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침투
(1)
“여기 실험 결과를 봐주시죠.”
딱딱하게 굳은 협회 관계자의 음성과 함께 화면에 비치는 영상이 바뀌었다. 온갖 몬스터를 모아 놓고 실험한 결과가 난잡한 사진과 함께 떠오른다. 그 모든 것을 문도하는 그저 무덤덤하게 쳐다보았다.
머릿속으로는 간밤의 일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이번엔 다행히도 A 포인트 현장에서 퇴거할 때까지 정상인인 척할 수 있었다. 잠깐 나가려던 정신이 가까스로 이서윤을 생각한 덕에 돌아왔으니까. 솔직히 말하면, 정말이지 기대 이상의 효과였다.
하지만 그렇게 찾아간 서윤의 대문 앞에서 문도하는 다시 정신을 잃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성을. 감시를 피해 그녀를 찾아가느라 능력을 많이 쓴 탓이었다. 좀 더 적극적인 가이딩을 해주면 좋을 텐데 매번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슬아슬하긴 한가. 가까이 두는 걸 서둘러야겠군.
또다시 목도하고 만 제 머저리 같은 행동을 떠올리며 문도하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방만하게 의자에 등을 기대자 앞에서 한창 지루한 얘기를 늘어놓던 관계자가 눈치를 본다.
그 애처로운 몸짓을 짜증스럽게 외면한 문도하가 손에 들고 있던 볼펜을 탁자로 툭 튕기며 내뱉었다. 데구르르 굴러간 볼펜이 마치 관계자를 찌를 듯 돌연 수직으로 섰다.
“그래서, 결론은?”
제 목을 노리고 바짝 선 볼펜을 관계자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그 표정을 보고 문도하는, 문득 ‘두려움’이라는 감정을 어렴풋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이서윤이 그의 가슴에 비죽비죽한 두려움을 잔뜩 욱여넣었으니까.
그간 저런 표정은 그에게 겁박이 제대로 먹혀들었다는 증거품으로밖에 사용되질 않았다. 이 약간의 변화를 문도하는 곰곰이 살펴보았다. 그에게 득이 될지, 실이 될지 가늠하면서.
그렇게 잠깐 묘한 감상으로 그 겁에 질린 얼굴을 쳐다보던 문도하는, 그렇다고 볼펜을 거두거나 하진 않았다. 새로운 감상이 있다 한들 그저 그뿐. 이해는 해도 어차피 저건 이서윤이 아니었으니까. 손안에 굴리던 반짝이는 이서윤의 두려움들이 데구르르 구르는 소리가 나는 듯했다.
그의 반응에 관계자가 마구 자료를 넘기기 시작했다. 결론 부분의 페이지를 찾는 모양이었다. 협회에서는 종종 이렇게 대표 클랜들을 모아 놓고 회의를 열었다. 어쨌든 협회는 국가가 세운 공적 기관이었고 클랜은 어디까지나 사설 용병 조직이 변한 모습에 불과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 세계적인 몬스터 위기에서 협회는 한국의 대표로 활동했다. 대부분의 나라는 이런 이중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클랜은 에스퍼를 관리하고, 협회는 가이드 명단을 관리한다. 나아가 협회는 중요한 국제 안건을 취합해 오거나 해외 동향 등을 자세히 교환했다. 때로는 일개 클랜이 나서서 처리하기 힘든 국가들의 일을 조율하기도 했다.
다만 점점 유명무실해지는 국가라는 틀 때문에 그 힘도 점점 작아지는 추세였다. 클랜들은 활발하게 타국의 클랜과 직접 결연을 맺거나 정보를 교환했다. 최근에는 한국에서 가장 큰 국민 클랜의 정보력이 협회를 상회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현재 인류의 생존 여부는 바다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질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능력의 기반은 에스퍼가 쥐고 있었다.
“…몬스터가 바닷물에서 떨어져도 생존할 수 있는 시간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과연 이 유명무실한 협회가 당당하게도 각 클랜을 오라 가라 한 이유가 있긴 했다. 드디어 나오는 흥미로운 정보에 문도하는 손짓으로 펜을 뚝 떨궈 주었다. 그대로 수직 낙하한 펜이 회의실 탁자에 푹 박혀 들었다. 주변에서 질렸다는 듯한 에스퍼들의 시선이 몰려들었다.
“늘어난다니, 구체적으로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의 곁에 앉아 있던 박남일 실장이 다급하게 물었다. 그는 최근 들어 자신의 일정에 지나칠 정도로 따라붙고 있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안 그래도 이서윤과 관련해서 실장을 써먹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드디어 가이드를 찾아서 폭주 위험이 사라졌다는 걸 알려 주는 것도 좋았지만, 그 전에 이서윤 근처의 잔가지들을 처리해야 했다.
과연 클랜 내부는 어디까지 믿을 만할까.
“본래 몬스터가 바닷물에서 떨어지면 일정 시간 안에 피부가 괴사하며 죽어가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네. 대략 한나절 정도죠.”
약 6시간. 몬스터가 바다를 벗어나 생존할 수 있는 최대치였다. 개체별 몸집 크기나 몬스터의 종류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대부분 그 정도 육지를 떠돌다 보면 알아서 뒤져버렸다.
정확히는 그 단단하던 피부가 녹아내리듯 괴사하는 것이었고, 이때부터는 평범한 현대 화기도 먹혔다. 총탄이 먹히는 몬스터는 그때부턴 위협 거리가 아니었다.
처음에는 바닷물이 마르는 시간이 관건이라는 가설이 있었다. 하지만 화염 능력이 있는 에스퍼가 몬스터 피부의 수분을 날려 버린다고 해서 바로 죽지는 않았다.
목숨을 건 여러 실험 끝에 바닷물에 있는 모종의 성분이 몬스터의 체내에 쌓이고, 그걸 다 소진하는 시점이 붕괴의 시작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었다. 그때부터 몬스터 웨이브 처리법은 몬스터를 단순히 막아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몬스터가 다시 바닷물로 도망치지 못하게 말살하는 것까지로 변경되었다.
어쨌든 몬스터가 몇 시간이면 알아서 증발한다는 사실은 인류에게 고무적이었다. 몬스터의 걸음으로도 여섯 시간 안에 도달하지 못할 대륙으로 파고들면 되었으니까. 평소에는 외지고 험해 외면받던 오지가 갑자기 거주지로 각광 받았다.
그러니 몬스터가 활동할 수 있는 시간이 점점 늘어난다는 건, 분명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놈들이 점점 더 깊은 대륙까지 진출한다면 인류에게는 좀 더 깊은 절망만이 생기리라.
“실험 결과 최대치 6시간에서 9시간 정도로 상승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음….”
6시간이라는 활동 시간이 발견된 게 10년 전이었다. 그러니 꼬박 10여 년 만에 몬스터의 활동 가능 시간이 50%나 증가했다는 말이었다. 빠르게 머릿속으로 계산을 마친 박남일 실장은 평정심을 잃고 침음성을 감추지 못했다.
자신도 모르게 옆에 태연히 앉아 있는 문도하를 힐긋 쳐다보았던 그는, 그야말로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갑작스럽게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며 연락해오던 협회의 장담에는 일리가 있었다. 이 실험 결과가 공표되면 여러모로 큰 변화가 있을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문도하의 생각은 조금 다른 듯했다.
“그래서?”
“네…? 활동 시간이 늘어나면….”
“지금처럼 웨이브 처리만 잘하면, 애초에 몬스터들이 육지로 기어 올라올 일이 없을 텐데?”
맞는 말이긴 한데 지나치게 이상적인 말이기도 했다. 문도하 자신이야 어차피 몬스터에게 죽을 일은 없었으니 태연하게도 말할 수 있는 것이겠지만.
그에 대한 개인적인 연민과 책임감, 그리고 인류에게 미칠 영향 등등 많은 것들이 박남일 실장의 머릿속을 떠다녔다. 아마 문도하는 그저 모든 것을 귀찮아할 테니, 그의 몫까지 자신이 고민해야 했다.
“하여간 그 거만한 성격은 어디 안 가는군.”
“흐음….”
제 말에 시비를 거는 다른 클랜의 에스퍼를 문도하는 흥미롭다는 듯 쳐다보았다. 나름 고위급 에스퍼였으나 문도하와 사사건건 비교되는 바람에 영향력이 썩 좋지 않은 자였다. 물을 조정할 수 있어 바닷가에서 몬스터를 상대로 효과적인 전투를 했다.
그래 봐야 조금 나은 쓰레기 정도였지만.
“내가 틀린 말을 했나?”
“매번 뒷짐 지고 방관하는 주제에 말은 번지르르하군?”
아무래도 구르기는 먼저 구르는데 마무리는 문도하가 다 하는 형국이 되는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이었다. 옆에서 다른 에스퍼들이 그를 조심스럽게 말리는 모습이 보였다. 마치 문도하를 자극하면 당장이라도 폭주할 것처럼.
문도하가 생각하기에 넓은 범위를 커버할 수 있는 자신은 이렇게 백업 역할을 하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었다. 그리고 물을 사용하는 그가 전진 배치되는 것 또한 효율적이다. 애초에 몬스터 웨이브에 임하는 목표는 몬스터의 말살이기도 했으나 해안가를 넘어서지 못하게 저지하는 것이 더 컸으니까.
하지만 저 힘쓰기 좋아하는 멍청한 에스퍼들은 그저 같이 피 묻히며 뛰지 않는 문도하가 아니꼬운 모양이었다. 물론 그로서는 귀찮게 일일이 양해를 구할 생각은 없었다. 말한다고 알아들을 지능이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어차피 매번 있는 시비라 문도하는 그저 손가락을 탁자에 빙글빙글 돌리며 그 말을 무시했다. 그의 태도에 에스퍼의 얼굴이 점점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는 능력이라도 쓰려는 듯 인상을 굳혔지만, 주변의 저지로 인해 겨우겨우 자신을 내리누르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다시 도발하듯 비웃어 주자 에스퍼는 기어코 탁자를 한 번 내려치고 밖으로 사라졌다.
“…도하 님. 아직 들을 내용이 더 남은 듯하니….”
“그러든가.”
“…휴….”
일단 이 정도만 하겠다는 의사표시에 박남일 실장이 한숨 섞인 숨을 내쉬었다. 다시 무료한 얼굴로 의자에 기대자 협회 관계자가 잠깐 쉬는 시간을 가지겠다며 빠르게 회의장 내부를 정리했다.
문도하라고 협회 관계자의 말이 어떤 파장을 일으킬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폐허가 되는 해안가의 범위가 좀 더 늘어나고, 인구 밀집도는 점점 최악이 될 것이고, 어쩌면 기어코 식량 부족 현상도 일어나겠지.
하지만 이 많은 내용들이 이상하게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저 소리를 들었을 때, 다른 무엇보다도 이서윤을 빼 와야겠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녀가 살고 있는 그 집은 이제 확실히 해안가 위험 범위 안에 포함될 테니까.
제 안에서 우선순위가 새롭게 정립되고 있다는 걸 깨달은 문도하가 불쾌감에 미미하게 인상을 찡그렸다. 아까 느낀 생생한 감정의 감촉도 그렇고, 며칠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잔뜩 녹슬어 굳어 버린 머리 탓인지 변화가 달갑지만은 않았다. 이서윤의 존재는 분명 달가운 행운일 테지만 한편으로는 거슬리기도 했다.
그의 찌푸린 표정을 어찌 해석했는지, 옆에서 박남일 실장이 관계자와 덩달아 안절부절못하는 기색인 것이 보였다. 역시 거슬린다. 고질적으로 찾아오는 편두통이 다시 번지려 하고 있었다.
손가락이 습관적으로 이서윤의 맨살을 찾았다. 벌써 중독되기라도 한 듯이.
“꺼져. 거슬리니까.”
“그럼, 잠깐 쉬고 계시죠.”
눈치 빠른 박남일 실장이 협회 관계자를 데리고 빠르게 회의장 밖으로 나갔다. 그들을 본 다른 클랜의 관계자들도 눈치껏 쉬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문도하는 텅 비어 버린 회의장에 홀로 남고 나서야 비로소 약간의 안정을 되찾았다.
시한폭탄 같은 취급을 받는 건 익숙했다. 오히려 알아서 다들 꺼져 주니 편하긴 했다. 게다가 문도하의 많은 적들은 그가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이기에 오히려 조용했다. 긁어 부스럼을 만드느니 그저 자연스러운 몰락을 기다리겠다는 심산이겠지.
하지만 이런 때 갑자기 그의 가이드가 뚝 떨어진다면, 과연 어떤 반응들일까.
아무래도 제게 찾아온 행운을 그저 거저 얻는 일은 없을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그 더러운 감각에 다시 눈을 가늘게 뜨며 눈앞의 프레젠테이션 화면을 노려보았다.
흉측한 몰골로 죽어 있는 몬스터와 별반 다를 바 없는 문도하의 죽은 눈빛이 허공으로 진득하니 내려앉았다.
* *
멍하니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자니 마치 주말에 있었던 일이 꿈인 듯했다.
그러나 그녀가 겪은 일은 안타깝게도 한 번 찾아오고 말 악몽도 아니었으며 엄연히 현실이었다. 자칫 잘못하면 그녀의 인생이 통째로 휩쓸릴 만한 그런 일. 그렇기에 서윤은 애써 헛된 기대를 하지 않도록 자신을 추스르며 바삐 움직였다.
그나저나 오늘은 분명 월급날인데 돈이 들어오지 않았다. 금요일에 조퇴했던 게 마음에 걸려서 부러 일찍 도착했지만 사장은 의외로 별말이 없었다. 다만 이따 끝나고 좀 남으라고 하는 것을 보니 기어코 그녀와 독대를 해야 직성이 풀릴 눈치였다.
월급도 직접 건네주려나. 설마 잘리는 건 아니겠지.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일자리에서 잘리는 게 큰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감각이 잠시 서윤을 아연하게 했다.
어쨌든 사장의 추파가 무척 곤란하긴 했지만 월급 하나는 제때 들어오던 아르바이트처였다. 이렇게 어긋나기 시작하면 이걸 감내해야 할 이유도 사라진다. 서윤은 재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도망이든 뭐든 치려면 돈이 있어야 하는데.
문득 드는 생각에 서윤이 잠시 멍한 표정을 지었다. 도망칠 작정이었나? 하지만 대체 문도하에게서는 어떻게 도망쳐야 하는 거지?
그런 서윤이 의아했던지 같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강하나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일전에 사장에게 서윤 대신 대타를 하겠다며 조퇴하도록 도와준 그 친구였다.
“병원은 다녀왔어?”
“아니…. 그래도 고마워. …덕분에 잘 쉬었어.”
서윤은 조금 늦었지만 진심을 담아 인사를 건넸다. 물론 잘 쉬었다는 건 거짓말이었으나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으니까.
문도하의 말대로 가장 강한 에스퍼의 가이드가 된다는 사실을 반길 사람은 많을 터다. 하지만 서윤은 반대로 이 사실을 절대 다른 이에게 알리고 싶지 않았다.
적이 많은 게 빤히 보이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유일한 약점이 서윤 자신이라고 떠들어 대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녀에겐 스스로를 보호할 힘이나 배경이 없으니 더욱 문제였다. 그녀가 가진 유일한 배경은 그 사실을 이용하지 못해 안달일 것이 뻔했고.
특히나 문도하가 과연 다른 에스퍼처럼 가이드를 보호할지 어떨지도 아직 알 수 없었다. 물론 그녀의 가이딩이 필요하니 조치를 취하긴 하겠지만 그게 과연 일반적인 의미의 보호일지는 모르는 일이다. 서윤은 제정신인 그를 단 두 번 만났지만, 확신과도 같은 예상으로 침묵을 택했다.
그리고 어쩐지, 그의 가이드임을 말하는 순간 모든 것이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으음…, 안색이 아직 창백한 것 같은데. 참, 오늘 월급날인데 뭐 할 거야?”
“아…, 난 아직 못 받았어….”
“어? 그래?”
서윤은 미약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흘긋 안쪽 사장실의 눈치를 살폈지만, 굳게 닫힌 문은 그녀가 출근한 후부터 그대로였다.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이런 일까지 생기다니.
다시 습관적으로 입술을 짓씹으며 손을 움직였다. 몬스터는 지치지도 않고 기어 올라왔고, 덕분에 가게는 늘 일정 수 이상의 에스퍼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그저 멍하니 있을 수는 없었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응…. 아니야. …고마워.”
서윤은 다시 눈치를 보듯 강하나의 얼굴을 보았다. 우려와는 다르게 거기 떠올라 있는 건 정말 순수한 걱정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타인의 호의가 익숙하진 않았다. 그래도 감사 인사를 빼먹진 않는다. 단순한 동정이라도 강하나의 호의는 분명 그녀에게 위안이 되고 있었으니까.
서윤의 대답에 다시 희미하게 웃어 보인 강하나가 활기차게 서빙을 시작했다. 그 건강한 걸음걸이를 서윤도 흉내 내고 싶었지만 쉽진 않았다.
앞으로, 대체 어찌해야 할까.
가장 희망적인 상상은 그녀가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면서 문도하를 몰래 가이딩하는 것이었다. 물론 정신이 휩쓸리지 않게 손을 잡는 정도의 약한 가이딩 말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주변을 속이며 살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터.
하지만 실현되기 어려운 소망일 것이다. 이 덧없는 소원은 짙은 체념의 빛을 띠고 있었다. 아까 불쑥 떠올랐던 도주는 애써 억눌렀다. 그녀의 차가운 이성이 절대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할 것을 엄하게 경고했기 때문이다.
문도하가 폭주하지 않을 정도로만, 그렇게 간신히 이어가는 삶. 슬프게도 이게 그녀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이었다.
더 안타까운 점은 멋대로 들이닥친 재앙에 이리저리 흩날린 건 그녀인데, 그 후폭풍을 걱정해야 하는 것도 그녀였다는 사실이다.
무거운 체념을 진득하게 흘리면서, 그녀는 애써 강하나의 발랄한 걸음걸이를 흉내 내 보려 했다.
* *
지루했던 회의도 결국 마무리되었다. 아무런 소득은 없었으나 그렇다고 이렇게 모든 클랜을 잡아 두기엔 그들의 힘이 미비했기 때문이다. 추후 긴밀한 협조를 부탁드린다는 사뭇 애처로운 협회의 말을 건성으로 들으며, 에스퍼들은 제일 먼저 회의장을 떠났다.
문도하는 제일 먼저 회의장을 뛰쳐나온 에스퍼였다. 지긋지긋한 협회의 대회의실은 언제 봐도 짜증 났다. 어릴 적부터 그에게는 좋은 기억이 없는 곳이었으니까. 탐욕과 아집으로 물든 협회는 국가라는 족쇄만 없었다면 진즉에 도려냈어야 하는 적폐일 뿐이었다.
그들이 회의에 가지고 온 자료는 무척 많았지만 결국 결론은 하나였다. 몬스터의 육지 생존 시간이 길어졌다는 것.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사태에 골머리를 앓다가 클랜에 책임을 분산시킬 작정으로 이 회의를 연 것이 분명했다.
각국의 실험에도 불구하고 생존 시간이 늘어난 원인은 불명이라고 했다. 그저 몬스터의 진화에 따른 일이라는 추측이라고. 저 실험 결과가 정말 ‘최근’에야 밝혀졌는지, 그 내용은 전부 진실인지, 문도하는 그 저의를 의심했다.
어느 쪽이든 쉽게 놀아나진 않을 것이다. 어릴 적과는 다르게 그의 힘도 커졌으니 가만히 당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제는 자체 실험진도 갖춘 국민 클랜에서는 발 빠르게 개별적인 조사에 나서기로 했다.
그를 위해 마련된 짙은 썬팅이 된 차량에 몸을 실으며 문도하는 성마르게 실장에게 질문했다.
“알아보라고 한 건?”
“여기 있습니다.”
어딘가 흐트러진 서윤의 뒷모습이 찍힌 사진을 보며 문도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일단 믿을 만한 이가 얼마 없는 탓에 박남일 실장에게만 일을 지시해두었다. 구체적으로는 이서윤에 대한 감시와 주변 정찰을.
처음 문도하가 우연히 그녀를 찾은 직후부터, 서윤의 주변은 이미 통제되고 있었다. 빠짐없는 감시를 위해서. 그녀의 과거 행적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에스퍼와 가이드의 운명은 조작할 수 없는 일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듣도 보도 못한 E급 가이드의 등장은 모든 것을 의심스럽게 했다.
보고에 따르면 그가 떠나온 일요일, 오후가 되어 깨어난 듯한 서윤이 밖을 돌아다녔다는 것 같았다. 다만 그 행색이 사뭇 불안정해 보여서 보고가 올라온 모양이었다.
신발도 제대로 못 신은 그 행색을 보면서 문도하는 입가를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도망이라도 칠 작정이었을까, 이렇게 허술하게.
아직 서윤이라는 인물을 잘 모르는 탓에, 사진의 모습만큼 빈틈이 많은 성격일지는 좀 더 두고 봐야 알 것 같았다. 만약 이게 정말 충동적인 도주 시도였다면 조금 주의해야 할 필요는 있을 듯싶다. 귀찮은 일이 생기는 건 질색이니까.
“총 두 세력으로 추정됩니다.”
“…두 세력?”
문도하가 예상한 대로 그녀의 주변엔 이미 눈이 달려 있었다. 본능적인 감각으로 그녀를 찾아낸 첫날, 아침에 클랜으로 돌아오며 그걸 파악한 문도하는 실장에게 자세한 조사를 명했다. 좀 더 은밀하게 사람과 기술을 풀어 서윤의 집과 직장 주변을 살펴본 결과가 드디어 나온 것이다.
의외인 건 그녀에게 달라붙은 세력이 두 곳이나 있었다는 점이다. 한쪽은 문도하의 예상대로 협회 쪽이었다. 다른 쪽은 사설탐정이라는 보고서의 글귀가 눈에 들어온다.
“사설탐정?”
“네. 누군가가 의뢰를 넣어서 대상자를 쫓고 있는 모양입니다.”
“의뢰자는?”
“아직 파악되지 않았습니다. 혹시나 싶어서 광범위하게 눈을 돌려보니 꽤 근접한 곳에서 대상자를 찾고 있더군요. 아마 근시일 내로 대상자의 주소지를 파악할 것 같습니다.”
“흐음….”
역시나 수상한 부분이 많은 여자였다. 협회야 국가 기관이다 보니 서윤이 합법적으로 일을 하고 있다면 그 주소지를 파악하는 건 일도 아닐 터. 하지만 개별적인 인물이 서윤의 거처를 알고 싶어 한다는 건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서류 위를 톡톡 손가락으로 건드리며 문도하는 생각에 빠졌다. 단순히 능력 부족으로 E급 가이드들이 명단에서도 누락이 되어있었다면 협회가 이렇게 은밀하게 감시하는 수고를 하진 않았을 터다.
하지만 가이드 판별은 무척이나 엄하고 공정한 과정을 통해 이뤄지고 있었다. 그 신뢰도가 협회의 힘과 직결되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서윤의 가이딩 능력이 낮아 E급이 책정되었다는 자체는 의심하기 힘들었다.
“누굴까….”
이런 낮은 등급의 가이드를 탐정까지 풀어서 찾고자 하는 인물이라. 문도하 자신과는 이해관계가 상충할 것이라는 본능적인 감이 들었다.
일단 그 생각을 접어둔 문도하는 일단 협회에 집중했다. 갑작스러운 회의 소집으로 불쾌한 와중에 심지어 이서윤을 감시까지 하고 있었다는 보고가 무척이나 거슬렸기에.
꽤 오래전부터 그녀를 감시한 정황이 있다는 글귀에는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문도하가 접근해서 협회의 눈에 띄었다기보다는 서윤이 이미 감시 대상이었던 것 같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보고서의 페이지를 가늠하던 실장이 요령 좋게 다시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협회 쪽엔 도하 님의 행적을 들키기는 한 것 같습니다. 본래 적었던 감시 세력이 최근에 늘어났더군요.”
첫 번째 폭주 때는 문도하도 기억이 얼마 없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본능으로만 거리를 헤집고 다녔을 테니 감시의 눈길을 파악하고 피할 정신도 없었을 터. 아무래도 그때 문도하와 서윤의 접촉을 들킨 듯했다.
다소 짜증 나는 상황에 톡톡 서류를 두드리던 그가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봤다. 해가 적당히 기운 오후의 풍광이 무감각하게 그의 시야를 파고들었다.
어차피 접점을 들켰다면 일단 이서윤을 미끼처럼 두고 협회의 동태를 살피는 건 어떨까.
자칫 서윤에게는 위험할 수 있는 생각이었으나, 이 상황에서 문도하가 그녀를 대놓고 싸고돈다면 오히려 더 문제가 될 수 있었다. 그녀가 자신의 가이드라는 걸 시인하는 꼴이니까.
정말 우연히 만나 연애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굴어야 한단 말인가.
뜻밖의 결론에 그가 조소를 흘렸다. 차라리 대범하게 행적을 질질 흘리고 다닌다면 협회나 미지의 적으로서는 의아할 수밖에 없으리라. 어떤 에스퍼도 가이드를 그렇게 다루지 않으니까.
가이드는 아닌 것 같으나 문도하에게 의미 있는 사람, 그렇게 판단되는 인물이라면 오히려 이서윤이 안전할 가능성이 컸다.
일단 그가 쌓아 온 평판에 따르면 겉으로 보이는 이런 관계가 진심이라고 여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결국 문도하의 심기는 거스르면서 정작 그에게 치명적인 일은 아닐 테니 이서윤을 건드릴 실익이 없다.
만약 이서윤이 그에게 정말 의미가 있는 사람이어도 문제였다. 같이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가이드도 없는 문도하를 그렇게 어설프게 자극할 수는 없었다. 그가 행여 충격이라도 받아 폭주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공멸일 테니 말이다.
차갑게 머리를 굴리며 문도하는 실장에게 말했다. 다시 서류에 프린팅된 이서윤의 이름 활자를 톡톡 두드리며 미소를 흘린다. 일이 역시나 순탄하게 풀리질 않는다.
“빠짐없이 지켜봐. 이 탐정의 의뢰자도 알아보고.”
“직접적으로 알아봅니까?”
“아니. 일단은 이쪽이 지켜보고 있다는 걸 모르게.”
“네.”
실장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문도하가 들고 있던 서류를 회수했다. 그러다 다시 창밖을 보며 생각에 잠긴 그의 눈치를 흘긋 본다. 오늘은 조금 기분이 괜찮은 것 같은데, 질문할 절호의 기회인 듯싶었다.
“…누구신지 여쭤봐도 됩니까?”
박남일 실장은 최근 그의 가장 많은 업무 시간을 빼앗는 이 여자가 궁금해 죽을 것 같았다. 가이드긴 한데 생전 처음 보는 E급인 것도 모자라서 그 문도하가 가서 밤을 보내고 오는 듯했기 때문이다.
여자에는 별 관심 없이 살아온 문도하였다. 한때 박남일 실장은 문도하의 성 기능을 심각하게 의심한 적도 있었다. 가이드 없는 에스퍼라면 으레껏 보이는 방탕한 생활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탕한 생활은커녕 평소에도 여자를 가까이하지 않았다. 물론 문도하가 가까이하는 인물 자체가 얼마 없어서 좋은 표본은 아니었지만.
그러나 문도하는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았고, 그런 주제에 이 모든 일을 일급 기밀로 부치길 원했다. 말이 일급 기밀이지 그걸 무마하고 숨기는 건 오롯이 박남일 실장의 몫이었다. 그의 업무량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고.
대체 누구인가.
“시키는 일이나 똑바로 해.”
“…예.”
“아, 그리고.”
“네?”
“나머지 E급에 대한 정보도, 가져와.”
“알겠습니다.”
실장의 얼굴이 시커멓게 죽어갔다. 야근하는 자신의 미래상이 눈 감고도 보일 지경이었다. 궁금증이나 속 시원하게 풀어주면 좋으련만.
…진짜 여자친구 뭐 그런 건가. 그래서 말하기 애매하니 비밀인 척하는 건가. 의심스럽게 문도하를 쳐다보던 실장은 눈이 마주칠 것 같자 재빠르게 서류를 정리하는 시늉을 했다.
E급 가이드들이야, 안 그래도 쫓고 있었다. 업무에 있어서는 결벽증처럼 구는 박남일 실장이었다. 그가 모르는 새로운 등급이 불쑥 튀어나온 것도 이상한데 심지어 이서윤을 제외한 모든 E급 가이드의 행적이 묘연했다.
단 몇 명뿐인 표본이었지만 그의 감을 자극하기에는 충분했고, 그 결과 지금 새로운 등급 파악이라는 핑계로 부하들이 열심히 구르고 있는 중이었다.
그걸 새롭게 지시하다니, 짐승 같은 본능을 지닌 문도하답게 뭔가 알아차린 걸까?
“오늘 남은 일정은?”
“클랜 연합체 회의가 있을 예정입니다.”
“안건은 동일한가.”
“네.”
갈까, 말까. 실장이 알았다면 기함할 만한 생각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문도하는 고민에 빠졌다. 이 이상 귀찮은 회의실에 앉아 있다가는 세 번째 폭주를 경험할지도 모르겠는데.
그의 눈치를 보던 박남일 실장이 다시 조심스레 말을 끼워 넣는다. 회의장에서 이 사실을 접한 문도하가 또 시비에 휘말리느니 미리 알리는 편이 좋겠다는 판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앞으로 일본 쪽 파견도 있을지 모른다는 분석입니다.”
“귀찮아지겠군.”
“몸은…, 괜찮으십니까?”
실장이 그의 일정에 계속 따라붙는 이유가 저거라는 걸 알지만, 자꾸 그의 몸 상태를 물으니 짜증이 났다. 손을 휘젓는 것으로 그의 입을 간단하게 막은 문도하가 넥타이를 느슨하게 했다. 저게 귀찮아서라도 가이드를 찾았다는 말을 실장에게는 해 줘야 할 성싶었다.
해외 파견 얘기가 이렇게 요란하게 들려올 정도라면 대규모 인원이 가게 될 것이라는 말과 같았다. 그래도 문도하가 그곳에 낄 확률은 희박했다. 어쨌든 한국으로서는 제일 중요한 게 자국 영토의 수호였고, 일본 처지에서도 가이드 없는 시한폭탄을 받아들이는 건 껄끄러울 테니까.
이 귀찮은 파견을 막기 위해서라도 당분간 외부에 서윤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야겠다고, 문도하는 골똘히 생각했다.
“슬슬 이동하셔야 합니다만.”
“그래.”
차는 이미 회의장 근처에 도착해 있었다. 그저 내리기 귀찮았던 문도하가 그 안에서 움직이지 않았을 뿐. 손목의 시계를 흘긋 본 실장이 그를 재촉했다.
마지막까지 회의를 빠질 궁리를 하던 문도하는 내키진 않았지만 몸을 움직였다. 아직 실장의 조력이 필요한 부분이 많았다. 이런 사소한 부분에서는 그의 말을 듣는 척이라도 하는 편이 낫겠지.
무심한 얼굴로 차에서 내린 문도하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깊어가는 오후를 배경으로 에스퍼들이 속속 회의장으로 집결하고 있었다. 아까와 비슷한 구성이었으나 인원수가 더 많았다. 다들 느릿하게 움직이는 문도하를 흘긋 보고는 반대로 걸음을 재촉했다. 그 익숙한 공백을 가르며 문도하는 계속 다리를 움직인다.
협회의 발표가 진짜인지 뭔지는 몰라도 세계에는 다시 변화의 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격변은 곧 문도하의 기회였다. 맨 처음 각성한 것이 그의 일생일대의 기회였던 것처럼.
이런 순간에 마침 나타난 서윤을 생각하니 절로 입가가 올라갔다. 그녀를 둘러싼 것이 음모이든 뭐든 깨부수고 쟁취할 보람이 있을 듯했으니까.
지평선을 향해 추락하는 해를 잠깐 올려다보던 문도하는 서윤을 생각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참 아르바이트를 할 시간이었다.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 *
‘그러니까 잘 생각해보라고.’
‘…아뇨. 사장님, 싫어요.’
‘어허. 서윤 씨가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 모양인데. 바닷가에서 여자 혼자 사는 게 그렇게 좋은 일이 아니야.’
‘…….’
싫다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건지, 사장은 계속 제 할 말만을 이어갔다. 바닷가에서도 악착같이 살아남으려 노력하는 그녀의 인생은 단 몇 마디로 땅바닥에 떨어져 폄하 당했다.
서윤이라고 그곳이 위험한 걸 모르겠는가. 서윤이라고 이렇게 아슬아슬한 인생을 살고 싶었겠는가. 그녀의 처지를 제멋대로 해석하는 사장의 입에서는 끊임없이 ‘제안’이 쏟아졌다.
그렇게 몇 번이나 반복된 오물 같은 대화를 전부 감내한 끝에야 서윤의 손에는 월급이 들어왔다. 그간 계좌에 바로 이체되던 월급과는 다르게 빳빳한 현금이었다.
그녀의 한 달 치 노동력은 전부 무시한 채, 마치 이 대화에 대한 대가라는 듯이. 그간 그녀 삶의 보람이었던 월급이 오늘만큼 악취가 난 적이 없었다.
대체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기에.
그걸 은행에 집어넣을 생각도 못 한 채 서윤은 비틀비틀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방금 도심부에 집을 마련해주겠다는 사장을 거절하고 온 참이다. 이런 태도 때문에 서윤은 늘 사장과 대면할 때면 삼촌을 떠올리며 움츠러들었다. 둘은 그 악취 나는 속내가 너무나도 닮아 있었다.
대가가 무언지는 한 마디도 직접 언급하지 않았으나 뻔했다. 사장은 돈을 받기 위해 내미는 그녀의 손을 자꾸만 잡으려 했다. 평소에도 유니폼을 갈아입고 나오면 괜히 어깨 어림을 만지려 들었다.
그러니 모를 수가 없었다. 그 목적이 뻔하디뻔한 스폰 제의라는 걸. 사장은 빈말로도 이게 별 뜻 없는 호의라고도, 어쩌면 아르바이트생을 위한 조치라고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저 자신이 베푸는 호의에 서윤이 줄 수 있는 걸 주면 된다는 기분 나쁜 뉘앙스. 이걸 자연스럽게 짐작할 수 있는 제 상황이 너무나도 서글펐다.
끝내 다시 생각해보라는 소리와 함께 사장실을 나서야 했다. 에스퍼를 상대로 하는 곳이라 돈이 많이 오가긴 했지만 이런 소리까지 할 정도로 여유가 있는 줄은 몰랐다. 그런데도 당장에 그만두질 못하고, 격렬하게 화도 낼 수 없는 자신이 미련하다는 생각이 들어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내 잘못이 아닌걸.
단언컨대 단 한 번도 여지를 준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녀가 연고도 없고 바닷가에 있는 집에 살 정도로 돈이 급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후부터, 사장은 줄곧 저렇게 행동했다. 어차피 네까짓 게 뭘 할 수 있냐는 듯.
혐오스러운 시선이 제게 닿는 게 싫었다. 함부로 손을 대지 말아 달라고 말한 적도 많았다. 그러면 사장은 오히려 뻔뻔한 얼굴로 예민하게 군다며 그녀를 나무랐다.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의 시선이 점점 이상해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점점 고립되어 갔다.
그만두고 싶었다. 당장이라도 이딴 아르바이트 자리 필요 없다며 유니폼을 내팽개치고 싶었다. 하지만 이곳은 서윤이 3개월이나 헤맨 후에야 겨우 얻은 직장이었다.
많지도 않은 나이인데 벌써 자격 요건부터 탈락하는 일자리가 늘어나고 있었다. 그녀가 고등학교를 제대로 나오질 못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생활비로 할 수 있을 정도로 급여가 낮지 않으면서 해가 지기 전에 끝나는 일자리는 흔하지 않았다.
당시 서윤은 바닥난 통장 잔고 덕에 정말 바닷가가 보이는 벼랑까지 몰려 있었다. 내일 먹을 식량을 살 돈도 없어 첫 주부터 약간의 월급을 가불 받아야 했었으니까.
그게 이런 대가로 돌아올 줄 알았다면 흙을 파먹는 한이 있더라도 사장에게 도움을 청하지 않았을 텐데. 서윤의 얼굴만 보고 그녀를 뽑으려는 자리에는 항상 이런 더러운 일이 따라왔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멀쩡한 낯을 하고 있던 사장이었기에 그 호의가 그저 감사했더랬다. 하지만 진정한 사냥꾼일수록 이렇게 온화한 낯을 하고 있다는 걸 서윤은 완전히 깨닫지 못했다. 문도하만 보더라도 겉은 얼마나 멀쩡하던가.
추격하듯 저를 뒤쫓는 사회의 현실에 서윤은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지는 해를 등 뒤로 흘리며 그녀는 계속 걸었다. 지금 할 수 있는 게 이거밖에 없었으니까.
어디까지 걸어갈 수 있을까.
아주 어릴 적, 그녀의 부모님이 아직 살아계시던 그 시절 함께 놀러 갔던 바닷가가 보고 싶었다. 하지만 바다가 무척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서윤은 한 번도 이 소망을 실천해본 적이 없었다. 이제 그때처럼 평화로운 바다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단 한 번 가봤던 바다인데도 그 공간을 빼앗긴 상실감은 컸다. 아마도 그게 부모님이 사고로 돌아가시기 전에 갔던 마지막 가족여행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바닷길이 막혀 물류의 이동이 어렵다든가 여러 가지 사회 혼란이 일어났다든가 하는 일들보다는, 서윤에게는 이게 더 와 닿는 바다의 상실이었다. 그녀는 부모님을 비롯해 너무 많은 것을 빼앗겼다.
그렇게 당도한 그녀의 안식처 앞에는, 문도하가 서 있었다. 그녀에게 얼마 남지 않은 것도 모두 빼앗아 가려고 하는 사람이.
“안녕.”
“…….”
대체 어디까지 비참해져야 평안해질 수 있을까.
탄식과도 같은 좌절이 그녀의 발목을 휘감았다. 아니, 기실 이 좌절은 얼마 전부터 줄곧 서윤의 발치에 매달려 있었다. 그저 익숙해져 버려서 그 무게를 느끼지 못했을 뿐.
오늘도 완벽한 정장 차림의 문도하는 세상에서 동떨어진 것 같은 무결함을 뽐내고 있었다. 그것을 보며 서윤은 완전한 아름다움에 대한 경외보다는 그저 이질적인 무언가를 보는 듯한 감상을 느껴야 했다.
마치 몬스터들처럼.
“인사 정도는 받아 주지 그래.”
“…왜 또 왔어요.”
쓸모가 있다고 생각할 테니, 나를 죽이진 않겠지.
이렇게 막연한 경계선이 쳐지자 말을 꺼내는 것이 어렵지는 않았다. 날것의 원망을 담은 말이 튀어 나가는데도 문도하는 피식 입꼬리를 올리며 그녀를 비웃었다. 그 명확한 비웃음에 등에서는 소름이 하나둘 돋아났다.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문도하를 보며 서윤은 주저앉고 싶은 심정을 참아 내야 했다.
“내가 안 올 거라고 생각했어? 정말?”
비웃음을 잔뜩 담은 선고가 그녀에게 떨어졌다. 얼굴만큼은 환한 미소를 걸고 있는 문도하였으나 그 누구보다도 위험하게 보였다.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는 거대한 칼날을 보는 기분이었다. 흔들거리는 칼날이 꼭 누군가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질 것만 같았다.
서윤은 천천히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흉포한 맹수를 앞에 두고 자극하지 않고 싶어 하는 사람처럼 아주 천천히. 어차피 문도하가 이대로 그녀를 포기해줄 것이라는 순진한 상상은 해 보지 못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문도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르바이트는 잘 다녀왔고?”
“…….”
이번엔 식은땀이 천천히 그녀의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렸다. 쌀쌀한 가을 날씨라 그럴 리가 없는데도. 역시 그녀에 대한 것들은 전부 파악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문도하는 그걸 분명하게 경고하려고 일부러 말을 꺼낸 것이겠지. 그 잔인한 성정에 자꾸만 등줄기가 서늘하게 일어섰다.
그런 그녀의 묵묵부답이 꽤 의외라는 듯 문도하의 입술이 길게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리고는 스르륵 고개를 숙여 서윤의 귓가에 속삭였다.
“흐음. 그러면 혹시 내 가이드가 된 걸 다른 사람에게 말한 적 있나?”
“아니요. …앞으로도 안 말할 거예요.”
아직 그의 가이드라는 사실이 전혀 납득이 되진 않았으나 일단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대답을 건넨다. 스스로에게 다짐을 했던 것처럼.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가 낙엽만도 못한 볼품없는 모양새로 흘러나왔지만, 그녀의 의사는 확실하게 전달되었으리라.
그렇게 말을 하고 보니 혹여 그가 기분 나빠하지는 않을까 불안해졌다. 아직도 제 귓가에 가까이 다가와 있는 문도하에게 곁눈질을 했으나 그는 여전히 웃는 낯이었다. 한술 더 떠 기분이 좋아 보이기까지 했다. 그 반응을 보면서 서윤은 어쩔 수 없이 미약한 희망을 떠올리고 말았다.
어쩌면, 자유를 조금이라도 지켜낼 수도 있지 않을까.
“똑똑하네.”
감시당하고 있으니 허튼짓하지 말 것, 그리고 당분간 그의 가이드가 된 걸 말하지 말 것.
오늘 온 목적은 이걸 경고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의외로 서윤은 자신의 상황을 아주 정확하게 직시하고 있었다. 덕분에 그는 기분 좋게 둔탁한 소리를 내며 구르는 그녀의 구슬 같은 두려움을 생생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녀의 일상이 낱낱이 보고되고 있음을 넌지시 알렸음에도 멍청하게 그걸 어찌 알았느냐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던 것처럼 잔뜩 긴장할 뿐. 그걸 일반적인 에스퍼의 집착으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으나, 문도하가 순순히 그녀를 놔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게다가 알아서 입단속을 하는 능력까지. 솔직히 말하면 알아서 잘 처신하는 모습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귀찮은 일이 없을 것 같았으니까.
다리를 벌릴 때도 순종적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말이지.
그녀가 입을 꼭 다물어야 하는 이유는 일부러 자세히 설명해주지 않았다. 특히나 사설탐정이 그녀를 쫓고 있다는 사실 같은 건. 이렇게 알아서 얌전히 있겠다는 의지를 보이는데 괜히 겁을 줄 필요는 없겠지. 겁이 한도를 넘어 멍청하게 도망이라도 치겠다고 마음먹으면 몹시 귀찮아질 테니까.
잔뜩 굳어 있는 서윤의 얼굴을 보니 다시 에스퍼의 본능이 솟구쳤다. 어떻게 그녀를 두고 바깥을 나돌 수 있었는지 의아해질 만큼 거세게. 뻐근해지는 아랫배의 감각에 애가 닳을 정도다.
이 욕구를 어찌해야 할까 고민하는데 의외로 서윤이 먼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일단, …집으로 들어가요.”
갑자기 주변을 마구 돌아보더니 꺼낸 말이었다. 마치 그렇게 두리번거리면 그녀를 감시하고 있는 이들이 보이기라도 할 것처럼. 일단 표면적으로 서윤이 살고 있는 이 동네는 지금 무척이나 한적하긴 했다.
어쨌든 다분히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는 행동이기에 높은 점수를 주었다. 서윤이 점점 더 마음에 들게 구는 것을 보니 자꾸 몸까지 동해 버려 큰일이었다.
한편으로는 이렇게 저를 집으로 끌어들이는 그녀의 행동이 퍽 대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슨 짓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걸 제 몸으로 톡톡히 겪었을 텐데도, 신선한 반응이 아닐 수 없었다.
죽어 말라비틀어진 지 오래된 그의 흥미를 끌 만큼.
“그러지.”
새하얗게 웃는 문도하는 그야말로 무해한 생물 같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