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만남(2) (2/27)

(2)

“이게 다야?”

“네. …그런데 E급은 왜 살피시는지…?”

“내가 일일이 너한테 이유를 알려 줘야 하던가?”

“아니요, 컥, 죄송, 크헙.”

그것은 무척이나 우스꽝스러운 광경이었다. 다 큰 성인 남자가 혼자 장난이라도 치는 것처럼 제 목을 잡고 마구 몸부림치고 있었으니까. 반면 그 앞의 푹신한 소파에 앉은 미남자는 권태로운 듯 소파 팔걸이에 팔을 올려 머리를 괴고 있었다.

목을 부여잡은 남자, 국민 클랜의 박남일 실장은 난데없이 봉변을 당하고 있었다. 말도 없이 사라져서 온 클랜을 비상사태로 만들었던 눈앞의 미남자, 문도하에게. 그가 돌아오자마자 다짜고짜 시킨 일도 성실히 완수했으나 단지 질문 한 번 잘못한 죄였다.

그의 얼굴이 점점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정말로 숨이 막힌 듯이. 마임이라도 하듯 발버둥을 치는 모습이 무척이나 괴상했다. 마치 보이지 않는 손아귀가 그의 목줄을 틀어잡고 있는 것처럼.

“꺼져.”

“헉, 허억, 허억. 죄송합니다. 헉.”

들고 있는 서류에 집중하던 문도하가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젓자, 허공에 살짝 떠 있던 실장이 거짓말처럼 추락했다. 바닥에 너부러져 숨을 들이켠 박남일 실장은 황급히 몸을 일으켜 문밖으로 사라졌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거슬려 문도하는 다시 인상을 썼다. 능력을 써서 그냥 벽을 확 날려 버릴까 하다가 이내 멈칫한다. 손에 쥔 서류 상단에 프린팅된 이서윤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지금보다는 한참 어린, 아마 중학생 정도로 추정되는 앳된 얼굴이.

“…흠”

이서윤의 얼굴을 한 번 보고 제 손을 한 번 까딱거리던 문도하는 이내 실감했다. 그의 정신 상태가 어젯밤을 기점으로 다소 안정되었다는 것을. 물론 방금 봉변을 당한 박남일 실장은 동의하지 못하겠지만.

에스퍼로 각성한 이후, 좀먹어 녹슬어 가는 철판처럼 그의 시야는 어느샌가 빨갛게 얼룩덜룩 오염되기 시작했다. 무엇을 보든 흥미가 없었고, 사소한 부분에서 쉽게 짜증이 났다. 시야를 가리는 것들이 날파리처럼 신경을 거슬리게 하니 당연한 수순이었다.

몬스터를 상대하려 초능력을 쓰면 이러한 오염이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그저 시야가 온통 붉기만 했다.

잔뜩 녹슬어 새빨간 세상.

그런 문도하의 시야가 어제를 기점으로 아주 조금 핏기가 빠진 채 맑아졌다.

“이게 가이드인가?”

난다 긴다 하는 에스퍼 새끼들이 제 가이드에게 죽고 못 사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각성하기 전에도 비틀어진 삶을 살았던 문도하 정도가 아니라면 이렇게 정신이 좀먹는 기분을 견디기 힘들 테니.

손가락을 들어 사진 속 이서윤의 얼굴을 따라 쓸어내린다. 이런 앳된 얼굴 말고 어제 제 아래에서 울던 이서윤의 얼굴이 불쑥 등장했다. 성욕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금방 끝없는 갈망이 생겨났다.

“하…….”

어제 그는 정신력이 한계에 다다라 그야말로 제정신이 아니었다. 아마 이서윤을 만나지 않았다면 바닷가 근처의 도시 몇 개와 함께 증발하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심각한 상태였다. 실장은 말하지 않았으나 아마 그가 속한 국민 클랜의 상위 에스퍼들은 죄다 비상사태였을 것이다. 시한폭탄 문도하를 책임지고 처리하기 위해서.

이 갑작스러운 폭주의 전조는 바닷가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탄란이라는 몬스터 때문이었다. 도마뱀을 닮은 이 몬스터는 보통 사람 정도의 크기였는데, 어제 나온 건 아주 가끔이나 출몰하는 대형종이었다. 대형 중에서도 큰 크기를 자랑하는 데다가 생긴 것과는 다르게 무척 질긴 가죽 때문에 쉽사리 잡을 수가 없었다. 그런 게 도시로 들어간다면 엄청난 혼란이 일어날 것이 뻔했다.

사실 문도하의 입장에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이야기였지만, 아까 멱살을 잡았던 실장이 와서 하도 성가시게 굴기에 출동했었다. 모든 일에 시큰둥하다 보니 출동하는 것 또한 아무래도 상관없었으니까. 능력을 마음껏 발휘해도 성가시게 구는 인간들이 없는 몬스터는 좋은 화풀이 감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상외의 상황이 발생했다. 그간 육탄 돌격 정도만 할 줄 알던 몬스터가 못 보던 능력으로 원거리 공격을 해댔기 때문이다. 덕분에 능력을 많이 써야 했고, 그 결과 아슬아슬하게 유지하고 있던 정신이 나가 버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서서히 희미해지는 이성 속에서 문도하는 씁쓸하게 입매를 비틀었다. 이제, 끝이구나 하고.

하지만 정신을 다소 차렸을 땐 자신은 절실하게도 이서윤을 부여잡고 있었다. 마치 동아줄처럼.

우연히 마주친 이서윤이 그에게 다른 가능성을 보여 주었다. 삐걱거리는 정신이 맑게 갤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이 모든 거슬림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희망을.

“묘한 기분이네.”

손이 달렸다는 사실을 처음 안 사람처럼 문도하는 계속해서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어젯밤 이서윤이 남겨 둔 것은 무척이나 작은 변화였다. 하지만 늘 악취만 맡던 코에 들어오는 미미한 향기는 무척이나 튀는 자극이기도 했다.

어린 나이에 S급 에스퍼로 각성한 문도하는, 이 능력이 제 인생에 드디어 찾아온 커다란 행운임을 의심치 않았다. 열 살짜리 아이를 바닷가에 내몰 수밖에 없을 만큼 절박한 세상을 틈타 문도하는 많은 것을 쟁취했다.

하지만 그에게 열광하던 세상이 서서히 뭔가 잘못되었다고 느낀 건 오래 지나지 않아서였다. 문도하가 아무리 많은 가이드를 만나도 운명을 찾지 못했기 때문이다. 슬슬 가이드를 제때 만나지 못하는 에스퍼들이 어떻게 폭주하는지 다양한 사례가 쌓여갈 때쯤이었다.

세상이 그에게 던지는 시선은 영웅에서 점점 시한폭탄을 보는 것으로 바뀌어 갔다. 전무후무한 그의 S등급은 한 번도 본 적 없는 재앙이 초래할 것이라는 딱지와도 같았다.

능력만 보고 어린 그를 발 빠르게 영입한 국민 클랜은 그의 가이드를 찾는 일에 절실하게 매달렸다. 그의 능력을 발판으로 한국 최대 클랜으로 성장한 탓에 문도하의 폭주를 막아야 할 책임 또한 커졌기 때문이다.

그런 국민 클랜의 입장과는 다르게 문도하는 어느 순간부터 운명을 찾는 걸 포기하고 살았다. 누구를 만나든 아무런 감상이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는 한편 머리는 점점 녹슬어 갔다. 망가진 머리는 이렇게 살다가 폭주해 뒤지는 것도 나쁠 게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를 찾아내기 전까지는.

“그런데 하필, E급이라…….”

솔직히 문도하는 타인에게 관심이 없는 탓도 있었지만 가이드 등급에 E급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다. D급도 쓰레기 같은 등급이나 마찬가지인데 E급이라니.

각성 초반, 페어를 위해 한국의 모든 가이드 명단을 요구했던 문도하에게 이능력 협회는 C급까지의 명단밖에 주지 않았다. 그때도 문도하는 별말을 하지 않았는데, 보통 에스퍼와 가이드의 페어는 비슷한 등급끼리 맺어지기 때문이다. 차이가 나 봐야 한 단계 아래 정도니 협회로서는 오히려 넉넉하게 명단을 보낸 것과도 같았다.

이번에 실장이 입수해 온 E급 가이드 명단을 살피던 문도하는 처음 알게 된 사실에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까지 한국에 나타난 E급 가이드는 겨우 다섯 명이었다.

D급 가이드가 2천 명 가까이 되는 걸 생각하면 터무니없이 적은 숫자였다. 그 적은 각성 비율도 이상한데 심지어 이 다섯 명 중 네 명은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되었다.

그러니 지금 한국에 있는 이서윤은 유일한 E급 가이드라는 소리다.

각성한 열 살부터 본의 아니게 권력층과의 접점이 많을 수밖에 없던 문도하는 이 네 명의 생사불명이 묘하게 거슬렸다. 그러니 유일하게 남은 이서윤이 마침 제 눈에 띄었다는 것도 무척이나 수상하고 꺼림칙하다.

심지어 어젯밤의 이서윤은 이상하게도 소극적이었다. 마치 문도하가 운명인지 확신하지 못한 것처럼.

보통 에스퍼와 가이드는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운명이다. 문도하가 느낀 생생한 환희는 분명 이서윤에게도 느껴졌어야 한다. 심지어 그의 심각한 상태를 고려한다면 이서윤은 먼저 가이딩을 하려 움직여도 이상하지 않았을 터다.

하지만 이서윤은 시종일관 무심한 듯 굴었다. 에스퍼가 정신의 안정을 위해 노력하는 행위에 말이다. 정신이 반쯤 나간 자신은 그렇게도 머저리 같이 굴며 이서윤을 향해 손을 뻗었는데.

드문드문 떠오르는 기억 속에서 자신은 무척이나 절박하게도 이서윤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처절하고 퍽 한심한 작태가 아닐 수 없었다. 게다가 이서윤은 그런 그에게 가이드의 본능을 느끼고는 있는지 애매하게 굴었고.

이서윤이 그의 페어가 될 운명의 가이드가 아닐 리는 없었다. 안정된 제 상태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저 가이드와 섹스하는 것으로 해소될 정신이었다면 애초에 폭주하는 에스퍼가 있을 리가 없다.

게다가 빗속에서도 이서윤의 감정은 무척이나 환하게 빛났다. 타인의 감정 따위 신경 쓰지 않는 문도하에게 이건 많은 의미가 있었다. 설령 어젯밤 이서윤이 보여 준 감정들이 모두 안개처럼 부옇게 흐린 종류들이라 하더라도.

설마, 한쪽만 일방적으로 느끼는 운명이 있던가.

갑작스러운 생각에 문도하의 얼굴이 굳었다. 스스로도 왜 이렇게 불쾌한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곰곰이 생각을 거듭하던 그는 이윽고 마음을 정했다. 한 번 더 만나 보면 알겠지. 썩 명료한 감정들은 아니었으나 이서윤이 그에게 흘러들어 오는 건 무척이나 생소한 경험이었다. 다시 겪어 본다면, 이서윤의 얼굴을 다시 본다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지금 상황에서 이서윤이 제게 있어 최선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 없었다. 주변에 뭔가 수작질이 들어간 부분은 없는지 살핀 후, 정 안 되면 다른 방법을 강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가령, 문도하 자신의 집에 고이 보관하는 것 같은 방법.

마음을 정한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다시 찾아가 볼 작정으로.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에 잠시 멈칫했다.

만에 하나라도 문도하 혼자만 느끼는 운명이라면 어젯밤은 그녀에게 날벼락과도 마찬가지일 터. 심지어 아침에는 여러 가지 확인이 필요했기에 그대로 버려두고 오기까지 했다.

“뭐, 상관없나.”

그 혼자 운명을 느끼든, 그래서 이서윤이 어떤 생각을 하든 솔직히 상관없었다. 어쨌든 그가 갖고자 한다면 손아귀에 들어올 테니. 그에게 지금 이서윤은 최고의 도구였다.

제게 배정된 국민 클랜 건물의 사무실에서 문도하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입가에는 오랜만에 띠는 미미한 미소를 걸고서.

* *

“실장님, 괜찮으세요?”

부하직원의 걱정 서린 물음에 박남일 실장은 한숨만 내쉬었다. 순간 진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꼴사납게 기어 나오느라 무릎이 시큰거렸다. 넥타이를 거칠게 끌러 내리면서 목도 매만졌다. 염동력으로 졸린 목이 아직도 답답하고 목구멍이 턱 막히는 기분이다. 아무래도 당분간 넥타이는 못 맬 듯싶다.

“…이번엔 멱살을 잡혔어.”

“……저런.”

그건 문도하의 상태를 직접적으로 알려 주는 표식과도 같았다. 제일 먼저 그의 안부를 물었던 부하직원은 안타까운 외마디 말을 끝으로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다.

“오늘따라 더 예민한 것 같은데. 도하 놈.”

욕을 하면서도 문도하가 있을 위층을 흘깃 눈치 봐야 하는 처지가 서러웠다. 문도하가 예민한 건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이렇게까지 능력을 직접 쓴 적은 얼마 없었다.

어린 문도하를 데려다가 에스퍼 구실을 하도록 만든 게 바로 박남일 실장이었다.

그는 격변하고 있던 세계에서 조금이라도 잘 살아남고자 당시 막 발생하기 시작하던 용병 회사에 취직했다. 이후 대외적 이미지를 위해 에스퍼를 관리하는 클랜으로 이름을 바꾸고 활동한 사설 용병 조직들의 시작이었다.

그가 입사하자마자 세상은 문도하의 등장으로 시끌벅적했다. 에스퍼란 어쨌든 목숨을 걸고 싸우는 직업이다. 그러니 열 살 에스퍼의 등장은 사회적으로 무척이나 충격적이었다.

평사원이었던 박남일은 그의 가능성에 확신을 갖고 어렵게 어렵게 상사를 설득해 문도하 영입안을 상부에 제안했다. 놀랍게도 그의 제안은 통과해 문도하에게 영입 제안을 하러 가는 자리에도 함께할 수 있었다.

다 쓰러져 가는 문도하의 집은 문을 열자마자 곰팡내가 났다. 주변엔 수많은 매스컴이 진을 치고 있었으나 정작 문도하에게 다가가는 사람들은 없었다. 그리고 그날 문도하는 박남일의 손을 잡고 그 집을 나왔다.

이후에는 울며 겨자 먹기로 어린 에스퍼님을 전담하는 업무를 받았다. 그가 제안한 일이기에 클랜으로서는 당연하다는 입장이었다. 아마 문도하가 크기 전까지는 제대로 써먹을 수 없으니 잡일을 맡긴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문도하는 어린아이답지 않게 영특했고 또 잔인했다. 어린아이가 몬스터를 잡으며 날아다니는 장면이 곧 어색해지지 않을 정도로 유능하기도 했다.

덕분에 덩달아 고속승진을 해 지금은 국민 클랜 대외전략실의 실장을 맡고 있었지만, 가끔은 문도하가 감히 자신을 제일 먼저 찾아온 박남일을 엿 먹이기 위해 그의 손을 잡은 것은 아닌지 강하게 의심이 들었다.

역시나 어제의 불안정함이 여전히 남아 있는 걸까.

“그래서 어제는 어디 갔었대요?”

“몰라. 그건 물어보지도 못했어. 어찌나 살벌하던지.”

“그러고 보니 실장님, 아까 그 자료 가져가지 않으셨어요?”

다른 부하직원이 아까 박남일이 가져간 자료에 대해 물었다. 안 그래도 그 사안에 대해 의문을 표했다가 목이 졸린 참이다.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맞아. 그거 E급 가이드 명단 맞지?”

“네.”

“이상하네.”

“뭐가요?”

이상한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일단 문도하가 어딘가 후줄근한 모습으로 돌아온 게 충격이었다. 사용하는 능력이 염동력 계열이기에 문도하는 다른 에스퍼들과는 달리 양복을 즐겨 입었다. 마치 너희같이 무식하게 싸울 필요가 없다는 걸 과시하듯이.

늘 깔끔한 모습을 선호하는 녀석이 뭔가 정신을 두고 온 것처럼 돌아왔을 때 박남일 실장은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기어코 어딘가에서 도시 하나를 날려 버리고 왔구나 싶어서.

하지만 녀석이 대뜸 콕 짚어 ‘E급 가이드’ 명단을 가져오라고 말했다.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등급이기에 박남일은 의아했으나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사라진 도시가 있나 알아볼 겸 자리를 피할 작정이었다.

다행히 도시가 괴멸되었다는 뉴스는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명단에 대한 수수께끼는 깊어졌다. 역시나 다시 확인해본바 클랜이 확보하고 있는 명단에는 E급 자체가 없었다. D급 끄트머리에 있어 혹시 자신이 기억하지 못했던 것인가 싶었던 박남일은 뭔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그 길로 협회에 인맥이 있는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 그냥 지나가는 업무인 것처럼 E급 이하 가이드 명단 좀 확보해오라며. 낮은 등급의 가이드 명단일수록 공공재처럼 돌아다닌다. 아직 신입인 부하는 가이드가 그런 등급도 있었구나 하는 표정으로 업무를 받아 갔다.

부하가 정보를 가져오길 기다리며 제 사무실에서 생각에 잠긴 박남일의 얼굴은 심각했다. 묘한 거슬림이 그의 촉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간 문도하의 페어 문제 때문에 국민 클랜은 협회에 많은 돈을 부어왔다. 다름 아닌 신규 가이드의 명단 확보 때문이다.

각 에스퍼와 가이드는 서로 정해진 페어가 한 명뿐이라지만, 혹시 아는가. 그 운명이 어쩌면 선착순일지도. 에스퍼와 가이드의 관계는 아직 규명되지 않은 것이 더 많았다. 남들은 잘만 맺는 페어를 문도하만 못 찾을 때부터 박남일은 이런 신빙성 있는 의심을 해 왔다.

게다가 가이드 명단 하나로 연명하는 협회였다. 이쪽에서 하나라도 더 뜯어내기 위해 어찌나 밀고 당기기를 잘하는지. 그래서 더더욱 이상했다.

만약 박남일이 협회에서 일한다고 가정하면 E급 가이드의 명단은 무척이나 생색내기 좋은 소재였던 것이다. 국민 클랜이 관리하는 에스퍼는 문도하만 있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오히려 가장 수가 많은 D급 에스퍼들에게는 E급 가이드 명단이 나름 쓸 만한 정보가 된다.

하지만 그간 만난 협회의 그 누구도 E급에 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당연히 D급까지만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실제로 에스퍼 또한 D급 이하는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조금 괘씸한 생각도 들었다. 그간 신규 가이드 명단을 그렇게 닦달하던 국민 클랜이었다. 이 정도 한미한 정보는 말하지 않아도 알아서 줘야 하는 것 아닌가.

그 때 부하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본 몇 개를 들고 왔다. E급이 정말 존재했다는 것에 놀란 것도 잠시,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문도하가 기다리다가 짜증이 나서 바닥을 부수면 안 되니까.

일단 명단만 알면 근황 파악은 일도 아니었다. 지금 현대 사회에서 가장 큰 권력은 에스퍼였다. 문제는 문도하가 왜 그걸 찾았느냐인데.

대뜸 이상하다는 소리만 하고 깊이 생각에 잠긴 실장의 옆에서 부하직원이 문득 말을 걸었다.

“그런데요, 실장님.”

“왜.”

“그 협회에 있는 친구 놈이 다시 연락을 했는데요. 아무래도 명단이 조금 이상하다고….”

“뭐? 무슨 소리야.”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그나마 클랜 내에서는 많이 봐주는 편인 자신의 목을 조를 정도로 예민한 문도하였다. 잘못된 명단을 가져간 걸 들키면 이번에는 목이 졸리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텐데.

“그게…, 전산 데이터베이스에는 없는데 저희가 콕 집어 E급 이하라고 말한 게 신기해서 문서 자료실에 간 모양이더라고요.”

“…그런데?”

“E급 자료가 거기에는 있었다고 합니다. 찾는 데는 좀 애먹긴 했어도. 일단 복사해서 보내 줬는데 생각할수록 희한하다고 해서요. 아무거나 다 전산화하는 시대 아닙니까? 먼지가 뽀얗게 앉아 있었다던데요, 자료에.”

“…….”

이상한 감각이 척추를 타고 슬그머니 올라왔다. 문도하의 손에 죽지 않고 그를 살아남게 했던 촉이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뜬금없이 E급 가이드를 찾는 문도하와 마치 은폐라도 된 것 같은 E급 가이드 명단.

S급 에스퍼인 문도하가 E급 가이드와 페어가 될 리도 없는데, 무슨 일일까.

“아까 그 명단 사본 좀 가져와 봐.”

어두워진 눈으로 박남일은 마른 침을 삼켰다. 뭔가가 일어나려고 하고 있었다.

* *

흔들거리는 걸음을 추스르며 서윤은 집으로 향했다.

그녀는 결국 아르바이트 시간이 끝날 때까지 버티지 못했다. 뉴스에서 커다란 몬스터를 그저 손짓 하나로 난도질하던 남자의 영상을 본 순간부터 영혼이 나간 듯했다.

간밤의 몽롱한 느낌이 거대한 절망이 되어 그녀의 어깨에 올라서 있었다. 거대하기만 하던 쾌락이 서윤을 기만하고 있었다.

다시 볼 일 없다고 생각하며 버티는 것도 한계였다. 혹사당한 다리 아래쪽과 감기라도 든 듯한 몸 상태는 불안정한 정신과 맞물려 잦은 실수를 자꾸 만들었다.

보다 못한 사장이 이번엔 아주 대놓고 그녀를 나무라려는 순간 나서는 사람이 있었다.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무리하지 말라고 해줬던 같은 아르바이트생이었다.

‘너 괜찮아?’

‘어…?’

‘얼굴 창백한 것 좀 봐! 병원 가야 해, 너.’

‘나는….’

제 말이 가로막힌 게 불쾌했던지 사장이 인상을 쓰며 서윤을 따로 불러내려고 했다. 그런 사장 앞을 대놓고 막아선 아르바이트생은 자신이 연장 근무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마침 그녀는 근무 시간이 끝났던 것이다. 그러는 한편 고용노동부를 운운하며 사장에게 으르렁거렸다. 아플 때 대타를 구했으니 병원에 가는 건 아르바이트생의 당연한 권리라면서.

이래저래 찔리는 게 많았던 것일까, 사장은 의외로 서윤을 순순히 보내 주었다. 아니, 사실 순순히 보내 주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때부터 완전히 놓아 버린 정신은 주변을 온통 멍하게 만들어서 고작 다리를 움직이는 것이 한계였으니까.

그래도 같은 아르바이트생의 도움은 똑똑히 머리에 남았다. 너무 큰 빚을 지어 어찌 갚아야 할지 걱정이 될 정도로.

다시 그녀의 어깨를 짓누르는 혼란이 걱정을 툭 밀어냈다. 지금 그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라는 듯이. 월요일에 어떻게 다시 출근해 사장 얼굴을 봐야 할지에 대한 걱정도 까맣게 멀어졌다.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고 싶었다.

오한이 들어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던 서윤은 잠깐 고개를 숙였다가 크게 심호흡했다.

괜찮을 것이다. 괜찮아야 한다.

어젯밤의 남자가 낯이 익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알아보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다. 아마 문도하가 사진 찍히는 걸 극도로 싫어하지만 않았다면 더 일찍 알아차렸으리라. 그는 유명세에 비해 근황이 잘 돌아다니는 사람은 아니었고, 어젯밤의 서윤은 정신이 너무 없었다.

그녀를 좌절하게 한 건 기어코 그녀의 무관심을 깨부수고 솟은 의문 때문이었다.

어젯밤 자신의 행동이 아무래도 석연치 않았다. 그저 단순히 상대가 먹은 약에 같이 당했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면 간단했을 터다. 문제는, 에스퍼의 신체에는 그따위 약이 듣지 않는다는 점이다.

더군다나 유일한 S급 에스퍼인 문도하가 그런 약에 취했을 리 없었다. 그렇다면 답은 하나였다. 무언가 다른 이유가 있거나 문도하가 그녀를 중독시켰다는 것이다. 자신에게는 통하지도 않을 약을 가지고 와서.

그게 서윤은 못내 무서웠다. 대체 어쩌자고 그따위 마수에 걸려든 것일까.

자꾸 두려움이 엄습했다. 그가 다시 나타나 서윤을 잡아채는 상상을 하니 몸이 움츠러든다. 걸을 때마다 생생한 아픔이 자꾸만 그녀를 자극했다.

입술을 자근자근 물며 서윤은 크게 심호흡했다. 이건 그저 무서움이 만든 과한 상상에 불과하다. 분명 그럴 것이다. 어젯밤 그녀를 유린한 것이 이 나라의 유일한 S급 에스퍼인 것이 뭐 어떻다는 말인가. 흔하디흔한 스토리였다. 권력 있는 개새끼에게 잠깐 물린 것뿐이다.

그런 놈들이 몇 번이나 서윤을 찾을 리도 없었다. 듣던 것과는 사뭇 다른 그의 성격은 조금 의아하긴 했으나, 어차피 이런 동네에 다시 돌아올 일은 없을 터. 다시 마주칠 일도 없을 것이다.

그렇게 없던 일이 되리라.

스스로를 세뇌라도 하듯 서윤은 계속 속으로 읊조렸다. 땅을 보고 걷는 건 습관이 되어 괜찮았다. 집으로 향하는 길은 익숙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집에 다가갈수록 심장이 불안하게 뛰었다. 평상시 뛰는 걸 의식하지 못하고 지냈던 것에 시위라도 하듯, 제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왔어?”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서윤의 방으로 향하는 계단. 그곳에 그 남자가 서 있었다.

어젯밤처럼 남자가 달게 웃었다. 환하게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아가 언제든 서윤의 목덜미를 찢어발길 것 같았다. 환한 곳에서 보는 남자의 얼굴은 뉴스에서 봤던 것보다도 더 수려했다.

단정하면서도 맵시 있게 떨어지는 수트 차림은 무척이나 정상적으로 보였다. 하지만 동시에 무서운 악몽이 현실이 되어 튀어나온 듯 비현실적이다.

그의 웃음이 꼭 사람을 유혹해 죽이는 독초 같아서 서윤은 뒷걸음질 쳤다. 무작정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어디로?

“일찍 왔네?”

“왜…, 왜….”

“아픈 덴 괜찮아?”

“왜….”

대체 왜 돌아왔을까. 제 몸을 두고 이런 생각을 해야 한다는 것이 퍽 슬프긴 했지만, 볼일은 끝난 거 아니었나?

계단참에 기대어 있던 남자가 성큼성큼 걸어오는데도 서윤의 다리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주춤, 반보 뒤로 경련하듯 물러난 것이 최선이었다.

괜찮을 것이라 스스로를 보듬었던 하루가 단숨에 박살 났다. 그림같이 서윤의 일상에 등장한 남자 때문에 발목을 붙잡은 고통이 슬금슬금 온몸을 속박하고 있었다. 그저 지나가는 악몽이라 여겼던 남자가 예상치도 못한 거대한 정체까지 뒤집어쓴 채 돌아왔다. 절망감이 한없이 땅을 파고들었다.

시시각각 변해 가는 서윤의 얼굴을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고 있던 문도하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내가 누군지, 아는 눈치네?”

다시 한번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제 정체를 안다고 하면 혹시 죽이려는 것일까. 그의 말투에 담긴 묘한 뉘앙스 때문에 서윤의 몸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어쩌면 이걸 위해 문도하는 어제 약을 쓴 걸지도 모른다. 정신이 없게 만들어 증거를 없애려고.

불확실하던 악몽은 이제 실체를 가진 손으로 나타나 그녀의 목까지 조르려 했다. 덕분에 서윤의 사고는 비이성적으로 두려움을 향해 달렸다. 난데없는 봉변에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대체, 자신의 인생엔 왜 이런 일만 일어난단 말인가.

도망칠 생각도 못 하고 애처롭게 떠는 서윤을 바라보며 문도하는 그녀의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저벅저벅 성의 없이 다가가는데도 어린 양처럼 떨고만 있는 모습을 보니 도하 자신의 능력을 아주 잘 아는 듯했다.

고개를 기울이며 서윤을 관찰한다. 몸 상태가 안 좋은지 퍽 지친 안색이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피가 좀 많이 났던가. 심지어 섹스가 처음이었던 모양이지, 안타깝게도.

전혀 안타깝지 않은 얼굴로 문도하는 다시 고개를 반대로 기울였다. 요리조리 제 얼굴을 뜯어보는데도 서윤은 더 물러나지도 못하고 파들파들 떨기만 했다. 아까부터 그에게 전해져 오는 감각은 공포심을 역력하게 담고 있었다. 어제와는 다르게 장막이 한풀 벗겨져 그녀의 감정이 훨씬 잘 보였다.

살짝 내리깐 서윤의 눈가를 따라 시선으로 핥았다. 이렇게 안색이 안 좋은데도 무척이나 고운 얼굴이다. 하얀 얼굴은 잡티 하나 없이 매끄러웠고 무엇보다 이목구비가 무척이나 오밀조밀했다. 그러고 보면 몸도 전반적으로 그랬었다. 손바닥에 걸리는 모든 피부가 마약이라도 바른 듯 그를 끌어당겼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문도하의 새빨간 세상에서 서윤은 홀로 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지금 이 순간조차.

내 가이드.

매번 거추장스럽게 에너지만 소모하던 심장이 거세게 날뛰었다. 그의 피부 속에 자리한 에스퍼의 본능이 외친다. 당장 손아귀에 넣어 물고, 씹고 또 삼키라고.

이 충동을 참아야 할 필요를 문도하는 느끼지 못했다. 어젯밤처럼. 천천히 손을 뻗어 아까부터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 있는 그녀의 뺨으로 향했다.

너는 하얀 만큼 차가울까?

그 순간 철썩 소리가 났다. 적막이 내려앉아 더께를 이룬 동네라 그 소리가 더욱 크게 고막에 닿았다. 그녀를 향해 뻗었던 손에서는 미미한 통증이 느껴졌다.

“아….”

때린 것은 그녀였으나 크게 당황한 것도 그녀였다. 서윤은 탄식처럼 외마디 말을 내뱉었다.

다가오는 손길에 무서워서 저도 모르게 손을 휘둘러 버렸다. 당황한 서윤이 입술을 짓씹었다.

쳐내진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며 기이한 것 보듯 하는 문도하는 어젯밤과는 어딘가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어쩐지 더 위험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어서 자꾸만 긴장감에 침이 넘어간다. 어쩌면 그의 능력인 염동력으로 자신을 공격할지도 모르는데 너무 안일한 반항이었다.

목숨의 위기 앞에서 제 행동을 후회하던 서윤은 심호흡하며 크게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눈이 감겼다 뜨이는 짧은 순간 사이, 제 목에서 온기가 느껴졌다. 크게 힘은 주지 않았으나 문도하가 그녀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어 마치 나무토막이라도 된 것 같았다.

“보통 이러면 목을 졸라 혼을 내 주는데….”

“흡….”

“…이상하게 네 목은 그냥 빨고 싶다는 생각만 드네.”

화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거슬리지 않았다. 어제와는 다르게 그녀가 그의 손길을 거부하는데도 그랬다. 그런 의미에서 이서윤은 문도하에게 무척이나 생소한 사람이었다. 근 몇 년간 문도하의 눈에 거슬리지 않았던 존재는 없었으니.

만약 사회의 법과 제도를 정상인 수준으로 준수하는 박남일 실장이 그의 곁에 없었다면 문도하는 S급 에스퍼가 아닌 살인귀로 이름을 날렸을 것이다.

그는 목에 얹었던 손을 슬그머니 위로 움직여 기어코 서윤의 뺨을 손바닥에 쥐었다. 희고 가는 목을 타고 올라가는 제 손이 꼭 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바닥의 가장 오목한 부분에 서윤의 볼을 가득 넣고 뭉근하게 돌려보았다. 제 움직임에 맞춰 움직이는 살결이 무척이나 신기했다.

그녀의 얼굴이 작은 건지 문도하의 손이 큰 건지, 단순히 손을 조금 놀리는 것으로 서윤의 뺨과 목덜미 근처까지 크게 훑을 수 있었다. 역시나 부드럽다. 그리고 식은땀을 흘리는지 촉촉하게 감겨 오기까지 한다.

이 이상 충동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대로 한 손으로 감싸 쥔 후 슬쩍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조르는 대신 입을 대고 싶었던 서윤의 목을 향해서.

혀를 내밀어 맥이 뛰고 있는 목줄기 근처를 길게 핥았다. 파들거리는 맥이 느껴졌다. 다시 한번 입술을 오므려 그곳을 힘주어 빨았다. 어제 서윤의 몸에 남겨 두었던 수많은 액체는 안타깝게도 이미 흔적도 없었다. 하지만 이건, 꽤 오래 갈 듯했다.

제 행동에 놀란 것일까, 서윤은 숨도 못 내쉰 채 빳빳하게 굳어 있었다. 빠르게 깜빡거리는 눈썹이 파르르 떨린다.

“숨 쉬어. 오늘은 안 잡아먹어.”

어제 몸을 섞은 덕분일까, 오늘은 그럭저럭 버틸 만했다. 물론 아직도 붉기만 한 시야는 그의 정신 오염이 여전하다는 걸 알려주었다. 하지만 처음 맛본 거대한 환희가 나름대로 만족감을 준다.

서윤의 몸도 썩 좋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아까부터 여실히 떨리는 다리나 시커멓게 죽은 안색을 보면 그랬다. 아무래도 오래 쓰려면, 적당히 봐줘야겠지.

그의 말에 서윤은 나라 잃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남의 감정 따위 별 관심 없는 문도하가 의아해질 정도로.

“……오늘은…?”

그럼 내일도 있단 말인가? 대체 왜.

기어코 가장 큰 두려움이 그녀의 앞에 툭 던져진 기분이었다.

어제가 그저 단순한 충동이길 바랐다. 다시 찾아온 것도 그저 그의 정체를 함구하러 온 것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문도하의 말은 무척이나 많은 것을 내포하고 있었다. 마치 그녀를 계속 찾아올 거라는 듯이.

서윤의 얼굴에 의문이 가득 들어차는 것을 본 문도하가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그녀에게 되물었다.

“E급 가이드라 그런가…, 조금 느린가 봐?”

“어…떻게.”

그녀의 질문을 서윤의 등급이 E급이라는 걸 어떻게 알았냐는 뜻으로 이해한 문도하가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로서는 드물게도 질문에 착실하게 답해 주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아침에 네 신분증을 봤지.”

그의 대답이, 그리고 가이드라는 단어가 청천벽력으로 들렸다. 그저 지나가다 찾아온 불운이 아니었던가.

그녀가 거의 숨기며 살아오던 제 정체를 담담하게 읊조리는 문도하가 진심으로 무서웠다. 삼촌의 집에서 도망친 이후로 그녀는 한 번도 자신이 가이드라는 것을 말하고 다닌 적이 없었다. 협회에 찾아가 페어 의뢰를 할 생각도 없었다. 그저 각성하지 않은 듯 살아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녀가 정신을 잃은 사이에 집을 뒤진 모양이었다. 그런 흔적은 보지 못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마치 그녀가 가이드라는 전제하에 철저히 신분증만 뒤진 것처럼.

가이드로 각성한 것이 그녀의 인생에 좋게 작용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삼촌이 가이드로서의 그녀의 가치를 재며 몰래 서윤을 살펴보던 시기가 문득 생각났다. 매번 어떤 곳에 팔려 가게 될지 벌벌 떨며 숨죽여 울던 나날들.

이번엔, 무슨 일이 생기려고.

“무서워하네. 왜지?”

역시나 이서윤의 감정이 마치 연결이라도 된 듯 생생하게 느껴졌다. 신기한 감각이었다. 타인에겐 관심도 없고, 또 앞으로도 없을 예정인 문도하에겐 이렇게 직접 파고드는 감각이 무척 생경했다.

그를 기르다시피 했던 박남일은 종종 그의 감정이 결여된 듯한 성격에 대해 걱정하는 말을 하곤 했다. 물론 어릴 적부터 실장의 우려대로 반사회적이었던 문도하는 그 걱정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만.

처음으로 반짝이는 물건을 발견한 아이가 한참을 그걸 살피듯이, 문도하는 이서윤의 감정을 살살 굴려 가며 음미했다. 그것이 설령 공포라는 감정일지라도, 문도하에겐 한없이 반짝이게만 보였다.

물론 신기한 한편 의문도 들기는 했다. 이게 ‘공포’라는 감정인 건 알겠는데, 이서윤은 왜 그를 이렇게 무서워하는 걸까. 에스퍼가 제 가이드를 해치지 못하는 건 알 텐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어제 이서윤의 반응도 일반적인 가이드의 것은 아니었다.

“이곳에, …왜 돌아왔어요.”

낮게 가라앉은 말끝이 잘게 떨리고 있었다. 벼르고 별러 이유를 묻는다는 듯이. 하지만 그녀의 반응은 차치하고 문도하의 귀에는 ‘돌아왔다’라는 단어가 달게 감겼다. 벌써부터 머리가 망가지고 있는 걸까.

아니지, 그의 머리는 이미 한참부터 망가져 있었다. 설령 이서윤이 곁에 있을지라도, 앞으로도 계속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건 즉 그가 다른 에스퍼들처럼 제 가이드에게 머저리같이 구는 일은 일어나지 않으리란 소리와도 같았다.

이 모든 것을 머릿속으로 계산하면서도 문도하는 천사처럼 웃었다. 제 낯가죽의 위력을 잘 아는 사람답게.

“그야, 넌 내 가이드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흐음.”

눈을 가늘게 뜨며 이서윤을 가늠하듯 문도하는 그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기껏 친절하게 알려준 가이드 얘기에도 그녀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우지 못했다. 자꾸 불길한 예감이 그를 찌르고 들어온다.

거짓으로 이 정도 낯을 꾸며낼 수 있는 여자일까, 이서윤은.

실장이 가져온 조사는 급히 했던 만큼 충분하지 못했다. 그 표정 아래의 진의를 가늠하듯 문도하는 계속 그녀를 쳐다보았다. 어쩐지 이상하게 시선을 떼기 힘들었다.

정말 이서윤은 제게 운명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아니면 E급답게 느리거나 운명을 느끼는 강도가 자체가 약한 걸까. 어쩌면 첫 단추가 조금 갑작스러웠던 탓에 거부감이라도 느끼고 있을지 몰랐다. 멍청하게 제 운명도 단번에 못 알아보고.

이것저것 생각하던 문도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느 쪽이든 협조적인 미래를 위해서라면 조금 달래는 척을 할 필요가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성가신데.

“어제는 본의 아니게 좀 거칠었어. 앞으론 안 그럴게.”

잠깐 말이 없던 문도하가 다시 그린 듯한 미소를 걸고 말했다. 다만, 그 예쁜 곡선에서 나온 말은 그 어느 것도 납득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서윤은 온통 혼란스러웠다. 이 나라에서 가장 강하다는 에스퍼가 갑자기 나타나 그녀를 자신의 가이드라고 말하고 있는 이 상황이. 어쩌면 일반적인 가이드라면 바라 마지않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가장 강한 에스퍼의 가이드가 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하지만 서윤은 달랐다. 애초에 가이드로서의 삶을 바란 적이 없기에, 그녀에겐 가이드란 결국 이용당하는 또 다른 방법에 지나지 않았다.

“…무슨….”

문득 어제 머릿속으로 직접 말하는 것 같던 환청이 떠올랐다. 도와달라며, 자신을 도와 달라며 애절하게도 말하던 그 음성이 말이다.

설마, 그게 환청이 아니었다면….

그러나 어제 닥친 일이 워낙 정신을 쏙 빼놓는 바람에 서윤은 도무지 그 상황에서 현실감을 찾을 수가 없었다. 당연히 약에 당한 자신이 헛것을 들은 게 분명하다는 판단을 굳힌 상태였던 것이다.

게다가 객관적으로 고민해도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윤이 비록 가이드로서 살아오지 않았다지만, 페어가 서로 비슷한 등급끼리 맺어진다는 건 알았다. 이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과도 같았으니까. S급과 E급에는 한반도 전체 크기만 한 거리감이 있었다.

게다가 만약 그가 자신의 에스퍼라면 어제 그렇게 무섭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정말 자신의 에스퍼라면 지금 이 순간도 이렇게 공포를 느끼도록 만들지 않았겠지. 오히려 서윤은 오염된 그의 정신을 도와주질 못해 안절부절못해야 정상일 터다.

제 마음을 가늠하듯 서윤은 용기 내어 천천히 눈앞의 문도하를 살폈다. 여전히, 저 잘생긴 얼굴은 속에 무엇을 가지고 있을지 모르는 괴물로만 보였다. 그날 밤 마주쳤던 그의 눈빛처럼.

그녀의 에스퍼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이곳에 돌아와서 굳이 거짓말을 늘어놓는 것일까. 자신을 둘러싼 상황 속에서 서윤은 익숙한 것을 하나 끄집어낼 수 있었다.

설마, 몸이 목적인가.

순식간에 마음이 싸늘하게 식었다. 그저 약으로 장난질이나 하려 했는데 마침 서윤이 가이드라는 걸 발견한 게 분명했다. 그걸 이용해 좀 더 그녀를 가지고 놀려는 게 아닐까.

대부분의 가이드가 문도하 같은 강한 에스퍼가 운명이기를 바라는 건 서윤도 알고 있었다. 그녀가 멍청하게 그런 사탕발림에 넘어가길 바라는 것이다. 사정없이 그녀를 우롱하기 위해서.

덕분에 분노가 두려움을 이기고 수면으로 솟았다. 그녀는 아무런 잘못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이따위 모욕까지 참고 감내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하.”

“어제는 제게 약을 쓴 것 다 알아요. 이따위 장난질 하지 말아요. 안 속으니까.”

이쪽을 노려보는 눈빛에 문도하는 절로 경쾌한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그렇다고 그의 속내마저 유쾌한 건 아니었지만.

그저 이 또한 새로 맛보는 감각이라 그랬다. 분노라니, 기껏 자신의 가이드가 누구인지 알려주었음에도 이렇게 선연한 분노라니. 게다가 말도 안 되는 오해까지 하고 있지 않은가. 설마하니 가이드로서의 본능을 겨우 약 기운 따위로 치부할 줄은 몰랐다.

영문 모를 감각이 신기해서 터진 웃음과 반비례해 기분은 오히려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이서윤이 그를 명백하게 거부하고 있었으니까.

제 쪽을 향하는 시선을 고스란히 바라보던 문도하가 순식간에 얼굴을 굳힌 채 손을 움직였다. 눈 깜빡하는 사이에 허리를 잡힌 서윤이 그의 코앞까지 속절없이 끌려갔다. 마주치는 눈빛이 소름 끼치도록 차가웠다. 방금 웃음을 터트린 사람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그런 서윤을 지그시 내려다보면서 문도하는 손속을 자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쉽게 없애기엔 서윤의 존재는 다소 아까웠으니까. 그나저나 서윤의 반응 따위 그냥 무시해도 될 텐데, 이게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쁠까.

“내가 왜 쓸데없이 E급 따위에게 장난이나 걸겠어, 안 그래?”

“……윽.”

도망치려는 듯 휘적이는 서윤의 팔을 잡아채 슬며시 뒤로 꺾었다. 더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묶인 서윤은 밀착되는 몸을 떨어트릴 생각도 못 하고 두려운 낯으로 문도하를 올려다보았다. 날카롭게 벼려진 시선에 잡힌 탓에 고개도 돌릴 수 없었다. 공포가 슬금슬금 기어 올라와 아까 문도하가 핥은 자리를 조르려 했다.

“행운이라고 생각해. 팔자 폈잖아? 혹시 알아, 조만간 네 말이면 무릎이라도 꿇을 병신이 될지도 모르는데. 응?”

쏟아지는 신랄한 어투에도 서윤은 몸을 비틀었다. 그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는 행운이라는 단어가 믿기질 않는다. 재앙과도 같은 그가 온몸으로 그녀를 찍어 눌렀다. 점점 숨이 막혀 온다.

그저 도망치고 싶었다.

“이거, 놔…!”

문도하가 비틀린 미소를 지었다. 방금 전 그가 내뱉은 말은 물론 마음에도 없는 소리였다. 그는 다른 에스퍼들과는 달랐다. 애초에 문도하는 선연하게 전해져 오는 타인의 감정에 슬퍼하거나 괴로워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평범한 에스퍼였다면 아침에 그녀를 내버려 두고 돌아가지 않았을 것이다. 정신이 들자마자 가이드를 두고도 이성적으로 굴 수 있다는 건 문도하만이 가진 특권이었다.

가이드의 감정이 직접 전해진다는 건 어찌 보면 고통이었다. 자신보다도 더 타인의 감정에 좌지우지될 수 있다는 사실과도 같았고.

어쨌든 직접 겪어본바, 문도하는 제 가이드 앞에서 병신이 되는 에스퍼가 그렇게 많다는 점에 어느 정도 납득은 했다. 이렇게 직접 가이드의 고통이 파고든다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겠지.

고통에 둔감한 문도하가 에스퍼로 걸린 서윤에게는 날벼락 같은 일이긴 할 터다.

그걸 알면서도 문도하는 이 사실을 계속 입에 담았다. 속물적인 가이드들은 어떻게든 에스퍼가 가져오는 부와 명예를 뜯어내려고 혈안이기 마련이었다. 자신의 미래도 그리될 수 있을 것이라 서윤이 착각한다면 문도하로서는 굳이 막을 이유가 없었다.

흔들리는 그녀의 몸을 단단히 쥔 문도하가 그대로 고개를 숙였다. 아담한 체구 덕에 한껏 고개를 숙여야만 겨우 서윤의 이마에 닿았다.

입술에 달라붙는 이마는 땀으로 촉촉해져 있었다. 그 체향을 같이 들이켜며 문도하는 제 안에서 다시 끓어오르는 흉포한 에스퍼의 본능을 추슬렀다.

성가시긴 해도, 조금은 조절할 필요가 있겠지.

“오늘은 몸이 안 좋은 것 같으니, 이 정도만 받아 갈게.”

이마에 닿은 뜨거운 감촉이 서윤은 도무지 믿기질 않았다. 문도하는 여전히 서윤이 그의 가이드라는 점을 부정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어찌 되었든 그가 좋을 대로 그녀를 쓸 예정이라는 것이 이 손짓 하나에 명확해졌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등을 부여잡고 있던 단단한 팔이 일순 사라졌다. 문도하가 기껏 풀어 준 몸은 힘을 잃고 스르륵 바닥으로 추락했다. 서윤은 막강한 좌절 앞에서 그저 문도하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

“내일 봐.”

상큼한 그의 미소가 그야말로 악마처럼 보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