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권-5화 (5/8)

꼬마 영애님은 주연들을 길들인다 3권

5.

“어서 오십쇼!”

상당히 험악해 보이는 여관 주인은 인상과는 다르게 우리를 환영해 주었다.

여관 1층을 식당으로 쓰는 모양인데, 사람이 바글바글한 걸 보니 맛집이 틀림없었다.

“이런 곳은 처음이야.”

“식사를 주문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

“메뉴는 뭐가 있지? 이런, 코스 요리는 없는 건가.”

우리는 작은 목소리로 두런두런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다들 제 손으로 식당에서 음식 주문을 해본 적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모양이었다.

‘후후, 다들 서툴잖아?’

이럴 땐 내가 나서줘야 하는 법.

마침 나 혼자 하녀복을 입고 있기도 하니, 귀족들을 모시고 평민들의 식당에 들른 하녀 컨셉을 잡아줘야겠다.

“일단 우리 모두 자리에 앉아요. 저쪽 테이블이 넓으니 저기로요.”

“뭐? 서버가 안내해 주는 줄 알았는데.”

고급 레스토랑에서 외식해 본 경험을 떠올렸는지 세드릭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에요. 이곳은 손님이 직접 테이블에 앉아서 주문하는 시스템이에요.”

“정말? 신기한걸.”

“우와, 에미르 너도 이런 곳에 오는 건 처음이라고 했잖아.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잘 알아? 대단하다.”

모두 입을 벌린 채 감탄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살짝 머쓱해져서 볼을 긁적이다 외쳤다.

“일단 주문은 저에게 맡기세요!”

“그래, 믿어볼게.”

때마침 주인장이 우리를 향해 다가와 물었다.

“여관 숙박도 하실 겁니까, 아니면 식사만 하겠습니까?”

“식사만 할게요. 총 6명인데, 메뉴는 스튜와 돼지 뒷다리살 바베큐요.”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쇼. 곧 내오겠습니다.”

주인이 떠나고, 우리는 도란도란 작게 수다를 떨었다.

아무래도 주변이 소란스럽다 보니 우리의 대화가 주목받지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얼마 기다리지 않았지만 금방 식사가 준비되었다.

대야만큼이나 커다란 그릇에 담긴 스튜와, 철제 꼬치에 크기가 제각각으로 꽂혀 있는 돼지 바비큐였다.

“우와아! 맛있겠다!”

“아까 우리가 맡았던 냄새가, 바로 이 스튜 냄새였나 본데?”

“아, 군침 돌아.”

다들 새로운 요리를 눈앞에 두고 들떠서 한마디씩 했다.

스튜는 방금 막 떠왔는지 아직까지도 보글보글 끓는 그대로였다.

고기는 훈제로 구운 모양이었다. 은은한 불향과 좌르르 흐르는 기름의 윤기가 식욕을 자극했다.

꿀꺽.

나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자, 우리 다 같이 먹어봐요.”

나는 스튜를 조금씩 퍼내서 개인 접시에 덜어주었다. 그러자 니콜라스가 질문했다.

“저 고기는 어떻게 먹는 거지? 나이프가 없는데…….”

“아, 저건요. 그냥 저 꼬치를 양손으로 들고 뜯어 먹는 거예요.”

“……!”

니콜라스는 꽤나 충격받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내 설명대로 조심스레 꼬치를 집어 들었다.

다른 아이들은 이미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꼬치를 잡고 베어 물고 있었다. 아무래도 많이 배고팠던 모양이다.

‘나도 먹어야겠다!’

겉으로만 보기 좋고 막상 씹으면 질기고 잡내가 심한 경우가 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고기는 정말로 맛이 좋았다.

야들야들한 식감과 살짝 젤리처럼 코팅된 겉표면, 시원하게 터져 나오는 육즙이 정말이지 최고였다.

다른 아이들도 입맛에  맞는지 처음에 망설이던 건 온데간데없이 맛있게 식사 중이었다.

나도 스튜를 한 스푼 떴다.

그런데 조금 의아해졌다. 아까는 자세히 보지 않아 몰랐는데, 처음 보는 모양의 건더기들이 있었다.

아주 푹 끓였는지 원래의 형태가 무엇이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인 무언가.

대체 이 스튜에는 무엇이 들어간 걸까?

나는 스푼을 입으로 가져다 대기 직전, 잠시 멈칫했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달리 이미 다른 아이들은 냠냠 맛있게도 스튜를 먹는 중이었다.

“우와, 이거 정말 맛있는데? 짭조름하면서 달콤해. 뭘 넣으면 이런 맛이 나는 거야?”

특히나 세드릭은 스튜가 정말 맛있는지, 빵도 스튜에다 찍어 먹는 것도 모자라서 벌써 세 그릇째 담아 먹는 중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다들 잘만 먹는데…… 나도 그냥 먹지 뭐.’

결국 나는 의심을 지워내고 스튜를 입에 머금었다.

“……!”

그리고 다음 순간 맛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웬만한 음식들은 냄새보다 못한 맛을 가진 것이 많은데, 이 스튜는 황홀한 냄새를 배신하지 않을 정도의 훌륭한 맛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내가 생각하기에도 이 정도인데, 이러다가 세드릭 혼자서 스튜 한 사발 더 주문하게 되는 거 아냐?’

어쩐지 가능한 일일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다시 식사에 집중하려던 그때, 갑자기 근처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그만 사레들릴 뻔했다.

“어이구, 사장님! 오늘 장사가 정말 잘 되나 보네요. 항상 먹던 걸로 부탁해요.”

“예, 닭고기 야채 볶음과 스프로 내오겠습니다.”

바로 내 유모의 목소리였다!

‘뭐, 뭐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분명 저택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장을 보러 온 걸까? 게다가……. ‘항상 먹던 걸로 부탁해요’라니.’

하필이면 이곳이 유모의 단골 음식점이었던 모양이다.

으으, 오늘따라  참 운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아는 사람과 마주치게 될 줄이야!

‘어른으로 위장하고 있어서 천만다행이지 뭐람.’

만약 원래 모습이었다면 유모는 단번에 뒷모습만으로도 나인 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헉, 그러고 보니 나 지금 우리 저택의 하녀복을 입고 있잖아?’

그 직후,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 섬뜩해졌다.

유모가 이 하녀복을 알아본다면, 어째서 저택 하녀가 근무 시간에 저택이 아닌 식당에 있는 것인지 의아할 것이다. 그러니 다가와 내게 말을 걸지 않을까.

‘무, 물론 나는 어른 목소리겠지만. 그래도 유모라면 의심할지도 몰라! 일단 얼굴부터가 거의 비슷하잖아.’

나는 재빨리 벗어서 의자에 걸쳐놓았던 로브를 다시 걸쳤다.

그뿐만 아니라 내 회색빛 머리와, 하녀복에 달린 가문 표식이 보이지 않게 후드까지 꽁꽁 여몄다.

“휴우.”

그러고 나서야 한숨 돌렸다. 하지만 문득 떠오르는 한 줄기 걱정.

‘……아니, 잠깐. 그런데 나만 숨으면 뭐 해? 유모는 내 친구들에 대해 다 알고 있는데. 우리가 대화하는 걸 엿듣고 의심하는 거 아냐?’

걱정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유모가 우리와 바로 붙어있는 자리에 앉은 것은 아니었지만, 꽤 가까웠으니까.

결국 나는 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제이크에게 속삭일 수밖에 없었다.

“저기, 제이크. 저기 내 유모가 와 있는 것 같아. 목소리가 들렸어.”

“……그게 정말이야?”

“응. 나 이렇게 로브 뒤집어썼어. 당장 숨을 수가 없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귓속말로 모두에게 좀 로브를 쓰고 말을 조심해 달라고 전해줄래?”

“알겠어.”

제이크가 믿음직하게 대답했다.

잠시 후, 제이크를 시작으로 니나이나, 니콜라스, 앨리스, 세드릭까지 모두에게 내 부탁이 전달되었다.

방금 전까지 신나게 먹는 소리와 대화로 시끌벅적했던 우리 테이블은 금세 적막이 흘렀다.

‘그럼 이제 식사를 마치고 나가야 하는 거 아니야?’

니나이나가 입 모양으로 내게 질문했다.

나는 잠시 뜸 들였다. 물론 나야 식사를 다 하긴 했지만…….

“그건 안 돼. 나 스튜 한 그릇만 더 먹고.”

세드릭을 힐끗 바라봤더니, 아니나 다를까 고개를 저으며 반대의 목소리를 냈다.

나는 하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고, 그사이 세드릭은 순식간에 스튜 한 그릇을 퍼서 원샷 했다.

“……!”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세드릭은 나를 보며 입을 열었다.

“으윽, 배불러. 어때? 정말 빠르지? 이제 나가자.”

“……그렇게 급하게 먹으면 체해요.”

걱정해 주었지만 세드릭은 예의 그 자신감 넘치는 미소를 지었다.

“괜찮아, 난 안 체해. 튼튼한 위장을 가졌거든.”

하지만 근거가 없는 자신감이었다.

오러를 다루는 소드마스터라 해도 위장에 오러를 두를 수는 없을 텐데 말이다.

그때였다.

우리 둘이 작은 목소리로 대화하는 걸 듣고, 유모가 중얼거렸다.

“어딘가 익숙한 목소리네. 아, 그래. 우리 아가씨랑 비슷하네. 호호, 아가씨는 친우분들 저택에서 잘 놀고 계시려나…….”

작은 혼잣말이었지만 내 귀에는 어쩐지 똑똑히 들려왔다.

나는 살짝 기겁했다.

‘유모, 원래 이렇게 눈치가 빨랐나?’

우리는 아무 말 없이 일어나 계산대로 향했다. 주인장이 계산을 도와주었다.

그때, 유모의 시선이 또다시 내게로 향하는 게 느껴졌다.

“……목소리만 비슷한 줄 알았더니 머리카락도, 후후. 우리 아가씨가 크면 저렇게 되려나.”

“……!”

나는 그제야 로브 밖으로 약간의 회색빛 머리가 삐져나왔다는 걸 알아차렸다.

이제 와 다시 집어넣기도 민망한 타이밍이었다.

나는 못 들은 척 얼굴이 안 보이게 옷깃을 올리면서 고개를 돌렸다.

‘유모, 눈썰미가 거의 탐정급이야.’

아무튼 계산을 마친 우리는 도망치듯이 가게에서 빠져나왔다.

골목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이후부터는 말하지 않아도 다 같이 도망치듯 뛰어갔다.

* * *

“헉, 헉…… 진짜 하마터면 들킬 뻔했어.”

“이런 데서 아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정말 신기하네.”

“신기할 것도 없지. 수도에서 열리는 시장 중에 이곳이 가장 크잖아.”

우리가 처음 시장에 들어왔던 입구 근처까지 와서야 숨을 고르며 가까스로 대화를 나누었다.

우리의 손에는 아까 샀던 머리띠와 액세서리 봉투가 엉망진창으로 구겨져 들려 있었다.

잠시 그 꼴을 서로 바라보다가, 다들 하나같이 짠 듯 와하하 웃었다.

“뭐야, 세드릭. 너 입가에 스튜 국물 묻었는데?”

“……젠장, 진작 좀 말해주시지.”

니콜라스의 말에 세드릭은 얼굴이 붉어진 채로 제 입가를 박박 닦아냈다.

한편 머리카락이 산발이 되어 있는 앨리스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다가가서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겨주었다.

“고마워요, 에미르 님!”

나야 뭐 아까 실컷 긴장한 탓에 약간의 식은땀을 흘리는 것을 빼고는 별로 문제없었지만.

“이제 다시 마차를 타러 가자.”

우리는 옷매무새를 점검한 후, 마차가 있는 숲으로 향했다.

시장과 숲을 연결하는 사이 통로에는 상당히 높은 높이의 돌계단이 있었다.

‘조심해야겠는걸.’

가파른 탓에 지금처럼 내려갈 때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할 것 같았다.

나는 한 발짝 한 발짝 신중하게 난간을 잡고 발을 디뎠다.

하지만 바로 그때.

“……어?”

“아악!”

바로 내 앞을 앞서가던 제이크와 니나이나가 동시에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인가 하고 깜짝 놀란 순간, 이미 내 몸은 반사적으로 손을 내밀어 그 둘이 떨어지지 않도록 붙잡았다.

동시에 약간의 ‘펑’ 소리가 나더니, 그 둘은 어른의 커다란 모습에서 원래의 아이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

“……벌써 시간이 반나절이 지났어?”

제이크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너무 신나게 놀아버린 탓에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던 모양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 짧은 순간 간과한 것이 있었으니.

“꺅!”

“으아아아!”

“헉!”

반나절의 유효기간이 있는 아티팩트를 착용한 건 우리 6명 모두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착용 시간에 따른 몇 초의 시간 차를 두고 우리는 다시 아이로 변했다.

세드릭과 앨리스, 그리고 니콜라스가 갑작스러운 변신에 균형을 잡지 못하고 비틀대더니 이내 서로를 붙잡으며 겨우 바로 섰다.

그 광경을 멍하니 보던 나는…….

그만 내가 가장 나중에 아티팩트를 착용했다는 것을 잊어버리고 넋을 잃은 채로 서 있었다.

“아, 안 돼!”

정확히 1초 후, 나 혼자서 아무에게도 기댈 대 없이 변신이 풀려버렸다.

나는 휘청대 보지도 못하고 곧바로 균형을 잃고 계단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

“에, 에미르 님!”

“미르!”

뒤늦게서야 나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저 위에서 들려왔다.

나는 구르는 동안 이상하게도 시간이 조금 느리게 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윽!”

잠시 후, 나는 끝내 돌계단의 끝까지 굴러 그 밑의 차가운 바닥에 쓰러지고야 말았다.

아이들이 놀라 계단을 달려 내려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아? 에미르!”

“제 목소리 들리세요, 에미르 님?”

“주, 죽은 건 아니지?”

떨리는 세드릭의 목소리가 들리는 걸 보아하니 아무래도 죽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아픔과 동시에 조금 멍해져 눈을 깜빡였다.

굴러떨어진 게 영 실감 나지 않았다. 머리나 목 같은 중요한 급소를 부딪친 게 아니라 다행이었다.

그리고 뒤늦게서야 아이들이 내민 손을 잡고 천천히 일어서려 했다.

그런데.

“아……!”

그만 너무 아파 외마디 비명이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다리가 부러져 버린 것 같았다.

“왜, 왜 그래? 어디 다쳤어?”

제일 가까이서 손을 내밀고 있던 제이크가 화들짝 놀라 외쳤다.

마음 같아서는 걱정시키기 싫었지만, 도저히 상태가 너무 안 좋아서 거짓말할 수가 없었다.

당장 부러진 다리 쪽은 땅에 제대로 디딜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를 짜내서 대답했다.

“아, 이쪽 다리가 부러진 것 같아…….”

그와 동시에 모두가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했다.

“……뭐?”

“다, 다리가요?”

“어떡하냐? 괘, 괜찮아? 아니, 다리가 부러졌는데 괜찮을 리가 없겠지, 젠장할.”

아이들은 잠시 패닉에 빠진 것처럼 우왕좌왕했다.

제이크는 내 손을 잡아주며 몹시도 상심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치유 마법도 함께 배울 걸 그랬어. 공격과 방어 마법이 다 무슨 소용이야. 막상 미르가 다쳤는데 아무것도 해줄 수가 없는데…….”

그러던 중 갑자기 세드릭이 내게 제안했다.

“업혀.”

“으으…… 네?”

다리를 부여잡고 앓는 소리를 내던 나는 순간 아픔도 잊어버리고 반문했다.

고개를 들어 쳐다본 세드릭의 얼굴은 자못 진지했다.

“업히라고. 너 정도는 내가 업어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세드릭은 제 로브를 벗어 던지고 정말로 업히라는 듯이 무릎을 꿇고 앉아 등을 보였다.

“하, 하지만.”

그렇지만 나는 선뜻 업히지 못했다.

당장 부러진 다리가 욱신거리고 부어오르는 게 보였지만, 어째서일까.

‘너무 신세 지는 게 아닐까.’

내가 고민하는 사이, 세드릭이 다시금 재촉했다.

“어서! 뭘 고민해?”

“제가 짐을 대신 들어드릴게요.”

동시에 앨리스가 내 손에 들려 있던 머리띠와 벗어놓은 로브, 돈주머니를 가져갔다.

“그, 그럼…… 미안하지만 업힐게요.”

나는 결국 세드릭을 비롯한 아이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을 가진 채로 세드릭의 등에 업혔다.

“미안할 게 뭐 있어? 어차피 마차가 있는 곳까지 5분이면 걸어간다고.”

“……물론 그건 알지만, 그래도요.”

나는 창피함에 고개를 들지 못한 채로 웅얼거리며 대답했다.

확실히 핏줄을 타고난 강인한 체격에다, 기사 훈련을 받기 때문인지 세드릭은 별로 힘들이지 않고 나를 업었다.

‘……진짜 안 무거운 거 맞겠지.’

끙.

어쩐지 뒤통수만 보이는 세드릭의 눈치가 보였다.

그렇게 세드릭이 나를 업고, 다른 아이들은 우리 뒤를 따라 걷고 있을 때였다.

갑작스레 뒤에서 누군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윽고 살벌한 대화가 들려왔다.

목소리를 들을 때 절대로 우리가 아는 이는 아니었다.

“분명히 이쪽으로 간 걸 봤는데. 6명이나 되고 다 까만 로브를 둘러서 눈에 안 띄려야 안 띌 수가 없다고.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 사라졌잖아?”

“그러게 말이야. 그 돈 많아 보이는 놈들…… 어디로 튀었지? 보아하니 뭣 모르는 귀한 자제분들 같던데. 딱 털어먹기 좋은 걸 이대로 놓칠 수는 없지 않아!”

돈 많은 놈들이라고? 검은 로브를 입은 6명?

‘설마, 그거 우리 말하는 건가?’

순간 식은땀이 났다.

힐끔 뒤를 돌아보니, 목소리의 주인은 단둘이었다.

그러나 둘 다 꽤나 인상 험악하게 생긴 불량배들이었다.

‘어디 보자, 한 명은 근육질인데 몸집은 좀 작은 편이고 얼굴에 흉터가 있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몸집이 상당한데 한쪽 눈에 안대를 쓰고 있잖아.’

무기는 각각 커다란 몽둥이와 협박용으로 보이는 녹이 잔뜩 슬고 이가 나가 있는 단검이었다.

짧은 시간에 스캔을 마치고 나는 언제 봤냐는 듯 다시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너네가 찾는 그 귀한 자제분들 바로 여기 있는데……. 부디 눈치채지 마라.’

콧김을 쉭쉭 뿜으면서 주변을 살기 어린 눈으로 훑어보는 그들에게, 우리는 시야에 있어도 안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인 듯했다.

‘아무래도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겠지만.’

한편 숲으로 막 향하려던 아이들의 발걸음이 일순간 멈추었다.

불량배들의 대화를 들은 건 나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때 그 두 명의 불량배가 도저히 타깃을 찾지 못하겠는지 우리를 향해 다가왔다.

아무래도 우리에게 ‘우리’의 행방을 물을 작정인가 보다.

“안녕, 꼬맹이들?”

“……!”

그들이 말을 걸자, 세드릭의 등이 살짝 긴장으로 굳은 게 느껴졌다.

세드릭도 무서워하는 걸까?

“에이, 에이. 너무 그렇게 겁먹지 말라고. 우리가 이렇게 생겼어도 그렇게 나쁜 놈들은 아니니까.”

“그래, 맞아. 그저 하나 물어보고 싶은 게 있을 뿐이란다? 혹시 어른 6명이 검은 망토를 두르고 지나가지 않았니?”

몸집 큰 불량배가 우리를 뚫어져라 보면서 질문했다.

나머지 한 명은 잠시 우리를 관찰하는가 싶더니 곧바로 말을 이었다.

“그래, 딱 너희가 입고 있는 옷 같은 것 말이야. 그러고 보니 너희도 딱 6명이구나? 흐음?”

……눈치챘나?

“어이, 아직 어린애들이잖아. 너무 겁주지 말자고, 에반스.”

“……흠.”

저 근육질의 이름이 에반스인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도르륵 굴렸다.

‘저치들이 우리를 어디서 본 걸까. 상점에서 금화를 꺼내는 모습을 보고 쭉 미행했나? 아니면 여관 식당?’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 위기를 모면하는 것이었다.

어차피 아티팩트에 관해 보통의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한다.

아이를 어른으로 바꿔 주는 기능이 있다고는 더더욱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니 대충 거짓말을 하고 넘어가야지.’

나는 고개를 떨구는 척하며 세드릭의 귓가에 몰래 속삭였다.

“……세드릭 님. 그냥 거짓말하고 보내버려요. 어차피 눈치 못 챈 것 같은데. 저쪽 돌다리 너머로 뛰어갔다고 말하세요.”

내 조언을 세드릭은 곧바로 받아들였다.

“저, 저쪽…… 돌다리로 뛰어간 걸 본 것 같기는 한데.”

심지어 보통의 아이들이 겁에 질려 떨리는 목소리를 연기하기까지.

세드릭, 몰랐는데 연기 실력이 꽤 는 것 같았다.

“오호, 돌다리란 말이지.”

“어서 가보자고.”

다행히도 세드릭의 뛰어난 연기 실력 덕분인지 불량배들은 의심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들이 부리나케 발길을 돌리자, 우리는 들리지 않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이윽고 니나이나가 말했다.

“……우리도 어서 가자.”

“그래요.”

그렇게 우리는 다시금 숲을 향해 걸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위기는 다시금 우리를 덮쳐왔다.

팅, 팅, 팅-

맑은 금속의 무언가가 땅바닥에 떨어져 튕겨져 나가는 소리가 울린 것이다.

몹시도 불길한 소리였다.

“……!”

그렇다.

바로 돈주머니에서 금화가 툭 떨어져 땅에 구르는 소리였다.

그 소리는 우리를 얼음처럼 굳어 버리게 했다.

무엇보다 돈이라면 환장하고 달려드는 불량배 녀석들이 뛰어가다가도 다시 되돌아오게 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소리는!”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였다.

벌써 돌계단을 반쯤 올라가 있던 불량배 두 명이, 눈을 번뜩이며 우리에게로 달려온 것이다.

“금화가 있었구나! 너희!”

“……!”

나는 기겁했다.

물론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돌계단을 거의 날 듯이 뛰어 날아오다니!’

떨어진 금화의 출처는, 아까 내가 들고 있던 돈주머니였다.

앨리스가 맡아주고 있었는데 실수로 주머니를 헐겁게 묶어 놓은 바람에 이런 불상사가 일어난 모양이었다.

‘금화를 갖고 있는 걸 들켰으니 저쪽도 목표물과 우리가 동일인이라는 걸 알아차리려나. 뭐,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금화를 본 이상 그냥 가지는 않겠지만…….’

그때, 갑자기 세드릭이 나를 조심스럽게 근처 바위에 내려놓았다.

“세드릭 님?”

갑자기 왜? 내 흔들리는 눈빛을 본 세드릭이 대답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싸울게. 나는 기사잖아.”

그러고는 로브를 힘차게 벗어 던지고 안에 숨겨놓았던 검을 뽑아 들었다.

스릉-

잘 벼려진 새파란 검날이 위험하게 빛났다.

그에 흉흉한 살기를 띠고 달려오던 불량배들이 아주 잠깐 흠칫하며 물러섰다.

“뭐야?”

“저 꼬맹이 녀석, 검을 갖고 있잖아?”

하지만 멈칫한 것도 잠시뿐.

그들은 우리가 어린아이라는 이유로 금세 경계를 풀었다.

오히려 귀여운 짓을 한다는 듯 껄껄 웃는 게 아닌가.

“하하하, 저것 봐. 기사 흉내 내는 도련님인가?”

“아쉽게도 도련님, 그런 모조 칼로는 저희가 가진 몽둥이나 단검을 막기 힘드실 겁니다!”

음, 저거 모조 검 아닌데.

너희는 저게 어딜 봐서 모조로 보이니?

그렇게 생각하다가 몽둥이가 무처럼 싹둑 썰려 나가야 정신을 차릴까.

……한 소리 해주고 싶었지만, 차라리 저렇게 방심하는 게 낫다 싶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필이면 시장 입구 중에서도 이 숲과 이어진 곳이 제일 인적이 드물어, 지나가다 우리를 도와줄 사람이 없다는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그때였다.

세드릭에 이어 제이크 역시 앞으로 나섰다.

“……투 파이어 볼.”

그러고는 작은 목소리로 마법 시동어를 외었다.

곧 제이크의 자그마한 두 손안에 구의 형태가 희미하게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화르륵 타오르는 불이 아니라서인지, 상대방에게는 잘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꼬맹이, 넌 또 뭐하니? 어엉? 이게 무슨 싸움 장난으로 보이는 거야?”

“이 어른들은 말이야, 그냥 꼬맹이는 건드리지 않지만 돈 많은 꼬맹이들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탈탈 털어간단다! 그러니 어서 가진 금화를 비롯한 패물들을 다 내놓지 않으련?”

……어휴, 자랑이다.

협박하듯이 우리를 몰아세우는 불량배, 이제는 강도 두 명을 앞에 두고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상하게도 겁이 나지는 않았다.

비록 초소형이지만 괴수를 물리친 전적이 있던 제이크와 함께여서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용감하게 나를 위해 앞으로 나선 세드릭 때문일까?

“그래! 어서 가진 돈 다 내놔라, 어린이들!”

……어쩐지 잠시 후 있을 불량배의 최후가 벌써 눈에 선한 것도 같았다.

* * *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완전히 적중했다.

세드릭이 얼마나 뛰어난 기사인지도 모르고, 제이크가 지금 손안에서 무슨 마법을 시전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협박하던 두 불량배.

그 두 명이 곧 정체불명의 무언가에 얼굴을 공격당한 채 정신을 못 차리게 된 것이다.

정확히는 얼굴이 아니라 머리카락이었지만.

“으아아악! 뜨, 뜨거워!”

그 ‘정체불명의 무언가’는, 바로 제이크가 만든 파이어 볼이었다.

평범한 불이라고 생각하면 큰코다치는 마법이었다.

목표물을 다 태울 때까지 절대로 꺼지지 않는 불이니까.

“내, 내 머리카락! 으악! 누, 누가 불 좀 꺼줘!”

파이어 볼은 신기하게도 불량배의 머리카락만을 노리고 집요하게 타들어갔다.

나름 탐스럽던 그의 금발이 새까만 재가 되어 공중에 흩어져 버렸다.

나머지 한 명은 머리카락보다 풍성한 수염이 집중적으로 타들어갔다.

“으아악! 내 머리! 내 수염!”

불량배가 잔뜩 날뛰었다.

한편 제이크는 또 새로운 마법을 시전하는 중이었다.

분명 몇 달 전엔 파이어 볼 하나만으로도 버거워하던 것 같은데, 그새 연속으로 마법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발전한 모양이었다.

“투 워터 볼.”

불을 붙였으니 이제 불을 꺼줄 차례였다.

물로 만들어진 투명한 구가 두 개 생겨났다.

물의 마법을 쓰는 방법은 다양했다.

호스처럼 뿜어나가기도 하고, 구형으로 하나가 되어 날아가 목표물에 부딪히면 산산조각 나며 데미지를 입히는 경우도 있었다.

아무래도 이번 마법은, 구 모양으로 압축된 물들이 동시에 목표물의 위에서 엄청나게 쏟아져 내리는 것인 모양이었다.

“읍, 으으으! 이어 머아!”

두 불량배의 위로 거의 폭포수 수준으로 물이 쏟아졌다.

두 명 모두 방금 전의 뜨거움은 잊은 모양인지 팔을 휘저으며 몸부림쳤다.

“으으읍! 어푸! 으아푸!”

워터 볼로 묵은 세수를 하기라도 하는 건지 괴상한 소리를 내기까지 한다.

잠시 후, 그들은 보기 좋게 우리 앞에 나란히 쓰러졌다.

‘흥, 꼴 좋다.’

평범한 소매치기라면 조금 과한 처사가 아닐까 싶지만, 이놈들은 무려 어린아이들을 칼로 위협해 돈을 뜯어내려 한 못된 범죄자였다.

오히려 고소하고 시원한 기분마저 들었다.

세드릭은 기껏 검을 꺼냈는데 써보지도 못하고 마법 한 방에 쓰러지다니 아쉽다며 투덜거렸다.

“……이제 어쩌지?”

그들이 쓰러진 걸 확인하고서 우리는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던 중 세드릭이 의견을 제시했다.

“이대로 그냥 풀어주기는 괘씸해. 우리 돈을 다 뜯어가려고 한 놈들이잖아. 그러니까 경비대에 넘기자.”

“좋은 생각이에요!”

내가 맞장구쳤다.

싸움에선 이겼지만 이대로 이들을 두고 가기엔 찝찝했다.

“그런데…… 이 무거운 덩치들을 무슨 수로 옮겨? 두 명이나 있는데.”

그때 니콜라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앨리스가 발랄한 목소리로 해답을 제시했다.

“요정님께 도움을 청할게요. 요정님은 불의를 싫어하시니까 기꺼이 도와주실 거예요.”

“맞다, 너 요정 소환사였지!”

“네.”

잠시 후 에이비시가 나타났다.

그는 우리의 부탁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놈들이 너희에게 강도짓을 하려고 한 그 나쁜 놈들이라고?”

“네! 맞아요. 에이비시 님.”

“혼내주랴?”

에이비시가 제 날개로 쓰러진 불량배의 콧잔등을 툭툭 쳤다.

그에 우리는 화들짝 놀랐다.

“아, 아녜요! 이미 제이크가 제대로 혼내줬어요. 지금은 보다시피 이렇게 쓰러져 있는걸요. 이 사람들을 경비대로 옮기고 싶은데 에이비시 님이 도와주셔야 할 것 같아요.”

“오냐.”

앨리스의 말에 에이비시가 고개를 끄덕이며 힘을 쓰려고 할 때였다.

제이크가 외쳤다.

“잠깐만요!”

“왜 그러느냐?”

“우리가 이 모습대로 경비대에 찾아갈 수는 없으니까 누군가 한 명이 어른으로 변해야 할 것 같아요.”

맞는 말이었다.

대뜸 아이들 여럿이 조르르 들어와서 강도를 때려눕혔다고 말하면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터였다.

그렇다고 제이크와 세드릭의 가문을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어디까지나 잠행 나온 것이니까.

마침 제이크는 혹시 몰라 여분으로 숨겨두었던 아티팩트가 하나 더 있다고 했다.

“그럼 내가 아티팩트를 사용할게.”

“세드릭 님이요? 아, 하긴.”

세드릭의 말에 나는 살짝 놀랐지만 이내 수긍했다.

평범한 차림을 한 우리보다야 수습 기사복을 입고 있는 세드릭 쪽이 조금 더 믿음직해 보일 것이다.

‘어린애들을 위협하는 강도를 때려잡았다는 이유를 대기에도 적당하고.’

그렇게 세드릭은 어른 모습으로 다시 변신했다.

우리는 에이비시의 도움으로 시장 안에 있는 경비대로 향했다.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강도를 잡았다.”

“강도 말씀이십니까?”

“그래. 아이들을 위협하는 강도 놈들을 내가 때려눕혔지.”

세드릭은 일부러 목소리에 힘을 잔뜩 주고 대답했다.

우리는 경비대 근처에서 고개를 기웃거리며 그 광경을 보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다리가 아팠기에 에이비시의 도움을 받았다.

통증을 줄여 준다는 약초를 건네받아 먹은 것이었다.

‘정말로 덜 아픈걸.’

잠시지만 고통이 눈 녹듯 사르륵 사라지는 듯했다.

이윽고 쓰러진 강도 콤비를 확인한 경비대원들이 깜짝 놀랐다.

“대장! 이자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패물들 대부분이 분실 신고가 들어온 것들인데요?”

“이런, 정말이군. 기사님이 큰일을 해주셨어.”

세드릭은 무려 경비대장이라는 사람으로부터 감사 인사를 받았다.

처음엔 멋쩍어하는가 싶더니 이내 경비대를 나올 즈음엔 헤벌쭉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제이크는 그 광경을 보며 살짝 떨떠름하게 웃고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마법으로 불량배들을 처리했는데, 막상 공치사는 세드릭이 모두 받아서 그런 모양이었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그런 제이크를 토닥여 주었다.

“제이크, 물론 세드릭도 용감하게 검을 빼 들고 나서주었지만 네가 마법으로 저들을 쓰러뜨렸잖아.

굉장히 큰일을 한 건 너야.”

“응, 알고 있어. 하지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미르.”

그제야 제이크는 환하게 웃었다.

* * *

이후 우리는 숲에 대기하고 있던 마차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나는 후작저에 도착해서 된통 혼났다.

“아, 아가씨……! 다, 다리가!”

유모를 비롯한 집안사람들이 내 부러진 다리를 보고 기겁하며 곧 쓰러질 것처럼 놀랐다.

외출하셨다가 돌아온 부모님 역시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놀라는 건 아주 잠시뿐.

우리 가족들은 내게 각종 힐링 포션을 먹인 후, 치유 마법사를 불러와 내 다리를 치료했다.

그런 이후에야 내게 잔소리를 시작했다.

알고 봤더니 내가 다리를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두 분이 일정을 취소하고 곧바로 저택으로 돌아오신 모양이었다.

“에미르. 도대체 어떻게 놀았길래 다리가 부러지니. 이 아빠와 엄마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니?”

오늘 시장에 갔다는 사실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다들 내가 유치원 아이들에게 초대받아 놀러 갔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놀다가 그런 게 아니라요, 실수로 계단에서 떨어져서 그렇게 됐어요.”

어쩐지 나는 변명을 하게 되었다.

사실 딱히 변명도 아니고 사실이긴 했지만.

아무튼 그 이후로도 나는 쭉 침대에 누워 있어야 했다.

치유 마법을 사용했지만, 과격한 움직임을 하면 마법이 풀려 다시금 다리뼈가 어긋날 수 있다는 마법사와 의원의 조언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걷는 정도는 괜찮은 거 아닌가?’

하지만 유모와 부모님은 절대로 나를 일어나지 못하게 하셨다.

한 삼 일 동안은 유치원도 못 가고 침대에서 꼼짝없이 앉아 있으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화장실을 갈 때도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내가 스스로 할 수 있는데.’

어쩐지 과보호를 받는 것만 같아서 부끄러워졌다.

그런데…….

‘으으, 배 아파!’

그날 저녁부터 이상하게 배가 살살 아파왔다.

배탈이 난 것일까? 튼튼한 몸을 가진 나로서는 거의 처음 있는 일이었다.

아무래도 후작가에 환생한 이후로는 몸에 좋은 신선한 음식만을 먹어왔기 때문에 더 그런 걸지도 몰랐다.

‘혹시?’

나는 시장에 갔을 때 먹은 음식을 떠올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뭔가 좀 수상해 보이던 스튜를.

‘……몸에 안 맞는 재료가 들어 있었거나, 아니면 위생 상태가 별로였거나.’

맛은 끝내줬었는데.

먹지 말 걸 그랬다고 속으로 생각하며 나는 눈물을 찔끔 흘렸다.

다행히도 옆에 준비되어 있는 힐링 포션을 들이키자 아프던 속은 멀쩡해졌다.

그때 그런 날 옆에서 간호하던 유모가 심심했는지 내게 말을 걸었다.

“그러고 보니 아가씨가 오늘 친우분 저택에 놀러 가셨을 때, 저도 외출을 했답니다.”

“응? 유모도? 어디로 외출했는데?”

유모가 시장에 왔었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나는 시치미를 떼며 모른 척 되물었다.

그러자 유모가 아련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시장에 다녀왔어요. 우리 아가씨는 아직 시장 같은 곳은 안 가보셔서 잘 모르겠지만, 제가 자주 말씀드려서 아시겠지요?”

“아하, 그 사람 많고 이런저런 물건을 파는 장소 말이지?”

“네, 맞아요.”

유모가 웃었다.

나는 슬쩍 떠보듯이 물었다.

“그런데 유모, 갑자기 시장 이야기는 왜?”

“아, 그곳에서 아가씨와 비슷하게 생긴 분을 봤거든요.”

“나, 나랑 비슷하게 생긴 사람?”

나는 흠칫했다.

그거 나잖아.

역시 유모는 그때 나를 꽤 인상 깊게 봤던 게 분명하다.

“그래요. 물론 아가씨 또래는 아니고, 다 큰 어른이었지만 우리 아가씨가 쑥쑥 자라서 성년이 되면 그리 자라지 않을까 싶더라고요. 비록 자세한 얼굴은 못 보았지만 풍기는 분위기며 머리 색도 비슷했고 말이에요.”

“아하하, 그랬구나!”

나는 애써 맞장구를 쳐주었다.

유모는 나를 아련하게 보면서 중얼거렸다.

“우리 아가씨. 이렇게 작은데, 언제 그렇게 자라시려나.”

나는 잠시 물끄러미 그런 유모를 바라보다가 속으로 생각했다.

‘나도 가끔은 그게 궁금한걸.’

일단 아직까지는 시간이 하염없이 느리게만 흐르는 영락없는 꼬맹이였지만 말이다.

* * *

그리고 다음 날 오후.

새런 후작저에 손님들이 찾아왔다.

그 손님들의 정체는, 바로 소중한 내 친구들이었다.

병문안을 온 것이다.

“에미르! 우리가 왔어!”

“다친 다리는 좀 괜찮은가?”

“에미르 님, 선물을 가져왔어요!”

한 마차에서 우르르 내리는 걸 보아, 유치원이 끝나자마자 함께 마차를 타고 온 모양이었다.

“지난번에 오셨던 아가씨의 친우분들이군요!”

하녀장과 집사를 포함한 고용인들이 아이들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다행히도 이번엔 황족들이 방문했다는 이유로 저택이 소란스러워지지 않았다.

이미 지난번 겪은 바가 있어서겠지.

아무튼 집사에게 안내를 받고 내 방으로 온 아이들은, 침대에 누워 있는 나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히, 힐링 마법으로 치료했다고 들었는데 왜 누워있는 거야, 에미르? 아직도 많이 아파? 우리 아버지를 불러서 치료해 달라고 부탁할까?”

특히 제이크가 제일 놀란 듯했다.

제이크의 말에 나는 손사래를 쳤다.

테이온 공작님 같은 분의 시간을 허투루 쓸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

물론 제이크의 부탁이라면 진짜로 오셔서 치료해 주실 것 같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냐, 괜찮아. 제이크. 네 말만으로도 고마워. 사실 마법으로 이미 거의 다 나았는데, 격하게 움직이면 다시 부러질 수도 있다고 해서 이렇게 누워 있는 거야.”

실은 우리 엄마 아빠가 나와 관련된 일에 한해서는 팔불출이 되는 분이라 그런 거지만.

나는 씁쓸하고 아련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아이들은 그런 내 표정을 무슨 뜻으로 알아들었는지, 몹시도 연민 어린 눈빛을 내게 보냈다.

“그러니까 에미르 네 말은, 아직 많이 아프다는 거구나?”

웬만해서는 나를 동정하지 않는 세드릭이 불쌍하다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 이래, 나 건강하다고!’

하지만 멀쩡한 내 낯빛은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모두가 나를 약한 아이 취급하고 있었다.

“언제쯤 유치원에 등원할 생각이지? 네가 없으면…… 유치원이 너무 조용하고 심심해.”

그러던 중 니콜라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자신도 모르게 무의식중에 튀어나온 말이었던 듯, 뒤늦게서야 얼굴을 붉히며 덧붙였다.

“방금 말은 내 속마음이었어. 신경 쓰지 마라.”

속마음을 들어버렸는데 어떻게 신경 안 써요, 전하?

한편 니나이나는, 방문 근처를 지키고 서 있는 황실 호위기사에게 손짓해 무언가를 가져오라 일렀다.

“자, 이걸 받아.”

“이게 뭐예요, 황녀님?”

결 좋고 크고 단단한 나무 상자였다.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무거웠다.

내 물음에 니나이나가 한껏 으쓱이며 대답했다.

“먼 나라에서 들여온 약초즙이야. 뼈를 강철처럼 튼튼하게 해준대.”

“뼈를…… 강철처럼요?”

나는 멍하니 니나이나가 한 말을 되풀이했다.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걸 선물해 준 걸까, 니나이나는.

“그래. 뼈가 약하니까 잘 부러지잖아. 많이 먹고 튼튼해져야 해, 에미르.”

“……네, 알겠어요. 많이 먹고 건강해질게요. 선물 감사합니다, 전하.”

나는 감사 인사를 건넸다.

‘이거 먹고 진짜 뼈가 강철로 변하는 거 아니야?’

잠시 황당한 상상에 빠진 그때, 갑자기 제이크가 내 앞까지 척척 걸어왔다.

“제이크?”

“보여줄 게 있어, 미르.”

자못 비장한 표정이었다.

“응? 보여줄 거라니, 뭔데?”

“네가 다친 이후에, 아버지께 치유 마법을 배우는 중이야. 자 봐, 벌써 약하지만 힘이 생겼어.”

“치유 마법? 벌써?”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기, 나 다친 지 고작 하루밖에 안 지났거든?

‘설마 밤새워서 배운 건가.’

그러고 보니, 제이크의 눈 밑이 어쩐지 살짝 어두워진 것처럼 보였다.

‘안 돼, 제이크! 아직 6살인데 다크 서클이 생기다니.’

나는 깜짝 놀라 제이크의 건강을 염려했다.

“제이크, 우리 나이 때는 일찍 잠들지 않으면 안 돼.”

그러자 제이크가 무슨 소리 하냐는 듯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 일찍 자고 있는데? 어제도 9시에 잠들었어.”

“응? 분명 치유 마법을 배웠다고…….”

“그건 노는 시간 대신 배운 거라서 괜찮아.”

“……!”

그러고 보니 요즘 잊어버리고 있었다.

제이크는 마법 천재였다는 걸.

“……그, 그렇구나. 그렇다면 다행이고.”

어쩐지 내 목소리가 의기소침하게 기어들어갔다.

제이크는 그런 날 눈치채지 못한 건지 살짝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직은 대단한 치유력이 아니야. 그렇지만 반드시 빨리 대단한 치유 마법사가 될 거야.”

“그렇게 된다면 좋을 것 같아.”

넌지시 대꾸했는데, 돌아오는 건 낯부끄러운 맹세였다.

“응. 미르를 옆에서 항상 지켜줘야 하니까.”

“……!”

마치 내 호위기사나 수호천사가 되어줄 것처럼 말하는 제이크였다.

어렵고 복잡한 마법을 배우는 이유가 오직 나라는 것이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역시 고마운 마음이 제일 커.’

내가 배시시 웃었다.

그때, 앨리스가 내게 다가왔다.

한 손에 작은 주먹을 쥐고.

“에미르 님.”

“……?”

“저는 치유 마법도 못 쓰고, 보약도 선물 드리지 못하지만 그래도 드릴 게 있어요.”

아무래도 그 줄 거라는 게 지금 주먹 안에 있는 물건인 모양이었다.

이윽고 앨리스가 주먹을 펴고 감춰놓았던 선물을 공개했다.

“쨘.”

“우와! 이게 뭐예요?”

손가락 두 마디 정도의 크기, 귀여운 다람쥐 모양의 천 인형이었다.

“가방에 달 수 있는 고리 인형이에요. 어제 시장에 갔을 때 머리띠와 같이 팔길래 샀어요.”

내 눈엔 머리띠만 보였었는데, 인형도 같이 팔았던 모양이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인형 고리는 정말로 작고 사랑스럽게 생겼다.

볼이 빵빵한 게 꼭 진짜 안에 도토리라도 물고 있을 법했다.

“정말 귀여워요. 앨리스처럼요.”

나는 무심코 중얼거렸다.

“네에? 전혀요. 오히려 이건…….”

그런데 내 말에 앨리스가 격하게 부정하면서 말끝을 흐렸다.

원래 말은 하다 말면 더 궁금해지는 법이다.

내가 ‘왜 그러지?’ 하는 눈빛을 보내자 앨리스가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음…… 사실, 이건 처음 보자마자 에미르 님을 너무 닮은 것 같아서 산 거거든요.”

“네? 저를요?”

“네. 에미르 님을요. 다들 보세요. 닮지 않았어요?”

앨리스는 다른 아이들에게 인형을 보여주며 의견에 동참을 구했다.

‘……나는 잘 모르겠는데. 어째서 엄마 아빠도 그렇고, 유모도 그렇고, 앨리스까지 나보고 다람쥐를 닮았다고 말하는 거지?’

그 짧은 사이, 나는 도대체 실제로 보는 내 외모가 어떻게 생겼길래 다들 그렇게 말하는 것인가 하고 의문이 들었다.

“오, 닮았는데?”

“나도 닮았다고 생각해.

에미르의 통통한 볼과 똑같아.”

“동그란 눈동자도 같아요.”

……다들 나 놀리는 걸까.

그때, 마침 똑똑 하고 누군가가 내 방을 노크했다.

잡일 담당 하녀였다.

“무슨 일이야?”

“아가씨 이름 앞으로 온 편지가 있어요.”

“……?”

내가 편지를 받을 일이 있나? 아직 데뷔탕트도 치르지 않았는데.

그런 생각으로 편지를 받아들었는데, 봉투 앞면에 베드몬 대공저의 문양이 찍혀 있는 걸 보고 바로 알아차렸다.

‘지난번에 세드릭이 말했던 형 생일 파티인가 보네.’

나는 풋 웃으며 편지를 탁자에 내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옆에서 나를 쳐다보던 세드릭이 날카롭게 질문했다.

“그 편지, 우리 형님이 보낸 거지?”

아니, 말도 안 했는데 어떻게 바로 알아차렸담? 아무래도 세드릭은 촉이나 직감이 발달해 있는 모양이었다.

“아닌…… 맞아요.”

살짝 거짓말을 해 볼까 했으나 이미 세드릭이 100% 확신을 하고 있다는 눈빛을 하고 있길래 사실을 실토했다.

그러자 세드릭이 한숨을 쉬더니 손을 내밀었다.

“편지는 이리 줘. 벽난로에 태워버리자.”

“여름이라 난로는커녕 장작도 없을걸요.”

“그럼 찢어서 화단에 거름으로 주자.”

“…….”

내가 제 가족 생일파티에 참석하는 게 그리도 싫은 모양이다.

남이라서 그런 거겠지.

하긴, 원래 생일은 가족끼리 보내는 게 제일이다.

“알았어요. 자, 여기요.”

그러니까 내년에 있을 세드릭의 생일 역시 오붓하게 세 형제끼리 보내는 걸로.

나는 참석할 일 없는 걸로 해야겠다.

내가 씨익 웃는 걸 뭐라고 생각했는지는 몰라도, 세드릭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 * *

“……안 오네.”

세르반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창밖을 자꾸만 힐끔거렸다.

하지만 아무리 뚫어져라 유리창 밖을 내다보아도, 정문을 통해 들어오는 손님 마차는 없었다.

“흐응, 작은형님. 누구 기다리는 사람이라도 있습니까?”

그리고 그 곁을 여유롭게 스쳐 지나가던 세드릭이 질문했다.

세르반은 여전히 시선을 창밖에 고정한 채 대답했다.

“그때 네가 데려왔던 친구 녀석 말야. 에미르 새런 영애.”

“음? 에미르는 내 친구인데. 작은형님이 웬 볼일로?”

다 알면서도 세드릭은 일부러 비죽거리는 말투를 썼다.

하지만 아직 무언가 세드릭이 수작을 부려놓았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세르반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늘 큰형님의 생일 파티가 있잖아. 거기 네 친구를 초대했거든.”

“아하, 그거라면…… 아마 에미르는 안 올 겁니다.”

“뭐? 세드릭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초대장을 보낸 건 난데?”

세르반이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뒤돌아보며 대꾸했다.

그러자 세드릭이 피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제가 오지 말라고 말했거든요.”

“뭐? 이 자식 장난하나. 왜 오지 말래? 분명 지난번 새런 영애는 내 생일에도, 큰형님 생일에도 방문해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거든! 누구 맘대로 그런 말을 한 거야.”

“제 맘입니다. 제 친구니까요.”

뻔뻔한 세드릭의 대답에 열불이 뻗친 다혈질 세르반이 버럭 외쳤다.

“내 동생의 친구이기도 하거든?”

“형님에게는 ‘내 동생의 친구’, 제게는 ‘친구’. 그러니 에미르가 더 가까운 사이인 제 의견을 따라준 건 당연한 일입니다.”

“웃기시네, 네가 오지 말라고 협박한 건 아니고?”

굉장히 사실에 가까운 물음이었으나 세드릭은 몹시도 뻔뻔하게 대답했다.

“그럴 리가요. 아, 그보다 저기 파티 장식을 실은 짐마차들이 들어오고 있는데 어서 큰형님 생일파티 준비를 하라고 명령해야 하지 않습니까? 자, 가시죠 작은형님.”

그렇게 말하면서 세드릭은 세르반의 등을 저편으로 쭉쭉 밀어냈다.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저택의 식당 테이블에 베드몬가의 삼 형제가 서로를 마주 본 채 앉아 있었다.

작은 규모의 연회를 열어도 될 정도로 넓은 식당엔 꽃이나 생일 축하 플래카드 같은 화려한 장식들이 가득 걸려 있었다.

하지만 그와 대비되게 겨우 세 명뿐인 생일 파티 참가자는 어쩐지 쓸쓸함을 불러일으켰다.

생일 당사자인 세이든은 머리에 알록달록한 고깔모자와 장미 화관을 쓴 채 제일 상석에 앉아 있었다.

고깔모자는 세드릭이, 화관은 세르반이 씌워준 것이었다.

“…….”

그는 의자에 앉아 얼떨떨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유치하고 발랄한 장식품들의 향연에 눈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머리 위에서 느껴지는 무게감과 이질감에 손을 뻗어 제게 씌워진 꽃 모자를 만져보던 세이든은 허탈함 반 약간의 기쁨 반으로 입꼬리를 올렸다.

‘하아, 이걸 대체 언제 다 준비한 거야…….’

세이든은 애써 한숨을 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왜냐하면 그의 바로 눈앞에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내는 두 동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형님이 마음에 들어 하실까?’

‘깜짝 파티! 생일 파티!’

입 밖으로 안 꺼내도 얼굴에서 이미 무슨 생각을 하는지 다 보였다.

사실 세이든은 방금 전 막 황궁에서 돌아온 터였다.

그런데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갑자기 두 동생이 안대를 씌워 자신을 어딘가로 데려가는 게 아닌가.

“……?”

계단을 빙글빙글 올라가고, 복도를 쭉 걸어가서 도착한 장소는 어딘지 익숙했다.

이윽고 ‘쨘!’ 하는 외침과 함께 벗겨진 안대.

그리고 나타난 게 바로 이…… 쓸데없이 조잡하게 화려한 생일 파티의 현장이었다.

‘몇 주 전부터 둘이 나만 보면 생일이 어쩌니 속닥이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보군.’

심지어 꼴에 구색은 맞춰놓아서 작은 악단까지 불러놓은 터였다.

악단의 연주자들이 형제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연주를 시작했다.

은은한 피아노 선율이 장내를 채웠다.

“……생일 축하 고맙다.”

결국 세이든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은 채 간신히 그렇게 말했다.

이 나이 먹고 아이들이나 할 법한 생일 파티를 받게 되어서인지, 아니면 내심 기뻐하고 있어서인지는 몰라도 그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갰다.

“이 정도 가지고 고맙긴, 형님도 참.”

“에헴, 작은형님이랑 저랑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세드릭과 세르반은 어깨를 한껏 으쓱이며 대꾸했다.

아닌 척해도, 이전까지는 긴장하고 있다가 세이든이 마음에 든다고 하니 안심한 기색이 눈에 훤했다.

“……야, 솔직히 너보다는 내가 더 많이 준비하지 않았어? 악단을 부르라고 이른 것도 나고, 주방에 생일 음식 명단을 넘긴 것도 난데.”

“무슨 소린지. 이곳을 꾸민 장식품들은 다 제가 주문했습니다.”

물론 자기들끼리 누가 더 열심이었네 하고 다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버지, 어머니 두 분 다 바쁘셔서 못 오신 게 아쉽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세드릭이 중얼거렸다.

이전에 자신이 열었던 가족 티파티에는 운 좋게 몇 번 온 가족이 모일 수 있었지만, 오늘은 일정 문제로 이렇게 셋만 모이게 된 것이었다.

“그건 그래. 우리 말고는 초대할 사람이 없어서 그것도 아쉬워.”

세드릭의 말에, 세르반은 뒤로 기지개를 쭉 켜며 무심코 중얼거렸다.

그런데 그 말을 듣고 무언가 생각났는지 세드릭이 투덜댔다.

“……분명 작은형님이, 친우들을 초대하겠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며칠 전에 그런 말을 들었었는데.”

“어? 아하하……! 으음, 내가 그런 말을 했었던가? 기억에 없는데?”

세드릭의 말에 세르반은 당황하더니 이내 사실이 아니라며 부인했다.

하지만 세드릭은 끝끝내 따지고 들었다.

“아닙니다. 분명히 들은 기억이 똑똑히 나거든요.”

“아니라니까! 그런 말 한 적 없다니까!”

세르반이 버럭 성질을 냈다.

그 순간 어울리지 않게도 잔잔한 왈츠가 연주되었다.

그때 세드릭이 뭔가를 알겠다는 듯이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혹시…… 작은형님 친구가 없으신 건지?”

“젠장, 아니라고!”

세르반의 얼굴이 붉게 타오르듯이 변했다.

하지만 되려 그 반응은 ‘친구가 없다’는 게 사실임을 알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잠시 씩씩대던 세르반이 세드릭에게 되물었다.

“그러는 너도 친구가 없긴 매한가지 아니야, 세드릭? 네 친구들도 오지 않았잖아. 유일한 친구 녀석, 그러니까 에미르는 온다는 애를 못 오게 막고 말이야.”

“그럴 리가요. 친구들이 없는 게 아니라 일부러 초대를 안 한 겁니다.”

세드릭의 유려한 대답에 세르반이 머리를 쥐어뜯으며 중얼거렸다.

“아아, 거짓말이 분명해. 유치원에서도 분명 저 자식 구석에서 혼자 놀고 있을 게 분명하다고.”

“아닌데요? 그건 작은형님 이야긴데요?”

세드릭이 얄밉게 대꾸했다.

그 말다툼을 관망하던 세이든이 넌지시 나서 둘을 중재했다.

“자, 다들 그만해라. 그런 사소한 것 가지고 형제끼리 싸우지 말자.”

“아니, 잠시만요. 형님. 이건 사소한 문제가 아닌 것 같다고요.”

세르반이 불퉁하게 입술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때 세이든이 내뱉은 한마디에, 금세 모두가 조용해졌다.

“나도 황궁에서 일하는 동료 이외에, 사석에서 만나는 친우가 없으니까 말이다. 그러니 너무 상심해하지 마라. 세르반.”

“…….”

“……아.”

이후 멍한 얼굴을 계속 하고 있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표정으로 세르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저뿐만이 아니었던 겁니다. 우리 삼 형제가 모두 친구가 없다니 정말로 공교로워요. 가문에 내려오는 저주인 겁니까?”

“세르반 형님, 저는 빼주시죠.”

세드릭이 슬쩍 끼어들었지만 매정하게 쳐내는 세르반이었다.

“시끄러워. 네 친구라고는 에미르 뿐이면서. 그 애도 분명 어쩔 수 없이 너와 놀아주는 게 분명해.”

“그럴 리가요. 에미르는 제가 멋있고 대단하다고 했습니다.”

“내가 그걸 물어봤냐?”

“……다들 그만하라니까. 초가 다 녹겠다.”

다행히도 세이든의 말에 둘은 정신을 차렸다.

정말이었다.

아까 시종이 켜주었던 케이크 위의 초가 흐물흐물 녹아내려 케이크 위가 온통 밀랍이 되기 직전이었다.

그들은 급하게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잘랐다.

“……어쩐지 쓸쓸합니다.”

“동감이다.”

“저도 그렇습니다.”

이후 은은한 음악 소리와 함께 조용히 케이크를 먹으며 그들은 외로이 중얼거렸다.

목소리가 커다란 공간 안에서 작게 메아리쳐 울렸다.

정말이지 비운의 대공가 삼 형제였다.

친구가 없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때였다.

갑작스레 식당 문이 열리고 집사가 무언가 꾸러미를 들고 나타났다.

아마, 선물로 추정되었다.

“응?”

기사 가문이었기에 세 형제 모두 집사가 저 멀리 복도에서 걸어올 때부터 알아채고 있었다.

세 명의 시선이 선물 꾸러미로 모아졌다.

“그건 뭐지?”

“아, 세이든 님 앞으로 선물이 왔습니다. <생일 축하합니다>라고 적혀 있군요. 새런 후작저의 에미르 영애님께서 보내신 것입니다.”

“뭐라고! 에미르가!”

집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벌떡 일어난 세드릭은 한달음에 달려가 꾸러미를 확인했다.

총알 같은 속도였다.

그 때문에 뒤늦게서야 세이든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내게 온 선물인데, 왜 네 것처럼 구는 거지.”

하지만 그 작은 혼잣말을 잘도 들은 세드릭이 여전히 시선은 꾸러미에 향한 채 대꾸했다.

“그야 보낸 사람이 제 친구니까요.”

“……정말이지 대단한 우정인 것 같다.”

“와우, 그러게 말입니다.”

농담 반 놀라움 반으로 세르반과 세이든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한다는 듯 말했다.

“이리 가져와 봐라. 선물이 궁금하다.”

세이든의 명으로 집사가 선물을 가져와 삼 형제의 눈앞에서 개봉했다.

상당히 부피감 있던 꾸러미 안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고급스러운 재질의 망토였다.

흰색과 금색이 어우러진 황궁 기사 제복에 어울릴 법했다.

“우와! 이거 정말 멋진데요?”

평소 옷에 별로 관심이 없는 세르반도 감탄할 정도였다.

선물 받은 당사자인 세이든 역시 마음에 들었다.

다만 세드릭 혼자서 어쩐지 별로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에미르…… 지난번에도 멋있니 어쩌니 칭찬을 해대더니…… 정말 너무해…….”

뭐라고 꿍얼거리는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힘없이 세이든을 향해 건넸다.

“이게 뭐지, 세드릭?”

“……큰형님 생일 선물입니다. 받으세요. 생일 축하해요.”

방금 전과 달리 잔뜩 힘이 빠진 목소리였다.

사실 세드릭은 내심 꾸러미를 확인할 때, 친구인 자신에게 보내는 무언가도 있으리라고 기대했다.

오늘은 제 생일도 아닌데 말이다.

바보같이 무슨 기대를 한 것일까?

‘젠장, 편지라도 있으면 좋았잖아!’

그러니까 무슨 편지? 하여간 세드릭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를 것이었다.

하물며 제 자신조차.

아무튼 그리하여 속이 상한 세드릭은 원래 깜짝 선물로 파티가 끝날 무렵 주기로 했던 것을 그냥 세이든에게 전달해 버렸다.

“지금 풀어봐도 될까?”

“……큰형님 맘대로 하세요.”

퉁퉁 불어터진 얼굴의 세드릭과는 달리, 귀여운 막내동생에게 생일 선물을 받은 세이든은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숨길 수가 없었다.

허락이 떨어지고 세이든은 조심스레 꾸러미를 풀었다.

안에서 나온 것은, 넥타이와 부토니에 장식이었다.

‘……세드릭.’

세이든은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평소 가족을 포함한 주변인들에게 별 관심 없어 보이던 세드릭은 알고 보면 제 형이 좋아하는 무늬나 색깔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고맙다. 세드릭. 잘 사용하도록 할게.”

세이든은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감사 인사를 했다.

그러자 아닌 척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드릭의 목소리가 살짝 풀어졌다.

“……고맙긴요.”

“정말 마음에 들어.”

옆에서 세르반이 ‘헉, 나는 선물 준비 못 했는데! 어떡하지!’라며 꽥 소리를 질렀다.

그에 세이든과 세드릭이 웃음을 터뜨렸다.

단 세 명뿐이지만 나름 화목한 생일 파티였다.

* * *

‘아무리 그래도 초대장을 받았는데, 그냥 모른 척할 수가 없어서 선물을 보냈지. 그런데.’

나는 하하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요 며칠 세드릭이 삐진 얼굴로, 내게 은근히 자신의 다음 생일을 언급하는 걸 보고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내가 제 생일에는 별다른 걸 안 해줬다고 토라진 모양이야.’

만약 미리 말해줬더라면 나도 세이든에게 보낸 것 그 이상으로 챙겨 줬을 텐데 말이다.

애초에 세이든에게 생일 선물을 보낸 것도, 세이든이 세드릭의 형이라서인데.

설마 제 친형에게 치졸하게 질투하는 건 아닐 테고 말이지. 세드릭.

‘그보다…… 비가 오네.’

나는 문득 창밖을 바라보았다.

내 방에는 창문 위치에 맞게 높은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가끔 그곳에 걸터앉아 깊은 생각에 잠길 수 있는 용도였다.

나는 끙차 하고 의자에 올라앉았다.

이내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창문을 사이에 두고 들려왔다.

쉴 틈 없이 흘러내리는 수많은 물방울로 뿌예진 창문에 내 얼굴이 희미하게 비쳐 보였다.

‘이제 여름 장마가 시작되려나 봐.’

원작 소설 속에서도 언급되었고, 실제로도 내가 몇 해 동안 살아오면서 경험한바.

이 세계에도 사계절이 있었다.

꼭 내가 원래 살던 곳처럼 말이다.

‘기분이 날씨처럼 눅눅해졌어. 에잇.’

사실 나는 비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글쎄, 아주아주 어릴 땐 좋아했으려나? 하지만 양말을 신을 나이가 된 이후부터는 아니었다.

비가 오는 날엔 항상 양말이 축축하게 젖어버리니까.

* * *

‘그래, 바로 지금처럼!’

나는 진저리를 치며 내가 실수로 밟아버린 빗물 웅덩이를 노려보았다.

덕분에 새하얀 양말이 흙탕물 빛으로 변해 버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튿날도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유치원에 가는 날인데, 아침부터 기분이 구질구질해졌다. 에휴.

“어머! 아가씨, 양말을 갈아신고 가셔야겠네요.”

“응, 유모. 그래야 할 것 같아. 혹시 모르니까 여분 양말도 좀 챙겨줘. 또 이런 일이 생길지 몰라.”

다행히도 아직 출발하기 전이라, 나는 유모로부터 새 양말을 건네받고 마차에 탈 수 있었다.

하지만 잠시 후 또 다른 문제가 생겼으니.

바로…….

‘우산을 안 챙겼어! 어떡하지?’

마차에 탈 때 유모가 씌워준 우산을 가져왔어야 하는 건데, 양말에 신경 쓰느라 미처 유모도 나도 깜빡해 버리고 말았다.

마차는 유치원 문에 달린 차양 앞까지 가지 못해서, 필연적으로 비에 노출되는데 말이다.

‘그래도 이곳 비는 산성비가 아니니 몸에는 나쁘지 않겠지. 후우.’

결국 나는 내리자마자 비 맞을 각오를 하고 뛰어서 문까지 가기로 했다.

슬프게도 그런 결심을 하는 도중에도 빗줄기는 점점 굵어져 어느덧 장대비가 되었다.

후두두두둑-

마차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가 아주 우렁찼다.

잠시 후, 유치원에 도착한 나는 마차가 멈추자마자 문을 열고 그대로 뛰어내렸다.

그런데…… 머리 위에 떨어지는 빗물이 느껴지지 않았다!

“……?”

뭔가 싶어 시선을 위로 향하니, 웬 우산이 있었다.

하나도 아니고 무려 둘이!

“황녀 전하? 황자 전하?”

나는 오른쪽을 돌아보고 니나이나가 있다는 것에 놀라고, 왼쪽을 또 돌아보고 니콜라스가 있다는 것에 한 번 더 놀랐다.

“안녕. 에미르. 우산 없지?”

“아, 네…….”

니나이나의 물음에 나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같이 쓰고 가도록 하자.”

니나이나가 싱긋 웃으며 내 쪽을 향해 우산을 기울였다.

니나이나의 우산은 와인빛의 화려한 프릴이 달려 있었다.

얇은 레이스 원단이었지만 방수 마법이 걸려 있어 하나도 비가 새지 않았다.

그때, 니나이나의 우산을 살짝 밀고 니콜라스의 우산이 내 어깨에 닿아왔다.

“아니, 내 걸 쓰도록 해라. 니나이나의 것보다 내 우산이 더 크니까.”

니콜라스의 우산은 저처럼 단순한 디자인의 잿빛이었다.

어른 두 명 정도는 붙어서 쓸 수 있을 정도로 크기도 했다.

‘으음, 고민되네. 누구 걸 써야 하지.’

두 명이서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는게 마치 ‘누가 더 좋아?’라고 묻는 것 같아서 더욱더 고민되었다.

‘큰 니콜라스의 우산인가, 먼저 제안해 준 니나이나의 우산인가. 으으음.’

그때였다.

고민할 시간에 빨리 유치원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하는 것처럼, 갑작스레 하늘에서 천둥이 쳤다.

쿠르릉, 쾅쾅쾅!

하늘을 북 치듯 두드리는 것 같은 굉음에 나는 깜짝 놀라 펄쩍 뛰었다.

물론 내 옆에 아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냥 뛰어서 들어가요!”

우리는 부리나케 달렸다.

그렇게 건물에 막 도착하자마자, 타이밍 좋게 번개가 쳤다.

파지지직-

먹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갈라내듯이 하얀빛 번개가 보였다.

순간 어두웠던 세상이 환해졌다.

“……번개는 무서워. 천둥도 무섭고.”

“저도 그래요, 전하.”

그리고 옆을 돌아보니 니나이나가 손으로 두 귀를 막은 채 질린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동의하며 아이들과 함께 문을 열고 들어갔다.

* * *

수업 시간에도 계속해서 비가 내리고 천둥 번개가 쳤다.

심지어 원래 있었던 수업 중 하나가 비었다.

선생님이 마차를 타고 오던 도중 마차 바퀴가 진창에 빠지는 사고가 나서라고 했다.

덕분에 우리는 때아닌 독서 자습을 하게 되었다.

그림책을 읽다 말고 나는 슬며시 상상에 빠져들었다.

‘오늘 같은 날은, 꼭 전생에서 보았던 스릴러 영화의 한 장면 같아.’

창밖에서 들려오는 천둥소리 때문인지도 몰랐다.

꼭 쾅쾅 문을 세게 두드리는 것 같았으니까.

‘천둥소리가 이렇게 들리는데, 만약 지금 이게 진짜로 누군가가 유치원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라면 어떨까? 그것도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

나는 한 손으로 턱을 받친 채 멍하니 공상에 빠져 있었다.

‘심지어 그게 나쁜 놈인 거야. 지난번 우리가 시장에서 만난 불량배들처럼. 물론…… 이곳에는 우리를 지켜주는 황궁의 호위기사들이 있으니까 괜찮겠지만 말이지.’

그렇지만, 만약에.

그 정예 기사들의 호위를 뚫고 침입자가 갑자기 이 교실로 뛰어들어 온다면? 그렇게 되면 나는 어떻게 행동할까?

‘이곳은 딱히 숨을 데가 마땅치 않아…… 그나마 책장 근처가 나을지도 모르겠네.’

전생에서 다니던 학교라면, 비어 있는 청소 용구함이나 교탁 밑에 재빨리 기어들어 갔을 텐데 말이다.

“……물론 그런 일은 없을 테지만.”

나는 무심코 그 한마디를 조용히 중얼거렸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툭-

툭?

갑자기 무언가가 끊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눈앞이 어두워졌다.

‘뭐, 뭐지? 조명이 꺼졌어!’

나는 당황했다.

그건 교실 안에 있던 다른 아이들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어라?”

“……뭐야?”

이상한 일이었다.

물론 내가 전에 살던 세계에서야 벼락이 치면 전기 장치에 문제가 생겨서 정전이 되는 일이 심심찮게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는 애초에 ‘정전’이라는 개념이 불가능했다.

왜냐하면 조명등 같은 현대의 물건과 비슷한 것은 대부분이 마법으로 작동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대체…….’

의문을 가지며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복도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러더니 밖에서 누군가가 외쳤다.

“자, 자객이다! 2층에 침입자가!”

“어서 전하 두 분과 영애, 영식들을 지켜!”

“나머지는 2층으로 먼저 올라가서 싸워라!”

……네? 자객이요? 아무리 내가 방금 침입자가 나타나는 상상을 했다지만 이건 좀 너무하잖아!

“자객……!”

“어, 어떡하지? 숨어야 해?”

“뭐야, 이거 진짜야?”

어느새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우왕좌왕하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상황은 다들 처음일 테다.

나도 그렇고.

“……이, 일단 숨어야 하지 않을까요?”

앨리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역시 동의했다.

자객의 수가 얼마나 많은지는 몰라도 황궁 기사들과 한 명의 마법사만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안위가 위험해진다.

하지만 문제라면 우리 6명이 안전하게 숨을 수 있는 장소가 어디냐는 것이었다.

‘아, 거기라면 괜찮을지도?’

그러다 문득 한 장소가 떠올랐다.

바로 사물함이 있는 방에 있는 비밀 장소.

“우리 다들 사물함이 있는 방으로 가요! 그곳에 제가 아는 비밀 장소가 있어요.”

“그, 그게 정말이야?”

세드릭은 내 말에 무언가를 알아챈 듯 보였고, 다른 아이들이 화색을 띠었다.

그런데 걱정이 또 생겼다.

혹시 문을 열고 나갔는데 복도에 이미 자객이 와 있으면 어떡하지?

그 때문에 나는 말을 꺼내고도 바로 문을 열지 못하고 망설였다.

다행히도 그런 날 알아챈 제이크가 나를 안심시켜 주었다.

“언제든 바로 마법으로 공격할 수 있게 준비할게.”

“응, 고마워 제이크.”

우리는 문을 열고 조심스레 복도로 나왔다.

불이 다 꺼진 데다 창문도 없어 교실보다도 어두컴컴했다.

저 멀리 복도 끝, 2층으로 통하는 계단에서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와 괴성 소리가 번갈아 들려왔다.

우리는 처음 느껴보는 공포심에 온몸이 오들오들 떨려왔다.

조심스레 벽을 짚어가며, 그렇지만 혹시라도 기사들의 방어를 뚫고 이쪽까지 자객들이 올까 두려워 최대한 빠르게 우리는 사물함이 있는 방으로 이동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다행히도 사물함 이외에 다른 이의 침입 흔적은 없어 보였다.

나는 재빨리 사물함 옆 벽돌을 조작해 비밀 통로의 입구를 열었다.

스르륵, 있는지도 몰랐던 먼지 쌓인 입구가 드러났다.

나는 아이들을 하나둘씩 안으로 밀어 넣고 마지막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잡아라! 저쪽으로 빠져나간 놈이 있다!”

기사단장의 우렁찬 외침 소리와 함께, 무언가가 이쪽으로 향하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자객이기 때문에 최대한 소음 없이 다니는 모양이었지만 그래도 직감으로 느낄 수가 있었다.

“어서 문을 닫아야 해!”

마지막으로 제이크를 안고 함께 통로로 들어간 나는 문을 닫았다.

스르륵, 열릴 때와 마찬가지로 문이 닫혔다.

동시에 사물함 방의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기 숨어 있나? 방금까지 있던 흔적이 보이는데?”

전혀 모르는 낯선 자의 음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정말로 간발의 차였다.

목소리의 주인이 우리를 발견하기 직전, 바로 앞에서 문이 소리 없이 닫혔다.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느낌에 소리 없이 주저앉았다.

뒤늦게서야 안도의 한숨을 길게 쉬었다.

“하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변이 캄캄한 어둠뿐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지난번에 왔을 땐 분명 조명으로 잔뜩 밝힌 내부였는데 말이다.

‘아무래도 자객들이 들어오면서 유치원 내부에 있는 마법 조명 시스템을 건드린 모양이야.’

창문이라도 있던 외부와 다르게여기는 빛 한 줄기 없는 곳이라 그런지 아예 보이지가 않았다.

‘끙.’

그때였다. 제이크가 갑자기 무어라 중얼거렸다.

“……라이트 볼.”

직후, ‘팟’ 하고 무언가가 눈앞에서 터져 나왔다. 작은 구 모양의 밝은 빛이었다.

“우와, 불빛이 생겼잖아?”

“마법으로 빛을 만들 수 있다니 대단해, 제이크 공자.”

아이들이 기뻐했다. 물론 나 역시 그랬다.

빛이 생기니 숨통이 조금 트이는 기분이었다.

우리는 불빛을 가지고 있는 제이크를 중심으로 둥그렇게 둘러앉았다.

그러고는 서로 맞추기라도 한 듯 침묵에 빠졌다.

“……우리 언제쯤 나가야 하는 걸까?”

잠시 후, 니나이나가 혼잣말하듯 조심스레 질문했다.

평소의 니나이나답지 않게 조금 침울한 목소리였다.

사실 나도 궁금하던 참이었다.

얼마나 기다려야 자객들이 모두 사라질까?

우리를 구하러 오는 기사들이 있을까?

교실에 갔더니 우리가 사라져 있어 납치된 것으로 오해하지는 않을까?

이곳은 약간의 공기 구멍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밀폐된 공간이었다.

출입구에 달린 문도 굉장히 두꺼웠기 때문에 바깥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있어도 들리는 소리라고는 우리의 야트막한 숨소리와 웅웅 울리는 빈 공간의 소리뿐이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뒤늦게서야 나는 니나이나에게 대답하며 고개를 양옆으로 살짝 저었다.

그때, 앨리스가 내게 질문했다.

“그, 그런데 에미르 님. 이런 곳이 있다는 걸 어떻게 알고 계셨던 거예요? 저는 이 유치원에 비밀 장소가 있다는 건 꿈에도 몰랐어요.”

“아, 그건.”

내가 막 대답하려 할 때 세드릭이 말을 가로챘다.

“흠, 사실 이곳은 예전에 내가 제일 먼저 찾았었어.”

“……맞아요. 몇 달 전 세드릭 님이 이런 장소가 있다는 걸 알려줬어요.”

“아하, 그랬구나.”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또다시 침묵이 찾아올…… 뻔했지만, 앨리스가 또다시 말을 꺼냈다.

“한번 요정님께 부탁드려 볼까요? 유치원 안을 살펴봐 달라고요.”

“음, 좋은 생각인 것 같지만…….”

나는 살짝 눈치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마음에 걸리는 게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그래도 에이비시 님은 무려 요정왕이신데, 너무 자주 부탁을 하는 게 아닌가 걱정돼요.”

“아, 그건 걱정 마세요! 에이비시 님이 제게 그러셨어요. 망설이지 말고 언제든 필요할 때 부르라고요.”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꼬장꼬장한 에이비시의 성격을 생각한 나는 잠시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달리 뾰족한 수도 없으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도움을 청해봐요.”

잠시 후, 제이크가 만들어낸 불빛 크기만큼의 불빛이 하나 더 생겼다.

에이비시가 나타난 것이다.

“그래, 이번엔 또 무슨 일로 나를 불렀니? 이 어두침침한 곳은 또 뭐고?”

“그게요, 요정왕님.”

앨리스의 설명에 에이비시의 낯빛이 점점 어두워졌다.

하긴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손녀처럼 여기는 계약 소환사가 다니는 유치원에 갑자기 자객이 나타나다니!

정말이지 뭐라 말로 하기 힘든 기분이지 않을까.

잠시 후 에이비시는 우리의 앞에 투명한 막처럼 보이는 무언가를 띄워 주었다.

“이게 뭐예요?”

“바깥의 상황을 볼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이다.”

“우와, 신기하다.”

CCTV 같은 개념의 마법인 모양이었다.

제이크는 ‘이것도 나중에 배워야지’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내 우리는 화면을 향해 집중했다.

“일단 교실부터 보고 싶어요, 에이비시 님.”

“오냐.”

곧 화면이 팟 하고 바뀌었다. 그렇게 비친 교실은…… 놀랍게도 난투의 흔적 하나 없이 멀쩡했다!

다만 앞뒤 문이 활짝 열려 있고 마루에 검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분명 자객 중 누군가가 우리를 찾아 교실 안을 뒤진 게 틀림없었다.

“그럼 이번엔 복도요!”

복도로 화면이 바뀌었다.

동시에 우리는 깜짝 놀랐다.

기사들이 두 손으로 깔때기 모양을 한 채로 무어라고 외치면서 복도를 헤치고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소리를 들을 수 있나요, 에이비시 님?”

입 모양을 보아 우리를 찾고 있는 것 같은데, 확실히 하고 싶었던 터라 나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러자 곧바로 화면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황자 전하! 황녀 전하!”

“다들 어디 계십니까!”

정말로 우리를 찾고 있는 게 맞았다.

간절한 외침이 바로 앞에서 듣는 것처럼 생생하게 귀에 들어왔다.

“……우리를 찾는 걸 보니, 자객들은 모두 해치웠나 봐. 이제 나가도 되지 않을까?”

세드릭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하지만 에이비시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은 해야 한단다. 언제나 말이다.”

옳은 말이었다.

곧 화면이 저절로 바뀌며 유치원 구석구석을 비추었다.

사람이 없는 공간이 몇 번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몇 번.

이내 보인 것은 다름 아닌 쓰러지거나 포박된 채 한곳에 있는 자객들이었다.

에이비시는 우리의 정신 건강 보호를 위해서 화면의 화질을 흐리게 바꾸었다.

그러자 그들의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쓰러진 몇몇은 죽음을 맞이했거나 정신을 잃어버린 듯했다.

포박된 채 앉아 있는 이들은 상처를 입었지만 나름 멀쩡해 보였다.

주변엔 그들이 쓰고 있던 복면이 벗겨져 나뒹굴고 있었다.

‘기사님들이 이겼나 봐!’

화면이 조금 옆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혹시라도 자객들이 포박을 풀고 도망가지 않도록 그 곁을 지키고 서 있는 기사들이 보였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기뻐한 것도 잠시.

그 옆에 기사복을 입은 누군가가 다친 채로 쓰러져 있는 게 보였다.

‘저, 저 기사님은!’

우리의 눈이 커다래졌다.

쓰러진 기사님은 다름 아닌 유치원 호위병들을 통솔하는 기사 단장이었다.

다른 기사들보다도 앞장서서 싸우다 상처를 입게 된 걸까?

평소 무뚝뚝한 보통의 기사들과는 달리 살갑게 인사를 나누던 분이라 그런지, 저렇게 다친 걸 보니 목덜미가 싸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다행히도 그의 옆에서 응급처치를 하는 이들이 있었다.

우리는 잠시 화면을 보며 침묵했다.

에이비시가 큼, 큼 하고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화면을 돌려 버렸다.

화면에 비치는 건 유치원의 문 앞 전경이었다.

여전히 비가 오고 있었다.

웬 황궁 마차가 여러 대 도착해 있는 게 보였다.

그 마차를 보자마자 니나이나와 니콜라스가 동시에 외쳤다.

“……저 마차는!”

“어마마마, 아바마마가 오셨나 봐!”

황제 내외의 마차인 모양이었다. 소식을 그새 전해 듣고 급하게 온 게 분명했다.

마차에서 내린 황제, 황후 폐하의 곁을 족히 50여 명에 가까운 기사들이 둘러싸며 호위했다.

‘아무래도 방금 자객 습격 사건이 일어났으니, 더욱더 철저해질 수밖에.’

근처에 황궁에 고용된 고위 마법사들도 자리를 지키고 서 있는 게 보였다.

이후 두 분은 상황 보고를 하는 기사와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고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그럴 만도 했다.

어린 자식들이 사라졌다는데 얼마나 충격적인 소식일까.

“……송구합니다. 폐하. 니콜라스 황자 전하, 니나이나 황녀 전하. 그리고 나머지 영애, 영식님들 모두 행방불명입니다. 침입자들은 총 여덟 명, 그중 두 명이 자결하였고 두 명을 처치, 나머지는 생포하였습니다.”

“……!”

기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황제 폐하가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다행히도 옆에 서 있던 황후 폐하와 기사들이 부축해 주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생각했다.

지금 나가지 않으면 안 될 것 같다고.

에이비시 역시 작은 몸으로 우리의 등을 떠밀며 말했다.

“자, 이제 나가도 될 것 같구나. 다들 걱정하고 있는 게 보이는군. 그럼 나는 이만…….”

에이비시가 홀연히 사라졌다.

사라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화면에 보인 것은 마법 통신석으로 누군가와 연락하던 보좌관이 반색하며 황제 폐하에게 무어라 말을 전하는 장면이었다.

“어서 나가자!”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하지만 외침과는 다르게, 바로 달려 나갈 수 없었다.

아무래도 계속해서 찬 돌바닥에 앉아 있었기에 몸이 굳어버린 탓이었다.

단, 평소 꾸준히 신체를 단련해 온 세드릭만 빼고.

‘다리에 쥐 났어!’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일어선 순간 전기가 통하는 듯 다리 근육에 찌르르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아이들도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드릭은 그런 우리를 조금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마치 ‘아니, 어떻게 이 정도 앉아 있었다고 다리가 아파? 이런 약골들’이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

‘기사랑 일반인이랑 같냐고!’

나는 항의해 주고 싶은 기분을 꾹 참으며 다리를 주물렀다.

주변 아이들도 그런 나를 보며 작은 손으로 각자 제 다리를 마사지했다.

이윽고 세드릭이 말했다.

“다들 일어났다가 앉았다를 5번씩 해요. 그럼 괜찮아질 거예요.”

“…….”

우리는 시키는 대로 잠자코 따랐다. 그랬더니 정말로 괜찮아졌다.

“자, 이제 진짜 나가자!”

우리는 재빨리 옹기종기 모여서 문을 열었다.

열리자마자 달려 나갈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문을 열자마자 보인 것은…….

“황제, 황후 폐하!”

“다들 여기 있었구나! 아아, 니나이나! 니콜라스!”

황제 폐하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우리를 향해 달려오셨다.

그 뒤에 서 있던 황후 폐하도 마찬가지였다.

시중인과 우산도 팽개치고 급하게 오신 모양인지 두 분의 옷과 머리칼이 빗물에 쫄딱 젖어 있었다.

두 폐하의 뒤엔 보좌관과 기사를 비롯한 여러 사람이 함께였다.

다들 우리를 발견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다들 우리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나는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그 의문에 대한 해답은 곧 밝혀졌다.

황제 폐하의 옆에 있던 보좌관이 뭉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다행입니다. 모두 이곳에 계셨군요. 혹시나 해서 유치원을 설계한 건축가와 통신석으로 연락을 해보았는데, 이곳에 비밀 공간이 숨겨져 있다고 하여 찾아왔습니다.”

다들 반신반의하며 왔지만, 기적처럼 우리가 이곳에서 나온 것이었다.

“……흐윽, 어마마마. 너무 무서웠어요. 갑자기 자객이 나타났다고 해서. 흑.”

한편 방금 전까지 의연한 모습을 보이던 니나이나가 황후 폐하의 품에 안겨들어 엉엉 울고 있었다.

그래, 아무래도 많이 무서웠을 것이다.

안온한 가족의 품에 안기니 긴장감으로 애써 포장하고 있던 두려움이 터져 나온 거겠지.

니콜라스 역시 눈시울을 붉히며 황제 폐하와 두 손을 꼭 맞잡고 있었다.

‘어쩐지 감동인걸…….’

나 역시 그 광경을 보며 속으로 뭉클한 감정을 느꼈다.

황족이라 해도 결국 사랑하는 가족에게 느끼는 감정은 보통 사람들과 다를 바가 없구나.

코끝이 찡해졌다.

* * *

자객 습격 사건 이후로 약 며칠간 우리는 유치원에 나가지 못하게 되었다.

이번과 비슷한 일이 또다시 일어나지 않게 유치원의 마법 보안 체계를 강화하는 작업을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황궁에 다녀오신 아빠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전해 들을 수 있었다.

황실에서 주관하는 광산 사업 과정에서 이권 다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그 광산은 마력석의 원료가 되는 광물을 캐내는 아주 중요한 곳이었다.

광산이 자리하게 될 산맥은 제국과 근처 왕국의 경계선에 걸쳐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광산 자체는 제국의 국경선 내에만 자리해 있었기에 별문제가 없을 줄 알았는데…….

하필이면 그 산맥에 비밀리에 도망쳐서 숨어 지내던 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바로 반역 혐의로 사형당할 뻔했던 왕국의 폐공작 일당이었다.

폐공작은 자신을 따르는 가신들과 함께 숨어 지내다, 이내 근처 도적 무리와 협력하여 그곳에 있는 마력석의 원료가 되는 광물을 몰래 빼돌려 왔다고 한다.

하지만 이번에 광산을 시찰하러 간 황궁 병사들에게 단단히 걸려 버린 모양이었다.

황실은 도둑들을 붙잡아 그동안 빼돌린 광물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고 왕국에 넘기려고 했다.

그렇지만 반역자들이 왕국에 돌아가면 사형될 게 뻔했다.

때문에 그들은 가만히 있지 못하고 마지막 발버둥을 쳤다.

……그 발버둥이라는 게, 바로 니나이나와 니콜라스를 인질로 잡아 황제를 협박하려 했다는 것이 문제였지만.

일당 중에는 재빨리 숨어 황궁 병사들에게 붙잡히지 않은 몇몇 이가 있었다.

대부분 도적이나 살수 경력이 있는 범죄자들이었다.

그들이 바로 며칠 전 유치원을 습격한 자객들이었다.

하지만 그럼 뭐 하나. 우리가 재빠르게 숨은 덕분에 자객들은 처음 계획과 달리 니나이나와 니콜라스를 인질 삼는 것에 실패했다.

결국 우왕좌왕하다가 실력이 압도적으로 뛰어난 황실 기사단에게 제압당했고 말이다.

그 과정에서 기사단장님이 부상을 입으셨지만, 다행히도 곧바로 치유 마법사의 도움을 받아 상처를 치료했다고 했다.

“그렇게 된 거였다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유치원 안의 사람들은 모두 무사해서 다행이었다.

그렇게 일이 마무리되고, 제국은 왕국으로 반역자들을 넘겼다고 한다.

이후 왕국에서 고마움의 표시로 사절을 보냈다고 하는데, 그 일까지는 나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아무튼 다행이에요, 아빠.”

“그래. 그보다 준비는 다 끝냈니?”

“……네!”

다정한 아빠의 물음에 나는 잠시 내 옷차림을 한번 둘러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우리 부녀는 마차에 올라탔다.

황궁으로 향하는 마차였다.

“……아차, 선물을 안 챙겼다!”

그리고 출발하기 직전, 나는 매우 중요한 것을 깜빡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바로 니나이나와 니콜라스에게 줄 생일 선물을 방에 두고 온 것이었다!

그랬다. 오늘은 다름 아닌 두 남매의 생일이었다.

한 살 차이 나는 연년생이지만, 신기하게도 생일이 똑같은 둘이었다.

나야 뭐, 일찍이 생일 연회 초대장을 받았기에 이렇게 선물을 준비해 가게 된 것이었다.

‘음, 그보다 어쩌지. 마차에서 내려서 가져올까?’

고민하던 찰나 막 밖에서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하던 하인 중 한 명이 쏜살같이 대신 다녀와 주었다.

“아가씨, 제가 바로 챙겨오도록 하겠습니다.”

“미안, 그리고 고마워.”

이후 우리가 탄 마차가 황궁을 향해 달려갔다.

* * *

나는 황궁 정문을 통과한 후 마차에서 내렸다.

니콜라스와 니나이나에게 전달할 선물은 미리 시종에게 맡겼다.

이후 아빠는 따로 용무가 있다며 떠났다.

“새런 영애님, 황녀 전하께서 영애님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를 따라오세요.”

나는 한 시녀를 따라 니나이나의 궁으로 향했다.

거의 다 도착했을 무렵, 뒤에서 갑작스레 누군가가 나를 껴안았다.

나는 깜짝 놀라며 제자리에서 파닥거렸다.

“어서 와, 에미르!”

“황녀 전하!”

뒤돌아보니, 니나이나가 활짝 웃으면서 나를 보고 있었다.

니나이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내 귓가에 속삭였다.

“……전에는 다른 사람들 몰래 숨어서 봐야 했는데 오늘은 당당하게 만날 수 있어서 좋아.”

“저도요, 전하.”

“역시 에미르도 그렇지?”

니나이나가 싱긋 웃었다. 그러고는 말을 이었다.

“이미 다들 와 있어. 내 궁이 아니라 다른 궁이야. 빨리 가자.”

잠시 후 니나이나와 함께 도착한 곳은, 다름 아닌 연회장이었다.

다만 지난번 봤던 곳보다는 조금 작아 보였다.

‘뭐, 생일 당사자 두 명을 제외하고는 단 네 명만 초대된 연회니 당연한 일일지도.’

그렇지만 막상 안에 들어가 보니 몹시도 화려해서 나는 깜짝 놀랐다.

실내에서도 불꽃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불꽃과 비슷한 모양을 내는 마도구가 있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내부가 꼭 숲이나 정원에 온 것처럼 꾸며져 있었다는 것이다.

진짜 잔디를 밟는 것처럼 느껴지는 부드러운 카펫. 아기자기한 꽃과 나무들. 인공 수로에 졸졸 흐르는 시냇물.

무엇보다 마법으로 살랑살랑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정말이지 시원했다.

“우와……!”

나는 눈을 떼지 못하고 연회장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중앙에서는 한 연주자가 은은한 피아노 선율을 들려주고 있었다.

“예쁘지? 내가 어마마마께 부탁해서 꾸민 거야.”

“정말 멋져요, 전하.”

나는 떡 벌어진 입을 닫을 새도 없이 계속해서 감탄했다.

그때, 한편에 자리한 통나무 테이블에 모여 앉은 아이들이 보였다.

“미르! 여기 내 옆자리에 앉아.”

평소처럼 깔끔하게 차려입은 제이크가 나를 향해 제일 먼저 손짓했다.

“늦었잖아. 기다리고 있었다고!”

지루한 표정으로 발끝을 까딱이던 세드릭 역시 나를 보고 반색하며 두 손을 흔들었다.

앨리스는 테이블 위에서 두 손으로 열심히 무언가를 꼼지락대는 것 같더니, 뒤늦게서야 내가 왔다는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아! 에미르 님! 오셨군요!”

그리고 앨리스는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작은 꽃이었다. 음, 선물인가?

“……이게 뭐예요?”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앨리스가 아차 하며 꽃을 조심스레 들어 보이며 설명했다.

“들꽃으로 만든 꽃반지에요.”

“아하!”

“자아, 끼워 드릴게요.”

뭘 그리 집중해서 만지작거리나 했는데, 이 작은 꽃으로 반지를 만들어주느라 그랬던 모양이다.

“예쁜데요? 고마워요. 앨리스.”

나는 손을 이리저리 뒤집어 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그러자 앨리스 역시 기쁘다는 표정을 하고 덧붙였다.

“저도 같은 반지를 만들어 끼고 있어요. 우리 우정 반지예요.”

“좋아요!”

그때였다. 갑자기 뒤에서 시끌시끌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가 나타났다.

바로 니콜라스였다.

‘저, 저 옷은……?’

니콜라스는 굉장히 태연한 태도로 성큼성큼 우리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 차분한 모습과는 상반되는 차림이었다.

얼룩말 머리띠에, 얼룩말 무늬 셔츠를 입고 있었던 것이다.

“……다들 왜 그래?”

모두가 니콜라스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니콜라스는 조금 민망해 보이는 얼굴로 질문했다.

그러더니 대답을 듣기도 전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모습을 보며 자문자답했다.

“아, 이 옷 때문인가.”

네, 맞아요.

나는 속으로 대꾸했다.

다만 니콜라스는 오히려 의아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하지만 오늘은 너희도 이런 차림을 하고 오기로 했잖아? 시장에서 샀던 머리띠는 다들 가져왔겠지?”

그랬다. 사실 오늘의 드레스코드는 다름 아닌 ‘동물’이었다.

평소 이런 행사에 별로 관심 없어 보이던 니콜라스가 웬일로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다.

“네, 챙겨왔어요.”

나를 포함한 아이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제이크가 내게 선물했던 하늘빛의 유니콘 뿔 머리띠.

한 손으로 뿔을 만지작거리며 나는 생각했다.

‘역시 와서 쓰길 잘했어.’

너무 눈에 띄니까 말이다.

제이크가 선물해 준 것이니 소중히 간직해야겠지만…….

그와 별개로 이런 귀여운 악세서리를 좋아하는 편이 아닌 나는 머리띠를 쓰고 있는 게 어색했다.

아무튼 나를 포함해서 다들 주섬주섬 각자의 동물 머리띠를 꺼내 머리에 썼다.

그때였다. 니콜라스가 시종을 불러 무언가를 가져오라고 지시했다.

‘저건!’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미리 준비해 둔 듯 시종들이 가져오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니콜라스가 입고 있는 것처럼 동물 무늬가 그려져 있는 옷과 소품들이었다.

“다들 이것도 입어줘.”

니콜라스가 수줍게 웃으며 부탁했다. 저렇게 양 뺨이 발그레해질 정도로 미소 짓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조금 멍해졌다. 평소의 무뚝뚝한 니콜라스답지 않았으니까.

“……한 번쯤 친우들과 이렇게 파티를 열어보는 게 꿈이었거든. 그리고 오늘은 내 생일이니까. 물론 니나이나의 생일이기도 하지만.”

변명하듯 니콜라스가 또다시 중얼거렸다.

정말이지, 제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운 말만 해대던 그 니콜라스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진심이구나, 니콜라스. 정말로 오랜 꿈이었던 모양인데.’

때문에 우리는 차마 그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주섬주섬 동물 옷과 장식들을 위에 걸친 우리는, 이내 서로의 모습을 바라보고서는 누구 하나 빠짐없이 박장대소했다.

“으하하하! 앨리스, 그 솜털 달린 망토는 뭐야? 와, 가짜 당근까지 들고 있잖아?”

세드릭이 앨리스가 걸치고 있는 망토를 보고 배꼽을 잡았다.

그 말을 들은 앨리스는 찌릿 세드릭을 흘겨보더니, 제 팔뚝만 한 크기의 당근 모형 인형을 거꾸로 잡아 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검을 쓰는 것처럼 당근 끝을 세드릭을 향해 바짝 겨누었다.

“아무리 세드릭 님이 지금 늑대라지만, 토끼를 무시하면 못써요. 작아도 빠르거든요.”

“……히익! 너 언제 검술 배웠어?”

세드릭이 깜짝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앨리스가 키득 웃으며 대답했다.

“세드릭 님이 평소 하는 걸 보고 따라 했어요.”

“윽……! 따라쟁이 같으니.”

“따라쟁이라니요!”

둘의 말다툼을 조금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던 나는, 이내 남 신경 쓸 때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팔꿈치를 뒤로 툭 치니 판판하게 걸리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이 날개 어쩔 거야…….’

왜냐하면 지금 내 등 뒤에는 내 몸길이만 한 너비의 모형 날개가 떡하니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유니콘엔 날개가 달려 있는 게 맞지. 그렇지만 이건 너무!’

……컸다.

다행히도 크기에 비해서는 가벼웠지만 말이다.

하지만 니콜라스를 비롯해 다른 아이들까지 내게 꼭 입어 줘야만 한다며 간곡히 부탁하는 바람에 이러고 있었다.

“……휴.”

나는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나만 이 날개를 달고 있는 건 아니었다.

나와 같이 유니콘 머리띠를 샀던 제이크 역시 똑같은 날개를 달고 있었다.

차이점이라면, 제이크는 은은한 연분홍색 날개이고 나는 연하늘색이라는 것일까.

나는 괜스레 드레스 자락을 만지작거리면서 유리 창문에 비친 내 모습을 힐끔거렸다.

‘그래도 뭐, 나쁘지는 않은걸.’

사실 싫지 않았다. 이렇게 꾸미고 생일 파티에 참석해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그때, 고양이 머리띠를 하고 얼굴에 몇 가닥 수염을 그린 채 이리저리 거울을 보던 니나이나가 천천히 내게 다가왔다.

니나이나의 표정이 감탄으로 바뀌었다.

“우와. 이게 있으니 꼭 천사 같네! 잘 어울려, 에미르.”

“헤헤, 감사해요.”

나는 환히 웃다가 저편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마침 여러 명의 시종이 파티 음식을 가져오고 있었다.

“우와! 10단 케이크다!”

생일 파티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케이크부터, 달콤 상큼한 대륙 전역의 과일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고기 요리들.

그 외에도 사르륵 녹아내릴 듯한 디저트들까지 종류는 가지각색이었다.

딱 어린이들 입맛에 맞을 법한 음식들이 줄지어 나무 그루터기 모양 테이블에 놓아졌다.

“생일 촛불을 불어 볼까? 동시에?”

오늘의 두 명의 주인공.

니나이나와 니콜라스가 서로 반대편에서 촛불을 불었다.

두 명 다 처음에는 가볍게 ‘후욱’ 하고 바람을 불었지만, 점차 누가 더 많은 촛불을 꺼뜨리는지 경쟁이 붙었다.

끝내 둘은 ‘허억’ 하는 숨소리와 함께 초를 모두 꺼뜨리고 자리에 앉았다.

“후아, 내가 오라버니보다 정확히 2개 더 많이 초를 껐어.”

“미안하지만 니나이나, 한 개는 나도 같이 불었거든?”

두 남매는 쓸데없는 곳에서 경쟁의식이 생긴 모양인지 투닥거리고 있었다.

한편 시녀가 다가와 케이크를 잘라 각자의 접시에 놓아주었다.

나는 손대면 사라져 버릴 것처럼 가볍고 부드러워 보이는 크림 케이크를 멍하니 바라보다, 조심스레 금색 포크로 떠서 입으로 가져갔다.

“음! 맛있어……!”

그리고 곧 탄성을 내질렀다.

역시 황궁의 케이크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물론 우리 저택의 주방장이 만든 케이크도 눈물 나게 맛있지만, 지금 이 케이크는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맛이었으니까.

나만 그런 건 아닌지 고개를 들어보니 다들 입가에 생크림을 양껏 묻힌 채 맛있게들 먹고 있었다.

‘냅킨이라도 건네줘야 할까?’

바보 같게도, 나는 내 입가에도 비슷하게 크림이 묻어 있는 줄 눈치채지 못하고 다른 아이들의 입가를 걱정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스윽, 하고 작고 보드라운 손가락이 내 뺨 근처를 가볍게 훔치고 지나갔다.

“……!”

뭐, 뭐지?

화들짝 놀란 나는 옆을 돌아보았다.

“제이크? 방금 뭐…… 아, 크림?”

그러자 제이크가 제 검지에 묻은 약간의 크림을 자랑스럽게 보여주었다.

나는 뒤늦게서야 내 입가에도 비슷한 게 묻어 있었다는 걸 알아차리고 얼굴이 새빨개졌다.

“마, 말해주지 그랬어…….”

“말해주지 못해서 미안. 내가 닦아주고 싶어서 그랬어.”

제이크가 배시시 웃었다.

마침 그런 우리 둘을 본 다른 아이들도 화들짝 놀라며 제 입가에도 무언가 묻어 있는지 확인하기 시작했다.

“휴우. 그보다 제이크, 여기 냅킨. 어서 닦아.”

나는 다른 아이들에게 건네주려던 냅킨을 제이크에게 건넸다.

그러자 제이크는 선뜻 받지 않고 무언가 고민하는 듯한 소리를 내었다.

“음…….”

“왜 그래?”

내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리자, 제이크는 제 손에 묻어 있던 크림을 제 입가에 콕 찍어 바르고는 짓궂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나도 닦아줘. 여기.”

“……!”

나는 잠시 멈칫했다.

저거 내가 먹던 크림 아니야? 하지만 이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손을 뻗었다.

“자, 닦아줬어. 이 크림은 이제 재활용하지 않을 거야.”

나는 단호하게 말하며 냅킨으로 크림을 훔쳐냈다.

그 광경을 반대편에서 지켜보고 있던 니콜라스가 말했다.

“너희 둘은 같은 유니콘이라 그런지 사이가 좋아 보이는구나.”

음, 제이크와 내가 사이가 좀 좋긴 하지.

그런데 저 아쉬워하는 것 같은 표정은 뭘까.

“……나도 크림을 묻힐 걸 그랬나.”

응? 방금 니콜라스가 답지 않게 시무룩한 표정으로 뭐라 중얼거린 것 같은데 기분 탓인 걸까?

내가 고개를 갸웃하니,  세드릭도 입을 열었다.

“얼굴에 케이크 크림을 잔뜩 바르면 나도 닦아줄 거야?”

“음식 가지고 그럼 못써요.”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잘라냈다. 그냥 묻힌 거면 몰라도 일부러라니, 용서할 수 없다.

“칫.”

어쩐지 토라진 듯한 표정으로 세드릭이 고개를 돌렸다.

* * *

잠시 후, 배부르게 식사를 마친 우리는 잘 꾸며진 파티장 내부를 마저 구경하다가 밖으로 나왔다.

“소화하는 데는 역시 산책이에요.”

마침 여름이라 그런지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황실 정원은 넓디넓어서, 한 바퀴만 돌아도 시간이 뚝딱 지나갔다.

정원 중간 즈음, 분수대가 보이는 작은 쉼터에서 우리는 벤치에 걸터앉았다.

“오늘은 정말로 재밌는 생일 파티였어.”

“맞아, 오라버니.”

두 황족 남매가 서로의 말에 맞장구치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나는 조금 궁금해져서, 그 둘의 대화에 불쑥 끼어들었다.

“두 분 전하는 이전에도 생일 연회를 여셨지요?”

“응, 맞아.”

니나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예전에는 재미없었어. 모르는 귀족들만 잔뜩 초대해 놓고 우리는 의자에 앉아 있기만 했거든.”

하긴, 보통 황족의 생일 연회는 보통의 연회처럼 치러지는 게 일반적이다.

“이번에도 그렇게 연회가 열리겠지만, 내 생각에 오라버니와 내 진짜 생일 파티는 오늘인 것 같아.”

니나이나가 꿈꾸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러더니 작년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조금 우울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사실, 친우가 갖고 싶었던 것도 그래서였는데.”

“아…….”

나는 유치원에 처음 다니게 되었던 계기를 오랜만에 되새겼다.

분명 그랬다. 친우를 원하지만, 아카데미에 가기엔 조기 입학 조건이 맞지 않았던 니나이나의 뜻대로 제국 유치원이 생겨났었다.

“하지만 이젠 아무래도 좋아.”

“……?”

“너희가 있잖아. 너희가 이젠 내 친우야. 무엇보다 에미르, 너처럼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를 만나서 기뻐.”

니나이나의 고운 손이 내 손을 맞잡고 신나게 흔들었다.

“이렇게 어른이 될 때까지 계속해서 유치원만 다니고 싶어.”

“전하, 그건.”

내가 머뭇거리자 니나이나는 농담이었다는 듯이 파하하 웃으며 대꾸했다.

“안 되는 거 나도 알아.”

그러고는 이내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냥 지금이 너무 좋다는 이야기야.”

“저도 그래요, 전하.”

내가 맞장구치자, 옆에서 가만히 우리 둘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던 니콜라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렇다.”

“저도요!”

“저도 그래요.”

“나도.”

어느새 다른 아이들도 끼어들어 ‘나도! 나도!’를 외쳐댔다.

그 소란스러움이 좋아서 나는 기분이 간질거렸다.

“자, 이제 마저 파티를 즐겨보자.”

때마침 무언가가 생각난 듯 니콜라스가 말했다.

“여기서요, 전하?”

“그래. 너희가 오기 전 시종들에게 준비해 놓으라 말한 게 있거든.”

그게 무엇일까?

나는 궁금해졌다.

니콜라스가 굉장히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 목소리였기에 더욱더 그랬다.

“바로 보물찾기야.”

니나이나가 불쑥 끼어들어 정답을 말해주었다.

그러자 니콜라스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니나이나. 내가 말하려고 했는데.”

“오라버니가 자꾸 뜸 들였잖아.”

메롱, 하고 니나이나가 내 뒤로 쏙 숨어버렸다.

니콜라스는 어이없다는 듯이 헛웃음 짓다가 설명을 이어나갔다.

“이 정원 곳곳에 보물을 비단 주머니에 담아 숨겨놓았어. 30분 안에 주머니를 제일 많이 찾은 사람에게 그 보물을 모두 선물할게.”

“우와아! 보물!”

나는 기쁘게 환호성을 질렀다.

‘진짜 보물’이 걸린 보물찾기라니! 두근거렸다.

다른 아이들도 물론 흥미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금방이라도 보물을 찾아 떠날 듯 발을 동동 굴렀다.

“자, 그럼 지금부터 시작이야.”

니콜라스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우리의 보물찾기 대회가 시작되었다.

* * *

“음, 여기쯤 있을 법한데……?”

나는 수풀을 손으로 조심스레 헤쳐가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또 허탕이었다. 반짝거리는 비단 주머니가 아닌 무성히 자란 잔디만이 나를 반겨주었다.

황궁 안이지만 혹시 모를 안전을 위해 저만치 내 뒤에 붙어 다니는 호위 기사가 있었다.

때문에 혹시 기사님이 뭘 좀 알고 있을까 싶어, 뒤를 돌아보며 초롱초롱한 눈빛을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영애님, 저는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곤란하다는 얼굴로 시선을 은근슬쩍 피하는 기사님이었다.

“그렇군요, 휴우…….”

나는 아쉽다는 뜻으로 한숨을 푸욱 내쉬며 고개를 떨궜다.

벌써 보물찾기가 시작된 지 10여 분째.

하지만 나는 아직 주머니를 단 한 개도 찾지 못했다.

‘왜 나만 못 찾는 것 같지.’

단순히 기분 탓이 아니었다. 정원 곳곳에서 ‘찾았다!’나 ‘저도 찾았어요!’ 같은 다른 아이들의 외침이 속속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나도! 나도 찾고 싶어! 보물!’

하지만 슬프게도 내게 그런 말을 외칠 기회는 아직 주어지지 않고 있었다.

나는 조금 우울해진 기분으로 다른 방향을 향해 털레털레 걸어갔다.

마침 내가 뒤지려던 분수대 근처에서, 나는 금색 주머니를 무려 세 개나 팔뚝에 걸고 있는 세드릭을 마주했다.

“헉, 벌써 세 개나 찾으셨어요?”

나는 깜짝 놀라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유독 세드릭의 외침 소리가 많이 들린 것 같긴 했었다.

“그래. 난 세 개 찾았어! 너는? 설마…….”

세드릭은 잔뜩 의기양양해진 얼굴로 대답하다가 이내 내 텅 빈 두 손을 바라보고는 ‘애걔? 설마 하나도 못 찾은 거야?’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힘없이 대꾸했다.

“네, 보시다시피 하나도 못 찾았어요.”

“흠, 불쌍하네.”

“동정하지는 말아주세요…….”

안 그래도 슬픈데. 나는 훌쩍거리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어쩐지 세드릭이 큰 잘못이라도 한 듯 덜컥 놀라더니  사과했다.

“노, 놀려서 미안.”

“…….”

“나, 난 간다. 마저 찾으러.”

그 말을 끝으로 세드릭이 사라졌다.

음, 그냥 조금 골려 주려고 했던 것뿐인데 내가 진심으로 슬퍼한 것으로 오해한 걸까?

‘근데 진심에 가깝게 슬프긴 하네.’

나는 터벅터벅 걸음을 옮겼다.

마침 내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저거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무언가가 장미꽃 덤불 사이에 있었다.

나는 재빠르게 목표물을 향해 쪼르르 달려갔다.

그렇지만 막 주머니를 손으로 잡았을 때, 동시에 반대편에서 누군가가 주머니에 손을 얹는 게 느껴졌다.

“앗! 앨리스?”

“에미르 님?”

경쟁자(?)의 정체는 바로 앨리스였다.

우리 둘은 덤불 너머로 서로를 알아보고 반가워하다가, 이내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에미르 님은 몇 개나 찾으셨어요?”

“아…… 그게…….”

차마 0개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 순간 앨리스의 시선이 텅 빈 내 두 손을 빠르게 훑었다.

직후, 앨리스가 말했다.

“에미르 님, 제가 양보할게요.”

“네? 안 그래도 되는데…….”

“아니에요. 사실, 저는 이미 다섯 개나 있거든요. 그리고 에미르 님이 1초 정도 더 빠르게 집으셨어요.”

그렇게 말하면서 앨리스는 제 왼손에 있는 주머니들을 들어 보여주었다.

“그럼 전 다른 주머니를 찾으러 갈게요!”

“자, 잠깐만요 앨리스!”

직후 앨리스가 덤불 너머에서 사라졌다.

나는 한발 늦게 앨리스의 이름을 소리쳐 보았지만 이미 가고 없었다.

‘으음……. 어쩐지 앨리스에게 미안해지는데.’

물론 고마웠지만. 미처 감사 인사도 못 해서 그런지 아쉬웠다.

나는 조심스레 덤불에 걸린 주머니를 집어 들었다.

“아얏!”

그러다가 실수로 장미 가시에 손가락을 찔리고 말았다.

순간 따끔함에 눈을 찌푸린 나는 이윽고 손가락에 송골송골 작게 맺히는 핏방울을 보았다.

“으으…… 조심할걸.”

주머니에 한눈팔다 보니 생긴 일이었다.

나는 손수건을 꺼내 손가락을 감싼 뒤 뒤돌아섰다.

그런데.

“제이크?”

뒤돌아서자마자 근처에서 나를 향해 달려오는 제이크가 보였다.

뭐지?

멀찍이 떨어져 있는 내 호위 기사조차도 의아한 눈빛이었다.

“헉, 헉. 미르. 괜찮아? 어디 다쳤어?”

“……어떻게 알았어?”

설마 내가 비명 지른 걸 듣고 온 건가?

하지만 별로 큰 소리도 아니었는데.

나는 손수건으로 감싼 손가락을 슬쩍 뒤로 숨기려 했지만, 제이크가 그보다 한발 빠르게 내 손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몹시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피가 나. 왜 이런 거야?”

묻기도 전 치유 마법으로 상처부터 치료하고, 살이 원래대로 아물자 그때에야 묻는 제이크였다.

“장미 가시에 찔렸거든. 치료해 줘서 고마워, 제이크.”

내 대답에 제이크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말했다.

“치유 마법을 배우길 잘한 것 같아.”

“……!”

“이렇게 미르를 안 아프게 해줄 수 있고.”

* * *

마침내 30분 후.

“자, 다들 모여봐! 몇 개나 찾았니?”

여유롭게 홀로 벤치에 앉아 있던 니콜라스의 앞으로 모두가 쪼르르 모였다.

“어디 보자.”

다들 자랑스럽게 손을 내밀어 갖고 있는 주머니를 보여주었다.

앨리스는 무려 8개, 세드릭은 5개, 제이크는 3개, 니나이나는 2개.

그리고 나는 여전히 1개였다.

개수를 세어보던 니콜라스가 보물찾기의 우승자를 가렸다.

“자, 앨리스 영애. 영애가 찾은 보물은 모두 영애 거야.”

“감사해요!”

엄청난 탐색력으로 내게 1개를 양보하고도 당당히 1위를 거머쥔 앨리스였다.

이후 니콜라스는 ‘숨겨놓은 주머니는 총 25개였는데, 아쉽게 다는 못 찾았네’라며 중얼거렸다.

아쉬웠다. 그 주머니들 내가 찾을 수 있었는데!

하지만 아쉬움도 잠시, 우리는 막간을 이용해 시원한 음료수를 마시며 쉬었다.

그러고는 한참 뛰어놀 나이답게 또 새로운 놀이를 시작했다.

바로 술래잡기였다.

너무 장소가 넓으면 찾기가 어려우니, 정원 가운데에 있는 조그마한 공터에서 놀기로 했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술래는 바로 나였다.

나는 니나이나가 낮잠 잘 때 쓴다는 분홍빛 안대를 쓰고 눈을 가렸다.

좋은 비단으로 만들어졌는지 엄청 보드랍고 폭신했다.

“이제 찾을게요!”

내 외침에 주변이 고요해졌다. 다들 숨을 죽이고 가만히 있는 게 분명했다.

‘다들 어디 숨었을까.’

벤치 밑이나, 나무 뒤나, 어쩌면 분수대 조각상 위에 올라가 숨었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나는 두 팔을 열심히 휘적거리며 조심스레 발걸음을 디뎠다. 물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

마침내 손끝에 딱딱한 게 닿았다. 촉감으로 보아 돌이었다.

오호라, 여기가 분수대구나? 그렇다면……!

나는 분수대 조각상 쪽을 향해 열심히 손을 뻗어 휘저었다.

하지만 내 팔이 짧은 탓인지, 아니면 여기 숨은 사람이 없는 건지는 몰라도 손끝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어휴, 딴 곳을 찾아봐야겠다.’

나는 뒤돌아서서 다른 곳을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찾았다!”

누군가의 팔로 추정되는 것을 잡으면서, 나는 자신 있게 외쳤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상대방에게서는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았다.

‘뭐지? 벌써 찾아버리다니, 하고 비명이라도 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설마 잘못 짚었나?’

침묵이 불러오는 이상함에 나는 닿은 손끝을 살짝 뗐다.

‘그럼 누구지? 시종인가? 하지만…… 이곳엔 놀이를 위해 시종을 모두 무르게 했을 텐데.’

나는 그저 고개만 갸웃거렸다. 수면 안대로 눈을 가린 터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때, 천천히 내 안대를 벗겨주는 손길이 있었다!

차가운 손이었다. 꼭 한겨울 설산에 있다 온 것처럼.

유치원에는 이런 손을 가진 사람이 없는데?

“……!”

시야가 밝아지자 나는 놀랐다.

단정한 검은색 정장을 입은 남자아이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시린 은발에 푸른 눈을 지닌 소년. 눈동자가 꼭 깊은 호수 같았다.

키가 나보다 더 컸지만, 나이가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았다.

그 아이는 잠시 제 손에 들린 분홍빛의 폭신폭신한 안대를 신기하게 바라보더니, 창백한 흰 손으로 살짝 안대를 매만졌다.

그러고는 이내 나를 향해 천천히 시선을 돌려 질문했다.

“넌 유니콘이야, 천사야?”

……사람인데요? 이건 머리띠랑 가짜 날개일 뿐이거든요.

그러나 속으로만 생각했을 뿐, 너무 당황한 탓인지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지 않았다.

입술을 조용히 뻐끔거리기만 했다.

그런 내 표정이 조금 웃기기라도 한 것일까.

순간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던 소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나랑 나이가 비슷해 보이네, 너.”

“……누구세요?”

나는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작게 질문했다. 그러자 소년은 아차 하며 대답했다.

“난 마야라고 해. 마야 트위트.”

“……마야?”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이름을 듣고 그제야 알아차린 탓이다.

소년은 원작에서 등장하는 엑스트라였다.

왕가의 피를 일부 이은, 왕국의 북부 공작. 지금은 아직 어린아이니 아마 소공작일 것이다.

원래는 외전에서나 잠깐 나오는 인물인데…….

원작과 달리 유치원이 생겨버리니 이렇게 유년 시절에 마주치게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온 거지? 분명 마야는 타국의 귀족인데…….’

마침 소년, 아니, 마야는 예쁘게 웃으며 내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게 내 이름이 맞아. 이제 네 이름도 알려줘. 넌 이름이 뭐야?”

“제 이름은 에미르예요. 에미르 새런이요.”

나는 잠깐 망설이다 대답했다.

원래는 모르는 사람에겐 이름을 섣불리 알려줘서는 안 되지만, 상대방이 먼저 신원을 밝혔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러자 마야가 내 이름을 작게 중얼거리며 웃었다.

“에미르, 음. 예쁜 이름이네.”

“앗, 감사해요. 그런데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황궁 정원은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데…….”

내 물음에 마야는 일순간 당황하다가 이내 조금 머쓱해 보이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게, 황궁 구경을 하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렸어.”

“……!”

“네가 길을 좀 안내해 줄 수 있을까? 난 귀빈 숙소로 되돌아가야 해.”

마야의 말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나는 지금 아이들과 술래잡기 놀이를 하던 중이었는데. 가도 되는 걸까?

그때였다.

“야, 에미르에게 말 걸지 마.”

“……!”

누군가가 내 뒤에서 불쑥 나타나 나를 감쌌다.

세드릭이었다. 곧 다른 아이들도 내 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넌…… 또 누굴까?”

마야는 당황해하며 질문했다.

그러자 세드릭이 픽 웃으며 대꾸했다.

“알 게 뭐야?”

마야는 세드릭의 갑작스러운 시비 아닌 시비에도 별로 기분 나빠 보이지 않았다.

다만 조금 민망해진 듯한 표정으로 부드럽게 대꾸했다.

“……넌 좀 까칠하구나.”

“하! 당연히 에미르에게 집적거리는 놈에게는 까칠할 수밖에.”

세드릭의 날카로운 말을 들은 마야가 조금 어이없다는 듯 되물었다.

“그런 단어는 어디서 배웠어?”

그러게. 세드릭. 집적거린다는 말을 대체 어디서 배운 거야?

하지만 미처 세드릭의 대답을 듣기도 전, 다른 아이들이 나를 붙잡았다.

“에미르 님! 모르는 분이랑은 대화하시면 안 돼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내게 속삭이는 앨리스부터,

“아는 애야, 미르?”

어쩐지 수상하다는 눈빛으로 마야를 응시하는 제이크까지.

하지만 그때.

“아, 너는 설마 왕국의 소공자인가?”

마야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던 듯한 니콜라스가 뒤늦게 질문했다. 그리고 마야 역시 니콜라스에 대해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 맞습니다. 황자 전하. 아, 그러고 보니 황녀 전하도 계시네요. 그럼 다들 두 분 전하의 친구이신가요?”

긍정의 대답에 마야의 정체를 모르고 있던 다른 아이들이 깜짝 놀랐다.

“귀족이었어?”

“난 모르는 얜데. 아, 왕국에서 왔다고 했지? 그래서인가.”

“……아무튼 에미르 님은 안 돼요!”

“맞아, 맞아.”

……반응이 어째 가지각색이었다.

잠시 소란스러운 대화가 지나가고, 니콜라스가 마야를 향해 질문했다.

“그런데, 소공자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사절단 숙소에 있어야 하잖아?”

그러자 마야가 눈을 천천히 깜빡이면서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이 꼭 나더러 대신 말해달라고 하는 것 같아서, 나는 우물대며 대답했다.

“음, 길을 잃어버렸다고……. 그래서 제가 길을 안내해 주려고 했어요.”

“아, 그런 거야? 하긴, 황궁은 길 찾기가 어려워.”

아이들이 그제야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듯하다가, 번뜩 태도를 돌변해 외쳤다.

“하지만 에미르 혼자서는 안 돼!”

“맞아요!”

“그럼, 우리 다 같이 가지 뭐.”

결국 우리는 술래잡기를 그만두고 마야에게 길을 찾아주기로 했다.

귀빈 숙소로 가는 길, 우리는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아이들은 ‘마야’라는 새로운 존재의 등장에 조금 경계심을 보이기도 했지만, 마야가 워낙 친화력이 좋은 터라 금방 말을 텄다.

그러다 알게 된 것 한 가지.

마야는 우리보다 나이가 많았다.

“난 8살이야.”

겨우 한두 살 차이긴 했지만 어쨌든.

원작에서는 마야가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터라 미처 나이까지 알지는 못했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마야는 지난번 유치원 자객 습격 사건으로 인해 오게 된 왕국 사절단의 일행이었다.

왕자 몇 명, 그리고 아버지인 공작과 함께 온 것이라고 했다.

“신기하네. 아, 그보다 그 주머니에 불룩한 건 뭐냐?”

이야기를 들으며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세드릭이 문득 마야의 재킷 주머니를 가리키며 질문했다.

그러고 보니 아까는 미처 몰랐는데, 양쪽 주머니가 빵빵했다.

“아, 주머니? 아까 정원에서 뭘 좀 주웠어. 황실에 돌려주려고 챙겨왔지.”

그렇게 말하면서 마야는 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냈다.

“웬 귀한 보석들이 든 주머니가 잔뜩 떨어져 있었거든.”

“이건……!”

그런데 그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아까 우리가 보물찾기할 때 찾으러 다녔던 주머니들이었다.

“뭐야, 다들 아는 눈치네?”

우리의 반응을 보고 마야가 당황했다.

잠시 후 니콜라스가 대답했다.

“보물찾기를 위해 숨겨놓았던 주머니들이다.”

“그렇군요, 전하. 그럼 전하께 돌려드릴게요.”

마야는 니콜라스에게 선뜻 주머니를 건네주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주머니가 너무 안 찾아진다 했지.

아무래도 마야가 보이는 대로 다 싹쓸이해서 그랬던 모양이다.

도란도란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우리의 발걸음은 사절단이 머무는 숙소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이대로 헤어지기 조금 아쉽네.”

마야는 숙소로 가기 전 우리를 돌아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시선을 나에게로 돌렸다.

“특히, 에미르 영애.”

응? 나?

……내가 왜?

“우리 나중에 또 만나자.”

당황한 내게 싱긋 웃어 보이며 손을 흔드는 마야였다.

“야! 너 집적대지 말라고!”

어째서인지 열불을 내는 세드릭을 본체만체하며 마야는 덧붙였다.

“친절한 영애가 마음에 들었거든.”

그리고 마야는 다시 뒤돌아 건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뒤쫓아간다는 세드릭과 제이크를 겨우 말렸다.

“좀 이상한 분 같아요……. 에미르 님.”

앨리스도 떨떠름해했다.

하지만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또 만나자’라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인사말이 설마 진짜가 될 줄은.

* * *

황궁에서 열린 니나이나와 니콜라스의 생일 파티 이후, 약 2주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벌써 한여름이란 말이야?”

그랬다. 사계절이 있는 제국에서 지금의 계절은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쨍한 여름이었다.

동시에 우리가 다니는 제국 유치원은 여름방학을 맞이했다!

여름방학이라고 뭐 거창할 것은 없었다. 그저 유치원에 나오지 않는 것뿐이니까.

그리고 아주 짧은 방학이었다. 한 달도 채 되지 않는.

하지만 나는 조금 아쉬웠다.

일주일에 다섯 번씩 친구들을 꾸준히 볼 수 있는 기회가 사라진 것이었으니까.

‘그래도, 한 달만 참으면 돼!’

어차피 만나고 싶으면 가문으로 편지를 보내거나, 사람을 보내서 약속을 잡으면 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멀쩡히 있는 유치원이 사라질 리도 없으니까!’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내가 잊고 있던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이 유치원은 애초에 목적을 가지고 시한부로 설립된 곳이었다는 것을.

그 목적을 한마디로 하자면, ‘니나이나의 친우 만들기’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이미 완료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나는 바보 같게도 이 유치원 생활이 영원할 거라고 믿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유치원에 다니지 못할 나이가 될 텐데 말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건 저 멀리 바닷가 근처 별장으로 우리 가족끼리 여름 휴가를 떠나기로 한 전날 밤이었다.

“에미르, 내년부터는 네 가정교사를 들여야겠구나. 기초 교양과 예절 이외에 따로 듣고 싶은 수업이 있니?”

엄마가 뜬금없이 나를 불러 저런 질문을 하셨다.

그 질문에 나는 그저 의아할 뿐이었다.

‘교양과 예절 수업이라면 어차피 유치원에서 다 배우는 것들인데 어째서 가정교사를 들이겠다고 하시는 거지?’

나는 의아한 점을 질문했다.

그랬더니…….

“아차, 에미르. 아직 네게 말하지 못했구나.”

“……무엇을요?”

나는 순간 왠지 모를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엄마의 다음 말이 무엇일지는 몰라도, 분명 그다지 반가운 소식은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어서였다.

그리고 그런 내 예감은 적중했다.

“올해 겨울을 마지막으로, 황제 폐하께서 제국 유치원을 해체하신다고 명을 내리셨단다.”

“유치원…… 해체요?”

처음엔 그저 믿기지가 않았다.

멍하니 ‘유치원’과 ‘해체’라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한 단어를 곱씹기만 했을 뿐.

나는 조용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 해체하는 거예요?”

“그게, 미르.”

엄마가 난감해하며 대답해 주셨다.

사정은 이러했다.

일단 황제 폐하의 명령도 명령이지만, 나를 제외한 다른 아이들에게도 더 이상 유치원에 다니지 못할 이유가 한 가지씩 있었기 때문이다.

먼저, 황자인 니콜라스.

니콜라스는 올해만 지나면 8살이 된다. 아카데미 조기 입학 시험을 칠 수 있는 나이가.

니콜라스야 워낙 똑똑하니 시험 통과야 이미 따놓은 당상이고 말이다.

‘그렇구나. 황자 전하는 내년이면 아카데미에 가겠구나…….’

사실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인데. 어째서인지 조금 공허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내 절친한 친우 제이크.

제이크는 여름방학이 시작한 이후 아버지인 공작님을 따라 마탑에 갔다고 한다.

지금은 잠시 방학을 틈타 간 것이지만, 아마 유치원에 다니지 않게 된다면 마탑과 공작저를 오가며 지내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하긴 제이크는 워낙 어릴 때부터 마법 재능이 출중하긴 했다. 아마 이제부터 꾸준히 마탑에서 교육을 받고 배움을 더한다면 훌륭한 마법사가 될 게 분명했다.

그리고 세드릭 역시 두 형, 대공가의 기사들, 기사 견습생들과 함께 이번 방학에 사막으로 여행 겸 훈련을 떠났다고 한다.

진정한 기사란 날씨 좋은 날의 평지에서만 검을 휘두르는 게 아니라, 천둥 번개 치는 날의 절벽 끝에서도 휘두를 수 있어야 한다는 대공가의 검술 철학에 따른 수련이었다.

유치원을 해체한 이후, 아마 세드릭은 사막뿐만 아니라 대륙 곳곳을 돌아다니며 검술 수련에 매진하려는 모양이었다.

듣자 하니 니나이나도 이제 니콜라스를 따라 가정교사를 들여 공부를 시작하려고 한단다.

원래 원작에서 니나이나는 학문 공부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는데, 우리와 함께 유치원에 다니면서 생각이 달라진 모양이었다.

‘아마 앨리스도 유치원에 다니지 않게 되면 요정의 섬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려나.’

나는 흔들의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이야. 당장 해체하는 게 아니니까.’

여름방학이 끝나고 다시 유치원에 다니게 된다면, 하루하루를 더 소중히 보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그냥 흘려보내는 시간 중 하나였겠지만, 2회차 인생을 살고 있는 나로서는 어린 시절의 추억이 얼마나 소중하고 금방 사라져 버리는 것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후, 별장으로 휴가를 떠나기 직전 나는 아이들에게 한 명 한 명 직접 편지를 썼다.

방학을 잘 보내고 있느냐는 안부 편지였다.

* * *

바닷가 근처에 있는 별장은 후작저보다는 작았다.

하지만 은은히 밀려드는 시원한 바다 냄새와 갈매기 끼룩거리는 소리가 좋았다.

또 근처에서 내 또래 아이들이 신나게 뛰어다니며 노는 소리 등이 어우러져 정말로 휴가 온 기분이 들었다.

“우와, 하늘색 조개껍데기네.”

새하얗고 깨끗한 백사장 위를 걸어 다니던 나는 예쁜 조개껍데기들을 주웠다.

“음, 목걸이로 만들까?”

고민하던 나는 두 손 가득 조개껍데기를 들고 별장으로 향했다. 바다는 예뻤지만 오래 보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왜냐하면 오늘은 내 생일이었으니까.

별장으로 돌아온 나는 깜짝 놀랐다.

문을 열자마자 예쁜 꽃장식들과 내 이름이 적힌 리본들이 나를 반겨주었기 때문이다.

내가 잠시 바닷가에서 놀고 있던 사이, 온 집안의 사용인들이 모두 달라붙어 파티 준비를 마쳤나 보다.

얼떨떨한 기분으로 하녀들의 손에 이끌려 식당으로 향하니…….

“미르, 생일 축하한다!”

“생일 축하해, 우리 딸!”

고깔모자와 화사한 정장을 차려입으신 부모님이 나를 반겨주셨다.

“엄마, 아빠……?”

나는 멍하니 두 눈을 깜빡였다.

이거 뭐야!

‘분명 두 분 다 오늘 아침부터 일이 바쁘다고 하셨는데…… 그 일이란 게 설마 내 생일 파티였어?’

얼떨떨하게 주변을 둘러보고 있는데, 하인들이 손수레에 웬 선물 상자들을 잔뜩 들고 왔다.

“우와, 이게 모두 제 거예요?”

작년, 재작년보다도 훨씬 많은 양의 선물 더미.

어쩐지 믿기지가 않아서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미르, 네 게 아니라면 대체 누구의 선물이겠니? 오늘은 미르의 생일이잖니.”

“그렇긴 하지만…… 어?”

무심코 선물 상자 위에 적힌 이름들을 바라보던 나는 깜짝 놀랐다.

‘내 친구들이 보낸 거잖아?’

유치원에서 내 생일이 정확히 언제라고 말한 적 없었던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알아낸 건지 내 생일에 맞춰 선물을 보내 주었다.

게다가 예쁜 봉투에 담긴 손편지도 함께였다.

‘니콜라스, 니나이나. 그리고 세드릭까지…….’

그 옆엔 부모님이 주신 선물과 다른 몇몇 귀족가에서 내 생일을 축하하며 보낸 선물이 자잘하게 놓여 있었다.

순간 감동 때문인지 먹먹해졌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갑작스레 팡! 팡! 하고 작은 폭죽이 터지더니 색색의 꽃가루가 바닥에 내려앉은 것이다.

“아가씨! 여섯 번째 생일을 축하드립니다.”

“축하드려요!”

동시에 닫혀 있던 한쪽 문이 열리더니, 본가에 있는 줄로만 알았던 주방장, 요리사들이 뛰쳐나와 커다란 케이크를 내게 선물했다.

“……이건, 내 얼굴?”

새하얀 케이크 위, 얇게 뿌려진 초코 드리즐 선 눈썹 아래 콕콕 작게 찍어놓은 녹차 크림 눈동자.

딸기 드리즐로 완만한 곡선을 이룬 입.

이걸 만들면서 뿌듯해했을 주방장을 생각하니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아가씨, 이 케이크는 제가 만들었습니다!”

“장식은 제가 했어요!”

내 미소에 다들 서로 나서며 제 공을 뽐내려 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즐거운 생일 파티였다.

* * *

파티가 끝난 그 날 밤. 나는 느지막하게 선물 꾸러미를 풀어보았다.

“……!”

어쩌다 보니 니콜라스가 보낸 선물을 제일 먼저 열어보게 되었는데, 선물의 정체를 확인하곤 기절초풍했다.

‘어쩐지 무겁더라니!’

도저히 내 힘으로는 들 수 없을 정도로 무겁고 부피도 상당한 상자.

그 안엔 다름 아닌 몇십 권의 동화책이 잔뜩 들어 있었다.

‘이 정도면 제국에서 유명한 동화 작가들의 책은 모두 싹쓸이해 온 게 아닐까?’

잠시 후 정신을 차리고 상자에 딸려온 니콜라스의 손편지를 확인해 보았다.

단정하고 차분한 니콜라스의 성격만큼이나 글씨체도 깔끔하고 정갈했다. 나와는 다르게.

편지를 열어본 후에야, 니콜라스가 왜 내게 이런 선물을 보냈는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읽어보고 그중 재미있는 동화책만 골라서 내게 선물한 모양이다.

편지 마지막에는, 조금 망설인 흔적이 보이는 글씨로 ‘생일 축하한다’고 적혀 있었다.

니콜라스에게 이런 세심한 면이 있을 줄이야.

정말이지 놀라웠다. 그리고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니나이나의 선물은 커다랗고 평범한 보석함…… 인 줄 알았는데, 숨겨진 버튼을 누르면 바닥이 분리되고 비밀 공간이 나오는 금고형 보석함이었다.

편지를 읽어보니, 나한테도 필요할 것 같아 선물했다고 한다.

니나이나의 말로는 요즘 자신이 비밀리에 일기를 쓰고 있는데, 일기장을 바로 이 보석함에 숨겨두고 있다고 한다.

‘아니, 잠깐. 이런 걸 나한테 알려주면 어떡해! 비밀이라며!’

아무래도 니나이나가 내 생각보다 나를 더 믿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그 신뢰에 보답하기로 했다.

절대로 니나이나의 일기장에 대해 타인에게 언급하지 않기로.

설령 그게 니콜라스나 황제, 황후 폐하라 할지라도!

다음은 세드릭의 선물이었다.

“응? 이건…… 방패잖아? 그리고 이 수상하게 생긴 병은 또 뭐지.”

꽤나 묵직했던 터라 뭐가 들었는지 궁금했는데, 상자에서 나온 것은 다름 아닌 순금으로 만들어진 듯한 커다란 방패였다.

뒤에 숨으면 나 하나쯤은 쏙 가려질 듯한 크기였다.

그리고 방패와 함께 내 손바닥만 한 투명한 유리병이 들어 있었다.

유리병 안에는 금빛의 액체가 찰랑거리고 있었다.

꼭 물에 백사장의 모래를 섞은 듯했다.

“어디, 편지를 읽어보자.”

물건만 봐서는 도저히 이 물건들의 정체(?)를 파악할 수 없었기에, 세드릭의 편지를 읽어보기로 했다.

거친 종이로 만들어진 편지지 위엔, 종이의 질감보다도 더욱 거칠고 괴발개발인 글씨체로 무언가가 적혀져 있었다.

“뭐라고 쓴 거지……?”

세드릭의 글씨체는 원래도 그다지 깔끔한 편이 아니었지만, 이번 편지는 자갈길을 달리는 마차 안에서 쓰기라도 한 건지 정말이지 읽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나는 의지를 가지고 가까스로 해독에 성공했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자기가 받은 포상을 나한테 선물한 건가?’

세드릭은 이번 방학에 사막으로 떠났다.

사막에서 다른 가문의 기사단들과 대련 시합을 벌인 모양인데, 당당하게 우승을 거머쥐었다고 한다.

‘하긴, 워낙 평소에도 열심히 훈련에 매진하긴 했었지. 세드릭은.’

그리고 그 우승의 상품으로 받은 게 바로 이 방패인 모양이다.

독사가 그려져 있는 황금 방패.

‘……이걸 내게 주다니.’

나는 얼떨떨해졌다.

분명 몇 달 전, 후계자 자격 시험의 포상으로 받은 검을 애지중지 아끼던 세드릭 아니었던가?

그렇게 아끼는 걸 나한테 줘도 되는 거야?

‘정말이지, 세드릭의 속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이 황금빛 물병…….

‘행운을 담은 사막의 모래라고?’

……나 이런 거 안 믿는데!

하지만 세드릭이 준 거니 믿거나 말거나 하는 셈 치고 머리맡에 둬 볼까.

나는 선물들을 다시 곱게 정리해 놓고, 머리맡에 모래 물병을 두고 잠들었다.

아니, 잠들려 했다.

어두운 방 안. 갑자기 똑똑, 하고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지만 않았더라도!

처음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노크는 계속되었다. 그런데 문득 든 생각 한 가지.

‘잠깐, 이 방은 2층인데? 창문을 어떻게 노크한 거지?’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서, 설마 도둑인가?

아니, 근데 도둑이 매너 있게 노크를 하고 들어올 리가 없잖아!

나는 고개를 천천히 창문을 향해 돌렸다.

“에미르 님!”

“미르! 나야, 나. 제이크!”

다행히도 밤손님(?)의 정체는 도둑이 아니었다.

창문 너머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드는 제이크와 앨리스를 보고 나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서 창문을 열어주었다.

“세상에, 앨리스. 제이크!”

방학 이후로 며칠 만에 만나는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우리는 잠시 얼싸안고 빙글빙글 방 안을 작게 뛰어다녔다.

“제이크. 어떻게 여기로 온 거야? 앨리스는……?”

그러고 나서야 나는 뒤늦게 질문했다.

“저는 당연히 에이비시 님의 도움을 받아서 왔지요!”

“얼마 전에 마탑에서 순간 이동 마법을 배웠거든. 이 앞에서 앨리스 영애를 만나서 같이 왔어.”

당당하게 외치는 앨리스와, 자랑스럽게 말하는 제이크였다.

아니, 그새 또 새로운 마법을 배웠단 말이야?

그런데 둘은 몸만 덩그러니 온 게 아니었다.

각자 한 손에 선물 꾸러미를 들고 있었다.

설마?

“맞다, 미르. 이거 네 생일 선물이야. 내가 직접 주고 싶어서 이렇게 왔어.”

“저도요, 에미르 님! 생일 축하해요. 자, 선물 받으세요.”

설마는 역시였다.

나는 두 사람이 건넨 선물을 품에 잔뜩 안았다.

“지금 여기서 풀어봐도 돼?”

조심스럽게 질문했는데, 두 명 다 고개를 흔쾌히 끄덕였다.

“물론이죠!”

“미르 맘대로 해.”

누구 선물을 먼저 풀어볼까 고민하다가, 나는 동시에 포장을 뜯기로 했다.

제이크가 건넨 작은 상자에서는 웬 작은 펜던트가 나왔다.

“세상에! 이게 뭐야, 제이크?”

“아, 그거. 꾹 누르면 나한테 신호가 오는 마법 아이템이야.”

“마법 아이템?”

고개를 갸웃했더니, 제이크가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응. 혹시라도 위험한 일이나 나를 부르고 싶을 때 이걸 눌러. 그럼 내가 곧바로 올게.”

“내가 장난으로 여러 번 누르면 어떻게 돼?”

“상관없어. 그럼 미르 옆에서 계속해서 있을 거야.”

제이크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곧이어 나는 앨리스의 선물도 확인했다.

“우와! 좋은 냄새!”

말린 과일 열매와 꽃다발 같은 것이 잔뜩 들어 있었다.

“요정의 섬에서만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에요. 이 붉은 열매는 아픈 걸 안 아프게 해주고, 보라색 열매는 잠을 잘 잘 수 있게 해줘요. 이 꽃은 향기를 맡으면 입맛이 살아난대요.”

앨리스는 신난 표정으로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다들, 정말로 나를 생각해서 고심한 끝에 선물을 고른 것이 티가 났다.

“제이크, 선물 정말 고마워. 만약 필요하게 된다면 저 펜던트를 꼭 사용할게.”

“응, 꼭 써야 돼.”

나는 제이크와 앨리스의 손을 꼭 잡고 감사 인사를 했다.

“그리고 앨리스. 선물 잘 받을게요. 정말 고마워요. 아프거나 힘들 때 앨리스가 준 열매를 먹고 힘낼 거예요.”

“네, 제 선물이 에미르 님에게 도움이 되면 정말 좋을 것 같아요!”

앨리스가 화사하게 웃었다.

그 이후로도 우리는 잠시 대화를 나누다, 이내 유모가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에 헤어졌다.

* * *

몇 주의 방학을 별장에서 지내고, 이후 후작저로 돌아오고도 일주일이 지났다.

마침내 오늘은, 기다리고 기다리던 유치원 가는 날이었다!

“유치원 가는 게 그렇게 좋으세요, 아가씨?”

머리를 빗겨주던 유모가 웃으며 질문했다.

깨우지도 않았는데 평소보다 일찍 일어난 데다, 유모가 말하지 않아도 이것저것 척척 준비해 놓은 나를 보고 하는 말이었다.

물론 나는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 좋아. 오늘만을 내내 기다려 왔어. 물론 방학도 쉬느라 즐거웠지만.”

유치원에 가면 아이들을 만나 무슨 이야기부터 해야 하는지 고민하느라 어젯밤을 꼴딱 새워버린 건 나를 빼고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었다.

나는 마차에서 내려 유치원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겨우 한 달 남짓 방문하지 않았을 뿐인데도 발을 디디는 걸음이 새롭게 느껴졌다.

어느새 더위는 거의 다 가시고, 뺨에 닿는 바람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곧 있으면 가을이 오겠지, 아마?

다닐 수 있는 시간이 앞으로 반년도 채 남지 않았다.

그동안은 열심히, 그리고 재밌게 살아야겠다!

‘응? 그런데 저 마차는 뭐지?’

그렇게 다짐하고서 잠시 주변을 둘러보는데, 시야에 못 보던 마차가 보였다.

제국 귀족들이 흔히 쓰는 것과는 조금 다르게, 이국적인 장식이 달린 어두운 빛의 마차였다.

‘으음, 누가 새 마차를 사기라도 했나.’

물론 나는 그다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고 그냥 지나쳤다.

당연했다. 설마 ‘전학생’이 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까.

* * *

등원 시간이 지나고, 나까지 포함해서 6명의 아이가 교실에 모였다.

하루하루 쑥쑥 클 나이라서일까.

한 달 사이 달라진 다른 아이들의 모습이 조금은 어색했다.

하지만 언제 어색했냐는 듯, 서로 대화를 나누자 금세 상대방에게 다시 익숙해졌다.

당연했다. 우리는 처음 만난 게 아니라 반년간 매일같이 만나며 친구로 지냈던 사이니까.

방학 사이 무언가가 조금 달라졌다고 해도, 반년이라는 시간이 쌓아놓은 친밀감은 여전히 끈끈했다.

우리는 모여서 서로가 여름방학에 무엇을 했는지 이야기를 시작했다.

“뭐, 나는 사막에 다녀왔지. 엄청 더웠어. 맨날 신발 안에 모래가 들어가고 말야. 도마뱀이나 전갈도 봤어. 내 베개 옆에 있어서 얼마나 놀랐는지. 으으, 전갈!”

세드릭은 전갈의 생김새를 손까지 휘저어가며 설명했다.

자신이 용감한 기사라는 것을 매일 강조하는 세드릭이니, 무서워하는 것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건 아닌 모양이다.

나는 세드릭이 가진 의외의 모습에 놀랐다.

세드릭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던 니나이나가 무심히 대꾸하며 말을 이었다.

“저런, 무서웠겠네. 나는 방학에 공부를 시작했어. 별로 재미는 없지만. 그래도 나만 하는 게 아니라 오라버니도 같이 배우니까 상관없어.”

니나이나가 니콜라스와 함께 저명한 학자들에게 수업을 받고 있다는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이윽고 앨리스도 반짝이는 눈을 하고서 제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요정의 섬에서 지냈어요. 낮에는 집에서 잠을 자고, 밤이 돼서 모두 잘 시간이 되면 에이비시 님을 따라 섬에 가서 요정들과 놀았어요.”

“우와, 재미있었겠다.”

세드릭이 감탄했다. 퍽 부러워 보이는 표정이었다.

“저는 마탑에 가서 마법을 배우고 왔습니다.”

제이크가 꽤 의젓해진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곁에 앉아 소곤거리며 물었다.

“무슨 마법을 배웠어, 제이?”

“응, 지난번에 말했던 순간이동 마법이랑 식물 마법, 그 외에도 이것저것 배웠어. 나중에 말해줄게.”

“대단하다. 방학에 열심히 공부하며 지냈구나.”

나는 감탄했다.

그러자 다른 아이들이 궁금하다는 듯 내게 물었다.

“에미르 영애는 방학에 뭘 했어?”

“아, 저는…….”

나는 살짝 머쓱해진 표정으로 대답했다.

“바닷가에 있는 별장에 가서 가족들과 내내 휴가를 보냈어요.”

“바다!”

“네, 생일 파티도 했고요. 그러고 보니 황자 전하, 황녀 전하. 그리고 세드릭 님. 생일 선물 감사해요. 잘 받았어요!”

나는 아차 하며 뒤늦게서야 생일선물에 대한 감사 인사를 했다.

“뭐, 그 정도 가지고 감사는 뭘.”

세드릭은 어쩐지 우쭐대는 것 같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분명 겸손한 말인데 어쩐지 겸손하게 들리지 않는 대답이었다.

“황금 방패도, 보석함도, 동화책도 모두 잘 쓰고 있어요. 물론, 펜던트와 나무 열매도요.”

방패는 침실 벽에 장식품처럼 걸어두었고, 보석함은 평범한 보석함인 척 위장해 드레스룸에 갖다 두었다.

수십 권의 동화책은 내 책장에 잘 꽂혀 있었다.

펜던트는 항시 지니고 다니는 중이고, 앨리스가 준 열매는 별장에 있을 때 음식을 잘못 먹고 탈이 나 요긴하게 사용했다.

내 말에 선물을 보내준 아이들이 뿌듯해했다.

그때였다.

교실 앞문이 부드럽게 열리며, 선생님인 에드몽 부인이 들어오셨다.

“……!”

그런데, 에드몽 부인의 옆에 웬 남자아이가 한 명 있었다.

어쩐지 얼굴을 어디서 본 것만 같이 익숙한데?

옷차림도 어둡고 단정한 게 꼭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앗, 설마. 그때 황궁 정원에서 만났던?’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도 모두 그 소년에게 시선이 가 있었다.

기억력이 좋은 몇몇은 알아보기도 한 것 같았다.

그때, 에드몽 부인이 우리를 향해 질문했다.

“방학은 모두 잘 지내셨을까요?”

“네!”

그녀는 잠시 우리의 커다란 외침에 미소 짓나 싶더니, 이내 옆에 서 있는 남자아이를 우리에게 소개했다.

“아, 이쪽은 오늘부터 새로 유치원에 다니기로 한 분이에요. 왕국에서 온 마야 트위트 소공자님이랍니다.”

“……!”

저, 전학생? 마야가 우리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단 말이야?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었다.

물론 다른 아이들도 나 못지 않게 당황한 눈치였다.

“쟤는…… 그때 황궁에서 만났던 그!”

세드릭이 눈을 부릅뜨며 외쳤다.

동시에, 마야가 자기소개를 했다.

“마야 트위트라고 합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그 이후 마야는 매우 자연스럽게 새로 마련된 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너무 익숙해 보이는 태도라서 순간 전학생이 아닌 줄 알 정도였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기 전 잠시 쉬는 시간.

우리는 말을 맞추지도 않았는데 우르르 마야의 자리로 몰려갔다.

그런데 막상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우물쭈물 입을 다물고 있는데, 마야가 먼저 반갑게 내게 인사했다.

“안녕, 에미르?”

“……안녕하세요?”

얼떨결에 나도 인사를 하게 되었다. 그러자 마야가 싱긋 웃었다.

“그때 우리 또 만날 거라고 했잖아.”

맞다, 그렇게 말하긴 했었다.

‘아니, 그런데 그 말이 유치원에 전학 온다는 말인지는 몰랐지!’

내가 당황하고 있으니, 마야가 이내 다른 아이들에게도 인사를 했다.

“황자 전하, 황녀 전하. 여기서 또 뵙네요. 앨리스 영애와 세드릭, 제이크 영식도 반가워요.”

“그래, 여기서 또 만나는구나.”

니콜라스는 의연하게 대꾸해 주었다.

반대로 세드릭은 개미만 한 목소리로 꿍얼거렸다.

“……난 별로 안 반가운데.”

그때 마야가 갑자기 내게 부탁을 청했다.

“에미르 영애, 내가 이곳은 처음 와보는데 안내 좀 해줄 수 있을까?”

“……안내요? 아, 그럴게요.”

갑작스러운 부탁이었지만 생각해 보니 그럴 만도 했다.

확실히 이 유치원은 넓었으니까.

길을 잃을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주요 시설들이 어디 있는지 정도는 알아둬야 생활이 편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아니, 잠깐. 왜 굳이 에미르에게 시키는 거야?”

돌연 세드릭이 마야의 소매자락을 붙잡으며 마음에 안 든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러자 마야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시키는 게 아니라 부탁하는 거예요. 에미르 영애는 세드릭 영식과 달리 친절하신 분이니까 말이죠.”

“……내가 뭘 어쨌다고. 그리고 유치원이 궁금하면 네가 직접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면 될 일 아닌가?”

이크, 이러다가 말싸움 나겠다.

나는 급히 중재에 들어갔다.

“잠깐만요, 다들 싸우지 마세요. 유치원 안내가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닌걸요. 정 그렇다면 우리 다 같이 유치원 구경을 하도록 해요.”

“그것도 좋은 생각인걸.”

마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세드릭은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으나 결국 우리의 뒤를 졸졸 따라왔다.

“저 건물은 점심 식사나 간식을 만드는 주방이에요. 아참, 점심은 항상 유치원 교실 안에서 먹어요.”

“이곳은 낮잠 자는 공간이에요. 물론, 오후에는 매일 모여서 놀기 때문에 낮잠 잘 일은 거의 없지만요.”

“여기는 창고예요. 매일 청소하기 때문에 먼지가 쌓여 있지는 않지만 잘못했다가는 물건을 깨뜨리거나 망가뜨릴 수 있으니 조심해야 해요.”

나는 아이들과 함께 유치원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마야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마야는 내 말에 귀 기울이는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덕끄덕 하며 맞장구쳤다.

그리고 유치원 구경을 다 하고 교실로 돌아와서는 행복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역시 유치원에 다니기로 하길 잘한 것 같아. 왕국 북부 성에 있을 때는 비슷한 나이 또래가 없었거든.”

“아…….”

마야의 속사정을 듣게 된 나는 침음을 삼켰다.

‘외로웠겠다.’

나야 지금보다 더 어릴 때부터 제이크라는 친한 또래 친구가 있었지만, 지금 친구가 된 다른 아이들도 처음 보았을 때는 다들 혼자였었다.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처음에는 다들 예민하게 굴어 쉽게 다가가지 못했던 기억이 났다.

“뭐, 뭐야. 그런 거였어? 난 또 에미르 때문에 유치원에 온 건 줄 알았잖아.”

세드릭 역시 그제서야 마야에 대한 경계심을 조금이나마 지운 듯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물론 그 이유도 있긴 해.”

“뭐?”

“농담이야.”

어쩐지 마야와 세드릭은 은근히 서로 잘 맞아 보이기도 했다.

잘하면 서로 금방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았다.

* * *

여름방학 이후 첫 수업이 시작했다. 제국의 경제에 대해 간단하게 배우는 수업이었다.

수업이 끝날 무렵, 선생님께서 재미있어 보이는 실습 체험을 다음번에 하자고 제안하셨다.

“그래서, 모의 시장 체험을 해보려고 합니다.”

“시장 체험이요?”

우리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선생님이 설명을 해주셨다.

“네. 모형 돈을 가지고 시장에 온 것처럼 물건을 사고 파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한마디로 시장 놀이를 한다는 이야기 같았다.

“우와! 재밌겠다!”

아이들이 신난 듯 탄성을 질렀다.

그때 앨리스가 질문했다.

“무슨 물건을 사고 팔아요?”

“음, 그건 말이지요.”

선생님이 잠시 뜸을 들였다.

나는 어쩐지 그 뒤에 나올 말이 예상되었다.

“각자 가지고 있는 물건들을 열 개씩 가져오시면 됩니다. 새로 구해오실 필요까지는 없고요.”

역시, 내 생각이 맞아떨어졌다.

음식 같은 것을 직접 만들어서 사고파는 것도 충분히 재미있겠지만, 아무래도 우리의 나이가 나이다 보니 그건 좀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나와 다르게 다른 아이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던 모양이다.

한차례 술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가지고 있는 물건이라고?”

“무슨 물건이든 상관없나요?”

마야의 당찬 질문에, 선생님이 아차 하며 설명했다.

“물론 그런 건 아닙니다. 일단, 너무 작거나 큰 물건은 안 됩니다. 한 손에 들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적당하겠죠.”

“아하!”

“또, 칼이나 유리처럼 위험하고 깨지기 쉬운 물건도 가져오시면 안 됩니다.”

선생님의 말에, 꽤나 들떠 있던 세드릭의 표정이 갑작스레 굳어버렸다.

‘으음, 설마 세드릭. 장식용 단검이라도 가져오려 했었던 거야?’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

작게 혼잣말로 ‘아, 그럼 뭘 가져와야 돼!’ 하고 투덜거리는 걸 보니.

그리고 뒤늦게 선생님은 추가로 안내 사항을 말씀하셨다.

“물론, 그러실 분은 없겠지만 아끼는 물건을 가져와도 안 됩니다. 모의지만 시장 체험이니까요. 판 물건은 다시 돌려받을 수 없어요.”

물론 그렇겠지. 내가 정말 좋아하는 목걸이나, 소중한 사람들에게 받은 선물 같은 물건을 가져올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으음, 그렇다면 나는 뭘 가져와야 할까?’

나는 고민에 빠졌다.

한두 가지라면 당장에 생각나는 물건이 꽤 있지만, 열 가지라니.

생각보다 많았다.

너무 초라하거나 볼품없는 물건을 가져오기는 싫었다.

물론 집문서나 황금 동상 같은 비싸고 귀한 물건을 가져올 수도 없는 일이었고.

‘……이따 집에 돌아가면 한번 뒤져봐야겠다.’

그렇게 후작저로 돌아온 오후.

나는 내내 집 안 구석구석을 뒤지고 있었다.

내 방 책장과 서랍, 테이블 밑부터 시작해서 복도의 장식장들까지.

그런 내 꼴이 꽤나 이상해 보였던 걸까?

바삐 움직이는 내 곁을 지나가던 하녀들이 내게 ‘아가씨, 뭐 잃어버린 물건이라도 있으세요? 저희가 찾아드릴까요?’라고 물었다.

“아니, 괜찮아! 내가 찾을게.”

물론 나는 하녀들의 호의를 모두 사양했다.

내 손으로 직접 찾아야 의미 있을 것 같았다.

‘아무래도 서랍이나 책장 같은 곳을 뒤지기보다는, 창고에 들어가 보는 게 더 나으려나?’

그때 문득 든 생각에, 집사에게 창고 열쇠를 빌려 창고로 들어갔다.

등불을 들어준 채 내 뒤를 따라오는 하녀가 ‘아가씨께서 창고는 웬일이시지?’ 하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느껴졌다.

“콜록, 콜록! 먼지가…….”

나는 오랫동안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깊은 창고 구석까지 들어가 시장놀이에 내놓을 만한 물건을 찾아보았다.

“이게 좋겠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딱 적당한 물건들을 찾을 수 있었다.

‘으음. 일단 엄마, 아빠한테 허락부터 맡아야겠다.’

나는 먼지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아빠의 집무실로 달려갔다.

다행히도 부모님께서는 내가 들고 온 물건을 보고, 흔쾌히 가져가도 된다고 허락해 주셨다.

* * *

그리고 바로 다음 날 아침, 유치원.

나를 포함해서 다른 아이들의 가방이 평소보다 빵빵했다.

무언가가 잔뜩 들어 있는 것이 겉에서도 보였다.

수업을 시작하기 전까지는 무슨 물건을 가져왔는지 비밀로 하기로 어제 약속했었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 궁금한 티를 내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수업이 시작했다.

기다렸다는 듯이 다들 각자의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평소 둥글게 모여 앉던 것과 다르게, 오늘은 간이 책상들을 가져와 7명이 각각 따로 떨어져 앉아 있었다.

당연하게도 시장놀이를 하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3명, 4명씩 팀을 짜서 ‘구매팀’과 ‘판매팀’를 번갈아 하기로 했다.

팀은 뽑기로 정했는데, 나는 니콜라스, 그리고 앨리스와 함께 판매팀에 속하게 되었다.

“자, 이제 시장 체험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선생님의 외침과 동시에 곧바로 구매팀의 아이들이 우리에게 쪼르르 달려왔다.

다들 한 손에는 모형 돈이 든 주머니를 꼭 쥐고 있었다.

참고로, 선생님께서 나눠주신 모형 돈은, 전부 다 공평하게 은화 50개씩이었다.

상품의 가격은 최소 은화 1개에서 최대 50개까지 매길 수 있었다.

가격 책정은 판매자 마음이었다.

‘으음. 하지만 너무 비싸면 안 사갈 게 뻔하잖아?’

때문에 나는 시장의 법칙에 따라 적당한 가격을 매겨놓았다.

물건 하나당 은화 5개 내외 정도로.

아, 참고로 내가 파는 물건은 다름 아닌 필기구였다.

정확히 말하면, 만년필과 깃펜, 잉크라고 해야 할까.

어제 창고를 뒤지다가 웬 다 떨어져 가는 오래된 나무 상자를 발견했는데 그 안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낡은 상자 겉면과는 다르게 상태가 새것과 다름없는 필기구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회, 횡재다!’

이게 대체 웬 떡인가 싶어, 부모님께 달려가 허락도 맡을 겸 물어보니…… 십여 년 전쯤 상단에서 이것저것 물건을 사들여 놓고 깜빡 잊었던 것이라고 했다.

다행히도 상자 내부에 마법 보존 처리가 되어 있어서 물건이 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러니까 얘들아, 어서 내 물건을 사가! 어서! 싸다 싸!’

나는 구매팀의 아이들에게 열렬한 시선과 함께 텔레파시를 보냈다.

놀이가 시작되자마자 재빠르게 달려오던 아이들은,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고민되었는지 중간쯤에서 멈춰 서 망설이고 있었다.

‘한 명이라도 좋으니까 어서 이리 와보라고!’

나는 옆자리인 앨리스와, 옆옆 자리인 니콜라스의 가게를 슬쩍 곁눈질로 염탐(?)하며 속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니콜라스는 이런저런 무늬가 그려진 수첩을 팔고 있었고, 앨리스의 앞에는 손바닥 크기보다 살짝 작은 상자들이 놓여 있었다.

‘평범한 상자는 아닌 것 같은데? 완전 예뻐.’

상자 겉면이 황홀할 정도로 아름답게 조각된 걸 봐서는, 요정들의 솜씨가 분명했다.

그때…….

드디어 내 필기구 가게에 첫 손님이 등장했다!

바로 제이크였다.

“안녕, 미르. 미르네 상점, 구경하러 왔어.”

“제이크! 어서 와!”

나는 두 팔을 벌리고 환영했다.

제이크는 빙긋 웃으며 내 앞에 있는 물건들을 구경했다.

그러더니 이내 신기하다는 듯 작게 탄성을 터뜨렸다.

“와, 미르. 잉크 색이 정말 예뻐!”

“그렇지? 나도 처음에 보고 놀랐다니까.”

내 너스레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제국에서 흔하게 구할 수 있는 보통 잉크들과는 달랐으니까.

형광색, 분홍색, 하늘색 등 특이한 빛깔의 잉크들이었다.

반짝거리는 펄이 들어가 있기도 했다.

‘아무래도, 너무 특이했던 탓에 10여 년 전 잠깐 판매한 이후로는 단종되기라도 한 모양이야. 아쉽네.’

한편 제이크는 퍽 진지한 표정으로 물건을 고르더니, 이내 내가 종이에 써놓은 임시 가격표를 힐긋 확인했다.

그러고는 조금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미르, 이렇게 싸게 팔아도 되는 거야?”

“응? 싸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나는 조금 의아해졌다.

하나에 은화 5개 정도면 그렇게 싼 것만은 아닌 것 같은데?

나름 적당한 가격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미르 물건이 하나에 은화 50개여도 사갈 생각으로 왔다고.”

“뭐?!”

그런데 이어진 제이크의 중얼거림에 도리어 놀란 건 나였다.

나는 재빠르게 제이크의 잘못된 경제관념(?)을 정정해 주었다.

“제이크, 그럼 안 돼! 아무리 모의 체험이라도 서로가 만족할 거래를 해야 한다고. 한쪽만 만족하는 거래는 불공평해.”

“그렇지만, 나는 미르가 파는 물건이라면 그게 뭐든 전 재산을 털어서라도 사고 싶은걸?”

그럼 미르도 만족하고, 나도 만족하니까 공평한 거 아니야?

……라고 갸웃거리며 되묻는 제이크의 말에, 나는 그만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아무튼, 이 물건들 내가 다 사갈게.”

이윽고 제이크가 환히 미소 지으며, 제 손에 들린 모형 돈과 내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을 싹 맞바꿔 가려 하던 그 순간!

“잠깐. 미안하지만 그건 안 돼. 나도 이 가게에서 사고 싶은 게 있거든.”

그런 제이크를 가로막는 누군가의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코앞에서 들려왔다.

“니나이나 전하?”

“그래. 나야. 참, 제이크 영식은 들고 있는 물건을 다시 내려주겠어? 나도 구경하려 하거든.”

니나이나의 말에 제이크는 아쉬운 표정으로 순순히 싹쓸이했던 필기구들을 다시 제자리에 내려놓았다.

“음, 나는 이 붉은색 깃펜이 마음에 드네. 분홍빛 잉크도 특이해서 좋아.”

잠시 후 니나이나는 자신이 마음에 드는 물건 두 개를 고르고 내게 은화 10개를 내밀었다.

“자, 여기.”

“앗, 감사합니다. 전하! 또 오세…….”

나도 모르게 ‘또 오세요!’ 하고 인사할 뻔하다가 입을 헙 다물었다.

아무래도 내가 지금 시장놀이의 상인 역할에 너무 과하게 몰입해 버린 모양이었다.

그때, 옆에 여전히 서 있던 제이크가 아쉬운 눈빛으로 내게 말했다.

“미르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아.”

“응?”

“내가 갖고 싶은 건 다른 사람들도 다 갖고 싶은 걸 테니까. 너무 욕심부리면 안 되는 거겠지?”

그렇게 말하면서 제이크는 하늘빛의 잉크와 만년필을 집었다.

“그럼 너무 욕심내지 않고 딱 이 정도만 살게. 그렇지만 이따가 남은 게 있으면 다시 와서 가져갈 거야.”

제이크가 그렇게 약속한 다음, 뒤돌아 다른 가게로 가는 것까지 본 나는 생각했다.

‘으음, 역시 제이크야. 똑똑해서 그런지 하나를 가르쳐 주면 열을 안다니까.’

어쩐지 뿌듯해졌다.

놀이가 시작하자마자 물건의 절반을 팔아서 더 기분이 좋은 것도 있었지만.

어느새 니콜라스와 앨리스의 가게 앞에도 아이들이 한두 명씩 구경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 내 가게 앞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이제 적극적으로 호객해 볼까?’

그렇게 다짐한 나는 이윽고 크고 우렁차게 외쳤다.

“싸다 싸! 만년필이 단돈 은화 5개! 잉크도 은화 5개!”

그 외침을 듣고, 누군가가 내 가게로 발걸음을 옮겼다.

“하하, 정말 그렇게 싸다는 거야?”

그 발걸음의 주인은 다름 아닌 마야였다.

내 말에 솔깃하기라도 한 건지 옅은 웃음을 머금은 채 나와 눈을 마주쳤다.

“……어서 오세요! 네, 물론이에요. 보세요. 하나당 은화 5개잖아요.”

“음, 정말이네.”

내가 열심히 설명해 주자 마야는 고개를 끄덕거리며 물건을 구경했다.

그때, 나는 마야의 한쪽 손에 돈주머니 말고도 다른 것이 들려 있는 걸 보았다.

‘이미 니콜라스와 앨리스에게서 물건을 샀나 본데?’

나는 세심한 눈길로 물건을 관찰했다.

작은 은회색빛 가죽 다이어리와, 은색의 화려한 무늬가 새겨진 나무 상자.

아무래도 마야는 의외로 화려하고반짝거리는 물건을 좋아하는 모양이었다.

특히, 제 머리색인 은색과 비슷한 색을.

‘그렇다면 좋아할 만한 물건을 추천해 줘야지.’

마침 깃털 펜 중에 마야의 마음에 들 법한 것이 있었다.

빛을 안 받을 때는 평범한 회색으로 보이는데, 빛을 받으면 호수처럼 은빛으로 반짝거리는 게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저기, 이 깃털 펜은 어떠세요? 색깔이 예쁘거든요.”

나는 다른 펜들에 가려져 있던 은색 깃펜을 꺼내 들며 이야기했다.

내 말과 동시에, 마침 오전의 밝은 햇살이 창문을 넘어와 깃털에 닿았다.

반짝-

깃털이 고운 색을 내자 그 순간 마야의 눈빛도 달라진 것 같았다.

“……정말 예쁘네.”

“아, 그렇죠?”

영업 성공!

나는 속으로 키득키득 웃었다.

“살 거예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확인을 위해 물어보았다. 마야의 대답은 조금 늦게 돌아왔다.

“……응, 살게. 사야지.”

“감사해요!”

내 인사에, 돈주머니를 뒤적거리던 마야가 문득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왜 그러는 거지?

“그런데 너는 나를 왜 이렇게 잘 아니?”

“……?”

응?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내가 어리둥절해 있으니, 마야가 작게 헛기침하며 말을 이었다.

“내가 좋아할 걸 알고 이걸 내줬잖아. 아니야?”

“아.”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알고 준 게 맞으니까.

하지만…….

“잘 안다기보다는, 눈썰미가 좋은 편이라서요.”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해 줬다. 딱히 마야에 대해서만 잘 아는 건 아니었으니까.

‘단지 이 유치원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 다 잘 알고 있는 것뿐이라고!’

그러자 마야는 조금 머쓱해진 얼굴로 대꾸했다.

“……그런 거였어? 난, 또.”

음, 저 미련 있어 보이는 ‘난, 또’는 뭘까.

하지만 나는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왜냐하면 새로운 손님이 등장했기 때문이다.

아니, 마지막 손님이라고 해야 하나.

“어서 오세요!”

한껏 발랄한 목소리로 외치자, 세드릭이 흠칫하며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아니, 환영해 주는 건데 왜 그래?

조금 섭섭해졌다.

“……너 장사 접었어?”

그러더니 대뜸 저렇게 묻는다.

뭐야, 세드릭. 왜 갑자기 한동안 안 걸던 시비를 거는 건데?

괜스레 어이가 없어져서, 나는 톡 쏘듯이 까칠하게 대답해줬다.

“아직 장사하는데요?”

“그래? 이상하네. 근데 왜 물건이 없지.”

세드릭은 미심쩍은 눈빛으로 내 책상 위를 응시했다.

아, 그러고 보니 벌써 반 넘게 물건이 팔렸던가. 조금 비어 보이기는 한다.

“……아직 남았어요. 보세요. 세드릭 님이 좋아하는 형광색 잉크도 있다고요!”

나는 책상 위 구석에 있는 잉크를 가리켰다.

딱히 인기가 없어 안 팔린 건 아니다.

뭐, 그렇다고 세드릭을 위해 특별히 남겨놓은 것도 아니지만.

“혀, 형광색?”

내가 가리킨 잉크 병을 보고 세드릭의 눈동자가 한차례 고민과 갈등으로 흔들렸다.

역시 좋아하는 게 맞구나.

형광색 넥타이를 고를 때부터 알아봤지만, 세드릭의 취향은 한결같았다.

“네, 예쁜 형광이에요. 이 잉크로 쓴 편지를 밤에 보면 반짝일걸요?”

“……그러네. 이걸로 편지를 써도 좋겠다.”

내 말에 살랑살랑 마음이 흔들리는지, 세드릭은 헤벌쭉한 얼굴로 잉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살 거예요?”

나는 그 틈을 타 은근슬쩍 질문했다.

그러자 고민되는 듯 세드릭이 깊은 침음을 흘렸다.

“음…….”

“저기, 만약에 잉크를 산다면 저 흰색 만년필도 덤으로 드릴게요.”

파격 덤!

이렇게까지 했는데 사겠지? 응?

그런데…….

“미안, 나 남은 돈이 없다.”

“……!”

돌아온 세드릭의 대답은 청천벽력이었다.

그러고 보니 세드릭의 손목에 걸린 돈주머니가 아무것도 들어 있지 않은 것처럼 가볍게 흔들리고 있었다.

세드릭은 제 재킷 주머니를 뒤지더니, 이내 딱 하나 남은 은화를 집어 들며 조심스레 질문했다.

“딱 한 개 있네.”

“…….”

“하아, 한 개로는 안 되겠지?”

조금 아련하기까지 한 눈망울을 반짝이며, 되지도 않는 요구를 하는 세드릭이었다.

‘세 개였으면 망설임 없이 깎아줬을 텐데. 달랑 은화 한 개라니!’

으으, 고민이었다. 이걸 깎아줘야 돼 말아야 돼? 하지만 어차피 판매 시간도 다 끝나가는데…….

‘에잇, 모르겠다.’

결국 나는 세드릭의 손에 있는 은화 한 개를 낚아채고, 대신 잉크 병을 올려주었다.

“……가져가세요. 싸게 드릴게요.”

“와, 정말? 정말로 주는 거지?”

뛸 듯이 기뻐하는 걸 보니, 정말로 형광색 잉크가 갖고 싶긴 했던 모양이었다.

뭐, 헤벌쭉하게 푼수처럼 웃는 걸 보고 있으니 내 기분도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래, 세드릭이 아니었다면 어차피 형광 잉크를 사갈 사람도 없었어. 제 주인을 찾아간 거라고 생각해야지.’

그리고 얼마 있지 않아 시간이 종료되었다.

이제 역할을 바꿔서 나, 앨리스, 니콜라스가 구매팀을 할 차례였다.

* * *

‘으음, 고민되네.’

놀이가 다시 시작되고, 나는 어디로 먼저 가볼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힐끗 관찰해 보니 니나이나는 보석함을 하나 통째로 가져오기라도 한 듯 화려한 장신구들을 팔고 있었고, 세드릭은 색색의 장식 술을 내놓았다.

제이크는 마법이 걸린 장난감들을, 마야는 웬 작은 도자기들을 가져왔다.

‘역시, 제이크에게 제일 먼저 가봐야겠지? 제이크도 아까 내게 먼저 와줬으니까.’

결심을 마친 나는 먼저 제이크의 책상으로 향했다.

제이크가 손을 흔들며 나를 반겨주었다.

“어서 와, 미르.”

“나도 제이크 네 상점을 구경하려고.”

“얼마든지 구경해. 마음껏 만져봐도 돼. 미르 너라면.”

제이크는 선뜻 그렇게 말하면서 물건들을 내 쪽으로 밀어주었다.

덕분에 나는 편하게 구경할 수 있었다.

내 시선이 제일 먼저 닿은 물건은, 다름 아닌 만년필이었다.

내가 팔던 것과 비슷하게 생겼는데, 신기하게도 끝에 작은 버튼이 있었다.

“이 펜도 혹시 마법 물품이야?”

“응, 맞아. 목소리를 저장해서 들을 수 있는 물건이야.”

“뭐? 그게 정말이야?”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물론 이 세계에도 녹음할 수 있는 마력석이 있긴 했다.

하지만 설마 그 마력석을 이렇게 가느다란 펜에 넣어서 휴대용 녹음 펜을 만들 줄은 몰랐는데.

“정말 신기하다! 나 이거 살래.”

나는 곧바로 구매를 결정했다.

그러자 제이크가 사용법을 알려줬다.

“버튼을 길게 누르면 녹음할 수 있고, 두 번 누르면 소리가 나와. 자, 이렇게 하면 돼.”

제이크는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공에 대고 자그맣게 속삭였다.

“미르가 좋아.”

“응?”

나는 순간 이게 녹음기 테스트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갑자기 제이크가 왜 날 좋다고 하는 거지?’ 싶어서 멍해졌다.

그런 내게, 제이크는 녹음이 완료된 펜을 내밀었다.

“한번 눌러봐.”

“아, 으응.”

꾹, 꾹.

반질거리는 버튼을 누르자, 곧바로 방금 제이크가 녹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르가 좋아.]

“우와!”

신기해서 한 번 더 눌러봤다.

꾹, 꾹. 하고.

[미르가 좋아.]

[미르가 좋아.]

“……가끔 실수로 두 번 나오기도 해.”

제이크가 머쓱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돈을 지불하기 위해 주머니를 뒤적였다.

“얼마야?”

“음, 미르는 공짜야.”

“뭐?”

내가 잘못 들었나 싶어서, 주머니를 뒤적이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제이크가 어깨를 으쓱였다.

“원래는 은화 7개인데, 미르가 갖고 싶으면 은화 같은 건 필요 없어.”

“그래도, 이건 시장놀이잖아.”

나는 은화 7개를 꺼내 제이크의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자 제이크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때? 녹음 펜은 은화 7개에 팔게. 대신, 미르에게만 특별히 덤을 줄게.”

“덤?”

“응. 다른 물건 중 하나를 골라 봐.”

제이크의 말에 자연스레 내 시선은 어디론가 향했다.

사실 아까부터 조금 관심이 가던 물건이었다.

“그럼, 이 공도 돼?”

“물론이지. 어떤 색이 좋아?”

내가 가리킨 것은 다름 아닌 색색의 탱탱볼이었다.

다른 물건들과는 다르게 별 기능이 없어 보였지만, 그냥 색이 너무 예뻐서 마음에 들었다.

“이 중에서 하나 고르자면, 난 초록색.”

“좋아, 미르. 이건 덤이야.”

“고마워, 제이크.”

나는 기쁘게 제이크의 덤을 받아들었다.

이후 뒤돌아 가려는데, 제이크가 깜빡했다는 듯 나를 붙잡았다.

“아 참, 그거 바닥에 튕기면 빛이 나니까 혹시 떨어뜨려도 놀라지 마.”

“……!”

몰랐다. 그냥 평범한 탱탱볼인 줄 알았는데. 이것도 마법 물품이었다니!

‘아무래도 제이크가 가져온 물건들에는 다 마법이 걸려 있는 건가 봐.’

이후, 나는 바로 옆에 있던 니나이나의 책상으로 향했다.

니나이나가 나를 보고 빙긋 웃었다.

“어서 와. 에미르 네게 어울릴 만한 게 많아.”

“……!”

“사실, 미리 몇 개 숨겨뒀어. 볼래?”

니나이나는 비밀이라는 듯 입술에 손가락을 얹고서, 이내 책상 서랍을 뒤적거려 무언가를 꺼냈다.

“이건, 반지와 팔찌잖아요?”

초록빛이 선명한 에메랄드 보석이 달린 주얼리 세트였다.

내 물음에 니나이나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다른 걸 보여줄까?”

“아뇨, 아뇨! 그건 아니에요. 오히려…….”

너무 내 취향이라 큰일이었다.

그러고 보니…….

‘니나이나의 팔목과 손가락에도 저 세트와 똑같이 생긴 장신구가 달려 있잖아? 보석 색깔만 다른.’

예전부터 니나이나는 종종 제가 좋아하는 것을 내게도 선물하고는 했다.

아무래도 이번에도 내가 사갈 것을 예상하고서 미리 준비해 둔 게 분명했다.

“너무 마음에 들어요, 전하.”

내 환한 웃음에, 그제야 니나이나가 다행이라는 듯 안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럼, 일단 한번 팔찌부터 차볼래?”

그렇게 묻고는 진지한 눈빛으로 내 손목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가늠하는 듯했다.

“흐음, 어디 보자. 에미르는 손목이 가느다랗네……. 이 칸에 잠금쇠를 하는 게 좋겠다.”

“헉, 전하가 손수 채워주시는 건가요?”

니나이나의 작은 손이 팔찌를 들고 내 손목에 닿았다.

난 깜짝 놀랐다.

니나이나는 뭘 새삼 놀라냐는 투로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그보다, 딱 맞네.”

“……정말로 그래요.”

꼭 처음부터 나를 위해 맞춤 제작된 것처럼 철컥하고 맞아들어 갔다.

“자, 이제 반지도 끼워줄게. 손가락 줘봐.”

나는 순순히 손가락을 내놓았다.

그러자 알 굵은 에메랄드 은반지가 내 손가락에 끼워졌다.

다른 손가락은 애매하게 헐렁하거나 혹은 꽉 끼어서, 하는 수 없이 검지를 선택했다.

나는 반짝거리는 보석이 어쩐지 낯설었다.

집에 내 보석함이 있기는 한데, 애초에 장신구를 자주 하고 다니는 편이 아니어서일까.

‘그렇지만 또 나쁘지만은 않은 기분인걸.’

나는 웃으며 초록빛으로 꾸며진 내 손을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그러다 뒤늦게 가장 중요한 무언가를 깨닫고 니나이나에게 물었다.

“전하, 그럼 저 이 팔찌와 반지 살게요. 얼마예요?”

“음, 얼마로 하는 게 좋을까? 사실 얼마에 팔지 생각해 보지 않았어.”

어쩐지 파는 당사자인 니나이나조차도 잊어버리고 있었던 듯했다.

“네에?”

내가 놀라자, 니나이나가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지금 정하자. 3실버 어때?”

“반지, 목걸이 각각 해서요?”

상당히 저렴한 가격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자 니나이나가 단번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아니. 둘 다 한꺼번에 3실버.”

“……안 돼요!”

니나이나의 말에 오히려 사는 입장인 내가 펄쩍 뛰자, 왜 그러냐는 듯 의아한 눈빛이 되돌아왔다.

“너무 비싸니? 내가 모형 돈은 처음이라서.”

“……!”

여기서 머뭇대고 있으면 나는 저 고급스럽고 예쁜 주얼리 세트를 단돈 2실버에 헐값으로 얻게 될 게 뻔했다. 아니, 어쩌면 1실버가 될 수도.

‘그건 안 돼!’

물론 따지고 보면 내게는 하나도 손해될 게 없는, 오히려 엄청나게 이득을 보는 상황이었지만.

‘그래서 더 안 되는 거라고…….’

이건 엄연히 시장 모의 체험이었다. 경제관념을 기르기 위한 수업.

‘그러니 아무리 놀이처럼 생각한다고 해도 제값은 받아야 해.’

나는 대답 대신 돈주머니를 뒤져 은화 10개를 꺼냈다.

그리고 니나이나의 물음에 조금 늦은 대답을 건넸다.

“아뇨, 전하. 제 생각에 3실버는 너무 싼 것 같다고 생각해요. 저는 10실버를 낼게요.”

나조차도 물건 1개에 5실버를 매겨놓았었으니까.

“음, 그러니?”

니나이나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에미르 네가 하는 말이니까. 믿어.”

“……!”

어쩐지, 니나이나. 지난번 일기장 이야기도 그렇고. 나를 너무 신뢰하는 거 아닌가 싶다.

‘물론 나는 그 신뢰를 어기지 않을 테지만. 혹시 다른 사람들도 저렇게 덥석덥석 믿어버리면 어쩐담…….’

조금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이내 니나이나가 하는 말에 그 걱정은 눈 녹듯 사라졌다.

“다른 사람이었으면 믿지 않았을 거야.”

뭐야, 황녀 전하 독심술도 쓰나?

내 속마음을 알고 말한 듯해서, 순간 멈칫했다.

그러자 니나이나가 나를 바라보며 싱긋 미소 지었다.

“그렇지만 에미르는 이곳에서 내가 제일 처음 사귄 친우니까 특별해. 또 방금처럼 이렇게 나를 먼저 생각해 주기도 하잖아?”

“…….”

“그러니까 내가 믿을 수밖에 없어. 에미르는 내게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니까.”

“가, 감사해요…….”

끊임없이 이어지는 칭찬과 애정 어린 말을 듣고 있자니 어쩐지 부끄러워졌다.

나는 주머니와 보석을 챙긴 채 재빠르게 니나이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왔다.

‘그랬구나. 니나이나가 내게만 유독 친절한 이유가…….’

우연한 기회로 니나이나의 속마음을 알게 되었다.

나는 괜스레 들떠서, 한참이나 구석에서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서야 다시 시장놀이에 참여했다.

이번에 내가 방문한 곳은 세드릭의 가게였다.

“왔냐? 왜 이렇게 늦게 왔어?”

세드릭은 내가 얼굴을 보이자마자 괜스레 틱틱거렸다.

사실, 아까부터 은근히 나를 향한 세드릭의 시선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다른 가게를 구경하고 있을 때 발을 동동 구르면서 자꾸 쳐다보던데.’

세드릭은 막상 돌직구로 물어보면 아닌 척할 거면서, 사실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일 먼저 올 줄 알았더니, 다른 가게 먼저 구경하고 말이야. 친우로서의 의리가 없어.”

미안하지만, 세드릭. 이 유치원 아이들이 모두 내 친구인데 어떻게 네 의리만 챙길 수 있겠어?

‘아니, 그보다 제일 먼저 올 줄 알았다는 게 무슨 소리야. 정작 자기는 구매팀일 때 가장 나중에서야 나한테 왔으면서.’

게다가 아까 일을 생각하니, 조금 황당해졌다. 그래서 똑같이 투덜거려 주었다.

“흥, 그러는 세드릭 님도 아까 제게 가장 늦게 왔잖아요.”

“그, 그건……!”

뒤늦게서야 자신의 행동을 기억해 낸 모양인지 세드릭은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겠지, 세드릭.’

과연 세드릭은 슬금슬금 내 시선을 피하다가, 이내 안 되겠는지 책상을 내 쪽으로 살짝 밀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 그건 됐고. 물건 보러 온 거 아냐? 어서 구경해.”

말 돌리기는.

‘하지만 뭐, 애초에 세드릭이 가져온 장식 술을 구경하러 온 게 맞긴 하지.’

나는 짧게 한숨 쉬며 세드릭의 의도대로 시선을 돌려주었다.

물론 시선을 돌리자마자 곧바로 집중을 빼앗길 만큼 아름다운 장식 술이기는 했다.

그런데 구경하던 와중 문득 의문이 들었다.

‘예쁘다. 하지만 보통 이런 술은 검 손잡이 끝에 장식하지 않나? 내가 이걸 산다면 대체 어디에 써야 하는 거지?’

내가 세드릭처럼 기사라면 몰라도, 평소에 검을 지니고 다닐 일도 없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안 사고 그냥 지나치기엔 색이 너무 고운데. 어쩌지? 사서 후작가 기사님 중 한 명에게 선물이라도 해야 할까?’

그 순간, 세드릭과 다시금 시선이 마주쳤다.

나도 모르게 질문이 튀어나갔다.

“검이 없으면 이 술을 어디에 달아야 해요?”

“검이 없다고? 그럼 술을 장식할 검을 하나 사도록 해. 아니다. 살 필요도 없지. 내가 하나 줄까? 나 집에 검 많아.”

“네에?”

그렇게 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 아닌가?

내가 당황하자, 세드릭이 살짝 멈칫하더니 정색하며 대꾸했다.

“물론 방금 한 말은 농담이었어.”

“농담 같지 않았는데…….”

소심하게 중얼거렸더니, 세드릭이 뜨끔했는지 농담이라며 끝끝내 우겼다.

“뭐, 아무튼. 꼭 검이 아니라도 다른 데에 장식하면 되는 거 아니야?”

“으음…….”

역시 그래야 하나. 나는 유독 눈에 밟히는 금빛과 연보라색이 섞인 술을 만지작거렸다.

“앨리스와 니콜라스 전하도 이걸 샀어. 방 문고리와 가방에 장식하겠다고. 너도 그렇게 해.”

“아! 가방!”

나는 뒤늦게서야 내가 유치원 올 때마다 들고 다니는 작은 가방을 떠올렸다. 왜 내가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좋아요, 그럼 이거 살게요. 얼마예요?”

나는 쿨하게 빠른 구매를 결정했다.

그러자 세드릭이 살짝 멈칫하더니, 이내 주변을 둘러보고는 내게 성큼 다가왔다.

바로 귓가 근처까지.

“……?”

뭐지? 굳이 비밀리에 속삭여야 할 만큼 엄청난 가격인가?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세드릭의 목소리를 듣고 나니 어째서 그런 건지 이해가 되었다.

“……네가 아까 은화 5개짜리를 1개에 줬었지.”

“네, 분명 그랬죠.”

생각해 보니 아까 내가 세드릭에게 파격 할인을 해줬던 것이다.

“나도 이번엔 특별히 은화값을 깎아줄게.”

“그렇다면 사양하지 않을게요.”

서로 주고받는다면 나름 공정한 거래였다.

나는 웬일로 세드릭이 친절을 베푸나 싶어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다음 하는 말을 듣기 전까지.

“은화 5개 값 빼고, 특별히 은화 15개만 내.”

“……!”

아니, 뭐가 이렇게 비싸?

나는 내 귀를 의심했다.

“이게 깎아준 값이라고요?”

“그래. 너무 싸서 놀랐어?”

“음, 저, 비싸서 놀랐는데요…….”

“뭐?”

세드릭과 나는 서로를 황당한 시선으로 마주 보았다.

“이 술 하나에 15개라니. 저 아까 돈을 많이 써서 그 값이라면 살 수가 없어요.”

그리고 내 항의(?)에 그제야 세드릭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우리 둘 사이에 의사소통이 어긋난 부분이 있었다.

“뭐? 하나라고? 난 또, 네가 여기 있는 걸 다 사가겠다는 줄 알았잖아.”

“……!”

“……네가 다 마음에 드는 것처럼 고민하는 눈빛으로 만지작거리길래.”

세드릭은 괜스레 혼자 한 오해가 부끄러운 듯 변명을 주절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내가 고른 연보랏빛 술을 집어 들어 건네주었다.

거기에, 살짝 고민하다가 내려놓은 흰색 술까지 함께.

“자, 받아. 내가 선물 주는 거야. 은화는 1개만 줘도 돼.”

“선물이요?”

“그, 그래! 선물! 어서 가져가! 맘 바뀌기 전에.”

세드릭은 내 손아귀에 술을 구겨 넣듯이 건네고서는 나를 슬쩍 밀어냈다.

살 거 샀으니 어서 가버리라는 듯이 매정하게.

‘뭘까. 세드릭…….’

세드릭이 요즘 유독 부끄러움을 잘 타는 것 같다면 내 착각일까 싶었다.

* * *

마지막으로 나는 마야에게 향했다.

마야의 앞엔 도자기가 겨우 두어 개 정도 남아 있었다.

화려한 색깔로 섬세하게 그림이 그려진, 손바닥만 한 화병이나 향초 받침대 같은 작은 물건들이었다.

‘그런데 안 깨지나? 분명 선생님께서는 깨질 수 있는 위험한 물건은 가져오지 말라고 하셨는데.’

나는 문득 선생님의 말씀이 생각나서 마야에게 질문했다.

“저, 도자기는 잘 깨지지 않아요?”

“이 도자기는 망치로 세게 두드려도 안 깨져.”

말도 안 돼!

세상에 그런 도자기가 어디 있어.

내가 그런 표정을 지었더니, 마야가 웃으며 되물었다.

“궁금해 보이는 얼굴인데, 한번 시험해 볼래?”

“네?”

“깨지는지 안 깨지는지.”

그렇게 말하면서 마야는 한쪽에 놓아둔 작은 손 망치를 가리켰다.

“나는 거짓말 안 해.”

“음…….”

내가 망설이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불쑥 누군가가 나타났다.

“내가 한번 해봐도 되냐?”

세드릭이었다. 아니, 그런데 제 가게는 어쩌고 여기 서 있는 거람?

마야도 조금 당황한 눈치로 세드릭과 나를 번갈아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허락의 표시였다.

그러자 세드릭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손 망치를 들고 도자기 컵을 힘껏 내려쳤다.

내심 ‘쨍그랑!’이나 ‘와장창!’ 소리가 나며 도자기 조각이 사방으로 흩뿌려질 것을 예상했지만, 놀랍게도 정말로 도자기는 깨지지 않았다.

다만 작게 쩌저적- 소리를 내며 약간의 금만 갔을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질끈 감았던 눈을 뜨자, 놀란 표정을 하고 구경하는 아이들이 보였다.

“뭐야, 진짜로 안 깨지잖아? 내가 엄청 세게 쳤는데도.”

세드릭이 대단하다는 눈으로 마야와 도자기를 번갈아 보았다.

하지만 막상 도자기의 주인인 마야는 조금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금이 가버렸네.”

“그 정도면 충분히 튼튼한 도자기 아니에요?”

내 물음에, 마야는 한숨을 쉬었다.

“이건 마법 도자기라서, 원래 금도 안 가거든. 세드릭 공자가 힘이 엄청 센가 봐. 기사라고 했었지, 참.”

그렇게 말하며 마야는 허탈하게 웃어 보였다.

흥미로운 구경거리가 끝나자, 다른 아이들은 다시 제 가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나는 뒤늦게서야 금 간 도자기를 바라보며 절망했다.

‘헉,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이 도자기 마음에 들어서 내가 사려고 했던 건데!’

마야는 그런 나를 알아챈 듯 힐끔 시선을 주었다.

“이 컵, 사려고 했던 거야?”

“아, 맞아요. 저 꽃무늬가 예뻐서요. 그런데 금이 가버려서 어쩌죠…….”

매일 아침 따뜻하게 데운 우유 한 잔을 마시는데, 저 잔에다 따라 마시면 좋을 것 같아서 눈여겨봤었다.

내 말을 들은 마야는 조금 난감해하나 싶더니, 이내 내게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생각해 보니, 우리 집에 가면 똑같은 컵이 하나 더 있어.”

“정말요?”

“응. 내일 가져올까? 아니면, 그냥 오늘 유치원 마치면 같이 가볼래?”

마야의 제안에 나는 잠시 고민했다.

그러고 보니 앨리스의 집만 빼고 유치원 아이들의 집에는 한 번씩 초대받아 놀러 가보았다.

‘마야네 집도 궁금한데.’

아무래도 원래 왕국에 살던 아이니까,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임시 별장 같은 곳이겠지만.

그래도 같은 유치원 다니는 친구니까 한 번쯤 집에 놀러 가보고 싶긴 했다.

“네, 좋아요.”

그래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 *

“우와, 여기가 바로……!”

약 반나절 후.

유치원을 마치고 내가 향한 곳은 후작저가 아닌 마야의 별장이었다.

주변이 푸릇푸릇한 초목으로 덮여 있는 걸 보아, 수도 중앙보다는 외곽에 가까운 곳에 자리한 별장인 모양이었다.

“자, 내리자. 다 왔어.”

내 마차를 돌려보내고, 마야의 마차에 함께 탄 채로 왔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함도 있었지만, 가는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꽤나 친해져 있었다.

나는 마야가 내민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렸다.

2층, 혹은 3층으로 이루어진 목조 저택을 예상했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건물은 예상외였다.

붉은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들어진 단출하고 고즈넉한 단층집이었으니까.

하지만 집의 크기와는 반대로, 엄청나게 넓은 마당이 펼쳐져 있었다.

이 일대가 모두 마야가 사는 별장 마당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게다가 산과 별장 사이에는 꽤 폭이 넓은 시냇가도 있었다.

물이 굉장히 맑은 데다 수면이 은빛으로 반짝거렸다.

“……엄청 멋진 별장이네요!”

나도 이런 곳에 별장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될 정도로, 훌륭했다.

내 외침에 마야는 조금 쑥스러운 표정을 하고서는 대답했다.

“칭찬 고마워. 그럼 들어가자.”

“네!”

나는 마야를 따라 별장 안으로 향했다.

“다녀오셨습니까, 마야 님. 이쪽 영애님은 친우분이신 모양이군요. 환영합니다.”

들어가자, 노신사 한 분이 우리를 반겨주었다. 이 별장을 관리하는 집사인 모양이었다.

제 방으로 향하며, 마야는 내게 별장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별장이 작다 보니, 고용인은 몇 없어. 아까 만난 집사와, 마부 한 명. 그리고 하녀와 하인 각각 한 명씩이 다야. 식사는 요리사가 따로 없어서, 집사가 준비해 주고는 해.”

“혹시, 같이 살고 있는 다른 사람들은 더 없나요? 가족이라든지…….”

나는 말하다 말고 재빨리 말끝을 흐렸다.

내 말을 들은 마야의 표정이 조금 우울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이야기는 꺼내지 말걸!’

원작에서 엑스트라로 나오는 마야였다. 그래서 별다른 가족관계에 대한 설명이 작중에서도 없었다.

때문에 무심코 얘기해 본 것이었는데, 마야에게는 영 좋지 않은 질문이었던 모양이다.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이내 마야가 대답했다.

“……가족, 음. 내겐 아버지뿐인데. 어머니는 예전에 돌아가셨거든. 형제도 없고. 나는 외동이야.”

“괜한 질문해서 죄송해요…….”

나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야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어차피 많이들 알고 있는 이야기고, 언젠가는 말해줄 거였으니까.”

그렇게 말하다 말고 마야는 잠시 복도에 난 창밖을 보았다.

창밖에 보이는 것은 온통 나무뿐이었다. 빼곡한 숲.

“아버지는 지금 아마 왕궁에 계실 거야. 평소에도 북부 성보다는 궁 근처에 있는 수도 별장에 자주 있으셨거든. 이곳엔 나 혼자 살아.”

그렇게 말하는 마야의 얼굴은 얼핏 조금 외로워 보였다.

하지만 이내 마야는 반색하듯 표정을 바꾸며,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데 사실 나는 이곳에서 사는 게 더 좋아. 이건 아버지껜 비밀. 너한테만 말해줄게.”

“……!”

“왜냐하면 이곳은 왕국 북부 성보다 훨씬 따뜻하거든. 그리고 너도 봤듯이 이 별장 옆에는 시냇가가 있잖아. 매일 오후에 거기서 낚시를 하는데, 정말 재미있어.”

그렇게 말하는 마야는 아까 우울한 표정을 짓던 아이라고는 생각할 수가 없었다.

정말로 즐거워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지금이 항상 낚시하던 시간이네.”

마야는 복도에 걸린 괘종시계를 흘끔 쳐다보고서는 멈춰 섰다.

그러더니 이내 나를 돌아보며 살짝 웃었다.

“괜찮다면 우리 같이 낚시할래?”

“어, 저는 한 번도 해본 적 없는데요…….”

나는 망설이며 주춤했다. 낚시라니, 전생에도 그렇고 나와는 거리가 있는 단어였다.

팔딱팔딱 뛰는 물고기를 어떻게 잡는다는 건지, 정말로 이런 건 자신 없었다…….

“응? 괜찮아. 당연히 처음이겠지. 보통 귀족들은 낚시를 잘 하지 않잖아. 그러니까 내가 알려줄게.”

하지만 저렇게까지 반짝거리는 눈빛을 하고 말하는데, 거절할 수도 없었다.

‘분명 마야는 이때까지 항상 혼자 낚시했을 테니까.’

아무리 혼자 해도 재밌는 거라지만, 매일 그렇게 보낸다면 가끔은 외로울지도 모른다.

‘그래, 같은 유치원 다니는 친구로서 이 정도는 함께해 주자.’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한번 해볼게요.”

“정말이지? 그럼 낚싯대를 가져올게.”

신나서 창고를 향해 뛰어가는 마야의 뒷모습을 보던 나는, 그만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완전 즐거워 보이잖아, 마야.’

저런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면 이까짓 낚시 한번 같이 못 해줄까 싶었다.

아무래도 유치원에서는 내내 차분하게만 있었던 마야니까.

그런데 잠시 후 마야는 손에 낚싯대가 아닌 웬 그물망을 가지고 다시 돌아왔다.

“미안, 낚싯대 보관을 잘못했나 봐. 딱 하나 있는 낚싯대가 부러져 버려서, 일단 그물을 가져왔어.”

“그물로 물고기를 잡는다고요?”

나는 깜짝 놀라 질문했다.

아무래도 그렇게 잡으려면 엄청나게 반사 신경이 빨라야 하지 않을까.

물고기는 조금만 건드려도 금세 눈치를 채고 스르륵 미끄러져 빠져나가 버리니까.

“응, 왕국에 있을 때도 낚시가 취미여서 할 줄 알아. 그리고 이곳 시냇물은 발목까지 잠기는 얕은 곳도 있거든.”

몰랐던 사실이다.

마야가 이런 취미를 가지고 있었다니.

영락없이 미래의 차갑고 시크한 북부 공작님이 될 줄로만 알았기에 정말 의외의 면모였다.

“……!”

놀란 내 표정을 무엇으로 해석했는지는 몰라도, 마야는 아차하며 덧붙였다.

“그렇지만 옷이 젖는 게 싫다면 넌 안 해도 괜찮아. 그냥 옆에 있기만 해도 좋을 것 같아.”

“음, 그러면 저는 일단 근처에 앉아서 보고 있을게요.”

“좋아. 그럼 냇가로 가자.”

마야는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손으로 내 손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한 발짝 앞서가는 발걸음이 경쾌했다.

“우와, 가까이서 보니 물이 더 맑은데요? 물고기도 많아 보이고…….”

이렇게 가까이서 강이나 시냇가에 와 본 건 또 처음이라, 나는 원피스 끝자락이 젖지 않게 조심하며 물가로 고개를 기울였다.

자갈돌이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얕았다.

“여기서 앉아서 구경해.”

마야는 나를 냇가 근처 의자에 앉혀두고 재빠르게 바짓단과 손목을 걷어붙이고 시냇물로 걸어들어 갔다.

첨벙첨벙.

발 내딛는 소리가 귓가에 시원하게 들려왔다.

‘재밌어 보이네.’

마야는 의욕 넘치는 얼굴로 어딘가를 힐끗 응시하더니, 이내 그물을 들고 무언가를 하는 듯했다.

그때, 나는 마야를 바라보다 말고 문득 무언가가 생각났다.

바로 오늘 유치원에서 샀던 물건들이었다.

“어디 있더라.”

내내 가방을 메고 있었기에, 안을 뒤적여 내가 찾던 것을 꺼냈다.

“오르골, 찾았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내가 돈을 주고 산 물건은 아니었다.

시장놀이가 끝나고, 앨리스가 미처 다 팔지 못했다면서 내게 선물로 준 물건이었다.

요정의 손길로 만든 오르골.

오르골마다 모양도, 소리도 다 다르다고 했다.

‘유치원에서는 시간이 없어서 들어보지 못했어.’

요정이 연주하는 오르골 소리가 궁금했던 나는 조심스레 오르골을 열어 보았다.

그리고…….

[♬♩????- ♬♩????-]

“우와!”

나는 짧게 감탄했다.

정말이지, 이제껏 들어본 오르골 중 가장 아름답고 맑은 소리가 흘렀으니까.

그런데, 그때.

“뭐, 뭐지?”

한창 물고기를 잡고 있던 마야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나는 무슨 일인가 싶어 마야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나에게 살랑거리는 바람이 불어왔다.

“……!”

동시에 시냇물이 갑작스레 통통 튀듯 작은 물방울들이 위로 샘솟아 오르기 시작했다.

심지어 그 물방울들은 은은하게 푸른빛으로 빛나고 있기까지 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마야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물을 든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했는데 말이다.

“이건 대체…….”

마야는 물고기를 잡을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시냇물에 시선을 주었다.

나 역시 당황했지만, 이런 기현상의 원인이 어쩐지 오르골에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오르골에서 음악이 흘러나오고부터 갑자기 바람이 불고 물방울들이 튀어 올랐으니까.

‘하아, 요정이 만든 물건은 함부로 바깥에서 쓰면 안 되나 봐.’

나는 시냇물이 요동치는 것을 막기 위해, 재빠르게 오르골의 뚜껑을 닫았다.

그러자 아름답게 울려 퍼지던 노래가 뚝 끊기고, 동시에 시냇물도 다시금 잠잠해졌다.

“……방금 무슨 일이었지? 내가 꿈꾼 건 아닐 텐데.”

마야는 텅 비어버린 그물을 들고 터덜터덜 걸어서 내게로 왔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음, 아하하. 아마도 이 오르골 때문이었나 봐요.”

“오르골? 이건 아까 유치원에서 앨리스 영애가 가져온 물건이잖아.”

내 말에 마야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무언가가 생각나는 듯 입을 살짝 벌렸다.

“아, 그러고 보니. 방금 바람에 섞여서 잔잔한 음악 소리가 들린 것 같긴 했어.”

“네, 맞아요. 궁금해서 열어 봤는데, 방금처럼 시냇물이 이상해지더라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진짜로 오르골 때문이었는지를 시험해 보기 위해, 다시금 뚜껑을 살짝 열어보았다.

역시나였다. 음악 소리가 들리자 시냇물이 움직인 것이다.

“신기하네. 정말로 오르골 때문이었다니. 뭐지, 이 오르골?”

“……!”

아직 앨리스가 요정술사라는 사실을 모르는 마야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혹시라도 마야가 앨리스의 정체(?)에 대해 의심할까 걱정한 나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괜한 걱정이었다.

“하하, 아마도 마법이 걸린 오르골인 모양이네.”

굳이 무어라 말해주지 않아도, 마야는 별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웃어넘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마야는 얼굴에서 미소를 지우고 씁쓸하게 제 손에 있는 텅 빈 그물을 보았다.

“……아쉽네, 거의 다 잡았었는데.”

마야는 혼자 작게 중얼거린 혼잣말이었겠지만, 공교롭게도 내 귀엔 쏘옥 들어왔다.

나는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마야, 한창 열심히 물고기를 잡는 데 열중하고 있었는데. 나 때문에 놓쳐 버린 걸까?’

그게 정말이라면 조금 미안해졌다.

나는 마야를 도와줄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자리에서 일어서 나섰다.

“저기, 저도 물고기를 잡는 걸 도와드릴게요.”

“응?”

갑작스러운 내 제안에 마야가 당황하며 나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마야는 곧 환히 미소 지었다.

“네가 도와준다면 나야 고맙지. 하지만 그러면 네 옷은 다 젖어버릴 텐데…….”

아, 그렇지 참.

나는 내가 입고 있는 원피스 자락을 내려다보며 한숨 쉬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여벌 옷을 가지고 다니는 건데!’

괜스레 되지도 않는 후회를 하게 되었다.

그때, 마야가 곰곰이 생각하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내게 다가왔다.

“아! 좋은 생각이 났어.”

“좋은 생각이라니요?”

“네가 내 옷을 빌려 입으면 되지 않을까? 어때? 나쁘지 않지?”

“……!”

정말로 생각지도 못한 방법이었기에, 나는 잠시 멈칫했다.

마야는 어쩐지 제가 더 신난 것처럼 떠들썩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마침 내가 작년쯤에 입던 조금 작아진 옷이 있거든. 그래도 네겐 좀 클지도 모르지만, 멜빵을 매면 괜찮을 거야.”

확실히 좋은 생각이긴 했다. 내가 대답하기도 전, 마야는 ‘그럼 가져올게!’라고 외치며 재빠르게 별장 안으로 달려갔다.

* * *

잠시 후, 마야는 곱게 개어진 셔츠와 바지 한 벌을 가져와 내게 내밀었다.

“자, 여기. 찾아봤는데 이게 제일 작더라고.”

“우와. 감사해요!”

보관을 잘해 놓았는지 갓 빨아놓은 것처럼 포근한 향기가 났다.

잠시 후, 나는 마야의 드레스룸을 빌려 옷을 갈아입고 나왔다.

‘아무래도 옷이 좀 커서, 이곳 하녀의 도움을 좀 받았지만 말이야.’

세네 번쯤 접어 걷어 올렸지만 바지도 그렇고 셔츠도 그렇고 확실히 내게 좀 크긴 했다.

아무래도 마야가 나보다 두 살이나 더 많기도 하고, 유독 체격이 좋아서 더 그런 거겠지만.

“음, 좀 이상하죠?”

나는 다시 야외로 나와서 조금 뻘쭘하게 서서 질문했다.

하지만 마야는 그런 내 질문을 듣고도 단박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 전혀. 잘 어울려.”

“하하. 그렇다면 다행인데요…….”

나는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그러자 마야도 마주 웃어 주었다.

“진짜야. 나는 거짓말 안 한다니까.”

“네, 믿을게요.”

잠시 후 우리는 나란히 달려서 다시 시냇가로 향했다.

‘으아, 차가워!’

발목까지 오는 물에 조심스레 발을 내딛자마자, 순간 느껴지는 온도의 찌릿함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신기할 정도로 차가움엔 금방 적응이 되었다.

나는 잠시 물고기를 잡아야 한다는 것도 잊을 정도로 시원한 시냇물을 거니는 것에 푹 빠져버렸다.

발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찰박거리는 소리도, 가만히 서 있을 때 들리는 졸졸 흐르는 시냇물 소리도.

하나같이 이 세계에서는 처음 느껴보는 것이라 조금 설레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하마터면 하염없이 이러고 있을 뻔했다.

나는 정신을 차리고 마야가 있는 쪽을 뒤돌아보았다.

“어때, 신나지?”

그러자 곧바로 마야와 눈이 마주쳤다.

조금 민망해졌다.

도와주겠다고 해놓고 물놀이나 하는 나를 어쩌지도 못하고 내내 지켜만 본 듯했다.

“아, 너무 신기해서 그만 한눈팔아 버렸어요.”

나는 구차하게 변명하며 볼을 긁적였다.

그러자 마야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나도 처음 여기 왔을 때 너처럼 그랬거든. 이렇게 멋진 시냇가가 있다는 게 놀라워서 하루 내내 이곳에서 놀았어.”

그렇게 말하면서 마야는 내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질문했다.

“그러니까, 우리 물고기 잡고 나서 같이 물장구치고 놀래?”

“어, 저는 좋아요!”

나는 곧바로 찬성했다. 생각만 해도 들떴다.

물놀이라니! 신나잖아?

“그럼 이제 물고기 잡는 거 도와드릴게요. 우리 빨리 물고기 잡고 놀아요.”

“그래, 어서 서두르자.”

나는 재빠르게 마야를 앞장세워 물고기를 잡을 장소로 향했다.

“여기가 그물로 물고기 낚기에는 딱이야. 커다란 바위가 곳곳에 있거든.”

마야의 말로는, 돌 하나 없이 탁 트인 곳보다는 이렇게 곳곳에 가로막고 있는 지형이 그물낚시에는 제격이라고 했다.

“그럼, 에미르. 너는 이 바위 뒤에 서서 물고기를 유인하는 역할을 맡아줘.”

“……유인이요?”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건 어떻게 하는 거지?

그러자 마야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 나뭇가지로 내가 서 있는 쪽의 반대 방향을 건드려 주는 거야. 그럼 물고기가 오다가 방향을 돌아 빠져나가거든.”

“네, 그럼 한번 해볼게요!”

나는 자신 있게 외쳤다. 이후, 우리의 그물 낚시가 시작되었다.

‘앗, 저기서 온다!’

‘……놓쳤다.’

‘이번엔 반드시……!’

‘또? 으악!’

매서운 눈길로 목표물을 포착했지만, 정작 가까이 왔을 때 헛손질로 엉뚱한 곳을 건드리기를 수 번.

슬슬 내 순발력에 대해 회의감이 들 무렵.

“잡았다!”

드디어 제대로 유인에 성공한 나는, 반대편에 서 있는 마야가 유쾌하게 외치는 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마야는 방긋 웃으며 제 그물에 든 물고기를 들어 보이며 나를 추켜세워 주었다.

“대단한데, 에미르? 단 5번 만에 유인에 성공했어, 너.”

“……대단하긴요. 오히려 대단한 건 마야 소공자님이잖아요. 한 번에 바로 잡아버리고.”

“나야 많이 해본 솜씨니까. 그래도 너한테 칭찬을 들으니까 좋다.”

마야는 제 칭찬이 조금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가렸다.

이후, 우리는 마저 낚시에 열중했다.

다행히도 한 번 성공한 이후로는 나도 거의 실패하는 일 없이 유인을 훌륭하게 해냈다.

그 결과로, 지금 이 참나무통에 들어 있는 싱싱한 생선 5마리가 나왔다.

“좋아. 이따가 우리 둘만 바비큐 파티를 하는 거야. 어때?”

마야는 몹시 기분 좋아 보이는 표정으로 내게 제안했다.

물론, 나 역시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니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어, 어?”

그런데 너무 들떠서 그만 내가 있는 곳이 물가라는 것을 잠시 잊어버리고 말았다.

나는 시냇물 바닥의 작은 돌부리에 발이 걸려 미끄러졌다.

“에미르!”

“으악!”

풍덩, 소리와 함께 나는 그대로 시냇물에 입수하고야 말았다.

다행히도 내가 서 있던 곳은 딱 내 무릎까지밖에 오지 않는 깊이였지만, 어쨌거나 나 하나 쫄딱 젖는 데는 충분한 정도였다.

나는 졸지에 눈앞을 가려 버린 내 회색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다시금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앞에 있는 마야와 마주쳤다.

마야는 막 나를 일으켜 세워주려 했던 듯 손을 내밀고 있었다.

나는 살짝 뻘쭘했지만, 이내 그 손을 잡고 일어났다.

“괜찮아, 너?”

“……어우, 네. 괜찮아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젖었지만 뭐 덕분에 시원하게 목욕했다고 생각하면 되겠지. 어차피 여기 물도 깨끗하다고.

그렇게 생각하며 마야를 바라보는데, 갑자기 시선이 마주친 채로 마야가 풉 하고 웃는 게 아닌가.

“풉! 아하하!”

“……왜 그렇게 웃으세요?”

뭐지, 나 얼굴에 수초라도 붙어 있나?

나는 급하게 내 뺨을 만지작거려 봤다. 하지만 딱히 손끝에 걸리는 것은 없었다.

“아니, 에미르 네가 너무 덜렁거려서.”

뒤늦게서야 마야는 왜 웃었는지 이유를 말해주었다.

“물에 빠져놓고는 아무것도 안 했다는 듯 뻔하게 쳐다보는 게 너무 재밌잖아. 아하하하. 웃어서 미안. 그런데 재밌는 걸 어떡해.”

“……뭐요?”

아니, 마야. 그렇게 안 봤는데 나를 덜렁이 취급하다니!

심지어 여전히 웃음이 나오려 하는지, 자꾸만 실룩거리는 제 입술을 꾹 깨물며 웃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좀 짜증 났다.

“에잇! 이거나 받아라!”

나는 마야가 신나게 웃는 틈을 타서 재빠르게 두 손으로 시냇물을 퍼다가 마야에게 뿌리고 도망갔다.

물론, 거기서 끝날 리가 없었다.

졸지에 내게 물벼락을 맞은 마야는 반격하듯 따라서 내게 물을 뿌렸고, 그게 반복되자 결국 우리 둘 다 쫄딱 젖고 말았다.

물놀이는 정말이지 재미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가고 있는지조차 느껴지지 않을 만큼이나 말이다.

정신없이 물을 튀기고, 반대로 마야가 뿌리는 물을 피했다.

그러다가 또 서로의 비 맞은 강아지 같은 모습에 깔깔 웃다 보니 어느덧 늦은 오후가 되어 있었다.

해가 지평선에 걸려 하늘이 주황색이 된 걸 보며, 우리는 집사가 피워준 작은 모닥불 근처에 마주 보고 앉았다.

“……아, 따뜻하다.”

나는 노곤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까는 그냥 옷도 갈아입지 않고 모닥불을 쬐려고 했지만, 물에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감기에 걸리기 딱 좋다며 하녀가 충고를 해주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말끔한 차림으로 갈아입은 채였다.

이후엔 머리칼도 말릴 겸 이렇게 모닥불을 쬐고 있었다.

그러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오늘 참 재미있었다고.

하지만 슬슬 해지기 전엔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이곳에 오기 전, 미리 유치원에서 유모를 통해 마야의 집에 놀러 가겠다고 이야기는 해놓았지만 말이야. 너무 오래 있으면 걱정하겠지.’

더군다나, 손님인 내가 너무 늦게까지 있는 건 마야에게도 실례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저는 이제 후작저로 돌아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곧 저녁이 될 테니까요.”

내 말에, 반대편에서 담요를 덮은 채 멍하니 앉아 있던 마야가 화들짝 놀랐다.

“뭐? 아…… 그러네. 이제 곧 저녁이구나.”

그러더니 조심스레 되물었다.

“그렇지만, 나랑 약속했던 대로 바비큐는 하고 갈 거지?”

“으음, 네. 그럼 바비큐만 먹고 갈게요.”

사실 생선구이는 나 역시 조금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바로 집에 돌아가기엔 좀 아쉬웠다.

“다행이네! 그럼 집사에게 바로 준비해 달라고 말할게.”

마야의 말대로 바비큐 준비는 금방 완료되었다.

정신 차려보니 어느새 우리가 방금까지 따뜻하게 쬐고 있던 모닥불 위에 생선이 꽂힌 꼬챙이 5개가 지글거리는 소리를 내며 익어가고 있었다.

‘음, 맛있는 냄새가 난다!’

약간의 소금만 뿌렸을 뿐인데도 불에 바로 구운 탓인지 냄새가 정말로 끝내줬다.

“뜨거우니까 조심해.”

“네, 소공자님도 조심해서 드세요.”

다 익은 꼬치를 집사가 우리에게 건네줬다. 마야는 그걸 또 잘 손질해서 내 앞의 접시에 덜어주었다.

솜씨가 예사롭지 않은 게 아무래도 꽤나 손에 익어 보였다.

이곳에 오기 전 왕국에서도 낚시가 취미였다더니, 혹시 강가나 바닷가 근처에 살기라도 한 걸까?

‘앗, 그보다 너무 맛있다!’

마야의 충고대로 뜨겁게 모락모락 김 오르는 생선 살을 입김으로 호호 불어 식혔다.

더 이상 김이 올라오지 않을 때쯤 포크로 콕 찍어 먹어보았는데, 으음.

정말로 환상적인 맛이었다.

‘입에서 살살 녹잖아!’

부드럽고 포슬포슬한 식감에 중독되어 한 입, 두 입 베어 물다 보니 어느새 한 마리를 뚝딱 해치웠다.

‘아니, 벌써 내가 이렇게 먹었단 말이야?’

그 사실을 알아챈 순간 나는 깜짝 놀랐다.

마침 마야가 생선을 더 덜어주면서 말을 걸었다.

“맛있어? 더 먹고 싶으면, 좀 더 줄게.”

“감사해요! 그렇지만 딱 이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아요.”

마야를 말리지 않는다면, 졸지에 나 혼자 생선 5마리를 모두 먹어치우게 될 것 같아서 황급히 사양했다.

그러자 마야가 손을 거두며 배시시 웃었다.

“좋아해 줘서 다행이야. 나도 예전엔 내가 직접 잡은 물고기를 요리해 먹는 걸 좋아했는데.”

예전에, 라고? 그렇다면 지금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뜻일까?

어쩐지 마야의 말이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다.

그런 내 표정을 알아챈 탓인지 마야가 무어라 설명을 시작했다.

“아, 오해 마! 물론 지금도 좋아해. 그렇지만 얼마 전 이곳 별장으로 오기 전엔 한동안 낚시를 하지 못했거든.”

“네? 어째서요?”

그렇게 좋아하는 취미라면서, 하지 못한 사정이 무엇일지 궁금했다.

한편 내 물음에 갑작스레 마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무언가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오른 탓이 분명했다.

“그게, 사실. 공작가 성 바로 옆엔 커다란 강이 있거든.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항상 거기서 낚시를 하고는 했어.”

마야의 말을 들어보니 사정은 이러했다.

트위트 공작가는 왕가와 핏줄이 이어진 명문가답게 비옥한 영지에 있었다.

게다가 큰 강까지 바로 옆에 있어 살기엔 꽤나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대륙 북부에 위치한 탓에 겨울이 조금 길고 평소에도 기온이 낮았지만 말이다.

“그런데 1년 전에 갑자기 날씨가 바뀌어 버렸어. 그 넓은 강이 아예 위가 모두 얼음이 되어버렸다니까.”

문제는 약 1년 전부터였다.

갑작스레 공작가의 영지에만 혹한이 닥쳐오더니 1년이 넘도록 겨울만이 계속되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된 거예요?”

“그러게. 나도 모르겠어. 사람들은 저주받은 땅이 되어버렸다고들 그렇게 말하는데, 정말 그런 걸지도 모르지.”

결국 영지민들도 하나둘 영지를 떠나고, 성에 상주하던 고용인들도 날씨를 견디지 못하고 그만두는 이들이 하나둘 늘어나면서 공작성은 꽤나 황량해졌다고 한다.

“사실, 아버지가 나를 이곳에서 지내게 허락해 주신 것도 날씨 때문일 거야. 거기에서는 정말 지내기 힘드니까.”

마야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쩐지, 왕국의 귀족 자제가 어째서 제국으로 온 건지 의아했는데 이런 이유였구나.

처음 만났을 때도 여름에 어울리지 않게 유독 두꺼워 보이는 옷을 입고 있었던 것이 그래서였을까.

‘아니, 잠깐. 분명 원작 외전에서 나왔던 마야는 지금과 많이 달랐는데?’

하지만 문득 기억을 되새겨본 나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느꼈다.

원작에서 마야는 첫 등장부터 공작인 어른 모습이었고, 추운 북부의 사람 같지 않게 오히려 가벼운 차림이라는 서술이 나온 적 있었다.

‘심지어, 강이 얼어붙기는커녕 그 강을 통해 배를 띄워 공작가가 다른 도시와 활발히 무역하는 내용도 쓰여 있었다고!’

그렇다면 역시 마야가 공작위에 오르기 전, 이 비정상적인 북부의 날씨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뜻일까.

나는 잘 기억나지 않는 원작의 내용을 떠올려 보려 끙끙댔다.

‘아! 그러고 보니, 이런 비슷한 내용이 나왔던 것도 같아. 저주, 혹은 주술과 관련이 있었던 것 같은데…….’

결국 그 자세한 해결 방법까지는 떠오르지 않아, 나는 한숨을 푸욱 쉬었다.

‘휴우. 도울 수 있을까 싶었는데.’

그런 내 한숨에, 마야는 오히려 제가 더 놀란 듯했다.

“너무 걱정해 주지 않아도 괜찮아. 일단 지금은 여기서 잘 지내고 있잖아, 나.”

“네? 아, 물론 그렇지만…….”

“괜히 이런 이야기 해서 미안. 걱정하게 만들었네.”

마야가 울상을 지었다.

그러더니 이내 주섬주섬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그럼, 오늘은 이쯤에서 우리 헤어질까? 이제 곧 어두워질 것 같은걸.”

어쩐지 마야도 북부에 대해서는 더는 말하고 싶지 않아하는 것 같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아차! 그러고 보니, 이곳에 오기로 한 게 그 도자기 컵 때문이었는데…….”

뒤늦게서야 마야의 별장에 온 처음 목적을 생각해 냈다.

마야 역시 도자기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맞다, 그랬지. 그럼 마차에서 기다리고 있을래? 도자기는 내가 가져올게.”

잠시 후, 마야는 자그마한 상자에 컵을 담아 가지고 왔다.

“이 컵은 선물이야. 가지고 가.”

“우와! 감사해요.”

나는 기쁘게 마야의 선물을 받아 들었다. 동시에 조금 아쉬운 기분도 들었다.

오늘 정말 즐거웠는데 이대로 헤어지다니.

물론, 내일 유치원에 가면 또 만나겠지만 말이다.

“응……?”

그런데 어째서 마야 역시 이 마차에 함께 타는 걸까?

의아한 눈빛으로 어느덧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마야를 응시했다.

그러자 마야가 싱긋 웃었다.

“혼자 가면 외롭잖아. 후작저에 갈 때까지 우리 같이 이야기하자.”

“……!”

그렇게 마야는 함께 마차를 타고 후작저까지 나를 바래다주었다.

이후 도착한 내가 내리고 나서 마야의 마차가 다시 되돌아가는 것을 보고 나서야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야도 혼자 되돌아가려면 외로울 텐데.’

어쩐지, 조금 미안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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