면 그녀의 활용 가치는 큰 게 분명했고.
다만 추측을 계속 이어가기엔 역시 그녀는 아는 게 너무 부족했다. 일단은 순순히 협조하는 척해야 탈출 기회를 노릴 수 있을 것 같다.
다시 정보를 얻고자 조심스럽게 말을 붙이려는데, 사이비는 돌연 그녀를 똑바로 마주 보더니 질문을 던졌다.
“자매님은 자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네?”
“사실 인간의 자유 의지라는 건 허황된 믿음에 불과합니다.”
“…….”
조금씩 등 뒤쪽에서 무언가 슬그머니 기어 올라왔다. 불길함을 가득 담은 간지러운 감각에 목 뒤의 솜털이 곤두선다.
마주치는 사이비의 눈동자 속에서 서윤은 이제껏 보지 못했던 것을 하나 발견했다.
“하찮은 인간이 자유를 가져 봐야 제대로 쓸 수 없는 노릇이죠. 진정한 자유는 신의 품 안에서만 가능한 일입니다.”
“…….”
“그런 의미에서 자매님은 운이 좋으신 겁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신의 영접할 기회를 얻으셨으니까요!”
말도 안 되는 궤변은 전혀 이해 가지 않는 단어의 조합으로 서윤을 매섭게 몰아쳤다. 다만 그 와중에도 그가 자유와는 전혀 다른 것을 입에 담는다는 사실 하나만은 머릿속에 쏙쏙 박혀 들었다.
“신에게 정신을 의탁하시면 모든 게 다 편해질 겁니다, 자매님.”
그저 미소 띤 얼굴이라 생각했던 사이비의 얼굴은 다시 보니 광기에 젖어있었다. 눈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미친 사람의 신념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있다. 이제는 확연히 곤두선 경계심에 서윤은 말없이 떨었다.
그저 늑대라고만 생각하고 뛰어든 자신이 이 이상 어리석을 수가 없다 생각하면서.
* *
“화장실을 가야겠어요.”
“자매님, 일단 교육장으로 가면…….”
“사실, 아까 화장실을 가는 중이었는데 찾아오신 거예요. 정말 급하니까 제발 가게 해주세요.”
열변을 토하는 사이비의 곁에서 서윤은 내내 침묵하며 앉아 있었다. 사실 비명을 지르며 창밖으로 도움을 요청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최선이었다. 멀쩡한 낯가죽과는 다르게 사이비의 안에는 상상을 초월한 혼돈이 담겨 있었다. 서윤이 엇나가는 행동을 한번 하는 것만으로도 그 거죽이 펑 하고 터지며 그녀를 물어 버릴 것만 같았다.
도망쳐야 해.
조용히 자신을 다독이며 서윤은 때를 기다렸다. 한참 헛소리를 주워 삼키던 사이비는 중간에 전화를 한 통 받더니 인상을 구겼다. 뭔가 일이 틀어지기라도 한 걸까. 생각해보면 문도하가 진즉 이 사달을 눈치챘을 시간이기도 했다.
이윽고 한참을 어딘지 모를 산길을 헤매던 차가 조금 큰 도로로 나왔다. 마침 동이 트려고 하고 있었다. 흘긋 창밖을 보던 서윤은 저 앞에 휴게소로 보이는 큰 건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화장실을 가겠다고 뻗대었다. 당연히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지만, 서윤은 절박했다. 만약 문도하가 지금 그들의 뒤를 쫓고 있다면 이게 마지막 기회일 테니까.
결국 인상을 쓰며 그녀를 보던 사이비가 운전기사에게 잠깐 휴게소에 들를 것을 명령한다. 그녀를 정중하게 데려가려고 애쓰는 듯하다.
“빨리 돌아오세요, 갈 길이 멉니다.”
서윤이 수상한 짓을 하지 않는지 유심히 살피던 사이비가 여자 화장실 바로 앞까지 따라와서는 신신당부를 했다. 무척 다급한 기색이다.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서윤은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시야에서 벗어나자 조금 숨통이 트였다. 그건 다르게 말해서 더는 무서움을 의연하게 가릴 유인을 잃었다는 것과도 같은 말이었다.
손이 덜덜 떨린다. 집에 있던 복장 그대로 나온 탓에 몸을 파고드는 한기가 매서웠다.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가장 안쪽 칸의 화장실로 들어간 서윤이 초조하게 머리를 굴렸다. 일단은 그 차에서 내려야 할 것 같아 우기긴 했는데 어찌해야 할까.
조심스럽게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설마하니 갇혀 있던 사람이 핸드폰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는지 사이비는 몸수색도 하지 않았다. 그녀에겐 천만다행인 일이다.
핸드폰을 열어 통화 기록에 들어가자 문도하의 이름이 보였다. 지금 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게 맞는 일일까. 결국 이렇게 다시 그곳에 제 발로 돌아가야 한단 말인가.
비참한 선택의 기로 앞에서 서윤의 눈동자가 한곳에 머물렀다. 다름 아닌 강하나의 이름에.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서윤아, 힘든 일 있으면 꼭 연락해. 알았지?’
무심결에 지나가는 강하나의 음성이 그녀를 강타했다. 자꾸만 오갈 데 없는 무서움이 그녀의 안에서 눈물을 밀어냈다. 덜덜 떨리는 손이 추위 때문인지 공포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홀린 듯 통화를 누른다.
―……서윤아? 왜 이렇게 오랜만에 연락을 했어!
자다 일어났는지 강하나는 졸린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그 한가로운 음성에 덜컥 울음이 솟았다.
“하나야, ……어디야?”
겨우겨우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물었다. 하지만 동시에 깨닫는다. 강하나가 과연 지금 해줄 수 있는 게 있을까. 염치 불고하고 돈을 좀 꾸려 해도 받을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강하나에게 구하러 와 달라고 할 수도 없다, 그녀 또한 위험에 처할 테니.
―난 집이지. 하암……, 일찍 일어났구나. 넌 어디야?
이렇게 기본적인 것도 생각하지 못하고 통화를 누르다니 경솔했다. 대신 경찰에 신고라도 부탁해야 할까. 그렇다면 이번엔 문도하가 쫓아오고 말 것이다.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서러움이 북받쳐 오른다.
“나, 나는…….”
―서윤아?
형편없이 흐르는 눈물이 뺨을 차갑게 가로질렀다. 이렇게 전화를 하는 것만으로도 강하나에겐 큰 폐가 될지도 모른다. 문도하가 서윤을 뒤쫓고 있다면 분명 이 사실을 모를 리 없을 테니까.
힘없이 고개를 떨어트린 서윤은 한숨을 내쉬듯 연거푸 사과만 입에 담았다.
“……아니야. 미안, 미안해, 하나야. 끊을게.”
비겁한 사과가 채 메아리치기도 전에 전화를 끊었다. 심상치 않은 그녀의 목소리 때문인지 강하나가 다급하게 그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랑곳하지 않고 끊은 후에 서윤은 전화를 아예 꺼 버렸다.
혹시 모를 상황 때문에 가져오긴 했으나 방금 통화로 매섭게 깨닫기만 했다. 그녀는 문도하의 집에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설령 당장 사이비가 그녀를 납치하고 있는 순간에도.
“자매님, 이제 그만 나오시죠.”
밖에서 그녀를 재촉하는 소리가 들린다. 호흡이 점점 가빠지며 울음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나왔다. 몬스터를 만날 때와는 또 다른 공포였다. 문도하가 들이닥칠 때와도 사뭇 다르다. 날 것의 범죄에 노출되고 있다는 감각에 서윤은 몸서리쳤다.
꺼진 핸드폰을 들고 서윤은 우왕좌왕했다. 살고자 문도하에게 돌아가야 하는지 마지막까지 고민이다. 어차피 납치되었을 것이라고는 하나, 제 발로 그곳을 걸어 나왔다는 감각이 자꾸만 그녀를 괴롭혔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았다. 삼촌에게 맞아 골방 같은 곳에 갇혀 있을 때도 이 정도로 무섭진 않았는데.
벌벌 떠는 손으로 일단 화장실 칸의 문을 열고 나왔다. 주위를 둘러보며 손에 쥘 것이라도 찾는데, 낡은 공동 화장실 벽에 붙어 있는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어쩌면 그녀 하나 정도는 간신히 나갈 수 있을 법한.
“자매님!”
시간을 끌어야 한다. 그 일념 하나로 서윤은 목을 가다듬었다. 눈으로는 분주히 화장실 안을 훑는다. 목소리가 최대한 태연하게 들릴 수 있기를.
“곧 나갈게요.”
“……대답은 빨리빨리 해주시길 바랍니다.”
“네.”
화장실의 한 칸은 청소용품을 넣어 두는 창고로 쓰이고 있었다. 그곳에서 발 디딜 만한 걸레통을 발견한 그녀가 큰 소리가 나지 않도록 살금살금 그것을 옮겼다. 서둘러야 한다. 이미 너무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적당히 미끄러지지 않도록 그걸 고정한 서윤은 재빨리 창문을 열고 몸을 올렸다. 다행히도 그리 높지 않아서 수월하게 창문으로 몸을 밀어 넣을 수 있었다. 조금 빠듯하긴 했으나, 그간 좀 더 마른 탓에 아슬아슬하게 창문 밖으로 몸이 반쯤 내밀어졌다. 그때까지 손에 어중간하게 들려 있던 핸드폰이 먼저 창밖으로 떨어졌다.
상반신이 다 나가자 서윤은 요령껏 몸을 틀어 엉덩이로 창틀에 걸터앉았다. 그다음이 문제였다. 한 번도 창문을 이렇게 빠져나가 본 적이 없어서 곤란하기 짝이 없다. 화장실 밖에서는 다시 그녀를 채근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자매님. 안 나오시면 제가 들어갈 겁니다.”
“잠시만요.”
초조함에 우왕좌왕하던 그녀는 결국 억지로 몸을 빼려고 노력했다. 자칫 잘못하면 뒤통수부터 떨어질지도 모르는 위험한 자세라 불안하다. 결국 앗 하는 사이에 형편없이 땅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윽…….”
용케 머리는 부딪히지 않았으나 착지할 때 잘못 디딘 탓에 한쪽 발목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크게 신음을 내지도 못한 서윤은 무작정 기듯이 앞으로 일어난다. 마구 땅을 헤집던 손끝에 핸드폰의 딱딱한 질감이 툭 스쳤다.
“…….”
위치 추적 정도야 당연히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문도하에게 도움을 청할 마지막 기회였다. 짧은 시간 동안 무수히 많은 상념이 그녀를 겨울바람처럼 통과했다. 시리도록 차가운 온도에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러나 숨 막히던 그의 집을 떠올리자 그녀의 흔들리던 눈동자가 뚝 멎었다.
서윤은 맨손으로 일어나기로 결심했다.
산 중간에 있는 휴게소답게 공중화장실도 산자락에 붙어 있었다. 특히 화장실 뒤쪽을 땔감용 나무 창고로라도 썼는지 휴게소 쪽에서는 그냥 올 수 없게 양옆이 막혀 있었다. 그나마 운이 좋았다.
앞에 펼쳐진 겨울 산의 황량한 나무들 틈 사이로 서윤은 절뚝이며 걸었다. 알아차리기 전에 더 빨리. 조급한 마음만큼 다리가 따라 주지 않아 야속하다.
“자매님!”
“흡, 흐윽.”
그녀가 막 다 쓰러져 가는 고목 하나를 잡고 비탈길을 기어올랐을 때, 뒤에서 고성이 터졌다. 반사적으로 뒤돌아보자 사이비가 창문을 빠져나오려 버둥거리는 게 보였다. 다행히도 체구가 큰 편인 사이비는 서윤처럼 창문을 빠져나오기 힘들 듯하다.
“뒤로 가! 쫓아!”
눈물이 가린 시야 사이로 겨울 숲이 번졌다 또렷해졌다를 반복했다. 어느새 발목의 아픔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엎어지면 오뚜기처럼 바로 일어났다. 다시 나무에 걸려 넘어지면 손끝으로 나뭇등걸을 긁는 한이 있더라도 일어나기를 반복했다.
처절한 산행은 서윤의 인생과도 같았다.
생각해보면 세상을 사는 그녀의 걸음걸이는 늘 이런 식이었다. 공중화장실 뒤쪽 길이 막힌 게 그녀에게는 행운이었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먼저 비탈길을 오른 덕에 그녀가 조금 앞서갈 수는 있었다. 하지만 겨울 산에서 패닉에 빠져 그저 두서없이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는 그녀의 행보는 너무 훤히 노출되어 있었다.
시시각각으로 다가오는 나뭇가지 부서지는 소리는 꼭 그녀를 짓밟는 소리와도 같았다. 헐떡이는 숨은 곧 넘어갈 듯 그녀를 옥죄어 온다.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후회처럼 마른 산을 적신다.
그저 소소하게 살아가고 싶었을 뿐인데.
기어코 지척으로 다가온 남자 하나가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때마침 나뭇등걸에 걸려 엎어진 그녀가 채 일어나기도 전에 발목으로 뱀 같은 손아귀가 다가왔다. 마치 그게 그녀를 영영 지옥으로 끌고 갈 손길처럼만 보였다.
그녀의 몸에 닿기 직전, 남자의 손목이 기괴하게 비틀어지지만 않았다면.
“끄아아아아아!”
“헉.”
“도, 도망쳐.”
“아아악!”
기시감이 느껴지는 장면이었다. 제멋대로 손목이 돌아간 남자는 이내 멀리 튕겨 나가 나무에 거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사부작 나뭇잎이 곱게 밟히는 소리가 난 건 그다음이었다. 그 사뿐한 소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비명 소리가 산 곳곳에서 울려 퍼졌다. 방금 그녀의 앞에 내려선 문도하를 중심으로 꼭 파동이 일어나는 듯하다.
그의 앞에 볼품없이 엎어져 있는 그녀의 위치가 꼭 그에게 느끼는 무거운 무력함을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몬스터에게서 한 번, 사이비에게서 또 한 번 그녀를 구해낸 문도하는 악몽이자 구원이었다. 이 가증스러운 타이밍이 꼭 사이비들이 건네는 거짓 구원과도 같아 서윤은 눈물을 멈출 수가 없다.
“이서윤.”
차가운 눈빛으로 서윤을 내려다보던 문도하가 나지막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그 순간, 기절하지 않았는데도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늑대무리를 피하고자 손끝이 다 터지도록 기어 도망친 이곳은, 결국 다시 문도하의 앞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