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 만남(1) (1/27)

목차

1. 만남

(1)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비가 내려 바지 밑단이 다 젖어 들어갔다는 것만 빼면. 언제나 보다 아주 약간 더 거지 같은 하루.

찝찝함을 견디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추웠다. 마치 이서윤의 인생처럼.

그녀의 인생은 늘 숨 막혔다. 수면 위로 입을 내밀고 뻐끔뻐끔 숨을 쉬는 금붕어처럼 그저 살기 위해 안달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 외의 일은 사치일 뿐.

그러니 E급 가이드(*에스퍼의 정신을 안정시켜 주는 사람) 판정을 받았다는 건 그녀의 인생에서 그저 곁가지 같은 일이었다. 하다못해 D급이라도 되었다면 적당히 협회가 붙여 주는 에스퍼(*이능력을 각성한 사람) 중 운명을 찾아 페어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를 찾아온 건, 보잘것없는 쪽으로는 S급 에스퍼의 희귀도와 같다는 E급 판정뿐. 게다가 등급이 너무 낮아서 에스퍼들의 정신을 안정시켜 주는 가이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오히려 쓸데없이 가이드 판정 따위를 받는 바람에 얹혀살던 삼촌의 집에서 끝내 도망치듯 독립해야 했다. 삼촌이 적극적으로 서윤을 이용하려고 갖은 수를 썼기 때문이다. 기어코 수집벽이 있는 변태 부자를 소개하려는 삼촌을 보며 서윤은 좌절했다.

에스퍼와 가이드가 세상에 등장한 지 겨우 15년이다. 가이드와 섹스하면 더 젊어진다는 둥 그 피를 마시면 장수한다는 둥 하는 미신이 아직 완전히 소멸하지 않은 채 일반인들 사이를 돌아다녔다.

그래서 서윤은 무작정 도망쳐야 했다. 마침 성인이 되어 다행이었다. 아르바이트 자리라도 구할 수 있었으니. 다만 그렇게 벌어들이는 돈으로는 이런 바닷가 근처의 집 밖에 구할 수 없었다.

바다에서는 몬스터가 기어 올라온다. 매일매일. 그러니 그녀가 향하는 보금자리는 을씨년스러운 겨울바람을 그대로 끌어안고 있었다.

겨울바람처럼 이서윤의 인생은 추웠다. 그것은 그녀가 저기 비죽 튀어나온 다리를 보고도 멈춰 서는 것 이상의 일을 하지 못한다는 소리와도 같았다.

“…….”

오늘도 그녀에게 치근대느라 영업시간이 지나고도 그녀를 붙잡고 일장 연설을 늘어놓은 사장 때문에 귀가는 더욱 늦어졌다. 그가 사장 부인의 전화를 받고 나서야 서윤은 풀려날 수 있었다.

이미 어두운 시간, 혹여 에스퍼들의 방어를 뚫은 몬스터가 난입하기 전에 그녀는 집에 들어가고 싶었다. 낡고 위험한 곳에 있지만 그녀를 따뜻하게 품어 주는 유일한 보금자리였다.

하지만 낡아 빠진 맨션의 계단에는 웬 장신의 남자 하나가 늘어져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이런 경우에 어떻게 행동할까. 잠깐 고민에 빠져 보았지만 서윤의 답은 하나였다.

“저기요.”

그녀의 부름에도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건조한 눈길로 남자를 살핀다. 질 좋은 양복은 한눈에 봐도 꽤 값비싸 보였고, 어둠에 가려지지 않은 손을 보면 젊은 사람이다. 그림자가 내려앉은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높은 콧대가 반사하는 전봇대의 불빛이 잘난 생김새를 짐작하게 했다.

아주 잠깐 서윤의 시선이 남자에게 머무른다.

그러나 생각을 정리한 서윤은 천천히 움직였다. 아직도 밑단이 젖어 축축한 다리를 사뿐사뿐 놀려 남자가 차지하지 않은 부분을 밟으며 계단을 올랐다. 그 와중에 남자의 옷깃이 살짝 밟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 3층에 있는 자신의 집에 들어갈 때까지 서윤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 *

샤워 후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꾹꾹 누르며 서윤은 아주 잠깐 문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따뜻한 샤워기 밑에서는 잊고 있었던 남자가 떠올랐기에.

이런 동네에 있을 만한 인물이 아닌데, 이상했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서윤이 할 수 있는 최선이다. 그대로 흔들어 깨워 부축한다거나 신고하는 건 선택지에 없다. 신고한다 한들 이 밤에 이런 위험지역까지 일반 경찰이 올지도 의문이고. 오히려 시민의 의무나 운운하며 신고 기록만 남겨 두겠지.

애꿎은 짐은 사양이다. 서윤의 인생은 이미 자신 하나를 감당하는 것으로 최선이었다. 이것이 그녀가 남자를 부르는 것 외에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은 이유였다.

남자에 대한 생각을 떠올린 그 때, 밖에서 쿵 소리가 났다. 묵직한 무언가가 계단을 딛는 소리 같았다. 순간적으로 숨을 멈춘 서윤은 그대로 숨소리를 죽이며 동작을 멈췄다.

몬스터인가.

어쩔 수 없이 몸이 덜덜 떨렸다. 바닷가에 위치해 한때는 관광도시였다던 이 근방이 죄다 꺼멓게 전깃불도 없이 죽어 버린 건 전부 몬스터 때문이다. 서윤 또한 집에 들어오면 최소한으로만 불을 켠 후에 끈다. 길 잃은 몬스터를 끌어들일 수 있으니까.

하지만 한번 들렸던 소리는 그대로 침묵 속에 묻혔다. 이 맨션에는 서윤 같은 사람이 몇 명 살고 있었다. 아마 다들 맞춘 듯 숨을 죽이고 있겠지. 어쩌면 그중 하나가 무언가를 떨어트리는 소리였을 수도 있다.

아니면 바람 소리였나? 몬스터가 이렇게 조용하게 다닐 리도 없으니. 다소 안심한 서윤은 한숨을 폭 내쉬었다. 다시 머리를 말리며 까맣게 죽은 눈을 깜빡인다.

아까 그 남자는 일어났을까. 근처에서 술이라도 먹고 헤매다가 이곳에 흘러들어 온 건가?

그 때 다시 밖에서 쿵 소리가 들렸다. 잘못 들은 것이 아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서윤의 등줄기에 소름이 좍 돋았다.

분명 무언가가 있다.

이렇게 조용히 다니는 몬스터가 있던가? 서윤은 살기 위해 외웠던 몬스터 도감을 황급히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하지만 아무리 떠올려도 답을 찾을 수 있을 리 없었다. 가이드긴 하지만 서윤은 직접 몬스터를 본 적도 없는 일반인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정말 몬스터라면, 그 남자는 먹혔을까?

쿵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는 서윤의 대문 앞에서.

숨을 참고 소리를 죽여야 하는데 턱이 덜덜 떨렸다. 제 이가 부딪치는 소리에 몬스터가 반응할까 봐 서윤은 입을 틀어막은 채 웅크리고 앉았다. 그런데도 목에서 흐으 하는 소리가 자꾸 흘러나오려 했다.

몬스터가 출몰하는 바다와 가까워 집세가 싼 동네라지만, 설마하니 집 안에서 몬스터를 만날 줄이야. 서윤의 집은 들어서면 안이 한눈에 보이는 작은 원룸이다. 아무리 대문이 철이라 한들 총화기도 튕겨 내는 몬스터의 공격에는 소용없을 터. 문이 열리는 그 순간 죽은 목숨이었다. 몬스터는 사람을 식량으로 여기니까.

끝도 없는 불운에 눈물이 흘러나오려 했다. 어릴 적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점점 메말라 언제부턴가 흘러나온 적 없던 눈물이었다. 조금이라도 더 살고 싶어서 서윤은 침대를 곁눈질했다. 밑의 공간이 좁지만 기어서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그 때, 놀랍게도 밖에서는 말소리가 들렸다.

“…열어 줘.”

“……흡.”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누군가가 야밤에 불도 안 켜진 서윤의 집을 정확히 찾아와 문을 두드리다니, 여태 한 번도 없었던 일이다. 처음에야 삼촌이 찾아와 저를 끌고 가는 상상을 몇 번 했었으나, 곧 이런 곳까지 그녀를 찾아올 사람은 없다는 걸 깨달았다.

죽음의 공포에 빠져 있던 서윤이라 상황이 단번에 이해되지 않았다. 한참을 숨을 끅끅 삼키며 머리를 굴리고 나서야 1층 계단에 쓰러져 있던 남자에게 생각이 닿았다.

왜 찾아왔지?

“거기 있잖아……. 열어 줘….”

그 말을 듣는 순간 놀랍게도 마음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이 점차 가라앉으며 얼굴마저 굳어졌다.

밖의 소음이 몬스터가 아닌 사람이라고 판명이 났어도 여전히 두려움에 떨던 서윤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있는 걸 안다는 듯한 남자의 말에 이번엔 다른 쪽으로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법. 15년 전 바다에서 몬스터가 기어 올라오기 시작한 후 이 나라에 생긴 법이다. 취지는 장황했으나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몬스터 재난 앞에서 타인의 고난을 외면하지 말 것. 그간 도덕의 영역에만 맡겼던 양심적 행위를 법으로 강제한 것이다. 아직 부족했던 에스퍼들과 무력한 군대를 가진 정부가 할 수 있던 최선이라고도 한다.

같이 몬스터라는 환난을 맞이했을 땐 서로 경계하지 말고 도울 것을 의도했을 것이다. 서로를 미끼 삼지 말고, 이렇게 몬스터를 피해 도망치는 이를 숨겨 주고.

하지만 서윤이 생각하기엔 이건 그저 좀 더 양심적인 이들을 나락으로 이끄는 족쇄일 뿐이다. 제대로 지키는 사람도 얼마 없는 유명무실한 법이다. 그래서 아까도 서윤은 과감하게 남자를 무시했다. 그가 의식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와서 콕 집어 서윤을 찾아오다니. 설마 아까 그를 지나치는 걸 본 것일까.

이 법은 유명무실한 것과는 별개로 끈질기게 살아남아 법정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는 도구였다. 처음에야 자신들의 가족을 버린 이들을 향한 비난의 방편으로 사용되었다, 원래 취지에 맞게.

하지만 점차 이득을 위한 수단으로 악용되었다. 각박한 사회 속에서 약자들이 요구를 쉽게 무시할 수 없도록. 몬스터 사체를 쉽게 입수할 수 있는 일부 재력가들은 사마리아인의 법이 발휘될 환경을 쉽게도 조작하곤 했던 것이다.

아까 살폈던 남자의 고급진 옷이 걸렸다. 어쩌면 밖에는 정말 몬스터라도 돌아다니고 있을지 모른다. 그 정도의 재력을 가진 남자가 이곳에서 실종된다면, 과연 에스퍼들의 조사가 없을까?

서윤의 집은 낡아서 CCTV는 없었지만 대로변에는 여전히 몬스터를 감시하기 위한 감시카메라가 많았다. 남자는 분명 그중 어느 곳에든 찍혔을 것이다. 어쩌면 서윤이 사는 맨션으로 다가오는 모습도.

“열어 줘……. 제발……. 있는데, 왜….”

끊길 듯 꾸준히 들려오는 남자의 목소리가 힘없이 울렸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점점 커진다. 이렇게 되면 이번엔 소리로 몬스터를 끌어모을지도 모르겠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던 서윤은 크게 결심한 후 문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듯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멈췄다. 하지만 가슴에서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망설임 끝에 문을 살짝 열자 그 틈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아…!”

그렇게 문 사이로 몸을 들이민 건 몬스터의 눈을 한 미남이었다.

놀란 서윤이 몸을 뒤로 빼며 물러나자 그는 우그러트릴 듯 문을 밀치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구둣발로 유린당하는 방의 정경이 서글펐다. 도움을 청한다면 전화나 빌려주고 일을 끝낼 생각이었는데, 이렇게 막무가내로 들이닥치다니.

“뭐 하는 거예요!”

“거봐, 있잖아.”

더 따지려던 서윤은 환하게 미소 짓는 남자를 보고 일순 할 말을 잃었다. 서윤의 방 안은 무척 깜깜했기 때문에 남자의 뒤로 스며드는 가로등 불빛이 눈부셨다. 그 완벽한 역광 속에서도 남자가 미소 짓는 건 똑똑히 보였다. 게다가 마치 서윤을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목소리 가득히 감정을 담고 있었다.

“……누구세요?”

“여기 있었어.”

“누구시냐고요!”

남자는 계속 미친 사람처럼 여기 있었다며 중얼거렸다. 아까 잠깐 물러갔던 소름이 다시 오돌오돌 올라오기 시작했다. 아직 술에 취했거나 정말 미친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냥 경찰에 먼저 연락을 하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른다. 아까는 몬스터가 아니라는 사실에 갑자기 맥을 놓아 버렸던 것 같았다. 이래저래 경솔했던 자신을 자책하며 서윤은 계속 뒤로 물러났다. 등에 벽이 닿을 때까지.

“윽.”

불쑥 팔이 잡히자 통증이 들었다. 미약한 앓는 소리에 남자가 멈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막무가내로 쳐들어온 사람답지 않게 그녀의 아픔에 신경 쓰는 반응이라 서윤은 반사적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남자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나며 방 안은 다시 암흑 속에 빠져들었다. 조금 전까지 가로등 불빛 쪽을 보고 있던 시야가 일순 깜깜해지고, 남자의 웃는 얼굴이 잔상처럼 남았다. 잡힌 팔부터 소름이 걷잡을 수 없이 돋았다.

“왜 이제 왔어.”

“나, 나가 주세요.”

맨살과 맨살이 닿자 갑자기 기이한 예감이 들었다. 소름이 돋는 이유가 마치 따로 있다는 것처럼. 단 몇 분간 마주했지만, 서윤은 눈앞의 남자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아마 그게 무서운 탓이리라고 서윤은 생각했다.

자신이 그녀의 방에 침입한 주제에 왜 이제 왔냐고 애달프게도 말하는 남자의 악력은 점점 거세어졌다. 무서워서 무릎 뒤에 힘이 탁 풀린다. 억지로 억지로 다리에 힘을 줘 가며 버텼다. 그러나 목소리는 절로 떨렸다.

“응? 왜 이렇게 늦게 왔어.”

“대체 무슨 소리예요.”

무력감이 서윤을 잠식했다. 당장 잡힌 손아귀 하나 못 빼는 것에서부터 힘 차이가 나도 너무 났다. 서윤이 필사적으로 팔을 비틀자 남자는 그녀의 양쪽 팔을 다 구속한 채 벽에 밀어붙였다. 단지 그 행동 하나로 서윤은 채집 당한 곤충처럼 옴짝달싹하지 못한다.

아직도 가물거리는 시야로 남자가 몸을 점점 붙여 오는 것이 보였다. 달달 떨리는 턱을 애써 부여잡고 서윤은 고개를 틀었다. 꼭 얼굴이 맞닿을 것만 같아서.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서윤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었다. 그 접촉에 서윤의 의문은 한층 커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들까.

“……흡.”

오묘한 기분이었다. 꼭 무언가가 채워지는 감각이기도 했다. 이렇게 느끼는 자신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살면서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감정은 곧 혼란을 낳았다. 남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형편없이 떨리고 있었다.

그 때 귓가로 무척이나 가냘픈 소리가 하나 들렸다. 무척 작았지만, 서윤은 그것이 이 남자의 목소리임은 정확히 인지할 수 있었다.

【도와줘.】

“뭐, 뭐라구요?”

이런 자세로 도움이라니. 대체 무슨 도움을 말하는 것인가. 애써 긴장을 삼키며 서윤은 남자에게 물었다.

“응……?”

【도와줘.】

하지만 서윤의 물음에 남자는 고개를 슬쩍 기울이며 멍하니 되물었다. 그는 아까부터 서윤의 목덜미에 제 얼굴을 묻었다가 머리카락에 부볐다가 하면서 어색하게 굴고 있었다. 꼭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강아지 같기도 했다. 위기의식 없이 이런 생각이나 하는 자신의 감정도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남자의 멍한 물음과 함께 또 도와 달라는 소리가 들려 서윤은 한껏 혼란스러워졌다. 두 가지가 동시에 들렸기 때문이다.

대체 이게 뭐지?

“기다렸어.”

【도와줘.】

서윤에게서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다시 고개를 기울이며 의문을 표하던 남자는 이내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다시 환하게 웃으며 달콤하게 말했다. 어둠에 이제야 적응한 서윤의 눈이 높은 콧날과 시원스런 입매의 윤곽만 겨우 잡을 때였다.

계속해서 들려오는 이상한 소리에 서윤은 눈만 크게 떴다. 혼란스럽고 또 무서웠다. 감정의 소용돌이에서 팔은 절대 움직이지 않았고, 급기야 남자는 제 몸을 가득 이쪽으로 기대 왔다. 배와 배가 맞닿을 만큼.

최대한 벽으로 몸을 붙이며 피한 서윤이 눈을 질끈 감았다. 외면하고 싶었지만 아까부터 남자의 움직임은 노리는 바가 명확해 보였다. 끈적한 숨결이 계속해서 그녀의 귓가를 맴돌았다.

무언가를 음미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머리칼 냄새를 맡던 남자가 이윽고 천천히 얼굴을 움직였다. 그대로 서윤의 입술을 노리고 내려온다. 반사적으로 서윤은 고개를 훽 틀어 피했다. 볼에 내려앉는 남자의 입술 감촉이 역시나 퍽 오묘하다.

“응…? 이상하네.”

다만 아까부터 그녀를 잠식하는 묘한 기분과 별개로, 마치 서윤이 피할 줄 몰랐다는 듯한 반응은 그녀를 한층 겁먹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진짜 미친 사람 같았기에.

제 쪽을 제대로 쳐다보라는 듯, 남자는 조금 떨어져서 서윤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 의도가 명확히 느껴지는 이 순간 또한 이상하다. 감정이 전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하지만 생각을 거듭해도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친근한 행동이었다. 애써 정신을 차린 서윤은 꿋꿋이 고개를 튼 채 말했다. 긴장감이 뒤늦게 그녀를 재촉했다.

“잘, 잘못 찾아오셨어요. 그냥, 가세요.”

“왜 그래? 응?”

【도와줘.】

정말 이해 못 하겠다는 표정을 한 남자는 마치 달래듯 서윤의 볼에 계속 입을 맞췄다. 곤란한 일이었다. 그의 입술이 닿는 부분이 점차 붉게 달아올랐다. 마른침을 삼키자 목구멍이 크게 울렁였다.

서윤은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의문을 되새겼다. 이 남자는 대체 누구고, 아까부터 저 소리는 대체 뭘까. 꼭 꿈이라도 꾸는 듯한 감각이었다. 그러다 무심코 도와 달라는 환청 같은 소리에 집중하자 가슴 속에서 미약한 감정 하나가 퐁 솟아올랐다.

어둠 속에서도 무척이나 환히 빛나는 감각이었다.

……도와줘야 하는데.

대체 무엇을, 어떻게?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무턱대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큰 확신에 의문을 가질 겨를도 없이 서윤이 스르륵 남자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 순간 그녀의 마음속을 훤히 읽은 것처럼 남자가 말했다. 다시 환한 미소를 걸고서.

“그래. 맞을 줄 알았어.”

“이게 대체……, 읍…!”

단번에 입술이 닿았다. 남자의 입술은 무척 뜨거웠다. 그렇게 점막이 서로 맞닿은 순간, 서윤은 몸에 힘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바닥으로 추락하는 그녀의 허리를 남자가 단단히 받쳐 든다.

“기다렸어.”

입 안을 파고드는 뜨거운 살덩이의 감각에 서윤은 눈을 크게 떴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남자는 계속 기다렸다고 읊조리며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 입술을 능수능란하게 가르고 들어온 남자의 혀는 마치 뱀처럼 그녀의 입 안을 탐색했다.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샅샅이.

혀뿌리를 꾹꾹 누르며 그 안의 달콤한 샘을 탐하던 남자는 서윤이 그 감각에 몸서리치는 사이에 입천장을 훑었다. 오돌토돌한 부분을 남김없이 탐한 후에는 그녀의 혀를 감아 오며 끈적하게 애무했다.

숨이 막혔다. 첫 키스치고는 지나치게 농밀하다. 가빠지는 숨을 따라 서윤은 점점 풀리는 다리를 제어할 수 없었다. 허리를 받친 팔에 의지하기 싫으면서도 의지하고 싶은 묘한 기분이었다. 그녀의 다리가 완전히 풀려 버리자 남자가 그 사이를 불쑥 파고들었다.

“이게……, 뭐야…….”

【도와줘.】

입술이 떨어지자 서윤은 멍하니 벽에 기대 그를 바라보았다. 온통 끈적한 감각에 휩싸여 생각을 이어갈 수가 없었다. 그것이 시발점이 된 듯 남자의 손이 그녀의 잠옷 안으로 파고들었다.

잠들기 직전이라 안에 아무것도 입지 않은 헐렁한 잠옷은 무척이나 무력하게도 침입을 허용했다. 뱀처럼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타고 올라온 손이 봉긋하게 솟은 그녀의 가슴을 쥐었다.

“흐읏……!”

【도와줘.】

한 번도 타인의 손길을 허용한 적 없던 곳이 마구잡이로 파헤쳐졌다. 거칠게 가슴을 주무르는 손길에는 농염한 의도가 담겨 있었다. 남자의 엄지가 가슴의 돌기를 꾹 누르자 찌릿한 느낌이 났다. 생소한 감각은 자꾸만 정신을 좀먹듯 그녀를 꿈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냥 그대로 있으라는 듯이.

겨우 두 팔을 들었으나 허무하게 남자의 어깨만 쥘 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계속해서 제 가슴을 주무르는 남자의 손과 꽉 잡힌 허리에 온몸이 녹아내리는 것 같다.

“이상해……, 읍…!”

【도와줘.】

【도와줘.】

다시 숨이 막혔다. 한층 절박하게 들리는 도와 달라는 환청과 제 입을 막아 오는 남자 때문에. 거친 입맞춤이 다시 시작되었다. 문득 다리가 허공에 붕 뜨는 감각이 들었다. 착각인가 싶었다가 실제로 시선 끝에 걸리는 발을 보고 놀란 서윤은 남자의 목을 둘러 안았다.

남자는 그 상태로 서윤을 들고 침대 쪽으로 이동했다. 풀썩하는 소리와 함께 침대에 등이 닿자마자 묵직한 것이 그녀의 위로 올라탔다. 한 번도 두 명분의 체중을 받아 본 적 없는 그녀의 낡은 침대가 끼익 소리를 내며 울었다.

“아……! 으흡…!”

마치 산소 호흡기를 찾듯이, 그녀가 입만 열면 남자는 고개를 숙여 입술을 탐했다. 거칠게 물고 빨아 댄 입술에서는 피 맛이 미약하게 났다.

그녀의 가슴을 장난치듯 희롱하던 손이 서서히 밑으로 내려갔다. 헐렁한 잠옷 바지는 이미 반쯤 내려가 있었다. 살갗에 닿는 차가운 공기에 잠깐 정신이 든 서윤이 드디어 팔에 힘을 주어 남자의 어깨를 짚었다.

그러자 남자가 고개를 들어 그녀를 의아하게 내려다봤다. 마치, 왜 그러냐는 듯.

다시 정신이 멍해진다. 남자가 자신을 의아하게 쳐다보는 행동이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아서 혼란이 가중되었다. 꼭 귀신에 홀린 기분이었다.

이상한 감각에 질식할 것 같았다. 창에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이 남자의 얼굴을 비추고 있었다. 묘하게 낯익은 얼굴이라 서윤은 멈칫했다. 누구지?

비에 살짝 젖어 내려온 앞머리가 수려한 이마에 붙어 있었다. 짙은 눈썹과 깊은 눈매에는 등골을 저릿하게 하는 정염이 담겨 있었다. 낯이 익다고 생각한 건 어쩌면 연예인처럼 잘빠진 얼굴이라 그럴지도 몰랐다.

그녀가 멍하니 시선을 던지자 마주 바라보던 남자가 다시 그녀의 미간에 소리 나게 입 맞췄다. 동시에 손은 분주히 움직여 골반 어림에 걸린 서윤의 속옷을 더듬었다. 잘 벗겨지질 않자 그대로 그것을 찢어 버린다.

“아……!”

풀썩하고 잠옷 바지와 찢어진 속옷이 바닥에 내려앉는 소리가 들렸다. 얄팍한 천 조각이라고는 해도 그것마저 사라지자 무척 무방비해진 기분이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아래를 가리려고 발버둥을 쳤다. 그 순간 두 발목이 꼼짝없이 남자의 손에 잡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어둡긴 했어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이윽고 조금 물러난 남자가 한술 더 떠 그녀의 발목을 활짝 양옆으로 벌렸다. 뜨거운 시선이 가랑이 사이로 쏟아졌다. 그런데도 발목에 닿은 남자의 맨손이 기분 좋아서 서윤은 미칠 지경이었다. 약이라도 한 듯 몽롱한 기분이 계속되었다.

서윤이 상체를 일으키려 하자 남자가 두 손을 살짝 잡아당겨 그녀를 도로 눕혔다. 그리곤 한층 경악할 만한 짓을 했다. 서서히 고개를 숙이더니 그대로 그녀의 밀지에 얼굴을 박은 것이다.

“미쳤어…! 아……!”

가장 먼저 느낀 건 뜨겁다는 감각이었다.

남자의 높은 콧대가 먼저 그녀의 밀지를 찔러 왔다. 다급하고도 당황스러운 서윤의 외침이 들리지 않는지, 그대로 입을 벌린 남자는 혀를 내밀어 그녀의 아래를 핥았다. 혀를 뾰족하게 세우고는 다물어져 있는 입구를 쿡쿡 쑤셨다.

미칠 것 같은 쾌감이었다. 눈앞에서 펑펑 터지는 흰 빛에 눈이 멀 듯하다. 난데없이 쳐들어온 낯선 남자에게 아래를 빨리고 있는 현실이 의아해야 할 텐데, 그녀는 한없이 강한 정염에 이끌리기만 했다.

그녀가 지나치게 헐떡거리자 남자는 발목을 놓아줬다. 끝인가 싶었는데 이번엔 서윤의 오금을 틀어쥐고는 그대로 그녀의 다리를 죽 밀었다. 한층 적나라한 자세가 몹시 불편했다.

“으읏!”

【도와줘.】

쉴 새 없이 들리는 영문 모를 애원에 머리가 푹 익어 버리는 것 같았다. 남자의 콧대가 아래쪽의 민감한 돌기를 쿡쿡 누를 때마다 자꾸만 고개가 하늘을 향했다.

“아……!”

【도와줘.】

【도와줘.】

“그만! 이상해……!”

기어코 흘러넘친 쾌감이 밖으로 흘러내렸다. 생전 처음 겪는 감각에 서윤은 이불을 쥐어짜며 몸부림을 쳤다. 도무지 현실 같지 않은 일이 계속되었다.

서윤은 저도 모르게 남자에게 손을 뻗었다. 손끝에 남자의 머리칼이 걸렸다. 촉촉하면서도 부드러운 그를 잡고 마구 흔들어도 남자는 정신없이 고개만 움직일 뿐이었다. 게걸스럽게도 서윤의 아래를 계속 핥았다.

“달아.”

한참을 그렇게 갈증 난 사람처럼 아래를 핥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멍한 시선이 서윤을 향한다. 잠에서 막 깨어나기라도 한 듯 한참을 그렇게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만 보았다. 그 시선에 사로잡힌 것처럼 서윤은 멍하니 늘어졌다.

지익 하고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더니 무언가가 퉁 튕겨 올라왔다. 이상하게 호흡이 가쁘다. 확연하게 그녀를 찌르는 소리에 서윤은 몽롱한 눈길로 남자의 하체를 바라봤다.

【도와줘.】

거대한 실루엣이 시선 끝에 걸린다. 심장 소리가 크게 귓가를 울렸다. 그저 조금 몽롱하기만 하던 기분은 어느새 꿈에 푹 절여진 듯 고양감마저 느껴진다. 팔이 멋대로 움직여 남자를 향하려 했다.

그 순간 아주 미약한 그녀의 이성이 다시 의문을 제기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일까.

서윤의 고민을 오래 두고 볼 생각이 없는지 남자는 손을 움직였다. 발목이 잡힌 서윤의 몸이 스르륵 아래로 움직인다. 쾌감에 버둥거리느라 잡고 있던 이불이 같이 질질 끌려 침대 아래로 흘러내렸다.

서윤의 골반을 잡은 남자가 그대로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는다. 일련의 움직임이 다시 꿈처럼 아스라이 멀어졌다.

“흐!”

그리고 그 순간 큰 고통이 찾아왔다.

“흐읍! 으……!”

맞닿은 입술 덕에 앓는 소리가 남자의 입 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아래쪽에서는 뭉툭하고 커다란 무언가가 서윤을 비집고 들어오려고 했다. 꽉 맞물린 아래쪽은 이런 무식한 침입을 겪어본 일이 없어서 무척 버거웠다.

몽롱한 와중에도 아픔은 무척 커서 서윤은 원망스럽게 남자의 어깨를 잡았다. 그러자 그녀를 꽉 끌어안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숙여 다시 뜨거운 입맞춤을 내려보낸다. 퍽 자상한 몸짓이었다.

“쉬…. 괜찮아.”

【도와줘.】

【도와줘.】

하지만 아래쪽의 움직임은 그대로였다. 옴짝달싹하지 못하는 기분으로 서윤은 도리질을 쳤다. 툭, 하는 느낌과 함께 남자의 큰 성기 앞부분이 그녀의 안에 진입한 것이 느껴졌다. 골반이 한껏 벌어져 있었다.

마음대로 잘되지 않는지 남자는 잘게 허리를 움직이며 조금씩 조금씩 깊이 들어왔다. 서윤은 그저 입을 크게 벌린 후 아무 소리도 내지 못했다. 안쪽이 연달아 투둑투둑 거리며 찢어지는 기분이 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들어갈 자리가 아닌데 남자는 제 무식한 물건을 욱여넣고 있었다. 허벅지가 파들파들 떨리고 발끝이 바짝 오그라들었다. 아픔을 감내하는 것만으로도 최선이 된 서윤은 밭은 숨을 내쉬며 입만 벙긋거리고 있었다. 그나마 이마에 내려오는 따뜻한 접촉에 겨우겨우 버틸 뿐이다.

그렇게 한참을 조금씩 허리를 추어올리던 남자가 어느 순간 서윤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았다. 그러더니 갑자기 허리를 크게 튕겼다.

“흐윽!”

“아. 들어갔다.”

남자의 몸과 서윤의 몸이 틈 하나 없이 맞물렸다. 고개를 젖힌 서윤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부풀어 오르는 가슴에 이번엔 남자의 코가 닿았다.

“좋아…….”

그녀에게 얼굴을 비비며 남자는 다시 애처롭게 칭얼거렸다. 목덜미로 올라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조금씩 허리를 둥글게 말면서 아래로 내려갔다.

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몸이 조금 차가워졌다. 잠옷의 상의가 나풀거리며 침대 밖으로 떨어졌다. 이 또한 비정상적인 힘인데도 서윤은 의문을 가지지 못했다. 남자가 제 가슴의 돌기를 앞니로 잘근잘근 무는 감각이 아스라이 멀게 느껴진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눈을 겨우 한 번 깜빡인 후에 또 내쉬고. 초점을 잃은 두 눈과는 별개로 몸 안의 감각은 점점 생생해졌다. 처음엔 이물감이 낯설다가도 곧 뜨거움이 안을 비집고 들어온 것을 느낀다.

남자와 더할 나위 없이 가까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이 들자 이유 모를 고양감마저 그녀를 잠식했다. 꼭 이게 옳다는 듯이.

한참을 헤매던 서윤이 발가락을 겨우 꼼지락거릴 수 있을 때가 되어서야 고개를 틀어 남자에게 시선을 보냈다. 그는 서윤의 갈비뼈에 잇자국을 남기느라 등을 잔뜩 굽히고 있었다. 커다란 몸이 꼭 웅크리고 있는 짐승을 보는 듯했다.

“이제 됐어?”

【도와줘.】

환청이 달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환하게 웃는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말을 건네는 게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남자 또한 서윤을 한참이나 관찰했다. 눈앞에 그녀가 있다는 게 퍽 믿기지 않는다는 듯이.

고개를 슬쩍 기울인 그대로 그는 허리를 조금 뒤로 물렸다. 다시 미약한 고통이 서윤을 찾아왔다. 어째서인지 아까보다는 무척이나 사그라든 고통이었다.

“괜찮아.”

귓가에 울리는 소리가 악마의 속삭임 같았다.

“아……!”

“쉬…, 조금만 더.”

【도와줘.】

그녀가 어색한 자세에 몸부림을 치자 귓가를 울리는 달콤한 속삭임이 거세어진다. 철퍽거리는 상스러운 소리가 아래를 울렸다. 감각이 희미한 와중에도 남자의 큰 성기가 들이치는 느낌은 선연했다.

그것은 이윽고 거대한 쾌락으로 낯을 바꾸었다.

아까보다도 더 강한 자극에 서윤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 상태로 숨을 쉬자 이상하게 가슴이 턱턱 막혔다. 허릿짓이 점점 빨라졌다. 덩달아 서윤의 고개도 까딱거리며 침대에 부딪혔다. 남자의 입에서도 침음성이 나기 시작했다.

“아, 흣. 아…….”

“조금만, 응? 조금만 더.”

시야마저 조금씩 가물가물해진다. 남자의 커다란 몸이 꼭 요람이라도 된 듯 그녀는 조금씩 흔들렸다. 끈질기게 의아함을 제기하던 이성은 어느덧 정염에 묻혀 아래로 침잠했다.

철퍽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감각이 없어졌다고 생각했는데도 골반에 부딪히는 남자의 몸은 생생하게 느껴졌다. 어디선가 신음 소리가 들려온다. 자세히 들어보니 서윤 자신의 목소리였다.

그녀의 숨소리가 점점 거칠어지자 남자가 서윤을 향해 팔을 뻗었다. 한 팔로 몸을 지탱한 채 그녀의 얼굴을 잡더니, 깨물고 있는 입술을 살살 건드려 놓게 만든다. 기이할 정도로 자상한 손길이었다. 그 와중에도 허리는 끊임없이 흉포하게 움직이며 그녀의 안을 파고들었다.

“숨 쉬어야지. 그렇게. 쉬…, 착하다.”

“하, 응……, 이상해, 이상, 흐으, 해…….”

눈이 흐렸다. 안 그래도 어두운 방 안이다. 점점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남자가 크게 미소 짓는 건 똑똑히 보였다. 뜨거운 감각이 계속 그녀를 파고들었다.

남자의 시선도 뜨거웠다. 그 온도를 감당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서윤은 무심코 제 얼굴을 가렸다.

“안 보이잖아….”

하지만 남자는 곧 강하게 그녀의 팔을 치워 서윤의 얼굴을 드러냈다. 그 사실이 갑자기 무척 서러워진다. 이성은 이미 의지를 잃었으나 머리 한구석에 남아 있던 의문은 그녀를 맴돌았다.

눈물이 툭 떨어진다. 귓가를 따라 시린 감각이 길게 흘러내렸다. 그녀가 이번엔 신음이 아니라 우느라 숨을 헐떡이자 고개를 기울인 남자가 허리를 잠시 멈췄다. 서윤은 계속 히끅거리는 소리를 자제하지 못했다.

“…이상하네……. 왜 울지?”

이상한 일이 아닌데 이상하게 여기고 있었다. 남자도 서윤도. 어두운 밤을 틈타 무척 기묘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혼란이 빙글빙글 맴돌다가 가슴을 뚫고 솟을 듯했다.

서윤이 계속 울음을 그치지 못하자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할짝거리는 선명한 소리가 귓가를 울린다. 길게 늘어진 눈물은 먹어 없애도 없어지지 않았다.

“입 맞춰 줄게. 울지 마.”

놀라울 정도로 순수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눈가를 맴돌던 남자의 입술은 이윽고 서윤의 입 안을 탐했다. 혀는 무척이나 뜨거웠다. 서윤이 히끅거리지 못하자 눈물을 그쳤다고 생각한 것인지 남자가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그의 움직임에 따라 둥둥 몸이 울리는 듯한 기분을 받으며 서윤은 그렇게 까무룩 기절하고 말았다.

* *

햇살이 눈꺼풀을 찌르듯이 두드렸다. 날이 밝았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서윤은 황급히 눈을 떴다.

“아앗……!”

허리 아래쪽이 찌르르 울리며 고통을 호소했다. 그걸 참으며 그녀는 침대를 짚어 몸을 황급히 일으켰다. 반사적으로 손끝에 채이는 이불을 마구 끌어당겨 몸을 가렸다. 그야말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렇게 맨살에 닿는 이불의 감촉을 느끼고 나서야 서윤은 완전히 정신을 차렸다.

다급하게 방 안을 살피자 그녀 말고 다른 이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도 전날 밤이 꿈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몸에 여실히 남은 통증과 흔적들이 그의 존재를 증명했으므로.

“읏.”

조심스럽게 다리를 움직여 침대 밑으로 뻗었다. 아직 화장실 안을 살피지 못해서 숨죽인 채로. 물소리가 나지는 않지만 일단 이 집에는 저 혼자라는 걸 꼭 확인해야 할 것만 같았다.

두 다리가 닿자마자 힘주어 일어섰지만 이내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파들파들 떨리는 허벅지는 안쪽이 너무 당겨 와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이불을 쥐느라 손을 짚지도 못해 무릎이 호되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파.”

주저앉은 그대로 몸을 웅크린 서윤이 한탄하듯 내뱉었다. 어젯밤에는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힐끔 욕실을 쳐다본다. 이렇게 큰 소리를 냈는데도 인기척이 없다. 엉금엉금 기어서 화장실 문으로 다가갔다. 가는 내내 방금 깨질 듯 떨어진 무릎과 민망한 곳이 무척이나 아팠지만 이를 악물면서 움직였다.

조심스럽게 밀어낸 화장실 문 안쪽은 비어 있었다.

“…….”

안도의 한숨이 소리 없이 퍼졌다. 반사적으로 쳐다본 대문은 단단히 닫혀 있었고, 서윤은 다시 엉금엉금 기어가서 문을 잠갔다. 하나도 빠짐없이 단단히.

그제야 팔에 힘이 풀렸다. 주르륵 바닥에 볼썽사납게 미끄러진 그녀의 몸에는 아직도 어젯밤의 흔적이 여실히 남아 있었다. 심지어 그녀의 밀지에서는 계속 통증이 올라오고 있었다.

입술을 깨물며 고민하던 서윤은 조심스럽게 다리를 벌리고 아래쪽에 손을 대어 보았다. 퉁퉁 부은 그곳은 조금만 건드려도 시뻘건 아픔을 호소했다.

“흑…….”

이제야 현실감이 거세게 느껴져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어젯밤에 인식하지 못했던 현실이 그녀에게 해일처럼 밀려왔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잠에서 깨어난 환한 아침,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라 서윤은 무척 억울한 심정이었다. 어제 그 환청은 무엇인지, 왜 자신의 몸은 그걸 기꺼이 여겼는지.

그 남자는 대체 누구인지.

혼란스러움에 구토감이 일 지경이었다. 정신이 저도 모르는 사이에 빗길에 던져져 거세게 두들겨 맞은 기분마저 들었다. 어쩌면 남자는 요새 유행한다는 마약을 한 채 쓰러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약 성분이 서윤에게 흘러들어 와 그런 환청을 듣게 한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가정이 떠오른다.

몬스터의 사체에서 뽑아낸 성분으로 만든다는 그 약은 제대로 된 명칭도 없었으나 하층민들 사이로 알음알음 퍼져 나가 있었다. 먹으면 고도의 환각과 환청을 보인다는 소문과 함께. 그 어떤 마약보다 중독성이 강하고 그 어떤 마약보다 현실을 잊게 해준다고 했다.

생각할수록 가능성이 있는 얘기인 듯했다. 그녀가 사는 동네는 좋게 말해도 치안이 우수한 편은 아니었으니까. 그런 질 고급 옷을 입은 남자가 어쩌다가 그런 약 따위를 하는지는 모르겠으나, 하필이면 서윤에게 여파가 미쳐버린 게 분명했다.

꿈 같기만 하던 어제는 현실이었다.

안타깝게도 그녀의 악몽에 등장하는 소재는 많았다. 변태 부자, 흰 벽으로 이뤄진 실험실, 삼촌의 검은 손아귀 등등. 그냥 그저 그런 악몽에 하나 추가된 일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손으로 마구 얼굴을 훔치다 보니 빨간 것들이 점점이 보였다. 홀린 듯 시선으로 방 안을 훑으며 빨간 자국을 따라갔다. 매트리스와 그녀가 몸을 가린 이불에는 그녀가 첫 경험을 치른 흔적이 무자비하게 남아 있었다.

이를 악물며 입술을 짓씹었다. 다시 한번 손을 마구 문질러 얼굴에 남은 울음을 모두 없앴다. 그녀가 잘못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뭔가를 빼앗긴 것처럼 굴 이유도 없었다.

손이 계속 부들부들 떨렸다. 그렇게 한참을 서윤은 자신을 위로하며 멍하니 앉아 있어야 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자꾸만 파들파들 떨리는 목은 호흡을 잠깐 놓치는 것만으로 울컥하고 울음을 쏟아 내려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억지로 그녀를 비집고 들어오던 쾌락이나 충족감은 이미 흔적도 없었다는 점이다. 다시는 이런 약 따위에 당하지 말아야지. 다시는 그런 것에 휘둘리지 말아야지. 그러려면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며 서윤은 계속해서 다짐을 거듭했다.

일단 씻어야 했다. 그리고 어제의 흔적을 남김없이 없애 버려야 한다.

애써 흔들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면서 서윤은 애써 해야 할 일을 하나씩 꼽았다. 그러다 문득 밖이 지나치게 밝다는 생각이 들어서 황급히 시계를 찾았다.

오후 두 시. 그녀가 아르바이트에 가려면 이미 집을 나섰어야 하는 시간이었다.

* *

“서윤 씨. 어제 내가 그렇게 잘해 보자고 하자마자 지각이라니, 내 말이 우스워?”

“죄송합니다. 몸이 안 좋아서.”

“컨디션 관리도 업무인 거 몰라서 그래? 내가 정말 딸 같아서 충고해 주는 거야. 명심해, 알았어?”

“…네. 죄송합니다.”

연신 몸을 꾸벅꾸벅 숙였다. 사장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떨어질 때마다 울음이 솟았지만 억지로 눌렀다. 이럴 때 울어서 상황을 모면하면 그다음엔 다른 아르바이트생들 사이에서 말이 나왔다.

제법 예쁘장한 외모는 서윤의 인생에 도움이 된 적이 별로 없었다. 아르바이트를 잡을 때 도움이 되긴 했으나, 그런 경우엔 꼭 대가가 따랐다. 서윤이 원한 건 그저 정당한 노동 계약이었으나, 가끔 당연하다는 듯 합격을 빌미로 이상한 걸 요구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녀가 살고 있는 곳이 도심지와는 먼 탓에 아르바이트의 선택지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슬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기에는 나이가 많아졌다. 정직원도 아닌 아르바이트 자리는 조금이라도 더 젊은 사람을 선호하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게, 그녀가 추근덕거리는 유부남이 사장으로 있는 이곳을 과감히 뛰쳐나가지 못하는 이유였다. 설상가상으로 서윤을 바라보는 사장의 눈길은 왜인지 삼촌을 떠올리게 만들어 그녀를 늘 위축시켰다.

“휴. 알아들었으면, 가 봐.”

사장은 다시 한번 잔소리를 하더니 한숨을 거하게 쉬며 손짓을 했다. 가서 일을 하라는 소리였다. 서윤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유니폼으로 갈아입으러 갔다.

걸을 때마다 민망한 곳이 너무 아프고 쓰렸다. 하지만 괜히 걸음걸이가 우스꽝스러울까 봐 내색도 한 번 못 하고 다리에 힘을 주어 걸어야 했다. 그러나 다리 역시 혹사당하긴 마찬가지였어서 곤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오늘 하루 아르바이트를 견딜 수 있을지 무척 걱정이 되었다.

아픔을 상기하자 다시 어젯밤의 영상이 떠올라서 몸이 절로 굳었다. 서윤은 가빠지는 숨을 겨우겨우 내리누르며 빠르게 탈의실로 갔다.

나올 때 보니 현관이 조금 이상했다. 잘 안 닫히는 기분이라 걱정이 되어 유심히 살피자 윗부분이 살짝 우그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정확히 어제 그 남자가 잡아 열던 곳이었다. 말도 안 되는 힘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서윤은 애써 생각을 지워냈다. 어젯밤은 몽롱하기 짝이 없어서 사실 정확히 그 부분을 남자가 붙잡아 열고 들어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다시는 볼 일 없기만을 기도하며 잊는 수밖엔 없을 터.

숨이 점점 가빠졌다. 옷 단추를 여는 손가락이 덜덜 떨린다.

마음 같아선 그녀도 모든 걸 놓아둔 채 쉬고 싶었다. 하지만 아르바이트 시간이 늦었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기계같이 움직여 기어이 나올 준비를 마쳤다. 통장의 잔고를 떠올리면 팔자 좋게 몸을 웅크리고 울 수 있는 시간도 별로 없었다.

크게 심호흡을 했다가 연거푸 내쉬면서 머릿속에서 서서히 어젯밤을 지워나갔다. 몸에는 다소 흔적이 남았으나 불안한 액체들은 전부 샤워기 아래에서 지워 버렸다. 시간이 늦었지만 침대 또한 대충 정리하고 나왔다. 들어오자마자 보이는 광경이 핏자국 가득한 잠자리이길 원하지 않았으니까.

없던 일처럼, 앞으로도 없을 일처럼.

그녀는 스스로를 천천히 다독였다. 불행 중 다행인 건 오늘은 금요일이라 하루만 버티면 쉬는 날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주말이 지나면 그녀의 월급날이었다. 집세를 내고 남은 돈으로 간만에 맛있는 사치를 부리는 게 좋겠다.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가면 없던 일이 될 것이다. 서윤은 그렇게 믿었다.

“왔어? 이거 13번 테이블.”

“응. 늦어서 미안해.”

다행히도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 동료는 어깨를 한번 토닥이며 무리하지 말라고 해주었다. 같은 여자였지만 타인의 손길을 저도 모르게 쳐낼 뻔했던 서윤은 가까스로 손을 제어하며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단련된 아르바이트 경험이 아니었다면 그대로 사색이 되었으리라.

황급히 커다란 잔에 나온 맥주 세 개를 들고 몸을 돌렸다. 사장의 취향대로 딱 붙는 스타일의 유니폼은 움직이기 힘들어서 다리에 더욱 힘을 주어야 했다.

13번 테이블로 다가가자 건장한 남자 세 명이 앉아서 크게 떠들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다시 다리가 멈칫거린다. 숨이 턱 막혀 오도 가도 못하고 서 있자 그쪽에서 먼저 손을 들었다. 서윤이 테이블을 헷갈렸다고 생각한 듯.

이번에도 가까스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쪽으로 걸어갔다. 다리가 몹시 삐걱거려 우스운 장난감 병정이 된 것 같았지만, 그들은 자신들만의 대화에 집중해 서윤을 신경 쓰지 않았다.

“어제 들었어? 그거?”

“그거 뭐?”

“씨발, 말도 마. 그 새끼 실종됐다고 탐지계열 요청하고 난리도 아니었는데.”

“너네 클랜에도 연락 왔냐?”

서윤이 일하는 곳은 바닷가 근처의 주점 겸 음식점이다. 위치가 위치다 보니 이곳은 일반인들을 상대로 영업하는 곳은 아니었다. 바다 쪽 현장으로 파견 나가는 에스퍼들이 잠시 들르는 일종의 거점 같은 곳이었다.

특수한 계층을 상대로만 장사를 하다 보니 영업시간도 일반적이지 않았다. 점심 즈음 열어 해가 지기 전에 닫는 주점은 확실히 특이했다.

에스퍼들은 알코올의 영향도 거의 받지 않았기에 몬스터를 상대하러 가기 전에 한두 잔 하고 가는 경우도 많았다. 마찬가지로 특수한 곳에 살기에 밤늦게 걸어 다니는 것이 꺼려지는 서윤에게는 적절한 시간대이기도 했다.

“여기 안주도 리필해 주세요.”

“네.”

“밥은 언제 나와?”

“확인해 드릴게요. 잠시만요.”

몬스터는 종류가 많았으나 하나같이 흉측하고 기괴한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들이 맨 처음 발견될 당시, 사람들은 동물의 한 종류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디서 왔는지 모를 괴물 같은 것들. 그런 뜻을 담아서, 따로 이름이 있음에도 통칭 ‘몬스터’로 뭉뚱그려서 불렀다.

놀랍게도 발달한 현대 문명의 화기는 몬스터에겐 통하지 않았다. 평범한 외양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총탄을 다 튕겨 낼 만큼 가죽이 단단해 보이진 않았기에 군대는 쉽사리 패닉에 빠졌다.

하지만 마침 몬스터가 대규모로 튀어나오는 ‘몬스터 웨이브’에 맞춰 나타난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특수한 이능력을 각성한 에스퍼와 그런 에스퍼의 정신을 다잡아 주는 가이드의 존재였다.

에스퍼가 각성한 능력은 아무리 한미한 것이라도 몬스터에게 통했다. 마치 이들로 몬스터를 상대하라는 듯이. 뒤늦게 그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적극적으로 에스퍼와 가이드를 찾기 위해 나섰다.

“그 새끼라면 문도하 말하는 거지?”

“어, 맞아.”

“나 아침에 봤는데?”

“뭐? 어디서?”

“여기 오기 전에 있는 관문에서. 멀쩡하게 돌아다니고 있던데?”

에스퍼 하나가 확인했던 식사가 나왔기에 서윤은 바로 들고 그들의 테이블로 돌아왔다. 돌아오자마자 문도하라는 이름이 대화의 주제로 떠올랐다. 서윤은 테이블을 세팅해 주며 자신도 모르게 귀를 기울였다.

한국의 유일한 S급 에스퍼 문도하. 이런 거물에 대한 이야기는 잘 기억해 둬야 했다. 에스퍼들이 무심코 흘리는 고급 정보가 나중에 제 목숨을 어찌 살릴지 모르니 자연스레 익힌 습관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등골이 서늘한 기분도 같이 든다. 왜 이럴까.

“그냥 또 어디 돌아다녔겠지. 그 새끼 그러는 거 한두 번이야?”

“이번엔 진짜 심각했다고 그랬어. 여차하면 그 새끼 죽이러 갈 에스퍼 명단도 짰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 새끼 진짜 폭주하는 거 아냐? 가이드 아직이지?”

“어. 존나 무서워 죽겠네, 시한폭탄 같은 새끼.”

쿵쿵 심장 소리가 가슴을 울렸다. 불길한 기운이 산소 대신 그녀의 폐에 들어찼다. 마침 마지막 그릇을 내려놓을 때라 다행이었다. 손님 앞에서 음식째로 그릇을 깨 먹을 뻔했으니까 말이다.

문도하, 문도하. 그 이름이 왜 지금 이렇게 불길한 기분을 선사할까. 아침에 본 비정상적으로 우그러진 철문, 문도하가 오늘 아침에 목격된 그녀 집 근처의 관문, 비상식적인 그 힘과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

“아, 저기 나오네.”

“낯짝 참 재수 없게 생겼다. 그나저나 저거 내보낸 방송사에 또 지랄하겠네. 지 얼굴 나왔다고.”

“하여간 존나 비싼 얼굴이야.”

마침 그녀의 불길한 생각에 쐐기를 박듯 뉴스가 나왔다. 테이블에 있던 에스퍼 중 하나가 바람 계열 능력자였는지 손을 대충 휘저어서 TV의 볼륨을 높였다.

볼을 스치는 약한 바람을 따라 서윤의 얼굴도 절로 돌아갔다. 쿵쿵 심장 소리가 너무 커진 나머지 테이블에서 떠드는 에스퍼들의 목소리마저 아스라이 멀어진다. 햇살에 비치는 먼지가 느리게 유영하는 것이 보일 만큼 순간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흘렀다. 크게 떠진 눈이 뉴스 화면에 나온 남자의 얼굴을 가득 담았다.

커다란 몬스터를 향해 혼자 오연히 맞서고 있는 남자. 한국의 유일한 S급 에스퍼, 문도하.

어젯밤의 그 남자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