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출근은 정상적으로 해라. 책임감 있게 굴 거라 믿는다.
“…….”
사장의 문자를 내려다보며 서윤은 어슴푸레한 새벽을 맞았다.
오늘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어느 날 그녀에게 들이닥친 문도하처럼, 불면증이 불시에 찾아온 모양이었다.
책임감이 과연 이럴 때 쓰는 말이던가. 싸늘한 조소로 그것을 내려다보던 서윤은 답장도 없이 핸드폰의 화면을 꺼 버렸다.
월급을 받은 지 고작 며칠이었다. 이대로 말없이 나가지 않아도 서윤으로서는 그다지 손해 보는 일이 아니라는 말과도 같았다. 그걸 사장도 알 테니, 아마 이따위 문자를 보내온 것이겠지. 마치 모든 게 서윤의 탓이라는 것처럼.
가게는 차질 없이 돌려야 하고, 그 와중에 제 사리사욕은 서윤에게 강요해야 하고. 무척이나 바쁘겠다며 꺼진 화면을 노려보며 조소를 흘린다. 잠을 자지 못하니 확실히 사람이 날카로워지는 것만 같았다.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려면 슬슬 준비해야 하는 시간이지만 서윤은 그저 침대에 웅크리고 앉았다. 고개를 무릎에 묻은 채 숨을 내쉬면 따뜻한 온기가 꼭 다른 사람의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그 딱딱한 온기에 필사적으로 얼굴을 비비며 서윤은 다시 한숨을 흘렸다.
그만두고 싶었다. 그따위 취급을 계속 받으면서 스스로를 학대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당장 새로 구해야 하는 일자리를 생각하면 막막해졌다. 그나마 일전에 받아온 한 달 치 월급이 아니었다면 이런 사치스런 고민조차 못 했으리라.
“…가기 싫어….”
이렇게 말해도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버티다 기어코 아르바이트에 가고 말 것이라는 걸 그녀는 잘 알았다. 그만둘 땐 두더라도 확실하게 이직할 방안은 찾은 채 그만두어야 했다. 기분에 따라 대책 없이 저지르고 나면 결국 굶어야 하는 건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사장이 어쨌든 이따위 문자까지 보낼 정도로 일손이 필요하다면 당분간 잠잠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강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서윤과는 다르게 두루두루 잘 지내는 그녀니까 어제 기묘했던 분위기를 어쩌면 이미 들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유까지는 다 말하지 못해도, 강하나에게만큼은 서윤이 그만둔다는 사실을 제대로 전한 후 사라지고 싶었다. 강하나가 건네준 온기가 지나가는 적선에 불과했을지라도.
파들파들한 한숨을 흘리면서 서윤은 내키지 않는 외출 준비를 시작했다.
* *
내키지 않는 발걸음도 앞으로 내딛는 한 언젠가는 목적지에 닿았다. 기어코 출근길에 오른 서윤에겐 안타까운 일이었다. 그나마 식당에는 사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서 그녀의 시름이 아주 조금 녹아내렸다.
적어도 서윤의 노동력을 빌리고 싶을 땐 물러설 줄 아는 인간이라 다행이었다. 어릴 적부터 열심히 살아온 덕에 서윤은 꽤나 수완 좋은 아르바이트생에 속했으니 말이다. 위험한 곳에 차려 둔 유일한 식당이라 늘 손님이 넘쳐나는 것도 이런 결정에 한몫했으리라.
그녀가 식당에 들어서는 순간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의 눈초리가 끈끈하게 달라붙었다. 적대감은 서려 있지 않았으나 진득한 호기심이 그녀를 숨 막히게 둘러싼다.
애써 담담한 낯을 가장하며 서윤은 서둘러 유니폼으로 갈아입었다. 늦장을 부린 덕에 오늘은 아슬아슬한 시간에 도착하고 말았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짧은 유니폼이 서윤의 마음처럼 몸을 조여왔다.
착장과 함께 다시 표정 관리에 성공한 서윤은 밖으로 나갔다. 식당 내부에는 벌써부터 에스퍼들이 자리를 제법 메우고 있었다. 이곳을 소위 아지트처럼 사용하는 에스퍼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홀에서 먼저 움직이고 있던 아르바이트생들도 그녀에게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졌다. 어제 사장과 일으켰던 마찰이 사뭇 궁금하다는 듯이. 무감각하게 제 감정을 죽인 서윤이 그 눈길을 외면한 채 자연스럽게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제법 분주하게 몸을 놀리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강하나가 오질 않았다.
슬쩍 본 시계는 강하나의 출근 시간을 한참 넘겨 있었다. 더 의아한 건 아무도 그 사실에 대해 의문을 갖지 않는 것 같았다는 점이다. 규모가 큰 식당답게 이 시간에 함께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은 열 명이 넘었다.
“이거 4번 테이블.”
“…응.”
우물쭈물 눈치를 보며 주변을 둘러보는 서윤을 오해한 것인지, 주방 쪽 아르바이트가 방금 내온 음식의 목적지를 다시 알려주었다. 하는 수 없이 홀로 나가 음식을 서빙하고 손님이 나간 테이블까지 정리하던 서윤은 다시 허리를 들어 시계를 보았다.
하나가 왜 안 올까.
그녀가 있으면, 그냥 그 존재 자체로도 위안이 될 것만 같았다. 지나치게 애정 결핍 같은 발상이었으나 서윤은 절실했다. 아무렇게나 떨어지는 동정이라도 받아먹어야 할 만큼.
그냥 기다리는 것만으로는 어차피 하나에겐 큰 피해가 가지 않을 터다. 그녀가 온다고 해서 큰 걸 바랄 생각도 없었다. 그저 무슨 일이 있을 때 마음 편히 질문할 수 있는 존재가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실제로 지금, 서윤은 강하나가 왜 오지 않는지 가볍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사람조차 없었으니까.
조금 더 고민하던 서윤은 이윽고 강하나의 행방을 물어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나마 가장 오래 얼굴을 본 아르바이트생에게 다가간 서윤이 쭈뼛거리다가 말을 걸었다. 그녀가 말을 걸자 마찬가지로 놀란 표정을 하던 다른 아르바이트생은 바로 대답을 해주었다.
“하나는 오늘 일이 있어서 쉰다고 했어.”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걸까.
다시 테이블을 정리하는 내내 그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어제 유난히 걱정스러운 얼굴을 하던 강하나가 떠올랐다. 오늘 무슨 일이 있을 거라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갑작스러운 일정이었을까?
어쨌든 사장이 굳이 문자까지 보내며 서윤을 부른 이유는 알 것 같았다. 아르바이트생이 둘이나 비길 원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사고라도 난 건 아니겠지. 하필 강하나의 온기에 조금 의지하기 시작한 때에 그녀에게 일이 있다는 소식을 들어서 그런가, 이상하게 신경 쓰인다.
사실 강하나에게 일정이 있었더라도, 그걸 고작 말 한두 번 섞은 것에 불과한 서윤에게 말해 줄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급작스런 사고였다면 방금 대답해준 아르바이트생이 그 점을 언급해 줄 것도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한 서윤은 이내 덤덤하게 걱정을 털어내곤 다시 일에 집중했다. 그냥, 일이 좀 있었나 보지.
“여기 맥주 추가.”
“네. 한 잔씩 더 드려요?”
네 명의 에스퍼가 앉아 있는 테이블이었다. 그들 앞에 놓인 잔들이 전부 비었기에 요령껏 물었다. 그녀의 물음에 주문한 에스퍼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서윤의 얼굴을 보고 잠깐 이채를 띠긴 했으나 이내 눈동자에서 흥미가 사라졌다.
이 직장에서 유일하게 만족스러운 건 이거 하나였다. 난폭하기 짝이 없는 에스퍼들이라도 자신의 가이드가 있다면 이런 쪽으로는 허튼수작을 잘 부리지 않는다는 점.
물론 에스퍼는 기본적으로 성격들이 오만해 서비스직으로서 비위를 맞추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쪽의 관심이 지긋지긋했던 서윤은 차라리 까다로운 고객 쪽이 나았다. 성격은 나빠도 어쨌든 성적 희롱을 일삼는 인간들의 비율이 비교적 적었으니까.
“아가씨. 애인 있어?”
“…있어요. 맥주 가져올게요.”
물론 그런 에스퍼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아직 가이드가 없는 에스퍼는 종종 이런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가이드가 없는 모든 에스퍼가 이처럼 더럽게 구는 건 아니었지만, 원래 자제심이 부족한 인간이 에스퍼가 된다면 십중팔구 문란하거나 난동을 부리거나 했다. 그 행동을 막을 수 있는 이가 얼마 없다는 걸 아니 고삐 풀린 것처럼 굴게 되는 것이다.
그런 사례를 보면 문도하는 퍽 특이한 축에 속했다. 이쪽으로는 스캔들 한 번 안 날 정도로 담백한 생활을 하는 것 같았으니까. 오히려 반대로, 그의 잠깐 스쳐 가는 연인이라도 되려고 달려드는 여자들에게 가차 없다는 게 여론이었다. 단지 그를 거슬리게 한다는 이유였다.
가이드가 없는 생활이 길어질수록, 정신이 무너져 내리는 감각을 견디지 못하고 문란하게 생활하는 에스퍼도 없진 않았다. 부질없는 온기로 위안을 삼으려고 말이다. 하지만 문도하는 그 어느 쪽도 아니었다.
하필이면 ‘애인’ 소리가 나올 때 문도하를 떠올려 버린 서윤은 일그러지는 표정을 자제하며 덤덤히 말을 이었다. 어차피 서윤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일부러 애인이 있다고 공공연히 말하곤 했다. 대부분은 이렇게 단호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떨어져 나갔으니까. 그러니 굳이 문도하를 신경 쓸 필요는 없다.
하지만 간혹 이런 대답에도 더 끈질기게 구는 족속들이 있었다. 그리고 이런 부류가 제일 질이 나빴다. 어떻게 상대하든 간에 제 좋을 대로 굴었기 때문이다.
위기감을 느껴 일부러 황급히 돌아섰는데 몸이 뒤로 훅 쏠리면서 손목 어림에 통증이 일었다. 에스퍼가 멋대로 꽉 잡은 손목이 아파 절로 앓는 소리가 나간다. 역시 예감이 좋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뭐 하는 놈이랑 사귀는데? 에스퍼로 갈아타는 게 낫지 않겠어?”
“윽. 놔주세요.”
우악스러운 손놀림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런 서윤의 미모를 다시 유심히 보던 에스퍼가 구역질 나는 웃음을 입에 걸었다. 추악함이 묻은 얼굴을 일그러트리는 게 웃음이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다.
어쩔 수 없이 문도하와 비교되는 장면에 서윤의 낯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번호 좀 줘 봐. 그럼 놔 줄게.”
“싫어요. 놔 주세요!”
“그만해.”
방금 서윤에게 맥주를 주문했던 다른 에스퍼가 그런 그의 행동을 막았다. 등급이 더 높은 에스퍼였던 모양인지 놈은 순순히 서윤의 손목을 놔주었다. 황급히 몸을 돌려 식당 안쪽으로 도망쳤다. 서럽고 분하긴 해도 피하는 게 상책인 부류였다.
그런 서윤의 뒤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화하는 음성이 들린다.
“허튼짓하지 말고 가이드나 빨리 구해.”
“그게 어디 마음대로 됩니까. 아, 얼굴이 참 취향이었는데.”
“시끄러워.”
“제 운명도 저렇게 반반한 얼굴이어야 할 텐데 말이죠. 그래야 박는 보람이 있지.”
천박한 대화가 서윤의 등을 찌르는 듯했다.
황급히 벽 뒤로 숨기 위해 조리대 근처로 들어서자 다시금 손목 통증이 올라왔다. 잠시 고개를 숙이고 손목 어림을 주무른다. 사장이 어깨를 만졌을 때와 같이 더러운 악취가 솟는 듯했다. 지긋지긋한 냄새였다.
그런 그녀를 다른 아르바이트생들은 눈길만 잠깐 주고는 지나쳤다. 다들 분주하게도 제 할 일을 찾아서 돌아다닌다. 서윤만 빼고. 다시금 사회에서 튕겨져 나온 기분이 들어 무척 불안했다.
미약하게 한숨을 내쉰 서윤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저, 다시 무사히 휴식이 오기를 바라며.
* *
같이 있던 에스퍼의 눈치를 봤는지, 서윤의 팔목을 함부로 잡았던 사람은 이후로 조용히 술을 마시다가 사라졌다. 이따금 서윤에게 징그러운 눈길을 보내긴 했으나 그럭저럭 버틸 만한 수준이었다. 이따위 일에도 면역이 생긴다니 불쾌하기 짝이 없었다.
어찌어찌 무사히 퇴근한 서윤은 이번엔 해가 지기도 전에 집에 잘 들어왔다. 잠깐 걸음이 느려졌던 철제 계단 근처에서는 문도하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물에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면서 그녀는 침대에 걸터앉았다. 아까 그 에스퍼에 비하면 문도하를 대하는 건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양쪽 다 무척이나 거북한 건 마찬가지였으나 문도하의 행위는 좀 더 본능적인 공포를 자극했다.
애초에 그 독이 든 식물같이 화려한 생김새가 문제일 수도 있겠다. 환하게 미소 짓는 그 얼굴만큼은 눈물이 날 정도로 그럴싸했으니까. 문도하의 손길에는 그 악취가 남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공포가 그런 감각까지 마비시켜 버리는 것일까. 어쩌면 그의 운명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작용하는지도 몰랐다. 퍽 의아한 깨달음에 서윤은 문도하에 대한 경계를 한껏 돋우었다. 그 겉모습은 좀 더 확실히 서윤의 목을 조르기 위한 수단일지도 모른다.
밤이 깊어지고 다시 웅크린 그녀는 두려워했다. 문도하가 또 올까?
그가 다시 찾아와 살갗을 맞대면 자신은 모든 것을 잊고 쾌락에 신음할 것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끔찍할 수가 없었다. 첫 경험을 하는 순간에도 위화감 대신 몸을 파고들던 쾌락을 서윤은 어렴풋이 기억했다.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감각은 그녀에겐 역린과도 같은 공포를 선사한다.
올 작정이었으면 또 철제 계단 근처에 서 있었을 것 같긴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안심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염동력에 의해 종잇장보다도 쉽게 열리던 자신의 대문을 잠깐 바라봤던 서윤이 다시 무릎을 굽히고 고개를 묻었다.
오늘도 잠이 올 것 같지가 않았다. 두려움에 마비된 생존 본능이 잠도 잊은 채 대문 쪽에 온통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으니까.
문득 강하나가 떠올랐다. 아까도 강하나가 있었다면 조금 유하게 해결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실제로 식당에는 이런 성희롱이 아니라도 여러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일전에는 강하나가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곤궁에 처한 것을 보고 끼어들어 해결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사장과 서윤 사이에 끼어든 건 그저 강하나의 착한 심성이 기여한 바가 클 것이다.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면서 서윤은 그녀의 행동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저 흐르듯 지나간 타인의 온기를 만끽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고.
왜 못 왔는지 연락이라도 해 볼까.
무심코 든 생각에 황급히 스스로를 나무랐다. 애초에 서윤이 먼저 연락하는 건 못 할 짓이었다. 괜한 행동으로 강하나마저 문도하의 감시 범위에 밀어 넣을 순 없는 노릇이다.
강하나는 서윤의 번호를 모른다. 애초에 그녀가 서윤의 핸드폰에만 자신의 번호를 찍어 주었기 때문이다. 일부러 제 번호는 보내 두지 않았다. 행여 착한 강하나가 먼저 연락을 하게 된다면 위험하리라 판단했으니까.
그러니 이 번호는 아무것도 아니다. 앞으로 쓰일 일이 없는 번호일 테니.
그런데도 저장되어 있는 강하나의 이름 하나에 서윤은 위안을 느꼈다. 이렇게 곤궁에 처한 제 상황이 극단적으로 드러날 때면 서윤은 몸을 웅크렸다. 이대로 점이 되어 사라질 것처럼.
그 때 문자가 오는 소리가 방안을 지잉 울렸다.
또 사장인가 싶어서 차게 식은 눈으로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봤다. 그리곤 이내 입매를 딱딱하게 굳힌다.
화면에는 제가 저장한 기억이 없는 문도하라는 이름 석 자와 함께 문자가 떠올라 있었다.
금요일에 갈게.
그 문자가 문도하의 눈이라도 되는 것처럼 서윤은 핸드폰의 화면을 황급히 꺼 버렸다. 마치 그와 눈이라도 마주치는 것만 같아서 숨이 막혔다.
대체 언제부터 저장되어 있었지?
그녀가 정신을 잃었을 때 문도하가 멋대로 가져가서 번호를 저장해둔 것이 분명했다.
입술을 잘근잘근 물면서 서윤은 식은땀이 나는 손을 움직여 이불을 움켜쥐었다. 몇 번이나 헛손질하고 나서야 손아귀에 보드라운 천이 잡혔다. 그러나 그 감촉이 못내 차가워서 이상하게 오한이 들었다.
이불을 마구 끌어 올리면서 숨을 고르게 쉬었다. 진정해야 했다. 잊을 만하면 그녀를 툭툭 치고 지나가는 이 상황에 익숙해져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짓을 할 것만 같아서. 그나마 당장 손이 떨리지 않는 건 벌써 몇 번이나 문도하를 겪었기 때문이리라.
한참을 초조하게 입술만 짓씹으며 문도하가 대체 언제 그녀의 핸드폰을 건드렸을지 고민했다. 그 안의 연락처는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나 강하나의 번호가 있었으니까.
다시 한번 낱낱이 기억을 되살려 보며 자신이 정신을 잃었을 때를 모두 떠올렸다. 하나같이 좋지 않은 기억이라 오래된 딱지를 떼서 상처를 헤집는 것만 같았다.
어쩌면 멀쩡한 그녀를 앞에 두고도 문도하는 핸드폰 조작이 가능할지도 몰랐다. 염동력이 과연 그런 일까지 할 수 있을까?
어쨌든 생각을 거듭한 결과, 자신이 강하나의 번호를 저장했던 건 마지막으로 문도하를 만난 이후라는 걸 깨달았다. 애초에 마주친 적이 없으니 그녀의 핸드폰 또한 건드리지 못했으리라. 확신을 얻고 나서야 탈력감에 몸이 축 늘어졌다.
고작 며칠 전의 기억인데도 어쩐지 빛바랜 앨범을 뒤적이는 느낌이 들었다. 그간 서윤이 필사적으로 이 며칠간의 시간을 인생에서 지워 버리고 싶다고 소망한 탓인 듯싶었다. 이렇게 무작정 모든 것을 지워 내려다가 중요한 것마저 스스로 없애 버릴까 봐 두려워진 서윤은 다시 이불을 움켜쥐었다.
이런 자신의 볼품없는 모습에 실성한 듯 웃음이 튀어나왔다.
“…하, 하하.”
금요일에 오겠다고 예고를 하다니. 그간 불쑥불쑥 잘도 그녀의 인생에 끼어든 주제에 웃기지도 않았다.
그가 그렇게 말한다고 한들 서윤이 어찌 믿겠는가. 그녀와 문도하 사이에 존재하는 신뢰란 바닷가의 모래알보다도 하찮았다. 하지만 아무리 분노를 짜내고 짜내어도, 그녀의 마음 한구석은 어쩔 수 없이 허물어져 내렸다.
오늘은 수요일이다. 어쨌든 오늘 밤은 문도하의 침입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지 몰라.
마음이 스스로에게 속삭이는 소리가 마치 꿀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다디단 잠을 먹지 못한 것이 벌써 이틀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문도하가 그녀에게 이런 거짓말을 해서 뭐하겠는가. 문자를 치는 수고조차 할 필요가 없을 텐데. 빠른 합리화가 자꾸만 메아리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돌아다니며 이성을 재웠다.
정신을 아무리 다잡으려 해도 한번 허물어진 둑은 정도를 모르고 무너져 내렸다. 결국 수마를 감당하지 못한 서윤이 그대로 웅크린 채 침대 위로 스르륵 쓰러졌다.
오랜만에 아주 깊은 잠이었다.
* *
“안녕, 서윤아.”
“안녕….”
하루 만에 다시 마주한 강하나는 무척이나 초췌한 얼굴로 나타났다.
알게 모르게 그녀의 등장을 기다리며 일하던 서윤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인사에 재빠르게 몸을 돌렸다. 반갑게도 몸을 돌렸으나 눈에 들어오는 건 어딘가 잔뜩 피로가 묻은 강하나의 얼굴이었다.
반사적으로 괜찮은지 물으려던 서윤은 입을 닫았다. 자신이 과연 그런 사정을 물어도 되는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다. 너무 오래 혼자 지낸 탓에 타인을 어찌 대하면 되는지 까먹은 것 같았다.
친구가 되고 싶은 이에게 어찌 다가가야 하는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어제는 아르바이트 잘했어?”
“응.”
하지만 이내 상냥하게 묻는 강하나를 보면서 서윤은 다시 용기를 냈다. 어차피 별것 아닌 일이었다. 아르바이트 동료에게 괜찮은지 물어보는 일쯤은, 그저 가볍게 건넬 수 있는 인사니까.
이렇게 하나둘씩 가벼운 물음을 건네다 보면 언젠가는 친구라고 말할 수 있는 사이가 되겠지.
“…안색이 안 좋은데, 괜찮아? 어제 무슨 일 있었어?”
“…….”
하지만 그녀의 물음에 강하나의 얼굴이 잔뜩 굳었다. 마치 어제 있던 일 때문에 미미한 미소마저 쓸려나간 것처럼.
어딘가 슬픈 것 같기도, 또는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기도 한 미묘한 표정이었다. 오랜 세월 겹겹이 쌓아 올린 것 같은 감정이, 그게 무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없게 만들었다. 심지어 물끄러미 저를 살피는 서윤의 시선에 능숙하게 자신을 감추기까지 했다.
덕분에 기껏 끌어 올린 가벼운 물음은 서윤의 긴장을 타고 한없이 가라앉기만 했다. 뭔가 실수라도 한 것 같아서 한껏 당황한 서윤이 제 두 손만 맞잡으며 강하나의 눈치를 살폈다. 굳어 있던 강하나는 이내 다시 미소 지으며 서윤의 그 손을 잡았다.
마치 당황한 서윤이 도망치려는 걸 알아차렸다는 듯이.
“고마워. 괜찮아.”
“…어….”
“너는, 괜찮아?”
어제는 오랜만에 푹 잔 덕에 서윤의 안색은 나쁘지 않았다. 입술의 상처도 생각보다 빠르게 아물어 이제는 그 흔적만 옅게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도 괜찮은지 묻는 강하나 때문에 서윤은 저도 모르게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제 일이 있어서 자리를 비운 건 오히려 강하나가 아니었던가. 그런 그녀의 반응을 어찌 해석했는지, 강하나의 안색이 한층 어두워졌다.
그 묘한 반응에 역시 어제 있었던 일을 전해 들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강하나였으니, 서윤의 일이 벌써 귀에 들어갔을지도 모른다. 특히나 그녀는 사장이 서윤에게 접근하는 것을 이미 한 번 막아 준 전적도 있지 않은가.
왜인지 그런 일로 자꾸 도움을 받는 것 같아서 어느 순간부터 잊고 있던 부끄러움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한편으로는 걱정되기도 했다. 어제 있었던 일이 또 어떻게 와전되고 왜곡되어 그녀의 귀에 들어갔을지.
그녀 자신은 분명 아무것도 원하지 않았으나 제멋대로 떠안은 ‘호의’ 때문에 마찰을 빚는 경우가 왕왕 있었다. 그녀에게만 잘 나오는 휴가, 그녀에게만 돌아오는 질 좋은 도시락, 그녀에게만 권유하는 퇴근길 교통편 등등.
모든 것을 정색하며 거절해보아도 그 제멋대로인 호의는 끊이질 않았다. 마치 자신이 선의로 주었으니 응당 받아야 한다는 것처럼. 실제 그 저의에는 더러운 욕망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게다가 순수한 선의인 것처럼 포장해 예민하게 구는 그녀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경우도 많았다. 어제의 사장처럼. 슬프게도 이 또한 이미 몇 번이나 겪어봤던 오해였다.
하지만 강하나만큼은 그렇게 오해한 채로 두고 싶지 않았다. 그냥 있는 그대로의 서윤을 조금 봐줬으면 싶었다. 그래서 서윤은 애써 덤덤한 말투를 꾸며내어 입을 열었다.
“어제 일이라면….”
“어제? 어제도 무슨 일이 있었어?”
하지만 서윤이 어제를 입에 담자 강하나는 도리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 아니야.”
그제야 자신이 뭔가 착각했다는 생각에 서윤이 얼굴을 붉혔다. 괜한 피해망상 환자처럼 굴 뻔했다. 익숙하다면서 눈앞의 강하나 또한 그런 소문에 쉽게 흔들릴 것이라 편견을 갖고 말았다. 어쨌든 서윤에게 오늘도 먼저 인사를 해주었는데도.
이런 제 마음이 부끄러웠다. 그래서 수습할 말을 찾느라 아직도 잡혀 있는 손이 조금 어색해질 때까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자 한참 그녀의 얼굴에서 눈물을 찾듯 시선을 던지던 강하나가 먼저 운을 떼었다.
“나는 어제 일이 좀 있어서 다른 지역에 다녀왔어.”
“아….”
“서윤아.”
“응.”
“무슨 일이 있으면 꼭 주변에 도움을 청해. 알았지?”
덤덤한 말투 속에는 분명 사포 같은 슬픔이 묻어 있었다.
그 감촉에 놀란 서윤은 그저 멍하니 고개를 끄덕여야 했다. 이래저래 갑작스러운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소리 내 대답하지 않아도 충분했다고 느꼈는지 강하나는 연기와 같이 흐린 미소를 보여 주곤 탈의실로 향했다. 스치듯 놓는 손길에는 모래알 같은 강하나의 감정이 진득하게 남았다.
이번엔 손 쪽에 남은 그녀의 온기를 느끼면서 서윤은 생각에 잠겼다. 자꾸 도움을 청하라는 말을 하는 강하나의 태도가 어딘가 걸렸다.
어쩌면 서윤이 사장 때문에 처한 상황을 정확히 알고 있는 건 아닐까. 오해 같은 것 없이 있는 그대로. 강하나 또한 서글서글한 눈매를 가진 미인이었다. 서윤과 비슷한 상황에 여러 번 처해봤을지도 모르겠다. 그걸 알고 있다면 이렇게 도움을 청하라고 조언을 줄 법도 했으니까.
하지만 거듭 들은 말에도 서윤의 고개는 바닥을 향한 채 올라오질 않았다.
강하나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그 약속은 지키지 못할 것 같았다. 기실 서윤의 문제는 사장 같은 것이 아니었으니까.
* *
다행히도 그 대화 이후로 강하나는 다시 본래의 밝은 얼굴을 회복했다. 경쾌해진 그 걸음걸이만 보아도 힘이 났기에 서윤으로서는 안도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문자가 사실이라면 오늘 밤도 문도하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 하나에 집에 돌아가는 서윤의 발걸음도 덩달아 힘이 들어갔다.
믿고 싶진 않았지만, 맑은 정신으로 생각해봐도 문도하가 굳이 그런 문자를 보낼 이유가 없었다. 여러 번 몸으로 겪은 바로도 그는 절대 친절한 성격이 아니었으니까.
아마 정말 금요일에 오겠다는 의사를 전달할 목적이었겠지. 어쩌면 그때까지 허튼짓하지 말라는 경고일 가능성도 높았다. 다만 그 일방적인 통보에 서윤이 알아서 몸을 사려야 하는 현실이 비참했을 뿐이다.
그래도 오늘 밤 또한 깊이 잘 수 있으리라. 그 사실에만 집중하기로 하며 서윤은 집 근처에 당도했다. 이렇게라도 숨 쉴 구석을 억지로 만들어 두지 않으면 다음엔 이 발걸음이 어디로 향할지 서윤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통통거리는 소리를 내며 철제 계단을 오르는데 그녀의 방 대문에 뭔가 꽂혀 있는 것이 보였다. 하얀 종이를 보며 묘한 기시감에 시달리던 서윤은 약간 눈썹을 찌푸리며 전단지를 뽑아 들었다.
마음의 평화를 원하신다면 교단에 정신을 의탁하세요.
“…….”
또 그 사이비였다. 다세대 주택인 이 건물은 방이 작은 만큼 좁은 간격으로 대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문을 열 열쇠를 찾으며 서윤은 반사적으로 집 양옆에 있는 다른 대문들을 곁눈질했다. 하지만 대문이 여럿 늘어선 복도의 끝까지 쳐다보아도 하얀 종이가 또 꽂혀 있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실을 발견한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황급히 주변을 미친 사람처럼 둘러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동네는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만 뽐내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그전에는 간간이 오가는 사람들을 마주치곤 했는데, 날이 추워질수록 밖에 돌아다니는 사람도 적어진 느낌이 들었다.
낙엽이 애처롭게 구르는 가을 분위기에, 서윤은 이상하게 갈비뼈의 틈새로 바람이 들어오는 듯한 착각을 느껴야 했다. 다시금 익숙하게 그녀를 휩쓸고 지나가는 서늘한 불안함이 뼛속부터 그녀를 잘게 떨도록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문틈에 있는 전단지를 사람들이 전부 가지고 갔을 가능성은 없었다. 그녀가 이 방을 계약할 당시 똑똑히 들은 바로는, 그녀가 사는 건물 한 층은 전부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그저 사람 마주칠 일 없고 한가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그건 서윤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어도 알아차리는 사람이 적을 거라는 소리와도 같았다.
이미 여러 번 증명되지 않았던가.
문도하의 예쁘장한 미소가 눈앞에 떠오르자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일전에 본 사이비 전도사가 그녀의 집을 염탐이라도 했던 걸까? 낯선 사람이 자리를 피한 줄 알고 바로 집으로 향한 것이 실책이었을까.
그 남자가 사라지는 척, 서윤이 집에 들어갈 때까지 몰래 그녀를 훔쳐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자마자 이번엔 정수리가 쭈뼛 솟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문도하 말고 또 다른 사람이 그녀의 안식처를 위협하리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요새는 보이지 않는 몬스터보다 실체를 가지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곁에 오곤 하는 사람이 더 무서웠다.
선득한 공포에 서윤은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복도를 서성거렸다. 아직도 어딘가에서 낯선 시선이 그녀가 정말 이 집에 들어가는지 확인하고만 있을 것 같아 무서웠다. 그렇다고 이대로 철제 계단을 내려가 다른 곳으로 가기엔 제 스스로 나쁜 손에 달려드는 꼴이 될까 봐 내키지 않는다.
전화를 해서 도움을 청해 볼까. 하지만 겨우 이런 일로 경찰에 신고한다고 한들 그들이 이 위험지역까지 와줄 것 같지는 않았다. 그저 홀로 이 모든 것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하다. 언제나 그녀가 혼자인 건 마찬가지였으나 이렇게 절실할 때는 괜히 그 고립감을 자꾸 더듬으며 한숨을 쉬는 것이다.
자꾸만 인생에 일어나는 이런 무서운 사건들에 눈물이 왈칵 솟는다.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그러다가 문득 다른 가능성이 하나 떠올랐다. 어쩌면 사람이 사는 곳에만 전단지를 넣은 것이 아닐까.
이 또한 소름 끼치는 일인 건 매한가지였으나, 그녀 한 사람만 노린다는 가정보다는 그나마 나을 것 같았다. 그녀가 안전하려면 이 방법밖엔 없다는 생각 때문에 잡은 실낱같은 희망일 뿐이었다. 확인하지 않고선 배길 수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녀가 이곳에 살면서 마주친 사람들이 이쪽으로 올라가는 걸 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명 정도는 그녀의 바로 위층에 살고 있을 텐데.
“헉, 헉.”
긴장으로 가빠 오는 호흡에도 마구 다리를 움직인 탓에 숨이 찼다. 그래도 머리를 들고 둘러보니 과연 그녀가 사는 위층에도 단 두 군데에만 이런 종이가 끼어 있었다. 약간의 빛만 내던 희망이 조금 더 선명해진 기분이었다.
이번엔 다시 구르듯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그녀가 사는 곳보다 한층 아래로. 철제 계단이 요동치는 소리가 요란한데도 나와 보는 사람은 없었다.
다행히도 아래층은 그녀의 이웃이 어느 방에 사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황급히 시선으로 문을 더듬으니 그곳에도 같은 하얀 종이가 하나 끼어 있었다.
“아…….”
갑자기 맥이 툭 풀렸다. 사이비 교단이 딱히 그녀만 노리는 건 아니었던 것이다. 그저 이 동네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전도 활동이라도 하는 것이겠지. 서윤과 그녀의 이웃들은 누구보다도 비참한 곳에 사는 밀려난 인생들이니까.
종이는 비싼 물건이니 확실하게 전할 수 있는 방안을 찾아낸 게 틀림없었다. 아마 우편함이라도 뒤져서 사람이 실제로 살고 있는 곳을 파악한 걸지도 몰랐다. 조금 짜증 나는 행동이긴 하지만 그래도 서윤을 특정지은 짓거리가 아니라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래도 앞으로는 부디 마주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그녀가 살고 있는 방이 특정되기 직전이라는 건 확실하니까. 이들은 우편함까지 뒤져가며 사람이 살고 있다는 것을 파악하는 사이비라는 사실을 머릿속에 똑똑히 저장해두었다. 그냥 한낱 사이비로 치부하기에는 퍽 위험해 보였으니까.
잠깐 집주인에게 말해 방의 위치를 옮겨 볼까 생각하던 서윤은 고개를 숙였다. 혹시 집주인에게 연락하는 일이 문도하의 신경을 거스르게 되진 않을까 하는 기민한 추측이 들었기 때문이다.
아니면 차라리 문도하에게 이런 사이비가 돌아다니는 걸 말하면 해결이 되지 않을까?
집에 들어선 호랑이로 지나가는 여우를 없앨 계획을 자연스럽게 하던 서윤이 피식 비웃음을 흘렸다. 문도하가 자신을 필요로 한다고 한들 이런 소소한 사정까지 고려해줄 것이라 생각한 자신이 너무 우스웠다.
서윤이 이런 말을 하면 문도하가 내보일 반응이 아직 선연하게 예상되지는 않았다. 그들은 서로 엮여버린 지 얼마 되진 않았으니까. 하지만 한 가지 단언할 수 있는 건, 그 반응이 결코 서윤의 정신 건강에 도움이 되진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아무래도 연이은 사건에 정신이 어떻게 된 모양이었다.
다시 터덜터덜 다리를 움직여 그녀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퇴근해 막 돌아왔을 때와는 다르게 계단을 오르는 소리에 경쾌함이 쏙 빠져 있었다. 큰 당황에 구기듯 꽉 쥐고 있던 종이는 손바닥의 식은땀이 배어 이미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이런 고급종이에 이런 글이나 적다니. 무척이나 아까운 짓이라고 서윤은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게다가 무언가를 믿으라는 것도 아니고 의탁하라니, 대체 무슨 소리일까. 이 전단지 때문에 놀란 탓에 서윤은 이걸 그대로 버리지 않고 그 안의 글귀를 가늠하듯 고민했다. 확실히 평안이라는 단어는 이런 곳에 사는 사람에게 솔깃한 단어이긴 할 것이다.
그녀 자신 또한 평안을 바라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이런 사이비에 홀랑 전화할 것이라 믿는 건, 무척이나 순진한 발상이 아닐까. 이런 짓이 정말 효과는 있긴 한가? 종이를 이렇게 투자할 만큼?
전단지를 돌리는 아르바이트도 무척 많이 해 본 탓에 종이의 질이 만만치 않게 좋다는 건 진즉 알아차렸다. 아니면 교단의 재력을 간접적으로 어필하기 위한 수단일까? 그럴 거면 이렇게 사람이 사는 곳에만 꽂는 게 아니라 길바닥에 뿌리는 게 효과적일 텐데. 어느 쪽이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낭비가 아닐 수 없다.
아주 잠깐이나마 평안이라는 단어에 눈길을 주었던 자기 자신을 나무라듯 서윤은 단호하게 문을 열었다. 아무 곳에나 버릴 타이밍을 놓친 사이비의 전단지는 그렇게 서윤과 함께 방 안으로 들어왔다.
이 전단이 다른 곳에도 꽂혀 있다는 사실에 안심한 나머지, 서윤은 그녀의 방문에 꽂힌 종이만 제대로 된 까만 글자를 담고 있다는 건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 *
무척 슬프게도 금요일은 쏜살같이 다가왔다. 마치 그녀가 도망칠 틈을 주지 않겠다는 듯.
세 번이나 컵을 깨 먹을 뻔한 이후로 서윤은 자신이 한껏 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틀을 편히 잔 반향이 이렇게 한번에 몰려오는 것 같았다. 단번에 그녀를 덮친 좌절은 그것이 없을 때와 비교되어 한층 무겁게 그녀를 짓눌렀다.
해맑게 주말을 잘 보내라며 인사하는 강하나의 밝은 모습에도 서윤은 굳은 표정을 풀 수 없었다. 그래도 가까스로 얼굴의 우울함은 걷어냈다. 강하나가 다시 무슨 일이 있냐며 걱정을 내비칠 것만 같아서.
사장은 며칠간 그녀를 피하는지 가게에 나오지 않았다. 그 사실조차 그녀에게 위안이 되지 않는다. 이대로 영영 마주치는 일이 없어진다면 조금쯤 위안이 되어 주긴 할 텐데.
오늘따라 진상 손님조차 없는 순탄한 하루가 지나갔다. 까다로운 주문이나 요구도 없었고, 그녀를 끈적한 눈길로 바라보는 에스퍼도 없었다. 그저 다들 담백하고 빠른 움직임으로 용건만 해결하고 사라졌다.
이 뒤에 그녀의 뒤통수를 대체 얼마나 거하게 칠 작정인지 한가롭고 평화로운 날이 아닐 수가 없다. 보이지 않는 올가미에 걸려 숨통이 턱 막혀 있는 기분이었다.
칼 같이 퇴근은 했으나 그녀의 발걸음은 미적거리기만 했다. 양발에 거대한 모래주머니라도 달고 있는 듯 걸음이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았다.
그녀의 동네 어귀로 들어서는 길을 세 번째 지나쳤을 때 서윤은 일탈을 결심했다. 도무지 집에 바로 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호하게 뒤돌아서서 괜히 번화가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도 없는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창밖으로는 쉴 새 없이 회색 건물들이 지나갔다. 그녀의 생활 반경은 주로 아르바이트를 하는 식당과 집에 한정되어 있었기에 익숙하지 않은 풍광이었다.
그래서인지 서윤은 섣불리 내릴 수가 없었다. 어디에 내릴지 결정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녀가 집에 갈 결심을 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려웠던 것처럼.
물론 그렇다고 종점까지 갈 수는 없는 노릇이라 하염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창가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딱 길을 잃은 사람의 그것이라 침통했다.
귓가에 많은 정류장의 이름이 스쳤다. 그러다 터미널이라는 소리가 들리자 홀린 듯 벨을 눌렀다. 급작스럽게 버스를 멈춰야 했던 버스 기사의 시선이 따가웠으나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타인의 시선을 고려하기엔 그녀에겐 남아 있는 감정이 얼마 없었다.
다급히 버스에서 내리자 해가 질수록 싸늘해지는 바람이 볼을 스쳤다. 버스가 선 곳은 번화가의 한중간이었다. 애초에 분주하게 불을 밝히기 시작하는 광경에 넋 놓고 있다가 벨을 눌렀으니 당연했다.
이런 늦은 시간에 돌아다니는 게, 대체 얼마 만이지.
늦은 시간에, 그것도 이렇게 바다에서 먼 곳에서 당연하다는 듯 돌아다니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희미한 행복이 깃들어 있었다. 그녀에게는 전혀 당연하지 않았던 그런 감정들이 모두에게는 공평하게 내려오기라도 한 듯.
질투가 나지는 않았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기엔 그녀는 지나치게 닳아 버렸다. 그저 신기할 뿐이었다. 고작 바다와 거리가 조금 떨어진 것만으로 사람의 생활이 이렇게나 바뀔 수 있었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밤이 되면 집에 숨어야 한다는 당연한 상식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어쩌면 이건 그녀만의 상식일지도 몰랐다. 서윤이 하다못해 부모님이 남기신 집이라도 지킬 수 있었다면 좋았을 뻔했다. 굶주리더라도 어쨌든 안전한 곳에서 굶주리고 있었을 테니.
삼촌에 대한 원망은 바닷가의 동글동글한 자갈을 닮아 있었다. 하도 많이 원망을 한 탓에 거대하던 거친 돌이 이렇게 반질반질하게 되어버린 것이다. 안타깝게 깎여나간 제 마음을 매만지면서 서윤은 계속 다리를 움직였다. 같은 곳을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어차피 목적지 따위 없었으니까.
무의미한 걸음만 반복하던 그녀는 문득 한 곳에서 우뚝 멈췄다. 대형 가전매장에서 TV의 화질을 홍보하듯이 인기 많은 시사 프로를 틀어 놓은 곳이었다.
―얼마 전 나타난 대형종을 문도하 에스퍼가 처리하는 영상입니다. 보시면 아시다시피, 지금까지의 탄란과는 다르게 원거리 공격을 하고 있는데요. 한 번도 보고된 적 없는 상황에도 문도하 에스퍼가 유연하게 대처하는 모습입니다.
―정말이지 한국에 S급 에스퍼가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하. 그 잘생긴 얼굴만 좀 더 잘 보여 준다면 좋을 텐데 말이죠.
일전에 뉴스에서도 본 적 있던 문도하의 영상이었다. 바닷가에서 홀로 대형종 탄란을 처리하는 바로 그 장면. 서윤이 걸려든 게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한 능력자라는 걸 알려준 그 장면.
대형종이 쓰러지고, 이윽고 머리를 거칠게 쓸어올린 문도하가 고개만 조금 틀어 카메라 쪽을 응시했다.
수십 대가 넘는 모든 화면이 그렇게 문도하의 눈길을 가득 담고 있었다.
* *
이렇게 까만 밤에 집으로 향하는 것도 처음이다.
오늘따라 처음 시도하는 일이 많았다. 늦은 시간에 번화가를 거닐고, 해가 까맣게 떨어진 밤에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제 발로 문도하를 향해 가고 있었다.
혼자 살면서 서윤은 의식적으로 이런 밤에 밖에 있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생각해보면 삼촌네 집에 얹혀살 때도 밤에 외출을 한 적이 없었다. 삼촌이 지나치게 그녀의 귀가에 간섭한 탓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 스스로가 밤에 돌아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에스퍼가 효과적으로 국토를 방어한 지 벌써 몇 년이다. 그러니 이제 멀쩡하게 도심에 사는 사람들이 몬스터를 만날 확률은 극히 드물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기본적인 것을 지키고 싶어 했다.
어쩌면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녀가 이런 운명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 모르겠다. 몬스터나 가이드 같은 것과는 최대한 멀리 떨어져서 살아야 한다는 듯이.
그러다 문득, 자신이 몬스터가 출몰하는 바닷가에 살고 있으며, 에스퍼가 자주 찾는 곳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실소를 흘렸다. 어차피 그녀는 이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왔어?”
“…….”
기어코 돌아오고 만 그녀의 집 앞에는 문도하가 있었다. 여전히 소름 끼치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어차피 열쇠 없이도 들어갈 수 있으면서 꼬박꼬박 그녀를 기다리는 듯 구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마치 내가 이렇게 너를 배려하고 있다는 걸 과시라도 하는 것 같아서. 꼭 사자가 제 입에 들어온 생쥐를 혀로 굴리며 농락하는 꼴이었다.
“늦었네.”
“…….”
퍽 상냥한 말투였다. 다만 그의 음성에 서윤의 기분은 곤두박질쳤다. 단 한마디로 그들이 오늘 만나기로 했으며, 심지어 문도하가 그녀를 꽤 기다렸다는 걸 알려주었으니까.
입 밖으로 적당한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가능한 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입을 여는 순간 비탄이 터져 나올 것 같아서.
서윤은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가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아주 잠깐 일탈하기 위해 찾은 곳에서도 문도하는 존재했다. 수십 개의 화면에 비친 문도하가 그녀를 쳐다보았다. 도망치듯 옮긴 옆 가게에는 문도하의 권태로운 얼굴이 찍힌 빛바랜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가 에스퍼로 각성한 뒤 딱 한 번 찍었다던 대외 선전용 사진이었다.
지나가던 어린 학생들이 그의 무용담을 떠들어댔다. 서점에 진열된 책에는 심심하면 한 번씩 ‘문도하처럼’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그 근처 흡연장에서 담배를 피우는 회사원들은 방금 본 시사 프로그램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다. 그의 염동력의 한계는 어디인가, 하는 주제를 가지고.
온 나라가 문도하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서윤이 도망친다면, 과연 그녀를 도와줄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을까?
“오늘따라 꽤 멀리까지 가고…, 도망이라도 치려고 했어?”
“…아니요.”
꽉 다물린 채 대답이 돌아오지 않는 서윤의 입매가 짜증 나서 문도하는 일부러 크게 찔러보았다. 그러자 고운 목소리가 흘러나오긴 했다. 비록 그게 진득한 원망을 담고 있었더라도.
도망치려 했냐는 물음에 서윤의 눈빛에는 적의가 가득해졌다. 마치 도망칠 구석도 주지 않은 주제에 그런 질문을 한다는 것처럼.
몇 번 안 되는 만남 동안 울고, 두려워하고, 또 굳어 있던 모습만 잔뜩 본 터라 퍽 신선했다. 저도 모르게 그 성난 눈매를 핥듯이 쳐다보던 문도하는 깨달았다. 서윤의 이런 표정도 신기한 것이지만, 타인의 표정을 이리도 잘 읽어내는 제 상태도 신기하다는 사실을.
이래저래 기이한 경험이었다. 그의 흥미를 자극하는 몇 안 되는 일. 성난 눈빛을 보내던 서윤이 눈을 다시 땅으로 향할 때까지 문도하는 홀린 듯 그 얼굴을 관찰했다.
어쨌든 이리도 솔직하게 구는 것을 보니, 서윤은 아마도 자신의 발걸음이 버스 터미널 근처를 하염없이 빙글빙글 돌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듯했다.
도망치고자 한 건 그녀의 본능 쪽일까. 아마 머리가 좋아서 이성이 도망치고자 하는 본능을 누르고 있는 것도 같았다.
사실 문도하의 경고를 듣기도 전부터 섣불리 행동하지 않았다는 점은 이성이 지나치게 잘 돌아간다는 신호와도 같았으니까. 아니면 체념에 길들어 있거나. 어느 쪽이든 이제 와 그녀의 행동이 엇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잘 관리해야겠는걸.
“일단 들어갈까?”
“…….”
사르르 웃음을 띤 문도하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러자 서윤은 끔찍한 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어두워질 때까지 그녀를 말없이 기다렸던 문도하는 이 이상 기다려 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서윤이 꼼짝도 하지 않자 천천히 그녀의 손목을 그러쥐었으니까.
말투는 상냥한 권유였으나 그녀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기는 힘은 무시할 수 있는 권유 따위가 아니었다. 이 와중에도 그 손길이 아프진 않다는 점이 가증스러웠다. 차라리 식당에서 만난 무뢰한처럼 아팠다면 마음껏 욕이라도 했을 텐데.
그녀를 유리알처럼 다루는 문도하의 손길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타박거리며 철제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처음으로 두 개의 화음으로 울렸다. 음울한 피아노곡 같은 걸음을 뒤로하고 방문 앞에 선다. 서윤을 기다린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듯, 문도하는 그녀가 열쇠를 꺼내기 전에 염동력을 사용했다.
에스코트라도 하듯 서윤의 등에 슬쩍 팔을 두른 문도하가 자상한 연인인 양 그녀를 안으로 인도했다. 등 뒤로 닫히는 문소리가 피아노곡의 마지막 음표를 연주한다. 그것이 꼭 이번 주말은 잔인할 거라는 경고음 같았다.
“…….”
이번에도 새삼스럽게 방 안을 둘러보는 문도하의 눈길에 서윤은 부끄러웠다. 삼촌을 향한 원망과는 다르게 서윤의 수치심은 서서히 사그라질 기회를 얻지 못했다. 지나치게 빠르게 부서진 그것들은 곧 모래알처럼 흩어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내가 먼저 씻을게. 넌 오래도록 씻고 싶을 테니.”
“…….”
그녀가 시간을 끌고 싶어 할 거라는 걸 잘 안다는 듯 말하며 문도하가 욕실로 들어갔다. 등 돌리기 전에 공연히 서윤의 볼을 톡톡 건드린다.
탁 하고 화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서윤은 침대에 무너지듯 앉았다.
* *
서윤은 오래도록 씻었다. 문도하의 말처럼 되는 것 같아 짜증이 났지만 어쩔 수 없었다. 사이좋은 연인이라도 된 것처럼 몸 섞을 준비를 하는 이 모든 시간이 조금씩 그녀의 목을 죄어왔다.
차라리 멋대로 들이닥쳐서 마구 그녀를 짓밟는 편이 나았다. 하지만 문도하는 이번엔 그녀의 몸보다는 정신을 짓밟고 싶어 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기어코 더 버티지 못하고 화장실 밖으로 나왔을 땐, 편한 바지를 입은 문도하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 편한 행색에 서윤이 잠시 멈칫했다. 아무리 봐도 그녀의 옷가지는 아니었고, 무엇보다도 슈트 차림이 아닌 것도 어색했다. 반사적으로 방 안을 살피니 그녀가 들어가기 전까진 없었던 짐이 하나 있었다.
누군가에게 건네받기라도 한 걸까. 그렇다면 역시 이 주변이 빠짐없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일이었다. 그녀의 눈이 어쩔 수 없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가까운 사이인 양 편한 바지를 입고 웃통까지 훤히 드러낸 채인 문도하는 이 공간에 있는 것에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마치 그건 오롯이 그녀의 몫이라는 것처럼.
화장실 앞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못 박힌 그녀를 다시 물끄러미 보던 문도하가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가 다가오는 느긋한 걸음걸이와는 다르게 그녀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자, 이거 받아둬.”
하지만 그대로 서윤을 침대에 던질 것이라 생각했던 문도하는 불쑥 무언가를 내밀었다. 까만 벨벳으로 둘러싸인 기다란 상자였다.
이번엔 기이한 불길함에 심장이 끈적하게 뛰었다.
“이게…, 뭔데요?”
“열어봐.”
그 말을 하는 문도하는 퍽 즐거운 기색이었다. 비스듬히 올라간 입꼬리는 분명 여느 때처럼 오만하기 그지없었으나, 서윤은 희미한 즐거움을 느꼈다.
그의 벗은 몸에는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서윤은 상자를 건네받았다. 손에 닿는 벨벳의 차가운 감촉이 어쩐지 싫다. 제게 꽂히듯 내려앉는 시선에 억지로 손가락을 움직여 상자를 열었다.
붉은 보석이 달린 목걸이가 하나 들어 있었다.
상자가 등장했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예감이 여지없이 들어맞았다. 사위가 희미한 그녀의 방 안에서도 붉은빛을 뿌리는 보석은 불길하게만 보였다.
목걸이를 자세히 살펴볼 생각도 안 하고 고개를 든 서윤이 문도하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다는 듯한 그 얼굴은 붉은 보석빛을 받아 요사하게 빛나고 있었다.
어쩐지 무척이나 화가 났다.
“이게 뭔가요.”
“보상이라고 생각해.”
“보상.”
그의 말을 따라 하듯 허탈한 그녀의 음성이 툭 떨어졌다. 딱 봐도 목걸이의 값어치가 무척이나 높다는 건 알 수 있었다. 물건을 담고 있는 포장 상자부터 범접할 수 없는 고급스러움이 묻어났다. 그걸 든 그녀의 손과 이 방 전체가 초라해질 만큼.
즐겁다는 듯한 그 반응을 감당할 수 없어진 서윤이 다시 고개를 툭 떨궜다. 보상이라는 건 그녀가 그에게 제공한 무언가에 대한 보상이라는 뜻일 터다. 서윤은 그에게 무언가를 자발적으로 준 적이 없었다. 그저 제멋대로 들이닥친 그에게 이리저리 휘둘렸을 뿐.
그런 서윤에게 그는 보상을 운운하고 있었다.
대체 자신을 어디까지 밀어 버리고 싶은 걸까.
“왜 그러지? 마음에 안 드나?”
“…….”
상자를 꺼내든 순간부터 얼어버린 서윤의 얼굴은 문도하가 기대했던 반응은 아니었다. 물론 그도 서윤이 이 목걸이를 받아들고 기뻐할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그러기엔 문도하가 쌓아 올린 행적이 무척이나 엉망이었다.
어쩌면 화를 내거나, 크게 고뇌할 것으로 생각하긴 했었다. 그녀의 자금 사정은 얼핏 봐도 썩 좋은 것이 아니었으니. 하지만 눈앞의 서윤은 그 어떤 예상과도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분명 방금 그는 서윤에게 막대한 부를 안겼는데, 이상하게 그녀는 모든 걸 빼앗긴 사람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의아한 기분으로 문도하는 저도 모르게 말을 뱉었다.
“뭐, 디자인을 바꾸러 가는 것도 좋아. 시간을 내보도록 하지.”
“아뇨.”
“…아니라고?”
탁, 하고 목걸이가 들어 있던 상자를 덮었다. 작은데도 둔탁하게 닫히는 소리가 단호하게 방 안을 울렸다. 그대로 손을 들어 문도하의 팔을 잡아당겼다. 맨살이 갑자기 닿자 움찔한 문도하가 이상할 정도로 순순히 서윤에게 끌려갔다.
힘없이 펴진 그의 커다란 손에 상자를 억지로 안기곤 밀쳐냈다.
“네. 이런 거 필요 없어요.”
“필요 없다고?”
멍하니 그녀의 말을 되풀이하는 문도하의 표정은 점점 딱딱하게 굳어만 갔다. 꿈틀거리는 그의 굵은 눈썹이 불쾌함을 담고 있었다. 그 모든 걸 생생히 보면서도 서윤은 그저 이를 악물었다.
이따위 것을 받아서 자신을 헐값으로 매도할 순 없었다.
서윤은 진정으로 문도하에게 아무것도 받고 싶지 않았다. 설령 내일 당장 굶어 죽을 위기에 처한다 한들 그의 손에 들린 빵을 향해 기어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다짐을 곱씹고 나서야 서윤은 깨달았다. 이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저항일 것이라고.
“우리가 이런 걸 주고받을 사이던가요.”
“…….”
이래서야 삼촌에게서 도망친 보람이 없었다. 그녀를 억지로 맡은 이후로 삼촌은 늘 서윤을 ‘쓸모 있게’ 만들려 했다. 그 과정에서 서윤의 의사가 반영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삼촌이 시키는 대로 웃고 싶지 않을 때 웃어야 했고, 삼촌이 시키는 대로 최소한의 음식만 먹으며 몸매를 관리했다.
“가이딩도 본능인지 뭔지에게 멋대로 조종당하는 거나 마찬가지고.”
그걸 깨닫고 나니 더더욱 굽힐 수 없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보석을 보상이라고 내미는 걸 순순히 받을 수 없었다. 그가 그녀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은, 영원히 서윤의 인생에서 사라져 주는 것뿐인 걸 알기나 할까.
자존심 따위 접어 두고 이 목걸이 하나로 적당히 풍족한 생활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자신의 안전을 빌미로 도심부에 주거지를 요구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의지하기 시작하면 종래에는 도망칠 기회가 와도 제 다리에 매달린 여러 족쇄가 그녀를 막을 테니까.
“원하지도 않는 일을 하면서 쾌감을 느끼고 마는 게,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알아요?”
지금 그녀가 바라는 건 단 하나였다. 어차피 문도하에게 당장 벗어날 수 없다면, 철저하게 격리라도 된 인생을 사는 것.
다짐처럼 강하게 말을 꺼낸 서윤이 그를 똑바로 직시하며 선언했다.
“그러니까 이따위 보상 필요 없어요.”
“…….”
“제 사생활이나 확실히 지키세요. 절대 남들 눈에 띄지 않게.”
그 말에서 문도하는 확실히 깨달았다. 그녀가 언제든 훌훌 털어 버리고 사라질 대비를 하고 있다는 걸. 그것이 본능적인 행동이든 철저한 계산된 행동이든 간에 말이다.
급속도로 추락한 기분이 밑에 웅크리고 있던 에스퍼의 본능을 자극했다. 머리를 얻어맞은 본능은 흉포하고 느릿하게 그 고개를 쳐들었다. 그녀의 온기를 살짝 묻히고 돌아온 벨벳 상자의 감촉이 선명했다.
그렇게, 놔둘 줄 알고.
“…주는 대로 받아.”
“싫어요.”
“귀찮게 하지 말고, 받아.”
위협적인 말투가 그녀에게 떨어졌다. 불쾌하게 여길 것은 알았으나 예상 이상의 반응이었다. 저도 모르게 움찔한 서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제 입술로 내려앉는 문도하의 눈빛이 한층 거칠어졌다.
다시 끔찍한 시련이 시작되리라는 예감이 왔다. 그런데도, 서윤은 자신을 굽힐 수 없었다.
“…필요 없어요.”
“내가 주는 건 아무것도 필요 없다 이건가?”
기어코 문도하는 성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어쩌다가 그의 역린을 건드리게 되었는지는 몰랐으나 서윤은 바짝 긴장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감정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격렬하게 구겨진 고운 미간은 그녀에게 순종을 요구하고 있었다.
두려움에 명치 부근이 잘게 떨리는데도 서윤은 힘들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 필요 없다고.
그 순간 서윤의 코앞으로 다가온 문도하가 짓씹듯 말했다.
“…앞으로 주는 대로 받아야 할 거야, 전부.”
“…싫…다고, 읏.”
다시 싫다고 말하려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한 손에 잡혔다. 반사적으로 문도하의 손목 어림을 쥐었으나 단단한 힘만 느껴질 뿐이다. 매달리듯 발버둥을 쳐도 문도하와의 거리는 가까워지기만 했다.
거칠게 그녀를 잡아당겨 억지로 눈을 마주친 문도하가 옅은 눈웃음을 띠며 그녀에게 말했다.
“거기에 쾌락도 포함해 보도록 하지. 맨정신으로, 지금 당장.”
자비 없는 선고가 그녀에게 거세게 떨어졌다.
<가이드의 우울>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