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마 영애님은 주연들을 길들인다 4권
7.
잠시 후, 한바탕 눈 범벅이 된 아이들이 힘들었는지 눈싸움을 그만두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헉, 헉. 분명 추운 날씨인데 왜 더운 거야.”
세드릭은 얼마나 열심히 뛰어다니며 눈을 던진 건지 땀 범벅이 되어 탈진한 채 주저앉았다.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니나이나, 니콜라스도 황족의 품위를 저버리고 온몸에 눈을 잔뜩 묻힌 채 눈밭에 풀썩 쓰러져 누워 있었다.
“아아…… 시원하다. 그리고 힘들어.”
눈밭에 대자로 누운 채로 무어라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니나이나였다.
마침 그 곁에 앉아 있던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전하, 눈사람은 안 만드세요?”
“눈사람?”
잔뜩 지쳐 있던 목소리가, 내 물음에 곧바로 생기를 담고 되살아났다.
“같이 만들어줄 거야?”
어느새 벌떡 일어난 니나이나가 제 옷에 묻은 눈을 털고 내게 다가왔다.
붉은빛 눈동자가 기대를 품고 반짝이는 게 보였다.
“네, 같이 만들어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참 싸움 구경하면서 쉬었으니까 나도 이제 놀아야지.’
그러자 니나이나는 몹시 기뻐하며 내 손을 끌어당겨 어디론가 향했다.
“좋아! 자, 가자.”
니나이나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아까 눈사람을 만들겠다며 가져온 물건들이 놓인 장소였다.
“이건 당근, 이건 보석들, 그리고 털모자……. 그러고 보니 팔을 대신할 물건이 없잖아?”
니나이나의 말에, 나는 주변을 훑었다.
“팔은, 저기 있는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서 만들면 돼요.”
“아, 그러네? 좋아. 그럼 어서 만들자. 내가 더 큰 눈덩이를 굴릴게.”
니나이나는 콧노래를 부르며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니나이나는 몸통이 될 큰 눈덩이를, 나는 그것보다 작은 머리가 될 눈덩이를 만들기로 했다.
나는 천천히 눈을 퍼서 단단히 뭉쳤다.
그리고 아직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깨끗한 눈밭에 눈덩이를 굴리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유치원은 아주 넓어서, 마음만 먹는다면 웬만한 사람 크기의 커다란 눈사람도 만들 수 있을 정도의 눈이 있었다.
“어,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눈덩이는 잘 익은 수박 정도의 크기로 불어나 있었다.
마침 뒤에서 니나이나가 나를 불렀다.
“에미르, 나 눈덩이 다 만들었어!”
“정말요? 저도 마침 완성했어요!”
뒤돌아서 보니, 니나이나는 대체 얼마나 열심히 눈을 굴린 것인지 본인의 키 절반만 한 지름의 눈덩이를 짚고 서 있었다.
“자, 이제 장식하자.”
니나이나와 내가 힘을 합쳐 눈사람의 형태를 만들자, 주변에서 아이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 장갑도 써주세요!”
앨리스는 원래 나에게 선물하려고 했던 털장갑을 내밀었다.
그러자 니나이나가 고개를 끄덕이며 나뭇가지로 된 눈사람의 팔 끝에 장갑을 씌웠다.
“다 됐다!”
마침내, 우리는 눈사람을 완성했다.
“자, 이제 소원 빌자. 책에서 봤는데 우리 제국에는 매년 처음 만든 눈사람에 소원을 빌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이야기가 있대.”
니나이나가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리고서, 두 손을 모아 잡고 눈을 꼭 감았다.
그 말에 다른 아이들도 앞다투어 소원을 빌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이 눈을 꼭 감은 걸 확인하고서 미소 지었다.
‘다들 원하는 소원이 하나씩 있는 모양이네. 물론 나도 있지만.’
마지막으로 나도 눈을 감았다.
‘가족들이 건강하고 오래오래 살았으면 좋겠어요. 그리고 우리 유치원의 다른 아이들도 모두 행복했으면 해요.’
조용히 소원을 빌고 다시 눈을 떠 보니, 다들 각자 원하는 것을 마음속으로 말한 듯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때 세드릭이 질문했다.
“다들 무슨 소원 빌었어? 나는.”
하지만 그때 마야가 웃으며 대꾸했다.
“세드릭 소공자, 소원을 입 밖으로 꺼내면 이루어지지 않는대요.”
“뭐? 그게 정말이야? 큰일 날 뻔했네.”
세드릭이 깜짝 놀라며 재빨리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그 모습에 우리는 와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그때 내내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에드몽 부인이 다가왔다.
“자, 이제 다들 들어가실 시간이에요. 너무 오래 바깥에 있으면 감기에 들지도 모르니까요.”
그녀의 말에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 하고 유치원 건물로 향했다.
‘음, 제이크에게 이글루를 만들어 달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냥 테이온 공작저에 놀러 가서 구경해야겠다.’
그때였다.
앞장서 가던 앨리스가 갑자기 뒤돌아서더니 나에게 속삭였다.
“에미르 님, 에미르 님!”
“네? 왜 그래요, 앨리스?”
“저기 좀 보세요. 고드름이에요!”
그 외침에 다른 아이들도 따라서 앨리스가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고드름이라고?”
“우와, 정말이네?”
유치원의 지붕 바로 아래, 줄줄이 당근같이 생긴 고드름 여러 개가 달려 있었다.
투명하고 깨끗한 색깔이었다.
“신기하다!”
“나도, 실제로 고드름을 보는 건 처음이다.”
니콜라스마저도 놀란 눈빛으로 지붕 밑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다들 너무 새로워하는 반응이네.’
내겐 이미 익숙한 고드름이었지만, 다른 아이들은 아마 처음 보는 모양이었다.
그때 세드릭이 질문했다.
“저거 맛있나?”
“……?”
“저 고드름 갖고 싶어.”
그 말에 나는 흠칫했다.
‘설마, 세드릭 저거 먹어 보려는 건가?’
그런데 너무 높이 달려 있는지라, 고드름을 따려다가 떨어져 다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위험…….”
나는 그런 세드릭을 말리려 했다.
금방이라도 세드릭이 지붕으로 올라가 고드름을 가져오겠다고 나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조금 다른 일이 벌어졌다.
“……?!”
지금 내가 헛것을 보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그러니까 웬만한 어른 키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높은 지붕을 향해 세드릭이 점프한 것이다.
더 놀라운 것은, 세드릭이 그 고드름 끝에 거의 손이 닿았다는 것이다.
“아! 놓쳤어.”
하지만 아슬아슬하게 세드릭은 고드름을 얻지 못하고 다시 땅으로 착지했다.
‘대체 뭐지. 마법만큼이나 신기해.’
그런 세드릭을 보고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가끔 세드릭은 저렇게 예상치 못한 부분에서 평범한 인간의 신체 능력을 초월한 모습을 보여주고는 했다.
그때 제이크가 내게 질문했다.
“에미르, 고드름 갖고 싶어?”
“응?”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제이크가 웃으며 재차 말했다.
“갖고 싶으면, 내가 도와줄게.”
“어? 잠깐!”
내가 대답을 끝마치기도 전, 제이크가 마법을 시전했다.
그러자 저 높은 곳에 매달려 있던 고드름이 칼로 벤 듯 똑 떨어져 내게로 날아왔다.
“헉!”
장갑을 끼고 있던 내 손엔 어느샌가 고드름이 들려 있었다.
멀리서 볼 때보다 훨씬 컸다.
‘아니, 고맙긴 한데. 나는 세드릭과 달리 딱히 고드름을 갖고 싶었던 건 아닌데…….’
세드릭의 기행을 구경했던 게, 고드름이 갖고 싶어서 바라봤던 걸로 오해를 산 모양이다.
“뭐야, 미르만 주는 거야? 치사하긴…… 아니다, 내가 제이크 소공자에게 뭘 바라. 휴.”
세드릭은 내 손에 들려 있는 고드름을 부러운 듯 바라보며 말했다.
어쩐지 그 뒤에 개미만 한 목소리로 ‘소공자는 항상 에미르만 챙기지, 쳇’이라고 투덜대는 혼잣말이 들린 것도 같았다.
그러더니 세드릭은 한숨을 푹 쉼과 동시에 다시금 자세를 잡고 지붕을 향해 점프했다.
다음 순간, 똑- 하는 소리와 함께 세드릭의 기분 좋은 외침이 들려왔다.
“아싸! 잡았다!”
결국 세드릭은 제가 원하던 대로 고드름을 손에 넣는 데 성공했다.
“우와, 얼음이 뭐가 이렇게 예쁘지?”
잠시 제 손으로 얻어낸 고드름을 관찰하며 감탄하는 세드릭이었다.
“그럼 이제 먹어볼까.”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곧장 베어 물려 했다.
“잠깐만요. 그렇게 깨물었다가는 이가 부러질 수도 있어요!”
나는 그런 세드릭을 말렸다.
물론 지금 우리는 아직 유치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부러져도 다시 나겠지만, 그래도 한동안 부러진 이를 가지고 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치유 마법으로 복구도 안 된다고!’
그러자 세드릭이 푹 한숨을 쉬며 제가 항상 옆구리에 지니고 다니는 단검을 꺼냈다.
“알았어, 알았어. 잘라 먹으면 되잖아.”
“……!”
“자, 됐다. 이렇게 작게 잘랐으니까 됐지?”
검을 몇 번 휘두르자 매끈하고 네모반듯하게 잘린 얼음 조각들이 탄생했다.
세드릭은 그걸 하나씩 다른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우와!”
“나도 먹어볼래.”
다들 내심 고드름을 갖고 싶었던 모양인지, 세드릭에게 받은 얼음을 오물오물 녹여 먹었다.
“에이, 뭐야. 그냥 평범한 얼음 맛이네.”
막상 가장 고드름을 원했던 세드릭은 예상과 다른 맛이 난다며 불평했지만 말이다.
* * *
첫눈이 내린 이후로도 시간이 며칠 더 흘렀다.
눈이 녹고 다시 얼어붙어 길가가 질척해졌을 즈음이었다.
오늘은 어쩐지 유치원에 도착한 아침부터 가슴이 먹먹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드디어, 유치원을 다니는 마지막 날이야.”
드디어라고 말했지만, 하나도 기다려지지 않았던 날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영원히 이때가 오지 않기만을 바랐었다.
그렇지만 결국 마지막이 오고야 말다니.
나는 조금 우울해진 기분으로 유치원 구석구석을 살폈다.
오늘은 일부러 일찍 일어나서, 평소보다 더 빨리 마차를 탔다.
조금이라도 더 이 건물을 오래 눈에 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오늘따라 공기가 더 차가운 것 같아.’
겨울이라 당연한 이야기였지만 말이다.
사실 건물은 하나도 달라지지 않았다.
달라진 건 내 마음가짐이라는 것을 나도 알고 있었다.
1년 동안 유치원과 함께하는 시간을 당연하게만 여겨왔으면서, 마지막이라고 말하니 그제야 아쉬워지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아이들이 하나둘 등원해서 교실 안이 북적거리자, 그런 내 쓸쓸했던 감정은 잠시 사라졌다.
“하아, 귀찮게. 검술만 연습하기도 아까운 시간인데…… 일주일 뒤부터 가정교사와 학문 수업을 받아야 한다는 게 말이 돼? 심지어 다 같이 배우는 것도 아니라 재미도 없다고.”
“이틀 뒤에 트위트 공작령으로 돌아가기로 했어. 돌아가기 전에 우리 집에 놀러 와서 혹시 도자기 좀 가져갈래?”
하지만 가정교사 이야기를 꺼내는 세드릭이나, 며칠 후 왕국으로 돌아간다는 말을 하는 마야를 보니 또다시 끝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오늘은 마지막 날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종업식만이 예정되었다.
당연하게도 따로 수업이 없어서, 우리는 그저 책상에 앉아 서로 이야기만 나누고 있을 뿐이었다.
복도에서는 각자 가문에서 나온 고용인들이 우리의 짐을 챙겨 마차로 실어나르고 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마침 창문 밖으로 떠나가는 우리 후작가의 짐마차가 보였다.
‘저 안에, 내 사물함에 들어 있던 여분의 옷이나 물건 같은 게 전부 실려 있겠지. 유치원에서 배우고 만들었던 것들도 모두 다…….’
한층 황량해진 교실 안이, 꼭 지금의 내 기분 같았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마야가 가방에서 두껍고 큰 종이 두루마리를 여러 장 꺼냈다.
‘응? 마야, 뭘 하려는 거지?’
자연스레 우리의 시선은 마야가 들고 있는 종이로 향했다.
마야가 제안했다.
“저기, 사실 내가 며칠 동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왕국으로 돌아가면 다들 그리워질 것 같아서 말야.”
“……!”
마야의 말에 나는 조금 놀랐다.
평소와 전혀 다른 점 없는 태도라서, 오늘이 유치원 다니는 마지막 날이라는 것에 아무런 의미부여도 하지 않을 줄 알았다.
‘아니었어. 마야도 티는 안 냈지만 아쉬웠던 거야. 그리워질 것 같다고 말하고 있잖아.’
나만 이런 감정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니었던 거다.
마야의 말에 아이들이 하나둘 숨겨왔던 속마음을 말하기 시작했다.
“그러게, 그리워질 것 같긴 하네. 물론 이 유치원 말이야.”
세드릭이 답지 않게 아련한 눈빛으로 교실을 쓱 훑으며 말했다.
“아바마마께 몇 년 더 다니게 해 달라고 부탁할 걸 그랬어.”
“미안하지만 니나이나, 안 되는 일인 것 알고 있지?”
이어진 니나이나의 푸념에, 니콜라스가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니나이나가 그런 니콜라스를 밉지 않게 흘겼다.
“……나도 알고 있어! 그냥 해본 말이야. 오라버니는 이 유치원을 떠나는 게 안 슬퍼?”
“……그럴 리가. 나도 무척이나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다.”
니콜라스가 당황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확실히 이 유치원에 처음 다니기 시작했을 무렵의 니콜라스와는 많이 달라진 모습이었다.
‘그땐, 아카데미 조기 입학이 예정되어 있다며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를 보이고는 했었지.’
마야가 우리에게 한 장씩 종이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말인데, 다들 나에게 편지를 써 줬으면 좋겠어. 나중에 유치원이 그리울 때면 이 편지를 꺼내보고 이곳을 기억하고 싶어.”
“뭐, 편지? 이 커다란 종이에 어떻게 가득 편지를 쓰란 말이야?”
“……!”
마야의 부탁과 세드릭의 투덜거림을 들은 나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내용도 쉽게 채우고, 모두가 유치원과 서로에 대한 추억을 간직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 바로 롤링 페이퍼를 만드는 거야.’
곧바로 나는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때요? 마야 소공자님뿐만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하고 싶은 말을 이 종이에 적는 거예요. 한 사람씩 번갈아서요.”
“그거 정말 좋은 생각인걸? 생각도 못 했어.”
다행히 마야부터 다른 아이들 모두 내 생각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우리는 종이 가장 위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놓고, 종이를 한 장씩 옆으로 돌려가며 편지를 쓰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황자님의 종이잖아?’
제일 먼저 내게 온 종이는 내 옆자리 니콜라스의 것이었다.
나는 펜을 들어 빈 종이에 정성껏 글을 적기 시작했다.
[에미르 새런: 안녕하세요, 니콜라스 황자님!
이렇게 편지를 쓰니까 꼭 예전 마니또 게임을 했던 때가 생각나요.
전하는 참 좋으신 분이었어요.
수업을 들을 때 어려운 내용이 나오면 다가와 도움을 주셨잖아요.
그전까지 저는 전하가 몹시 어렵고 무뚝뚝한 분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동화책도 좋아하고 동물도 좋아하는 사랑스러운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전하의 꿈이 모두 이루어졌으면 좋겠어요.
아참, 아카데미에 가신 이후에도 저를 잊으시면 안 돼요!]
‘음……. 좀 허전한가?’
나는 편지의 끝에 무언가 귀여운 그림이라도 그릴까 망설이다가, 정해진 시간이 다 되었음을 알고 다음 차례로 넘겼다.
이번에 내게 온 종이는, 세드릭의 것이었다.
종이에는 단정한 글씨로 써놓은 니콜라스의 편지가 이미 있었다.
[니콜라스: 세드릭 소공자.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된 것은 처음이라 어색한걸.
소공자는 기사와 검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항상 좋아하고는 했지.
앞으로 멋진 기사가 되어 이 제국을 지켜주길 바라겠어.]
‘정말 니콜라스다운 편지네.’
슬쩍 편지를 훑은 나는 키득 웃으며 다시 펜을 들었다.
[에미르 새런: 안녕하세요, 세드릭 님!
저도 마침 검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려 했는데, 황자 전하께서 이미 써 버리셨네요.
그만큼 세드릭 님을 생각하면, 멋지고 강인한 기사의 모습이 제일 먼저 떠올라요.
몇 달 전 아티팩트를 사용해 어른이 된 모습으로 시장에 간 적이 있었잖아요.
그때 정말로 멋있었어요.
10년쯤 후에, 세드릭 님이 훌륭한 기사가 된 모습이 궁금해요.
아마 그때는 소드 마스터가 되어 있겠죠?
저는 계속해서 세드릭 님과 친우로 지내고 싶어요.
세드릭 님이 대륙의 모든 사람이 우러러보는 일인자 기사님이 된 이후로도요.
※아참. 아티팩트를 망가뜨린 대신, 제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던 건 아직 잊지 않으셨죠?]
‘어쩐지 점점 편지가 길어지는 것 같은데…….’
내가 편지를 넘겨주기만 기다리고 있는 제이크에게 뒤늦게서야 종이를 건네면서, 나는 끙 하고 머리를 짚었다.
다음 종이는 니나이나의 것이었다.
나는 제일 먼저 세드릭과 니콜라스가 적어놓은 글을 읽어보았다.
‘으악, 세드릭 악필이야. 심지어 제 이름도 이상하게 적어놓았어!’
[저는 세드 릭입니다.
황녀 전하가 주신 보석 단검 잘 쓰고 있어요.
감사합니다.]
‘……이게 끝이야?’
그걸 본 나는 내 종이에 적힐 세드릭의 편지에 대한 기대를 접어버렸다.
‘그리고 니콜라스는…… 어라?’
[니콜라스: 니나이나, 네게 이렇게 편지를 쓰는 게 아마도 처음인 것 같다.
조금, 아니, 많이 어색한 기분이구나.
처음 네가 유치원을 만들겠다고 할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것 하나만큼은 정말로 잘한 일인 것 같다.
뭐라고 끝마쳐야 할지 잘 모르겠구나.
어차피 우리는 유치원에 다니지 않아도 매일 마주할 사이니 인사는 필요 없겠지?]
니나이나에게 보내는 니콜라스의 편지를 읽고 나는 그만 피식 웃어버렸다.
‘남매는 남매구나. 어색한 사이가 활자로도 느껴질 수 있다니…….’
나는 펜을 들어 니나이나에게 편지를 적기 시작했다.
[에미르 새런: 안녕하세요, 니나이나 황녀님!
전하께서 유치원을 만들어주신 덕분에 이렇게 많은 분과 함께할 수 있어서 정말로 기뻤던 1년이었어요.
황녀 전하 같은 분과 제가 친우가 될 수 있어서 정말로 기뻐요.
평소에는 무심하시지만 필요할 때면 저에게 도움을 주시던 전하였어요.
그 따뜻하고 세심한 마음에 감동도 많이 받았었지요.
요즘 아카데미를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한다고 하셨는데, 꼭 멋지고 똑똑한 전하가 되시길 바랄게요.
1년 동안 행복한 추억을 남기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영원한 전하의 친우로 남고 싶어요.]
‘후훗.’
이걸 받고 내심 뿌듯해할 니나이나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자, 다음 편지는 누구지? 앗, 앨리스의 것이구나.’
나는 또다시 다른 아이들이 먼저 적어놓은 글을 살폈다.
[니콜라스: 앨리스 로즈 영애.
영애에게 편지를 쓰는 건 처음이라 조금은 낯선걸.
다행히도 영애와는 얼마 전 학예회 공연을 위해 연습을 함께한 이후로 많이 가까워진 것 같아.
사실 처음 봤을 때부터 친해지고 싶었는데, 어쩐지 영애는 에미르 영애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과는 어울리지 않으려 하는 것 같아서 쉽게 다가가기 어려웠어.
그래도 이렇게 솔직한 마음을 담아 편지를 쓸 수 있어서 다행이야.
앞으로도 영애의 앞길에 행복만 가득했으면 좋겠어.]
‘세상에, 세상에! 얘네 좀 봐! 아니, 니콜라스 좀 봐!’
나는 자꾸만 위로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누르려 애써야 했다.
역시, 학예회 이후로 둘 사이가 많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역시 원작의 주인공들다워. 다른 건 몰라도 둘 사이만큼은 원작처럼 돈독했으면 하는 바람이었는데, 다행이야.’
나는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물론, 비단 니콜라스뿐만 아니라 세드릭과 니나이나의 편지도 나를 이유 없이 뿌듯하게 했지만.
[나는 세드 릭이야.
앨리스 로즈.
예전엔 같이 마차를 타고 유치원에 왔는데 요즘은 따로 타서 조금 심심해. 그렇지만 아쉬운 건 아니야.
그냥 뭐 그렇다고.]
‘세드릭, 아닌 척해도 요즘 혼자서 마차를 타니 대화할 사람이 없어서 외로운가 봐.’
[니나이나: 앨리스 영애, 안녕?
처음 편지를 써보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영애가 마음에 들어.
안목이 나랑 비슷한 것 같거든.
그리고 요즘은 영애가 많이 당차져서 더 좋아.
몰랐는데 나는 씩씩하고 말 잘하는 사람을 좋아하는 것 같아.
내 유치원에 함께해 줘서 고마웠어.]
나는 니나이나의 편지 바로 밑에 이어 글을 적었다.
[에미르 새런: 안녕하세요, 앨리스 영애!
다른 분들도 그렇지만 앨리스와는 정말로 추억을 많이 쌓은 것 같아요.
저를 믿어주고, 좋은 친구로 지내줘서 고마웠어요.
앨리스는 꼭 한낮의 하늘에 뜬 별과 달처럼 신비로워요.
그만큼 그런 앨리스와 친해진 게 믿기지 않기도 해요.
앞으로도 서로 꾸준히 연락을 주고받으며 좋은 친구로 지내요, 우리.]
이쯤에서 나는 계속 펜을 잡고 있었던 손과 팔뚝이 아파왔다.
잠시 기지개를 쭉 켠 나는 새로운 편지지를 눈에 담았다.
‘마야의 편지지네?’
[니콜라스: 마야 소공자, 소공자에게 이렇게 편지를 쓰게 될 날이 올 줄은 미처 몰랐는데.
사실 몇 달 전 사절단과 함께 소공자가 왔을 때는 그저 한번 보고 말 사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소공자가 유치원에 온 이후로 제국뿐만 아니라 왕국의 문화와 사정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된 것 같아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왕국에 돌아가서도 잘 지내길 바라지.]
[세드 릭이다.
사실 소공자에게는 별로 편지를 쓰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지.
처음부터 소공자가 에미르에게만 관심 보이는 게 마음에 안 들었거든.
그래도 뭐, 왕국에 돌아가서는 잘 지내도록 해. 흥.]
어쩐지 뒤로 갈수록 꽉꽉 눌러쓴 듯한 글씨가 세드릭의 속마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듯했다.
[니나이나: 마야 소공자, 안녕?
지난번 건국제에 사실 나도 함께 가보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어.
다음번에 왕국에 초대되어 갈 기회가 생긴다면 트위트 공작령을 한번 꼭 방문해 보도록 할게.
소공자의 말로는 공작령에서 잡히는 물고기들이 신선하고 맛있다고 했었지? 기대하고 있어.]
[앨리스: 마야 님께.
사실 마야 님이 유치원에 오신 이후로 항상 제자리였던 에미르 님의 옆자리를 차지하고 계셔서 조금 미웠어요.
하지만 지난번에 공작령에 갔던 이후로 마야 님이 나쁜 분이 아니란 걸 알게 되어서 이젠 미워하지 않아요.
그래도 에미르 님의 친한 친구 자리는 제 것이라는 걸 알고 계시죠?]
아이들이 자꾸만 내 이름을 편지에 언급하는 것을 보고 있자니 조금 부끄러웠다.
‘이 편지를 읽은 제이크가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제이크는 항상 자신만이 내 제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으니까.’
아무튼, 나도 마저 편지를 썼다.
마야에게도 할 말이 많았다.
[에미르 새런: 안녕하세요, 마야 소공자님!
다른 분들도 소공자님께 보내는 편지에 공작령 이야기를 쓰신 것 같아요.
그만큼 소공자님을 따라 갔던 공작령이 인상 깊었다는 거겠죠? 저도 그래요.
가끔씩 꿈에서 그때 봤던 얼어붙은 강가가 나오기도 하거든요.
또, 소공자님이 구워주셨던 맛있는 생선들도요.
아참. 소공자님께서 선물한 도자기 컵은 제가 아침마다 우유를 마실 때 아주 잘 사용하고 있어요.
볼 때마다 소공자님 생각을 한답니다!
소공자님이 왕국으로 돌아간 이후로도, 꾸준히 안부 편지를 보낼게요.
짧은 시간이었지만 소공자님과 함께 유치원을 다닐 수 있어서 정말로 좋았어요.]
이제 마지막으로, 제이크의 편지만 남았다.
제이크는 특별히 나의 가장 오래된 친구니까 마지막이지만 가장 깊은 마음을 담아서 편지를 쓸 생각이었다.
‘어디 보자. 다른 아이들이 쓴 걸 먼저 읽어볼까.’
[니콜라스: 제이크 소공자, 소공자에게는 이래저래 도움받은 게 많아.
내가 잘 모르는 마법학 지식에 대해서 소공자가 종종 알려준 적이 있었지.
이제 마탑으로 가서 마법 공부를 한다고 했던가?
그 이후에 아카데미에 오게 된다면 다시 만날 수 있겠는걸.
그때가 되면 좋은 친우로서, 선배로서, 또 황자로서 나도 소공자에게 많은 도움을 주도록 하지.]
[나는 세드 릭이다.
제이크 소공자, 솔직히 처음에는 소공자와 절대로 친하게 지내지 못할 줄 알았어.
늘 약한 모습만 보였으니까.
하지만 소공자가 마수를 멋지게 해치우고 나서 생각이 바뀌었다.
소공자는 정말 멋지고 강해.
나도 언젠간 소드 마스터가 되어 소공자처럼 단번에 마수를 해치우고 싶다.]
[니나이나: 제이크 소공자, 안녕?
소공자에게 받은 마법 부채를 지금까지도 잘 쓰고 있어.
처음 봤을 때는 또래인데 벌써 마법사라는 게 신기했었어.
그리고 에미르 영애와 많이 친해 보여서 그것도 부러웠어.
뭐, 지금이야 아니지만.
아무튼 유치원에 소공자가 함께해 줘서 정말로 고마웠어.
없었다면 큰일 날 뻔했지 뭐야.]
[앨리스: 제이크 님께.
제이크 님, 유치원에 다니면서 제가 에미르 님과 놀 때마다 은근히 흘겨보고 있었던 걸 다 알아요.
알면서도 저는 에미르 님 곁이 좋아서 그냥 모른 척했거든요.
제이크 님은 저보다 더 오래전부터 에미르 님과 친하게 지내서 정말로 부러워요.]
[마야: 제이크 소공자에게.
지난번 공작령에서 마법을 써주었던 걸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물론 에미르 영애의 부탁 때문이겠지만 말이야.]
……어쩐지 제이크의 편지에는 온통 내 이야기들이 함께 적혀 있는 것 같았다.
그만큼 내가 제이크와 많이 친하다는 걸 다른 아이들도 알아서 그런 것이겠지?
‘휴우, 제이크…….’
게다가 앨리스가 나 보란 듯이 고자질해 놓은 것을 보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제이크에게 보낼 롤링 페이퍼를 쓰기 시작했다.
[에미르 새런: 안녕, 제이.
나의 소중한 친구야.
종종 편지를 쓰긴 했지만 이렇게 롤링 페이퍼를 써보는 건 또 처음이네.
사실 쓸 말이 엄청 많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리는 옹알이할 때부터 자주 만나왔던 그런 오래된 친구잖아?
그런데 아니었어.
이미 너에 대해 너무 많이 알고, 많은 대화를 해서 그런지 막상 편지에 쓸 말이 없어.
그렇지만 이 말은 할게.
앞으로도 우리는 계속해서 친하게 지낼 거야.
마탑에 가서는 지금처럼 매일 만날 수는 없겠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은 꼭 만나러 갈게.]
잠시 후.
우리는 자신의 종이를 돌려받게 되었다.
“……!”
“…….”
다들 말없이 제 종이에 적힌 편지들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나 역시 그랬다.
니콜라스, 세드릭, 니나이나, 앨리스, 마야, 제이크.
6명이 나에게 써 준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어……?’
왜 점점 코끝이 막 뜨거워지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지는 걸까?
‘눈물이 왜 나오는지 모르겠어…….’
나는 붉어진 눈시울을 애써 가리려 소매로 눈을 박박 닦아냈다.
정말로 이상한 일이었다.
그냥 편지를 읽는 것뿐인데, 어째서 눈물이 나는 건지 정말로 이런 내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
그런데 주변을 둘러보니 나만 그런 건 아닌 것 같았다.
다들 코를 훌쩍거리고 있거나 아니면 소리 없이 눈가를 붉히고 있었다.
교실 안은 한동안 눈물 콧물 소리뿐이었다.
“…….”
니콜라스는 우는 걸 들키지 않으려 편지를 읽는 척 편지지로 얼굴을 전부 가렸다.
하지만 니콜라스의 책상 위로 투명한 눈물이 툭툭 떨어지는 게 보였다.
“……흐읍.”
니나이나는 자신도 모르게 감정이 벅차오르는지 잔뜩 울상이 된 표정으로 제 손수건을 꺼내 눈가를 톡톡 닦아냈다.
그러면서도 연신 눈으로는 편지를 훑어내리고 있었다.
마야는 처음엔 태연하게 편지를 읽는 듯싶더니 점점 입꼬리가 떨리는 게 보였다.
“……왕국으로 돌아가도, 이 편지들은, 절대로 잊지 못할 것 같아요.”
그러고는 어느새 잔뜩 촉촉하게 젖어버린 눈으로 우리를 하나하나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세드릭은 편지를 읽다 말고 주변에서 들려오는 흐느낌 소리에 당황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뭐, 뭐야. 다들 왜 울어? 바보같이! 왜 우냐고오…… 흐읍…….”
하지만 애석하게도 세드릭 역시 애써 슬프지 않은 척 묻는 목소리와는 다르게, 진작에 눈가는 눈물범벅이었다.
결국 세드릭은 제 소매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는 데 여념이 없게 되었다.
“……흐윽, 에미르 님. 이런 편지 써주셔서 정말 감사해요.”
앨리스 역시 연신 구슬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그러다가 우는 날 발견하고서는, 손수건을 건네주었다.
“흡, 에미르 님, 이 손수건…… 쓰세요.”
나도 나지만, 앨리스에게 더 필요해 보였기에 나는 손수건을 사양했다.
한편 뿌옇게 변해버린 시야 너머로 나를 향해 아련히 미소 짓고 있는 제이크가 보였다.
‘제이크, 평소에는 눈물이 정말 많은데. 이럴 때는 의외로 의연하구나.’
나를 포함한 7명의 아이 중에 유일하게 울고 있지 않은 제이크였다.
잠시 후, 나는 간신히 눈물을 닦고 마저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아, 어떡해. 잉크가 번져 버렸어……!’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내 눈물이 뚝뚝 떨어진 자리에 군데군데 잉크가 번져 볼품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더 이상 편지를 망가뜨릴 수는 없었다.
눈을 크게 뜬 채로 눈물을 말렸다.
‘웃긴 생각 하자, 웃긴 생각…….’
세드릭의 저택에 놀러 갔을 때, 단추를 한 칸씩 밀려 끼운 제복을 입고 나왔던 세드릭을 상상했다.
‘그 모습 정말 웃겼는데.’
그리고 아티팩트를 사용해 어른의 모습을 하고서 시장에 놀러 갔던 날을 떠올렸다.
모습은 분명 근엄한 황녀님인데, 행동과 말투는 아직 앳된 티가 나던 니나이나.
‘말투와 생김새의 괴리감 때문에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었지.’
그렇게 나는 1년 동안 있었던 재미있는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런데 왜…….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자꾸 눈물이 더 나냐고! 에잇, 나 이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래.’
결국 고개를 털어 머릿속을 비워버리고, 주머니에서 꺼낸 손수건을 눈가에 댄 채 다시금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편지는 니콜라스의 것이었다.
단정하고 깔끔한 글씨체.
[니콜라스: 에미르 영애, 반가워.
처음 편지를 쓸 때는 어색했는데 영애가 마지막 순서라 그런지 이젠 더 이상 어색하지 않구나.
영애에게도 사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어.
처음 유치원에 왔을 때 이곳에서 니나이나를 제외하고서는 누군가와 새로운 친우가 된다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거든.
그런데 그런 나에게 먼저 다가와 주고 손을 내밀어준 영애 덕분에 다른 이들과도 좋은 친우로 지낼 수 있게 되었어.
물론, 내게 동화책을 소개해 준 것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황자로서의 내가 아닌 니콜라스로서의 나를 알아준 건 영애가 처음이야.]
‘니콜라스 황자님…….’
이 편지를 쓰면서 조금은 부끄러워했을 니콜라스를 떠올리니 마음이 찡해져 왔다.
다음 편지는 세드릭의 것이었다.
삐뚤빼뚤한 글씨만 봐도 알 수 있었지만 말이다.
[나는 세드릭이다.
젠장, 편지를 네 번이나 써놓고 이제야 깨달았는데.
내 이름을 ‘세드 릭’이 아니라 ‘세드릭’이라고 붙여서 적어야 하는 거였어.
아니, 그보다도 에미르.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그러니까…… 고맙다고.
너도 알다시피 우리가 단둘이서 함께했던 일이 많잖아?
핸드벨 연주를 도와준 것도 그렇고, 빼앗긴 검을 되찾게 도와준 것도 그렇고, 내 생일에 파티를 해준 것도 그렇고.
젠장, 생각해 보니 전부 내가 도움받은 것뿐이잖아? 기사로서 면목이 없네.
뭐, 앞으로도 네가 계속 나와 친우로 지내준다면야 네게 받은 것들을 이후에 모두 갚아주도록 하지.]
‘뭐야, 계속 친구로 지내자는 말을 굳이 이렇게 말해야만 하는 거야? 휴. 하여간 세드릭. 솔직하지 못한 건 여전하다니까.’
나는 다음 편지를 읽었다.
날카롭지만 단정한 글씨체가 니콜라스의 것과 퍽 비슷한 느낌이었다.
[니나이나: 안녕, 에미르? 에미르 를 처음 본 게 바로 어제 같은데 이렇게 유치원에 다닐 마지막 날이 오다니 믿기지가 않는구나.
사실 이건 비밀인데, 네가 처음 내게 주었던 캐러멜에 달려 있던 리본 말이야.
아직도 간직하고 있어.
내 보물 상자에.
그리고…… 에미르 네 덕분에 이젠 나 장미처럼 새빨간 색깔도 좋아하게 되었어.
그냥 그렇다고.
앞으로도 황녀인 나와 함께하려면, 꽤나 열심히 공부를 해야겠구나 에미르.
다행히도 우리는 나이가 같으니, 열심히 공부한다면 몇 년 뒤에 아카데미에서 만날 수 있겠지.
앞으로도 내 좋은 친우가 되어줘.]
‘뭐? 그 리본을 아직도 갖고 있다고?’
니나이나의 솔직한 고백에 나는 깜짝 놀랐다.
그 별거 아닌 리본을 지금까지 소중히 간직하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까.
그리고 나는 다음 편지, 앨리스가 보낸 것을 읽기 시작했다.
동글동글한 글씨가 꼭 앨리스의 말투처럼 느껴졌다.
[앨리스: 에미르 님께.
에미르 님, 다른 분들께 편지를 쓰면서 에미르 님께 편지를 쓸 차례가 오기만을 내내 기다렸어요.
더 이상 유치원을 다니지 못한다는 건 정말 아쉬운 것 같아요.
에미르 님을 일주일에 다섯 번씩 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지는 거니까요.
하지만 이제는 에이비시 님의 도움을 받아 일주일에 일곱 번씩 에미르 님을 만날래요.
물론 농담이에요.
에미르 님도 쉬는 날이 있어야 하니까, 일주일에 여섯 번으로 해요.
에미르 님을 만난 게 제 인생 최고의 행복인 것 같아요.
에미르 님을 만나고 친구가 생겼고, 에이비시 님을 소환하게 되었고, 행복해졌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나중에 커서 멋진 어른이 되면, 그때 꼭 에미르 님이 제게 해주셨던 것처럼 제가 에미르 님을 행복하게 해 드릴게요.
약속이에요.]
‘앨리스…….’
앨리스의 편지에 기분이 일순간 뭉클해졌다.
또다시 눈물이 나오려는 것을 참고, 다음 편지를 읽었다.
‘마야의 편지네. 언제 이렇게 제국어 공부를 열심히 한 걸까.’
마야를 처음 봤을 때, 분명 제국어는 유창하게 말했지만 제국 문자를 쓰는 것은 그리 잘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언제 연습한 건지 어느새 나보다도 더 또박또박한 글씨로 멋진 편지를 써낸 마야였다.
[마야: 에미르 영애에게.
에미르, 반가워.
네가 롤링 페이퍼를 제안해 줘서 정말로 기뻐.
물론 나는 에미르의 편지가 제일 갖고 싶었지만, 다른 친구들이 준 편지도 함께 볼 수 있으니까.
에미르, 그거 알아? 너는 내 은인이야.
은인.
이 단어, 이렇게 쓰는 거 맞겠지? 그러니까 네가 우리 공작령을 원래대로 되돌려 주었잖아.
네 덕분에 모든 게 해결되었어.
아버지도 더 이상 다른 곳에 있지 않으시고 영지에 머무르고 계셔.
나는 돌아가면 좋아하던 강가 낚시를 할 생각이야.
물론 에미르 네가 아니었다면 차가운 얼음 위에서 썰매나 타고 있었겠지.
괜찮다면 유치원 졸업 후에도 너를 우리 영지에 자주 초대하고 싶어.
편지도 계속 주고받자.
그래도 될까?]
‘마야가 초대해 준다면 자주 놀러 가야지.’
벌써 왕국 여행 가는 것을 상상하며 나는 행복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마지막 편지였다.
제이크가 쓴 편지.
아주 익숙한 글씨체라서, 아마 이름이 쓰여 있지 않았더라도 바로 알아차렸을 것이다.
[제이크 테이온: 미르, 나야. 제이.
미르의 편지지에 내가 제일 먼저 편지를 쓸 수 있다는 게 기뻐.
벌써 이렇게 유치원이 마지막이라니 정말 신기한 기분이야.
내가 처음에 미르에게 함께 유치원에 다니자고 말했었잖아.
그때는 내가 후회하게 될 줄 몰랐어.
미르는 나만의 친구인데, 다른 아이들과도 친구가 되는 게 싫었거든.
그걸 뒤늦게 깨달았어.
하지만 어쩌겠어.
내가 싫어도 미르가 좋아하는데.
그래서 그냥 어쩔 수 없이 참았어.
어차피 미르는 나와 가장 오래 같이 지낸 친구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그리고 드디어 오늘이 됐어! 이제 유치원은 안 다녀도 돼, 미르.
매일 나랑만 함께 놀자.
마탑에 가서 지낸다고 해도, 순간 이동 마법을 사용해서 네게 오면 되니까.
매일 틈틈이 너와 함께 놀 시간은 많아.]
‘……!’
여기서 편지는 끝이었지만, 놀랍게도 제이크가 쓴 편지 끝에는 다른 아이들이 작게 달아놓은 의견이 있었다.
└마야: 제이크 영식, 욕심이 너무 과한 것 같아.
└앨리스: 제이크 님, 지금 저에게 결투 신청하신 거예요?
└니나이나: 이런, 제이크 소공자. 그렇게 안 봤는데 너무한 거 아니야? 황녀인 내가 명령하지. 에미르와 혼자만 놀려고 하지 마.
└누구 맘대로 소공자와만 논다는 거야?
└니콜라스: 의견들에 동의한다.
‘휴…… 이렇게 써놓아도 어차피 제이크는 못 본단 말이야!’
아이들이 한 줄씩 써놓은 걸 보던 나는 그만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편지를 써 주다니 다들 너무 고마워.’
아무래도 이 편지는 대대로 가보로 물려줘야 할 것 같다.
보물 상자 안에 소중히 원본을 보관하고, 마법으로 복제품을 만들어서 종종 꺼내봐야지!
* * *
우리는 에드몽 부인을 비롯해 1년 동안 우리에게 좋은 수업을 해주었던 선생님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이런 귀한 분들을 가르칠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잊지 못할 것 같군요. 허허. 제가 황자, 황녀 전하의 스승이 되다니…….”
그러고는 정말로 끝이었다.
평소와 같은 시간에 우리는 유치원을 나섰다.
“에미르, 잘 가. 공작령에 도착해서 안부 편지를 보낼게.”
왕국으로 향하는 마차에 오르면서 마야가 내게 손을 흔들었다.
“네, 마야 소공자님. 저도 편지 쓸게요!”
나는 마야를 향해 마주 손을 흔들었다.
이윽고 마야가 탄 마차가 서서히 멀어져 갔다.
이 유치원을 가장 마지막까지 지키는 게 내가 되었으면 했다.
그래서 다른 아이들이 마차를 타고 떠나는 걸 배웅했다.
“에미르, 잘 가렴!”
“네! 황녀 전하도, 황자 전하도 안녕히 가세요!”
아까 롤링 페이퍼를 읽으며 울던 모습은 어디 가고 니콜라스와 니나이나 둘 다 환하게 웃으며 나를 향해 인사하고 떠나갔다.
“에미르 님, 이따가 요정님과 함께 놀러 갈게요!”
“나도 편지 보내줘, 에미르! 빼놓지 마!”
내게 다가와 속삭이고서는 재빨리 마차에 올라타는 앨리스와, 떠나기 직전에서야 내게 외치는 세드릭.
두 사람이 탄 마차도 유유히 제 갈 길을 떠났다.
마지막으로 제이크.
제이크는 내게 달려와 폭 안기고서는 중얼거렸다.
“미르, 나랑 같이 안 갈 거야? 마탑으로 가는 건 이틀 뒤라서, 나 오늘은 미르랑 놀 시간이 많은데.”
“응? 아, 나는 이곳에 조금만 더 있고 싶어서.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 있어. 이따가 갈게!”
내 말에 제이크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알았어. 저택에서 기다릴게. 빨리 와, 미르.”
“알았어, 제이.”
제이크까지 제 마차를 타고 집으로 떠나갔다.
이윽고 나는 조용해진 유치원 앞에 덩그러니 서 있었다.
‘엄청…… 고요하다.’
더 이상 물이 흐르지 않는 분수대, 주변에서는 새가 짹짹거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는다.
‘꼭 그림이나 사진처럼 한순간에 멈춰 있는 것 같아.’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찬 바람만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잠시나마 시간이 멈춰 버린 것으로 착각했을지도 몰랐다.
그때, 마침 황궁에서 파견한 일꾼들이 유치원으로 오고 있었다.
아마도 유치원 내부의 집기들을 정리하려는 모양이다.
“아가씨, 이제 슬슬 출발하셔야지요? 다른 분들이 떠나신 지도 어언 30분이나 지났습니다.”
“……!”
마침 들려온 마부의 목소리에 나는 놀랐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유치원 주변만 서성거린 것 같은데 벌써 그렇게 시간이 지났다고?
“알았어. 갈게.”
나는 마차에 올라탔다.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어쩐지 미묘한 감상을 일으켰다.
‘신기하네. 평소와 하나도 다를 것 없는 하원길인데.’
하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더 이상은 이곳에 올 일 없다는 것이겠지.’
그때 마부가 외쳤다.
“아가씨, 출발하겠습니다!”
“……잠깐!”
나도 모르게, 그 목소리를 듣자마자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부가 의아한 듯 되물었다.
“예?”
“……미안. 나 잠깐만 내릴게. 생각해 보니 두고 온 게 있는 것 같아서!”
그러고서 나는 마차에서 뛰어내려 재빠르게 유치원 안으로 달려갔다.
“헉, 헉…….”
평소에 이렇게 달려 본 적이 드물어서 그런지, 숨이 찼다.
“…….”
마침내 유치원 안에 도착했을 때, 나는 이미 대부분의 집기가 사라진 휑한 내부를 마주했다.
책상, 의자, 책장, 그 어떤 것도 남아 있지 않은 텅 빈 교실을.
“새런 영애님? 왜 아직 여기 계십니까? 물건을 옮기고 있어, 다치실 수 있습니다. 어서 자리를 피하시지요.”
나를 알아본 몇 명의 일꾼이 말을 걸어왔다.
동시에 뒤에서 나를 따라온 마부가 질문했다.
“아가씨, 두고 오신 물건은 찾으셨습니까?”
“……아, 그게.”
두고 온 게 있다는 것은 그저 변명이었을 뿐이다.
하지만 이제야 깨달았다.
아무래도 나는 이곳에 미련을 두고 왔던 것 같다고.
“……응, 찾았어. 그러니까 이제 진짜로 돌아갈게.”
여기서 행복하게 지냈던 시간에 대한 미련.
6명의 아이와 함께했던 추억들.
‘정말로 끝인 거야. 이젠 알겠어.’
나는 터덜터덜 걸어가 마차에 다시 탔다.
등받이에 몸을 기댄 순간 온몸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다행이야. 내가 이곳의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어서.’
곧이어 마차가 움직이며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가 꼭 자장가처럼 느껴져서일까?
나도 모르게 창턱에 고개를 툭 기대고 잠에 빠져들었다.
* * *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아직 채 잠에서 깨지 못한 탓인지, 날 깨우는 유모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어유, 아가씨, 황궁에 다 왔다니까요. 어서 일어나 보세요!”
……응? 뭐지?
황궁이라고?
나는 분명 황궁이 아니라 우리 집으로 가는 마차를 탔었는데?
그때 다시금 유모의 우렁찬 외침이 들려왔다.
“아이 참, 황녀 전하께서 기다리시겠어요, 아가씨! 황녀 전하와 데뷔탕트 준비를 함께하기로 하셨잖아요.”
데뷔탕트?
그 단어를 들은 순간 확 정신이 듦과 동시에 눈이 스르륵 뜨였다.
나는 몽롱하게 중얼거렸다.
“……벌써 도착했어, 유모?”
“그렇다니까요. 자, 어서 내리세요. 어머, 리본이 흐트러졌네. 다시 매 드릴게요.”
눈앞에 있는 이는, 유치원 다닐 때쯤의 내가 기억하던 것보다 10여 년 더 나이 든 모습의 유모였다.
‘물론 당연한 일이지. 벌써 유치원을 졸업한 지도 10년…… 하고도 2년이 더 흘렀으니까.’
크게 숨을 들이켜자 그제야 꿈과 현실이 구분되었다.
어제 얼마 남지 않은 데뷔탕트를 앞두고 두근거리는 마음에 잠을 늦게 잤더니, 그만 니나이나를 만나러 오는 길에 마차에서 푹 잠든 모양이었다.
“마차에서 잠들어서 그런가? 유치원 졸업할 때의 꿈을 꿨어. 신기하지, 유모?”
나는 내 옷차림을 점검해 주는 유모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러자 유모가 너털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렇게 신기하지만은 않네요. 아가씨께서는 워낙 유치원에 관련된 꿈을 자주 꾸시잖아요. 후후.”
“하긴, 그건 그래.”
나는 피식 미소 지었다.
워낙 유치원 다녔을 때 일이 내 인생에서 인상 깊게 남은 탓인지도 몰랐다.
‘그때 유치원을 간 덕분에, 지금 이렇게 니나이나 황녀님과도 여전히 친우로 지내고 있으니까.’
마침 왼손 끝에 마차 안을 굴러다니던 손거울이 잡혔다.
‘황녀님을 만나는 자리에 침 자국을 달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나는 거울을 보았다.
12년.
많은 걸 달라지게 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물론, 7살이었던 어린아이를 19살 성년이 되게 하기에도 충분했다.
‘정말 하나도 달라진 게 없다니까, 나는.’
어릴 때 아티팩트를 사용해 어른이 된 모습을 미리 확인했던 적이 있었다.
그때 보았던 것과 지금의 나는 완전히 똑같았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예상보다 더 멋지게 변했는데 말이야. 나만……!’
거울을 볼 때마다 19년째 마주하고 있는 동그란 눈매와 그 안의 진한 녹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회색빛의 머리카락은 어느덧 허리께까지 길어져 있었다.
나는 모자를 고쳐 쓰고 마차에서 내렸다.
어느덧 훌쩍 커버린 키는 더 이상 발판이나 누군가의 에스코트 없이도 쉽게 마차를 오르내릴 수 있게 했다.
* * *
수백 번이나 드나든 니나이나의 궁 복도는 이제 내 집…… 만큼은 아니고 별장 정도는 될 정도로 익숙했다.
나를 발견한 니나이나의 시녀가 응접실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자 찻잔을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와 함께 니나이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미르, 이제 오니? 기다렸다고.”
“아,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죄송해요. 마차에서 잠드는 바람에 그만…… 늦었어요!”
“그래. 변명은 그쯤 하고. 이제 고개 들어.”
내 사과에 니나이나가 손을 휘휘 저었다.
시녀에게 차를 새로 내오라는 신호였다.
나를 기다리는 동안 얼마나 차를 많이 마신 건지, 찻주전자가 반쯤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동시에 나는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오늘따라 더 화려해 보이는 니나이나의 모습이 보였다.
오른쪽으로 머리를 쓸어모아 땋고, 자잘한 붉은색 모조 꽃장식을 단 머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니나이나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스타일이었다.
‘2년 전이었던가. 니나이나가 처음 저 머리를 하고 나타났을 때 찬사를 보냈더니, 그 이후로 일주일에 한 번은 무조건 저 머리를 한 채 나타나고는 했었지…… 아마?’
황족의 핏줄 때문인지, 어느덧 키도 나보다 한 뼘이나 더 큰 니나이나였다.
붉은 눈동자와 날카로운 눈매가 나를 향해 부루퉁한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은 흰색 레이스에 붉은 리본 장식이 되어 있는 드레스를 입고 있었는데, 정말로 잘 어울렸다.
때문에 그 모습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 어린 찬사를 중얼거릴 수밖에 없었다.
“……전하는 오늘따라 더 빛나시네요! 눈동자가 루비를 닮은 듯이 반짝.”
하지만 그 중얼거림은 채 끝맺지 못했다.
중간에 말을 자른 니나이나 때문이었다.
“저기, 에미르. 나도 알거든? 내 눈동자가 루비를 닮았다는 것 말이야. 네가 수백 번도 더 말해줬는데 바보가 아닌 이상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잖니?”
니나이나는 이어 푸념했다.
자신이 ‘눈동자가 루비를 닮았다’는 칭찬을 좋아한다는 소문이 어디선가 퍼져나간 이후로, 자신을 만나는 이마다 눈동자 이야기를 꺼낸다면서.
“처음에 네가 그렇게 말해줬을 때는 정말로 좋았는데, 이젠 수천 번도 더 들은 것 같아서 식상해졌어. 정 찬사를 보내고 싶으면 새로운 방식을 생각해 내란 말이야, 다들.”
“하하…….”
니나이나를 질리게 한 데에 내 공도 조금은 있을 것 같았다.
잠시 후, 새로 따른 차와 함께 니나이나가 내게 질문했다.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자. 오늘은 데뷔탕트 의상을 제작하기로 했잖니. 이 디자이너 중 누가 마음에 들지?”
니나이나가 보여준 명단에는, 제국뿐만 아니라 타국에서까지 내로라하는 의상 디자이너들의 이름이 가득 적혀 있었다.
당연하지만 니나이나라면 이들 중 누구를 고른다 해도, 곧바로 황궁에 달려오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선택권을 나에게 넘겨버리다니!’
선택지가 많으면 많을수록, 결정하는 데에 어려움을 느끼는 나로서는 그저 머릿속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이 사람은?’
그때, 다행스럽게도 명단을 훑어내리던 중 꽤나 익숙한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십여 년 전 니나이나가 내게 선물한 옷들을 제작했던 디자이너이기도 했고, 그 이후로 실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하며 마침내 황녀 전속 디자이너가 된 사람이기도 했다.
내 선택에 니나이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흐음? 일부러 내 전속 디자이너를 고른 거야?”
“……안 되나요, 전하?”
혹시라도 니나이나가 ‘안 돼! 그녀는 내 전속 디자이너라고!’라고 말할까 봐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안 될 리가 없잖아? 그래, 뭐. 네 마음대로 해. 에미르.”
니나이나의 호쾌한 목소리였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이런, 에미르 영애님도 함께시군요.”
잠시 후, 니나이나의 전속 의상 디자이너가 조수들과 함께 허둥지둥 달려왔다.
“그래. 내가 이전에 귀띔했다시피 이제 데뷔탕트가 한 달도 남지 않았잖니? 2주 안에 나와 에미르의 데뷔 의상을 만들어낼 수 있겠지?”
“물론 가능합니다, 전하. 그럼 지금 바로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곧 우리의 앞에 그녀의 디자인 북이 놓였다.
디자이너는 작년 데뷔탕트를 치렀던 영애들의 드레스 스케치를 모아 보여주었다.
“흐음…….”
하지만 어쩐지 니나이나는 그중에서 딱히 마음이 가는 디자인이 없어 보였다.
감흥 없는 눈길로 사락사락 종이를 넘기던 니나이나의 시선이 무언가를 보고 멈추었다.
“이건?”
나는 니나이나가 눈짓한 종이의 정체를 확인했다.
‘어! 이 드레스는 내가 어릴 때 입었던 것과 똑같잖아.’
그 종이의 제일 위에 그려진 것은, 다름 아닌 유치원에 다닐 적 나와 니나이나가 맞춰 입었던 트윈룩의 디자인이었다.
10여 년도 더 된 스케치인지라 잉크가 바래 있어서 바로 눈치채지 못했다.
디자이너 역시 뒤늦게서야 알아차린 듯 깜짝 놀란 얼굴을 했다.
“아, 그것은……!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실수로 다른 종이를 데뷔탕트 디자인 북에 끼워 넣었던 모양입니다. 미처 빼놓는다는 것을…….”
디자이너는 안절부절못하면서 니나이나가 어서 그 종이를 제게 돌려주기를 바라는 듯했지만, 니나이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 이 디자인 좀 더 봐도 될까? 흐음, 드레스뿐만 아니라 모델을 그려놓은 것도 있네? 그것도 두 명씩이나.”
그렇게 말하면서 니나이나는 종이의 뒷면을 펼쳤다.
과연 그곳에는 빼어난 솜씨로 의상뿐만 아니라 그 의상을 입은 모델 또한 그려놓은 스케치가 보였다.
‘그런데 어쩐지 익숙한데? 저 그림. 그러고 보니 검은 머리는 니나이나, 회색 머리는 나를 닮았잖아?’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 그게!”
동시에 디자이너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녀는 변명을 찾으려는 듯 우물쭈물하다가 이내 사실을 실토했다.
“실은, 전하와 영애께서 제 옷을 입어주신 이후로 두 분을 뮤즈 삼아 종종 디자인을 그려보고는 했습니다…….”
그녀의 말은 사실이었다.
수십 개는 될 듯한 디자인 밑엔 구상한 날짜까지 짤막하게 적혀 있었는데, 최근까지도 스케치를 계속해 온 모양이다.
“오호, 이건 꽤나 마음에 드는데?”
디자이너의 뺨이 창피함으로 붉어지는 것은 무시한 채, 니나이나는 계속해서 공책을 넘겨 가며 제 마음에 드는 디자인들을 살폈다.
아까까지만 해도 별로 관심 가는 것이 없어 보이던 니나이나의 무료한 시선이 흥미로움으로 바뀌었다.
“어? 이것도 예쁜 것 같아요. 드레스 위에 덧붙인 천이 꼭 산들바람처럼 하늘거리는걸요?”
나는 옆에서 니나이나가 보는 것을 함께 지켜보다가, 내 마음에 쏙 드는 디자인을 발견하고서는 말을 보탰다.
그러자 니나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에미르. 보는 눈이 있구나. 나도 이 의상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던 참이었어.”
뭐라고 해야 할까.
디자이너가 아까 보여주었던 디자인 북과는 다르게, 이 종이에 그려진 디자인들은 선 하나에도 열정과 애정이 듬뿍 담긴 것 같았다.
종이 너머로 그게 느껴졌다.
당연하게도 우리는 그 종이에 그려진 드레스를 고를 수밖에 없었다.
“아, 전하. 그리고 영애님. 정말로 이걸로 하시겠습니까? 물론 두 분께서 이 의상을 입어주신다면 저야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래. 그리고 특별히 내 허락 없이 몰래 디자인을 해놓은 것을 용서해 줄게. 왜냐하면 마음에 들었거든.”
니나이나가 자비롭게 용서를 선언했다.
나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그런데 아무리 친한 친우 사이라 해도 데뷔탕트에 서로 비슷한 디자인의 트윈룩을 입고 가는 사람이 있던가?’
작은 의문은 들었지만 말이다.
설마 그런 사람이 나와 니나이나가 최초였을 줄은 몰랐으니까.
* * *
약 한 달 후.
마침내 데뷔탕트 연회가 열리는 당일이었다.
데뷔탕트는 따스한 봄이 시작될 무렵 열리는 연례행사였다.
그 해에 만으로 19세 생일을 맞는 제국의 귀족 영식과 영애라면 모두 참석해야 하는 중요한 연회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처음으로 정식 사교계 데뷔를 하는 자리인지라 나는 정말로 설레고도 떨렸다.
물론 처음 데뷔하는 이들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기존의 귀족들도 모두 함께하는 행사인지라, 단연컨대 신년제나 건국제만큼 규모 있는 연회였다.
‘그러고 보니 재작년엔 마야의 데뷔탕트 연회를 축하하러 왕국까지 다녀왔었지.’
아직 데뷔탕트를 치르지 못한 이들은 연회장 내부로 들어갈 수 없었기에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다 꽃다발을 건넸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리고 작년엔…… 니콜라스와 세드릭, 앨리스. 그 세 명의 데뷔탕트가 있었고 말이야.’
아무래도 제국 유일 황태자의 첫 사교계 데뷔이다 보니 많은 파장이 있었더랬다.
그리고 세드릭과 앨리스 역시 데뷔탕트를 같이 치렀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젠 세드릭은 소드 마스터, 앨리스는 공을 세워 백작위를 받은 어엿한 요정 소환사니까.’
그리고 올해 역시, 황실의 하나뿐인 황녀인 니나이나와 고위 마법사 자리에 오른 제이크의 데뷔로 꽤나 시끌벅적해질 게 분명했다.
‘음…….’
물론 나, ‘에미르 새런 후작 영애’의 데뷔에 관심 갖는 이는 내 가족들과 친우들을 비롯해 소수의 몇몇뿐이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괜찮아!’
나는 황실에서 보내온 데뷔탕트 의상을 걸친 채 거울 앞에서 이리저리 기웃거리기도 하고, 들뜬 채 미리 파트너도 없이 혼자 사교댄스를 연습하기도 했었다.
이날을 위해서 몇 달 동안 노력했으니, 식 순서를 헷갈린다든가 춤을 추다 상대방의 발이나 옷자락을 밟아버린다든가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정확히는 일어나면 안 되는 거지만.’
단장이 모두 끝나고 나는 자신감 있게 방에서 나왔다.
이제 가문의 마차를 타고 연회가 열리는 궁으로 향할 시간이었다.
분명 그래야 하는데, 어째서일까?
“미르.”
“……제이? 왜 네가 여기 있어?”
저택을 나서자마자 제이크의 마차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그야말로 화들짝 놀랐다.
‘분명 연회장에서 만나기로 했었잖아?’
그런 내 의문을 알아챈 모양인지 제이크가 말했다.
“혼자 가면 외로울 것 같아서. 에미르. 너와 함께 가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10년이나 지났지만 제이크는 아직 많은 것을 나와 함께하려고 한다.
외로움을 많이 타는 성격도 여전한 것 같다.
“음, 그렇다면 알겠어.”
“좋아.”
제이크가 환히 미소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건 설마…… 에스코트인가?’
나는 잠시 믿기지가 않아서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그러자 제이크가 어서 잡아 달라는 것처럼 재차 손을 뻗었다.
‘어쩐지 제이크의 속마음을 알 것 같아. 이제 데뷔탕트도 치르게 되니까, 자신도 어엿한 어른이라는 거겠지.’
제국에서 법적인 성년은 17세지만, 귀족 사회에서는 데뷔탕트까지 치러야만 성인으로 인정해 주는 분위기다.
‘그렇다면 나도 장단을 맞춰주는 수밖에!’
생각을 마친 나는 선뜻 제이크가 내민 손을 잡고 마차에 탔다.
이렇게 둘이서 함께 마차를 타보는 것도 꽤나 오랜만인지라, 괜히 옛날 어릴 때의 추억을 떠오르게 했다.
‘유치원 다닐 때만 해도 이렇게 자주 함께 타고는 했는데.’
괜스레 그사이 많이 달라져 버린 제이크의 모습이 신경 쓰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제이크. 오늘은 평소와 조금 다르네. 처음으로 연회에 가게 되어서 그런 건가. 예복을 차려입은 모습은 또 처음 보는 것 같아.’
나는 무심코 마주 앉은 제이크의 모습을 살폈다.
연한 미색의 정장이 부드러운 갈색 머리와 눈동자에 정말로 잘 어울렸다.
그런데 그런 내 시선이 의아하게 느껴진 것인지, 제이크가 민망한 듯한 목소리로 뺨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미르, 내 얼굴에 뭐라도 묻었어?”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야.”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저었다.
제이크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럼 어째서?”
“그게…… 제이 네가 이렇게 차려입은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아서.”
차마 그 뒤에, ‘그래서 조금 기분이 묘한 것 같아’라든가, ‘어쩐지 똑바로 시선을 마주치기 힘들어’ 같은 솔직한 심정은 털어놓지 못했다.
“아, 그래?”
하지만 그런 대답에도 제이크는 어쩐지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대꾸했다.
“다행이야. 최대한 네 취향에 가깝게 맞췄던 보람이 있어.”
“뭐라고?”
나는 귀를 의심했다.
‘방금 분명 내 취향이라고 했지?’
제이크에게 방금 뭐라고 말한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마침 마차가 궁에 도착해 버렸기에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연회장 앞은 이미 많은 귀족으로 인산인해였다.
종종 내가 있는 쪽을 향해 눈길 주는 이들이 느껴졌지만, 아마 나와 함께 있는 제이크를 바라보는 시선일 게 분명했다.
그때였다.
“에미르.”
“어, 황녀 전하!”
갑작스레 왼편에서 사람들이 썰물처럼 갈라지더니, 그 사이로 내게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다름 아닌 니나이나였다.
니나이나는 오늘따라 정말로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긴, 아마 오늘의 주인공은 그녀일 테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주목받는 사람 둘 사이에 낀 나도 덩달아 관심받고 있다는 점이겠지만.’
사실, 나도 이미 알고 있었다.
유치원을 비롯해 아카데미에서도 나는 여전히 친우들과 친하게 지냈다.
그래서일까? 후작가의 영애지만 평범하기만 한 ‘에미르 새런’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이들이 아예 없지만은 않다는 것을.
그때, 니나이나가 내게 말했다.
“에미르, 우리 함께 연회장에 들어가자.”
“황녀 전하. 에미르는 저와 함께 입장하기로 먼저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곧바로 제이크가 니나이나를 향해 조금 불만 어린 목소리로 항변했다.
니나이나가 제이크의 불만 어린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 약속을 했었다고? 나는 들은 바가 없는데? 그것참…… 유감스러운걸.”
하지만 여전히 뜻을 굽히겠다는 생각은 없어 보였다.
물론 그것은 제이크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쩌지?’
제이크와 니나이나 사이에서 흐르는 팽팽한 긴장감이 피부로 느껴졌다.
둘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버린 나는 스리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누굴 선택할 거야?’
‘에미르, 나와 함께할 거지?’
어쩐지 두 사람의 눈빛이 내게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필이면 우리가 있는 곳이 연회장 바로 근처인지라, 주변에서 느껴지는 관심 어린 시선들도 상당했다.
“어머, 저분들은?”
“황녀님과 테이온 소공자…… 그리고 그 사이는 아마도 소문의 그 새런 영애인 모양인데요.”
웅성웅성, 수군수군.
휴, 언제부터 내가 ‘소문의 그 영애’가 되어 있던 걸까?
‘계속 이러고 있을 수는 없어!’
올해 데뷔탕트를 치르는 이들 중에서 가장 신분이 높은 이는 단연컨대 황녀인 니나이나였다.
때문에 그녀가 연회장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다른 이들도 섣불리 발걸음을 디디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어서 선택해야 하는데, 어쩌지?’
그때 이 위기를 모면할 좋은 아이디어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아! 그러면 되겠다.’
나는 자연스레 오른손은 제이크에게, 왼손은 니나이나에게 내밀었다.
“미르?”
제이크가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그럼, 우리 세 명이서 함께 입장해요. 어차피 우리는 친우잖아요. 다들 그러려니 할걸요?”
내 말을 들은 니나이나가 일순간 멈칫하더니 골치 아프다는 듯이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하아…… 내 이럴 줄 알았지.”
“이런, 미르는 항상 공평한 선택만 하는구나.”
분명 칭찬 같은 말을 하면서도, 표정은 미묘했다. 제이크는 마음에 완벽하게 차지 않는다는 티를 냈다.
“어쩔 수 없지.”
“그럼 이제 들어갈까?”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결국 내 의견을 따르기로 한 듯, 내 손을 사이좋게 하나씩 잡은 채로 연회장에 입장했다.
“니나이나 클루아 베텔리우드 황녀 전하, 제이크 테이온 소공자, 그리고 에미르 새런 후작 영애께서 입장하십니다!”
우리가 들어옴과 동시에 우렁차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에, 나는 순간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정말로 데뷔탕트를 치르게 된 거야!’
그동안 얼마나 사교계 모임에 참석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원작 소설에서 보았던 화려하고 웅장한 연회나, 담소가 오가는 티파티나, 취미를 함께하는 소모임 등에 꼭 나도 함께해 보고 싶었다.
‘아, 그런데 시선이 너무 집중되는 것 아니야?’
하지만 기쁜 마음도 잠시.
이 넓은 연회장 안에 있는 이들이 모두 우리를 바라보는 통에 나는 좀처럼 어디에 시선을 둬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테이블, 테라스 커튼, 악단, 댄스 홀, 그 어느 쪽을 바라본다 해도 누군가와 시선이 마주칠 것 같았다.
‘으으, 나는 아직 모르는 사람과 시선이 마주쳤을 때 싱긋 눈웃음 지으며 능숙하게 넘길 수 있는 정도는 못 된단 말이야!’
후우, 한숨을 쉬며 대충 천장과 저 멀리 창문 사이쯤을 바라보고 있을 무렵이었다.
멀리서만 지켜보는 게 아니라 직접 다가와 인사를 하려는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세상에, 몹시 용감하네. 다들 처음 사교계에 나오는 자리일 텐데.’
지금 내가 참석한, 오전에 열리는 첫 번째 연회는 오직 그 해에 처음 데뷔탕트를 치르는 이들만 있었다.
처음 참석해 낯설 이들을 위한 배려였다.
‘한마디로, 다들 웬만하면 서로 초면이라 이거지. 아카데미에 다녔다면 서로 안면 있는 이들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아카데미에 다니지 않은 수도 이외 영지에서 올라온 귀족 자제도 상당히 많았다.
마침 한 영애가 니나이나에게 인사를 건네는 게 보였다.
미묘한 눈치 싸움의 승리자였다.
“처음으로 황녀 전하를 뵙고 인사드립니다. 이스틴 백작가의 소피아라고 합니다.”
“반가워요, 소피아 영애.”
니나이나가 우아한 태도로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었다.
사실, 나를 대할 때와 다른 이들을 대할 때가 많이 달라 이럴 때면 조금 괴리감이 들고는 했다.
‘그래도 니나이나, 원작에서처럼 까칠하지만은 않아서 다행이야.’
원작에서는 그야말로 극악무도한 악녀처럼 등장했던 니나이나였다.
원작 그대로였다면, 아마도 나는 그녀의 곁에 제대로 다가가지도 못하고 얼쩡거리다가 눈에 거슬려 벌 받지 않았을까.
‘휴우…… 그렇게 되지 않아서 정말로 다행이야.’
내가 안도하고 있을 때, 소피아 영애를 시작으로 하나둘 사람들이 다가와 니나이나와 제이크에게 말을 걸기 시작했다.
물론, 둘뿐만 아니라 내게도 인사를 건네는 이들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새런 후작 영애! 저는…….”
그때마다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렇지, 이게 바로 사교계의 재미지!
그런데 어째서일까.
정신 차려 보니 어느새 우리 주변에 아무도 없었다.
“언제 여기로 왔지……?”
눈앞에 보이는 것은 휴게실이었다.
말을 거는 이들에게 일일이 화답해 주며 연회장 내부를 거닐다 보니, 나도 모르게 여기까지 떠밀려 온 것일까?
“미르, 네가 좀 피곤해 보여서.”
“맞아. 우리 여기서 좀 쉬자. 다들 관심 가져 주는 건 좋지만, 슬슬 지치네.”
제이크와 니나이나의 말을 듣고 보니 이쯤에서 좀 휴식을 취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미르. 이것 좀 마실래?”
“카나페도 좀 먹어봐.”
시종을 불러 가져온 디저트를 앞다투어 내게 권하는 둘이었다.
덕분에 나는 배고플 일 없이 실컷 간식을 먹었다.
‘그런데 신기하네. 아까와는 다르게, 다들 이곳을 그냥 스쳐 지나가.’
황실 연회장에 있는 휴게실은, 얇고 투명한 커튼으로만 입구가 가려져 있다.
때문에 지나가다가 한 번쯤 흘깃 쳐다볼 법도 한데, 그 누구도 니나이나와 제이크가 있는 이곳을 바라보지 않았다.
‘뭐지.’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거릴 때, 마침 제이크가 말했다.
“휴식할 때 다른 사람들이 기웃거리면 불편할 것 같아서 연회 참석자들에게 존재감을 지우는 마법을 걸어놓았어. 잘했지?”
“……!”
어쩐지, 그래서였어?
그제야 이 위화감의 이유를 깨달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이대로 있으면 데뷔탕트 첫 연회를 제대로 즐기지 못할 거야. 그럼 두고두고 아쉬울 것 같아…….’
그때였다.
시종이 다가와 니나이나에게 무어라 이야기를 전했다.
“미안. 나는 잠시 자리를 비워야 할 것 같아. 오라버니가 날 불렀어.”
“아, 니콜라스 전하께서요?”
니콜라스가 이후에 있을 2부 연회에서 새롭게 데뷔탕트를 치르는 이들에게 축사를 건넬 예정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전해 들은 바였다.
‘조금 있으면 오래간만에 황자님도 만날 수 있겠네.’
니나이나가 싱긋 미소 지으며 자리를 떴다.
“응. 다녀올게.”
그러자 휴게실엔 어느덧 나와 제이크만이 남게 되었다.
‘이제 슬슬 다시 나가자고 해볼까?’
아무래도 충분히 휴식을 취한 것 같으니 말이다.
“저기, 제이. 우리 다시 연회장으로 가지 않을래?”
왜 그런 말을 하냐는 듯, 제이크가 살짝 졸려 보이는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날 응시했다.
‘음…… 피곤한가?’
하긴 제이크도 요 며칠 데뷔탕트 준비를 위해 고생했을 테니, 피로가 몰려올 만도 했다.
“제이 네가 피곤하다면 넌 여기서 조금만 더 쉬어도 되고. 음,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빨리 춤도 춰 보고 싶고 해서…… 어?”
어쩌다 보니 구구절절 이유를 설명하고 있던 차였다.
갑자기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 고개를 들어 보니 제이크가 어느덧 일어서 있었다.
“가자. 미르. 나랑 같이 가.”
“아? 응, 그래!”
피곤해 보였던 표정은 어디 가고, 제이크는 살짝 결연해 보이기까지 하는 비장한 태도로 나를 이끌었다.
‘어째서 갑자기 태도가 변한 거지?’
제이크와 함께 연회장으로 향하는 복도를 지나치면서 짧게 고민했다.
‘아! 설마 제이크도 춤추고 싶었던 걸까?’
예전부터 제이크는 종종 첫 데뷔탕트에서 추게 될 춤이 기대된다며, 꾸준히 연습하고 있다는 말을 했었다.
‘그러고 보니 제이크. 첫 춤은 나와 함께 추기로 약속했었지, 참.’
그 약속,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 맞겠지?
하긴 최근에도 언급했던 약속이니 잊어버렸을 것 같지는 않았다.
연회장에 막 들어서려던 그때.
갑작스레 제이크가 발걸음을 멈추고서 돌아섰다.
“……?”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듯한 표정이다.
도저히 말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말이라도 있어 보인다.
“왜 그래?”
“……미르. 내가 이런 말은 네가 싫어할까 봐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그러고서는 주변을 휙 훑으며 내게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왔다.
대체 얼마나 대단한 말을 하려고?
“……분명 첫 춤은 나와 추기로 약속했는데, 벌써 잊어버린 거야? 나 아까 네가 한 말을 듣고 나서부터 자꾸 마음이 조급하기만 해. 혹시라도 네가 나 말고 다른 사람의 손을 먼저 잡아줄까 봐.”
“……!”
그래서 그렇게 급하게 따라나섰던 거였어?
마음속 깊은 곳에서 의심은 했지만, 설마 진짜일 줄은 몰랐다.
‘제이크도 참. 평소엔 느긋하면서 이럴 때만 성격이 달라 보여.’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뜻으로 빙긋 웃었다.
“제이크, 내가 너와 한 약속을 잊어버렸을 리 없잖아. 그것도 네가 몇 번이나 다시 상기시켜 준 내용인걸. 알고 있어. 우리, 서로의 첫 춤 상대가 되어주기로 했던 거.”
“……고마워. 잊지 않아줘서.”
제이크가 내 손을 약하게 붙잡은 채 중얼거렸다.
나는 그런 제이크를 잠시 애틋하게 바라보다가, 손을 잡고 끌어당겼다.
“고마우면 어서 가자. 나 빨리 진짜로 춤춰보고 싶어!”
“알겠어.”
제이크는 기쁜 표정을 하고서는 순순히 내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그렇게 우리는 다시금 연회장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아까보다 더 많은 인파가 보였다.
“이미 춤이 시작했나 봐.”
제이크와 함께 댄스 홀로 향하며 자그맣게 속삭였다.
조금 아쉬웠다.
첫 곡의 시작을 내가 장식해 보고 싶었으니까.
‘그래도 제이크와 함께 추는 거니까 꼭 첫 번째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오히려 주목이 덜할 테니 그 점은 마음에 들었다.
때마침 한 곡이 끝나고, 다음 곡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제이크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미르, 네 첫 춤을 나와 함께해 줘.”
한 치의 떨림도 없이 매끄러운 목소리였다.
꼭 이날을 위해 수십 번도 더 넘게 연습해 온 것처럼.
“……좋아!”
나는 제이크의 팔에 손을 가볍게 얹고 춤을 추기 시작했다.
‘아, 떨려! 그럴 일은 없겠지만 혹시라도 제이크의 발을 밟거나 드레스 자락에 걸려 넘어지기라도 하면 어쩌지.’
괜히 속으로 설레발을 떨면서, 겉으로는 하나도 긴장하지 않은 것처럼 태연하게 스텝을 밟았다.
“미르, 긴장했어?”
그런데 그런 나에게 제이크가 빙긋 웃으며 질문했다.
혹시 내 행동에서 긴장한 티가 난 걸까?
“응? 아니? 전혀.”
순간 나는 속마음을 들킨 창피함에 부러 뻣뻣한 투로 부정했다.
그러자 제이크가 살짝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래? 미르 넌 나와 다르게 의연하구나. 사실, 난 지금 너무 긴장되거든.”
“에이, 거짓말…….”
제이크의 말이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긴장된다고 하는 사람치고 너무 태연한 태도였으니까.
“거짓말 아니야. 네 손을 잡고 있으니까 금방이라도 실수할까 봐 겁나.”
제이크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음, 나는 긴장하면 겉으로 티 나는 편인데 제이크는 반대인가 보네.’
나도 나지만, 제이크에게 무언가 격려의 말을 해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있잖아, 제이. 너무 겁내지 마. 혹시라도 네가 내 발을 실수로 밟더라도 모른 척 넘어가 줄게, 아얏!”
하지만 나는 채 말을 다 끝내지도 못하고, 스텝이 꼬여 휘청거렸다.
‘안 돼, 넘어진다…… 어?’
우당탕 소리와 함께 볼썽사납게 연회장 바닥을 구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넘어지지 않았다.
“미르. 조심해야지.”
제이크가 곧바로 내 허리를 받쳐 자연스럽게 기대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아, 고마워…….”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감사 인사를 했다.
이게 뭐야!
너그럽게 말해놓고서는 정작 실수를 저지른 건 제이크가 아니라 나였다.
‘하마터면 망신당할 뻔했다. 휴.’
아마 제이크가 나를 잡아주지 않았더라면, 데뷔탕트 연회에서 춤추다 파트너 손을 내동댕이치고 바닥 구르기를 한 전설의 영애로 수십 년간 회자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후로 나는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춤을 췄다.
두 번 실수하는 일은 다행히도 없었다.
첫 곡이 무사히 끝나고, 우리는 댄스 홀에서 빠져나와 테라스 근처 벽에 섰다.
‘휴, 힘들다. 춤추는 게 이렇게 에너지 소모가 많은 일일 줄이야.’
어쩐지 몸이 휘청거리는 것 같은 기분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자 그런 나를 제이크가 기민하게 알아채고서 귓가에 속삭였다.
“힘들면 내게 기대도 돼, 미르. 아니면 우리 다시 휴게실로 돌아갈까?”
제이크는 금방이라도 나를 데리고 이동 마법을 쓰고 싶은 표정이었다.
아쉽게도 행사가 이루어지는 궁 내부에서는 허가받지 않은 이가 마법을 쓰는 게 금지되어 있어서 그럴 수는 없었다.
그때였다.
처음 보는 낯선 영식이 우리를 향해 쭈뼛거리며 다가왔다.
“……?”
무슨 일이지? 제이크와 안면이 있는 사람인가?
하지만 그럴 리가 없는데.
왜냐하면 제이크가 아는 사람이라면 나도 알고, 내가 아는 사람이라면 제이크도 알기 때문이다.
“저, 저기. 혹시 에미르 새런 영애님이십니까?”
남자가 내게 말을 걸었다.
혹시, 설마?
‘춤이라도 신청하려는 걸까?’
그런 내 예상은 정확히 맞아떨어졌다.
그는 퍽 수줍어 보이는 태도로 얼굴조차 들지 못하고 내게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혹시…… 괜찮으시다면 저와 춤 한 곡 추시겠습니까?”
“……!”
나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사실 춤은 제이크와 출 생각만 했지, 누군가가 내게 춤 신청을 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어쩐지…… 바로 내 뒤에 서 있는 제이크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헉!’
뒤돌아보니, 제이크는 내가 아닌 내게 춤을 신청한 남자를 차갑게 바라보고 있었다.
만약 이곳에서 마법을 쓰는 게 가능했더라면, 금방이라도 남자를 눈길 안 닿는 곳으로 치워 버렸을 것 같은 그런 쌀쌀맞은 표정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남자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로 나와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는 터라 그런 제이크를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지만 말이다.
‘애초에 힘들어서 더 이상은 춤추고 싶은 생각도 없었지만, 장난으로라도 수락하는 척했다가는…….’
저 남자의 존재가 위태로워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어쩐지 그렇게 될 것 같다는 느낌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래서 거절하려던 그때, 나보다 먼저 남자에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는데. 에미르 영애가 지금 좀 바빠서 말입니다.”
“……!”
어느샌가 내 손을 턱 맞잡은 채로, 제이크가 빙긋 웃어 보였다.
하지만 내게 흔히 짓는 그 미소가 아닌, 살벌해 보이는 미소였다.
“선약이 있어서 그런데, 방해하지 말고 이만 가줬으면 하는데요.”
음, 다 좋은데 말이지 제이크.
우리 그런 선약 없잖아?!
하지만 어쩐지 제이크의 장단에 맞춰줘야 할 것 같은 분위기라서,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미안하지만 춤 신청은 거절할게요. 선약이…… 하하, 있어서.”
“아, 그런. 죄, 죄송합니다. 영애. 실례했습니다!”
당황한 영식이 잔뜩 붉어진 얼굴로 부리나케 자리를 벗어나는 것을 여유롭게 지켜보던 제이크는, 싱긋 웃으면서 나를 보았다.
그러고서는 내게 하이파이브했다.
“잘했어, 미르!”
“응? 아, 응.”
아무래도 제이크는 내가 다른 사람과 춤추는 게 꽤나 싫었나 보다.
그렇게 된다면 혼자 휴게실에서 외롭게 쉬어야 할 테니까 말이다.
이후로도 간혹 두세 명이 내게 다가오는 듯했으나, 비슷한 레퍼토리로 제이크에 의해 내쳐졌다.
잠시 후 제이크는 조금 지친 목소리로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미르는 정말 인기가 많구나.”
“하하, 에이. 너만 하겠어?”
하지만 나는 그걸 그냥 농담으로 받아들였다.
왜냐하면, 제이크 역시 또래 영애들에게 인기가 만만찮기 때문이다.
물론 그걸 내 눈앞에서 직접 목격한 적은 어째서인지 없지만, 전해 듣기로는 그렇다고 했다.
‘마탑에서 수련할 때도 그렇고, 아카데미에서도 제이크를 몰래 짝사랑하는 영애들이 꽤나 있었었지. 아마?’
그때 제이크가 말을 이었다.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미르를 좋아하는데……. 계속해서 나와 함께해 줘서 정말 고마워, 미르. 나 앞으로도 네 마음에 들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할게.”
그렇게 말하면서, 제이크는 두 손으로 내 손을 조심스레 감싸 올렸다.
‘음, 따뜻하다.’
나는 잠시 그 온기에 취해 멍하니 있었다.
아무래도 테라스 근처라서 그런지 조금 쌀쌀했기 때문이다.
“……에이, 뭘. 제이크 너야말로 성년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나와 친구로 지내줘서 고마운걸.”
나는 아차 하고 뒤늦게서야 제이크의 중얼거림에 대답을 해주었다.
“응, 친구…… 그런데 앞으로는 우리 다른 것도.”
“어! 이제 막 2부 연회가 시작하려나 봐. 제이.”
제이크가 뒤에서 무어라 말하는 듯했으나, 갑작스레 연회장의 문이 열리며 새로운 얼굴들이 하나둘 등장하자 나는 시선을 빼앗겼다.
‘2부 연회에는 아직 미혼인 귀족들이 모두 참석하니까, 앨리스와 세드릭도 볼 수 있겠다!’
연회장에서 우리가 한자리에 모이게 될 날을 내내 고대하고 있었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입구를 주시하느라, 제이크가 말을 끝마치지 못하고 내 뒷모습을 아련히 바라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앗! 저기……!”
그때, 나는 연회장 입구에서 천천히 걸어들어오는 앨리스를 발견했다.
마음 같아서는 ‘앨리스! 여기예요! 나 여기 있어요!’라고 외쳐 주고 싶었지만, 이곳은 황실 연회장이고 예법을 지켜야 하는 곳이었기에 그러지 못하고 참았다.
‘앨리스, 정말 예쁘다……. 요정 소환사가 아니라 요정 같아. 역시 원작 여주인공다워. 우리 앨리스.’
앨리스가 연회에 참석한 모습은 오늘 처음 보았다.
그래서 점점 가까워져 오는 앨리스의 모습을 보고 나는 감탄하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건 나뿐만이 아닌지, 모든 사람이 그녀만을 주목하고 있었다.
‘아직 나를 발견하진 못했나 봐.’
앨리스는 무심한 표정으로 주변을 찬찬히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나와 제이크를 찾는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앨리스 역시 나만큼이나 내 데뷔탕트를 기다린다고 말했었으니까.
사교계에는 온통 앨리스와 친분을 쌓고 싶어 하는 이들이 깔려 있지만, 앨리스는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그래서 데뷔탕트 이후로는 사교계에 거의 모습을 비추지도 않았다.
오늘은 정말로 오래간만에 그녀가 연회에 등장한 것이었다.
이유는 당연했다.
‘나를 보기 위해서야!’
때마침 내 시선과 앨리스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앨리스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잠시 후, 빠른 걸음으로 앨리스가 내 앞까지 다가왔다.
“에미르 님! 보고 싶었어요!”
앨리스가 나를 끌어안았다.
누가 보면 몇 년 만에 만난 줄 알겠지만, 사실 일주일 전에도 우리는 함께 티타임을 가졌다.
“저도요, 앨리스. 그런데…… ‘에미르 님’ 말고 ‘에미르’라고 불러주면 안 돼요?”
“아차, 실수예요. 에미르. 너무 오랫동안 이렇게 부르다 보니 입에 붙어버려서 그만…….”
앨리스가 머쓱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호칭을 정정했다.
하긴, 유치원 다닐 때부터 거의 10년 넘게 나를 ‘에미르 님’으로 불러왔으니, 그편이 더 익숙할 만도 한 것 같긴 했다.
그런데 어쩐지 주변의 호기심 어린 시선이 상당히 신경 쓰였다.
“오, 앨리스 백작이 웬일로 이렇게 일찍 연회에 모습을 드러낸 걸까요?”
“보아하니 오늘 데뷔탕트를 치른 새런 후작가의 영애와 친분이 있는 모양인데요. 아마 그래서 일찍이 참석한 것일지도…….”
주변 귀족들이 앨리스와 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게 들렸다.
그래, 다 들린다고!
‘뭐, 험담은 아니지만…… 그래도 신경 쓰여.’
나는 머리카락을 괜스레 비비 꼬며 곁눈질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앨리스 역시 휙 고개를 돌려 내가 보는 쪽을 같이 응시했다.
“……아, 그러고 보니 2부 연회에 축사를 해주실 황태자 전하께서는 언제 오실까요?”
“어머, 그러게 말이에요.”
나와 앨리스의 시선이 닿자, 사람들은 언제 우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냐는 것처럼 아하하 웃음과 함께 말을 돌렸다.
“휴……. 이럴 줄 알았어요. 다들 에미르에게 관심이 많은가 봐요. 정말 싫다.”
앨리스는 잠시 그들을 향해 찌릿 시선을 보내나 싶더니 고개를 돌려 푹 한숨을 내쉬며 내게 속삭였다.
응? 앨리스는 대체 저들의 대화에서 무얼 들은 걸까?
다들 앨리스의 연회 참석 유무에 대해 언급하는 걸로밖에 안 보였는데.
“우리 2부 연회가 끝나면 같이 돌아갈래요? 황제, 황후 폐하께 인사드리고 나면 그 뒤로는 연회장을 나가도 되거든요.”
앨리스는 무료해 보이는 표정으로 주변을 다시 한번 휙 돌아보더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앨리스는 종종 말했던 대로 파티나 연회 자리에는 신물 나도록 관심 없는 모양이다.
‘음…… 어쩔까?’
순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나를 제외한 대부분의 또래 귀족들은 계속해서 연회 자리를 지키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다들 첫 연회니까. 처음이니만큼 일찍 돌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 같은데.’
물론 내겐 이미 충분하고도 과분한 인맥과 친구들이 있지만, 그래도 새로운 사람들과 대화를 나누고 친해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생각되었다.
‘고민되는걸? 게다가 내가 일찍 돌아가 버리면 제이크도 같이 돌아가겠다고 할 게 뻔하잖아.’
내 흔들림이 표정으로 드러난 탓일까.
앨리스가 나를 유혹하기 위해 한 가지 조건을 내걸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번에 에미르의 첫 사교계 데뷔 기념으로 준비한 선물이 있어요.”
“선물이요?”
나는 금은보화에 약한 편이라, 그녀의 말을 듣고 곧바로 마음이 갈대처럼 한쪽으로 기울었다.
“네, 어떤 선물일지 궁금하지 않아요? 가져와야 했는데, 그만 깜빡 잊어버리고 두고 왔지 뭐예요.”
앨리스가 실수라는 듯 웃었다.
하지만 어쩐지 저택에 선물을 두고 왔다는 말이 의도적인 것처럼 느껴진다면 기분 탓일까.
“궁금하니까 어쩔 수 없네요. 그럼 일찍 저택으로 돌아가는 걸로 할게요.”
“좋아요!”
앨리스가 곧바로 화색을 띠며 웃었다.
그때, 옆에서 가만히 우리 둘의 대화를 듣고 있기만 하던 제이크가 한마디 했다.
“미르, 그럼 나도 너 따라서 같이 일찍 돌아갈래.”
“아, 정말? 다른 영식들이나 영애들과는 대화 나눠보지 않을 거야?”
혹시나 해서 물은 질문에, 제이크는 선선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응, 애초에 그럴 생각은 없었어.”
“그렇구나…….”
하긴, 대외적으로는 과묵한 성격이라고 알려진 제이크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세드릭은 왜 아직도 모습을 안 보이는 거야?’
그때 문득 나는 여태 모습을 보이지 않는 한 명, 세드릭에게 생각이 미쳤다.
이미 대부분의 귀족은 입장을 마친 상태였다.
‘마야는 중요한 일로 내 데뷔탕트를 와주지 못한다면서, 대신 선물과 편지를 보냈지. 니콜라스는…… 곧 축사를 위해 모습을 보일 테고.’
설마 몇 주 전 갑작스럽게 재출현한 마수 소탕을 위해 국경 근처로 갔다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건가?
‘뭐야…… 세드릭. 내 데뷔탕트 연회에 꼭 참석하겠다고 했었으면서.’
나는 어쩐지 조금 투정 부리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항상 약속을 잘 지키는 세드릭인데, 막상 모습을 보여주지 않으니 아쉬웠다.
‘뭐, 어쩔 수 없겠지. 마수 소탕이 항상 원하는 때에 맞춰 끝날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앨리스에게 한번 물어볼까?’
나는 조심스레 앨리스에게 귓속말로 물었다.
“저기, 앨리스.”
“응? 왜 그래요?”
앨리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혹시…… 세드릭 경 소식 알고 있는 것 있어요? 오늘 왜 연회에 모습을 안 보이는지 궁금해서요.”
“아…….”
내 질문에 앨리스가 외마디 침음을 흘렸다.
표정을 보아하니 세드릭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는 듯했다.
“미안해요, 에미르. 솔직히 말해서 세드릭 경 소식을 전해 듣는 건, 에미르와 함께할 때가 거의 전부라서요. 작년 겨울에 있었던 마지막 마수 토벌 작전에서 잠깐 만났던 게 우리 둘이 교류했던 마지막인 것 같네요.”
앨리스는 미간을 옅게 찌푸리며 기억을 되새겨 대답해 주었다.
‘하긴, 역시 그러려나.’
앨리스는 성인이 되자마자 로즈 가문에서 스스로 나왔다.
사실 그즈음 이미 로즈 공작가는 몰락에 가까워진 처지였기에, 당연하게도 세드릭과의 태중혼약은 거의 깨져 있던 것이나 마찬가지이긴 했다.
그리고 그녀가 가문의 성을 버린 이후, 가문 간의 혼약은 완전히 무효가 되었다.
이후 앨리스가 마수 토벌에 참여해 공을 세워 백작위를 얻게 되었지만, 세드릭과의 혼약을 재개할 생각은 아예 없어 보였다.
그러니 앨리스의 말대로 그녀는 지금 세드릭과의 교류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확실히 원작과는 많이 달라졌네. 원래는 이맘때쯤에도 여전히 로즈가는 건재하고, 앨리스와 세드릭 사이에 혼약이 오가야 했는데 말이지.’
하지만 앨리스나 세드릭이나, 서로 마음이 없어 보이는 탓에 나는 원작을 바꾸고도 그에 대해 별다른 유감을 갖지는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세드릭 경에 대해서는 왜 묻는 거예요, 에미르? 설마…… 지금 나를 앞에 두고도 세드릭 경이 더 보고 싶은 거예요?”
그때 앨리스가 서운한 듯한 목소리로 나를 채근했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전혀 아닌걸요.”
“아, 그럼 다행이에요.”
앨리스가 싱긋 웃었다.
* * *
마력석을 이용한 등이 갑작스레 연회장에 마련된 단상 위에 켜졌다.
‘니콜라스가 나오려나 봐!’
그렇게 생각함과 동시에 정말로 니콜라스가 장내에 등장했다.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전하! 저는…….”
니콜라스와 한 번이라도 대화를 나눠 보려는 갓 데뷔탕트를 치른 영식, 영애가 수두룩했다.
이렇게 황궁에서 모든 귀족을 초대해서 여는 연회가 아니라면, 따로 친분 없이 니콜라스를 만날 기회는 거의 없었으니까.
물론 나는 그들 사이에 섞이거나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았다.
잘못하다 발을 헛디디거나 인파에 치여 넘어질까 무서웠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나는 니나이나만큼 자주 만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 달에 한 번쯤 니콜라스와 만나 안부를 나누고는 했다.
그러니 굳이 지금 인사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니콜라스도 오늘따라 정말 멋있네.’
다만, 먼 거리에서 니콜라스를 바라보며 엷게 미소 지을 뿐이었다.
10여 년도 더 전, 책벌레 모범생이었던 그의 모습은 어디 가고 이젠 어엿한 제국의 황태자가 되어 저렇게 당당하고 매력적인 모습만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헉, 방금 눈 마주쳤나?’
그때 막 단상 위에 올라가 카리스마 있는 시선으로 사람들을 응시하는 니콜라스와 시선이 마주친 것 같았다.
‘아냐, 착각일지도 몰라! 응, 착각이 분명해…….’
니콜라스는 곧바로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아무래도 방금 시선이 마주친 건 오로지 내 착각이었던 모양이다.
‘에휴.’
나는 헛된 생각을 없애고서, 조용히 니콜라스가 첫 사교계 데뷔를 하게 된 이들에게 보내는 축사를 들었다.
‘원래 이런 연설은 지루하게 마련인데, 니콜라스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럽고 좋아서 그런지 전혀 그렇지 않아.’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닌 듯 또래의 영애, 영식들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고 그의 연설을 듣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니콜라스가 축사를 마치고 단상에서 내려오자, 다시금 연회장 내부는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다들 교양 있는 말투로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아무래도 참석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런 걸까.’
새삼 아까 앨리스의 말에 따르기로 한 것이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되었다.
연회장에 오래 머무르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 듯했다.
그때였다.
“에미르 새런 영애.”
“황태자 전하……?”
어쩐지 생각에 빠져 있는 동안 주변이 점점 더 시끄러워지는 것 같다 했더니.
내게로 니콜라스가 다가오고 있어서 그랬던 모양이다.
니콜라스는 조금 수줍어 보이는 표정을 하고서, 내게 인사말을 건넸다.
“몇 주 만에 보는 얼굴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네! 전하께서도 잘 지내셨지요?”
하지만 이렇게 물어도, 니콜라스가 그리 잘 지내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한창 황태자로서 차기 황제가 되기 위한 공부로 바쁠 테니까.
“그래. 그보다…… 첫 사교계 데뷔를 축하해. 새런 영애.”
“……!”
그때 니콜라스가 시종에게서 무언가를 건네받아 내게 건넸다.
화려한 꽃다발과 선물 상자였다.
졸지에 품 안 가득 커다란 꽃다발을 한 아름 떠안게 된 나는 당황했다.
시야가 온통 꽃으로 가려져 앞도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감사 인사는 했다.
“전하께서 이런 선물을 주실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감사해요!”
그러자 조금 늦게 대답이 돌아왔다.
니콜라스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무슨 표정을 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목소리는 평소답지 않게 허둥지둥 변명하는 투였다.
“……아, 물론 오해는 말도록. 후작 영애에게만 주는 건 아니야, 절대로. 내 동생 니나이나에게도 데뷔탕트 선물을 주었지.”
니콜라스는 다시 시종을 불러냈다.
아마 제이크에게도 꽃다발과 선물을 전달하는 듯했다.
“물론 제이크 소공작에게도 줄 게 있고. 자, 받도록. 첫 사교계 데뷔 축하하네. 제이크.”
“아, 축하 감사히 받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제이크의 깍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곁눈질로 간신히 제이크를 훔쳐보았다.
그는 은은하게 웃으며 꽃다발을 품에 안고 있었다.
‘어쩐지…… 내 게 더 큰 것 같다면 착각이겠지.’
제이크는 나보다 체격이 큰 편이니 똑같은 꽃다발도 작게 보이는 것일 것이다.
그나저나, 아니나 다를까.
내내 무심하던 니콜라스가 처음으로 데뷔탕트를 개인적으로 축하했다는 사실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세상에, 황태자 전하께서……!”
“손수 직접 데뷔탕트 선물을 준비하셨나 봐요. 아아, 부러워라. 저 영애는 대체?”
나를 지칭하며 부러움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는 누군가의 말에, 근처 다른 귀족이 뭘 모른다는 듯 대꾸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 수도에 오신 지 얼마 되지 않아 모르시나 보네요. 저분은 평범한 영애가 아니에요.”
“평범한 영애가 아니라고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목소리에, 자신이 아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되어 우쭐해진 상대방이 나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네, 무려 황태자 전하의 10년도 더 넘은 오랜 친우분이시죠. 아마, 제국 유치원의 첫 입학생 중 한 분이셨다는 것 같던데요.”
“그런……!”
날 보고 ‘부럽다’고 말하던 영애가, 새삼 달라 보인다는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아까와 다르게 한층 관심이 담겨 있는 부담스러운 눈빛이었다.
‘나에게 관심 가질 사람은 소수일 거라 예상했는데, 으음. 아닌 것 같아…….’
나는 그제야 조용한 사교계 데뷔와는 거리가 먼 첫 데뷔탕트를 치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렇게 된 이상, 즐기는 수밖에 없지.’
그렇게 마음먹고서는, 나는 뻔뻔하게 시선 따위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얼굴을 했다.
제이크와 앨리스를 양옆에 대동한 채로, 뒤에는 니콜라스가 준 선물을 들고 있는 시종까지 함께하니 과연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었다.
* * *
잠시 후, 우리 셋은 황제와 황후 폐하를 뵙고 인사했다.
두 분께서는 우리의 데뷔탕트를 진심으로 축하해 주셨다.
“자, 이제 우리 돌아갈까요? 에미르.”
“아, 네!”
조급해 보이는 표정으로 앨리스가 나를 연회장 바깥으로 인도했다.
물론 제이크 역시 나를 여전히 따라오고 있었다.
“제이크 소공작님은 자택으로 돌아가지 않으시나요?”
앨리스는 그까지 함께 따라오는 것이 퍽 마음에 들지 않는 눈초리였다.
하지만 제이크가 적어도 나에 관해서라면 누군가에게 지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결론만 말하자면 결국 앨리스가 사는 백작저에 가게 된 건 우리 셋 모두라는 이야기였다.
막 마차에 올라타기 직전, 나는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연회가 시작한 지도 한참이라서, 더 이상 새로 도착하는 이들은 없었다.
‘그래, 뭘 기대한 거야.’
나는 한숨을 내쉬며 아까 연회장에서 세드릭의 두 형을 만났던 것을 생각했다.
세이든과 세르반.
두 사람은 나의 첫 사교계 데뷔를 기념으로 함께 춤이라도 한 곡 추고 싶어 하는 눈치였었다.
‘하지만 뒤에서 은근히 둘에게 눈치를 보내는 제이크 때문에 제안하지 못한 듯했지.’
나는 그 둘에게 세드릭의 안부를 물었다.
가족이니까 뭐라도 알고 있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하지만.
‘이런, 나 역시도 세드릭이 지금 어디 있는지는 잘 몰라. 알다시피 그 녀석, 지난 토벌대에 출정 갈 때도 그랬듯 좀처럼 연락 도구를 챙겨가지 않으니까. 형님도 모르지?’
‘그래, 세르반의 말이 맞다. 일주일 전 도착한 편지가 마지막이었어. 이번 연회에 꼭 참가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 일정이 늦어져서 오지 못하는 듯싶구나.’
세르반과 세이든 역시 세드릭의 근황을 모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래, 무사히만 돌아오면 되는 거지. 물론 소드 마스터까지 된 사람에게 무사 귀환을 바라는 것도 의미 없는 일이지만. 그리고 세드릭에게 축하받지 못했다고 아쉬울 것까지는 없잖아. 이미 많은 이에게 충분하고도 과분히 축하받았는걸.’
나는 이만 세드릭을 보는 일은 단념하기로 했다.
물론 여전히 아쉬움은 남아 있었다.
‘……오늘 소원을 말하기로 약속했던 날인데.’
하지만 그때 멀리서부터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
대체 어떤 귀족이 황궁 연회에 마차가 아닌 말을 타고 오나 해서 뒤돌아보았다.
그런데 말 위에 타고 있는 사람이 너무 익숙한 얼굴이었다.
그래, 다름 아닌 세드릭이었다!
심지어 그는 예복 차림도 아니었다.
마수 소탕한 뒤 옷 갈아입을 시간도 없이 곧장 달려온 듯 기사복 그대로였다.
“……!”
너무 기막힌 타이밍에 놀라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말을 매어놓고서 저 멀리서 뛰어오는 세드릭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이 전부였다.
“어라, 세드릭 경이네요? 안 올 줄 알았더니만.”
“이런. 와버렸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다르게 옆에 서 있던 앨리스와 제이크는 각자 아쉬운 것 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어느새 눈 깜짝할 사이에 세드릭은 바로 내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후우, 다행히도 너무 늦지는 않았네.”
급하게 뛰어온 사람치고는 숨 한번 고르는 게 전부였다.
세드릭은 씨익 미소 지으며 등 뒤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제국에서 데뷔탕트에 흔하게 선물하고는 하는, 분홍빛의 장미꽃 다발이었다.
하지만 한 가지 눈길 가는 점이 있다면, 꽃 한 송이에 검은색 핏자국이 묻어 있다는 점이었다.
‘마수의 피잖아.’
나는 애써 그 피를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세드릭의 차림이 차림이다 보니 미처 덜 마른 마수의 피가 묻어버린 모양이다.
마침 세드릭도 뒤늦게서야 그 핏자국을 발견한 듯, 모른 척 자연스레 그 꽃 한 송이를 다발에서 빼내 제 주머니에 넣었다.
“자, 네 첫 사교계 데뷔를 축하한다. 에미르.”
그러고서는 곧바로 내게 그 꽃다발을 건넸다.
나는 세드릭의 행동을 모른 척하며 방긋 미소 지었다.
“고마워요, 세드릭 경. 꽃 선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래. 네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 다 제쳐 두고 달려왔지. 이거 뿌듯한걸.”
세드릭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픽 웃었다.
그의 목적은 오로지 내게 선물을 건네주는 것뿐이었는지, 연회장 내부로 들어갈 생각은 없다고 했다.
‘하긴, 애초에 저 차림으로는 입장해도 다들 피할걸.’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드릭이 연회장 앞에 도착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가서, 어느새 2층 테라스에 나와서 아닌 척 기웃거리는 이들이 상당했다.
“그럼 나는 말끔하게 정리하고 다시 오도록 할까.”
세드릭은 뒤늦게서야 자신의 차림이 신경 쓰인 듯, 그렇게 중얼거리며 다시 말에 올라탔다.
“우리는 이제 리오나 백작저로 갈 거예요. 백작저로 오세요!”
“그래, 알겠어.”
내 외침에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떠났다.
이윽고 우리 셋은 백작저 앞에 도착했다.
‘여긴 올 때마다 새롭게 느껴져. 신비로운 분위기가 보통의 저택과는 다른 것 같아.’
나는 저택을 올려다보며 감탄했다.
분명 앨리스가 예전에 살던 로즈 공작저보다는 아담하고 단출한 저택이었다.
하지만 화려하기만 하고 한편으로는 삭막하던 로즈 공작저와는 다르게, 리오나 백작저는 사람 사는 느낌이 물씬 풍겼다.
‘아는 사람만 알겠지만, 이곳 정원에 심어진 식물들은 대부분 요정의 섬에서 공수해 온 것이기도 하고.’
또한 제국에서 유일하게 요정의 섬처럼 꾸며진 정원을 볼 수 있는 저택이기도 했다.
“자,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차를 내오라 이를게요.”
앨리스는 빙긋 웃으며 나와 제이크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백작저 안에 근무하는 사용인들은 다소 적은 편이었다.
하지만 다들 따스하고 다정한 성격이 꼭 집주인인 앨리스를 닮아 있었다.
“에미르 영애님, 그리고 제이크 소공작님께서 방문하셨군요. 주인님께서 가장 좋은 차를 내오라 말씀하셨지요.”
하녀가 나타나 우리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과연, 꽃차의 향이 아주 좋았다.
그렇게 차를 마시고 있는데 어쩐지 제이크의 표정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꼭 식초를 가득 탄 차를 마신 것처럼 찌푸린 표정이었다.
‘이상하다, 왜 그러지?’
하지만 우리 둘이 마신 차는 완전히 똑같았다.
제이크에게만 따로 골탕 먹이기 위한 장치가 걸려 있는 것도 아닐 텐데 신기한 일이었다.
아무래도 입맛에 맞지 않는 차였나 보다.
“많이 기다렸죠, 에미르? 자, 여기 선물을 가져왔어요.”
그때 마침 앨리스가 작은 상자를 들고 응접실로 들어왔다.
‘무슨 선물일까?’
상자만 보면 엄청나게 귀해 보이는 물건일 듯한데, 내용물을 모르니 더 두근거리는 마음이 있었다.
그때 앨리스가 차분한 목소리로 과거를 되새기듯이 말했다.
“……제가 예전에 에미르 님께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어요. 나중에 멋진 어른이 된다면, 반드시 멋진 목걸이를 선물해 드리겠다고요.”
아, 설마 그 목걸이라면?
나는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아마…… 엄청 큰 에메랄드와 두꺼운 순금 체인이 달린 목걸이를 선물해 주겠다고 했었던가.’
나는 기억을 더듬어 과거에 앨리스가 했던 말을 생각해 냈다.
‘설마, 정말 앨리스가 했던 말대로 그렇게 생긴 목걸이를?’
나는 앨리스에게 상자를 건네받아 조심스레 열어보았다.
‘진짜잖아!’
화려한 에메랄드 목걸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불순물 하나 없이 투명하게 반짝이는 보석과 섬세하게 세공된 모양을 보아 꽤나 비싼 물건일 게 분명했다.
다만 생각했던 것처럼 그리 투박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내가 지금 입고 있는 드레스에도 어울릴 법한 예쁜 디자인이었다.
“제가 그때 드렸던 목걸이, 기억하세요? 아직도 갖고 있나요?”
목걸이를 보고 감탄하는 내게, 앨리스가 싱긋 웃으며 질문했다.
“네, 물론이죠. 아직 제 보석함에 잘 간직하고 있어요.”
가끔 꺼내서 목에 걸어보기도 한다.
비록 이젠 너무 낡아 혹시라도 끈이 끊어질까 무서워 실제로 하고 다니지는 않지만.
“……소중히 간직해 주셔서 감사해요. 이젠 그 목걸이 대신, 이걸 쓰세요.”
“고마워요, 앨리스. 잘 받을게요.”
나는 곧바로 목걸이를 걸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낯선 잠금쇠로 되어 있어서, 좀처럼 혼자 걸기가 어려웠다.
“아, 제가 도울게요.”
내가 계속 헛손질만 해대자, 앨리스가 도움을 주려 했다.
동시에 지켜보고 있던 제이크도 나섰다.
“아니, 내가 해줄게.”
두 사람은 서로 자신이 목걸이를 채우겠다고 옥신각신했다.
하지만 결국 이긴 사람은 없었다.
“앗! 됐다. 두 사람 모두 도와줄 필요 없어요. 방금 직접 했거든요.”
왜냐하면 내가 결국 스스로 목걸이를 차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아쉬운 눈길로 나를 바라봤지만, 나는 그런 눈길을 느낄 새도 없이 거울을 보며 감탄했다.
“그보다 정말 예쁘네요……. 자주 하고 다닐게요. 앨리스.”
“네, 그래 준다면 저도 기쁠 것 같아요.”
그때, 마침 집사가 다가와 앨리스에게 손님이 한 분 더 오셨다는 말을 전했다.
세드릭이 도착한 것이었다.
“다들 뭘 하고 있었던 거야. 그보다 그 목걸이는? 아까는 안 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세드릭은 마물 피가 묻은 기사복 대신 깔끔한 정장 차림을 하고 나타났다.
그의 시선이 주변을 둘러보다 이내 내 목에 걸린 목걸이로 향했다.
눈썰미도 좋지, 세드릭.
나는 자랑스럽게 목걸이를 들어 올리며 설명했다.
“아, 이건. 앨리스가 내게 선물해 준 거예요. 데뷔탕트 축하의 의미로요.”
“……그래? 젠장, 나도 선물을 준비할 걸 그랬나.”
세드릭이 미처 생각 못 했다는 표정으로 볼을 긁적였다.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세드릭 님도 제게 주실 선물이 있으시잖아요?”
“뭐?”
세드릭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나를 응시했다.
“나도 모르는 내가 준비한 선물이 있었단 말인가?”
세드릭은 도저히 모르겠다는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나는 빙긋 미소 지었다.
“그런 건 아니고요. 예전부터 계속 미뤄왔던 것 말이에요. 그러니까, 12년 전 소원 들어주시기로 했던 걸 말하는 거예요.”
“아.”
그제야 세드릭 역시 생각났다는 표정을 했다.
자주는 아니지만 1년에 한두 번 정도는 대화에서도 언급하던 것이었다.
“잊어버리고 있었던 모양이에요. 이전까지는 세드릭 님이 도리어 안 잊어버렸냐면서 종종 묻던 건데.”
나는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그도 그럴 게, 일 년에 한두 번씩은 꼭 세드릭이 ‘너, 나한테 소원은 언제 빌 건데?’라며 질문해 왔던 터였다.
불과 작년까지도 그랬다.
그리고 작년에 나는 세드릭에게 말했었다.
‘데뷔탕트 치르는 날, 그때 소원을 말하는 걸로 할게요!’
그제야 세드릭은 변명했다.
“……잊고 있지 않았어. 다만 요즘 일이 너무 바빠서 잠시 헷갈린 것뿐이야. 그래서, 무슨 소원을 빌 건데?”
그런데 어째서일까?
세드릭의 표정이 약간의 기대감을 품고 있는 것처럼 두근대 보였다.
‘소원을 비는 건 난데, 어째서 세드릭이 저런 얼굴을 하는 거지?’
의아했지만 그냥 착각이려니 했다.
그리고 소원에 대해 말하기 전, 뒤에서 우리 둘을 지켜보고 있는 제이크와 앨리스를 돌아보았다.
“음, 미안하지만 제이크. 그리고 앨리스. 혹시 방을 좀 나가줄 수 있을까요? 비밀 소원이라서…….”
“……!”
“비밀 소원이요?”
내 말에 앨리스가 당황했고, 제이크의 눈동자가 약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만약 세드릭 경이 소원을 듣고도 지키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제가 증인으로 서 있을게요.”
앨리스가 제안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마음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설마 세드릭 경이 제 작은 약속 하나 지키지 않겠어요. 저는 경의 양심을 믿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만요…….”
앨리스는 휴 한숨을 내쉬며 방을 나가려 했다.
하지만 여전히 제이크는 나가고 싶어 하지 않는 듯했다.
못 들은 척 꿋꿋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앨리스는 저 혼자만 나가는 건 불공평하다고 생각되었는지, 제이크를 채근했다.
“제이크 소공작님, 어서 저와 같이 나가시죠. 왜 그렇게 멀뚱히 서 계세요?”
“맞아, 제이크. 아주 잠깐이면 돼!”
“……알겠어.”
앨리스에게 반쯤 떠밀려 제이크도 나가자, 응접실 안엔 세드릭과 나 둘만 남아 있었다.
세드릭은 어쩐지 아까보다 배는 긴장한 표정으로 뻣뻣하게 서 있었다.
‘왜 저러지?’
그러면서도 은근히 표정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도대체 뭘 기대하는 건지 나로서는 모를 노릇이었다.
“……그래. 소원이 뭐야?”
세드릭의 목소리가 약하게 떨렸다.
얼핏 머리카락 사이로 보이는 귀 끝이 붉었다.
머리카락 색이 붉어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도 몰랐다.
“제 소원은요.”
나는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입을 뗐다.
사실, 내내 생각했었다.
세드릭에게 무엇을 요구해야 할지.
물질적인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새런 후작가는 부유했으니까.
고민 끝에, 내가 세드릭에게 단 한 가지 바라는 게 있다는 것을 떠올렸다.
잔뜩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세드릭의 굳은 얼굴을 앞에 두고 나는 말을 이었다.
“세드릭 님께서…….”
그런데 어쩐지 막상 입 밖으로 꺼내려니 조금 망설여졌다.
너무 유치하고 식상한 소원이 아닐까.
“그래, 좋아.”
그런데 아직 본론을 말하지도 않았는데 세드릭이 눈을 질끈 감은 채 대답했다.
당황스러웠다.
뭘 들은 거야?
“저 아직 다 말 안 했는데요?”
“……뭐? 방금…… 대답은 실수였어. 그냥 잊도록 해. 그, 그래서 네가 진짜로 말할 소원이 뭔데?”
세드릭은 뒤늦게서야 자신이 헛소리를 했다는 것을 자각한 듯 입을 가린 채 시선을 피했다.
‘세드릭, 말을 하면 끝까지 들어야지. 내가 무슨 소원을 빌 줄 알고 저렇게 덥석 알겠다고 하는 건데?’
나는 세드릭이 무슨 생각으로 저렇게 대답했는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나는 살짝 헛기침을 내뱉고서 결국 말하고야 말았다.
“흠, 흠. 저는 세드릭 님께서 정의로운 기사가 되었으면 좋겠어요. 그러니까 악보다는 선의 편에 서는 그런 기사님이요.”
아, 결국 말해버렸다!
사실 어쩐지 너무 뻔하고 상투적인 바람인 것 같아서 말하기 직전까지도 망설여졌다.
원작처럼 세드릭이 뒤늦게서야 흑화하는 일 없도록, 소드 마스터의 힘을 나쁜 곳에 쓰지 않았으면 해서 말한 소원이었다.
물론 지금의 세드릭이라면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그런 비열한 짓은 할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약속으로 매어 놓는 건 또 다르니까.
“……뭐?”
세드릭은 내가 한 말을 온전히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제 귀를 의심하는 듯하던 그는 재차 내게 되물었다.
“……그게 네 소원의 전부야? 다른 건 없어?”
“네, 그게 제 소원이에요. 그리고 다른 거라니요. 애초에 소원은 한 개였는걸요.”
나는 홀가분한 기분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세드릭이 ‘허’ 하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맥 빠진 듯 실망한 기색이 보이기도 했다.
“혹시 들어주기 어려운 소원이라던가…… 그래서 선뜻 알겠다고 말하기 어려운 거예요?”
세드릭이 좀처럼 ‘그래’라든지 ‘알겠다’는 대답을 하지 않아서, 나는 조금 불안해졌다.
‘혹시 세드릭이 이미 남몰래 흑화하고 있던 중은 아니겠지!’
내 흔들리는 시선을 마주한 세드릭은 길게 후우 한숨을 쉬었다.
“……넌, 뭐 그런 걸 다 소원이라고 빌어. 기껏 소원을 말할 기회를 날려버린 거나 다름없다는 거 알아? 가장 뛰어난 소드 마스터에게 소원을 빌 수 있는 사람은 너밖에 없어. 지금이라도 바꿀 기회 5초 주지.”
세드릭은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물끄러미 마주 봤지만, 소원을 새로 말하지는 않았다.
“…….”
“5, 4, 3…… 2…… 1.”
숫자 세는 간격이 점차 길어졌다.
세드릭은 잠시 멈칫하다가, 고개를 숙인 채 말을 이었다.
“……빌 거면 좀 더 거창한 소원을 빌어보라고. 세계 멸망을 시켜 달래도 나는 할 수 있거든? 정의니 선이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린지. 정의로운 기사…… 내가 정말로 그렇게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너 내 성격 몰라? 난 못된 놈이라고…….”
횡설수설 말을 늘어놓던 세드릭의 말끝이 물기 어린 채 흐려졌다.
숙인 고개에서 눈물방울이 툭툭 떨어져 바닥을 적셨다.
‘세드릭, 여전히 울보구나.’
어쩐지 나는 세드릭이 왜 우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세드릭은 여전히 남이 자신에게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고, 자신 스스로를 별로 믿지 않았다.
나는 세드릭이 자신의 얼굴을 가린 두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 잡았다.
“네, 알아요. 저는 알고 있어요. 세드릭 님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그리고 앞으로도 멋지고 용맹한 기사가 되리란 걸 의심하지 않아요.”
“……!”
세드릭의 눈물 젖은 금색 눈동자가 휘둥그레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잔뜩 떨리는 입가로, 그는 내게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달싹댔다.
“……알겠어. 네 소원을 들어줄게.”
잠시 후 세드릭이 대답했다.
* * *
데뷔탕트 연회 이후, 일주일이 지났다.
나는 그동안 평화로운 나날을 보냈다.
물론 연회 바로 다음 날은 지친 탓에 하루 종일 방 안에서만 지냈었다.
그 이후로는 제이크네 저택으로 놀러 가거나 앨리스와 티타임을 가졌다.
‘오늘은…… 따로 잡아놓은 약속도 없으니 오랜만에 유모와 함께 번화가로 나들이나 가볼까? 아니지, 나도 이제 다 컸는데 유모와 같이 갈 필요는 없어. 그래, 좋아. 그럼 오늘은 나 혼자서 외출해야겠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간단하게 식사를 하며 오늘 하루 할 일을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하지만 내가 야심 차게 홀로 외출하기도 전, 일이 생기고야 말았다.
“아가씨, 아가씨!”
“왜 그래, 유모?”
대뜸 신나 보이는 표정을 하고 내게로 다가오는 유모의 팔엔, 웬 종이 꾸러미가 잔뜩 담긴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글쎄, 이 편지들이 모두 우리 미르 아가씨 앞으로 온 모임 초대장이에요.”
“뭐?”
내가 눈을 휘둥그레 뜨자, 유모는 하나하나 초대장을 들어 보이며 설명했다.
“이건 다음 주 백작가에서 열리는 다과회, 이건 이번 주말 자작가에서 주최한 독서 모임, 그리고 이건…….”
내게 도착한 초대장의 개수는 열 개가 넘었다.
‘데뷔탕트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사교계 활동을 시작할 수 있다더니, 정말이잖아?’
부모님과 유모로부터 이야기를 들었지만, 이렇게 실제로 내 이름이 쓰인 초대장들을 받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백작가 이상의 고위 귀족 영애들을 모두 초대한 듯싶은 모임도 있었지만, 연회에서 몇 마디 인사를 나누었던 귀족가에서 나를 초대한 경우도 있었다.
‘설마, 나랑 친해지고 싶었던 걸까?’
내게 먼저 인사를 건네주었던 영애, 영식들을 떠올리며 나는 배시시 미소 지었다.
‘당장 답장을 써야겠다! 꼭 갈 거라고.’
유모에게 펜과 편지지를 건네 달라고 말한 나는 곧바로 답신을 적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어라, 이 두 모임은 날짜가 겹치네? 어딜 가야 할까…….”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정성껏 답장을 적어 내려가던 그때.
또다시 유모가 알려왔다.
“아가씨, 제이크 소공작님이 오셨어요.”
“아, 곧 간다고 전해줄래? 아니다, 그냥 내 방으로 오라고 해줘.”
응접실에 마냥 세워두기도 미안했고, 무엇보다 제이크에게 이 초대장들을 자랑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제이크는 나보다 더 많은 모임 초대를 받았겠지만 말이지.’
잠시 후, 제이크가 나타났다.
“미르, 좋은 오후야.”
“응, 제이크. 반가워. 그보다 이것들 좀 볼래?”
내 말에 제이크는 책상으로 성큼 다가와 초대장 더미에 시선을 주었다.
“……이게 다 뭐야?”
“응, 보다시피 모임 초대장들이야. 봐. 그때 데뷔탕트에서 내게 인사해 줬던 가문 자제들이 나를 초대해 줬어.”
내가 방긋 웃으며 말하자, 제이크가 이해가 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들 너와 가까워지고 싶은가 봐. 하긴, 내가 다른 가문 사람이었더라도 그랬을 거야.”
“아하하, 제이크! 요즘은 재미있는 농담도 할 줄 아네? 그보다 이 초대장 한번 봐. 후작가 이상 가문만 올 수 있대. 영애들뿐만 아니라 영식들도 모두 함께 어울리는 티파티야. 너도 이곳 초대장 받았지?”
내 질문에 제이크가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 것 같았어. 그럼 우리 이날 함께 참석하면 되겠다.”
“그래, 좋아.”
제이크가 웬일로 순순히 모임 참가 의사를 밝혔다.
조금 더 설득해야 할 줄 알았는데 웬일이람?
그때 제이크가 질문했다.
“이 편지들, 전부 모임 초대장뿐이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의도를 알지 못해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이크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혹시 구혼서라거나…… 연서 같은 건, 아직 받지 않았지?”
뭐라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구혼서? 연서? 그런 게 나한테 올 리가 없잖아!’
연회장에서 내게 말을 건 사람들은 대부분이 또래 영애였다.
물론 영식들과도 몇 대화를 나눠 보긴 했다.
하지만 그들은 이성적인 호감보다는 멋진 친구들을 가진 나라는 사람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다가온 게 대부분이었다.
‘아, 하긴. 내게 춤을 신청하려던 영식이 몇 있긴 했었지, 참?’
하지만 그 영식들은 모두 제이크의 방해 공작으로 내 손도 잡아보지 않고 떨어져 나갔었는데.
생각을 마친 나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한 장도 안 받았어. 그런 거 나한테 올 리가 없잖아. 온다고 해도…… 내 앞이 아닌 가문 앞으로 오지 않을까?”
아무래도 아직까지 제국의 귀족 사회에서는 연애결혼보다는 가문 간의 이득을 따진 정략결혼이 더 흔했다.
때문에 구혼서가 온다고 해도 새런 후작가의 이름을 붙여서 도착할 게 뻔했다.
내 대답에, 제이크는 몹시도 당혹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분명 미르에게 구혼서를 보낼 사람이 꽤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물론 나도.”
하지만 제이크는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마침 다과를 들고 내 방으로 온 유모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두 분, 혹시 미르 아가씨 앞으로 온 구혼서에 대해 말씀하시고 계셨나요? 그런 거라면 아예 오지 않은 건 아니랍니다. 아마도 집무실에 있지 않을까 싶어요.”
“뭐, 그게 정말이야?”
유모의 말에 나는 기함했다.
‘아니, 물론! 데뷔탕트에서 결혼 상대를 물색하는 경우가 있다고는 들었지만…….’
도대체 내게 구혼서를 보낸 사람이 누구인지, 아니, 가문이 어디인지 궁금해졌다.
“유모, 그 구혼서들 좀 가져다줄 수 있어? 궁금해.”
“그렇게 하도록 하지요. 물론 아가씨, 구혼서가 왔다고 해서 곧바로 혼인하실 필요는 없다는 것 아시지요? 그저 혼인 적령기의 자제가 있는 가문 간에 호의를 표하기 위해 보내는 경우도 부지기수랍니다.”
유모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막상 ‘구혼’이나 ‘혼인’이란 단어를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나는 이 뻘쭘한 기분을 어떻게 털어버려야 하나 고민하다가, 옆에 가만히 앉아 있는 제이크에게 너스레를 떨었다.
“제이, 네 말이 맞았어. 나도 모르는 구혼서가 와 있을 줄 몰랐다니까? 누가 나한테 청혼했을지 정말 궁금하다.”
나는 두 손을 맞잡고 들뜬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옆에서 제이크가 맞장구쳐 주었다.
“나도 궁금한걸.”
“아차, 그러고 보니 너는 저런 거 안 받았어? 나보다 열 배는 더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제이 너라면…….”
아무 의미 없이 한 질문에, 제이크가 순간 작게 움찔했다.
꼭 정전기라도 일어난 것처럼 말이다.
“왜 그래?”
“……아니, 나는 구혼서 같은 것 받지 않았어.”
제이크는 다소 딱딱해진 태도로 고개를 완강하게 저었다.
덕분에 놀란 건 나였다.
그럴 리가 없잖아! 나도 구혼서를 받았는데 제이크가 받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뭐? 하나도? 알고 보면 너도 나처럼 가문 앞으로 구혼서가 도착해 있는 거 아니야?”
“……그건 아니야. 솔직히 말하자면 받았지만, 받자마자 모두 벽난로에 태워 버렸어.”
“……?!”
그걸 왜?
가문 간의 호의의 상징 아니야?
“……실수로 태운 거지?”
“아니, 내가 직접 버렸어.”
제이크의 대답에도 나는 여전히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그걸 왜 태워버리는 거지.
“왜 그랬어?”
“그야, 다 쓸모없으니까. 어차피 내가 혼인하고 싶은 사람은 따로 있기도 하고. 그런데 그 사람에게서는 못 받았어. 구혼서를.”
그 말을 하면서 제이크는 나를 바라보았다.
순간, 나는 얼굴에 열이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
거울을 안 봐서 모르겠는데, 지금 내 얼굴 꽤나 붉을 것 같다.
‘아니, 그러니까. 제이크. 지금 나한테 청혼하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왜 저런 말을 하는 건데!’
사실, 이미 알고 있었다.
제이크가 왜 저런 말을 하는지.
그가 ‘혼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설마, 제이크. 나더러 자신한테 청혼하라고 은근히 요구하는 건 아니겠지?’
나는 청혼 같은 거 해본 적 없단 말이야! 구혼서를 어떻게 쓰는지도 몰라!
‘물론 제이크 역시 그건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휙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고 눈을 꼭 감아버렸다.
어쩐지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바로 그때.
유모가 품에 한 아름 무언가를 들고 돌아왔다.
“아가씨, 말씀하신 구혼서 가져왔어요! 어머, 두 분 뭐 하세요?”
“……아무것도 안 했어, 유모. 구혼서나 빨리 볼래.”
나는 애써 옆에 있는 제이크의 존재감을 무시하고서, 유모에게서 구혼서를 건네받았다.
평범한 초대장과는 다르게, 고급스러운 양피지 두루마리들이 여러 개 있었다.
‘어디 보자. 대부분이 우리 가문과 비슷한 후작가네.’
아무래도 혼인은 재산이나 작위가 비슷한 가문끼리 하는 경우가 많은 탓이었다.
나는 별생각 없이 두루마리를 하나하나 펼쳐서 확인했다.
그러던 중, 유독 독특한 재질의 두루마리가 눈에 띄었다.
‘이건 어느 가문에서 보낸 거지?’
그리고 두루마리에 적힌 발신인을 읽는 순간,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트위트 공작가?’
순간 제국에는 이런 공작가가 없는데, 하고 생각했다가 이윽고 깨달아 버렸다.
마야의 가문이잖아!
‘왜, 왜 이걸 나에게……?’
심지어 글씨체를 보니 누군가가 대신 써준 것도 아니고 마야가 직접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써 내린 것 같다.
‘왕국에 있는 수많은 영애를 놔두고 왜 하필 나에게 구혼했을까?’
구혼서에 쓰인 말은 그저 평범했다.
다른 가문에서 온 구혼서와 하나 다를 바가 없었다.
그래서 더욱 내 의문은 커져만 갔다.
하지만 그때, 두루마리 사이에서 무언가가 툭 떨어졌다.
‘쪽지?’
작게 접힌 쪽지를 열어보니, 마야가 내게 보낸 편지가 적혀 있었다.
‘……!’
나는 천천히 편지를 읽어보았다.
[에미르 새런 영애에게.
반가워, 에미르 영애.
내가 보낸 청혼서는 읽어보았어?
당황했으려나.
일언반구도 없이 갑자기 이런 걸 보내서.
하지만 데뷔탕트 직후가 아니라면 달리 구혼서를 보낼 만한 적당한 핑계가 없잖아?
얼핏 이 구혼서와 편지가 농담이나 장난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야.
그러니까 내 말은…… 받아주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한 번쯤 진지하게 내 청혼을 고려해 줬으면 한다고.
진심이거든.
트위트 공작령에도, 그리고 나에게도.
영애가 필요해.
함께해 줬으면 하는 마음이야.
마지막으로, 첫 사교계 데뷔를 치른 것을 축하해.
조만간 트위트 공작저에서 열리는 모임 초대장을 보낼게.
와줄 테지?]
대충 편지를 훑어본 나는 흐음 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게 진짜 구혼서인 모양인데.’
두루마리에 쓰인 것은 형식상으로 적어 보낸 모양이고, 이 쪽지에 적힌 글이 진짜 내게 하고 싶은 말인 듯했다.
내가 유심히 쪽지를 살피는 모습에, 제이크가 궁금한 듯한 얼굴로 물었다.
“미르, 누가 보낸 구혼서길래 그렇게 뚫어져라 보는 거야?”
“응, 트위트 소공작님.”
“트위트 소공작…… 뭐?”
제이크는 내 대답을 한번 곱씹어보더니 제 귀를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한번 되물었다.
“맞아. 트위트 소공작. 그러니까 마야 말이야.”
나는 그런 제이크를 힐끗 보고 어깨를 으쓱여 주었다.
“그가 왜 네게 청혼을…….”
다른 이들이 보낸 구혼서에는 눈 깜짝 하나 하지 않았으면서, 마야가 보냈다고 말하니 제이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러게,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구혼서를 보니 트위트 공작령과 자신의 옆에 내가 필요하다는데.”
뭐, 빈말이라도 필요하다고 해주니 딱히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그럼, 그럼. 나처럼 원작을 아는 인재는 옆에 두면 좋지.’
그런데 어쩐지 제이크의 반응이 심상찮았다.
“트위트 소공작의 구혼…… 받아 줄 건 아니지? 그렇지?”
두 번이나 내 의사를 캐묻는 걸 보니, 아무래도 조바심이 나는 모양이다.
‘조금 놀려 줄까.’
갑자기 못된 장난기가 샘솟아 올라서 나는 한번 제이크에게 거짓말을 해보았다.
“글쎄…… 조금 관심이 가는 것 같기도 해.”
“……!”
제이크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나는 한마디 더 보탰다.
“트위트 공작령은 살기 좋은 곳이잖아. 공기도 물도 맑고, 무엇보다 맛있는 게 많아.”
내 말에 제이크가 이를 꽉 깨무는 게 보였다.
그가 무언가 결심한 듯 바라보았다. 그러곤 나를 설득하기 위해 말을 이었다.
내 손을 꼭 붙잡으면서.
“……굳이 트위트 공작령이 아니라도, 살기 좋은 곳은 많잖아. 다시 생각해 줘, 미르. 정 수도에 있기 싫다면 내가 다른 곳을 알아봐 줄 수도 있으니까.”
“…….”
그러나 이어지는 내 침묵에, 제이크의 목소리에 약간 울음기가 묻어났다.
“왕국으로 가지 마. 이곳에 있어 줘. 꼭 내 옆이 아니라도 괜찮으니까, 나랑 결혼하는 게 아니라도 상관없으니까, 소공작 같은 사람과 혼인해서 멀리 떠난다는 말은 하지 마, 제발…….”
“……!”
제이크의 말에서 언뜻 그의 본심이 엿보였다.
나는 침묵을 멈추고, 제이크에게 조심스레 떠보듯 물었다.
“제이크, 나와 결혼하고 싶어?”
“……!”
제이크는 내 물음에 그대로 굳어렸다.
내밀한 속마음을 들켜 버렸는지 당황한 표정이 볼만했다.
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던 두 뺨이, 오히려 살짝 붉어졌다.
나는 웃으며 말했다.
“사실, 방금 했던 말들은 전부 다 농담이었어. 내가 왜 마야 소공작님과 결혼을 하겠어. 물론 트위트 공작령도 좋지만, 나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곳 제국 수도가 훨씬 더 마음에 들어.”
“……나를 놀렸구나, 미르.”
내 말에, 제이크가 일순간 눈을 크게 뜨나 싶더니 허탈한 표정으로 안도하는 목소리를 냈다.
그는 한숨을 푹 쉬었다.
“……후우. 그래도 농담이라서 다행이야. 나는 정말로 네가 소공작과 결혼할 마음을 먹은 줄로만 알았어.”
“그럴 리가. 그리고 나는 당장에 혼인할 마음은 없어. 약혼이라면 또 몰라도…….”
나는 말을 하며 구혼서 두루마리들을 다시 정리했다.
그러곤 하녀를 불러, 다시 아버지의 집무실로 가져다 놓도록 일렀다.
‘뭐, 어차피 우리 부모님도 나를 혼인시킬 마음은 아직 없어 보이시던데.’
무엇보다 우리 가문은 당장 정략결혼으로 무언가를 얻어내야 할 조급한 상황도 아니었다.
그러니 만약 혼인을 결정하게 된다면 그건 내 뜻에 따라서일 게 분명했다.
“약혼이라고.”
“응.”
“……약혼이란 말이지.”
그런데 어쩐지 제이크는 내가 한 말에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했다.
나는 그런 그를 두고 딴생각에 잠겨 혼잣말했다.
“그보다 오늘은 뭘 하지? 모임 참석은 내일부터고…….”
그때였다.
제이크가 입을 열었다.
“에미르.”
“응?”
얘가 웬일로 나를 ‘미르’가 아닌 ‘에미르’로 부르나 싶었다.
뭐 중요하게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제이크는 물끄러미 보는 내 시선에도 굴하지 않고 차분히 말했다.
“실은 오늘, 너와 함께 오페라를 보러 갈까 하고 온 거야.”
“오페라?”
“그래. 이전에도 네가 좋아해서 자주 봤던 공연이잖아.”
그렇게 말하며 그는 내게 티켓을 보여주었다.
정말로 내가 좋아하는 공연이 맞았다.
요새 데뷔탕트 일로 바빠서 미처 취미에는 신경을 못 썼는데, 제이크는 그걸 알고 이렇게 티켓을 챙겨온 모양이었다.
‘게다가 특별석이네.’
티켓을 확인한 나는 살짝 기분이 이상해졌다.
특별석에도 종류가 있는데, 제이크가 가져온 것은 연인이나 부부를 위한 2인용 티켓이었다.
제이크와 함께 가면 누가 봐도 한 쌍의 연인처럼 보이지 않을까.
‘아니, 어쩌면 제이크 역시 그걸 노린 걸지도…….’
생각을 마친 나는 빙긋 웃으며 제이크가 내민 티켓을 받아들였다.
“좋아, 그럼 오늘은 함께 오페라 공연을 보러 가자.”
“그래. 바로 출발할까?”
제이크는 살짝 조급해 보이는 투로 나와 함께 방을 나섰다.
“응. 그런데 제이크, 내가 방금 궁금한 게 생겼는데…….”
나는 복도에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고용인들을 힐끗 바라보고서, 까치발을 들어 제이크의 귓가에 마저 속삭였다.
“혹시 이거 데이트 신청이야?”
“……!”
순간 그의 귓가가 빠르게 붉어지는 게 보였다.
제이크는 잠시 침묵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맞아. 네가 먼저 그렇게 물어볼 줄은 몰랐지만…… 처음부터 오늘은 이러려고 찾아온 거야.”
“어쩐지.”
나는 납득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오늘 제이크는 처음 봤을 때부터 계속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이었으니까.
“……혹시, 싫은 거야?”
제이크가 조심스레 질문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좋아.”
* * *
잠시 후, 우리는 수도 번화가의 오페라 극장에 도착했다.
‘오랜만인 것 같아. 공연을 보러 온 것도, 제이크와 함께 온 것도.’
분명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연이고, 집중하려 하지만 자꾸만 옆에 앉은 사람이 신경 쓰여서 큰일이었다.
‘괜히 특별석에서 본 걸까.’
오페라가 끝난 이후에도, 나는 좀처럼 평정심을 되찾지 못했다.
사실 아까 저택에서 제이크와 함께 청혼서 이야기를 할 때부터 계속 마음이 싱숭생숭했던 것 같았다.
“재미있었어?”
“……응? 아, 물론이지.”
공연이 끝나고 내게 그렇게 묻는 제이크의 얼굴을 어쩐지 똑바로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아까 자신 있게 데이트 신청이냐고 물어보던 건 언제고 말이다.
‘괜히 혼인이니 약혼이니 그런 얘기를 꺼내서.’
작게 한숨 쉬던 그때, 제이크가 내게 제안했다.
“이대로 저택에 돌아가긴 아쉬운 것 같아. 미르, 우리 축제에 갈래?”
“……축제?”
그러고 보니 막 생각이 났다.
항상 데뷔탕트가 열리는 이맘때쯤의 봄엔 수도에서 가장 큰 시장 거리와 연결된 광장에서 꽃 축제가 열리고는 했다.
‘오랜만에 가볼까.’
간혹 귀족들도 변장을 한 채 평민들 사이에 어울려 참석하고는 하는 축제였다.
나는 몇 년 전 꽃 축제에서 즐겁게 놀았던 기억을 떠올리고서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가자.”
* * *
우리는 시장 근처로 향했다.
이미 광장에는 사람이 북적거리고 있었다.
이제 막 노을 지려는 오후, 축제는 한창 무르익어 있었다.
“이거 봐, 제이크. 잘 어울리지?”
제이크와 나는 각각 평민과 비슷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채 서 있었다.
마차를 타고 오거나, 수상해 보이는 로브를 푹 눌러쓴 채 축제에 참석하면 누가 봐도 귀족임이 티가 나 소매치기의 타깃이 될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이렇게 철저히 변장(?)을 하게 된 것이었다.
“……꼭 그때 생각난다. 우리 유치원 다닐 때 시장에 몰래 놀러 왔던 것 말이야.”
마침 근처에 있는 식당을 보고 오래된 추억이 떠올라서, 나는 제이크를 힐끗 보며 말을 걸었다.
제이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그때 재미있었지.”
유모의 단골 식당이자, 우리가 바비큐를 먹었던 식당은 아직도 건재한 채 장사를 이어가고 있었다.
식당을 바라보고 있으니 어쩐지 우리만 자라버린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어, 저거?”
그때였다.
수많은 인파를 뚫고 걷던 내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바로 예전 우리가 썼던 동물 귀 머리띠였다.
“아직도 파나 봐.”
물론 기억에 남아 있는 곳과는 다른 노점이었지만, 그래도 우리의 발걸음을 이끌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제이크, 저거 써볼래? 내가 선물해 줄게.”
“뭐?”
내 질문에 제이크가 당황했다.
나는 곧바로 가판대로 가 머리띠 두 개를 사 왔다.
쫑긋한 강아지 귀 모양이었다.
머리띠를 제이크에게 대 본 나는 방긋 웃었다.
“좋아. 아주 딱 어울려.”
“……그래?”
내 말에 제이크는 어색한 표정으로 머리띠를 만지작거렸다.
본인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귀 머리띠라니, 안 어울리려야 안 어울릴 수가 없는 조합이었다.
“짜잔, 나는 이거야.”
제이크의 앞에서 등 뒤에 숨겨두었던 다른 하나를 꺼냈다.
이건 회색 털 늑대 머리띠였다.
“내 머리는 회색이니까, 어때?”
“좋아. 미르도 잘 어울려.”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웃으며 그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조용히 단둘이서만 앉아 오페라를 보는 것도 좋지만, 역시 이렇게 시끌벅적한 가운데서 축제 분위기를 즐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그렇게 제이크의 손을 잡고 한참 거리를 걷는데, 때마침 내 시야에 낯익은 두 명이 보였다.
순간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이나 눈을 깜빡여 봤지만, 점점 더 가까워지는 거리에 확신만 더해졌다.
“저기 좀 봐, 제이크!”
나는 다급하게 옆에서 주변을 구경하고 있던 제이크에게 귓속말로 속삭였다.
“니콜라스 전하와 앨리스야.”
“……그러네?”
내가 눈짓하는 곳을 바라본 제이크 역시 살짝 얼떨떨해 보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우리는 조심스레 걸음을 늦춘 채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니콜라스는 제 정체를 숨기려는 듯 진한 색의 로브를 걸쳐 입고 있었다.
반면 앨리스는 평소 요정 소환사로 일할 때처럼 소탈한 차림을 한 채였다.
확실히, 가까이 지낸 사이인 우리라서 바로 알아보게 된 것이지 보통 사람들은 그 둘의 정체를 쉬이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니콜라스를 보고도 황족이라고 생각하기보다는 변장한 귀족이라고 여길 듯했다.
‘저 둘, 축제에 왔다가 우연히 만난 걸까? 아니면 함께 온 걸까?’
두 사람은 아주 친밀해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간간이 대화를 나누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앨리스가 화관을 파는 상점 앞에 멈춰 서 물건을 고르는 게 보였다.
자신의 것만 고르는 건가 싶었지만 그녀가 고른 화관은 자그마치 열 개나 되었다.
앨리스는 그중에서 흰 꽃이 달린 화관을 골라 자신이 썼다.
‘나머지는 대체 누구에게 씌워주려고?’
니콜라스는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다가, 뒤늦게서야 앨리스를 따라 화관을 하나 샀다.
남들처럼 화관까지 쓴 그 둘은 완벽하게 꽃 축제에 녹아든 것처럼 보였다.
그때 문득 우리의 시선이 느껴지기라도 했는지, 앨리스가 힐끔 뒤돌아보았다.
‘들키겠어!’
다행히도 벽에 가려진 우리를 미처 보지는 못했는지 고개를 갸웃하고서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향했지만 말이다.
나는 어쩐지 둘의 축제 구경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제이크를 붙잡고 제안했다.
“저기, 제이크. 우리는 광장 쪽으로 갈래?”
“좋아.”
제이크는 내 뜻을 알아차리고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 * *
어느덧 해가 지고 어두운 저녁이었지만, 광장은 마치 대낮이라도 되는 듯이 환했다.
축제를 기념해 가게마다 등불을 환하게 걸어놓고, 간혹 규모 있는 상점은 마력석 등을 켜놓았기 때문이다.
광장의 일부는 귀족들이 주로 가는 고급 상점가 거리의 끝과 연결되어 있었고, 나머지는 시장이나 일반 주택가와 연결되어 있었다.
“자, 사세요! 풍성한 꽃 목걸이가 단돈 5실버!”
“달콤한 장미 사탕, 상큼한 안개꽃 사탕 있어요!”
광장을 돌아다니며 호객하는 장사꾼들부터, 꽃을 형상화한 의상을 입고 무대를 꾸리는 길거리 공연단까지.
광장은 많은 사람으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다, 비어 있는 벤치가 하나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잠깐 앉았다 가자, 우리.”
“힘들어?”
내 제안에 제이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음, 그런 것도 있고…… 앉아서 주변을 구경하고 싶어.”
내 말에 제이크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벤치로 향해 무언가 손을 썼다.
“클린 마법을 썼어. 깨끗하니 이곳에 앉아.”
“고마워, 제이크.”
사소한 것에도 제 마법으로 내게 도움을 주는 그였다. 이런 순간마다, 나는 제이크가 나를 얼마나 배려하고 우선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새삼 느끼고는 했다.
나는 웃으며 제이크와 함께 벤치에 앉았다.
그리고 한편에서 분주하게 무언가를 준비하는 이들을 눈짓하며 속삭였다.
“봐, 이제 막 불꽃놀이가 시작하려는 모양이야.”
“그러네. 미르는 원래 불꽃놀이 구경을 좋아했었지.”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쳐 주었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몇 번 제이크와 함께 축제를 구경했었다.
‘그런데 그때와 오늘은 또 다른 느낌이야. 이상하네.’
그렇게 멍하니 환한 조명과 밤하늘 사이를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펑, 펑-
갑작스레 예고도 없이 불꽃놀이가 시작되었다.
알록달록한 빛깔의 불꽃이 밤하늘을 장식했다.
그때, 갑작스레 내 손을 꼭 붙잡아오는 손길이 느껴졌다.
나는 곁눈질로 옆을 보며 물었다.
“제이크?”
“미안, 원래는 안 이랬는데…… 불꽃 터지는 소리가 무서워서 말이야. 잠시 이렇게 손 좀 잡고 있어도 될까?”
“……어쩔 수 없지. 잡아줄게.”
별로 겁먹은 것 같지 않은 태연한 표정이나, 한 치의 떨림도 없는 손을 보아 불꽃이 무섭다는 말은 사실 거짓말 같았다.
하지만 나는 이번만 특별히 그 속 보이는 거짓말에 속아주기로 했다.
“고마워.”
제이크가 미소 지었다.
우리는 두 손을 꼭 맞잡은 채로 불꽃을 구경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었다. 불꽃이 터지는 소리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제이크와 유독 가까이 붙어 있어서인 듯 했다. 맞잡은 손이 자꾸만 신경쓰였다.
그러다 문득 주변을 둘러본 나는, 몇몇 연인이 키스를 나누는 장면을 보고야 말았다.
‘그러고 보니 제국에서는 꽃 축제에서 불꽃놀이를 보며 키스하는 연인들은 결혼하게 된다는 속설이 있던데.’
다들 그 속설을 믿기라도 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제이크와 나는 아직 연인 사이는 아니니까.’
어쩐지 아쉬운 감정이 들었지만, 그저 착각이라고 생각했다.
그때였다.
제이크가 나직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에미르.”
“으, 응?”
나는 어째서인지 깜짝 놀라서, 그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야 말았다.
그러자 제이크가 물었다.
“왜 그렇게 놀란 거야, 미르? 불꽃놀이가 이제 막 끝났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이제 어디로 갈 거야?”
“아…….”
나는 어쩐지 부끄러워진 기분으로 멍하니 서 있다가 대답했다.
“불꽃놀이도 봤으니, 이제 그만 저택으로 갈까 싶어.”
* * *
후작저 앞, 마차에서 내린 나는 제이크를 배웅하려고 했다.
“잠깐, 같이 가.”
그런데 공작저로 돌아갈 줄 알았던 제이크가 나를 따라 내렸다.
“응? 돌아가지 않고?”
“……할 말이 있어. 아주 중요한 말이야. 조금만 더 시간을 내줄 수 있을까?”
제이크는 살짝 망설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느낌이 왔다.
나는 제이크를 향해 손을 내밀며 질문했다.
“그럼, 우리 오랜만에 온실 정원 산책 같이할래?”
“……그래.”
내 손을 맞잡은 제이크가 긴장하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도 없는 온실에 마력석 등을 켜고 들어갈 때까지도 그랬다.
제이크는 드러난 온실의 풍경에 잠시 멈칫하더니 정원 안을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이곳은…… 여전하네.”
“응. 테이온 공작님께서 공작저에 있는 온실과 비슷하게 꾸며주신 곳이잖아. 그때와 하나도 달라진 게 없어.”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제이크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달라진 게 없다는 말, 정말이네.”
이후 우리는 잠시 말없이 정원을 거닐었다.
침묵 속에 미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나는 마음속으로 제이크가 한 말을 곱씹어 보았다.
‘달라진 게 없다고…….’
하지만 그것은 정원 이야기일 뿐이었다. 제이크와 나 사이는 이미 꽤나 달라져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내가 달라진 거겠지만.’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게 잡던 손도, 이제는 마음속으로 긴장하며 잡아야 했다.
예전에는 오랫동안 눈싸움을 해도 아무렇지 않았는데, 지금은 조금만 오래 시선을 마주쳐도 왜인지 모를 기분에 시선을 피하게 되었다.
처음엔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당황스러웠만, 이제는 알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가 제이크를……더이상 친구로만 느끼지 않는 것 같아.’
그러던 중 우리는 눈앞에 정원의 중앙이 드러날 즈음 멈춰 섰다.
정확히는, 제이크가 먼저 걸음을 멈췄다.
“에미르, 내가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잖아.”
“응, 어서 말해봐.”
나는 선뜻 대답했다.
그러자 제이크가 두루마리 편지 하나를 꺼냈다.
오늘 아침에 보았던 것과 비슷하게 생긴 물건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나타난 걸 보니 아무래도 마법을 쓴 모양이다.
“이게 뭐야? 설마 구혼서?”
나는 알면서도 일부러 물었다.
그러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말한 게 맞아. 너에게 청혼하려고. 더 이상 이 말을 미룰 수가 없었어.”
“……!”
내내 미뤄왔던 것치고는 너무도 망설임 없는 태도였다.
물론 언젠가 제이크가 내게 청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마주 보고 청혼받을 줄은 몰랐다. 순간 불꽃놀이를 볼 때보다 더 빠르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나는 조심스레 질문했다.
“……왜 청혼하는지, 이유 물어봐도 돼?”
“내 옆엔 늘 네가 함께하고 있었잖아.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 같이 있고 싶어. 영원히 함께.”
제이크의 대답을 들은 나는 빙긋 웃었다.
“역시 그렇구나.”
어쩐지 제이크다운 대답이라고 생각되었다. 물론 나도 그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정말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말을 이었다.
“청혼서를 가문으로 보내는 것보다, 이렇게 네게 직접 말하고 싶었어.”
제이크는 깊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받아주는 거야?”
내 빠른 대답에 제이크가 살짝 놀랐다. 선뜻 받아줄 줄 몰랐던 모양이다.
“그렇지만, 결혼은 아직이야. 일단은 약혼부터 해야 해.”
“응, 약혼부터 하자.”
제이크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내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전에 우리.”
“……?”
“……연애부터 하면 어떨까?”
사실, 제이크와 함께 무언가를 해야 한다면 결혼보다는 약혼이, 약혼보다는 연애가 먼저 해보고 싶었다.
“……!”
내 말을 들은 제이크는 잠시 멈칫하나 싶더니, 정말로 원하던 대답이었다는 듯 환한 낯을 했다.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하자. 네가 하고 싶은 게 곧 내가 하고 싶은 거나 다름없으니까.”
제이크는 그렇게 말하며 내 두 손을 꼭 붙잡았다.
그러고는 약속하듯 중얼거렸다.
“네 연인, 약혼자, 남편. 모두 내가 해줄게. 미르, 넌 나와 함께 해줘.”
“그래, 좋아. 약속할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그런 내 미소를 본 제이크 역시 몹시 벅차오르는 표정으로 미소 짓고 있었다.
친구로 시작한 우리 둘의, 또 다른 새로운 관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