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5. 흉터(1) (16/27)

목차

5. 흉터

(1)

그건 실로 잔인한 감각이었다.

문도하의 세계는 깊은 지저에 위치해 있었다. 매끄럽게 다듬어진 기이한 동굴에서 그는 어두컴컴한 사람들을 관찰하는 따분한 일상을 보냈다. 그런 그의 일상에 어느 날 갑자기 이서윤이 나타났다. 검은 사람들 사이에서 유일하게 하얀 얼굴을 가진 그녀가.

가슴속에 있는 감정의 모습을 그녀가 처음으로 문도하에게 보여 주었다. 비록 두려움이나 분노 같은 부정적인 것뿐이어도, 문도하는 이 새로운 경험이 꽤 만족스러웠다. 그의 어두운 세계에서는 그렇게 반딧불처럼 미약한 빛도 꽤 값어치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틀 전 그녀가 TV를 보며 보여 준 감정은 여태껏 그가 관찰한 것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포근하고 따듯한, 어쩌면 햇살보다 찬란한 빛.

그 빛 앞에선 그가 수집하듯 어여쁘게 모은 그간의 감정들은 한낱 반사광에 불과했다. 탁하고 볼품없는 그것들은 더 이상 예쁘지 않았다. 그동안 열심히 모아 왔던 감정의 편린들이 사실은 쓰레기만도 못했다는 사실이 못내 충격적이다.

그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했다고 해서 문도하가 바로 평범한 사람처럼 울고 웃을 수 있게 된 건 아니었다. 아직도 그에게 직접 영향을 미치는 건 이서윤 한 사람뿐이었으니까.

다만 그는 해바라기가 해를 따라 서서히 고개를 돌리듯 덤덤히 깨달았을 뿐이다. 그가 사실은 꽤 오래전부터 그녀의 아픔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는 걸.

생전 처음 손끝에 보드랍게 닿을 듯한 그녀의 빛이 온통 머리를 메웠다. 그게 사라지는 것이 못내 아쉬워서, 문도하는 그날 그녀가 뒤를 돌아볼 때까지 허락되지 않은 광경을 훔쳐보았다. 역시나 그와 눈을 마주친 순간 빛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메운 건 어둡고 축축한 분노였을 뿐이다.

그게 너무 허탈해서 문도하는 손에 들고 있던 초라한 음식을 그녀 앞에 던지듯 내려놓고 도망치는 수밖엔 도리가 없었다.

“후…….”

넥타이를 고쳐 매며 문도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얼마 전부터는 일상이 된 두통이 그를 엄습했기 때문이다. 잠시 동상처럼 그렇게 멈춰서 있자 조금쯤 사그라든다. 다시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움직였다.

지난 이틀간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그는 방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렇다고 아예 그녀의 곁을 떠날 수는 없었다. 목마른 자가 한 걸음 앞의 샘을 망연히 바라보듯 그렇게 어떻게든 이서윤의 근처에 있고 싶어 몸이 달았다.

그가 방에서 나가질 않자 이서윤은 곧잘 집 내부를 돌아다녔다. 그래서 더더욱, 끼니를 챙겨주러 나갈 때 말고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신이 그녀의 시야에 드는 순간 어둠이 몰려올 테니까.

단 한 번 정확히 목격했을 뿐인데도 이미 중독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영혼을 치유하는 따스한 바람을 어떻게든 바라보고 싶은 욕망에 거칠게 휘둘린다. 안 될 걸 알면서도 손을 뻗는 스스로가 너무 어리석다는 자각이 들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걸 또 볼 수 있지.

그녀의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클랜에서 신신당부한 일정이 있어서 도무지 집에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마지못해 외출 준비를 하면서도 문도하는 계속 한쪽 벽을 바라보았다. 이서윤의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을.

“…….”

준비를 마친 그가 방 밖으로 나서니 거실에서 TV를 보던 서윤이 무심히 고개를 돌렸다. 그때와는 또 다른 동물들이 나오는 방송이었다.

그날 이후로 서윤은 TV를 줄곧 보았다. 대체로 작은 동물이 나오는 프로그램들이었다. 어쩔 땐 같은 소리가 반복되기도 했는데, 문도하는 그걸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를 바라보니 그녀의 마음이 당연히 어두워진다. 그 질책이 두려워 문도하는 이서윤을 지나쳐 걸었다. 망설임 없이 현관문으로 향하는데 오늘따라 그녀의 시선이 길게 등 뒤로 따라붙었다.

잠깐 그 눈길에 사로잡힌 문도하가 고뇌 끝에 멈춰 섰다.

“……뭐 필요한 건 없나?”

슬쩍 반쯤 뒤돌아보며 물었으나 이서윤은 묵묵부답이었다. 텅 빈 눈길에는 매서운 질책이 서려 있다. 무릎에 힘이 탁 풀릴 것만 같아서 그는 도망치듯 집 밖으로 나섰다. 폭주가 일어나는 것도 아닌데 걷고 있는 발밑이 꼭 가시밭길 같았다.

이서윤의 마음에 반짝이는 빛은 흔적도 없었다.

* *

생각해보면 그 반짝거리는 감정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다.

이서윤에게 삼촌이 그녀의 뒤를 쫓고 있음을 호의로 알려줬을 때 스쳐 지나갔던 것이 있었다. 그때는 그저 잘못 보았다 치부했으나, 분명 그 환한 빛과 비슷한 감정이었던 게 분명하다. 어느 쪽이든 지금 그를 향하는 어두운 기운과는 많이 달랐다.

뭔가 정보를 공유하면 좋아하는 걸까, 서윤은.

권태롭게 순찰 지정 구역에 서 있던 문도하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오랜만에 대중 앞에 모습을 드러낸 탓인지, 그의 주위에는 사람이 벌떼처럼 몰려 있었다. 국민 클랜에서 파견된 이들이 그들의 접근을 멀찍이서 막긴 했으나 소용없었다. 기감이 발달한 그에게는 지척에서 소란을 피우는 것과 다름없었으니까.

꼭 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도심지까지는 오지도 못할 몬스터를 대비하겠다며 이런 쇼를 보여야 하는 게.

몰래 찍는답시고 가리고 있으나 그들이 카메라를 들이대고 있는 게 너무 잘 느껴졌다. 손으로 가려도 그에게는 셔터음이 천둥 같다. 카메라 렌즈는 꼭 몬스터의 눈알처럼 그를 응시했다. 까딱하면 몬스터가 아닌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폭주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덤덤히 흘려보냈다.

오늘은 이서윤에 관해 고민하니 그럭저럭 버틸 만했기에.

“도하 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을 것 같나?”

“곧 끝나니까 조금만 더 힘내시죠.”

그래도 퍽 웃기는 일이었다. 하필이면 고위급 인사들이 많이 모여 사는 부촌이 그의 배정지가 된 것이 말이다.

몬스터가 거주 지역에 나타난 후 클랜은 협회를 압박해 방어라인 근처의 감시체계를 일정 부문 공개할 것을 닦달했다. 그 결과 참으로 어이없게도 방어라인이 뚫린 흔적이 더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몇몇 몬스터는 자연적으로 산화한 채 발견되었다.

다만 문도하는 높은 담벼락을 가진 주택가를 바라보며 조소했다. CCTV로 역추적한 결과, 만약 다른 곳에서 침투한 몬스터가 살아 있다 해도 오늘이면 전부 죽을 것이다. 데드라인과도 같은 시점에 자신이 이곳에 배치된 게 과연 우연일지.

문도하는 싸늘한 조소와 함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생각할수록 부아가 치미는 일이다. 협회의 수작질에 놀아나는 게 과연 언제쯤 끝이 날는지 알 수가 없었다. 썩어빠진 그들이 가지고 있는 몇 안 되는 권한마저 깡그리 빼앗아야 이 전쟁이 끝이 나려나.

위로랍시고 옆에서 실장이 물을 건넸다. 카메라의 셔터 소리가 더 요란해진다. 싸늘하게 눈매를 굳히며 입을 열려던 문도하는 실장을 본 순간 멈칫했다.

“…….”

최근 문도하가 예민한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그는 또 목숨을 걸고 이곳에 따라 나왔다. 막상 자신이 폭주하게 되면 실장으로서는 할 수 있는 게 없는데도 대단한 책임감이었다. 폭주하는 에스퍼의 옆자리는 자살하기 딱 좋은 장소인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도 실장은 물을 받아들지 않는 문도하를 보며 걱정 어린 눈빛을 보낸다. 갑작스럽게 그 사실을 깨달은 문도하는 날 선 말을 주워 삼킨 채 얌전히 물병을 받아 들었다.

“도하 님?”

“……잘 버티고 있으니까 조용히 해.”

그의 이런 반응에 실장의 안색은 한층 시커멓게 변했다. 평소답지 않은 짓을 했다는 걸 깨달은 문도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이서윤이 그의 마음에 억지로 심어낸 것들이 문도하를 성공적으로 흔들고 있었다.

“저번 회의록 남아 있나?”

“네? 아, 그 협회 측에서 제공한, ……자료 말씀이십니까?”

극비 자료를 입에 담는 실장의 목소리가 한껏 작아진다. 몬스터를 떠올리니 이서윤 생각이 났다. 정확히는 그녀를 당장 집 밖으로 내보낼 수 없는 이유가. 그리고 아까 불현듯 떠올렸던 단상도 같이.

이걸 알려주면, 이서윤은 기꺼워할까?

아지랑이 같은 감각이 그를 충동질한다. 목으로 넘어가는 물은 새는 일 없이 그의 목구멍을 타고 들어갔다. 그 차가운 감각이 선명한데도 어쩐지 목이 계속 마르다.

“그 자료들 잘 좀 정리해 봐.”

“네? 언제까지 필요하신지.”

“오늘 저녁.”

박남일 실장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오늘따라 뚜렷하게 보이는 그 표정을 묵묵히 내려다보면서 문도하는 물병을 구겼다. 그런 극비 자료를 갑자기 요구하면 곤란하긴 하겠지.

그런데도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했다. 당장 이서윤에게 그 사실을 꼭 알려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 *

벌써 몇 번째 돌려보는 동물 프로그램을 서윤은 멍하니 응시했다. 발랄하게 뛰노는 강아지들의 꼬리가 부산히도 움직인다. 어차피 이 집에선 의미 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밖엔 그녀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답답함이 명치에서 소용돌이치다 못해 몸통을 꿰뚫을 것 같을 때면 그녀는 TV를 봤다. 그 속에 담긴 바깥의 풍경들이 조금이나마 그녀를 위로하는 것 같아서.

아침에 일을 하러 나서던 문도하는 조금 이상한 기색이었다. 꼭 그녀에게서 도망치는 듯한 행색은 착각이 아니었나 보다. 며칠간 느꼈던 것처럼.

하지만 그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녀의 분노를 쉽게 자아냈다. 필요한 게 없냐고 묻다니, 제게 지금 정말 필요한 게 뭔지 모르는 걸까.

평소같이 보상 운운하는 걸 보니 뻔했다. 가이딩이 필요해진 거겠지. 그가 가져왔던 붉은 보석을 떠올린 서윤은 미간을 곱게 구겼다.

그러고 보니 옷장 안에 대충 처박아 둔 그 보석은 도둑맞았으리라. 마지막으로 봤던 집 안의 광경을 생각하니 이번엔 의문이 들어찬다. 삼촌이 보냈다던 사립 탐정이 뒤진 게 맞겠지?

그 때 밖에서 묵직한 걸음 소리가 들렸다. 반사적으로 현관문을 바라보자 역시나 문도하가 돌아왔다. 한 손에는 파일 하나를 든 채로.

무심히 눈길을 보냈으나 뜨겁게 마주쳤다. 며칠과는 다르게 서윤을 빤히 바라보는 문도하가 불편하다. 시계를 흘긋 봤더니 어느새 저녁때였다. 한번 나가면 무척 늦게 오곤 했던 문도하가 돌아오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기도 했다.

며칠간 그녀에게 밥을 못 먹여서 안달이었던 그이기에 다음 행동이 빤히 예상되었다. 오늘은 정말 입맛이 없어서 서윤은 도망치듯 방 안으로 사라질 결심을 했다.

미련 없이 TV를 꺼 버렸다. 왜인지 거실과 그녀의 방 사이에 멈춰선 문도하는 그런 그녀를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 다녀왔냐는 살가운 말을 할 사이도 아니니 서윤은 최대한 평정을 가장한 채 그를 스쳐 방으로 향했다.

그 순간 팔목이 잡혔다.

손아귀 힘은 강하지 않았지만 서윤은 반사적으로 놀라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문도하 또한 불에 덴 듯 그녀의 서둘러 팔을 놔주었다. 그 반응이 예상 밖이라 서윤은 저도 모르게 문도하의 얼굴을 봤다.

저건 무얼 담고 있는 표정일까.

“잠깐, 얘기 좀 해.”

곧은 눈길이 관찰하듯 그녀를 바라보더니 이내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녀가 등 돌려 가버린다 한들 문도하는 잡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 순순한 태도가 걸렸다.

“무슨 얘기요.”

“……저기 앉는 건 어때.”

문도하가 방금까지 서윤이 앉아 있던 소파를 눈짓했다. 얘기가 얼마나 길어지려고 이러나 싶어서 서윤은 반대로 눈을 가늘게 뜨며 문도하를 관찰했다. 그 빤한 시선에 그가 어쩐지 곤란해 보이는 건 착각일까.

먼저 걸음을 옮기는 문도하를 따라 얌전히 소파에 앉는다. 아까부터 그가 손에 쥔 채로 놓지 않는 서류철이 마음에 걸렸다.

“이걸 보겠어?”

스스럼없이 건네는 파일을 받아 여니 제일 먼저 정갈하게 정리된 서류철과 상단의 도장이 보인다. ‘협회’라고 쓰여 있는 것을 보니 어딘가의 공문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중간엔 빨간 도장으로 1급 기밀이라는 표시가 떡하니 찍혀 있었다.

“이게……?”

“몬스터의 활동 범위가 늘어났어. 엄밀히 말하자면 활동 시간.”

“…….”

“본래 육지에서 6시간 정도 살아남던 것들이 이제 최대 9시간 정도 살아남고 있지.”

서윤이 머뭇거린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닌데도, 문도하는 그녀가 내용을 이해 못 했다고 생각했는지 차근히 설명을 이어갔다.

“……이서윤 네 집이 있던 곳은 본래도 위험지역이긴 했지만, 지금은 확실하게 안전하지 않아.”

“……아.”

그의 말에 그녀를 덮치던 몬스터의 잔상이 떠올랐다. 엄습하던 죽음의 순간이 축축한 바닷물 냄새를 싣고 다시 그녀의 등에 올라탔다. 선득한 감각에 서윤은 몸을 움츠렸다. 집 안에 있는데도 발밑에 다시 피 웅덩이가 솟아오르는 듯했다.

그런데 습관적으로 시선을 내리까는 서윤의 시야에 이상한 게 들어왔다. 얌전히 무릎 위에 두 손을 올려놓고 말을 꺼내던 문도하가 고운 양복을 구기며 손에 힘을 주고 있었다. 마치 뭔가가 괴롭다는 듯이 말이다.

그 뜻밖의 광경 때문에 서윤은 다시 현실로 돌아와 그를 마주했다. 잔뜩 굳은 얼굴의 문도하는 잠깐 시선을 거실의 테이블 쪽으로 내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 방어라인은 총 세 군데가 뚫린 것으로 보고되었지. 본래는 위험도가 무척 낮은 지역이라 상대적으로 감시를 소홀히 한 것 같아. 아무래도 협회가 횡령을 일삼는 것 같다고 국민 클랜은 추측하고 있어.”

“……그러면 안 되는 것 아닌가요?”

“그걸 아는 놈들이면 처음부터 부정을 저지를 생각을 안 하겠지.”

냉소적인 문도하의 말에는 깊은 한기가 스며 있었다. 케케묵은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난다. 협회라면 서윤이 삼촌에 손에 끌려 가이드 적합 검사를 받으러 갔던 곳이었다. 그녀를 상품 취급했던 삼촌의 영향 때문일까, 서윤도 협회에 대해 좋은 기억은 갖고 잊지 않았다.

과거의 어두운 기운이 배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길을 걸어온 듯한 문도하를 새삼스럽게 바라본다. 그는 아까부터 시종일관 무척 굳은 얼굴이었다.

“……더 궁금한 게 있나?”

궁금한 건 무척 많았다. 몬스터의 활동 범위가 왜 갑자기 늘어났는지, 그걸 왜 사람들에게 공표하진 않는지. 늘어났다면 언제부터였는지. 이것 말고도 대체 협회나 클랜이 숨기고 있는 비밀은 또 뭐가 있는지.

하지만 지금은, 누가 봐도 최상위 기밀일 게 분명한 자료를 들고 와 그녀에게 내미는 문도하의 의도가 궁금했다.

“이걸 나한테 왜 보여 주는 거죠?”

반사적으로 대답하려고 했던 문도하는 입술을 채 열지도 못한 채 침묵에 빠졌다. 그가 말을 할수록 점점 어두워지는 이서윤을 보니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다만 입술이 마음대로 움직였다 한들 대답을 꺼내 놓았을지는 의문이다. 그 또한 자신이 무슨 생각으로 이걸 준비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 그저 일전에 있었던 것과 비슷한 상황을 본능적으로 만들어 보려고 했던 것 같았다.

그저 이렇게 서류를 늘어놓는 것으로 그 환한 빛을 다시 마주할 수 있으리라 여긴 걸까. 낮에 거쳤던 사고가 퍽 맥락이 없었다는 걸 문도하는 이제야 깨달았다. 그녀의 앞에서는 명민한 머리도 다 시궁창에 처박고 돌아온 사람처럼 굴고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

끝내 침묵하는 그를 보면서 서윤은 경계심만 끌어 올렸다. 이런 기밀을 알고 있는 게 소시민인 그녀에게 도움이 될 리가 없는데, 왜 알려주는 걸까. 설마 집은 위험하니 얌전히 있으라는 소리인가. 벗어날 생각은 하지 말라며 겁을 줄 목적으로.

억측은 곧 확신이 되어 그녀에게 자리 잡는다. 서로 다른 상념 속에서 침묵만 무겁게 거실을 메웠다.

* *

집에 돌아온 이후 다시 방에 처박힌 문도하는 멍하니 벽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방밖에서는 이서윤이 물을 먹고 다시 거실로 돌아가는 모양이었다. 눈으로 보는 건 아니라도 그녀를 훔쳐보는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하지만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그녀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으로 시선이 향했다.

중독이 만들어 낸 갈증은 하루가 지날수록 심해지고 있었다.

본래라면 시내 순찰을 하고 온 이후로 클랜에 나갔어야 하지만 내키지가 않았다. 결국 그는 상태가 좋지 않다는 핑계를 대고 말았다. 한 번도 그런 소리를 하지 않았던 문도하였기에 실장은 어둡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더 정확히는 이서윤의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와 제가 얼굴 맞대고 사이좋게 있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음울한 기운을 내뿜는 이서윤을 보면 견딜 수가 없다. 그래서 이렇게 방에서 멍하니 이서윤의 기척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보며 시간을 죽이고 있는 것이다.

그 때 초인종 소리가 울렸다. 매일 식사를 가져다주는 박남일 실장이 온 모양이다.

“오셨어요.”

“안녕하세요. 이서윤 씨.”

양손 무겁게 들어온 실장이 부엌에 음식 재료들을 내려놓았다. 매번 먹는 둥 마는 둥 하는 이서윤이 신경 쓰인 나머지 제대로 된 밥을 가져오라고 말해 둔 참이었다. 이제껏 문도하의 열량보충 위주인 식사 스타일에 익숙하던 실장은 그제야 이런저런 식재료를 사다 나르기 시작했다.

“몸은 괜찮으신가요?”

슬쩍 다가온 실장이 이서윤에게는 들리지 않도록 문도하에게 물었다. 그가 3일째 집에서 나올 생각을 하지 않자 사뭇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그는 그저 고개만 슬쩍 끄덕이고 말았다.

그가 칩거를 시작하고 나서 얼마 후, 실장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제대로 된 가이딩을 기대할 수는 없는 상황인 걸 알지만, 그렇다고 이서윤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는 않다고. 목이 졸릴 걸 각오한 얼굴이었다.

사실 클랜에서는 암암리에 에스퍼가 가이드를 통제하는 걸 도왔으니 그로서는 업무를 방기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그게 왜인지 거슬리지 않았다. 새삼스럽게 박남일 실장의 얼굴을 바라보던 문도하는 신경 끄라고 차갑게 말하긴 했으나 오래도록 그 말을 곱씹었다.

“이서윤 씨, 배고프시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매번 안 이러셔도 돼요.”

“제가 죄송해서 그러는 겁니다.”

이서윤과 박남일 실장은 잠깐 눈을 마주쳤다. 복잡하게 소용돌이치는 이서윤의 감정은 문도하를 볼 때보다는 탁한 빛이 덜하다. 그 과정을 이해해 보려고 문도하는 눈을 떼지 못한 채 그들을 관찰했다.

분위기를 환기시키고 싶었는지 실장은 애써 밝은 어조로 이서윤에게 이런저런 말을 걸었다. 그러면서 문도하에게 손짓해 그를 식탁에 앉힌다. 하루 중 유일하게 집이 말소리로 가득 차는 시간이었다.

“이서윤 씨, 양념갈비는 좋아하십니까?”

“……감사히 먹을게요.”

왜인지 이서윤은 퍽 불편하다는 낯을 하면서도 실장이 부르는 식사 자리에는 꼬박꼬박 나왔다. 그곳에 문도하가 있을지라도 말이다.

식욕 따윈 잃은 지 오래인 문도하도 군말 없이 이 불편한 자리에 동참했다.

가끔은 이처럼 그녀의 앞에 할 수 없이 모습을 드러낼 핑계가 필요했다는 기분이 들었다. 매 순간 이서윤의 기척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꼭 그녀가 보고 싶다는 듯이.

이윽고 체할 것 같은 식사가 이어졌다. 이서윤의 권유로 실장도 함께하는 자리였다. 그가 있으면 어쨌든 이서윤의 목소리가 간간이 들리기 때문에 문도하로서도 막을 이유가 없었다.

입에 넣은 고기가 턱의 움직임에 따라 산산이 부서졌다. 미각은 그의 정신 오염이 시작되며 가장 먼저 오염된 감각이었다. 물에 삶아 연해진 고무를 먹는 기분으로 그는 매 식사 시간을 버텨 왔다. 어쩔 땐 산해진미라는 것들이 썩은 내를 풍기기도 했다. 냉장고가 대충 먹고 치울 수 있는 음식 위주로 채워져 있던 건 실장이 이런 그의 상태를 잘 알기 때문이다.

슬프게도 문도하의 인생에서 미식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어릴 적엔 배를 곯을 정도로 가난했고, 에스퍼가 된 이후엔 금세 정신 오염에 시달린 탓이다. 물론 가끔은 일부러 양질의 식사를 하긴 했다. 가령 일전에 이서윤을 데려갔던 레스토랑 같은 곳 말이다. 때로는 사회적인 이유로, 때로는 그저 영양학적 관점으로 계산한 행동이었다.

그런데 건너편에 앉은 이서윤은 꼭 그처럼 음식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얼굴이었다. 음울한 기운은 이제 그녀의 감정 그 자체인 듯 항상 그녀의 근처에 머물러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혹시 싫어하는 음식을 마지못해 먹는 건 아닌지 불현듯 의문이 들었다.

“……좋아하는 음식이 따로 있나?”

그의 질문에 이서윤이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빤히 그를 향하는 시선은 여느 때와 같았다. 이상한 긴장감이 들어서 문도하는 몰래 식탁 아래로 주먹을 쥐었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우울하게 흩어질 뿐이다.

“없어요.”

반석같이 곧은 그녀의 답변에 문도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실장도 종종 이서윤에게 좋아하는 걸 묻곤 했다. 한 번도 제대로 답변해준 적은 없었지만.

그 또한 좋아하는 음식 따윈 없기에 그저 수긍하려다가 위화감을 느낀다. 설마하니 가이드에게 정신 오염이 있는 건 아닐 테고, 그저 말하기 싫은 걸까.

실장같이 격무에 시달리는 사람도 식사 시간이 되면 뭘 먹을지 팀원들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하곤 했다. 그와는 사정이 다른 그녀이니 좋아하는 음식이 없을 리가 없지. 다만 그 대답이 문도하에게 허락되지 않았을 뿐이다.

미각을 잃은 입에도 씁쓸한 맛은 돌았다. 한번 쥐어진 주먹은 불편한 식사가 끝날 때까지 펴지질 않았다.

뒷정리를 얼추 마친 실장이 현관문에 서서 문도하에게 이것저것 필요한 보고를 올렸다. 이 또한 매일 있는 일이었다. 식사가 끝나면 이서윤은 꼭 방에 들어가 한참을 나오질 않았다. 그들의 대화를 듣지 않겠다는 듯이.

벽에 기대어 실장의 보고에 고개를 끄덕여 주는 문도하의 머릿속엔 사실 그의 말이 잘 들어오지 않았다. 계속해서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는 이서윤의 목소리만 울릴 뿐이다.

“내일은 뭘 가져올까요. 혹시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그 말에 왜 그녀가 먹던 인스턴트 커피가 생각날까.

그녀가 그 커피를 마시는 걸 본 게 두 번이나 되었다. 짧고, 대부분은 두려움으로 점철되어 있던 그들의 만남에서는 퍽 높은 빈도수를 자랑하는 물건이었다. 턱을 쓸며 몹시 역하던 커피의 맛을 상기한 문도하는 그간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가정을 떠올렸다.

만약 몸이 정상이었다면 자신도 그녀처럼 커피를 음미할 수 있었을까.

* *

문도하가 이상하다.

식탁을 내려다보며 서윤은 자신이 어렴풋하게 느끼던 점을 확신했다. 역시, 요 며칠간 그는 무척 이상했다.

일단 밖으로 나가질 않고 방에서 두문불출했다. 그녀와는 다르게 아무것도 그의 발걸음을 막지 않는데 말이다. 게다가 얼마 전 얼결에 본 그 기밀 서류의 내용대로라면 그는 지금 무척 바쁠 게 뻔한데도.

방에서 업무를 본다고 생각하기엔 또 조금 묘했다. 얼마 전엔 서윤이 실수로 리모컨을 놓쳐서 발등에 떨어트렸는데, 거의 동시라고 할 정도로 문도하가 방문을 벌컥 열고 나왔던 것이다.

발등을 가로지르는 아픔에 미간을 찡그리고 있자 그는 잠시 뒤 붕대를 가져왔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짓이라 인상을 쓰며 올려다보니 부지불식간에 문도하가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주저앉았다. 뜻밖의 행동에 당황한 서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흘긋 그녀를 올려다본 문도하가 이내 붕대를 발에 칭칭 둘러 주었다. 여전히 표정은 희미했고 손길은 고요했다. 그런데도 어딘가 진득한 위화감을 주었다. 그의 손길이 꼭 조금 당황한 듯 보여서.

본래는 방에서 뭘 하는지 궁금하지 않았는데 그때부터는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방에서, 하루 종일 뭘 하고 있는 거지?

뚱뚱하게 감긴 붕대는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었다. 무슨 짓인지 물어볼 겨를도 없이 문도하는 다시 방으로 사라졌다. 사람을 놀리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운 행동이 아닐 수 없었다. 두껍게 둘린 붕대는 걷는 게 불편해서 이내 풀어 버렸다.

그러더니 오늘은, 식탁에 커피가 하나 놓여 있었다.

서윤의 집 찬장에 있던 것과 같은 브랜드의 인스턴트 커피였다. 묵묵히 그걸 내려다보며 서윤은 인정하고 말았다. 문도하가 역시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이 커피를 내주니 미간을 찌푸리며 마시던 그의 얼굴이 떠오른다. 표정에는 미처 감추지 못한 혐오가 묻어 있었다. 밥을 먹을 때의 미각이 사라진 듯한 무덤덤한 얼굴과는 또 달랐다. 그러니 그의 정신 오염이 문제가 아니라 그저 이 싸구려 커피에 대한 거부감이었으리라. 정확히 말하면 그녀의 낡고 초라한 집을 비하하던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그러니 이건 문도하가 먹겠다고 이 집에 들여놓은 게 아니리라. 외출하며 그녀에게 뭔가 필요한 게 없냐고 묻던 때가 생각난다. 확연히 이상해진 그의 행동이 틱틱 신경을 거슬렀다.

이상하게 화를 참을 수가 없었다.

식탁 위의 작은 커피 박스를 거칠게 집은 서윤은 지체 없이 그걸 부엌의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털썩 비닐이 얻어맞는 소리가 크게 들린다. 분노가 폐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수작일까.

달칵하고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어 문도하가 스르륵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이상한 일이다. 저 빠른 반응은 뭐란 말인가. 안에서 서윤을 감시하듯 소리에만 온통 귀 기울이고 있는 사람처럼.

주체할 수 없는 분노에 서윤은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뭐 하자는 거예요.”

답답함이 치고 올라왔다. 늘 묵직하게 가슴에 웅크리고 있던 그것이 크게 기지개를 켜는 기분이다. 나가고 싶었다,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문도하의 시선이 느릿하게 쓰레기통을 향한다.

“……좋아하는 커피 아닌가.”

“구정물을 마시는 얼굴을 했으면서 잘도 그런 말을 하네요, 당신.”

“…….”

“이상한 짓 하지 말아요.”

이건 이상한 짓이 맞았다. 문도하가, 마치 알량한 자비심을 베풀어 서윤을 위하는 것처럼 구는 이 모든 행동이.

그녀를 억지로 이곳에 억류하고 있다면 시종일관 그렇게 행동하는 게 옳다. 도구로 사용하려고 데려왔다면 그저 무생물을 대하듯 무시하고 필요할 때만 찾아야 하는 게 맞았다. 이렇게 어쭙잖게 사람을 위로하듯 이상한 짓을 하는 게 아니라.

그래야 그녀도 마음 놓고 그를 욕할 수 있으니까.

서윤은 이미 한 번 호되게 속았다. 어쩌면 문도하가 변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부여잡는 짓을 했다가 돌아온 건 살벌한 감금뿐이었다. 짓밟히는 경험을 딛고 일어나 먼저 그의 가이딩 상태를 걱정했는데도 받은 건 도구 취급이었다.

그러니 또 속을 순 없었다.

그가 어찌 반응을 하든 서윤은 매섭게 걸음을 옮겼다. 문도하의 바로 옆을 스쳐 지나가며 이번에도 또 팔을 잡는다면 호되게 따귀를 때려 주겠노라 결심했으나, 그는 가만히 쓰레기통 쪽을 응시할 뿐이었다. 그렇게 방에 들어앉아 그녀는 이불을 뒤집어썼다.

어쩐지 몹시 울고 싶었다.

* *

“…….”

피곤했다. 어느 순간 그를 묵직하게 엄습해온 감각이 오늘따라 더욱 매섭다. 클랜의 사무실에 앉아 미간을 문지르던 문도하는 실장이 내미는 결재 서류를 체크했다. 오늘은 반드시 나와야 한다는 엄포에 걸맞게 하나같이 심각한 사안들이었다.

매번 협회는 이렇게 일을 쳤고, 그걸 수습하는 건 클랜의 역할이었다. 이사라는 직함을 달고 있는 이상, 문도하는 에스퍼로서의 역할 이상으로 일을 해내야 했다. 이렇게 정신이 온통 이서윤에게 몰려 있는 상태에도 말이다.

“안색이 많이 안 좋아 보이십니다.”

“티가 날 정도인가?”

“적어도 저는 알아볼 정도군요.”

“후…….”

그를 살피는 박남일 실장의 얼굴에는 죄책감이 서려 있었다. 필시 일전에 입에 담았던 말 때문이라는 걸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하긴 그가 폭주 직전까지 내몰린 게 벌써 몇 번이라는 걸 모르니까 그런 배려도 할 수 있었던 것이겠지.

다만 그의 걱정이나 죄책감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어차피 그게 아니었어도 문도하는 이서윤을 압박하지 못했을 테니까.

정신이 그야말로 한계에 몰렸다. 가이드가 근처에 있어서 가질 수 있는 안정감이 아니었다면 진즉에 또 폭주하고 말았으리라. 아주 잠깐 긴장을 놓는 것으로 그는 쉽게 정신이 나갈 수 있을 듯했다. 하지만 그렇기에 문도하는 더더욱 이성을 다잡았다. 정신이 나간 머저리 같은 자신은 또 이서윤에게 무작정 달려가리라. 그리곤 가이딩을 스스럼없이 요구하겠지.

영혼이 바스라지는 감각을 느끼면서도, 그는 이서윤에게 가이딩을 해달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가장 많은 두려움을 내비쳤던 때가 바로 그때였으니까.

할 수 없어.

이제야 그녀의 가슴에서 도르륵 굴러다니던 두려움의 구슬이 얼마나 아픈 감각인지 문도하는 알 수 있었다. 하루가 다르게 이서윤에게서 전해지는 감정은 조금씩 구체화되고 또 무거워졌다. 이서윤의 우울이 점점 무거워지는 탓도 있었지만, 문도하가 깨달을 수 있는 범위가 늘어난 것도 있었다.

서류를 잡고 있던 한쪽 손이 덜덜 떨릴 조짐을 보였다. 그걸 자연스럽게 아래로 내려 감추면서 그는 서류에 집중하는 척했다. 환한 빛을 직접 목도하고 눈이 멀어 버린 그 날부터 새롭게 생긴 증상이었다. 기실 지금은 어떻게 두 발을 움직여 제대로 걸어 다닐 수 있는지, 문도하는 자신의 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앞으로 어찌해야 하지.

낡고 좁은 방에서 박남일 실장의 손을 잡고 세상에 발 디딘 후로 문도하는 한 번도 확신 없이 걸음을 뗀 적이 없었다. 그의 앞에는 늘 약속된 것들이 많았고, 그 또한 주어진 것들을 다루는 데 거리낌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딱 길을 잃은 심정이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컴컴한 암흑.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이서윤을 발견한 이때에 그는 정작 길을 잃었다.

처음엔 그저 그 환한 빛을 한 번 더 보고 싶었을 뿐이다. 그다음엔, 그러려고 아등바등할수록 그게 자신에게는 영영 허락되지 않을 것이라는 깨달음만 늘어갔다.

계속해서 사고가 본질을 향해 흘러간다. 그들의 첫 만남까지 생각이 거슬러 올라가는 건 금방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되돌리고 싶었다.

서류 속에서도 눈길로 헤매던 문도하는 문득 박남일 실장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자연스레 식사 자리에서 대화를 이어가던 실장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리고 그런 실장에게는 자신보다 조금 덜 어두운 감정을 내비치는 서윤도.

덕분에 그는 무심코 실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환심을 사려면, 보통 뭘 해야 하지?”

“……보통은 좋아하는 걸 해 드려야겠죠.”

뜬금없는 질문에도 실장은 알 만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다. 이어서 그는 곤란한 음성으로 이서윤은 좋아하는 음식 등을 좀처럼 알려주지 않는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렇잖아도 좋아하는 줄 알았던 커피는 이미 어제 거세게 거부당했다. 어쩌면 커피의 문제가 아니라 그걸 준 문도하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곰곰이 이서윤의 모든 걸 반추하던 문도하는 그녀가 계속 즐겨보던 TV를 떠올린다.

“강아지 같은 건 어디서…….”

“……설마 이서윤 씨에게 선물하실 생각이신 건 아니죠?”

“그럼 안 되나?”

매번 비슷한 프로그램을 볼 정도로 이서윤은 강아지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어떨 땐 하얀색 강아지가 나오는 장면을 몇 번이고 돌려보기도 했다. 강아지를 증오해 마지않는 게 아니라면 분명 좋아하는 게 맞을 터다.

“그런 무책임한 짓은 싫어하실 것 같은데요.”

“그게 왜 무책임한데?”

문도하가 의문을 담아 실장을 쳐다보자 그는 미약하게 한숨을 쉬었다.

“동물 입양을 그렇게 쉽게 결정하면 안 됩니다. 이서윤 씨 성격상 그런 걸 좋아하실 것 같진 않군요.”

“…….”

문도하가 아직 어릴 적, 박남일 실장이 계속 당부하던 것들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일단 단번에 이해할 순 없어도 문도하는 고개를 끄덕인다. 적어도 이 분야만큼은 자신보단 실장이 더 정확할 터다.

그런 그를 보면서 또 묘한 낯을 해 보인 실장이 목을 한 번 가다듬더니 조용히 말을 꺼냈다.

“거주지라도 일단 독립시켜 드리는 게 어떨까요.”

갑자기 심장 부근이 지끈거렸다. 통증은 익숙했으나 문도하는 의아하게 제 가슴께를 내려다보았다. 몬스터에게 찔린 것도 아닌데 갑자기 무슨 일일까.

어쨌든 실장이 하고자 하는 말은 그에게 정확히 전해졌다. 이서윤이 지금 제일 원하는 건 자유일 것이라는 점.

다시 한번 심장이 지끈거린다.

“그것도 방법이겠지.”

문도하의 말에 실장의 얼굴이 미미하게 밝아졌다. 실장이 그녀가 살 만한 도심지의 주택을 매입해둔 건 이미 오래전이었다. 그러나 이서윤이 그 집을 안 받을 게 뻔한 걸 떠나서 문도하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단순히 이서윤을 그의 집 밖으로 놓아주는 게 능사가 아니었다. 일부러 생각 저편으로 애써 미뤄 두고 있던 본질이 기어코 끄트머리를 잡혀 현실에 내동댕이쳐졌다. 이서윤의 우울을 직접 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인 문도하는 슬프게도 그녀의 진심을 이따금 엿볼 수 있었다.

이서윤의 인생에서 문도하 자체가 사라지는 게 그녀가 지금 제일 원하는 일이라는 것을.

한번 시작된 가슴의 통증이 도무지 사그라들질 않았다.

* *

어두운 집으로 들어서며 문도하는 가까스로 한숨을 삼켰다. 그가 달아 둔 잠금장치가 작동하며 내는 높은 기계음이 고막을 찢어발기는 기분이 들었다. 어두컴컴한 집 한쪽에서는 희미한 빛이 깜빡이고 있다.

빛에 이끌리는 부나방처럼 그는 홀린 듯 거실로 향했다. TV를 보고 있던 이서윤이 소리 없는 눈길을 보낸다. 가슴의 통증이 심해진 나머지 숨을 쉬는 게 버거웠다.

그러나 문도하는 위태로운 상태를 숨기는 데는 이골이 난 사람이었다. 최대한 덤덤하게 그 근처로 다가간 문도하는 손에 들고 있던 물건을 슬그머니 내려 두었다.

박남일 실장의 조언으로 사 온 강아지 모양 인형이었다. 한 손에 잡히는 초라한 봉제 인형은 볼품없고 마감 처리도 되지 않은 싸구려였다. 그걸 손에 집어 들면서도 그는 긴가민가했다. 이런 건 오히려 역효과가 아닐까.

“…….”

“…….”

허공에서 부딪히는 이서윤의 눈길은 여전히 매서웠다. 그 속에서 구르는 붉은 분노를 새삼스레 살폈다. 저걸 어여쁘게 반짝인다고 생각했던 과거가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다시 그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나야 했다. 더 다가가질 못해서 거실 테이블 끄트머리에 올려 둔 봉제 인형은 아슬아슬한 모습이었다. 꼭 그의 발걸음처럼 금방이라도 추락할 듯이. 문도하는 저 인형이 어제처럼 쓰레기통에 거칠게 처박힐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다음 날, 인형은 거실 테이블 중간에 놓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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