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제이크에게 청혼받은 다음 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벌떡 상체를 일으킨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믿기지 않아.”
따뜻한 세숫물을 가져와 어푸어푸 세수로 한바탕 정신을 차린 이후에도 여전히 멍하기만 했다.
어제 정원에서의 고백이 계속 생각났다.
“내가 정말 제이크와 사, 사…….”
사귀게 되었다니.
나는 아직까지 차마 부끄러워 입 밖으로는 꺼내지도 못하는 그 말끝을 입안에서만 머무르게 했다.
일단 청혼받은 거긴 한데, 약혼이나 결혼은 나중에 하기로 했으니까…….
으음, 우리 지금 사귀는 거 맞겠지?
“웬일이야, 정말.”
나는 거울을 보았다.
뺨이 새빨개진 여자가 한 명 보였다.
괜히 혼자 볼만 붉히고 있으니 주책맞아 보인다.
하지만 도저히 믿기지가 않는걸!
이거 꿈 아니지?!
‘막상 어제 고백받고 나서는 집에 잘만 들어와서 발 뻗고 잤는데.’
어쩌면 어제는 현실감이 별로 들지 않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자고 일어나서인지 어제와 달리 현실감이 느껴졌다.
“……제이는 뭐 하고 있으려나. 오늘은 따로 만나기로 약속하지는 않았는데.”
괜스레 그렇게 중얼거리고 있을 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들렸다.
“응?”
“아가씨, 제이크 소공자님이 찾아오셨어요.”
유모의 말에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 그게 정말이야?”
“네, 그럼요.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지금 만나러 가실 거죠? 드레스 준비해 드릴까요?”
유모의 물음에 나는 황급히 옷차림을 살폈다.
세수도 하고 머리도 깔끔히 정리했지만 여전히 실내복 차림이었다.
이대로 제이크를 보러 갈 수는 없어!
‘물론 어릴 때야 실내복 차림으로도 잘만 만나고 놀았지만……. 지금은 어린애가 아니잖아. 우리 둘 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며칠 전에 주문했던 것 중에서 골라서 준비해 줘.”
“알겠습니다, 아가씨.”
유모는 어쩐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채 쿡쿡 웃으며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유모가 왜 저러지?’
나는 의아해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잠시 후, 유모가 드레스를 가지고 나와 입는 걸 도와주며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건 채 말했다.
“우리 아가씨, 언제 이렇게 다 크셔서 소공자님이랑 데이트도 가시고……. 이 유모는 정말 기뻐요.”
“뭐, 뭐? 데, 데이트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아니야!”
가만히 있던 내게 순간적으로 들어온 예상치 못한 틈새 공격.
나는 표정 관리에 실패하고 펄쩍 뛰며 부정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누가 봐도 찔리는 구석이 단단히 있어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래서일까, 유모는 후후 웃으며 다 알고 있다는 듯 푸근한 미소를 띠었다.
그 웃음을 보자마자 나는 식은땀이 삐죽 흘렀다.
‘설마?!’
다 들었나? 아까 내가 중얼거리는걸?
하지만 딱히 별다른 말을 하지는 않은 것 같은데…….
‘하지만 유모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을 때면, 확실히 뭔가를 알고 있고는 했지.’
그녀는 눈치가 빨랐다.
어쩌면 나와 제이크 사이에 어떤 변화가 있었다는 것을 내 주변의 누구보다도 더 빨리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냥 솔직히 털어놓아야겠다.
어차피 가족들과 친구들에게도 다 말할 생각이었으니까.
“그게, 나 사실…….”
내게 연인이 생겼다는 사실을, 그것도 그 연인이 내 소꿉친구라는 사실을, 내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함께했던 유모에게 막상 털어놓자니 기분이 이상하다.
마치 가족에게 사생활을 고백하는 것 같잖아.
물론 유모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사이가 맞긴 하지만. 그래도!
“제이크와……!”
그렇게 운을 뗀 순간, 유모가 푸훗 웃으며 말했다.
“알아요. 알고 있어요, 아가씨. 제이크 소공자님과 우리 아가씨가 이제 정식으로 교제하는 사이가 된 거죠?”
“……어떻게 알았어?”
유모의 말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실, 어제저녁에 아가씨께 목욕물을 미리 받아놓을지 물어보러 온실로 갔다가 두 분의 비밀스러운 고백을 듣고 말았어요.”
“아, 역시……. 그랬던 거구나.”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난 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둘이 사귀는 걸 모두 알게 된 줄 알았지 뭐야?!
“물론 예전부터 예상했던 일이라……. 그렇게까지 놀랍지는 않았지만요.”
“응? 잠깐 유모, 그건 또 무슨 말이야?”
내 다급한 물음에 유모는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얼굴로 답했다.
“그야, 어릴 때부터 워낙 제이크 소공자님이 우리 아가씨를 너무 좋아하셨으니까요? 물론 우리 아가씨를 싫어할 분이 감히 누가 있을까 싶긴 하지만, 아가씨께서 제일 친하게 지낸 영식은 그분뿐이기도 했고요. 이 제국 수도에 두 분이 친한 걸 모르시는 귀족분들이 있을까요?”
“아하하…….”
“게다가 언제부턴가 우리 아가씨도 제이크 소공자님이 왔다는 소식만 전해드리면 화들짝 놀라며 기뻐하는 게 눈에 선해서,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 생각은 해왔었죠. 후후, 이리 빨리 두 분의 마음이 이어지니 기쁘네요!”
유모의 흐뭇해 보이는 미소를 보며, 나는 생각했다.
유모가 저렇게 생각할 정도면 내 주변인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겠구나.
‘제이크가 날 좋아하고, 내가 제이크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걸!’
어쩐지 내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묘하게 창피했다.
하지만 동시에 조금은 후련하기도 했다.
* * *
준비를 끝내고 응접실로 향하는 길.
분명 평소와 다르지 않은 복도이건만 햇볕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지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생소한 기분이네.’
흔히들 로맨스 소설이나 영화에서는 연애를 시작하면 모든 게 바뀌는 것처럼 이야기하고는 하던데.
‘그 정도까진 아니지만 확실히 좀 다르긴 해.’
응접실의 문을 열기 위해 문고리에 손을 댔을 때, 온몸이 찌릿해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열린 문 너머에 차분히 앉아 있는 제이크의 뒷모습을 보자마자, 내 마음은 묵직이 아래로 가라앉는 듯싶다가 이내 구름처럼 위로 붕 떠올랐다.
“제이, 미안. 오래 기다렸지.”
“……아, 미르. 왔구나.”
내 목소리를 듣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돌리며 화색을 띠는 제이크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빙긋 웃음이 지어졌다.
‘이제 알겠어. 지금 내 기분이 어떤지.’
장르가 바뀐 기분이었다.
원래의 삶이 일상물이었다면 지금은 로맨스물이 된 것 같았다.
‘으음, 그렇다면 나와 제이크 사이의 세부 장르는 뭐지? 로맨스 코미디? 피폐 로맨스? 격정 멜로……?’
머릿속에서는 제이크와 나를 주연으로 한 영화가 재생되었다.
아니, 그런데 피폐와 격정은 너무 안 어울리잖아!
이건 안 돼!
절대 안 할 거라고!
너무 안 어울리다 못해 창피하기까지 한 상상을 어서 내보내야 했다.
그래서 손을 작게 내저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상상을 몰아내고 눈을 뜬 순간, 바로 앞에 서 있는 제이크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게 손을 뻗었다.
“어디 아파?”
“……응?”
“미간을 찌푸리고 으, 하는 소리를 내길래. 아픈 줄 알고 걱정했어.”
제이크의 투명한 갈색빛 눈동자가 염려를 가득 담아 나를 바라보고 있다.
나는 황급히 변명했다.
“아니야. 아픈 게 아니라 그냥 갑자기 다른 생각을 좀 하느라 그만…….”
“……다른 생각?”
기분 탓인가.
순간 제이크의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는 ‘흐음’ 하고 작게 한숨 쉬며 중얼거렸다.
“나보다 더 미르를 신경 쓰이게 한 그 다른 생각이란 게 뭔지 몹시 궁금해지는걸.”
말 그대로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절대로 알려줄 수 없기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진짜 별거 아닌데.”
“별거 아닌 생각도 네가 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이 알고 싶어지던데.”
제이크가 능글맞게 질문해 오는 통에 나는 도저히 내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작게 대답했다.
“……진짜 별거 아니라니까. 그냥 뭐, 너와 내 앞으로의 미래와 관계 변화에 대한 생각……. 뭐, 그런 걸 좀 해봤어. 알다시피 우리 어제부터 연인이 된 사이잖아. 아직은 어색해서 상상으로밖에 모르겠어.”
내 말을 들은 제이크는 은은히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런 거라면 별게 아닌 게 아닌데. 아주 특별한 고민이잖아.”
“그런가?”
“그래. 이왕이면 그 고민 상담, 나에게 해 줬으면 좋았을 거야. 왜냐하면 나도 요즘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었거든. 미르.”
그렇게 말하며 제이크는 한쪽에 벗어놓았던 외투를 다시 걸쳤다.
“제이, 나 만나러 온 것 아니었어? 다시 돌아가게?”
“아니, 너와 같이 외출하려고. 한 장소에서만 끙끙대 봤자 고민에 대한 답이 쉽게 나오지 않잖아.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다 보면 답이 나올지도 몰라. 그러니 미르, 어서 함께 나가자.”
그는 내게 눈웃음을 지어 보였다.
* * *
나는 얼떨결에 제이크를 따라 그의 마차에 탔다.
마차에 타기 전, 제이크는 나를 에스코트하듯 손을 내밀며 장난스레 말했다.
“타십시오, 레이디.”
“……!”
순간 제이크의 신사적인 말투가 낯설어서 낯이 확 붉어졌다.
나는 마차에 타고 나서야 주변에 듣는 귀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제이크에게 속삭였다.
“방금 그 말은 뭐야? 처음 보는 사이도 아니고.”
“한 번쯤 저런 말로 널 에스코트해 주고 싶었어. 알다시피 우리는 어릴 때부터 친했던 소꿉친구잖아. 저런 말은 해볼 기회가 없었지.”
제이크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만약 너와 내가 데뷔탕트 연회에서 처음 만난 사이였다면 저렇게 말해 봤을 텐데, 싶어서 아쉽더라고.”
“그래? 아쉬워? 그럼 우리 오늘부터 처음 만난 사이인 걸로 할까?”
괜스레 나도 장난기가 들어 농담을 건넸다.
그랬더니 제이크가 화들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안 돼.”
“싫은 거야?”
“당연히. 내가 네 첫 번째 친구라서, 어릴 때부터 친했던 사이라서 얼마나 다행이라고 생각했는지 몰라. 그 자리는 절대로 내줄 수 없어.”
“아하하.”
사뭇 진지하게 말하는 제이크의 모습을 보니 과연 진심이구나 싶어 웃음이 나왔다.
“그래, 제이. 나도 너와 오랫동안 친하게 지낼 수 있어서 좋아. 어릴 때부터 친한 친구는 다 커서는 못 얻는 특별한 사람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막 제이크를 향해 고개를 돌린 때였다.
히히힝!
작은 돌부리라도 밟았는지 갑작스레 말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마차의 차체가 살짝 옆으로 쏠렸다.
“……!”
“아얏!”
예상치 못한 마차의 흔들림에 순간 몸이 기울어졌다.
“조심해, 미르!”
제이크의 외침이 들렸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분명 의자의 모서리에 몸 한구석을 단단히 찧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 얼굴에 와 닿은 것은 딱딱하고 차가운 나무가 아니었다.
부드러운 셔츠 천의 촉감 너머로 따스하고 단단한 살결이 느껴졌다.
“응……?”
지금 나, 아무래도 누군가의 가슴팍에 폭 안긴 것 같은데?
하지만 이곳에 제이크와 날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제이크에게 안겨 있단 말이지?
“저, 제이크? 미안. 내가 중심을 못 잡아서……. 다친 건 아니지?”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제이크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제이크는 고개를 돌리고 있어서 나는 제이크의 목덜미와 귀, 시선을 피하고 있는 그의 한쪽 눈밖에 볼 수 없었다.
“…….”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가슴께에서 심장박동이 쿵쾅거리며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
방금까지만 해도 태연히 농담하며 멀쩡했던 제이크의 단정한 얼굴은 어느새 오늘 아침에 거울로 봤던 내 얼굴보다 더 새빨개져 있었다.
“저기, 설마 안 괜찮은 거야?”
내가 재차 괜찮냐고 묻자 그는 그제야 뒤늦게 짤막한 대답을 내뱉었다.
“난 괜찮아. ……정말로.”
하지만 붉어진 얼굴을 보니 별로 괜찮아 보이진 않았다.
나는 면밀히 제이크의 온몸을 살폈다.
딱히 다친 데는 없어 보이는데 저렇게 당황스러워한다는 건 역시…….
‘내가 갑작스레 품에 안겨버린 탓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것 말고는 딱히 답이 없는 것 같다.
하긴 나도 방금의 상황은 좀 갑작스러워서 놀라긴 했다.
이렇게 갑자기 스킨십을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흐음, 제이크. 태연한 척하더니만. 실은 나만큼이나 긴장하고 있었던 거지?’
나만 두근대며 초조해하고 있다는 게 아니란 걸 알고 나자 도리어 마음이 편안해졌다.
대신 스멀스멀 작은 장난기가 샘솟아 올랐다.
나는 제이크의 손끝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저기, 제이크. 방금 본의 아니게 네 심장 소리를 들었는데 말이야.”
“…….”
제이크는 말없이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키득대며 말을 이었다.
“너무 빨리 뛰어. 혹시 어디 아픈 건 아닐지 걱정돼.”
내 말에 제이크는 나머지 한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 앓듯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앞에서만 그런 거야, 미르.”
“정말? 평소에는 안 이래?”
“난 건강해. 널 위해서라도 앞으로도 건강할 거고. 못 믿겠다면 보여줄 수도 있어.”
나는 눈을 휘둥그렇게 뜨고 난처해하는 제이크에게 물었다.
“아니, 잠깐. 그렇다면 제이, 너 그동안 내 앞에서는 항상 이렇게 심장이 막 빨리 뛰어왔다는 소리야?”
“…….”
“……?”
눈을 깜빡거리며 무언의 재촉으로 답변을 요구하니, 그제야 제이크가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그래, 맞아. 항상 그랬어. 오늘은 특히 더.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네. 지금도.”
“……제이크. 너 그러면 나중에는 어떻게 하려고 그래?”
내 물음에 제이크가 멈칫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연애도 하고 약혼도 하고 결혼도 하기로 했잖아. 그렇게 되면 막 키, 키스도 하고…… 막, 막 더한 것도 하고……. 아니다, 방금 말은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줘!”
어쩐지 말하면 말할수록 창피해지는 건 나였다.
제이크를 놀려 보려다 내가 내 무덤을 파고들어 간 꼴이었다.
“……!”
내 말에 제이크의 표정 역시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때 마침 타이밍 좋게 마차가 멈추고, 마부의 외침이 들렸다.
“도착했습니다!”
동시에 나는 생각했다.
‘휴, 살았다!’
* * *
어찌어찌 마차에서 내리고, 거리를 걷던 우리는 자연스레 고급 식당가로 향했다.
하마터면 아까 마차 내에서의 일로 어색해질 뻔했지만, 주변을 구경하다 보니 어느새 마차에서의 일은 잊혀가는 듯했다.
일단 내 생각은 그랬다.
“저기 봐, 미르.”
나는 제이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상호가 눈에 들어왔다.
“디저트 가게잖아.”
“맞아. 우리 유치원 다닐 때부터 있었던 곳이지. 10년도 더 넘었어. 꽤 오래됐네.”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말대로 가게는 오래되어 간판이 빛바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손님이 북적이는 인기있는 가게다.
“네가 저 가게에서 파는 디저트를 좋아했잖아. 우리 자주 갔었지, 안 그래?”
제이크의 말에 갑자기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나는 감상에 젖어 중얼거렸다.
“그랬지. 아카데미 다닐 때도 저기서 디저트를 사 와서 먹고는 했던 게 기억나. 물론 지금도 좋아하고……. 말 꺼낸 김에 우리 저기로 갈래?”
“그래, 좋아.”
이야기하다 보니 정말로 디저트가 먹고 싶어졌다.
나는 제이크의 손을 잡고 가게로 향했다.
“미르, 넌 여전히 바나나 초콜릿 푸딩을 좋아하는구나. 입맛이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내가 고른 디저트들을 보며 제이크가 푸훗 웃었다.
나 역시 미소 지으며 대꾸했다.
“그러는 너도…… 라고 말하려 했는데, 제이크 넌 어릴 때와 다르게 단것도 이제 잘 먹지.”
어릴 적, 웬만해서는 단 걸 입에 잘 대지 않던 제이크가 떠올랐다.
보통 어린아이들은 단맛을 좋아하는데, 제이크는 내가 주는 게 아니라면 단 디저트를 절대로 먹지 않았더랬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제이크가 마탑에서 공부를 마치고 나와 함께 아카데미에 갔을 때부터였나?’
어느샌가 제이크는 초콜릿 무스가 가득 얹힌 케이크도 싫은 기색 하나 없이 잘 먹고는 했다.
“나는 취향이 변하지 않았는데 넌 변했구나, 신기하다.”
나는 작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제이크는 태연하게 답했다.
“그러게. 미르가 좋아하는 걸 따라 먹다 보니 어느새 나도 좋아하게 되어버린 것 같아.”
“아, 날 따라 한 거였어?”
“응. 좋아하는 사람은 서로 닮는다는 말도 있잖아?”
“풉.”
너무도 태연하게 저 말을 하는 제이크 때문에 순간 나는 마시던 차를 뱉을 뻔했다.
“제이크. 넌 어떨 때는 참 순수하기 그지없다가도 갑자기 이렇게 훅 들어올 때가 있더라.”
“그래? 그런 내 모습 중에 어떤 게 더 마음에 드는데?”
“그야 당연히 순…….”
나도 모르게 순수한 모습이라고 대답하려 했다.
하지만 막상 대답하려니 고민이 됐다.
내가 좋아하는 제이크의 모습이 정말 순수한 모습뿐일까?
그렇게 고민하던 나는 신중하게 대답했다.
“아니, 나는 둘 다 좋은 것 같아. 둘 다 각자의 매력이 있거든. 하지만 훅 들어오는 건 너무 자주 하지는 말아줘. 놀라거든.”
“알겠어. 때마다 미르가 원하는 모습으로 보여주도록 할게. 그리고 아까 했던 말 말인데.”
“응? 어떤 거?”
“……아까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에 네가 했던 말.”
“……!”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던 줄로만 알았는데, 아니었어?
‘우리 연애도 하고 약혼도 하고 결혼도 하기로 했잖아. 그렇게 되면 막 키, 키스도 하고…… 막, 막 더한 것도 하고……. 아니다, 방금 말은 그냥 못 들은 걸로 해줘!’
순간 지워 버리고 싶은 내 아까의 흑역사가 떠올라 볼이 발개졌다.
이윽고 머뭇거리던 제이크가 진지한 대답을 내놓았다.
“내내 그 말에 대해 생각해 봤는데 말이야.”
“……아, 응.”
‘어떤 이야기를 하려는 거지?’
내 의문과 함께 제이크는 사뭇 비장해 보이는 얼굴로 말을 이었다.
“내가 지금보다 더 노력할게. 키스 그리고…… 그거 말이야.”
응?
대체 뭘 어떻게 노력한다는 건지 궁금해졌다.
마법으로는 긴장을 없앨 수도 없는데 말이다.
“더 이상 날 봐도 심장이 미쳐 날뛰지 않게 해볼 거라는 거지?”
내 질문에 제이크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지만 그런 제이크의 다짐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지금도 넌 이런 말을 하면서 뺨이 붉어지는걸, 제이크. 아무래도 그렇게 되려면 아직 한참 먼 것 같아.’
나는 그런 그가 꽤나 귀엽다고 생각하며 한쪽 턱을 살짝 괴었다.
* * *
이윽고 우리의 대화 주제는 우리의 미래에 대한 것으로 옮겨갔다.
“제이, 넌 데뷔탕트도 치렀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후계자 수업에 들어가겠지?”
“응, 그럴 것 같아. 미르 너는 가게를 차리겠다고 했던가?”
제이크의 질문에 나는 환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몇 년 전부터 내 꿈이었어. 아기자기한 소품을 파는 가게를 차릴 거야.”
한마디로 소품샵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유독 손재주가 좋다는 말을 자주 듣고는 했었다.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특별 강의로 우연히 재봉틀 수업을 듣고는 그쪽에도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 내게 딱 어울리는 가게지.’
때마침 제이크가 질문했다.
“가게는 어디쯤에 차릴 생각이야?”
위치는 나 역시 오랫동안 고민해 온 바였다.
후작저와 가까운 상점가도 좋을 것 같고, 귀족들이 자주 드나드는 황궁 앞 거리 상점가도 좋을 것 같으니까.
광장 근처도 나쁘지 않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곳은 세 군데 다 아니었다.
“마탑이 얼마 전 수도로 이전했지, 아마?”
내 갑작스러운 물음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래서 공작저와 마탑을 한결 편하게 오갈 수 있게 됐지. 물론 너를 자주 만나게 된 게 더 좋지만. 그런데 가게 얘기하다가 갑자기 왜 마탑에 대해 질문하는 거야?”
“아, 나, 가게를 차리게 된다면 마탑 근처 상점가에서 해보려고.”
“정말이야?”
내 말에 제이크가 깜짝 놀라더니 이윽고 상상만으로도 기쁜 듯 환히 웃었다.
“응. 너와 자주 볼 수 있는 장소기도 하니까. 부디 가게 열면 동료들을 많이 데려와 주길 바랄게.”
“글쎄, 동료들이라……. 영 내키지만은 않지만 네가 원한다면 한 번쯤은 데리고 가는 것도 괜찮겠지.”
말을 마친 제이크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 제안했다.
“우리 지금 마탑으로 갈래?”
제이크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마탑? 갑자기?”
“응. 한 번쯤은 내가 일하는 곳을 보여주고 싶기도 했고. 어떻게 생각해?”
“으음, 나야 물론 좋지만. 마법사도 아닌 일반인이 마탑에 갈 수 있는 건가?”
내 의문에 제이크가 걱정 말라는 듯 미소 지었다.
“넌 내 특별한 초대 손님이니까 괜찮아.”
* * *
이윽고 우리는 마탑에 도착했다.
마탑은 정말 이름처럼 높은 탑 모양의 건물이었다.
이 제국에서 일정 규모 이상의 큰 건축물은 마법을 이용해 짓는다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마탑은 유독 웅장하고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우와…….”
외관이야 제이크를 만나기 위해 찾아올 때 몇 번 봤던지라 익숙했지만, 내부는 처음 들어와보는 것이라 모든 게 신기했다.
꼭대기 층까지 시원하게 뻥 뚫려 있는 가운데 광장과 그 주변으로 둥글게 이어진 연구실들이 장관이었다.
마법사들, 마법을 배우는 몇몇 학생, 조수들이 바쁘게 지나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제이크에게 물었다.
“그래서, 우리 어디로 가야 해?”
“그야 당연히 내 연구실이지.”
마탑에서 공부를 마친 후, 아카데미까지 졸업한 제이크는 정식 마법사로서 개인 연구실을 가지고 있다.
나는 마법 이동진을 타고 제이크와 함께 연구실로 향했다.
“우와!”
겉으로 봤을 땐 분명 마법사 개개인에게 할당된 연구실의 크기는 작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와 보니 충분히 널찍했다.
상상했던 연구실의 모습은 책상 위에 자료가 어지러이 늘어져 있고, 기묘한 색색의 마법 향로가 피워져 있는 모습이었는데 현실은 전혀 딴판이었다.
‘역시 제이크야.’
방 안은 온통 하얀색과 검은색뿐이라 사람이 지내지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제이크의 깔끔한 성격을 보여주듯이 책장에 가지런히 정리된 자료들은 물론 라벨에 붙은 글씨마저도 정갈했다.
하지만 연구실 전체가 그러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책상 위의 벽 한쪽에 걸려 있는 그림과 사진을 바라봤다.
“이건…….”
유치원을 졸업하기 직전, 화가를 불러 사이좋게 옹기종기 모여앉은 모습을 그림으로 남겨놓았었다.
그 그림 중 하나가 여기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바로 옆, 어릴 적 제이크와 내가 사이좋게 손잡고 있는 모습을 그린 초상화도 있었다.
우리가 아카데미를 졸업할 무렵, 영상구에 찍힌 모습을 실물로 인화할 수 있는 기술이 개발되었는데, 이곳에서도 그걸 사진이라 불렀다.
때문에 아카데미 시절의 나와 제이크의 모습이 남겨져 있는 건 그림이 아니라 사진이었다.
“뭐야, 제이. 네 방에 너와 내가 찍었던 사진들이 보이지 않아서 그냥 잘 보관하고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알고 보니 연구실에 걸어두고 있었구나?”
내 장난스러운 물음에 제이크가 살짝 민망해하며 답했다.
“……그래. 사실 요즘은 공작저의 내 방 옆에 마련한 개인 연구실을 더 자주 쓰는 것 같긴 한데, 그동안은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는 했거든. 자주 볼 수 있는 곳에 걸어두고 싶었어. 볼 때마다 힘이 나니까.”
제이크는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아하, 그랬구나. 어쩐지. 나도 자주 보려고 내 침실 벽에 걸어뒀거든. 이제 가게를 열면 거기에도 몇 점 놔둘까 싶어.”
이윽고 나는 제이크와 연구실을 구경하다 말고 카우치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던 도중,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나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아침 식사를 하지 않았거든.”
오늘 조금 늦게 일어난 탓도 있었고, 곧바로 제이크와 외출하느라 식사할 때를 놓치고 말았다.
원래 내가 식사 시간을 놓치는 사람은 아닌데 말이다.
물론 디저트 가게는 들렀지만, 디저트로는 식사를 대신할 수 없다.
제이크는 그런 내 모습을 귀엽다는 듯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그럼 우리 같이 식사하러 가자. 마탑 내에 레스토랑이 있어.”
“정말? 어서 가자!”
나는 화색을 띠며 제이크의 손을 잡고 일어났다.
* * *
잠시 후, 레스토랑에 도착한 나는 또다시 신기함에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탑의 레스토랑은 최상층에 위치해 있다.
그 말은 곧, 높은 산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듯 전망이 끝내준다는 이야기다.
‘옆에 구름이 떠다니는데?’
게다가 어쩐지 점심시간인데도 손님이 드물었다.
거의 제이크와 나, 단둘만 식사하는 수준이었다.
알고 보니 대부분의 마법사는 식당에 오기보다는 소환진을 이용해 제 개인 연구실로 식사를 배달시켜 먹는다고 한다.
‘하긴, 마법사 중 대다수가 개인적으로 행동하는 걸 좋아한다고 했으니까.’
그보다 문득 걱정되었다.
‘간혹 연구에만 몰두하는 마법사들은 끼니도 몇 차례 거르고 일만 한다고 하던데, 혹시 제이크도 그러는 건 아니겠지?’
노파심에 물어보았더니 다행히도 제이크는 자신은 절대로 그러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난 미르 네가 걱정할 만한 일은 절대로 하지 않으니까.”
아, 이유가 나 때문이었어?
새삼 제이크가 그동안 나를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는 게 실감 났다.
식사를 마친 후, 나는 제이크와 함께 레스토랑 밖에 있는 도넛형 테라스에서 산책을 하기로 했다.
역시나 이곳엔 우리뿐이었고, 차가운 공기가 우릴 반겼다.
테라스를 한 바퀴 돌 즈음, 처음엔 살짝 떨어져 있던 우리 사이의 거리는 손끝이 스칠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그 이후로도 대화하며 몇 바퀴를 더 돌았을까?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새 나는 제이크와 자연스레 손을 잡고 있었다.
친구 사이일 때도 손을 잡는 것 정도는 가볍게 했었지만, 이제는 어쩐지 좀 특별하게 느껴졌다.
“저기, 제이크.”
나직이 제이크의 이름을 부르자 그가 멈춰 섰다.
“왜 그래? 미르.”
“내가 오늘 아침에 말했던 고민 말인데.”
“아, 우리 미래에 대한 고민?”
“응.”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말인데, 오늘 하루 너와 이렇게 시간을 보내면서 어느 정도 생각이 정리된 것 같아. 정확한 답은 아니더라도 대충은 알 것 같아.”
“그래?”
제이크가 흥미롭다는 듯 되물었다.
“미르 네가 생각하는 우리의 미래가 어떨 것 같은데?”
“음, 그러니까…….”
대답을 내놓기 전, 나는 천천히 상기했다.
오늘 제이크를 처음 마주했을 때의 그 미묘한 떨림을.
우리 사이에는 어울리지 않다 못해 다소 느끼하게까지 느껴지는 ‘레이디’라는 호칭을.
사소하지만 갑작스러운 접촉에 이전보다 배는 더 콩닥거리는 심장을.
우리가 함께한 시간만큼이나 어느새 많은 게 비슷해져 버린 취향과 습관들을.
우리 둘을 엮고 있는 무수한 추억들이 담긴 기억을.
그 모든 것들이 이미 우리 사이를 정의하고 있었다.
우리는 떼어놓으려 해도 떼어놓을 수 없는 사이라는 걸.
누구보다 편한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무척이나 긴장되고 설렘을 느끼는 사이라는 걸.
“제이크, 우린 어제부로 연인이 되었어.”
“응.”
“하지만 여전히 서로에게 소중하고 좋은 친구이기도 해. 너도 그렇지?”
“물론이지. 당연해.”
제이크의 확언을 들은 나는 미소 지었다.
우리는 지금 친구와 연인 사이, 그 어딘가쯤에 있다.
“그래서 내 생각엔 우리는 아마 친구 같은 연인이 될 것 같아. 미래엔 친구 같은 부부가 될지도 모르겠네.”
“……!”
제이크의 시선을 마주하며 나는 생각했다.
예전에 한 편의 강렬한 로맨스 소설 같은 사랑을 꿈꿨던 적이 있다.
하룻밤 불장난 같은 사랑이 얼마나 아찔할지 궁금했던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사랑인 줄도 모르게 너무도 오래 내 곁에 있어 준 네가 좋았다.
불이 꺼지지도 거세게 타오르지도 않고, 주변을 온기로 덥혀주는 모닥불 같은 그가 좋았다.
한결같은 내 옆에 한결같이 있어 주는 네가 앞으로도 나와 함께라면 얼마나 좋을까.
소원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다른 건 바라지도 않는다.
“나는 네가 좋아, 제이크. 언제나 그래왔듯이……. 응?”
말을 잇기가 무섭게 제이크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이제는 어릴 때와 다르게 나보다 키가 훌쩍 커버린 그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고 중얼거렸다.
“나도, 에미르. 정말…… 좋아해.”
“응, 그러니까 우리 앞으로도 함께 있자. 계속 이렇게 같이 있자. 처음부터 이랬던 것처럼.”
“……응.”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서로의 온기가 따뜻했다.
* * *
시간은 이후로도 흘러, 어느새 소품샵을 개업하는 날이 되었다.
가게는 모든 준비가 완료되어 문을 열기만 하면 되었다.
사교계에서 친분을 나눈 몇몇 이들에게 개업 기념 파티 초대장을 보낸 상태였는데, 사실 그 이전에 따로 기념식을 작게 열기로 했다.
당연하게도 가족들과 유치원 친구들을 불러서 하는 기념식이었다.
“자, 이제 제 손을 붙잡고 내리실까요, 레이디.”
이제 제이크는 종종 저런 멘트를 자연스럽게 하고는 한다.
예전과는 다른 다소 능글맞고 뻔뻔한 모습이지만 싫지 않았다.
나는 당황하지 않고 도리어 대꾸했다.
“뭐야, 제이. 날 에스코트 하려면 제대로 된 흉내를 내란 말이야. 레이디 말고 마이 레이디라고 부르세요, 신사님.”
“아하하, 알겠습니다, 마이 레이디. 내리시죠.”
“푸훗.”
유치한 대화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여기야, 내 가게.”
이윽고 마차에서 내린 나는 내가 좋아하는 초록빛의 간판을 바라보며 뿌듯하게 미소 지었다.
“가게를 여는 게 미르 네 소원 중 하나였다고 했지. 소원을 이룬 것 축하해.”
“고마워. 나 지금 너무 기뻐.”
나는 미소 지으며 제이크를 끌어안았다.
“……!”
나는 갑작스러운 포옹에 당황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내 곁에 네가 있어서 더 기쁜 거 알지?”
하지만 제이크의 대답을 듣기도 전, 어디선가 다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런, 기껏 축하해 주려고 왔더니 대낮부터 두 연인의 포옹 장면이나 봐야 한다는 말인가?”
“헉, 니나이나 전하!”
고개를 들어보니 니나이나의 뾰로통한 얼굴이 있었다.
대체 언제 도착한 거지?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황녀를 손님으로 초대했으면 예를 갖추도록 해라. 닭살 돋는 장면 따위는 보고 싶지 않다. 그리고 이건, 내가 친히 주는 약소한 개업 기념 선물이다.”
니나이나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깥에서 황궁 시종들이 크고 작은 박스들을 들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
전혀 약소하지 않았다. 아마 반어법인 모양이다.
나와 제이크, 니나이나는 하나둘씩 도착하는 다른 친구들을 맞이했다.
그들이 가지고 온 선물로 꽉 차버린 아담한 가게를 보고서 나는 그만 헛웃음을 터뜨렸다.
내 친구들은 너무 통이 커서 문제다.
싫다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이제 모두 모였으니 기념식을 시작해 볼까.’
나는 작게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자, 모두들 제 소품샵 개업 기념식에 와주셔서 감사해요!”
나는 그들의 축하를 받으며 환히 웃었다.
* * *
Q: 세드릭 경, 에미르 영애와 제이크 영식이 교제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어떠셨습니까?
A: 시끄럽군. 말 걸지 마.
Q: 예?
A: 그것에 관해서는 내게 묻지 말라는 뜻이다. 알아들어? 안 그래도 그 애 생각만 하면 가슴이 아프단 말이다. 이제 겨우 잊어보려 하는데 아주 남의 상처를 들쑤시는군.
Q: 그, 그렇다 하시면 역시!
A: 그래, 젠장. 그 애는 내 첫사랑이었다고.
Q: 경. 실례지만, 혹시 지금도……?
A: 그것까지 네게 알려주고 싶지는 않군. 꺼져.
-세드릭 베드몬과의 인터뷰 中-
* * *
날씨가 유독 화창한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제1기 제국 유치원 동창회가 열리는 날이기도 했다.
뭐, 이름은 거창하지만 그냥 친구들 사이의 작은 소모임이다.
물론 그 안의 구성원들이 제국을 비롯해 왕국에서도 내로라하는 이들이었다는 점이 조금 특징이지만.
여느 때와 같이 각자의 이야기를 하며 회포를 풀어놓는 티타임을 가지다 말고, 세드릭은 문득 에미르와 제이크 사이의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불과 며칠 전, 데뷔탕트에서 마주했을 때만 해도 평소와 같았는데 며칠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세드릭은 직감적으로 둘 사이의 관계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다는 걸 눈치채고 입을 열려 했다.
“여러분, 사실 오늘은 제게 꼭 해야만 하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어요.”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선수를 가로챈 이가 있었다.
바로 에미르였다.
에미르는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헛기침을 하며 운을 뗐다.
“중요한 이야기? 무슨 이야긴데?”
“말해봐.”
다들 여상한 태도로 대꾸하는 와중, 세드릭 혼자만이 바짝 긴장했다.
그리고 이윽고 들려온 말.
“제이크와 저, 정식으로 교제하기로 했거든요.”
에미르는 그렇게 말하며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화답하듯 제이크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꼭 붙잡았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
역시나였다.
이미 예상했던 결과였다.
언젠가 이런 결말이 날 거라고 어렴풋이 생각해 왔었다.
“그게 정말이에요?”
“오……. 에미르 영애, 제이크 영식. 축하하네.”
“이런 중요한 이야기를 진즉에 하지 않고.”
하지만 어쩐지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세드릭만은 아무런 말도 쉬이 하지 못했다.
평소라면 장난스럽게 진짜냐고, 농담하는 거 아니냐고 질문했을 테지만 그런 말을 건넬 수가 없다.
“…….”
니콜라스처럼 축하한다는 말을 건네보고 싶지만 입은 제 생각과 다르게 떨어지지 않았다.
“처음 말하는 이야기에요. 아직 부모님들도 모르세요.”
하지만 저렇게 말하며 기쁘게 웃는 에미르를 보고 있으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이대로 표정이 굳어진 채로 있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세드릭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 올려 어색하게 웃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세드릭은 내내 자리에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 돌아와야만 했다.
* * *
오로지 세드릭 혼자뿐인 그의 침실 안.
조명도 켜지 않은데다 두꺼운 암막 커튼으로 창마저 가려놓아 방 안은 어둡고 외롭기 그지없었다.
고요한 정적 속에 세드릭은 제 침대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린 채 죽은 듯 누워 있었다.
“세드릭이 왜 저러는지 알고 있나, 세르반?”
“모르겠는데요, 형님. 아까 기분 좋게 친우들을 만나러 간다고 외출하더니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돌아와서부터 내내 제 방에 틀어박혀 있군요.”
“무슨 일이 있었을지 정말 궁금하구나. 웬만해서는 오후에 있는 검술 훈련에 절대로 빠지지 않는 세드릭이 웬일로 훈련도 취소했으니 말이다.”
저 멀리에서 제 두 형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드릭은 여전히 아무런 말도,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을 감고 살포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예전, 그가 지금의 키의 절반이었을 때.
작고 어리던 그의 곁에 있던 에미르를 생각했다.
‘넌 내게 많은 것을 줬어. 에미르. 하마터면 모르고 살았을 뻔한 많은 감정도 행복도 알게 해줬지.’
폴리가 날아와 세드릭의 머리맡에 살포시 앉았다.
폴리는 그를 위로하듯이 부드러운 날개 끝으로 그를 톡톡 두드렸다.
그에 세드릭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 폴리. 너를 살려준 것도, 나와 계속 이렇게 함께할 수 있도록 도와준 것도 그 애였어.”
“주인, 슬픈 거야? 주인의 눈가에 눈물이 흐르고 있어.”
“……슬프냐고? 그런 것 같다. 아마도.”
폴리가 조심스레 질문했고, 세드릭은 대답과 동시에 소매로 대충 눈가를 훔친 후, 고개를 베개에 푹 묻었다.
그리고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후회 중이야.”
“무엇을 후회하는 건데, 주인?”
“……일찍부터 내가 그 애에게 많은 걸 해줬더라면 뭔가가 달라졌을까 후회하고, 이전에 한 번이라도 마음을 고백해 볼 걸, 하고 후회 중인 거다.”
“고백?”
“그래. 하지만 지금은 너무 늦어버렸지.”
그는 어쩌면 제게 마지막 기회였을지도 모르는 데뷔탕트 때의 자신을 떠올려냈다.
세드릭은 마수 소탕을 마친 전날 밤부터 전속력으로 말을 타고 달려왔다.
중간에 말이 지쳐 다른 마을에 제 애마를 맡겨두고 말을 바꿔 타고 올 정도로 신속히 돌아왔다.
평소라면 그가 아끼는 애마 이외에 다른 말을 타느니, 차라리 걸어가거나 느긋이 일정을 미룰 테지만, 그렇게까지 서두른 건 전부 에미르의 데뷔탕트 연회에 참가하기 위해서였다.
“후우, 아슬아슬하게 시간을 맞추겠네.”
세드릭은 정오가 넘어 수도에 도착해서야 겨우 속도를 늦추며 숨을 골랐다.
하지만 그때 마침 길가에 있는 꽃집을 보고, 그는 뒤늦게 자신이 잊어버린 게 무엇인지 깨달았다.
하마터면 꽃다발도 까먹을 뻔했지 뭔가.
데뷔탕트 연회에 아슬아슬하게 늦어버린 건 전부 꽃을 고르느라 시간이 가버린 탓이었다.
‘이거면 되려나.’
하지만 결국 고르고 고른 꽃다발은 흔하디흔한 분홍색 장미꽃이었다.
혹시라도 꽃에 자신의 숨겨놓은 사심이 묻어날까 봐 아무 마음도 담지 않은 척 평범한 꽃을 건넬 수밖에 없었다.
아마 에미르는 그를 ‘감정을 드러내는 데 몹시도 솔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도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다.
에미르의 앞에서만 그렇지 않을 뿐이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아마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을 때쯤이었던 것 같다.
어느 순간 자신이 에미르를 친구 이상으로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세드릭은 몹시도 당황스러웠다.
‘내가 걔를? 말도 안 돼. 절대 그렇지 않아.’
처음에는 자신의 그 마음을 부정했지만 이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언제나 솔직했던 그가 그 마음만큼은 솔직하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에미르의 마음이 자신에게 있지 않고, 언제나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너무나 쉽게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왜 제이크 녀석을 제치고 에미르의 1순위가 될 수 없는 걸까.’
한 번은 그렇게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도저히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세드릭은 몇 걸음 뒤에서 제이크와 에미르의 모습을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리고 데뷔탕트 기념으로 에미르가 자신에게 12년 전에 얻은 소원권을 사용해 소원을 빌겠다고 했을 때.
“……그래. 소원이 뭐야?”
“제 소원은요.”
그 순간, 기대하지 않았다고 말하면 솔직히 거짓말이다.
무슨 소원을 빌어도 괜찮으니 어떤 것이든 온 힘을 다해 들어주고 말 것이다, 라고 생각했었다.
혹시라도 그렇게 하면 한 번이라도 자신을 더 돌아봐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어떤 것이든 각오하고 있던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에미르에게서 들려온 대답은 예상외였다.
자신이 정의로운 기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니.
그게 오직 전부라니.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정의로운 기사……. 내가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너 내 성격 몰라? 난 못된 놈이라고…….”
게다가 세드릭은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소원을 이뤄줄 자신이 없었다.
그는 자조하며 눈물을 흘렸다.
“네, 알아요. 저는 알고 있어요. 세드릭 님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
하지만 이윽고 에미르가 하는 말을 듣고, 그는 알아채고 말았다.
그녀가 정말로 자신을 믿고 있다는 것을.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되리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참으로 에미르다운 소원이 아닌가.
그제야 세드릭은 깨달았다.
‘그래, 네 바람이라면 못 할 것도 없지.’
이미 그녀가 그 말을 꺼냈을 때부터, 자신의 소명은 그렇게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걸.
자신이 그렇게 살아 에미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정의로움도 기꺼이 수호할 수 있을 거라고.
* * *
그는 그 이후로도 하지 못했다.
축하한다는 말, 그 한마디를.
“에미르, 약혼 축하한다.”
“세드릭, 축하해 줘서 정말 고마워요.”
그가 담담한 표정과 말투로 축하를 건넨 건 그로부터 한참이나 지난 시점에서였다.
축하 인사를 건네고 뒤돌아선 세드릭은 아무도 보지 못할 정도로 살짝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아마 평생 모를 것이었다.
그 축하한다는 말 한마디를 하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망설였는지를.
그 안에 말하지 못한, 앞으로도 말하지 않을 수많은 감정이 담겨 있다는 것도.
‘괜찮아. 에미르, 이젠 너만 행복하다면 나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이대로 네 곁에 친구로 남을 수 있어 좋을 뿐이다.’
* * *
Q: 니나이나 황녀 전하, 에미르 영애와 제이크 영식이 교제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어떠셨습니까?
A: 흠, 글쎄? 좀 놀랐던 것도 같아.
Q: 어떤 점에서 놀라셨습니까?
A: 그야 당연히 그 둘은 결혼부터 할 줄 알았으니까. 어릴 때부터 사이가 좀 유별났어야지. 아, 그보다 너. 자꾸 나더러 캐묻기만 하지 말고 대답 좀 해봐.
Q: 네? 어떤 대답을 말씀이신지?
A: 며칠 후에 에미르의 소품샵 개업 기념식이 있어. 무슨 선물을 가져가면 좋을까?
Q: 음……. 정말이지 갑작스러운 질문이군요. 저야 뭐, 에미르 영애님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도 잘 모르고. 친한 친우이신 전하께서 고르신 선물이라면 아무렴 그분의 취향께 잘 맞지 않겠습니까.
A: 역시 그렇겠지? 그럼 전부 다 가져가는 걸로 해야겠어.
-니나이나 클루아 베텔리우드와의 인터뷰 中-
* * *
개업식에 온 니나이나는 가게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조명이나 벽지 같은 인테리어 하나에도 에미르의 취향이 잘 녹아들어 있어 마치 몇 번이고 방문했던 단골 가게처럼 익숙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아쉬움이라고 하면 역시 위치였다.
“아담하고 예쁜 가게네. 그런데 에미르. 왜 하필이면 이곳에 가게를 차린 거지? 가게를 차릴 곳이라면 여기가 아니라도 많잖아? 이를테면 황궁 앞이라든지.”
황궁 앞이었더라면 밥 먹듯이 매일같이 방문했을 텐데, 아쉬움이 컸다.
황녀인 니나이나가 하는 행동이라면 뭐든지 사교계의 새로운 유행이 되고는 했으므로, 보란 듯이 그녀의 가장 친한 친우의 가게를 홍보할 계획이었던 니나이나는 입맛을 살짝 다셨다.
“황궁 앞도 생각해 보지 않은 건 아니지만요. 제이크와 자주 만날 수 있는 곳이 좋아서 이곳으로 정했어요.”
“흐응.”
니나이나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역시 그랬군.’
괜히 이 한산한 거리에 가게를 차린 게 아니었다.
이윽고 그녀는 창문 너머로 바로 보이는 마탑 주변의 장벽을 바라보았다.
순간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라, 니나이나는 픽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뭐, 상관없지.”
“네? 어떤 게 상관없는데요?”
에미르의 물음에 니나이나는 제 검지를 붉은 입술에 쉿 대며 대답했다.
“비밀.”
사실은 지금 이 가게 주변의 한산한 건물 여러 채를 사들여, 그 건물들에 여러 가게를 입주시킬 작정이었다.
에미르는 어린 영애들부터 나이 지긋한 노부인들까지 모두 아우를 수 있는 가게를 만들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그러니 주변 상권의 업종이 겹치지 않게 다양하게 꾸미면 자연스레 사람이 몰려 에미르의 가게도 번창할 수 있을 터다.
지금은 아무래도 마탑을 제외하고서는 별 시설이 없는지라, 애초에 손님이 오기 어려운 구조였다.
“후후.”
손님이 많아져 에미르가 기뻐할 걸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물론 손님이 너무 많아도 에미르가 바빠져 자신과 자주 만나지 못할 테니, 적당한 수준으로 해줘야겠지.
“전하, 왜 그렇게 웃으세요?”
“아이참, 비밀이라니까.”
그런 그녀의 음흉한(?) 계략을 모르는 에미르는 어리둥절해할 뿐이었다.
* * *
가게 안쪽에는 작은 작업실이 있다.
이곳 작업실에서 물건을 제작하는 모양이다.
은은한 조명 아래 돌돌 말린 천 뭉치들과 재봉틀 같은 도구가 보였다.
문득 니나이나는 궁금한 게 생겨 에미르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에미르, 가게에서 판매할 물건은 전부 네가 손수 만드는 거니?”
“아뇨, 몇몇 소품은 제가 직접 만들겠지만 다른 수제 공방의 물건들을 들여와서 팔기도 하려고요.”
“흐음, 그렇구나. 그래서 직접 만들 물건은 뭔데?”
“음, 일단은 목베개부터 시작해 보려고요.”
에미르가 말한 생소한 단어에 니나이나가 고개를 갸웃했다.
“목베개? 그게 뭐지? 처음 들어보는 물건인데. 나무로 만든 베개라는 거니?”
“으음, 제가 처음 만든 물건이라서 지금까지 들어보지 못하신 것도 당연해요. 목베개는요, 일반 베개처럼 천과 솜으로 만들어요. 하지만 그보다는 크기가 작겠죠.”
니나이나는 에미르의 모호한 설명에 궁금증만 커져갔다.
때마침 작업실 구석 상자를 뒤적이던 에미르가 외쳤다.
“아, 찾았다!”
“무엇을?”
“바로 이거예요. 목베개.”
“으음?”
에미르가 건넨 물건을 본 니나이나는 멈칫했다.
베개라고 해서 흔한 사각형이나 둥근 모양을 생각했건만, 예상을 벗어난 디자인에 도저히 이 물건의 사용법을 예측할 수가 없었다.
마치 고리 모양 도넛을 다섯 조각으로 나눈 것 중 한 조각만 먹어버린 것처럼 생겼다.
“전하께서도 써보실래요? 고운 비단으로 만든 거라 목덜미에 닿아도 거칠지 않고 부드러울 거예요.”
에미르가 건넨 목베개를 얼떨결에 건네받은 니나이나는 목베게를 살펴보다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어떻게…… 쓰는 거지?”
“아차! 제가 미처 사용법을 안 알려 드렸네요. 이건 그러니까요, 이렇게! 목에 끼워서 쓰는 거예요.”
“……!”
에미르는 까치발까지 들어가며 직접 니나이나의 목에 목베개를 끼워 주었다.
니나이나는 목 주변에 닿아오는 푹신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깜짝 놀랐다.
“목걸이처럼 걸고 다니는 거야?”
“목걸이라……. 아예 틀린 말씀은 아니네요. 왜냐하면 이 목베개는 잘 때 침대에서 쓰기보다는 평소에 앉아서 책을 볼 때, 마차에 타 장거리를 이동해야 할 때 쓰면 더욱 편안하거든요.”
이 물건의 예상치 못한 좋은 용도를 알게 된 니나이나가 감탄했다.
“오……. 정말 그렇겠구나? 하긴, 나도 서재에서 책을 오랜 시간 볼 때 목을 너무 오랫동안 기울이고 있어서 그런지 가끔 어깨와 목이 굳어 뻐근해지고는 했어.”
뿐만 아니라 간혹 마차로 먼 곳까지 이동할 일이 생길 때도 불편함이 많았다.
의자에 누워 있자니 아무도 안 보더라도 황족의 품위를 지켜야 하니 안 될 일이고, 그렇다고 꼿꼿이 허리를 펴고 있자니 불편하고 졸릴 때마다 힘들었다.
“이 목베개라면 마차를 타고 가면서도 편하게 잠들 수 있겠어.”
니나이나가 미소 지으며 칭찬했다.
그러자 에미르는 볼을 긁적이며 마주 웃어 보였다.
“사실, 이걸 만들면서도 조금 걱정했어요. 아무래도 생소한 물건이다 보니, 손님들이 좋아해 줄까 싶었거든요. 하지만 전하의 마음에 들었으니 반은 성공했다고 봐도 될 것 같아요.”
“그래. 분명히 잘될 거야. 이렇게 편안하면서도 휴대성 좋은 베개는 처음 보니까.”
니나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 목베개, 열 개 정도 주문을 예약해도 될까? 내 시녀들과 호위 기사들에게 선물해 주고 싶은데. 아바마마와 어마마마, 그리고 오라버니의 것도 함께.”
“아, 물론이죠. 당연히 돼요. 황녀 전하께서 제 첫 번째 고객이신 셈이네요.”
“그렇게 되네.”
“전하의 것은 특별히 신경 써서 더 어울리는 디자인으로 따로 만들어서 새로 보내드릴게요.”
때마침 그렇게 말하던 에미르가 손뼉을 짝 치며 무언가가 또 생각났다는 듯 등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제가 전하께서 오시면 드리려고 만들었던 게 하나 더 있는데. 한번 보실래요?”
“응? 날 주려고 만들었다고?”
“네. 맞아요. 리본이에요. 머리에도, 옷에도 장식할 수 있게 적당한 길이로 만들었어요.”
에미르는 니나이나에게 색색의 리본을 건넸다.
니나이나는 그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태양처럼 붉은색의 리본을 집어 들었다.
“이거, 지금 해볼래. 거울 좀 줄 수 있을까?”
“거울 여기 있어요.”
니나이나는 풍성히 늘어뜨린 검은 머리카락을 모아 리본을 묶고 싶은지 열심히 손을 움직였다.
하지만 시녀의 도움 없이 스스로 뒷머리를 리본으로 묶기엔 무리가 있었다.
결국 그 광경을 지켜보던 에미르가 나섰다.
“제가 도와드릴게요.”
“고마워.”
에미르는 재빠른 손길로 니나이나의 머리에 리본을 묶었다.
결 좋은 흑발이 그녀의 손끝에서 마치 실크처럼 찰랑였다.
“다 됐어요. 어떠세요?”
에미르는 거울을 두 개 사용해서 니나이나에게 그녀의 뒷모습을 보여주었다.
니나이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최고야. 몹시 마음에 들어.”
“다행이네요. 칭찬 감사해요.”
“그런데, 네 건 없어? 에미르 너도 자주 머리에 리본을 묶고 다니잖아.”
“아, 제 거라면 여기 있는데…….”
에미르는 한쪽 책상에 놓인 리본을 가리켰다.
그러자 니나이나는 흔쾌히 그 리본을 집어 들며 말했다.
“우리 똑같은 리본을 묶자. 어때? 우리의 리본이 네가 만든 거라고 사교계에서 소문나면 분명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거야. 네 건 내가 묶어줄게.”
“네? 전하께서 직접요?”
“왜, 내 솜씨가 영 안 미덥니? 걱정 마. 너만큼은 아니더라도 제법 잘하니까.”
이윽고 니나이나는 에미르의 머리에도 똑같은 리본 장식을 해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그녀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사교계의 한 살롱이 주최하는 다과회가 열렸다.
아직 미혼의 영애들이 주도하는 살롱이지만, 다들 권세 가문의 여식들이니만큼 이 살롱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기로 유명했다.
하지만 오늘 이 다과회만큼은 살롱 멤버 외에도 많은 가문의 영애들을 초대해 개최하였다.
그 이유는 곧 살롱의 멤버가 되는 영애들을 다른 영애들로 하여금 선망하게 하고 많은 추종자가 생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많은 이들이 들어가고 싶어 하는 모임일수록 사교계에서 영향력이 생기고, 많은 유행을 퍼뜨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 이 다과회에 뜻밖의 손님이 참석했다.
바로 니나이나였다.
“어머, 웬일이에요. 황녀 전하께서 모임을 다 참석하셨네요?”
“호호, 저희 살롱의 다과회가 전하께서도 오실 만큼 품격 있다는 뜻 아니겠어요?”
살롱 멤버들의 화색 어린 얼굴을 바라보던 니나이나는 이내 작게 웃었다.
물론 그들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오늘 이곳에 온 진짜 목적은 에미르의 물건들을 널리 유행시키기 위함이었다.
‘이 살롱에서 물건을 한번 선보이면, 그 어떤 때보다도 빠르게 퍼져나갈 게 분명하지.’
이윽고 다과회장인 정원 한구석의 휴식처인 선베드로 이동한 니나이나는 다소 무심해 보이는 얼굴로 시녀에게 목베개를 가져오게 했다.
목베개를 끼고 한결 편안해진 자세로 선베드에 반쯤 기대 누운 니나이나를 흘끔흘끔 바라보던 영애들이 슬금슬금 다가와 묻기 시작했다.
“전하, 처음 보는 물건인데 이것은 이름이 무엇인가요?”
“어디에 쓰는 건지 궁금해요!”
니나이나는 사뭇 우아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이거? 목베개라는 물건인데.”
“목베개……? 오,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네요.”
“다른 왕국에서 수입한 물건인 건가요? 처음 봐요.”
“아니면 혹시 새로운 장신구인가요, 전하?”
영애들이 신기하다는 듯 니나이나의 목덜미에 걸린 폭신하면서도 부드러워 보이는 목베개를 바라보았다.
“장신구는 아니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것처럼, 목에 끼운 채로 간단하게 쓸 수 있는 베개야.”
“……!”
“그게 정말이에요? 우와, 신기해요!”
영애들의 눈빛은 새로운 물건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니나이나는 그들에게 목베개에 대한 사용법을 간단하게 설명해 주었다.
“자, 한 번씩 만져봐도 좋아.”
“우와! 촉감이 정말 좋아요.”
“저도 전하처럼 이 목베개라는 물건이 갖고 싶네요. 아아, 하나쯤 가지고 다니면 정말 편할 것 같은데.”
“대체 이런 물건을 만든 멋진 디자이너가 누굴까요? 역시 전하의 전속 디자이너겠죠?”
당연하다는 듯 묻는 한 영애에게, 니나이나는 회심의 답변을 했다.
“아니.”
“네? 그럼 대체 누가 이런 물건을?”
“내 오랜 친우인 에미르 영애가 이번에 마탑 앞에 작은 가게를 열었어. 아마, 소품샵이랬던가?”
니나이나가 운을 떼자 그들 중 몇몇 영애가 자신들도 알고 있다는 듯 말을 보탰다.
“아, 에미르 영애의 가게라면 저도 알아요!”
“저도요. 얼마 전에 마차를 타고 지나가다 보았는데, 작고 아기자기한 물건들이 많아 한 번쯤 구경하러 가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왜 갑자기 여기서 에미르의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라고 생각하는 듯한 영애들의 의문 어린 표정을 보며 니나이나가 풋 웃었다.
“후후, 그래. 영애들도 알고 있었구나. 다들 빠른걸. 이 목베개라는 물건은 다름이 아니라 에미르 영애가 만든 거야. 가게에서 판매하기 전에 시범 삼아 만든 걸 내게 선물해 줬지.”
그녀의 말에 모두가 술렁였다.
“정말요? 에미르 영애께서 직접 만든 물건이라니 놀라운데요. 어쩜 이런 신기한 아이디어를 다 내다니.”
“영애께서 손재주가 좋다는 건 얼핏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이윽고 감탄하던 이들이 하나둘씩 박수를 치며 중얼거렸다.
“어머, 저도 목베개를 주문하고 싶어졌어요. 내일 에미르 영애의 가게에 가야겠네요.”
“저도요, 저도요. 저는 오늘 다과회가 끝나는 길에 들르겠어요.”
어느새 다과회장 안은 니나이나가 하고 온 목베개와 에미르가 새로 차린 소품샵에 대한 화제로 들썩이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던 니나이나는 이내 찻잔을 기울이며 보이지 않게 씨익 미소를 지었다.
‘성공했어, 에미르.’
* * *
‘요즘 왜 이렇게 장사가 잘되지? 가게를 연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마감 시간이 거의 다 된 저녁인데도 여전히 손님이 끊이지 않는 가게 내부를 바라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님이 붐비는 건 정말 환영할 일이지만, 기껏 제이크와 가까운 곳으로 왔는데도 바빠서 자주 만나지 못하는 건 조금 아쉽긴 하네.’
사실 마탑 앞에 자리를 잡았을 때부터 장사가 불티나게 잘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았더랬다.
그냥 처음엔 친분 있는 이들 위주로 소소하게 단골이 생기고 그 단골들이 홍보를 해주는 식으로 그렇게 조금씩 손님을 늘려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건 정말이지 예상을 벗어나도 한참 벗어난 호황이었다.
가게를 준비하느라 몇 달 전부터 바빴던 탓에 모임이나 연회에는 일절 참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얼핏 소문으로 듣기에는 니나이나가 다과회에서 내가 만든 물건들을 선보였다고 한 것 같았다.
‘그럼 역시 이 인기는 니나이나 전하 덕분인가?’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생각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니까.’
나중에 니나이나에게 소소하게 보답이라도 해 줘야 겠다.
이윽고 나는 마지막 손님에게 목베개 예약을 받는 걸 끝으로 영업 종료 간판을 걸었다.
“이런, 늦었군요.”
“저희 아가씨께서 이 가게의 리본을 꼭 구매하고 싶다고 하셨는데……. 아쉬워라. 월요일에 다시 와야겠어요.”
정리를 마친 이후에도 간혹 영업시간을 모르고 온 손님들이 있어,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그들을 돌려보내야 했다.
“후우, 오늘 장사는 여기서 끝!”
카운터와 바닥의 먼지 한 톨까지 꼼꼼히 닦은 나는 기지개를 쭉 켜며 하루의 마지막을 기념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북적이던 가게가 허전하니 조금 아쉬웠다.
‘괜히 쓸쓸해지는걸. 하지만 뭐, 손님들은 다음에도 또 올 테니까.’
내일과 모레는 가게 정기 휴무일이다.
오랜만에 부모님과 함께 단란한 가족 여행이라도 가볼까 싶었지만…….
이윽고 나는 두 분께서 이미 일정이 있으시다는 걸 깨닫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엄마와 아빠가 건강하셔서 다행이야. 열정만큼은 아직도 30대 같으시다니까.’
일찍이 후계자에게 가주직을 넘겨주고 노후를 보내는 귀족들이 있는가 하면, 나이가 들어도 정무에 매진하며 건재한 귀족들이 있다.
그리고 우리 부모님은 후자다.
‘내가 후작 자리를 물려받으려면 한참이나 걸릴 거야. 덕분에 이렇게 가게를 차릴 수 있게 되어서 좋지만 말이야.’
나는 외동딸이자 유일한 후계자로서, 일찍이 미래 후작이 되기 위해 가문 운영에 대한 것을 배워왔다.
아카데미를 다니면서 틈틈이 후계자 수업까지 받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던 지난날이 떠올랐다.
하지만 아직 후작이 되려면 한참이나 남았기에, 그사이 소소한 꿈을 한번 이뤄보기로 한 것이었다.
‘그보다 이번 휴무가 끝나면 슬슬 직원을 좀 뽑아야 할까 봐.’
당장은 기성품을 제외한 수제 물건을 주문 제작만 받고 있으니 나 혼자서도 충분했다.
비록 시일이 오래 걸리는 단점이 있었으나, 그런 단점에도 불구하고 많은 손님이 예약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주문 제작보다는 미리 재고를 마련해서 손님들로 하여금 직접 보고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더 좋을 것 같아 고민이 되었다.
‘하여간 요즘의 난, 온통 가게 운영에 대한 생각뿐이네.’
이런 나 스스로가 조금은 기특했지만 그만큼 다른 데에는 다소 신경을 덜 쓰게 되는 것 같아 아쉬움이 생겼다.
제이크와도 시간을 더 많이 보내고 싶은데 말이다.
“에미르. 데리러 왔어.”
“아, 제이크!”
그때 마침 제이크가 왔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제이크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도 잘 있었어?”
“그럼, 물론이지. 장사도 잘돼. 손님 많은 걸 네가 낮에 와서 봐야 하는데.”
“알고 있어. 마탑에서도 지나가던 동료들이 네 가게 이야기를 하던데. 새로 생긴 가게인데 인기가 많다고. 질투 나게.”
어쩐지 제이크는 뒤에 덧붙인 말을 하면서 조금 시무룩해지는 것 같았지만 내 관심사는 그의 표정보다 다른 쪽에 있었다.
“뭐? 정말이야? 마법사들에게도 내 가게가 입소문이 퍼졌다니. 놀라워라.”
마법사들은 자신의 관심사 외의 다른 것에는 좀처럼 관심이 없다.
그리고 그 관심사란 마법 연구가 보통이었다.
내가 아카데미에서 본 마법사들 대부분이 그랬고, 유일한 예외는 제이크뿐이었다.
그런 마법사들에게까지 소문이 날 정도면 아무래도 정말 대박 난 게 맞는 것 같다.
“뭐, 네가 기쁘다면 그걸로 됐어. 그보다 미르. 내일 가게 쉬는 날이지?”
“응, 맞아.”
“그럼 우리 함께 여행 가지 않을래?”
제이크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여행이라고? 어디로?”
“실은, 바닷가 근처에 있는 마력석 광산에서 주문한 마력석을 가져와야 하거든.”
이윽고 그가 싱긋 웃으며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하지만 그건 사실 핑계고, 너와 함께 있고 싶어서 그래.”
노골적인 속내였지만 사실 내 속내도 그와 별다를 게 없었다.
나는 살짝 고민하는 척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좋아. 가자. 그런데 텔레포트 마법진을 써서 당일에 다녀오는 여행인 거야?”
제국의 모든 영지에는 서로 텔레포트를 할 수 있게 만들어진 마법진이 최소한 한 개씩 있다.
덕분에 아무리 먼 거리라도 짧은 시간 내에 이동할 수 있는 게 강점이었다.
하지만 제이크는 머쓱해 보이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그래야 맞는데, 도착할 영지의 텔레포트 마법진이 오류가 나 수리 중이라고 들었어. 그러니 일단은 근처 영지로 텔레포트 한 후, 거기서 마차를 타고 가려고.”
“그래, 그렇게 하자.”
사실 제이크라면 아무리 장거리라도 개인적으로 마법을 써서 어떻게든 다녀올 수 있겠지만, 그런 사사로운 데에 마력을 소모하는 건 아까운 일이니 나는 그의 말대로 하기로 했다.
‘제이크와 마차 여행이라니 계속 같이 있을 수 있겠네. 좋다.’
솔직한 마음은 이거였지만.
이윽고 다음 날이 되었다.
제이크는 일찍이 나를 데리러 왔고, 나는 편한 여행용 복장에 작은 트렁크 가방에 짐까지 챙겨 마차에 탔다.
“여행을 가는 것도 꽤나 오랜만이네.”
“맞아, 그동안은 우리 둘 다 이런저런 일로 바빴으니까.”
우리는 소소한 대화를 나누며, 순조로운 여행을 시작했다.
수도를 벗어나자 이윽고 싱그러운 숲이 우리를 반겼다.
“저기 봐, 우리가 예전에 아카데미 다닐 때 다 같이 여행 갔던 곳이네?”
“그러게. 오랜만이다.”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익숙한 풍경들을 바라보며 우리는 도란도란 추억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텔레포트 마법진이 설치되어 있는 장소까지 도착해 있었다.
“저기, 있지. 제이크.”
“왜 그래?”
“마차에 탄 채로 텔레포트 되는 건 몇 번이나 겪어봤지만 정말 신기한 것 같아. 살짝…… 무섭기도 하고.”
전생에서도 이런 기분을 느껴 본 적 있었던 것 같다.
어릴 적 처음 차를 타고 자동 세차장에 갔을 때가 꼭 이랬던가.
지금도 밖에서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게 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웅, 하고 마치 빈공간에서 들려오는 기계음 같은 소리가 마차 주위를 감쌌다.
그러자 제이크가 피식 웃으며 동의했다.
“나도 그래.”
“에이, 넌 마법사잖아.”
“아니, 정말이야. 마법사라고 해서 마법이 늘 친숙하기만 한 건 아닌걸. 하지만 무서워하지는 마. 네 곁에 늘 내가 있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제이크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암흑이었지만 미세한 진동으로 인해 우리가 텔레포트 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문득 농담처럼 대꾸했다.
“마법진에 오류가 생겨서 내가 저 멀리 우주의 바깥으로 떨어져 버려도, 그렇게 말하면서 날 찾아와 줄 거야?”
내 물음에 제이크는 잠시 고민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 혼자 떨어지게 될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어떤 상황에서든 내가 항상 네 손을 잡고 있을 테니까.”
“뭐야, 그건.”
나는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며 깔깔 웃었지만, 그 순간 제이크가 정말로 내 손을 붙잡아 오는 바람에 살짝 고개를 돌렸다.
뺨이 뜨거워졌다.
* * *
텔레포트를 한 후로 몇 시간 동안 다시 마차를 타고 달렸다.
우리는 제이크가 가야 할 마력석 광산 바로 옆 바닷가에 도착했다.
“와, 정말 오랜만에 보는 바다다!”
나는 기뻐하며 저 멀리 수평선과 널따란 해안가를 연신 훑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찔하게 내려오는 햇빛을 계속 보고 있으니 선글라스가 절실해졌다.
그러나 이 세계에 그런 물건이 있을 리가 없으니 나는 손을 비스듬히 내밀어 볕을 가렸다.
문득 생각했다.
선글라스를 만들어 소품가게에서 팔아보면 어떨까 하고.
‘아니, 잠깐 제이크와 여행 와서까지 일 생각을 하면 어떡해?’
이러다 일 중독이 되어버릴 것 같았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제이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마침 마차에서 뒤늦게 내린 제이크 가 내게로 다가와 있었다.
그는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며 중얼거렸다.
“마력석을 거래하기로 한 시간은 4시야. 어디 보자…… 그때까지 3시간이나 남았네. 뭘 하면 좋을까?”
얼핏 고민처럼 들렸지만 실상 눈앞에 새하얀 백사장이 있는데, 답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뭘 하긴. 나와 같이 놀려고 온 거 아니었어?”
나는 장난스레 가방에서 꺼낸 여행용 밀짚모자를 제이크의 머리에 툭 씌우며 대꾸했다.
그는 깜짝 놀라는 척하는가 싶더니 내가 준 모자를 고쳐 썼다.
“미르 네가 챙겨온 거야?”
“응, 당연하지! 이것도 사실 내가 만든 거야. 직접.”
내 말에 제이크는 예상치 못했다는 듯 밀짚모자를 벗어 한번 바라보더니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멋지다. 잘 쓸게.”
“좋아. 그런데 제이, 잠시 망 좀 봐줄 수 있어?”
제이크가 만족스러워하니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키득키득 웃다가 그에게 망을 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그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뭘 하려고?”
그의 표정이 살짝 불안해 보였다.
아마도 내가 이렇게 웃으며 부탁할 때면, 항상 예상치 못한 일을 하고는 해서였겠지.
“별건 아냐. 마차 안에서 옷 좀 갈아입으려고. 따로 얇은 옷을 챙겨왔어. 어제 네가 바닷가에 간다고 할 때부터 해수욕할 생각에 기대가 되더라.”
내가 생글생글 웃으며 대답하니, 제이크가 못 말리겠다는 얼굴로 살짝 고개를 젓다가 미소 지었다.
“그래. 마차 주변을 마법으로 안 보이게 해줄게.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갈아입고 나와.”
“고마워.”
잠시 후, 옷을 주섬주섬 갈아입고 나온 나는 마차 근처의 나무에 뒤돌아 기대 서 있는 제이크를 향해 다가갔다.
“쨘, 어때?”
“……!”
“기억할지는 모르겠는데, 전에 너와 함께 의상실을 갔을 때 샀던 옷이야. 네가 내게 잘 어울린다고 말했던 옷.”
하늘하늘한 하얀색 천은 바닷가에 몹시도 잘 어울렸다.
나는 보란 듯이 제자리에서 빙그르르 한 바퀴 돌아 보였다.
드레스가 내 몸을 따라 바람을 머금고 사뿐히 움직였다.
그런 내 모습을 보던 제이크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런 옷을 입으니 천사 같은걸.”
“고마워, 그런 칭찬은 상상도 못 했는데.”
나는 살짝 주변을 둘러보았다.
비록 인가와 먼 바닷가인지라 사람은 거의 없었지만 말이다.
혹시라도 이런 낯뜨거운 칭찬을 누가 들었을까 봐 겁났다.
‘이런 말은 나만 들어야 해.’
다행히도 지나가는 건 오로지 파도의 쏴아아 하는 소리뿐이었다.
우리는 잠시 시선을 교환한 후, 너나 할 것 없이 곧바로 손을 잡고 바닷가를 따라 걸었다.
“조심해. 날카로운 조개껍데기를 밟을지 몰라.”
백사장 사이로 군데군데 삐져나와 보이는 작고 큰 조각들을 보며 나는 제이크에게 걱정 어린 말을 건넸다.
하지만 그는 별문제 없다는 투로 대답했다.
“그럼 보호 마법을 걸어야겠다. 우리 둘 모두에게.”
“이런 데에 마법을 쓰면 어떡해!”
나는 깜짝 놀라 그렇게 대꾸했지만, 도리어 당연하다는 듯 되묻는 제이크의 말에 설득당하고 말았다.
“이런 데에 쓰라고 있는 거 아니야? 나는 네가 무엇보다 소중한데.”
“……그런가.”
하긴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소중한 건 잃어버리기 전 미리미리 지켜야 하는 법이니까.
제이크에게는 그게 나였고, 나에게는 그게 제이크였다.
“제이크, 잠시 저기 누워볼래?”
그렇게 걷던 도중 나는 키 큰 나무들이 여럿 줄지어 자라 있는 곳을 가리키며 물었다.
“누웠어.”
그러자 제이크는 곧바로 내 말대로 나무 밑 그늘진 곳에 가서 얌전히 누웠다.
두 손까지 잘 모으고.
“이제 뭐 하면 돼?”
“제이크 넌 그냥 가만히 있기만 하면 돼. 내가 모래찜질을 해줄게.”
“모래…… 찜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몇 시간 후 있을 거래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어차피 제이크에게도 갈아입을 옷이 있었다.
정 어려우면 마법으로 오염을 해치워 버리면 되니까 별문제는 없었다.
“믿고 맡겨봐.”
“음…… 알겠어.”
나는 가지런히 누운 제이크의 모양대로 모래를 쌓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리만 쏙 남고 나머지는 꼭 모래 인간처럼 되어버린 형상이 되었다.
“다 된 거야?”
“응. 아니다, 잠깐만 그대로 있어봐.”
뭔가 더 완벽한 데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 마침 주변에 핀 손가락 한 마디만 한 크기의 작은 들꽃이 보였다.
나는 꽃을 두 송이 꺾어 제이크의 뺨에 얹었다.
“쨘, 이렇게 하니까 너무 귀엽다!”
“내가 귀여워?”
“그래, 무척.”
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그러자 제이크가 눈동자만 굴려 나를 빤히 쳐다보다가, 이내 눈을 지그시 감고 중얼거렸다.
“그럼 칭찬해 줘.”
“응? 칭찬? 방금도 해줬잖아?”
“그런 거 말고. 다른 방식으로.”
“다른 방식…… 이라니?”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순간 제이크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는가 싶었다.
그는 여전히 눈을 감은 채 작게 대답했다.
“입술로.”
“뭐, 뭐?”
나는 순간 자리에서 펄쩍 뛸 만큼 깜짝 놀랐다.
그러나 제이크는 굴하지 않고 나를 재촉했다.
“해줘. 어서.”
“……아, 알겠어. 크흠.”
나는 살짝 헛기침을 하고 제이크에게로 조심히 다가가 이마에 살짝 키스하고 곧바로 얼굴을 뗐다.
그러자 잔뜩 기대하고 있던 제이크의 얼굴이 이윽고 실망으로 물들었다.
그가 눈을 슬그머니 뜨고 물었다.
“……음, 겨우 이것뿐이야?”
“여기서 뭘 더 바란 거야. 저, 정 뭔갈 더 하고 싶으면 네가 직접 하던가!”
나는 당황해서 얼떨결에 한 말이었지만, 제이크는 꽤나 진심으로 받아들인 모양이다.
“그럼 그럴까.”
“자, 잠깐만! 그거 내가 얼마나 힘들게 만든 건데!”
열심히 쌓아 올린 모래를 한 번에 털고 일어나 버린 제이크를 보고 나는 경악했다.
나는 뒤돌아 뛰며 낼름 메롱 하고는 외쳤다.
“어디 한번 잡아보든지!”
* * *
하지만 호기롭게 그런 말을 한 게 무색하게도 금방 잡혔다.
“헉, 헉. 너 뭐야. 왜 이렇게 빨라? 혹시 마법으로 반칙 쓴 거 아니지?”
“안 썼어.”
제이크가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나는 이 경기가 잘못돼도 한참을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아무리 내가 아카데미를 졸업한 후 운동을 소홀히 했다지만 이건 정말 말도 안 된다고!’
제이크는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잠시 시선을 교환하다가, 그가 먼저 질문했다.
“그래서, 정말로 키스해도 돼? 이번엔 정말로. 이마 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한 가닥 남아 있는 의문이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 키스는커녕 손만 잡아도 부끄러워하던 제이크였는데. 언제 저렇게 마음의 준비가 된 거지.’
모를 일이라 생각하면서도 서서히 다가오는 그의 얼굴에 나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
하지만 입술이 아닌 내 뺨을 누르고 스쳐 지나가기만 한 키스였다.
오른쪽 뺨 한 번, 왼쪽 뺨 한 번.
‘……뭔데?’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이 들어 눈을 떠보니, 제이크가 장난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번에는 이마 말고 뺨에 해봤어. 어때?”
“제이크 너 나빠.”
“응, 나 나쁜 사람이야. 원래는 안 그랬는데 방금 미르 너 덕분에 그렇게 변해 버렸어.”
“…….”
방금 전 내가 했던 행동을 되새겨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이번엔 그가 뒤돌았다.
“자, 이번엔 미르가 날 잡아봐. 대신 나는 뛰지 않고 걸어갈게.”
“거기 서!”
나는 곧바로 뒤돌아 가려는 제이크를 붙잡았다.
“……!”
그가 잠시 당황하나 싶더니 빙긋 웃었다.
“이렇게나 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제이크, 네가 날 농락했으니 나는 너에게 벌을 줘야겠어.”
“그거 기대되는걸. 뭘로?”
나는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제이크의 어깨를 붙잡고 대답했다.
“……네가 그렇게 원하던, 키스로.”
“……!”
제이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다음 순간 나는 까치발을 들고 눈을 꼭 감은 채로 그에게 키스했다.
“……!”
제이크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단 하나는 확실했다.
내가 충동적으로 선사한 벌칙을 그가 몹시도 기꺼워하고 있다는 것.
처음엔 살짝 떨리는가 싶던 그의 손이 조심스럽게 내 뺨을 감쌌다.
어느 순간부터 따스한 숨결이 가까이에서 오갔다.
‘처음이야, 이런 건.’
몹시도 간지럽고 애틋한 기분이었다.
아마도 제이크 역시 비슷해 보였다.
그는 깨지기 쉬운 유리를 다루듯 나를 대했지만, 그동안 참아왔던 갈급함을 채우고 싶어 하는 모양인지 이내 점점 집요해졌다.
어느새 내 발걸음이 하나둘 뒤로 밀려나고 있었다.
이러다 바닷물에 닿을 것만 같아 나는 황급히 그를 멈춰 세웠다.
“……잠깐!”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그러고는 눈짓으로 어느새 몇 발자국만 더 가면 옷이 다 젖어버릴 듯한 파도를 가리켰다.
그러자 제이크는 어느새 붉게 상기된 얼굴로 조용히 질문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응.”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대답했다.
“아쉽네.”
사실은 나도 그랬다.
하지만 말할까 말까 머뭇거리던 사이, 제이크가 옅게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난 이 정도로도 만족해. 일단, 오늘은.”
의미심장한 말이었다.
아직 오지도 않은 다음번을 생각하게 만드는 말.
* * *
첫 키스.
만약에 제이크와 하게 된다면 이후 꽤나 어색해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건 아니었다.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유치하게 모래 장난도 치고, 바닷물에 발을 담그는 등 신나게 놀았다.
또 평소처럼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문득 시계를 꺼내본 제이크가 중얼거렸다.
“이제 광산에 가봐야 할 시간이네.”
“아, 벌써?”
나는 어느새 뉘엿뉘엿 노을이 지기 시작한 바닷가를 뒤돌아보며 미련 남은 얼굴을 했다.
그러자 제이크가 그런 날 위로하듯 말을 건넸다.
“응. 비록 오늘은 얼마 못 있었지만, 다음번에 우리 또 오자.”
“신혼여행으로?”
나도 모르게 한 말이었지만, 제이크는 매우 기꺼워하며 대답했다.
“그것도 좋지. 신혼여행이라니, 벌써 기대된다.”
“하하, 나도…… 앗!”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이전과는 확실히 달라졌다.
나는 제이크와 살짝 스치는 손끝에도 어쩐지 아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부딪힌 것도 아닌데 괜히 당황하고야 말았다.
이내 근처에 있는 광산에서 마력석을 받아와 마차에 실은 우리는, 다시 수도로 돌아가는 길을 떠났다.
모든 게 설레고 또 순조로웠다.
이웃 영지로 가는 길, 갑자기 어느 산속에서 두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멈춰 서기 전까지는.
‘사고가 난 것도 아닌데 어째서 갑작스레 마차가 멈춰 버린 거지?’
의아해하던 나는 제이크와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무슨 일이지?”
우리의 눈앞에 보인 것은 거의 반쯤 주저앉은 채 거품을 물고 있는 두 말.
그리고 그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마부였다.
마부는 우리를 발견하고 아연실색한 채로 상황을 설명했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도련님, 그리고 영애님. 제가 미처 이 근방에 있는 독초를 제대로 살피지 못해 그만……. 말들이 독풀에 중독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뭐라고?”
제이크와 나는 깜짝 놀랐다.
그의 자세한 설명을 듣자 우리는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아까 우리가 바닷가에 있을 때, 마부는 근처에 있는 옹달샘에 휴식 겸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말들을 데려갔었다.
하지만 말들을 옹달샘 근처에 묶어놓고 마부가 잠시 눈을 붙이는 동안, 그만 말들이 그곳에 있는 독초를 먹어버린 모양이었다.
‘이곳 지역에서만 자라는 독초는 향이 좋고 맛도 나쁘지 않아 말들이 모르고 먹어버리는 경우가 있다고…….’
마부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알려진 정보였으나, 그는 오랜만에 방문하는 곳이었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며 우리에게 사죄를 구했다.
“괜찮아요, 실수할 수도 있지요.”
나도 가끔 저렇게 알고 있던 것도 까먹는 경우가 있었으므로 마부의 실수를 이해해 주기로 했다.
제이크는 그런 나를 힐끗 보더니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보다 데릭, 그러면 이 말들은 어떻게 하지? 치료할 수는 있는 건가?”
“그게 말입니다, 도련님. 이게 말에게 약간의 환각 작용을 일으키는 풀인지라, 가만히 놔두어도 하루 정도만 있으면 정상으로 돌아오긴 합니다.”
“그거 큰일인데. 지금은 밤이고, 이동 중이잖아.”
심지어 이곳은 산길이었다.
당일에 다녀오는 여행인지라 약간의 간식을 제외하고서는 식량도 챙겨오지 않았는데, 꼼짝없이 여기서 발이 묶이게 될 처지였다.
‘걸어갈 만한 거리는 아닌데. 그렇다고 아픈 말들과 마차를 버리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고민하던 그때, 마부의 다음 말이 들려왔다.
“물론 빠르게 치료하는 법이 있긴 합니다. 해독풀을 먹이면 되거든요. 그 풀은 제가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자신 있게 말하는 마부에게 제이크가 되물었다.
“데릭, 자네가 찾아오겠다고?”
“예, 다행히도 이곳은 제가 어렸을 적에 살았던 곳인지라 이 산길도 잘 알고 있지요. 지금 그 해독풀이 서서히 마를 시기인지라, 남아 있는 게 적을 것 같긴 하지만 제가 반드시 찾아오도록 하겠습니다.”
그의 말에 제이크는 나와 짧게 시선을 교환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녀오도록 해.”
“예.”
마부가 떠나고, 정말로 둘만 남게 되었다.
마차 안이 고요해졌다.
혹시나 해서 제이크에게 마법으로 말들을 치유해 줄 수는 없냐고 물어봤고, 실제로도 시도해 봤지만 실패했다.
인간을 제외한 생명체를 치유하려면 또 다른 특수한 마법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저기, 제이크.”
날씨도 좀 쌀쌀한 것 같고, 정적이 흐르는 것도 어색해져 나는 제이크의 손끝을 톡톡 건드리며 말을 걸었다.
그러자 나를 스윽 돌아본 제이크가 빙긋 웃으며 제 겉옷을 벗어 내게 덮어주었다.
순간 따뜻한 온기가 내 주변을 감쌌다.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봤다.
“응? 이걸 왜……?”
“추워 보여서.”
그렇게 말하며 제이크는 내 손을 모아 자신의 손으로 덮어주었다.
“아.”
몰랐는데 그의 말이 맞았다.
언제부터 이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내 두 손은 핏기 없이 차가웠다.
“마차 안에도 따뜻해지는 마법을 걸어야겠다. 어때?”
“좋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로 마법을 건 제이크는 따스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내 어깨에 덮인 겉옷보다도 그 눈빛이 더욱 따뜻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하암…….”
몸이 따뜻해지니 어느 순간 서서히 졸음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 낯선 곳에서 시간을 많이 보낸 탓이었다.
어느 순간 내 고개가 나도 모르게 툭 떨어졌다.
드문드문 눈을 뜰 때마다 마차 안의 마력석 등이 은은하게 우리를 비추고 있는 고요한 풍경이 보였다.
“피곤하지, 미르.”
나른한 제이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느릿하게 대답했다.
“……응. 너는?”
“나도 그렇네. 우리 잠깐 잘까?”
“……이 마차에서?”
물론 테이온 공작가의 마차였기에 결코 좁은 크기는 아니었다.
성인 여덟 명쯤은 가뿐하게 태우고 갈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양쪽에 각각 좌석이 있는 형태라, 결코 잠들기 편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내 무릎을 베고 네가 누우면 되니까.”
“하지만…… 불편하지 않아?”
네가. 라는 뒷말은 생략했다.
물론 제이크는 다 알아들었다는 것처럼 빙긋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난 더 좋은걸.”
“그럼, 잠깐 빌릴게.”
나는 고마움의 뜻으로 살짝 웃으며 제이크의 무릎에 머리를 기대고 누웠다.
‘이상하다.’
눕기 전까지는 분명 불편해서 얼마 못 가 일어날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왜 자꾸만 더 졸린 거지? 포근해.’
살짝 눈을 감고 있었을 뿐인데, 어느샌가 나는 진짜로 잠들어 버렸다.
* * *
조용한 마차 안.
밖은 은은한 달빛과 별빛을 제외하면 새까맣다.
“……잠들었네.”
제이크는 제 무릎 위에서 곤히 자고 있는 에미르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피식 미소 지으며 마차 안의 조명등을 어둡게 바꾸었다.
“미르 넌, 어떻게 자는 모습도 이렇게 사랑스러울까.”
“…….”
분명 잠들었으니 듣지 못할 게 뻔한데도, 순간 에미르의 손끝이 살짝 움직였다.
제이크는 에미르 위에 덮어진 제 옷을 다시 정돈해 주었다.
“알고 있어, 미르?”
그는 그녀에게 질문했다.
물론 대답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여린 숨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
“나는 네가 이 세상에 있는 그 무엇보다 소중해.”
“……으음.”
잠꼬대라도 하는지 순간 에미르의 고개가 살짝 움직였다.
제이크는 다정한 손길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듯 정리해 주고는, 마저 중얼거렸다.
“절대로 잃어버리지 않을 거야. 약속할게.”
“…….”
“잘 자, 에미르. 좋은 꿈 꾸고.”
이윽고 제이크 역시 피곤한 듯 마차 내의 조명을 아예 꺼버렸다.
마차 안은 잠든 두 연인이 함께였다.
* * *
“으음, 지금이 몇 시야?”
저택의 내 방에서는 절대로 들을 수 없는 명랑한 아침 새 울음소리에 잠에서 깼다.
“어?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말들이 아파서 그대로 여기서 잠들어 버렸지.”
고개를 갸웃하던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창가에 고개를 기댄 채 잠들어 있는 제이크의 모습이 보였다.
‘불편했겠다, 제이크.’
미안한 마음과 고마운 마음이 함께 들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를 마차 좌석에 눕혔다.
그리고 가방에 들어 있던 목베개를 꺼내 그의 목에 끼워주었다.
‘어제는 깜빡해서 못 썼지만.’
그럼 편안하게 마저 자라고 안녕을 빌어준 다음, 마차에서 내린 나는 어느새 멀쩡해진 말들과 다시 되돌아온 마부를 볼 수 있었다.
“아. 에미르 영애님, 밤새 잘 주무셨습니까?”
“잘 잤어요. 말들이 괜찮아 보이네요. 결국 해독초를 찾은 건가요?”
“예, 산을 돌아다니다 해독초를 결국 찾아 왔지요. 돌아왔을 땐 이미 새벽이 밝아오고 있었고 두 분께서 주무시고 계셨고요.”
마부는 머쓱해하며 대답했다.
“제 실수 때문에 불편한 밤을 보내셨을 것 같아 영애님과 도련님께 죄송한 마음이 드는군요.”
“음, 괜찮아요.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았거든요.”
나는 미소 지었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마차에서 잠든 것치고 하나도 몸이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개운했다.
‘설레고 포근한 밤이었어.’
나는 기지개를 쭉 켜며 싱긋 웃었다.
* * *
Q: 마야 공작님, 에미르 영애와 제이크 영식이 교제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어떠셨습니까?
A: 아쉬웠지. 조금은 씁쓸한 기분이 들기도 하던데.
Q: 에미르 영애에게 구혼서를 보냈다고 들었습니다만.
A: 아, 청혼? 깔끔히 거절당했어. 그건.
Q: 그럼에도 아직 미련이 있으신지요?
A: 글쎄, 어떨 것 같은데?
Q: ……예?
A: 푸훗, 농담이야. 당연히 그런 게 남아 있을 리가 없지.
Q: 오, 공작 각하께서는 상당히 시원스러운 성정이시군요.
A: 그녀는 이미 다른 사람을 선택했잖아. 나는 그 선택을 받아들였어. 그럼에도 친우로 남아 있을 수 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한 거 아닌가?
-마야 트위트와의 인터뷰 中-
* * *
포근해 보이는 집무실 안.
타닥타닥 피어오르는 벽난로 소리를 들으며 마야는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문엔 서리가 옅게 끼어 있었다.
그 너머로 보이는 바깥의 풍경은 온통 하얗기만 했다.
이맘때 겨울만 되면 마야 트위트는 자신이 어렸을 적 이 영지가 아예 얼어붙어 버렸던 때를 떠올리고는 했다.
그는 잠시 감상에 젖은 눈빛으로 생각에 빠져들었다.
“공작 각하, 무슨 생각을 그리하십니까?”
“별거 아니다. 그냥 옛날 생각이 좀 나서.”
뒤에서 들려오는 보좌관의 목소리에, 마야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소처럼 차분하게 대꾸하며 뒤를 돌았다.
“내일 제국으로 출발하시려면 일찍 잠드셔야겠습니다.”
“그렇지. 도자기를 비롯한 선물들은 일러둔 대로 미리 챙겨놓았나?”
“예, 준비해 놓았습니다.”
“그래. 그럼 자네는 이만 가보도록 해. 나도 곧 잠자리에 들도록 하지.”
보좌관을 돌려보낸 후, 마야는 제 책상 서랍에 넣어놓았던 봉투 한 통을 꺼냈다.
그것은 바로 몇 달 전 에미르의 데뷔탕트에 맞춰서 그녀에게 보낸 청혼서였다.
‘비록, 거절당하고 이렇게 되돌아왔지만 말이야…….’
거절당한 지 어언 몇 달.
사실 처음부터 별로 기대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용기 내어 시도해 본 청혼이 가볍게 거절당하니 직후에는 약간 미련도 남았더랬다.
‘그러나 이젠 그 한 조각 미련조차 버려야 할 때지.’
얼마 전, 제이크 영식과 에미르의 교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듣기로 몇 개월 후 약혼식도 올린다고 했다.
‘그녀는 제가 원하는, 제게 맞는 짝을 찾아갔어.’
잘된 일이지.
정말로.
마야는 그렇게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피식 웃으며 봉투에서 제가 한 글자 한 글자 정성 들여 썼던 구혼서를 꺼내 가볍게 훑었다.
“이걸 쓸 땐 몰랐는데, 사실 나도 널 좋아하긴 했던 모양이야.”
구혼서에는 단 하나도 사적인 감정을 담아놓지 않았다.
그 흔한 연모한다는 단어조차 적혀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그 자신이 보기에 과거의 자신은 충분히 에미르에게 연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에미르 영애. 영애에게 괜스레 질척이는 못난 남자가 되고 싶지는 않으니까 이쯤에서 정리하도록 할까. 내 마음은.”
아직까지도 조금은 미련 어린 말투였다.
하지만 그다음 순간, 마야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혼서가 담겨 있던 봉투를 통째로 벽난로에 집어넣었다.
화르륵.
은은한 향수를 머금었던 종이가 타오르며 향긋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이걸로 이젠 끝이고, 우린 다시 친우로 돌아가는 거야. 영애도 그걸 원하겠지?”
마야는 어쩐지 후련해진 마음에 한동안 타오르는 모닥불을 바라보았다.
종이가 재가 되고 그 재마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 * *
“그래서 말입니다, 각하. 저희 상단에 왕국의 특산품들을 납품해 주시는 건 어떻습니까?”
한 중년 귀족이 아무도 없는 주변의 눈치를 살피다, 슬그머니 다가와 질문했다.
하지만 마야는 가면처럼 빙긋 미소 짓기만 하고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귀족은 재차 조건을 말하며 그를 설득하려 애썼다.
“물론 각하께서 내켜 하시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만. 기존 납품가의 두 배! 두 배를 드리겠습니다. 어떠신지요.”
“셀몬 후작.”
마야가 자신의 손목을 흘깃 확인하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남자를 불렀다.
그의 손목에는 에미르의 소품가게에서 만든 손목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후작은 구하기 힘들다는 시계를 잠시 넋 놓고 바라보다, 뒤늦게서야 대답했다.
“예, 예!”
“미안하지만 시간이 다 되어, 나는 이만 가보려 합니다. 그럼 이만.”
“예? 하,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마야를 후작은 붙잡으려 했다.
하지만 마야는 더 이상 이런 끈질긴 요구를 받아주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일갈했다.
“후작께서도, 애초에 트위트가는 제국의 상단들에 무역을 위한 배를 판매할 뿐 다른 물건을 팔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으면서. 이런 요구를 해오는 게 말도 안 되는 거라는 것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트위트 공작가가 속해 있는 왕국은, 일정 규모 이상인 타국의 상단에 자국의 특산품들을 자유롭게 수출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정해진 가격으로, 그것도 허가받은 소수의 상단에서만 납품이 가능했다.
그런데 지금 살몬 후작은 그 법을 어기고 트위트 공작령을 통해 불법으로 특산품을 수입해 오려 하고 있었다.
‘내가 이제 막 공작위를 물려받은 젊은 후계자라, 만만히 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는데.’
마야는 이참에 톡톡히 후작가와의 관계를 정리해 놓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그 낌새를 눈치챈 후작은 뒤늦게 변명을 늘어놓으려 했다.
“……각하, 저는 그저 각하께도 도움이 되는 제안을!”
“이런 요구를 앞으로도 해온다면, 더 이상 셀몬가와 일체의 교류를 하지 않으려 하는데. 후작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말 많던 후작은 그제야 꿀 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이윽고 정말로 마야가 응접실을 나가려 하자, 후작은 황급히 그를 불러세웠다.
“자, 잠시만! 각하! 점심 식사라도 하고 가십시오!”
“미안하지만 이미 선약이 있어서.”
마야는 미련 없이 고개를 살짝 저었다.
“……?”
“오랜 친우들과의 약속인지라 절대로 깰 수가 없군요.”
* * *
물론 그 ‘약속’이라 함은 당연하게도 에미르를 주축으로 잡힌 약속이었다.
아쉽게도 시간이 맞지 않아 다른 유치원 동창들은 함께하지 못했지만 말이다.
“마야 공작님! 어서 오세요!”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새런 후작가의 저택.
평화롭고 잔잔한 저택 앞에 도착하자 그제야 마야의 굳어 있던 표정이 유하게 풀렸다.
마야는 미소 지으며 자신을 환영하는 오랜 친우 에미르에게 인사했다.
“에미르 영애, 잘 지냈어?”
그리고 그 옆에서 티는 내지 않지만 미묘하게 견제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제이크, 역시나 오랜 친우에게도 악수와 함께 인사를 건넸다.
“제이크 소공작도 여전히 잘 지내고 있지? 이거 참, 두 사람 다 낯이 좋아 보여 다행인걸.”
마야는 저 견제하는 눈빛이 몇 달 전 자신이 에미르에게 보낸 구혼서 때문이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절대로 겉으로 그 사실을 내색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그랬듯이 자신 특유의 서글서글한 미소를 지으며 두 친우를 대했다.
이윽고 둘의 대답이 거의 동시에 들려왔다.
“나야 뭐, 보다시피 잘 지내지요. 마야 공작.”
“물론이죠. 아, 그보다 딱 맞춰 도착했네요. 정말 잘됐어요.”
“……?”
마야는 은은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소리일까?
“마침 식사를 다 준비해 둔 참이었거든요.”
에미르가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 식사를 미리 준비해 둔 거야?”
“맞아요. 그런데 오늘의 식사는 조금 특별해요.”
“특별…… 이라고?”
마야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에미르가 키득대며 제이크의 손을 꼭 잡고 답했다.
“무려 우리 제이크가 직접 준비한 식사거든요.”
“……?!”
마야가 뜨악한 표정으로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요리 같은 건 아예 소질 없는 줄로만 알았는데, 웬 식사 준비?
“사실 며칠 전 깜짝 선물로 제게 미리 맛보여 줬는데, 이럴 수가. 제이크는 마법사가 아니라 요리사를 했어도 대성공했을 것 같지 뭐예요? 그리하여 이왕이면 멋진 요리를 다 같이 맛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이렇게 마야 공작님과 함께하는 자리에도 선보이게 되었답니다, 짝짝짝.”
에미르의 장황한 설명이 끝나자,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뭐,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니까 기대는 하지 않아줬으면 좋겠군요.”
* * *
“우와, 이 수프는 정말 맛있는걸? 에미르 영애가 극찬한 이유가 있었어.”
“하하, 그렇죠? 저도 제이가 요리에 재능이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하지만 겸손 어린 제이크의 말과는 다르게, 그가 만든 요리는 몹시도 맛있었다.
내심 두 연인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가 조금은 어색하지 않을까 걱정하던 그로서도 잠시 그 걱정을 잊게 해줄 정도였다.
“제이크, 내 가게 옆에 레스토랑을 차리는 건 어때? 내가 매일매일 갈게.”
에미르의 농담에 제이크가 웃으며 대답했다.
“네가 원한다면야, 진짜 차릴게. 마법사는 그만두고 본업을 요리사로 바꿔야겠다.”
분명히 농담일 텐데 어쩐지 그가 말하니 진담처럼 들렸다.
에미르는 황급히 말을 바꾸었다.
“음…… 생각해 보니 안 되겠다!”
“왜?”
“나만 먹고 싶으니까. 너무 맛있어서.”
“그래, 좋아. 앞으로는 너에게만 만들어주는 걸로.”
두 사람의 다정한 대화를 바로 옆에서 듣던 마야는 살짝 웃었다.
‘두 사람, 잘 어울리네. 생각했던 것보다도 더.’
마야는 내심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혹시나 뒤늦게 질투심이라도 들면 어쩌나 했는데 역시나 괜한 걱정이었던 모양이다.
에미르와 제이크는 마치 처음부터 이어질 운명이었다는 것처럼 그림처럼 잘 어울려서, 마야로 하여금 감히 질투라든가 아쉬움 같은 사사로운 감정이 들지도 못하게 했다.
‘그래, 어쨌거나 두 사람 모두 내 소중한 친우니까.’
잃고 싶지 않았다.
둘 모두의 인연을.
그런 의미에서 잘된 일이었다.
더 이상 자신이 에미르에게 예전과 같은 감정을 품을 일 없다는 것은.
‘어쩌면 그건 내 몇 달간의 노력 덕분일 수도 있겠지만.’
마야는 새삼 두 연인이자 친우들에게 마음속으로 축복을 빌었다.
‘부디 행복하길. 오래, 오래.’
그는 트위트 공작가를 이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가주였다.
그러니 필연적으로 혼인하게 될 운명이었다.
상대는 정략결혼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두 사람처럼 자신에게도 기적처럼 어울리는 짝이 나타날지도 몰랐다.
‘……뭐, 아직은 먼 이야기지만.’
마야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 * *
Q: 앨리스 리오나 백작님, 에미르 영애와 제이크 영식이 교제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어떠셨습니까?
A: 질투 났어요.
Q: ……예? 실례지만 혹시 제가 잘못 들은 것인지.
A: 아뇨, 제대로 들은 게 맞아요. 나는 그 순간 제일 친한 친구를 빼앗겨 버린 기분이 들었다고요.
Q: 하지만 에미르 영애도, 제이크 영식도 백작님의 오랜 친우이지 않습니까?
A: 하아, 물론 두 사람 다 내 친우이긴 한데……. 아니, 그전까진 분명 에미르에겐 제가 1순위 친우였단 말이에요. 에미르가 제게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진 친우인지 아세요? 에미르는, 에미르 님은 어렸던 저를 구원해 줬어요. 제 영원한 은인이라고요!
Q: 큼, 진정하시고. 그렇다면 혹시 지금은 어떠신지요. 조금 생각이 바뀌셨습니까?
A: 제가 뭐 어쩔 수 있나요. 두 사람이 이대로 연애하고 혼인까지 하는 걸 축하해 주는 수밖에요. 만약 그 둘 사이에 에미르를 닮은 예쁜 아이들이 태어나면 제가 반드시 대모님 자리를 맡을 생각이에요. 요정들의 축복도 받게 해줄 거고요. 매일매일 찾아가 우르르 까꿍 하고 놀아줄 거란 말이에요! 아,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귀엽다!
Q: …….
-앨리스 리오나와의 인터뷰 中-
* * *
앨리스는 이제 더 이상 앨리스 로즈가 아니었다.
그 이름은 이미 1년도 더 전에 버린 이름이었다.
이제 그녀는 어엿한 한 백작가를 이끌어 가는 가주였다.
비록, 가문의 구성원이 그녀 하나뿐이긴 했지만.
‘앨리스 리오나 백작. 이제 그게 내 자랑스러운 새 이름이야.’
반년 전, 갑작스러운 국경의 해안선 근처에서 일어난 마물들의 습격에 공을 세운 이들 중 하나가 바로 그녀였다.
요정들의 힘을 빌려 무장한 앨리스는 성공적으로 제국의 군사들 사이에서 큰 마물들을 여럿 무찔러냈다.
그녀는 결국 그 대가로 귀환한 후 황실에서 백작위라는 큰 선물을 받았다.
이후 앨리스는 백작으로서 얻게 된 영지를 관리하며 자산을 불려 나갔다.
물론 평소에는 전투보다는 소소하게 요정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더 많지만 말이다.
요정왕의 계약자로서, 이렇게 어엿한 성년이 될 때까지 앨리스는 요정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이제는 앨리스가 그들에게 도움을 줄 차례였다.
요정들의 비밀스러운 숲을 안전하게 유지하고 평범한 인간들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앨리스 같은 ‘요정 소환사’의 피가 흐르는 이들이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또한 요정들의 힘을 유지하는 데도 요정 소환사는 꼭 필요한 존재였다.
요정들은 인간들이 자신들을 이용하려 하고 귀찮게 하는 것을 경멸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아예 인간과 단절된 삶을 살면 힘이 서서히 약해지고 결국 소멸되기 때문이다.
요정 소환사들은 그런 요정과 소통을 나눌 수 있는 특별한 사람들이었다.
보통의 인간들이 존재만으로도 요정들에게 스트레스를 주는 것과 반대로, 소환사의 핏줄을 타고난 이들은 요정들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그러나 요정 소환사라고 해서 무조건 선한 인간들은 아니었으므로, 간혹 자신이 요정과 계약을 맺었다는 이유로 요정들에게 과도한 것을 요구하는 계약자들이 있었다.
아니, 사실 꽤 자주 있는 편이었다.
앨리스의 (구)가족들도 그랬고.
‘그런 못된 계약자들은 다 계약을 취소해 버려요. 부족한 마나는 내가 다 공급해 줄게.’
그리고 현재 요정왕의 계약자인 앨리스는 자신이 가진 방대한 양의 마나, 즉 인간의 기운을 요정들에게 공급해 주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그녀는 다른 요정 소환사들보다 수백 배는 더 많은 양의 마나를 소유하고 있었으니까.
덕분에 그동안 악덕 계약자들에게 시달리던 요정들은 전부 그들과 계약을 끊어버렸다.
그렇게 한순간에 요정 소환사에서 보통 사람으로 추락해 버린 이들 중에는 당연하게도 로즈 공작가가 있었다.
‘꼴 좋게 되어버린 거지. 언제까지나 소환사라는 이유만으로 대가를 거의 지불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무한한 호의를 요정들에게 받아 챙길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앨리스는 그때 처음으로 로즈 공작가의 몰락을 지켜보며 통쾌하다는 감정을 얻었다.
지금껏 로즈 공작가가 소환사 가문으로서 대대로 명맥을 이어오며 쌓아올린 재물들은, 이번 대에서 감당하지도 못할 정도로 벌려놓은 가문의 사업들을 메꾸느라 순식간에 바닥이 났다.
말만 공작가지, 이젠 몰락 가문이나 다름없었다.
듣기로는 빚도 잔뜩 졌다고 한다.
물론 당연하게도 앨리스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제국에서는 친족이라도 법적으로 절연을 마친 사이에는 그 어떤 것도 책임지지 않는 완벽한 남남이 될 수 있는 제도가 있었다.
그리고 앨리스는 이미 로즈 가문이 몰락하기 이전에 가문과 연을 끊고 새로운 삶을 살게 된 상태였으니까.
하지만 뻔뻔하게도 이후 로즈 공작가의 일원들은 앨리스에게 찾아와, 그녀에게 요정들에게 그들의 요정 소환사 능력을 다시 되돌려달라 청하라고 압박했다.
‘애원이라도 했더라면 한 번쯤 생각해 봤겠지만, 지금 이건 협박이에요. 당신들이 제게 협박할 처지는 아니죠.’
‘그래도 가족이었던 사이에 이건 너무하잖니!’
‘그래, 맞다. 아무리 법적으로 남남이 되었다지만 우리는 피가 섞인 가족이야! 어떻게 이럴 수 있는 거냐? 매정하기 짝이 없구나!’
매정하다, 라.
그 단어를 곱씹던 앨리스는 순간 웃음이 났더랬다.
지금 이렇게 그들이 비굴하게 구는 것도 다 지금의 그녀가 많은 것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앨리스에게 그 어떤 것도 없던 때, 그들은 그녀에게 참으로 차갑고 쌀쌀맞았다.
‘어렸던 제게 아버지와 어머니는 단 한 순간도 매정하지 않은 적이 없으셨어요.’
‘뭐, 뭣……?’
‘아니, 내가 언제……!’
‘잊어버리셨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제 기억엔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아 있으니까요. 저는 앞으로도 여러분께 아무것도 해드리지 않을 것이고 그 생각이 바뀔 일은 절대로 없어요.’
‘……이런 배은망덕한! 너 혼자 잘 먹고 잘살면 다인 것 같으냐?’
이내 본색을 드러내고 노발대발하는 아버지와, 이제 와 버림받기라도 한 마냥 흑흑 구슬픈 척 우는 어머니, 그리고 자신을 원수처럼 노려보는 언니.
예상했던 결과였다.
사람은 바뀌지 않는다.
앨리스는 기사들을 불러 명했다.
‘이 사람들을 밖으로 끌어내 줘. 앞으로는 저택 안으로 절대로 들일 일 없을 테니까 명심하고.’
‘예, 알겠습니다. 주인님.’
그러자 그제야 변명하는 그들이었다.
‘얘, 잠깐! 얘! 앨리스!’
‘그러지 말고 우리 얘기 좀 더 들어보렴! 우리가 잘못했어!’
‘그래, 사실 그동안 미안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우리 허심탄회하게 다 털어놓고 이야기하자꾸나!’
물론 그들의 말을 들어줄 생각은 없었다.
그들은 백작저의 기사들에게 끌려나갔다.
문이 쿵 닫히고 응접실 안이 조용해졌다.
그때야 앨리스는 뒤늦게 중얼거렸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기엔 이미 너무 늦어버렸잖아요.’
그래도 가족인데 동정이 간다거나, 조금은 신경 쓰인다거나…… 하지 않았다.
“어디 좋은 기억이 하나라도 있었어야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린 앨리스는 흥 콧방귀를 뀌며 중얼거렸다.
그래, 어릴 때는 그래도 조금이라도 사랑받고 싶었던 감정이 남아 있었더랬다.
하지만 점차 성장해 나가면서 그들은 사실 남이나 다름없다는 것을, 아니, 어쩌면 남보다도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아버리고 만 것이다.
요정 소환사의 자질이 없다는 것만으로 자식을 차별했으니, 이제 그 행각들을 죄다 되돌려받게 된 것뿐이다.
“아아, 그때 일은 정말이지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피곤하다. 에미르랑 놀고 싶어.”
앨리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오늘은 에미르가 제이크와 단둘이 데이트를 하기로 한 날이었다.
때문에 앨리스는 둘을 방해할 수 없었다.
“역시, 혼자 있는 건 심심한데.”
요정들을 제외하고 앨리스가 가장 많은 교류를 하는 상대는 단연컨대 에미르였다.
그런 그녀가 없으니 괜스레 쓸쓸했다.
“……오랜만에 번화가로 가볼까.”
사람이 많은 곳을 혼자서 가본 지도 오래되었으니까 한 번쯤은 가볼 법하다.
그렇게 생각한 앨리스는 마부에게 외쳤다.
“저택 말고 수도 중심가로 목적지를 바꿔 줬으면 해.”
“알겠습니다, 주인님.”
이윽고 앨리스는 작은 목베개에 제 얼굴을 푹 묻었다.
요즘 니나이나 덕분에 이 목베개를 비롯한 에미르의 가게 물건들이 불티나게 유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에미르의 가게를 가고는 싶지만, 에미르가 없는데 거기 가봤자 뭐 하겠어.”
뚱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푹 쉬었다.
* * *
수도 중심부의 번화가.
이 거리는 다양한 가게들이 있어 귀족, 평민 상관없이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물론 귀족들은 대다수 시종과 기사들을 동행하기에 그들은 한눈에 보기에도 구분이 가능했다.
하지만 어쩐지 앨리스는 그러고 싶지 않아졌다.
아무도 자신을 신경 쓰지 않도록 단출하게 거리를 돌아다니고 싶었다.
“호위는 잠시 물리도록 할게. 그 로브를 좀 빌려주겠어?”
항시 주변을 호위하던 기사에게 로브를 빌린 그녀는 그것을 뒤집어썼다.
틈 사이로 베이지색의 치맛단이 약간 보이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녀가 리오나 백작인지 절대로 알 수 없을 것이다.
“이런 기분 오랜만이네…….”
무수하게 많은 행인.
시끌벅적한 호객 소리.
그 가운데서 앨리스는 자신이 그 무엇도 아닌 그저 평범한 행인 중 하나임을 느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윽고 앨리스는 무언가 좋은 생각을 떠올렸다.
“오랜만에 서점이나 들러 봐야겠다.”
아카데미 시절 자주 다니던 서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알지 못했다.
서점에서 아주 익숙한 얼굴을 만나게 될 줄은.
그녀처럼 로브로 감쌌지만 숨길 수 없는 검은색의 선명한 머리칼.
색 변경 아티팩트를 쓴 건지는 모르겠지만 역시나 검은색의 눈동자.
하지만 틀림없이 생김새는 니콜라스 황태자였다.
몰라볼 수 없을 만큼.
‘저걸 변장이라고 한 건가, 전하는?’
그 역시 그녀를 발견하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먼저 말을 꺼낸 건 앨리스였다.
“……전하가 왜 여기에?”
“쉿. 지금은 잠행 중이라.”
니콜라스가 입술에 손가락을 얹고 비밀을 지켜달라는 표시를 했다.
“잠행…… 이라고요?”
앨리스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속삭이듯 물었다.
니콜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러니 지금은 전하라고 부르지 마. 니콜라스, 아니, 니콜이라고 부르는 게 좋겠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니콜라스는 연신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레 로브 후드의 깃을 여몄다.
“그럴게요. 그런데 자주 이렇게 모습을 바꾸고 잠행을 나오시나요?”
“그래. 아무리 적어도 일주일에 한 시간은 꼭 저잣거리에 나와 다른 이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보고는 하지.”
니콜라스의 대답에, 퍽 궁금하다는 얼굴로 앨리스가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전하, 아니, 니콜 님이 잠행하신다는 건 처음 듣는 이야기네요. 언제부터 그러셨나요?”
“그건 말이지…….”
시작이 언제였더라.
아, 아마 계기는 그때였을 것이다.
또래는 물론이고 다른 이들에게도 벽을 치며 홀로 고고하기만 했던 7살의 니콜라스.
하지만 그는 그 벽을 통과해 들어온 에미르와 여러 대화를 나누면서, 세상에는 여러 사람이 있고 꼭 저 같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후부터 그는 종종 타인을 돌아보고는 했다.
책을 좋아하는 자신과는 다르게 책을 읽으면 잠이 온다는 에미르.
항상 규칙과 예의범절을 준수하며 평정을 유지하는 자신과는 다르게 가끔은 말썽도 부리고 방정맞은 태도를 보이기도 하는 니나이나.
자신의 주변만 해도 수십, 수백 가지의 개성을 가진 이들이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니콜라스는 그때 처음 알았다.
‘이들 모두를 어우르고 보듬는 황제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어렸지만 명석하고 항상 자신이 황제가 될 미래를 생각하던 그는 이내 고민에 빠졌다.
그 고민은 니콜라스가 에미르와 다른 아이들을 따라 시장에 처음 가보게 되면서 더욱 커졌다.
세상은 그가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책이나 지도로만은 모든 것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그때의 니콜라스는 깨달았다.
분명 그는 황태자로서 제국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지만, 높은 곳에 있다고 이 세상 모두를 한 번에 내려다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니콜라스는 어느 날 결심했다.
제국민들의 생활을 알기 위해 꾸준히 잠행을 가보자고.
꼭 저잣거리만이 아닌 주택가, 저 멀리 수도를 벗어난 다른 지역까지도.
그런 지가 어느덧 5년도 넘었다.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니콜라스의 사정을 대강 듣게 된 앨리스가 침음을 삼켰다.
그녀는 방긋 웃으며 제안했다.
“그럼 니콜 님, 마침 제가 오늘은 시간이 많아요. 함께 있을 사람도 없이 심심했는데 괜찮으시면 잠행에 따라가도 될까요?”
“……마음대로.”
니콜라스는 살짝 멈칫했지만 아무렴 상관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호위기사 하나 없이 하는 잠행이었지만, 오늘은 함께할 동료가 생겨 괜히 들뜬 그였다.
티는 내지 않았지만 괜스레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것 보세요, 니콜 님. 요즘은 이 소설이 인기래요.”
“그래?”
“에미르 님도 이 소설을 봤으려나? 한 권 선물해 드릴까 싶네요.”
“…….”
서점에서 책을 구경하다 불현듯 에미르의 생각이 났는지 책을 계산하러 가는 앨리스의 뒷모습을 보고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게 침울해졌다.
홀로 버려진 느낌이었다.
‘이런 기분은 어째서지? 어차피 항상 잠행은 나 혼자 하고는 했는데 말이야.’
물론 잠시 후 다시 생글거리며 돌아온 앨리스의 모습을 보자 니콜라스는 이상하게도 다시 기분이 좋아지는 걸 느꼈다.
니콜라스는 앨리스의 제안으로 시장 한편의 음식점으로 향했다.
“이곳은?”
그런데 막상 와보니 이 익숙함은 뭔가.
그는 음식점 내부를 두리번거렸다.
“니콜 님, 어렸을 때 에미르 님을 비롯한 다른 분들과 이곳에 왔던 것 기억하세요? 저는 아직도 이 근처만 오면 여기서 처음 먹었던 스튜의 맛이 생각나요.”
앨리스의 감상에 젖은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니콜라스는 기억이 났다.
생각해 보니 이곳은 유치원 다닐 적 아이들과 함께 왔던 식당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랬었지. ……추억이군.”
“그때 꼬치구이도 먹었었는데. 이번에도 그걸 시켜봐야겠어요.”
“그래. 좋은 생각이야.”
이윽고 주문한 음식이 나오기 전.
살짝 어색한 침묵이 흘렀지만, 앨리스가 먼저 말을 꺼냈다.
어느새 대화의 주제는 에미르의 가게에 대한 것으로 넘어가 있었다.
“제가 생각해 봤는데 에미르 님의 가게에서, 요정의 숲에서 나온 나무로 만든 오르골을 판매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요. 실은 요정왕님께 먼저 이야기를 꺼내봤는데, 좋다고 하셨거든요. 니콜 님의 생각은 어때요? 에미르 님께 한 번쯤 제안해 볼 만하죠?”
“……어?”
멍하니 앨리스를 바라보던 니콜라스가 한 박자 뒤늦게 대답했다.
평소의 그답지 않은 얼빠진 모습에 앨리스는 곧바로 뭔가를 눈치챘다.
“이런, 다른 생각을 하고 계셨나 봐요.”
“아, 아니다.”
“아니긴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길래 답지 않게 그러세요?”
“……정말로 아무것도 아니다.”
차마 너를 바라보느라 그랬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서, 니콜라스는 애써 말을 돌렸다.
* * *
이후, 식사를 마치고 식당에서 나온 둘은 근처 거리를 걸었다.
문득 니콜라스는 어쩐지 오늘따라 자신이 좀 이상하다고 느꼈다.
분명 앨리스와는 단둘이 만나는 일만 거의 없다 뿐이지 오랜 친우였는데, 그녀를 대하는 게 어색해진 것 같았다.
“어? 저기, 에미르 님과 제이크 소공작이!”
하지만 마침 앨리스가 깜짝 놀란 듯 작게 소리치며 한편을 가리키는 바람에, 그의 상념은 멈추었다.
앨리스가 말한 곳엔 정말로 에미르와 제이크가 있었다.
다만 상당히 먼 곳이었는데, 어떻게 그걸 한눈에 알아봤는지 신기할 정도였다.
‘앨리스는 시력이 좋나 보군.’
앨리스가 손을 흔들자, 에미르 쪽에서도 그들을 발견한 모양인지 둘의 발걸음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잠시 후, 한 자리에서 마주하게 된 네 명은 반가운 목소리로 서로를 반겼다.
정확히는 앨리스와 에미르가 그랬다고 하는 게 맞겠지만.
“앨리스! 여긴 어쩐 일이에요? 게다가 니콜라스 전하도 함께라니.”
에미르는 갑작스레 함께 나타난 니콜라스와 앨리스를 보고 놀라워했다.
“저는 우연히 시간이 남아 거리를 둘러보다가 전하를 만났어요. 이런 곳에서 에미르를 만나게 되다니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요?”
“그러게요. 진짜 신기하다. 사실 오늘 저도 갑자기 이곳 거리가 생각나서 제이크와 데이트할 겸 함께 온 거거든요. 우리 서로 생각이 맞아떨어졌나 봐요.”
에미르와 앨리스는 서로 대화를 나누다, 한 가지의 결론을 냈다.
“이렇게 된 거 우리 다 함께해요.”
“좋은 생각이에요, 앨리스!”
“…….”
어쩐지 그 둘을 제외하고서 제이크의 표정은 영 좋지 않았지만 말이다.
하지만 에미르와 앨리스가 저렇게 기뻐하는데 별수는 없었다.
“저것 봐요, 앨리스. 솜사탕이에요.”
“어릴 때 에미르 님이랑 함께 길거리에서 음식을 사 먹었던 게 생각나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둘을 바라보던 제이크는 어느 순간 사라졌다.
그리고 눈 깜짝할 사이에 다시 나타났는데, 그의 손에는 솜사탕이 잔뜩 들려 있었다.
“자, 미르.”
“우와! 고마워. 언제 사 온 거야?”
“방금. 네가 원하는 것 같길래.”
제이크는 선심 쓰듯 니콜라스와 앨리스에게도 하나씩 솜사탕을 들려주었다.
그는 어느새 자연스레 아까처럼 에미르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이크, 그런데 어쩌지. 나 아까 실수로 이쪽 손이 더러워졌는데.”
“괜찮아. 내가 먹여줄게.”
오붓하다 못해 꿀이 떨어지는 두 사람을 빤히 바라보던 앨리스는 팔짱을 끼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그리고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 물었다.
“부러운가?”
평소라면 절대로 그런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하지 않았겠지만, 어쩐지 쓸쓸해 보이는 앨리스의 얼굴을 보자 자연스레 말이 튀어나왔다.
“글쎄요.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앨리스의 흐릿한 말꼬리는 어쩐지 울적하게 느껴졌다.
니콜라스는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말했다.
“그럼 네게는 내가 해주마. 어때?”
“……?”
“자, 여기.”
이윽고 앨리스의 입가로 내밀어진 작은 솜사탕 조각을, 그녀는 저도 모르게 받아 물었다.
그리고 난 후 뒤늦게서야 앨리스는 자신의 행동을 알아차린 모양인지 당황한 듯 허둥지둥 변명했다.
“부, 부럽다고 했지 별로 따라 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었는데……!”
“그래? 미안하구나.”
“그래도 뭐, 감사해요…… 전하. 아니, 니콜 님.”
앨리스는 민망한 얼굴로 중얼거리다 휙 돌아섰다.
“어서 가요. 이러다 저 두 사람을 놓치겠어요.”
뒤돈 채로 그녀가 무심하게 내민 손을, 니콜라스는 흔쾌히 잡았다.
“뛰어가죠. 거리 차이가 너무 나요.”
“그래, 뛰어가자.”
니콜라스는 앨리스의 말에 대꾸하며 저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느꼈다.
어쩐지, 지금 이 기분 좋은 감정이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알 것만 같았으니까.
* * *
Q: 니콜라스 황태자 전하, 에미르 영애와 제이크 영식이 교제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어떠셨습니까?
A: 글쎄다……. 처음엔 당황스럽고 신기할 따름이었지만, 곧 둘을 축하해 주었지. 오랜 친우들이라 그런지 내 일처럼 기쁘더군.
Q: 전하께서는 지금 꽤나 아련한 표정을 하고 계시는군요.
A: 하하, 그런가? 실은 갑자기 옛날 생각이 좀 나서 말이야. 어릴 적 그 개구쟁이 같았던 녀석들이 언제 이렇게 커서 연애도 하고 그러는지 신기할 따름이야.
Q: 이런, 전하께서도 그때는 어린아이셨잖습니까.
A: 그건 맞지만, 나는 적어도 개구쟁이는 아니었다네.
Q: 큼, 아무튼 전하. 에미르 영애와 제이크 영식. 그 두 연인에게 한 마디 남기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A: 에미르, 그리고 제이크. 오래오래 행복하고 건강하게 잘 살도록 해라. 너희 둘은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야.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너희의 인연은 앞으로도 굳건하겠지. 테이온 공작가와 새런 후작가의 후손까지 대대손손 번영하기를 바라고…….
Q: 저, 실례지만 한마디가 너무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A: 이런, 아직 할 말이 더 있는데. 그럼 마지막으로 이 한마디만 더하지. 내가 너희를 위해 좋은 성군이 되어주마. 약속한다.
-니콜라스 클루니 베텔리우드와의 인터뷰 中-
* * *
그로부터 약 2년 후.
나와 제이크는 드디어 혼인하게 되었다.
약혼식을 올린 지도 1년 정도 지난 것 같은데, 시간은 참 빨리 가는 것 같다.
그사이 이런저런 일도 있었는데, 대표적인 것만 꼽아보자면…….
앨리스와 니콜라스 전하가 연애를 시작했다는 것?
‘대체 언제부터 두 사람이 마음이 통하게 된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정말 잘된 일이야.’
원작의 주인공들이라 운명적으로 만나게 되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내 존재로 인해 이 세상은 많은 게 달라졌으니까.
둘 사이 내가 모르는 관심사가 통했다던가 하는 계기가 아마도 있었겠지?
‘……괜히 흐뭇해지는걸.’
아참.
결혼식을 올리기 전, 내 웨딩드레스를 고르는 데 니나이나와 앨리스가 도와주었다.
우리 세 명은 의상실의 긴 카우치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내 오른쪽에서는 앨리스가 열심히 디자인 북을 넘겨보며 일일이 제안을 해주었다.
“에미르는 이렇게 소매 부분이 부풀어 오른 퍼프 스타일이 잘 어울려요. 이 디자인은 어때요?”
마찬가지로 내 왼쪽에서 스케치북을 든 채로 무언가를 끄적이던 니나이나가 고개를 저으며 반박했다.
“이런, 이런. 아니지, 앨리스. 그보다는 이렇게 아슬아슬하게 등과 어깨가 보이는 드레스가 더 예쁘지 않니? 보렴.”
니나이나가 직접 그린 그림을 확인한 앨리스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어머나 세상에! 이건 너무 과감하잖아요. 안 돼요, 안 돼. 우리 에미르에게는 귀여운 게 더 잘 어울린다고요!”
“……안 되긴 뭐가 안 되니? 게다가 이 정도면 그렇게 과감한 것도 아니란다? 그러지 말고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고려해 보길 바라, 에미르. 15년 넘게 옆에서 지켜본 오랜 친우의 말을 듣도록 하렴.”
니나이나가 내게 속살거리자, 앨리스가 흥 코웃음을 치며 다리를 꼬았다.
“이런, 전하. 누가 들으면 전하께서만 에미르의 유일한 15년 지기 친우인 줄 알겠어요. 저도 마찬가지거든요?”
니나이나와 앨리스의 언쟁 아닌 언쟁을 듣던 나는 이러다 싸움이 날 것만 같아 말리기로 했다.
결혼식 준비를 도와주던 세 명의 친우!
의견 문제로 절교!
이런 결말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모두 그만……. 두 사람의 의견 모두 잘 알겠어요. 일리도 있네요.”
“흐응, 그래? 그럼 우리 둘 중 누구의 의견을 따를 생각이야? 당연히…… 나겠지?”
“무슨 소리. 에미르는 처음부터 제가 보여준 디자인을 더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고요, 전하.”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꼭 두 사람이 제안해 준 것 중에 하나만 골라야 하는 건 아니잖아요. 저는 둘 다 마음에 드는걸요? 역시 제 곁을 오래 지켜준 친우들다운 의견이라고 생각해요.”
내 대답에 잠시 멍해 있던 니나이나는 헛웃음을 터뜨렸다.
“에미르 넌 정말, 항상 이렇게 허를 찌르는 대답을 하는구나. 하긴, 꼭 하나만 선택할 필요는 없겠지.”
“공평해서 좋긴 한데……. 가끔은 제 편만 들어준다면 어떨까 하는 아쉬움이 있어요, 에미르.”
앨리스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조금 마음에 차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한숨을 작게 내쉬며 대답했다.
“두 사람이 싸우는 건 보고 싶지 않다고요. 두 분 다 제겐 소중한 친우잖아요.”
그러자 니나이나가 깜짝 놀라며 대꾸했다.
“이런, 내가 언제 앨리스와 싸웠다고 그러니?”
“그러게요. 전하와 전 그저 에미르를 위해 의견을 낸 것뿐인데. 물론 그 과정에서 아주, 아주 조금 갈등이 생겼지만요……?”
“호호.”
“아하하.”
둘은 갑작스레 어깨동무를 한 채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나는 모른 척 작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고마워요, 다들. 이렇게 직접 드레스 고르는 것도 도와주고, 정말로 나를 많이 아껴서 이렇게까지 해주는 거란 사실을 잘 알고 있어요. 잊지 않을게요.”
내 감사 인사에 앨리스가 살짝 부끄러워하며 대답했다.
“에이, 뭘요. 이 정도는 제가 에미르를 아끼는 마음의 반의반의 반도 채 되지 않는걸요.”
“맞아. 친우로서 당연한 걸 하는 것뿐이지.”
둘의 말에 나는 그만 풋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마침내, 고대하고 고대하던 결혼식 당일.
사교계의 많은 귀족이 내 결혼식에 참석해 손님들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아마 이날은 제이크와 내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었을 것이다.
“에미르, 내 딸. 축하한다. 제이크 소공작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도록 하렴.”
“언제 이렇게 커서 결혼까지 하게 된 건지. 정말이지 감회가 새롭구나. 상대가 제이크 소공자일 거라는 건 옛날부터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나를 누구보다 사랑하시는 우리 부모님.
나는 두 분과 한 차례 포옹하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엄마. 아빠. 두 분도 앞으로 계속해서 건강하게 잘 사셔야 해요. 앞으로도 제가 더 잘할게요.”
물론 우리 부모님뿐만 아니라 제이크의 부모님, 그러니까 이제 내 새로운 가족이 될 두 분도 우리의 미래를 축하해 주셨다.
“에미르, 오늘 정말로 눈이 부시게 사랑스럽구나. 앞으로 제이크와 행복하게 살려무나. 원하는 것이 있다면 모두 말하고, 혹여나 힘든 일이 있으면 내게 이르렴. ……그게 뭐가 됐던 내가 손봐 주마.”
테이온 공작 부인께서는 든든한 내 뒷배가 되어주겠다고 말씀하셨다.
“정말이지 제이크를 데려가 주어 고맙다.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제이크는 예전부터 너만 바라보는 아이였지. 물론 지금은 더 심해진 것 같다만…… 크흡.”
테이온 공작님은 뭔가가 울컥해진 모양인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공작님이 말씀하시는 말이 어떤 것인지 알 것 같았기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감사해요. 그리고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오로지 제이크만을 바라보며 행복하게 해줄 테니까요. 두 분 다 저만 믿으세요.”
“그래, 그래. 사실 제이크는 너만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행복일 게다…….”
내 친우들도 하나둘 나를 찾아왔다.
가장 먼저 찾아온 것은 앨리스와 니나이나였다.
“와, 정말 예뻐요. 에미르, 천사님 같네요. 갑자기 결혼식 도중에 하늘로 날아가 버리면 어쩌죠?”
“앨리스도 참. 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네. 역시 내 안목은 정확했어. 네게 이 드레스, 정말 잘 어울리거든.”
잠시 자신들이 의견을 낸 드레스를 구경하던 둘은, 내게 선물을 건네며 축하의 말을 했다.
“결혼 축하해요, 에미르. 저는 에미르의 행복을 항상 바라고 있어요.”
“에미르와 제이크 소공작의 결혼이라니, 내 두 친우가 이렇게 무사히 결혼까지 하게 되어 몹시도 기쁜 마음이야. 에미르, 축하한다. 행복하렴.”
잠시 후, 니콜라스와 마야 역시 나타났다.
먼저 내게 인사를 건넨 건 마야였다.
“에미르 영애, 결혼 축하해. 앞으로도 좋은 친우로서 영애와 소공작의 앞날을 응원할게.”
“감사해요, 마야 공작님.”
니콜라스 역시 내게 축하의 말을 했다.
참고로 그는 오늘 결혼식의 주례를 맡아주기로 했다.
“미리 축하의 말 건네도록 하지. 에미르 영애. 혼인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
“황태자 전하도 감사해요. 오늘 이렇게 주례까지 맡아주시고.”
황태자가 직접 주례를 맡는 경우는 정말이지 흔치 않다.
그만큼 영광스러운 결혼식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다소 거칠게 문이 열리며 세드릭이 들어왔다.
그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이윽고 나를 발견하고서 화색을 띠었다.
“늦은 건 아니겠지?”
“오셨군요, 세드릭 님.”
“……다행히도 안 늦은 것 같군. 후우. 그래.”
그는 몇 번이나 숨을 고르고, 빙긋 웃으며 내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거 녀석 중 내가 마지막으로 온 것 같은데.”
“맞아요.”
“그래? 아무튼 다행이야. 마지막으로 결혼 전 축하 인사를 해주는 게 나라니 기쁜걸.”
이윽고 세드릭은 살짝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살다 보니 이런 날도 오는 건가. 너를 진심으로 축하해 줄 수 있게 되고.”
“……?”
“결혼 축하한다. 정말로. 그저 행복하기만 해라.”
“꼭 그럴게요.”
축하의 말에서 그의 진심이 느껴져서, 나는 환히 미소 지으며 고개를 몇 번이나 끄덕였다.
이윽고 친우들을 비롯한 많은 이의 축하를 받으며 나와 제이크는 성대한 결혼식을 치렀다.
우리는 모두의 앞에서 영원을 맹세했다.
“저 제이크 테이온은, 평생 에미르 새런만을 바라보며 반려로서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다.”
“저 에미르 새런은, 평생 제이크 테이온만을 바라보며 반려로서 함께할 것을 맹세합니다.”
각자의 미래를 서로에게 걸어보겠다고.
* * *
결혼식 이후 한 달여가 흘렀다.
신혼여행도 다녀오고, 행복한 나날이 계속되었다.
밤만 되면 나는 생각했다.
언제나 홀로 잠들던 내 곁에 누군가가 함께한다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라고.
서로의 숨소리마저 들리는 아주 가까운 거리.
바로 옆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폭신한 베개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한 이불을 덮고 잠드는 우리였다.
“……너와 결혼하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
피곤함에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면서도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제이크는 나를 뒤에서 끌어안으며 속삭이듯 대답했다.
“나도 그래.”
그는 살짝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나는 오래전부터 네 남편이 되고 싶었어. 아마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던 것 같아.”
“하하, 정말? 그럼 이젠 그 꿈을 이룬 거네. 소감이 어때?”
장난스레 묻자, 제이크는 내 어깨에 얼굴을 푹 묻고는 대답했다.
“너무 행복해. 밤마다…… 참지 못할 정도로.”
“그게 뭐야…… 꺄악!”
“역시나 오늘도 그래.”
제이크의 목소리엔 어느새 은근한 욕망이 담겨져 있었다.
몇 시간 후.
다시 고요해진 방 안.
나는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렇게 손만 잡고 있으니…… 갑자기 옛날 생각이 나. 안 그래?”
“옛날 생각?”
“응. 그러고 보니 말인데 제이크,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내 질문에 제이크는 작게 침음을 내며 생각에 빠져들더니, 이윽고 대답했다.
“미안. 사실 나도 그때의 기억이 생생하다면 좋을 것 같은데, 너무 어릴 때라서 그런지 완벽히 기억 나지가 않아. 확실한 건…….”
“확실한 건?”
“……처음 봤을 때부터 난 네가 너무 좋았어. 그거 하나는 확실히 기억나.”
어느새 졸음이 가득 묻어나오는 제이크의 목소리였다.
“그래?”
“…….”
잠들었는지, 더 이상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괜찮아, 제이크. 왜냐하면 나는 다 기억하거든. 그때 네 모습을…….”
서서히 나도 잠이 왔다.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오늘은 제이크와 내가 처음 만났을 때의 꿈을 꿀지도 모르겠다는, 그런 예감.
* * *
내가 태어난 지 약 1년 하고도 반 정도 더 흘렀을 때였던가.
그때 아마 제이크를 처음 만났던 것 같다.
제이크와 나는 생일도 며칠 차이 나지 않는 또래였고, 부모님들끼리 친한 덕분에 우리의 첫 만남은 다소 일찍 이루어졌다.
내가 엄마와 유모의 품에 안겨 테이온 공작저로 갔을 때, 그 애는 바닥에 앉아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는 제이크의 첫인상은, 하얗고 동글동글한데 도토리 같은 연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아이였다.
‘머리카락도 정말 부드러워 보여. 꼭 밤톨 같다. 귀여워!’
처음으로 마주하는 또래의 아이였기에 반가운 마음이 제일 컸다.
그리고 어쩐지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예감도 들었다.
참고로 나는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에 할 수 있는 한에서 이런저런 노력을 하는 중이었다.
무슨 노력이냐고?
단어를 외워서 빨리 말할 수 있도록 부지런히 입을 트는 연습을 했다.
또 필사적으로 이것저것 붙잡고 걸음마도 연습했다.
그 덕분에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성장이 빠른 상태였다.
지금은 아장아장 걷기뿐인가.
타탓 하고 빠르게 뛰어갈 수도 있다.
물론 아직은 쉬지 않고 오래 뛰어다니는 건 지쳐서 무리지만.
‘……딱히 천재가 되고 싶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것들을 일찍 해서 나쁠 건 없잖아.’
그때 느낀 건데, 말을 한마디도 못 하고 행동으로만 표현하는 것과 말을 할 줄 아는 건 생각보다 큰 차이가 있었다.
무엇보다 내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배고플 때 배고프다고, 아플 때 아프다고 말할 수 있다는 건 좋은 거였다.
물론 우리 유모는 꽤나 노련해서 아주 어릴 적에 그냥 울기만 해도 내가 뭘 원하는지 빠르게 눈치채긴 했지만 말이다.
아무튼 우리 부모님은 그런 내가 몹시도 대견했는지 다른 이들을 마주할 때면 내가 이런저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걸 자랑하고는 했다.
“미르, 인사하렴. 네 친구인 제이크란다.”
“인다. 인다해.”
마음 같아서는 ‘인사’라고 똑바로 말하고 싶었지만 아직 혀가 덜 자라서 그런지 발음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뭐, 그래.
아직 겨우 1년 반 살았는데 발음을 똑바로 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지, 뭐.
나는 자연의 순리를 따라가기로 했다.
대신 약간의 내면의 창피함은 감수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래, 인사!”
엄마의 말에, 나는 두 손을 들어 눈앞의 아이를 향해 살짝 흔들어 보였다.
내 필살기인 ‘방긋 웃기’를 선보이면서.
“안녀! 제이!”
제이크라는 이름은 끝이 발음하기 어려워서, 그냥 대충 내 맘대로 제이라고 애칭을 지어 부르기로 방금 마음먹었다.
하지만 여전히 상대편, 그러니까 제이크라는 이름을 가진 아이는 나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할 뿐 별 반응이 없었다.
아니, 아니지.
아까까지만 해도 장난감을 매만지다가 내게 시선이 꽂혔으니 반응이 있긴 한 건가?
“어머, 에미르는 정말로 말을 잘하네요! 사랑스러워라.”
“제이크도 마찬가지예요, 테이온 부인. 어쩜 저리 깜찍하게 앉아 있나요?”
깜찍하다는 제 칭찬에 제이크는 그제야 고개를 갸웃거리며 제 어머니인 테이온 공작 부인을 바라보았다.
“마마? 나?”
음, 확실히 깜찍하긴 하잖아.
하지만 그건 나도 마찬가지라서.
엄마와 테이온 공작 부인의 대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제이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주위엔 각자의 유모가 서서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으음, 저 시선들 어쩐지 부담되는데.’
그래도 역시 내가 먼저 다가가 보는 게 좋겠지?
듣기로 제이크는 별로 활발한 편은 아니라고 했다.
걷고 뛸 줄은 알지만 보통은 저렇게 철퍼덕 앉아 있는 걸 좋아한다고.
‘괜찮아, 제이크. 내가 널 활발한 아이로 만들어줄게.’
어릴 땐 열심히 뛰어다니며 다리 근육을 기르는 게 좋다.
나는 제이크를 몸도 마음도 건강한 아이로 만들어주기로 다짐했다.
“놀댜. 나가더.”
나는 제이크에게 다가가 함께 정원에 나가 놀기를 제안했다.
제이크는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뭐, 뭐야!
“…….”
“……시러? 시타고?”
“…….”
“……하!”
설마 너 지금 나랑 노는 걸 거부한 거야?
내가 기껏 선심 써서 제안했더니!
나는 아주 살짝 충격을 받았다.
내 멍한 표정을 본 제이크의 유모가 머쓱해하며 설명했다.
“에미르 영애님, 죄송해요. 제이크 소공자님께서 낯을 많이 가리셔서요.”
“글쿠나!”
나는 납득이 간다는 듯 고개를 까딱였다.
이윽고 주먹을 꼭 쥔 나는 다시금 굳게 다짐했다.
‘그래, 괜찮아. 기회는 한 번이 아니니까! 나는 네게 거절당해도 몇 번이고 다시 다가가겠어.’
나는 척척 걸어가 제이크의 앞에 턱 앉았다.
제이크가 넌 뭐냐는 듯 빤히 바라봤다.
“가티 놀댜.”
“…….”
물론 여전히 제이크는 내키지 않는 듯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나는 제안을 살짝 바꿔보기로 했다.
“나가더가 시루면 여기더 놀댜.”
나는 제이크가 앉아 있는 곳을 손가락으로 콕콕 가리켰다.
주변엔 나무 블록이나 만지면 부스럭거리는 인형 같은 게 잔뜩 있었다.
전부 제이크의 장난감들이었다.
‘뭐, 이런 건 사실 나한테는 별로 재미없긴 하지만! 그럴 바에 차라리 뛰어노는 게 더 좋긴 하지만! 그래도 내가 특별히 놀아준다, 제이크!’
속으로 그렇게 생각한 나는 두 주먹을 쥐고 턱밑에 가지런히 댔다.
“오때?”
“…….”
“이래더 시러?”
그러자 제이크는 눈을 몇 번 천천히 깜빡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됴, 아.”
“……!”
방금 제이크가 날 보고 말했다.
좋다고!
분명 그렇게 말을 한 걸 두 귀로 똑똑히 들었다.
나는 화색을 띠며 고개를 연신 끄덕였다.
‘역시 그럼 그렇지. 넘어왔어!’
이후 나는 제이크에게 블록 쌓기를 알려주었다.
기껏 해봐야 나무 블록을 서너 개 쌓는 기록이 전부였던 제이크에게, 아슬아슬하게 열 개도 넘는 블록을 쌓아 올린 나는 정말로 대단해 보였던 모양이다.
“……오와.”
제이크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감탄사가 터져 나왔다.
나는 한껏 뿌듯해져서 어깨를 으쓱였다.
“나 대다내.”
나는 내 자신을 스스로 칭찬했다.
칭찬은 거름이 되어 내 스스로를 자라게 하니까!
그러자 제이크는 내 말에 동의한다는 듯 중얼거렸다.
“……대다나다.”
“너 할두 있더.”
너도 할 수 있다고, 나는 제이크에게 자신감을 북돋아 주었다.
“도아두께.”
제이크가 하나 블록을 올리면 그 위에 블록을 내가 올리는 식으로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홉 개째.
열 개의 고지가 눈앞에 보이는 그 순간……!
“으아!”
그만 내 오른발이 실수로 블록을 쳐 버리는 바람에, 기껏 쌓아 올린 블록이 다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
순식간에 벌어져 버린 일에 허망한 것도 잠시.
나는 황급히 제이크에게 사과했다.
“미, 미아내…….”
“…….”
제이크의 말간 눈이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쩐지 거기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며 으앙 하고 울어버릴 것만 같아서, 나는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들려온 말은 예상외였다.
“……갠타나.”
“……!”
“……다디 하께.”
제이크는 퍽 의연해 보이는 표정으로 다시 야무지게 블록을 집어 들었다.
그제야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조아!”
그날 이후부터, 우리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처음엔 좀처럼 방 밖에서 놀기를 싫어하던 제이크는 어느 순간 나와 함께 저택 안이나 정원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나는 제이크에게 술래잡기, 숨바꼭질 등의 놀이를 알려줬다.
간식도 꼭 함께 나눠 먹었고, 간혹 낮잠도 같이 잤다.
그런 우리의 모습을 보며 서로의 가족들은 물론이고 유모들, 고용인들까지 흐뭇해하고는 했다.
아마 처음엔 그저 또래 아이들끼리 안면을 익히라는 뜻에서 만나게 해 준 것이었을 테다.
하지만 예상외로 제이크와 내가 엄청나게 가까워지자, 테이온 공작가와 새런 후작가는 기뻐하며 우리 둘을 더더욱 친하게 지내게 해주었다.
그래서일까?
한동안 우리는 웬만한 가족만큼이나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다.
“미느! 미르!”
언젠가부터 제이크는 다른 건 몰라도 내 이름 하나만은 정확히 기억하고 정확히 발음했다.
“응!”
나는 그런 제이크가 정말로 마음에 들었다.
우리는 그렇게 어릴 때부터 단짝 친구로 지내게 된 것이다.
* * *
사실 제이크가 진짜로 기억하고 있는 에미르에 대한 첫 기억은 그로부터 한참이나 뒤였다.
제이크와 에미르는 1살 반 이후부터 두 살이 넘을 때까지 몇 번이나 만났었다.
하지만 이후 테이온 공작 부인이 갑작스레 병에 걸리게 되었다.
그녀는 잠시 요양을 위해 수도를 벗어난 별장으로 향했다.
제이크 역시 함께 가는 바람에 한동안 그 둘은 얼굴을 마주하지 못했었다.
이후 다시 두 아이가 만나게 된 건, 세 살 무렵이었다.
제이크가 다시 수도의 공작저로 돌아온 이후 어느 날, 한 마차가 테이온 공작저에 도착했다.
그 마차에서는 한 여자아이가 내렸다.
아이는 부드러워 보이는 회색 단발머리에 싱그러운 녹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제이크는 어쩐지 그 아이가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1년간 얼굴을 보지 못한 탓에,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안녕!”
“……!”
그러던 중, 제이크에게 에미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제이크는 당황해 그 자리에 그대로 굳어버렸다.
하지만 에미르는 개의치 않고 다가와, 환히 미소 지으며 제이크의 두 손을 붙잡고 물었다.
“제이크, 나 기억해? 난 에미르 새런이야!”
에미르 새런, 에미르 새런.
그 이름을 곱씹던 제이크는 이내 별장에서 지낼 적 유모와 어머니가 해줬던 말을 기억해 냈다.
수도에 친하게 지내던 친구를 두고 와 아쉽겠다고.
그랬다.
바로, 그 애가 에미르였다.
제이크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에미르!”
“정말? 다행이다! 정말 오랜만이야 우리! 그동안 못 봐서 섭섭했어!”
“……나도.”
제이크는 어쩐지 부끄러워져서, 대답과 동시에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에미르가 밝게 웃는 그 모습.
그 모습만은 제이크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잔상처럼 남았다.
첫 기억이나 다름없이 인상적으로.
* * *
나는 아카데미에 다닐 때의 꿈도 꾸게 되었다.
제국 아카데미는 대륙에서 유일하게 종합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제국뿐만 아니라 주위 왕국에서도 많이들 유학을 오고는 했다.
최소 입학 나이는 12세.
교육 과정이 중등부와 고등부를 합쳐 6년이기 때문에 18세쯤 졸업하고는 한다.
하지만 간혹 시험을 통과하면 조기 입학도 가능하다.
그 예가 바로 9세에 아카데미를 입학한 니콜라스 황자님이었다.
때문에 내가 처음 아카데미에 입학했을 때 이미 니콜라스는 졸업을 앞둔 6학년이었다.
그래서 니콜라스와는 아카데미에서 함께한 시간이 그리 길지 못했다.
아쉽지는 않았다.
어차피 학년이 다르면 그리 자주 마주치지도 못했으니까.
하지만 조금 허전했던 건, 내가 2학년이 되던 첫날.
여느 때처럼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 각자의 도시락을 들고 야외 테이블에 모였을 때, 비어 있는 한 자리를 본 순간이었다.
이후 해가 지나면서 한 사람씩 졸업을 하며 마침내 내가 6학년이 되었을 땐 제이크와 니나이나를 제외하고서는 아무도 남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아직도 아카데미를 생각할 때면 우리 7명이 함께였던 때의 추억을 제일 많이 떠올리고는 한다.
* * *
아카데미에 입학한 첫날.
나는 아카데미에서 받아 가져온 안내장을 참고해서 준비물을 이것저것 챙기고 있었다.
이미 나보다 먼저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친우들에게 들은 바가 있었지만, 그래도 실제로 다니게 되니 너무 설레고 떨렸다.
유치원을 졸업한 이후 5년 동안은 가정교사와 함께 공부를 했다.
다른 학생들과 함께 어울려 공부할 수 있다니 드디어 지루함이 사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유모, 아카데미에 다닐 때는 점심 도시락을 싸가야 한대.”
안내장에 적힌 내용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나는 옆에 있는 유모에게 넌지시 한마디 건넸다.
그러자 유모는 환히 웃으며 대답했다.
“어머, 저도 이미 마님께 들어 알고 있는 사실이랍니다. 진작에 주방에 알려놓았으니 걱정 마세요.”
“정말?”
“물론이지요. 우리 에미르 아가씨의 도시락은 웬만한 정찬 부럽지 않을 정도로 완벽하게 준비해 놓겠다고 주방장과 요리사들이 자신 있게 말하더라고요.”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되는데. 그냥 딱 적당히 나 혼자 먹을 수 있는 정도의 양이면 충분할 거야!”
매일매일 나만 한 높이의 도시락통을 마차 옆에 태운 채로 함께 등교할 생각을 해보니 어쩐지 아득해져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유, 그럼요. 물론이지요. 아가씨의 말대로 주방에 알려 놓을게요! 후후, 걱정하지 마세요!”
“……응, 믿을게. 유모.”
어쩐지 유모의 꿍꿍이 있어 보이는 싱글벙글한 표정을 보니 영 내 생각대로 되지만은 않을 것 같지만 말이다.
아무튼, 다음 날 나는 우리 집안의 고용인들 기준으로 적당히(?) 풍성한 양의 도시락과 함께 등교했다.
‘역시 이럴 줄 알았어……. 전혀 간소하지 않잖아!’
묵직한 도시락들을 아카데미 내 물품 보관함까지 들고 가니 팔이 빠질 것 같았다.
아카데미 내에서는 귀족, 왕족, 심지어 황족이라 해도 따로 시중인을 둘 수 없었다.
그래서 이 도시락을 운반하는 건 내가 해야 했다.
아마 요리사들과 유모도 이런 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나를 생각해서 하나하나 정성껏 만들어준 주방장과 요리사들의 마음이 몹시도 고맙긴 하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과하잖아, 휴우.’
그리고 마침내 점심시간.
나는 일찍이 다른 친우들과 약속했던 대로, 아카데미 중앙 정원의 야외 테이블로 향했다.
물론 내 옆엔 제이크가 함께였다.
제이크는 낑낑대며 많은 양의 도시락을 들고 있는 내가 버거워 보인다면서 내 짐을 잔뜩 가져가 나눠 들어주었다.
제이크의 도시락은 딱 평범한 정도의 크기였다.
어쩌면 내가 예상했던 대로, 당연하게도 말이다.
‘나만 튀고 있잖아…….’
주변을 둘러봐도 다른 학생들이 들고 있는 도시락통의 크기는 아무리 커봤자 손바닥 세 뼘 정도였다.
나처럼 도시락을 열 통씩 바리바리 싸 온 학생은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는 것이다.
‘쟨 도대체 뭐하는 아이길래 저렇게 많은 양의 도시락을?’이라고 묻는 듯한 흘끔거리는 시선이 은근히 신경 쓰였다.
‘오늘 집에 돌아가면 반드시! 내가 직접 주방에 찾아가서 조금만 해달라고 부탁할 거야.’
그렇게 굳게 다짐하고서 도착한 테이블에는, 이미 다른 친우들이 다 도착해 있는 상태였다.
“이쪽이야, 이쪽!”
나를 제일 먼저 발견한 건 니나이나였다.
그녀는 명랑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니나이나는 아카데미에 다니는 걸 꿈꿔 왔다고 했지. 소원을 성취해서 행복해 보이네, 니나이나.’
이윽고 화사한 금발을 가진 소녀가 고개를 돌렸다.
앨리스였다.
그녀는 몹시 밝은 목소리로 외쳤다.
“에미르 님, 어서 오세요!”
“어서 와서 앉도록.”
니콜라스 역시 나를 반겨주었다.
“……야, 근데 그 많은 도시락은 다 뭐냐?”
세드릭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질문했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나와 제이크가 들고 있는 도시락으로 쏠렸다.
나는 뜨거워진 낯으로 대답했다.
약간의 변명을 섞어서.
“믿기지 않으시겠지만 전부 다 제 도시락이에요. ……다 같이 나눠 먹으려고 좀 많이 쌌더니 이렇게 되어버렸네요.”
어쩌면 요리사들도 친우들과 나눠 먹는 걸 염두에 두고 이렇게 많은 양을 만들었는지도 모르겠다.
설마 나 혼자 다 먹으라고 만들었겠어?
“아, 다 같이 먹는 거야? 에미르 영애, 고마워. 그 도시락은 이리 줘. 내가 세팅하는 걸 도와줄게.”
마야가 밝게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내게서 도시락을 건네받아 갔다.
“좋은데, 다음부터는 너무 많이 싸 오지 마. 쓸데없이 무겁기만 하고. 힘들잖아, 네가. 안 그러냐? 안 그래도 비실비실하면서.”
동시에 세드릭이 툭 내뱉는 충고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그러려고요.”
하지만 속으로는 그의 말에 소심하게 반박했다.
‘난 비실비실하지 않아!’
다만 세드릭과 비교해서 체력이 약할 뿐이다.
“아무튼, 잘 먹을게!”
“잘 먹도록 하지. 고맙다, 에미르.”
이윽고 감사 인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잠시 후 테이블 위는 몹시도 풍성해졌다.
절반 이상이 내가 가져온 도시락들이었다.
꼭 작은 파티를 연 것 같은 모양새였다.
전채 요리부터 디저트까지 풀 코스로 준비된 도시락은 유모의 말대로 웬만한 정찬 부럽지 않을 정도였다.
다들 먹느라 말이 없어졌다.
“내가 생각했을 때 말이야, 새런 후작가의 요리사들은 황궁 요리사들만큼이나 실력이 뛰어난 것 같아. 그렇지 않아, 오라버니?”
“나도 동감한다.”
잠시 후, 음식을 이것저것 골라 맛보던 니나이나와 니콜라스가 내 도시락의 맛을 극찬했다.
그에 앨리스가 동의했다.
“맞아요, 저는 아직도 처음 후작저에 가서 먹었던 간식을 잊지 못한다니까요? 이 도시락들도 정말 맛있어요, 에미르 님!”
그렇게 한참 화기애애하게 점심 식사를 하고 있을 무렵.
다른 테이블과 멀찍이 떨어진 우리의 테이블로 한 소녀가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지?’
다른 아이들보다 내가 먼저 그 소녀의 인기척을 눈치채고 슬쩍 바라보았다.
아카데미의 명찰을 차고 있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곳 학생 같은데.
심지어 명찰 색깔을 보니 나와 같은 1학년이다.
어제 막 입학한.
“저, 저기……!”
소녀는 이 테이블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누군가를 불렀다.
일단 나와는 안면이 없었으므로, 나를 부르는 건 아닐 것이다.
“응?”
“무슨 일로 온 거지?”
모두가 그 소녀의 존재를 알아챘을 즈음, 니콜라스가 먼저 소녀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더니 조심스레 뺨을 붉힌 채 무어라 중얼거렸다.
“세, 세드릭 선배님께 드릴 게 있어서…….”
“……뭐?”
막 샌드위치를 베어 물던 세드릭이 당황한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았다.
전혀 자신에게 말을 걸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않은 듯한 모습이었다.
“이 편지…… 받아주세요! 아참, 제 이름은 제인이에요! 아카데미에 들어오기 전부터 선배님을 몇 번 뵌 적 있었는데…… 그때부터 쭉 좋아해 왔어요. 그, 그럼 전 이만!”
소녀는 황급하게 세드릭의 앞에 편지를 놓아두고는 부끄러운 듯 재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니나이나가 깔깔 웃으며 세드릭을 향해 놀리듯 물었다.
“뭐야, 세드릭 소공자. 인기 많네? 아무리 앨리스와의 정혼 약속이 몇 년 전 깨졌다지만, 저렇게 멋지게 고백해 오는 애도 있고?”
니나이나의 말에 앨리스는 이젠 자신과 상관없는 내용이라는 듯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이건…….”
그보다 세드릭은 무어라 반박을 해보고자 하는 모양이었지만, 어쩐지 평소의 그와는 다르게 당황한 모습이었다.
“아니긴 뭐가 아니라는 거야. 봐. 하트가 잔뜩 그려져 있는 이 봉투를. 누가 봐도 고백 편지인걸? 게다가 쟤가 널 좋아한다잖아.”
“……난 저 얠 몰라요.”
세드릭은 간신히 그렇게 중얼거렸다.
“이런, 나쁜 선배님이네. 후배가 용기 내서 수줍게 한 고백일 텐데 말이야.”
마야가 웃으며 하는 말에 세드릭이 발끈했다.
“마야 소공자가 그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 않아? 내가 들은 것만 해도 소공자가 받은 고백이 나보다 훨씬 많을 텐데.”
세드릭의 반격에 마야가 빙긋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나? 물론 그건 사실이지. 하지만 세드릭 소공자처럼 매정하게 모른 척하지는 않았어. 항상 친절하게 거절해 주었는걸.”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의 고백이 아니면 대답도 하고 싶지 않아.”
세드릭은 이를 앙다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자 니나이나가 호기심 넘치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좋아하는 사람? 그게 누구지?”
“……아, 말 안 해요. 그런 거 없어요, 없어.”
“이런, 황녀인 내가 질문을 하는데 감히 대답을 안 하다니. 무엄하구나.”
“진짜 없다고요……. 진짜로…….”
세드릭은 단단히 삐진 듯한 표정으로 빵이나 물고 있었다.
방금의 고백 사태를 목격한 나는 멍하니 생각에 빠졌다.
‘제이크도 고백을 받으면 어쩌지?’
‘아니, 잠깐. 내가 왜 제이크가 고백을 받을 걱정을 하고 있는 건데? ……제이크는 그냥 내 제일 친한 친구일 뿐이잖아.’
나는 내 스스로가 한 생각에 화들짝 놀랐다.
어째서 나도 모르게 저런 고민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만약 제이크가 고백을 받고, 혹여나 그 고백을 받아들이기라도 한다면……. 어쩐지 기분이 좀 이상해질 것 같아.’
제이크의 옆에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는 것을 좀처럼 상상하기가 힘들었다.
심지어 그 누군가를 제이크가 나보다 더 친밀하게 여기게 된다면……?
‘섭섭할지도 모르겠네. 하아, 내가 왜 이러지…….’
나는 제이크가 꼬물꼬물 걸어 다닐 때부터 봐왔다.
거의 가족이나 마찬가지인 절친이란 거다.
내게 제이크의 의미란 딱 그 정도여야만 맞는데.
하지만 아무리 친한 친구라고 해도, 이런 식의 기분이 드는 게 맞는 걸까?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나는 제이크와 눈이 마주쳤다.
제이크는 빙긋 눈웃음을 지었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그의 모습에, 방금까지 했던 상상들이 전부 별 의미 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차피 지금의 제이크는 내 친구니까.
그거면 된 거다.
‘걱정은 나중에 때가 되면 하자.’
그리고 내 걱정 역시 기우일 뿐이었다.
수많은 학생이 오가는 이 아카데미에서는 교내 커플이 정말 많이들 이루어지고는 했다.
딱히 연애 금지라는 교칙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아카데미를 다닌 지 한 달이 지나도 제이크가 누군가의 고백을 받은 모습은 보지 못했다.
물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지만.
나야 뭐 인기가 없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제이크의 경우는 사실 조금 의문이긴 했다.
‘제이크는 누가 봐도 잘생기고 친절한 데다 성격도 좋은데 어째서 아무도 고백을 하지 않는 걸까?’
아카데미에 다니는 누구 영애가 제이크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날 법한데도, 그런 이야기조차 듣지 못했다.
* * *
아무튼 시간은 흘러, 제국에서 일명 ‘고백 데이’로 유명한 기념일 날.
짝사랑하는 상대가 있는 아이들은 아침 일찍 아카데미로 와 상대방의 캐비닛에 고백 편지를 넣어놓았다.
“이거 봐! 나 편지를 받았어.”
“와, 정말?”
“세상에, 에밀리 네 캐비닛에도 편지가 들어 있는걸?”
사방에서 달콤한 핑크빛 하트가 퐁퐁 샘솟아 오르고 있는 와중.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내 캐비닛을 열어봤지만, 괜스레 끼이익 하는 듣기 싫은 경첩 소리만 날 뿐 아무것도 없었다.
“뭐, 역시나…….”
나는 그럴 줄 알았다고 생각하면서 캐비닛을 닫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내 어깨 너머로 누군가가 훅 고개를 들이밀며 묻는 게 아니겠는가.
“뭐가 역시나야?”
“깜짝이야! 제이크?”
고개를 돌리니 제이크가 장난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모습을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휴우, 놀랐잖아.”
“뭔가 기대하고 있던 얼굴인데.”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제이크가 순진무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쩐지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거짓말하는 것도 낯부끄럽게 느껴져서, 결국 솔직히 털어놓았다.
“사실 오늘이 고백데이잖아. 물론 그런 일이 나에게 없을 건 아는데! 아주 만에 하나 있어 혹시나 하고 캐비닛을 열어본 것뿐이야.”
“아, 그랬구나.”
제이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물었다.
“그래서, 뭐가 좀 있었어?”
“……아니, 당연히 없었지. 아무것도. 텅 비어 있어. 평소와 같이.”
“음, 그렇구나.”
그런데 어째서인지 대답하는 제이크의 표정이 이미 예상했다는 듯한 태연한 얼굴이었다.
‘뭐, 내 옆에서 계속 나를 지켜본 결과 내가 인기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어서 저런 얼굴을 하는 걸지도 모르지.’
그런데 문득 궁금해졌다.
고백데이인 오늘도, 제이크는 아무 고백도 받지 않았을까?
“저기, 제이크. 너는 캐비닛 확인해 봤어?”
내가 넌지시 묻자, 제이크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되물었다.
“응?”
“혹시 네 캐비닛에도 누군가가 편지를 넣어놨을 수도 있잖아.”
“에이, 절대로 그럴 일은 없어. 미르. 걱정하지 마.”
100% 그럴 일이 없다고 확신하는 제이크는 어쩐지 믿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어쩐지 의아해졌지만, 나는 제이크를 다시금 채근했다.
“아니, 걱정한 적은 없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한번…….”
그때였다.
저 멀리 복도에서부터 다급한 얼굴로 뛰어오는 세드릭이 보였다.
아침부터 뭐가 그리 급한 걸까.
준비물을 안 챙겨오기라도 한 걸까?
세드릭은 제이크와 나를 보고 화색을 띠더니 크게 외쳤다.
“야, 제이크! 네 캐비닛에서 물건 좀 빌린다! 쓰고 바로 갖다 놓을게!”
“맘대로.”
제이크가 어깨를 으쓱이자, 세드릭이 신나게 제이크의 캐비닛으로 뛰어갔다.
그리고 곧이어, 세드릭의 비명이 들렸다.
“으아악! 뭐야?”
나는 깜짝 놀라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세드릭은 감전이라도 된 듯 파드득 놀라며 제이크의 캐비닛 손잡이에서 손을 뗐다.
그제야 제이크는 아차 하며 제 캐비닛으로 다가가 무언가를 해제하는 주문을 외웠다.
세드릭은 씩씩대며 제이크에게 따졌다.
“너, 너, 캐비닛에 무슨 짓을 해놓은 거냐? 번개 맞은 줄 알았잖아!”
“미안, 실수였어. 미리 말해줬어야 했던 건데.”
“뭐, 뭣?”
“그래도 몸에 해로운 건 아니니까 그렇게 화내지는 마, 세드릭 소공자. 화내는 게 건강에 더 나빠.”
“…….”
“그리고 번개라니, 그 정도는 아니야. 엄살 부리지 않아 줬으면 해. 정전기처럼 살짝 따끔한 것뿐인걸.”
태연히 설명하는 제이크를 본 세드릭이 입을 쩍 벌린 채 얼빠진 얼굴로 있다가,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넌 정말 이상한 놈이라니까, 제이크.”
“나도 알고는 있어.”
그 둘의 언쟁을 잠시 바라보던 나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제이크, 고백 편지 받기 싫어서 캐비닛에 방어 마법이라도 설치해 둔 건가?’
그 정도로 제이크가 고백받기 싫어하는 줄은 또 몰랐는데 말이다.
시간은 흘러, 어느덧 아카데미에도 첫 여름방학이 찾아왔다.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내게 세드릭이 마침 좋은 제안을 해왔다.
“야, 이번 여름방학에는 다 같이 별장에 가는 게 어떠냐?”
“좋은 생각인데요? 그런데…… 별장이라니요?”
“후훗, 이번에 대공가 소유로 새로 장만한 별장이야. 아버지께서 가도 된다고 허락해 주셨어! 물론 우리 대공가의 기사들이 호위하고 있으니 안전도 문제없고.”
세드릭이 자신만만한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과연 좋은 생각 같았다.
세드릭이 보여준 지도를 보니, 별장의 위치는 작은 산과 계곡을 끼고 앞엔 널따란 평원이 펼쳐져 있는 곳이었다.
우리 일곱 명이서 뛰어놀기 딱 좋게 넓기도 했다.
“좋아요! 일단 저는 갈게요!”
“그럴 줄 알았어. 그럼 난 다른 녀석들에게도 제안하러 간다. 이만.”
세드릭은 씨익 웃으며 지도를 들고 일어섰다.
다행히도 이후 다른 아이들도 모두 세드릭의 별장에 가는 것에 동의했고, 내 부모님도 흔쾌히 수락해 주셨다.
그리하여 우리는 여름방학에 별장으로 떠나게 되었다.
* * *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우리를 반긴 건, 아찔하게 내리쬐는 뙤약볕이었다.
“이 햇빛 좀 보세요! 에미르 님, 많이 더우시죠? 이럴 줄 알고 제가 모자를 챙겨 왔는데…….”
“정말요? 고마워요, 앨리스. 잘 쓸게요!”
앨리스가 준 여행용 모자를 쓰자 정말로 여름 휴가를 온 것 같은 기분이 물씬 들었다.
“정말 덥네, 이런 날씨는 익숙하지 않은데.”
웬만해서는 땀 한 방울 흘리는 법이 없던 마야도 더운 듯 연신 손으로 부채질을 했다.
“……젠장, 이 정도로 더운 줄은 미처 몰랐는데. 그래도 별장 안에 들어가면 시원할 거니까 다들 걱정하지 마라고요.”
다들 더워하는 모습에 세드릭이 지레 찔려서 변명을 했다.
그래도 세드릭의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는지, 별장 안은 냉각 마법으로 마치 가을이 온 것처럼 시원했다.
그때였다.
별장 안 어딘가에서 커다란 상자를 챙겨 온 세드릭이, 그 안에서 주섬주섬 무언가를 꺼냈다.
“뭐야?”
“악기잖아?”
“류트네.”
세드릭이 꺼낸 건 류트라는 악기였다.
당연하게도 아이들의 시선이 전부 세드릭에게로 쏠렸다.
그러자 세드릭이 평소답지 않게 살짝 부끄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흠, 흠. 실은 내가 류트를 좀 연습해서 말이야.”
“와, 연주해 주시는 거예요?”
나는 깜짝 놀라 질문했다.
그러자 세드릭이 낯을 붉히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껏 혼자 연습해 오다 누군가에게 보여주는 건 처음이야.”
“와, 정말요? 이거 영광인데요? 세드릭 님의 첫 연주를 듣다니. 박수!”
나는 감동 어린 목소리로 세드릭을 응원해 주었다.
그러자 다들 나를 따라 박수를 쳤다.
어쩐지 상당히 민망해 보이는 세드릭이었으나, 그는 이내 원래대로 자신감 있는 얼굴을 하고서 류트 연주를 시작했다.
‘세드릭, 몰랐는데 악기 연주도 곧잘 하잖아?’
연주를 듣던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드릭에게서 예상외의 면모가 보였으니까.
‘어쩌면 이 연주를 보여주려고 별장으로 우리를 초대한 건가?’
세드릭은 어디서나 자신감이 항상 넘치는 편이었지만, 평소의 모습과 다른 자신을 보여주는 건 꺼려 할 때가 많았다.
그런 세드릭도 유일한 예외를 두는 게 있었는데, 바로 자신의 형제들과 나를 포함한 유치원 친우들이었다.
오직 자신과 친한 몇몇 사람에게만, 세드릭은 자신의 진실된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런 생각은 나만 한 게 아니었는지 다들 의외라는 표정으로 감탄하며 세드릭을 바라보고 있었다.
“멋진걸, 세드릭?”
“연주 잘하네.”
니콜라스와 마야도 세드릭을 칭찬했다.
그때, 연주를 가만히 듣던 니나이나가 문득 기시감이 든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잠깐, 이건 세레나데 아니야? 그러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불러주는 노래.”
“……!”
니나이나의 말에 세드릭이 살짝 놀란 표정으로 연주를 멈추었다.
그리고 그는 신기해하며 대답했다.
“와, 이걸 알아챌 줄은 몰랐는데. 맞아요. 세레나데.”
세레나데가 맞다고 고백하며, 세드릭은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니나이나는 자신이 정답을 맞추었다는 게 기쁜 듯 깔깔 웃으며 중얼거렸다.
“뭐, 나야 나름 음악에 조예가 깊으니까. 몇 년 전부터 교양을 위해 공부 중이거든. 그래서 듣자마자 바로 알았지 뭐야.”
그때, 문득 니콜라스가 의문이 든 모양인지 물었다.
“그런데 세레나데라니. 세드릭 소공자가 이런 노래도 알고 있을 줄은 미처 몰랐는데. 예상외로 낭만적인걸.”
“그러게요. 뭐, 세레나데를 불러주고 싶은 사람이라도 생겼나 봅니다.”
마야가 니콜라스의 말에 동조하며 한마디 보탰다.
그러자 세드릭이 흠칫 놀랐다.
마치 자신의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이.
‘그런데 어쩐지, 방금까지 세드릭의 시선이 내 쪽에 멈춰 있었던 것 같았는데 착각일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세드릭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향해 있는 걸 보고 그저 잘못 본 거겠지 하고 잊어버렸다.
“뭐, 그냥…… 어쩌다 보니 이 노래를 연습한 거지 딱히 누군가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으로 한 건 아닙니다.”
세드릭은 헛기침을 해대며 고개를 살짝 돌렸다.
하지만 나는 보고 말았다.
세드릭의 왼손이 작게 꼼지락거리는 것을.
“거짓말.”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물론, 아주 작은 혼잣말일 뿐이었지만.
왜 거짓말이냐고?
세드릭이 왼손을 꼼지락거리는 건, 본인은 아마 모르겠지만 실수나 창피함을 감추기 위해 거짓말할 때 하는 버릇이니까.
10여 년 가까이 봐온 세월이 있는데 모를 수 없었다.
나는 내 주변인들의 버릇을 아주 잘 알았다.
“……!”
분명 작은 목소리였는데, 어찌 된 일인지 세드릭만은 그런 내 중얼거림을 들은 모양이다.
그의 눈이 미묘하게 커졌다.
“…….”
입술을 살짝 벌리고 멍하니 날 바라보던 세드릭은, 5초도 되지 않아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거짓말을 들킨 게 창피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런 세드릭을 향해 싱긋 미소 지으며 생각했다.
‘저토록 까칠하고 취향 까다로운 세드릭에게도 비로소 좋아하는 상대가 생겼구나. 잘은 몰라도 분명 좋은 사람이겠지.’
문득 궁금해졌다.
‘상대가 누구이려나. 같은 아카데미 학생?’
그 상대도 세드릭을 좋아하고 있을까?
아니면 세드릭 혼자만의 짝사랑일까.
‘뭐, 세드릭은 겉으로는 까칠해 보여도 사실 정도 많고 은근히 세심한 면도 없잖아 있으니까.’
게다가 객관적으로 친구인 내가 봐도, 원작의 서브 남주답게 몹시 잘생겼고 말이다.
‘그러니까 상대방도 그런 널 알아본다면, 분명 잘될 수 있을 거야. 세드릭.’
나는 마음속으로 세드릭을 응원해 주었다.
그리고 생각은 이쯤에서 멈추기로 했다.
딱히 세드릭이 밝히고 싶어 하지도 않아 보이고, 나 역시 친구의 비밀을 일부러 캐내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까.
* * *
이후 우리는 세드릭의 별장에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즐겁게 먹고 마시고, 간혹 야외에서 어릴 때처럼 뛰어놀고.
밤이 되면 잠들기 전 니나이나와 앨리스와 침실에서 수다도 떨고.
시간이 느리게 가는 것 같으면서도, 막상 달력을 살펴보면 너무도 훅훅 지나가 버리는 시간에 아쉬워질 따름이었다.
그리고 2주 후.
드디어 세드릭의 별장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날이었다.
우리는 오늘 아주 특별한 무언가를 하기로 했다.
바로, 세드릭의 별장 뒷마당에 타임캡슐을 묻는 것이다.
며칠 전 내 제안으로 시작된 일이었다.
“우리, 타임캡슐을 묻는 게 어때요?”
“타임캡슐? 그게 뭔데?”
“아, 저 들어봤어요, 에미르 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담아 묻어두었다 나중에 열어보는 거라면서요?”
“아, 그게 정말이야?”
아이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각자 소중하게 여기는 물건을 하나씩 묻는 거예요. 그리고 10년 후에 어른이 되었을 때 열어보는 거죠! 어때요?”
“좋지.”
“그래, 좋은 생각인 것 같다. 이것도 추억이 될 수 있겠지.”
다들 내 의견에 동의했다.
그때, 나는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떠올리고 아차 했다.
“……아, 그런데 혹시 썩으면 어쩌지?”
이 세계에 비닐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으니, 뭘 묻어도 10여 년 되는 세월 동안 썩어서 흙이 되거나 고철이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을 해결해 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제이크였다.
“걱정 마, 미르.”
“응?”
“내가 보존 마법을 써줄게. 이런 건 내가 전문이야.”
“아, 정말? 다행이다. 생각해 보니 마법을 쓰면 되는 거였구나. 정말 고마워, 제이크!”
나는 기쁜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렇게 된 일이었다.
설마 더운 날씨에 다 함께 모여 별장 뒷마당의 나무 아래 땅을 파게 될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일이었지만.
“하아, 역시나 힘들잖아. 오라버니, 차라리 아까 기사들이 도와준다고 할 때 그러라고 할 걸 그랬어.”
니나이나는 투덜대면서도 열심히 구슬땀을 흘리며 삽으로 흙을 퍼냈다.
평소의 우아한 차림과는 다르게 승마복 바지를 걷어붙여 입고 땅을 파고 있는 그녀는, 말과는 다르게 어쩐지 보람차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헉, 헉. 미안하다, 니나이나. 뿐만 아니라 다들…… 괜히 나 때문에 고생을 하고 있구나. 이제라도 기사들을 부르는 건…….”
한편, 니콜라스는 상당히 힘에 부쳐 보였다.
하긴 매일 서가와 책상에만 틀어박혀 있던 터라 어쩔 수 없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니콜라스, 분명 원작에서는 일도 잘하고 똑똑하지만 체력도 뛰어난 남주였는데! 어쩌다가!’
원작을 바꿔 버렸더니 이런 사소한(?) 문제가 생겨 버렸다.
아무래도 니콜라스는 앞으로 세드릭과 함께 체력 단련을 좀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외로 마야와 제이크는 일을 잘했다.
니콜라스의 혼잣말을 들은 마야가 걱정스럽게 중얼거렸다.
“거의 다 했는데 이제 와서 기사들을 부르기엔 너무 모양이 없어 보이지 않을까요, 전하?”
니콜라스는 대답과 동시에 삽으로 중심을 잡다 말고 비틀댔다.
“헉, 그런가……. 그럼 어쩔 수 없군. 노력하겠다. 흐억.”
“…….”
앨리스가 그런 니콜라스를 말없이 바로 세워주었다.
“에휴, 다들 비실비실하긴. 이런 것도 못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땅 주인인 세드릭은 투덜거리면서도 지친 기색 하나 없이 마무리 작업을 하고 있었다.
사실 땅파기의 대부분은 세드릭이 해낸 것이다.
일당백이라고 해야 할까?
기사단과 함께 합숙 연습을 하면서 땅 파는 것쯤은 맨손으로도 가능해졌다고 한 말이 과연 허풍은 아닌 모양이다.
‘만약 이 세계에도 포크레인이 있다면 그건 세드릭이 아닐까 싶네.’
다들 힘들어하는 것 같아, 나는 잠시 삽을 놓고 별장으로 들어가 하녀로부터 시원한 물을 여러 병 얻어왔다.
“자, 여기 다들 물 마시세요!”
“헉, 고맙다.”
“잘 마실게, 미르.”
다들 목이 탔던 모양인지 유리병에 든 물을 순식간에 비워냈다.
다행히도 물을 마시고 다시 기력을 보충한 우리는 얼마 가지 않아 깊은 구덩이를 파냈다.
니나이나가 잔뜩 설레며 말했다.
“자, 여기에 각자의 타임캡슐이 든 상자를 넣는 거야. 차곡차곡 쌓아서.”
상자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오직 본인만이 알 수 있었다.
다들 각자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묻는 모양인지, 표정이 아련했다.
“자, 다 묻었다.”
파낸 흙을 다시 쌓아 올리고 삽으로 꾹꾹 다진 세드릭이 뿌듯한 얼굴로 얼굴에 흐른 구슬땀을 닦아냈다.
그러고는 뒤돌아서서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아, 어디 물 남은 거 없나?”
“여기 있어요!”
마침 반쯤 남은 물병이 딱 하나 있었기에, 나는 그걸 세드릭에게 건넸다.
“……아. 고마워, 에미르.”
혼잣말이었기에 누군가가 대답해 줄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세드릭은 잠시 멈칫하다 이내 밝게 웃으며 내가 건넨 물병을 받아 들었다.
“……푸우, 시원하다.”
그러고는 눈 깜짝할 새 제 머리 위로 물을 쏟아버리는 게 아니겠는가.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시에 물에 젖은 붉은빛 머리를 쓸어넘기던 세드릭과 시선이 마주쳤다.
“왜 그렇게 봐?”
세드릭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나는 걱정스럽게 대답했다.
“이제 곧 해도 지는데, 아무리 지금이 덥다지만 물에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감기 걸려요.”
“……푸핫.”
진지하게 내뱉은 내 말을 물끄러미 경청하던 세드릭은 작게 입가를 가리며 폭소했다.
“왜 웃어요. 진짠데?”
내가 부루퉁하게 묻자, 그제야 세드릭은 괜스레 기지개를 쭉 켜는 척하며 빠르게 둘러댔다.
“아니, 뭐. 딱히 웃겨서 그런 건 아니고. 새삼 날 걱정해 주는 건 역시 너뿐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서 말이지.”
“네?”
빠르게 지나가 버린 말은 몇 단어만 귀에 꽂혔을 뿐, 제대로 듣지 못해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세드릭은 어느새 딴청을 피웠다.
“뭐, 못 들었으면 말고. 아무튼 걱정할 건 없어. 곧 저기 공터에 모닥불을 피울 거라고. 그러니까 옷은 금방 마르겠지. 캠프파이어 하기로 했잖아.”
“아, 맞다. 캠프파이어!”
세드릭의 말에 나는 잠시 잊고 있었던 걸 기억해 냈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별장의 집사에게 마시멜로와 과일 꼬치들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했었는데!
“그럼 세드릭, 저는 주방에 들러 캠프파이어에 쓸 음식들이 다 준비됐는지 확인하고 올게요!”
나는 다급히 등을 돌려 별장 내부로 뛰어갔다.
뒤에서 얼핏 무어라 세드릭이 중얼거리다 만 것도 같았다.
* * *
저 멀리 뛰어가는 에미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세드릭은 이내 나무 등걸이에 기대앉으며 중얼거렸다.
“……쓸데없는 걱정이야. 나, 유치원 졸업한 이후 감기 걸린 적은 단 한 번도 없다고.”
에미르.
넌 분명 나에 대해 아는 게 많지만, 그래도 아직 모르는 게 있구나.
세드릭은 그렇게 생각하며 풋 웃었다.
어느새 에미르의 말대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 * *
시간은 흘러, 어느덧 겨울이 되기 직전의 가을이 되었다.
이맘때쯤 아카데미에서는 전 학년 학생들이 모두 참가할 수 있는 가장무도회를 개최한다.
평범한 드레스나 정장을 입는 게 아니라, 가지각색의 분장을 하고 참석하는 게 이 무도회의 묘미라 고 한다.
아직 무도회까지는 2주나 남았지만, 다들 벌써부터 준비를 시작하는 듯했다.
‘아, 고민된다. 고민돼. 어떤 분장을 하고 무도회에 가야 하는 걸까?’
나 역시 슬슬 준비해야 할 텐데, 마땅한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과 겹치지 않으면서, 나만의 개성이 드러날 만한 분장을 하고 싶었다.
마침 다른 친우들도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점심시간, 한자리에 모여 대화하던 우리는 자연스레 2주 후 있을 가장무도회에 대한 주제를 꺼냈다.
“맞다, 그러고 보니 다들 가장무도회 때 어떤 가장을 할지 정했니? 나는 아직 못 정했는데.”
제일 먼저 이야기한 것은 니나이나였다.
그녀는 몹시도 설레는 표정으로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하긴, 니나이나는 몇 달 전부터 아카데미에서 개최하는 무도회와 축제가 기대된다며 종종 이야기를 꺼내고는 했었지.’
어쩐지 그런 니나이나가 귀엽게 느껴져, 나는 작게 미소 지었다.
“저도 아직 못 정했어요, 전하.”
“나도.”
“저도요.”
대답하는 걸 들어보니, 아마도 다들 나와 니나이나처럼 가장 컨셉을 정하지 못한 모양이다.
그리고 바로 옆에서 묵묵히 식사하던 니콜라스가 고개를 살짝 갸웃거리며 말했다.
그는 가장무도회에 관심을 두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니나이나, 나는 아카데미에 다니는 6년 동안 가장무도회에 참석한 적이 한 번도 없구나. 이번에도 참석하지 않으려 한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오라버니. 가장무도회 같은 재미있는 이벤트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게 아니라고.”
니콜라스의 말에 니나이나가 얼굴을 작게 찌푸리며 대꾸했다.
그러자 니콜라스는 살짝 당황하며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학업과 관련 없는 일인데 괜히 시간을 낭비하는 게 아닐까 하여…….”
“관련이 없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가끔은 그렇게 쉬고 놀아주는 날도 있어야지, 안 그래? 어떻게 오라버니처럼 매일 일과 공부만 하면서 살아. 나는 그런 거 못 해.”
니나이나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나도 살짝 끼어들어 말을 보탰다.
그녀의 말대로, 나는 니콜라스에게도 가끔은 쉬어가는 날이 있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맞아요, 니콜라스 전하. 그동안 계속 가장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으셨다고 하셨죠. 하지만 내년이면 전하는 졸업하시고, 올해가 마지막인 거잖아요.”
“……그렇지.”
니콜라스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빙긋 웃으며 그를 설득했다.
“그러니까 마지막을 기념하는 의미에서 이번 한 번은 참석하시는 게 어떨까요?”
“으음…….”
니콜라스가 고민되는 얼굴로 침음을 흘렸다.
나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사실 제가 전하를 포함한 우리 모두와 가장무도회를 함께하고 싶어서이기도 하고요.”
“……그래, 이번 한 번쯤은 괜찮겠지. 에미르 영애의 말이 일리가 있군.”
결국 내 말에 설득당한 니콜라스가 참석하겠다고 답했다.
나는 어쩐지 뿌듯해졌고, 옆에서 그걸 지켜보던 니나이나가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니콜라스를 놀렸다.
“어머, 오라버니는 내가 제안할 땐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에미르가 말하니 바로 알겠다고 하는구나? 이런, 이런. 수상한데.”
“……뭐가 수상하다는 건지. 그런 적 없다. 에미르의 말이 좀 더 설득력 있었을 뿐이지, 크흠.”
니콜라스는 애써 헛기침을 하며 말을 돌렸다.
마침 앨리스가 입을 열었다.
“저는 작년에 열렸던 가장무도회에는 그냥 평범한 드레스를 입고 갔어요. 그런데 대부분이 평범과는 거리가 먼 분장들을 하고 있어, 오히려 제가 더 튀어 보이더라고요.”
“맞아, 앨리스 영애의 말대로야. 나도 모르고 1학년 때는 가장을 하지 않은 채로 무도회에 참석한 적이 있었지.”
마야가 동감한다는 얼굴로 대꾸하자, 그녀는 어깨를 으쓱이며 덧붙였다.
“꽃 분장을 하고 온 사람도 보았고, 심지어 요정 분장을 하고 온 사람까지 봤어요. 그 분장을 본 에이비시 님이 저게 뭐냐며 웃으셨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그때였다.
‘꽃? 요정? ……아!’
앨리스의 말에 내 머릿속에서 괜찮은 아이디어가 마구 떠올랐다.
나는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뭔데?”
다들 궁금해하는 얼굴로 나를 주목했다.
“일단, 우리 일곱 명이서 컨셉을 비슷하게 꾸며 가장하는 거예요!”
내 말을 들은 아이들은 꽤나 일리가 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 좋은 생각이네. 각자 따로 하는 것보다 훨씬 나아 보여.”
“맞아.”
“그런데 다 같이 어떤 컨셉으로 맞추겠다는 건데?”
답지 않게 조용하던 세드릭이 문득 궁금하다는 얼굴로 물었다.
나는 생각해 둔 걸 말했다.
“음…… 사실 여러 컨셉이 있겠지만, 인외 존재로 공포스러운 건 어때요? 유령이라든가, 뱀파이어라든가, 혹은 늑대인간…… 아무튼 전설의 존재들로 분장하는 거죠!”
“공포? 세상에, 재미있겠다! 정말 좋은 생각인 것 같아, 에미르.”
내 말에 니나이나가 꺅 소리를 지르며 즐거워했다.
“다들 우리를 보고 깜짝 놀라는 거 아니니? 생각만 해도 즐거운걸?”
“저도 재미있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에미르 님.”
“나도.”
다행히도 다들 무서운 분장에 거부감을 느끼지 않아, 곧바로 우리의 가장무도회 컨셉이 정해지게 되었다.
“그럼, 각자 어느 분장을 맡을지 말해볼까? 음, 일단 나는 마녀가 하고 싶어.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것 말이야. 아티팩트를 쓰면 실제로 공중에 떠다닐 수도 있을 테고.”
니나이나는 벌써부터 생각해 둔 것이 있었다는 듯 자신 있게 마녀 가장을 하겠다고 했다.
“흐음, 나는 에미르 네가 아까 말했던 늑대인간. 그걸로 할래.”
티스푼을 빙글빙글 돌리며 장난치던 세드릭은 갑자기 날 바라보며 저렇게 말했다.
앨리스 역시 곧바로 결정을 내린 듯 대답했다.
“저도요! 저도 에미르 님이 말씀하셨던 것 중에 유령이 하고 싶어요. 홑겹 이불 같은 흰 천을 뒤집어쓰고 다니면, 다들 진짜인 줄 착각하는 거 아닐까요?”
“그럼 나는 뱀파이어가 좋겠다.”
마야도 한마디 했다.
어쩐지 마야의 창백한 피부에 몹시도 잘 어울릴 것 같은 분장이었다.
아직 결정을 못 내린 몇몇 아이도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의 분장을 선택했다.
그렇게 우리는 2주 동안 열심히 의상과 소품을 준비하며 각자의 시간을 보냈다.
* * *
마침내 가장무도회가 열리는 당일.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아카데미에 도착한 우리는 서로의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미리 알고는 있었지만, 은근히 무서운걸?’
황실의 마차에서 내린 니콜라스를 보고 나는 순간 주춤했다.
마지막까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그를 위해 내가 좀비 분장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었는데…….
‘실력 좋은 궁인들에게 분장을 받은 모양이네, 니콜라스.’
녹황색으로 물든 피부와 튀어나온 상처 분장이 정말로 사실적이었는데, 그와 어울리게 더럽고 군데군데 찢어진 제복까지 입고 있는 그였다.
니콜라스를 보고 있으니 뭔가 내가 좀비 영화의 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좋은 아침이야, 에미르 영애. 인형 분장 잘 어울리네.”
그는 미소 지으며 내게 인사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전하께서도 너무 감쪽같은 가장을 하고 오셨네요. 놀랐지 뭐예요, 하하.”
“그래? 에미르 영애를 놀라게 하다니, 좀 미안하군.”
머쓱해하는 니콜라스에게 나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뇨, 아뇨. 이건 오히려 칭찬이라고요, 전하. 단연컨대 오늘의 주인공은 전하일 게 분명해요. 최고!”
“……그 정도인가?”
“그럼요!”
그때 마침 니나이나도 마차에서 쏙 내렸다.
그녀는 얼마 전 했던 말대로 평범해 보이는 나무 빗자루를 들고 있었다.
그러곤 갑자기 그 빗자루를 탄 채 공중을 쓰윽 날아와 내게로 다가왔다.
니나이나는 키득대며 내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 에미르? 오라버니 보고 놀랐지? 실은 나도 그랬어. 마차 타고 오는 동안 멍하니 있다가 간혹 시선을 돌릴 때면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줄 알았지 뭐야?”
“네, 조금 놀랐어요. 그런데 전하, 빗자루를 타는 게 몹시도 자연스러우신데요? 꼭 진짜 마녀 같아요.”
내 칭찬에 니나이나는 마녀처럼 매혹적인 미소를 지었다.
“어머, 정말? 그거 영광인걸? 실은…… 하아, 이건 비밀인데. 특별히 너에게만 알려주마. 귀 좀 대봐.”
“뭔데요?”
“황궁 뒤뜰, 사람 없는 곳에서 일주일 동안 계속해서 빗자루 타고 나는 연습을 했어. 그러다가 균형을 잃어서 아티팩트를 몇 개나 깨 먹었는지 몰라!”
“세상에나. 노력의 결과였군요! 대단해요, 전하.”
“아니, 대단하긴 뭘. 그보다 에미르, 이렇게 입고 오니 정말로 도자기로 만든 매끈한 인형 같잖아?”
니나이나가 가까이서 날 보고 놀라며 내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매만졌다.
겉으로 보기에 부드러워 보이는 내 머리카락은 만져 보면 도자기처럼 딱딱하게 굳어 고정되어 있었다.
‘후후, 오늘 아침 새벽부터 다듬어 놓은 분장이라고요.’
나는 속으로 흐뭇하게 생각했다.
내가 고른 분장은 저주받은 도자기 인형이었다.
군데군데 꽂힌 핀과 깨진 듯한 피부 표현이 내 마음에 쏙 들었다.
‘전부 내가 한 것치고, 이만하면 정말 잘한 것 같아.’
나는 일부러 인형처럼 눈을 느리게 깜빡깜빡 뜨며 니나이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웃으며 중얼거렸다.
“꼭 내가 어릴 적 갖고 놀았던 인형이 생각나네. 물론 그건 저주 인형이 아니라 그냥 인형이긴 했지만. 후후.”
“맞다, 전하랑 유치원 다닐 적 가끔 도자기 인형도 갖고 놀고는 했죠.”
우리는 잠시 옛날 추억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마침 저 멀리서 다가오는 익숙한 테이온 공작저의 마차를 보고 대화가 끊겼다.
“에미르!”
마차에서 내린 제이크가 나를 불렀다.
“제이크, 좋은 아침이야!”
나는 그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제이크가 선택한 분장은 다름 아닌 악마였다.
‘어쩐지, 순진해 보이는 제이크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데.’
……라고 어제까지만 해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이렇게 보니 의외로 잘 어울렸다.
목 아래부터 발끝까지 온통 새까맣기만 한 차림이 몹시도 눈에 띄었다.
부드럽고 순해 보이는 인상에 대비되는지라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흉악해 보이는 가짜 날개와 뿔까지 달고 있으니, 정말로 누군가를 타락시키러 온 못된 악마처럼 보였다.
잠시 멍하니 제이크를 바라보던 나는, 장난스러운 웃음을 머금고 그에게 다가갔다.
“뭐야, 제이크. 오늘 좀 멋진걸?”
“……미르 네 눈에 그렇게 보인다면 다행이야. 칭찬 고마워. 그러는 너도 오늘 정말 멋져 보여.”
제이크가 빙긋 눈웃음을 지었다.
그는 검은 레이스 장갑이 끼워진 내 손을 조심스레 잡으며 물었다.
“이 정도면, 오늘 인형인 네 옆에 있어도 부족하지 않겠지?”
어쩐지 의기소침해하는 것 같은 제이크의 말에, 나는 걱정 말라는 의미로 호기롭게 대답했다.
“물론이지. 저주 인형과 악마라니. 정말이지 딱 어울리는 조합인걸. 우리 둘이 같이 다니면 틀림없이 다들 쳐다볼 거야.”
“그런가.”
그제야 환한 미소를 되찾은 제이크였다.
나는 그의 손을 붙잡고 이끌었다.
“자, 가자. 아마 다들 이미 와 있을 거야. 우리도 이제 가장무도회에 참가할 시간이야!”
* * *
아카데미의 별관은, 어느새 훌륭한 무도회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오늘 가장무도회는 아카데미의 축제도 겸하고 있기에, 보통의 무도회보다 훨씬 흥겨운 분위기였다.
‘사람이 너무 북적여서 춤을 추기는 어려울 것 같아.’
무도회장을 둘러보던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무도회장의 한가운데에 몇몇 학생이 짝을 지어 가볍게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보였지만, 도저히 거기 끼어들어 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뭐, 됐어. 춤을 추는 건 나중에도 기회가 많으니까. 애초에 첫 춤은 데뷔탕트 때 제이크와 추기로 약속도 해놨단 말이지.’
나는 애써 미련을 지웠다.
하지만 그때, 내 표정을 지켜보던 제이크가 물었다.
“미르, 혹시 춤추고 싶은 거야?”
“응? ……아니? 그냥, 사람이 너무 많으니 차라리 잠시 나갔다 오는 게 어떨까 고민하고 있었어.”
“그렇구나. 진작 말하지 그랬어. 그럼 함께 나갈까.”
“그래, 좋아.”
우리는 함께 무도회장을 나왔다.
무도회장 밖 야외에서는 몇몇 학생이 직접 축제 부스를 두고 운영하고 있었다.
제이크와 함께 축제 현장을 돌아다니며 구경하던 도중.
어느샌가 내 곁으로, 쉬이익 하고 무언가가 날아오는 듯한 바람 소리가 들렸다.
이윽고 눈 깜짝할 사이 툭 하고 누군가가 내 곁에 내려앉았다.
“까, 깜짝이야!”
“아하하, 에미르! 뭘 놀라고 그래?”
화들짝 놀라 눈을 질끈 감은 내 곁에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그래.
혹시나 했는데 눈을 떠보니 역시나 그 정체는 니나이나였다.
“……니나이나 전하?”
“그래, 나야! 후후, 놀라게 해서 미안. 하지만 에미르 네가 놀란 모습을 보니 좀 귀엽네. 그보다 제이크 영식이랑 즐겁게 데이트 중이었나 봐?”
“네, 뭐.”
“데, 데이트라니요!”
태연하게 그렇다고 답하는 제이크와는 달리 나는 얼굴을 붉히며 펄쩍 뛰었다.
그러자 니나이나는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함께 다니면 그게 데이트지. 다른 게 데이트야?”
“그렇긴 하지만…….”
“아하하! 뭐, 아무튼 빗자루는 이쯤 타야겠다. 여기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타고 다니기 힘들어.”
내가 머뭇거리자 니나이나는 재미있다는 듯 깔깔 웃으며 제가 타고 있던 빗자루를 멈춰 세웠다.
이제 보니 그런 그녀의 반대편 손엔 색색의 아이스크림이 들려 있었다.
‘으음, 니나이나는 이미 알차게 축제를 즐기고 있던 모양이네.’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니나이나의 손에 들린 아이스크림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니나이나가 물었다.
“에미르 너도 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거야? 하지만 어쩌나, 이미 반쯤 먹어버렸는데. 물론 원한다면 줄 수 있어.”
“아, 아니요. 괜찮아요.”
내가 두 손을 내젓자 니나이나는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살짝 고개를 갸웃하다가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 제이크 영식도 있지, 참. 그렇다면 차라리 새로 사 먹는 게 좋겠다. 이 아이스크림은 저기 저쪽에 있는 빨간색 천막 부스에서 산 거야.”
“아, 정말요?”
사실 아닌 척했지만 니나이나의 아이스크림이 꽤나 탐스러워 보였기에 어디서 샀는지 궁금하던 차였다.
그때 니나이나가 한마디 더 덧붙였다.
“참고로, 아이스크림 말이지. 세드릭 영식이 직접 팔고 있어.”
“네? 뭐라고요?”
“너도 안 믿기지? 나도 그랬어. 가서 줄을 섰는데, 글쎄, 카운터 너머로 익숙한 늑대인간 분장을 한 세드릭 영식이 보이는 거야.”
“축제 부스에는 참가 안 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세드릭 님은 그런 거 안 할 줄 알았는데.”
“그러게. 듣기로 원래 하기로 했던 애가 아파서 못 나와 대신 아이스크림을 팔게 된 모양이더라.”
니나이나가 갑자기 쿡 웃으며 내게 속삭였다.
“……투덜거리면서도 곧잘 일하고 있더라고. 꽤나 지루해 보이던데 네가 가면 좋아할지도 모르겠네. 가서 말이라도 걸어줘 봐.”
“좋은 생각이네요. 꼭 가야겠어요.”
“훗. 그래, 어서 가봐. 그럼 난 이만, 다른 부스도 구경하러 갈게.”
니나이나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며 수많은 인파 사이로 유유히 빠져나갔다.
나는 고개를 돌려 제이크를 바라보며 질문했다.
“어떻게 생각해, 제이크? 난 가보고 싶은데.”
혼자서 꿍얼거리고 있을 세드릭을 생각하면 한 번쯤 얼굴을 비춰주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제이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미르 네가 가보고 싶다면야 당연히 나도 함께 가야지.”
* * *
그렇게 도착하게 된 붉은 천막의 부스.
다른 부스들과는 달리 어쩐지 손님이 적고 한산해 보였다.
그 이유를, 나는 들어가자마자 알 수 있었다.
‘세드릭, 그런 표정을 지으면 너무 무섭잖아! 가뜩이나 늑대인간 분장 때문에 야수처럼 험악해 보이는데!’
바로, 세드릭이 뚱하고 매서운 표정으로 의욕이라고는 하나 없이 부스 안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의 얼굴에는 ‘나도 놀고 싶다’라는 욕망이 그대로 적혀 있는 듯했다.
영혼이 빠져나가기라도 한 듯 그저 멍하게 서서 아이스크림을 주문받는 세드릭은, 아직까지 우리 둘을 발견하지도 못했다.
‘이런, 세드릭…….’
마침내 나와 제이크가 카운터 앞에 섰을 때도, 세드릭은 한편의 메뉴판에 시선을 고정한 채 한마디 툭 퉁명스럽게 내뱉을 뿐이었다.
“어떤 거.”
“……저기, 늑대인간 세드릭 선배님? 저예요, 저. 에미르.”
나는 정신 좀 차리라는 의미에서 카운터 한편에 벗어놓은 세드릭의 늑대 발 모양 장갑을 톡톡 건드렸다.
“뭐, 뭐야. 에미르? ……네가 왜 여기 있어?”
그러자 초점 없이 멍하던 세드릭의 눈빛이 확 살아났다.
그는 갑작스러운 내 등장에 당황한 듯 허둥지둥거렸다.
“그야, 아이스크림을 먹으려고 왔지요. 세드릭 님이 여기서 일하고 있다는 소문을 듣고요.”
나는 태연히 대답했고, 세드릭은 그런 날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려 몇 번 헛기침했다.
“흠, 흠. 그래, 네 말대로야. 어쩌다 보니 일을 도맡게 됐지 뭐냐? 이걸 다 팔 때까지 나는 아무 데도 못 가.”
익숙한 내 얼굴을 보자마자 푸념하듯 자신의 사정을 털어놓은 그는, 뒤늦게서야 내가 손님으로 방문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질문했다.
“……뭐, 그래서 넌 어떤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건데?”
“음, 잠시만요! 제이크, 넌 뭐 먹을래? 역시 바닐라겠지?”
“응, 맞아.”
나는 제이크와 찬찬히 메뉴판을 보며 아이스크림을 골랐다.
제이크는 항상 그랬듯이 바닐라 맛을, 나는 바나나 초콜릿 맛을 골랐다.
선택한 메뉴를 들은 세드릭은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떻게 네 취향은 매번 변하지를 않냐.”
“흐음, 너무 쉽게 변하면 그건 더 이상 취향이라 말하기가 어렵지 않을까요.”
“뭐, 그런 네 말도 맞긴 하지. 아무튼 잠시만 기다려. 빨리 해줄게.”
세드릭은 지금까지의 느릿느릿한 속도는 다 거짓말이었다는 듯 빠릿빠릿하게 아이스크림을 퍼냈다.
뒤에서 기다리던 몇몇 손님이 고개를 갸웃하는 게 느껴질 정도의 행동 변화였다.
‘하여간, 세드릭.’
세드릭은 나와 제이크에게 아이스크림이 담긴 콘을 건넸다.
“자, 받아.”
“……?”
그런데 어쩐지 이상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보기에도 제이크와 내 아이스크림의 양이 아주 많이 차이가 났다.
제이크는 딱 정량인 주먹만 한 크기인데, 내 아이스크림은 커다란 배 하나를 올려놓은 것 같은 크기였다.
“저기, 세드릭 님? 이것 좀 봐 보세요.”
“뭐, 왜 그러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어?”
세드릭은 되레 뻔뻔하게 굴었다.
나는 당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 아이스크림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아니, 전혀. 바나나 초콜릿이 많이 남아서 아주 조금 더 줬을 뿐인데.”
“그래도…….”
“뭐, 내 마음이라고 생각해.”
세드릭이 장난스럽게 대꾸했다.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되물었다.
“네?”
그 순간, 아슬아슬하던 내 아이스크림이 결국 균형을 잃고 땅으로 툭 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
나는 물론이고 세드릭과 제이크 모두 당황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잠시 침묵이 이어지고, 나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저기, 물론 고맙지만……. 세드릭 님의 마음이 방금 땅에 떨어진 것 같은데요. 너무 커도 문젠가 봐요.”
“……젠장, 어쩔 수 없지. 다시 해줄게.”
나는 다시 아이스크림을 퍼내려 하는 세드릭을 말렸다.
“아뇨, 괜찮아요.”
“뭐? 다시 준다니까? 싫어?”
“그보다 제가 좀 도와드리고 싶은데, 그래도 될까요?”
내 제안에 세드릭이 미간을 찌푸리고 물었다.
“뭘 돕는다는 거야?”
“그야, 당연히 세드릭 님의 일이죠. 함께하면 더 일찍 끝낼 수 있을 테니까요.”
“……!”
“자, 어서 끝내고 함께 놀러 가요.”
나는 빙긋 웃으며 세드릭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 그래, 고맙다.”
세드릭은 짐짓 당황해하다가, 내 가 내민 손을 잡았다.
그때 제이크가 끼어들었다.
“미르, 나도 도울게. 그럼 더 빨리 끝날 거야.”
“좋아. 어서 이 아이스크림을 모두 팔아버리자.”
제이크까지 합세하니 어느덧 세 명이 되었다.
세드릭은 어쩐지 감동한 눈빛으로 우리 둘을 바라보았다.
“너희 둘이 이렇게 힘을 합쳐 날 도와줄 줄은 몰랐는데……. 젠장, 설마 이게 바로 우정이란 거냐.”
“그렇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은 갑자기 부끄러워진 듯 얼굴을 붉히며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튼 정말로 고맙다, 에미르. 그리고 제이크.”
“뭘요. 그럼 각자 역할 분담을 좀 해볼까요?”
나는 말을 꺼냄과 동시에 천막 안을 둘러보았다.
카운터 내부는 몹시도 좁아, 도저히 세 명이 함께 일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애초에 손님이 적은데 세 명이서 함께 일해봤자 아이스크림을 빨리 팔 수도 없다.
고민 끝에 말했다.
“이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세드릭 님은 하던 대로 카운터에서 주문을 받고, 제이크가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거죠.”
“흐음…… 나쁘지 않네. 그럼 너는 나와 함께 주문을 받는 게 어떠냐?”
세드릭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저는 이 천막 근처에서 부스를 홍보할 생각이거든요.”
“홍보라고?”
“네, 손님이 많이 와야 빨리 팔리지 않겠어요?”
나는 눈을 찡긋했다.
그러자 세드릭이 짐짓 멍한 얼굴을 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재차 말했다.
“홍보는 제게 맡겨만 주세요.”
“……그, 그래. 열심히 해라.”
“미르, 힘내.”
제이크와 세드릭의 응원을 받으며 천막 밖으로 나섰다.
어느새 축제 부스가 있는 곳의 인파는 더욱더 불어나 있었다.
무도회가 끝날 시간이라 그런 모양이다.
북적거리는 사람들 속에서 나는 힘껏 외쳤다.
“아이스크림 드시고 가세요! 달콤하고 사르륵 녹는 맛있는 아이스크림 있어요!”
“……!”
“아이스크림?”
내 외침에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돌아보기 시작했다.
‘좋았어! 관심을 끌고 있어!’
사실 아주 조금 창피한 마음도 있었지만, 세드릭을 도운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홍보를 했다.
“네! 아이스크림! 빨간 천막 부스에서 아이스크림을 팔아요! 일곱 가지 맛, 하나에 단돈 50브론즈밖에 하지 않아요!”
내 열성적인 목소리에 드디어 세드릭의 부스로 사람들의 발걸음이 향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후에도 쉬지 않고 열심히 발로 뛰며 홍보를 했다.
중간에 마야를 비롯한 아는 얼굴도 여럿 만났다.
“에미르 영애,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저요? 세드릭 님의 가게를 홍보하고 있어요. 마야 소공자님도 어서 가서 아이스크림을 사 드셔 보세요.”
“그래? 알겠어. 하지만 뱀파이어는 자고로 인간 음식이 아니라 피를 먹어야 하는데.”
마야가 송곳니 분장을 혀로 살짝 핥으며 농담을 건네자, 나 역시 농담으로 받아쳤다.
“피 말고 새빨간 딸기 샤베트 아이스크림을 드시면 되잖아요.”
“하하, 그런가. 좋은 생각이네.”
결국 마야까지 손님으로 만드는 데에 성공했다.
이후 틈틈이 천막 사이로 확인해 본 결과, 세드릭과 제이크가 좀 힘들어 보이긴 했지만 장사는 잘되고 있는 것 같았다.
‘해냈다!’
결국 한 시간도 안 되어서, 세드릭의 아이스크림 가게 부스는 그 어떤 축제 부스보다도 빨리 영업을 종료할 수 있었다.
둘러놓았던 앞치마를 벗고 개운해 보이는 얼굴로 세드릭이 내게 감사 인사를 했다.
“하아. 에미르, 정말 너무 고맙다. 네가 아니었으면 나는 해가 질 때까지도 그 답답한 부스 안에 갇혀 있었을 거야.”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아무것도 아니라고 대꾸했다.
“뭘요. 사실 저는 홍보만 했지, 일은 결국 세드릭 님과 제이크가 다 한 거잖아요. 그리고 친우끼리 서로 돕는 건 당연한 일인걸요. 우리가 어디 보통 친우 사이인가요.”
사실 너무 목소리를 크게 낸 탓인지 약간 목이 쉰 것도 같았지만 말이다.
그때 세드릭이 조용히 물었다.
“……그럼 보통이 아니면, 뭔데?”
“음, 대단히 친한 친우 사이?”
“……하아, 뭘 기대한 건지. 그래, 우리는 대단히 친한 친우 사이긴 하지.”
세드릭이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아무튼, 이만 일어날까. 네 말대로 이제 놀 시간이야.”
“좋아요!”
이후 나는 제이크, 세드릭을 비롯한 다른 친우들과 모두 함께 아카데미의 축제 저녁을 즐겼다.
‘행복해.’
우리 일곱 명이서 줄지어 앉은 채로 공연을 바라보던 그날의 기억을, 나는 아마 앞으로도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 * *
아카데미를 다녔던 지도 어느덧 10년이 다 되어가는 어느 날.
일곱 명의 친우는 성인이 되어 각자의 일로 바빠졌지만, 아직도 한 달에 한 번씩은 꼭 모두가 모이는 모임을 갖고는 했다.
그날의 모임에서, 니콜라스가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약속했던 10년이 다 되었구나. 타임캡슐 말이다.”
“그렇네요. 슬슬 꺼내봐도 될 때인 것 같아요.”
“……드디어 열어보는 건가.”
세드릭의 별장 뒤편 타임캡슐의 존재를 다들 잊고 있을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알고 보니 모두가 타임캡슐을 열어볼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한자리에 모여 추억이 담긴 타임캡슐을 꺼냈다.
“내가 이 상자 안에 넣어놓은 것은 아카데미를 다닐 때 자주 하고 다니던 머리띠였어.”
니나이나는 어쩐지 아련해 보이는 얼굴로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서 나온 붉은색의 머리띠를 본 에미르가 손뼉을 짝 쳤다.
“저, 이 머리띠 기억나네요. 전하께서 매일같이 하고 다니던 물건이잖아요. 어느 날부턴가 안 보인다 했는데 알고 보니 타임캡슐에 넣어두었던 것이었군요.”
“그래, 맞아. 에미르 네가 직접 골라줬던 머리띠인 건 기억나니?”
“그, 그랬던가요?”
“이런, 기억을 못 하다니 섭섭한걸.”
니나이나는 풋 웃으며 머리띠를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보존 마법 덕분인지 색 하나 바래지 않았다.
“평범한 물건은 아무리 매일같이 봐도 쉬이 그 소중함이 느껴지지 않지. 하지만 이렇게 오랫동안 멀리하고 있다가 보면, 새삼 물건에 깃든 소중한 추억들이 느껴진다고 해야 하나.”
니나이나는 다른 친우들을 둘러보며 물었다.
“그래, 다들 무슨 물건을 타임캡슐에 묻어 두었던 거니? 이제 공개할 때도 되었지 않아?”
그녀의 물음에 하나둘 자신의 상자를 보여주었다.
니콜라스는 아카데미에 다닐 적 즐겨 읽던 소설책 몇 권을, 앨리스는 낡아서 체인이 끊어져 버린 목걸이를, 마야는 자주 뿌리던 향수를 각각 타임캡슐에 넣어두었다.
‘아니, 잠깐.’
그걸 본 에미르는 당황했다.
왜냐하면 각각 그들의 타임캡슐에 들어가 있는 게 그녀 자신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물건이었으니까.
‘저 소설책은 내가 추천해 준 것이고, 저 목걸이는 유치원 다닐 때부터 나와 함께 걸고 다니던 거고, 저 향수는 내가 향이 좋다고 말했던 그 단종된 향수잖아.’
그리고 제이크의 타임캡슐에는 웬 양말 한 짝이 들어 있었는데, 역시나 에미르에게는 낯이 익은 물건이었다.
“아니, 잠깐. 저건……? 내가 만들어줬던 양말 아니야?”
에미르는 저 오래된 물건이 대체 왜 여기 들어 있는 거냐며 놀랐다.
어렸을 적 그녀가 손수 만든 뜨개 양말은 지금 보니 손바닥보다도 작은 크기였다.
제이크가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한때 내가 부적처럼 갖고 다녔던 거거든. 한 짝밖에 없으니 신을 수도 없었고.”
“정말, 제이크 넌.”
에미르는 제이크를 못 말린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제 그녀의 남편이기도 한 그는, 유독 어릴 때부터 그녀와 관련된 물건에 집착이 심했으니까.
‘제이크뿐만 아니라 다들…… 나와 관련 있는 물건들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에미르는 어쩐지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러는 나도, 내 친우들이 아카데미 입학 선물로 준 물건들을 여기 넣어두었지만 말이지.’
그때 아직까지도 상자 안에 든 물건을 공개하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세드릭이었다.
어쩐지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하는 듯한 세드릭은 제 상자를 뒤로 감춘 채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왜 세드릭 경은 상자를 공개하지 않는 거지?”
“혹…… 보여주기 창피한 것이라도 넣어둔 건가?”
물론 그런 그의 행동을 다른 친우들이 몰라볼 리가 없었다.
짐짓 놀리는 투의 말에도, 세드릭은 아무런 부정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게, 상자 안에 든 건 다름 아닌 그가 아카데미 시절 쓰던 일기장이었으니까!
‘젠장, 절대로 안 돼.’
세드릭은 식은땀이 나는 걸 느꼈다.
다행히도 그의 친우들은 잘은 몰라도 그 상자 안에 무언가 비밀스러운(?) 게 있다는 걸 눈치채고 더는 언급하지 않았으나, 그는 여전히 초조했다.
사실 그는 자신의 별장 뒷마당에 타임캡슐을 묻어놓고 있었으면서도 다른 친우들이 그 이야기를 꺼내기 전까지 그 존재에 대해 잊고 있었더랬다.
그리고 타임캡슐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자신이 10년 전 그 안에 무엇을 넣었는지를 기억해 내고 순간 아찔해졌다.
한참 사춘기 시절의 그가 패기와 감성 넘치게 써놓은 일기들은, 그때는 나름 소중했지만 지금 와서는 이런저런 흑역사들이 가득 담긴 일급 비밀 쓰레기일 뿐이었다.
‘이 모임이 끝나는 대로, 이 상자를 저택으로 들고 가 비밀리에 태워 버려야겠어.’
세드릭은 굳게 다짐했다.
‘절대로, 절대로! 아무에게도 들키면 안 돼. 왜냐하면…….’
다 제쳐놓고라도, 일단 그 일기장에는 한때 그가 에미르를 짝사랑하면서 적어놓았던 글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내 친우들에게 들킨다면 그날이 바로 내가 죽는 날이 될 것이니.’
일기장에 적힌 내용을 기억하고 있는 세드릭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의 난 정말로 무모한 짝사랑을 했었군.’
* * *
결혼 후에 바뀌지 않은 것들이 있는가 하면, 바뀐 것도 많았다.
일단 제이크와 나는 각자 집안의 유일한 후계자였기 때문에, 어느 한 가문에만 귀속되어 지낼 수는 없었다.
때문에 한 달마다 번갈아서 각자의 가문 저택에서 기거하기로 했다.
‘지금은 새런 후작저에서 지내는 중이지.’
비어 있는 방이 많았던 후작저의 별채는 우리 부부의 공간이 되었다.
“잘 잤어, 미르?”
아침에 일어나면, 항상 기다렸다는 듯 바로 옆자리에서 살포시 눈웃음을 짓는 제이크가 있다.
그러면 나는 그에게 답인사를 건네고, 함께 침대에서 일어난다.
“자, 머리 빗어줄게.”
“응, 고마워. 제이.”
이후 제이크는 화장대 의자에 날 앉혀놓고, 밤사이 부스스해진 내 머리를 곱게 빗어준다.
한번은 내가 하거나, 혹은 고용인들이 해줘도 될 일을 왜 직접 나서서 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때 제이크가 어떻게 대답했더라.’
나는 거울 너머로 제이크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마침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왜 그래, 미르?”
“응? 아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어떤 기억이?”
“전에 네가 내 머리를 빗어줬을 때, 내가 했던 질문에 네가 뭐라고 답했었는지 기억이 잘 안 나.”
“……?”
제이크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눈을 깜박였다.
그때, 타이밍 좋게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맞아. 그때 네가 분명 이렇게 말했었어. ‘미르 네 머리는 부드러운 비단 커튼 같아. 매일 아침 네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어’라고.”
“아.”
제이크가 그제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했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렇게 말했었지. 내가.”
그는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나중에 내가 정말 나이가 많이 들어서, 더 이상 손을 움직일 수 없을 때가 되기 전까지는 계속 이렇게 해줄게.”
“하하, 뭐야 그게.”
나는 푸스스 웃었지만, 그 와중에도 조심스레 다가오는 제이크의 손길이 기분 좋아 살포시 눈을 감았다.
이후 농담 섞인 대화를 주고받다, 잠옷에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우리는 함께 아침 식사를 하러 갔다.
우리 부모님께서는 새벽에 가까운 이른 시간에 일어나 식사를 마치셔서, 좀처럼 식사시간에 만나뵙긴 어렵다.
하지만 오늘처럼 간혹 한 달에 한 번꼴로 두 분이 느지막한 아침 식사를 즐기실 때가 있었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다 같이 모여 식사를 하고는 한다.
“오, 우리 딸과 사위가 왔군그래.”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제이크는 나를 한 번 찡긋 웃으며 바라보고는 어느새 깍듯한 태도로 우리 부모님께 인사했다.
“허허, 그래. 좋은 아침이네. 모쪼록 많이 들도록 하게.”
사실 나는 부모님과 함께하는 식사 자리가 아주 조금은 어색했다.
“자, 미르. 이것도 먹어.”
그 이유는 다른 게 아니라,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살갑게 나를 챙겨주는 제이크를 흐뭇하게 바라보시는 부모님의 시선이 어쩐지 매우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아아, 좋은데, 분명 더할 나위 없이 좋은데…… 어쩐지 창피해! 두 분 다, 우리를 몹시 기특해하는 표정으로 보고 있잖아!’
물론 우리 부모님은 제이크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그를 봐왔다.
그렇기에 제이크를 사위보다는 오랜 친구의 아들을 보는 시선으로 바라보시고는 했다.
뭐,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하지만 이 부끄러운 기분도, 나쁘지는 않네.’
나는 제이크가 잘게 썰어준 고기 조각을 먹으면서 아주 살짝 뺨을 붉혔다.
내심 오래오래 이런 평화롭고 낯간지러운 행복한 일상이 계속되었으면 하는 소망이 생겼다.
사실, 테이온 공작저에서 지낼 때도 비슷한 상황이 여럿 있긴 했다.
공작저는 후작저보다 조금 더 넓은 저택을 가졌기 때문에, 아예 건물 한 채가 통째로 우리 부부의 공간이 되었다.
그리고 공작저의 뒤뜰.
작은 온실.
이제는 내 시어머니가 되신 테이온 공작 부인께서 가꾸는 그 온실은 언제 봐도 따뜻한 온기가 감돌았다.
혹시나 도울 일이 있을까 해서 몇 번이고 온실을 방문해 봤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온실의 대부분 일은 마법으로 자동화되게 바뀌어서 내 손이 닿을 틈이 없었다.
“우리 사랑스러운 새아가, 미르 왔니?”
대신 온실에 방문하면 테이온 공작 부인께서 나를 앉혀놓고 이것저것 제철 과일로 만든 디저트들을 가져다주시고는 했다.
“대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우와, 그보다 이 차 정말 맛있네요!”
처음 보는 연초록 빛깔 차가 너무 맛있어서 감탄했더니, 공작 부인께서 내게 소곤거리며 차의 정체를 알려주셨다.
“그거, 십 년에 한 번씩만 열리는 나무 열매로 만든 차란다.”
“세상에, 정말요?”
어쩐지 귀한 것이라 맛있었구나.
그런 감상과 함께 그런 귀중한 걸 나 혼자 먹어도 될까 싶은 걱정이 공존했다.
내 생각이 얼굴로 드러나기라도 한 걸까. 공작 부인께서 쿡쿡 웃으며 덧붙였다.
“이건 비밀인데, 사실 우리 남편과 제이크 녀석에게도 올해는 아직 이 열매로 만든 차를 준 적이 없단다. 네가 처음이야.”
“……!”
몰랐던 사실에 나는 눈을 크게 떴고, 그녀는 고개를 작게 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미르. 새아가 넌 그저 먹고 마시기만 하면 된단다. 아무런 걱정도 할 필요가 없어.”
아무래도 공작 부인께서는 내게 맛있는 음식들을 배불리 먹이는 게 취미이신 듯하다.
* * *
이후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새 우리 둘 다 각자의 가문의 가주가 되었을 즈음.
어느덧 제이크와 나 사이에는 두 명의 아이가 있었다.
둘은 이란성 쌍둥이 남매였고, 우리는 그 두 아이의 이름을 각각 ‘레이나’와 ‘레디스’로 지어주었다.
어느덧 레이나도, 레디스도 6살이 되어 유치원에 다니는 중이다.
참고로, 내가 어릴 적 다니던 그 ‘제국 유치원’이 맞다.
원래는 내가 졸업한 이후 사라졌어야 할 기관이었지만, 어쩌다 보니 되살아나 현재는 귀족가 자제들의 명문 유치원이 되었다.
물론 내가 다닐 때처럼 소수로 운영되는 유치원은 아니었다.
건물도 새롭게 더 지어 커졌고, 지금은 모든 학년을 합해서 10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다니고 있었다.
‘예전 니나이나가 원했던 대로, 정말이지 작은 아카데미나 다름없게 된 셈이지.’
모든 꼬마 영애, 영식들의 꿈은 바로 이 제국 유치원에 다니면서 친우를 사귀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보다 레이나, 레디스. 둘 다 태어난 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이렇게 자라 유치원을 다니고 있다니.’
제이크와 나 둘 다 오후 일정이 없는 날은 오랜만인지라, 오늘은 특별히 아이들의 유모 대신 우리가 직접 아이들을 데리러 왔다.
어느덧 외관이 조금 오래되어 보이는 유치원의 전경을 바라보던 나는, 추억에 빠져들었다.
“엄마! 아빠!”
때마침 유치원의 문이 열리고 레이나와 레디스가 우리를 부르며 뛰쳐나왔다.
‘이런, 분명 우리가 데리러 온 것은 비밀이었을 텐데! 어떻게 알아챈 거지?’
두 아이를 깜짝 놀라게 해 줄 생각이었던 계획이 송두리째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놀람과 아쉬움도 잠시, 제이크와 나는 환하게 웃으며 아이들을 맞을 준비를 했다.
“와! 난 엄마 품!”
“그럼 난 아빠 품!”
레이나와 레디스는 경쟁하듯 쏜살처럼 달려와 우리의 품에 각자 한 명씩 안겼다.
제이크와 나는 아이들을 안은 채 마차로 향하며 질문했다.
“레나! 레딘! 유치원은 어땠니? 오늘도 재미있었어?”
“네! 아주 재미있었어요! 정말 최고로요!”
평소에도 유치원에서 되돌아올 즈음이면 친구들과 신나게 어울린 탓에 잔뜩 활기가 넘치는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더욱 텐션이 높은 것만 같은걸?’
어쩐지 아이들의 하루 일과가 궁금해졌다.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며 질문했다.
“어머,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길래 그렇게 최고로 재미있었을까?”
그러자 레이나가 두 팔을 마치 검처럼 휘두르는 시늉을 하며 외쳤다.
“오늘은요, 검술을 배웠어요! 세드릭 대공님에게요! 아니, 아니다. 오늘은 대공님이 아니라 세드릭 선생님이셨어요!”
“뭐?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이 세드릭 경이 일일 교습을 맡는 날이었던가?”
나는 뒤늦게서야 기억해 냈다.
2주 동안 몇몇 특별한 이를 초빙해서 유치원 아이들의 일일 선생님이 되어주는 이벤트를 한다고 했었는데.
그중에 세드릭 역시 검술 선생님으로 오기로 했었더랬다.
‘그게 오늘이었었구나.’
마침 레디스가 제 가방에서 주섬주섬 제 팔뚝만 한 작은 목검을 꺼내서 자랑하듯 보여주었다.
“이것 보세요, 엄마! 세드릭 선생님께서 주신 목검이에요.”
“목검? 세상에, 멋진걸? 우리 레딘에게 정말 잘 어울리는 검이야.”
내가 레디스를 칭찬하자 레이나도 질세라 손을 번쩍 들고 말했다.
“저도, 저도 받았어요! 세드릭 선생님이 제가 제일 검을 잘 잡는다고 칭찬해 주셨어요!”
“우와, 정말? 우리 레나, 알고 보니 검에 재능이 있었던 거야?”
내가 손뼉을 쳐주자, 레이나는 한껏 우쭐해하며 외쳤다.
“네! 저 나중에 기사가 될래요. 아주 멋진 기사가 돼서 우리 엄마 아빠 그리고 레딘을 지켜줄 거예요!”
“어머, 그래? 이것 참. 엄마는 레나가 있어 너무 든든한걸. 그렇지 않아, 제이?”
나는 흐뭇한 표정을 지으며 제이크를 돌아보았다.
제이크는 레이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레나, 이미 엄마는 이 아빠가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말렴.”
“칫, 하지만 아빠는 마법사잖아요! 마법사보다는 검으로 이렇게 쉭쉭! 하고 지키는 게 더 세다고요!”
“으음…….”
레이나의 말에 한 방 먹었다는 듯이 제이크가 난감한 표정으로 울상을 지었다.
‘하긴, 아이들이 볼 때 마법사보다 기사가 더 세 보일 수도 있지. 이거, 분발해야겠는걸. 제이크?’
나는 싱긋 웃으며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때 마침 레디스가 생각났다는 듯이 외쳤다.
“그러고 보니 엄마, 아빠! 오늘 황궁 가기로 했잖아요!”
“맞다, 그랬지. 참?”
“네, 어서 가서 메이칼 황자님과 놀고 싶어요! 너무 귀여워!”
“나도, 나도! 같이 숨바꼭질해 줄 거야!”
메이칼 황자.
이제 막 3살이 된 그 아이는 니콜라스와 앨리스 사이에서 태어난 황가의 새 후계자였다.
“그런데요, 황자님은 언제쯤 유치원에 다니실 수 있어요, 엄마?”
“글쎄, 아마 레나와 레딘이 졸업할 때쯤?”
내 대답에, 레나가 깜짝 놀란 듯한 얼굴로 울먹거렸다.
“……같이 다니고 싶었는데, 유치원!”
“괜찮아, 레나. 그래도 1년 정도는 함께 다닐 수 있을 거란다.”
“앗, 정말요? 신난다!”
울먹거리는 게 언제인가 싶게 곧바로 화색을 띠는 레나는, 꼭 어릴 적의 제이크를 생각나게 했다.
‘하여간. 똑 닮았다니까.’
나는 고개를 돌려 제이크를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내 얼굴에 뭐 묻었어, 미르?”
“아니, 그냥. 귀여워서.”
나는 제이크의 볼을 조심스레 쓰다듬었다.
“아냐, 아냐 엄마. 아빠보다 내 얼굴이 더 귀여워!”
그 순간 가만히 앉아 있던 레디스가 툭 튀어나와서 외쳤다. 나는 레디스를 쓰다듬어 주며 대답했다.
“그래, 그래. 우리 레딘이 백배 천배는 더 귀여워.”
“미르…….”
제이크가 어쩐지 은은한 배신감을 느낀 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역시 귀엽다니까!’
나도 모르게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제이크와 나, 그리고 우리 둘을 똑 닮은 아이들.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이젠 두 명이 아닌 네 명이 가족이 된 만큼, 두 배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더더욱 노력하자고.
‘레이나, 레디스. 그리고 제이크. 내가 꼭 우리 가족을 행복하게 해줄게. 영원히.’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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