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침투(6) (9/27)

(6)

이서윤의 가게에 멋대로 찾아간 뒤 며칠이 지났다. 본래라면 금요일인 오늘은 이서윤을 만나기로 문도하가 결정한 날이었다.

늘 그랬듯 원래는 그녀의 집 앞에 가 있으려고 했다. 멋대로 들어가 있는 건 일도 아니지만, 너그럽게 계단 밑에 서서 이서윤이 퇴근하는 걸 기다릴 작정으로. 겸사겸사 그가 이서윤을 만나는 장면이 외부에 드러나도록 말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상하게 심사가 무척 사나웠다.

“…….”

“저……, 도하 님?”

“왜.”

아까부터 그의 눈치를 애타게 보는 박남일 실장을 무시하면서 문도하는 턱을 괴어 책상에 기댔다. 시선은 태블릿에 못 박힌 채.

역시, 이서윤이 그곳에 있을 것을 생각하면 기분이 더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병신 같은 에스퍼 무리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직접 위해를 가했던 에스퍼 놈은 오히려 걱정되지 않았다. 이미 그날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처리해 두었으니까.

그곳까지 찾아가 요란하게 소문낼 거리를 잔뜩 만들어주었으니 당분간 위험 요소는 없을 터다. 그걸 잘 알면서도 계속 신경이 쓰였다. 마치 이서윤이 그곳에 있는 것 자체가 못마땅한 것처럼.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슬슬 움직이실 시간이 아닌지…….”

“…….”

사무실에 있던 박남일 실장은 뜻밖에 그와 묘한 대치 상태를 이어가게 되었다. 이쯤이면 움직여야 했을 문도하가 제 자리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그가 직접 빼놓으라고 했던 스케줄이 아니었던가.

이 묘한 행동이 또 뭔가 나쁜 신호인 것 같아 실장은 은근슬쩍 눈치를 보며 문도하의 안색을 살폈다. 폭주는 아닌 것 같은데, 왜일까.

요 며칠 문도하는 무척 날카로운 듯 행동했다. 그저 기분이 나빠 보였다면 실장도 이상한 일로 치부하진 않았을 것이다. 어차피 문도하는 맨 처음 박남일 실장을 만났을 때부터 그리 좋은 성격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뭔가를 참는 듯한 분위기를 풍겼다는 부분이다. 문도하는 제 눈에 거슬리는 걸 참는 법이 없었다. 다만 아무리 그라도 폭주는 싫으니 참겠지, 하고 가정하다 보면 어느새 등이 서늘해졌다. 정말 지금 참는 것이 폭주하려는 몸 상태인 건가 싶어서 말이다.

이 상황을 비단 박남일 실장만 발견한 것이 아니라서, 지금 온 국민 클랜원들의 신경이 날카롭게 곤두서 있었다. 얼마 전에는 폭주의 전조 증상으로 추정되는 기이한 행동까지 보이며 소재가 불분명해졌던 그였다. 다시금 나타나는 위험 사인에 주변의 모두가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다. 클랜장은 유사시에 사용하도록 지침을 세우고 유서까지 써 놨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나 있었다.

이미 실장은 문도하를 어디에 가두기라도 해야 하는 게 아니냐는 의견을 각기 다른 이사에게 세 번쯤 들었다. 물론 그때마다 그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문도하를 연민한 것이 아니라 그게 가능하기나 한 건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시도를 하다가 어설프게 문도하를 자극하는 게 더 위험할 수도 있었다.

그리고 실장의 묘한 촉은 어쩐지 문도하가 최근 보이는 인내심이 어떤 인물에 대한 것은 아닐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지금도 문도하는 그 여자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었으니까.

문도하의 시선이 머무르는 태블릿은 박남일 실장이 참다못해 새로 사서 들려준 것이다. 실장의 업무용 태블릿에서 그가 이서윤이라는 인물의 사진을 발견한 후부터, 문도하는 툭하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처음에 인상을 쓰며 그 손을 맞잡았다가 그대로 죽을 뻔한 박남일 실장은 이제 그가 말없이 손을 내밀면 즉시 들고 있던 태블릿을 넘겼다.

그게 한두 번을 넘어 점점 잦아지자 곧 실장의 업무에 차질이 생길 지경이 되었다. 심지어 태블릿에는 문도하를 욕하는 데 쓰는 메신저도 담겨 있어 매번 심장이 쫄깃한 것이 못 해먹을 짓이었다. 그래서 눈 딱 감고 그 인물의 사진만 달랑 담은 태블릿을 하나 새로 들려줬더랬다.

멋대로 행동했다고 목이 졸릴 각오까지 했건만, 문도하는 눈썹만 슬쩍 들어 올리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제는 틈만 나면 그 태블릿을 켜 놓고 하염없이 보고만 있는 거였다.

솔직히 조금 무섭기도 했다. 멋대로 판단하지 말라고 주의를 줘야 했을 텐데 그냥 넘어간 것도, 하필이면 그가 보고 있는 것이 특정 인물의 사진이라는 점도.

설마 어떻게 몰래 죽여야 하나 고민하는 건 아니겠지.

“나갈 준비 해, 거기서 그러고 서 있지 말고. 거슬리니까.”

“네.”

문도하는 묘한 눈초리로 자신과 태블릿을 번갈아 보는 실장의 행동이 슬슬 거슬리기 시작했다. 이따위 물건 부숴 버려야지 고민하다가도 매번 손가락은 얌전히 전원이나 켜고 있다. 그러니 이런 걸 멋대로 준비한 실장도 나무랄 수가 없었다.

홀린 듯 목이 비어 있는 이서윤의 사진을 바라본다. 여전히 대충 찍혀 초점조차 명확하지 않은 사진이었다. 그럼에도 문도하는 이서윤의 옆모습에서 당황과 절망을 읽을 수가 있었다. 언제부터 이렇게 타인의 감정이 명확하게 보였는지 알 수 없었지만.

잠깐 손가락을 들어 태블릿의 가장자리를 쓸던 문도하가 다시 짜증스럽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그는 분명 자신의 영향력을 아주 잘 알았다. 힘이 없어 고생하던 어린 시절 일부러 기를 쓰고 손에 쥔 것이었으니까. 어제 그 난리를 쳐 놨으니 또 덤벼드는 새끼들은 분명 없을 것이다. 아마 이서윤에게는 간접적인 방어막이 되어 주겠지.

하지만 이서윤을 떠올리면 어쩐지 눈썹이 멋대로 꿈틀거렸다. 그런 새끼들을 상대하는 태도가 제법 단호한 걸 보면 지금껏 그런 일이 꽤 있었던 모양이라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그러면 또 쉽게 화가 났다. 이상하게도.

“……그런데 어디로 가십니까?”

“해안가.”

행선지를 정하라는 듯 자꾸 보채는 실장을 서늘하게 노려보며 문도하는 툭 내뱉었다. 역시 더는 참지 못하겠다. 사실 처음 이서윤이 일하는 가게를 다녀온 이래 며칠간 그는 계속 참아 왔다.

당장이라도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 발걸음을 말이다.

아무래도 그곳에서 이서윤을 빼 와야 직성이 풀릴 듯싶었다. 이상하게 눈앞에서 붉은 보석이 빛을 뿌리는 기분이 들었다.

* *

“…….”

한가했다. 서윤이 이 가게에서 일한 이래 가장 한가한 나날이었다. 사실 그저 한가하다는 말로도 부족했다. 그야말로 손님이 뚝 끊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같은 아르바이트생들이 그녀에게 말을 거는 일도 뚝 끊겼다. 강하나가 중간에서 뭔가 열심히 조율을 하고자 하는 모습이 보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다들 그녀에게 다가서는 것만으로도 문도하의 염동력이 그들의 팔을 꺾을 것처럼 굴었으니까.

강하나조차 이따금 의문을 담은 눈길로 서윤을 바라보았으나 소리 내어 묻지는 않았다. 그 누구도 아닌 문도하였다. 그와의 관계가 궁금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면 오히려 서윤 쪽에서 이상하게 봤을 터다.

하지만 서윤의 안색이 너무 좋지 않아서일까, 강하나는 결국 침묵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 사려 깊은 행동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녀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만약 질문을 받는다면 무어라 대답해야 할지 서윤도 도무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

깊은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자연스레 숙여지는 고개가 손끝으로 향했다. 맞잡은 서윤의 두 손은 침착한 듯 얌전히 무릎 위에 있었으나 그녀의 마음속은 그러하질 못했다. 분명 사람들과 함께 있는데도 고립된 기분이 들었다.

그저 손님의 수가 줄어들었다면 뭔가 해안가에 비상사태가 난 건 아닐지 뉴스를 봤을 것이다. 하지만 그야말로 매출이 전혀 없어지자 사장이 뭔가 이상함을 눈치챈 것도 금방이었다. 특히나 가게는 늘 성업을 이루고 있었기에 이러한 변화가 더더욱 눈에 띄었다.

그녀를 피하는 듯 가게에 두문불출하던 사장도 바로 나오지 않을 수가 없었다. 문도하가 다녀간 다음 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듣게 된 사장은 그야말로 사색이 되었다.

안절부절못하던 사장은 바로 여러 곳에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멀리서 살핀 낯빛으로 봐서는 성과가 없는 것을 넘어 절망적인 모양이었다. 통화를 끊고 망연자실하게 바닥을 보던 사장은 무언가 강한 눈빛을 서윤에게 쏘아 내다가 눈이 마주치자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 이후로는 오히려 서윤의 눈치를 보듯 주변을 맴돌았다. 매번 어떻게든 다가와 은근슬쩍 어깨 같은 곳을 만지려고 들 때는 언제고, 이제는 그녀의 근처에도 다가오지 않았다. 그거 하나는 기꺼운 일이다.

사장은 그날부터 매일 나와 하루 종일 가게를 지키면서도 퍽 똥 마려운 개새끼처럼 굴었다. 딱 봐도 무언가 말하고 싶은 기색이라서 서윤은 더욱 못 본 척 그것을 무시했다. 어차피 뻔했다. 그녀에게 뭘 입막음하고 싶어 하는지가 말이다.

어차피 문도하에게 이르듯 그간 있던 일을 말할 생각도 없었지만 일부러 무시했다. 멋대로 그들의 관계를 사장이 오해하든 말든 그녀가 알 바 아니었으니까.

아르바이트생들은 제각기 다른 곳에 앉아 멍하니 문만 쳐다보고 있었다. 그곳에 끼지 못하고 홀로 외딴곳에 의자를 두고 앉은 서윤이 다시 고개를 숙여 발끝을 쳐다보았다. 어쨌든 이렇게까지 한가한 가게에 있으려니 그야말로 가시방석이긴 했다. 조만간 일자리를 잃게 될 거라는 확신도 들었다.

이제, 어떡하지?

그 때 며칠 만에 가게 문이 활짝 열렸다.

“한가해졌네.”

“어, 어서 오십시오.”

사장이 구르듯 뛰어나가 문도하를 맞았다. 슬쩍 숙인 고개는 그길로 올라올 줄을 몰랐다. 그 비굴한 모습이 제게 돈 봉투를 빌미로 협박하던 모습과 상반되어 서윤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문도하 님 위명은 익히 들었습니다. 일전에 저희 가게에 찾아 주셨다는 말을 듣고 어찌나 아쉽던지.”

“…….”

“제가 꼭 만나 뵙고 싶었….”

“왜.”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묻는 문도하의 어조는 평이했으나 생략된 뒷말은 명확했다. 대놓고 무시하는 그의 말투에 애써 웃는 낯을 보이던 사장의 표정이 한껏 구겨진다.

“그야……, 세계 최고의 에스퍼이시니까…….”

“알면, 꺼져.”

차갑게 내뱉은 문도하가 서릿발 같은 시선을 남자에게 향했다. 황급히 그의 앞에 나섰던 남자가 갑작스레 고개를 푹 숙인 이유는 묻지 않아도 훤했다. 분명 사정없이 구겨지는 얼굴을 가리겠다고 하는 짓이겠지.

문도하는 들어오자마자 이서윤 앞을 가로막는 남자의 행동에 자연스레 불쾌함이 솟았다. 무언가 더러운 촉이 스물스물 그를 괴롭힌다. 대놓고 아부를 하는 행동은 그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느낌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권력을 노리고 제게 접근하는 인간을 던져 차곡차곡 쌓아 두었다면 아마 산 만큼 쌓여 있었을 터다. 어릴 적부터 이런 경험이 무척 많았던 문도하는 단번에 사장으로 보이는 저 남자가 어떤 부류인지 파악해 냈다.

이런 게, 이서윤의 근처에 있나?

또다시 기묘한 불쾌감이 문도하를 자극했다. 눈을 가늘게 뜨며 이 장소에 대한 평가를 하향 조정하는데 곁으로 다가서는 기척에 고개가 절로 돌아갔다. 사장을 제치고 앞으로 나선 이서윤은 어딘가 피곤한 낯으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며칠 만에 한층 거뭇해진 이서윤의 눈가에 이상하게 시선이 향한다.

“또 무슨 일이에요.”

“꼭 무슨 일이 있어야 올 수 있는 곳인가?”

삐딱하게 기울인 고개처럼 삐딱하게 흘러나오는 대답에 서윤은 반사적으로 주먹을 쥐었다. 슬쩍 곁눈질로 주방 쪽을 보니 꽂히듯 날아오는 호기심 어린 시선이 느껴졌다. 심지어 그 시선에는 단순히 호기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더욱 걱정이다. 저 두려움 섞인 눈길들이 언제 비난으로 변해 제게 쏟아질지 모르니까.

결국 서윤은 한숨을 내쉬며 입고 있던 앞치마를 벗었다. 재앙 같은 문도하가 이곳에 오는 이유는 누가 봐도 자명했다. 아무도 그를 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을 리 없다. 그러니 그녀가 데리고 나가야겠지.

하지만 서윤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과연 제 말을 문도하가 고분고분히 따라 줄 것인가. 오히려 코웃음이나 치며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지도 모른다. 다만 저번에도 그녀의 요청에 순순히 나가 주었던 것을 떠올리며 겨우 몸을 움직인다.

무겁게 가라앉는 분위기를 보면 유니폼을 갈아입고 할 시간조차 없을 것 같았다. 그대로 사장의 앞으로 다가간 서윤은 사장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딱히 정붙이고 싶진 않았으나 점점 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란 확신만 공고해지는 나날이다.

“오늘은 이만 들어가 볼게요.”

나름 배려해서 문도하를 이끌고 나가려는 건데 사장의 얼굴이 오히려 더 사색이 되었다. 그걸 의아하게 쳐다보고 있자 사장은 문도하의 눈치를 슬쩍 보며 서윤에게 사장실 쪽을 가리킨다.

“서, 서윤 씨. 잠시만 나 좀….”

“무슨 볼일이지? 할 말이 있음 여기서 해.”

그의 시도는 문도하에 의해 단번에 저지되었다. 아까보다 티가 나게 불쾌해 보이는 얼굴이라 사장의 미간에서는 땀이 흐르는 게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사장의 이런 반응보다 서윤을 의아하게 하는 건 따로 있었다.

문도하가 마치 그녀를 보호라도 하듯 구는 태도가 이상했으니까.

“아니, 그게. 꼭 둘이 해야….”

그제야 사장이 하고자 하는 말이 입막음이라는 것을 깨달은 서윤이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사람에 따라 태도가 저리도 바뀌는 것을 보니 불쾌한 인상만 깊어진다. 서윤의 표정을 봤는지 못 봤는지 문도하는 한층 서슬 퍼런 음색으로 사장을 다그쳤다.

“남들 앞에서 못할 말은, 아예 안 하는 게 낫지. 안 그래?”

목까지 움츠린 사장은 결국 육수 같은 땀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무심하게 쳐다보면서도 서윤은 의아함을 감추지 못했다. 뭘 노리고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문도하가.

잠깐 머뭇거리던 서윤이 손을 들어 문도하의 팔에 얹었다. 무척 용기가 필요했으나 저번처럼 또 누군가가 기괴하게 비틀어지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잡은 문도하의 팔은 어쩐지 무척 딱딱했다. 그녀가 잡은 것을 의식해 굳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 감각을 무시하면서 서윤은 다시 주방 안쪽을 바라보았다. 걱정스러운 얼굴인 강하나와 눈이 마주치자 힘없이 바닥만 보게 되었다. 이 상황을 대체 뭐라고 생각하려나.

“…가요.”

긴장한 채로 슬쩍 힘을 주어 문도하를 잡아당겼다. 왜인지 깊게 눈을 마주쳐 오는 문도하는 오늘도 완벽한 차림이었다. 후줄근한 유니폼을 입은 자신과는 무척 대비되는 모습으로. 저도 모르게 고개가 바닥을 향해 떨어졌다. 입술을 깨물며 이 행동을 후회하려는 찰나 문도하의 입이 열렸다.

“그러지.”

지금껏 사람 하나를 압박했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큼한 대답이 흘러나와 서윤은 반사적으로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칠 것이라 생각했으나, 문도하가 서늘한 시선을 사장에게 보내고 있어서 보이는 건 턱 어림뿐이다.

살피듯 훑어봐도 문도하는 별 표정이 없었다. 그리고는 이내 서윤이 당기는 쪽으로 몸까지 움직여 얌전히 그녀의 뒤를 따랐다. 다시 혼란스러움이 그녀를 잠식했으나 서윤은 애써 표정을 관리하며 계속 걸음을 옮겼다.

가게 밖으로 나설 때까지도 잡고 있던 손을 왜인지 놓을 수가 없었다.

* *

얌전하게 뒤를 졸졸 따라오는 문도하는 이 먼 거리를 왜 걷는지 같은 질문은 하지 않았다. 적당히 가게에서 멀어졌다 싶을 때 손을 떼어냈지만, 아직도 미미한 체온이 남은 기분이 들었다.

집으로 가는 길을 둘이 걷는 건 퍽 오랜만이었다. 물론 그 상대가 문도하가 될 것이라고는 평생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었으니 서윤을 묘한 감상에 빠지게 하기엔 충분했다. 자꾸만 제 손길을 따라 걸음을 옮기던 문도하의 행동이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뭐 하는 걸까 대체.

다만 이내 가슴속엔 음울한 생각이 들어찼다. 애초에 제 삶을 이렇게 파괴한 건 문도하였는데, 그게 무에 대수라고 신경 쓴단 말인가.

소리 없는 울분이 들어찼다가 썰물처럼 쓸려나갔다를 반복했다. 어쩔 수 없는 체념이 자꾸만 그 마음을 쓸어 내는 탓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무 아프다는 것처럼. 자꾸 무모한 줄 알면서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때 얌전히 따라오는 듯싶던 문도하가 입을 열었다.

“왜 굳이 저딴 곳에서 일하는 거지?”

“…….”

덜컥 서윤의 걸음이 멈췄다. 하필 얼마 전에 그녀가 속을 게워 냈던 낡은 공원 화장실이 있는 곳이었다. 여전히 황폐하게 시간이 멈춘 그곳은 바닷바람에 누렇게 변한 잔디만 듬성듬성 자라 있었다.

“그만둬.”

“…….”

“집도 옮기는 편이 좋겠군. 쓰레기 같은 곳에서 잘도 살고 있단 말이지. 돈 같은 건 쓸데없이 걱정하지 말고.”

연이어 떨어지는 그의 말에 서윤은 담담히 고개를 들어 문도하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석양이 내리쫴 붉은빛이 도는 그의 얼굴은 현실에서 벗어난 것만 같은 느낌을 주었다.

얼마 전 사장이 서윤에게 내뱉었던 오물의 악취가 났다. 며칠 전 난동을 부린 그 에스퍼 때문에 생긴 팔목의 통증도 다시금 신경을 타고 올라온다.

문도하의 모습에서 왜 그들의 얼굴이 떠오르는 걸까.

“…….”

가게를 나온 후부터 말없이 앞서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질리게 바라보고 있던 문도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을 꺼내야 했다. 석양을 아스라이 쬐고 있는 그 모습이 이상하게 그대로 증발할 것만 같았으니까.

소리 없는 거부가 이서윤과 자신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충동적으로 해 버린 방문은 문도하의 가슴에 이상한 감각만 심어 놓은 채 끝났다. 팔에 남은 이서윤의 온기가 자꾸만 찌르듯 붙어 있는 기분이다. 그냥 이서윤이 돈에 환장하는 일반적인 가이드 같았다면 훨씬 일이 수월했을 텐데, 하는 기분이 들어 화가 난다.

제 말을 듣고 걸음까지 멈췄으면서 말없이 이쪽을 쳐다보기만 하는 그녀의 시선을 받으니 어쩐지 초조하다.

석양이 비추는 그녀의 머리칼이 반짝이자 그대로 녹아내릴 것 같다는 비이성적인 생각이 커졌다. 문도하는 그 감각을 참지 못하고 충동적으로 이서윤의 손목을 잡았다.

그 순간 그를 쳐다보던 이서윤의 시선이 서늘하게 제 손목을 향해 내려갔다. 어쩐지 손끝이 바늘에 찔린 것 같아 문도하는 손을 움찔 놓고 말았다. 그녀의 아픔이 뒤늦게 전해졌다.

그러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제 반응이었다. 아프게 하는 것 따위 상관없다고 생각했는데, 분명.

이렇게 행동하는 제 몸이 이상해서 문도하는 일부러 더욱 이죽거리며 말을 뱉는다. 이 앞에 놓인 이서윤의 거부감을 부숴 버리고 싶다는 듯이.

“왜, 또 내가 주는 건 다 싫다는 건가?”

귓가에 찌르듯 박히는 문도하의 말에 서윤은 다시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찬란하게 빛나는 문도하의 얼굴을 볼수록 자꾸만 체념이 소록소록 그녀의 마음을 잠식했다. 이대로 물들어 다시는 제 빛을 찾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가게에 찾아온 에스퍼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챈 후로 사실 계속 아팠다. 다만 병원에 갈 여유가 없어서 방치했을 뿐. 그 통증마저 문도하가 다시 상기시켜 주자 문득 떠오른 생각이 더욱 공고해진다.

이 말을 들은 문도하가 어찌 나올지 예상도 할 수 없었으나 덤덤히 선고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따위 말에 지고 싶지 않았으니까.

“당신은, 그놈들이랑 똑같아.”

“…….”

그림처럼 배경에 녹아 있는 문도하의 시선이 뚫을 듯 강해진다. 그걸 무감각하게 마주 보며 서윤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가야 했다. 자신을 괴롭히는 것들을 향해서.

“내가 지금 걱정하는 건 돈이 아니라, 원치도 않았던 것들을 받아서 헐값으로 팔려나가야 하는 나 자신이야.”

“…….”

“멋대로 주겠다는 집 따위, 필요 없다고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는지.”

머릿속으로 쉴 새 없이 그녀가 감내해야 했던 일들이 지나갔다. 대체 언제까지 이렇게 웅크리고 살아야 할까. 서윤은 언제 날아들어 올지 모르는 돌팔매질을 경계하며 쉼 없이 메마른 땅을 걷는 기분마저 들었다.

어차피 그녀가 안주할 땅은 어디에도 없는데.

“집을 주겠다던 놈이 또 있었나?”

“…….”

자조적으로 읊조리는 서윤의 눈동자에서는 희미한 분노마저 느껴졌다. 그 헛소리에 문도하는 이상하게 짜증이 치솟는다. 일단 그녀가 내뱉은 분노에서 오류를 짚어 주자 이서윤은 그제야 실수했다는 표정이 되었다.

새삼 반반한 이서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아까부터 넘실대는 불쾌함이 최고조에 다다랐다. 지금 당장 몬스터라도 하나 산산조각 내야 직성이 풀릴 정도로 아득한 기분.

침묵하며 부정하지 않는 이서윤을 보니 예상이 더욱 공고해진다. 누군가가 이서윤에게, 그딴 소리를 지껄이긴 했었군.

훤히 예상은 가는 바였다. 몬스터가 나타남에 따라 빈부격차는 더욱 도드라지고 있었고 최근 들어서는 도심지에 있는 집이 그야말로 부의 상징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익히 알고 있는 사회현상이고, 이서윤이 그런 제안을 받았든 말든 하등 상관이 없는데.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

필시 그따위 저급한 욕망으로 행동하는 놈들과 자신을 동급으로 취급하는 이서윤의 태도 때문이리라. 이쪽은 이래 봬도 정신 오염과 폭주라는 중대한 이유가 있었으니 그따위 놈들과 도매급으로 팔리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그녀의 착각을 정정해 주기 위해 헛소리는 그만두라고 말하려던 찰나, 문도하는 문득 이상하기만 한 이서윤의 태도를 떠올렸다. 이서윤의 손목을 멋대로 잡았던 에스퍼의 팔을 꺾어 준 그 날, 그녀는 문도하가 저를 해칠 수 있을 거라 여겼다. 그 생생한 두려움은 진심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

왜 아직도 에스퍼는 제 가이드에게 위협을 가할 수 없다는 걸 모를까. 슬쩍 입을 열었던 문도하는 이내 눈만 가늘게 뜨고 그녀를 관찰했다. 말문을 멈추자 이서윤의 얼굴에는 의문이 미약하게 떠올랐다. 보아하니 그가 이서윤의 감정 상태를 훤히 보고 있다는 것도 잘 모르는 눈치고.

이래저래 일반적인 가이드의 반응이 역시 아니다. 본능이 극대화됨에 따라 그녀도 적응하게 될 것이라 여겼던 예상도 빗나가고만 있었다. 이서윤은 가이딩을 정확히 ‘본능에 조종당한다’라고 표현했다. 가이딩을 할 때마다 보이던 부연 그녀의 감정을 고려한다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건 이성이 불투명한 막 안에 갇힌 사람의 상태이기도 했다.

그러니 그 말은 이서윤의 이성은 그걸 거부하고 싶다는 것과도 같았다. 어째서인지 이서윤은 그녀에게 간섭하는 모든 걸 싫어하는 듯 보인다. 문도하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이유까진 알 수 없었다.

어쨌든 가이딩이라는 행위가 위협이 된다는 소리겠지, 이서윤에겐.

새삼스러운 감상은 한번 떠오르고 나자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분명 그녀의 반응 따위 상관없다고 여겼다. 그녀가 이 상황을 기꺼워할 것이라 순진하게 여긴 적도 없었다. 그런데도 한낱 거품이라 생각했던 그 감상은 시간이 지나도 도무지 꺼지질 않았다.

성가시고 또 성가시다. 오래도록 써야 하니 잘 관리해야겠다고 생각은 했으나 이미 근본부터 어긋나 있었던가.

이대로라면 이서윤이 드디어 가이드로서의 정체성을 각성했다며 알아서 매달려올 것 같지도 않다. 뭘 가져다준다 한들 거들떠도 보지 않은 채 그의 신경만 잔뜩 거스를 것이라는 예감마저 들었다.

그녀가 썩 협조적인 가이드는 아니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문도하 또한 연애 놀음과 비슷한 페어 관계를 맺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니 응당 보상을 했던 것이다. 그녀가 자칫 어긋날 걸 막고자 하는 목적도 있었으나 영혼이 받는 치유에 대가는 필요한 법이니까. 이건 그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이고 건조한 관계였다. 이서윤이 이렇게까지 거부하기 전까진.

짜증 서린 속내를 숨기지 않으며 문도하는 직설적으로 그녀에게 물었다. 원하는 걸 손에 넣어야 하는데 방법이 막힌 건 퍽 오랜만이었다. 이서윤은 대체 그가 뭘 제시해야 이 영혼의 절규를 도와줄까.

이 절규가 왜 그녀에겐 들리지 않는지.

“그럼 내가 뭘 어째야 하는데.”

“……뭐라고요?”

“뭘 어떻게 해야 그 빌어먹을 가이딩을 해줄 거지.”

적반하장과도 다름없는 문도하의 말에 이서윤은 완전히 돌아서서 문도하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기가 막혀서 분노마저도 잠깐 어리둥절하게 땅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황량한 바람이 아이들의 웃음소리 대신 놀이터에 자란 황량한 잔디를 훑고 지나갔다. 그 선득한 느낌에 어깨를 움츠리면서도 이서윤은 문도하를 향하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선연한 비난을 쏟아 낼 작정이다. 지금 그따위 말이 나오냐며 따지려고 마음먹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 눈을 마주칠수록 기묘한 생각이 올라왔다. 정확히 말하면 문도하의 시선을 타고 그녀에게 흘러들어 온다. 거스를 수 없는 감각에 서윤은 인상을 쓰며 그의 속내를 들여다보았다. 분노가 잠깐 고개를 돌린 사이 그의 시선을 올곧게 마주하니 어쩐지 그 감정을 알 것도 같았다.

정말 이쪽이 왜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심정이구나, 이 사람.

그가 내뱉은 가이딩이라는 단어에는 진심이 묻어 있었다. 그녀가 당한 것이 마냥 흥미 위주의 교접이 아닌 가이딩이라는 진심이. 갑작스러운 자각에 이서윤은 멈칫했다. 방금 분에 차 뱉은 말이 머리를 맴돌았다. 문도하가 원하는 것은 그간 그녀를 괴롭히던 저열한 욕망과는 사뭇 궤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발현한 지가 15년이 다 되어 가는데 문도하는 가이드 없이 홀로 버텼다. 운명을 찾지 못한 에스퍼들이 얼마 못 가 미쳐버리는 것을 생각하면 유례없이 긴 시기다. 폭주 직전이 되어 저 오만하던 남자가 정신 나간 어린애처럼 구는 것도 똑똑히 보아 온 그녀였다. 어쩌면 그에게는 가이딩이란 무척 절실한 일일 것이라는 예상도 스쳤다.

매번 그녀를 노리고 내미는 검은 손길들과 그가 똑같다고 선언한 시점에서 발견한 미묘한 간극이 그녀의 미간을 찌푸리게 했다.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지?

이서윤은 단순히 에스퍼라는 이유 하나로 이 모든 상황을 정당화하려는 사고방식이 싫었다. 그녀가 받은 충격과 상처는 결국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행동하는 모습도. 멋대로 그녀의 자유를 주무르는 게 당연하다는 듯 구는 그도.

그동안은 두려움이 앞서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한 말들을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치 그냥 그를 용서하라는 듯 구는 제 안의 본능일지 뭔지 모를 것의 속삭임을 무시한다. 그렇게 쉽게 받아들이기엔 그녀가 흘린 눈물이 너무 무거웠다. 더는 마음대로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멋대로 내 집에 쳐들어온 건 당신 아닌가요? 왜 우리가 동의 하에 만난 것처럼 말하는 거죠?”

“본능의 이끌림이지. 그나저나 정말 이상하군. 아직도 그렇게까지 느낌이 없나?”

역시나 본능이니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그의 반응이 가증스러웠다. 잠깐 잡았던 미약한 이해를 쉽게 놓아 버릴 만큼. 점점 굳어가는 마음이 표정으로 드러나는 게 느껴졌다. 자신은 필시 살면서 해 본 것 중 가장 굳은 얼굴을 하고 있으리라.

“본능에 이끌리는 것과 본능에 마냥 휘둘리는 건 다르죠. 난 그게 싫어요.”

게다가 문도하의 말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렇게 주위 시선을 의식해 그녀를 적당한 곳에 처박아 두려 했던 주제에, 이렇게 직장까지 찾아와 소란을 피우는 건 역시 이상했으니까. 확신 서린 의문을 서윤은 가감 없이 입 밖으로 내보냈다.

“그럼 관계도 알리지 말라고 협박까지 한 주제에, 당당하게 가게에 찾아온 건 왜죠?”

“…….”

과연 그녀의 지적에는 할 말이 없는지 문도하가 입을 다문다. 매번 거리낄 것 없이 멋대로 굴던 그가 이렇게 나오니까 어쩐지 통쾌한 기분마저 느껴졌다.

게다가 본능 운운하는 것도 사실 웃겼다. 에스퍼들이 제 가이드에게 얼마나 쩔쩔매는지는 사회적으로 유명했다. 일반인들도 쉬이 적응해 버릴 만큼 관련된 사건 사고도 무척 많았다.

그러니 그녀가 느끼는 혼란과 거부감을 눈치챘다면 그 어떤 에스퍼도 그처럼 행동하지 않았으리라. 애초에 문도하가 더 무서웠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라면 아무리 서윤이 진짜 그의 가이드일지언정 거슬리는 걸 참지 않을 것이라 여겼으니까.

실제로도 그러고 있고.

운명이라는 에스퍼를 만나도 그녀의 처지는 썩 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층 내리막길로 떠밀림 당하는 속도만 빨라졌을 뿐. 자조 섞인 미소가 굳어 있던 표정을 겨우 풀어냈으나 마음은 여전히 답답했다. 꽉 막힌 듯한 속이 언젠가는 폐부마저 굳게 만들 것처럼.

“보통 사람은 절실하다면 정중하게 부탁을 해요. 보상이랍시고 필요하지 않은 보석을 던지거나 다른 사람 직장이나 집에 간섭할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

“……운명인 가이드와 에스퍼의 관계니까.”

낮게 흘러나오는 문도하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듯했다. 아까 미약하게 느껴지던 그의 감정도 더는 읽히지 않는다. 애초에 사이좋게 표정이나 살필 관계도 아니었고.

“본능에 이끌리든 휘둘리든 차이가 없지. 그게 당연한 거니까.”

그가 당연하다고 말하는 일들이 서윤에게는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다. 문도하의 말에는 점점 모순이 늘어 간다. 그조차 일반적인 에스퍼처럼 행동하질 않는데, 왜 그녀라고 당연히 여겨야 하나.

“그냥 가이드 에스퍼 관계라기엔……, 어차피 내가 갖고 있는 두려움에 관심 없잖아, 당신.”

덤덤하게 흘러나오는 이서윤의 목소리에 문도하는 어쩐지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자조하듯 비스듬히 올라간 그녀의 입꼬리를 보고 싶었으나 한편으론 보기 싫었다.

그녀가 뱉는 말은 전부 진실이다. 그러니 가볍게 그렇다 긍정하며 헛된 기대는 하지 말라고 해 줘야 할 것이다. 이렇게 제 처지 파악을 빠르게 하고 있는 건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목소리가 목에 턱 걸린 듯 빠져나올 생각을 못 한다.

아주 잠깐 머뭇거린 제 행동을 문도하는 억지로 무시했다. 딱딱하게 굳은 이서윤의 마음 좀 엿본 거로 자신이 이렇게 반응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래, 아무 상관 없지. 그래서 질 좋은 보상이 필요한 거고.”

“…….”

“그래도 일단 해주지. 그 빌어먹을 정중한 부탁.”

자꾸만 무언가가 어긋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그의 안에서 초조한 심정이 덩달아 불쑥불쑥 올라왔다. 멀쩡히 잘 붙어 있는 장기가 바닥을 치고 돌아오기 일쑤였다. 한없는 추락감과 길을 잃은 듯한 미묘한 감각이다. 그것은 분노와도 퍽 닮은 심정이라 문도하는 제 안을 살핀 끝에 그저 그렇게 단정 지었다.

이건 분노가 맞다. 이서윤이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저열한 비교에 자존심이라도 요동친 탓이리라.

게다가 처음 이서윤을 만나고 온 다음 날 다짐하지 않았던가. 그녀가 어찌 생각하든 그저 잘 이용하면 그만이라고. 이서윤조차 제 처지를 이렇게 잘 파악하고 있는데 머뭇거릴 이유가 없었다. 그러니 이따위 언쟁은 소모적이다.

그는 끝내 이서윤을 차지하고 말 것이니까.

그래서 괜한 오기를 담아 한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습관적으로 두려워 움칠거리는 주제에 이서윤은 단단히 두 다리로 그를 맞이했다. 그 오연한 자세에 한껏 심사가 비틀린다.

한편으론 억울하기도 했다. 영혼에 실금이 가는 소리를 듣고 산 지 십여 년이 넘었다. 그나마도 중간에 헤아리기를 그만두었기에 이 정도지, 그가 줄곧 지고 있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런데 그의 하나뿐인 운명은 이렇게 아무것도 모른 채 정중한 요청을 운운하고 있었다. 그가 폭주 직전 발견한 새하얀 구원에 다가가면서 과연 어떤 심정인지 알기나 할까.

그게 어찌나 갈급한 걸음이었는지 그녀는 아무것도 모른다.

“이서윤 씨, 오늘 가이딩 좀 해주시겠습니까?”

정중한 물음은 선명하게 비웃음을 담고 있었다. 다만 문도하는 자신이 과연 누굴 비웃고 있는지 확신할 수가 없었다.

* *

벌써 몇 번이나 문도하를 자신의 공간으로 들이는 건데도 서윤은 영 적응이 되지 않았다. 오늘은 한층 문도하를 집 안에 들여놓기 싫었다. 그 가식으로 점철된 정중한 음성이 비꼬는 태도라는 걸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

두려움과 분노가 서로 쟁탈전을 벌이듯 분주하게 그녀의 마음속을 오락가락했다. 가식적인 그의 행동에 화가 났지만, 한편으론 갑작스러운 행동 변화에 당황한 것도 사실이다. 덕분에 그녀는 도망치듯 뒤에 문도하를 매달고 집으로 들어서야 했다.

“…….”

오늘따라 집 안을 둘러보는 문도하의 시선이 너무 길었다. 그녀가 겨우 찾은 보금자리를 단 몇 마디로 비하하던 음성이 자꾸 맴도는 탓이리라. 그의 시선이 그녀가 아침에 벗어 둔 잠옷에서 늘 쓰는 화장품까지 옮겨가자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시야를 가리듯 그의 앞을 막아섰다.

“할 말이 있나?”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말하는 문도하의 낯은 어딘가 덤덤했다. 방금 전 정중한 비웃음을 흘린 사람답지 않게 어쩐지 굳은 얼굴인 것도 같았다. 그나저나 가이딩이 급하다더니 저 오만한 인간이 형식적으로나마 굽힐 정도였던가.

그간 문도하의 태도와는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다. 다시 목을 붙잡고 매서운 경고를 하는 게 차라리 어울렸지. 아까 그의 팔을 잡고 끌고 나올 때부터 의외라는 쓸데없는 감상이 자꾸 떠오른다. 그저 그가 무슨 행동을 하든 무시할 수 있었으면 좋을 텐데.

이번에도 폭주 전인 걸까.

등줄기가 바짝 긴장되었다. 문도하를 만난 이래로 벌써 몇 번이나 서늘한 감각이 그녀의 어깨 어림을 타고 내려간다.

에스퍼의 폭주는 국가적인 재난이나 다름없었다. 등급이 어느 정도 높은 에스퍼만 되어도 근처가 쑥대밭이 되곤 했다. 가장 최근에 있었던 폭주 때는 하필 그 에스퍼가 도심에서 폭주하는 바람에 많은 사망자가 나왔다. 어설픈 부상자는 존재하지도 않던 무시무시한 사건이었다.

그때 서윤은 그저 바닷가가 아니라도 위험은 있구나, 하는 심정으로 그 뉴스를 넘겼더랬다. 그게 그녀의 앞에 현실로 다가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당시 폭주한 에스퍼의 등급은 겨우 B 등급이었다. 능력에 따라 차이가 있다고는 하나 서윤은 S급에 염동력을 쓰는 문도하가 폭주한다면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아마 그녀가 죽는 것으론 끝나지 않겠지.

딱히 인류애적 사명감이 있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문도하가 그녀와 있으면서 정신을 차리는 걸 똑똑히 본 이상, 더는 효과를 의심하기 힘들었다. 앞에 놓인 책임을 단박에 버리고 갈 수 있는 성격도 아니라 문제다.

일반적인 가이드라면 에스퍼의 상태를 긴밀하게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서윤에겐 그런 전조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고, 그저 문도하의 말에 의존해야 하는 게 답답하기도 했다.

불쑥 떠오른 희망 사항을 서윤은 애써 흐트러트렸다. 더 가이드답게 되고 싶지도 않은데 능력이라니, 불필요한 소망 아닌가. 두려움을 완전히 갈무리하지도 못한 채 서윤은 양가적인 감정에 시달렸다. 눈앞의 문도하를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책임감과 그냥 다 버리고 도망가 버리고 싶은 소망 사이에서.

어쨌든 지금은 문도하가 몹쓸 변덕이라도 부리는 게 분명했다. 아직은 저렇게 뒷짐 진 채 함부로 행동하지 않겠다는 듯 굴고 있으나 언제 또 돌변할지 몰랐다. 분명 가이딩이 시작되면 또 제멋대로 굴 터다. 과연 어디까지 정중한 척 저러고 있을지 괘씸함이 올라왔다.

그리고 그녀의 예상대로 그가 늘 그랬듯 멋대로 군다면 아주 경멸스럽게 쳐다봐 줄 작정이었다. 그렇게밖에 이 처지에 반항할 수 없다는 사실이 슬펐으나, 한편으론 그게 그의 자존심을 제대로 상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감이 왔다.

다만 그 후가 걱정이다. 어떻게든 문도하의 뜻대로 휘둘릴 운명이라는 걸 증명받는다면 과연 자신이 견딜 수 있을까.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도망치고 싶어지리라. 그가 폭주하든 말든, 어디로든 멀리.

“그 가이딩, 빨리하고 어서 나가세요.”

저번처럼 밤을 보내고 가지 말라는 축객령이나 다름없었다. 원하는 걸 먹고 떨어지라는 말투 같기도 했다. 제게 떨어지는 날것의 홀대에 문도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서서히 이서윤과의 간격을 좁히려 다가간다. 이번에도 물러서지 않고 버틴 그녀를 보면서 어쩐지 미소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새어 나온다. 그렇게 발끝이 닿을 때까지 다가서며 해사한 미소를 걸었다. 매번 전부 거부하는 것보다는 이런 적선이나 다름없는 태도가 더 낫다는 어처구니없는 감상마저 떠오르니 머릿속이 단단히 망가졌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전히 뒷짐을 쥔 채 그녀에게 불쑥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코끝이 맞닿을 것처럼 내려간 문도하는 이서윤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어 가는 걸 감상하듯 바라보았다.

이 순간에도 이서윤이 환하게 빛나는 걸 보면 머리가 진작에 망가진 건 맞는 모양이다.

“그냥 접촉으로 부족한 건, 알고 있는 거겠지?”

“……손으로는 부족하단 소린가요.”

“운에 맡겨 보든가.”

“…….”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눈을 내리깔자 이서윤의 얼굴에 난처함이 배어 나온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녀의 감정은 아주 풍랑같이 움직이는 듯했으나, 그는 이대로 움직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눈앞이 완전히 빨갛게 물들어 다시 폭주해 버린다 해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자기 파괴적인 심정 속에서 문도하는 짙게 미소 지었다.

“선택해. 네가 원하던 거잖아.”

코앞까지 다가온 문도하는 왜인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곧 멋대로 굴 것이라 여겼는데 이상한 일이다. 머릿속 구석에서 경고등처럼 빨간빛이 번쩍거리며 돌아갔다. 당황스러운 심정을 감추지도 못한 채 서윤은 동상처럼 굳은 채 서 있어야 했다.

흥미롭다는 듯 문도하가 이쪽을 관찰하고 있는 걸 알았으나 표정을 숨기기엔 늦었다. 슬쩍 그늘지게 내리깐 문도하의 눈가만 노려보던 서윤은 시선을 이리저리 방황하다가 할 수 없이 다시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아주 느릿하게 깜빡이는 문도하의 눈꺼풀을 바라보던 서윤은 그대로 홀린 듯 그의 입술로 다가갔다.

선택이라는 문도하의 말에는 여전히 반발심이 들었다. 그가 곧 자제력을 잃을 것이라는 조소도 머릿속을 울렸다. 그런데도 어쩐지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입술이 맞닿았다. 반쯤은 폭주에 대한 두려움이 그녀를 움직인 거나 다름없었다. 나머지 반은 대체 무슨 감정인지 불명확했다.

빠르게 입술 끝에서 온기가 퍼졌다. 한숨처럼 들어오는 문도하의 숨에 폐부가 들썩였다. 덕분에 짧게 지나간 자신의 속내에 대한 고민도 멀어진다. 여전히 두 손을 봉인한 문도하는 소극적으로 굴었고, 하는 수 없이 서윤은 양손으로 그의 뺨을 잡아야 했다. 보드라운 피부가 손바닥에 닿는 감각이 자극적이다.

그저 빨리 내보내기 위해서야. 스스로를 향한 다짐으로 서윤은 애써 행위에 몰두한다.

한참 그렇게 그의 뺨을 부여잡고 어설픈 키스를 주고받은 서윤이 뒤로 물러났다. 매섭게 그녀의 허리를 잡아당길 것이라 여긴 문도하는 여전히 동상처럼 서 있기만 했다. 각오하고 있던 서윤이 어리둥절한 낯을 미처 숨기지 못하고 그에게 물었다.

“……이제 됐죠?”

“아직.”

덤덤한 낯을 가장하고는 있었으나 문도하의 말끝은 퍽 거칠었다. 무언가를 깊게 참고 있는 게 뻔한 모양새라 그녀는 한층 혼란에 빠졌다. 이제 와서 왜 이런 시늉을 하는 걸까.

그런데도 아직 가이딩이 더 필요하다는 문도하의 말에서는 진심이 느껴졌다. 이게 운명인 에스퍼와 가이드의 교감인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확신에 찬 추측이었다.

어쩔 수 없이 이를 한 번 악물고 결심한 서윤은 다시 그의 뺨을 잡고 입을 맞췄다. 깊숙이 들어오는 혀가 입천장을 훑을 때마다 그와 같이 보냈던 밤이 떠오른다. 단단히 서 있으려 했는데 자꾸만 다리가 희미하게 떨려 왔다. 그나마 다행인 건 정신을 똑바로 차리려 노력한 덕인지 그녀의 정신이 혼미해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이 느낌은 뭘까.

모래 늪에 빠지는 기분이 무서워서 서둘러 입술을 떼어냈다. 눈을 내리깔고 고요히 서 있는 문도하의 얼굴은 한껏 정염에 빠져 있었다.

“이번엔 됐겠죠.”

“하……. 아직 멀었어.”

깊은 울림을 지닌 문도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쯤 알아서 휘두르면 될 텐데 이상한 짓을 하고 있었다. 곤란한 그녀의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는 건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떠오른다. 그녀가 어쩔 줄 모르고 손만 쥐었다 폈다 하고 있자 문도하는 그저 눈을 감았다. 시선이 사라지자 조금은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머쓱함을 담아 재빨리 제 입술을 훔친 서윤은 부들거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눈을 감고 있는 그를 바라만 보았다. 아까 희미하게 느껴진 교감 비슷한 느낌은 덧없이 흩어진 지 오래다. 부담스러운 상황 속에서 서윤은 입술을 깨물며 고민했다. 저 말이 진짜일까.

고민은 길었고 행동은 짧았다. 아까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려움도 한몫했다. 저 오만한 인간이 진짜 뭔가 문제가 생겨서 이런 짓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현실적인 예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시 맞닿은 입술은 이번엔 오래도록 떨어지지 못했다.

그런데 참으로 곤란하게도, 무언가가 그녀를 깊숙이 침투한 기분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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