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파괴(4) (13/27)

(4)

“…따라서 바로 근처를 수색했으나 괴물을 세 구밖에 처리하지 못했습니다.”

긴급회의가 연신 이어졌다. 모처럼 야간 전투가 없는 날이다 싶더니 기어코 설치한 루어 중 한 곳이 뚫려 버렸다. 늘 역방향으로 가동해서 몬스터들이 기피하도록 만들어 둔 지점이었는데도 말이다. 생존 시간이 늘어난 것과 함께 뭔가 몬스터의 성질 변화가 있던 건 아닌지 갑론을박이 한창이다.

“방어라인이 뚫린 크기는 그리 크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세 마리가 다일 수도 있으나 외곽 거주 지역과 가까운 곳이라 수색을 좀 더 진행할 작정입니다.”

“CCTV로 확인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필 큰 파도와 함께 괴물이 흘러들어 와서 영상이 명확하지 않습니다. 일단 영상에서 확실하게 확인한 게 세 마리였습니다.”

이서윤을 내려 주고 바로 회의에 참석한 문도하는 면밀히 정보를 귀에 담으면서도 불편하게 앉아 있었다. 원래도 편한 자리는 아니었지만 오늘은 정도가 심했다.

요 며칠 이서윤은 자꾸 이상한 얼굴을 했다. 그녀의 마음속에 소용돌이치는 감정은 너무 빠르게 일렁여서 문도하로서는 그걸 명확하게 인식할 수도 없었다. 아무래도 두려움 같은 단순한 감정은 아닌 모양이다.

“주변 도로를 빠짐없이 확인하면 되지 않습니까?”

“그, 그게……. 몇몇 CCTV가 현재 작동하지 않아서…….”

“뭐요? 관리 소홀 아닙니까.”

“그게 예산 문제 때문에…….”

“지금 국민들의 목숨을 걸고 예산 타령을 하는 겁니까!”

그 알 수 없는 감각이 문도하는 몹시 거슬렸다.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본래 이서윤의 감정 따위가 어떻든 무시할 작정이었는데, 이제는 그가 모르는 무언가가 떠오른다고 거슬렸다. 심지어 자신의 감정조차 제대로 분류할 줄 모르는 문도하였기에 이 상황이 더 아이러니하다.

어쨌든 문도하는 이서윤 덕분에 자신의 거슬리는 감각도 꽤나 분류가 다양해질 수 있다는 걸 배웠다. 다른 이가 거슬리게 한다면 그저 치워 버리고 말았을 텐데, 이서윤이 거슬리게 행동하면 득달같이 그걸 좇을 수밖에 없었으니까.

“협회 측에서는 늘 최선을…….”

“그따위 말은 누구나 할 수 있지! 그리고, 자꾸 이렇게 명확한 자료도 없이 회의를 소집할 겁니까?”

흐르는 물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회의장 내부의 분위기는 개판으로 돌아갔다. 능력 없고 욕심 많은 협회와 당한 게 많은 클랜의 관계는 최악이라고 표현해도 어폐가 없었다.

애초에 클랜 연합 측에서는 몬스터의 육지 생존 시간이 늘어났다는 정보를 협회가 순순히 알려준 것도 이런 사태를 혼자 수습할 여력이 없기 때문이라 분석하고 있었다. 사회 혼란까지 야기할 정도가 아니었다면 절대 먼저 알려줄 리가 없다고.

최근 들어 협회는 세금으로 구성된 막대한 자금을 횡령한 혐의까지 받고 있었다. 연구를 위한 지출이라고 주장하고는 있으나 증빙 자료가 없는 실정이었다. 덕분에 협회에 대한 클랜의 의심은 한층 깊어져만 갔다.

애초에 클랜 또한 이익집단이기에 이 사태를 빌어 아예 유명무실한 협회를 끌어내리려는 자들이 있는 모양이었다.

그게 당장 몬스터가 민가를 돌아다니고 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도 서로가 욕심을 위한 돼지 같은 언쟁을 하는 이유였다.

“그러니 각 클랜이 가지고 있는 정보가 있다면 조금 협조를……!”

“언제까지 그렇게 하는 일도 없이 뜯어내기만 할 작정입니까, 협회는?”

돼지 새끼들이 뭐라 떠들든 문도하는 앞에 놓인 태블릿 화면을 성의 없게 넘겼다. 그러다 문득 이번에 루어가 파괴된 지역을 자세히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요? 우리 협회가 얼마나……!”

“다들 닥쳐.”

“…….”

“…….”

아무리 생각해도 이서윤의 집과 너무 가깝다.

이서윤이 사는 동네는 원래부터 위험지역이었다. 사람보다는 두 배나 느리게 걷는 몬스터지만, 그것들이 최대치로 살아남는다면 간신히 닿을 거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추정치이기에 몬스터의 출몰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래서 그 위험한 곳에도 사람들이 아등바등 살고 있는 것이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괴물들의 최대치가 바뀌기 전의 얘기였다. 육지에서의 생존 시간이 늘어난 지금은 아무것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문도하의 눈에서 형형한 빛이 솟았다.

“그래서, 수색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데?”

“흠흠. 다섯 개 조가 몬스터가 움직일 만한 동선을 따라 수색 중입니다.”

“지도.”

“네, 넵.”

그의 기세가 바뀐 탓일까, 돼지 새끼들의 각축장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협회에서 대책을 아예 안 세운 건 아닌지 금방 괴물의 예상 동선이 화면에 떠올랐다. 흠을 찾듯 화면을 노려봐도 협회의 대처는 적절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탐탁지가 않지.

“……에스퍼를 더 지원하도록 하지. 거주 지역에 닿는 일 없도록 확실하게 처리해.”

“네. 역시 국민 클랜다운……!”

협회의 인사가 뭐라 찬양을 늘어놓았지만 문도하는 깔끔하게 무시했다. 어떻게든 이득을 위해 주도권을 쥐려 했던 다른 클랜의 인물들이 얼굴을 구기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톡톡 태블릿의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생각에 잠긴다. 최근 뉴스에 보도되지 않았던 몬스터의 침입은 이서윤의 동네보다도 더 바닷가에 밀접한 곳이었다. 아슬아슬하긴 해도 몬스터가 실제로 이서윤의 집 근처에 나타나는 일은 희박할 것이다.

다만 국민 클랜이 만에 하나를 위해 대처했다는 사실을 남겨 두는 건 이로운 일이 될 터다. 이런저런 이성적인 계산이 금방 섰다. 그런데도 왜인지 문도하는 자신이 이서윤의 존재에 휘둘리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문도하가 제 할 말만 끝내고 다시 무관심해지자 회의장은 다시 한번 소란스러워졌다. 이번엔 국민 클랜의 에스퍼 파견에 숟가락을 얹으면서 조금이라도 더 뭔가를 뜯어내려는 각축으로.

“저번의 상대분과는 무척 각별하신 사이 같더군요.”

옆에 앉아 같이 회의에 참석했던 이강덕 이사가 그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알 수 없는 감각에 그저 태블릿만 뚫어져라 내려다보던 그가 대번에 시선을 줄 만한 화제를 가지고 말이다.

그 또한 문도하처럼 회의 내용엔 별반 관심이 없어 보였다. 대체 무슨 협잡이 오갈지 모르니 안 올 순 없지만, 대부분은 이렇게 영양가 없는 시간 죽이기가 되기 일쑤였다. 지루하다는 태도를 버리지 않은 채 이강덕이 친근하게 계속 말을 붙였다.

“그 중요한 회의 중간에도 뛰어나가시다니. 박남일 실장님이 수습하느라 얼마나 고생하셨는데요.”

저번부터 이서윤에게 관심을 보이는 이강덕을 슬쩍 바라보며 문도하가 의혹을 일축했다. 이 간덩이가 부은 자는 대체 무슨 꿍꿍이일까.

“남의 사생활에 관심이 많군.”

“하하. 에스퍼에게 사생활이 어디 있습니까, 도하 님.”

정말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호탕하게 웃는 이강덕의 얼굴을 문도하는 천천히 마주 봤다. 그가 이렇게 크게 웃음을 흘리는데도 회의장의 시선이 이쪽으로 오는 법은 없었다. 저쪽에서는 아까보다 더한 고성이 오가고 있었으니까.

“하고 싶은 말이 뭐지.”

이미 이강덕 이사에 대한 건 조사가 끝났다. 야심이 퍽 많은 타입이나 어쨌든 국민 클랜 내부에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하는 자였다. 수완도 뛰어나고 주변 평판도 썩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본격적으로 긴밀한 동맹을 맺은 에스퍼는 딱히 없었다. 그 사실과 남들은 다 기피하는 자신에게 이렇게 대놓고 접근하는 그의 태도를 보면서 문도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역시 권력이 목적인가.

그런 문도하를 잠깐 바라보던 이강덕 이사가 슬쩍 다가왔다. 무척 긴말한 말을 하고 싶다는 듯이. 가까이 다가오는 인기척이 짜증났지만 저 입에서 자꾸 이서윤이 오르내리는 탓에 문도하는 일단 그가 하는 짓을 두고 보았다.

가까이 다가와서도 문도하의 뛰어난 청력으로만 겨우 들을 수 있도록 음성을 조절한 그가 속삭인다.

“저 말고도 주시하는 눈이 많습니다. 가이드 여성분과의 교제라니 신기한 일이라면서 말이죠. 조심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

딱히 대꾸는 하지 않은 채 문도하는 그저 불쾌하다는 듯 눈썹만 들어 올렸다. 금방 떨어져 나간 이강덕 이사가 어깨를 으쓱하며 빙글 미소를 지었다. 무슨 의도를 가지고 저러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겉으로는 무시하는 척을 했다.

다만 마음 한구석에서 덜컹 무언가가 쏟아져 내렸다는 감각이 들었다.

* *

회의는 꽤 오래 이어졌다. 참다못한 문도하가 직접 괴물이 움직였을 만한 곳까지 직접 수색했지만 별 성과는 없었다. 어쩌면 괴물은 세 마리를 끝으로 더 침입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이상한 예감이 떠나질 않았다. 그저 불안하다고 표현하기엔 그의 본능이 뇌리를 찌르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하염없이 주변을 수색하다 보니 이서윤을 데리러 갈 시간이 되었다. 하루쯤은 게으름을 부릴 만도 한데 이서윤은 빌어먹게도 성실하기까지 했다. 피곤하게 미간을 문지르며 차에 오른 문도하는 묵묵히 그녀에게 닿기를 기다렸다.

벌써 며칠째 제대로 잠들지 못했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었다. 시야가 녹슬기 시작한 이래로 제대로 잠드는 날이 더 드물었으니까.

이서윤에게 가까워질수록 예감인지 뭔지 초조한 감각이 들었다. 그래, 이건 초조함이었다. 무언가 그의 신경을 제대로 거슬리게 하고 있었다.

이강덕 이사가 선심을 쓴답시고 내뱉은 말이 귀를 떠나질 않았다. 가이드 여성분과의 교제라. 일단 이서윤이 가이드라는 사실은 딱히 비밀이 아닐 터다. 클랜 자체에서 수집한 가이드 명단은 이사인 이강덕도 접근할 수 있을 테니. 애초에 가이드 명단을 협회가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어디로든 새어나갈 수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아니.”

“……가이딩을 받으시면…….”

“내가 알아서 해.”

예전에는 상태가 안 좋다고 툭 내뱉으면 박남일 실장의 얼굴이 아주 볼 만했는데 지금은 대안을 제시한다. 믿을 구석이 생겼다는 듯 구는데, 그와 이서윤의 관계를 제대로 알게 되어도 저런 태도일지 궁금했다. 보통 가이드들은 에스퍼의 치유에 협조적이기에 그가 가이딩을 못 받을 수도 있다는 선택지는 떠올리지도 못하는 거겠지.

자꾸만 뭔가 어긋났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게 이서윤과의 관계인지, 아니면 차라리 가둬 놨어야 했다는 생각인지도 잘 모르겠다. 지나간 일을 곱씹는 취미는 없었는데 최근 들어 이서윤의 두려운 표정이 이따금 생각나기도 했다. 어쩌면 너무 오래 잠들지 못한 탓이리라.

괜한 상념을 날리려는 듯 머리를 쓸어 올린 문도하가 툭 내뱉었다.

“이강덕 이사가, 이서윤이 가이드인 걸 알고 있던데.”

“네? 도하 님의 운명인걸요?”

“아니. 그냥, 이서윤이 가이드인 점을.”

“흠…….”

어제는 실장이 같이 회의에 들어가질 못했다. 그래서 일단 알아두라는 언질이었는데 실장의 얼굴이 대번 심각해진다. 그걸 보니 그도 덩달아 인상이 펴지질 않았다.

“왜.”

“사실, 그게……. 흠흠. 왠지 감이 별로라서 명단을 숨겨 놨거든요.”

“……E급 가이드 명단 전체를?”

“네.”

실장은 맨 처음 문도하가 뜬금없이 명단을 가져오라고 했을 때 있었던 일을 알려주었다. 석연찮게 은폐된 듯하던 E급 가이드 명단과 협회의 태도를. 그 후로 이를 이상하게 여겨 팀원들에게 함구령을 내리고 명단도 클랜 중앙 자료실에 보내지 않았다고.

E급 가이드의 존재를 아는 사람도 적은 데다가 그 중요도도 낮으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다. 실장 정도의 수완이라면 나중에 이유를 갖다 붙이는 것도 어렵지 않았을 거고.

그렇다면 이강덕 이사는 어떻게 이서윤이 가이드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걸까.

그 사실을 들으니 아까부터 들끓던 감정이 일시에 범람했다. 뭔가 도무지 이대로 가만히 있기 힘든 기분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퍽 이상한 감각이었다. 왜냐면 지금 그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마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결국 이서윤이 걸어오는 걸 기다리지 못하고 문도하는 차 밖으로 나갔다. 어느새 으슥한 골목길에 주차된 그의 차는 주변에 잘 동화되어 숨어 있었다.

분명 이대로 마중을 간다면 싫어하겠지. 또 그와의 관계가 널리 알려질까 봐 그 고운 이마부터 찌푸릴 게 뻔했다. 퍽 현실성 높은 상상 때문에 문도하의 이마에도 실금이 갔다.

그가 차에서 불쑥 내리자 실장이 눈치껏 마스크를 챙겨줬다. 그는 얼굴이 매스컴에 노출되는 걸 최대한 막고 있었으나 알음알음 퍼지는 것까진 막기 힘들었다. 특히나 얼마 전엔 뉴스에 탄란을 잡는 모습이 대대적으로 나온 탓에 그를 알아보는 빈도수가 더욱 늘어나고 있다. 그게 아니라도 눈에 띄는 외모는 늘 쓸데없는 주목을 부른다.

마스크를 성의 없게 얼굴에 끼던 문도하가 차에서 몇 걸음 걷지도 못하고 이내 멈칫했다. 이 상황이 무척 우습다는 생각에 사로잡혔기 때문이다.

“……쳇.”

신경질적으로 마스크를 구겨 주머니에 넣어 버린다. 이서윤이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지.

문도하는 평생 얼굴을 가리고 살아온 적이 없었다. 누군가 그를 쳐다보는 게 거슬린다면 자신이 얼굴을 가릴 게 아니라 쳐다보는 눈길을 제거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게 모퉁이를 돌아 천천히 이서윤이 걸어올 길을 더듬어 올라가자 이내 반대쪽에서 환한 빛이 터져 나왔다.

그의 빨간 세상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이서윤.

“……오셨어요.”

그의 예상과 한 치의 다름없는 장면이 펼쳐졌다. 그를 발견하자마자 이서윤은 이마를 살풋 구기며 주변의 눈을 살피는 데 집중했다. 찰나같이 붙었다 떨어진 시선이 왜 이리도 거슬리는지.

분명 이서윤은 처음으로 그의 세상에서 거슬리지 않는 존재였다. 그러다 어느새 무엇보다도 거슬리는 존재가 되어 버렸다. 아주 매끈한 대리석 바닥에 톡 튀어나와 있는 거친 돌부리처럼. 도무지 외면하려 해도 외면할 수 없는 그런 존재.

평소라면 거친 돌부리를 밀어 다른 곳처럼 매끈하게 만들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서윤은 달랐다. 그녀가 중심인 양 주변의 매끈한 곳까지 점점 패이고 깎여 이상한 모양이 되고 있다.

“늦었군.”

마치 늦어서 잡으러 왔다는 듯 들렸으리라.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문도하는 괜한 오해를 사는 쪽을 택했다. 도무지 제 안의 모순이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래도 그간 배운 게 없지는 않은 듯 이서윤은 도망치기보단 재빠르게 그에게 다가왔다. 그 목적이 문도하를 이 번화가에서 데리고 사라질 작정이라는 게 빤히 보였지만 거리가 가까워지니 이상하게 이제야 숨을 쉰다는 감각마저 들었다.

정말 미쳐 가고 있었다.

“별일은 없었나?”

“네? ……네.”

하루 종일 빠짐없이 그녀의 주변 상황을 보고받고 있었으나 문도하는 짐짓 모른 척 물었다. 자꾸만 자신을 치울 거리로만 생각하는 그녀의 태도에 자극이라도 받은 듯이. 이서윤은 별 희한한 걸 들었다는 얼굴을 했으나 이내 고개까지 끄덕이며 그와 눈을 마주쳐 주었다.

“…….”

“…….”

차까지 돌아가는 짧은 길이 올 때와는 다르게 무척 느렸다. 그게 그의 엉망이 된 시간 감각 탓인지 느린 이서윤의 걸음 탓인지 잘 모르겠다. 혼란이 이제는 질서인 양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다. 그를 뒤흔드는 이서윤에 대해 고민하던 문도하는 문득 답답함을 느꼈다.

어제 회의에서부터 계속되는 기묘한 불길함이 안 그래도 예민한 그의 신경을 마구 난도질하고 있었다.

“이번 일은, 언제까지 계속할 예정이지?”

덕분에 끝내 묻고 말았다. 이 말을 꺼내는 순간 이서윤이 반발할 걸 알면서도. 일단 그녀가 안전하다는 확신이라도 받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물론 그는 늘 반쯤 미쳐 있었기에 썩 맞는 표현도 아니었다.

“……계속할 건데요. 별일 없다면 계속.”

역시나 경계심을 잔뜩 띄운 이서윤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그 곧은 눈길을 받으니 어쩌면 그와 이서윤의 관계는 영원히 이런 상태일 거라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이건 분명 그가 맨 처음 계획했던 것처럼 이상적인 관계다. 그는 이서윤의 안전을 책임지고, 그녀는 그의 정신을 보듬고. 그 과정에서 쓸데없는 운명 놀음은 집어치우고.

그런데 그녀와 그의 사이에 영원히 좁힐 수 없는 거리가 있을 거라는 걸 깨닫는 순간 이상하게 숨이 턱 막혀 왔다. 그의 본능이, 스스로의 목을 조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이서윤이 앞에 있는데도 시야가 점점 붉어졌다.

“……거주지라도 이쪽으로 옮기는 게 어때.”

“…….”

며칠 그녀의 상황에 맞추려는 듯 굴던 문도하는 역시나 허상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경계심을 잔뜩 끌어올리며 서윤은 불현듯 깨달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그의 앞에서 경계를 풀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그들의 짧은 평화가 산산조각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안쓰러운 마음이 들어 버린 걸 이제 와 지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 감정 때문에 그가 이렇게 그녀의 거처까지 통제하는 걸 정당화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녀는 이미 최대한 많은 걸 양보하고 있었다. 어느 날 혜성처럼 떨어진 이 운명을 감수하고 말이다.

“기밀이지만, 괴물의 활동 범위가 늘었어. 게다가 어제 이 근처에 있는 루어도 하나 뚫렸다고.”

억울함에 무작정 거부를 쏟아 내려던 서윤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분명 뉴스에는 아무런 속보가 뜨지 않았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문도하의 말이었다. 그간 살펴본 문도하는 분명 이런 일로 거짓을 말할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인생을 멋대로 주무르겠다는 계획을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문제였지.

이제야 그가 갑작스럽게 또 이런 태도가 된 이유가 조금 이해는 갔다. 막연하게 생각하던 위협이 그녀의 지척에 다가오는 걸 알아차렸으니 경고하고 싶었던 모양이다.

애써 이성적으로 이 상황을 판단한 서윤은 이번만큼은 한발 물러나기로 했다. 그런데도 어쩐지 스스로가 문도하의 행동에 자꾸 면죄부를 쥐여 주려는 것 같은 위화감이 들었다. 한번 울컥 솟은 억울함이 쉬이 가라앉지 않는 탓인 듯했다.

“알려준 건 고맙지만, 역시 결정은 내가 할 거예요. 내 인생이잖아요.”

결정을 내리기에 그녀는 가진 것이 많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녀가 홀로 서려는 의지가 강하다고 한들 무모한 짓까지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괴물이 자연적으로 소멸할 때까지는 문도하에게 부탁을 할 생각이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한시적인 일이라는 걸 확실하게 하고 싶었을 뿐이다. 이 빚은 꼭 갚겠다는 말도 함께. 그건 언제나 서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니까 당분간….”

“그 빌어먹을 인생에 내가 끼어들었다는 걸, 대체 언제 인정할 셈이지?”

그러나 서슬 퍼렇게 떨어지는 문도하의 음성에 뒤이어 하려던 말이 맥없이 끊기고 말았다.

문도하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괴물의 생태로 인간을 표현한다면 명실상부한 최상위 포식자인 그가, 이상하게도 꼭 궁지에 몰린 표정이었다. 쫓기고 쫓기다 못해 절박함에 빠진 심정.

늘 몰려 있는 건 그녀였기에 문도하가 이런 표정을 하는 건 이해가 안 갔다. 어쨌든 이제껏 해온 그녀의 태도가 있으니 무작정 거부하고 있다고 지레짐작한 모양이었다. 적어도 당장 어리석은 짓을 할 생각은 없음을 알리고 싶었다.

“오해가 있어요. 지금도 고집을 부릴 생각은 아니었다고요.”

“고집은 이미 부리고 있잖아.”

“…….”

그는 단순히 이 상황만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 아니었나 보다. 그걸 깨닫자 서윤의 표정이 순식간에 멍해졌다. 꼭 불시에 얻어맞은 사람처럼.

“도무지 말을 듣지 않는군. 다른 가이드들은 뜯어내지 못해 안달인 걸, 왜 다 거부하는 거지? 그게 네 알량한 자존심인가?”

날 선 말을 뱉으며 문도하는 한껏 인상을 찌푸렸다. 그게 꼭 제 말에 제가 베인 사람 같았으나 서윤은 신경 쓰지 않았다. 저런 말을 내뱉는 그를 그녀가 이해해야 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문도하는 첫 만남부터 지금까지 도무지 요구를 수용하지 않는 서윤을 매도하고 있다. 마치 응당 그래야 한다는 것처럼. 그녀의 감정 따윈 역시 중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답답함이 치고 올라왔다.

“당장 어디 가두지 않는 걸 고맙게 생각해. 그 빌어먹을 고집 때문에 참아 주고 있는 거라고.”

살포시 미간을 찌푸리며 서윤은 걸음을 멈추었다. 하필 멈춘 곳이 버스 정류장 근처라서 시선이 이곳에 꽂히고 있었다. 정확히는 맨얼굴을 드러낸 문도하에게.

몇 번이나 당부했고, 또 그 스스로도 약속해 놓고 문도하는 서윤의 생활을 지킬 의지가 없었다. 그렇지 않다면 늦지도 않았는데 그녀를 잡으러 굳이 얼굴을 드러낸 채 나타나지 않았겠지.

그저 서윤이 당장 필요하니까 존중해 주는 척을 해 왔던 것에 지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멋대로 휘두르는 걸 잠깐 참아 주는 정도의 알량한 배려. 그 배려는 너무나도 얕고 가늘어서 조금만 수틀리면 이렇게 서윤의 숨통을 조여오는 방향으로 금방 변화하고 말았다.

도무지 그와 발맞춰 걸어갈 수 없을 정도로 숨이 막혔다. 멈춘 건 걸음인데 이상하게 심장이 덜컥 멈췄다는 생각이 들었다. 쿵쿵 일정한 리듬을 내는 심장 소리가 들리는데도 꼭 꺼멓게 멍이 든 기분이다.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도 잊은 채 서윤은 그저 문도하를 마주 봤다. 어리석게도 아주 잠깐 동안 손을 뻗으면 그가 닿을 거라 여겼던 모양이었다. 그들이 걷는 건 결국 평행선이었는데 말이다. 반짝이다 사라진 제 안의 무언가가 박살 나고 나서야 서윤은 그게 희망이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쩌면 이 관계에 미래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

매서운 말을 잘도 내뱉던 문도하는 이상하게 그런 그녀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 또한 뭔가를 잃어버린 듯 유심히도.

“또 뭐가, ……뭐가 문제야.”

“문제?”

과연 이게 문제라는 단순한 말로 표현할 수 있나. 서윤이 허망함에 멍하니 그의 말을 따라만 하자 문도하가 제 얼굴을 쓸어내린다. 그는 뭐가 이리도 초조한 걸까. 어차피 손에 쥐고 모든 걸 흔들 수 있으면서.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고…….”

그의 앞에서는 서윤의 모든 것은 쓸데없는 것으로 치부되기 마련이었다. 아등바등 살려는 노력도, 내 발로 걷겠다는 기본적인 욕구도.

나는 당신의 인생을 이해해 보려 했는데.

“내가 얘기했죠. 도망쳐 버릴 거라고.”

기어코 그녀를 끌고 가려는 듯 손을 뻗는 문도하가 서윤의 단호한 음성에 덜컥 멈췄다. 팔을 내밀고는 있으나 그녀에게 닿을 리 없었다. 그들 사이는 겨우 그 정도로 건널 수 있을 만큼 가깝지 않았으니까. 이상한 확신 속에서 서윤은 말을 이었다.

“쫓아오지 말아요. ……오늘은 혼자 돌아갈 거니까.”

마침 그녀의 뺨에 찬바람을 휘날리며 버스 한 대가 들어섰다. 자신에게 꽂힐 듯이 들이닥치는 문도하의 시선을 외면하면서 서윤은 등을 돌렸다. 당장 이 자리에서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번호조차 확인하지 않은 채 무작정 버스에 올라탄다. 쫓아오지 말라고는 했으나 당장이라도 문도하가 능력이든 힘이든 써서 그녀를 뒤로 잡아당길 것 같았다. 하지만 왜인지 문도하는 그녀를 뒤쫓지 않았다. 무언가가 그를 그 자리에 꽉 잡아 둔 것처럼.

사람이 많지 않은 노선인지 버스 안에는 빈자리가 많았다. 애써 창밖을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하면서 서윤은 쓰러지듯 의자에 앉았다. 버스가 무사히 출발하는 것을 보니 다리에 힘이 죽 풀린다. 스르륵 차가운 창문에 뺨을 기대며 늘어졌다.

마지막으로 마주친 문도하의 얼굴이 어쩐지 겁먹은 것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들어서 그저 눈을 감아 버린다.

포근한 어둠이 거짓 안식을 주듯 살포시 그녀에게 내려앉았다.

* *

터벅터벅 집으로 가는 길이 너무 공허했다.

삼촌의 소식을 알려주는 문도하를 보면서, 그녀를 배려하듯 가이딩까지 자제하는 그를 보면서 알게 모르게 기대하고 말았나 보다. 그녀가 겪은 모든 일을 뒤로한 채, 어쩌면 괜찮은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지만 서윤의 착각과 다르게 그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 그의 행동들은 언제든 휴짓조각처럼 쉽게 내버릴 수 있는 덧없는 가식이었다. 그런 것에 기대어 애써 평안을 얻으려던 자신이 어리석게만 느껴졌다.

도망치겠다고는 했으나 그게 성공할 거라 여긴 건 아니었다. 이렇게 절망적인 심정 속에서도 그녀가 돌아가는 곳이 집이라는 건 알릴 만큼 그녀는 체념에 물들어 있었다. 그저 오늘만큼은 혼자 집에 돌아가며 이 걸음이 그녀 자신의 의지라는 걸 실감하고 싶었을 뿐이다.

“…….”

그녀가 잡아탄 버스는 평소에 타던 노선이 아니었다. 몇 개의 정류장을 지나치고 나서야 낯선 번호였음을 깨달았다. 그 후에는 바로 내려서 택시를 잡아탔으나 기사는 동네 깊은 곳까지 가는 걸 거부했다. 위험한 동네에 살아 그런지 종종 있는 일이었다.

할 수 없이 평소와는 다른 곳에 내려서 집까지 조금 걸어야 했다. 몬스터를 꾀려고 대로를 환히 밝히고 있는데도 눈앞이 어둡게만 보였다.

하필 근처에 루어가 뚫렸다니 불안한 마음이 든다. 무모하게 행동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다시 체념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뒤쫓지 않았다고는 하나 문도하가 자신의 행적을 추적하지 않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어차피 늘 빠짐없이 감시하고 있겠지.

주변에 널린 공기가 이상하게 그녀의 숨통을 콱 잡은 느낌이 들었다. 온몸이 칭칭 감긴 채 꼭두각시처럼 사는 기분. 그녀는 이게 뭔지 아주 잘 알았다.

소름 끼칠 정도로 자유가 사라진 그녀는 늘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삼촌의 인형처럼 이리저리 다른 공간에 놓일 뿐.

과거를 떠올리자 서윤은 정말이지 쉽게 발작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녀의 과거에 드리워진 인형 줄을 겨우 끊고 탈출했다고 생각했는데 더 단단하고 집요한 힘이 서윤을 잡고 있었다.

그녀가 발버둥 칠수록 이 줄은 그녀의 목을 조였다.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에서도 그녀는 모든 게 까발려진 그녀의 안식처로 가는 것밖엔 할 수가 없었다. 누군가 톡 건드리는 것만으로도 한없이 추락할 것 같은 절망이 그녀를 억누르고 있다.

문도하에 대한 연민과 자신에 대한 연민이 어우러지자 그저 울고 싶었다. 하지만 우는 걸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님이 살아 돌아오지도 않았고, 눈물을 보고 삼촌이 그녀를 학대하는 걸 멈춘 것도 아니다. 그저 비참함이 발밑에 고이는 걸 봐야만 했기에 울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이제 집이 코앞이었다. 그녀가 철제 계단을 올라갈 때까지도 문도하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그 알량한 배려로 오늘은 혼자 있게 해주려는지도 몰랐다. 계단을 오르면 오를수록 다리가 무겁다. 그저 침대에 쓰러져 잠들 순간만을 기대하며 다리를 움직였다.

이윽고 문 앞에 도착한 그녀가 대문을 열자 온통 어질러진 집 안이 보인다.

“…….”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밤인데 싸한 기운이 그녀를 훑고 지나갔다. 책상 서랍에 모아 두던 각종 중요 서류가 다 뜯어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그녀의 옷장은 안에서 괴물이 숨어 있다 튀어나오기라도 한 양 옷을 전부 뱉어냈다. 부엌의 작은 서랍부터 침대 매트리스 아래까지 온갖 곳이 헤집어져 있었다. 마치 뭘 찾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한쪽 바닥에는 문도하가 준 목걸이 케이스가 열린 채로 내팽개쳐져 있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면서 서윤은 혼란에 빠졌다. 도둑인가. 그렇다기엔 이 근처는 빠짐없이 감시당하고 있었을 텐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문도하의 짓일까?

서러움이 북받쳤다. 그가 이렇게 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의심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녀가 미약하게 가지고 있던 문도하에 대한 신뢰가 산산조각 난 직후라 더했다. 혼란이 가슴을 빙글빙글 돌며 온갖 곳을 치고 지나가는 기분이었다.

어지러운 나머지 토할 것 같은 그 때, 갑자기 옆집 대문이 슬쩍 열렸다.

“이서윤 씨?”

그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자신의 목뼈에서 녹슨 소리가 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분명 빈집이어야 하는 곳이다. 그녀는 숨을 얕게 쉬며 그곳에서 나온 정체 모를 남자를 쳐다만 보고 있었다. 너무 무서운 나머지 다리가 무거운 사슬에 묶인 기분이다. 빈집에서 나온 남자는 손바닥에 있던 핸드폰과 그녀를 번갈아 본다. 마치 얼굴을 비교하는 듯이.

불길함이 턱밑까지 차올랐다. 그녀의 숨통을 완전히 틀어막겠다는 듯 맹렬히 상승하면서. 무거운 다리를 겨우겨우 움직여 서윤은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마음먹은 만큼 잘 움직여지지 않아서 답답하다.

이윽고 그녀가 대답하지 않았어도 이서윤이라는 확신을 얻었는지 남자가 주변을 한번 둘러보고는 빈집에서 나왔다. 어두운 옷과 가죽 장갑을 낀 남자는 위협적인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낯선 얼굴이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남자는 정중하게 명함을 내밀었지만 서윤은 받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걸 받으려면 기껏 벌린 거리를 다시 좁혀야 했으니까. 이렇게 당당하게 그녀 옆집에서 잠복하고 있던 걸 보면 혹시 문도하가 보낸 사람은 아닐까.

이러나저러나 모든 것이 문도하의 소행으로만 보였다. 그녀가 받을 생각도 않고 자꾸 뒷걸음질만 치자 남자가 명함의 글씨가 보이도록 그녀의 눈높이로 들어 올린다. 그곳에는 사립 탐정이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이번에도 문도하는 어김없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그가 경고해 주었던 사안이.

설마.

문도하가 경고해 줄 정도로 미리 파악된 움직임이었다. 삼촌의 마수가 여기까지 올 리가 없다. 대체 누굴 믿어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서윤은 일단 간절하게 빌었다.

그녀의 얼굴에 차오르는 절망도 아랑곳하지 않은 남자는 명함을 품으로 잘 갈무리한 채 다시 주변을 살폈다. 꼭 뭔가에 쫓기는 사람 같았다. 그 행동이 그녀의 불안함을 더 자극하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는 꼼꼼하게 주변 상황을 살폈다.

그렇게 온갖 곳을 다 체크한 그가 열린 대문 사이로 그녀의 집 안 상황을 보고는 인상을 찌푸렸다. 서윤은 이제 계단참까지 물러나 있었다. 멀어진 그녀를 보고 반걸음 슬쩍 다가온 그가 목소리를 낮춘 채 그녀에게 속삭인다.

“삼촌이 찾으십니다.”

겨우겨우 이어지던 호흡이 뚝 멎어 버렸다.

“근처에 감시 인력이 얼마나 많은지!”

서윤의 집 근처에 깔려 있던 눈길에 대해 남자는 한참 토로했다. 숨어 있던 빈집에 들어가 주섬주섬 자기 짐을 챙기면서도 주변에 대해 경계를 늦추지 않는다. 그 일련의 동작이 서윤에게는 마치 무성영화의 낡은 필름처럼 보였다.

이윽고 다시 남자가 그녀를 마주 보고 서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삼촌이라니. 정말 삼촌이 보낸 사립 탐정이 여기까지 와 있다니. 영영 안 찾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그녀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최악의 순간에 드리워진 손길에 꼭 폐부를 콱 잡힌 것만 같았다. 이게 마치 그녀의 운명이라고 선언하는 것만 같아서.

남자가 동상처럼 굳은 채 말도 하지 못하는 그녀를 의아하게 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빨리 이 틈에 도망……, 이서윤 씨?”

그녀의 어깨를 향해 다가오는 손길을 보는 순간, 서윤은 그대로 몸을 계단 아래로 움직였다. 대체 어찌 뛰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일단 구르듯 계단을 내려왔다. 밤이니 조용히 해야 한다는 생각은 온데간데없었다. 저 밖에는 괴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경고 또한 모래알처럼 흩어졌다.

지금 잡히면, 다시 삼촌에게 가야 해.

“젠장. 이서윤 씨!”

그녀와는 다르게 조심조심 철제 계단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서윤은 무모하게도 무작정 앞으로 뛰었다.

순식간에 큰 도로를 벗어났다. 본능적으로 어두운 곳을 향해 숨어든 탓이다. 그래도 이 동네에 오래 살았다고 서윤은 지리를 꽤 잘 꿰고 있었다. 어쩌면 늘 이런 순간을 대비했을지도 모른다. 언젠가 삼촌이 그녀를 잡으러 왔을 때 허무하게 끌려가고 싶지 않았으니까.

당장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몬스터보다는 눈앞에 다가온 구체적인 공포가 그녀를 어둠으로 몰아세웠다. 문도하가 그녀의 이런 행동을 예민하게 받아들일 것이라는 생각도, 무작정 뛰어 봐야 아무 소용없다는 생각도 그녀의 다급한 걸음에 밟혀 조각조각이 나 흩어졌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자꾸 벌어지는지, 왜 하필이면 오늘인지. 그리고 그녀를 감시하던 문도하는 대체 뭘 의도한 건지. 수많은 의문이 떠오르며 그녀의 뜀박질을 재촉한다.

자꾸만 어둠으로 스며드는 그녀를 놓쳤는지 뒤따라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녀는 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최대한 멀리 아무도 없는 곳으로 가고 싶다는 원초적인 혼란만이 그녀를 움직인다.

그런데 어디로 가야 하지?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이면서도 서윤의 정신은 덧없이 길 위를 헤맸다. 이대로 삼촌에게 돌아갈 수 없었다. 다시 골방 같은 방에 갇혀, 행여 귀중한 물건이 사라질까 감시라도 당하는 삶을 살 수는 없었다. 비참하게 하루 한 끼의 밥을 얻자고 협회에 가서 몸을 파는 것과 다름없는 페어 신청 따위를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수틀리면 그녀에게 거침없이 손찌검을 하던 삼촌이다. 그 와중에도 삼촌은 꼭 밖의 시선을 의식해 그녀의 얼굴만은 건드리지 않았다. 늘 맞아 울긋불긋하던 몸과 대비해 하얀 얼굴을 볼 때면 서윤은 치를 떨었다. 자신이 꼭 잘 포장되어 진열된 고깃덩이가 된 기분이었으니까.

비참한 과거가 뒤에서 쫓는 것처럼 그녀는 절박하게 뜀박질을 했다.

그렇게 서윤이 사는 동네의 가장 안쪽까지 도달했을 무렵이었다. 이 부근은 산그늘이 내려앉아 낮에도 어두운 곳이었다. 한계 이상의 뜀박질 때문에 폐가 터져 나갈 것만 같았다. 가쁘게 쉬는 숨은 그녀를 살리는 게 아니라 찌르듯 들이찼다.

아주 잠깐 멈춘 서윤이 방향을 가늠했다. 한 번도 와 보지 않았던 으슥한 동네였다. 위험 신호가 계속해서 눈앞을 붉게 만들었다. 어쩌면 문도하의 시야가 이런 걸까. 생각이 마구 범람해 꼭 익사할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옆에서 시커먼 물체가 그녀를 덮쳤다.

“윽……!”

팔에 닿는 거센 진동이 아픔이라는 걸, 콘크리트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지고 나서야 깨달았다. 몸을 빼곡히 수놓는 고통에 서윤은 거친 숨을 토했다. 살짝 부딪힌 머리가 어지러웠다.

기묘한 예감에 가까스로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자, 그것이 있었다.

사람들에게서 바다를 빼앗아 간 몬스터가.

“크륵, 크르르…….”

거칠게 몰아쉬는 숨 탓인지 서윤의 목에서는 끽끽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게 꼭 자신이 저 괴물의 말을 하는 것만 같아서 소름이 오소소 돋는다.

덜덜 떨리는 턱은 볼품없는 소리를 내며 거칠게 부딪친다. 골목의 어둠 속에서 천천히 모습을 드러내는 거대한 비늘이 시야를 강제로 잡아챘다. 코끝에 스치는 피비린내와 바다 냄새. 죽음의 향기다.

꿈인가.

한순간 서윤은 기가 막힌 이 현실을 부정했다. 문도하와 운명이 되더니, 그 운명이 이렇게 장난질을 하는 게 아닐까.

이렇게 연이어 일이 터지면 안 되는 거였다. 평범하게 살고자 아등바등하는 그녀에게 이럴 수는 없었다. 마치 문도하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라는 듯, 실체를 가진 몬스터가 그녀를 주시하는 게 느껴졌다. 무엇이 놈의 눈인지도 모르지만 본능이 알아차린다.

손끝에서는 서늘한 감촉이 났다. 무심코 시선을 내리니 팔이 찢어졌는지 길게 떨어지는 핏물이 바닥으로 똑똑 떨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죽는구나.

다시금 날아드는 검은 물체를 보며 서윤은 막연히 생각했다. 도망치고 또 도망친 끝에 겨우 이렇게 죽는다. 평생을 피해 왔던 두려움을 맞이하는 순간은 놀랍도록 현실감이 없었다.

그렇게 괴물이 내뻗는 게 뭔지도 모를 그 찰나에 갑자기 그녀의 시야가 휙 뒤집혔다.

“아……!”

인식할 새도 없이 얼굴이 그의 품에 묻혔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얼굴에 쓸리는 천의 감촉이 무척 부드러웠다. 시야가 온통 문도하의 양복 무늬로 덮인 그 순간, 뒤에서는 가죽이 터지는 소리가 났다.

조금씩 떨리던 몸이 점점 거세게 떨리기 시작한다. 연달아 울리는 가죽 터지는 소리가 잠잠해질 무렵에는 이미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몸이 흔들렸다. 허리를 둘러 안은 문도하의 팔이 아니었다면 진즉 바닥으로 쓰러졌을 정도로.

문도하와 그녀의 발 주변으로 빨간 핏물이 흘러들어 왔다.

조악한 가로등 불빛을 받은 그것은 꼭 녹슨 쇠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핏물에는 알 수 없는 모양의 살점이 둥둥 떠 있었다. 거대한 무언가가 일시에 쥐어짜진 게 사실이라는 것처럼 범람하듯 바닥이 온통 핏물로 휩싸였다.

이게 문도하가 늘 보는 세상이구나.

“지금, 어딜 가는 중이었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은 문도하가 이를 갈며 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서윤의 얼굴이 불쑥 그와 마주칠 정도로 매서운 손길이다.

그의 시선은 방금 터져 나간 몬스터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사정없이 그녀를 꿰뚫고 또 휘두르는 사람. 그리고 평생 서로 이해하지 못할 관계. 혼란이 메스꺼움을 쥐고 그녀의 몸통 곳곳에서 발악을 하고 있다.

“이서윤, 어딜 가고 있었냐고 묻잖아!”

이제 한계였다.

매섭게 저를 쳐다보는 문도하의 시선이 그대로 그녀를 부수고 있었다. 거센 풍랑 속에서 서윤은 결국 좌초되고 말았다. 이리저리 나부끼던 그녀의 사지는 결국 버티질 못하고 산산이 찢어져 흩날리고 있다. 저기 저 몬스터처럼.

희망으로 잡고 있던 직장은 결국 그녀의 욕심이었다. 피상적인 두려움이던 몬스터가 직접 손을 휘둘러 그녀에게 그걸 일깨워 주었다. 유일한 안식처였던 집은 뭔지 모를 손길에 잔뜩 파헤쳐졌다. 게다가 그녀를 턱 밑까지 쫓은 삼촌의 존재까지.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외통수였다. 상상해 온 그 어떤 불행보다 감당하기 힘든 현실이 그녀를 무겁게 누른다. 어쩌면 이 세상은 그저 그녀의 목을 조르기 위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감당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서윤은 서서히 추락했다. 깊고 짙은 도피 속으로.

“이서윤!”

고개를 툭 떨군 채 바닥으로 추락하는 이서윤을 받아내며 문도하는 소리쳤다.

손바닥에 묻어나는 이서윤의 피는 그의 녹슨 세상에서도 형형한 붉은빛이다. 벌벌 떨리는 그의 손길은 누군가에게 조종이라도 당하는 듯 뜻대로 움직이질 않았다.

이서윤에게 달려들던 몬스터의 영상이 눈에 선하다. 그가 직접 안에서부터 몸을 터트려 죽여 버렸는데도 그 장면이 각막에 붙어 사라지질 않았다.

아까 전에는 갑작스럽게 버스에 뛰어오른 이서윤이 마치 염동력으로 그의 몸을 묶기라도 한 듯 한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었는데도 그랬다. 뒤돌아서는 이서윤이 그녀를 잡는다면 진짜 도망가 버리겠다고 선언하던 저번과 똑 닮아 있어서.

겨우 뒤늦게 그녀의 행적을 쫓을 수 있었던 건 집으로 돌아가겠다는 그 한마디 덕분이었다. 몬스터의 위협이 있으니 쫓지 않을 수 없었다. 자꾸만 누군가 칼날을 들고 그의 눈 밑에 들이대고 있는 기분이다. 정말 그녀가 도망치려 한다 한들 이대로 둘 수 없었다.

하지만 서둘러 달려간 이서윤의 집 안은 엉망이었다. 마치 도망갈 짐을 급하게 챙기기라도 한 듯이.

본격적으로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그 짧은 순간에 문도하를 기만하려고 그녀가 꾀를 낸 건 아닐까. 그가 선물한 목걸이 케이스가 알맹이만 쏙 빠진 채 뒹구는 꼴을 보니 눈알이 돌아가는 기분이었다.

‘도하 님, 큰일입니다. 사립 탐정이 그사이 감시를 따돌리고……! 이게 무슨……?’

‘찾아.’

뒤늦게 그를 쫓아온 실장이 다급한 보고를 올린다. 그 어느 것도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뛰고 있는 심장이 너무 거칠게 아우성을 친 나머지 그대로 안에서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실장에게 추적을 명령하고는 날아올랐다. 이상한 감각이 느껴져 와 보니 보이는 게 이런 꼴이었다. 문도하는 핏물 가득한 땅 위로 거침없이 추락하는 이서윤을 양팔로 단단히 붙잡았다.

그에게서 등을 돌려 도망치는 이서윤, 괴물에게 채여 쓰러지던 이서윤. 온갖 이서윤의 영상이 그의 뇌를 가득 메운다.

피 웅덩이 한가운데서 표표히 빛나는 이서윤의 하얀 얼굴을 보며 문도하는 제 안의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감각을 받아들였다. 그를 향하는 그녀의 두려움이 더는 그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게 된 순간이었다. 그녀를 이대로 둘 수는 없었다.

내 가이드.

제 속에 울리는 본능의 외침을 들은 문도하의 눈빛이 까맣게 가라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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