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무섭고 아름다운 >
오후 5시. 우희는 뿌연 먼지를 일으키며 멀어져가는 시내버스의 뒷모습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시골 동네의 막차인 버스가 커브를 돌아 자취를 감추자 비로소 시골로 돌아왔단 실감이 들었다.
스스로 서울 집을 떠나왔지만 유배된 거나 다름없었다. 오늘 아침 단출한 캐리어를 끌고 제 발로 집을 걸어나 올 때까지만 해도 중간에 붙들려 돌아가게 되진 않을까 헛된 생각을 품었다.
아직 핸드폰이 고요한 걸 보아 그들도 바라던 시골행이란 게 확실해졌다. 이복 오빠 김규호에게서 메시지가 오긴 했다.
[언제 올라올 거니?]
그에 이렇게 답했다.
[어디로 갈지 정하면.]
우희는 유학길에 오를 때까지 시골에 조용히 박혀 있을 생각이었다.
[내가 알아볼까?]
김규호의 질문에 긴장감이 묻어났다. 유학처를 알아본답시고 서울로 돌아오지 말고 되도록 시골에 박혀 있으란 속뜻이 아주 잘 느껴졌다.
하긴 어떤 오빠가 난잡한 클럽에서 연행된 반쪽짜리 여동생을 아무렇지 않게 마주 볼 수 있을까.
3주 전이었다. 그녀는 성적 취향을 한껏 반영한 클럽을 찾았고,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에 의해 얼떨결에 연행되었다.
경찰서로 달려온 김규호의 표정이 어떻게 변해갔는지 지금도 잊을 수 없었다. 결국, 환멸에 가까웠지.
“죄지은 것도 아닌데, 뭐.”
짜증스레 중얼거리며 한숨을 쉬었다. 포장되지 않은 흙바닥 위로 캐리어 바퀴가 돌돌돌 굴렸다. 자잘한 돌멩이가 튀며 바퀴가 덜컹거렸지만, 우희는 요령 좋게 손잡이를 움직여 균형을 잡았다.
서울 소재의 대학교에 입학하며 떠났던 동네는 전보다 더 을씨년스러운 느낌이었다. 10월이라는 생명력이 다해가는 계절 탓도 있으려나.
이 마을에서 30분 거리에 조폭의 은거지와 카지노가 있어서 일반인은 정붙이고 살기 힘든 곳이었다. 우희가 얹혀산 외갓집의 주요 고객이 근처를 어슬렁대던 조폭이었을 만큼 험악한 동네였다.
숭덩숭덩 위치한 허름한 시골집들에서 사람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몇 없는 주민은 도심으로 떠나가거나 생을 마감해 소강상태였다.
이곳에서 산 세월이 자그마치 20년인데, 석양이 내려앉은 밭과 산의 풍경이 TV 화면으로 들여다보듯 낯설게 변해 있다. 마을의 산 중턱에 자리 잡은 삼식 아저씨네 축사가 저렇게 작았던가.
건조하게 코끝을 스치는 바람만이 익숙한 냄새를 몰고 왔다. 흙과 산의 냄새였다. 미미한 고향의 정취가 정겨움보다 걱정을 안겨주었다. 이곳에서 잘 지낼 수 있을까. 불편한 것투성이인 시골로 돌아오니 괜한 기개를 부렸나 약간의 후회가 밀려들었다.
마음 편히 지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사람 한 명 돌아다니지 않는 썰렁한 동네를 보고 있자니 착잡함을 숨길 수 없었다.
우희는 축축 처지는 기운을 끌어올려 걸음을 재촉했다. 10분쯤 걷자, 주거지가 밀집된 동네가 보였다. 평상에 앉아 담배를 태우던 슈퍼 사장 장미옥이 벌떡 일어났다.
“어? 이게 누구여?”
우희를 알아본 장미옥의 자글자글한 주름에 반가움이 가득 어렸다. 기억대로라면 장미옥은 환갑이 다 되어갔다.
“안녕하셨어요?”
“세상에, 맞네. 우희네! 우희 네가 여긴 어쩐 일이여?”
“며칠 지내다 가려구요.”
우희는 냉큼 달려와 두 손을 쥐고 흔드는 장미옥을 향해 웃었다. 장미옥은 어렸을 적 외조부의 매질에 못 견뎌 뛰쳐나온 우희를 슈퍼 뒷방에 숨겨주곤 했었다.
외조부모의 장례식 때도 장미옥에게 큰 도움을 받았다. 우희가 아무것도 몰라 발을 동동 구를 때 발 벗고 나서 도와준 은인이었다.
“잘 왔어. 참 잘 왔네!”
“반겨주셔서 감사해요.”
“당연히 반갑지. 다른 사람도 아니고 우희인데! 요새 젊은 사람 보기가 얼마나 힘든지 몰라. 그럼 이게 얼마 만이여. 4년? 4년 맞지?”
“네. 그쯤 됐어요. 아주머니는 더 젊어지셨어요. 여전히 피부도 좋으시구요.”
“어유. 그런 말 말어. 저 놈팽이 같은 영감 때문에 하루하루 늙어간다니까.”
우희의 인사치레가 마음에 들었는지 장미옥이 크게 웃었다. 우희가 백화점 신상 라인에서 공수한 화장품 세트를 조심히 내밀었다.
“이거 별건 아닌데… 마음에 드시려나 모르겠어요.”
“이게 뭔디?”
“화장품이에요. 점점 쌀쌀해지잖아요.”
냉큼 건네받은 종이 가방을 열어본 장미옥의 표정이 훤하게 폈다. 일부러 중년 여성이 선호하는 메이커가 떡하니 박혀 있는 것으로 골랐는데, 다행히 그녀도 가치를 알아본 기색이었다.
“세상에! 이거 비싼 거 아녀?”
“그렇게 많이 비싸지도 않아요.”
“세상에 세상에….”
예상보다 더 좋아하는 장미옥을 보자 민망해졌다. 우희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웃음기 있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음에 드세요?”
“말이라고 그러냐. 정말 고맙다, 우희야. 내가 언제 이런 걸 받아보겠어.”
“저야말로 감사한 게 많아요. 연락도 그동안 못 드리고 죄송해요.”
“그런 말 말어. 내가 우희 덕에 호강한다.”
과분한 환영에 코가 시큰했다. 더 좋은 걸 사 올걸. 그녀가 부담을 느낄까 봐 적당한 걸 고른 게 후회됐다. 유학 가기 전에 더 좋은 걸 선물하리라 다짐했다.
“내 정신 좀 봐라. 잠깐만 우희야, 여기 있어봐라. 응? 가만있어 봐.”
호들갑을 떨며 장미옥이 슈퍼 안으로 사라졌다. 한쪽이 열려 고정된 유리문 너머로 슈퍼 내부가 들여다보였다. 리모델링한 내부는 예전보다 깔끔하고 상품도 다양했다.
손님은 좀 있을까. 근처에 공동묘지가 있으니 손님이 끊이진 않겠지만 그것만으론 장사가 될까 싶었다. 상품이 썩는 건 아닌지 괜히 걱정됐다.
장미옥에겐 술주정뱅이 남편이 있었다. 평생을 골치 썩으면서도 이혼을 택하지 못하는 건 그녀의 남편이 조폭이기 때문이었다. 아저씨와 관계된 깡패들이 한 번씩 우르르 몰려와 물건을 팔아주곤 했는데 지금도 그러는진 몰랐다.
찬찬히 슈퍼를 둘러보고 있는데 장미옥이 위생 비닐을 씌운 넓적한 접시를 가지고 나왔다.
“이거 우희가 좋아하지?”
“우와. 이게 무슨 냄새예요?”
우희가 고소한 냄새에 환하게 웃으며 접시를 받아들었다. 금방 만든 것인지 밑바닥이 뜨끈뜨끈했다.
“파전. 오징어 넣고 새우 넣고 지졌어.”
“이런 귀한 걸 저 주셔도 돼요?”
“어휴. 엄청나게 만들었어. 우린 내일까지 먹고도 남어. 이거 먹고 부족하면 또 가지러 와. 응?”
장미옥은 손이 컸다. 음식을 많이 만들어 나눠주는 일이 잦았기에 예의상 권하는 소린 아닐 거다. 그녀가 우희를 향해 웃는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인제 들어가 봐. 짐도 풀고 하려면 들어가야지.”
장미옥은 한시라도 빨리 화장품의 효능을 시험하고 싶은 눈치였다. 눈이 자꾸만 슈퍼 안으로 가는 게 그래 보였다. 그녀의 변하지 않은 모습에 웃음이 났다.
“그럼 또 뵐게요.”
고향을 낯설게 받아들이고 있던 우희는 푸근한 장미옥의 미소에 비로소 안심했다. 이곳마저 오지 못할 곳이 되었을까 봐 속이 까맣게 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다 쓰고.”
“네. 쉬세요.”
고개를 숙여 인사한 우희는 걸음을 옮겼다. 이쪽 골목에도 사람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질 않았다. 어느 집 개가 짖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와서 반가움에 고개를 돌렸지만, 동네 반대편에서 나는 소리였다.
천천히 거닐다 파란 대문 너머의 고령의 할머니와 눈이 마주쳤다. 사람을 알아보는 기색은 아니었다. 아마도 잘 안 보이시는 거겠지. 안면이 없는 분이라 굳이 인사하지 않고 지나쳤다.
우희가 멈춰선 곳은 골목의 가장 끝 집이었다. 다른 집에 비해 담이 높아 내부가 잘 보이지 않는 벽돌 주택. 이곳이 그녀가 나고 자란 곳이었다.
고개를 숙여 대문 틈에 끼인 벽돌을 치웠다. 비로 축축해진 땅을 손끝으로 쓸자 차가운 금속이 느껴졌다. 고리로 연결된 두 개의 열쇠를 살살 흔들어 흙을 털어내고 녹슨 구멍에 홈을 맞췄다.
끼이익. 고막을 긁는 소리를 내는 낡은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래도록 사람이 찾지 않은 마당은 잡초투성이였다. 현관으로 이어지는 돌계단 위까지 이끼와 잡초가 무성하게 자라 있었다.
집 꼴을 보아 외삼촌 정두영은 아예 발길을 끊은 모양이었다. 이제 뜯어먹을 구석이 없으니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거겠지. 잠시 잠깐 개차반 정두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 기분 나쁜 한숨이 흘러나왔다.
주택 옆쪽에 자리한 앵두나무에 익숙한 플라스틱 그네가 보였다. 엄마 정은영이 어린 우희와 놀아주던 곳이었다.
국회의원 김중혁의 두 번째 부인이었던 정은영은 불같은 사랑의 종지부를 이혼으로 찍었다. 당시 임신 상태였던 정은영은 배 속의 아이 존재를 알리지 않고 부모가 있는 이 시골로 내려와 우희를 낳았다.
그리고 10년 뒤 자살했다. 오랜 우울증 때문이었다. 그리고 우희는 정은영의 장례식에서 처음으로 친부 김중혁을 만났다.
대문부터 현관까진 그리 멀지 않았다. 이끼 낀 돌계단을 올라 현관을 밀고 들어가자 케케묵은 먼지 냄새가 밀려들었다. 치울 생각을 하니 암담했다. 외조부모가 한날한시에 세상을 뜬 후 신경을 안 썼으니 치울 곳이 만만치 않았다.
우희는 삐걱거리는 거실 바닥을 지나서 2층으로 올라가는 층계 앞에 멈춰 섰다. 1층은 진료소로 쓰이던 곳이기에 2층이 생활공간이었다. 짐을 풀고 자려면 2층으로 가야 하는데 먼지가 많아 발들일 엄두가 나질 않았다.
“괜히 여기로 왔나….”
중얼거렸다. 차라리 호텔에 장기 투숙하는 게 나았으려나.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김중혁의 고집스러운 눈매가 떠올랐다. 보는 눈을 생각하라며 호통쳤으려나.
아버지 김중혁과는 잘 맞지 않았다. 부녀는 처음부터 잘못 끼워진 단추처럼 어긋나 있었다. 시간을 돌려 차근차근 순서대로 꿰지 않으면 다잡을 수 없을 만큼 틀어진 관계였고 두 사람에겐 관계를 굳이 회복할 의욕이 없었다.
뭐든 내일로 미루고 싶었지만, 집을 빙 둘러볼 동안 마땅히 몸 누일 곳을 찾을 수 없었다. 우희는 어쩔 수 없이 청소도구를 꺼내 들었다. 창문을 모두 열고 오래된 수건을 꺼내 물에 적셨다. 물건에 나앉은 먼지를 걷어낸 뒤엔 거실부터 쓸고 닦았다.
환자 대기실로 쓰이던 곳이라서 가죽 소파가 세 개나 되었다. 겉보기엔 멀쩡해도 내부 상태가 의심스러워 낑낑거리며 한쪽 벽으로 모두 붙여 놓았다. 거실을 중심으로 주방과 욕실까지 청소를 마치자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이 없을 만큼 진이 빠졌다.
간신히 씻은 뒤엔 한쪽에 소중히 놔둔 전을 먹었다.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을 깔고 눕자 전신을 짓누르며 묵직한 피로감이 몰려왔다.
“웃기지도 않는다….”
중얼거리며 뻑뻑한 눈두덩에 팔을 하나 올렸다. 얇은 담요를 목 끝까지 덮고 유배된 신세에 대해 되짚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우희는 성적 취향이 남달랐다. 깨닫게 된 시기는 스물한 살쯤이었다. 친구의 소개로 만나 남자친구를 사귀었고, 시간이 지나 자연스레 섹스했다. 그는 다정하고 좋은 사람이었다.
문제는 우희였다. 그녀는 섹스하는 내내 다른 생각을 했다. 좀 더 거칠게 다뤄줬으면, 조금 더 인격을 무너뜨려 줬으면. 아무 생각도 나지 않게 짓밟아줬으면 하는 따위의 생각을 하느라 도통 섹스에 집중할 수 없었다. 남자친구에게 예의 없는 짓을 저지르고 있단 걸 알았지만 고칠 도리가 없었다.
만족감이 높은 섹스를 위해선 대화를 많이 나누는 게 좋다는 소리를 주워듣고 난 뒤에야 고민을 끝내고 남자친구에게 이실직고했다. 섹스에 흥분할 수 없으며 집중할 수 없는 이유에 대해 차근차근 털어놓았다. 중간중간 수치스러웠으나 관계 진전에 필요하다면 감수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전부 들은 그는 부쩍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원치 않은 선물을 받은 것처럼 떨떠름한 표정이 되어 웃었다. 우희는 그 순간 이별을 예감했다. 역시나 남자친구는 사람을 괴롭히며 흥분할 수 없다는 답을 했다.
그 후론 불 보듯 뻔했다. 아귀가 틀어진 관계는 서로 상처만 입혔고 우희는 이별을 통보해야 했다. 많이 괴로웠는지 그도 이견 없이 이별을 수긍했다.
이별로 위축되었던 것도 잠시였다. 우희는 본격적으로 취향을 탐구했다. 처음엔 인터넷 검색이었다. 은밀한 카페에 가입한 뒤에 수많은 취향을 알게 됐다. 정보의 홍수에 떠밀려서 하루하루, 배움의 기쁨에 도취됐다.
그러다가 같은 성향을 가진 남자와 사랑에 빠질 확률이 0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 시름에 빠졌다. 아무런 호감도 없이 섹스할 순 없을 것 같았다. 간간이 카페에 들러 성인 기구 사용 후기나 플레이 후기를 섭렵하며 아쉬운 마음을 달랬다.
그러던 중 카페 지인을 통해 회원제 BDSM 클럽에 발을 들였다. 그게 3개월 전이었다. 같은 성향의 사람들과 교류하며 잠시간 시들했던 성욕에 불이 붙었다. 심장이 쿵쾅거릴 만큼 마음이 들뜬 우희는 수시로 클럽에 들락거렸다. 그러면서 자신은 비정상이 아니란 걸 몸소 깨달으며 위로받았다.
급기야 다른 사람의 플레이를 지켜보았으나 이상하게도 직접 해보고 싶은 욕구는 들지 않았다. 누군가의 서브미시브가 되고 싶단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계속되자 제 성향에 대해 의심이 되었다. 내가 정말 서브미시브일까?
그날도 의구심을 품은 채 두 명의 돔과 한 명의 섭이 뒹구는 광경을 흥미롭게 구경하고 있었다. 갑자기 큰 소리가 들렸고 경찰과 검사가 들이닥쳤다.
클럽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워낙에 비밀스럽게 운영하는 곳이라서 웬만하면 단속에 걸리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다. 신원을 철저하게 숨긴 상류계 사람만 모인, 사회적 지휘가 보장되는 회원들로 이뤄진 클럽이었기에 우희는 자신이 경찰서로 연행된 게 지금도 이해되지 않았다.
경찰서 안에서 고개를 숙이고 범죄자처럼 얼굴을 가리고 있는 우희 앞에 이복 오빠 김규호가 나타났다. 그는 김중혁이 첫 번째 부인에게서 본 자식으로 중앙지검의 평검사였다.
우희를 바라보는 김규호의 표정에 갖가지 감정이 스쳐 갔다. 놀람과 어이없다는 듯한 한숨 그리고 경멸 섞인 눈초리까지. 소리 없는 질책에 우희는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클럽 좀 간 게 어때서. 씨알도 안 먹히는 변명이었다.
김규호는 중죄인을 송치하듯 그녀를 끌어냈다. 우희가 클럽에서 직접 성관계를 했든 안 했든 유무는 중요하지 않았다. 바로 옆 방에서 마약 파티가 벌어졌고 그 일에 연루되었다는 게 중요했다. BDSM 클럽을 찾은 것만으로 집안이 뒤집힐 일이었다.
결혼 시장에서 돋보일 상품이 되기 위해 신부 수업을 해야 할 우희가 그런 곳에 있었다는 건, 가뜩이나 시원찮은 이력마저 백지로 만들 실책이라며 김규호가 침을 튀기며 그녀를 난도질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부친 김중혁과 새어머니 주선혜의 반응도 다르지 않았다. 고성을 지른 김중혁은 클럽 회비를 결제한 카드부터 잘라버렸다. 철부지 어린애도 아닌 것이 멋모르고 음탕한 짓을 저지르고 다닌다며 질타했다. 그 후론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지냈다.
시간이 흐르면 사건도 흐지부지될 줄 알았는데 김중혁은 신부 수업 같은 건 그만두고 당장 결혼하라는 판결로 감정의 골을 격화시켰다.
클럽 마약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큼 커졌기 때문에 내린 결론이라기엔 김중혁은 이 정도 얼룩쯤은 쉽게 지워낼 수 있는 부와 권력이 있었다. 그저 이때다 싶어서 우희를 꼼짝없이 팔아넘기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우희는 차라리 유학을 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김중혁은 밖에서까지 그 괴상한 짓거리를 할 거냐고 다그쳤다.
‘괴상한 짓거리요? 술집에서 여자 끼고 노시는 분이 할 소린 아닌 것 같은데요.’
‘뭐, 뭣이? 이게 오냐오냐했더니 아비한테 못 하는 말이 없어!’
‘그렇다고 제가 아버지처럼 몸을 함부로 굴렸어요, 범죄를 저질렀어요?’
‘김우희! 지금 추처분한 소문이 얼마나 위험한지 몰라서 이래!’
추저분한 짓. 우희의 성향은 이미 그렇게 판가름 나 있었다. 부녀의 싸움은 곧 개싸움처럼 변했다.
주선혜가 중재한 뒤에야 유학을 가는 대신 클럽엔 발도 들이지 않기로 합의를 봤다. 국회의원 이미지, 그게 뭐라고 개인의 성향을 좌지우지한단 말인가.
그렇게 우희는 캐리어를 끌고 시골행을 택했다. 그녀의 뒷모습에 대고 김중혁은 쐐기를 박듯 시골에서 머리 좀 식히며 그 이상한 취향도 싹 버려오라고 했다.
또 허튼짓을 하면 결혼부터 시키겠단 고함은 그냥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김중혁은 한다면 하는 사람이었고 그 피를 타고난 그녀는 불같은 성격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일단은 시골구석에 처박아뒀으니 안심 따위나 하고 있겠지. 우희는 뜨끈한 눈을 내리감았다.
우희는 물에 빠졌다가 깨어난 사람처럼 번쩍 눈을 떴다. 평소와 다른 냄새와 온도, 풍경을 감지하고 난 뒤 이곳이 시골집이란 걸 깨달았다. 으슬으슬하다 싶더니 연신 재채기가 터져 나왔다.
“으… 추워.”
우희는 쌀쌀한 공기에 눈살을 찌푸리며 얇은 담요 안으로 하얀 다리를 집어넣었다. 평소에도 이불을 차는 습관이 있어서 감기에 자주 걸렸다.
이런 날씨라면 오늘은 잘 때 긴 옷을 입어야 할 것 같았다. 주변에 산이 많아서 추위가 이르게 찾아오는 걸 깜빡했다. 한겨울엔 수도관이 터질 만큼 추운 동네였단 게 뒤늦게 생각난 거다.
컴컴한 주변을 둘러보며 더듬더듬 핸드폰을 찾았다. 액정을 확인하니 새벽 5시 30분이었다. 평소에 6시쯤 일어나니 크게 이른 기상은 아니었다.
가족들과 아침 식사가 차려진 상에 다붓이 둘러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눌 사이는 아니라서 우희는 늘 7시가 되기 전에 작업실로 출발해 불편한 자리를 피했다.
우희의 대학 졸업 직후, 외조부모가 돌아가셨다. 그때 엄마의 장례식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얼굴을 비쳤던 김중혁이 나타났고, 보호자를 자처했다.
이미 성인인 우희에게 굳이 보호는 필요 없었다. 그런 우희를 설득한 게 새어머니 주선혜였다. 혼자 두면 걱정된다는 기계적인 말에 진짜 걱정이 담겼는지 어쨌는지는 몰랐다. 당시엔 너무 힘들었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구박데기로 키워졌어도 외조부모는 우희의 하늘이었다. 세상에 혼자 남겨졌단 우울한 생각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누군가 내밀어준 손을 붙잡는 것뿐이었다. 아버지와 살라는 엄마의 유언도 결정에 한몫했다. 그렇게 우희는 김중혁의 집으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그때부터 집과 작업실을 오가며 웹 디자이너 프리랜서로 활동했다. 취직하고 싶은 회사가 있었지만, 결혼 뒤엔 내조에 충실하라는, 구시대적인 발상을 자식에게도 강요하는 김중혁 때문에 그 꿈은 접어야 했다.
또한, 적극적으로 김중혁에게 맞서기엔 그만한 열정이 없었다. 그냥 흘러가는 대로 순응하는 편이었다. 게다가 정략결혼이 꼭 나쁘다곤 생각 안 했다.
어쨌든 김중혁의 덕으로 생전 누려보지 못한 부를 거머쥐고 호강하고 있는 건 사실이었기에 정략결혼에 이용된다 한들 아쉽진 않았다. 돈이 없어 아등바등 살다 보면 돈이 주는 안정감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다만 결혼을 한다면 적어도 서른은 넘어서 하고 싶었다. 의무를 다하는 것보다는 달콤한 자유를 더 누리고 싶은 20대였으니.
“으….”
딱딱한 바닥에서 일어나니 재조립된 것처럼 뼈마디가 아팠다. 찌뿌둥한 어깨를 펴며 기지개를 켠 뒤에 간단하게 세안했다. 오래된 새 칫솔을 꺼내 안정성을 꼼꼼히 검수한 뒤 치약을 묻혀 입에 물었다.
청소의 여파로 영 몸이 뻑적지근했다. 웅크리고 있으면 더 처질 것 같아 밖에 나갈 생각을 했다. 집을 치우기 전에 자주 갔던 호수를 보고 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외투… 여기 있다.”
습관처럼 혼잣말하다가 주선혜에게 들킨 적이 있었다. 이상한 사람 보듯 하던 그 눈빛이 떠오를 게 뭔가.
“혼잣말이 어떻다고. 안 보는 데선 욕도 하는데.”
물론 우희는 보는 앞에서 욕을 하는 성격이었다. 주선혜의 말에 의하면 김우희는 별종이었다.
신경에 거슬리면 참지 않고 내뱉어야 하는 우희와 우아함을 피부처럼 두른 주선혜가 같은 종류의 염료처럼 섞여들 순 없었다. 함께 산 세월이 3년이 넘었는데 여전히 다른 색으로 빙빙 돌고 있었다. 회오리치던 관계는 클럽 사건 이후 재생 불가 수준으로 말라비틀어져 버렸고.
둥둥 뜬 기름 같은 취급이 문득문득 서러울 때도 있었다. 특히 오빠 김규호와 비교될 땐 착잡함이 이루 말할 수 없었다.
태어나자마자 금빛 요람에 싸인 김규호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었다. 김중혁의 첫 번째 처인 김규호의 친모는 중공업을 기반으로 우뚝 선 대기업 로열패밀리 일원이었다.
김규호의 외가만 따지면 그가 사업이 아닌 검사의 길을 택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라고 했다. 그런 차이를 인정하자 그들의 묘한 시선이 버틸 만해졌다.
우희는 산책을 위해 대문을 닫고 골목을 벗어났다. 어렸을 때 쏘다녔던 숲의 지름길은 거의 흔적이 없이 사라져서 핸드폰 플래시에 의지해야 했다. 15분 정도 걷자 등이 축축했다.
어느덧 하늘이 밝은색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상쾌한 새벽 공기를 마치며 두 팔을 위로 올리곤 힘차게 소리쳤다.
“도착!”
아무도 없을 줄 알고 내지른 소리가 그곳에 모인 남자들의 이목을 끌어왔다. 동시에 풍덩, 하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아래쪽 호수 한가운데로 무언가 가라앉았다. 물속에 던져진 건 분명 커다란 포대였다. 불룩한 포대.
당황한 우희를 향해 흉흉한 시선들이 메뚜기처럼 날아들었다. 안경을 쓰지 않아 잘 보이진 않지만 곱지 않은 눈빛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우희는 올렸던 팔을 어정쩡하게 내렸다. 아무것도 못 본 거다. 아무것도 못 봤어. 연신 곱씹었다. 호숫가로 눈을 두지 않으려 애쓰며 까마귀처럼 모인 검은 무리를 외면해보고자 했다.
양심보단 목숨이 먼저였다. 우희가 먹고 자랄 수 있던 것도 외조부모가 양심을 버리고 깡패들에게 협조한 덕이었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우글우글 모여 있는 남자들은 다시 봐도 그쪽 사람들이었다. 저마다 어두운 색상의 슈트를 갖춰 입고 넥타이까지 맸다. 깔끔한 외향이 그녀가 알던 조폭과는 분위기가 달랐다.
심심하면 피를 흘리고 찾아와 외조부의 치료를 맡겨둔 돈 찾듯 요구하던 무식한 잔챙이들보단 고상해 보였다. 껄렁거리지 않고 단정하게 선 형상 또한 낯설었다. 그래 봤자 도덕을 버리고 불법으로 득을 착취하는 자들이지만.
때를 잘못 맞춘 산책이었다. 우희는 덩치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냉큼 옆길로 몸을 틀었다.
“잠깐 지나가겠습니다….”
작은 목소리에 대꾸해주는 이는 없었다. 어째 눈빛이 더 매서워진 것 같았다. 그냥 지나갈걸. 말을 왜 해선 분위기를 더 싸하게 만들었을까. 후회란 늦어서 후회였다.
“너.”
무리의 가장 가운데 선 덩치가 콕 찍어 우희를 가리켰다. 존재감 없는 행인으로 치부해주길 바랐던 희망은 이룰 수 없는 꿈이 되어 사그라졌다. 절망감을 느끼며 우희가 덤덤한 척 되물었다.
“…저요?”
“그래 너 말고 또 누가 있는디. 이리 와봐.”
“왜요?”
“왜긴 왜야. 어른이 말하는데 싸게 안 튀어오냐. 너 여기 살아?”
덩치의 말투가 동네 아이 대하듯 허물없었다. 아무리 동안이라지만 우희는 올해 스물여섯 살로, 모진 풍파를 여러 번 겪어본 나이였다. 평소 동안인 외모 때문에 이런저런 안 좋은 일을 당하기 일쑤였기에 혹시 얕잡아보고 해를 가할까 봐 말끝이 불퉁해졌다.
“네. 왜요?”
“뭘 자꾸 왜요야. 좋게 말할 때 와라.”
덩치가 무시무시하게 눈을 부라렸다. 그제야 적어도 40대로 보이는 그에겐 여전히 파릇파릇해 보일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슬그머니 두 손을 앞으로 모은 우희가 달려가며 말했다.
“네.”
뛰는 반동에 이마까지 뒤집어쓴 점퍼의 후드가 내려왔다가 올라가길 반복했다. 시야가 훤해질 때마다 덩치의 몸집이 풍선처럼 불어났다. 조금 전 덩치를 보고 단정하다고 생각했던 걸 당장 취소했다. 안경을 쓰지 않은 흐린 눈이 덩치의 험상궂은 인상을 십 분의 일도 담아내지 못한 거다.
짧은 머리와 두꺼비 같은 손등, 왼쪽 뺨을 가르는 흉포한 자상이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어린아이가 보면 울음이라도 터뜨릴 것 같았다. 깡패에 익숙한 우희마저 온몸에 힘이 절로 들어갈 외모였다.
“딱 봤을 땐 덜 큰 사내새낀 줄 알았더니만.”
“저 여자예요.”
167㎝의 키가 남자로 보이다니. 눈이 안 좋은 건 덩치도 마찬가지였다.
“근디 왜 아침 댓바람부터 싸돌아다니고 지랄이야. 어느 집 애여?”
덩치가 담배를 입에 물자 옆에 있던 다른 어깨가 기다렸다는 듯 불을 붙였다. 우희가 멀거니 그 모습을 보고만 있자, 혀를 차며 빨리 대답하라 성화를 부렸다.
“내가 묻잖냐. 내일 대답할 거냐?”
“혹시 정 의원이라고 아세요?”
“정 의원? 아… 그 몇 년 전에 뒈진… 네가 걔여? 정 의원네 손녀?”
“네.”
“허따. 이만큼 찌깐이였는디.”
남자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손을 허리께로 놓고 작은 키를 재단하듯 흔들었다. 클클 웃은 그가 손을 뻗어 모자를 휙 벗겨내는 걸 막지 못했다. 우희가 뒤늦게 부스스한 머리칼을 감추려 두 손을 올렸다.
“어, 그래. 얼굴 보니까 기억이 난다. 지 엄마 빼닮아서 팔자 사나울까 봐 걱정이라고 정 의원이 그랬지. 틀린 말은 아니네. 크니까 느낌이 나오네.”
엄마의 얘기에 빗지 못한 머리가 새벽바람에 아무렇게나 흩날렸다. 엄마에 대해 잘 아는 걸까. 캐물어 봐야 불쌍한 여자였단 소리나 들을 거다. 모두가 그녀를 측은하게 생각했다.
“저 본 적 있으세요?”
“있지. 내가 정 의원네로 애들을 몇이나 날랐는디. 자, 여기.”
덩치가 갈비뼈 부근을 툭툭 쳤다.
“여기 뽀개졌을 때도 정 의원이 칼 댔어. 너는 나 기억 안 나냐?”
“하도 오시는 분이 많아서 다 기억하진 못해요. 죄송합니다.”
영혼 없이 사과했다. 사실 저 호수에 빠진 포대 자루가 계속 신경 쓰였다. 다음은 자신이 빠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죄송할 것도 많다. 이름이 뭐더라 정 무슨 희였는디?”
“김우희요.”
“그려, 우희. 허따. 상판을 이만큼 타고났으면 연예인이나 하지 뭔 촌구석에 미련이 있다고 얼쩡대냐.”
정우희에서 김우희. 성이 바뀐 걸 인지한 덩치의 가느스름한 눈이 더욱 좁아졌다. 그러나 더 캐묻진 않고 담배만 깊이 빨았다. 배려라기보단 거기까진 궁금하지 않은 것일 터다.
바람이 거세졌다. 손으로 빗질하며 머리를 애써 갈무리해보려는데 아래쪽 호숫가에서 말소리가 났다.
“전부 잠겼습니다!”
뭐가 잠겼는지 알아선 안 됐다. 못 본 거야. 못 들은 거야. 고개를 저은 우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 이쪽을 향해 올라오는 인영과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짙게 가라앉은 남자의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남자가 슬쩍 눈썹을 비틀었다. 순간 절벽에서 깊은 수면으로 다이빙한 것처럼 검고 차가운 무언가가 우희의 안으로 숨 막히게 몰려들었다. 엄습한 감정의 정체를 모르고 끝도 없이 빠져들었다.
남자가 여유로운 걸음걸이로 거리를 좁혀올수록 기묘한 압박감을 느꼈다. 그 뒤로 덩치들이 여럿 따라붙어 올라왔다. 덩치들의 감각 또한 남자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혹시 보스일까.
그물에 걸려든 물고기가 된 것처럼 심장이 펄떡거렸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받은 기억이 났다. 대학교 동아리에서 떠난 해외 여행에서였다. 이름만 말하면 누구나 아는 작가의 작품 앞에서 말을 잇지 못할 경이로움을 느꼈었다.
그때처럼 두 다리에 힘이 쭉 풀리고 아득한 전율이 일었다. 쓰러지지 않기 위해 온몸에 힘을 줘야 했다. 정신 차려야 했다. 막연한 두려움과 흥분에 짓눌려 압사당할 것만 같았다. 당혹스러웠다.
남자는 우희를 직시하고 있었다. 난데없는 불청객을 파헤치려는 눈빛은 성급하지 않았다. 유연히 파고들어 단숨에 독을 쏠 것처럼 속을 가늠할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그가 천천히 우희를 분해했다. 날카로운 인상엔 그 어떤 감정도 읽히지 않았다. 숨이 가쁘게 드나들던 그녀의 목구멍이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눈도 깜빡거리지 못했다. 차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형님.”
덩치가 입을 연 후에야 우희는 겨우 숨을 토해내며 덫처럼 걸렸던 남자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패자처럼 시야를 낮추자 남자의 옷차림에 눈에 들어왔다.
짙은 그레이 슈트. 두 손은 주머니에, 재킷은 어깨에 대충 걸친 차림에는 넥타이가 없었다. 그런데도 남자는 금욕적이고 정제된 느낌을 주었다.
“형님, 얘 정 의원네 애랍니다. 별로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야, 너 이제 가라.”
대변하듯 말한 덩치가 우희의 어깨를 툭 쳤다. 그 바람에 휘청한 우희가 중심을 잡으며 퍼뜩 정신을 차렸다.
“죄송합니다. 그럼 만수무강하세요.”
무슨 소린지도 모를 인사를 내뱉은 우희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허리를 폈다. 빨리 가야겠단 생각뿐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남자가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가왔을 줄은 몰랐기에 다시금 시선이 태엽처럼 맞물렸을 때 눈이 한계까지 커졌다. 송곳처럼 따끔한 눈빛에 지레 겁먹고 한 발 뒤로 물러났다.
“만수무강은 그쪽이 해야 할 낯빛인데. 왜. 유령이라도 봤나.”
서른을 웃돌 것 같은 얼굴인데, 목소리에 힘이 제법 있었다. 형님이라 불린 것만 봐도 그가 범상치 않은 위치에 앉았던 걸 알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그냥 산책하던 길이었겠죠. 시골 바닥에서 뭘 할 게 없으니까 싸돌아다녔나 봅니다.”
덩치의 걸걸한 목소리가 2차 대변을 시작했다. 우희는 그게 몹시 고마웠다.
“이 실장한테 물은 거 아니고.”
“아예, 형님. 죄송합니다.”
덩치가 굳은 얼굴로 옆으로 물러나자 아군을 잃은 기분이었다. 우희는 적장의 손에 운명이 좌지우지될 마지막 포로가 된 심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사람 발라 먹을 것처럼 보지만 말고 대답을 해야지.”
남자가 입술 사이로 담배를 끼웠다. 불을 가져오려는 덩치를 손짓으로 막은 그가 한 발 더 다가왔다. 그에 맞춰 우희가 뒤로 물러났다.
“저 아무것도 못 봤습니다. 정말이에요.”
호숫가를 흘깃댄 그녀가 고개를 열심히 흔들었다.
“담배 태워?”
“아, 아니요.”
“애새끼가 올만 한 데가 아닌데. 여기 올라오는 길도 없잖아.”
남자의 느긋한 목소리가 채찍처럼 느껴졌다. 채찍? 망할. 우희는 재점화 되려는 이상 성벽을 의식에서 황급히 지우며 대답했다.
“운동하려고요. 새벽 운동이요.”
두 팔을 위로 뻗었다가 접으며 턱걸이라도 하는 양 열연했다. 모양 빠지는 변명을 가만히 쳐다보던 그가 반대편을 턱짓했다.
“그럼 해야지.”
남자의 눈이 낡은 운동기구가 오밀조밀 모인 공터에 닿았다. 동네 어르신들이 애용하던 운동기구는 군데군데 녹슬어 있었다. 처분하기 힘든 덩치 큰 쓰레기가 된 운동기구에 굳이 손댈 사람은 없었다.
“네?”
“해보라고, 운동.”
그걸 굳이 만져보라 권하는 건 배려가 아니었다. 억압이었다.
“…네.”
우희가 쭈뼛대며 그리로 다가가 뒤로 돌았다. 호수를 등진 남자가 홀로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느샌가 덩치들이 모조리 사라진 뒤였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남자의 시선이 집요했다. 울고 싶어졌다. 수치심을 주는 게 조폭들의 신종 괴롭힘 수법이라면 머리 한번 잘 쓰는 거였다.
“저 잘 못 하는데….”
남자가 바늘 하나 안 들어갈 것 같은 건조한 표정으로 고갈된 인내를 표현했다.
숨을 한 차례 깊게 내쉰 그녀는 키보다 높은 철봉을 향해 폴짝 뛰었다. 수월하게 철봉을 잡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안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바닥에 나자빠지는 건 너무한 거지.
“윽….”
순식간에 흙바닥에 나자빠진 채 신음했다. 이슬에 젖은 철봉을 잡은 손이 대차게 미끄러졌고 볼썽사납게 휘적거리다가 바닥으로 떨어진 거다.
등부터 찌르르 전해지는 통증에 이어 갈비뼈가 반으로 갈라지는 격통이 밀려들었다. 짧게나마 흘린 신음이 창피해서 이를 악물고 상체를 세웠다. 애써봐도 곧장 일어나긴 무리였다.
진흙이 섞인 잔디를 짓누르는 남자의 가죽 구두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높은 곳에서 내리깐 남자의 눈엔 짧은 조소와 한심함이 깃들었다.
“아픈가?”
눈가가 뜨뜻하게 달아올랐다. 업신여기는 듯한 시선에 흥분하려는 몸뚱이는 대체 뭘까. 온통 엉망진창이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안 괜찮은 표정이니 그러지.”
“정말 괜찮다구요.”
남자의 길쭉한 정강이가 흐릿한 시야를 채웠다. 여기에 매달리려면 철봉에서 떨어진 것보다 더한 값을 치러야겠지. 그런데도 이쪽에 더 매달려보고 싶었다. 당혹감에 손을 벌벌 떨면서도 군침 흘리는 걸 멈추지 못하고 탐욕스럽게 낯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우희는 처음으로 누군가를 주인으로 삼고 싶은 욕구를 느끼고 있었다. 비로소 자신을 다뤄줄 도미넌트를 찾은 것처럼 속으로 헐떡거렸다.
“일으켜줘야 하나.”
남자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난잡한 생각을 들킨 것처럼 어깨가 굳었다. 이성이 돌아오자 눈물이 툭, 뺨으로 떨어졌다.
“됐습니다.”
손등으로 흔적을 지운 우희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속이 울렁거렸다.
“말은 곧잘 듣는데 하는 짓이 똥개처럼 어설프네.”
“…똥개 아니에요.”
그 와중에 똥개는 싫었다.
“그래, 잡종. 본 건 잊자. 괜히 의미 부여하지 말고.”
말을 남긴 남자가 그대로 우희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그가 우희가 올라왔던 길로 내려가자 어디에 있었는지 덩치들이 따라붙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우희는 황망하게 두 손을 쥐었다 펴며 헛숨을 내쉬었다.
뒤늦게 등이 따끔거렸다. 더러워진 두 손을 허벅지에 문지르곤 터벅터벅 호수를 따라 걸었다. 열기가 고인 아랫배를 꾹 손바닥을 눌렀다.
“뭘 잊으라는 거야. 포대? 아니면….”
혹시 남자를 두고 흥분했던 걸 눈치채기라도 했던 걸까. 그래서 괜히 의미 부여하지 말라고 한 건 아니겠지. 남자를 만난 여파로 누군가 반죽하듯 아래가 욱신댔다.
“미쳤어.”
호수를 따라 달리다가 걷다가를 반복했다. 순간 무릎을 꿇고 남자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리고 싶었던 건, 분출할 곳을 찾지 못한 남다른 성욕이 변이한 것이라고 그렇게 정돈했다. 미끈거리는 다리 사이를 느끼며 헛웃음 지었다.
며칠간 집안을 부지런히 쓸고 닦았더니 잡생각은 나지 않았다. 손대지 않으려던 2층까지 전부 치워 방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잡초가 무성한 정원까지 손보는 건 비효율적인 것 같아서 이쯤 만족하기로 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고 몰라보게 쾌적해진 환경을 선물했다.
저녁엔 장미옥에게 얻은 김치로 찌개를 끓였다. 진열대에서 고른 달걀과 참치를 거저 주겠다는 장미옥의 호의를 극구 만류하고 제값을 치렀다. 공짜로 받으면 필요한 것을 마음껏 사지 못할 테니 고집을 꺾지 않았다.
샤워를 마친 우희는 거울에 등을 비춰 힘겹게 면봉을 굴렸다. 잘 닿지 않는 부위에 상처가 생겨 곤욕이었다. 지난번 철봉에서 떨어지면서 생긴 상처였다. 돌멩이에 찍혔는지 집에 돌아온 다음에야 피가 철철 흐르고 있단 걸 알고 꽤 놀랐다.
겨우겨우 연고를 바르곤 티셔츠를 내렸다. 다행히 많이 아물어 내일부턴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연고를 떡칠할 때마다 남자가 떠오르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대체 남자는 누구였을까. 못 보던 얼굴인데. 이 근방의 조폭은 두 개의 파가 대립했다. 주로 정 의원네를 찾는 건 우묵파였고, 종종 대연파가 오기도 했다. 가끔 두 파가 정 의원네에서 맞닥뜨리기도 했지만, 암묵적인 합의인지 이곳에선 칼부림을 하지 않았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 어떤 회장이 두 파를 흡수했단 소식을 들었다. 그 회장과 관련된 사람일까.
우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남자에게 쏠리는 의식을 차단하며 좌식 밥상을 끌어와 앉았다. 충전기에서 분리한 노트북을 펼쳐 드라마를 틀었다. TV 수신이 끊겨 노트북의 작은 화면에 의지해 드라마 시리즈를 시청하고 있었다. 비가 올 건지 공기가 끈적했다. 보일러를 돌리고 돌아와 이불을 뒤집어쓰자 몸이 금방 더워졌다.
티백으로 우린 녹차를 한 모금 머금으니 며칠째 욱신대는 근육이 노곤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서울집의 이모님이 건네던 고급 차보다 이쪽이 입에 맞았다. 20년 넘게 길든 입맛은 쉽게 바꿀 수 없는 것 중 하나였다. 그런 그녀를 지지리 궁상으로 보며 안타까워하던 주선혜와 김규호가 떠올랐다. 녹차의 쓴맛이 진하게 그녀의 혀끝을 감쌌다.
차뿐만이 아니었다. 서울 집 반찬은 정말 별로였다. 건강을 위한 식단이라나 뭐라나. 무병장수라는 이유를 갖다 붙여 간을 적게 한 음식들은 하나같이 밍밍했다. 맵고 짠 것을 좋아하는 우희에게 식사 시간은 고문이었다. 가뜩이나 입이 짧은데 맛조차 느껴지질 않는 음식만 차려지니 먹을 것에 흥미를 잃어버렸다.
이곳에 온 뒤 입맛에 맞춰 조리할 수 있다는 데 소소한 기쁨을 느꼈다. 슈퍼의 냉장 진열대에서 본 떡을 떠올리곤 찬찬히 웃었다.
“내일은 떡 라면 먹어야지.”
남은 녹차를 비우고 막 끝을 알린 드라마 다음 편을 눌렀을 때였다. 쾅쾅쾅. 부서져라, 문을 내리치는 소리가 났다. 철문을 흔드는 굉음이 거칠었다.
우희는 드라마 재생을 멈추고 좀 더 귀를 기울였다. 옆집인가. 앞집인가. 의심해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며칠간 확인한바 집 근처는 모두 빈집이었으니 이 집을 찾은 손님일 확률이 높았다.
현관을 나서자 육안으로 보일 만큼 대문이 거세게 흔들리고 있었다. 쾅쾅쾅. 대문이 튕겨 나갈 것처럼 휘어지고 있었다.
“안에 누구 없냐! 야!”
원수진 듯 걸걸하게 부르짖는 목소리가 성난 짐승처럼 격렬했다.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꾸물댔다.
“아오, 씨발! 없는 척하는 거면 뒈진다!”
꿀꺽. 마른 침을 삼킨 뒤 두 다리를 움직였다. 대답을 안 하면 부수고 들어올 기세였기에 매를 먼저 맞는 편을 택한 거다.
“누, 누구세요?”
“야! 뭐 하느라 인제 나와! 너 정 의원 손녀냐?”
“네. 어?”
“어는 무슨 어야. 있으면 싸게 문 열어!”
지난번 호수에서 들었던 목소리였다. 이 실장이라고 불리던 덩치. 어린아이를 기절시킬 수 있을 것 같은 외모가 떠오르자 선뜻 문을 열기가 겁났다.
“여기까진 웬일이세요?”
“속 터져 디지겠다. 아, 빨리 문 안 열어?”
어쩔 수 없이 우희가 대문의 잠금을 풀자 이 실장이 성급하게 문을 열었다. 그 기세에 우희는 얼른 뒷걸음질 쳤다.
“그 치료할 때 쓰는 거 어디 있냐? 다 있지?”
“누가 다치셨어요?”
“그렇다니까! 안에 있냐?”
그는 대답도 듣지 않고 성큼성큼 돌바닥을 밟으며 열린 현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우희도 서둘러 따라 들어갔다. 무작정 거실을 가로지르는 덩치의 뒤를 쫓으며 소심하게 목소리를 냈다.
“신발 안 벗으셨는데….”
우희의 음성은 가볍게 묵살됐다. 예전 진료실 겸 수술실로 썼던 1층의 가장 큰방을 열어젖힌 이 실장이 소리쳤다.
“치료할 만한 거 빨리 챙겨봐.”
“어딜 어떻게 다치셨는데요?”
“칼. 여기.”
이 실장이 배를 내밀며 배꼽 옆을 죽 긋는 시늉을 했다. 우희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칼에 맞았다니, 그건 큰일이었다.
“인제 찾을 마음이 좀 드냐?”
우희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고 할아버지가 쓰던 물건을 찾았다. 청소할 때 한 번 정리해두어서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철제 서랍에 고이 싸놓은 수술 기구를 챙겨 왕진 가방에 넣었다. 칼에 찔렸으면 출혈이 심할 거다. 빈 종이가방을 꺼내 그 안에 붕대와 거즈도 챙겼다.
“많이 다치신 건 아니죠? 119는 부르셨어요?”
“부를 상황이겠냐? 알면서 지랄이냐 왜.”
“혹시나 싶어서 여쭤봤어요.”
역시 곤란한 상황이구나. 보통 조폭들은 다친 사유를 숨겨야 할 때 이곳을 찾곤 했다. 그들 딴엔 자잘한 상처거나 병원에 가서 큰돈을 쓰기 싫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 실장이 성질 급하게 가방을 챙겨 들더니 눈을 부라렸다.
“뭘 꿈지럭거려. 빨리 따라와라.”
“저도 가요?”
“씨발. 그럼 나더러 바느질하라고?”
아오. 답답한지 성질을 내며 이 실장이 우희의 손목을 거칠게 다잡았다. 그러곤 빠르게 걸어갔다.
“손목… 아픈데.”
우희는 들릴 리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이 실장에게 끌려 골목을 종종거리듯 뛰었다. 슈퍼 앞에 세워진 검은 세단에 던져지듯 태워졌다. 심각한 상황인 건 알겠지만 도움이 될 거란 자신이 없었다.
휙휙 지나가는 주변 풍경이 식별되지 않을 만큼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이었다. 그래서 더 겁이 나는데도 차에서 내리겠단 말을 못 했다. 혹여나 그 남자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미약한 희망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것을 깨닫고 머리를 쾅 유리창에 들이받았다.
“그렇게 해서 대가리가 깨지겄냐?”
“죄송합니다.”
“왜 자신 없냐? 너 곧잘 하잖냐. 그 뭐냐 전에 동명이 궁뎅이도 네가 꿰맸고.”
“그땐 할아버지가 계셨겠죠. 안 한 지도 오래됐고 저 좀 자신 없는데….”
우희가 겁에 질린 걸 솔직히 말하자, 실수했다간 묻어버릴 것 같은 표정으로 이 실장이 혀를 찼다.
“쯧, 나보다야 낫겠지. 그, 다 끝나면 이리로 전화해라. 수고비는 받아야지.”
그가 명함 하나를 억지로 쥐여주었다. 굳은 손으로 그걸 받아 후드 티셔츠의 앞주머니에 넣었다.
“뭐냐. 너 우리 형님 전에 봤지?”
“네.”
우희의 귀가 쫑긋, 이 실장에게 집중했다.
“하시는 사업이 많은데 거기 명함엔 QJQ 금융이라고만 표시했을 거여.”
“금융업 하세요? 아, 사채.”
씁, 하고 이 실장이 눈을 부라렸다.
“우리가 그런 수준 낮은 깡패 새끼들이랑 같은 줄 아냐? 우리 형님은 건축일도 하시고, 2금융권도 꽉 잡고 계시고 뭐냐, 그 카지노랑 어? 주식사업도 불려가고 계신다. 다 법 지키면서 하는 짓이여.”
합법으로 위장한 기업형 조직폭력배의 다양성을 주장하는 소리를 잠자코 들으며 정리했다. 법망을 피해 주가 조작을 하고, 사행산업과 용역사업을 한다는 거겠지. 어째 검은 물 같은 창밖에서 스산한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돌아가는 상황 봐서 너를 살리든가 죽이든가 할랑게. 긴장 말고.”
“…죽여요?”
“그럼 잘못 꿰매면 네 사지육신은 무사할 것 같냐?”
치료가 잘못되면 정말 해코지하겠단 말일까. 불안감이 큰 산이 되어 다가왔다. 그 남자를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철없는 기대를 하고 있던 게 한심해졌다.
차가 멈추었다. 언제 내렸는지 뒷좌석 문을 연 이 실장이 허리를 굽혀 재촉했다.
“뭣하냐. 안 내리고.”
“저… 그냥 지금이라도 병원을… 꺄악!”
이 실장이 두툼한 팔을 넣어 미적거리는 우희를 어깨로 들쳐멨다. 기겁하며 버둥댔으나 그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흔들림 없이 우희를 받쳤다.
“뭐 하시는 거예요! 내려주세요.”
“야, 야. 다친다.”
우희는 뒤집힌 시야로 주변을 살폈다. 숲속에 세워진 건물은 외딴 섬에 솟은 저택처럼 음산했다. 별장인가?
우희는 그 안으로 빠르게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빙글빙글 도는 풍경은 곤죽이 될 미래를 투영하듯 낯설었다.
내부는 목조 느낌이 나는 겉과 다르게 모던했다. 손본 지 얼마 되지 않은지 유행하는 심플한 인테리어에서 새것의 냄새가 났다. 매립된 등에서 퍼져나오는 새하얀 불빛에 눈을 찡그리며 우희가 끙끙댔다.
“안 도망갈 테니까, 이제 내려주세요. 배 아프다구요.”
“오냐. 지금 내린다.”
우희가 거칠게 내려진 곳은 거실 한가운데로 긴 소파가 기역 자로 맞붙은 곳이었다. 그녀가 두리번거리자 침대 맡에 서 있던 덩치 둘이 비켜서며 우희의 팔을 잡아끌었다.
“얼른 보쇼.”
우희는 강제적으로 소파 앞으로 떠밀렸다. 팔걸이에 비스듬히 기대앉은 남자를 발견한 그녀가 눈꺼풀을 옅게 떨었다. 며칠간 불쑥불쑥 떠올라 사람을 싱숭생숭하게 만들던 장본인이 눈앞에 있다.
그의 검은 동공을 마주하자 뜨거운 포말이 자글자글 뱃속에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벅벅 긁어내고 싶은 흥분이 그녀의 의지를 거스르며 배에서 손끝까지 빠르게 번져갔다.
“좆 같은 상황이라고 얼굴에 써 붙이고 왔네.”
“그야 갑자기 부르시니까 놀라서….”
“놀라? 나만 할까.”
벗은 셔츠를 옆구리에 댄 채 남자가 말했다. 그녀가 핏물이 가득 밴 셔츠에 기함하며 냉큼 침대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다, 다친 지 얼마나 됐어요?”
“한 시간 넘었는디.”
뒤에서 이 실장이 대꾸했다.
“볼게요.”
조심히 셔츠를 거둬내자 한껏 벌어진 상처가 보였다. 지혈은 된듯하지만 꿰매야 할 것 같았다.
“이 지경이 됐으면 병원을 가시지….”
우희는 남자를 흘긋 올려다보곤 생각보다 가까이 자리한 얼굴에 놀라 황급히 왕진 가방을 열었다. 손이 몇 번이나 미끄러졌다.
다시 그를 올려다보았을 땐 비명을 지를뻔했다. 유심히 관찰하듯 내리쬐는 시선이 뻔뻔하리만치 직선적이었다.
“벌벌 떠는 주제에 할 수 있겠나.”
“제가 한다고 한 게 아니라요…. 저분이 억지로 끌고 오셨다구요.”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책임 안 진다, 그건가?”
그는 구덩이를 파놓고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첨예한 눈매로 우희를 골몰히 관찰했다. 아니, 남자는 구덩이 그 자체였다. 눈동자를 흔들던 우희는 그에게 삼켜질지도 모른다는 근거 없는 상상을 치워내며 겨우겨우 해야 할 일을 떠올렸다.
“소독하고 꿰, 꿰맬 거예요. 마취해도 따끔할 수 있어요.”
남자를 향해 말했으나 대답이 없었다. 대신해 대답한 건 이번에도 이 실장이었다.
“아프면 안 되는디. 우리 형님 몸이다. 조심히. 어?”
“자신 없다고 했잖아요….”
우희가 중얼거렸다. 남자의 안색을 확인하려 고개를 들자 싸늘한 시선이 내려앉고 있었다. 얼른 눈을 피했다.
“저 바지를 흠, 좀 내려주셔야… 소독을….”
“소독? 아 형님 제가 하겠습니다.”
이 실장이 다가와 남자의 바지 버클에 손을 대려다가 몸을 굳혔다. 주제넘은 짓이란 걸 깨달은 이 실장이 주춤하는 사이 고저 없는 목소리가 안개처럼 깔렸다.
“이 실장, 다 데리고 나가.”
“예? 형님. 하지만….”
이 실장이 갈길 잃은 두 손을 어색하게 거두며 남자의 옆구리, 그리고 우희를 번갈아 살폈다.
“형님, 얘가 정식 의사는 아니라서, 좀 거시기한디요.”
“돌팔이 손에 뒈질까 봐 걱정이었으면 진작 신경을 썼어야지. 늦은 감이 있다고 생각 안 하나?”
“그 양반이 갑자기 제주도에 가 있다고 해서….”
“변명하지 말자.”
“죄송합니다, 형님.”
고개를 숙이고 목 뒤를 긁적인 이 실장이 수하들을 데리고 자리를 떴다. 그를 보며 우희는 속으로 절규했다. 단둘이 남으면 저 구덩이가 점점 커져 자신을 지워낼 거란 근거 없는 추측이 무섭도록 커졌다.
멍하니 의료기구를 늘어놓는 동안 사위가 조용해졌다.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공기를 갈랐다.
“어디까지 벗을까. 좆까지?”
바지에 손가락 하나를 건 남자가 무심히 물었다.
“…네?”
우희의 얼빠진 목소리가 차가운 공기 속을 부유하다가 소멸했다.
“두 번 묻게 하지 말고, 확실하게 말해.”
자상이 배꼽 아래까지 길게 이어져 있었기에 바로 아래까지 소독이 필요했다.
“그 아래까지요….”
허리를 살짝 든 남자가 속옷까지 내려버릴 듯 손가락을 깊게 밀며 물었다.
“그러니까 그 아래가 어디야. 좆? 아니면 불알?”
“…배꼽 아래까지만 부탁드립니다.”
우희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을 때 남자의 숨소리가 나른하게 흘러들었다. 웃은 건가?
“직접 해봐.”
남자가 배꼽 아래를 턱짓했다. 건조하고 오만한 눈빛이 자석처럼 우희를 끌어당겼다. 이러다간 정말 남자에게 함몰되는 거 아닐까. 흥분된 가슴이 쿵쾅쿵쾅 머리까지 울려댔다.
“제가요?”
라이터가 튕기는 소리가 나며 그가 담배를 깊게 빨았다. 시뻘건 환부가 징그럽게 벌어져 있다. 이 정도 다쳤으면 적어도 신음 정돈 흘릴 텐데, 남자는 타인의 상처를 마주한 것처럼 감흥 없는 표정이었다.
“정말 제가 벗겨요?”
“내가 지금 너무 아파서 손을 쓸 수 없게 되었거든. 해줘 봐.”
남자의 목소리가 연기처럼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손도 쓸 수 없다기엔 남자가 너무 평화로워 보였지만 우희에겐 거부권이 없었다.
“담배는, 참아주세요.”
“참아주세요.”
남자가 읊조리듯 우희의 말을 따라 하더니 담배를 부러뜨렸다.
“고맙습니다.”
“내 몸을 위한 건데, 네가 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남자의 슈트 하의를 끌어 내렸다. 지퍼가 열려 있어 한시름 덜었지만, 꽉 짜인 근육에 갇힌 허리춤이 돌부리처럼 작용해 옷이 움직이질 않았다.
“허리 좀….”
“부탁을 하려면 제대로 해야지. 똑바로 다시 말해 봐.”
“…치료하는 건데 제가 부탁을 해야 해요?”
우희가 우울하게 물었다. 그때 툭, 커다란 손이 우희의 정수리에 내려앉았다. 믿을 수 없어 하는 사이 남자가 허리를 약간 들었다. 틈을 놓칠세라 얼른 골반까지 바지를 내렸다.
검은색의 드로어즈 위로 두둑한 형태가 드러났다. 불룩하게 솟은 적나라한 윤곽에 시선이 사로잡혔다. 기둥은 왼쪽으로 휘어 골반 위로 누워 있었다. 현실감 없는 크기를 마주한 우희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의심했다. 계속 남자만 생각했으니 꿈이라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우희는 진심으로 고뇌하며 핀셋을 집어 들었다.
소독약을 듬뿍 먹인 탈지면을 환부에 가져다 댔다. 할아버지를 도와 가벼운 상처를 꿰맨 경험이 있긴 하나 오랜만에 수술용 장갑을 끼는 거라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짐승에게 산채로 오독오독 잡아 먹히는 듯한 숨 막히는 시간을 간신히 이겨내며 살갗을 이어붙였다. 조금이라도 비뚤게 꿰맸다간 호숫가에 끌려갈 것 같았다. 풍덩. 매몰되는 모습이 추격자처럼 쫓아왔다.
그동안 상대한 잔챙이와 남자가 같은 부류였다면 이렇게까지 목을 조이듯 긴장되진 않았을 텐데.
“아예 코를 박겠는데.”
“네?”
“치료에 도움 되는 거 맞나? 내가 보기엔 네 욕심 채우는 짓거리 같아서.”
우희가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안경을 두고 온 바람에 바짝 밀착해서 상처를 들여다보고 있던 게 꼭 그의 사타구니에 머리를 처박은 모양새였던 거다. 귓불이 뜨거워졌다. 우희는 손을 크게 휘저으며 오해란 표정을 했다.
“그게 아니라, 여기 밑이요.”
“어디 밑. 김우희 씨가 코 박고 있던 내 좆?”
“왜 자꾸 좆좆, 그러세요?”
“그럼 뭐라고 할까. 자지? 페니스? 육봉?”
수치심에 얼굴이 허옇게 떴다.
“조, 좆으로 하세요, 그냥.”
매끈한 입꼬리가 늘어졌다.
“그래 내 좆에 관심이 많다고.”
“아니에요! 배꼽 아래로 조금만 제모해도 될까요? 상처가 이곳까지 이어져서 감염될 수 있어요.”
우희가 눈가가 빨개진 채 말했다.
“일일이 묻지 말고 해, 그런 건.”
귀찮다는 투는 아니었다. 왠지 모를 서러움에 코를 훌쩍거리곤 눈에 힘을 주었다. 안경이 없어서 정말 너무 불편했다.
어떻게 치료를 마쳤는지 기억이 없었다. 자꾸만 정수리에 툭툭 닿았다가 떨어지는 커다란 손을 느낄 때마다 비명이 나올 것 같아서 간신히 이성을 부여잡는 게 최선이었다.
“다 됐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재워도 주나.”
남자가 눈두덩이 위에 팔 하나를 올리며 말했다.
“어떻게… 자장가를 불러요? 토닥토닥해요?”
지친 마음에 아무 말이나 횡설수설하자 남자의 눈매가 좁아졌다.
“그것도 귀엽긴 하다만. 수면제 없나?”
아. 수면제. 우희는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주삿바늘 포장을 뜯었다.
“수면제는 지금 없어서 진통소염제 놔드릴게요.”
핏줄이 진하게 올라온 팔뚝에 조심스레 주삿바늘을 찔러넣고 진통제를 투입했다. 정 의원에는 따로 간호사가 없었기에 주사를 놓는 건 우희의 일이었다.
의료 행위가 불법이란 걸 인지한 건 고등학생쯤이었다. 알게 된 후에도 관성처럼 치료를 도울 수밖에 없었다. 외조부의 말대로 눈엣가시가 되지 않으려면 쓸모가 있단 걸 증명해야 했다.
얼마 후 남자는 숨소리조차 내지 않고 고요히 잠들었다. 기력이 다한 우희는 남자가 잠든 것을 재차 확인하고 별장에서 빠져나왔다.
현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덩치들이 모여 있었다. 우희를 발견한 이 실장이 빠르게 다가왔다.
“형님은 어때. 괜찮냐? 어?”
“괜찮을 거예요. 소독 잘하시고 진통제 챙겨 드리세요. 정 불안하시면 병원에 가보시고요.”
“확실한 거지?”
그렇게 걱정되면 병원을 가라니까…. 우희는 하지 못한 말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성질머리는 사람을 가리는 편이었다.
“네. 지금 주무시니까 일어나시면 상태 여쭤보세요. 그럼 이제 가볼게요.”
“형님 깨어나고 가야지.”
“네?”
“멀쩡하게 깨어나셔야 할 것 아니냐. 갑자기 형님 몸에 이상 생기면, 네가 책임져야지!”
이 실장이 붕어처럼 뻐끔대는 우희를 다시금 별장 안으로 밀어 넣었다. 버벅거리는 그녀의 등 뒤로 조용히 문이 닫혔다. 축객령을 받은 이 실장은 들어가지 못하니, 유일하게 통행권이 있는 우희를 남자 곁에 남겨두려는 심산 같았다.
우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왔다 갔다 하다가 스위치를 발견하곤 소등을 시도했다. 불을 잘못 꺼서 몇 번 켰다 껐다 했다. 점멸하는 불빛이 오락가락하는 자신의 이성과 겹쳐 보였다.
늘어진 남자의 몸체가 유혹적이었다. 아무래도 미친 것 같다. 우희는 재차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도 발소리를 죽이고 조심스레 남자가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세상에서 동떨어진 공간에 잠든 거대한 짐승처럼 남자는 거대한 형태로 소파를 채우고 있었다. 바짝 다가서진 못하고 거리를 두고 그를 바라보았다. 남자의 구둣발에 걷어차이고 싶은 게 과연 지성인의 사고방식일까. 철없이 방방 뛰는 성욕을 어떻게 정의 내려야 할까.
저기 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아양을 부리며 남자가 적선하듯 내던져주는 시선에 감읍해 그의 발이라도 핥고 싶은 건 나사가 여러 개 빠져야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이곳에 유배당한 신세를 잊어선 안 됐기에 우희는 애써 성충처럼 부화하려는 본능을 억눌렀다. 반대쪽 벽에 기대 쪼그려 앉았다. 긴장을 너무 많이 했더니 속이 다 쓰렸다.
“김우희 씨.”
까무룩 잠들려던 우희가 무릎에 닿았던 이마를 번쩍 들어 올렸다.
“돌팔이 맞네.”
잠든 거 아니었나? 남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잠겨있지 않았다. 우희는 얼른 조명 하나를 켰다. 이번엔 실수 없이 남자의 뒤쪽으로 은은한 조명 하나를 보기 좋게 켤 수 있었다.
“어디 불편하신 데라도….”
되레 우희의 목소리가 안타까울 만큼 갈려져 나왔다. 자신이 왜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직원이 된 것처럼 그의 불편함을 물어야 하는지 모르겠으나 우희는 답습된 것처럼 그를 향해 냉큼 걸어갔다.
“많이 아프세요?”
이불을 걷자 거즈를 붙인 옆구리가 보였다. 환부 주위를 눌렀는데 피가 배어 나오는 것 같진 않았다.
“진통제를 더 놔드릴까요?”
남자가 눈을 내리깔아 열린 지퍼 사이를 눈짓했다. 두꺼운 거즈를 붙인 옆구리보다 약간 아래쪽이었다. 우희가 무릎을 꿇고 앉았다.
오랜 시간 쭈그리고 있던 터라 오래된 창틀처럼 관절에서 뻣뻣하게 틀어지는 소리가 났다. 다리를 주무르고 싶은 걸 참아가며 고개를 숙이자 그에게 복종하고 싶단 희망을 얼마간 이뤘단 생각이 들었다. 제대로 돌았구나.
“아예 좆을 밀지 그랬어.”
“…네?”
우희는 남자의 시선이 머무른 배꼽 아래쪽을 확인하곤 흡, 숨을 멈췄다. 갓 긁힌 것처럼 유난히 붉은 실선이 보였다. 조금 전 면도날로 잔털을 제거하는 도중에 낸 실수 같았다.
무심코 시선을 들어 올렸다가 그와 시선이 얽혀 손을 삐끗했던 때. 당시엔 남자가 아무 말 없어서 몰랐다. 바로 붉은색 소독약을 발랐으니 더욱 눈치채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우희는 왕진 가방에서 꺼낸 연고를 듬뿍 짰다. 급한 대로 손가락에 묻혀 바로 남자의 살갗에 가져갔다. 조심히 문대고 있자니 이 또한 음흉한 짓거리 같아졌다. 고삐 풀린 것처럼 음탕한 상상이 가지를 뻗어간다. 망상으로 마비된 머리통 위로 커다란 손이 올라왔다.
“혼내면 울려나.”
혼낸다는 말이 위험하게 가슴을 파고들었다. 쿵쿵. 이 실장이 대문을 두드리던 것보다 더 무섭게 남자가 우희를 두드리고 있다. 그가 이대로 제 뒤통수를 눌러 바닥에 처박아줬으면 좋겠다. 몹쓸. 우희는 끈질긴 남자의 시선을 피하며 아무 말이나 지껄였다.
“저기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물어놓고 아차 싶어서 서둘러 변명거리를 이어붙였다.
“환자니까요, 혹시 제가 책임질 일이 생길 수도 있고. 또….”
“진무헌.”
더 횡설수설하기 전에 남자가 이름을 말해주어 내심 고마웠다.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단 의심이 고개를 내밀 무렵 무헌이 평화로운 어조로 물었다.
“김중혁 의원 딸이 왜 이런 곳에 있지?”
“그걸 어떻게… 아세요?”
“조사도 없이 사람을 들였을까 봐.”
무헌이 태연히 말하며 담배를 물었다. 천천히 필터를 흡착해 빨아당기는 단단한 입가를 호기심이 덕지덕지 묻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태우고 싶어? 안 피운다며.”
빨던 필터를 우희 쪽으로 돌려주었다. 강요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우희는 그걸 받아들곤 입술로 가져갔다. 쿨럭쿨럭. 기침이 촌스럽게 터져 나왔다.
“못하는 건 거절을 해. 미련하게 다 받아 처먹지 말고.”
다시 담배를 거둬간 남자가 축축해진 필터를 깊게 빨았다.
“저기 진무헌 씨, 아니 형님…? 뭐라고 부르죠?”
매서웠던 남자의 눈가가 약간 풀렸다. 그러나 마땅히 호칭을 정해주진 않았다. 답을 기다리던 우희도 굳이 오늘 말곤 그를 부를 일이 없단 것을 깨닫고 할 말을 이어갔다.
“일부러 그러시진 않겠지만 오늘 일, 저희 집에는 비밀로 해주세요.”
남자가 묘연히 웃었다. 기분 좋은 미소라기보단 계략을 꾸미는 흑막처럼 의뭉스럽고 탁한 느낌이었다.
너무 되바라지게 말했나 싶어서 그런 걸까. 그와 마주 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해서 하고픈 말을 다 해도 되는 건 아닌데, 지옥의 주둥이가 되어 주변을 싸하게 만들던 습관이 도진 게 아닐까 걱정됐다.
“부탁하는 건가.”
아까부터 무헌은 부탁이란 말을 강조했다. 그 점에 말도 안 되는 희망을 품었다가 그래 봤자 밝지 않을 미래를 알기에 체념했다.
“제가 부탁해야 하는 상황인가요?”
우희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왕 낸 용기를 쥐어짰다. 따지자면 우희가 귀찮음을 감수하고 그를 도왔다. 그러니 무헌도 협조를 해주어야 옳았다.
“부탁이 아니면 청탁?”
남자가 어디 더 말해 보라는 듯 인자하게 기다려주었다.
“다친 거 비밀로 하고 싶으셔서 제 손 빌리신 거잖아요. 부탁을 하려면 형님께서… 하셔야죠. 왜 제가 해요?”
애써 눈을 피하지 않고 말했다. 길게 이어지는 침묵으로 미뤄 이 말이 유언이 될지도 모르겠단 후회가 밀려들었다.
“깡패가 칼 맞은 게 뭔 대수라고 숨겨. 네가 이쪽 상황 잘 알고, 가까이 있으니 부른 거지.”
무헌이 연기를 내뱉으며 말을 흘렸다. 그가 정말 김중혁에게 전화를 걸어 따님이 제 배를 꿰매주었습니다, 하고 말할까. 아니겠지. 아니란 걸 알면서도 피가 말랐다. 큰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불안했다.
우희는 그날 호수에서 무헌을 만난 이후부터 내내 그의 환영에 시달리고 있었고, 지금은 꿈을 이룬 아이처럼 마음이 들떠 있었다. 처음 만난 취향의 남자에게 각인 당한 그녀는 제 어미인 줄 알고 고양이를 쫓는 강아지처럼 사리 분별이 어두워져 버렸다.
그동안 너무 억누르고 있어서, 발산하지 못해서. 처음으로 취향의 남자를 만나서. 봉인이 풀린 본능이 위험하게 칼춤을 추기 시작했다. 자칫 잘못하면 자멸할 것 같았다. 위태로운 주제에 음탕한 속마음을 숨기고자 대답을 쥐어짰다.
“지금 협박하시는 거예요? 제가 도와드린 건데… 너무해요.”
“협박?”
“그렇잖아요…. 부탁하라고 지금 협박하시는 거잖아요.”
긴장감을 견디지 못하고 음성이 울먹댔다. 우희의 반항은 여기까지였다. 무헌이 무슨 말이든 명령해준다면 배를 뒤집어 까고 굴복하고 싶어 안달 난 지 오래였다.
“협박은 무슨, 그딴 걸 왜 해.”
관심 없단 투로 대꾸한 무헌이 소파에 느른히 누웠다. 우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급격히 아쉬워진 마음을 들킬까 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무헌이 진짜 잠들 때까지 꼼짝없이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물소리에 잠에서 깼다. 우희는 낯선 향기를 맡으며 미끈한 시트를 짚고 일어났다. 침대의 주인인 양 대자로 뻗어 자던 모습에 놀라 스프링처럼 튀어 올랐다. 황급히 몸을 일으키자 어두운 톤의 방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직사각형의 방은 우희가 있던 거실이 아니었다.
무헌의 상태를 돌본답시고 곁을 지키다가 깜빡 잠든 듯했다. 배에 구멍이 난 그가 직접 안아서 옮기진 않았을 테니, 덩치 중 한 명이 날랐다는 건데…. 모르는 새에 일어난 타인의 접촉이 그리 유쾌하진 않았다.
아까부터 계속 신경을 자극하는 물소리의 근원을 찾아 시선을 돌렸다. 소리는 침실 안쪽의 문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우희는 천천히 방을 둘러보았다. 손님용 침실일 줄 알았는데, 욕실 옆에 붙은 드레스룸을 보니 안방 같았다. 곳곳에 사용 흔적이 남아 있었다. 혹시 무헌의 침대를 점거한 걸까. 초조해져 물소리가 나는 욕실로 다가갔다.
당분간 샤워하면 안 되는데 주의 사항을 말해주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완치 전에 움직여 실밥이 터지거나 꿰맨 채로 온천을 다녀온 덩치들을 종종 봐왔기에 안심할 수 없었다. 하얀 문을 앞에 두고 조심스레 노크했다.
“저기요.”
소심하게 몇 번 문을 두드리자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그냥 대답만 바란 건데 무헌의 젖은 얼굴이 불쑥 튀어나와서 놀라고 말았다. 우희는 뒷걸음질 치며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하, 할 말이 있어서요.”
밝은 곳에서 본 무헌의 젖은 얼굴은 어제보다 더 뚜렷한 입체감을 자랑했다. 우희를 내리누르는 듯한 시선은 여전했다. 그가 물 맺힌 턱을 비스듬히 틀었다.
“호칭 하나로 통일해. 어제는 형님, 오늘은 저기. 듣는 저기 헷갈려.”
샤워용품 냄새가 우희의 코점막을 휘감았다. 너무 그를 빤히 봤다는 것을 깨닫고 나자 맞닿은 시선이 자잘하게 흔들렸다. 우희는 눈동자를 슬쩍 옆으로 보내며 말했다.
“샤워하면 안 되는데….”
“물 안 닿게 했어.”
“그래도 그게 방수가 아니라서요.”
흘긋 무헌의 옆구리만 살피려던 우희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나신을 마주했다. 당연히 아래는 입고 나왔을 줄 알고 아무 생각 없이 눈을 내리깔았다가 그대로 굳었다.
“어….”
혹시 잘못 본 걸까 싶어 눈을 깜빡였다. 그럴 때마다 배꼽까지 달라붙은 그것이 꺼떡대며 우희를 반겼다. 그녀는 무너지는 돌다리에 선 것처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만 봐야 하는데, 너무 놀라서 눈조차 돌릴 수가 없었다.
“스물여섯 먹고 좆 처음 봐?”
“…네?”
“어지간히 신기한가 봐.”
“저도… 마, 많이 봤어요. 많이 봤다구요!”
바락 소리 지르곤 아차 싶어 입을 닫았다. 무헌을 처음 만난 뒤부터 달달 거리며 위험하게 가동되던 엔진이 기어코 폭발한 것 같다. 까만 연기를 내뿜으며 퍼져나가는 건 억눌렀던 본능이 분명했다.
죄송하다고 무릎을 꿇을까. 돌연 상상이 폭주했다. 산뜻한 향이 나는 무헌의 발등을 핥으며 용서를 구하는 장면이 매연처럼 들어찼다. 억눌렀던 탓인지 짧은 순간, 상상은 그의 발에 밟히는 데까지 도달했다. 구멍이 그의 분신처럼 벌름대며 흥분액을 지렸다.
“좆 맛본 걸 자랑하고 싶은 줄은 몰랐네.”
“…뭐라구요?”
“많이 봤다며. 맛본 사연이라도 들어줘?”
무헌이 문틈에 비스듬히 기댔다. 언뜻 웃는 듯한 입꼬리에 소름이 돋았다. 완벽한 주인처럼 여유롭고 고고한 모습. 미친. 미친 거야.
“정말, 실례 많았습니다.”
우희는 창백해진 얼굴로 돌아섰다. 그가 이상한 오해를 하는 것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이대로 무헌의 바짓가랑이를 잡을 것 같아서 그게 두려웠다.
무슨 정신으로 별장에서 도망쳐 나왔는지 모르겠다. 기억이 끊긴 철로처럼 불완전했다. 2층을 헤매느라 빠져나오는데 애먹은 것만 어렴풋이 기억났다. 뛰어나오는 동안 덩치들을 마주쳤는지는 가물가물했다.
차 한 대가 겨우 지나다닐 만한 산길을 내려가다 보니 어느덧 마을 어귀였다. 별장은 마을 너머에 있는 또 다른 산에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곳에 별장이 있는 줄 오늘에서야 알았다.
어찌어찌 집까지 걸어가자 활짝 열린 대문과 현관이 새벽공기를 맞으며 황량하게 우희를 맞이했다. 겁 없이 열어둔 문이 집 나간 정신머리와 겹쳐 보였다.
집안은 바깥과 다를 것 없이 차가운 공기로 가득했다. 현관 문턱을 넘고 나서야 도망치듯 뛰쳐나온 제 꼴이 무헌에게 어떻게 비쳤을지 염려됐다.
“뭐 하는 짓이야….”
허탈하게 중얼거리며 미지근한 물을 한잔 비웠다. 어느 정도 침착해지자 극심한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욕실로 들어간 우희는 땀에 젖은 얇은 티셔츠를 벗고 따뜻한 물줄기에 몸을 적셨다. 두 손이 덜덜 떨리고 있다.
뜨거운 물줄기를 내리 맞고 서 있었으나,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무헌의 성기 형태는 문신처럼 머리에 새겨진 뒤였다. 문신. 언뜻 무헌의 오른팔에서 그런 걸 본 것 같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그것마저 섹시했다.
“돌았니….”
클럽에서 섹스를 관망하며 타인의 몸을 적지 않게 봤다. 무헌의 나체를 보고 이렇게까지 충격받을 일은 아니란 소리다. 그래 봤자 다 사람 몸인데.
물론 무헌의 그것이 겁먹을 만큼 거대한 크기이긴 했다. 검은 숲 한가운데 불뚝 솟은 성기는 처음 본 야동보다 충격적이고 원색적이며, 공포스러웠다.
흉흉하게 발기한 검붉은 형상. 제 것이 20㎝의 대물이라고 자랑하던 낯선 남자의 그것보다 좀 더 길어 보였고, 둘레는 훨씬 두툼했다. 양각 띠를 두른 귀두와 핏줄이 두둑하게 감긴 기둥. 무헌의 주먹만큼이나 묵직하던 고환과 힘찬 요동. 이무기 같은 생동감이 지워지질 않았다.
우스운 것은 무헌의 나체를 되짚어볼수록 음심에 불이 붙는다는 거다. 폭발한 본성이 온몸을 장악해 성욕만 남은 것 같다. 흉기 같은 그걸 숨 막히도록 물면… 그가 머리채를 잡고 목 끝까지 쑤셔주면….
“하….”
머리를 쥐어뜯으며 주저앉았다. 녹녹하게 풀린 밑구멍에서 기어 나온 애액에 가랑이가 흠뻑 젖어 있다.
“읏….”
손을 대자 구멍이 움찔대며 아까 그 몽둥이를 받아들이고 싶다며 안달을 냈다. 진무헌이 이 동네에 머무르는 한 유배지로 이 동네는 적절하지 않단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