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8)

6.

다음 날, 유치원에서 마야와 나는 이전보다 한결 살가운 태도로 서로를 대했다.

그런데 우리가 퍽 가까워진 것이 티가 많이 난 모양이다.

옆에서 얌전히 책을 읽고 있던 제이크가 조용히 질문했다.

“미르, 마야 소공자와는 언제 그렇게 나 몰래 친해진 거야?”

“……아, 그게.”

“나 조금 서운해.”

내가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 제이크는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팔짱을 끼고 어깨를 툭 기댔다.

“그래도 여전히 미르에게 가장 친한 친구는 나지, 응?”

그리고 저렇게 조심스레 올려다보며 속삭이는데,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건 당연하지, 제이.”

“……다행이다.”

제이크가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때,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마야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내게 이야기했다.

“아, 영애. 그러고 보니 어제 낚시터 의자에 오르골을 두고 갔더라고. 책상 위에 올려둘게.”

헉, 어쩐지! 어젯밤에 가방을 뒤져도 오르골이 안 나오더라니! 두고 온 거였어?

내가 당황해 있는데, 어쩐지 아까보다 한층 더 울적해 보이는 눈빛으로 제이크가 물었다.

“설마, 어제 마야 영식의 집에 놀러 갔던 거야?”

“아, 응. 맞아.”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제이크의 입꼬리가 천천히 굳어버렸다.

잠시 말이 없던 제이크가 또다시 질문했다.

“……재미있었겠다. 뭘 하고 놀았어?”

“그게, 낚시를 좀 했어. 소공자네 별장 바로 옆에 시냇물이 흐르더라고.”

“으음, 낚시. 그리고 또?”

어쩐지 흥미를 보이는 것 같은 제이크의 눈빛에 나는 곧바로 말을 이었다.

어쩌면 제이크도 어제 나와 함께 마야의 별장에 놀러 가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낚시도 좋았지만, 물놀이하는 것도 재미있었어.”

“그랬구나.”

그리고 제이크는 잠시 동안 아무 말도 없었다.

약 5분쯤 뒤, 나는 제이크가 내 손을 톡톡 두드리는 바람에 다시 고개를 들었다.

“음? 왜 그래, 제이크?”

“……응, 갑자기 생각났는데. 마침 우리 공작저 뒤뜰에 인공 시냇가를 만들기로 했었거든.”

“우와, 그게 정말이야?”

“물론 정말이지. 그러니까 미르, 다음번에는 나와 함께 시냇가에 가서 노는 게 어때?”

“좋은 생각이야, 제이!”

내 선선한 대꾸에 제이크가 밝게 미소 지었다.

“그렇지?”

* * *

시간이 흘러, 마야의 별장에 놀러 간 이후로 몇 주가 지났다.

마야와 함께 신나게 놀았던 기억도 어느새 상당히 희미해졌을 무렵이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마야는 어느새 다른 아이들과도 상당히 친해졌다.

특유의 서글서글한 친화력 덕분이 분명했다.

혹시라도 서로 친하게 지내지 못할까 봐 걱정했지만, 역시 괜한 생각이었던 거다.

그리고 마침 내일부터 약 일주일간 제국의 건국 행사가 열렸다.

그 기간엔 대다수의 제국민이 휴가를 보내는 만큼, 우리도 유치원을 나오지 않게 되었다.

나는 내심 기뻤다.

‘좋아, 오랜만에 낮잠도 실컷 자고 방 안에 콕 박혀 뒹굴거리면서 일주일을 보내는 거야!’

그렇게 계획을 세웠건만, 마야가 지나가듯 한 말에 순간 그 계획을 취소해야 하나 고민이 되었다.

“건국제 동안, 나 잠시 공작저에 다녀오기로 했어.”

“……정말요?”

“응. 오랜만에 아버지도 뵙고 공작저에 남겨둔 짐을 좀 더 가져오려고.”

무슨 고민이냐 하면은, 바로 마야를 따라 왕국 북부 공작저로 가볼까 싶은 것이었다.

‘저주인지 주술인지. 아무튼 그 매서운 강추위를 좀 해결해 주고 싶은데. 뭔가 그곳에 가면 방법이 떠오를 것 같단 말이야.’

사실, 몇 주 전에 마야의 사정을 들은 이후로 내내 생각했었다.

방법이 아예 없다면 몰라도, 해결이 가능하다는 미래를 알고 있는 입장에서 그냥 가만히 있기는 힘들었다.

‘게다가 우리는 친구인걸.’

친구의 어려움을 그냥 두고 보기만 할 수는 없다.

무엇보다 내년이면 이제 유치원도 해체하는데, 그렇게 되면 마야는 다시 그 추운 북부로 돌아가야 한다.

‘안 그래도 그곳엔 또래 아이들이 없다고 했는데, 얼어붙듯 추운 곳에서 혼자 지내려면 외로울 게 분명해.’

그런 이유로 결국 마야를 따라가기로 결심했다.

물론 나 혼자만의 결심이었기에, 막상 마야에게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고민되었다.

‘다짜고짜 저주를 해결해 보겠다고 하는 건 이상하니까 안 돼!’

무엇보다 확실한 방법도 없는데 당당하게 ‘내가 해결한다!’고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쩐담.’

나는 한참 고민에 빠진 얼굴로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그때 그런 날 지켜보고 있던 마야가 넌지시 질문했다.

“저기, 에미르 넌 건국제에 뭘 하고 놀 거야?”

“아, 저는요.”

너랑 같이 북부를 갈까 고민 중인데, 마땅한 핑계가 없다…… 고 말할 수가 없었다.

“혹시 나랑 같이 갈래?”

“……!”

그런데 마야가 내뱉은 바로 다음 질문에,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렇게 먼저 같이 가자고 해주다니 이게 꿈이야 생시야?

“……음, 농담이야. 방금 한 말은 신경 안 써도 돼.”

그런데 막상 내가 너무 놀란 나머지 아무 대답도 않고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니, 마야는 민망해진 모양인지 슬그머니 말을 바꿨다.

나는 뒤늦게서야 펄쩍 뛰며 외쳤다.

“아뇨! 신경 쓸게요!”

“뭐?”

“공작저, 저도 같이 따라갈게요!”

“저, 정말이야?”

마야는 막상 제가 먼저 말을 꺼내놓고선 내가 정말로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말까지 더듬으며 주춤댔다.

“하지만 그곳은 정말로 추워. 에미르. 진짜, 진짜로 춥다고. 그래도 괜찮아?”

“알아요. 소공자님이 공작령이 몇 번이나 춥다고 강조하신 거. 그래도 괜찮아요.”

나는 믿음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털 달린 외투에 수제 양말과 목도리, 모자까지 꽁꽁 둘러 싸매고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까지 싸 들고 가면 설마 그렇게까지 춥겠어?

“그러니까 초대장 써주세요. 지금 바로 여기서요.”

“……아, 응. 알겠어.”

마야는 어쩐지 현실감이 안 드는 것처럼 멍해 보이는 얼굴로 내 말에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그러더니 이내 허둥지둥 제 가방에서 만년필과 종이를 꺼냈다.

“아, 여기에 써주면 될까?”

“네에. 아! 맞다! 그 끝에 이름도 적어주세요. 사인이 필요해요.”

“응, 알겠어…….”

마야는 이내 미간까지 찌푸려가며 열심히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적어 내려갔다.

‘아직 문자로 제국어를 쓰는 건 서툰 모양이야.’

나는 마야의 어깨 너머로 초대장을 힐긋대며 생각했다.

이전에 마야가 했던 말로는, 어릴 때부터 자신을 돌봐주었던 시녀 중 한 명이 제국 출신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마야가 처음 봤을 때부터 유독 제국어를 유창하게 잘 말한 것이다.

‘왕국 출신인 걸 몰랐더라면, 제국에서 나고 자란 줄 착각했을 정도로.’

한편 마야는 그새 임시 초대장을 다 완성한 모양인지 안도의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썼다…….”

나는 마야에게서 초대장을 건네받아 꼼꼼히 살폈다.

‘아무래도, 이걸 보여주면서 우리 부모님을 설득해야 할 테니까.’

초대장이 없는데 그 먼 타국까지 놀러 가는 건 귀족 사회에서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기도 했고.

그때였다.

“잠깐, 지금 뭐라고 했어? 건국제에 마야 소공자와 함께 왕국으로 놀러 간다고?”

“으악! 깜짝이야!”

갑작스레 내 바로 뒤편에서 세드릭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바람에 놀랐다.

‘언제부터 듣고 있었던 거야? 분명 아까는 화장실에 갔는지 없었는데.’

일단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놀러 가기로 했어요.”

“……!”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으로 경악하다가, 이내 세드릭은 버럭 외쳤다.

“왜 나는 빼놓고 가? 치사하게!”

아니, 나도 방금 막 약속했는데.

“음, 그럼 세드릭 님도…….”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마야를 힐끗 보았다.

마야도 이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지만, 이내 세드릭에게 친절하게 제안했다.

“그럼 세드릭 소공자도 함께 가는 걸로 할까? 그런데, 북부는 많이 추워.”

“그래! 나도 갈 거야. 빼놓을 생각도 하지 말라고. 추위 따위 내겐 아무것도 아니야.”

세드릭은 마야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엄포를 놓았다.

그래놓고는 뒤늦게서야 원래 계획해 놓았던 일정이 생각나기라도 한 듯 중얼거렸다.

“……잠깐, 건국제엔 특별 연습을 하기로 했는데…… 아니지, 연습은 놀러 가서도 할 수 있으니까. 그럼 검을 따로 챙겨야…….”

뭐, 들어보니 어쨌거나 함께 갈 것 같긴 하다.

하지만 문제는 또 있었다.

“……뭐? 미르, 마야 소공자와 함께 공작저에 간다고?”

잠시 후 소식을 전해 듣고 적잖게 당황한 듯한 제이크라던가.

“저도! 저도 갈게요, 에미르 님. 세드릭 님이 같이 간다면야 저도 정식으로 허락받고 같이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우리 북부에 가서 눈 가지고 놀아요.”

어쩐지 벌써 북부에서 나와 함께 놀 생각에 들뜬 듯한 앨리스라던가.

“뭐? 다들 왕국 북부로 가기로 했단 말이야? 너무 아쉽네.”

“그러게 말이다.”

황족이기 때문에 건국제 행사에 필히 참석해야 하는 니나이나와 니콜라스의 미련 어린 목소리라던가 말이지.

사실, 이상하게도 나는 그중에서도 제이크가 자꾸 신경이 쓰였다.

나는 조심스럽게 제이크의 곁으로 다가가 손을 잡았다.

“저기, 제이크. 너도 같이 갈 거야?”

“……미르가 가는데 내가 안 갈 리가 없잖아.”

결국 어찌어찌 두 황족 남매를 제외한 유치원 아이들은 모두 건국제에 트위트 공작저로 놀러 가기로 했다.

아니, 정말로 놀러 간다고 하는 게 맞을까.

그 추운 곳에!

* * *

다행히도 부모님께 허락을 받았다.

단, 유모와 기사 두 명과 동행하는 조건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각자의 사정이 있었겠지만, 결국엔 허락을 맡아낸 것 같았다.

이제 문제는 딱 하나였다.

‘옷! 옷을 잘 챙겨입어야 해.’

바로, 매섭고 추운 공작령의 날씨에서 버틸 수 있는 두툼하고 따뜻한 의상을 챙기는 것이었다.

이전에 말했듯, 내게는 체온을 유지시키는 아티팩트가 있었으니 그렇게까지 껴입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었다.

‘……아무래도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것 같지.’

드레스룸에 앉아, 내 앞에 속속들이 하녀들이 가져다 놓는 두툼하다 못해 한 채의 솜이불이 되어버릴 것 같은 옷들을 보고 있으니 한숨이 나왔다.

이것 중에 골라야 하는 거야?

‘어디 보자, 저 코트는 너무 목에 달린 깃이 불편해 보여. 저 망토는 원단 자체가 무거워 보이는데. 저 모자를 쓰면 머리만 큰 가분수가 되어버릴 것 같은 느낌.’

그렇지만 뭐, 돌아가는 상황을 보아하니 내 의견은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았다.

내 의상을 챙겨주는 하녀들이나 유모의 의견이 모든 걸 결정하게 될 듯했으니까.

‘해탈해야겠구나.’

나는 결국 유모의 손에 모든 걸 맡기기로 했다.

* * *

건국제의 시작일이자 우리가 함께 모여서 왕국으로 출발하기로 한 날.

집결지는 다름 아닌 유치원 앞이었다.

내가 제일 먼저 온 건지, 내가 탄 마차 이외에 다른 마차는 아직 보이지가 않았다.

‘음, 새벽이슬 냄새.’

나는 마차에서 잠시 내려서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하는 붉고 노란 낙엽 위에 고인 물기 냄새를 맡았다.

‘여행가기 직전의 향기야.’

그렇게 평소보다 한산한 유치원의 아침 풍경을 구경하고 있으려니, 어느새 하나둘 마차가 도착하기 시작했다.

“뭐야, 벌써 와 있었네?”

“에미르 님!”

앨리스와 세드릭은 한 마차를 타고 온 모양인지 함께 내렸다.

그 둘은 나를 보고서는 잠시 당황해 멈춰 섰다.

‘휴우.’

그 이유를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제일 잘 알았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내 옷차림이 좀 튀어야 말이지.

“아니, 에미르 너 뭘 두르고 있는 거야? 설마 자다가 이불 두르고 나온 건 아니지?”

세드릭이 저렇게 묻는 것도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내 옷 정말로 이불을 잘라 만들었을지도 몰라.

“어, 에미르 님 옷이……! 정말로 따뜻해 보여요. 저, 일부러 따뜻한 물주머니를 가지고 나왔는데 에미르 님께는 필요 없을 것 같아요.”

앨리스는 내게 수제 핫팩(?)을 건네려다가 말고 주춤했다.

지금 내 옷차림은 유모가 직접 짠 털실 모자, 목도리, 장갑, 양말에 두꺼운 한겨울용 코트를 두르고 있었으니까.

과장 보태서 한 명의 눈사람처럼 보일지도 몰랐다.

‘사실, 좀 더운데.’

아직 북부에 도착하지도 않았건만 벌써 이렇게 입고 있으려니 슬슬 땀이 나려 할 정도였다.

‘뭐, 어차피 텔레포트를 이용해 갈 테지만.’

대륙에서 도시나 도시, 혹은 나라와 나라처럼 먼 거리를 이동할 때는 마차까지 통으로 옮겨주는 텔레포트 마법을 사용하고는 했다.

그때, 저편에서 두 대의 마차가 한꺼번에 오는 게 보였다.

두 마차 다 내게는 익숙했다.

제이크와 마야의 마차였으니까.

그중 마야가 탄 마차가 먼저 도착했다. 마야는 마차에서 내려 내게 다가왔다.

“안녕, 미르? 옷이 따뜻해 보이네.”

마야는 손을 뻗어 내 소맷자락 끝을 살짝 만져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살포시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음, 이 정도면 북부에서도 별로 안 춥겠다.”

확실히, 공작령 토박이인 마야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적어도 추위에 떨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믿음이 갔다.

‘다행이야, 휴.’

이후 제이크의 마차도 멈춰 섰다.

마차가 열리자마자 뛰듯이 내린 제이크는 쏜살같이 내게로 달려왔다.

‘응? 손에 뭘 들고 있는 거지, 제이크.’

그런데 제이크의 두 손엔 한가득 무언가가 쥐어져 있었다.

“헉, 헉……. 미르. 이거 받아.”

“세상에, 이게 다 뭐야, 제이?”

“이건 담요, 이건 물병이야. 담요에는 보온 마법이 걸려 있어서 덮으면 따뜻해져. 그리고 이 물병은 안에 있는 물을 뜨겁게 해주는 거야.”

내 물음에 제이크는 기다렸다는 듯 설명해 주었다.

아무래도 저 물병은 보온병과 비슷한 물건인가 보다.

“우와! 정말 신기하다. 정말 고마워.”

“응, 사실 미르가 북부에 가서 추울까 봐 어제 내내 아버지와 함께 만들었어.”

내가 기뻐하니 제이크도 뿌듯해 보이는 표정으로 한껏 미소 지었다.

다만 나는 그런 제이크가 조금 걱정되었다.

‘나를 챙기느라, 정작 제 자신은 소홀하게 여기는 것 같아…….’

항상 나를 먼저 위해주는 게 너무도 고마웠지만, 이럴 때마다 조금 미안해지는 기분이었다.

항상 제이크에게는 주는 것보다도 받는 게 더 많은 것 같았다.

결국 나는 결심했다.

‘아무래도 이번 여행을 하는 동안 내가 곁에서 챙겨줘야겠다. 제이크.’

제이크가 만약 듣는다면 ‘뭐라고?’라며 되물을지도 모르는 생각을 하며, 나는 넌지시 질문했다.

“저기, 제이크. 우리 같은 마차 타고 가지 않을래?”

“……정말로? 좋아.”

제이크는 어쩐지 영 내 말이 믿기지가 않은 표정을 짓다가 이내 화색을 띠었다.

내게 물건들을 건네주고 제 마차로 돌아가려던 제이크는 나를 따라 내 마차로 함께 갔다.

“나도! 나도 같은 마차 타고 싶어.”

“그건 안 돼요. 한 마차에 너무 많이 타면 말이 힘들어해요.”

뒤늦게서야 세드릭이 입을 삐죽 내밀며 중얼거렸지만, 나는 우리 후작저의 말이 폭삭 주저앉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았다.

“칫.”

세드릭이 다시 제 마차에 올라탐과 동시에, 우리 마차는 텔레포트 장소를 향해 이동했다.

* * *

약 한 시간 후.

우리는 더 이상 제국의 수도가 아닌 왕국의 북부에 와 있었다.

어지러움 하나 없이 눈 깜짝할 사이 텔레포트가 완료되고, 북부에 온 걸 알아채자마자 서서히 추운 날씨가 느껴졌다.

투명하던 마차 창문엔 눈만큼이나 하얀 김이 잔뜩 서렸다.

제이크와 나는 서로가 앉아 있는 측의 창문에 손가락으로 뽀득거리며 그림을 그리며 놀았다.

나는 제이크 몰래 창문 맨 구석에 ‘제이크 왔다 감’이라고 끄적였다.

“우와! 바깥이 온통 하얀색이야.”

그러다가 이내 비친 바깥의 풍경에 잠시 넋을 놓았다.

제국도 한겨울엔 눈이 오지만, 이렇게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풍성하게 내리지는 않았다.

앞서가는 다른 아이들의 마차 위에도 어느새 소복하게 눈이 쌓였다.

“봐, 나 입김이 나와, 미르. 후우-”

그때 제이크가 제 숨이 하얀 김으로 바뀌는 걸 보고 깜짝 놀라며 말했다.

“어, 정말이네? 나도야.”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잠시 그런 서로의 모습을 보며 웃었다.

그러다가 나는 제이크가 좀 추워 보인다는 것을 알아챘다.

‘따뜻한 물을 따라줘야겠다.’

나는 품을 뒤적여 아까 제이크가 주었던 물병을 꺼냈다.

다행히도 마법이 걸린 마차라서 내부는 달리지 않고 멈춰 서 있는 것처럼 평온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쏟지 않게 조심하자.’

나는 물을 컵에 조금 따라, 적당한 온도로 식을 때까지 호호 불었다.

옆에서 그런 나를 보고 있던 제이크가 질문했다.

“후아, 춥다. 그런데 미르, 물 마시려고?”

“응? 아니. 제이 네가 추워 보여서.”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제이크에게 컵을 건넸다.

“……!”

제이크는 어쩐지 감동받은 눈빛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천천히 컵을 건네받았다.

“……고마워, 미르.”

“아냐, 뭘. 어차피 네가 준 거잖아. 나눠 마셔야지. 뜨거울 수 있으니까 천천히 마셔.”

나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보다 컵을 줄 때 살짝 스치듯 닿았던 제이크의 손이 꽤나 차가웠다.

계속해서 창문에 그림 그리기 놀이를 해서일까.

아니면 바깥의 찬 공기가 이곳까지 새어 들어와서일까.

‘잘은 모르지만, 따뜻하게 해줘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좌석 아래에 놓아둔 작은 짐가방을 뒤적거렸다.

그런데 아뿔싸! 혹시 몰라 여분으로 챙겼던 장갑을 저택에 두고 온 모양인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하는 수 없지. 그럼 내가 쓰던 거라도…….’

결국 나는 넌지시 장갑을 벗어 제이크에게 건넸다.

“자, 제이크. 이것도 받아.”

“응? 이건 미르가 방금까지 끼고 있었던 장갑 아니야? 이걸 나한테 주면…….”

제이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응, 맞아. 제이 네 손이 차가워서. 방금까지 내가 낀 거라 금방 따뜻해질 거야.”

“어서 써봐.”

나는 제이크의 손에 장갑을 끼워주었다.

제이크는 잠시 주춤했으나, 이내 제 손에 꽉 끼다시피 한 장갑을 이리저리 보면서 의미 모를 미소를 배시시 지었다.

“조금 작아.”

“아, 미안. 크기는 미처 생각 못 했어.”

“괜찮아. 작아서 오히려 더 따뜻한 거 같은데.”

그러더니 제이크는 휑해진 내 두 손을 물끄러미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지?

“미르, 네 손은 어떡해?”

“응? 아, 제이 네가 손이 따뜻해지면 그때 돌려줘.”

“으음…….”

내 말에도 제이크는 뭔가가 썩 내키지 않는 듯 침음을 흘렸다.

그러더니 도톰한 뜨개 장갑을 낀 손으로 짝 박수를 쳤다.

“그래, 이렇게 하면 되겠다!”

“뭘……?”

“미르는 내게 장갑을 줬으니까, 나는 미르에게 온기를 나눠주는 거야.”

온기를 나눠준다고?

처음에 그 소리가 무엇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바로 내 두 손을 살포시 감싸오는 부드러운 털실의 감촉에 제이크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손을 잡아준다는 거였어?’

참나, 제이크. 휴, 내가 못 살아.

하지만 어쩐지 싫지 않아서 그냥 조용히 피식대기만 할 뿐, 제이크가 잡아준 손을 빼지는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손을 잡고 한동안 있었다.

북부 공작저에 도착할 때쯤엔 어느덧 우리 둘 다 손이 따뜻해져 있었다.

* * *

텔레포트 이후로도 약 한 시간가량을 달려 도착한 이곳.

바로 트위트 공작성이었다.

아무래도 길바닥이 온통 눈, 얼어붙은 땅, 얼음이다 보니 빨리 달리지 못해 늦은 것 같았다.

“우와, 여기가 바로!”

우리는 작은 탄성과 함께 마차에서 내렸다.

안에서 내다볼 때와 다르게 막상 나와 보니 정말로 낯설고도 신기한 광경이었다.

‘이렇게 추운 데라면, 확실히 사람들이 떠나는 것도 이해돼.’

나라도 오래 버티지 못할 것 같았다.

이곳에서 일 년 넘게 지낸 마야가 대단해 보일 지경이었다.

‘역시, 마야를 도울 방법을 빨리 찾아야겠어.’

나는 혼자서 고개를 끄덕이며 소복소복 쌓여 있는 눈을 밟으며 한 발자국씩 나아갔다.

너무 껴입은 탓인지 걸음이 뒤뚱거리는데 분명 뒤에서는 한 마리의 펭귄처럼 보이겠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너무 따뜻하잖아. 역시 우리 부모님과 유모의 선견지명 최고.’

옛말로, 어른 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고 한다.

물론 항상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이럴 때 보면 꽤 맞는 말 같기도 했다.

잠시 후 우리는 집사와 시종들을 따라 공작저 내부로 향했다.

들어가는 길,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구경했다.

성 근처엔 무언가를 지으려다 버려진 것처럼 보이는 땅이 있었다.

또한 한때는 경작지였던 모양인지 잘 갈아져 있었지만 심어놓은 농작물들이 모두 말라 한 줌의 지푸라기처럼 되어버린 곳도 보였다.

그리고 웬 거대한 아이스링크장처럼 보이는 장소도 눈에 띄었다.

처음엔 대체 뭔가 했지만, 이내 그곳이 이전에 마야가 말했던 강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휴우, 바깥은 정말이지 황량하구나…….’

* * *

다행히도 공작성 내부는 그나마 온기가 흘렀다.

아니, 정확히는 응접실의 벽난로를 잔뜩 땐 덕분이겠지만.

“정말이지 오랜만에 방문하신 손님이시군요. 심지어 우리 소공자님의 귀한 친우분들이시라니, 비록 추운 성이지만 성심성의껏 모실 테니 편안히 지내다 가시길 바랍니다.”

공작성의 시녀장과 집사가 우리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외부 손님은 정말이지 오랜만이라면서.

잠시 후 우리는 각자의 방을 배정받았다.

마야의 말로는, 공작성 안에 널리고 널린 게 빈방이라 우리에게 그중 가장 크고 좋은 방을 내주었다고 한다.

‘과연, 정말 넓고 포근해 보여!’

비록 창밖은 잔뜩 낀 서리와 눈발로 하얗지만, 회색빛의 폭신한 침구와 캐노피, 커튼은 보기만 해도 아늑함이 느껴졌다.

한참 방을 구경하고 있던 그때, 갑작스레 누군가 방문을 노크했다.

‘응? 누구지? 하녀인가?’

나는 들어와도 된다고 대답했고, 동시에 문이 열렸다.

하지만 방문자의 정체는 예상과 달랐다.

“……마야 소공자님?”

마야가 살짝 머쓱해 보이는 태도로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제집에 돌아온 탓인지, 조금 편안해 보이는 얼굴을 한 채였다.

“응, 나야. 방은 좀 괜찮아? 마음에 들어?”

“네, 엄청 좋은데요? 침대도 폭신폭신해요.”

“그래? 다행이다…….”

내 대답에 마야는 안도의 목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그는 살짝 소심한 투로 중얼거렸다.

“사실 걱정했어. 이전의 공작령이라면 몰라도, 지금은 정말로 별 볼 일 없는 곳이라. 실망하는 건 아닐까 하고.”

“그럴 리가요! 실망스럽긴커녕 이런 아름다운 광경은 처음 봐서 놀랐는걸요.”

“……그게 정말이야?”

어쩐지 울먹거리는 듯한 눈동자로 마야는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고개를 몇 번 세차게 끄덕여 주었다.

“물론이죠!”

“정말로 고마워. 에미르.”

마야가 환히 웃었다.

그러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알려줄 게 있어서 내가 온 거였는데.”

알려줄 것이 있다니, 대체 뭐지?

궁금해진 나는 조심스레 질문했다.

“어떤 건데요?”

“응, 이제 곧 점심 식사 시간이잖아. 우리 모두 식당에서 식사하는 게 어떠냐고 물어보려고 했어.”

마야의 말에,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힘차게 외쳤다.

“당연히 좋아요!”

“정말? 그럼 지금 바로 가자.”

마야가 화색을 띠며 내 손을 잡고 문을 나섰다.

우리는 다른 아이들이 머무는 방에 들렀다.

식당에 올 때쯤엔 5명 모두가 함께였다.

‘우와, 후작저의 식당에 있는 것보다도 더 넓고 웅장한 테이블이잖아.’

이걸 테이블이라고 불러도 될지 모르겠지만, 수십여 명의 사람과 함께 식사해도 될 정도로 길고 넓었다.

때문에 맞은편에 앉은 제이크와 세드릭의 얼굴이 멀게 느껴질 정도였다.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저 멀리서 식전 수프가 담긴 쟁반을 들고 오는 시종들이 보였다.

“우와, 좋은 냄새가 나는데요?”

내 감탄에,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미르 님 말이 맞아요. 향긋한 닭고기 수프 냄새 같아요.”

정말이었다.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식감의 닭고기 수프를 시작으로, 기름진 생선 요리, 과일과 야채 푸딩, 잘게 잘라놓은 칠면조 구이까지.

테이블 위가 맛있는 요리들로 풍성해졌다.

나름 먼 길을 떠나와서 그런지 허기졌던 우리는 바쁘게 음식을 먹어치웠다.

‘정말 맛있다! 제국 수도에서 흔히 먹는 것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데, 양념이 진해서 더 좋은 것 같아.’

식사가 끝나고, 우리의 앞에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따뜻한 장미 차가 놓였다.

그제야 마야는 웃으며 설명했다.

“너희 모두 내 소중한 손님들이니까, 식사 준비를 평소보다 멋지게 해달라고 말했어.”

동시에 마야는 아쉬운 얼굴로 덧붙였다.

“요즘처럼 눈이 많이 오지 않았더라면, 다른 도시에서 들여온 향신료와 음식들도 맛보게 해줬을 텐데. 미안해.”

“아니에요, 소공자님. 정말 맛있게 잘 먹었어요!”

어쩐지 의기소침해 보이는 마야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 나는 엄지를 척 치켜세웠다.

맞은편에서 세드릭 역시 동의했다.

“맞아. 생선구이가 엄청났다고.”

“그렇다면 다행이야. 정말로.”

그제야 마야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 *

그렇게 티타임까지 끝난 후,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그러다 마야의 제안으로 성 주변을 구경하기로 했다.

“어차피 성 안도 장작을 때지 않는 곳은 바깥처럼 춥거든. 재미있는 것도 별로 없어. 그러니까 따뜻하게 옷 입고 주변을 둘러보자. 내가 안내해 줄게.”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어차피 내 개인적인 목적은 이 땅의 저주를 해결하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이곳에 대한 정보를 많이 알아두는 편이 좋았으니까.

‘음, 그런데 어째서 우리를 뒤따라오는 시종에게 낚싯대를 챙겨오라고 말하는 건데?’

아무래도 마야는 주변 구경보다는 다른 사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역시나는 역시나였다.

잠깐 공작성의 온실 정원을 구경시켜 주나 싶더니, 이내 방향을 자연스레 틀어 얼어붙은 강가로 가는 마야였다.

얼음 위에 보통 신발로 서 있으면 미끄러지기 십상이었다.

때문에 우리는 지푸라기 끈을 엮어 만든 무언가를 신발에 덧씌웠다.

그랬더니 꼭 평지를 거니는 것처럼 잘 걸어 다닐 수 있었다.

“저쪽은 조금 위험한데, 이쪽은 다행히 얼음이 두꺼워서 아무리 세게 두드려도 깨지지 않을 거야.”

얼음 위에 서서 설명을 이어가던 마야는, 무언가 중요한 사실을 깨달은 모양인지 휙 뒤돌아 누군가에게 시선을 주었다.

“뭐, 뭐야? 갑자기 왜 날 보는 건데?”

그 시선을 받은 이는 바로 세드릭이었다.

얼떨결에 자신에게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자, 당황한 세드릭이 주춤댔다.

잠시 후, 마야가 한숨을 푹 쉬었다.

“아무래도 세드릭 소공자가 조금 불안해서 말이지. 소공자라면 잘못하다 이 얼음도 깨 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당연히 이 정도 얼음쯤은 깰 수 있지! 날 뭘로 보는 거야?”

세드릭은 추워서 귀가 얼어붙은 탓인지, 마야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모양이다.

마야가 초연해 보이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래, 역시 내 불안감이 맞았어.”

한편, 나는 세드릭의 삐뚤어진 모자가 자꾸만 신경 쓰였다.

삐져나온 귀가 빨갛게 얼어 있는데, 잘못하면 동상에 걸려 아플지도 모른다.

조심스레 뒤로 다가간 나는 세드릭의 모자를 살며시 제자리로 끌어당겨 주었다.

“뭐, 뭐 하는 거야?”

“모자 정리해 드렸어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고서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왔다.

세드릭이 당황하며 제 뺨과 귓가를 매만지는 게 보였다.

동시에 내 옆에 서 있던 제이크가 나를 제게로 살짝 끌어당겼다.

잠시 후, 마야는 세드릭에게 다시금 ‘절대로 과하게 힘을 쓰지 말라’고 충고해 주었다.

“쳇, 알겠다고. 안 쓰면 되잖아.”

세드릭은 툴툴대면서도 얼음 강에 빠지기는 싫었는지 행동이 조심스러워졌다.

이윽고 우리는 다른 시종들이 가져온 무언가에 시선이 꽂혔다.

“저건……!”

“썰매잖아?”

“맞아. 썰매를 타고 싶은 사람은 얼마든지 타도 돼. 시종들이 도울 거야.”

“우와! 저 타볼래요.”

“나도! 나도! 탈 거야!”

세드릭과 앨리스는 서로 나서며 썰매에 관심을 가졌다.

하지만 나는 그다지 흥미가 가지 않았기에,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런 나를 힐끔 보더니 마야가 질문했다.

“에미르 넌 썰매엔 관심 없어?”

“음, 그냥 앉아 있고 싶어서요.”

저주에 대해서 어떻게 알아봐야 할지 고민할 시간도 필요했고 말이다.

내 대답에 마야는 반색하며 제안했다.

“정말? 마침 잘됐다. 여기서 얼음낚시를 하려고 하는데, 근처에서 구경할래?”

“좋아요, 응?”

고개를 끄덕인 순간 바로 옆에서 느껴지는 누군가의 존재감에 나는 시선을 돌렸다.

제이크가 마야와 나 사이를 자연스레 가로막으며 서 있었다.

“마야 소공자, 나도 같이 구경할게.”

“아…… 그래. 좋아.”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마야가 제이크의 동행을 수락했다.

‘어쩐지 둘 사이에서 불편한 기분이 드는 건 기분 탓일까.’

혹시 내가 방에 있을 동안 둘이 몰래 싸우기라도 한 건지 의심이 되었다.

아무튼 잠시 후, 어른 손 한 뼘 정도의 지름으로 얼음 위에 구멍을 파낸 뒤 우리는 그 주변에 둘러앉았다.

‘마야, 정말 낚시 좋아하는구나.’

평소에도 거의 항상 서글서글 웃고 있는 얼굴이긴 하지만, 이렇게 낚시를 할 때면 눈빛까지 반짝거리는 게 갑작스레 생기가 보충되기라도 한 느낌이다.

나는 마야가 낚싯대에 미끼를 끼우고 이런저런 준비를 하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갑작스레 내 옆에 제이크가 더 가까이 붙었다.

뭐지, 혹시 추운 건가?

나는 제이크의 차림을 흘끗 보았지만 딱히 추워 보이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아까 마차에서도 유독 손이 차가웠으니까, 지금도 추위를 꽤나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제이크에게 슬쩍 팔짱을 꼈다.

다행히도 제이크는 순순히 내 팔을 꼭 껴안아 주었다.

따뜻한지 입꼬리가 씨익 올라가는 게 보였다.

잠시 후.

제이크가 넌지시 속삭였다.

“……미르, 무슨 생각해?”

“응? 그냥 이것저것 생각 중이야. 제이 너는?”

사실, 이번에도 즉석에서 생선 바비큐를 해 먹으면 맛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 남몰래 침을 꿀꺽 삼켰지만…….

방금 식사도 했는데 또 먹을 것 이야기를 꺼내는 게 영 아닌 것 같아 얼버무렸다.

그랬더니 제이크가 웃으며 대꾸했다.

“나는 미르가 무슨 생각 중일지 생각했어.”

“아하하, 그게 뭐야.”

나는 제이크가 심심해서 장난을 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웃었다.

마침, 열심히 고기 낚는 데 열중하고 있던 마야가 고개를 들었다.

“……너희 굉장히 사이좋아 보인다.”

“……!”

혹시 마야가 저만 빼놓고 이야기하는 바람에 조금 서운해진 건가 싶어서, 나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그러는 마야 소공자님은, 물고기 몇 마리나 잡았어요?”

“나? 음…… 어디 보자. 다섯 마리 잡았어.”

뭐? 벌써 그렇게나?

체감상 아직 채 10여 분 정도밖에 지나지 않은 것 같은데 대단한 속도였다.

거의 줄을 드리우자마자 족족 낚여 올라오는 정도 아닌가?

마야가 머쓱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너희 둘이 지켜보고 있으니 조금 어색해서, 그만 몇 마리 놓쳤지 뭐야.”

놓친 결과가 저 정도라니, 마야는 타고나길 대단한 낚시꾼인 모양이었다.

“아, 그보다. 우리 이따 저 공터에서 바비큐 하지 않을래?”

“우와, 좋은 생각이에요.”

마침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기에, 나는 곧바로 기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약 30분 후.

어느덧 바구니 안에 잡힌 물고기가 스무 마리가 넘어갈 무렵이었다.

마야는 이쯤에서 그만하자며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섰다.

우리는 한참 썰매를 타고도 지친 기색 하나 없는 얼굴을 한 세드릭과 앨리스를 데리고, 공터로 향했다.

“이 땅은…….”

그런데 어쩐지 이 땅 그냥 평범한 공터는 아닌 것 같았다.

이곳저곳이 파헤쳐진 채로 남아 있어 상당히 이상한 기분이 드는 땅이었다.

‘꼭, 무언가가 갑자기 튀어나오거나 혹은 중요한 무언가가 묻혀 있을 법한 느낌.’

하지만 이내 모닥불을 피우고 생선을 굽자 그런 느낌 따위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다들 모닥불을 향해 손을 가까이 대고 몸을 녹이고 있을 무렵, 나는 열심히 시종이 가져다주는 마른 나뭇가지를 장작으로 던져넣는 마야를 보고 질문했다.

“그런데 이곳은 왜 이렇게 구덩이가 많아요?”

“아, 그건 말이지. 이곳은 아버지께서 야외 연회장을 지으려고 하셨던 땅이야.”

“아하!”

“그런데 보다시피 제대로 짓지도 못하고 이곳저곳 땅만 파여 있어.”

그렇게 말하면서 마야는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웬 색색의 돌무더기가 잔뜩 쌓여 있었다.

“저기 봐. 땅을 갈다가 나온 돌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어. 공사가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날씨가 추워져서 이렇게 된 거야. 이젠 어차피 야외 연회장을 짓지도 못하지만.”

마야의 말을 듣던 나는 갑작스레 호기심이 생겨 자리에서 일어서 돌무더기 근처로 향했다.

대충 쌓아놓은 돌들을 기웃거리던 그때, 무언가 이상한 점이 눈에 띄었다.

“……?”

돌무더기 틈 사이로 얼핏 하얀빛의 무언가가 눈에 스친 것이다.

‘뭐지?’

호기심에 다가가 보려고 한 그때.

“에미르, 돌은 그만 보고 이제 이리 와! 생선 다 구워졌어. 엄청 향이 좋아. 우리 그때 먹었던 것보다 더 맛있을 거야.”

“앗, 정말요?”

순간 훅 풍겨오는 맛있는 냄새와 함께 들려온 마야의 목소리에, 호기심은 어디 가고 허기가 도졌다.

‘뭐, 별거 아니겠지. 일단 먹고 나서 생각하자.’

곧바로 뒤돌아 쪼르르 아이들의 곁으로 향했다.

마야가 손수 구운 생선은, 주변 시종들이 나서서 우리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우와아! 살이 엄청 야들야들해 보인다!’

군침이 절로 돌 정도였다.

나는 재빠르게 포크를 챙겨서 생선을 맛보았다.

‘역시! 맛있어. 마야는 정말로 거짓말을 안 해!’

행복해하며 한 입 볼에 가득 넣고 오물거리던 그때, 옆에 앉아 있던 제이크가 혼잣말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그때 같이 바비큐도 했구나.”

“응? 제이, 방금 뭐라고 했어?”

내 물음에 제이크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제 입을 가리고 고개를 작게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미르.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나와버렸어.”

“아…… 그래? 그런데 생선 조금밖에 안 먹었네. 속이 안 좋은 거야?”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면 아까 점심을 너무 많이 먹어서 별로 입맛이 없는 걸까?

“아냐. 이제 먹으려고.”

“그래? 그럼…… 자, 아 해봐.”

“……!”

제이크가 당황한 듯 그대로 행동을 멈췄다.

나는 그 사이 재빠르게 생선살을 포크로 쿡 찍어 제이크의 입에 넣어주었다.

“어때?”

“……응, 엄청 맛있어.”

제이크가 배시시 웃었다.

* * *

생선 바비큐를 먹은 이후, 우리는 저택으로 다시 들어갔다.

이런 추위에 너무 오래 바깥에 있으면 앓아누울지도 모른다는 시녀장의 의견 때문이었다.

‘아늑해!’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하게 데워진 방 안으로 들어오니 이보다 더 좋을 수가 없었다.

차갑게 굳어 있던 몸이 포근한 이불 안에서 천천히 녹는 기분이었다.

나는 잠시 아까 공터에서 본 돌이라던지, 공작령의 추위에 대해 생각하다가 그만 깜빡 잠들고야 말았다.

눈을 떠 보니 어느새 다음 날이 되어 있었다.

꽤 늦은 오전인 모양인지 창가에서 들어오는 볕이 쨍쨍했다.

“하암……. 응?”

“일어나셨습니까, 영애님?”

문득 들려온 목소리에, 눈을 애써 찡그려 가며 앞을 보았다.

간밤에 붙어버리기라도 한 듯 쉬이 잘 떠지지 않았으니까.

그곳엔 단정한 차림의 하녀가 식사 트레이를 들고 서 있었다.

“소공작님께서 손님분들을 깨우지 말라고 말씀하셔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마침 식사를 내왔는데, 드시겠습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그래서 지금 일어났구나.

항상 정해진 시간에 유모가 깨워줘서 일어났었다.

이렇게 늦잠 자본 것이 대체 얼마 만인지 어색했다.

아침 식사를 다 하고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유모의 도움을 받아 옷을 갈아입고 단장했다.

유모가 내게 귀띔했다.

“아가씨, 소공작님께서 아가씨가 깨어나시면 온실 정원으로 놀러 오라고 말씀하셨어요. 다른 친우분들은 벌써 그곳에 계시다네요.”

“앗, 정말? 그럼 어서 가야겠다.”

나는 재빨리 준비를 마치고 공작성의 하녀를 따라 온실 정원으로 향했다.

정말로 아이들은 다 그곳에 있었다.

“뭐야, 이제 온 거야? 이런 늦잠꾸러기 같으니.”

세드릭이 나를 응시하고서는 기다렸다는 듯 놀려댔다.

세드릭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마야는 내게 손을 흔들었다.

“잘 잤어, 에미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둘은 이곳에서 체스 게임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이런 게임은 처음 해보는 세드릭이 머리를 쥐어뜯은 모양인지 머리가 산발이었다.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다, 제이크와 앨리스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앨리스 영애와 제이크는 어디 있어요?”

“아, 그 둘?”

마야가 무어라 대답을 해주려던 그때, 누군가가 뒤편에서 다다다 달려와 나를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앨리스?”

내 어깨 근처까지 길게 늘어진 백금발을 보고, 바로 그게 앨리스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맞아요! 저예요.”

앨리스는 내가 곧바로 자신을 알아 맞춘 것이 기쁜 모양인지 화사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에 있었어요?”

내 질문에, 앨리스는 온실의 한쪽을 가리켰다.

“저쪽에 예쁜 나무들과 꽃이 많아서 잠시 구경하고 왔어요.”

“아하, 그렇구나!”

이 공작령에서 유일하게 푸릇푸릇 잘 자라난 다양한 식물을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 온실 정원이었다.

‘나도 구경이나 해볼까……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제이크!’

제이크의 행방부터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순간, 마야가 말했다.

“제이크 영식을 찾아? 아마 서재에 있을 거야.”

“아, 정말요?”

“응. 아까 심심하다며 책을 읽겠다고 해서 서재 출입증을 줬거든.”

서재라고? 그때, 불현듯 무언가가 생각났다.

‘혹시 저택 서재에 가면 이 공작령에 대한 정보나, 내려오는 민속 주술 같은 것을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런 걸 보다 보면 혹시 이곳 추위에 대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했다.

“저도 서재에 가고 싶어요!”

“그래? 그럼 네게도 출입증을 줄게. 시종을 따라…… 아니다, 그냥 나도 같이 갈까?”

마야는 체스말을 들고 무언가를 고민하다가, 벌떡 일어섰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세드릭이 투덜댔다.

“뭐야, 나 거의 이기고 있었는데. 비겁하게 도망가는 거야?”

하지만 그런 말과는 달리 체스판의 상태를 보니 전혀 세드릭이 이기고 있던 것 같지는 않았다.

“쳇, 나도 갈래. 그럼. 서재에서 이어서 게임 하지 뭐.”

결국 세드릭은 체스를 챙겨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앨리스도 나를 따라왔다.

“저도 갈게요! 온실 구경 다 했어요.”

* * *

잠시 후, 우리는 서재에 도착했다.

서재의 문을 열자 꽤나 커다란 공간이 드러났다.

“제이크!”

“어, 미르?”

그 가운데에 위치한 테이블에 제이크가 앉아 있었다.

제이크는 한참 책에 집중하고 있던 모양인지, 내가 들어오는 것도 모르다가 이름을 부르자 그때야 알아차렸다.

“나도 책을 읽으려고 왔어.”

“정말? 그럼 내 옆자리에 앉아.”

“응, 그럴게.”

미리 자리를 찜해 놓고 나는 책장으로 갔다.

꼭 작은 도서관처럼 가지런히 정리된 책은 어림잡아 수천 권도 더 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 많은 책 중에서 내가 원하는 주제를 어떻게 찾지?’

그 까마득함 앞에서 나는 그만 조금 멍해졌다.

그때, 가만히 서 있는 내게 마야가 다가왔다.

“찾는 책이 있어? 내가 도와줄게.”

“아, 그게…… 실은, 이 공작령에 대한 게 좀 궁금해서요.”

내 말에 마야는 반색하며 한쪽을 가리켰다.

“정말? 이곳이 궁금하다니 환영이야. 공작령에 대한 책은 저쪽 세 번째 책장 왼쪽 밑을 보면 있을 거야. 물론 그렇게 많지는 않아.”

“아, 감사해요.”

나는 곧바로 마야가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음, 제목들이 다 내 목적과는 관련이 없어 보이는데.’

전통 요리나 축제에 관련된 책 몇 권이 전부였다.

왕국어뿐만 아니라 제국어로 쓰인 번역본도 함께였다.

나는 잠시 고민했지만, 속는 셈 치고 읽어보기로 결심했다.

‘……음, 공작령이 되기 이전에 대한 역사는 거의 적혀 있지 않구나.’

하지만 별 소득 없이 책을 덮었다.

아무래도 이번엔 저주에 관한 책을 읽어봐야 할 것 같았다.

사실, 얼마 전 제국에 있을 때 우리 후작저 서재에서도 주술에 관련된 책을 조금 찾아 읽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정말로 별 도움 되지 않는 내용뿐이었다.

진짜 주술과 관련된 내용이 아니라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들을 주워 담은 것에 불과했다.

‘하긴, 저주나 주술에 관련된 책이 버젓이 이런 데 있을 리없겠지. 그리고 그런 거에 관심 가지는 사람이 많지도 않을 테고 말이야.’

아무래도 이곳 서재도 비슷할 것 같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찾아보기로 했다.

한참을 서재 안을 돌아다니던 나는 이내 한쪽 구석 책장 앞에 멈춰 섰다.

‘음, 여긴가?’

왕국어를 유치원에서 배우긴 했지만, 정말로 기본적인 일상 대화 수준밖에 할 줄 몰랐던 터라 찾는 게 조금 어려웠다.

하지만 역시 이쪽 맨 구석에 있는 책들이 주술과 관련된 게 맞는 것 같았다.

막 손을 뻗어 책을 꺼내려던 그때.

“주술, 저주…… 이런 책에 관심 있어?”

“까, 깜짝이야!”

갑작스레 바로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그만 헛손질을 했다.

뒤돌아보니 마야가 어색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미안, 놀랄 줄 몰랐어. 내 발걸음 소리 들은 줄 알았는데.”

“……너무 집중해서 못 들었어요.”

동시에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지 뭐야?

그때, 나와 내 앞의 서적들을 번갈아 바라보던 마야가 넌지시 질문했다.

“혹시, 내가 지난번에 공작령이 저주받은 땅일지도 모른다고 해서…… 저주에 대해 궁금해진 거야?”

“……!”

내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본 마야의 질문이었다.

하긴, 대놓고 이런 책을 찾아다니는 게 조금 티 났을지도 모른다.

나는 수긍했다.

“……네, 조금 궁금해서요.”

다행히도 마야는 그런 나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그랬구나. 그런데 미안하지만, 저주에 대한 책들은 여기서 찾을 수 없을 거야.”

“……어째서요?”

마야가 설명했다.

이미 1년 전 추위가 시작하고부터, 들려오는 사람들의 이런저런 입방아에 공작을 비롯한 여러 사람이 저주에 대한 책이나 정보를 수집해 해결책을 찾아보려 했다고.

물론 모두 실패로 돌아갔지만 말이다.

“그런 책들은 모두 아버지 집무실 옆 작은 서재에 꽂혀 있어.”

“아…….”

“그런데 다행히도 아버지 서재 열쇠 중 하나를 내가 갖고 있거든. 궁금하다면 우리 같이 가볼까?”

그렇게 말하면서 내게 손을 내미는 마야였다.

나는 홀린 듯 그 손을 붙잡았다.

“좋아요, 가봐요!”

* * *

잠시 후, 우리 둘은 조용히 서재를 빠져나와 복도를 통해 집무실 근처 작은 서재로 향했다.

‘이곳은 작고 아담하네.’

서재라기보다는 그냥 작은 응접실 정도의 크기였다.

이런저런 어려워 보이는 책이 잔뜩 있었다.

마야는 책장을 이리저리 뒤적이더니, 나를 불렀다.

“이쪽에 있는 책들 같아.”

마야가 가리킨 곳으로 가보니 중후한 분위기를 풍기는 책장이 있었다.

책의 제목을 살펴보니 정말로 저주와 주술에 관련된 내용인 것 같았다.

‘적어도, 아까 봤던 책들보다는 훨씬 도움되는 내용이 적혀 있겠지.’

하지만 이미 다른 사람들이 한 차례 샅샅이 살펴보았을 것이다.

실패한 방법을 내가 다시 시도한다고 해서 기똥찬 해결법을 찾아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아까는 일순간 혹해서 마야를 따라오긴 했는데, 생각해 보니 헛수고일 것 같았다.

‘그래도 일단 읽어봐야 하나…… 응?’

고민하던 나는 다른 칸에 꽂힌 책들로 시선을 돌렸다.

‘어, 이 책들은?’

아까 큰 서재에서는 미처 찾을 수 없었던 공작령의 역사에 대한 책이 있었다.

그걸 발견한 내 눈이 절로 커졌다.

‘저주보다는 이쪽에 더 흥미가 가는 건 어째서일까.’

일단 내 직감을 따라보기로 했다.

나는 책장 바로 앞 바닥에 앉아 공작령 역사서를 펼쳤다.

어려운 단어들은 모르니 건너뛰고, 읽을 수 있는 단어들만 하나씩 천천히 읽어나갔다.

‘으으, 진작에 왕국어 공부 좀 많이 해둘걸…….’

조금은 후회되었지만 이제 와서 어쩔 수 있나.

후작저로 돌아가면 공부는 그때부터 하기로 했다.

잠시 후, 책을 읽어나가던 나는 어느 한 대목에서 시선을 고정했다.

‘잠깐, 이 성…… 공작령이 되기 이전부터 다른 누군가가 쓰던 성이었다고?’

어쩐지 외관도 그렇고 꽤나 유서 깊어 보인다 했다.

역사가 깊은 성이었구나.

“저기, 소공자님. 이 성이 옛날엔 공작가가 아닌 다른 가문의 성이었어요?”

호기심이 생겨서 마야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마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역사서를 읽고 있었구나? 맞아. 공작성으로 쓰인 건 백 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

마야의 말로는 그 이전엔 다른 귀족가가 살았다고 한다.

오래전에 몰락해 버린 귀족가라, 지금은 찾아볼 수 없지만 말이다.

“이 책장도 알고 보면 엄청 오래된 거래. 아마 몇백 년은 되었을걸. 이런 가구가 이 성엔 많아.”

마야는 책장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 말을 들은 나는 신기한 기분이 들었다.

‘이 성의 시작부터 함께해 온 유서 깊은 물건인가 봐.’

나는 다시 책을 읽는 데 집중했다.

공작령이 되기 이전에 대한 내용은 짤막하기만 했다.

설화 같은 이야기가 조금 쓰여 있었다.

이 땅을 지켜주는 신비한 돌에 관한 내용이었다.

‘잠깐, 돌이라고?’

무언가가 막 생각나려는 무렵.

마침 옆에서 마야가 피식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들렸다.

‘응? 왜 웃는 거지?’

동시에 우리 둘은 시선이 마주쳤다.

마야는 읽지도 않은 책을 펼쳐만 놓고 나를 내내 지켜본 듯했다.

두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웃음 짓고 있다가, 내가 쳐다보자 그제야 표정을 갈무리했다.

‘……설마 내가 고심하며 책을 읽는 모습이 너무 진지해서 웃겼나?’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마야가 입을 열었다.

“나 사실 여기 두 번째로 들어와 봐.”

“네?”

“아버지께서 내게 열쇠도 넘겨주셨지만, 실은 나 책 같은 거에 별로 관심 없어서. 내가 공작이 되기 전에는 이곳을 쓸 일 없다고 생각했는데 에미르 네 덕분에 와보게 됐네.”

음, 이건 좀 의외였다.

니콜라스만큼은 아니지만 마야도 책에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니.

‘서재에서도 이것저것 안내를 잘해주길래, 독서를 좋아하는 줄 알았어.’

어쩐지 마야가 책은 안 읽고 나만 빤히 바라보고 있다 싶었다.

‘마야, 혼자 심심하겠다.’

계속해서 나 혼자 책만 읽고 있는 게 미안해졌다.

어서 용건을 끝내고 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는 읽는 속도를 빨리했다.

팔랑, 팔랑.

책장이 넘어가도 딱히 더 이상 흥미를 끄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이제 다른 책도 한번 꺼내볼까 싶어서 앉은 채로 등을 돌려 엉거주춤하게 책장으로 팔만 뻗었다.

그때였다.

‘응?’

아래에서 책장을 올려다보니, 어두컴컴한 안쪽 모서리에 뭔가 오목하게 들어간 듯한 부분이 보였다.

‘……뭐지?’

이 각도에서만 살짝 보이는 걸 보니, 무언가 숨겨진 비밀이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가가 모서리의 오목한 부분을 손끝으로 꾹 눌러 보았다.

그랬더니.

“……!”

갑작스레 드르륵 움직이는 소리가 나더니, 책장 사이 숨겨진 공간이 드러났다!

“뭐, 뭐야, 에미르? 무슨 일이야?”

그 소리를 듣고, 바닥에 앉아 있던 마야도 놀라 벌떡 일어섰다.

우리는 잠시 멍하니 책장 앞에 서 있었다.

그러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다.

“어, 책장 안쪽에 틈이 있어서 눌러봤는데…… 이렇게 비밀 공간이 나와버렸어요.”

“……정말이네. 숨겨져 있었나 봐.”

우리는 비밀 공간을 열어 안에 든 물건들을 확인했다.

족히 몇십 년 이상은 묵었는지 먼지가 상당했다.

“콜록! 먼지가…….”

우리는 잠시 기침을 하다가, 눈앞에 보이는 여러 문서에 다시 한번 깜짝 놀랐다.

‘설마, 이건?’

아무래도 공작령이 되기 이전 가문이 숨겨놓았던 비밀 문서를 찾아내 버린 모양이다.

‘그렇다면 혹시 여기에 해답이 있지 않을까?’

순간 번쩍 든 생각에 재빨리 문서들을 확인했다.

하지만 슬프게도 너무 오래된 문서들이라 그런지 삭아서 가루가 되기 직전이거나, 혹은 잉크가 다 날아가 버린 것이 대다수였다.

하지만 그 가운데 유독 보관 상태가 양호한 게 하나 있었다.

평범한 종이가 아닌 특수 처리가 된 양피지였다.

어쩐지 중요한 물건 같았다.

‘……뭐라고 적힌 거지?’

그런데 정작 읽을 수가 없어서 눈을 찌푸리기만 했다.

드문드문 왕국어처럼 보이는 문자가 적혀 있었는데, 그 외의 문자는 내가 생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그때 마야가 다가와 그것을 보더니 중얼거렸다.

“이건, 고대어인 것 같은데?”

“그게 정말이에요?”

“응. 나도 읽지는 못하지만, 생김새가 비슷하게 생긴 것 같아.”

마야의 말에 나는 우울해졌다.

‘고대어라니! 어쩌지?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이 성에 있을 리가 없잖아.’

언어학자들이면 몰라도 평범한 사람들은 고대어에 대해 모를 게 분명했으니까.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마야가 한 말에, 방법이 생겼다.

“그러고 보니 아까 우리가 있던 서재에, 고대어 사전이 있었던 것 같아.”

“……!”

“우리 다시 서재로 돌아가서 이걸 한번 해석해 보자. 재미있을 것 같아.”

정확히 내 뜻과 일치하는 마야의 말을,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좋아요!”

* * *

잠시 후.

정체불명의 양피지를 들고 돌아온 우리 둘을 본 다른 아이들이 앞다퉈 질문해 왔다.

“미르!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어…….”

“너희 둘만 어딜 다녀온 거야?”

“에미르 님! 그 종이는 뭐예요?”

나는 아이들에게 아까 집무실 옆 서재에서 있었던 일을 말해주었다.

“비밀 공간에서 이걸 찾았다고?”

“그런데 그 서재는 왜 간 거야?”

저 질문에 답하려면, 1년 전 시작된 공작성의 추위에 대해 말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 성의 주인도 아닌 내가 선뜻 말을 꺼내도 되는 걸까.

망설이던 찰나에, 다행히도 마야가 나서 다른 아이들에게도 설명을 해주었다.

“그게 정말이야? 신기하다. 원래는 이렇게 춥지 않았다니.”

우리는 힘을 합쳐서 양피지 해석을 해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단 한 장뿐이고, 그리 길지 않은 내용이었으니까.

마야가 책장에서 고대어 사전을 여러 권 꺼내왔다.

우리는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가운데엔 빈 종이와 양피지를 두었고, 각자 하나씩 사전을 펼친 채로 작업을 시작했다.

‘어쩐지 대단한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져.’

사실 일일이 사전을 뒤져 양피지에 쓰여 있는 것과 똑같은 모양을 한 글자를 찾는, 단순하고도 시간을 잡아먹는 작업일 뿐이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힘을 합치니 예상외로 속도가 빨랐다.

“나, 찾았어! 이건 ‘돌’을 뜻하는 문자인 것 같아.”

“저도 찾았어요! ‘땅에 묻다’라는 뜻이에요.”

어느새 서재 바깥의 하늘빛이 주황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바쁘게 사전을 넘겼다.

찾은 단어가 늘어날수록 점점 문서의 윤곽이 잡히는 느낌이었다.

‘역시, 이건 공작령의 날씨와 관련된 내용이었어.’

내 생각은 점점 확실해졌다.

마침내 해가 지기 직전, 우리는 장장 몇 시간의 노력 끝에 문서 해석에 성공했다.

* * *

공작령의 추운 날씨를 해결하는 방법은 생각보다 쉬웠다.

이 종이를 조금이라도 빨리 발견했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아쉬울 만큼.

‘역시, 내 감이 맞았던 거야.’

나는 지난밤 생선 바비큐를 했던 공터를 떠올렸다.

돌을 없애고 땅을 고르게 하느라 잔뜩 파냈던 구덩이들과, 한쪽에 쓰레기마냥 쌓여 있던 돌무더기를.

공작령의 날씨가 이렇게 추워진 것은 다름이 아니었다.

이 땅을 지키는 마법이 걸려 있던 돌 중 하나를 파내 버린 탓이었다.

그 공터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다섯 개의 오색 돌이 깊이 묻혀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중 한 개의 돌이라도 사라지게 되면 균형이 깨져 공작령의 질서가 어그러진다고 적혀 있었다.

‘그러니 그 파내 버린 돌을 찾아내 다시 똑같은 위치에 묻어 줘야 해.’

다행히도 어디에 묻어야 할지는 자세한 설명이 나와 있어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마 돌을 찾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쌓여 있던 돌무더기 안을 뒤져보면 나올 게 분명했다.

우리는 곧바로 바깥으로 향하려 했다.

하지만 집사를 비롯한 사용인들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도련님. 해가 졌는데, 밖으로 외출하시겠다고요? 그것도 친우분들과 함께라니.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집사, 우리가 중요한 걸 찾았어. 이걸 한번 봐.”

마야는 평소보다 배는 커진 목소리로 재빠르게 집사에게 설명했다.

“이, 이런! 세상에, 도련님! 어떻게 이런 것을…….”

눈이 침침해 보이던 집사가 잠시 후엔 눈을 휘둥그레 뜰 정도로, 엄청나게 놀라운 소식이었다.

우리 주위로 공작성의 사용인들이 웅성대며 하나둘 모여들었다.

“무슨 일이시래?”

“모르겠어. 도련님과 친우분들이 중요한 걸 찾으셨대.”

그렇게 모여든 사용인들도 우리가 찾아낸 공작령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한차례 성안이 뒤집어졌다.

“이게 정말이라면……. 도련님 말씀대로 어서 시도해 봐야겠습니다.”

집사는 그렇게 말하며 기사 몇 명을 불러모았다.

해가 지면 흉포한 야생동물이 많이 돌아다니는 북부이기 때문에, 맨몸으로 나갈 수 없기 때문이었다.

마야가 집사에게 말했다.

“나도 같이 갈게.”

“하지만 도련님.”

집사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마야는 꿋꿋했다.

“끝까지 옆에서 지켜보고 싶어. 이곳의 후계자로서 공작령에 도움될 수 있는 일을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니까.”

“……그렇다면 알겠습니다. 따뜻하게 챙겨 입고 나오시지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 집사가 막 뒤돌아서려는 찰나.

“잠깐, 소공자님. 저도 함께 가보고 싶어요.”

나 역시 이 공작령의 고민이 해결되는 순간을 끝까지 지켜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나섰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도 앞다투어 말했다.

“나도 데려가.”

“저도요!”

마야는 우리를 한 번 바라보더니, 집사에게 말했다.

“내 친우들도 함께 가게 해줘. 다들 이 사실을 알아내느라 고생했어.”

“……도련님 뜻대로 하시지요.”

집사가 허락했다.

잠시 후, 우리는 기사들과 집사, 몇 명의 사용인과 함께 저택을 나서 공터로 향했다.

밤이 되어 어둠이 깔린 공터는 평소보다도 더 황량하게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일에 기뻐하던 이들이었지만 막상 무엇부터 해야 할지 망설이는 게 보였다.

나는 재빨리 외쳤다.

“일단 먼저 돌을 찾아야 해요!”

“에미르의 말이 맞아.”

옆에서 마야가 맞장구쳤다.

우리의 말을 듣고 횃불을 든 일행이 한편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로 향했다.

혹시라도 갑작스레 무너지면 곤란하니, 장정들이 힘을 써 하나하나 겉에 쌓인 돌들을 옮겨갔다.

잠시 후 살짝 들뜬 목소리의 외침이 들려왔다.

“여기, 찾았습니다! 말씀하신 석판 모양이에요!”

그가 꺼내 든 건 먼지 때가 묻은 흰색의 판판한 돌이었다.

양피지에 적혀 있는 것처럼 뒷면에 마법진이 흐릿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제 할 일은 한 가지였다.

올바른 위치를 찾아내 돌을 묻는 것.

‘흰색 돌이 있어야 할 위치는 정확히 다른 4개의 돌 가운데라고 했는데.’

하지만 다른 돌을 찾기 위해 일일이 땅을 다 파볼 수도 없고, 딱히 다른 표시도 없으니 어디가 원래 묻혀 있던 위치인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다른 사람들 역시 그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애꿎은 양피지만 뚫어져라 보며 모여 이야기하고 있었다.

“어찌할까요? 일단 가장 중요한 돌은 찾았고 도련님과 일행분들도 계시니, 이만 저택으로 돌아갔다가 해가 뜨면 땅을 파 나머지 돌들의 위치를 알아내는 게 어떻겠습니까?”

“허어…….”

돌을 다시 되돌려 놓기만 한다면, 이 끔찍하고도 저주 같은 추위를 없앨 수 있다는 희망이 바로 눈앞에 어른거리는 상태였다.

현실적으로는 돌아간 뒤 내일 작업하는 게 맞겠지만, 고지를 바로 앞에 두고서 망설이지 않고 그만두기란 쉽지 않았다.

집사를 비롯해 여러 사용인의 한숨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때였다.

“……마법진이 그려진 돌이라면, 내가 그 위치를 알아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 옆에 꼭 붙어 서 있던 제이크가 아주 조용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제이크, 그게 정말이야?”

“응.”

화들짝 놀라 묻는 내 말에도 제이크는 고개를 묵묵히 끄덕였다.

나뿐만 아니라 옆에 서 있던 마야도 제이크의 말을 들은 모양이다.

마야가 떨리는 목소리로 다가와 제이크에게 물었다.

“그렇다면, 도와줄 수 있겠어?”

“……음.”

조금 망설이는 듯한 제이크였다.

아무래도 조금 어려운 마법이라서 그런 것일까? 아니면…….

그때, 갑작스레 제이크는 나를 휙 돌아보며 물었다.

“미르, 미르는 내가 마법을 썼으면 좋겠어?”

“응?”

갑작스러운 질문이었다.

무슨 뜻으로 물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응, 아무래도. 오늘 이 일이 해결되면 굉장히 뿌듯할 것 같거든. 하지만 제이 네가 무리해서 하는 거라면 안 썼으면 좋겠어.”

내 말을 들은 제이크는 잠시 멈칫하더니 시선을 돌린 채 말했다.

“……미르 네가 그렇다면, 마법을 써서 도울게.”

“정말 고마워, 제이크 소공자.”

그 말에 마야가 곧바로 나서며 제이크에게 고마움을 표했다.

“고마워하지 않아도 돼요. 미르가 원하는 일이니 하는 것뿐이니까.”

“……!”

태연한 목소리로 제이크가 대답하는 걸 듣고,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잠시 후 제이크는 눈을 감고 마법 주문으로 들리는 말을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자 갑작스레 어딘가에서 은은히 빛이 비치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니, 정확히 네 군데의 땅 표면에 빛이 떠올라 있었다.

“저 빛이 있는 곳이, 나머지 4개 돌이 묻혀 있는 곳이야.”

제이크의 말을 듣고 마야가 사람들을 불러모아 이야기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어디선가 긴 밧줄을 두 개 가져와 빛과 빛이 있는 곳을 대각선으로 각각 이었다.

그 밧줄이 서로 맞닿는 곳에 구덩이가 나 있었다.

그곳이 바로 돌을 묻어야 하는 곳이었다.

조심스레 먼지를 닦아낸 돌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야는 직접 땅에 파묻었다.

삽으로 흙을 덮고 땅을 고르는 마무리 작업은 다른 이들이 했다.

“어……?”

사실, 땅에 돌을 묻자마자 곧바로 큰 변화가 생길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지막 흙을 고르자마자, 우리의 뺨을 매섭게 스치고 지나가던 칼바람이 뚝 멎었다.

“……!”

“바람이 멎었다!”

다른 이들도 그걸 느꼈는지, 놀란 목소리로 웅성댔다.

여전히 하늘에서는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일단 바람이 멎은 것만 해도 충분히 놀라운 일이었다.

우리는 다시 저택으로 돌아왔다.

내가 머무는 방에서 내내 뜨개질을 하며 기다리고 있던 유모는 나더러 무얼 하고 놀았길래 그리 피곤해 보이냐고 물었다.

나는 그저 살짝 미소 짓기만 했다.

‘근데, 정말로 피곤하긴 하네…….’

하암.

나는 작게 하품했다.

오늘은 정말 많은 일이 있었던 하루였다.

내일이 되어 봐야 성공했는지 아닌지 알겠지만, 어쨌거나 내가 이곳 공작령에 온 목적을 달성하기도 했고.

낮 시간 내내 개미만 한 글씨의 사전을 들여다보며 일하기도 했고.

‘으음, 일단 자야겠다…….’

침대에 눕자마자 생각은 멈추었고, 스르륵 눈이 감겼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유모를 비롯해 다른 아이들까지 호들갑 떠는 목소리에 잠에서 깼다.

‘……응? 유모는 그렇다 치고, 왜 다들 내 방에 와 있는 거지?’

다들 뭐라고 나를 보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긴 한데, 아직 잠이 덜 깬 나로서는 그저 귓가에서 웅웅대는 것 같을 뿐이었다.

대충 눈을 비비고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그제야 다들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알 수 있었다.

“아가씨! 세상에나, 창밖 좀 보세요. 하루아침에 날씨가 이렇게 갰네요.”

“뭐? 그게 정말이야?”

나는 기지개를 켜는 것도 잊고 깜짝 놀라 외쳤다.

대답한 것은 유모가 아닌 앨리스였다.

“네, 맞아요. 에미르 님. 저도 아침에 일어나서 깜짝 놀랐어요! 어제는 분명 아침에도 하늘이 온통 흐렸고 엄청나게 추웠는데 지금은 엄청 햇볕이 쨍쨍해요!”

앨리스가 정말 놀라웠는지 평소와 다르게 속사포로 말을 쏟아냈다.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재빠르게 창가로 향해 바깥을 보았다.

“……정말이잖아?”

어제는 그저 칼바람만 잦아든 것을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간밤에 공작령은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도통 온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햇살은, 구름이 없어지자 맑은 하늘에서 유일하게 존재감을 뽐냈다.

하늘에서 쏟아지듯 날리던 눈발도 더 이상은 볼 수가 없었다.

창문을 열어보니, 바깥에서 은은하게 바람이 불었지만 본래 계절에 맞는 선선한 가을바람이었다.

잔뜩 쌓여 있는 흰색의 눈이, 서서히 녹고 있었다.

“맙소사.”

나는 그만 너무 기쁜 나머지 입을 가린 채 그대로 굳어버렸다.

정말로 내가 해냈다.

아니, 다른 아이들과 함께해 낸 일이었다.

나는 바깥의 풍경에서 좀처럼 헤어나오지 못하다가,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뒤돌아섰다.

그 자리에는 다른 아이들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세드릭이 개구쟁이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는 다 진작에 봤는데, 에미르 너만 혼자 늦게 봤네? 하여간 늦잠꾸러기.”

“……저 원래는 늦잠 안 자거든요.”

나는 흥 콧방귀를 뀌었다.

그러다가 나를 빤히 바라보고 있던 제이크와 시선이 마주쳤다.

제이크는 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

“미르가 웃어주니까 나도 기뻐진다.”

“어제 열심히 도와줘서 정말로 고마웠어, 제이크.”

“……뭘.”

제이크가 부끄러워하는 목소리를 냈다.

* * *

우리는 식당에 점심 식사를 하러 갔다.

다들 아침 식사는 이미 한 모양이지만, 나는 늦게 일어난 탓에 점심이 아침이 되고 말았다.

‘응? 뭐가 이렇게 푸짐해?’

나는 시종들이 내온 식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우리가 첫날 이곳에 왔을 때보다 훨씬 정성을 들인 티가 가득했다.

뭐지, 하고 어리둥절해 있는데 그런 내 곁에 저택의 요리사들이 다가왔다.

“도련님께서 해주신 말씀을 들었습니다. 에미르 님이 이 공작령을 구하는 방법을 찾아내 주셨다고요.”

응……?

그렇게 말하니까 내가 무슨 대단한 구원자라도 되는 것 같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우물쭈물하고 있으려니 그들은 잔뜩 감동한 표정과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희가 해드릴 수 있는 건 오로지 음식뿐이라, 최대한 심혈을 기울여서 만들었습니다. 이곳에 머무르실 동안 최고의 대접을 해드리겠습니다.”

어, 어쩐지 굉장히 부담스러워졌다.

……괜찮은 걸까.

이제야 느껴지는 건데, 주변 공작저의 사용인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뭘 저렇게 애틋하고 간절하게 바라보는 건데!

대체 마야, 나에 대해 뭐라고 말해놓은 거야?

‘빠, 빨리 집에 돌아가고 싶어졌어.’

이런 기분은 익숙하지가 않아서 큰일이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식사를 마칠 즈음, 갑자기 집사가 나타나 마야의 귀에 무어라 속닥였다.

“……!”

뭐라고 말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들은 마야가 반색했다.

무슨 말을 들었길래 저렇게 기뻐하는 걸까.

내 궁금증 어린 눈빛을 받은 마야가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돌아오신대.”

“정말요?”

“응. 오늘 아침 일찍 통신구로 연락을 드렸거든. 다행이지.”

마야는 꿈꾸는 것처럼 행복해 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방방 들뜬 말투로 중얼거렸다.

“아버지께서도 공작령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을 보면 기뻐하실 거야.”

마야의 말대로였다.

정확히 다음 날 아침, 저택이 소란스러워져서 나와 보니 처음 보는 남자가 나를 반겼다.

나는 잠시 당황했으나, 남자는 마야와 똑 닮아 있었다.

이분이 바로 마야의 아버지, 트위트 공작님인 모양이다.

“오, 영애가 바로 마야가 말했던 공작령의 은인……!”

네? 은인이요?

낯선 단어에 얼떨떨한 기분을 느끼기도 전, 옆에서 불쑥 마야가 튀어나왔다.

“네, 맞습니다. 아버지. 모두 에미르 영애가 이 양피지를 찾아내 준 덕분이에요.”

“오오…….”

“아, 그리고 제 다른 친구들도 함께 도움을 주었습니다.”

마야의 말에 다른 아이들도 나처럼 쭈뼛거리거나 괜스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무래도 부끄러웠던 탓이다.

트위트 공작님은 우리에게 무언가 보답하고 싶은 모양이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다.

‘보답받으려고 한 행동은 아니니까. 나는 그냥 마야가 행복해졌으면 해서 방법을 찾아보려고 노력한 것뿐이야.’

물론 공작님을 포함해 공작저 내의 다른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모양이었지만 말이다.

공작저의 사람들이 극진하게 대접해 준 덕분에, 나는 거의 왕족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심지어 며칠 후 돌아가기 직전 짐을 꾸릴 땐, 이것저것 금은보화가 든 꾸러미를 몰래 마차에 실어주려던 것을 내게 들켰다.

“저는 정말로 괜찮아요, 소공자님! 안 주셔도 돼요!”

“……음, 하지만 나도 그렇고 아버지께서도 이대로 빈손으로 돌려보내기엔 미안하다고 하셨는걸.”

마야는 내 시선을 슬쩍 회피하며 볼을 긁적였다.

그러더니 무언가가 생각난 듯 다시 물었다.

“그럼 도자기는 어때? 지난번에 네가 마음에 들어 하던 컵 같은 거 말이야. 더 아름답고 좋은 물건들이 우리 집에 많거든.”

너라면 다 가져가도 돼.

농담이겠지만, 마야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어, 도자기라고?’

순간 마음이 흔들렸지만 굳이 대답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마야는 그런 내 속마음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응? 제발. 뭐라도 보답하게 해 줘.”

“……네, 알겠어요.”

저렇게까지 애원하는데 끝까지 모른 척하고 거절하기도 미안했다.

결국 나는 하는 수 없는 척하며 마음에 드는 도자기 몇 점을 골라 챙겼다.

이후 우리는 수도로 돌아왔다.

물론, 마야는 제외였다.

마야는 오랜만에 아버지와 시간도 보낼 겸 조금 더 공작성에 머무르겠다고 했다.

나흘이 넘는 시간을 트위트 공작령에서 보낸 탓에, 수도로 돌아오니 어느새 건국제 연휴가 끝나기 직전이었다.

그렇지만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내내 신경 쓰이던 마야의 문제도 해결되었으니까.

그런데 나는 또다시 작은 걱정이 들었다.

‘마야가 더 이상 유치원에 다니지 않겠다고 하면 어떡하지?’

얼마 전 마야가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추위 때문에 잠시 고향을 떠나 이곳에 왔다고 그랬었는데.

‘내가 추위를 해결해 버렸으니…… 이제 제국 수도에 있을 이유가 없잖아.’

아무래도 마야의 아버지도 마야가 다시 왕국으로 돌아와 사는 걸 바라실 테고 말이다.

‘……아쉬운걸.’

다른 아이들보다는 훨씬 짧은 시간을 함께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정이 많이 들긴 한 모양이었다.

더 이상 유치원에 마야가 없다고 생각하면 슬퍼졌으니까.

* * *

그런데 건국제가 지나고 유치원에 다시 와 보니, 떡하니 마야가 있었다.

“잘 지냈어, 에미르? 좋은 아침이야!”

심지어 방긋 웃으며 내게 아침 인사를 날리기까지 했다!

어디로 보나, 곧 유치원을 그만둘 것 같은 태도는 아니었다.

“마, 마야 소공자님?”

내심 이틀 동안 우울해하며 마야와의 이별(?)을 준비하던 나는 당황해 말을 더듬었다.

마야는 그런 나를 의아하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아니, 그게 아니라.”

며칠 내내 고민했던 것이 엄청나게 쓸데없는 상상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부끄러운 기분이 들었다.

나는 개미 기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실은, 소공자님이 이제 유치원에 다니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뭐? 어째서?”

마야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제가 듣기에도 생뚱맞은 소리였던 걸까.

“……공작령이 이제 다시 따뜻해졌으니까요.”

내 말에 마야는 무언가가 생각난 듯했다.

“음, 사실 네 말이 약간 맞아.”

“네?”

다도 아니고, 약간 맞다니.

그게 무슨 소리일까?

“아버지께서 이제 다시 공작령으로 돌아와 지내는 게 어떠냐고 말씀하셨거든. 물론 난 거절했어.”

마야가 나를 보며 웃었다.

“왕국에 있으면 에미르 너와 다른 친구들을 못 보게 되잖아.”

“……!”

“그러니까 유치원은 계속 다닐 거야. 너희와 함께.”

그제야 나는 안도했다.

“다행이에요, 정말 좋아요!”

* * *

건국제 이후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가을이 원래 이렇게 짧았었나 싶을 정도였다.

트위트 공작령에서 지냈던 기억이 한때의 해프닝처럼 느껴질 정도로 평온하고 즐거운 나날이었다.

놀기만 한 게 아니라, 이것저것 재미있는 것들을 배우기도 했다.

이를테면 음악 공부라던가.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어설픈 실력이었지만, 전혀 다룰 줄 몰랐던 피아노나 바이올린 같은 악기도 배워보았다.

그래서였을까.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겨울이 되어 있었다.

‘이제 정말로 유치원 다닐 수 있는 시간이 한 달 정도밖에 남지 않았어.’

달력을 넘겨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유치원은 내년에 해체하게 된다.

그러니 12월인 지금이 마지막인 것이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올 정도였다.

벌써 이렇게 아쉬워지면 어쩌지.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다른 아이들도 조금씩 마지막이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우리, 유치원을 졸업하기 전 무언가 재미있는 걸 해보지 않을래?”

“재미있는 거요?”

니나이나가 저런 제안을 하는 것만 봐도 그랬다.

“응, 우리가 이곳에 다녔다는 걸 기념할 수 있는 거면 좋겠어.”

“그렇다면…….”

나는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기념이라고? 학예회 같은 걸 하자는 것일까?

‘음, 나쁘지 않은걸.’

니나이나의 말대로 무언가 뜻깊은 행사를 한다면 좋을 것 같았다.

나는 니나이나에게 속삭였다.

“그럼 이렇게 하는 게 어떨까요, 전하?”

“응? 뭔데?”

“우리가 1년 동안 배운 것들을 자랑하는 자리를 만드는 거예요. 선생님과 가족들을 모두 초대해서 보여드리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내 말에 니나이나가 깜짝 놀랐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어? 정말로 좋은 생각이야.”

“헤헤.”

니나이나의 마음에 들어서일까.

얼마 후, 우리는 에드몽 부인의 도움을 받아 학예회를 준비하기로 했다.

자유 시간.

우리는 함께 모여 토론을 시작했다.

“그런데 뭘 보여줘야 해? 우리가 배운 것들을 전부 다?”

세드릭이 제일 먼저 의문을 표했다.

학예회를 해보는 건 처음이라, 궁금한 게 많은 모양이었다.

‘물론 나 빼고 다 처음이겠지만.’

나는 조심스레 의견을 말했다.

“아뇨.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요. 각자 가장 자신 있는 것을 뽐내면 되지 않을까요?”

“그래? 그렇다면 나는 검무를 추겠어.”

그렇게 말하면서 세드릭이 의기양양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요즘 검술 외에 수련하고 있다는 검무를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건 안 돼. 세드릭 소공자. 유치원에서 배운 게 아니잖아.”

“맞아요. 그리고 위험해요. 갑자기 검을 놓치면 어떡해요.”

“칫…….”

물론 다른 아이들이 반대하는 바람에, 세드릭은 검무를 포기해야 했다.

그때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라, 나는 입을 열었다.

“아!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배웠던 자료들을 액자에 걸어 전시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응? 전시?”

“미술 시간에 그린 그림이나 문학 시간에 지었던 시를 걸어두는 거예요.”

내 말에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 같아!”

그때 막 니콜라스가 말을 꺼냈다.

“아, 그러고 보니 우리 이제 악기도 연주할 줄 알지 않나. 연주회는 어때?”

참고로, 니콜라스는 의외로 바이올린 연주에 재능이 있었다.

내가 켜면 끼익- 끼익- 하는 소음이 나는 것과 반대로 말이다.

“전하 말대로 악기 연주도 좋아 보여요.”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러고 보니 앨리스는 피아노 연주를 잘하던가?

문득 두 사람이 함께 연주한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황자 전하와 앨리스가 함께 연주회를 하는 걸로 해요!”

내 외침에, 다른 아이들이 잠깐 술렁대더니 이내 동의했다.

“좋은 생각 같아. 오라버니 혼자 바이올린을 켜는 것보다 훨씬 나을 거야.”

“그럼 혼자가 아니라 두 명이서 같이 준비해도 되는 거네?”

그런데 막상 당사자인 니콜라스와 앨리스는 조금 당황한 듯 보였다.

“같이……?”

“……전하와 같이 공연이요?”

둘은 어색해 보이는 시선을 잠깐 교환하더니, 앨리스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에미르 님이 말했으니까, 나쁘지 않은 생각 같아요. 할게요.”

“……!”

앨리스의 대답에 니콜라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라버니? 왜 그래?”

니나이나가 이상하다는 듯 되묻자, 그제야 니콜라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그럼 앨리스 영애와 함께 연주하도록 하지.”

“좋아! 기대하고 있을게.”

어쩐지 니나이나가 더 신나 보였다.

잠시 후, 마야가 말을 꺼냈다.

“나는, 내가 직접 지은 시를 낭송할래.”

“우와, 그것도 좋은 생각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 마야가 지었던 시는 꽤 길어서, 틀리지 않고 읊으려면 꽤나 연습해야 할 듯했다.

‘그럼, 나는 뭘 해야 하지?’

아직 무엇을 할지 정하지 않은 다른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고민에 빠졌다.

그때, 막 내 시야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건?’

음악 시간에 연주하던 미니 핸드벨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유일하게 잘 다룰 수 있는 악기가 저거였지, 참.

‘그럼 나는 핸드벨 연주…… 아차!’

자신 있게 학예회 공연 주제를 정하려다가,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저 핸드벨은 총 8개인데, 내 손은 8개가 아니라 2개잖아?’

분신술로 몸을 3개 더 만드는 게 아닌 이상 불가능해 보였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손을 뻗어 핸드벨을 만지작거렸다.

딸랑, 고운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때, 마침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제이크가 다가왔다.

“미르는 뭐 할 생각이야?”

“응, 제이크. 나는…….”

아직 생각하지 못했어.

라고 말하려던 찰나.

제이크가 나보다 한발 앞서 말했다.

“아직 생각한 게 없다면, 황자 전하와 앨리스 영애처럼 우리 함께하지 않을래?”

“음…… 좋아!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제이 넌 뭔가 좋은 생각이라도 있는 거야?”

내 질문에 제이크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하더니, 나처럼 핸드벨로 시선을 돌린 채로 말했다.

“아까 미르가 저걸 바라보고 있었잖아. 사실 핸드벨 연주하고 싶었던 거 아니야?”

“아, 맞아. 그랬어. 그렇지만 우리 둘이서 함께한다 해도, 사람이 부족해.”

나는 아쉬운 목소리를 냈다.

그러자 제이크가 농담했다.

“분신 마법으로 우리와 비슷하게 생긴 인형을 만드는 거야.”

역시 사람들의 생각은 거의 비슷한 모양이다.

아까 전 내가 상상했던 걸 제이크가 똑같이 말하고 있었다.

물론, 제이크는 정말로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점이 다르지만.

“에이, 그럴 필요까지는 없어.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우리 그냥 다른 거 하자.”

내가 손을 내저은 그때였다.

갑자기 세드릭과 니나이나가 우리에게 다가왔다.

“핸드벨 연주를 한다면 우리도 끼워 줄래?”

앞서 다가온 니나이나가 당당하게 말했다.

‘우리 넷이면 인원수가 딱 맞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같이해요!”

* * *

그날 점심시간부터 우리는 본격적인 학예회 준비에 돌입했다.

먼저 어떻게 학예회를 꾸밀 것인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유치원 내부에는 손님들을 여럿 모시고 공연할 만큼 넓은 공간이 없었다.

다행히도 후원에 널찍한 잔디밭이 있었기에, 공연 장소는 후원으로 결정되었다.

“초대장은 누구에게 보내지? 수도에 있는 귀족 가문에 전부 보내야 하나?”

펜으로 종이를 끼적이던 니나이나가 문득 고개를 들고 질문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저는 각자 두세 명 정도 초대장을 보내는 게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해요.”

“너무 많으면 어지러울 것 같아.”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아이들도 동의했기에, 학예회는 극소수의 손님만을 초대해 진행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우리 의상도 맞춰 입는 게 어떨까?”

그때, 니콜라스가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이것도 좋은 생각이었다.

“겨울에 맞게 흰색이 좋을 것 같아, 오라버니.”

니나이나가 의견을 냈다.

흰색으로 모두 다 함께 맞춰 입으면 사랑스러운 눈사람들이 모인 것처럼 보일 것이다.

다른 의견이 나오지 않아, 니나이나의 말대로 학예회 복장은 ‘흰색 옷’으로 결정되었다.

‘좋아!’

마침 사 놓고 입지 못했던 흰색 드레스와 겨울 망토 세트가 있었는데, 이번 기회에 입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앨리스가 꽤나 깊은 고민에 빠져 있는 얼굴을 한 게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앨리스는 가족들을 별로 초대하고 싶지 않을 텐데.’

그렇다고 요정들을 초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앨리스 혼자서만 친구나 가족이 아닌 다른 존재를 데려오는 셈이니까.

‘어쩌지?’

미처 생각하지 못한 문제였다.

나는 당황했다.

아직 다른 아이들은 그런 앨리스를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이따가 앨리스와 대화를 해봐야겠다.’

모두가 즐겁게 여는 학예회에서 앨리스 혼자 마음이 불편하다면 안 될 일이었다.

나는 방법을 찾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수업이 없는 자유 시간에 우리는 각자 연습을 시작했다.

마야는 책상에서 제가 쓴 시들을 꺼내보며 무엇을 낭송해야 할지 고르고 있었다.

앨리스와 니콜라스는 피아노가 있는 방으로 함께 향했다.

그리고 나머지 우리 넷은…….

“내가 ‘도, 레’를 맡고 싶은데.”

“어, 전하. 저도 ‘레’가 좋은데요?”

“뭐어?”

유치하게도, 각자 어떤 음을 맡을지를 두고 옥신각신하고 있었다.

물론 니나이나와 세드릭이.

“다들 왜 그러세요. 가위바위보로 공평하게 정해요, 우리.”

나야 뭐 뭘 맡아도 별 상관 없었기에, 명쾌하게 둘 사이를 중재했다.

잠시 후, 각자의 핸드벨 음까지 정한 우리는 가까스로 연습에 들어갔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아, 미안. 내 차례였네?”

악보를 제대로 보지 못한 것인지, 자꾸만 세드릭이 한 박자씩 늦거나 너무 빠르게 벨을 흔드는 것이었다.

‘어떡하지. 세드릭 박치였나 봐…….’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다시 곡을 연주했지만, 번번이 세드릭의 파트에서 실수가 생겼다.

“일단 잠깐 쉬고 해요!”

다른 아이들이 지친 게 보였다.

나는 휴식 시간을 외쳤다.

니나이나와 제이크는 힘이 들었는지 과자와 음료수를 먹으며 의자에 앉아 쉬고 있었다.

나는 그 틈을 타 세드릭에게 다가갔다.

“……아, 왜 자꾸 안 돼.”

세드릭은 평소와 다르게 잔뜩 의기소침해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채 악보를 보며 혼자서 핸드벨을 흔들고 있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런 세드릭의 곁에 털썩 앉았다.

“뭐야, 너?”

세드릭이 당황하며 나를 보았다.

평소에는 이런 기척쯤은 금방 알아채는 세드릭인데, 얼마나 악보에 집중하고 있었던 건지 눈치도 못 채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조심스레 질문했다.

“세드릭 님, 핸드벨이 어렵다면 다른 걸 공연하는 건 어때요?”

“뭐?”

세드릭은 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일순간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내가 너무 못해서 그래?”

“아뇨. 힘들어 보여서요.”

평소 체력이 훨씬 더 많이 필요한 검술 훈련도 너끈히 해내는 세드릭이었지만, 지금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진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하지만 핸드벨 연주는 4명이 필요하잖아. 나 없으면 안 되는 거 아냐?”

세드릭의 질문에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세드릭 대신 분신 인형과 함께할까…….’

하지만 차마 말하지는 못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세드릭은 핸드벨 연주를 꼭 해내고 싶은 모양이니까.

“……난 이걸 꼭 해내고 말겠어. 하다 보면 잘 되겠지.”

뚝심 있는 투로 중얼거리는 세드릭이었다.

하지만 그런 다짐과는 다르게 여전히 박자는 엇나가기만 했다.

“아, 젠장. 항상 조금씩 늦잖아. 왜지?”

나는 그런 세드릭을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 도움을 줘보기로 했다.

참고로, 세드릭은 혼자서 녹음된 음악을 들으며 그에 맞춰 연습하는 중이었다.

자세히 지켜보니, 세드릭은 음악보다는 악보에 더 집중하고 있는 것 같았다.

놓치지 않으려 꽉 쥐고 있는 핸드벨의 손잡이가 부르르 떨렸다.

나는 세드릭의 시선이 닿는 곳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악보에는 세드릭이 삐뚤빼뚤하게 동그라미를 쳐놓은 곳이 여러 개였다.

세드릭이 담당하는 ‘미, 파’였다.

‘알아냈다!’

잠시 후, 나는 세드릭이 어째서 매번 박자를 놓치는지 알아차렸다.

세드릭은 노래를 들으며 언제 자신의 차례가 오는지 기다렸다 연주하는 게 아니었다.

제가 담당하는 음이 노래에서 나오면 그제야 재빠르게 벨을 흔드는 것이었다.

‘그러니 늦을 수밖에. 아무리 세드릭이 반사신경이 빠르다고 해도 말이지.’

나는 세드릭에게 다가가 말했다.

“세드릭 님, 이걸 검술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뭐? 검술과 이게 무슨 상관인데?”

세드릭이 눈을 가늘게 뜨며 되물었다.

그러자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적이 만약 검으로 찌르려 들면 어떡할 거예요?”

“뭐 그렇게 당연한 걸 물어봐? 당연히 막아내야지. 방패로든 검으로든.”

“맞아요, 바로 그거예요!”

기쁘게 외치는 나를 세드릭은 ‘얜 뭐지’ 하는 미심쩍은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핸드벨 연주도 비슷해요. ‘위험해!’ 하는 외침을 듣고 나면 이미 늦어버린 거라고요. 상대방이 검을 휘두르려고 할 때, 미리 그다음에 올 공격을 생각하면서 검을 맞대야 해요.”

“……!”

검술로 설명하니, 세드릭은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네 말은, 미리 다른 사람이 연주하는 걸 들으면서 준비하고 있다가 차례가 되면 벨을 흔들라는 거지?”

“바로 그거예요!”

내 칭찬에, 세드릭은 헤벌쭉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가 정신이 든 모양인지 다시 무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알았어. 해볼게.”

“좋아요. 노래 틀어드릴게요.”

나는 녹음석 레코드의 버튼을 꾹 눌렀다.

노래가 재생되고, 세드릭은 아까보다 덜 긴장한 얼굴로 악보 앞에 섰다.

“성공했어!”

세드릭은 1절 연주가 끝난 뒤 내게 달려와 외쳤다.

“어, 어…….”

“역시 에미르 넌 정말 똑똑해!”

아니, 웬일로 세드릭이 칭찬을 다 해주는 걸까?

그래도 뭐, 똑똑하다는 말을 들으니 나쁘지 않은 기분이었다.

“그럼 우리 다시 함께 연습을 시작해 봐요.”

나는 휴식을 취하던 니나이나와 제이크를 데려와 다시 연습을 시작했다.

다행히도, 한 번 배운 걸 잊어버리지 않는 세드릭은 더 이상 실수를 저지르지 않았다.

‘박치까지는 아니었던 거야.’

나는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배움을 가르친(?) 세드릭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 * *

연습이 끝난 후, 나는 복도로 나왔다.

‘황자님과 앨리스, 연주 잘하고 있는지 궁금하네. 찾아가 봐야지.’

2층에 자리한 피아노가 있는 방이었다.

닫힌 문틈 사이로 은은한 바이올린과 피아노의 선율이 들려오고 있었다.

‘응? 그런데 뭔가 이상해.’

계속되는 연주에 들어갈 틈을 찾지 못하고 바깥에서 기웃대고만 있던 나는 무언가 수상한 점을 알아차렸다.

‘저 둘, 대화를 하나도 하지 않고 묵묵히 연주만 하고 있잖아?’

혹시 싸우기라도 한 걸까?

조심스레 문을 열었다.

“……!”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나는 놀랐다.

‘서로 등진 채 연주하고 있잖아? 게다가…….’

둘 다 꽤나 어색해 보이는 태도였다.

싸운 것 같지는 않은데 말이다.

‘어쩌면, 앨리스와 니콜라스 별로 친하지 않았던 걸까?’

그때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나를 뒤늦게서야 발견한 앨리스가 피아노에서 손을 떼고 일어섰다.

“어! 에미르 님!”

“앨리스! 음, 방해해서 미안해요. 뭐 하고 있는지 궁금해서 잠깐 와봤어요.”

내 말에 앨리스는 고개를 저으며 악보를 챙겼다.

“아뇨, 괜찮아요. 이제 막 연습을 그만하려고 했었거든요.”

그러고 보니 이제 유치원이 마칠 시간이었다.

짐을 정리하는 앨리스를 힐끗 보다가 니콜라스를 보았다. 그도 바이올린을 정리했다.

유치원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타려던 그때, 앨리스가 날 불러세웠다.

“저, 에미르 님.”

“응? 앨리스, 무슨 일이에요?”

“……그게, 실은.”

이미 다른 아이들의 마차는 다 떠나버리고 없는 공터를 살며시 둘러본 앨리스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오늘 제 생일이에요.”

“헉, 세상에!”

앨리스의 깜짝 고백에 나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리고 놀랐다.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을 텐데!’

지난번 세드릭의 생일이 떠올랐다.

그때도 당일에 알게 되어서, 선물을 챙겨주지 못했던 것이 생각난다.

나는 급하게 주머니와 가방을 뒤져보았지만, 애석하게도 돈은 단 한 푼도 나오지 않았다.

‘이래서야 상점가에 들러서 선물을 사주지도 못할 거야.’

하필이면 오늘은 유모가 다른 일로 바빠서 마부 혼자 나를 데리러 왔다.

‘음, 마부에게 돈을 빌려야 하는 건가.’

그때 앨리스가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같이 요정의 섬에 가지 않으실래요?”

“네?”

하지만 이건 또 예상 못 한 말이었다.

요정의 섬이라고?

‘물론, 예전에 앨리스가 한 번쯤 우리 유치원 아이들을 모두 초대하고 싶다고 말을 하긴 했었지만…….’

요정들은 요정 소환사가 아닌 평범한 인간들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불가능한 일임을 뒤늦게 깨달았었다.

‘그런데 나와 함께 가겠다니!’

어쩌지, 그래도 되는 걸까?

어느새 나는 선물에 대한 것은 까맣게 잊어버리고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런 날 알아챈 앨리스가 입을 열었다.

“사실, 오늘 유치원이 끝나면 에이비시 님이 요정들과 함께 제 생일 파티를 열어주시기로 했었거든요. 그런데 이제 생각해 보니 혼자 가면 외로울 것 같아서…….”

그런 거라면 안 갈 수가 없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앨리스의 손을 잡았다.

“좋아요, 함께 가요.”

나는 마부에게 앨리스와 함께 놀겠다고 전해 달라 말한 뒤, 유치원 후원으로 향했다.

‘주변에 아무도 없지?’

사람들이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앨리스는 에이비시를 소환했다.

에이비시는 나를 보고 물었다.

“이 아이도 함께 갈 것이냐?”

“네, 에이비시 님.”

“흐음……. 그래, 좋다. 자, 가자꾸나.”

에이비시는 우리를 요정의 섬으로 옮겨 주었다.

그러자 이전 황궁에서처럼 몸이 두둥실 뜨는 것 같았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질끈 감았다.

“……!”

순간, 훅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

분명 제국은 추운 겨울이었는데, 얼굴에 닿아오는 바람은 산뜻하고 따뜻했다.

눈을 살며시 떠보니, 전혀 보지 못했던 놀라운 세상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숲인가? 아니, 이곳은 마을인가 봐. 요정 마을.’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는데, 앨리스는 이미 이곳에 여러 번 와서 익숙한 모양인지 내 손을 잡아끌었다.

“이리로 오세요, 에미르 님!”

“아…….”

앨리스에게 이끌려 가면서도 나는 쉴 틈 없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요정들이 사는 곳이라 그런지 인간의 손이 닿은 흔적은 단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평범한 숲은 절대로 아니었다.

인간이 만들어낸 건축물보다 아름다운 풍경이 자연과 함께 섞여 있었다.

“에미르 님, 신기하시죠? 실은 저도 몇 달 전 여기 처음 놀러 왔을 때 그랬어요. 세상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어요. 꿈속인 줄 알았다니까요.”

그렇게 말하면서 앨리스는 싱긋 웃었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이런 곳이 어떻게 인간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물론 알려지길 바라는 건 절대 아니었다.

그렇지만 요정과 교류할 수 있는 소환사들이 이야기를 전할 법도 한데 말이다.

“다른 요정 소환사들도 이곳에 방문하나요?”

내 질문에, 앨리스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말했다.

“에이비시 님 말로는, 요정 소환사라고 해서 무조건 다 이 섬에 올 수 있는 건 아니라고 하셨어요.”

“그럼요?”

“요정왕의 소환사. 그리고 그 소환사가 보증하는 소수의 사람…… 이라고 그러시더라고요.”

“……!”

“그러니까 에미르 님은 제가 보증하는 분이에요!”

앨리스는 믿음 가득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 * *

우리가 부지런히 걸어 도착한 곳은 요정의 마을 입구였다.

요정의 섬이라고 해서 전체가 모두 요정들이 거주하는 구역은 아니었고, 요정들은 섬 가장 중앙에서 주로 지낸다고 했다.

“오오, 에이비시 전하와 앨리스 님이 오셨다!”

나는 에이비시를 제외한 첫 번째 요정과 마주했다.

입구에서 팔랑팔랑 날아다니던 요정은 둘을 발견하고서 손바닥만 한 몸집에 맞지 않게 쩌렁쩌렁 소리쳤다.

“엥? 그런데 이 인간 아이는 누구?”

그러던 요정은 에이비시와 앨리스 뒤에 서 있던 나를 발견하고 눈을 가늘게 떴다.

밝고 장난기 넘치던 방금까지의 표정과 다르게 경계심이 잔뜩한 얼굴이었다.

“앨리스가 데려온 인간 친구다.”

“아하! 그렇군요, 전하. 그럼 이제 파티장으로 모시겠습니다.”

다행히도 에이비시가 나에 대한 설명을 해주자, 곧바로 요정은 경계심을 풀고 우리를 마을 안으로 안내했다.

“……!”

마을에서, 정확히는 앨리스를 위한 생일 파티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다른 요정들이 나를 보고 놀랐다.

“저 인간은 누구?”

“인간이라고? 소환사가 아니라?”

“뭐지?”

하지만 방금 입구에서 만났던 요정이 촉새처럼 돌아다니며 이야기를 퍼뜨려 주어서 금방 분위기는 진정되었다.

“아~ 다름이 아니라~ 전하의 소환사가 데려온 인간이래.”

“너무 걱정 마~ 인간이야, 그냥 어린 인간! 뭐, 소환사님이 데려온 인간이니 믿을 만하겠지~”

“소환사님 친구래~ 응? 이름은 모르지만 아무튼 친구~”

“…….”

그럼에도 요정들의 무수한 시선이 내게 닿아오는 건 여전해서, 어쩐지 나는 조금 낯이 뜨거워졌다.

‘이렇게 집중을 받을 줄은 몰랐는데!’

그때, 요정들이 다가와 내 곁에 서 있던 앨리스를 데려갔다.

“앨리스 님! 오늘의 주인공이시니, 예쁘게 꾸며 드릴게요. 이리 오세요.”

“맞아요~”

앨리스는 요정들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 내게 외쳤다.

“어, 금방 다녀올게요, 에미르 님!”

“네, 네……?”

갑작스레 앨리스마저도 사라져 버리니, 나는 얼떨결에 홀로 서 있었다.

‘뭘 어째야 돼?!’

마치 아는 사람 하나도 없는 축제에 온 것처럼 뻘쭘하고 어색해졌다.

앉아 있으려고 해봐도 이곳이 요정 마을이라 그런지 내게 맞는 크기의 의자는 없었다.

‘어, 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겠다…….’

괜스레 손가락만 꼼지락거리고 있을 때, 유독 호기심 넘쳐 보이는 몇몇 요정이 내게 다가왔다.

“흐음, 작은 인간이다.”

“인간, 네 이름이 뭐야?”

순간 성까지 다 붙여서 대답할까 싶다가, 어차피 요정들에게는 성이 의미 없다는 걸 깨닫고 말했다.

“으음, 저는 에미르라고 해요.”

“에미르! 인간 에미르구나.”

“네…….”

어쩐지 이름 앞에 ‘인간’이라고 붙으니 조금 어색했다.

“몇 살이야?”

“저는…… 6살이에요.”

여름에 생일이 지났으니 6살이었다.

그런데 내 대답을 들은 요정이 깜짝 놀랐다.

“뭐? 6살이 이렇게 엄청 크다고?”

“바보야, 인간이잖아.”

옆에 있던, 인간에 대해 조금 더 알고 있는 듯한 다른 요정이 팔뚝을 꾹 찌르며 첨언했다.

“그렇지만 나는 129살인데도 아직 이 인간 손바닥만 한데?”

요정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하는 말에 나는 깜짝 놀랐다.

아니, 129살이었다고?

‘역시 요정들은 인간과 달리 오래 사는구나. 게다가 겉모습도 하나도 나이 들지 않아 보여…….’

그때, 또 다른 요정이 내게 물었다.

“인간, 구경해 봐도 돼?”

“네? 저를요?”

이미 충분히 구경하고 있는 거 아니었나?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요정이 내 손에 쥐어진 가방을 가리켰다.

“너 말고 네 가방.”

“아하…….”

하긴, 요정들은 인간 물건이 생소할 테니 호기심을 가지는 것도 당연했다.

내가 요정의 섬이 신기한 것처럼, 비슷한 이유겠지.

“네, 구경하세요.”

“좋아!”

나는 깨끗한 나무 그루터기 위에 가방을 올려놓았다.

요정들은 앞다투어 가방 근처로 모였다.

어느새 구경꾼들이 더 늘어 열 명도 더 넘는 요정에게 둘러싸이게 되었다.

“끙, 안 열려!”

“도와줘, 인간 에미르!”

그런데 아무래도 잠금 장치가 조금 어렵게 되어 있어서인지 열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나는 다가가 가방을 열어주었다.

“우와, 이건 뭐야? 손수건인가?”

“그런 것 같아. 우리 집 거실 카펫만 하네.”

“듣기로 인간들은 목화솜이나 누에고치 같은 걸로 천을 만든다지? 에헴! 책에서 봤어.”

내 손수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세 명이서 토론하는 요정들이었다.

한편, 작은 크기의 물병을 앞에 두고 고개를 갸웃거리는 요정이 있었다.

“이건 뭐야?”

“그건 물병이에요.”

“인간은 물을 들고 다니면서 마시는구나! 거참, 신기하네. 인간들이 마시는 물도 이 섬에 있는 물과 비슷하나?”

궁금해 보이는 표정이었기에, 나는 물병 뚜껑을 열어 물을 조금 따랐다.

“궁금하면 마셔도 돼요.”

“응, 좋아!”

요정은 컵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잠시 후 다시 고개를 든 그의 얼굴은 흠뻑 젖어 있었다.

“어푸푸, 실수로 네 물에 세수를 해버렸지 뭐야. 그보다 인간들이 마시는 물도 똑같네. 신기해. 잘 마셨어.”

한편, 어느새 요정들의 관심사는 내가 연습하다 말고 가져온 핸드벨에 가 있었다.

“이건 또 뭐야, 신기한데? 방울꽃 소리가 나잖아.”

“인간들은 이런 걸로 뭘 해?”

“아, 이건 핸드벨이라는 악기예요.”

딸랑딸랑.

열심히 요정 셋이서 힘을 합쳐 핸드벨 하나를 열심히 흔들어 보더니, 이내 지쳤는지 내려놓고 내게 다가와 물었다.

“나 저거 마음에 들어.”

“……?”

“우리 물물교환 할래?”

요정과의 물물교환이라니!

순간 혹했지만, 중요한 사실을 상기했다.

‘하지만 저 핸드벨은 유치원에서 가져온 건데. 학예회 연습도 해야 하고.’

그때 상대 요정이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 내 앞에 내려놓았다.

“이 물건이랑 바꾸자.”

“이게 뭐예요?”

작은 병 안, 유리구슬처럼 생긴 동그랗고 투명한 구슬이 수십 개 들어 있었다.

한 알이 모래알보다 조금 더 큰 크기였다.

“이건 옹달샘 근처 꽃잎에서 주워 온 새벽이슬들이야.”

“이슬이라고요? 하지만 구슬처럼 생겼는걸요?”

내 물음에 요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이슬을 굳혀 만든 구슬이거든. 평범한 이슬은 아니야. 목마를 때 입안에 구슬을 넣으면 갈증이 사라져.”

“우와, 정말 신기한데요? 으음…….”

나는 고민했다.

가방 안에는 딱히 교환할 만한 다른 물건도 없었고, 무엇보다 저 요정은 핸드벨만을 원하고 있었다.

‘저런 이슬 구슬은 대륙에서는 구할 수가 없겠지. 요정의 섬에서만 나는 거니까.’

결국 나는 거래하기로 마음먹었다.

똑같은 핸드벨을 구해서 유치원에 가져다 놓으면 되겠지.

“좋아요, 우리 교환해요.”

“그래! 정말 잘 생각했어!”

요정이 기뻐하며 내게 구슬 병을 건넸다.

그리고 내게서 핸드벨을 받아 가져가는데, 어쩐지 힘겨워 보였다.

“나 좀 도와줘!”

그는 다른 요정에게 도움을 청했다.

차라리 그냥 내가 도와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제가 집까지 가져다 드릴게요.”

“앗, 정말? 그래 줄 거야? 나야 고맙지! 그런데 우리 집에 인간이 오는 건 처음이야.”

요정이 내게 부탁했다.

“그러니 부탁인데, 실수로 내 집을 밟지는 말아줘. 콧김을 세게 내뿜기만 해도 우리 집 살림살이가 날아갈 거야.”

“음, 네. 조심할게요.”

“그럼 날 따라와!”

나는 요정을 따라 바쁘게 뛰어갔다.

혹시라도 근처에서 누워 쉬고 있는 요정을 밟을까, 부지런히 주변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집까지 물건을 날라 준 나는 요정에게 감사 인사를 들었다.

“정말 고마워! 인간은 아이라도 힘이 엄청 세구나.”

요정은 내 핸드벨을 제집 마당에 두고 장식용으로 쓸 모양이었다.

미니어처 크기의 집을 구경하던 나는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응? 앨리스 목소리잖아?”

아무래도 앨리스가 막 준비를 끝낸 모양이다.

나는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갔다.

“헉, 앨리스!”

그리고 몹시 아름답고 화려하게 치장한 앨리스를 보고 감탄했다.

분명 같은 옷인데, 요정의 가루와 황금빛의 관을 쓰고 있으니 꼭 공주님 같았다.

“어, 에미르 님!”

앨리스가 나를 발견하고 반가워했다.

나는 그런 앨리스에게 다가가려 했다.

하지만…….

“자, 이제 약속한 대로 에미르 님도 부탁드려요!”

“……?”

갑작스러운 앨리스의 외침과 동시에 나를 향해 빠르게 날아오는 요정 몇 명을 보고 나는 당황해 뒷걸음질 쳤다.

‘왜 이래! 나를 요정들에게 부탁한다는 건 또 뭐지?’

그리고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나는 숲속 그루터기에 앉아 요정들의 손길을 받으며 단장하는 중이었다.

“……?”

정말 뭐지, 이 상황?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한 요정이 유리 거울을 가져와 내 얼굴을 비춰주었다.

“어떠세요? 앨리스 님과 똑같은 넝쿨로 만든 관이랍니다. 황금 넝쿨의 줄기와 잎사귀가 아름답죠?”

금속이 아니라 넝쿨이었구나.

정말 예쁘다…… 가 아니라! 왜 나를 앨리스처럼 꾸며 주고 있는 거야?

나는 요정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질문했다.

“……으음, 저기 요정님들. 그런데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아요. 오늘 생일인 건 앨리스지 제가 아닌걸요?”

“앨리스 님이 친구분도 똑같이 꾸며달라 부탁하셨으니까요. 그보다 고개 숙이지 말고 턱 좀 들어보세요.”

“……네.”

요정들이 너무 바쁘고 열심히라, 결국 나는 입을 다문 채 얌전히 단장을 받았다.

이후, 나를 기다리고 있던 앨리스와 함께 파티장으로 향했다.

“생일을 축하합니다, 앨리스 님!”

“앞으로도 우리 전하의 훌륭한 소환사로서 힘써 주세요!”

요정들이 앨리스를 향해 환호하는 걸 들으며, 나는 테이블 위를 살폈다.

잘 꾸며진 접시 위에 올라온 음식들은 대부분 야채와 과일 종류였다.

‘하긴, 요정들은 인간처럼 요리해 먹거나 고기를 먹지는 않을 테니까. 그런데 저건 뭐지?’

내 시선이 의아함을 품고 한곳에 머물렀다.

중앙에 놓여 있는 커다란 케이크에서 다른 음식들과는 다르게 인간 세상의 세속적인 기운이 물씬 났기 때문이다.

나는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근처를 날아다니던 요정에게 물었다.

“저 케이크, 이곳에서 만든 건가요?”

하지만 대답은 그 요정이 아닌 어느새 불쑥 끼어든 요정왕 에이비시가 했다.

“그 케이크는 내가 가게에서 사 온 것이다. 인간들이 만든 케이크지.”

“……!”

나는 의문에 빠졌다.

에이비시는 요정인데, 어떻게 케이크를 사 온 것일까?

‘이 세상에 요정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지만, 소환사가 아닌 사람들은 살면서 요정을 볼 일이 없어. 그런 세상에 요정이 나타난다면 이미 한바탕 소문이 났을 텐데?’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종종 앨리스는 ‘에이비시가 옷이나 물건을 사서 가져다주었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도대체 어떻게 한 걸까?

‘앨리스 말고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기라도 한 걸까?’

그런 내 의문이 티가 난 모양인지 에이비시가 답했다.

“요정왕은 인간의 형태로 모습을 바꿀 수 있지.”

“그게 정말인가요?”

처음 들어보는 사실에 눈을 크게 뜨자, 에이비시가 제 손가락을 튕겼다.

퍼엉.

작은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흰 정장 차림의 노신사였다.

“우와, 에이비시 님이 변신하신 모습인가요?”

“그렇단다.”

에이비시가 자랑스러운 얼굴로 턱을 치켜들고 대답했다.

‘어쩐지, 그래서 앨리스에게 에이비시가 이런저런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거구나.’

나는 내내 의문이었던 사실의 답을 알고 상쾌한 기분을 느꼈다.

* * *

파티는 흥겹고 성대했다.

한바탕 재미있는 시간이 지나고, 앨리스와 나는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이제 막 해가 질 시간이네.’

주머니에서 시계를 꺼내 보고 생각했다.

분명 한나절 넘게 실컷 논 것 같은데, 아무래도 요정의 섬은 시간이 조금 다르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겠다.

‘아차, 그러고 보니……!’

그때 나는 문득 아주 중요한 일을 기억해 냈다.

그러니까, 앨리스에게 초대장에 관한 것을 물어보는 것이었다.

‘지금 말해야겠지.’

나는 망설이다, 앨리스에게 학예회에 누굴 초대할 것이냐고 질문했다.

“아, 초대…….”

앨리스는 자신도 잊고 있었던 것이 뒤늦게서야 떠올랐는지 갑작스레 표정이 어두워졌다.

“사실 걱정이 돼요. 어차피 초대장을 보내도 버려질 것 같아서…….”

주어는 생략되어 있었지만, 공작 부부 내외라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았다.

그때 갑작스레 우리의 대화에 에이비시가 끼어들었다.

“무슨 초대장을 말하는 것이냐? 학예회라는 건 또 뭐고? 또 무슨 인간들의 연회가 열린다더냐?”

“아, 에이비시 님…….”

앨리스는 머뭇거리며 에이비시에게 사정을 이야기했다.

묵묵히 앨리스가 하는 말을 듣던 에이비시는 되물었다.

“뭘 그런 걸 고민하는 거냐? 당연히 이 요정왕인 내게 부탁하지 않고. 내가 인간의 모습을 하고 가면 되는 일이 아니겠어?”

앨리스와 나. 우리는 동시에 눈을 크게 떴다.

이 방법이 있었구나!

인간화한 에이비시의 모습은 중후하고 위엄 있어 보이는 노신사이니, 가족을 대신해 참석한 믿음직한 대리인이라고 말하면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애초에 로즈 공작가가 앨리스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는 사실은 암암리에 많은 이가 알고 있을 테니까. 그래서 대리인을 보낸 거라고 생각하겠지…….’

방법을 찾은 덕분에 매우 기뻐하는 앨리스의 옆모습을 보며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야. 앨리스에게도 초대장을 보낼 사람…… 아니, 요정이 생겨서.’

앨리스가 주머니에서 꺼낸 초대장을 건네받은 에이비시가 아닌 척 기뻐하고 있었다.

* * *

요정의 섬을 떠나 다시 돌아온 나는 이것저것 할 일을 시작했다.

‘먼저, 물물교환 해버린 핸드벨을 다시 사고.’

핸드벨을 샀지만 아직 내 용돈은 충분히 남아 있었다.

나는 그 돈으로 앨리스의 생일 선물을 사기로 했다.

‘하루 지나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요정의 섬에 초대해 준 답례를 해야지.’

마침 아주 좋은 생각이 있었다.

‘앨리스에게는 딱 맞는 흰색 드레스와 외투가 없을 테니까.’

학예회에 맞춰 입기로 한 흰색 옷.

그걸 선물로 주는 것이다.

‘에이비시 님이 앨리스에게 사주기 전에 내가 먼저 발 빠르게 선물하고 말겠어!’

그 생각으로 나는 유모를 대동해 수도의 유명 상점가로 향했다.

귀족들은 맞춤옷을 입는 게 보통이지만, 가문의 힘을 빌릴 수 없는 앨리스는 아무래도 그런 가게를 예약하는 게 힘들 것이다.

물론 나 역시도 이번엔 맞춤복 가게에 갈 생각이 없었다.

맞춤옷을 위해서는 반드시 옷을 입을 당사자가 직접 가 치수를 재야 했기 때문이다.

‘기성복 가게 중 가장 좋은 곳에 가는 거야!’

얼마 전 우연히 앨리스가 사물함에 가져다 놓은 여분의 옷에 달린 상표를 본 적이 있었다.

그러니 어떤 치수를 사야 하는지는 알았다.

‘문제는 앨리스가 어떤 옷을 좋아하느냐인데.’

앨리스는 에이비시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지만, 적극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들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단지 에이비시가 구해다 주는 것을 곧이곧대로 쓸 뿐이었다.

‘아무래도 에이비시 님은 인간의 취향을 잘 모르니까, 가게에 있는 대로 싹쓸이해 사오시는 모양이지만.’

다행히도 나는 앨리스와 또래이기 때문에, 우리 나이 대의 아이들이 무얼 좋아하는지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럼 디자인은 이걸로 하고, 원단은…… 앨리스는 피부가 예민하고 약한 편이니까 엄청 보드라운 걸로 해야겠다.’

마침내 매장에서 나오는 나와 유모와 마부의 손엔 잔뜩 물건들이 들려 있었다.

유모는 고개를 절레절레하며 말했다.

“아가씨 옷은 사라고 해도 안 사시더니, 정작 친구분 옷만 이렇게 많이 사시는 걸 보면 이 유모는 이해할 수가 없네요.”

“친한 친구니까 그렇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제 곧 학예회가 일주일도 남지 않았는데, 이 옷 중 하나를 입을 앨리스가 궁금해졌다.

‘좋아하려나? 마음에 들어 할지 걱정이네.’

다행히도 내 걱정과 달리, 앨리스는 내가 건넨 선물을 매우 마음에 들어 했다.

“이렇게 많은 옷을 다 제게 주시겠다니, 정말 감사해요! 저 에미르 님 덕분에 너무 행복해졌어요.”

유치원 뒤뜰에서 건넨 선물에,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나를 바라보며 들뜬 목소리로 감사 인사를 하는 앨리스였다.

덩달아 나까지 기분이 좋아졌다.

“그런데 너무 많아요. 이 중에 어떤 걸 학예회에 입고 가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떡하죠?”

앨리스의 고민에 나는 조심스레 의견을 내보았다.

“이 블라우스와 스커트, 코트를 입는 게 어때요? 귀엽고 따뜻하게 생겼잖아요. 무엇보다 앨리스에게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요.”

내 말에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에미르 님이 골라 주신 대로 입을게요.”

* * *

시간은 흘러 어느새 학예회 당일이 되었다.

아이들은 아침 일찍부터 유치원에 도착해서 각자 열심히 마지막 연습에 매진했다.

단, 세드릭만 빼고.

“앨리스, 세드릭 님과 같은 마차를 타고 온 것 아니었어요?”

하필이면 학예회 당일 지각이라니, 곤란했다.

내 질문에 앨리스도 잘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항상 오던 시간에 마차가 오지 않아서, 전 그냥 에이비시 님의 힘을 빌려 왔어요.”

“아하…….”

나는 말끝을 흐리며 걱정했다.

이대로 학예회 시작까지 오지 않으면 어쩌지?

그때였다. 다행스럽게도 창밖으로 급하게 달려오는 마차 소리가 들려왔다.

“……!”

“세드릭 소공자가 왔나 봐!”

아닌 척해도 다른 아이들도 세드릭의 부재가 신경 쓰였던 모양이다.

우리 핸드벨 연주팀은 모두 벌떡 일어나 유치원 밖으로 향했다.

“헉, 헉. 미안. 어제 늦게까지 핸드벨 연습하다가 그만 늦잠 잤지 뭐야?”

세드릭은 급하게 준비한 기색이 역력한 차림새로 마차에서 뛰어내려 달려왔다.

‘그 와중에도 용케 흰색 옷은 챙겨입었어. 다행이네.’

셔츠 단추가 한 칸씩 밀려 잠기고, 바지 끝이 구겨져 있긴 했지만 그래도 약속대로 흰색 정장 차림이었다.

지각생 세드릭과 함께 우리는 다시 유치원 안으로 들어왔다.

모두 새하얀 옷을 입고 앉아 있으니 꼭 눈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 같았다.

그때였다.

겨우 자리에 앉아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세드릭이 경악 섞인 비명을 질렀다.

“으악! 핸드벨을 안 가져왔어!”

“세드릭 님, 뭐라고요?”

“저택에 핸드벨을 두고 온 거야?”

“저런.”

갑작스러운 상황에 우리 핸드벨 연주팀은 당황했다.

세드릭, 정말 급하게 일어나 몸만 챙겨서 온 모양이었다.

‘어쩌지…… 아! 그러고 보니, 내가 새로 산 핸드벨이 있잖아?’

우리가 원래 쓰던 핸드벨은 유치원에 딱 한 세트 있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지난번 요정의 섬에 갔을 때 핸드벨을 물물교환 하고 온 관계로 내게는 새로 산 핸드벨 세트가 있었다.

‘혹시 몰라 내 것 말고도 세트를 다 가져오길 잘했어.’

나는 가방에서 세드릭이 담당하는 ‘미, 파’를 골라 내밀었다.

“어라, 에미르. 어떻게 핸드벨을 세트로 갖고 있는 거냐?”

“새로 샀어요. 오늘만 특별히 빌려드릴게요.”

“……그래? 잘 쓸게, 고마워.”

웬일로 세드릭이 쑥스러워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다 했다.

핸드벨을 건넨 후, 나는 시선을 돌려 앨리스와 니콜라스를 보았다.

처음엔 꽤나 어색한 사이였던 둘은 어느새 좋은 연주회 파트너가 되어 함께 연습하고 있었다.

‘다행이야. 역시 원작 남주와 여주니까, 처음에는 조금 어색해도 결국 잘 맞게 된 거겠지.’

한편 혼자 음악이 아닌 다른 것을 선택한 마야는 제자리에 가만히 앉아 종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스무 줄이나 되는 시가 쓰인 종이였다.

문득 궁금한 점이 생긴 나는 마야에게 다가가 질문했다.

“소공자님, 설마 이 시를 다 외우신 거예요?”

“응? 물론이지.”

마야는 내 물음에 잠시 당황하는가 싶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와, 대단해요!”

“……이 정도 가지고 뭘. 그러는 너도 악보를 다 외운 것 같던데.”

마야의 말에 이번엔 내가 놀랐다.

“헉, 어떻게 알았어요? 말한 적 없는데.”

“그야, 아까 핸드벨 연습을 구경했으니까. 혼자서만 악보를 안 보고도 잘 연주하던데? 너만 보였어.”

마야의 칭찬에, 나는 배시시 미소 지었다.

“잘 연주한다니, 감사해요.”

“그보다 에미르. 혹시 연습 다 해서 시간이 남는 거면, 나 좀 도와주지 않을래?”

“네? 어떤 도움이요?”

우리 핸드벨 연주팀은 연습 시작 전 잠깐 5분 휴식을 하기로 했다.

오래 걸리지 않는 부탁이라면 들어줄 생각이 있었다.

“내 시가 적힌 종이를 보면서, 내가 잘 읊고 있는지 확인해 줘.”

혼자 연습하다 보니 틀리고도 그냥 넘어가는 부분이 있을까 봐 걱정된다고 했다.

“아, 그런 거라면 지금 바로 할게요.”

나는 마야로부터 종이를 받아 들었다.

마야가 목소리를 살짝 가다듬더니 이내 시 낭송을 시작했다.

‘마야, 대단하다.

분명 평소에는 제국어 발음이 조금 어색한 부분이 있었는데, 시를 외울 때는 또박또박하고 부드러운 발음이야.’

정말 열심히 연습하고 외운 티가 났다.

나는 고개를 끄덕거리다가, 이내 실수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마야가 당황했다.

“나 틀렸어?”

“음, 여기 맨 끝 문장이요. ‘꿋꿋하게’를 ‘꿀꿀하게’로 잘못 말했어요.”

간혹 아이들이 잘 실수하고는 하는 단어였다.

내 지적에 마야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아,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하지만 다른 부분은 하나 틀린 것 없이 아주 잘 외웠는걸요? 정말 잘하셨어요.”

내 칭찬에 마야가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고마워.”

“뭘요. 아, 마침 연습 시작할 시간이에요. 저는 이제 가볼게요!”

“그래, 열심히 해.”

마야가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그런데 핸드벨 연주팀으로 돌아가자마자 또다시 문제가 일어났다.

“……내 악보! 어쩌지?”

니나이나가 그만 목을 축이려 차를 마시다가 실수로 잔을 엎어 악보가 다 젖어버린 것이었다.

‘이런, 악보는 딱 4개밖에 없는데!’

이 세계에는 복사기나 인쇄기 같은 것이 없다.

때문에 악보를 새로 만들려면 일일이 손으로 베껴야 한다.

‘하지만 이제 정말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걸?’

악보를 베껴 그릴 때가 아니었다.

결국 나는 내 악보를 니나이나에게 건넸다.

“에미르? 이걸 왜 나한테 주는 거야?”

“저는 악보를 다 외웠거든요. 그러니 전하께 드릴게요.”

“뭐? 다 외웠다고? 대단하다! 아니, 그보다 고마워.”

니나이나는 허둥지둥 악보를 받아 들었다.

그렇게 겨우 우리는 4명이서 함께하는 최종 연습을 시작할 수 있었다.

* * *

한 시간 후.

우리는 창밖을 내다보며, 초대장을 보낸 손님들이 하나둘씩 오는 것을 구경했다.

“저기 마차가 오고 있어! 오라버니. 아바마마와 어마마마가 타고 계신 마차야!”

니나이나가 들뜬 목소리로 외쳤다.

정말로 황실의 표식이 걸린 마차가 제일 먼저 유치원 내부로 들어오고 있었다.

물론 그 마차 주변을 호위하는 수많은 기마병도 함께였다.

“뭐, 뭐야. 나는 분명 형님들만 초대했는데, 왜 어머니와 아버지도 같이 오셨지?”

세드릭도 제 가문의 마차를 발견하고서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워낙 바쁘신 분들이라 당연히 일정이 안 될 줄 알고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나 보다.

그런데 어떻게 시간을 내서 세드릭을 보러 오신 모양이었다.

‘우리 엄마, 아빠도 저기 오고 계셔!’

마침내 익숙한 새런 가문의 마차도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보이지도 않을 창문 너머로 손을 마구 흔들었다.

이윽고 제이크의 부모님과 마야의 아버지도 유치원에 도착하셨다.

이제 손님 중 오지 않은 이는 단 한 명.

‘에이비시 요정왕님.’

혹시 이런 행사에 어떤 차림새로 와야 할지 몰라 늦는 것일까?

다른 아이들이 가족들의 등장에 환호하는 것을 옆에서 말없이 지켜보고만 있는 앨리스였다.

“늦으시네…….”

앨리스가 아주 작게 혼잣말했다.

그때였다.

“저 마차는?”

웬 고풍스럽고 신비로운 디자인의 흰색 마차가 스르륵 미끄러져 들어왔다.

마차를 이끄는 말도 신비롭고 늠름한 백마 두 마리였다.

그 마차에서 내린 것은, 다름 아닌 인간의 모습으로 변신한 요정왕이었다.

흰색 마차만으로도 충분히 시선을 끄는데,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색 정장을 차려입고 등장하니 인간이 아닌 듯한 신비함이 느껴졌다.

‘뭐, 인간이 아닌 건 맞지……. 요정이니까.’

그리고 그의 품엔 커다랗고 화사한 꽃다발에 떡하니 들려 있었다.

“에이비시 님이다!”

가만히 앉아 있던 앨리스가 벌떡 일어섰다.

앨리스의 얼굴엔 어느새 함박웃음이 가득했다.

* * *

후원은 이미 손님들로 가득했다.

각자의 가족들과 그들을 호위하는 기사들.

그리고 시중인들까지.

오래간만에 유치원이 큰 행사로 북적이는 느낌이었다.

“우와, 날씨 정말 좋다!”

심지어 날씨마저 우리의 학예회를 빛내주는 듯했다.

이른 아침만 해도 눈발이 조금씩 날리던 추운 겨울 날씨였는데, 우리가 막 공연을 펼칠 시간이 되자 어느새 하늘이 맑게 개고 따뜻한 햇볕이 잔뜩 내리쬐는 것이었다.

나는 무대에 올라서서 우리 부모님이 계신 쪽을 바라보았다.

옆엔 유모도 함께였다.

‘우리 딸!’

‘멋지다!’

엄마 아빠는 입 모양으로 나를 응원해 주셨다.

아무래도 황제 내외를 비롯해 다른 분들도 있는 자리다 보니 대놓고 큰 목소리로 외치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응원이 되었다.

‘열심히 해야지!’

나는 자신감을 잔뜩 담아 부모님을 향해 찡긋 윙크를 해 보였다.

그러자 일순간 엄마, 아빠, 그리고 유모와 우리 가문의 기사까지 총 5명이 눈을 질끈 감고 가슴을 부여잡았다.

‘응? 왜들 저러시지?’

아무튼 곧 우리의 공연이 시작할 차례였다.

핸드벨 연주가 제일 먼저였으니까.

“우리 잘해보자!”

무대에 올라서기 전, 니나이나와 제이크, 그리고 세드릭과 함께 파이팅을 외쳤다.

보면대 위에는 악보 대신 빈 종이만을 올려놓았지만 나는 그 누구보다 이 연주에 자신 있었다.

‘으음?’

그런데 짧은 새 우리 가족들이 울상을 짓고 있는 게 보였다.

귀를 기울여 보니, 미처 마법 사진기를 챙겨오는 것을 깜빡했다는 모양이다.

하지만 잠시 후, 바로 근처에 있던 제이크의 부모님이 우리 부모님께 무언가를 건넸다.

‘영상석!’

작게 들려오는 대화를 보아, 아마 빌려준다는 것 같았다.

영상석을 건네받은 엄마와 아빠는 나를 향해 한껏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침내 핸드벨 연주가 시작되었다.

‘으, 긴장돼.’

많은 이의 앞에서 공연한다는 건 떨리면서도 설레는 일이었다.

나는 연주에 집중했다.

다행스럽게도 핸드벨을 꼭 쥔 두 손은 한 번도 실수하지 않았다.

연주가 끝나자, 수많은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손님들뿐만 아니라 에드몽 부인을 비롯해 유치원의 기사들도 우리를 향해 박수 쳐주었다.

‘헤헤, 뿌듯하다.’

별것도 아니지만 해냈다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무대에서 내려왔다.

‘잘했다, 에미르!’

‘최고였어!’

부모님께서는 나를 향해 엄지를 척 올려 보이며 입 모양으로 외쳐 주셨다.

나는 마주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 황후 폐하께서도 흐뭇한 표정으로 니나이나를 향해 미소를 보내셨다.

다른 아이들의 손님들도 마찬가지였다.

무대 뒤에 모인 우리는, 핸드벨을 내려놓고 앉아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공연이 끝나고 나니 긴장이 스르르 풀리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미리 준비된 시원한 장미차 한 잔씩을 마시고 약속이라도 한 듯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말 다행이야. 실수라도 할까 봐 걱정했는데 무사히 해냈어!”

니나이나가 내게 달려와 손을 맞잡고 외쳤다.

환한 웃음이 정말로 기뻐 보였다.

그때, 바로 맞은편에 앉아 시를 다시 한번 외우고 있던 마야가 고개를 들고 우리를 보았다.

“무대 뒤에서 기다리면서 들었는데, 정말 멋진 연주였어요.”

한편,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막 무대에서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가 들려왔다.

‘앗! 황자님과 앨리스의 연주가 시작했나 봐.’

우리는 얼른 자리에 앉아 연주를 감상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원작에서도 이런 비슷한 장면이 있었던 것 같아.’

문득 원작에서 니콜라스가 앨리스를 위해 바이올린을 연주해 주던 대목을 떠올리고서는 혼자 키득거렸다.

* * *

앨리스와 니콜라스의 연주도, 마야의 시 낭송도 모두 무사히 끝났다.

이제 손님들은 야외가 아닌 유치원 내부로 안내되었다.

평소 텅 비어 있던 복도 벽에는 우리가 1년 동안 공부하고 만들어낸 결과물들이 자랑스레 걸려 있었다.

“오, 니나이나. 이 그림은 네가 그린 것이니?”

“네, 맞아요. 어마마마.”

“정말 멋진 그림이구나. 마치 네 침실에 있는 그림만큼이나 말이지. 물론 그 그림은 에미르 영애가 그린 그림이지만.”

한편에서 들려오는 황후 폐하와 니나이나의 대화를 흘려 듣던 나는, 일순간 귀에 꽂힌 내 이름에 흠칫하고 놀랐다.

‘역시, 그 그림을 황후 폐하도 보셨구나.’

처음엔 내 그림이 모두에게 공개되는 게 부끄러웠는데,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런지 오히려 조금 자랑스럽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그때, 마침 내게로 엄마와 유모가 다가왔다.

“에미르, 한참 찾았잖니. 여기 있었구나.”

“엄마! 어, 아빠는 어디 가셨어요?”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다.

“그게, 네 영상이 찍힌 영상석을 작동하는 법을 모르겠다며 테이온 공작님께 갔단다. 아, 마침 저기 오는구나!”

엄마의 말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정말로 문가에서 들어오는 아빠가 보였다.

“에미르!”

“아빠!”

잠시 후, 아빠는 영상석을 켜서 내게 보여주셨다.

나뿐만 아니라 엄마, 유모까지 모두 함께 영상석 주위에 둘러서서 영상에 집중했다.

[????♫♩♫]

영상석의 화질은 꼭 실제로 보는 것과 별다를 바가 없었다.

홀로그램처럼 비친 화면에서는 오직 나에게만 초점이 잡혀 있어 또렷했다.

‘음, 내가 저런 표정을 짓고 있었구나.’

너무 과하게 긴장한 탓인지 꼭 로봇이나 꼭두각시 인형처럼 어색한 표정을 지은 채 연주하고 있는 게 그대로 나왔다.

하지만 그 어색함은 오직 나만 느낀 모양이었다.

주변에 서 있던 부모님과 유모가 연신 감탄했다.

“역시, 우리 아가씨가 제일 연주를 잘하세요!”

“우리 딸, 꼭 요정같이 나왔구나! ……잠깐, 당신. 저 살짝 올라간 귀여운 입꼬리 다시 한번 봐야겠어요. 화면 좀 되돌려 볼래요?”

……어디가 귀여운 입꼬리라는 건지 모를 노릇이었다.

내 눈에는 그냥 뻣뻣하게 굳어서 떨리는 입꼬리밖에 안 보이는데?

아무튼 우리 부모님께서는 그 영상을 두세 번 더 반복해 감아서 보고는 그제야 영상을 껐다.

“흠, 흠. 이건 아무래도 우리 가문의 가보로 남겨둬야 할 것 같구나.”

“……가보요?”

아빠의 말에 나는 생각했다.

‘가보로 해봤자 후손들이 별로 안 좋아할 것 같은데.’

몇백 년 후 내 조상들이 보물창고를 뒤지다 이 영상석을 찾는 걸 상상했다.

보물상자 위치라도 나오지 않을까 하며 기대하고 틀었다가, 웬 아이가 나와서 어색하게 핸드벨 연주를 하는 걸 보면 실망하지 않을까.

에이, 이게 무슨 가보야! 하고.

‘뭐, 상관없으려나. 저렇게 기뻐 보이시는데. 그냥 맘대로 하시라고 해야지.’

하지만 부모님께서 너무 좋아하셔서, 별로 말리고 싶은 생각은 안 들었다.

한편 나는 이제야 다른 아이들의 손님들을 제대로 확인할 수 있었다.

세드릭의 가족들은 어머니만 빼고서 하나같이 타오르는 듯한 붉은 머리칼이었다.

세드릭의 부모님을 실제로 뵙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두 분 다 기사랬던가.

갑옷이나 제복을 입고 있는 것도 아닌데 누가 봐도 기사 가족이었다.

‘다들 엄청 무뚝뚝해 보이고 세 보이는 것까지 닮았어!’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저렇게 무뚝뚝한 모습이지만, 사실 저 삼 형제가 겉모습만큼 차갑고 나쁜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복도에는 세드릭이 글씨 연습을 위해 열심히 소설을 필사한 공책이 전시되어 있었다.

그 공책을 한 장 한 장 넘겨 보며 감탄한 세이든과, 뒤늦게서야 부끄러워진 듯 형에게서 제 공책을 뺏으려고 하는 세드릭이 보였다.

‘세드릭, 얼굴이 새빨개졌네.’

그 공책을 전시해 놓겠다고 한 것은 자신이었으면서, 막상 가족들이 구경하니 창피한 모양이다.

시선을 돌려 교실 안을 보니, 책상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앨리스와 에이비시가 보였다.

‘유치원 생활이 어땠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건가.’

앨리스의 말로는 에이비시나 다른 요정들이 평소 자신이 유치원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궁금해한다고 했었다.

그리고 앨리스의 품에는 엄청 커다란 꽃다발이 한 아름 안겨 있었다.

아까 에이비시가 가져온 그 꽃다발이었다.

‘계속 들고 있기엔 무거울 텐데도, 절대 놓지 않고 있네.’

앨리스의 표정이 정말로 행복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그런데 내가 그런 앨리스를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는 게 우리 부모님께 오해를 산 모양이다.

“에미르, 미안하다.”

“……네?”

갑자기 뭐가 미안하다고 하시는 거지?

나는 의아해졌다.

“꽃다발을 미리 챙겨오지 못해서 미안하구나. 아마 지금쯤 가문에 도착한 꽃을 가져오고 있을 거란다. 마법 사진기도 함께 챙겨오라 일렀지. 조금만 기다려 주겠니?”

아, 설마 내가 앨리스의 꽃다발을 부러워하고 있다고 오해하신 건가?

하지만 오해라고 말하기도 전, 우리 가문의 하인이 유치원에 도착했다.

아빠가 말씀하신 그 ‘꽃다발’을 들고.

“……!”

꽃다발을 건네받은 나는 깜짝 놀랐다.

뭐가 이렇게 크고 화려해?

“네가 좋아하는 파란색 장미와 흰색 장미를 최대한 많이 주문했는데, 하필이면 겨울이라서 마법 온실에서 몇 송이씩 재배하는 것 말고는 없다고 하더구나.”

엄마의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온 수도의 꽃가게를 모두 수소문하느라 늦었구나!

이후 나는 내 몸집 반만 한 꽃다발을 들고 서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엄마, 아빠는 유치원의 각 장소를 배경으로 내 사진을 한 컷씩 찍는 데 여념이 없었다.

마지막으로는, 우리 유치원 아이들 7명이 모두 모여 함께 단체 사진을 찍었다.

아이들의 품에는 모두 각자의 꽃다발이 하나씩 안겨져 있었다.

우리의 학예회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비록 화려한 연회만큼 성대하지는 않았지만, 기억에 남을 만한 멋진 행사였다.

* * *

학예회가 끝난 후, 앨리스는 로즈 공작저로 돌아갔다.

요즘 들어서는 세드릭의 마차를 빌려 타고 돌아오는 때보다, 에이비시의 도움을 받아 간편하게 순간이동으로 돌아오는 날이 더 많았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런 앨리스의 변화를 공작저에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

앨리스의 가족들을 포함해, 공작저의 수많은 고용인이 있었지만 그중 단 누구도 몰랐다.

여전히 아무도 앨리스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는 이야기였다.

‘……한 번쯤은 물어봐 주실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앨리스는 제 침대 밑에 숨겨둔 꽃다발을 보았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어. 내겐 에이비시 님이 계시잖아.’

학예회에 방문해 준 이는 앨리스의 친가족들이 아닌 요정왕 에이비시였다.

그런 것처럼, 더 이상 앨리스는 가족들의 관심이나 존재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었다.

물론 원래도 별 보탬은 되지 않았었지만.

그때였다.

갑작스레 복도와 연결된 계단을 쿵쿵 오르는 낯선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앨리스는 황급히 침대보를 잡아당겨 밑에 숨겨둔 꽃다발을 가렸다.

“앨리스? 거기 있느냐?”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로즈 공작이 앨리스를 찾았다.

“네.”

평소에는 일 년에 대화를 한번 나눌까 말까 하는 사이인 아버지였기에 이렇게 그가 찾아온 상황이 매우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앨리스는 예전처럼 소심하게 고개만 끄덕이거나 말을 더듬지 않고 태연히 대답했다.

“……이 아비에게 할 말이 있지 않느냐?”

그런 앨리스의 달라진 태도를 아는 것인지 모르는 것인지, 공작이 뻔뻔하게 질문했다.

하지만 앨리스는 그가 무슨 의도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할 말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래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뜻으로 침묵했다.

그랬더니 공작이 이내 약간의 노기 어린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오늘, 유치원에서 학예회가 열렸다지?”

그걸 어떻게 알았을까?

아예 앨리스에게 관심이 없는 줄 알았더니만 용케도 그런 질문을 하는 공작이었다.

“궁에 다녀오는 길에 전해 들었다. 어째서 그런 행사가 있다는 것을 이 아비에게 미리 말하지 않았지?”

왜 말하지 않았냐고?

정말이지 황당한 질문이었다.

만약 앨리스가 자신이 학예회에서 피아노 연주를 한다고 말했더라도, 그러냐며 고개만 끄덕이고 곧바로 잊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아니, 어쩌면 되레 아직도 유치원에 다니고 있었냐면서 되물을지도 몰랐다.

그만큼 앨리스는 이 공작가에서 존재감이 없었으니까.

“……당연히 안 오실 거라 생각했어요.”

앨리스의 대답에 공작은 멈칫하더니, 할 말이 없는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 침묵은 아주 잠시뿐이었다.

애초에 공작은 유치원에서 학예회를 했다는 사실 자체는 중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그 학예회에 황제 내외를 비롯해서 여러 귀족이 학부형으로 참석했다는 것.

그리고 하필이면 그런 자리가 있다는 것을 몰라 자신이 참석하지 못한 것이었다.

심지어 유치원과는 관련도 없는 다른 귀족에게 그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이 가장 그를 창피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는 앨리스의 일에 무관심했던 자신이 아닌, 자신에게 소식을 전하지 않은 앨리스를 탓했다.

“허어, 다른 이들이 우리 로즈 가문을 어떻게 생각했겠느냐! 너는 창피하지도 않았어? 다른 가문의 자제들은 모두 가족과 함께하는 자리에, 너만 혼자였을 것 아니냐?”

아무래도 공작은 학예회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듣지 못한 모양이다.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다면, 앨리스에게 에이비시라는 든든하고 멋진 보호자가 있었다는 소식까지 들었을 텐데.

물론 그는 소식을 전해준 이에게 학예회가 있었다는 사실을 이제 알았다는 티를 내지 않기 위해, 일이 바빠 가지 못했다는 핑계를 댔다.

그러니 저런 되지도 않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지금의 앨리스는 그런 질문을 들어도 아무렇지 않았다.

‘저는 혼자가 아니었어요. 에이비시 님이 함께해 주셨는걸요. 그리고 사실……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언니. 세 분이 없어서 더 좋았어요.’

단지 속으로만 진심을 말할 뿐인 앨리스였다.

어차피 그렇게 말해봤자 아무런 소용도 없을 테고, 오히려 독이 된다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으니까.

대답 없는 앨리스가 반성하고 있다고 여긴 공작은 혼자서 분을 삭이고서 말했다.

“……다음부터 그런 자리가 생기면, 꼭 이야기하도록 해라. 오늘처럼 뒤늦게서야 알게 되는 일이 없었으면 한다. 로즈 공작가의 체면을 지켜야 하지 않겠느냐?”

공작은 그 말을 한 뒤 쌩하니 몸을 돌렸다.

이윽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거친 발걸음으로 계단 내려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앨리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앨리스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제 곧 유치원은 해체하게 된다.

로즈 공작은 그런 사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역시 끝까지 무관심했다.

하지만 그런 그와 다르게, 앨리스는 따로 말해주는 사람이 없어도 요즘 로즈 공작가의 사정이 어떠한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당연하게도 에이비시를 비롯한 요정들이 소식을 전해준 덕분이었다.

“…….”

앨리스는 말없이 미소 지었다.

사실, 최근 들어 로즈 공작이 저토록 외부의 평판에 집착하게 된 이유가 있었다.

더 이상 로즈 공작가가 요정 소환사 가문이 아니게 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요정 소환사들은 10여 년마다 자신들의 요정과 계약을 갱신한다.

서로에게 만족한다면 그 계약은 계속해서 이어지겠지만, 인간 혹은 요정 둘 중 하나라도 계약을 거부한다면 더 이상 계약을 이어나갈 수 없다.

‘에이비시 님이 그러셨어. 이제 더 이상 나를 제외한 로즈 공작가 사람과 계약할 요정은 없을 거라고.’

마침 로즈 공작은 요정과의 계약 기간이 거의 끝나가던 참이었다.

안 그래도 그는 인간들과 계약하는 요정들 사이에서 평판이 좋지 않았다.

거기다 이번에 앨리스가 요정왕과 계약한 이후로, 요정들에게 로즈 공작가가 감히 요정왕의 계약자를 무시한다는 소문이 퍼져나갔다.

‘불안하실 거야. 아무도 계약하겠다고 소환되는 요정이 없을 테니까.’

그렇게 된다면 로즈 공작가에는 공식적으로 요정 소환사가 한 명밖에 남지 않는다.

바로 앨리스의 언니인 클레어 로즈였다.

클레어의 경우는 아직 계약한 지 1년 정도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아마 9년 후엔, 정말로 앨리스를 제외하고서는 이 로즈 공작저에 그 어떤 요정 소환사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9년 후엔 내가 성년이 돼.’

물론 그때까지 앨리스는 절대로 자신이 요정 소환사, 그것도 요정왕의 소환사라는 사실을 밝힐 생각이 없었다.

성년이 되면 가문을 나가고, 그 이후에 당당하게 제가 요정 소환사라는 것을 알릴 생각이었다.

에이비시, 그리고 그를 소환하게 도와준 에미르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저 혼자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앨리스는 그 둘에게 정말로 감사하고 있었다.

로즈 공작가는 요정의 조언으로 막대한 보석 광산이 묻혀 있는 땅을 사 개발 사업을 벌인 이후 부유해졌다.

그 이외에도 요정의 도움을 받아 여러 사업을 벌이고, 요정 소환사라는 타이틀로 가문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니 로즈 가문은 요정이 없으면 그 무엇도 아니었다.

그렇게 될 예정이다.

* * *

학예회 다음 날부터, 기다렸다는 듯이 하늘에서는 눈이 펑펑 내렸다.

그제야 정말로 한겨울인 게 느껴졌다.

분명 몇 달 전 마야의 저택에 처음 갔을 때도 이렇게 눈이 왔었지만, 그때는 눈이 주는 기쁨보다도 얼어붙을 것 같은 맹추위가 더 커서 미처 좋아하지도 못했었다.

유치원에 도착해 보니, 건물 앞 공터에 수북하게 흰 눈이 쌓여 있었다.

아직 아무도 밟지 않은 깨끗한 눈이었다.

“우와! 눈이 잔뜩 쌓였어. 발목까지 와!”

나는 마차에서 내린 직후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헤헤. 이럴 줄 알고, 어제저녁 함박눈이 내리는 걸 보자마자 유모에게 털이 달린 두꺼운 부츠를 준비해 달라고 하길 잘했지!’

물론, 어제저녁 첫눈을 보고 소원을 비는 것도 잊지 않았지만 말이다.

마부가 나를 향해 걱정 어린 목소리를 냈다.

“아가씨,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하세요!”

“알았어, 조심할게!”

다행히도 이 장화에는 동상을 방지해 주는 보온 마법과, 밑창이 쉽게 미끄러지지 않게 해주는 마법이 걸려 있었다.

그렇게 새하얀 눈밭에 발을 푹푹 파묻으며 뛰어다니기를 한참, 하나둘 다른 아이들의 마차가 도착하는 게 보였다.

다른 아이들도 나처럼 소복하게 쌓인 눈에 기뻐했다.

“뭐야, 혼자서 뛰어다니고 있었던 거야? 나도 같이 놀자!”

“에미르 님! 저 털장갑을 챙겨왔어요. 어라, 이미 끼고 계시네요?”

오늘따라 더욱 활기차 보이는 세드릭과, 직접 뜨개질한 것 같은 멋진 장갑을 들고 온 앨리스.

“눈사람 만들기 어때? 특별히 황궁 주방에서 커다란 당근을 챙겨왔어.”

책에서 본 눈사람을 꼭 따라 만들어 보고 싶다며, 당근과 검은 보석 단추 등을 바리바리 챙겨 온 니나이나와 니콜라스.

“저기, 우리 눈싸움 같이할래? 에미르 네게 눈을 던져도 될까?”

원래 눈싸움은 말없이 눈을 뭉쳐 던지는 것이 시작인데, 주먹만 한 눈덩이를 양손에 든 채로 정중하게 질문하는 마야.

“우리 집 뒷마당에 눈으로 만든 집을 지어놨어, 미르.”

그리고 마법으로 이글루를 지어놓았다며 자랑하는 제이크까지.

아무래도 오늘 유치원에서는 하루종일 공부가 아닌 눈 놀이를 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 고민이다. 누구와 먼저 놀아야 하지? 마야와 함께 눈싸움부터 할까? 아니면 니나이나와 눈사람 만들기? 제이크에게 이글루를 지어달라고 할까?’

여러 개의 선택지가 다 마음에 들어서 큰일이었다.

어떤 놀이를 먼저 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진 채, 나는 한참 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하지만 그때.

퍽, 하고 무언가가 묵직하게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으악! 뭐야?”

갑작스레 내 발치에 날아온 눈덩이에, 나는 깜짝 놀라 소리 질렀다.

재빠르게 주변을 훑으며 생각했다.

‘대체 누가 겁도 없이 내게 눈싸움 결투 신청을 한 거지?’

전생에 내가 얼마나 눈싸움을 잘했는데, 이렇게 먼저 시비를 거냔 말이다.

‘흥, 어디 한번 큰코다치게 해줘 볼까.’

이윽고 나는 저편에서 잔뜩 동그랗게 눈을 뭉치는 세드릭을 발견했다.

그래, 바로 네가 범인이구나!

“세드릭 님이 저한테 방금 눈을 던졌죠?”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물론 방금은 경고였어! 어서 놀자고!”

하긴, 세드릭은 워낙 운동 신경이 좋으니 마음먹는다면 정확히 목표를 노려 던졌을 게 분명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 님이 먼저 시작하신 거예요.”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세드릭에게 불시에 눈을 던졌다.

사실, 나는 이미 아까 몰래 눈덩이를 뭉쳐서 내 코트 주머니에 숨겨놓았었다.

“……!”

세드릭은 예상치 못한 빠른 공격에 깜짝 놀랐지만, 슉 하고 몸을 낮춰 눈덩이를 피해 버렸다.

‘아! 아까워!’

세드릭을 쉽게 맞출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내 회심의 공격을 이렇게 곧바로 피해버리니 꽤나 김이 샜다.

‘칫. 그렇다면 물량으로 승부해 주겠어.’

다행스럽게도 눈을 뭉치는 데 시간이 걸리는 세드릭과는 달리, 나는 5초도 안 되는 시간에 동그란 눈덩이를 뭉치는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전생에 습득해놓은 스킬이었다.

휙, 휙, 휙-

재빠르게 날아오는 여러 개의 눈덩이에 세드릭이 당황했다.

“아니, 이건 반칙이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한쪽 발을 들고, 팔을 접고, 고개를 돌리며 요리조리 잘만 피하는 세드릭이었다.

‘그러는 세드릭이야말로 반칙 아냐? 장래의 소드 마스터와 눈싸움 대결해서 어떻게 이겨!’

그때였다.

세드릭이 내게로 눈덩이를 던졌다.

“……!”

정확히 내 상체를 저격하고 날아오는 눈덩이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도저히 피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은데?’

짧은 순간 모든 게 슬로모션처럼 지나갔다.

나는 눈에 맞을 걸 예상하고 눈을 꼭 감았다.

그런데…….

“응?”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비명을 지른 건 세드릭이었다.

“으악!”

분명 내게 날아왔어야 할 눈덩이가 도리어 세드릭의 어깨에 맞았다.

그 광경에 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그리고 어느샌가 날 둘러싸고 있는 희미한 기운이 느껴졌다.

꼭 마력과 비슷한 그런 기운이었다.

‘설마……?’

문득 짐작 가는 게 있어 나는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근처에 서 있는 제이크가 보였다.

“미르, 방금 네게 보호 마법을 걸었어! 잘했지?”

제이크는 환히 웃어 보이며 외쳤다.

‘으음, 보호 마법만 건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세드릭이 제 어깨를 붙잡고 아파하는 걸 보니, 아무래도 던진 것의 몇 배의 힘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마법도 함께 걸려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눈덩이를 맞고 휘청거리던 세드릭이 정신을 차리고 버럭 소리쳤다.

“너였냐! 마법을 쓰면 어떡해? 재미없게!”

“하지만 미르가 눈덩이를 맞는 걸 그냥 지켜볼 수가 없었어.”

제이크가 뻔뻔하게 대꾸하자, 세드릭은 잠시 할 말이 없어진 건지 멍하니 있었다.

그러더니 갑작스레 돌변해 외쳤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네게 대신 던질 수밖에!”

세드릭은 제이크를 향해 여러 개의 눈덩이를 던졌다.

그러자 제이크가 당황하며 눈을 크게 떴다.

“……!”

내게는 보호 마법을 걸어 주었으면서, 미처 자신에게는 그런 마법을 걸 틈이 없었던 모양이다.

결국 제이크는 눈덩이를 고스란히 다 맞고야 말았다.

맞은 뒤에야 뒤늦게 제 몸에 방어 마법을 구현한 제이크는 한발 늦었다는 표정으로 머리카락에 잔뜩 묻은 눈을 털어내고서 고개를 들었다.

‘제이크가 저런 표정을 짓는 건 처음 봐!’

그런데 어쩐지 제이크가 세드릭을 보는 눈이 평소와 다르게 살벌했다.

아무래도 세드릭이 이제 무사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런 내 예감은 그대로 들어맞았다.

“으하하! 못 피했다! 그럼 이것도 맞아라!”

미처 수상한 제이크의 기운을 감지하지 못하고 눈치 없이 눈덩이를 열심히 만들어 던질 준비를 하고 있는 세드릭의 위로, 무언가 어둑한 먹구름이 하나 생겨난 것이다.

“……뭐야?”

그 구름을 세드릭이 인식한 순간.

때는 이미 늦었다.

후두두두둑-

완전한 구 모양의 예쁜 눈덩이 수십 개가 세드릭을 정확히 조준해서 한 번에 와르르 떨어졌다.

“으아아악!”

세드릭은 비명을 지르며 눈덩이를 피하려 달렸지만, 머리 위의 먹구름은 계속해서 세드릭을 따라다니며 눈덩이를 쏟아냈다.

세드릭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하얀 눈으로 엉망이 되고 나서야, 눈덩이의 습격은 끝났다.

“으으, 가만두지 않을 거야!”

세드릭은 잔뜩 약이 올라 열심히 눈을 뭉치기 시작했다.

그런 세드릭을 여유로운 태도로 응시하면서 제이크가 말했다.

“눈을 더 맞고 싶은 거라면, 얼마든지 더 만들어줄게.”

제이크의 손 위에 먹구름이 스멀스멀 만들어지자 세드릭이 흠칫했다.

하지만 더 이상 세드릭은 겁먹지 않았다.

“그런 걸로 무서워할 것 같아!”

용맹한 기사답게, 재빠른 손놀림으로 열심히 눈을 만들어낸 세드릭은 휙휙 눈을 던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제이크는 먹구름을 세드릭에게 보냈다.

둘의 끈질긴 눈싸움에, 빗맞히거나 엉뚱한 곳으로 튄 눈덩이들이 다른 아이들에게 날아갔다.

“악!”

“누가 나에게 눈을 던졌어?”

“뭐 하는 짓이지!”

그렇게 눈을 맞은 아이들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다들 각자 하던 일을 멈추고 눈을 뭉쳐 눈싸움에 끼어들기 시작했다.

‘……이게 뭐람.’

물론 그 와중에도 제이크가 만들어준 보호 마법은 여전해서, 나 혼자만 평화로운 모습으로 그 아수라장 사이에 서 있었다.

‘휴.’

나는 유유한 발걸음으로 그곳을 빠져나가 벤치에 가 앉았다.

‘눈싸움은 구경이나 해야겠다.’

(4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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