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이고,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문도하 님.”
“됐고, 위치는?”
“네,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이쪽으로.”
연신 굽실거리는 협회 관계자를 코끝으로 무시한 문도하는 성의 없게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잠깐 미미하게 얼굴을 굳히는 걸 보니 이런 취급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 말은 협회에서도 고위직이라는 뜻이다. 이런 현장에 보통은 나올 일이 없는 인물.
눈을 가늘게 뜨고 다시 굽실거리기 시작한 관계자를 보던 문도하는 이윽고 걸음을 옮겼다. 박남일 실장은 며칠간 쉬라고 신신당부를 했으나 그는 개의치 않았다.
저번 몬스터 웨이브 현장에서 얼핏 자제력을 잃고 사라지는 모습을 보인 탓에 소문이 좋지 않았다. 실제로 그건 폭주 직전의 모습이었지만, 문도하는 멀쩡한 얼굴로 그저 그 또한 변덕이었다는 듯 다시 출동했다. 제게 있는 영향력을 잃지 않으려면 적당히 자신이 건재함을 과시할 필요가 있었다.
딱히 돈이나 명예 같은 것에 연연하진 않았지만 거슬리는 물건들을 치우기에는 권력만 한 것이 없었다. 아주 어릴 적부터 그렇게 생활해 왔던 문도하에게는 이것도 일종의 업무와도 다름없었다. 에스퍼로서의 역할과 마찬가지로.
물론 정말 몸이 좋지 않았다면 그저 만사가 귀찮아서 늘어졌을 터다. 아니면 진작 인류의 적이 되어 또 다른 몬스터가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 문도하에게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어느 때보다도 상쾌하게 몬스터를 죽이러 바닷가로 나올 수 있었다.
어제 오후 억지로 이마에 입을 맞췄었던 서윤을 떠올리며 문도하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내디뎠다. 밤에 찾아갈 예정이긴 했지만, 어차피 억지로 취하는 것, 입술 정도는 빨다 오는 게 낫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이상하게 몸이 달아오르는 기분이었으나 그저 가이드를 만난 에스퍼의 본능 탓일 것이라 편히 생각하고 말았다.
하루 정도 시간을 주었으면 충분하겠지.
당연한 말이지만 그에게는 적이 무척 많았다. 그나마 적으로 분류하지 않을 만한 인물인 박남일 실장에게 문도하는 서윤의 감시를 명령했다. 더 자세한 신상 조사와 함께.
실장은 어딘가 미묘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의중을 캐려고 들었다. 자신이 찾아낸 가이드라는 소리를 할까 하던 문도하는 일단 입을 다물었다. 그녀가 명확하게 그의 가이드라는 게 알려진다면 어지간한 경호로는 부족하리라. 이서윤은 그를 완벽하게 조종할 가장 훌륭한 수단일 테니까.
얼굴이 적당히 반반하니 연애질이나 한다고 여길 여지를 남기는 게 나을 듯했다. 어차피 S급과 E급이 페어가 된다는 건 어불성설로 느껴질 테니까.
이런저런 생각을 이어가는데 옆에서 연신 거슬리게 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세기의 영웅을 이렇게 뵙게 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나중에 시간 되시면 자식들 주게 혹시 사인을 좀….”
옆에서 계속 쫑알대는 협회의 고위직은 대체 무슨 생각인지 연신 거슬리게 굴고 있었다. 알랑거리는 것이 티가 나는 아부는 문도하에게 아무런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저 거슬리고 또 거슬릴 뿐.
그의 개 같은 성정은 무척이나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도 보낸 게 이런 아부꾼이라, 협회가 드디어 그 실낱같은 명줄을 버리고 싶은 걸까.
아니면 그냥 이 인간이 멍청한 걸 수도.
“제 큰딸이 문도하 님을 그렇게나….”
“너.”
“네, 네?”
“꺼져.”
“네? 우악…! 사, 살려…!”
갑작스럽게 마네킹처럼 뻣뻣하게 굳어 버린 협회의 고위직은 그대로 주우욱 미끄러졌다. 사람만 한 손에 붙잡힌 듯 어색한 차렷 자세로 스슥 미끄러지는 모습이 무척이나 비현실적이었다. 한참 비명 소리를 길게 궤적처럼 끌던 그가 튕겨 들어간 곳은 그들 근처에 있던 커다란 천막 안이었다.
그래도 살려 달라는 소리가 바로 나오는 것을 보니 문도하의 성격을 몰랐던 것도 아닐 텐데, 그냥 멍청한 인간이었던가.
그가 방금 사람 하나를 집어 던진 천막은 협회의 대책 본부였다. 바닷가의 백사장이 멀리 보이는 곳에 설치된 이 본부는 괴물들을 막기 위해 국가에서 지정한 방어라인 중 하나였다.
괴물은 바다에서 기어 올라온다. 그리고 불행히도 한국은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었다.
국가 방어를 위해 모든 군인을 일렬로 늘어트려 세워도 바다가 닿은 모든 면적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가능하다고 한들, 군인들이 총화기로 괴물을 상대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몬스터 웨이브가 처음 생긴 15년 전, 바닷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무척이나 많이 죽었다. 몬스터가 바닷물에서 오래 떨어지면 죽어 버리는 양태를 보이지 않았다면 이런 작은 한반도 정도는 순식간에 괴물의 소굴이 되었을 것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지 괴물들은 몇몇 포인트를 중심으로 나타나는 경향을 보였다. 그것에 집중해 연구한 결과 몬스터들이 바닷속에 생긴 어떤 균열 속에서 기어 올라오는 것이 포착되었다.
단지 이 사실 하나를 알기 위해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목숨을 바쳤다. 그러나 추가적인 희생에도 불구하고 균열은 무엇인지, 왜 생겼는지, 또 균열 밑에는 뭐가 있는지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그 사이 한국보다 바다와 닿은 영토가 더 넓기에 더 절실했던 국가들은, 미국의 주도로 공동 연구를 통해 몬스터를 유인하는 기계 장치를 발명했다. ‘몬스터 루어’라고 불리는 기계의 시작이었다.
“도하 님. 무슨 일입니까?”
대책 본부 안에 있었던 모양인지 박남일 실장이 천막 안에서 황급히 달려 나왔다. 기어코 출동하겠다는 문도하가 걱정되어 따라 나온 것이다. 잘못하면 그의 폭주에 휘말려 죽을 수도 있을 텐데. 매번 생각하지만 참 쓸데없는 책임감이 강한 인간이었다.
아주 잠깐 그의 손에 이끌려 벗어났던 자신의 옛날 집을 회상하던 문도하는 곧 차갑게 말했다.
“저거, 내 눈앞에서 치워.”
“네? 무슨…, 아. 알겠습니다.”
성의 없는 그의 손가락질에 잠깐 의문을 표현했던 박남일은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연신 전송했다. 아마 협회에 ‘온건하게’ 권고하는 것이겠지, 쓸데없이 문도하를 자극하지 말 것을.
국가로서 국민들에게 가이드 적성 검사를 강제할 수 있는 협회의 역할은, 안타깝게도 거기서 끝이었다. 가이드 명단을 가지고 있는 건 분명 권력이었으나, 그렇다고 해서 가이드들의 행동까지 통제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몇몇 국가들과는 다르게 한국은 공산주의가 아니었으니까.
덕분에 에스퍼들이 속한 클랜들과의 상하 관계가 때에 따라 무척이나 미묘해졌다. 특히나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문도하의 능력은 그가 속한 국민 클랜의 영향력까지 덩달아 드높이곤 했다. 지금처럼.
과연 조금 기다리자 이번에는 천막 안에서 그나마 낯익은 인물이 하나 튀어나왔다. 아까의 협회 고위직과는 다르게 현장직으로 이 A 포인트에서 자주 마주치는 사무관이었다. 그가 나온 것을 보니 박남일 실장의 권고는 잘 먹힌 모양이었다. 그는 무척이나 과묵한 인물이었으니까.
“그럼, 부탁드립니다. 사무관님.”
“네. 가시죠.”
그나마 덜 거슬리는 인물의 등장에 문도하는 오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안했는지 박남일 실장은 그대로 같이 걸음을 옮겼다. 과연 그가 콕 집어 요청했던 인물답게 웬만해선 입을 다물고 문도하의 신경에 거슬리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 같았다.
“예상 시간은?”
“앞으로 30분입니다.”
“루어 작동은.”
“한 시간 전부터 가동 중입니다. 비작전 지역의 역방향 가동도 이상 없음을 확인했습니다.”
웨이브 초기. 바닷가를 감시할 여력이 없던 탓에 그저 바닷물에서 한없이 기어 올라오는 줄 알았던 몬스터들은, 조사가 진행되면서 뜻밖에도 대부분 시간에 맞춰 일시에 솟아오르는 것이 관측되었다.
그래서 국가는 또다시 엄청난 희생을 내 가며 방어라인을 깔았다. 미국이 만들어 낸 몬스터 루어를 다량으로 수입해 해안선을 따라 촘촘하게 둘렀다. 몬스터 루어는 그냥 가동하면 몬스터를 유인하지만 역방향으로 가동하면 몬스터의 접근을 미미하게 막을 수 있었다.
물론 그저 역방향으로만 가동한다고 해서 몬스터가 완전히 물러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렇게 에스퍼들이 활동하기 좋은 몇몇 지점을 선정해, 이번엔 루어를 제대로 가동한다. 그것도 몬스터 웨이브와 시간을 맞추어서.
그러면 균열을 뚫고 올라온 몬스터들은 부나방처럼 루어가 설치된 이곳으로 자연스럽게 몰려들기 마련이었다.
한국처럼 이렇게 인력과 물자를 들여 방어라인 구축에 성공한 국가들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S급 에스퍼인 문도하는 무척이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
“이제 가 봐.”
“네.”
꺼지라는 듯 흔드는 손에도 사무관은 덤덤하게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앞으로 30분 안에, 문도하 그가 서 있는 A 포인트가 오늘의 루어 가동지가 될 것이다.
중요한 부분만 멋대로 골라 들은 문도하는 오연하게 바닷물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같이 투입되는 에스퍼는 누구인지, 특이사항은 없는지 등등은 귀찮아서 듣지 않았다.
보통 에스퍼들은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되기 전에 작전을 짜곤 했지만 문도하는 이 또한 무시했다. 그의 역할은 그저 이곳에 버티고 있다가 멍청하게 방어라인이 뚫릴 것 같은 위치로 지원을 나가는 것이었으니까.
어스름하게 해가 지는 시각, 노을이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밤에 더 잦게 일어나는 탓이다. 그 장면이 그의 녹슨 시야와 맞물려 이곳이 곧 몬스터의 피로 붉게 물들 것이라는 예고를 보여 주는 것만 같았다.
수많은 목숨으로 둘러싼 방어라인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협회는 존속하고, 또 썩을 수 있었다. 가이드 명단으로 장난질을 하기 시작한 것도 이렇게 방어라인이 제대로 작동한 이후였다.
이 방어진의 아래에 얼마나 많은 시체를 묻었는지, 그 과정을 전부 지켜본 문도하는 조용히 고개를 기울였다. 아직 시야가 전부 녹슬기 전에는 무척이나 그 사실이 아니꼬워서 마찰도 많이 일으키곤 했다. 그와 협회 사이를 중재하며 가이드 명단을 확보해야 했던 박남일 실장의 수명이 뭉텅이로 줄어들던 시절이다.
그마저도 이제는 낡아 빠진 사진처럼 멀어진 감정이었지만.
시야가 완전히 녹슨 후부터는 그저 하루하루가 권태로웠다. 박남일 실장은 자신이 문도하를 통제하는 실력이 늘어났다 여기는 것 같았지만, 그건 사실 그저 아무 일에도 감흥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능력을 쓰다가 산화할 날만을 기다리듯이.
하지만 이제 그에게는 서윤이 있었다.
이 희망적인 순간에 협회의 장난질이 이렇게 그의 눈에 띌 정도로 불거진다는 건 좋지 못한 징조였다. 가령, 현장에는 나와 본 적도 없는 고위직이 굳이 문도하에게 얼굴도장을 찍으러 오는 것과 같은 일 말이다.
역시 거슬렸다.
“알아봐. 무슨 수작인지.”
“…네.”
그때까지도 불안한지 그의 곁에 서서 여기저기 연락을 넣던 박남일이 눈치 빠르게도 대답했다. 그가 말하는 게 협회에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르는 모종의 수작을 의미하는 걸 바로 알아챘다는 듯.
어쩌면 눈치 빠른 그답게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비하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문도하가 다른 것도 아닌 E급 가이드의 명단을 요구했을 때부터. E급 가이드의 존재가 새로운 건 박남일 실장도 마찬가지일 테니까.
그들이 함께한 건 자그마치 십여 년이 넘은 세월이었고, 박남일은 태생적으로 눈치가 빨랐다. 그랬기에 문도하의 곁에서 살아남았겠지만.
어쨌든 유능한 박남일 실장은 오늘 아침 서윤에 대한 정보를 추가적으로 가져왔다. 일전의 간단한 신상명세보다 좀 더 자세해진 내용이었다.
서윤의 사진이 붙은 서류를 떠올리던 문도하는 무심코 생각했다. 지금이 토요일 저녁이니, 서윤은 아르바이트를 쉬고 있겠지.
서윤의 과거 행적을 보니, 대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아직 변변찮은 직업 하나 없이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모양이었다. 그녀가 일하는 그 쓰레기 같은 식당이라면 문도하도 잘 알았다. 멍청한 에스퍼들이 작전에 들어오기 전 안일하게 술을 마시는 곳으로 유명했으니까.
취하지도 않는 술을 즐기는 쓰레기들이 모이는 곳이라.
문득 드는 생각에 기분이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가이드로서 에스퍼라도 잡기 위해 그런 곳에서 일을 한 것일까. 신빙성 있는 가설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위험한 지역에서 살며 그런 일을 하진 않을 테니.
어차피 그만두게 할 예정이긴 했으나, 서윤의 직업은 이미 그의 눈에 거슬렸다. 어떻게 하면 매끄럽게 그딴 일을 그만두게 만들지, 문도하는 머리를 굴렸다. 이렇게 눈치라도 보듯 처지를 고려해 줘야 하는 게 성가시긴 했지만 조금쯤 감내하기로 했다.
하나 일단 당분간은 그대로 두긴 해야겠지. 자신에게 선택권이 있다고 서윤이 착각하게 두는 편이 장기적인 협조에는 이로울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일상생활을 계속 영위할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착각 말이다.
깊어지는 그의 상념을 방해하듯 찢어지는 듯한 사이렌 소리가 A 포인트를 가득 울렸다.
몬스터 웨이브의 시작이었다.
* *
손으로 허공을 쥐듯 팔을 뻗는다. 손끝에 몬스터의 단단한 피부가 걸려들었다는 느낌이 나서 그대로 으스러트릴 듯 주먹을 쥐었다. 그 단순한 동작 하나에 10m 밖에 있던 몬스터가 곤죽이 되듯 으스러졌다.
단단한 피부도 내부에 있던 뼈에는 당하질 못했다. 이리저리 뾰족하게 꺾이고 부러진 뼈가 안에서부터 몬스터를 파괴했다. 몬스터 근처에는 선명한 피가 이리저리 살점과 함께 떨어졌지만 문도하의 행색은 처음과 동일했다. 애초에 접근을 하지 않았으니까.
“크읏, 젠장!”
“쓸모없는 새끼들.”
그의 도움에 겨우 살아남은 에스퍼 하나가 뒤로 물러나며 욕지기를 겨우 삼켰다. 목숨을 구원받은 입장이지만 문도하가 일부러 저렇게 몬스터의 살점이 제게 떨어져 내리도록 공격했다는 것도 알았기 때문이다. 아무리 목숨 걸고 싸우는 입장이라지만 몬스터의 살점으로 목욕을 하는 게 달가울 리 없다. 마구 얼굴을 털어내며 몬스터의 흔적을 지우는 손길이 급했다.
이번 웨이브에서 기어 올라오는 것들은 케치라는 몬스터였다.
해파리를 닮은 외양은 얼핏 보면 익숙했지만, 자세히 보는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다. 마치 사람의 팔을 닮은 것만 같은 두꺼운 촉수 하나하나가 징그럽게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것들은 그 움직임 때문에 촉수라고 일컫긴 하지만 안에는 분명 단단한 뼈대가 들어 있었다.
진짜 해파리처럼 독이 있는 건 아니었으나 각기 제멋대로 움직이는 여러 개의 촉수가 무척 공격적으로 움직였다. 그래서 접근형 에스퍼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몬스터다. 무기를 휘두르는 에스퍼에게도 달갑지 않은 건 마찬가지였다. 흐물거릴 것 같은 촉수에는 단단한 뼈가 있어서 날붙이로도 베기 어려웠다.
그래서일까, 작전을 짠답시고 시간을 허비해 놓고도 다른 에스퍼들은 기어이 방어라인 한쪽이 무너지는 걸 막지 못했다. 설치된 루어까지 파괴되는 바람에 일정하게 억제되던 몬스터들의 이동마저 방향을 잃고 마구잡이로 날뛰었다.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었다.
아니면, 문도하를 끌어내겠다는 짓거리일 수도 있고.
방금 도망친 에스퍼가 협회 친화적인 클랜 소속인 것을 머릿속에 담아 두며 그는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적당히 범위를 좁힌 후에 이번엔 양손을 다 휘둘러 케치 여러 마리를 한 번에 잡는다. 머리와 촉수를 양쪽에서 능력으로 결박한 뒤 잡아 뜯듯이 거칠게 팔을 휘둘렀다. 마찬가지로 허공에서 팔을 휘젓는 모습이었으나 효과만은 확실했다.
펄럭펄럭 떨어지는 몬스터의 사체에서 진한 핏물이 번져 바닷물로 흘러 들어갔다.
사위는 어느새 어두웠다. 바다가 있던 자리는 크나큰 어둠의 공간으로 변해 버렸다. 이제는 환한 불을 켜고 고기를 잡을 어선도, 호화롭게 반짝이며 물 위를 떠다닐 호화 크루즈도 없기에 바다는 영원한 암흑 속에 빠져 버렸다.
“…….”
그 짙은 어둠을 감흥 없이 바라보며 문도하는 다시 한 걸음 움직였다. 오늘따라 왜 이리 걸음이 내키지 않는지 모를 일이다. 마치 뭔가를 예감하기라도 한 듯.
문도하가 나서자 무너진 방어라인 근처에 있던 에스퍼들이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마치 이제 알아서 하라는 듯. 그 일사불란한 모습에는 희미한 불안감이 섞여 있었다. 저번에 문도하가 폭주 전조 증상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꽤나 퍼진 모양이었다.
속으로 혀를 차며 문도하는 다시 여유롭게 손을 움직였다. 자신이 건재하다는 걸 알리는 건 중요했다. 다만 차가운 이성이 이해하는 것만큼 가슴이 따라 주고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그저 의무감으로 팔을 움직이던 문도하는 이내 심드렁히 손을 내렸다.
그저 다 귀찮았다. 그런 게 과연 중요한 걸까.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오연히 해안선을 바라본다. 밤새 싸우는 에스퍼들을 위해 저 멀리 협회 대책 본부 쪽에서는 환한 조명을 쏘고 있었다. 까만 배경을 뒤로 피가 흩날리는 그 장면이 그저 희극 무대의 연출인 것만 같았다.
“문도하, 이 새끼야!”
“후….”
그가 손을 놓자마자 다른 에스퍼들의 부담이 가중된 모양이었다. 이번 웨이브에 대형종은 없었으나 몬스터의 수가 유난히 많았다. 케치가 원래 웨이브에 출현하는 숫자가 많은 편이긴 하지만 이번엔 정도가 좀 심하다.
최근 들어 이렇게 예상치를 벗어나는 웨이브가 많았다. 클랜에서도 이런 사태를 심각하게 주목하고는 있지만, 뾰족한 수가 달리 있을 리 없다. 그저 에스퍼들을 많이 모으는 수밖에.
한숨을 내쉰 문도하는 다시 신경질적으로 손을 움직여야 했다. 어차피 거슬리는 일이라면 그냥 몬스터를 없애는 편이 좋다. 잔소리하는 박남일 실장을 이렇게 염동력으로 구겨 버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몬스터 소탕은 그 많은 숫자 때문에 새벽녘까지 이어졌다.
어스름하게 다시 제 얼굴을 보이는 바다를 보면서 문도하는 어느새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삐딱하게 서 있었다. 멍한 시선은 뒷정리하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훑고 있었다. 불안하다는 듯 그를 흘긋거리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에스퍼의 역할은 몬스터를 죽이는 것에서 끝난다. 이제 그 뒷정리는 사체를 수거하고, 가공하는 자들의 일이다. 아이러니하게도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한 이래로 몇몇 시장은 빠르게 발전하고 있었다. 신소재처럼 새롭게 등장한 몬스터 사체들이 좋은 자양분이었다.
몬스터의 사체가 산을 이룬 바닷가는 핏빛이었다. 그의 시야 또한.
다시 잔뜩 녹슬어 버린 시야를 보면서 문도하는 깨달았다. 다시, 올 게 왔구나 하는 것을.
솔직히 말하면 예상 착오였다. 한 번이긴 해도 어쨌든 이서윤의 가이딩을 받았으니 능력을 썼다고 바로 또 폭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장시간 연달아 능력을 쓴 것이 치명적이었던 모양이라고, 문도하는 덤덤히 분석했다. 빠르게 붕괴하는 속과는 다르게.
그 고요한 폭주를 바로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그저 소리 없이 침몰하는 배처럼 겉으로는 오연히 시선을 던지고 있을 뿐이었으니.
그는 속을 좀먹는 거대한 힘과 머리에 구멍을 숭숭 뚫는 것 같은 상실감의 사이를 위태롭게 질주했다. 제 목숨값을 저울질하던 문도하는 이내 고개를 푹 숙였다. 위태로운 줄타기는 줄 자체가 끊어지며 종말을 선고했다.
그대로 모든 걸 찢어발길 거대한 힘이 심장 어림부터 바람 소리를 냈다. 고막을 터트릴 것 같은 힘이 그대로 폭발하려는 때, 이번에는 머릿속에 환한 빛이 퍼졌다.
이서윤.
그 이름이 생각나는 순간 귓가를 시끄럽게 울리던 바람 소리가 단번에 멎었다. 숨 막히는 정적은 그 자리를 무겁게 차지했다. 둥둥 울리는 심장 소리가 다시 정상적으로 들릴 즈음, 문도하는 다시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지금 아프게 제 몸을 찢어발기는 폭주보다 더 간단한 일이 있다는 걸 본능이 깨달았기에.
등 돌린 문도하는 일단 겉보기엔 무척이나 멀쩡하게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하고 그의 행동을 보며 긴장하던 몇몇 에스퍼들마저 이내 그에게서 신경을 완전히 꺼 버렸다.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고요한 폭풍을 완전히 알아차린 사람은 없었다. 다들 그저 시한폭탄의 수명이 아직 더 남은 모양이라며 가볍게 넘어갔다.
자신의 깨진 영혼을 밟아가며 문도하는 계속 걸음을 옮겼다.
그의 단 하나의 빛을 향해.
* *
몸이 나른하게 휴식을 취했어야 하는 꿀 같은 주말에 서윤은 깊은 좌절에 빠져 있었다.
문도하가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하고 간 금요일 저녁부터 서윤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질 못했다. 무슨 정신으로 방에 올라왔는지조차 생각나지 않았다. 그저 무너지듯 쓰러져 기절했을 뿐이다.
멍청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다. 차라리 그대로 몸을 돌려 도망쳐서는 다른 곳에서 기절했어야 했다. 눈을 뜨니 이미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는 걸 발견했을 때의 그 참담한 심정이 그녀의 어깨를 짓눌렀다.
오늘 다시 찾아오겠다던 문도하의 소름 끼치는 예언을 떠올리며 그녀는 한층 더 몸을 웅크렸다. 서윤은 갈 곳이 없었다. 그것도 이 밤중에.
까무룩 기절한 탓에 그녀의 잠은 깊었다. 그 덕에 이 방에서 일어났던 참극을 되새길 정신도 없었던 건 차라리 다행이었다. 어쨌든 그리도 깊은 잠으로 하루를 꼬박 보내고 나니 도통 다시 잠들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은 당장이라도 문도하가 찾아올까 봐 그게 무서웠다.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밤 11시 50분. 10분만 지나면 그가 말했던 ‘오늘’은 지나간다. 이성이 뭉개져 초라해진 몰골로 그녀는 단지 그것만을 바랐다. 오늘이 지나가기를. 그러면 문도하가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숨을 잔뜩 죽이며 남은 10분을 견뎌 냈다.
그렇게 오늘이 완전히 지나가 버렸다.
탄식 같은 한숨을 쉬면서 서윤은 양손으로 머리를 짚었다. 해가 뜨자마자 조금 위험하더라도 방을 나서야겠다. 그렇게 옆 도시든 어디든 넘어가야지. 아르바이트는 그만둬야 할까. 거주지만 옮기면 과연 자신을 못 찾아낼까. 얼마나 더 위험한 곳으로 가야 그가 나를 못 찾을까.
에스퍼는 권력의 상징이었다. 과연 서윤이 발버둥 친다고 뭐가 달라질까?
문도하의 가이드.
이 단어가 머릿속을 떠나질 않았다. 허공을 향해 눈물을 흘릴 때조차 뇌리에 새긴 듯 잊을 수가 없었다. 대체 무슨 소리일까. 설마, 정말 페어가 될 운명이라는 건 아닐 텐데.
입술을 깨물며 서윤은 그 단어를 애써 무시했다. 상식적으로 말이 되질 않는다. 게다가 자신은 여전히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에스퍼와 가이드의 운명은 이렇게 긴가민가한 감정이 아니었다. 크나큰 확신 속에서 그들은 페어를 맺는다고 했다.
아무리 자신의 등급이 낮다 한들, 이렇게까지 거부감이 드는데 어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듣기로는 에스퍼가 살고자 자연스럽게 가이드를 찾듯, 가이드 또한 자연스럽게 에스퍼를 구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고 했다. 서윤은 문도하를 위해 노력하고 싶지 않았다.
일요일로 넘어가는 새벽, 서윤은 침대에서 웅크리고 앉아 하염없이 어둠을 바라봤다. 이러면 어둠이 물러가기라도 할 듯이.
문도하의 말은 거짓임이 틀림없다. 그저 서윤을 농락하기 위한 수작일 뿐. 이렇게 고약한 심성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게 큰 불행으로 다가왔다.
어쩌면 서윤이 조금만 멀리 도망쳐도 그는 그녀를 찾길 포기할지도 몰랐다. 그렇게까지 성가신 일을 굳이 할 인물이 아닌 듯했으니까.
그저 만만했던 것이겠지. 제 처지가.
자조적으로 제 상황을 곱씹던 서윤은 길고 긴 상념을 접었다. 이제 몇 시간만 더 지나면 해가 뜰 것이었다. 그렇게 서윤이 저도 모르게 긴장을 탁 풀어 버린 그때였다.
쿵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그녀의 집 문 앞에 ‘내려서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와 함께 숨이 덜컥 멈췄다. 자신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은 그녀는 흐느끼듯 숨을 참았다. 잠깐의 침묵에 이어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무척이나 미약한 노크였지만 이상하게도 천둥소리보다 크게 들렸다.
본능적으로 저 노크의 주인공이 문도하라는 것을 알았다. 그가 아니면 철제 계단을 소리 없이 올라 문 앞에 내려설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 리가 없으니까.
모른 척하면 이대로 가주지 않을까 하는 순진한 희망은 너무나도 금방 짓밟힌다.
“…또 그러네….”
어딘가 힘이 잔뜩 빠진 목소리가 문을 건너 넘어왔다. 그녀가 안에 있다는 걸 확신하는 음성에 그저 탈력감밖에 들지 않았다. 벌써부터 차오르는 눈물이 시야를 부옇게 만든다.
잠깐 침묵하던 문도하는 한숨을 쉬는 듯했다. 그리고 그 순간, 현관 안쪽에 빠짐없이 걸려 있던 걸쇠들이 일제히 촤르륵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그제야 문도하의 능력이 염동력 계열이라는 걸 다시 떠올린 서윤은 이불을 칭칭 감으며 반사적으로 침대 구석으로 물러났다.
낡은 현관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귀를 아프게 파고든다. 이번에는 놀랍게도 신발을 벗은 문도하가 천천히 침대를 향해 걸어왔다. 저벅저벅 망설임 없이 들어오는 문도하는 어딘가 지친 기색이었다.
“왜 안 열어 줬어….”
칭얼거리듯 흘러나온 음성이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문도하의 몸도 반쯤 흘러내리듯 서윤의 위로 타고 올라온다. 자연스럽게도 제 영역을 침범하는 그의 모습에 서윤이 더 물러날 곳 없는 벽을 파고들었다.
“……사람 가지고 놀지 말아요.”
“힘들어…….”
서윤의 이불을 잡아끌며 문도하가 그녀를 잡아당겼다. 반항하려던 서윤은 힘이 빠진 그 손길이 의아해서 반사적으로 문도하를 살폈다. 매달리듯 서윤에게 상체를 기울이는 그의 모습이 역시나 조금 이상했다.
어제 그녀를 찾아와 단 몇 마디 말로 서윤을 잔뜩 뒤흔들었던 남자는 여기에 없었다. 그저 한없이 본능에 휩쓸려 절실하게 팔을 뻗는 에스퍼만 있을 뿐.
낮에 봤던 모습과 비교했을 때 무척이나 흔들리고 있다는 게 티가 났다. 살풋 찡그린 이마는 고통을 참는 듯했고, 그녀와 눈이 마주치면 슬쩍 풀어지는 입가는 긴장감이 없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맨 처음 그녀의 방에 쳐들어올 때도 이런 느낌이었던 것 같았다.
설마, 폭주 직전인 건가.
신빙성 있는 가정이 떠오르자 이번엔 등줄기에서 식은땀이 났다. 문도하를 시한폭탄처럼 묘사하던 TV 방송이 생각났다. 설마 여기서 이렇게 폭주하고 마는 걸까. 그러면 이 일대가 정말 쑥대밭이 될 텐데.
어딘가 정신마저 혼미한 것 같은 그는 행동도 잔뜩 흐트러져 있었다. 폭주의 전조 증상일지도 모르는데, 이게 제정신인 문도하의 모습보다 덜 무서운 건 의외였다. 비현실적인 감상에 서윤은 난처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왜인지는 모르지만 문도하는 그녀가 제 가이드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정신이 없어 보이는 지금이라면 어쩌면…….
“하, 하지 마세요….”
“왜…?”
“손… 잡아 드릴게요.”
“흐응….”
벌벌 떨리는 손을 내밀며 서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신체가 접촉하기만 하면 가이딩은 가능하다. 그 접촉이 깊을수록 효과가 좋지만, 보통은 손부터 잡으며 가이딩을 하는 게 일반적이라고 들었다.
물론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기에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도 만약 그가 정말 정신이 없다면 이 정도로 넘어갈 수 있지 않을까. 또다시 끔찍한 경험이 도래할까 봐 그녀는 그야말로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키지 않는다는 듯 눈을 가늘게 뜬 문도하가 그 와중에도 내미는 그녀의 손은 착실히 잡아 왔다. 그의 손을 잡자 아주 잠깐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가 스러졌다.
깍지를 낀 그가 불쑥 그녀를 끌어당기더니 그대로 제 볼에 손등을 부빈다. 그 어린애 같은 행동에 다시 서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로 정신이 없는 게 맞는 모양이었다. 낮의 날카로웠던 그 눈빛은 온데간데없었다.
정말 여기서 폭주하면, 어쩌지.
지금 자신이 걱정해야 하는 것이 목숨인지 몸인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긴장감만 치솟아 올랐다. 이불을 감고 있는 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덕분에 간질거리던 그와의 접촉에서 서윤은 완전히 신경을 접을 수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은 문도하의 가이드가 아닌데, 여기 이렇게 두면 안 되는 게 아닐까. 하지만 폭주 직전인 사람이 이렇게 멀쩡하게 능력까지 쓰면서 돌아다닐 수 있는 건지 의문이었다.
평생 이쪽을 애써 멀리하며 살았기에 서윤은 온통 혼란스럽기만 했다.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하나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이 작은 접촉은 부싯돌을 당기는 행위밖에 되질 않았다.
“이서윤….”
손이 맞닿는 순간부터, 아니 사실은 서윤의 근처에 도착한 순간부터 문도하는 눈이 하얗게 머는 것만 같았다. 매번 빨갛기만 하던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니 그대로 정신이 같이 증발하는 줄 알았다.
당장이라도 가슴에서는 흉포한 힘이 비집고 튀어나오려 했다. 그의 갈비뼈를 내부부터 부러트리며 잔인하게 솟아오르려고 웅크린 힘이다. 반면 그의 생존 본능은 조금만 더 다다르면 살 수 있다고 외친다. 그 팽팽한 줄다리기는 아슬아슬하게 문도하를 이곳으로 이끌었다.
날카로운 칼날 위를 걷는 것 같던 정신이 서윤의 손을 잡는 순간 놀랍도록 진정되었다. 자신의 영혼을 짓밟느라 상처투성이였던 발이 빠르게 통증을 잊어 갔다. 그 달콤한 유혹에 문도하는 환히 웃음 지었다.
역시, 너야.
“잠깐….”
“조금만 더…….”
이 거대한 환희 앞에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입술을 움직여 가볍게 서윤의 손등에 흔적을 남긴 문도하의 몸이 들썩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서윤이 반사적으로 팔을 잡아 빼려 했지만 그는 꽉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이대로 놓아줄 수 있을 리 없다. 애처롭게 자꾸만 꽁꽁 몸을 굽히려고 하는 서윤의 위로 슬며시 올라갔다. 잡은 손을 여전히 단단히 쥔 채로 그녀의 머리 근처 벽에 포개 놓는다.
“손, 손만…….”
“왜?”
왜 도와주지 않지? 왜 자꾸만 하지 말라고 할까, 제 가이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렇게 아픈데.
“왜?”
“…이거, 놔…!”
자꾸만 미운 소리가 튀어 오는 입술이 원망스러웠다. 어깨를 매섭게도 내려치는 팔을 마저 잡아챈 문도하가 서윤을 거칠게 벽으로 밀어붙였다. 크게 뜨인 눈에는 물기가 촉촉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안 돼.”
놓아줄 수 없어.
“흡…. 제발….”
고개를 갸우뚱 기울인 문도하가 멍하니 서윤의 얼굴로 시선을 던졌다. 그의 새빨간 세상에서도 하얀 그 얼굴을. 홀린 듯 고개를 숙여 입술을 마주쳤다. 단단히 닫힌 입술이 야속하게도 길을 열어 주지 않았다.
애원하듯 혀를 살짝 세워 조금씩 그녀의 입술을 핥았다. 농밀한 접촉이 계속될수록 조금씩 갈증이 채워지는 기분이 든다. 아니, 어쩌면 갈증을 더 부추기는 것도 같았다.
이해할 수 없는 상반된 감정에 몸이 양쪽으로 찢어질 것만 같았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어 한 손으로 서윤의 얼굴을 콱 잡았다. 강제로 벌어진 입술을 무작정 파고들었다.
“으, 읍! 으…!”
흐물흐물 녹아내릴 것 같았다. 혀끝을 힘주어 세우고 있는데도 서윤 안의 점막에 닿는 순간 사르륵 물러지는 것만 같았다. 전해져 오는 타액이 메말라 있던 그의 영혼에 숨을 불어넣는다. 차오르는 생명력이 그의 어긋난 영혼을 조금씩 보듬었다.
그의 영혼을 가여이 여긴 탓인지 이서윤의 몸에서도 점점 힘이 빠졌다.
“아, 흐, 이상, 이상해…. 읍.”
그 협조적인 반응에 다시 입술을 거칠게 막으며 계속해서 이서윤을 갈구한다. 그녀를 아예 다 집어삼킬 기세로.
“하…….”
“흐…….”
서윤은 자꾸만 정신이 연기처럼 흩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의 손을 잡았을 때 애써 무시했던 감각이 저릿저릿할 정도로 그녀를 거세게 엄습한다. 입술을 핥으며 서윤을 내려다보는 그는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정신이 나간 듯 행동했다.
잠깐 그녀를 관찰하던 문도하가 고개를 기울인다. 입술을 다시 마주하는가 싶었는데 고개를 더 숙이더니 이번에는 그녀의 목덜미를 탐했다. 하필 집 앞에서 범해졌던 그 부분이었다.
자신이 남긴 흔적이 마음에 든다는 듯 여러 번 핥던 그가 이번엔 이를 세웠다. 따끔한 아픔이 서윤을 파고들었다. 그 아픔이 쌓이고 쌓인 그녀의 위화감을 자극했다.
“아…….”
“좋아…….”
역시 이런 저릿한 감각은 정상이 아니다. 또 약에 당한 건 아닌가 싶어 정신을 또렷하게 차리려고 해도 쉽지 않았다.
한참 그렇게 그녀의 목덜미를 남김없이 탐닉하던 문도하의 손이 불쑥 상의 안으로 들어왔다. 차가운 손이 몸에 닿자 깜짝 놀랐다. 덕분에 퍼뜩 정신이 든 서윤이 문도하의 어깨를 잡았다.
그게 무엇을 자극했는지 문도하의 얼굴이 설핏 찡그려졌다. 의아하게 그 표정을 살피는데 순간 시야가 빙글 돌았다.
요령 좋게 그녀를 엎드리게 한 문도하가 끌어안듯 그녀의 등 뒤에 달라붙었다. 딱딱한 품이 왜 포근하게 느껴지는지 서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는 쉬지 않고 그녀의 맨살을 찾아 옷을 파헤쳤다. 입고 있던 티셔츠가 밀려 올라가자 등줄기가 서늘했다. 척추 부근을 따라 자근자근 이를 세우는 감각이 선연하게 꿈틀거린다. 이윽고 쑥 내려가 맨살을 드러내는 바지의 감각에 서윤은 어느새 뭔가를 기대하고 있는 자신을 믿을 수가 없었다.
“또, 약, 이지, 이런 거, 이상, 흣, 해……!”
“……그런 거 아니라니까. 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애처로울 만큼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한 문도하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분명 믿을 수 없는 사람인데 서윤은 어느새 그 말을 깊이 믿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녀가 혼란과 싸우는 사이 속옷까지 내려 버린 문도하가 손가락을 세웠다.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의아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대로 그녀의 밀지를 스륵 훑어 내렸다. 손이 처음 회음부에 닿는 순간 등줄기가 딱딱하게 굳었다. 느릿느릿한 손길이 잘 다물린 입구를 지나 살짝 돋아 오른 곳까지 거침없이 움직였다.
타인의 감촉이 이렇게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한 곳이다. 손가락의 움직임이 너무 선명하게 느껴져서 서윤은 몸부림쳤다. 그의 손가락이 닿는 부분마다 불이 붙는 것만 같았다. 생소한 쾌락에 그녀는 쉽게 휩쓸릴 것만 같았다.
그러나 문도하가 다녀간 다음 날을 떠올린 서윤이 애써 눈을 똑바로 떴다. 분명, 뭔가 이상한데.
한참을 다물린 그녀의 입구를 빙글빙글 돌던 손가락이 다시 톡 하고 작은 열매를 건드린다. 메마른 가운데 그 감촉은 그저 아픈 자극일 뿐이었다.
“왜 안 젖지?”
“읏…….”
아슬아슬하게 그녀의 입구를 콕콕 찍어 대는 손길에 서윤은 저도 모르게 손을 꼼지락거렸다.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대체 왜 그런 기분이 드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확연히 느껴졌다. 기대감에 빠진 발끝이 자꾸 오므라들었다.
마치 본능과 줄다리기를 하는 듯 서윤은 이불을 그러쥐었다. 이러면 안 된다고 매섭게 자신을 질책하듯이.
흘러들어 오는 그녀의 감정을 느낀 문도하가 다시 고개를 기울였다. 정말 이유가 궁금하다는 얼굴을 하고는 한참을 그렇게 그녀의 아래를 희롱한다. 이러면 해결될 것이라는 듯이. 그러나 서윤의 아래는 움츠러든 채 그의 침입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걸 본 문도하는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뭔가 뜻대로 안 된다는 것처럼. 그리고는 곧 뜨거운 것이 아래에 닿았다.
“아……!”
“움직이지 마.”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아무렇지도 않게 한 그가 다시 서윤의 밀지에 얼굴을 박았다. 애써 부여잡던 정신이 무색하게 노골적인 감각이었다. 이불을 쥐어 잡은 손은 이제 다른 이유로 애꿎은 천을 괴롭히고 있었다.
뜨거운 그의 혀가 그녀의 아래를 사정없이 훑어 댔다. 부들거리는 팔은 몸을 제대로 지탱하지 못하고 흔들렸다. 억눌린 신음이 자꾸만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정신, 차려야 하는데.
그 순간 퓨즈가 나가듯 그녀의 가녀린 이성이 아래로 침잠했다.
“으응…….”
한참을 정성스럽게도 이서윤의 아래를 핥은 문도하는 겨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정신이 이토록 몽롱한 것을 보니 꼭 꿈과도 같았다. 어쩐지 숨쉬기가 불편했다. 곧 터져 나갈 것처럼 몸이 들썩이기도 했다. 덜걱거리는 정신을 억지로 붙잡아 가며 몸을 움직였다. 이서윤을 향해.
갈증이 도무지 해소되지 않았다. 붙다가 만 영혼이 아직도 어긋난 채 피를 흘리고 있었다. 녹슬어 삐걱이는 시야를 다시 하얗게 물들이고 싶다. 그런 원초적인 본능만 남아 손을 움직인다.
퉁 튕겨 오르는 성기가 갑갑한 속옷을 벗어났다. 좀 전부터는 신음을 감추지 않는 이서윤의 팔을 놔주었다. 감미로운 목소리를 향해 다가간다. 교접하는 짐승 같은 자세로 서윤의 목덜미를 물었다. 그러나 가만히 있을 뿐, 그를 보듬어 주지 않는 그녀가 야속하고 또 야속했다.
양팔로 서윤의 가느다란 허리를 감았다. 품에 넣었는데도 금방 빠져나갈 것 같은 가녀림에 이상하게 마음이 초조했다. 미약하게 움직이는 그녀를 팔까지 그러모아 꽉 끌어안았다. 그리곤 슬그머니 허리를 움직인다.
선단에 닿는 입구의 감촉에 순간 정신이 나갈 뻔했다. 다가올 환희를 예고하듯 번쩍이는 쾌감이었다. 이 뜨겁고 좁은 곳에 파고든다면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숨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충분히 젖은 그곳에 자신을 밀어 넣자 다시 한번 눈앞이 새하얘졌다.
“으응……!”
“하…….”
잡아먹히는 것 같은 감각에 애가 닳았다. 허리가 녹아내려 그대로 이서윤의 안으로 쏟아질 것만 같다. 농밀한 접촉에 조금씩 충만감이 차올랐다. 그녀와 하나가 된 채로 그저 굳어 버리고 싶었다.
“아, 아…! 흐응, 응…….”
“괜찮아, 쉬이…….”
하지만 오늘은 조금 성급했는지 서윤이 미미하게 몸을 비틀었다. 살짝 부어 있던 아래에서 아픔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그 움직임은 또 다른 쾌감이 되어 전해졌다. 서윤의 아픔은 곧 문도하의 흔적이었다. 그는 그것을 그렇게 이해했다. 그러니 순순히 놔줄 수 없어서 더욱 꽉 그녀를 붙잡는다.
그의 침입에 자꾸만 다리가 풀리는지, 서윤은 문도하의 팔을 붙잡듯 매달렸다. 애초에 팔까지 잡힌 불편한 자세라 선택지가 없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그녀의 반응에 가이드를 갈구하는 에스퍼의 본능이 제어를 잃고 서서히 날뛰기 시작했다. 그녀가 먼저 그를 잡아 주었으니까.
이대로 씹어 삼킬 수만 있다면.
갈급한 심정으로 문도하는 허리를 움직였다. 찰싹거리며 살이 부딪는 소리가 방을 울렸다. 화끈한 아래쪽의 감각이 계속될수록 이서윤의 신음성이 커졌다. 그가 미묘하게 허리의 방향을 바꾸자 이번엔 그녀의 허리가 팽팽하게 휘었다.
쾌감이 지나친지 이서윤의 눈꼬리에는 어느덧 방울방울 눈물이 매달렸다. 여전히 흉포하게 허리를 흔드는 문도하에게는 그 또한 다디달 뿐이다. 다만 어딘가 부옇게 흐려진 그녀의 감정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허리의 움직임이 점점 성마르게 고조되었다.
“아, 아, 으응, 흑, 그만…….”
“가만히, 응?”
점점 거칠게 움직이는 문도하 때문에 서윤은 허리를 슬쩍 비틀었다. 그러자 득달같이 그녀를 달래듯 구는 문도하의 음성이 따른다.
엎드려 있는 게 버거워 그녀는 몸에 힘을 탁 풀어 버렸다. 그러자 문도하는 기꺼이 그녀의 몸을 받쳐 들며 지탱해 주었다. 몸이 맞닿는 면적이 늘어나자 쾌감도 늘어났다. 저번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하반신이 통째로 저릿저릿하게 울리는 기분도 들었다. 그가 꽉 그러쥔 곳의 피부가 전부 붉게 달아올랐다.
그런데도 진득한 행위 속에서 서윤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그게 의아해서 힘겹게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으나, 눈앞은 온통 어둡기만 했다.
* *
콰득 하고 발목이 물리는 감각에 서윤은 가물거리는 눈을 떴다. 시야가 이상하게 흔들거렸다. 중간중간 정신이 아득히 멀어지더니 기어코 기절했던 모양이었다.
“아……!”
“정신이 들어?”
문도하의 음성보다 더 먼저 느낀 건 아래쪽이 활짝 열리는 감각이었다.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던 서윤은 문도하가 아직도 제 밀지에 그를 욱여넣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깨달음과 동시에 미뤄 두었던 쾌감이 치달아 등이 휘었다.
문득 눈이 부셔서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자 즉각 달려든 문도하가 그녀의 팔을 머리 옆으로 내리눌렀다. 매트리스가 출렁일 정도로 거친 행동이었다.
그게 의아해 시선을 보내자 문도하는 눈길을 피하는 일 없이 그녀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이서윤.”
퉁퉁 부은 눈이 겨우 떠졌다. 문도하는 처음보다도 더 집요하고 더 끈질겼다. 안개가 낀 듯하던 정신도 서서히 맑게 개었다. 그런 그녀의 귀에 문도하의 목소리가 울린다.
“하…, 미친 감각이군, 정말.”
“아, 흣…….”
입에서 나가는 신음성이 서서히 의식되기 시작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윤이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이번엔 얼굴을 강하게 잡아채는 손길이 있었다. 이제야 그의 상태가 조금 의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심코 바라본 문도하의 눈빛은 다시 날카로워져 있었다.
설마……?
“이래도 네가, 내 가이드라는 걸 못 믿겠어?”
“말, 도 안 돼…, 아……!”
어느새 정신이 돌아온 문도하는 이제 본능이 아닌 자신의 의지로 허리를 흔들고 있었다. 거추장스러운 옷은 전부 벗어 던진 지 오래였다. 그 매끈하고 단단한 몸을 바라본 서윤도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그저 몽롱할 때 다가오는 희끄무레한 형체가 아니라, 맨 살갗을 보인 문도하의 모습에 눈이 크게 뜨인다.
“다리, 더 벌려.”
자그마한 움츠림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그녀의 다리를 잡아 활짝 벌린 문도하가 허리를 크게 튕겼다. 끈질기게 남은 쾌락이 서윤의 안쪽에서 다시 날뛸 정도로.
입을 벌리며 자지러진 서윤이 겨우겨우 손을 뻗어 문도하의 팔을 잡았다. 손톱 세운 손길이 무척 다급했다. 그 손마저 매정하게 잡아챈 문도하가 이번엔 서윤의 팔목 안쪽을 세게 물었다. 화끈한 감각이 팔을 타고 흐르며 서윤에게 새기듯 무언가를 남긴다.
“잘 봐, 약 같은 핑계 대지 말고.”
“으, 아…! 거짓, 말, 아앗…!”
못 믿겠다는 소리가 나오자 다시 그의 허리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배 안을 둔중하게 울리는 쾌감에 서윤이 말을 잇지 못하고 도리질을 쳤다. 계속해서 찰싹거리는 물기 어린 소리가 고막을 찢는 것만 같았다.
“증거를 보고도 못 믿겠다는 거야? 이서윤.”
“흣…, 으응…….”
정말이지 쾌락에 잠겨 익사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다시금 몽롱해지는 정신이 야속하다. 이대로 의지를 빼앗기는 기분이 불쾌했다.
똑바로 현실을 보려는 그녀의 노력을 빤히 바라보던 문도하는 다시 서윤의 팔목 안쪽을 물었다. 제 말을 똑바로 알아들으라고 경고하듯이.
그 의도를 왜인지 정확히 이해한 서윤은 다시 의문을 잊고 멍한 표정이 되었다. 억지로 눈을 마주친 문도하가 싱긋 웃는 것이 보인다. 그녀의 예상대로 정신을 차린 문도하는 훨씬 더 위험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온몸으로 체험하며 서윤은 다시 쾌락에 몸을 맡겼다. 머리가 한없이 무겁고 또 무거웠다.
* *
눈을 찌르는 빛에 서윤은 슬며시 눈꺼풀을 올렸다. 이렇게 눈을 뜨는 행위가 이상하게 무서웠다. 빈방을 바라보고 나서야, 그녀는 현실을 더는 외면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몸을 가릴 생각도 못 한 채 서윤은 멍하니 몸을 일으켰다. 관절이 덜그럭거리며 아픔을 호소했지만, 몸을 가누며 일어나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영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 같아서.
다시 확인하듯 둘러본 방 안은 고요했다. 문도하의 흔적이라고는 제 몸에 남은 것밖에 없었다. 이불을 덮을 생각도 못 한 채 서윤은 팔로 몸을 감쌌다. 이불 따위로는 그를 막을 수 없었으니까. 단단한 철문조차 S급 능력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그런데 자신이 정말 그의 가이드라고.
서윤은 어제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문도하가 눈빛을 되살리는 걸 똑똑히 목격했다. 대화도 안 되고 그저 돌진하는 어린애 같았던 그가 의지를 담아 서윤에게 말을 걸었다. 폭주하는 에스퍼를 진정시킬 수 있는 건 그 에스퍼의 운명인 가이드밖엔 없었다.
정말, 페어가 될 운명인 걸까. 우리가.
그 생각을 하니 맨 처음 문도하가 이곳에 침입했을 때 들렸던 환청이 다시 생각났다. 아무 이유 없이 그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던 자신도.
그가 이따위 연기를 한다는 의심도 들지 않았다. 맨살로 느낀 감각은 진짜였으니까.
【도와줘.】
다시 그 환청이 들리기라도 하는 듯 서윤은 제 머리를 감쌌다. 이제는 그 기이한 경험을 그저 약의 탓으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가 없었다. 고작 며칠 사이에 서윤의 인생은 송두리째 뽑혀 뿌리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연이은 충격에 서윤이 느낀 건 다름 아닌 무력함이었다. 살면서 맛보는 가장 큰 암담함이다. 어쩌면 맨몸으로 삼촌의 집에서 도망쳐야 했을 때보다도 더.
자신이 가이드가 맞다면, 그리고 이게 약 따위의 조화가 아니라면 정말 큰 일이었다.
쾌락에 풀어져 버리는 자신의 정신이 서윤은 몹시 두려웠다. 거의 평생을 삼촌의 꼭두각시처럼 살아온 그녀였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정신을 저당 잡혀 흔들리는 꼴이 정말이지 너무나도 싫었다. 비록 그 끝에 쾌락이 달콤한 과실처럼 들이밀어 진다 하더라도.
무작정 가출한 후 서윤은 이리저리 떠돌아다녀야 했다. 숙식이 제공되는 일부터 시작하며 조금씩 돈을 모았다. 거처가 없다 보니 위험한 일도 많았지만 겨우겨우 도망치며 살았다. 그렇게 악착같이 모은 돈은 무척 적었어도 행복했다. 바닷가와 지나치게 가까운 이런 방이라도 얻을 수 있었으니까.
그녀는 자신의 의지대로 걷고 있었으니까.
집을 얻고 한숨 돌렸던 몇 달 전의 행복이 그야말로 산산조각이 났다. 그녀가 느낀 안락함이 거짓이었던 양 새털처럼 가볍게도 흩날렸다. 문도하의 손짓 한 번에.
진짜인가? 겨우 이게? 이딴 게 운명이라고?
로맨스 영화나 책에서 묘사하던 아름다운 운명 따위는 여기에 없었다. 그저 본능만 남아 가이드에게 손 뻗는 에스퍼가 있었을 뿐. 이 갑갑한 현실에서 서윤은 이제 눈물 흘릴 기운도 없었다.
그의 가이드라는 걸 확인받고 말았다.
가이드. 그 단어를 자세히 곱씹자마자 숨이 막혔다. 저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던 서윤은 겨우겨우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가이드. 자신은 결국 가이드였다. 매번 삼촌으로 하여금 그녀를 가장 위험한 곳으로 내몰게 하던 그녀의 정체성.
결국 도망칠 수 없었나.
그저 몸이 노려지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왜냐면 그녀가 하필이면 많고 많은 에스퍼 중 문도하의 가이드였으니까.
이건 그녀를 억압하고 노릴지도 모르는 대상이 국가로까지 확대되는 일이었다. 몬스터가 창궐하는 세상에서 에스퍼가 가지는 의미는 그런 것이니까. 온 세상이 그녀를 가두는 새장이 된 것만 같았다. 가도 가도 빠져나갈 길이 없는 커다란 새장.
도무지 문도하를 원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운명이라는 건 그의 뜻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는 머리가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그녀를 찾아내고 만 그를 원망하지 않고는 배길 수가 없다. 하필이면 그가 그녀가 가장 두려워하는 부분을 틀어쥐려 하고 있었으니까.
인형처럼 갇혀 사는 삶이 서윤은 죽기보다 싫었다.
절망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에 그녀는 한참이나 잠겨 있어야 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야 애써 모든 것을 외면하며 몸을 일으킨다. 허리, 골반, 발목 그리고 그녀의 밀지까지.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지만 이 또한 무시했다.
그대로 욕실로 뛰어 들어가 미친 사람처럼 몸을 씻어 냈다. 몇 번이나 머리를 감고 또 몸을 닦아내었는데도 뭔가가 진득하니 달라붙어 있는 것만 같았다. 문도하의 손길처럼.
살갗이 아프도록 문지르고 나서야 방으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도 어딘가 부족한 것 같아서 이번엔 분주하게 집을 청소했다. 더러워진 이불이나 침대 시트를 전부 세탁기에 처박으면서 잠깐 고민했다. 마음 같아선 전부 버리고 싶었지만 그러면 당장 덮을 것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통장의 잔고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제 처지가 서럽다.
서러울수록, 마음속에 울분이 소복소복 쌓일수록 일부러 더 부산스럽게 움직였다. 하지만 그녀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답답함은 가시질 않았다.
옷장까지 전부 뒤집어 정리하던 서윤은 더는 손댈 곳 없는 작은 방을 둘러봤다. 이대로 방에 있자니 숨이 막혀 죽을 것 같았다. 늘 안식처였던 그녀의 방은 더는 서윤을 보호하지 못했다.
어느덧 해가 뉘엿뉘엿 지는 일요일 오후. 서윤은 결국 무작정 방 밖으로 뛰쳐나갔다. 곧 어둠이 내려앉으면 더 위험해질 것이라는 점도, 당장 나가봐야 갈 곳이 없다는 점도 고려하지 못했다. 그저 일단은 바깥 공기를 마셔야 숨이 쉬어질 것 같았다.
철제 계단이 내는 시끄러운 소리를 한 귀로 흘리며 서윤은 비틀비틀 동네를 돌았다. 해가 저물어 가기 때문일까, 한층 고요해진 동네에는 여전히 적막히 깔려 있었다. 마치 아무도 살지 않는 것처럼.
내일이면 또 쳇바퀴 같은 하루가 시작될 것이다. 어쩌면 문도하가 찾아올지도 모른다. 마치 약속이라도 되어 있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서윤의 방을 짓밟겠지. 앞으로 그의 방문이 정말 일상처럼 될지도 모른다는 점을 서윤은 아프게 납득해야 했다.
가이드를 향한 에스퍼의 집착은 상상을 초월했다. 등급이 높을수록 폭주의 위험이 높아서일까, 강한 에스퍼일수록 자신의 가이드에 대한 집착이 심했다.
그녀는 에스퍼들이 자주 이용하는 식당에서 일한 덕에 뉴스에는 나오지 않는 온갖 사건 사고를 들을 기회가 있었다. 심지어 몇몇 클랜은 에스퍼의 원활한 활동을 위해 같이 가이드를 통제하는 걸 도와주기도 했다.
그러니 시한폭탄이라며 벌써 오랜 세월 방치된 문도하가, 이 나라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강한 그가, 조금이라도 효과가 있는 방법을 발견한 지금, 서윤을 이대로 놔둘 리 없었다.
어린 여자아이가 살아남기 위해서는 눈치가 빨라야 했다. 덕분에 서윤은 어제 문도하의 태도에서 절대 그녀를 놓지 않으리라는 의지를 똑똑히 보았다. 비척비척 동네를 걸으며 서윤은 멍하니 좌절에 빠졌다. 끝도 없는 늪에서 허우적거리는 기분이었다.
그는 저렇게 매번 도구를 사용하듯 자신에게 쳐들어올 작정일까. 정신을 조종하듯 휘어잡아 제멋대로 다루려고. 차라리 서윤이 문도하에게 강한 운명을 느꼈다면, 그래서 그 사실이 늘 기꺼웠다면 덜 불행했을까.
비척거리는 그녀의 걸음걸이가 점점 더 위태로워졌다. 삼촌이 저를 팔아넘기려 할 때는 차라리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어서 지금보다는 나았다. 그는 염동력처럼 갑작스럽게 서윤의 일상에 떨어져 내렸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그가 서윤은 너무나도 두렵다.
문도하가 언젠가는 자신이 곧 가이드에게 쩔쩔매는 에스퍼처럼 되지 않겠냐며 비아냥거리던 음성이 생각났다.
서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만큼 순진하지 않았다. 그가 정말로 가이드를 위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면 애초에 혼란을 느끼는 서윤을 부드럽게 다독였을 것이다.
한국에선 개인의 자유를 통제하는 것이 불법인데도, 클랜들이 가이드를 통제하려는 에스퍼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할 수 있는 기반도 이 때문이다. 애초에 에스퍼들은 가이드가 싫어하는 짓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보통 삼엄한 경호와 물질로 가이드의 마음을 잡으려 애썼다.
하지만 과연 문도하가 그런 사람일까? 그의 클랜은 그를 통제할 아주 좋은 도구인 그녀를 가만히 놔둘까? 전략 병기나 다름없는 위상을 차지하는 그를 위해 과연 서윤에게 무엇을 요구할까.
정신없이 걷다 보니 다시 그녀의 집 앞이었다. 의식이 없는 와중에도 제자리로 돌아오고야 마는 제 걸음걸이가 목줄 매인 자신의 인생과도 같아서 서윤은 자조적으로 입매를 비틀었다.
사위가 어느새 조금 더 어두워졌다. 제 마음과도 같은 까만 어둠을 응시하던 서윤은 다시 방에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한숨이 흔적처럼 걸음걸이마다 따라붙었다. 오늘따라 인적 없는 이 동네의 적막이 소름 끼쳤다.
계단을 오르며 무심코 시선을 옮기자 그녀의 우편함에 놓인 하얀 봉투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그녀에게 편지를 보낼 사람은 없다. 바닷길이 막힌 덕에 모든 자원은 절약 체제로 돌아선 지 오래여서 종이 고지서 같은 것이 올 일도 없었다.
그러니 쓸데없는 우편인 건 알지만 비우기 위해 다가갔다. 다른 집의 우편함에는 같은 봉투가 없는 것을 보니 서윤만 아직 우편함을 비우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얀 봉투 겉면에는 ‘세계 평화 교단’이라는, 대충 지은 것이 티가 나는 발신인이 적혀 있었다. 싸구려 갱지가 아닌 고운 하얀 종이에서 위화감이 느껴졌다. 막 돌리는 전단은 보통 재활용지 같은 값싼 종이를 쓰는데 이렇게 돈을 들이다니 이상한 일이다.
…마음의 평화를 원하신다면 교단에 정신을 의탁하세요. 문의는 아래 쓰인 번호로….
“또 왔네….”
최근 들어 계속 보이는 우편물이었다. 아무래도 사이비 종교인 듯싶었다.
바다에서 괴물이 올라오는 세상이었다. 이런 사이비가 판을 친다 한들 이상하지 않았다. 게다가 서윤의 동네는 중심부에서 밀려날 대로 밀려난 이들이 사는 곳이다. 교단 영업을 하기 위해서라면 이보다 적절한 곳도 없을 터. 단순한 교인 모집 광고에 이렇게 돈을 들일 수 있는 걸 보면 심지어 성황인 모양이다.
서윤의 팔이 힘없이 떨어지며 그대로 종이를 버렸다. 우편함 아래 재활용 수거함에는 서윤이 버린 것과 같은 종이가 몇 개나 쌓여 있었다.
서윤은 매번 광고가 올 때마다 이렇게 바로바로 버리곤 했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다른 주민들은 우편물을 가지고 들어가는지 수거함 안의 종이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마치 서윤만 종이를 이곳에 버리는 것처럼.
잠깐 그 미묘한 양을 가늠하던 서윤은 그저 몸을 돌렸다. 요 며칠 사이 더 집요하게 오는 우편이었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저 이런 것에라도 의탁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
당장 서윤 또한 그런 처지 아니던가.
제 상황을 떠올리던 그녀는 다시 어깨를 축 늘어트렸다. 머리가 멍해서 그저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미 자유 의지를 몽땅 문도하에게 빼앗긴 것처럼.
무거운 체념만이 소록소록 내려앉았다. 철제 계단을 딛는 걸음 하나하나에 깊은 우울이 떨어져 내렸다.
차라리 문도하의 신랄한 설득처럼 한몫 단단히 잡았다고 속물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다면, 편했을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울적함이 그녀의 얼굴에 그늘을 드리운다.
서윤이 그의 가이드라면, 문도하가 자신을 포기할 리 없었다. 그 사실이 서윤의 발목을 무겁게도 잡아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