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침투(2) (5/27)

(2)

“…….”

스스로 문도하를 방에 초대하는 일은 생각보다도 더 비참했다.

이미 여러 번 쳐들어왔음에도 새삼스럽게 방 안을 스윽 훑는 그의 눈빛 때문인지도 몰랐다. 매번 화사하게 걸고 있던 미소는 집어치운 그가 무감각하게도 방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게 마치 초라한 제 방을 탓하는 것만 같아서 서윤은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그녀가 한참을 앉지도 못하고 어정쩡하게 서 있는 바람에 문도하도 덩달아 현관 앞에서 움직이질 못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긴장감만 높아졌다. 대체 어떻게 말을 꺼내야 그녀에게 남은 얼마간의 자유를 지킬 수 있을까.

무심코 생각하던 서윤이 갑자기 멍한 표정을 지었다. 자신이 빼앗기고 있는 것이 자유였다는 사실을 갑작스럽게 실감했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문 앞을 막고 있는 문도하 때문에. 이상하게 숨이 막혀 왔다.

그 기색을 눈치챈 문도하가 다시 그린 듯한 미소를 걸고 툭 그녀를 자극했다.

“그렇게 대범하게 유혹한 것 치곤, 용건이 너무 늦는데?”

“…….”

“이서윤.”

대답 없는 이서윤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문도하가 낮은 음성으로 그녀를 불렀다. 드문 서윤의 반응에 잠시 억누르고 있을 뿐, 그의 인내심은 길지 않았다. 그나마 그게 아니라면 여기까지 온 김에 서윤의 몸이나 받아 갈까 고민하고 있었을 게 뻔했다.

저의 부름에 어째서인지 서윤이 입술을 하얘지도록 깨무는 것이 보였다.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는 동작이라 무심코 인상을 찌푸린다. 붉은 수치심에 물든 그녀의 감정이 생생히 전해졌다. 빨간 유리알 같은 감각이었다.

“……굳이 그…것까진 안 해도 되잖아요.”

그들의 관계를 비밀에 부치려는 듯한 그의 태도에서, 서윤은 어쩔 수 없이 다시 희망을 붙잡고 말았다.

본능적으로 지금이 적기라는 판단이 들었다. 그저 헛된 희망이라 생각했으나 어쩌면 그걸 이룰 수 있는 마지막 순간일지도 모른다고. 그의 의중이 무엇인진 몰라도 지금이라면 그녀가 원하는 얼마간의 자유를 정말 요구할 수 있지 않을까.

비참하게도 이렇게 제 몸을 걸고 흥정을 해야 하는 게 무척이나 수치스러웠다. 사장이 제게 건넨 빳빳한 현금다발이 생각나서 서윤은 한층 입술을 사리물어야 했다. 차마 단어조차 제대로 입에 담지는 못하고 어정쩡하게 말했으나 문도하는 알아들은 눈치였다.

대체 어디까지 수치스러워야 할까.

결연한 서윤의 말에도 불구하고 문도하는 다시 비웃음을 입에 걸었다. 또 무슨 기특한 소리를 하려나 했더니 이번엔 영 거슬리는 요구가 아닐 수 없었다. 가증스럽게 배려라도 하듯 현관 앞에 머물러 주었더니 헛된 희망이라도 가진 걸까.

그런 서윤의 희망을 부수듯 문도하는 다시 성큼 걸음을 옮겼다. 볼품없는 방답게 단 두 걸음 만에 서윤은 궁지에 몰렸다. 이번엔 물결치듯 전해지는 두려움이 생생했다. 아마 이 방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는 거겠지.

역시 쓸데없는 저항을 조금 고분고분하게 만들 필요가 있을 것 같았다.

“사이좋게 손이라도 잡자는 말이야?”

“원래 가이딩의 기본은 손…부터라고….”

“그러기엔 내 상태가 썩 좋지 않은데 말이지. E급이라서 그런 것도 못 느끼는 건가?”

눈에 띄는 멸시에 서윤의 어깨가 절로 움츠러들었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곁으로 불쑥불쑥 다가오는 그가 무서웠다. 아무리 날을 세워 봐도 쉽사리 그녀의 경계를 파헤치는 그가 두려웠다.

서윤에게는 정말이지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자신이 그의 가이드라는 자각도, 그의 상태도. 그저 겉으로 드러나는 문도하의 상태를 보고 가늠해야 할 뿐이다. 혹시나 싶었던 첫날의 환청도 그 이후로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마치 가이드라면 응당 그런 걸 느껴야만 한다는 듯이 말하고 있었다. 가이딩에 관한 지식이 전혀 없었던 서윤이기에 그런 문도하의 말이 곧 정보였다. 어쩌면, 하고 어리석은 희망이 다시 솟아올랐다.

파르르 떨리는 한쪽 손을 다른 손으로 쥔 채 그녀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네, 전혀. …아…무래도 뭔가 착…각하신 건 아닐까요….”

“…….”

“역시 제가 그쪽 운…명이 아닌 것 같은데….”

그 순간 빠르게 움직인 문도하의 손이 그대로 서윤의 입을 콱 막아 왔다. 전혀 예기치 못한 동작에 서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흡…!”

“그런 말은, 하지 않도록 해.”

“으읍!”

“앞으로도. 알겠어?”

그저 그녀가 생각하는 순진한 발상은 이뤄질 일이 없다는 걸, 차근차근히 알려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예상외로 서윤은 꽤나 머리가 잘 돌아가는 듯 굴었으니까. 적당히 희망을 부수고 그다음엔 보상이라도 하듯 재물을 안겨 주면 이내 포기한 채 순응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운명을 거부하는 듯한 그녀의 발언이 들리는 순간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이 좁은 방에 단둘이 들어서는 순간에도 붙잡고 있던 자제심이 바닥나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당장이라도 헛소리를 내뱉는 입을 틀어막고 싶다는 충동만 거세게 들었다.

분명 이성을 잘 컨트롤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의아할 정도로 급격한 변화였다. 일전에도 그를 거부하던 서윤에게 이렇게 분노했던 기억이 났다.

사소한 의아함은 일단 밀어 둔 문도하가 얼굴이 잡혀 끌려오는 서윤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대답하라는 듯 계속 말없이. 서윤의 눈꺼풀이 퍽 놀란 듯 애처롭게도 흔들렸다.

한참을 반항하듯 몸을 뒤틀던 서윤이 소용없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제로 마주쳐진 눈동자가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좀 더 선연해진 서윤의 두려움이 그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아까 회의 때 느꼈던 타인의 두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생생함이었다.

비죽비죽 모난 두려움이 문도하의 가슴속을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촤르륵 소리를 내며 구르는 쇠 구슬처럼, 그것들은 한참 그의 가슴을 발판 삼아 널뛰었다. 그 무게감 때문일까, 어렴풋하게만 느껴지던 감정의 존재가 어쩐지 좀 더 뚜렷해진 것만 같았다.

대답을 들었음에도 맞닿은 접촉을 놓기가 힘들었다. 물기 어린 서윤의 눈가를 유심히 보던 문도하가 고개를 살짝 숙여 점막 근처를 핥았다. 움찔거리며 티가 나게 거부하는 움직임이 역시나 거슬렸다. 그걸 벌하듯 일부러 더 한참을 그렇게 그녀의 눈가를 핥았다.

그는 눈물이 흐를 듯 말 듯 하던 서윤의 눈가가 완전히 젖고 나서야 불시에 얼굴을 놔주었다. 슬픔은 미처 흐르지 않았으나 서윤은 이미 온통 울고 난 얼굴이 되었다.

“흐읍….”

그대로 스르륵 주저앉은 서윤이 반사적으로 제 얼굴을 마구 문지르며 닦아냈다. 온몸으로 거부감을 나타내는 그 동작에 문도하가 다시 차갑게 눈매를 굳혔다. 습관적으로 걸고 있던 미소도 때려치운 채로.

왜 이렇게 화가 나는가.

쇳소리를 내며 구르는 서윤의 두려움을 어린아이처럼 관찰하며 문도하는 고개를 기울였다. 자신의 격한 상태도, 이렇게 생경하게 거부감을 드러내는 서윤도 그에게는 온통 미지의 것이었다.

오늘은 본래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아니었다. 그저 경고를 하고, 가능하다면 가이딩도 좀 받고. 아주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서윤은 그에게 유용했기에 아껴 쓸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 곁에 있으면 계속 흉포한 본능만 남은 채 움직이게 되었다.

역시 가장 큰 원인은 자꾸만 그를 거부하는 서윤의 태도였다. 일반적인 가이드답지 않은 행동에 그의 본능이 거세게 반발하는 게 분명하다. 곰곰이 머리를 굴리고 나서야 적당한 원인이 떠오른다. 역시 첫 단추를 강제로 꿴 게 귀찮게 작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귀찮은 건 질색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는 언제라도 쉽게 쓸 수 있는 도구가 필요했다. 어르고 달랠 성가신 가이드가 아니라.

무너져 내린 서윤과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문도하도 느릿느릿 몸을 숙였다. 적당히 무릎을 굽힌 채 몸을 웅크리고 앉은 문도하가 고개를 숙인 서윤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제 몸이 떨린다는 자각은 있는지 서윤은 부질없게도 제 양손을 기도라도 하듯 맞잡고 있었다.

그러면 처음부터 조금 강하게 밟아 두면 되겠지.

“몸 사리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니, 내 가이드가 된 건 비밀로 해주지.”

“흑….”

어차피 문도하에게 필요한 일이었으나 그걸 서윤이 알 길도, 알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마치 은혜라도 베풀 듯 관대한 척 말을 꺼냈다. 그의 차가운 말에 얻어맞는 사람처럼 서윤은 계속 잘게 몸을 떨어 댔다.

울음소리가 비집고 나오는데도 서윤은 용케 울음을 참았다. 다만 덜덜 떨리는 몸까지는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다. 푹 숙인 고개를 못 드는 것도 여전했다.

그런 서윤의 여린 어깨 어림을 눈으로 훑던 문도하가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가이딩을 언제 어떻게 받을지는, 내가 결정해야지.”

“흡, 윽….”

“그 쓰레기 같은 등급 때문에, 네 에스퍼가 어떤 상태인지도 모르잖아. 안 그래?”

“그…건….”

숙인 고개 탓에 억눌린 서윤의 말이 들렸다. 기껏 눈높이까지 내려 주었건만, 땅을 향한 채 올라올 줄 모르는 서윤의 고개가 짜증이 났다. 훽 다시 손을 내밀어 그녀의 뒤통수를 잡았다. 억지로 끌어 올리듯 제게 당기자 그제야 답답하게 내려가 있던 서윤의 고개가 들렸다.

문도하를 이제야 올려다본 서윤의 눈매가 절망으로 까맣게 물들었다. 마주친 눈동자에서는 차가운 한기만 전해져 내려왔다. 철저하게 그녀를 도구로 바라보고 있는 포식자의 눈.

제멋대로 모든 걸 결정하는 그의 앞에서도 변변한 말 한마디 못한 서윤은 계속 입만 벙긋거리며 억울함을 토해내야 했다. 휘몰아치는 좌절과 수치가 날카롭게 부딪히며 그녀의 가슴을 헤집었다.

그걸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것인지 문도하가 입매를 굳힌다.

“대화를 할 땐 눈을 봐야지.”

“흡.”

시선이 맞닿자 한층 생생하게 느껴지는 그녀의 감정을 관찰하던 그는 홀린 듯 손을 뻗었다. 스르륵 다가간 손가락이 오래도록 그녀의 입술 끝에 머무른다. 차가운 피부가 하얗기까지 해서 이렇게 만지고 있으면 꼭 녹아내릴 것 같았다.

“가이딩의 기본은 점막 접촉이지. 살갗도 소용은 있지만 아무래도 점막만 한 게 없지.”

“그, 그래서요.”

“입 벌려 봐.”

고개를 기울이며 계속 그녀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문도하가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서윤의 얼굴에 두려움이 한층 진하게 내려앉았다. 그녀가 차마 거부의 말을 뱉기도 전에 문도하는 손가락을 그녀의 입에 쑤셔 넣었다.

“읍……!”

기습적으로 열린 입술을 오므리려 해봤으나 그의 손가락이 더 빨랐다. 두려움에 턱을 마구 다물었으나, 그녀의 이가 아프지도 않은지 단호한 침입이었다. 결국 턱이 크게 벌어지고 입가로는 침이 흘러내렸다. 억지로 벌어지며 긁힌 입술이 찢어졌는지 아팠다.

“뜨겁네…….”

손가락을 쑤셔 그녀의 입 안에 넣으니 점막이 촉촉하게 감겨 왔다. 언뜻언뜻 드러나는 그 축축한 동굴을 보고 있자니 서서히 이성보다는 본능이 앞으로 나오려 하고 있었다.

애원하듯 저를 올려다보는 서윤의 커다란 눈과 시선을 마주했다. 열심히 그녀의 입 안을 꾹꾹 누르던 문도하가 겨우 본능을 내리누르며 가만히 침묵했다. 그 행동에 서윤은 다시 멈칫거렸다.

그걸 신기하다는 듯 바라보던 문도하가 다시 예쁜 미소를 입에 걸었다. 그리고는 곧 그녀의 입 안에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혀를 꾸욱 누르며 존재감을 과시한다.

제 가이드에게, 다시는 거부하지 못하도록 확실하게.

두려움을 가득 담은 눈빛이 그를 향한 채 떨어지지 않았다. 그 끈끈한 두려움을 원래 제 것인 양 잡아챈 문도하가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묘한 만족감으로 엉망이 된 서윤의 얼굴을 감상했다.

그런 그의 집요한 눈길에 서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의 정염 어린 의도가 너무나도 명백했다. 붉은 구슬 같던 그녀의 수치심이 쨍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게 느껴졌다.

아름답게 흩어지는 그 구슬 조각들을 바라보며 문도하는 나른하게 웃었다.

“이게 네 역할이야.”

“흐윽……!”

“벌리랄 때 벌리는 거. 알아들었어?”

툭 성의 없게 얼굴을 놓아주며 말하자 펑펑 쏟아지는 서윤의 눈물이 끈적하게 얼굴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 감각을 소름 끼치도록 생생히 느껴야 하는 서윤의 수치심도 땅바닥으로 흩어졌다.

대답다운 대답은 나오지 않았고 서러운 울음소리만 방 안을 가득 메웠지만 문도하는 굳이 더 강요하지 않았다. 산산조각 난 그녀의 수치심이 절그럭 소리를 내며 계속 아름답게 흩어졌으니까.

여전히 단정한 모습인 문도하와는 다르게 서윤은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주저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가득 새긴 두려움이라는 제 흔적이 문도하는 퍽 마음에 들었다. 자비라도 베풀 듯 그녀의 볼을 부드럽게 감싸 다시 시선을 맞추게 했다.

그는 흠칫거리며 제 눈치를 살피는 서윤의 시선을 홀린 듯 마주했다. 일부러 한층 화사한 미소를 입에 걸었다. 자상하게 반대쪽 손도 들어 그녀의 찢어진 입술을 슬쩍 문지른다. 질척한 감각이 마치 엄지에 붙은 듯 늘어졌다. 상처 입은 피부가 애처롭게 파들거렸다.

그의 손짓, 눈짓 하나하나에 전부 반응하는 서윤의 상태가 퍽 마음에 들었다.

“잘 자.”

그녀의 눈이 다시 까맣게 물드는 걸 문도하는 즐겁게 바라보았다.

* *

“일본 파견이 확정되었다고 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조율하겠지만 일단 파견 자체는 확정입니다.”

국민 클랜의 소회의장에서 문도하는 권태로운 표정으로 의자에 기대 박남일 실장의 말을 들었다. 소회의장에는 문도하와 다른 고위 에스퍼 둘, 그리고 박남일 실장과 클랜의 중역들이 다 함께 모여 있었다. 국민 클랜 모든 실세의 모임이었다.

그는 무심코 한쪽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밤사이 활동하는 에스퍼들에게 맞춘 회의는 늦은 오후에 이뤄졌다. 서윤은 오늘 제대로 아르바이트에 갔을까.

혼이 쏙 빠진 것 같던 어제저녁의 모습을 생각하면, 어쩌면 그대로 방에 처박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실장은 그녀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파악하고 있을 테지만 문도하는 굳이 묻지 않았다. 만약 이상 행동을 보인다면 알아서 보고하겠지.

게다가 왜인지 자꾸만 그쪽으로 향하는 자신의 의식에 위기감이 느껴졌다. 마치 휘둘리기라도 할 것처럼.

문득 드는 제 생각을 문도하는 그대로 입꼬리를 올려 비웃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아닐 수 없었다. 휘둘릴 것이 두려웠다면 어제처럼 그렇게 휘두르지도 못했을 터다. 나름 농밀한 접촉이었던 탓에 정신에 낀 녹이 조금 사라진 기분이 들었으나 아직 제정신을 차리려면 멀은 모양이다.

그녀가 그대로 방에 처박혀 대외활동을 그만둔다면야, 문도하로서는 나쁠 것 없었다. 좀 더 서윤의 사정 봐줄 것 없이 이용할 수 있을 테니.

어쨌든 어제 그렇게 짓밟아 두었으니 이번엔 당근을 쥐여 줄 차례였다. 타인의 감정은 알지 못해도 그들의 이성을 조련하는 것엔 자신 있는 문도하였다.

머릿속으로는 그녀에게 필요할 법한 것들을 떠올리며 실장에게 질문을 던졌다.

“중국 측은?”

“중국 측에서도 파견 예정이라고 하지만 규모는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저 말은 이제 국민 클랜에서도 다수의 에스퍼를 파견하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다. 바닷길이 막힌 와중에도 에스퍼의 해외 파견은 왕왕 있었다. 특히나 한국의 경우 그 특수성을 살려 적극적으로 이렇게 파견을 보내는 상황이다. 어디까지나 협회와 클랜의 이해관계가 맞을 때의 얘기긴 했지만.

한국은 에스퍼와 가이드의 비율이 무척 높았다. 그것도 타국에 비교한다면 현저할 정도로. 거기다 역사에서 한 번도 좋게 작용한 적 없던 작은 영토가 이번에는 큰 메리트로 다가왔다. 많은 수의 에스퍼로 해안선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삼면이 바다라는 치명적인 어려움을 이겨낼 만큼.

그렇게 급한 재난을 넘고 나자 해외로 눈을 돌릴 틈이 생겼다. 게다가 다른 나라야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외면하기엔 바닷길이 막힌 단점이 컸다. 자급자족하기엔 한국은 영토가 작고 인구수도 적었다. 그러니 그저 홀로 살아남고자 한다면 머지않아 온 국민이 사이좋게 고사할 판이다.

여유가 생긴 한국은 이번엔 전략자원으로서의 에스퍼를 수출하기로 했다. 인재를 파견해 타국에 도움을 주고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도록.

이 과정에서 S급 에스퍼라는 문도하의 존재가 끼친 영향이 컸다. 안 그래도 에스퍼가 많은 나라에 웬만한 에스퍼 열 사람의 몫은 하는 그가 있었다. 협회로서는 무척이나 여유 있게 방어와 수출, 두 가지 이득을 다 꾀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협회와 문도하는 차근차근히 대립해 왔다. 협회로서는 이용해 먹기 좋은 어린 에스퍼가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이 불만이었을 것이다. 하나 어릴 적부터 웬만한 어른보다도 머리가 잘 돌아가던 문도하로서는 그런 협회의 도둑 같은 심보가 어처구니없을 뿐이었다.

바다가 막히긴 했으나 인류는 이전에도 하늘에 진출한 지 오래였다. 비용이 많이 들고 한 번에 옮길 수 있는 양이 적긴 했어도 곧 비행기를 통한 무역길이 다수 개척되었다. 여기에 육로로 연결된 철도가 가세하면서 국가 간 무역체계는 안정적으로 자리 잡았다.

“파견 명단은 나왔나?”

“그게…, 이번엔 일본 측에서 도하 님을 요청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의아하다는 음성으로 실장이 보고를 이어갔다. 그의 말에 중역들을 비롯한 모든 이가 의문을 띄웠다. 특유의 무감각한 표정으로 있는 건 문도하 혼자였다.

그의 해외 파견은 그가 각성한 초기부터 손에 꼽는 일이었다. 초유의 재난에 많은 나라가 그의 파견을 요청했으나 협회와 국민 클랜의 이해관계가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첨예한 대립 끝에도 꿈쩍 안 하는 그를 두고 협회는 표면적인 이유를 갖다 붙였다. S급이 최우선으로 국토 방어에 나서는 모습을 보여야 국민 정서가 안정적이라면서. 물론 진짜 이유는 그를 해외 수출 병기마냥 다루는 협회에 대한 국민 클랜의 반발이었다.

어쨌든 그 모든 대립도 그가 가이드 없는 고위험 에스퍼로 분류된 뒤로는 사그라들었다. 그 많던 파견 요청이 어느 순간 뚝 끊겼기 때문이다. 그의 능력을 이용하는 대가로 감당해야 할 위험이 지나치게 높아졌기 때문이리라.

“내막은?”

“처리 못 한 대형종이 있다는 이유라고 합니다.”

대형종은 분명 위협이었다. 몬스터의 종류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각 종류에서 이따금 튀어나오는 대형종은 꼭 성가신 능력까지 가지고 있었다. 대형종이 출몰하면 마치 그것을 따르듯 더 많은 수의 몬스터가 튀어나오는 것도 예사였다.

하지만 아무리 대형종이 처리가 어렵고, 또 몬스터가 육지에서 활동하는 시간이 늘어났다고 한들 이상한 일이었다. 협회의 말이 사실이어서 몬스터의 생존 시간이 늘었어도 어쨌든 이틀 안에 자연 소멸하게 되어있었다.

일본으로서는 이제 와서 문도하를 파견해 달라 요청하느니 차라리 구역을 폐쇄해 몬스터가 무너지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현실성 있었다.

그런데 굳이 문도하를 요청했다?

“헛소리군.”

물론 일본은 상황이 특히 개판이긴 했다. 일본 열도의 동쪽, 태평양에 자리 잡은 마리아나 해구에서 대형종이 심심치 않게 올라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마리아나 해구와 가까운 필리핀은 몬스터 웨이브 초기에 거의 궤멸 직전까지 갔었다. 최근에야 겨우겨우 국가가 정상화되었을 정도였다.

보통은 바닷속에 탐지기를 넣으면 몬스터를 낳는 균열이 관측된다. 처음 무작정 해안선을 모두 봉쇄한 것과는 달리, 이제는 이 균열을 파악해서 근처의 몬스터가 상륙하기 쉬운 해안을 위주로 거점 방어를 했다.

하지만 마리아나 해구는 이런 관측도 어려웠다. 본래 지나치게 깊어서 미지의 지역으로 남았던 곳이기도 하고, 해구에 다가갈수록 바닷속을 유영하고 있는 몬스터의 밀집도가 압도적으로 높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그 속에 지금까지와는 다른 커다란 균열이 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곤 했다. 어쩌면 해구 자체가 균열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대형종이 연달아 출몰하기라도 한 걸까요?”

“아니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공격 패턴 때문에 지역 봉쇄도 어려운 실정일 수도 있겠군요.”

“처리하고자 하는 대형종에 대한 정보가 같이 왔는가?”

“아니요.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 요구에 클랜의 중역들은 저마다 추측을 늘어놓았다. 이따금 실장에게 질문도 던져 가며 합리적인 토론을 개시해 갔다. 문도하는 그저 홀로 머리를 굴리며 그것을 잠자코 들었다.

그가 국민 클랜에 어쨌든 계속 발붙이고 있는 건 박남일 실장의 노력도 있었으나, 클랜의 중역들이 그렇게 병신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본래 사설 군사 조직으로 시작한 클랜답게 중역들은 대부분 은퇴한 군인이 주를 이뤘다. 덕분에 몬스터에 대응하는 에스퍼들에게 많은 도움을 주고 있었다.

“기축통화에서 엔화를 제외하자는 논의가 있다더군요.”

“흐음….”

“그것에 위기감을 느껴서 무리한 초청을 한 걸까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흠흠. …불안정한 선택이 아닐 수 없군요.”

그 불안정한 선택인 문도하를 흘긋 바라보았던 중역 하나가 헛기침을 했다. 백번 동의하는 바이기에 문도하는 그저 고개만 한 번 까딱하고 말았다. 그런데도 중역은 조금 불편해진 얼굴로 앉아 있던 자세를 바꾸었다. 오히려 그 모습이 더 거슬린다는 걸 모르는 걸까.

애써 신경을 끈 문도하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 제안이 정말 일본에서 요구한 것일지 의심스러워서.

현재 일본은 그야말로 수세에 몰려 있긴 했다. 일단 오키나와 일대는 방어를 포기한 지 오래였다. 그나마 홋카이도의 넓은 평야 덕에 자급자족 사정이 한국보다는 나았고, 부국이었던 과거 해외 곳곳에 투자했던 자산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니 아무리 좋게 말해도 그저 막대한 돈을 미끼로 에스퍼를 수입하다시피 하는 실정이었다. 그 와중에 기축통화로서의 신뢰 자체가 흔들릴 지경이라면 절실하긴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게 아니라, 중간에 낀 누군가의 농간이라면.

“그게 아니라면, 협회가 이상한 수작을 부리는군요.”

그런 문도하의 생각을 읽은 듯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강덕 이사였다.

문도하의 대외적인 클랜 직책도 이사였다. 본래는 클랜과 에스퍼의 계약관계였으나 추후 그의 영향력이 늘어남에 따라 이사로 추대되었다. 이 회의실에 같이 앉아 있는 에스퍼들은 다들 그런 식으로 이사 직함을 꿰찬 이들이었다.

국민 클랜의 초창기부터 함께 클랜을 성장시킨 에스퍼들은 그나마 문도하에 대해 유한 태도를 취했다. 그가 목숨을 구해준 것도 여러 번이었고, 오래 가까이 지내다 보니 저 태도에 그러려니 할 수 있게 된 탓도 컸다.

국민 클랜은 그 규모답게 많은 수의 이사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중 이강덕 이사는 일반인으로, 에스퍼 출신을 제외하고 가장 젊은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정확히 문도하의 속내를 꿰뚫는 듯한 발언에 그는 잠시 이강덕 이사에게 시선을 주었다.

웃는 낯으로 그 시선을 받아넘긴 이강덕 이사가 재차 좌중을 향해 의견을 피력한다.

“일단 비공식 채널로 이게 진짜 일본의 요청인지는 알아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흠. 외부의견이 들어갔을 가능성을 보는가?”

“네. 여러모로 수상한 요청이긴 하니까요.”

그의 의견은 충분히 일리가 있었다. 그간 협회에 당한 것이 너무 많았기에 중역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어 저마다 활용할 만한 끈이 있는지 떠올렸다.

게다가 실제로 일본의 요청이라도 문제긴 했다. 지금의 문도하는 그들의 계륵과도 같은 존재였다. 진짜 일본에 가겠다고 나서서, 하필 그곳에서 폭주라도 한다면 그 후폭풍은 어찌 감당한단 말인가. 단순한 시민 피해를 넘어서 국제 문제로까지 비화할 가능성이 컸다.

모두의 생각이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귀결되었는지 시선이 문도하에게 몰리기 시작했다. 그 시선을 유유히 받아넘기며 문도하는 입꼬리를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미치지 않고서야, 왜일까….”

이강덕 이사는 일단 의심이나 해 보자고 말을 꺼내긴 했으나, 문도하는 이 사안에 어떤 형식으로든 협회의 의견이 들어갔음을 느꼈다. 그의 본능이 속삭이듯 경고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에스퍼의 본능은 가끔 과학으로는 해석할 수 없는 영역의 일들을 벌이곤 했다.

하필 서윤과의 관계를 들켰을 때 벌어진 일이라 무척 공교로웠다. 혹여 그를 떠보기라도 하는 건가.

“어찌하실 겁니까?”

박남일 실장이 문도하의 의견을 물었다. 실무진인 그는 이 제안에 대해 어떻게든 회신을 보내야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건 어차피 문도하의 의견이리라.

나름 합리적인 국민 클랜은 이런 파견에 에스퍼의 의사를 철저하게 고려했다. 덧붙여 이곳의 대다수가 모르는 정보까지 머릿속에 담아 둔 실장에겐 이 사안이 더욱 꺼림칙했다. 그의 머리에도 서윤의 일이 스쳤기 때문이다. 우선은 문도하의 판단을 믿기로 했다.

“일본을 지도에서 완전히 지우고 싶은 거라면 직접 와서 말하라고 해.”

말을 전하라는 주체가 몹시 모호했다. 일본 정부인지 아니면 협회인지. 하지만 아무도 그 점을 지적하지 않았고, 오히려 문도하처럼 협회의 개입 가능성을 하나둘 머리에 떠올렸다.

중차대한 인류의 위기 앞에서 모든 이가 생각하는 것 같은 화합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히려 남을 밟고 올라 물에 빠지지 않으려는 원초적인 악의가 표면으로 드러났을 뿐. 생존이 걸린 문제 앞에서 권력을 탐하는 손길은 더욱 거셌다.

특히 몬스터의 습성과 초반부터 제대로 자리를 잡은 클랜 때문에 국가의 권위를 점점 잃어 가는 협회는 아등바등이었다. 어떻게든 가지고 있는 힘을 잃지 않기 위해 에스퍼를 소모품으로 쓰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때문에 그 몸부림에 제일 많은 피해를 받는 건 이들 같은 클랜과 에스퍼였다. 클랜과 협회의 사이가 점점 어긋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아니면 어차피 터질 폭탄을 외부에서 터트릴 작정인가 보지.”

잠시 머리를 굴리던 문도하가 불안정한 자신의 상태를 일부러 더 상기시켰다. 가이드가 없다는 사실을 부각해 적당히 연막을 칠 생각이었다. 비교적 믿을 만한 인물들이 모여 있는 회의장이라도 문도하는 긴장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은 믿어도 이곳에서 이야기가 새어나가지 않길 바라는 건 지나치게 순진한 발상이다.

그의 지적에 에스퍼 출신 이사를 제외한 이들의 낯빛이 미미하게 어두워졌다. 당장 문도하가 폭주라도 한다면 꼼짝없이 죽은 목숨인 것을 굳이 떠올리게 되었으니까. 그나마 그와 오래 지낸 이들이라 덤덤하게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잠시간의 침묵을 뒤로하고 회의를 주최했던 전무가 어두운 음색으로 말했다. 집에 두고 온 자식들이 아른거린다는 얼굴이었다.

“…클랜 차원에서 일단 자세한 내막을 알아보겠습니다.”

“그래.”

“흠흠. 그럼 오늘 회의는 이 정도로 하죠.”

그의 폐회 선언에 다들 안 그런 척 바쁘게 발을 놀려 밖으로 사라졌다. 실장을 제외하면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은 아까 문도하의 의중을 읽듯 행동했던 이강덕 이사였다.

야심이 큰 것인지, 아니면 간이 홀로 특급 사이즈를 자랑하는지 평소에도 그는 스스럼없이 문도하에게 말을 걸곤 했다. 어쩌면 비교적 늦게 국민 클랜에 합류한 탓에 심각성을 모르는 걸 수도 있겠다.

막 이사로 임명되었을 때 악수를 청하던 그 모습이 생생했다. 새롭게 유행하는 자살 방법인가 싶어서 무시했으나 그 뒤로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잘도 들러붙었다.

그러면서 박남일 실장에게 특훈이라도 받은 것인지, 아직까진 그럭저럭 덜 거슬리게 그의 주변을 맴도는 인간 중 하나였다.

“요새 만나시는 분이 있다지요?”

“…….”

“연애는 딱히 안 하시는 줄 알았는데요.”

“신경 꺼.”

야심이 큰 쪽이었던가. 제가 가진 정보망을 가릴 생각도 안 하는 그 대범한 태도에 문도하가 나른하게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다른 이사들에 비하면 경력이 짧은데도 수완이 대단한 모양이었다. 어쩌면 그걸 과시하고 싶었는지도.

어느 쪽이든, 일단 그는 딱히 부정하지 않았다. 멋대로 오해하고 소문이 나 주면 나쁠 것도 없을 터.

조금 이른 느낌은 있었으나 언젠가는 생길 일이라고 예상한 범위였다. 그에게 아부할 수 있는 수단이 하나 더 생겼다는 소식이 그를 퍽 귀찮게 할 것이라는 점도 충분히 예상했다. 그러니 계획대로 문도하는 그저 애매모호한 태도를 보여 주면 될 일이었다. 가이드를 대하는 에스퍼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도록.

분명 그럴 텐데.

왜 다른 이의 입에서 이서윤에 대한 정보가 나오니 기분이 나쁠까.

쓸데없는 감상을 이성으로 눌러 버렸다. 강제로 억눌린 그 감정은 웅크리듯 다시 깊은 심층으로 가라앉는다. 요새 들어 자꾸 제멋대로 행동하려는 본능 때문에 문도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가이드를 찾은 건 분명 좋은 일인데, 어째 자꾸 예상 밖의 일이 벌어지는 것이 탐탁지가 않았다.

조만간 해결책을 찾아야 할 것 같았다. 이서윤을 어찌해야 이게 나아질까.

그의 기분이 묘하게 나빠진 것을 깨달았는지 실장과 이사는 바람처럼 인사를 건네고는 회의실 밖으로 나갔다. 좀 더 길게 의자에 기대는 것으로 문도하는 그들을 일별했다.

앉은 자리에서 다시 무료하게 바라본 창밖에는 여전히 녹슨 세상이 있었다. 그는 이 지긋지긋한 풍광을 조금은 여유로운 마음으로 감상했다. 어쩌면 앞으로는 볼 일 없을 세상일지도 모르니까.

이상하게 손바닥에 서윤의 감촉이 남아 있는 듯했다. 그 매끄러운 살결이나 찢어진 입술의 감촉이 선명했다. 저를 필사적으로 두드리던 발버둥이 가슴 깊은 곳을 둔중하게 울렸다. 한 손에 들어오던 따뜻한 목덜미, 잡티 없는 하얀 얼굴.

이서윤에 관한 것들이 무작위로 그를 훑고 지나갔다. 깨져 버린 그녀의 수치심도, 점점 더 그 무게감을 키워 가는 두려움도.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고 관찰하면서 문도하는 묘한 감상에 빠졌다.

익숙하지 않았다. 휘둘리는 듯한 불편함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불쾌하진 않았다. 애초에 이서윤에 관한 것은 대부분 그랬다. 그를 거슬리게 하지 않았다. 그 작은 입술에서 그를 거부하는 말을 내뱉지 않는 한.

홀린 듯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문도하는 한참을 그렇게 사색에 빠졌다. 이러고 있으면 서윤의 손이 그 위에 올라오기라도 할 것처럼.

* *

“서윤아,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거지?”

“아니….”

자신이 생각해도 신빙성이 없는 어투였다. 어김없이 돌아온 아르바이트 시간, 그녀보다 조금 늦게 출근한 강하나가 서윤을 보자마자 말을 건넸다. 엉망인 그녀의 얼굴을 도무지 모른 척할 수가 없다는 듯이.

서윤은 습관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가 아픔에 눈가를 찡그렸다. 하필 어제 찢어진 부분이었다. 그걸 보고 불쑥 다가온 강하나가 걱정스레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그 눈동자에 담긴 걱정이라는 감정이 영 낯설었다.

“…내가 꼭 도움이 되진 않을 수도 있지만…, 너무 혼자서 그러진 않았으면 좋겠어.”

“…….”

“정 힘들면 경찰의 도움도 있고….”

“아니, 괜찮아.”

경찰이라니 안 될 말이었다. 그녀가 경찰에 신고하는 순간 문도하가 도대체 어찌 나올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어떤 반응이든 강하나의 기대처럼 그녀에게 도움 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리라.

심지어 에스퍼에 의존하는 사회 체제로 바뀌어 가면서 가이드를 대하는 사회의 시선이 조금씩 변화하고 있었다. 가이드를 에스퍼의 소유물로 보는 듯한 태도가 점점 사회적 문제로 부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과연 진지하게 그녀를 위해 노력해 줄지 의심스러웠다.

행여 그 S급 에스퍼의 가이드가 도망이라도 치려고 든다면 다들 대체 어떤 반응일지 갈피가 안 잡혔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이후로 그녀를 보듬은 적이 한 번도 없었던 세상이었다. 그들의 무자비한 시선이 날카롭게 그녀를 찢어발길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급해서 저도 모르게 강하나의 말을 끊어 내듯 가로막은 서윤이 그제야 제 행동을 깨닫고 어깨를 조금 움츠렸다. 같은 아르바이트생들 중에서는 그래도 살갑게 인사해 주던 사람이었는데. 기껏 위로를 건네는 지금 매몰차게 대했으니 분명 이런 걱정도 끝이겠지.

하지만 눈치 보듯 강하나의 얼굴을 살피자 그 얼굴에는 한층 깊어진 걱정만 드리워져 있었다. 의아할 정도로.

심지어 그녀의 태도를 어떻게 해석한 것인지 강하나가 조심스레 서윤의 어깨를 잡아 왔다.

“내가…. 서윤아….”

“응…?”

“…아냐. 말하기 어려운 것 알아.”

“…어….”

“나중에 털어놓을 사람이 필요하면 나한테 연락해. 알았지?”

그러면서 강하나는 제 휴대전화 번호를 서윤에게 건네주었다. 핸드폰에 입력된 그녀의 번호를 보면서 서윤은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친구의 번호를 저장한 게 대체 얼마 만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서윤이 무작정 도망친 후, 삼촌은 그녀를 집요하게도 추격했다. 그래서 그녀에겐 같이 학교에 다녔던 친구가 아무도 남지 않았다. 서윤에겐 어떻게든 간직하고 싶은 인연이었으나 삼촌의 패악질에 다들 그녀를 멀리했기 때문이다. 친구들이 행여 그녀와 연락하지는 않는지, 삼촌은 부끄러움도 모르고 그들을 닦달하곤 했다.

그녀도 친구들이 어쩔 수 없었음을 이해한다. 그래도 힘들 때는 연락을 하거나 같이 맛있는 밥이라도 먹으러 갈 친구 하나 없는 삶에 사무쳤다.

그럴 때면 어쩔 수 없이 그녀가 강제로 놓고 와야 했던 인연들이 생각났다. 한때는 같이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떠들던 친구들이, 삼촌의 학대를 받고 울적하게 학교에 가면 위로해 주던 그들이.

그래서일까, 강하나의 동정에 불과한 행동에도 가슴이 먹먹해져 입술의 쓰라림을 조금 잊을 수 있었다.

“응……. 고마워.”

그래서 혹여 강하나가 말려들까 봐 밀어내던 서윤은 이내 맥빠진 소리로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번호만 간직하고, 연락만 안 하면 되겠지. 아무리 문도하라도 서윤이 쓸데없는 연락만 하지 않는다면 그녀의 핸드폰 내용까지 굳이 신경 쓰진 않을 테니.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서윤의 어깨를 다시 토닥여 준 강하나가 바쁘게 유니폼을 갈아입으러 갔다. 그녀의 표정을 보고 일부러 자리를 피해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어쨌든 그 온기 덕에 서윤은 비틀거리는 다리를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다시 변함없는 하루가 흘러갔다.

서윤과 강하나의 아르바이트 시간은 조금 달랐으나 요일은 늘 같았다. 일단 강하나가 출근만 한다면 서윤은 퇴근까지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을 옆에 두고 일할 수 있었다. 그 사실 하나에 못내 위안받는 자신을 서윤은 뼈아프게 발견했다.

오늘은 운 좋게도 사장이 보이지 않았다. 가게를 살뜰히 관리하긴 하지만 자리를 비우는 때가 많은 사장이었다. 앞으로도 이렇게 마주치지 않을 수만 있다면 참 좋을 텐데.

부질없다는 걸 알면서도 현실 도피를 하면서 서윤은 더 바쁘게 몸을 움직였다. 어쩔 수 없이 공백이 생길 때는 계속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멍하니 매만졌다. 고작 번호 하나 저장했다고 세상과 다시 연결된 것만 같았으니까.

어쨌든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을 죽여 가며 서윤은 기운을 차려 갔다. 어제 있었던 일은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았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무언가가 부서질 것만 같아서. 그저 어깨에 남은 타인의 온정에 기대어 필사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래, 마냥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여태 강하게 살아왔으니, 자신이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으리라 믿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더랬다.

“서윤 씨, 생각 좀 잘 해봤나?”

퇴근을 위해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오자 사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서윤의 퇴근 시간을 맞춰 가게에 돌아온 듯한 행동이었다. 게다가 바로 어제 그렇게 미친 제안을 해 놓고 뻔뻔하게도 굴었다. 그녀에게 퍽 여유롭게 시간을 줬다는 듯이. 그 사소한 태도 하나하나가 전부 소름 끼치기만 했다.

잠깐 말을 잃고 얼어붙은 사이, 가까이 다가온 사장이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은근히 매만지며 쓸어 대는 손길이 마치 차가운 뱀 같았다. 그 더러운 손짓 한 번에 강하나가 겨우 불어 넣어 준 온기가 힘없이 증발해 버린다. 분할 정도로 어이없이.

저도 모르게 그 손길을 강하게 쳐낸 서윤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사장의 표정이 험악하게 일그러졌지만 애써 눈매에 힘을 주며 맞섰다. 하지만 허망하게 흩어진 온기에 대한 분노와 당황이 그녀를 비틀거리게 했다. 애써 외면하고 있던 자신의 나약함에 금방이라도 주저앉을 것만 같아 속이 울렁거린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사장이 입을 열었다가 주변을 흘긋 둘러본다. 탈의실이 있는 식당의 안쪽 공간, 아르바이트생들이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상하게 구는 듯 보이는 서윤을.

강하나는 홀에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서윤은 그들의 무감각한 시선에 날카롭게 찔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동시에 머릿속에서는 저 모든 시선을 합친 것보다 강렬했던 문도하의 두 눈이 떠올랐다.

그래, 그녀의 인생은 충분히 괴로웠다. 저항할 수 없는 상대는 문도하 하나로도 충분했단 말이다. 더는 그녀를 짓밟을 인간들을 늘릴 수 없었다.

“분명 싫다고 말씀드렸어요.”

말끝이 파르르 떨리긴 했으나 끝까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나 사장의 얼굴을 다시 쳐다보는 건 역시 무서워서 그대로 빠르게 등을 돌렸다. 인사도 잊은 채 뛰쳐나와 그저 하염없이 달렸다. 도망이라도 치듯이.

아주 잠깐 이어졌던 용기가 툭 하고 끊긴 기분이 들었다.

* *

집으로 가는 길 도중에 있는 공중화장실에서 서윤은 결국 허리를 꺾은 채 구토를 하고 말았다. 목으로 뭔가를 넘길 수가 없어서 굶은 덕에 속에서는 신물만 조금 올라왔다. 그런데도 울렁이는 속이 도무지 진정되지 않는다.

모두가 떠난 바닷가 주택단지의 공원에는 폐허처럼 허물어져 가는 운동 기구만 몇 개 남아 있을 뿐이었다. 본래 반듯했을 공터에는 볼품없는 잡초가 무성히 자라 허무함을 메우고 있었다. 잔뜩 녹슬어 방치된 그 물체들이 꼭 자기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서윤은 무심히 생각했다.

그 곁에 마찬가지로 방치된 공중화장실은 오랫동안 관리되지 않은 화장실 특유의 더러운 냄새가 가득했다. 서윤은 그 냄새가 제 어깨에 진득이 붙어 따라온 건 아닌지 의심해야 했다. 손을 닦고 닦아도 올라오는 역한 냄새가 그녀를 자꾸만 어지럽게 했다.

입을 적당히 헹구고 겨우 고개를 들었다. 녹슨 거울 속에 비치는 창백한 얼굴이 허망한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

입술이 터져 부어오른 얼굴은 피로를 가득 머금고 있다. 어제 한숨도 못 잤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입 안을 헹구고 또 헹구어도 그녀에게 벌어진 일까지 지워지진 않았다. 새벽에야 그것을 겨우 인정한 서윤은 그때부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야 했다. 그녀가 막을 수 없는 공포가 언제든 다시 돌아올 것 같아서.

지긋지긋했다, 모든 것이.

제 입에 난폭하게 손가락을 욱여넣던 문도하를 떠올리면 그저 눈을 감은 채 다시 뜨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리 눈을 감고 있어도 잠들 수 없었다. 안락한 잠으로의 도피마저 그녀에겐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까만 좌절에 잠긴 채 한없이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것이다. 이대로 다 끝나 버렸으면 하고.

아직 살아 있는 그녀의 본능이 즉각 반발한다. 이렇게 살고 싶지 않노라고. 이대로 스러지고 싶지 않노라고. 하지만 그런 본능의 발버둥은 까만 좌절에서 허우적대며 가라앉을 뿐이다. 끝도 없이 아래로.

왜 나에게는 이런 일만 일어나는 걸까.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교묘하게 그녀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가는 사장의 쓰레기 같은 행동도,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를 팔아 치울 생각만 하던 삼촌도, 그리고 차갑게 물건 보듯 자신을 대하는 문도하도.

그중 문도하의 등장은 그야말로 재앙이었다. 몬스터가 처음 나타난 15년 전의 세상처럼 서윤의 모든 것을 완전히 뒤바뀌어 버렸으니까.

아무것도 없는 어린아이 때도 삼촌의 마수에서 도망칠 수 있었던 영특한 서윤이다. 그런 그녀에게, 처음부터 도망칠 수 없는 문도하의 존재는 숨 막히는 거대한 족쇄와도 같았다.

차라리 문도하의 재산이라도 탐내 가며 방탕하게 살아볼까, 다른 가이드들처럼. 모든 것을 포기하고 얌전히 흘러 다니는 생활을 해 볼까. 분명 몸만은 편할 것이다. 더 이상 몬스터가 나타날까 봐 무서운 동네에 살지 않아도 되리라.

하지만 서윤은 이 생각을 단번에 비웃었다. 자신이 절대 그렇게 할 수 있는 인간이 아니라는 걸 잘 알았으니까.

애초에 서윤이 그렇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이런 바닷가 근처에 있는 집에서 생활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그녀가 가진 것들을 무기 삼아 좀 더 쉬운 길을 찾았을 것이다. 미련하게 아등바등 일해 입에 풀칠을 하느니 남에게서 빼앗고, 자기 자신을 거래 대상으로 삼았을 터. 거기에 등급이 낮기는 해도 가이드인 점도 좀 더 활발하게 이용했을 것이다. 그저 안락함을 위해서.

하지만 그녀는 그러질 못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스스로가 너무 소중했기에.

잠시 고개를 숙인 채 이율배반적인 제 속내를 비웃던 서윤이 이내 몸을 바로 폈다. 뻣뻣하게 보일지라도 곧게 몸을 펴야 먼 곳을 볼 수 있는 법이었으니까.

게다가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 먹었다. 어린 나이부터 변변찮은 보호막 하나 없이 내동댕이쳐졌던 서윤은 그 비정한 민낯을 너무 잘 알았다. 그러니 서윤이 설령 지금과 다른 상황이었어도 위기는 찾아왔으리라.

하지만 이렇게 커다란 절망이 또 있을까?

불쑥 올라오는 의문을 애써 외면했다. 이미 비틀거릴 대로 비틀거리는 걸음걸이였다. 문도하의 존재에 너무 집중하면 지금 당장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너무 큰 좌절에 허덕이는 자신을 가엾게 여기며 서윤은 스스로에게 말미를 주었다. 조금쯤 그의 생각에서 도망칠 수 있는 시간을.

터덜터덜 집으로 향한다. 발끝에 스치는 잡초들의 감촉이 거칠었다. 즈려밟혀도 다시 고개를 드는 그 잡초를 보며 서윤은 이상하게 위안을 얻었다.

화장실에서 시간을 지체한 탓에 등 뒤로 석양이 길게 존재감을 드리웠다. 서둘러 돌아가야 할 것 같아 절로 마음이 급해졌다. 하지만 두 다리의 속도는 그다지 빨라지지 않았다. 이 걸음의 끝에 또 문도하가 기다리고 있을까 봐 무서워서. 그렇다고 뒤돌아 다른 곳을 향해 가기에는 그 후폭풍이 더 두려웠다.

반사적으로 주머니 속의 핸드폰을 더듬던 서윤이 흠칫 놀라 손을 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강하나를 이런 곳에 끌어들일 수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자신에게 아낌없이 동정을 부어 주는 착한 아이였다. 끌어들여서는 안 된다고 서윤은 엄하게 다짐했다.

그렇게 땅을 쳐다보며 집으로 향하자 그녀의 방으로 향하는 철제 계단이 보였다. 긴장감으로 침을 삼키며 주변을 둘러봤지만, 오늘은 다행히도 문도하가 보이질 않는다.

“아….”

안도의 탄식이 저도 모르게 나왔다. 아주 잠깐은 숨 돌릴 틈이 있을 것 같아서.

그 때였다. 방으로 들어서려던 서윤의 뒤에서 누군가가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십니까.”

하필 안도하고 있을 때 들린 낯선 음성에 서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아, 제가 놀라게 해 드렸군요. 좋은 하루 보내셨습니까.”

“…….”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서윤은 새롭게 등장한 인물을 바라보았다. 이 동네에 이사 온 지 몇 달이나 지났지만 사람을 마주친 적은 손에 꼽았다. 이웃의 존재를 어렴풋이 깨달을 정도로만 사람들을 마주쳤고, 그마저도 살가운 인사는 생략되어 있었다. 이런 곳에 사는 이들에게는 타인에게 관심을 할애할 만한 에너지가 얼마 없었으니까.

사람 좋은 낯을 한 중년 남자를 보면서 서윤은 한층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그런 그녀의 기색을 깨달은 것인지 남자가 품 안 가득히 들고 있던 종이 뭉치에서 한 장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하하. 저는 이런 곳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아….”

선한 웃음을 가면처럼 걸고 있는 남자의 손에는 어딘가 익숙한 하얀 종이가 들려 있었다.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그것을 받아 든 서윤이 그 익숙함의 이유를 깨달았다. 매번 그녀의 우편함에 꽂혀 있던 사이비 교단의 전단지였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해 보이십니다.”

“…….”

“괜찮습니다. 누구에게나 말 못 할 고민은 있는 법이죠.”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남자는 싫은 기색 하나 없이 말을 이었다. 이런 사람들의 경계가 무척이나 익숙하다는 듯이. 그 행동을 보며 서윤은 맥이 탁 풀렸다. 많이 놀라긴 했으나 딱히 화가 나지는 않았다. 그저 최악의 하루에 어울리는 마무리라고 생각했을 뿐.

다만 걱정되는 건 그들이 하필 대화를 나누게 된 곳의 위치였다. 사람 좋은 낯을 하고 있지만, 애초에 사이비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었다. 하필 그녀의 집 바로 앞에서 마주쳤다는 점이 다소 찜찜했다.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을 들킬 것만 같아서.

다시 산책이라도 하듯 밖으로 나갔다 와야 할까 생각하면서 서윤은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잠시 물끄러미 쳐다보던 사이비가 재차 입을 열었다.

“교단에 정신을 의탁하시면 평안이 올 겁니다. 자매님.”

“교단….”

“네. 그럼 좋은 의탁 되십시오.”

그렇게 대화를 마무리한 중년 남자는 미련 없이 등 돌려 떠났다. 그녀의 경계심을 읽기라도 한 듯이. 사이비 아니랄까 봐 무척이나 이상한 인사였다. 정신의 의탁이라니, 수상함을 가릴 생각도 하지 않는 이상한 단어가 아닌가.

어쨌든 자신이 집에 들어가기 전에 자리를 비켜 주었기에 서윤은 안도하며 손을 내려다보았다. 손에 들린 건 매번 보던 전단지와 같은 종이였다. 이해 안 가는 선전 문구와 말도 안 되는 맹목적 믿음을 강요하는 전형적인 사이비.

제 얼굴에서 불행이 티가 나는 것일까. 그래서인지 별것이 다 달라붙는다는 냉소적인 생각이 스친다.

그렇게 전단지를 그대로 우편함 아래의 박스에 버리던 서윤이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방금 중년 남자가 전단지를 잔뜩 들고 나타난 것과는 다르게 우편함에는 이 하얀 선전 종이가 하나도 꽂혀 있지 않았다.

“…….”

잠깐 우편함을 먹먹하게 바라보던 서윤이 고개를 흔들었다. 아무래도 지금 신경이 무척 날카로워서 그런 게 틀림없었다. 모든 것이 다 이상해 보이는 것을 보면.

기묘한 위화감을 점점이 털어 버리면서 서윤은 방으로 향했다. 아주 잠깐 허락된 휴식을 향해서.

* *

“사이비?”

“네. …아마도 근처에서 활동하는 단체인 듯합니다만….”

“…….”

“일단 방금 들어온 소식이라 자세한 조사는 아직입니다.”

핸드폰으로 뭔가를 급히 보고 받은 박남일 실장이 그에게 다가와 조용히 보고를 올렸다. 서윤이 누군가와 접촉했다는 내용에 아주 잠깐 문도하의 손끝이 멈췄다. 그 자신조차 영문 모를 미약한 반응에 잠깐 입을 다물었던 그는 이내 실장에게 눈짓했다. 계속 말하라는 듯이.

그의 보고에 따르면 접촉한 인물은 사이비 교단의 전도사라는 모양이었다. 한 번도 고려한 적 없는 단어에 일단 의심부터 들었다. 누군가가 사이비를 빙자해 그녀에게 접촉한 것은 아닐까.

충분히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하나 한편으로는 정말 사이비 교단이 우연히 그녀에게 접근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었다. 지금 세계는 바야흐로 비이성이 자제력을 잃고 날뛰는 중이었으니까.

일반적인 물리 법칙을 무시하는 몬스터가 등장한 이래로 세계 곳곳에서는 이런 사이비 교단이 성행했다. 기존의 종교가 몰락한 건 순식간이었다. 무자비한 몬스터의 이빨 앞에서는 그들이 외치던 구원이 없었기 때문이다.

세계 종말론이 당연한 상식처럼 돌아다녔다. 몬스터가 하필 바다의 균열에서 기어 올라오는 바람에 지구 공동설이 다시 유행했다.

기존에 인류가 쌓아 올린 집단 지성과 이성, 과학의 성과들은 죽음의 공포 앞에서 민들레 씨앗보다도 가볍게 날려 사라졌다. 특히 몬스터에게 기본의 재래식 무기가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을 본 후로 이런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한술 더 떠서 지금 세계를 구하며 유지하고 있는 것도 에스퍼였다. 에스퍼를 대상으로 대놓고 실험을 할 수 없는 탓에 그 힘의 근원이나 작동 원리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에 가까웠다.

그러니 인류는 그간 당연한 지식의 근간으로 삼았던 ‘과학’으로 에스퍼와 가이드의 존재를 설명할 수 없었다. 판타지 소설에서나 봤던 초능력이 도래한 세상에서는 그 어느 것도 이제 이상하지 않았다.

최근에는 이렇게 준동했던 사이비 집단 몇몇이 살아남아 정식 종교의 자리를 꿰차려 하고 있었다. 한낱 사이비로 싸잡아 부르기에는 그 세가 너무 커진 탓이다.

그들이 내거는 그럴싸한 위안과 구호 물품, 그리고 구원을 약속하는 사탕발림에 나약한 인간의 정신은 쉽사리 현혹되었다. 어떤 사이비에서는 에스퍼를 신의 대리인으로 규정하고 숭배하기도 했다.

그러니 서윤이 사는 쓰레기 같은 동네에서, 그곳에 사는 쓰레기 같은 인간들을 현혹하기 위해 사이비가 돌아다니는 건 사실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연스러울 정도로 어울리는 조합이다.

이상한 일이 분명 아닌데, 왜 이렇게 기분이 더럽지.

“알아봐.”

“네.”

문득 급속도로 가라앉은 기분 때문에 차갑게 명령이 나갔다. 눈치를 잘 보는 실장답게 기합이 들어간 대답이 돌아온다.

그런 쓰레기 같은 것들이 함부로 서윤에게 접근하다니. 물론 티 나게 그녀를 끼고돌 생각은 없었다. 다른 머저리 에스퍼들처럼 그녀의 처지를 긴밀하게 고려하고 싶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쓰레기들이 제 것의 곁을 맴도는 게 유쾌할 리 없었다. 분명 그 점이 신경 쓰인 탓이리라.

그따위 동네에 살고 있긴 하지만, 서윤은 차라리 그 악취 나는 갯벌에 묻혀 있는 진주에 가까웠다. 어쨌든 그에게는 쓸모가 있었으니 말이다.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가 그의 이성을 다독였다.

“지금은 어디 있지?”

“자택에 계신 것으로 파악됩니다.”

주어가 빠진 물음에도 박남일 실장은 눈치껏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주었다.

서윤의 자택이라는 소리에 다시 그 작은 방이 떠올랐다. 혼자 살기에도 작고 낡은 쓰레기 같은 방. 허술한 그곳의 정광을 떠올리던 문도하는 혀를 찼다. 그 위험한 동네에서도 특히 보안에 취약한 곳을 잘도 골라 들어갔다 싶을 정도였으니까.

계속 신경 쓰이게 두는 것보다는, 조만간 그 쓰레기 같은 동네에서 서윤을 빼 와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협회의 장담대로 몬스터의 침식 범위가 늘어났다면 정말 귀찮은 일이 벌어질지도 모를 테니까.

다만 서윤의 거처를 옮기는 것이 예상보다 조금 이르다는 판단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이 관계를 숨기기로 한 후로 문도하는 철저하게 서윤에게 들일 시간과 공을 계획했다.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무관심을 바탕으로.

그러니 과연 지금 서윤을 빼내 오는 것이 좋은 선택일까.

화려한 보석들이 줄지어 놓여 있는 투명한 유리관을 문도하의 검지가 톡톡 두드렸다. 생각에 깊게 잠긴 듯이.

“계속 물건을 보여드려도 될까요?”

보석상의 나지막한 물음에 문도하는 오만하게 고개만 한 번 끄덕였다.

일단은 볼일부터 마치고 자세한 보고를 듣는 편이 효율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광대놀음을 또 하고 싶진 않았으니까.

그는 지금 서윤에게 줄 물건을 사러 이곳에 와 있었다.

거세게 한 번 밟아 두었으니 이번엔 당근을 줄 차례였다. 보상 차원에서 값진 물질을 안겨 반항적인 그녀를 고분고분하게 할 작정이었다. 그가 아는 인간 대부분은 이 두 가지 방법이면 쉽게도 무너져 내렸다.

특히나 서윤처럼 금전적으로 곤궁한 상태라면 이런 보상에 하염없이 구부러질 터다. 그녀에겐 물론 달갑지 않은 보상이겠지만, 곤궁 앞에서 인간은 쉽게도 자기 자신을 죽이곤 했다. 문도하는 정확히 그런 순종적인 모습을 서윤에게 바랐다.

사실 그녀의 상황을 본다면 가장 좋은 물질적 보상은 현금일 터다. 그러니 오늘 굳이 이렇게 행적을 흘리며 보석상을 찾은 건 보여주기식의 행동에 가까웠다. 그저 평범하게 여자에게 빠진 듯한 모습을 주변에 보이고 싶었으니까.

잠깐 저도 모르게 초조해졌던 마음이 일시에 가라앉았다. 그래, 이러니 서윤의 거처를 옮기는 건 원래대로 시간을 두고 판단하는 것이 좋겠다. 지금 그녀를 안전한 곳으로 옮기려는 그의 행동은 가이드를 대하는 에스퍼로 보일 가능성이 컸다.

에스퍼들은 가이드의 말에 죽고 못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으나 그들이 타협하지 않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바로 가이드의 안전이었다. 에스퍼라면 일단은 제 가이드를 안전한 곳에 가져다 두질 못해 안달이곤 했다. 문도하는 그런 머저리 같은 행동을 고스란히 답습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그걸 알기에 보석상까지 친히 찾아온 것이 아니던가. 다시금 드는 합리적인 판단에 문도하는 다시 결정을 다잡았다.

그의 의도를 모르는 박남일 실장은, 어쨌든 안 하던 행동을 하는 문도하 때문에 무척이나 혼란스러운 얼굴로 그의 일정에 동행하고 있었다. 대체 서윤을 어떤 인물로 파악해야 하는지 갈피를 영 못 잡는 눈치다.

하지만 아직은 실장에게도 그녀가 그의 가이드라는 사실은 비밀로 할 예정이다. 가장 측근이라 할 수 있는 그가 문도하의 의도대로 서윤을 판단하는 편이 적을 속이기 더 쉬울 테니.

“이쪽에는 반지 계열이 있습니다. 혹여 서로 나눠 끼실 것을 찾으십니까?”

“아니.”

“그럼 여성분이 단독으로 착용하는 물건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보석상은 한참 동안 이런저런 반지들을 꺼내 들며 문도하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하지만 평생 이런 것에는 관심도 두지 않았던 문도하는 적당히 그 말을 흘리며 가늠할 뿐이다. 이 바보짓을 얼마나 해야 널리 널리 소문이 퍼질까 하고.

그러다 문득 그의 시선을 잡아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단독으로 전시된 목걸이였다. 목걸이가 걸려 있는 곳을 환하게 비추는 조명이 찬란하게 아름다움을 흩뿌렸다.

정확히는 그 목걸이 중앙에 자그마하게 박힌 빨간 보석이 그의 시선을 끌었다.

“저건 뭐지?”

“아. 이쪽으로 와주시겠습니까?”

보석상의 인도에 따라 그 단독 케이스 앞으로 간 문도하는 가까이에서 본 목걸이에 더욱 시선을 빼앗겼다.

빨간 보석을 보니 어쩐지 이서윤이 생각났다.

“가운데 붉은 보석은 루비입니다. 특수한 커팅으로 빛을 반사하는 모습이 무척이나 매혹적인 것으로 평가됩니다.”

“…….”

“조명 빛이 산란하는 모습을 보시면 알겠지만, 제작자가 찬란하게 빛나는 아름다움을 표현한 것으로서, 특수하게 제작되어 전 세계에서 단 한 점만….”

주절주절 쓸데없는 설명을 늘어놓는 보석상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문도하는 고개를 슬쩍 기울였다. 보석상이 잘 보라는 듯 조명에 이리저리 목걸이의 보석을 가져다 대자 빛이 붉은빛을 뿌리며 흩어졌다. 다른 사람에겐 평범한 붉은 빛일지라도 문도하에겐 신기한 일이었다. 녹슨 그의 시야는 사물의 붉은빛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지 오래였기 때문이다.

그걸 보니 본래 붉은 구슬 알 같았던 서윤의 수치심이, 이내 산산조각 나던 순간이 떠올랐다.

생각과 동시에 아랫배에 미약한 고양감이 들었다. 예쁘게도 부서지던 그녀의 감정을 처음 봤을 때처럼 문도하는 천천히 그 보석을 살폈다. 눈물을 흘리던 그녀의 얼굴과 붉게 찢어져 물든 입술까지 떠올리는 순간 마음을 굳힌다.

보상을 해주어야겠지. 앞으로 고분고분하도록.

제가 생각하는 합당한 이유를 앞으로 내밀면서 문도하는 이 장난 같은 방문을 끝낼 순간이 다가왔음을 느꼈다. 그녀에게 저 물건 이상의 선물이 있을 리가 없었다.

보상이라는 단어가 어느새 선물로 바뀐 것도 모른 채 그는 목걸이를 향해 턱짓했다.

“그걸로, 포장해.”

어쩐지 그 흰 목에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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