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감금(2) (15/27)

(2)

―……지역 사회에 큰 파문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또한 도심에 있는 피의자 명의의 아파트 두 곳에서는 감금되어 있던 피해자들이 구조되었습니다. 이들은 지속적인 학대를 받아왔음을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평소 피의자는 주변에 기부를 하는 등 선행활동을 꾸준히 해 왔기에 주변인들에게 더욱 충격을 주고 있습니다. 검찰은 이러한 선행활동이 세금 탈세 등의 목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닌지 심도 있는 조사에 들어갔습니다.

한편 피의자와 친분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에스퍼들은…….

적막이 싫어서 튼 TV였으나 뜻밖에도 서윤은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연고 없는 여자들을 가둬 두고 학대한 범죄자가 구속되었다는 뉴스였다. 눈살을 찌푸릴 만한 내용이었으나 슬프게도 이따금 벌어지곤 하는 비극이었다.

그녀의 눈길을 끈 건 다름이 아니라 자료화면으로 계속 보이는 장소였다. 서윤과 강하나가 일하던 사장의 가게가 폴리스 라인이 쳐진 채 계속해서 배경에 보여지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사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매번 사장이 억지로 매만지던 어깨 부근부터 잔잔한 소름이 돋은 채 사라지질 않는다. 스폰 따위를 제안한 시점에서 이미 쓰레기 같은 작자였으나 이건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한 일이 아닌가.

어쩐지 추운 기분이 들어서 그녀는 더욱 몸을 움츠렸다. 처음처럼 이불을 칭칭 감고 있지는 않았으나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가득이었다. 괜히 마음만 더 심란해지는 기분이라 리모콘을 들어 TV를 꺼 버렸다.

“…….”

다시금 적막이 황량한 집을 채웠다. 딱 필요한 가구 이외에는 흔한 장식 하나 없는 공간이다. 그래서 안 그래도 넓은 집이 더욱 광활한 기분이 들었다.

서윤이 이 집에 갇힌 지 벌써 며칠이 지났다. 처음에는 마냥 두려움에 떨던 그녀는 느리지만 조금씩 정신을 차렸다. 어쨌든 여기는 삼촌의 집이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녀는 이제 아무것도 못 하는 어린아이가 아니라고 계속 되뇌인 덕분이었다.

심적으로 무척 힘들었지만 조금씩 주먹에 힘을 쥐며 서윤은 어떻게든 기회를 노렸다. 이대로 주저앉아 있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게 서윤이 바깥 생활을 하면서 배운 의지였다.

매일 일찍 집을 나가는 문도하는 다시 늦은 새벽이 되어서야 돌아왔다. 최근 잠이 늘어난 서윤의 체감상 몇 시간도 집에 머무르지 않는 느낌이었다. 아마 그녀를 감시하러 이따금 돌아오는 게 아닐까 추측할 뿐.

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을 따름이지, 문도하는 어디에도 있었다.

하필이면 서윤에게 몹쓸 제안을 했던 사장의 범죄 행각이 뉴스를 탄 게 그녀는 못내 무서웠다. 문도하가 연관 있는 사안이 아니라고 여기기엔 시기가 너무 공교롭지 않은가.

심지어 어제는 에스퍼 한 명이 피습을 당해 손목이 뒤틀리는 사건이 벌어졌다고 했다. 꽤 큰 사건일 게 뻔한데 뉴스 자막으로 짧게 지나가더니 이내 그 자막조차 자취를 감추었다. 영상자료 하나 보지 않았지만 서윤은 왜인지 그 뉴스 보도를 잊을 수가 없었다. 에스퍼가 습격당하려면 같은 에스퍼의 짓일 게 뻔했다. 그리고 그 누군가는 하필 손목이 뒤틀렸고.

어쩌면 그녀의 과대망상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차라리 그랬으면 하는 심정으로 서윤은 무릎을 그러안았다. 아무래도 갇혀 있다 보니 자꾸 과한 상상을 하게 된다고 여기고 싶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 때마다 숨이 막혔다. 온 세상이 문도하라는 거대한 손에 놀아나고 있는 듯 보여서. 그 앞에서 서윤은 너무나 작고 보잘것없어서 잘못 고개를 드는 것만으로도 납작하게 눌릴 것만 같았다.

그런데도 이제 그녀는 갈 곳이 없다.

애써 힘을 주었던 주먹에서 자꾸만 스르륵 힘이 빠져나갔다. 왜 하필 그곳에 괴물이 있었을까. 왜 하필, 그녀가 뛰어 들어간 자리에 괴물이 있었을까. 온 세상이 그녀가 돌아갈 장소 하나 없도록 막아서는 기분이 들 때마다 막막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그날처럼.

지금도 이곳에서 나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막상 나가서 뭘 어찌해야 할지 생각하면 너무 암담했다. 저도 모르게 손끝을 꽉 쥐어 하얗게 만들던 서윤이 그대로 무릎에 볼을 대며 웅크린다.

뉴스는 서윤의 집 근처에 출몰한 괴물을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그 현장에 있던 서윤에 대한 건 쏙 빠졌으나 문도하가 직접 처리했다는 내용은 그대로 나왔다. 어쨌든 이렇게 이목까지 끈 이상 정부가 무슨 대책을 세우긴 할 터다. 그러니 일단 돌아가서 최대한 빨리 다른 곳으로 가면 되지 않을까.

희망을 동아줄처럼 부여잡듯 서윤은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나갔다. 문자 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방해하기 전까지.

서윤아 뉴스 봤어? 어제 경찰들이 갑자기 들이닥쳐서 사장님을 체포해 갔어.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연락이 없네, 잘 지내는 거지?

강하나의 문자에서는 숨길 수 없는 걱정이 묻어났다. 사장에 대한 언급이 있는 것을 보니 역시 서윤의 예상이 맞은 모양이다. 항거할 수 없는 거대한 힘에 확인 사살을 당한 기분이 들었다. 모처럼 강하나가 햇살 같은 문자를 보내 주었는데도 말이다.

사람을 감금한 주제에 문도하는 그녀의 핸드폰은 돌려주었다. 이미 빠짐없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증거인 양. 뭘 어떻게 더 건드렸는지는 알아보려 하지도 않았다. 이미 그녀의 물건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연락이 끊긴 서윤이 걱정되었는지 강하나는 여러 차례 문자를 보내왔다. 하지만 감시당하고 있는 처지에 행여 피해가 갈까 한 번도 답장하지 못했다. 그저 이따금 울리는 핸드폰을 뜨거운 쇳덩이처럼 바라만 보고 있는 수밖엔.

속절없는 상황에 가슴이 조금씩 땅으로 푹푹 패이는 기분이 들었다.

멍하니 시간을 죽이는 와중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문도하가 올 시간은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혹시 알았어도 움직이지 못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체념에 잡아먹히지 않는 게 서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행동이었으니까.

“이서윤 씨. 식사는 하셨습니까.”

무척 불친절한 집주인과 다르게 서윤이 먹고 자도록 돌본 것은 박남일 실장이었다. 서윤의 집도 아닌데 매번 초인종을 누른 다음에나 들어오는 박남일 실장은 오늘도 죄책감 어린 얼굴이었다.

“네.”

비록 이 불합리한 일에 일조하고 있긴 하나 서윤은 박남일 실장까지 원망하기는 힘들었다. 그런 고된 감정마저 오로지 전부 문도하의 몫이라는 것처럼. 매번 어두운 얼굴로 서윤의 상태를 살피는 그가 불편할 뿐이다.

대답은 그렇게 했으나 서윤은 아침을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점심시간이 다가왔지만 챙겨 먹을 생각은 없었고. 식재료를 사다 나른 것이 실장이었기에 금방 그 사실을 알아챈 그는 안절부절못하는 낯이 되었다. 어차피 억지로 먹이지도 못할 테니 서윤은 갇혀 있는 상황에 반항하듯 배짱을 부릴 심산이었다.

“거의 안 드신 것 같은데. 혹시 좋아하는 음식은 없으신가요, 이서윤 씨.”

“없어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실장은 그저 서윤의 눈치만 살핀다. 가까이 다가오는 일도 없이 매번 물건과 할 말을 전해 주면 사라지더니, 이런 상황이 며칠이나 계속되자 가만히 있기 힘든 모양이었다.

그 얼굴에 서린 순수한 걱정을 읽어 버린 서윤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그저 강압적으로 나왔으면 모른 척 마음껏 욕할 수 있었을 텐데.

“실장님은 식사하셨어요?”

마지못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그래도 온기가 담긴 이서윤의 물음에 박남일 실장은 한층 안색을 굳혔다.

문도하의 말과는 다르게 이서윤은 마냥 모든 걸 거부부터 하고 보진 않았다. 무척 불안해 보이는 것은 사실이나 상황 파악이 무척 빨랐던 것이다. 소파에 웅크린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을까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런대로 생활을 하긴 했다.

특히나 패악질을 부려도 좋을 판에 이따금 실장을 배려하는 모습마저 보여 주곤 했다. 그러면서도 해야 할 말은 똑 부러지게 하는 성격인 걸 보고 더욱 암담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문도하와는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문도하의 성격이 이러한 이서윤의 행동을 더욱 방어적으로 만들었으리라는 예상이 쉽게 왔다. 어릴 적부터 곁에서 지켜본 세월이 무색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래서 더욱 안타까웠다. 아무리 운명을 느끼지 못한다 한들 문도하의 사정을 안다면 연민을 품을 만한 성격이었으니까. 첫 만남부터 최악이었다는 문도하의 진술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중간에 가이딩을 걱정해 주기도 했다. 분명 좀 더 긍정적인 대안이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이미 지나간 일을 안타까워할 때면 여기 갇혀 있어야 하는 그녀에 대한 안쓰러움이 차오른다. 문도하의 행동이 이상해졌을 때 바로 조치를 취했으면 나았을까 생각하는 것 또한 부질없는 짓이었다.

지금은 이서윤이 당장 나가겠다고 실장을 압박하지 않는 것만으로 감사해야 했다. 그녀가 사라지면 제일 먼저 달려가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애원해야 하는 처지였으니까. 폭주하는 문도하를 뒤에 둔 채로 말이다.

“네, 저도 대충.”

“그렇군요.”

“……이서윤 씨.”

“네.”

“일이 얼추 마무리되면, 제가 도하 님께 꼭 다시 말씀드려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서윤 씨 거처를요.”

결국 차오르는 연민을 이기지 못한 실장은 다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하지만 애써 내민 희망을 듣고도 이서윤의 표정은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그의 말을 믿지 않는다는 것처럼.

문도하의 허가 없이는 이게 얼마나 공허한 약속인지 제일 잘 아는 실장은 결국 고개를 떨구었다. 그에게 쏟아지는 질책 어린 시선을 견딜 수가 없어서.

* *

“……밥을 안 먹어?”

“그게, 아예 거르시는 건 아닌데…….”

난처하게 말끝을 흐리는 박남일 실장의 뒷말은 쉽게 예상이 갔다. 하루 종일 사람이 머무르는데도 생활감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 집 안과 늘 죽은 듯 자고 있는 이서윤의 영상이 지나갔기 때문이다. 보나 마나 또 그가 주는 건 싫다며 죽지 않을 만큼만 먹고 있을 터.

이서윤의 오해와는 다르게 실장이 그 집에 드나들며 그녀를 챙길 수 있었던 건 순전히 문도하가 지시했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박남일이라도 이서윤만 있는 곳에 혼자 보내고 싶지 않았지만, 그로서도 선택지가 없었다.

그 겁먹은 눈길이, 자꾸만 그를 뚫을 듯 다가와서.

“……나가 봐.”

“네.”

이제는 의문의 여지가 없었다. 이서윤의 감정이 분명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제 와 그녀의 감정에 감화되었다고 하기엔 아직 그의 세계는 숨 막히는 정적만 자리하고 있다. 여전히 이서윤을 제외한 타인의 감각 따위엔 관심이 없었고 지긋지긋한 붉은 시야도 여전했다.

그러나 혈관을 돌아다니며 이따금 그를 콕콕 찌르곤 했던 바늘은 이제 아예 심장 쪽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무심하게 그걸 내려다보던 문도하는 깊은 의문을 가졌다.

이서윤이 그에게 가진 게 두려움뿐이라도 분명 꽤 만족스럽게 그것들을 관찰하고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상황이니 그가 설사 관광이라도 시키듯 집 안을 구경시키면서 마음껏 사용하라고 한들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매번 그가 제공하는 호의가 순순히 이서윤에게 닿은 적이 없기에 문도하의 예상은 그에겐 지극히 당연했다.

그렇다고 어두컴컴한 곳에 마냥 그렇게 처박아 두는 건 어쩐지 내키지 않는다. 그가 들어갈 때마다 두려운 눈길을 보내는 건 놀랍게도 견디기가 힘들었다. 금방이라도 그 시선을 벗어나고 싶다는 충동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이유를 알 수 없었으나 일단 그녀의 눈길이 그에게 이상 행동을 불러일으킨다면 마땅히 제거해야 했다.

하지만, 어떻게?

저도 모르게 손바닥으로 턱을 매만지던 문도하는 문득 낯선 것을 보듯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꼭 몇몇 군데가 마비된 것처럼 이상한 감각이 느껴진다. 일반인이라면 당장 병원에 뛰어가야 할 감각이지만 그저 또 시작되었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지긋지긋한 영혼의 붕괴가.

손을 쥐락펴락하며 문도하는 생각에 잠겼다. 매번 도망치듯 집을 벗어나서는 다시 불안함을 이기지 못하고 돌아가는 짓을 반복하고 있었다. 이서윤이 그곳에서 꼼짝도 하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벌써 며칠이나.

톡톡 책상을 두드리는 손가락의 울림이 어쩐지 평소보다 더 무거운 기분이 들었다.

* *

조용히 처리하고 넘어가길 원했던 협회의 바람과는 다르게 이서윤의 집 근처에 출몰한 몬스터 건은 사회적 파장을 몰고 왔다. 당연히 은폐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묘하게 일이 꼬여 들어 갔기 때문이다.

협회가 무슨 구역질 나는 속으로 은폐를 하려 했는지, 그 과정이 무언지는 문도하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짜증 나게 그를 자극하는 건 두 가지였다. 거주 지역에서 몬스터를 터트린 것에 대한 협회의 항의. 그리고 몬스터 방어라인이 뚫렸다는 게 대중에 노출된 이상 당연한 수순으로 늘어나게 될 일거리.

“……이 스케줄은 아무래도 감당하기가 힘든 수준인데요.”

“하지만 대중 심리를 충족시키려면 이 정도는 보여줘야 한다더군요.”

덕분에 클랜 회의실에서는 한창 성토의 장이 벌어졌다. 여전히 몬스터의 활동 범위가 늘어났다는 공식 발표는 없었다. 어쨌든 이서윤이 살고 있던 집은 기존의 위험 구역에 속하는 곳이었고, 덕분에 ‘비정상적’으로 오래 살아남은 몬스터가 발생했다는 협회 측의 주장이 어느 정도 설득력을 얻고 있는 모양이었다.

혹은,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거나.

“그 심리 하나 충족시키자고 하기엔 너무 불필요한 작전들투성이 아닙니까. 에스퍼가 대체 왜 도심지역을 순찰해야 한다는 겁니까.”

“순찰 시간에 낮 시간은 누가 포함시킨 거야! 몬스터가 기어들어 와도 제대로 못 움직일 시간인데!”

그간 문도하의 성격에 가려져 있었으나 에스퍼는 기본적으로 호전적인 성격이다. 맡은 직함이 무거워 평소에는 점잖은 척하던 이들도 오늘만큼은 마음껏 입을 열었다.

“그건 맞는데 협회가 휘두르는 명분이 이번엔 너무 단단합니다. 언론이 합세하는 바람에 아주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습니다.”

대답을 하는 클랜의 고위직도 답답한 얼굴이었다. 그라고 이게 얼마나 쓸데없는 짓인지 모르는 게 아니었으니까. 결국 이 성토를 직접 들어야 하는 협회는 여기 없었다. 덕분에 한참 달아올랐던 회의실은 이내 깊은 침묵에 빠져들었다.

몬스터가 거주 지역을 뚫고 들어왔기에 정부의 방어라인 관리에 대해 시민들이 의문을 표하고 있다. 그에 정부의 압박을 받던 협회는 반대로 이걸 기회 삼아 에스퍼 통제권을 요구하고 있는 기막힌 실정이었다. 어차피 가이드와 에스퍼는 함께 있어야 하니 관리도 일괄적으로 해야 한다는 취지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말도 안 되는 주장이 일반인들에게는 잘 먹혀 들었다.

만약 협회가 그저 무능하기만 했다면 차라리 효율 면에서 그럴 수 있다고 문도하 또한 생각했을 터다. 그러나 인류가 위기에 빠져 있던 그 순간에도 제 이익만 좇던 협회와 몇몇 정치인들의 면면을 똑똑히 기억하는 그는 그저 대중의 무지를 비웃는 수밖엔 없었다.

“듣기로는 정치권이 본격 개입했다던데, 결국 이용당하는 것 아닙니까. 에잉…….”

협회와 결탁한 몇몇 정치 세력은 작금의 상황을 통제되지 않는 에스퍼들의 비협조 탓으로 돌리고 있었다.

안 그래도 에스퍼라는 새로운 계급에 적응하기 싫었던 사람들은 이러한 선동을 쉽게 수용했다. 사회적으로도 몇몇 에스퍼가 힘을 무기로 하여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기에 여러 가지 심리가 맞물렸다.

덕분에 공포감 조성을 위해 거주 지역에서 몬스터 시체를 흩뿌렸다는 혐의까지 받고 있는 문도하로서는 그저 기가 찰 뿐이었다.

피가 흥건한 거주 지역 골목길의 모습이 모자이크 하나 없이 매스컴의 전파를 탔다. 덕분에 국민 클랜은 여타 클랜보다 한층 뭇매를 맞고 있는 상황이었다. 당장 시위대가 클랜 건물 앞에 모여들 듯 분위기가 험악했다.

그가 이서윤을 구하겠다고 앞뒤 가리지 못하고 몬스터를 과하게 죽인 건 사실이다. 하지만 만약 몬스터를 얌전히 죽였다고 하면 이번엔 제대로 확인 사살을 하지 않았다는 꼬투리를 잡혔을 게 뻔했다.

결국 이래저래 곤란한 상황이다. 당장 에스퍼가 시민을 ‘지키고 있다’는 쇼라도 보여야 할 만큼.

어두운 분위기 속에서 눈길이 하나둘 문도하에게 모여들었다. 그런 시선을 감지한 다른 에스퍼 하나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능력이 화염 계열이었어도 그 상황에서 화재 위험을 도외시했다고 난리를 칠 것들이지. 신경 쓰지 말라고.”

호의적인 그의 태도에 문도하는 고개를 한번 끄덕이며 예의를 차렸다. 산전수전을 같이 다 겪은 탓일까, 클랜의 에스퍼들은 어쨌든 이런 일이 있으면 문도하의 편을 들곤 했다. 그게 에스퍼의 상징인 그와는 같은 배를 탔다는 심리일지라도 말이다.

덕분에 좌중의 분위기는 다시 전환되어 이 말도 안 되는 일정을 어찌 소화할지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 때 계속 가만히 있던 이강덕 이사가 발언했다. 그러고 보니 매번 활발하게 대외 정보를 가져오곤 했던 그가 오늘따라 조용했다.

“이번엔 하필 자극적인 장면이 전파를 타는 바람에 여론이 쉽게 선동된 듯합니다. 지금으로선 방법이 없고……, 아마 적당히 장단을 맞춰주는 척하다 보면 쉽게 가라앉겠죠.”

“…….”

“아, 그렇다고 도하 님의 대처를 흠잡는 건 아닙니다. 시민을 구하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는 것 잘 압니다.”

침묵 끝에 내뱉은 말이 조금 묘했다. 이강덕 이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회의실은 금방이라도 뻥 터질 듯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 호기심이라는 이름의 풍선은 감추려 해도 그 거대한 몸집을 드러냈다. 다들 잊고 있던 그 ‘시민’의 정체가 궁금한 얼굴이었다.

아무래도 치료 에스퍼가 입을 함부로 놀린 모양이군.

박남일 실장의 우려가 현실이 되고 만 것이다. 다만 문도하는 표정 관리도 잊은 채 무심코 인상을 쓰고 말았다. 한 가지 깨달음이 그의 머리를 둔중히 후려쳤기 때문이다.

경솔한 대처 때문에 일이 이 지경이 되었는데도, 그는 이서윤이 같은 위기에 처했을 때 똑같이 행동하지 않을 자신이 없었다.

* *

“아마 다음 주부터 바로 순찰조에 편성이 되실 듯한데…….”

“……그 안건은 내일.”

“네. 마실 것 좀 가져다드릴까요.”

사려 깊은 실장의 말에 문도하는 그저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그렇게 박남일 실장이 그의 사무실을 벗어나자마자 그는 피로한 눈을 문질렀다.

잠을 제대로 잔 게, 언제였더라.

새삼스러운 상념이 부옇게 떠오른다. 멍하니 사무실의 전등을 올려다보던 문도하는 이제는 완벽하게 불편해진 의자에 몸을 기댔다. 몸을 감싼 고급옷감이 사포라도 된 듯 거슬렸다. 어느 순간부터 그는 이서윤에 대한 상념을 머릿속에서 밀어낼 수가 없었다. 어쩐지 마비가 된 듯한 가슴의 묘한 감각과 함께.

오늘은 집에 돌아가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군.

하루쯤 혼자 지내게 한다면 이서윤의 경계도 조금 누그러지지 않을까. 게다가 그가 누군가를 보호하고 있다는 수상한 정황에 연막도 조금은 필요했다. 갑작스러운 이상 반응의 원인인 이서윤을 없앨 수 없다면 그가 다가가지 않으면 될 일이었다.

피로하다. 정말 오랜만에 실감하는 버거운 기분에 그는 다시 성마르게 눈가를 문질렀다. 관절 마디마디가 녹슬어 굳어 버린 감각이었다. 움직일 때마다 바스락하고 떨어지는 건 필시 영혼의 파편이다.

그리고 그의 구원은 세상에서 제일 원망하는 눈길로 문도하를 바라본다.

상념이 뇌를 찌르는 감각에 문도하는 순간 머리를 움켜쥐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고통이 숨을 허덕이게 한다. 평소보다도 더 강한 고통에 몸부림치던 문도하는 전조를 깨달았다.

능력을 쓴 것도 아닌데 폭주가 시작되고 있었다.

사무실을 밝히는 환한 전등의 입자 하나하나가 망막을 찌르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거친 고통처럼 마구잡이로 빠져나간 염동력이 사무실 안을 순식간에 부수며 날뛰었다.

“크윽.”

마비된 줄 알았던 심장은 쪼개지는 듯 비명을 지르며 갈라질 준비를 했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문도하는 고개를 숙이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몸 안에서 태풍 소리가 들려온다. 그를 비롯해 모든 것을 거칠게 찢어발길 힘이었다.

그는 매번 이 종말의 순간을 덤덤히 맞이했었다. 그저 올 게 왔구나 하는 녹슨 감정으로, 남의 일처럼. 허나 오늘은 뭔가 달랐다.

그저, 이서윤이 보고 싶었다.

“도하 님?”

잠시 뒤 음료를 준비한 실장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를 맞이하는 건 적막만 흐르고 있는 텅 빈 사무실이었다.

* *

깊은 잠에 빠졌던 서윤을 깨운 건 대문이 닫히는 소리였다. 쇠가 부딪히는 소리는 오늘따라 조용했는데 기이한 일이었다. 초인종도 없이 들어온 걸 보면 문도하가 분명했다. 그러나 서윤이 뭔가 낌새가 이상하다고 느끼는 건 금방이었다.

질질 끌리는 발걸음 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중간중간 벽을 짚는 듯한 둔탁한 소리도 이어진다. 귀를 지속적으로 침투하는 기묘한 소리에 서윤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녀는 맨 처음 눈을 떴던 문도하의 침실이 아니라 적당한 손님방 한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무척 느렸지만 꽤 안쪽에 있는 그녀의 침실까지 문도하의 걸음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이윽고 방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서윤…….”

이제 보니 대문이 열리는 소리가 오늘따라 조용한 것이 아니었다. 벽에 위태롭게 기댄 문도하가 힘이 없는 것이었다. 비척거리는 걸음이 다시 이어졌다. 침대에 바싹 기대앉은 서윤을 향해.

한껏 흐트러진 그의 모습을 보니 다시 폭주 직전의 상태가 되었음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벌써 몇 번이나 확인한 그의 상태에 서윤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간 기껏 감금까지 해 놓고 가이딩에는 관심이 없더니 다시 이 사달이 난 모양이었다.

그녀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대로 이불보만 움켜쥐었다. 도망칠 곳은 진작 문도하가 다 없애 버렸으니까.

말 그대로 문도하가 필요할 때 준비된 도구가 된 것 같아서 마음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당신, 정말 잔인한 사람이야.”

“…….”

자신에 대한 연민을 가득 담아 문도하를 노려보는 것밖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러면서도 대체 무슨 끔찍한 일이 이어질지 걱정이 되어 손끝이 떨린다. 스스로의 모습이 한없이 초라해 보일 걸 알았지만 가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차피 그녀를 여기까지 끌어내린 건 문도하였으니까.

그는 왜인지 곱게 매여 있던 넥타이를 더듬더듬 풀어냈다. 방 안은 온통 어두웠고 문도하의 얼굴도 잘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그게 꼭 숨이 막힌 사람의 행동으로만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넥타이를 푸는 게 행위의 시작 외의 의미가 있을 리 없는데도.

침대 맡까지 다가온 문도하가 그녀의 위로 불쑥 몸을 움직인다. 푹 들어가는 침대의 스프링이 서윤에게는 꼭 아득하게 추락하는 기분을 선사했다.

가까이 다가오자 이제야 문도하의 얼굴이 희미하게 보였다. 서윤은 순간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불쑥 시야를 비집고 들어오는 그의 표정이 예상과는 너무나도 달라서.

“……그렇게 쳐다보지 마.”

뜻밖의 얼굴이 대체 무슨 감정을 담고 있는지, 그 의미를 깨닫기도 전에 문도하가 그녀를 그러안았다. 목덜미에 닿는 콧대의 감촉이 차가웠다. 꼭 같이 물에 빠지듯 침대가 풀썩 들썩였다.

문도하는 그렇게 이서윤을 꼭 끌어안은 채 더는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 *

“…….”

어느새 아침인지 밤새 소록소록 내려앉았던 어둠이 물러났다. 희끄무레한 눈을 조심스럽게 깜빡이며 서윤은 뺨에 닿은 문도하의 감촉을 멍하니 인지했다. 절대 잠들지 못할 것이라 여겼는데 놀랍게도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몸살이라도 난 것처럼 온몸이 쑤셨다. 어깨와 허리를 가로지르는 문도하의 양팔은 서윤이 조금이라도 그 품을 벗어날라치면 밧줄처럼 그녀를 죄였다. 깊은 수마를 헤엄치면서도 그 감각은 똑똑히 기억이 났다. 분명 문도하도 그녀처럼 의식은 없었을 텐데 안 놔주겠다는 것처럼 끈질겼다.

정신이 없을 때야 몰라도 정신을 차리고 나니 그의 품에 안긴 이 자세가 편할 리 없었다. 뺨이 그녀의 목덜미에 닿도록 웅크린 문도하는 온 체중을 실어 그녀에게 닿고 있었다. 차라리 그녀 또한 마음 놓고 문도하에게 기댈 수 있었다면 괜찮았겠지만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요원한 일이었다.

꼼짝없이 험한 꼴을 당할 거라 여겼는데.

막무가내로 들이닥쳤던 첫 만남 때도 문도하는 꼭 어제 같은 느낌이었다. 그때는 마냥 꿈같고 몽롱하기만 했는데, 몇 번 겪어보니 알 수 있었다. 그가 익사하고 있는 사람처럼 위태로운 상태라는 걸. 잠들기 직전 문도하의 말투도 힘이 퍽 빠져 있었다. 매번 고압적인 문도하답지 않은 일이다.

기대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편하게 누운 것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는 금방 무리가 왔다. 근육이 당기는 기분에 서윤은 몸을 뒤척였다. 그래 봐야 꽉 죄인 문도하의 팔 때문에 움찔하는 정도에 불과했다. 이마저도 이제 다시 그녀를 잡아채는 손길 때문에 더욱 조여 오겠지.

그런데 각오한 것과는 다르게 문도하는 움직이지 않았다.

“…….”

혹시나 하는 생각에 이번엔 몸에 힘을 더 주어서 그를 슬쩍 밀었다. 놀랍게도 문도하는 그녀가 미는 대로 툭 밀려 반듯하게 누운 자세가 되었다. 그녀의 허리에 있는 팔도 어느새 스르륵 풀려 힘없이 축 늘어져 있다.

그렇게 밤새 옴짝달싹도 못 하게 하더니 이제야 푹 잠든 모양이었다. 그녀가 이렇게 품에서 빠져나와도 세상모르고 잘 만큼.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내려온 서윤은 발걸음 소리가 나지 않도록 조용히 몸을 움직였다. 두 다리로 바닥을 딛자 몸이 한층 뻐근했으나 힘을 주어 참는다. 무심코 내려다본 문도하는 평화롭게 눈을 감고 있었다. 생각해본 적 없는 그의 자는 모습은 그녀에게 묘한 심정을 불러일으켰다.

어제, 왜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문도하의 그 상태는 아무리 생각해도 가이딩이 부족해서 일어난 참사 같았다. 그래서 첫 만남 때도 그렇게 막무가내로 그녀를 잡아 온 것이겠지. 가이드로서의 소양이 부족한 서윤도 이제는 어렴풋하게 에스퍼와 가이드가 어떤 운명으로 묶여 있는 건지 깨달아 가고 있었다. 본능이 그녀에게 가르치듯 읊어주는 것 마냥.

그러니 어제는 분명 서윤이 반항한들 억지로 밀고 들어와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을 터다. 그런데도 그는 영문 모를 말만 남기고는 그녀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잠에 빠졌다. 가장 최소한의 가이딩만 하려는 사람처럼.

왜 그는 그런 자제심을 보였을까. 서윤이 대체 그를 어떤 눈으로 보고 있기에.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겠다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탓에 서윤은 갈 곳을 잃었다. 이 황량한 집에서 겨우 두 다리 뻗고 눕던 손님방 침대에는 또다시 그녀의 영역을 침범한 문도하가 누워 있었으니까.

그래서 서윤은 이 모든 고민이 너무 싫었다. 자꾸만 그의 뜻밖의 행동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자신이 너무 미련한 것 같았다. 그는 그저 그녀에게서 모든 걸 앗아가는 사람에 불과해야 했다. 왜 자꾸 안쓰러운 마음이 주제넘게 머리를 내미는 걸까.

그저 마냥 미워할 수만 있게 만들어줬으면 원망이라도 마음껏 할 텐데, 문도하는 그조차 못하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슴에 자꾸만 묘한 감각을 심어주려는 이런 상황들이 싫었다.

그렇게 엉망진창으로 돌아올 정도였으면 그냥 가이딩을 하고 말지 뭐 하는 짓일까. 애초에 도구처럼 그녀를 쓰겠다고 이런 곳에 가둬 둔 건 문도하였다. 이제 와서 뭘 어쩌자고.

문득 현관의 잠금장치에 생각이 미친다. 현관문에는 이상한 장치가 있었는데 안이든 밖이든 문도하의 지문이나 열쇠 카드로 개폐 여부를 설정할 수 있는 물건이었다. 그런데 어제 그 정신으로 돌아온 문도하가 들어오면서 과연 잠금장치를 잘 설정해 놨을까?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발걸음 소리 하나 없이 뒤돌아선 서윤은 흘긋 돌아가는 시야 끝자락으로 문도하의 평화로운 얼굴을 훑었다. 그러나 그뿐, 돌아보는 일 없이 조심조심 방을 벗어나 현관문 쪽으로 향한다.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마음이 조급하다. 다급함이 발끝까지 퍼지지 않도록 주먹을 꽉 쥐면서 서윤은 숨마저 죽인 채 걸었다.

그렇게 손 뻗으면 현관문이 닿을 거리에 도착하자 확연하게 보였다. 잠금 설정을 했다면 빛이 나야 할 기계가 꺼져 있다는 걸.

지금이라면 나갈 수 있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손이 절로 움직였다. 이런 허술한 도망으론 금방 잡히고 말 것이란 생각도, 당장 나가봐야 수중에 돈 한 푼 없는 자신은 갈 곳조차 없다는 생각도 아스라이 뒤로 멀어진다. 그저 나가서 숨을 쉬고 싶었다.

손에 차가운 현관 손잡이의 감촉이 느껴짐과 동시에 힘을 주어 밀었다. 역시나 어제는 잠금 설정을 잊었는지 문이 아무 저항 없이 열렸다.

그렇게 서윤이 바깥으로 발을 한 걸음 내뻗으려는 그 때, 무언가가 허리를 잡아챘다.

“어딜 가는 거지?”

오랜 시간 숨죽여 걸어온 게 무색하도록 그녀를 집 안으로 끌어당기는 문도하는 자비가 없었다. 언제 다가온 건지 등 뒤에 바로 붙은 문도하의 음성이 귀를 울린다. 거친 울림을 들으니 그의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는 걸 깨달았다.

초조함이 불쑥 올라온다. 이미 늦어 버린 걸 알면서도 서윤은 두 손으로 잡은 현관문의 손잡이를 놓지 못했다. 그러자 문틀 위쪽에 손을 짚은 문도하가 서윤의 몸을 통째로 끌어당겼다.

“아……!”

몸이 붕 떠올랐다. 염동력도 아닌 문도하의 순수한 악력이었다. 덕분에 뒤로 당겨지는 그녀를 따라 잡고 있던 현관문이 스르륵 닫혔다. 바깥으로 향하는 계단의 모습이 서서히 사라졌다. 이내 쾅 소리마저 내고 닫힌 대문이 더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망연자실하게 아직도 손잡이를 잡고 있는 서윤을 문도하가 못마땅하게 내려다보았다.

“신발도 안 신고 나갈 작정이었나? 도망을 어설프게 치는군.”

그제야 자신이 정말 정신없이 밖을 향해 가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다시 한번 정신이 멍해진다. 숨이 막히는 것도 같았다. 아직까지 뒤에서 허리를 단단히 두르고 있는 문도하의 존재가 너무 거대하게만 느껴진다.

그렇게 한참을 망연자실하게 현관문 앞에 서 있기만 하자 귓가에 혀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불쑥 옆으로 뭔가 다가오는 게 보여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린다. 그에 맞춰 문도하는 잠깐 손을 멈칫했으나 기어코 아직도 현관 손잡이를 잡고 있는 이서윤의 손을 잡아떼었다.

“……발이 차갑잖아. 들어와.”

그 말을 듣고 나서야 대리석 바닥을 타고 올라온 한기가 발끝을 점령한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중적인 그의 태도는 역시 그녀에게 혼란만 욱여넣고 있었다.

몹시, 불필요한 감정을.

“제대로 된 가이딩을 하는 것도 아니면서, 사람을 왜 가둬 두는 거죠?”

충동적으로 뻗었던 발걸음처럼 홀린 듯 서윤은 물었다. 도무지 일관적이지 않은 문도하의 행동에 휘둘린 나머지 속이 다 울렁거리고 있다. 하지만 말이 끝남과 동시에 다시 무서워졌다. 문도하가 알겠다며 그대로 그녀를 침대로 끌고 갈 것만 같아서.

하지만 그런 서윤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던 문도하가 피로감 가득한 얼굴로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런 표정으로 만용 부리지 말고 조용히 해.”

그러더니 도무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 서윤의 무릎 뒤로 손을 넣어 그녀를 번쩍 들어 올렸다.

“흣!”

“얌전히 있어.”

갑작스러운 부유감에 서윤은 마구 발버둥을 쳤다. 두려움에 주먹으로 문도하의 어깨도 마구 내리쳤으나 단단한 반탄감만 느껴졌을 뿐이다. 불안하게 흔들리는 그녀의 몸과는 다르게 문도하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얼굴에 쌓인 피로감이 아니었다면 흡사 기절한 사람을 옮기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우려와는 다르게 그가 향한 곳은 거실의 소파였다. 눈만 질끈 감고 두려움을 감내하던 서윤을 문도하는 무심히 털썩 내려 두었다.

“기다려.”

“왜, 왜요…….”

“시위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이렇게 마르도록 밥을 굶으라고 했지?”

“…….”

서릿발 같은 질책에 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문도하의 미간이 한층 깊게 패이는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녀가 팔자 좋게 미식이라도 즐기길 바라는 건 지극히 불합리한 소망이 아닌가. 잊고 있던 분노를 쥐어짜 그를 쳐다보자 문도하의 얼굴이 다시 굳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보자 문득 얼마 전부터 묘하게 문도하의 표정이 풍부해졌다는 감상이 떠올랐다. 어젯밤도 그렇고.

“분명 잘 챙기도록 실장에게 말해 두었는데, 그가 일을 제대로 하지 않았나?”

“그건, 아니에요…….”

“하…….”

이대로라면 박남일 실장에게 불똥이 튈 거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그가 자발적으로 이곳에 갇힌 서윤을 배려해주는 것이라 여겼는데 아니었던가. 이번에도 마음껏 분노를 표출할 수 없게 된 이 상황이 가슴에 큰 돌덩이를 얹어 주었다.

결국 서윤은 다시 체념 어린 심정이 되어 문도하의 발끝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발이 차갑다며 사람을 끌어당긴 것치곤 그 또한 맨발이었다. 시선이 얼마간 정수리로 꽂히는가 싶더니 그가 몸을 팩 돌려 부엌 쪽으로 향했다.

“……허튼 생각 말고 기다려.”

두 팔로 들어 올린 이서윤은 얼마 전과 비교해서 몹시 말라 있었다.

손바닥에 아스라이 남아 있는 그 무게를 떠올리니 이상하게 부아가 치밀었다. 그러다가도 이서윤과 눈이 마주치면 이번엔 등을 돌리고 싶어졌다. 잔뜩 마른 걸 목도하고 나니 억지로라도 음식을 먹여야겠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이렇게 하루하루 말라 사라지는 것으로 도망칠 계획은 아닌지, 말도 안 되는 상상마저 그를 괴롭혔으니까.

부엌에 오고 나서야 문도하는 그가 썩 좋은 요리사가 아니라는 걸 겨우 기억해 냈다. 짜증스럽게 미간을 한번 쓸어 올리며 냉장고를 열었다. 그의 의식주는 대부분 실장이 처리하고 있었다. 아마 적당히 바로 먹을 수 있는 것들로 채워 넣었으리라.

예상대로 냉장고 안에는 음식이 가득했다. 건드린 흔적도 거의 남아 있지 않아서 다시 한번 두통이 그를 침습한다. 적당히 꺼내 들어 이서윤에게 가져가려던 그는 이번엔 다른 위기에 봉착했다.

이딴 빵 쪼가리 말고, 좀 더 제대로 된 걸 먹여야 하는데.

생각을 이어가던 찰나, 순간적으로 그는 싱크대에 팔을 지탱하며 비틀거렸다. 사실 몸 상태는 이지가 돌아온 게 기적이라 할 만큼 좋지 않았다. 어제 제대로 된 가이딩을 하지도 않았는데 어찌 영혼의 붕괴가 멈췄는지 모를 일이었다. 설마하니 그가 이서윤이 빠져나가는 것도 모르고 자는 사이 그녀가 가이딩을 더 해준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거실에서는 보이지 않는 부엌 안쪽에서 문도하는 양팔을 싱크대에 짚은 채 한참을 침묵했다. 보이진 않았으나 이서윤의 숨소리가 그를 향해 흘러들어 왔다. 그게 퍽 불안해 보인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이 적막이 견딜 수가 없어진다.

본능적으로 염동력을 보내 TV의 전원을 올렸다. 무슨 프로인지는 모르겠으나 이런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음악이 거실을 잠식했다.

“후…….”

다시 무릎에서 풀썩 힘이 빠진다. 어리석은 짓을 한 대가였다. 능력을 쓰기 힘들 정도라 이서윤마저 직접 손으로 잡으러 간 것이었는데, 고작 TV 전원 하나 올리자고 능력을 쓰다니 멍청한 짓이다.

그저 이서윤의 불안한 숨소리가 거슬려서.

해결책이 딱히 없는 위기 앞에서 문도하는 오래도록 팔을 짚고 서 있었다. 이제는 멍청한 짓이 습관이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자조마저 들 정도였다.

왜 그녀의 눈길 앞에선 몸이 말을 듣지 않을까. 깊은 의문이 본격적으로 문도하의 뇌리를 잠식한다. 그러나 역시 당장 해답이 나오진 않았다.

“…….”

금방이라도 올 것처럼 사라진 문도하는 뭘 하는지 부엌에서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중간에 불쑥 켜진 TV가 마치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신호라도 된 양.

어울리지 않는 발랄한 음악이 서윤의 주의를 쉽게 끌었다. 무생물에게마저 조롱당하는 기분에 건조한 눈길을 화면으로 보낸다. 그러다 곧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되었다.

“……강아지.”

하얀 강아지 한 마리가 주인공처럼 화면의 집중을 받고 있었다. 버려진 꼬질꼬질한 강아지가 새로운 주인을 만나는 과정이 짤막하게 나오더니 이내 이전의 모습이 전부 사라졌다. 흡사 웃고 있는 듯 혀를 내밀고 주인을 응시하는 강아지의 모습을 보는 순간 서윤은 잊고 있던 기억을 하나 떠올렸다. 그녀의 동네에서 잠깐 만났던 작고 볼품없던 강아지를.

이제는 돌아가기 힘들어진 그곳에서 잘살고 있을까. 멍하니 흘러가는 걱정 때문에 서윤은 제 처지도 잊은 채 화면에 집중했다. 꼭 문도하가 부숴 버린 폐허 속에서 한 송이 꽃이라도 발견한 사람처럼 하염없이 바라본다.

그러다 이번엔 강아지가 마치 서윤을 바라보듯 카메라를 응시하며 헥헥거리자 아주 조금 포근한 마음이 솟았다. 여린 생물을 좋아하는 서윤으로서는 거의 반사적인 감상이었다.

그 강아지도 좋은 주인을 만나 저렇게 예쁜 모습이 되면 좋을 텐데.

“…….”

음식을 들고 조용히 다가왔던 문도하는 그런 서윤의 뒤에서 바짝 굳어 버렸다.

이서윤은 미소를 짓지 않았다. 멍하니 화면을 보는 그녀의 외양은 여느 때처럼 체념만이 가득했다. 그런데도 그의 눈길은 이서윤에게 사로잡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녀의 감정이 몹시 반짝이고 있었다.

그 환한 빛을 목도한 순간은 들고 있는 접시를 떨구지 않는 게 최선일 만큼 충격적이었다. 그가 다가온 지도 모르고 하염없이 TV만 보고 있는 그녀를 부를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를 돌아보는 순간 저 반짝임이 어떻게 추락할지 똑똑히 알고 있었으니까. 문도하는 그게 못내 두려웠다.

이서윤의 부정적인 감정일지라도 꽤 만족스럽게 관찰하고 있었다고 했던가. 붉게 빛나는 그녀의 두려움들을 손끝으로 예쁘게 굴리며 관찰한 적도 있었다. 그게 발밑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순간을 찬란하다 여기기도 했다.

전부 아둔하기 짝이 없는 소회였다. 그따위 것들, 저 반짝임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하고 아픈 것들일 뿐인데.

깨달음이 거대한 파도처럼 일순 문도하를 덮쳤다. 숨이 막힌다. 접시를 들지 않은 한 손으로 두려움의 파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입을 가리자 피부에 진동이 느껴진다. 손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넥타이를 하고 있지도 않은데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입을 가렸음에도 그의 폐부에 들어찬 두려움은 기어코 그의 숨통을 졸랐다. 귓가로 무언가가 깨져 나가는 소리가 들려 반사적으로 손을 내려다보았으나, 그녀를 위해 준비한 초라한 음식 접시는 그대로 손아귀에 있었다.

폭주의 소용돌이에 있는 것처럼 자꾸만 무언가가 쩍쩍 갈라져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불길함을 가득 담은 그 소리가 마치 운명의 잔혹한 선고와도 같았다. 어렴풋이 떠다니던 그의 의문에 돌아온 해답은 이토록 잔인한 것이었다.

그를 두렵게 보는 이서윤의 눈길이 왜 아팠는지, 그 해답이 말이다.

아픈 감각이라는 게 이렇게도 선명하게 실감된 적이 있던가. 선천적인 결핍이 낳은 무지는 이서윤이 그에게 직접 전하는 뚜렷한 감정에 의해 형편없이 파괴되었다.

충격이 몸을 떨게 하는 이 순간, 그를 둔중하게 후려치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저것이 앞으로도 문도하에게는 허락되지 않을 빛이라는 점이.

<가이드의 우울>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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