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8)

4.

어느덧 세드릭의 저택에 방문한 지도 이틀이 지났다.

세드릭은 내 옆 의자에 앉아 투덜대고 있었다.

“완전 웃겨. 너 온 이후로, 세르반 형님이 자꾸 너 언제 데려오냐고 난리야. 날 볼 때마다 거의 매번 ‘네 친구는 언제 오냐?’라고 묻는다니까.”

누가 들으면 제가 아닌, 내가 대공가의 일원인 줄 알겠다며 세드릭이 큭큭 웃어댔다.

나 역시 농담으로 대꾸해 주었다.

“네 친구는 언제 오냐, 라니. 역시 전 세드릭 님의 유일한 친구였군요!”

“야! 그건 아냐!”

세드릭이 발끈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키득거렸다.

동시에 며칠 전 베드몬 대공저에서 있었던 후일담을 생각해 냈다.

‘케이크만 먹고 집에 가려고 했더니, 삼 형제가 동시에 날 붙잡았지. 저녁 만찬도 같이 하고 가라고 말이야.’

근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만찬이 너무 맛있었더랬다.

기억을 되새긴 나는 입맛을 쩝 다셨다.

……또 갈까.

“……그리고 어제는 정말로 정원에 세 명이 모여 티파티를 했다고. 지나가는 고용인들 모두가 우릴 보고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어.”

어느덧 세드릭은 어제저녁 있었던 삼 형제의 티파티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세드릭네 고용인들에게 깊이 공감했다.

아무래도 꽤나 당황했을 거다.

도저히 티파티 같은 담소의 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세 형제가 모여 앉아 있는 걸 봤을 테니까.

“근데 역시 티파티 같은 건 형님들과 나에겐 안 맞아. 근질근질, 좀이 쑤신다니까. 금방이라도 연무장에 나가 몇 바퀴 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하지만 그런 푸념 섞인 투와는 다르게, 세드릭의 얼굴엔 그래도 나름 좋았다는 것이 여실히 나타나 있었다.

‘하여간 솔직하지 못하긴!’

나는 그저 희미하게 웃을 뿐이었다.

그때, 이야기 중인 우리 둘에게 니나이나가 다가왔다.

정확히는 내게 제안할 말이 있어 보였다.

“에미르. 오늘 유치원이 끝나고, 나와 함께 가지 않겠니?”

“네? 어디로 말씀이세요?”

나는 놀라 물었다.

물론 니나이나의 제안이면 거절할 수도 없거니와 거절할 이유도 없으니 99.9% 수락할 것이긴 하지만.

뜬금없는 제안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게 마련이다.

“의상실들이 모여 있는 로제 에트알 거리. 나와 함께 드레스를 맞추자꾸나.”

“……!”

로제 에트알이라면, 평범한 귀족들은 출입조차 어려운 최고급 의상실들이 즐비한 거리이다.

사실 나는 목적지가 그곳이라는 것 자체에는 별로 놀라지 않았다.

다만, 황녀님께서 직접 그곳에 행차하시겠다고 한 것이 놀라웠을 뿐.

‘니나이나라면 황궁에 전속 디자이너도 있을 테고, 또 부르기만 하면 제국의 어떤 디자이너든 바로 앞으로 대령될 텐데…….’

“디자이너를 부르지 않고, 직접 가서 드레스를 맞추시게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질문하자 니나이나는 그게 무슨 별일이냐는 듯 대수롭지 않은 태도로 대답했다.

“그거야 당연하지. 에미르 너와 함께 놀고 싶으니까. 혼자 드레스를 고르면 무슨 재미가 있겠니?”

니나이나의 말에 나는 결국 수긍했다.

“아하! 맞는 말씀이세요. 그럼 같이 가요.”

“그래. 잘 생각했어. 이참에 앨리스 영애에게도 의견을 물어봐야겠구나.”

그렇게 말한 니나이나는 이윽고 앨리스를 불러 똑같은 질문을 했다.

“드, 드레스요?”

“그래.”

“……저, 죄송하지만 안 될 것 같아요.”

하지만 돌아온 앨리스의 대답은 거절이었다.

앨리스는 다소 쭈뼛대는 자세로 이유를 말했다.

“저도 함께 가고 싶지만…… 오늘 유치원이 끝나면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언니와 함께 극장에 가야 하거든요.”

가족들과 한 약속이라 지켜야만 한다는 앨리스의 말에, 나는 놀랐다.

가족들과 사이가 좋지 않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걸까?

하지만 또 그렇다기엔 앨리스의 미소가 어쩐지 씁쓸해 보였다.

‘……착각이면 좋겠는데.’

캐물어 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나는 앨리스에게 질문을 건네려다 말았다.

그렇게 의상실 투어엔 아쉽지만 앨리스는 함께하지 못하게 되었다.

유치원이 끝난 오후, 나는 니나이나의 마차를 함께 타고 로제 에트알 거리로 향했다.

* * *

따뜻한 바람이 부는 거리.

휘황찬란한 금빛 마차가 세워지고, 그 안에서 위엄 있는 걸음으로 한 어린아이가 나왔다.

니나이나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나온 또래의 어린아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모습이 어째 좀 어설프다.

……이 아이가 나였다.

명색이 귀족이었지만 옷은 항상 디자이너가 방문해 맞춰 줬던 탓에 이런 고급 의상실들에는 가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으으, 떨린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로 니나이나의 뒤를 졸래졸래 따라가고 있었다.

한편 주변에서는 우리를 힐끔거리는 시선들이 가득했다.

“저기 황녀님이 계시잖아?”

“어머, 정말로 황가의 마차네요!”

“오, 세상에!”

대부분 거리에 쇼핑하러 나온 부유한 귀족들이었다.

그들은 이런 곳에 니나이나가 등장할 줄은 미처 몰랐다는 얼굴로 놀라 멈춰서 있었다.

물론 니나이나는 그런 시선들이나 수군거림을 전혀, 일체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나와는 다르게 말이다.

“그 뒤에 있는 작은 영애분은 누구지요?”

“다른 나라에서 온 귀빈인가요?”

“호호. 다들 소식을 잘 모르나 보네요. 이번에 폐하께서 세우신 유치원에 황녀 전하께서 다니신다지요. 아마 그곳의…….”

심지어 귀를 기울여 보니 내 얘기도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나는 귀를 쫑긋 세우고 열심히 나에 대한 평판을 주워 삼켰다.

물론 겉으로는 아닌 척 태연하게 표정을 유지하려고 엄청나게 노력하면서.

‘어쩐지 나, 니나이나랑 함께 엮여서 엄청난 관심을 받고 있는 것 같은데.’

몇 달 동안 거의 유치원과 집만을 반복하는 시간을 보냈다.

그래서 도통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알지 못했던 나였다.

하지만 들어보니, 제국 유치원은 이미 은근히 사교계의 핫 이슈였던 모양이다.

내 또래의 자녀들이 있는 귀족들 사이에서 특히나 더 그렇다는데.

아이들을 보내고 싶어도 단 6명만이 입학한 유치원이기에 갈 수 없는 아쉬움이 다들 몹시 큰 모양이었다.

‘……어, 어쩐지 내가 엄청 대단한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아이들도 환상에 젖어 있는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너도나도 제국 유치원 가는 게 요즘 귀족가 자제들의 목표(?)가 되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비밀리에 싸여 있다 보니 더 그런 것 같다.

뭐 아무튼 간에, 내 귀로 들려오는 목소리들은 점점 잦아들었다.

마침 니나이나의 발걸음이 한 가게 앞에서 멈추기도 했고 말이다.

“황녀 전하께서 방문하셨다! 예를 차리도록.”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온 무수한 호위병 일행에 디자이너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지는 게 보였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엄청난 특급 손님의 방문에 디자이너는 즉시 가게의 문을 닫아걸었다.

니나이나만을 위한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가게의 종업원들이 모두 허리를 조아리고, 콧대 높은 디자이너 역시 화사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던 가게 중앙에 푹신한 작은 의자까지 대령되었다.

그런데 어쩐 일일까.

그런 극진한 대접에도 니나이나의 기분은 영 좋아 보이지만은 않았다.

‘가게 안에 있는 옷들이 별론가? 아니면 혹시 갑자기 몸 상태가 안 좋아진 걸까?’

니나이나의 바로 옆에 서 있던 나는, 가까운 거리인 만큼 바로 눈치를 챘다.

슬그머니 걱정이 스쳐 갔다.

아마 디자이너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던 모양이다.

니나이나의 언짢아 보이는 얼굴에 웃음을 만들기 위해 그녀는 달콤하고 친절한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황녀 전하! 이 드레스는 어떠신지요? 다른 영애님들에겐 보여 드린 적 없었던 디자인이지만, 전하께서 오셨으니 안 보여 드릴 수가 없…….”

“미안하지만 이곳에서는 옷을 맞추지 않아. 이만 일어나야겠어.”

하지만 그녀의 설명이 채 다 끝나기도 전, 니나이나가 더는 못 참겠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에 주위 종업원들과 호위병들이 당황했다.

물론 개중에서도 가장 놀란 건 바로 디자이너 본인이었다.

“……예? 황녀 전하,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요? 아! 혹시 이 디자인이 마음에 안 드셨나요? 그렇다면 새 디자인을 내오겠…….”

“필요 없어. 다들 나가지.”

“헉, 저, 전하! 잠시만……!”

옷자락이라도 붙잡을 기세로 대경실색하는 디자이너를 뒤로하고, 니나이나는 매정하게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그리고 곧바로 날 앞세워 가게를 빠져나왔다.

나는 몰래 곁눈질로 뒤를 살폈다.

디자이너와 종업원들은 미처 떠나가는 니나이나를 붙잡지도 못하고 유리창 너머로 허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살짝 의아해졌다.

정말로 니나이나는 디자이너가 건넨 디자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일까?

하지만 그렇다기엔 그 이전부터 니나이나의 표정은 좋지 않았었다.

결국 나는 니나이나에게 조심스레 질문했다.

“저기, 전하.”

“왜 그래.”

“방금 드레스숍…… 그곳의 옷들이 황녀 전하 취향에 맞지 않아서 나오신 거예요?”

그러자 니나이나는 나를 보며 애매 모호한 표정을 지었다.

‘뭐, 뭐지.’

나는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니나이나는 꼭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걸 지금 몰라서 묻는 거냐고.

그리고 결국 니나이나는 입을 열었다.

“너를 홀대했잖아. 그 디자이너.”

“……네?”

“에미르 네게 정중하지는 못할망정, 의자도 내주지 않고 말이야. 그래서 마음에 안 들었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이 말해서, 미처 놀랄 틈도 없었다.

나는 그저 말을 끝내고 앞서가는 니나이나를 종종대는 걸음으로 따라잡을 뿐이었다.

‘나 때문이라고?’

그 와중에 멍하니 생각했다.

니나이나가 그 정도로 나를 위하고 있을 줄 미처 몰랐으니까.

‘……사실 조금 다리가 아프긴 했지만. 그래도 그런 날 신경 쓰지 않는 줄 알았는데.’

새삼 니나이나가 나를 정말로 친구로 여기고 있다는 사실이 느껴졌다.

좋아서, 배시시 미소가 나왔다.

니나이나는 내 손을 잡고 두 번째 의상실로 들어갔다.

직원들과 디자이너가 대경실색하기는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니나이나가 이 거리에 방문했다는 소식이 알음알음 퍼져나간 모양이었다.

곧 직원들이 푹신한 소파로 우리 둘을 안내했다.

시원한 음료수도 두 잔 내왔다.

니나이나는 그들의 대접이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입꼬리가 스윽 올라가더니, 이윽고 호쾌하게 외쳤다.

“이 의상실에 있는 드레스, 내가 다 사도록 하지.”

“……!”

나는 깜짝 놀라 니나이나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디자이너 역시 잠시 입을 쩍 벌린 채로 멈춰 있다가, 몹시도 감격스럽다는 얼굴로 두 손을 맞잡았다.

“저, 정말로…… 감사합니다, 전하! 호, 혹시 더 필요하신 것은 없으신지요?”

“흐음…….”

디자이너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는가 싶던 니나이나는 이내 내 쪽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내게 질문했다.

“에미르, 네 드레스룸엔 옷이 몇 벌이나 있지?”

갑작스러운 질문에 말문이 막혔다.

나는 천천히 생각나는 대로 하나하나 말했다.

“어, 음. 평상복으로 입는 드레스는 계절별로 다 합쳐서 스무 벌 정도 있는 것 같고, 아닌가?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다섯 벌 정도 작아져서 치웠던 것 같아요. 그리고 파티용 드레스는…….”

내 주절거림에 니나이나는 말을 멈추게 했다.

“그만. 안 들어도 알 것 같아. 그래, 좋아. 그럼 네 드레스룸을 내가 드레스로 꽉 채워주도록 하지. 이 의상실에서 부족하면 다른 의상실까지 가자. 한 200벌이면 나쁘지 않겠지?”

“꽈, 꽉이요? 심지어 200벌? 저, 제 침실에 딸려 있는 드레스룸은 되게 작은데…….”

나는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나는 그냥 후작가의 이름을 달아 놓고 두세 벌 정도만 사려고 했는데 일이 어쩐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아!

“걱정 마, 하녀들과 네가 들어갈 정도의 틈은 남겨두고 채워줄 테니.”

뭐가 문제냐는 듯 시원시원하게 말하는 니나이나였다.

하지만 나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하지만 키가 계속 자랄 텐데……. 같은 옷을 안 입고 매일 바꿔입는다 해도 200일…… 그 사이에 저 10㎝는 클걸요?”

내 말이 뭐가 우스운지 니나이나가 킥킥 웃었다.

“그럼 200벌 중 50벌만 지금 사이즈로 맞추고, 나머지는 조금씩 더 크게 맞추면 되잖아?”

“헉. 그런 방법이…… 황녀 전하 천재시군요. 앗, 아니지. 그래도 너무 많아요.”

허둥지둥하는 나를 뒤로하고, 니나이나는 디자인 북을 내오라 명령했다.

그러자 의상실의 직원들이 황급히 카트에 물건들을 담아 가져왔다.

“이것은 명령 주신 디자인 북입니다, 전하. 그리고 이것은 컬러 팔레트입니다. 또 이것은 원단 샘플북인데…….”

설명을 귀 기울여 듣는 니나이나의 옆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만 한숨 쉬었다.

드레스룸의 행거들이 너무 무거워서 폭삭 주저앉으면 어떡하지.

“나쁘지 않네. 그럼 에미르, 네가 먼저 마음에 드는 것들을 골라보도록 해.”

내 상념을 깨뜨린 것은 니나이나의 목소리였다.

나는 얼떨결에 디자인 북을 비롯한 샘플북들을 잔뜩 넘겨받았다.

“어, 어. 좀 무겁…….”

“경, 에미르의 옆에서 이걸 좀 들고 있어줘.”

“알겠습니다. 전하.”

게다가 자각 없이 흘린 혼잣말도 냉큼 주워들어 버린 탓에, 내 옆에 서 커다란 장정 기사님이 수발을 들어준다.

으음, 이거 좀 부담스러운걸.

니나이나도, 내 옆의 기사도, 내 앞의 디자이너도, 저쪽 직원들도 다들 나만 쳐다보고 있다.

내가 뭘 고르게 될지 주시하는 느낌이랄까…….

“전 이거…….”

고심 끝에 한 디자인이 좀 예뻐 보여서 지목했다.

그랬더니 니나이나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곧장 말했다.

“다음도 골라.”

“네? 아…… 으음, 이거?”

“다음.”

“헉.”

그렇게 끝이 안 보이는 고르기가 시작되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어느새 두 번째 의상실에서 나와 세 번째 의상실에 들르고 네 번째 의상실까지 방문한 참이었다.

“정말로 잘 어울리십니다, 황녀 전하! 새런 영애님!”

“그런가? 뭐 괜찮긴 하네.”

“아하하.”

그리고 마지막으로 방문한 의상실에서, 니나이나와 나는 트윈룩을 맞추게 되었다.

리본 하나, 레이스 하나까지 디자인이 똑같지만 나는 초록색이었고 니나이나는 붉은색이었다.

마침 미리 제작되어 있던 드레스였기에, 우리 둘은 새 옷을 나란히 맞춰 입고 의상실을 나올 수 있었다.

‘으아, 계속해서 의상실을 돌아다녔더니 어질어질해.’

계단을 내려오는 순간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다행히도 곧 정신을 차렸다.

니나이나도 그런가 싶어 옆을 힐끔 봤는데, 다행히도 나와는 달리 아주 만족스러워 보였다.

평소에 안 하던 콧노래까지 작게 부르고 있었으니 말 다 했다.

“그럼 내일 유치원에서 보자꾸나, 에미르.”

“네, 전하. 오늘 너무 즐거웠어요.”

“나도 즐거웠어.”

니나이나가 미소 지었다.

우리는 각자의 마차에 올라탔고, 곧 로제 에트알 거리를 벗어났다.

* * *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를 탄 채, 창가를 바라보며 멍 때리고 있을 때.

“어?”

문득 창밖에, 내가 아는 얼굴이 보였다.

바로 앨리스였다.

이곳은 수도에서 가장 큰 극장이 있는 곳인데, 아까 유치원에서 가족들과 연극을 보러 간다고 하던 게 정말인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다른 가족들과 함께 있지 않지.

하물며 호위병이나 하녀 한 명쯤은 붙여줄 법한데 앨리스는 완전한 혼자였다.

나는 의아함에 고개를 갸웃하다, 이내 머릿속에 번뜩하고 스쳐 지나가는 한 가지 가정에 곧바로 마부를 향해 외쳤다.

“잠시 이곳에서 멈춰주세요! 잠깐만 내릴게요.”

“예, 아가씨!”

곧 마차가 멈췄고, 나는 허둥지둥 뛰어내렸다.

내 뜀박질 소리에 앨리스가 뒤돌아보았다.

앨리스의 표정이 쓸쓸함에서 놀람으로 바뀌는 그 순간, 내가 앨리스의 앞에 도착했다.

“앨리스!”

“에, 에미르 님? 여긴 어떻게……?”

“방금까지 황녀님과 의상실에 있다가, 이제 막 돌아가려 하던 길이었어요.”

“아…….”

“마차를 타고 가는데, 앨리스가 보여서 내리지 않을 수 없었지 뭐예요!”

내 외침에 앨리스가 화사하게 웃었다.

아까의 쓸쓸함은 찾아볼 수도 없는 미소였다.

하지만 여전히 앨리스는 슬퍼 보이는 눈빛이었다.

“엇, 앨리스. 혹시 추운 거예요?”

그때, 나는 앨리스가 작게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이제 곧 초여름인데도 오늘은 좀 추운 날씨였다.

바람도 서늘하게 불고, 해가 질 때라 그런지 더 그랬다.

그런 날씨에 얇은 홑겹 드레스 한 장만 달랑 입고 있으니, 춥지 않은 게 더 이상했지만.

“아, 저는 안 춥…… 추워요.”

앨리스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저어내려다, 일순간 몰려오는 추위에 몸을 바들거렸다.

“일단 이걸 입어요!”

나는 곧바로 내가 걸치고 있던 미니 케이프를 벗어 앨리스에게 둘러주었다.

작지만 목 주위를 감싸준다.

게다가 방금까지 내가 입던 거라서 따끈따끈할 거다.

“……감사해요.”

“일단 마차로 갈래요? 저기 저 마차가 제가 타고 온 거예요. 여기 계속 있는 건 추우니까요.”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제안했다.

그러자 앨리스는 뒤편의 극장을 흘끔 쳐다보더니 아직 가족들이 오려면 한참 남았다고 생각되었는지 순순히 내 손을 잡고 따라왔다.

“담요도 덮어요.”

마차에 상시 준비되어 있는 털 담요를 앨리스의 무릎에 덮어주었다.

그렇게 우리 둘은 마차 안에서 침묵과 함께 앉아 있었다.

어느샌가 앨리스의 창백하던 뺨에는 다시 혈색이 돌아온 채였다.

‘얼마나 오래 밖에서 서 있었으면.’

나는 앨리스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앨리스는 그런 내 시선을 느꼈는지 가만히 바닥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왜 안 물어보세요? 제가 왜 바깥에 혼자 서 있었는지.”

잠시 후, 앨리스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닌 척해도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앨리스가 말해주고 싶으면 대답해 주세요.”

“…….”

그 말에 앨리스는 다시 침묵했다.

그리고 몇 초 후 입을 열었다.

“사실, 가족들이 저를 싫어해요.”

“…….”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물끄러미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런 내 침묵이 기껍게 여겨진 걸까.

아니면 아무래도 좋다고 여긴 걸까.

앨리스는 마치 지금까지 하지 못했던 말들을 쏟아내듯이 말을 이어나갔다.

“요정 소환사 가문인데, 저는 처음부터 그 재능이 없었대요…….

게다가 다른 가족들과는 조금 다르게 생기기도 해서.

그래서 제가 밉대요.”

소설 속 초반부에 짤막하게 언급되었던 앨리스의 과거.

자신의 입으로 그 슬픔을 모두 토해내야 하는 심정이 어떨지 나는 감히 상상하지 못했다.

아무리 7살 어린아이여도 자신을 향한 악의 어린 감정들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니니까.

오히려 더욱 힘겨웠을 것이다.

“저는 가족들이 아니라 유모가 키워줬어요. 사실 유모가 아니라 하녀였지만요. 그마저도 작년에 저택에서 유모가 쫓겨나서, 저는 혼자예요. 혼자였어요.”

나는 그동안 앨리스가 가문에서 홀대받고 있다는 걸 알았다.

원작을 읽었으니까.

그렇지만 쉽사리 본인에게 그 점을 떠보거나 언급하지 못했다.

“부모님은 저를 외면해요. 언니는 저를 무시하고 괴롭혀요. 집안의 사용인들도 저를 신경 쓰지 않아요.”

이미 상처 입은 마음이 또다시 다칠까 두려웠으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저 차갑게 떨리는 앨리스의 손을 꼭 잡아주는 것뿐이었다.

“오늘은, 정말로 오랜만에 가족들이랑 함께하는 날이었어요. 같이 외출을 하자고 어머니께서 말씀하셨는데, 흑. 그래서 너무 행복했는데…… 막상 이곳에 오니 저는 같이 극장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는 거예요. 흐으으…….”

앨리스는 마침내 서러움이 복받친 얼굴로 구슬프게 흐느꼈다.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사, 사실, 흐윽.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제 자리는 없었다는 걸. 알았지만 말하지 않았어요. 기다리라고 해서 얌전히 극장 앞에 서 있었는데…….”

앨리스가 작은 손으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냈다.

나는 급히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내 건넸다.

“사실 아까까지는요. 지금처럼 슬프지 않았어요. 그런데 에미르 님이 이렇게 옷과 담요를 덮어주시고 손수건을 빌려주시니 갑자기 눈물이 막 쏟아져요…….”

앨리스는 자신이 왜 하필 지금 이렇게 운 건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앨리스의 어깨를 가만히 토닥여주었다.

그 이후로도 앨리스는 한참이나 울었다.

꼭 그동안 몰래 혼자 흘려 왔던 눈물을 다 쏟아내는 것처럼 말이다.

“……흐, 흡. 에미르 님. 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공연이 끝날 시간이 다 돼서…… 가야 할 것 같아요.”

노을이 짙어질 때쯤 앨리스는 창문 너머로 극장 앞에 놓인 커다란 시계탑을 확인하고서 벌떡 일어섰다.

“그, 그리고 이거…… 돌려드릴게요. 감사해요. 너무 따뜻했어요.”

“아니에요, 앨리스! 해가 져서 추운데요. 가지고 가요.”

나는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러자 앨리스가 씁쓸한 얼굴을 했다.

“이런 좋은 망토를 하고 담요를 갖고 있으면…… 언니가 뭐냐면서 빼앗아 갈 거예요.”

“아…….”

“그러니 돌려드릴게요.”

그렇게 온기가 남아 있는 담요와 망토는 다시 내 품으로 돌아왔다.

나는 원래 자리로 가서 아까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앨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공연이 끝났는지 관객들이 우르르 나와 각자의 마차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어째서일까.

앨리스는 마차에서 내리면서 이제 자신을 신경 쓰지 말고 가봐도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앨리스가 가족을 만나기 전까지 자꾸만 지켜보게 되는 나 자신이었다.

‘걱정되니까…….’

결국 앨리스의 가족은 한참이나 더 걸려서 돌아왔다.

그들은 따뜻한 털 외투를 입고 있었다.

얼굴에는 행복해 보이는 웃음이 가득했다.

화목한 가족인 것처럼.

하지만 그들이 앨리스를 본 순간 그 웃음은 사라졌다.

‘뭐라고 하는 건지 안 들려. 앨리스를 구박하는 게 아니면 좋을 텐데.’

그러고는 앨리스에게 짧게 몇 마디를 하는 게 보였다.

곧 앨리스는 가족들과 함께 마차에 올라탔다.

올라타기 직전, 앨리스가 내가 있는 쪽을 힐끔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얼른 손을 흔들었다.

* * *

주말이었다.

이 세계에서도 주말에는 웬만해서 직장이나 학교에 가는 법이 없다.

때문에 유치원도 가지 않는다.

나는 평소답지 않게 방 안에만 틀어박혀 생각에 빠져 있었다.

생각의 주제는 하나였다.

어제 보았던 앨리스와 앨리스의 가족들.

그리고 내가 앨리스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는 시간이 이어졌다.

물론 좀처럼 명쾌한 해답은 나오지 않았다.

“아가씨? 오늘 입맛이 없으세요?”

“으응, 좀.”

“어쩐지. 평소에 좋아하시던 닭고기 스튜를 반이나 남기셔서 혹시 아프신가 했어요.”

아침 식사 시간에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메뉴를 해치우는 것에 실패했다.

“아가씨! 어제 황녀 전하와 함께 쇼핑하셨다던 드레스들이 방금 도착했다네요!”

낮이 되어 유모와 하녀들이 기쁜 얼굴로 좋은 소식을 전해주어도, 어째서인지 진심으로 행복하기가 힘들었다.

“으응…….”

“어머? 왜 이렇게 힘이 없으세요. 혹시 열나나? 그건 아닌데…….”

힘없이 네 팔다리가 축축 처져 있는 나를 침대에서 일으킨 유모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손바닥으로 열을 재 보는 제스처를 취하던 그녀는 이내 어깨를 으쓱였다.

“이 유모, 알 것 같아요.”

“응? 뭐를?”

“왜 아가씨가 이렇게 힘이 없으신지 말이에요.”

자신만만한 유모의 말투에 나는 순간 멈칫했다.

유모, 혹시 나 몰래 독심술이라도 배우고 온 거야?

“다 소문났어요. 어제 황녀 전하와 아가씨가 로제 에트알 거리에서 얼마나 유명인사였는지 말이에요. 수 개의 숍을 싹쓸이했다면서요? 그렇게나 쇼핑을 하셨으니 피곤하실 만도 하지요.”

아쉽게도 오답이었다.

나는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전하께서 나한테 선물을 많이 해주셨어, 유모.”

“그러니까 말이에요. 배포가 큰 황녀 전하와 친우가 되시다니, 우리 아가씨도 정말 대단하세요.”

유모는 감탄 어린 목소리로 기쁘게 외쳤다.

어쩐지 나보다 유모가 더 행복해 보인다.

내 주변인이 행복하다면 좋은 일이다.

“응, 그러니까 나 낮잠 조금만 더 잘래. 옷은 저녁에 입어볼게.”

“그러실래요? 그럼 커튼을 다시 쳐 드려야겠네요.”

유모는 다행히도 내 거짓말 아닌 거짓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곧 방문이 닫혔고 방 안은 다시 조용해졌다.

“…….”

나는 한동안 암막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들어오는 빛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뭔가 해답이 생각날 듯하면서도 말 듯 하다.

아아, 답답해!

그때였다.

“……아! 바로 그거다!”

유레카!

나는 등에 용수철이 달린 것처럼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원래 정답은 불현듯 생각나는 법.

잊고 있었던 원작 소설 속의 설정을 떠올린 나는 눈을 반짝이며 연신 ‘예! 예에!’를 외쳤다.

하지만 부작용이 있었다.

갑작스러운 환호성에 바깥방에서 대기하고 있던 유모가 급히 뛰어 들어온 것이었다.

유모는 내 방에 도둑이나 납치범이라도 든 줄 알았다고 했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갑자기 왜 환호성을 지르신 거예요, 아가씨?”

유모의 등장으로 잔뜩 상기되어 있던 내 기분도 조금 진정이 되었다.

갑작스럽게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라 해야 할까.

하지만 여전히 정답을 찾아낸 그 짜릿한 쾌감은 잊히지 않은 채였다.

“으음, 그게 말이지! 어…… 음, 그러니까 갑자기 드레스 생각이 나서!”

“드레스요? 하지만 저녁에 입어보겠다고 하셨잖아요.”

“그, 그랬지! 그런데 어제 골랐던 것 중에 유독 예뻤던 게 있었어. 그게 생각나서, 하하. 유모! 옷 보러 가자.”

“……네, 아가씨.”

내 어설픈 변명은 다행히도 통한 듯했다.

하긴 사람은 원래 작은 것에도 기분이 쉴 새 없이 바뀌는 동물이니까.

어린아이는 더더욱 그렇고.

“아가씨가 오늘 좀 이상하시네…….”

아, 아닌가? 안 통했나? 유모의 혼잣말에 나는 뜨끔 하고야 말았다.

잠시 후.

나는 수많은 새 드레스 사이에 파묻힌 채 생각했다.

‘앨리스는 미래에 제국 최고의 요정 소환사가 되지.’

요정을 소환하는 소환사는 매우 특수한 재능이었다.

귀족 중에서는 앨리스의 가문인 로즈 공작가가 유일하다고 보면 되었다.

그만큼 제국에서는 그 재능을 높게 치고 있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때문에 앨리스는 지금 가족들에게 배척받고 있었다.

가족들과 다르게 재능이 없다는 이유로.

하지만 아니었다.

앨리스는 그저 선천적으로 능력이 억제된 채 태어난 것일 뿐.

한번 능력의 물길을 열어준 이후에는 급속도로 재능이 성장한다.

‘그리고 나는 그 재능 성장의 비법을 알지. 원작을 읽은 덕분이지만.’

바로, 요정의 섬에서 나는 열매를 먹는 것이다.

‘흐음, 요정의 섬이라.’

원작에서는 앨리스가 성인이 되고 난 이후에서야 니콜라스의 도움으로 요정의 섬으로 향해 열매를 먹게 된다.

요정의 섬은 지도조차 비밀에 부쳐져 있어서 아무나 갈 수 없는 곳이다.

하지만 그 부분에서 스쳐 가듯 나온 숨겨진 설정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사실 그 요정의 열매는 이곳 대륙에도 넘쳐나. 단지 모양이 좀…… 많이…… 아니, 상당히 해괴하고 맛도 이상해서 그렇지. 누가 그걸 식용으로 먹을 생각을 하겠냐고.’

요정의 열매가 이곳에서도 자라난다는 것이다.

사실 소설을 읽을 적엔, 좋은 효능이 있는 것은 희귀할 것이라는 선입견을 깬 설정이라 좀 놀랐더랬다.

물론 그 열매는 이곳에서 웬만한 잡초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일명 ‘저주의 열매’라고 불리고 있었다.

“흐으음…….”

이쯤에서 또 고민이 생겼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 열매, 앨리스에게 가져다줘도…….’

“괜찮을까.”

나는 중얼거렸다.

마침 거울 앞에 선 채였기에 그런 내 혼잣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내게 번갈아 새 옷을 가져다 대 보여주던 하녀들이, 일동 멈칫했다.

“아가씨, 방금 괜찮냐고 물어보셨나요?”

“말해 뭐하나요. 당연히 괜찮지요. 아가씨는 무슨 옷을 입어도 천사의 날개 같은데요?”

그러더니 칭찬을 마구 퍼붓는다.

이런 유의 칭찬에는 얼굴이 쉽게 붉어지는 나였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으악! 그만! 더 이상 칭찬하지 마!”

“후후, 천사의 날개 같다는 칭찬이 싫으세요, 아가씨?”

“그럼 이건 어때요. 요정의 날개?”

“하하하! 아가씨께 너무 잘 어울려요. 우리 후작저의 꼬마 요정 아가씨.”

하지만 원래 사람의 본성이,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어 하는 법.

하녀들의 장난에, 나는 한동안 얼굴을 새빨간 토마토처럼 붉히고 있어야 했다.

* * *

“좋아, 나 이거 입을게. 이걸 입고 저택 너머 산으로 산책 갈 거야.”

잠시 후, 나는 드레스 하나를 골랐다.

혹시라도 나뭇가지 같은 데에 걸려 찢어지지 않도록 투박하고 질긴 천으로 된 옷이었다.

장식도 거의 없었지만 부드럽고 편했다.

“거참, 아가씨 취향은 알다가도 모르겠어요.”

“저도요.”

최종 선택한 드레스를 갈아입혀 주면서 하녀들은 저마다 한 줄씩 조잘댔다.

하지만 나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내 취향 이런 게 하루 이틀도 아닌 걸 뭐.

“갑자기 기운이 샘솟기라도 하셨어요? 낮잠 자겠다고 하셔 놓고, 일어나서 드레스 고르시고. 이젠 산책까지!”

“응응, 단전에서 기운이 막 흘러나오네?”

나는 유모와 농담을 주고받으며 저택을 나섰다.

물론, 우리의 뒤에는 후작가의 기사 몇 명도 함께였다.

‘요정의 열매를 찾아야 하는데…… 이래서야 방해가 되겠는걸.’

내심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안전은 무엇보다 중요하지, 그럼.

지난번 유치원 야외 수업 사건 이후로 바짝 군기가 든 기사들이었다.

‘하지만 뭐 방법은 있지.’

마침내 저택 뒷산에 도착한 나는, 흙바닥을 이리저리 뒤지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유모가 경악했다.

“아니, 아가씨! 나이가 몇 살이신데 안 하던 흙장난을 다 하세요……!”

“나 6살이야.”

한창 흙장난할 나이잖아.

하지만 진짜 목적은 따로 있다고.

나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그리고 흙장난하는 거 아니야. 유치원 친구들과 내기를 했거든.”

“……내기, 요?”

유모가 어이없다는 목소리로 되물었다.

하긴 이해한다.

나도 지금 내 행동이 몹시 우스꽝스럽다는 건 안다고.

“응, 내기. 누가 저택 뒷산에서 더 도토리를 많이 주워 갈 수 있을지 내기했어.”

“맙소사!”

내 말에 유모가 금방이라도 기절할 것처럼 한쪽 머리를 짚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살짝 미안해졌다.

‘거짓말이래도 도토리는 좀 심했나.’

지금은 초여름이다.

도토리가 떨어지려면 반의 반년은 더 있어야 한다.

작년 가을에 떨어진 도토리들은 이미 산짐승들의 좋은 먹잇감이 되었거나 혹은 썩어 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유모는 이 산책이 좀처럼 끝나지 않을 것을 예감한 모양인지 해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그래 유모?”

나는 모른 척 물었다.

유모가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가씨. 도토리 주우세요. 네, 암요. 주우셔야죠.”

나는 한참이나 흙바닥을 뒤지며 도토리를 찾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처음엔 나를 주의 깊게 지켜보던 기사들과 유모도, 점차 따분해졌는지 조금씩 딴짓을 하기 시작했다.

먼 산을 보며 하품을 한다든가, 서로 수다를 떤다든가, 근처 산딸기나무에서 열매를 따서 먹는다든가. 뭐 그런 일들.

나는 그 틈을 타 조금 더 깊은 덤불 쪽을 향해 들어갔다.

‘분명 지난번 이쯤에 요정의 열매 나무가 있는 걸 봤는데…….’

때마침 유모가 나를 보고 외쳤다.

“아가씨! 너무 멀리 가면 안 돼요!”

“응, 알겠어! 멀리는 안 갈게!”

입으로는 부지런히 대답하면서도, 시선과 손은 계속해서 주위 수풀을 헤집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아, 찾았다!”

마른 지푸라기와 새로 난 이파리들이 섞여 있는 한 가시나무 덤불 바로 아래에서, 나는 드디어 원하던 요정나무 열매를 발견할 수 있었다.

‘요정 열매라더니, 진짜로 요정처럼 작긴 작네.’

그렇지만 귀엽지는 않다.

험상궂게 생긴 나무의 비주얼에 나도 모르게 소름이 쫙 끼쳐왔다.

‘으으, 왜인지 독이 있을 것 같은 모습이다.’

물론 없다는 걸 잘 알지만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에잇!”

하지만 앨리스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고난쯤이야.

나는 질끈 눈을 감고 요정나무의 울퉁불퉁한 줄기를 넘어 괴상망측하게 길러진 잎을 헤쳤다.

마침내 도토리만큼 작지만 뭉툭한 잔가시들이 잔뜩 나 있는 열매를 다섯 개나 얻을 수 있었다.

‘다섯 개면 충분하겠지? 한두 개는 모자라고, 세 개는 조금 허전하니까.’

열매를 쥔 순간, 절로 작은 비명이 나왔다.

잔가시가 내 손을 지압하듯 콕콕 찔렀기 때문이다.

“앗, 따가워!”

“아가씨?”

저 멀리서도 내 목소리를 들은 모양인지 유모가 내 안부를 확인했다.

나는 재빨리 열매들을 주머니 속에 구겨 넣었다.

“아가씨, 방금 비명이 들렸는데요?”

단 몇 초 사이에 유모는 기사들과 함께 내게로 부리나케 달려왔다.

나는 깜짝 놀라며 유모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응? 아, 그게…… 그만 실수로 가시에 찔려버렸어.”

수풀 안을 들추지 않는 이상 요정나무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겉에 보이는 가시덤불을 가리키며 손바닥을 매만졌다.

다행히도 깊게 찔린 것은 아닌지 피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연한 살이 살짝 붉어져 있었다.

“어디 봐요, 아가씨! 어머, 어머, 이것 좀 봐. 피 나기 직전이네! 어서 저택에 돌아가서 약 발라야겠어요.”

“…….”

유모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에, 괜히 마음 한구석이 콕콕 찔렸다.

유모는 그런 날 보고 말을 이었다.

“도토리는 못 찾으셨죠?”

“아, 으응.”

“……그럴 줄 알았어요. 이 초여름에 도토리가 웬 말인지, 휴. 처음부터 도토리가 없다는 걸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유모는 한숨을 푹푹 쉬며 나를 가볍게 안아 들었다.

“결국 이렇게 다치시다니! 오늘은 더 이상 밖에 있지 말고 어서 들어가요, 아가씨.”

“으응.”

이미 목적은 달성했기에 나는 유모의 말에 토 달지 않고 얌전히 집으로 향했다.

* * *

요정의 열매를 줍고 이틀 후.

‘앨리스한테 이걸 뭐라고 하면서 줘야 할까?’

나는 남몰래 힐끔힐끔 앨리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고민했다.

주말 동안 내내 유치원 오기만을 기다리느라 끙끙 앓았던 게 무색하게도 아직 요정의 열매는 내 주머니 안에 고이 있었다.

‘혹시라도 앨리스가 싫다고 한다면…….’

나는 마음속으로 상황을 시뮬레이션해 보았다.

내가 조심스럽게 다가가서, 앨리스에게 요정의 열매를 건네는 것이다.

그러면 앨리스는 아마 이렇게 대답하겠지.

“에, 에미르 님. 이렇게 징그러운 걸 왜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그, 그게.”

나는 당황하며 식은땀을 삐질삐질 흘릴 것이다.

그리고 말하겠지.

“사실 이 열매가…… 그렇게 안 보여도 엄청난 효능이 있거든요!”

“네? 효능이라고요?”

“맞아요. 바로 요정을 소환할 수 있게 해주는 효과예요!”

그러면 아마 앨리스는 정색할 것이다.

“에이, 장난치지 마세요, 에미르 님. 아무리 에미르 님이라지만 이런 장난은 싫어요. 이런 열매를 먹고 요정이 나타날 리가 없잖아요!”

역시 안 믿겠지.

그렇다고 가루를 내서 쿠키 같은 거로 만들어 선물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이래 봬도 맛이 좀 많이 독특해서 말이지.

“끙…… 어쩌지.”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하던 그때.

내 앞으로 누군가 다가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방금까지 저만치 앉아 있던 앨리스였다.

“앨리스?”

“……에미르 님이 절 계속 쳐다보셔서.”

앨리스는 살포시 웃으며 내 옆에 기대앉았다.

그러고는 내 귀에 작게 소곤댔다.

“혹시 제 등에 뭐가 묻었나요?”

“아뇨, 그건 아니고. 사실 앨리스에게 줄 게 있었거든요.”

“네?”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는 앨리스였다.

그러고는 살짝 상기된 목소리로 물어왔다.

“먹을 거예요? 간식이에요?”

음, 글쎄.

일단 먹을 거긴 한데.

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대답했다.

“네. 사실 맛은 좀 없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엄청엄청 귀한 거예요.”

“귀한 거라니! 그런 엄청난 걸 절 주신다고요?”

앨리스는 귀한 것이라는 단어에 눈을 반짝이더니, 이내 헉 하고 숨을 들이켜고서 소곤소곤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대답했다.

“그런데 여기서는 안 돼요. 귀한 거라서 앨리스에게만 줄 거거든요. 그러니까 우리 잠깐 유치원 뒤뜰로 나가요.”

“좋아요!”

앨리스가 적극 찬성하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 * *

잠시 후.

유치원 뒤뜰에 비장한 표정을 한 채 선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이거예요.”

주머니에 넣었던 주먹을 꺼내 조심스럽게 펼쳐 보였다.

어젯밤 몰래 다듬어 놓았기에 열매 겉에는 가시가 없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양은 흉물스럽기 그지없었다.

“…….”

앨리스는 역시나 말이 없었다.

지나가는 새들의 짹짹 소리만 들리는 조용한 정적 속에, 나는 속으로 기도했다.

‘앨리스가 날 이상한 아이로 보지 않아야 할 텐데.’

마침 앨리스가 입을 열었다.

“에미르 님, 이건 저주의 열매인걸요.”

잔뜩 기대에 부풀어 올랐다가 실망한 탓에, 무겁게 가라앉은 앨리스의 속눈썹이 깜빡거렸다.

내가 뭐라 설명을 하기도 전 앨리스가 말을 이어나갔다.

“……그렇지만 에미르 님은 저를 힘들게 하는 장난 같은 것 치지 않으시니까, 분명 진짜로 귀한 것을 제게 주신 게 틀림없어요.”

앨리스는 나를 굳게 신뢰하고 있었다.

이제 보니 가라앉은 속눈썹 아래 자리한 눈동자가 선명하게 날 응시한 채였다.

이윽고 앨리스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이걸 왜 제게 주신 건가요?”

“음, 앨리스가 힘을 가지게 되었으면 해서요.”

나는 잠시 머뭇거린 끝에 대답했다.

그에 앨리스가 갸웃했다.

“힘, 이요?”

“네. 앨리스가 전에 말했잖아요. 요정을 소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다고.”

“……네.”

내 말에 급격히 앨리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나는 틈을 주지 않고 바로 설명했다.

“앨리스, 이 열매를 먹으면 능력이 생길 거예요. 당장은 아니지만요. 빠른 시일 안에 요정을 소환하게 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나 믿고 딱 한 번만 먹어봐! 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응?

“에미르 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으니까.”

어라?

“먹을게요.”

앨리스는 더 묻지 않고 내 손바닥 위에 올려진 열매들을 가져갔다.

그러고는 입안에 한 번에 털어 넣고 아작아작 씹었다.

열매 과즙 터지는 소리가 시원하게 났다.

분명 내가 바라던 대로 됐는데, 너무 쉽게 먹어버려서인지 조금 당황스러웠다.

아무리 그래도 거짓말 아니냐며 의심 정도는 할 줄 알았는데!

‘앨리스, 너무 순진해……. 아무래도 안 되겠다!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는 먹을 것 얻어먹지 말라고 가르쳐야겠어!’

불현듯 나는 다짐했다.

그리고 잠시 후, 앨리스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말했다.

“다 먹었어요. 음…… 써요. 그리고 느끼한 맛이 나요.”

“잘했어요, 앨리스. 아. 초콜릿 좀 먹을래요? 떫은맛이 좀 가라앉을지도 몰라요.”

나는 주머니를 뒤져 나온 초콜릿과 사탕을 앨리스에게 건네주었다.

앨리스가 화색을 띠었다.

“맛있어요! 쓴 거 먹고 먹으니까 더 달아요.”

“맛있죠? 다행이에요.”

“……그, 그런데 에미르 님, 정말로 저 열매 독이 없는 거 맞아요? 저, 어쩐지 지금 좀 잠이 쏟아져서…….”

“애, 앨리스?”

그때 갑자기 웃고 있던 앨리스의 표정이 급격히 나른해지더니 이윽고 몸이 무너졌다.

나는 깜짝 놀라 앨리스가 쓰러지기 전 달려가 붙잡았다.

우당탕 소리와 함께 나는 넘어졌다.

“아, 아야……. 아파.”

엉덩방아를 제대로 찧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앨리스는 내가 제대로 붙잡아서 다치지 않았다.

요란한 소리에 기사들이 내 쪽으로 달려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앨리스가 쓰러졌는데……!”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는 건지.

내가 앨리스에게 요정나무 열매를 주었다고 말하면 그걸 대체 왜 준 거냐며 다들 나를 이상한 눈길로 볼 게 뻔했으니까.

아니, 그보다 원작에서는 갑자기 잠이 온다는 부작용은 나와 있지 않았잖아?

대체 어째서 앨리스가 잠든 거지?

원작에서는 성인일 때 먹었고 지금은 아이일 때 먹어서 그런 걸까?

“쓰러진 게 아니라 잠드신 것 같은데요?”

그때, 앨리스의 곁으로 다가간 한 기사가 의아하게 말했다.

“숨소리가 고릅니다. 기면증이 있으신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잠드셨다고요?”

“아, 음…….”

일단은 그렇게 해두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기사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하더니, 잠시 후 내게 말했다.

“일단, 에드몽 부인께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앨리스 님을 낮잠 공간의 침대에 옮겨드릴 텐데, 에미르 님도 같이 가시겠습니까?”

“……응!”

아무리 잠든 거라고 하지만, 혹시 모르니 옆에서 지켜봐야겠다.

* * *

잠시 후, 유치원의 낮잠 공간.

“코오- 코오-”

우리 둘만 있는 조용한 공간이라 그런지 앨리스의 잠든 숨소리만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의자를 갖다 놓고 앉아 있었다.

방 창문에는 깊이 잠들 수 있도록 암막 커튼이 달려 있었다.

그 사이의 작은 틈으로 들어오는 얇은 빛줄기에, 앨리스의 화사한 백금발이 반짝 빛났다.

“앨리스, 머리카락 진짜 예쁘다.”

그 광경을 멍하니 응시하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팔랑팔랑 나비처럼 긴 속눈썹 역시 백금색이었다.

그런데 내 말을 잠결에 듣기라도 한 건지 앨리스의 눈꺼풀이 움찔거렸다.

“……?”

그리고 곧이어 앨리스의 입이 작게 뻐끔거렸다.

잠꼬대하려는 건가?

“요, 요정……님, 으음.”

“……!”

다행히도 꿈속에서 앨리스는 요정과 만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뒤로도 앨리스는 계속해서 꿈을 꾸고 있는 듯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요정이라고 말한 다음부터는 웅얼거림에 가까워져서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지 못했지만 말이다.

‘표정이 편해 보여. 웃고 있어.’

하지만 앨리스의 입꼬리가 자연스레 올라간 채 있는 걸 보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아주 좋은 꿈을 꾸고 있나 보다, 하고.

몇 시간 뒤.

유치원이 끝날 즈음 앨리스는 깨어났다.

혹시라도 더 오래 잠들어 있으면 어떡하지 했는데 다행이었다.

“……으음, 저 좀 오래 잤어요?”

앨리스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 맹한 표정으로 나를 응시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뇨, 오히려 딱 적당하게 잤어요. 이제 유치원이 끝날 시간이거든요!”

“그, 그런. 그럼 설마 에미르 님이 지금까지 계속 여기 계셨던 거예요?”

앨리스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제가 드린 열매 때문에 쓰러졌으니까요. 당연히 옆에서 보살펴야 했어요. 그보다 미안해요. 쓰러질 줄 몰랐거든요…….”

“아,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에미르 님. 그보다 정말로 저 요정을 봤어요. 꿈속에서요!”

앨리스는 괜찮다며 두 손을 내저었다.

그러더니 자신이 꿈꾼 내용을 설명했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요정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자고 일어나니 엄청 기분이 좋아졌어요. 약간 힘도 생긴 것 같아요. 정말로 에미르 님 말대로, 곧 요정을 소환하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요!”

“……그렇게 된다면 좋겠어요. 꼭이요. 기도할게요. 앨리스가 요정을 빨리 만나볼 수 있게 해달라고요.”

내 말에, 앨리스는 활짝 웃었다.

“감사해요, 에미르 님. 이렇게 절 위해주셔서요.”

유치원이 끝난 후, 집으로 돌아간 앨리스는 어쩐지 점점 몸에서 힘이 솟구쳐 오르는 것 같다고 느꼈다.

‘왜 이러지……? 유치원에서 자느라 점심도 안 먹었는데 전혀 배가 안 고파. 잠도 안 와. 아까 낮잠을 오래 자서 그런가?’

어쩐지 기분이 몽롱했다.

분명 잠에서 깬 지 한참이나 지났는데 아직도 꿈속에 있는 것처럼.

앨리스는 침대에 누워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았다.

‘점점, 방 안이 더 환해지는 것 같아……. 응?’

이윽고 앨리스는 무언가 이상한 점을 눈치챘다.

바깥은 점점 노을 져 가고 있는데 방 안은 꼭 한낮처럼 환해지는 것이었다.

“나한테서 빛이 나와!”

잠시 후 앨리스는 저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외쳤다.

분명 예전에 들은 적 있었다.

요정을 소환할 수 있게 되면, 주변이 달라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저, 정말로 에미르 님이 해주신 말처럼, 나도 이제 요정을 소환하게 될 수 있는 걸까?’

앨리스는 제 심장이 멈추지 않고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잠시 눈 깜빡하는 사이, 무언가가 나타났다!

요정이었다.

푸르면서 불그스름한 오묘하고 신비로운 빛을 온몸에 두른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에헴! 이 몸을 소환한 게 네놈인가? ……뭐야. 작은 꼬맹이잖아?”

요정은 나타나자마자 한껏 거만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서 말을 하더니, 뭔가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는지 눈을 번쩍 뜨고는 깜짝 놀랐다.

자신을 소환한 게 이토록 어린 7살짜리 아이라는 것이 영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요, 요정님? 요정님이세요?”

물론 앨리스는 자신이 요정을 불러냈다는 사실 그 자체로 너무 기뻐서 요정의 표정 같은 것엔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흠, 큼. 그래. 내가 바로 요정왕 에이비시다.”

그런 앨리스를 빤히 보던 요정은 작게 헛기침을 했다.

요 작은 어린아이 소환자를 상대로 한껏 거드름을 피웠던 게 민망했던 모양이다.

“요, 요정님이 아니라 요정왕님이세요……?”

그리고 앨리스는 요정이 한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그냥 요정이어도 놀랐을 텐데, 무려 요정왕을 자신이 소환했다니!

혹시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귀를 의심했다.

“당연히 이 몸은 요정왕이다. 설마 모르고 소환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 없는데. 이 몸은 왕을 소환할 수 있는 커다란 그릇만이 불러낼 수 있단 말이다.”

“음, 저, 어…… 모르고 소환했어요.”

“어이쿠!”

앨리스의 솔직한 대답에, 요정왕 에이비시는 그만 중심을 놓치고 공중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그러더니 버럭 화를 냈다.

“이런, 이런. 고얀. 아니, 어떻게 이 몸의 진가를 몰라본 채 소환을 할 수 있지? 정말이지 괘씸하구나! 아무리 꼬맹이라지만 내 참을 수 없다!”

“그, 그게…… 열매를 먹었는데 그것 때문인가 봐요.”

“무슨 열매를 말하는 것이냐?”

에이비시가 인상을 찌푸리자, 앨리스는 허둥지둥 가방 안에서 종이를 꺼내 그림을 그렸다.

“이, 이렇게 생긴 열매인데요. 보통 저주의 열매라고 부르는데 따로 이름은 없…….”

“으윽! 뒷목이 당기는구나!”

앨리스가 채 말을 마치기도 전 에이비시가 분노에 찬 날갯짓을 하며 뒷목을 잡았다.

앨리스는 당황해 손을 뻗어 요정을 잡아주었다.

“괘, 괜찮으세요, 요정님?”

“안 괜찮다! 안 괜찮고말고! 아니, 도대체 이곳 인간들은 전부 눈알이 삐어 있기라도 한 거란 말이냐? 저 열매가 어딜 봐서 저주의 열매란 건지.”

에이비시는 분통이 차오른다는 투로 빠르게 말을 쏟아냈다.

“저 열매는 우리 요정들이 사는 섬에서 나는 것이란 말이다! 요정들이 가루를 손수 뿌려 사랑과 정성으로 기르는 열매지. 도대체 그런 귀한 열매를 이곳에서 어떻게 구했는지는 몰라도, 저주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다니 정말로 우매하기 그지없군!”

‘뭐, 뭐라고 말씀하신 거지. 요정? 사랑과 정성? 어떻게 구했냐고?’

앨리스는 머리가 어지러웠다.

에이비시의 말이 너무 빨라서 전부 알아듣는 게 불가능했다.

앨리스는 조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구하는 건 어렵지 않았을 거예요. 제 친우분이 구해다 주신 건데, 이곳에서 그 열매는 되게 흔하거든요.”

거의 잡초나 다름없는 수준으로 취급되는 열매였다.

그에 요정왕 에이비시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흔하다고……?”

“네에. 그보다, 저. 이제 에이비시 님은 저랑 요정 계약을 해주시는 건가요?”

앨리스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보통 소환사들은 제일 먼저 소환한 대상과 계약을 맺는다.

이후에 언제 또 소환이 가능할지 모르니까.

정령이나 요정들 사이에서도 소환사의 정보가 서로 공유된다.

때문에 첫 계약을 얼토당토않은 이유로 거부했다가는 정령이나 요정 세계에서 평판이 나빠진다.

다음 소환 대상을 찾기가 어려워지는 건 당연했다.

그러니까, 앨리스는 이번에 꼭 계약을 성공하고 싶었다.

‘무, 물론 평범한 보통 요정이 아니라 무려 요정왕님이라는 게 조금 부담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괜찮겠지? 일단 왕이라면 되게 셀 테니까. 나를 지켜주실 거야.’

앨리스의 초롱초롱한 눈빛이 에이비시에게 닿았다.

어쩐지 부담스러워진 에이비시는 시선을 슬슬 피했다.

“그, 그건! 예끼 이놈! 원래 계약은 바로 하는 게 아니니라! 이것저것 살펴보고 요정도, 인간도 서로에 대해 잘 알게 된 다음 하는 것이지. 무턱대고 계약부터 했다가 하나부터 열까지 안 맞아서 매일 티격태격하게 되면 어쩌려고?”

“아, 그, 그렇구나…….”

하지만 막상 잔소리에 주눅 든 앨리스를 보고 있으니 에이비시의 마음이 조금 약해졌다.

애초에 요정들은 인간이라면 어린애건 노인이건 상관없이 조금 박하게 대하는 면이 있었다.

그러나 어쩐지 에이비시는 눈앞의 이 소녀가 조금 짠하게 느껴졌다.

말대꾸하기는커녕 눈치를 보고 있지 않은가.

‘흐, 흠. 아무래도 좀 너무 야박하게 말했던가.’

에이비시는 살짝 목소리를 부드럽게 했다.

“그러니 계약은 일주일 후에 고려해 보는 거로 하자꾸나. 흠.”

“일주일! 그럴게요.”

그 말에 금세 앨리스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한편 에이비시는 뒤늦게서야 무언가를 깨달은 눈치인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곳은 어디길래 이리도 초라한 것이더냐? 보아하니 근처에 요정을 소환할 수 있는 자들이 두어 명은 더 있는 듯한데. 요즘 소환사들은 전부 가난한 것인가?”

“아, 그건…… 아마 제 언니와 아버지일 거예요. 두 분 다 요정 소환사거든요.”

그 말에 에이비시가 또다시 질문했다.

“너희 가족은 평민인가?”

“네? 아, 아뇨. 아버지는 로즈 공작님이세요.”

“……내가 알고 있는 공작은 인간 중에서 높은 계급을 칭하는 것인데. 어째서 이렇게 방 안이 좁고 낡은 것이냐? 혹 그사이 인간들의 계급이 달라지기라도 한 것인가?”

에이비시의 물음에 앨리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에 에이비시는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챘다.

“손 좀 줘보거라.”

“네? 손이요?”

“그래. 손바닥 말고 검지 하나면 된다. 계약 전 계약자의 상태와 기억을 살피는 건 필수니까. 네 기억을 읽어봐야겠다.”

“……네.”

앨리스는 머뭇대다 이내 검지를 스윽 내밀었다.

앨리스의 손가락에 에이비시가 날아와 앉았다.

“잠시 움직이지 말거라. 정신을 집중해야 하기 때문에 움직이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네. 명심할게요.”

그리고 잠시 후.

앨리스의 짧은 몇 년 동안의 기억을 읽어낸 에이비시의 표정은 영 좋지 못했다.

“하여간 인간들이란……. 야비하고 못돼먹었지. 이런 작은 꼬맹이에게 구박할 데가 어디 있다고.”

에이비시는 한참이나 혀를 쯧쯧 차댔다.

그동안 앨리스가 가족들에게 어떻게 구박받았었는지 알게 된 탓이었다.

“소환사가 뭐 별거라고, 그 능력 좀 없다고 같은 인간끼리 차별을 해대는구나.”

“…….”

앨리스는 아무 말이 없었다.

뒤늦게서야 에이비시는 앨리스의 눈치를 살짝 살폈다.

“흠, 그럼 어떻게 해주는 게 좋을 것 같으냐?”

“네? 무엇을요?”

앨리스가 영문을 모르는 눈빛으로 되물었다.

그러자 에이비시가 근엄한 목소리로 다시 질문했다.

“네 가족이라는 인간들을 말하는 것이다. 복수를 원하느냐?”

복수.

그 단어에 앨리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귀족으로서 아직 배운 게 적은 앨리스지만, 복수라는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가문을 망하게 해줄까? 아니면 다른 가족들의 소환사 능력을 모두 없애줄까? 그런 소원이라면 얼마든지 이뤄줄 수 있다. 나는 요정왕이니.”

“……저, 저는.”

앨리스는 혼란스러웠다.

평소에 가족들에 대해 미워하는 감정을 가진 적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이렇게 가문이 망한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니, 막상 겁이 났다.

“……그건 너무 무서워요.”

앨리스는 한참이나 지난 후에야 조그마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요정왕 에이비시는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어째서 무섭다는 거지? 가문이 망한다고 해도 요정왕의 계약자라면 아무 문제 없을 것이다. 내가 지켜줄 터이니.”

“……하지만 저는 아직 7살인걸요.”

“7살이 뭐가 어쨌다는, 아. 인간 나이로 7살이지. 요정들은 나이를 잘 세지 않기에 잠시 서툴렀구나. 미안하다.”

에이비시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직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그럼 네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천천히 생각하고 다시 나를 불러보거라.”

그렇게 에이비시는 홀연히 사라졌다.

요정이 사라진 방은 다시 원래대로 칙칙하고 어두워졌다.

앨리스는 낡은 제 이불을 칭칭 둘러싸고서 생각에 빠져 있었다.

“……내가 원하는 거?”

유치원에 가기 전,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었던 것 같다.

만약, 아주 만약에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 하고.

‘자고 일어났는데 내 옆에 요정이 짠 하고 나타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었어. 그러면 모두 놀라서 기뻐할 테니까.’

앨리스는 눈을 깜빡이며 생각했다.

‘그러면 나도 언니처럼, 사랑받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만약 지금 방 밖으로 나가 부모님께 가서, 요정을 소환했다고 알리면 다들 기뻐할까?

앨리스는 어째서인지 상상할 수가 없었다.

바로 직전까지 경멸스러운 표정을 짓던 이들이 눈 깜빡할 새 환한 미소와 함께 저를 반겨주는 모습을.

‘그건 싫어. 정말 싫어. 소름 돋는 기분이야…….’

앨리스는 치를 떨었다.

분명 예전엔 가족들의 달라진 태도를 바랐었는데, 지금은 상상만 해도 소름이 끼쳐왔다.

‘그렇다고 가문이 망하는 건 싫어. 그렇게 되면…… 유치원에 가지 못할 테니까.’

귀족 가문인 탓에 제국 유치원에 다닐 수 있었다.

앨리스는 유치원에서 처음으로 사귀게 된 친구들을 무엇보다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에미르 영애님을 못 보게 되는 건 너무 슬픈 일이잖아.’

앨리스는 계속해서 끙끙대며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가 잠든 늦은 밤.

앨리스가 조심스레 요정왕 에이비시를 불러냈다.

“……어유, 막 잘 채비를 끝냈더니만. 그래 무슨 일이더냐?”

에이비시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등장했다.

그 앞에서 앨리스는 망설이다가 말을 꺼냈다.

“요정왕님, 저 마음을 정했어요.”

“오, 그러냐?”

“……네. 일단, 가문은 멸망시키지 말아주세요.”

에이비시가 눈을 가늘게 떴다.

“유치원 때문에 그러는 거냐? 그곳에 있는 친우들 때문에?”

“어, 어떻게 아셨어요?”

“아까 네 기억을 읽었으니 모를 리가 있겠니.”

“아…….”

앨리스가 납득한 표정을 지었다.

잠시 후 에이비시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마음대로 하거라. 소환사인 네 뜻을 따르는 게 소환수로서의 도리이니.”

“그, 그리고요!”

앨리스가 급하게 말을 이었다.

혹시라도 에이비시가 아까처럼 홀연히 사라지기라도 할까 붙잡은 모양새였다.

“……가문에 복수는 안 할래요. 하고 싶지 않아졌어요. 대신 저, 요정왕님과 계약하게 되면 부탁드릴 게 있어요. 조금 어려운 부탁일 수도 있지만요…….”

“무엇이냐?”

“저, 저를 훌륭한 어른으로 키워주세요!”

앨리스의 작은 외침에 에이비시의 눈이 동그래졌다.

“키워달라고? 이 몸이 널?”

“네.”

* * *

짹, 짹.

새소리가 들려오는 좋은 아침이다.

“앨리스는 어제 뭘 했을까?”

요정의 열매를 주고 나서도 내내 걱정했다.

잘 지내고 있으려나.

혹시라도 집에 돌아가 다시 잠들기라도 했을까.

요정을 만났으려나…….

오늘 앨리스를 만나면 제일 먼저 안부부터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유치원에 도착하니, 나보다 먼저 온 마차가 보였다.

세드릭과 앨리스의 마차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에미르 영애님!”

세드릭은 화장실이라도 간 건지 안 보이고, 앨리스 혼자 나를 반겨주고 있었다.

나는 따라서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러자 앨리스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저, 영애님께 드릴 말씀이 있어요. 잠시 유치원 2층의 빈방에 가서 이야기해요.”

“그래요, 앨리스.”

무슨 이야기를 하려나 궁금했지만 당장에 묻지 않고 꾹 입을 다문 채 앨리스의 손을 잡고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

웬일로 앨리스의 걸음이 신난 듯 빨랐다.

앨리스는 나를 끌어당기듯 앞장서 계단을 올라갔다.

마침내 2층에 다다른 우리는 뛰어온 탓에 숨이 찬 채로 멈춰 섰다.

이윽고 앨리스가 발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에미르 영애님.”

“듣고 있어요, 앨리스.”

“저 요정 소환사가 되었어요. 어제 집으로 돌아가서 요정을 소환했거든요.”

“……축하해요! 정말 잘됐어요, 앨리스!”

요정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부터, 아니, 어쩌면 오늘 아침 유독 앨리스의 표정이 밝고 개운해 보이는 것에부터 예상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앨리스가 요정 소환사의 능력을 깨우쳤다는 것을 직접 들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나는 진심으로 앨리스를 축하해 주었다.

“축하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려요.”

앨리스가 환히 웃었다.

지금까지 중 가장 행복해 보이는 미소였다.

그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는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앨리스. 혹시 소환사가 되었다는 걸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어요? 이를테면, 가족이라든가…….”

원작에서 성인이 된 이후에야 소환술을 각성한 앨리스에게 가족들은 돌변한 태도를 보인다.

지금까지 언제 그랬냐는 듯 살가운 가족인 척 가식적으로 잘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그때 이미 앨리스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환멸이 날 대로 난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남주인 니콜라스의 도움을 받아 가족들에게 지금까지 홀대받았던 것에 대한 복수를 하게 된다.

그런 원작이었다.

하지만 지금, 바뀐 이 내용대로라면 어떨까.

어른이 되고 나서야 각성한 원작과는 달리 아직 7살 어린아이일 때 각성하게 된 앨리스라면.

못된 가족들이 잘해주는 것에 넘어가, 혹여나 이용당하지는 않을까.

사실 요정의 열매를 가져다줄 때 이런 걱정을 하긴 했었다.

그래서 만약을 대비해, 앨리스에게 소환사가 되게 된다면 절대로 남의 말에 휘둘리지 말라고 오늘 단단히 일러둘 참이었다.

그랬는데.

“가족들, 그러니까 부모님과 언니에게는 알리지 않을 거예요.”

“……!”

앨리스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전의 그 여리고 약하던 모습이 아니었다.

“가문 안의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제 능력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요.”

“앨리스…….”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다.

그러나 내가 바라던 대답이기도 했다.

이윽고 앨리스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물론 제가 소환사가 되었다는 걸 알면, 그것도 요정왕님을 소환했다는 걸 알면 가족들이 기뻐할 거예요.”

“자, 잠깐만요. 앨리스. 뭐라고요? 방금 설마…… 요정왕이라고요? 요정왕을 소환한 거예요?”

앨리스의 말을 가만히 귀담아듣던 나는 예상치 못한 단어에 깜짝 놀라 입을 막았다.

요정왕? 요정왕을 소환했다고?

“네, 맞아요. 요정왕 에이비시 님이라고 하셨어요.”

“역시, 앨리스! 정말 대단해! 대단해요!”

열매 따다 주길 잘했다! 뿌듯함과 보람이 차올랐다.

나는 손뼉을 치며 앨리스를 칭송했다.

그러자 앨리스가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그,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니에요!”

앨리스는 너무 겸손해서 문제였다.

요정왕을 7살에 소환했는데 대단한 게 아니면 대체 뭔데?

그때였다.

갑자기 펑 하고 뭔가가 나타나 이의를 제기하듯 외쳤다.

“뭐가 대단한 게 아니라는 거냐!”

“으악!”

나는 깜짝 놀라 허공에 헛손질을 했다.

하마터면 넘어질 뻔…….

그때 앨리스가 나를 잡아주며, 동시에 나타난 무언가에게 말을 걸었다.

“요, 요정왕님? 갑자기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내 모욕을 하길래 귀가 간지러워서 와봤지.”

“모욕이라뇨. 전 그런 적 없는데…….”

앨리스가 억울하다는 듯 말끝을 흐렸다.

그러자 자칭 요정왕이라는 조그만 생명체가 펄럭펄럭 날갯짓을 해대며 조잘거렸다.

“이 몸, 요정들을 다스리는 왕을 소환할 자격을 갖추었는데 그것을 대단치 않다고 여기는 것이 나에 대한 모욕이 아니면 무엇이냐? 이봐라 꼬맹아. 이건 겸손이 아니라 나에 대한 무시란 거다.”

“저, 저는.”

“그러니까 앞으로는 당당하게 대단한 요정왕 소환사라고 말하도록 해라. 아무도 무시하지 못하도록.”

요정왕은 에헴, 하며 근엄하게 당부를 하고서는 뿅 하고 다시 사라져 버렸다.

나와 앨리스는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저, 앨리스. 방금 그분이 요정왕님이시라고요.”

“네에…….”

확실히 요정왕이라 그런지 존재감이 대단했다.

어쩐지 앨리스에게 꼭 필요한 존재일 것 같다는 확신도 들고 말이지.

잠시 후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다시 끊겼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혹시나 또다시 요정왕이 불시에 나타날지 모르니, 절대로 그분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무언의 약속이었다.

“저는 소환사가 아닌 저라도 괜찮다고 해주는 분들이 좋아요. 음, 이를테면 에미르 님 같은 분이요. 하지만 제 가족들은 그렇지 않아요. 소환사가 아닌 저를 싫어하니까요.”

앨리스의 말에서 채 하지 못한 속마음이 느껴졌다.

그래. 앨리스도 사실 알고 있었던 거다.

어리다고 모르지 않았다.

만약 앨리스가 제 능력을 밝혀서 가족들의 태도가 달라진다면, 그건 그들이 앨리스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앨리스가 가진 능력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걸.

“저는 이 능력을 숨길 거예요. 다행히도 요정왕님께서 저랑 계약해서 도와주시기로 했어요. 저에게 글도 가르쳐 주시고, 맛있는 식사도 가져다주시고, 가끔은 몰래 꿈나라 대신 요정의 섬에 여행을 갈 수 있게도 해주신대요.”

“잘됐네요, 앨리스. 좋은 요정을 만난 것 같아요.”

“네, 저도 기뻐요. 요정왕님 같은 분을 만나서. 그리고 에미르 님 같은 친구가 있어서.”

앨리스가 내 손을 꼭 잡았다.

어쩐지 앨리스의 눈빛이 전과 다르게 강해진 것처럼 보였다.

착각이 아니었다.

* * *

그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앨리스는 꾸준히 에이비시와 함께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예전엔 유치원에서 모두와 함께 있어도 가끔 외로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는 했는데, 지금은 한결 활기차 보였다.

‘다행이지.’

앨리스가 내게만 말해주기를, 에이비시가 가져다준 요정의 섬에서 나는 과일들이 정말로 달콤하고 사르르 녹아내린다고 했다.

너무 맛있어서 눈 깜짝할 사이에 다 먹어 치워버렸다고.

다음엔 에이비시에게 부탁해서 나와 유치원 아이들 것도 가져다준다고 하는데, 맛이 궁금해진다.

앨리스가 무사히 요정 소환사가 된 이후, 내 고민은 한결 줄었다.

요즘 하는 고민은 이전보다 훨씬 사소한 것들인데, 이를테면 이런 거다.

‘이제 곧 이틀 후면 황실에서 연회가 열린다고 했지.’

매년 여름 황실에서 귀족들을 초대해 성대하게 벌이는 연회가 있다.

물론 그곳에 들어갈 수 있으려면 데뷔탕트를 치른 귀족이어야만 한다.

즉, 나는 안 된다는 거지.

참석하려면 아직 10여 년은 더 기다려야 한다.

하지만 황족은 예외라서 아마 니콜라스 황자님과 니나이나 황녀님은 참석하실 거다.

‘아아, 부러워! 나도 연회 가보고 싶다.’

아주 가끔 저택에서 열리던 소모임 같은 것만 기웃대던 나는, 진짜 연회가 얼마나 화려할지 궁금해졌다.

물론 모든 것이 다 그렇듯, 신기한 것도 한두 번이니 데뷔탕트를 치른 이후에는 질리도록 참석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어휴…….”

“에미르, 왜 한숨을 쉬고 있어?”

“아, 황녀님!”

내 어깨를 턱 하고 짚는 손에 놀라 뒤돌아보니 니나이나가 어깨를 으쓱이고 있었다.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니나이나는 연회 이야기를 꺼냈다.

“내일은 유치원에 오지 못하게 됐어. 오라버니와 나 둘 다. 알다시피 연회가 있거든.”

“황녀님은 연회에 자주 가보셨어요? 연회는 즐겁나요?”

문득 궁금증이 샘솟은 나는 니나이나에게 질문했다.

그러자 니나이나가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자주 갔어. 즐겁긴 한데 놀 상대도 없고 계속 서 있으려면 다리 아파. 테라스에 숨어 있는 것도 한두 번이지.”

“아…….”

역시 좋은 점만 있는 건 아니구나.

니나이나는 벌써 지긋지긋하다는 듯 해탈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윽고 그 시선이 내게 꽂혔다.

“에미르, 너는 연회에 못 오겠지?”

그거야 당연한 말씀.

나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러자 니나이나가 잠시 고민하더니 말을 이었다.

“연회가 궁금해?”

“앗, 네! 엄청 궁금해요!”

나는 곧바로 대답했다.

보통 이런 경우에는 초대해 주게 마련이니까.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어긋나지 않았다.

“그럼 나랑 같이 참석하자.”

“좋아요, 황녀 전하! 그럼 초대장을 보내주시는 거예요?”

들뜬 마음으로 주먹을 꼭 쥐고 니나이나를 응시했다.

그런데 니나이나가 고개를 저었다.

“초대장은 안 돼.”

“헉! 그럼 어떻게 해요? 입구에서 근위병에게 끌려나갈 것 같은데.”

다른 귀족들의 연회도 비슷하지만, 황궁에서 열리는 연회는 특히나 철저했다.

초대장이 없으면 절대로 입장이 불가했고, 그 초대장이라는 것도 위조하기 어렵게 마법을 따로 걸어놓았다.

그런데 초대장을 보내주지 못한다니!

‘마, 망신당하는 거 아냐?’

나는 상상했다.

당당하게 연회용 드레스를 차려입고 마차에서 내렸는데 초대장이 없다는 이유로 근위병에게 가뿐히 들려 마차로 반송되는 나의 모습을.

귀족들이 모두 웅성대며 저 꼬맹이는 뭐냐고 쳐다보겠지.

상상만 해도 쪽팔린걸…….

“걱정 마. 내게 방법이 있어.”

하지만 니나이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한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방법이요?”

“응. 연회가 시작하기 전, 미리 황궁의 표식이 없는 마차를 보내놓을게. 그걸 타고 황궁으로 오면 돼. 그럼 연회가 시작하고 나와 함께 몰래 숨어들어 갈 수 있으니까.”

좋은 방법인데? 내 눈이 반짝였다.

니나이나라면 연회장에 숨어들어 가는 방법을 아주 잘 알고 있을 테고.

황궁 거주민이니까.

내가 막 그러겠다고 대답하려던 그때.

“황녀님, 저도 함께 가고 싶어요.”

“제이크 공자?”

어디선가 스르륵 제이크가 나타나 말을 얹었다.

그에 니나이나가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제이크 공자도 함께 가는 거로. 그런데 두 명이면 숨어들어 갈 때 들키지 않을까…….”

니나이나의 말투에서 약간의 망설임이 느껴졌다.

그렇지만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황궁 연회? 재밌겠는데? 전하, 저도 가고 싶습니다.”

“아…… 저도요!”

저 멀리서 몰래 귀 기울여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세드릭과 앨리스도 함께 가겠다고 나선 것이다.

“어쩔 수 없지.”

이쯤 되니 니나이나는 무언가를 포기한 듯한 말투로 말했다.

“다들 각자 가문에 안 들키게 오도록 해, 그럼. 마차는 보낼게.”

“좋아요, 황녀님!”

우리의 외침을 들은 니나이나는 어쩐지 말투와는 달리 기뻐 보이는 표정이었다.

* * *

“옷을 뭐로 입을까아?”

그날 저녁.

내 방 옆 드레스룸에서 나는 몰래 옷들을 뒤지고 있었다.

지난번 니나이나가 선물해 준 옷도 엄청나게 많고 해서, 옷이 없어 연회에 못 가는 일은 없겠지만.

그래도 명색이 황궁 연회인데 아무 옷이나 입고 가는 건 또 예의에 어긋나지 않나 싶었으니까.

‘아니, 그런데 애초에 불청객이잖아?’

물론 초대받지 못한 어린이 손님이라는 점은 예외로 두자.

아무튼 나는 열심히 옷을 골랐다.

원래대로라면 앨리스의 옷도 하나 골라 갔겠지만, 앨리스에게 물어보니 글쎄 다 옷을 구할 방법이 있단다.

‘저는 괜찮아요, 에미르 님. 물론 말씀해 주신 것만으로도 엄청 고맙지만, 이젠 에이비시 님께 부탁드리면 되니까요.’

에이비시는 어쩐지 보통의 소환수와는 다르게, 앨리스를 돌보고 선생님 비슷한 역할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가끔은 심부름꾼 같기도 하고.

‘음, 음. 과연 좋은 소환수를 만났다니까.’

아무튼 다시 본론으로 돌아와서 뭘 입고 갈까 고민이 된다.

“아, 그때 그 옷이 좋겠다!”

다행히도 고민은 길지 않았다.

마침 떠오르는 옷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의상실에서 니나이나와 트윈룩으로 맞추었던 드레스가 있었으니까.

‘물론 니나이나가 이걸 입고 오지는 않겠지만. 황녀니까, 더 좋은 옷을 입겠지?’

그래도 한 번쯤 이 옷을 입어보고 싶었는데 마침 기회가 온 거다.

어차피 지금은 폭풍처럼 빠르게 성장을 할 때라서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작아져서 못 입을 터였다.

“그럼 옷은 이걸로 하고, 구두는 하얀 에나멜 슈즈가 좋겠다.”

장신구까지 하나하나 미리 찜해 둔 다음, 나는 드레스룸을 빠져나왔다.

이틀 후 있을 연회가 기대되었다!

* * *

제이크는 평범하디 평범한 제 드레스룸 앞에서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지나가다 본 테이온 공작 부인은 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했다.

‘얘가 이럴 애가 아닌데……?’

때마침 인기척을 눈치챈 제이크가 고개를 들었다.

“아, 어머니.”

“제이크, 뭘 그리 고민하니?”

“……연회에는 어떤 옷을 입고 가는 게 좋을까요?”

제이크의 대답에 공작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질문이 의외였으니까.

“연회? 설마, 이틀 후 열리는 황궁 연회 말이니? 하지만 그곳에는 네가 가지 못할 텐데.”

“알고 있어요. 하지만 황녀 전하께서 초대해 주셨거든요.”

“아하, 그러니? 흐음…….”

공작 부인은 제이크의 말을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항상 정직한 제이크였기에 의심할 이유가 없다는 게 맞았지만.

그런 제이크가 초대장을 받지 않고 몰래 연회에 간다는 것을 안다면 꽤나 놀랄 것이다.

“네 머리 색은 부드러운 갈색이니까, 연한 크림색 정장이 좋겠구나. 이걸로 하겠니?”

“좋아요.”

공작 부인은 옷 고르는 센스가 꽤나 뛰어난 편이었다.

비단 옷뿐만 아니라 정원의 수목들, 저택 내의 집기들, 장식품들을 고르는 데도 조예가 있었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런 고로 제이크는 제법 만족스럽게 연회에 입고 갈 옷을 골랐다.

한편 베드몬 대공가에서는 자그마한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도련님? 지난번에도 이 제복을 쓸데없이 꺼내시더니 이번에는 또 어쩐 일로 이러십니까.”

“쓸데없다니. 다 이유가 있다고.”

“그러니까 그 이유가 무엇인지 말씀을 해주셔야, 제가 이 옷을 드릴 텐데요. 제가 알기로 도련님의 공식 바깥 일정은 없는데, 대체 무엇에 쓰시려고 이러십니까.”

어쩐지 데자뷔가 느껴지는 소소한 말다툼 장면이었다.

시종은 옷을 뺏기지 않으려 버티고, 세드릭은 어떻게든 옷을 얻어내려 끈질기게 버티는 중이었다.

팽팽한 싸움.

그 승자는 지난번과는 다르게 세드릭이 아니라 시종이었다.

“끝까지 말씀 안 해주시면 못 꺼내드립니다.”

“그래, 됐어.”

갑자기 뭔가 음모를 꾸미는 눈빛으로 제복을 한 번 바라보더니 너무 손쉽게 포기해 버린 세드릭이었다.

“……어라? 이렇게 쉽게 포기하실 도련님이 아닌데?”

시종은 당황했지만, 설마 이틀 후 몰래 세드릭이 제복을 꺼내 입고 가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지난번에 분명 에미르가 잘 어울린다고 말했잖아. 그러니 난 저걸 입고 가고야 말겠어. 그래야만 해.’

세드릭은 속으로 남몰래 제복을 훔칠(?) 궁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대공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있는 로즈 공작저에서도 약간의 소란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에이비시 님. 저 이 드레스는 좀…… 너무 화려해요.”

여전히 작고 초라한 다락방.

며칠 전 에이비시가 이곳을 화려한 궁전같이 꾸며준다고 나섰지만 앨리스의 격한 반대로 무산된 이곳에서, 에이비시와 앨리스의 의견 다툼이 벌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 정도는 되어야 네가 주인공처럼 보이지 않겠느냐? 명색이 요정 소환사인데, 초라한 몰골을 하고 가야 되겠어? 아무리 네 정체가 비밀이라지만, 쯧.”

“네? 제가 주인공이라뇨. 절대 안 돼요. 황실에서 열리는 연회인걸요. 게다가 사실…… 초대장도 안 받았고요.”

“뭐, 뭐라고? 초대장을 안 받아? 이런! 도대체 누가 네게 그런 무례한 짓을! 초대장을 주지 않다니 기본적인 예의가 없구나!”

앨리스가 무시당했다고 여긴 에이비시가 벌컥 역정을 냈다.

“에이비시 님, 완전 오해예요. 초대해 주신 분은 제 유치원 친우인 황녀님이시라고요.”

“……호오, 황녀가 널 초대했다고?”

“네. 그리고 황녀님도 따로 초대장을 구해주지 못하셔서 이러는 거예요. 원래대로라면 못 가는 연회거든요.”

앨리스의 말을 듣던 에이비시는 문득 심각해진 표정으로 질문했다.

“잠시만, 네 말대로라면 몰래 황궁에 갔다는 걸 들키면 큰일 나는 것 아니냐? 안 잡혀가나?”

“……아마도 그럴 거예요. 에이비시 님, 만약 그렇게 돼서 감옥에 갇히면 저 좀 구해주세요. 가족들은 절 안 구해줄 것 같아요.”

“무슨 그런 당연한 소리를. 감옥 근처에도 안 가게 바로 날개로 감싸서 요정의 섬으로 데려가 주마.”

어쩐지 앨리스의 강력한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는 듯한 에이비시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한 게, 워낙 앨리스의 곁엔 보호자가 될 만한 어른이 없었다.

게다가 에이비시는 그런 꼴을 그냥 두고 볼 만한 매정한 요정도 아니었다.

때문에 결국 에이비시가 이렇게 앨리스를 손녀 돌보듯 하게 된 것이었다.

“쯧쯧, 감사하게 여겨라. 세상 어느 인간이 요정왕의 과보호를 받겠느냐?”

“항상 감사하게 여기고 있어요.”

“그래, 그래.”

물론 가끔 요정 특유의 거들먹거림과 생색내기는 있었지만 말이다.

이후로도 자잘한 의견 충돌 끝에, 결국 앨리스는 요정들이 직접 요정의 가루로 실을 자아내 만든 원피스를 입기로 했다.

과연 요정의 손길이 닿은 옷이라 그런지 범상치는 않았다.

“우와! 왼쪽에서 보면 은색 같고, 오른쪽에서 보면 푸른색 같아요!”

“신기하냐? 요정의 실이라서 그렇단다. 아주 부드러운 데다 가볍기도 공기를 두른 것처럼 가벼울 게다.”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는 인간을 위한 드레스라며 에이비시가 한껏 거드름을 부렸다.

새 드레스를 입고 신난 듯 방 안을 걷는 앨리스는 이제야 제 또래처럼 보였다.

에이비시는 흐뭇하게 그 광경을 쳐다보았다.

* * *

이틀 후.

‘드디어 오늘이 연회가 열리는 날……!’

나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수도에 있는 귀족들은 모두 참석하게 되어 있는 연회였다.

그러니까 아마 엄마 아빠도 곧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갈 거다.

나는 그전에, 몰래 핑계를 대고 빠져나갈 예정이었다.

응? 무슨 핑계를 댈 거냐고?

‘그거야 당연히 친구 집에서 논다는 핑계지.’

이렇게 하기로 했다.

제이크와 함께 놀겠다고 하면서 테이온 공작저로 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제이크와 함께 황녀 전하가 보내온 마차를 타고 베드몬 대공저와 로즈 공작저를 경유해 몰래 황궁으로 향한다!

‘……까지가 세운 계획인데. 잘할 수 있으려나.’

하지만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도 정말로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공작저로 향한 나는 나를 기다리고 있던 제이크의 모습에 감탄하며 엄지를 척 내보였다.

“우와, 제이크! 오늘 좀 멋진데?”

“고마워, 에미르. 너도 오늘 정말 최고로 멋있다! 드레스 너무 예뻐.”

제이크는 칭찬이 좋은지 볼을 살짝 붉히면서 되려 내게 칭찬을 돌려주었다.

마침 니나이나가 보낸 마차가 도착해서, 우리는 조용히 마차에 탔다.

얼마 후 도착한 곳은 베드몬 대공저에서 약간 떨어진 버려진 과수원이었는데, 그곳에는 세드릭이 기다리고 있었다.

과수원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근사한 제복 차림으로.

“왜 이렇게 늦었어? 괜히 일찍 나와 기다렸네.”

세드릭은 툴툴대며 마차에 올라탔다.

그도 그럴 게 꽤나 오래 기다린 모양이었다.

약속 시간을 잘못 알고 30분이나 서 있었단다.

아무튼 마차는 계속 달렸다.

“저예요, 에미르 님! 저 앨리스예요!”

그러다가 길가에서 웬 후드 달린 로브를 푹 눌러쓴 아이를 만났는데, 알고 보니 그 애가 바로 앨리스였다.

차림새만 보고는 몰라볼 뻔했는데, 다행히도 우리 둘이 눈이 마주쳐서 무사히 마차를 멈춰 세우고 탈 수 있었다.

“저택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안 들키고 빠져나오느라, 일부러 이 로브를 입었어요.”

“더웠겠다……. 이제 마차 안이니까, 로브는 벗어도 될 것 같아요.”

“네!”

앨리스는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긴 그럴 만도 하지.

이런 연회는 아예 처음이 아니던가.

물론 나도 그렇긴 하지만…….

‘응?’

생각에 빠져 있던 난, 이윽고 앨리스가 로브를 벗자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마차에 탄 모두가 놀랐다.

“너, 그 옷 대체 뭐야? 뭐로 만들었는데 이렇게 신기하게 반짝여?”

세드릭이 입을 쩍 벌리고 감탄할 만큼이나 신비로운 드레스였다.

제이크 역시 드물게 감탄했다.

그런 옷을 앨리스가 입고 있었다.

‘그 에이비시라는 요정왕에게 받은 거겠지? 다행히도 앨리스를 잘 챙겨주고 있나 봐.’

나는 뒤늦게야 눈치챘다.

저 옷은 필시 인간의 솜씨가 아니라는 것을.

물론 앨리스는 의뭉스럽게 웃을 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직 나를 제외한 다른 사람에게는 요정을 소환했다는 것을 밝히지 않기로 했으니까.

“어디 의상실에서 맞춘 거야? 신기하잖아.”

“……의상실이 아니고, 선물받았어요. 역시 눈에 좀 많이 띄나…….”

앨리스가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그러자 세드릭은 눈치도 없이 긍정했다.

아무래도 세드릭은 순수하게 옷감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이었다.

“응, 엄청나. 눈에 네 옷만 들어오는데? 이건 뭐, 금실이랑 은실로 짠 것도 아니고. 미친 듯이 튀어.”

결국 앨리스는 황궁 내에서 주목받아 들킬 것을 우려해 다시 로브를 입었다.

그렇게 우리 4명이 모두 탄 마차는 부지런히, 또한 은밀히 황궁을 향해 달렸다.

마침내 마차가 완전히 멈춰선 곳은, 황궁 안의 웬 담벼락 앞이었다.

담벼락에는 작은 개구멍이 나 있었다.

우리 정도 되는 꼬마 아이들이 몸을 완전히 숙여야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황궁에 이런 비밀통로가 있다니!’

분명 아까 마차가 황궁 정문을 통과한 것을 봤는데, 바로 황녀궁으로 가지 않고 빙빙 돌아가는 게 좀 이상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게 다 이곳으로 오기 위함이었다니.

“너희들, 왔어?”

“황녀 전하!”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말을 맞춰둔 시녀에게 전갈을 받았는지 니나이나가 개구멍 너머로 쏙 하고 나타났다.

니나이나는 우리를 쓱 둘러보더니 말했다.

“다들 잘 왔네. 혹시나 중간에 들키기라도 했을까 봐 걱정했다고! 아, 그보다 어서 가자. 내가 꼬드겨 놓은 건 이 마부와 시녀 한둘뿐이라 다른 궁인들에게 들키면 곤란해.”

그렇게 우리는 하나씩 개구멍을 통과해 니나이나의 궁 안으로 들어왔다.

궁 뒤에 자리한 자그마한 후원이었는데, 막 여름을 맞이할 준비를 끝낸 꽃봉오리들이 화사했다.

“우와…….”

우리 중 유일하게 이전에 황궁에 와본 적이 없던 앨리스가, 감탄사를 중얼거렸다.

예쁘다, 멋있다.

뭐 이런 말을 할 새도 없이 주변을 둘러보느라 바빴다.

“이쪽이야. 이쪽 계단으로 곧장 올라가면 내 방으로 들어갈 수 있어.”

“우와! 비밀통로네요.”

역시 황궁이라 그런지, 이런 통로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는 모양이었다.

나선형의 계단은, 성인 한 명 정도 겨우 올라갈 수 있을 법한 폭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조그마했기 때문에 서로 부딪히지 않고 여유롭게 올라갈 수 있었다.

“우와!”

그리고 마침내 니나이나의 침실에 도착했을 때, 모두 감탄사를 터뜨렸다.

“후후.”

니나이나는 그런 우리들의 반응이 사뭇 뿌듯한지 으쓱이는 표정을 숨기지도 못했다.

“꽤 괜찮지? 너희를 초대할 거라서, 아침부터 깨끗이 청소해 놓으라고 일렀어.”

믿기지 않았다.

이곳이 ‘고작’ 침실이라니.

웬만한 저택의 로비만 한 크기인걸.

“엄청나요! 어……?”

나는 두 손을 감싸 쥐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가 문득 눈에 들어온 한 물건에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 섰다.

‘저, 저건. 전에 내가 그려주었던 니나이나의 초상화잖아?’

그러고 보니…….

분명 니나이나가 그때 그렇게 말했었다.

‘내 침실 정중앙에 걸어놓도록 해야겠어.’

으, 으악! 진짜로 걸어놓다니!

‘창피해!’

순간 화르르 불타오르듯이,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다.

심지어 그림의 퀄리티와 어울리지 않게, 걸린 액자는 무려 황금과 보석으로 만들어져 있었다.

“에미르 네가 그려준 그림이야.”

어느새 내 옆에 다가와 있던 니나이나가 뿌듯하게 설명했다.

“저…… 전하. 혹시 다른 사람들도 이 그림을 구경했나요?”

나는 문득 궁금해져 질문했다.

그러자 니나이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지. 내 방을 청소하는 하녀들, 나를 보필하는 시녀들, 호위 기사들, 또 아바마마랑 어마마마까지 모두 이 그림을 보셨단다.”

“아아…….”

나는 더욱더 붉어지는 얼굴을 두 손으로 덮었다.

내가 창피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모양인지 니나이나가 내 어깨를 토닥였다.

“부끄러워하지 마. 아무도 네 그림을 욕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다들 잘 그렸다고 아우성이었지. 어마마마께서도 뛰어난 예술 재능을 가진 친우를 두었다며 감탄하셨는걸.”

“……그, 그것참…… 감사해요.”

어쩐지 더 부끄러워지는 건 착각이겠지.

그때였다.

갑자기 복도에서 여자의 것으로 추정되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상당히 특이한 걸음걸이였다.

“……!”

그 소리를 제일 먼저 들은 니나이나가 재빨리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다들 숨어! 내 시녀가 오고 있어.

저 시녀는 말을 맞춰놓은 게 아니라서, 너희들을 발견하면 아바마마께 이르러 갈 게 뻔해.”

숨으라고?

갑자기 여기서요?

……어디에 숨어야 하죠?

니나이나의 말에 우리는 당황해 허둥지둥했다.

침실이 아무리 넓다지만, 있는 것이라고는 침대와 커튼, 양탄자, 작은 티테이블 뿐인데…….

“빨리 숨어!”

“네, 넷!”

니나이나도 갑작스레 닥친 상황에 초조한 듯 연이어 재촉했다.

그제야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렸다.

“치, 침대 밑으로 숨을게요!”

“나도!”

“저, 저도요!”

“야, 잠깐! 나도 거기 숨으려고 했다고!”

내가 먼저 잽싸게 침대 밑에 기어들어 가자, 그제야 다른 아이들도 나를 따라 침대 밑에 숨으려고 했다.

하지만 공간에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이 침실이 넓고 침대도 넓다지만, 우리의 몸이 가려질 만한 사각지대는 의외로 좁았던 것이다.

“세, 세드릭 님은 들킬 것 같은데요……?”

둥글게 몸을 말고 끝 모서리에 안착한 앨리스가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과연 마지막으로 숨어들어 온 세드릭의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침대 끝자락에 삐죽 나와 있었다.

“으, 으으! 너희가 조금만 더 옆으로 붙으면 되잖아!”

“안 돼요! 옷 구겨져요!”

앨리스와 세드릭이 소곤대며 실랑이했다.

그 순간에도,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또각, 또각.

“제, 젠장……! 어디 숨어야 해?”

결국 세드릭이 잔뜩 당황한 얼굴로 재빨리 다시 침대에서 빠져나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그때.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우리는 방금까지 작은 목소리로 티격태격하던 것도 멈추고 쥐 죽은 것처럼 침묵했다.

“황녀 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준비는 모두 마치셨는지요.”

이윽고 나이 든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니나이나는 얼음처럼 굳은 세드릭을 향해 흔들리는 눈빛을 보내고는, 재빨리 외쳤다.

“……자, 잠깐! 아직 들어오지 마!”

“……예? 예. 그러겠습니다.”

시녀는 어리둥절한 듯했지만 일단 명령이니 니나이나의 말을 따랐다.

그사이, 세드릭에게 재빠르게 입 모양으로 속삭이는 니나이나였다.

‘어서, 숨어! 커튼, 커튼!’

그 말을 알아들었는지 세드릭은 곧바로 커튼 뒤로 갔다.

다행히도 커튼은 얇은 홑겹이 아니었다.

홑겹 위에 두꺼운 암막 커튼이 함께였다.

주름도 져 있고 보석 장식도 주렁주렁해서, 움직이지만 않는다면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드릭이 커튼 뒤에서 완전히 자리를 잡은 걸 확인하고, 니나이나는 재빨리 어디론가 쪼르륵 달려갔다.

그리고 나서야 허락의 말을 했다.

“……이제 들어와도 돼!”

“예, 전하.”

시녀는 방 안에서 있었던 소동을 아직 눈치채지 못한 듯 차분히 걸어왔다.

‘휴우…… 다행히도 안 들킨 걸까?’

하지만 그때.

시녀가 갑작스레 예민해진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순간 시녀가 우리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날카로운 그녀의 시선이 침대 밑에 꽂혔다.

‘서, 설마 들킨 건가?’

우리는 오들오들 떨지도 못하고 섬뜩한 채로 굳어버렸다.

이후 시녀가 조심스레 니나이나에게 질문했다.

“전하, 설마…….”

“……왜 그러지?”

니나이나가 평소보다 어색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게 들렸다.

시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그렇게 연회장에 가실 것은 아니겠지요? 드레스가 구겨져 있습니다.”

그녀의 말에 니나이나가 흠칫하며 제 옷을 내려다보았다.

정말이었다.

소매와 치맛단이 잔뜩 구김이 가 있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조금 전 개구멍을 통과한 데다 우리와 함께 소란을 벌인 틈에 그렇게 된 것 같았다.

“아, 갈아입어야겠네.”

“예. 드레스를 새로 내오라 이르겠습니다, 전하.”

시녀가 고개를 숙이고서 물러나려 했다.

그때 니나이나가 잠시 멈칫하나 싶더니 그녀를 붙잡았다.

“잠깐만! 내가 직접 가서 고르도록 할게. 같이 가.”

“알겠습니다, 전하.”

그렇게 니나이나와 시녀는 방문을 열고 사라졌다.

그러고 나서야 우리는 겨우 마음을 놓고 안심할 수 있었다.

“휴우……. 저 진짜 무서웠어요. 들킬까 봐요.”

앨리스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 역시 꾹 참고 있던 숨을 뒤늦게서야 몰아 쉬었다.

이윽고 커튼이 들썩이더니 그 안에 숨어 있던 세드릭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보다 이제 우리 어떡할 거야? 황녀 전하가 나갔는데, 따라 나가야 하나?”

“안 돼요. 나갔다가 들키면 어떡해요. 일단 우리 여기 계속 있어요.”

세드릭의 말에 앨리스가 기겁했다.

그러자 세드릭이 아쉬운 듯 쩝 입맛을 다셨다.

“……여기 계속 숨어 있으려니 답답한데.”

하지만 그러기가 무섭게 근처 복도에서 웅성대며 시종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니나이나가 돌아왔다.

시녀와 함께가 아닌 혼자였다.

옷을 바꿔입고 오겠다더니, 정말로 다른 옷을 입고 왔다.

그런데 어쩐지, 드레스의 생김새가 많이 익숙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입고 있는 드레스와 니나이나의 것을 번갈아 보면서 중얼거렸다.

“어, 그 옷은?”

내가 지금 입고 있는 것과 똑같은 트윈룩 드레스였다.

아까 내 옷을 힐끗 본 것 같더라니, 일부러 맞춰 입고 오기라도 한 걸까.

“다들 나와도 돼. 이제 연회장에 갈 시간이야.”

연회! 그 단어를 듣자마자 나는 눈을 반짝였다.

드디어 화려하고 성대한 황궁 연회를 구경할 수 있는 건가……?

니나이나는 탄성을 지르려고 하는 우리에게 손가락을 입에 쉿 대 보였다.

“다들 조용히! 알지? 몰래 가는 거야.”

그렇게 우리는 니나이나와 함께 방을 나서게 되었다.

텅 빈 복도는 시끌벅적하던 아까와 다르게 휑했다.

아무래도 궁인들이 대부분 연회장 쪽으로 가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일단 너희가 연회장 쪽에 숨어 있게 해줄게. 그다음엔 잠깐 떨어져 있어야 해. 아바마마, 어마마마 그리고 오라버니와 함께 입장해야 하거든.”

“알겠어요!”

우리는 또다시 비밀통로로 향했다.

아, 그러니까 우리가 아까 방으로 들어왔던 곳과는 다른 통로였다.

니나이나의 궁에서 연회장으로 직행할 수 있는 지하 통로였다.

회색빛 벽돌과 일정 간격으로 벽에 붙은 등불은 중세 고궁을 연상시켰다.

미로처럼 복잡한 길을, 니나이나는 잘도 찾아갔다.

‘으음, 역시 황궁은 복잡하다니까.’

원래도 그리 지리에 빠삭한 편이 아니었던 나는, 자칫 길을 잃기라도 할까 봐 다른 아이들과 니나이나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그러고 보니, 니콜라스 역시 황궁에 있을 텐데.’

우리를 몰래 황궁으로 초대한 게 니나이나뿐인지라, 니콜라스는 아마 우리가 이곳에 와 있다는 것도 모를 터였다.

‘모르는 거, 맞겠지……?’

나는 조심스럽게 니나이나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황자 전하께서도 저희가 황궁에 온 걸 알고 계실까요?”

“아니? 그럴 리가.”

“아, 그렇구나.”

니나이나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되물었다.

“그런데 그건 왜 물어보니?”

“그게…… 혹시라도 황자 전하와 마주치면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 오라버니도 같이 끌어들여서 놀면 되지. 그런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네에.”

니나이나의 확언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니나이나가 있다면 걱정 없다.

왜인지 알아서 척척 해결해 줄 것 같은 느낌이었으니까.

잠시 후, 거의 다 온 모양인지 통로의 끝에 희미하게 빛이 보였다.

“자, 여기로 올라가면 벽이 있거든? 그 벽을 살짝 밀면 연회장 테라스로 연결돼. 곧 있으면 연회장에 사람들이 들어올 시간이니까, 그 사이에 연회장 안에 잘 숨어들어 가는 거야.”

“네, 전하.”

우리는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첩보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찍고 있는 것 같았다.

“가자! 연회장으로!”

벽이 열리고, 우리는 테라스의 신선한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며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우와, 이 넓은 곳이 완전 텅 비어 있어요!”

“쉿, 여기는 넓어서 목소리가 잘 울려. 시종들이 들을지도 몰라!”

“앗, 조용히 할게요.”

앨리스가 제 입을 두 손으로 텁 막았다.

때마침 문가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났다.

우리는 모두 화들짝 놀라 얼른 벽 쪽에 쪼그려 앉아 숨었다.

“방금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았어?”

“잘못 들었겠지.”

하녀들이 반질반질 윤이 나는 흰 접시들을 들고 들어왔다.

그들의 대화에 우리는 식은땀을 흘렸다.

하지만 나는 내심 심장이 두근거렸다.

‘완전 스릴 넘쳐.’

물론 들키면 우리 모두 큰일 날 것이다.

사교계에 소문도 날 거고, 부모님께 혼날 거고, 아마 근신 처분을 받을지도……?

그렇지만 언제 또 이런 기회가 올까?

커서 연회에 참여하는 게 아닌, 우리끼리 함께 숨어서 노는 건 아마 유일무이한 추억일 것이다.

게다가 사실 믿는 구석도 있었다.

아까 앨리스가 내게 해준 말인데, 들키게 되면 요정왕 에이비시 님이 우리를 요정 섬으로 데려가 준다고 했다.

일명 증거 인멸이다.

접시를 나른 하녀들을 시작으로, 연회장에는 점차 오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우리가 있는 곳은 벽 쪽, 그러니까 화려한 장식이 있어서 좀처럼 눈에 띄지 않았다.

“헉, 이제 연회가 시작되려나 봐. 제이크.”

나는 내 옆에 앉아 있는 제이크에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제이크는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그러게.”

“우리 부모님도 오시겠지? 아, 테이온 공작님과 공작 부인도 오시겠구나.”

“맞아. 아마 오실 거야.”

제이크가 내 말에 수긍했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하나둘 귀족들이 연회에 참석하기 시작했다.

황제 일가는 가장 나중에 입장하기 때문에, 아마 귀족들이 모두 연회장 내에 입장하려면 꽤 걸릴 것이다.

“아, 초콜릿 과일 퐁듀다!”

그러던 와중, 우리가 숨어 있는 곳과 가장 가까운 한 테이블에 올려진 다과가 보였다.

여러 과일과 부드럽게 녹인 초콜릿이 들어 있는 볼이었다.

‘맛있겠다. 먹고 싶다…….’

순간 침이 꿀꺽 삼켜졌다.

나만 그런 건 아니었는지, 양옆에서 비슷한 소리가 연이어 작게 들려왔다.

‘참 이상하지.’

평소에는 그다지 당기지 않던 음식도, 어째서 이런 곳에만 오면 먹고 싶어지는 걸까?

생각하기가 무섭게, 내 옆으로 누군가가 슬며시 다가와 팔꿈치를 톡 건드렸다.

세드릭이었다.

“저 퐁듀 먹어보고 싶지 않아?”

세드릭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제이크와 앨리스 역시 동의했다.

그런 우리를 보고 세드릭이 씨익 악동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 가위바위보 해서 진 사람이 몰래 다녀오는 거로 하자.”

“……!”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이거 누가 봐도, 제가 가기는 싫어서 대신 누군가를 희생양으로 보내겠다는 수작 아냐?

“…….”

음, 그렇지만 생각해 보니 딱히 다른 방법은 없었다.

우리 4명 모두 가는 것보다 1명이 가서 가져오는 게 들킬 확률이 적다는 건 당연한 거니까.

게다가 이곳에서 한도 끝도 없이 숨어만 있을 수는 없고, 우리도 본격적으로 몰래 연회 구경 좀 해봐야 하지 않겠어?

구경 전에, 일단 배부터 좀 빵빵하게 채워놓고 시작하는 거다.

“좋아, 우리 동시에 내는 거야. 가위바위보!”

우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이고서 속삭이듯 조용히 게임을 했다.

그리고 결국 패자는 세드릭이었다.

“……내가 졌어?”

세드릭이 멍하니 주먹 쥔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후후, 약간 쌤통이었다.

그러게 애초에 뻔한 속셈을 가지고 가위바위보를 제안한다 했지.

결국 제 도끼에 제가 발등 찍힌 셈이다.

“쳇…….”

세드릭은 투덜댐과 동시에 한숨을 푹 쉬더니 이내 하는 수 없다는 듯이 발걸음을 옮겼다.

살금, 살금.

사실 걷는다기보다는 기어간다고 해야 맞았다.

조금만 더 몸을 높이 하면 들킬 수도 있는 아슬한 위치였다.

우리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그런 세드릭을 지켜보았다.

마침내 세드릭이 퐁듀가 있는 테이블 밑으로 향한 게 보였다.

‘좋아! 그렇게 손을 뻗어서……!’

손을 한 번 올려서 과일 접시를 하나 빼돌리고, 또다시 손을 올려서 초콜릿 접시를 하나 빼돌려 가져오면 되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때, 퐁듀를 향해 다가오는 이가 있었다.

“……!”

그 사람의 얼굴을 보고 나는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세이든이 아닌가.

세드릭의 큰형.

세드릭도 목소리를 듣고 자신의 형이라는 것을 알아챘는지 꽤나 흠칫한 게 보였다.

“……세르반과 세드릭도 함께 왔더라면 좋아했겠는데. 그 녀석들은 단 걸 잘 먹으니까.”

세이든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면서 접시에 퐁듀를 담아갔다.

그동안 세드릭은 정말로 숨도 안 쉬고 가만히 테이블보 밑에서 눈을 끔뻑거리고 있었다.

잠시 후.

겨우 퐁듀를 구해온 세드릭과 우리는 아주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어차피 이제 연회장 안은 완전히 시끌벅적 대화 소리로 가득해서, 우리 정도의 말소리는 아예 묻힐 게 분명했지만.

“어떻게 거기서 딱 형님이 나타나지? 나 진짜 식겁했다니까?”

세드릭은 답지 않게 엄살을 부리며 제가 이 접시들을 아주 어렵게 구해왔노라고 으스댔다.

우리는 입가에 약간씩 초콜릿을 묻힌 채 맛있게도 퐁듀를 먹었다.

* * *

잠시 후, 그러니까 손님들이 모두 입장한 후 연회의 주인이 나타났다.

그러니까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 니콜라스와 니나이나 말이다.

니나이나는 유독 평소보다 주변을 자주 둘러보는 듯했다.

아마 우리가 어디쯤 있는지 찾고 있는 듯했다.

황제 폐하의 짤막한 말씀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우리는 슬슬 연회장을 벗어나 안전한 곳에서 연회 구경을 할 채비를 하기로 했다.

“조금만 천천히 가!”

“들키겠어.”

우리는 소곤대며 저 너머 테라스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뻥 뚫린 곳으로 가면 들킬 게 뻔했으니, 음식이 있는 테이블 아래로 살금살금 숨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나는 실수로 테이블보를 살짝 건드렸다. 순간 모골이 송연해졌다.

“방금 뭐가 들썩거린 것 같은데…….”

“에이, 착각이겠지요.”

게다가 누군가가 이쪽을 지나가다 본 모양이다.

바로 코앞에서 대화 소리가 들렸는데, 문제는 그게 내가 아는 사람이라는 거다.

‘어, 우리 엄마 아빠 목소리다! 지금 내 바로 앞에 계신 건가!’

나는 숨을 죽였다. 다행히도 두 분은 테이블보를 들추지 않으시고 그대로 내 앞을 지나치셨다.

천 아래 작은 틈새로 엄마와 아빠의 구두 끝이 살짝 보였다.

‘다행이다.’

또다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 *

이후 우리는 무사히 들어왔던 테라스에 돌아왔다.

“휴우, 연회장에 계속 숨어 있다가는 들킬 뻔했어.”

세드릭이 잔뜩 질린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앨리스가 살짝 열린 테라스의 커튼 틈새를 불안하게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럼 이제 어디로 가야 해요?”

조금 전에 봤을 때, 니나이나는 여전히 가족들과 함께 연회장에 있었다.

그러니 아마 지금쯤 니나이나의 방은 비어 있지 않을까.

“……황녀 전하의 방으로 돌아가는 게 어떨까요?”

생각 끝에 조심스레 내가 말하자, 모두 그게 좋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좋아. 돌아가자.”

우리는 들어왔던 입구, 그러니까 테라스의 바깥쪽 벽을 살짝 밀어 비밀통로로 들어왔다.

번들거리는 회색빛의 벽돌이 은은하게 등불을 반사해 내부가 반짝거렸다.

“…….”

그런데 한 5분쯤 걸었을까.

문제가 생겼다. 가장 앞서가던 세드릭이 잠시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중얼거린 것이다.

“이, 이 길이 아니었던가?”

“뭐라고?”

“세드릭 님, 그게 대체 무슨 소리예요?”

“세상에.”

우리 넷은 부지런히 걷던 걸음을 멈추고 서로를 아연실색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보니, 확실히 우리가 연회장에 왔었던 길과는 미묘하게 달랐다.

‘세드릭 길치였어?’

어쩐지 아무런 고민도 없이 쭉쭉 앞장서 나가더라니.

너무 당당한 태도라 세드릭이 당연히 길을 아는 줄 알고 뒤따라 걸어갔던 우리였다.

물론 아무 생각 없이 세드릭을 믿고 쫓아간 우리도 잘못이 있긴 했지만.

“하아…….”

제이크가 골치 아프다는 듯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럼 여긴 어디죠?”

앨리스는 내 옷자락을 살짝 붙잡고 조심스레 물었다.

하지만 나도 몰랐기에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저도 이 길은 처음이라고요.

“아, 잠시만! 저기 문이 있는데?”

제 실수에 안절부절못하던 세드릭은 이내 주변을 둘러보더니, 살았다는 듯 외쳤다.

그에 우리는 세드릭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정말이었다. 아까 테라스로 향하는 문과 비슷한 문이 있었다.

“저기로 나가 보자.”

“……그런데 저기로 나가서 뭐가 나올 줄 알고요?”

나는 의심스럽게 중얼거렸다. 덥석 나가기에는 역시 미심쩍었다.

이곳은 넓디넓은 황궁. 저 통로가 웬 지하감옥의 악질 죄수의 방으로 연결되어 있을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흐음……. 일단 들어가 보고 아니면 다시 나오지 뭐.”

“헉.”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이자, 나는 그 무모하다시피 한 배짱에 그만 입을 쩍 벌렸다.

세드릭이 그런 날 보고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반응이 왜 그래?”

“아니, 세드릭 님이 너무 용감하셔서 그만.”

“……내가 좀 용감하긴 하지.”

세드릭이 잔뜩 의기양양해졌다.

그러고는 그 기세를 타고 곧바로 문을 향해 척척 걸어갔다.

“자, 일단 열어보자고.”

힘껏 밀자 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리고 그 안으로 들어갔는데.

다행히도 문 밖은 지하 감옥이나 펄펄 끓는 용광로 같은 곳은 아니었다. 좁은 환풍구로 이어져 있었는데 그곳을 통해 기어나오니 널따란 야외였다.

“우와. 풀밭인데요?”

우리는 안심하며 차례로 바깥을 향해 나갔다.

깜깜한 어둠과 은은하게 풍겨오는 마른 풀 냄새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여긴…… 폐정원 아니야?”

주변을 둘러보던 제이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나도 동의하는 바였다.

평범한 풀밭이 아니었다. 군데군데 조각상이나 분수대 등의 장식이 보였으니까.

하지만 관리를 잘 하지 않았는 듯 잡초가 듬성듬성하게 자라 있고, 마법으로 만든 조명등이 모두 꺼져 있었다.

확실히 폐정원이 맞는 듯했다.

조명 하나 없는 어두운 야외.

혼자였다면 혹시라도 주변에서 무언가가 나타날까 두려움에 떨었겠지만, 이상하게도 네 명이서 함께라 그런지 무섭지는 않았다.

“노랫소리가 들려요!”

주변을 둘러보던 앨리스가 이윽고 희미하게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작게 외쳤다.

그에 우리는 모두 침묵한 채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저기 옆 건물이, 우리가 아까 있었던 연회장인 모양인데?”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과연 빽빽하게 심어진 나무 담장 사이로 화려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웃음소리, 대화 소리도 은은하게 바람결을 타고 날아왔다.

“우와…….”

나도 모르게 저 멀리 연회장의 광경에 집중해 넋 놓고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는 거의 숨어 있기만 해서 미처 연회를 즐길 틈도 없었는데, 이렇게 멀리서 긴장을 풀고 노래를 들으니, 뭐랄까.

참 낭만적인 분위기였다.

해가 진 어두운 밤인데, 연회장의 불빛이 하늘에 별이 안 보일 정도로 환하고 아름답다.

이런 광경은 이곳에 환생한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나처럼 나무 틈새에 고개를 파묻고 연회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가, 나는 한숨과 함께 중얼거렸다.

“……나도 춤춰보고 싶다.”

그러자 갑자기 바로 옆에 서 있던 제이크가 내게로 손을 내밀었다.

“응?”

갑자기 웬 손?

영문을 몰라 멀뚱히 제이크를 바라보았다.

그랬더니 제이크가 살짝 쑥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나랑 같이 춤추면 되잖아, 미르.”

“……좋아!”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내겐 기꺼웠다.

곧바로 제이크가 내민 손을 잡고 가볍게 빙그르르 돌았다.

“제이크, 내 손 꽉 잡아줘. 놓지 마!”

“걱정하지 마. 절대로 놓지 않아.”

혹시라도 내 움직임 때문에 제이크의 손이 미끄러질까 봐 나는 신신당부했다.

그랬더니 제이크가 꽤나 믿음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

그게 조금 웃겨서, 나는 나지막하게 웃음소리를 내며 스텝을 밟았다.

예전에 어깨너머로 엄마 아빠가 춤추는 걸 본 적이 있었다.

그때의 기억을 희미하게 떠올리면서 나는 춤을 췄다.

“……그러고 보니 제이크.”

그러다가 문득 한 가지 이상한 점을 떠올렸다.

제이크가 이 춤을 출 줄 알았었던가?

“춤 배운 적 있어?”

“응.”

곧바로 제이크가 긍정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뭐? 정말?”

아니, 마법도 그렇고 제이크는 정말 내가 모르는 사이 이것저것 할 줄 아는 게 많아지는 것 같았다.

나만 게으르게 사는 걸까.

휴, 어쩐지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제이크가 조용히 말했다.

“나중에, 데뷔탕트를 치르게 되면 미르와 첫 춤을 추고 싶었어.”

“……!”

“그래서 얼마 전부터 선생님을 불러서 춤을 연습했거든.”

과연 제이크의 말대로, 연습을 꽤나 한 모양인지 춤 실력이 수준급이었다.

나는 신나게 꺄르륵 웃으며 춤을 췄다.

비록 연회장은 아니지만 노래도 들리고, 연회를 즐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 옆에서 누군가가 투덜댔다.

세드릭이었다.

“재밌냐? 너희만 추고.”

“맞아요, 에미르 님. 저랑도 춤춰 주세요.”

앨리스도 한마디 보탰다.

그에 내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 제이크가 대답했다. 여전히 내 손을 꼭 쥔 채로.

“그럼 두 분이서 추시면 되지 않나요?”

“……으윽!”

“그건 좀 별로…….”

하지만 어쩐지 세드릭과 앨리스의 반응이 떨떠름했다.

영 내키지 않아 하는 눈빛이었다.

‘왜 그러지? 아무리 그래도 둘이 매일같이 마차도 타고 다니는데. 설마 둘이 싸웠나?’

내가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리자, 그제야 세드릭과 앨리스는 무언가를 생각한 모양인지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으로 둘이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더니 어설프게나마 춤을 추는 듯했는데…….

“으아악! 너 어딜 밟는 거야? 아프잖아!”

“안 보여서 실수했어요. 그보다 세드릭 님이야말로 제 옷자락 밟지 마세요!”

어쩐지 세드릭과 앨리스는 맞지 않는 블록처럼 삐그덕거리고 있었다.

발을 밟았니, 옷을 밟았니 하면서 서로 투닥거렸다.

“하, 됐어. 그보다 이제 이제 나랑 춤춰, 에미르. 제이크랑은 많이 췄잖아?”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세드릭님? 에미르 님은 저랑 춤추기로 하셨거든요?”

“내가 먼저였어!”

게다가 이젠 또 나랑 춤추는 걸 가지고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재빨리 나서서 둘 사이를 중재했다.

“가위바위보 해서 이긴 사람이랑 먼저 춤추는 걸로 할게요.”

그렇게 세드릭과 앨리스는 가위바위보를 했다.

승리한 건 앨리스였다.

어쩐지 세드릭은 게임을 할 때마다 자주 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일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앨리스와 손을 마주 잡았다.

앨리스가 기쁜 듯 활짝 웃으며 내게 물었다.

“그런데 에미르 님, 너무 어둡지 않아요? 잘못하다가는 발에 걸려 넘어질 것 같아요. 그러니까 제가 조명을 좀 켜드릴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앨리스는 제 소맷자락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웬 가루 같았는데, 그걸 공중에 뿌리자 갑자기 가루가 공중에 둥둥 뜨며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나는 감탄했다.

“우와, 꼭 반딧불이 같아요!”

“……에이비시 님께서 주신 물건이에요. 요정의 가루라는데, 뿌리면 5분 정도 주변이 반짝반짝 빛나게 된대요!”

“뭐야, 이런 게 있으면 진작 꺼내지 그랬어? 내 발은 실컷 밟아놓고.”

세드릭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나와 앨리스는 천천히 춤을 추기 시작했다. 비록 어설픈 동작이었지만, 주변에서 빛나는 요정의 가루 덕분인지 분위기가 흥겨워졌다.

요정의 가루가 꼭 살아 있기라도 한 것처럼 자유롭게 움직이며 우리를 비춰주었다.

5분 후, 빛이 사르르 녹아내리듯이 사라지면서 우리의 춤은 끝났다.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세드릭이 내 손을 낚아채듯이 앨리스에게서 빼앗아갔다.

“자, 이제 내 차례지?”

“……세드릭 님은 참을성이 없으시네요.”

앨리스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한마디 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세드릭은 흥 콧방귀나 뀌었다. 그러더니 공연히 내게 핀잔을 던지는 게 아닌가.

“그런데 에미르, 너 왜 손이 이렇게 따뜻하냐?”

‘갑자기 웬?’

뜬금없는 물음에 나는 눈을 가늘게 좁혔다.

하지만 세드릭은 퍽 진지해 보였다.

정말로 신기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게 아닌가.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를 해주었다.

“흐음, 저야 뭐 혈액순환이 잘 되나 보죠. 그러는 소공자님은 손이 차가운데요?”

“아까 바닥에 엎드려 있어서 그래.”

“…….”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세드릭이 피식 웃었다.

“그런데 신기하네. 이렇게 손을 꼭 잡고 있으니까…… 내 손도 따뜻해졌어.”

“제 손에서 열을 빼앗아 가니까 그렇죠!”

내가 발끈하자, 세드릭이 장난기 어린 투로 물었다.

어두운데도 세드릭의 호박색 눈동자가 반짝이는 게 보였다.

“그럼 계속 뺏어도 돼?”

“……어휴, 맘대로 하세요. 맘대로.”

잠시 멈칫했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세드릭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하긴, 지금 좀 춥긴 하지.’

초여름이었지만, 해가 지고 조명조차 없는 풀밭에 있으려니 체온이 떨어져 추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내 열을 빼앗아가다니, 세드릭 나쁜 자식.

그때였다.

“방금 이쪽에서 무슨 소리 나지 않았습니까?”

“글쎄……. 한번 살펴봅세.”

“……!”

멀리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목소리에 우리는 동시에 흠칫했다.

아마도 황궁을 순찰 돌던 경비대원들인 모양이었다.

‘숨어야 해!’

아직 거리가 꽤 있었기에 다행히도 바로 들키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널찍하게 트여 있어서 저 코너를 돌면 바로 우리가 눈에 띌 게 분명했다.

‘어떡하지?’

다른 아이들도 당황한 눈빛을 한 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주변을 둘러보던 내 눈에 무언가가 포착되었다.

‘저건?’

바로 한쪽 구석에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나뭇가지였다.

나무를 다듬은 가지들을 모아둔 듯했다.

이파리들이 아직 싱싱한 걸 보니 잘라 놓은 지 얼마 안 된 것들이 분명했다.

“우리 모두 저걸 들고 덤불 뒤에 숨어요! 나뭇가지로 위장해요!”

내 주변에 서 있는 아이들에게 조그마한 목소리로 일러주었다.

그러자 다들 쪼르르 달려가 제 손바닥만 한 나뭇가지들을 하나씩 주워 들었다.

“난 이거!”

세드릭은 꼭 검같이 쭉 곧게 뻗은 긴 나뭇가지를 집더니 부리나케 덤불로 달려갔다.

앨리스는 나뭇잎이 많이 달린 작은 나뭇가지를 집었다.

망설이는 듯한 제이크에게 나는 나뭇가지를 하나 골라 건네주었다.

“고마워, 미르.”

제이크가 내게 고마워했다.

이후 하나씩 줄지어 나무 덤불 뒤에 숨고 나니, 그제야 두 명의 경비대원이 저편에서 터벅터벅 걸어왔다.

“무슨 소리가 났다고?”

“글쎄요, 사람인지 동물인지…… 바스락하고 움직이는 소리가 난 것 같은데요.”

“이쪽은 폐정원 아닌가. 침입자가 있을 만한 장소는 아닌데.”

“그렇겠죠, 대장?”

두 명의 대화를 듣자 하니 우리의 존재가 들킨 건 아닌 모양이었다.

나는 몸을 조금 더 둥글게 말았다.

그러던 중, 제이크가 있는 쪽에서 갑작스럽게 낙엽 밟는 소리가 났다.

바스락.

“……!”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경비대원들은 그 소음을 놓치지 않고 이쪽을 주목했다.

“방금 또 무슨 소리가……!”

“맞죠, 대장?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그들은 마력석으로 만들어진 손전등을 비추며 이쪽으로 천천히 다가왔다.

우리는 점점 더 초조해졌다.

들키면 어쩌지?

순간 나는 앨리스에게 에이비시 님을 소환하는 게 어떻겠냐고 물어봐야 하나 고민했다.

그사이, 어느새 손전등 빛은 우리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흠, 저기 나뭇가지가 유난히 위로 튀어나와 있는 듯한데 착각인가?”

둘 중 대장으로 보이는 남자가 작게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흡. 나는 순간 분위기에 맞지 않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그가 언급한 나뭇가지는 분명 아까 세드릭이 고른 유난히 긴 나뭇가지일 게 분명했다.

“음…… 아닌가?”

한 발짝 더 다가온 그들은 그림자에 가려진 데다 잘린 나뭇가지를 들고 수풀 뒤에 숨어 있는 우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그때, 또다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바로 근처에서 들리더니 무언가가 후다닥 달아났다.

순간 깜짝 놀라 내 뒷목엔 오소소 소름이 돋아났다.

“뭐지!”

경비대원들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는지 소리가 들리는 쪽을 향해 손전등을 비추었다. 그리고 드러난 도망자의 정체.

“찍찍?”

바로 다람쥐였다.

다람쥐가 갑작스레 제게 비친 스포트라이트에 당황한 듯 고개를 갸웃하다가 이내 저편으로 도망가 버렸다.

“에이, 뭐야.”

“……다람쥐였군요.”

다소 김빠지는 침입자의 정체에, 경비대원들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갑시다, 대장.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했네요.”

“그래, 그러지.”

이윽고 그들은 우리가 숨어 있는 수풀을 지나쳐 저편으로 걸어갔다.

두 사람의 그림자마저도 사라질 정도로 시간이 지나자, 그제야 우리는 하나둘씩 수풀에서 나왔다.

“후우…… 하마터면 들킬 뻔했잖아.”

세드릭이 식은땀을 닦으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제이크가 말했다.

“이제 이곳을 벗어나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길을 찾아가죠?”

“일단 난 방법을 모르겠어.”

그에 세드릭이 답지 않게 침울해진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곧바로 앨리스가 방법을 제시했다.

“저한테 좋은 생각이 있어요.”

“뭔데?”

“제가 요정님을 불러낼게요. 그분께 우리를 원하는 장소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 봐요.”

세드릭은 ‘뭐라는 거지?’라고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고, 제이크는 의아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앨리스?”

나 역시 당황하긴 마찬가지였다.

앨리스는 나 말고 다른 사람에겐 요정 소환사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렇게 요정에 대한 걸 말하다니, 세드릭과 제이크에게도 비밀을 밝히려는 것일까?

그런 내 예상은 맞았다.

“……다들 제가 요정 소환사가 되지 못했다고 알고 있겠지만, 사실 얼마 전에 요정님을 소환했어요.”

“뭐어어? 그게 정말이야?”

“요정을요?”

세드릭은 눈도 커다랗게 뜨고 입도 쩍 벌린 채 뜨악하며 놀랐다.

제이크 역시 답지 않게 놀라워하는 표정이었다.

“네. 사실 제 힘만으로 소환한 건 아니고, 에미르 님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그 말에 갑작스레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쏠렸다.

나는 당황해 멋쩍은 웃음을 흘렸다.

“아니…… 내가 한 게 뭐 대단한 거라고요. 하하. 그냥 열매를 가져다준 것뿐인데요, 뭘.”

“아니에요, 전혀요! 저는 에미르 님 덕분에 그날 이후로 완전히 달라졌는걸요.”

하지만 앨리스가 내 말을 극구 부정하며, 두 손을 모은 채로 초롱초롱한 고마움의 눈빛을 보냈다.

동시에 세드릭이 내 말에서 궁금한 점이 생긴 듯, 질문했다.

“열매를 가져다줘? 무슨 열매?”

“……그게 말이죠. 음, 그러니까 흔히들 저주의 열매라고 부르는 그거 있잖아요. 그거예요.”

나는 이걸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얼버무려 대답했다.

그러자 세드릭이 경악했다.

“뭐? 저어주? 저주 열매? 설마 내가 아는 그걸 줬다고?”

“……음, 아마 세드릭 님이 아는 그게 맞을 거예요. 엄청 흉측하게 생긴 그거요.”

“히익.”

세드릭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살짝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금 질문했다.

“……그, 그럼 그걸로 대체 뭘 했길래 요정을 소환했다는 거야? 열매를 앞에 두고 마법진이라도 그렸어? 설마 아니겠지만 즙이라도 내서 마신 건…… 우웩.”

상상만 해도 토할 것 같은지 세드릭이 헛구역질했다.

때마침 앨리스가 대답했다.

“즙은 아니고, 통째로 씹어먹었어요.”

“……!”

“괜찮아요, 아예 못 먹을 맛은 아니었거든요. 좀 쓰긴 했지만 에미르 님이 주신 초콜릿을 먹으니 좋아졌어요.”

그렇게 말하며 앨리스는 ‘헤헷’ 하고 날 보며 웃었다.

어쩐지 별거 아닌 것처럼 여기는 듯한 앨리스의 태도에, 떨떠름해하던 세드릭도 조금씩 호기심이 동하는 모양이었다.

“……그걸 먹으면 나도 소환사가 될 수 있을까?”

“아뇨! 절대!”

나는 깜짝 놀라 튀어나가듯 세드릭의 앞을 가로막고 작게 외쳤다.

갑작스레 바로 앞에 나타난 내 얼굴에 세드릭이 움찔했다.

“깜짝이야. 난 왜 안 되는데?”

“그야, 그 열매는 요정 소환사의 핏줄을 이은 사람이 먹어야만 효과가 나타나니까요! 세드릭 님이 먹으면 괜히 쓰기만 할걸요.”

“쳇, 알겠다고. 젠장, 혹시라도 먹으면 힘이 불끈 솟을까 해서 물어본 것뿐이야.”

아니, 7살이면서 벌써 보양식을 탐내다니!

세드릭의 변명에서 진심 어린 아쉬움이 느껴지는 듯했다.

그때, 앨리스가 조심스레 모두에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세드릭 님, 제이크 님. 제가 요정을 소환했다는 건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주세요. 저희 가족에게도요. 부탁드려요.”

간절한 목소리였다.

나는 앨리스의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다들 앨리스 말대로 해주세요. 우리는 모두 같은 유치원 다니는 친우들이니까, 친우의 의리를 지켜주셔야 하는 거잖아요.”

의리, 그리고 친우!

그 두 단어는 세드릭의 무언가를 자극한 모양이었다.

곧 세드릭이 비장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친우로서 의리는 지켜줘야지. 약속한다.”

“자, 약속이요.”

내가 앨리스와 세드릭의 손을 끌어당겨 맞잡게 해 약속을 도와주었다.

제이크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비밀은 지켜요.”

“감사해요, 제이크 님.”

이윽고 비밀 엄수 약속이 끝나고, 앨리스가 요정을 불러내었다.

“우와아!”

“……!”

갑자기 공중에 팟 하고 빛이 나타나자, 눈부신 듯 잠시 눈을 깜빡이던 세드릭과 제이크는 이윽고 신기한 표정으로 에이비시를 응시했다.

“무슨 일로 불렀느냐? 아, 이곳은 설마 연회가 열린다는 궁인 것인가?”

에이비시는 주변을 휙휙 둘러보더니, 궁에 딸린 정원에 왜 사람이 없냐며 꿍얼거렸다.

혼잣말의 내용은 대략 ‘우리 앨리스를 이런 황량한 곳에 있게 하다니!’인 것 같았다. 무슨 손녀 바보 할아버지 같았다.

“요정왕님, 저희가 길을 잃어버렸어요. 길을 좀 찾아주세요…….”

앨리스는 불쌍한 목소리로 에이비시에게 간청했다.

그러자 금세 에이비시의 얼굴이 연민으로 물들었다.

“어쩌다가 길을 잃었을꼬? 그래, 이 몸이 길을 찾아줘야지. 목적지가 어디냐?”

“목적지? 그리고 보니 우리 어디로 가려고 했었죠?”

앨리스가 미처 생각 못 했다는 듯 나를 보고 물었다.

“음, 황녀님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었던 것 같아요.”

“네, 요정왕님. 에미르 님 말대로예요. 저희를 황녀님 방으로 보내주세요.”

“오냐.”

에이비시가 대답함과 동시에, 우리의 몸이 공중으로 두둥실 날아올랐다.

그리고 서서히 세상과 동화되듯이, 손끝부터 몸이 투명해져서 안 보이게 되었다.

“어어?”

세드릭이 기겁하며 팔다리를 휘적거렸다.

제이크는 요즈음 공중부양 마법을 연습하고 있다더니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나였다.

그만 신고 있던 신발 한 짝을 떨어뜨려 버렸으니까!

“앗, 내 신발!”

내 아찔한 외침을 듣고, 막 무언가 주문을 외려던 에이비시가 당황했다.

“뭐라고? 신발을 떨어뜨렸어?”

“네!”

“그럼 어서 가서 주워와야지! 자, 갔다 오거라!”

그렇게 말하며 에이비시는 나만 다시 땅으로 내려보냈다.

아니, 정확히는 그래야 했다.

급하게 행동한 탓에 나 대신 제이크를 대신 내려보내 버렸지만.

“응?”

갑자기 급속도로 하강해 땅에 발이 닿은 제이크가 영문을 모르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이윽고 에이비시가 제 실수를 깨달은 모양인지 이마를 짚었다.

“에구구, 나이를 먹어서 그런지 실수가 잦군그래.”

그러고는 다시 제이크 말고 나를 내리려는데, 제이크가 고개를 젓더니 이내 손을 뻗어 무언가를 집었다.

바로 내 구두 한 짝이었다.

그러고는 다시금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아마 요정님의 힘이 아닌, 제이크의 마법 같았다.

“자, 미르. 잃어버린 신발을 신겨줄게.”

그렇게 말하면서, 휑한 내 한쪽 발에 구두를 신겨주는 제이크였다.

그 순간 어쩐지 나는 잃어버린 구두를 되찾은 신데렐라가 된 것 같았다.

이윽고 에이비시가 퍽 온화해진 목소리로 우리에게 질문했다.

“그럼, 이제 신발도 찾았으니 가 볼까?”

“좋아요!”

우리는 완전히 투명해진 몸으로 팔을 세차게 흔들며 외쳤다.

잠시 어질어질하도록 세상이 빙빙 도는 느낌이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어지러움이 사라지고 장소가 바뀐 듯 감긴 눈앞이 환해지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푹신한 느낌이 등에 전해졌다. 침대나 소파 같은 곳에 떨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눈을 슬그머니 떠 주변을 확인했다. 아까 봤었던 익숙한 장소였다.

“여긴……!”

“황녀 전하 방이에요!”

“허허, 맞게 온 모양이구나.”

그랬다. 우리가 이동한 곳은 다름 아닌 니나이나의 침실.

그것도 널따란 침대 위였다. 나는 정신을 번쩍 차렸다.

‘이런, 잘못하다가는 흙 묻은 신발이 침대에 닿겠는데?’

나는 벌떡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때였다. 문이 벌컥 열렸다. 미처 숨을 새도 없이.

그대로 쩡 하고 얼음처럼 굳어버리는데, 다행히도 들어온 사람은 시녀나 시종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오라버니, 정말로 못 봤어? 분명 연회장에 꼭꼭 숨어 있겠다고 약속했는데 어딜 갔는지 몰라. 어, 어라? 너희 왜 여기 있니!”

바로 니나이나와 니콜라스였다.

니나이나는 몹시 걱정스러운 투로 니콜라스를 붙잡고 이야기하다가, 방 한편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우리를 보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니나이나는 한달음에 우리에게 달려와 한 명씩 안부를 확인하고서 외쳤다.

“걱정했잖아! 혹시라도 연회에 숨어든 타국의 간자들이나 경비병들에게 잡혀간 줄 알고. 휴우……. 아니면 길이라도 잃어버렸나 해서 내 기사들에게 몰래 황궁 안을 수색하라고 명령 내릴 뻔했어.”

‘엇, 길 잃어버린 것 맞는데.’

나는 뜨끔했다.

하지만 미처 티 낼 새도 없이, 니나이나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건 뭐지……?”

바로 우리가 누워 있던 침대 위에 흩뿌려진 반짝거리는 가루였다.

당연하게도 그 가루의 정체는 요정의 가루였다. 니나이나는 의아한 듯 고개를 연신 갸웃했다.

“흙도…… 그렇다고 보석도 아닌 게 대체 왜 이리 반짝거리지? 혹시 암살자가 뿌려놓은 독인가?”

“무엄하구나, 인간 아이! 독이라니! 그것은 요정의 가루이니라!”

정확히 니나이나가 ‘독인가?’라는 단어를 내뱉자마자 갑자기 어디선가 뿅 하고 에이비시가 나타났다.

뭐야, 다시 요정의 섬으로 돌아간 게 아니었어?

“……!”

그리고 니나이나는 바로 제 머리께에서 쩌렁쩌렁 들려오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크게 떴다.

그러고는 금방이라도 엉덩방아를 찧을 듯 뒤로 급하게 물러서며 눈을 질끈 감았다.

“으아…… 악?”

비명을 지르려 했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는지 다시금 눈을 떴다.

그런 반응에 민망해진 듯한 에이비시가 발끈했다.

“아니, 무슨 유령을 본 것처럼 놀랄 필요는 없잖느냐?”

“누, 누군데 감히 내 방에…….”

니나이나는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에이비시의 날개를 툭 하고 짚었다.

그러자 에이비시가 도리어 화냈다.

“날개를 건드리지 말거라! 요정에게 날개가 얼마나 예민하고 소중한 부위인데!”

“요, 정?”

니나이나가 멍하니 우뚝 멈춰 섰다.

물론, 저 뒤에 서 있던 니콜라스 역시 마찬가지였다.

앨리스와 나는 또다시 둘에게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다행히도 니나이나와 니콜라스도 앨리스의 비밀을 함구해 주겠다고 굳게 약속해 주었다.

“어쩐지, 그래서 이 방에 감쪽같이 돌아와 있었던 거로구나.”

니나이나는 우리를 찾기 위해 몸이 안 좋다는 핑계를 대고 일찍 연회에서 퇴장했고, 니콜라스는 그런 니나이나를 방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같이 퇴장했던 모양이었다.

그 이후 아쉽게도 우리는 이만 황궁에서 나오게 되었다.

연회를 제대로 즐기기는 실패했다.

아무래도 우리가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다 보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겠지만.

“다음에는 정식으로 초대장을 보내줄게. 한 달 뒤에 우리의 생일 연회가 열릴 예정이거든.”

니나이나는 서운해하지 말라며 우리를 토닥였다.

하지만 딱히 서운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오히려, 몰래 숨어서 연회를 구경하고 나름 춤도 추고 했던 게 스릴 있는 추억으로 기억에 남게 되었다.

우리는 처음에 왔던 것처럼 개구멍을 통해 나가 마차를 탔다.

그리고 제이크의 집에서 내린 나는 그곳에 있던 우리 가문의 마차로 갈아타고 후작저로 돌아갔다.

‘재밌는 황궁 연회였어.’

만족스럽게 씨익 웃었다.

하지만 그땐 미처 알지 못했다.

오늘의 일로 인해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게 될지!

* * *           다*임*공*유*금*지

그날은 우리가 황궁 연회에 다녀온 지 정확히 2주가 지난 어느 날이었다.

어느덧 초여름이 지나고 진짜 여름이 와 공기가 꽤나 후덥지근했다.

하지만 유치원 안은 냉기를 뿜어주는 마법석 덕분에 가을 날씨처럼 시원하기만 했다.

‘창밖에서 여름 소리가 들려.’

매미가 우는 소리와 공기가 익어서 푹푹 찌는 듯한 소리.

비록 시원한 실내에 있지만 창밖을 보는 것만으로도 내 귀에 그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멍하니 창가에 턱을 괴고 앉아 있다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오늘의 수업은 제국 수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중에서도 수도의 주요 상업시설이 어디에 있는지에 대한 것이었다.

물론 아직 우리가 꼬꼬마이기 때문에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다.

“자, 이 그림을 보시겠어요? 이 그림이 어디인지 아시는 분이 계신가요?”

선생님이 스케치북에 그려진 그림을 들어 보였다.

천막과 상점들, 그리고 노점상 거리. 와글거리는 손님들.

음, 정확한 명칭은 모르지만 아무래도 저건 시장 같은데?

내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옆에 앉아 있던 니콜라스가 손을 들어 대답했다.

“수도 정중앙, 엘로바 요일시장이 아닌가?”

“바로 맞추셨습니다, 전하.”

역시 똑똑이 니콜라스.

나는 고개를 작게 주억거렸다.

이후 선생님의 설명이 시작되었고, 나는 눈을 부릅뜨고서 수업에 집중했다.

그런데 유독 아까부터 딴생각에 푹 빠져 있는 것 같은 사람이 있었다.

‘세드릭, 왜 저렇게 히죽대며 웃는 건데?’

시선은 스케치북이나 선생님이 아닌 허공에 가 있었고, 입꼬리는 제멋대로 올라가 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세드릭의 행동에 고개를 갸웃대다가 다시 수업에 집중했다.

세드릭이 어째서 그렇게 의미심장하게 웃었는지는 수업이 끝난 오후가 되어서야 알게 되었다.

* * *

“그러니까…… 같이 시장에 가자고요? 오늘 배웠던 그 엘로바 요일시장에요?”

세드릭이 내게, 아니, 나뿐만 아니라 다른 아이들까지 전부 같이 시장에 가지 않겠느냐고 제안을 한 것이다.

세드릭이 잔뜩 들뜬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재밌지 않겠어?”

“그냥 구경만 하려고 가는 건가요?”

내 물음에, 어쩐지 세드릭은 살짝 뜨끔한 표정이었지만 표정관리를 했다.

“……그, 그럴 리가 있겠냐? 당연히 재미있어 보여서…… 도 있지만! 거기서 사야 할 물건이 있어서 그러는 거지.”

“사야 할 물건이요?”

하지만 웬만한 물건들은 다 시중인들을 통해 구할 수 있지 않나?

내가 의아한 시선을 보내자 세드릭이 변명했다.

“물론 나도 알지. 굳이 시장까지 갈 필요 없는 거. 하지만 말이야, 가끔은 가문에 비밀로 하고 사야 할 물건이 있단 말씀.”

“비밀로 하고 살 만큼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에요?”

내 물음에 세드릭이 살짝 수줍게 웃었다.

‘아니, 세드릭이 저렇게 웃을 수도 있었어?’

처음 보는 모습에 당황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할 때, 세드릭이 대답했다.

“그래. 이건 진짜로 비밀인데, 우리 큰형님 생일 선물을 살 거거든.”

“……음, 그거라면 확실히.”

나는 납득했다.

아무래도 생일 선물을 사려면 모두에게 비밀로 하고 사는 편이 서프라이즈로 좋잖아?

‘아니, 그런데 잠깐.’

뒤늦게서야 나는 세드릭이 한 말을 되새겨 보고 깜짝 놀랐다.

“그런데, 큰형님이라면 설마 세이든 님? 세이든 님이 곧 생일이셨어요?”

“……그래, 맞아.”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어쩐지 표정이 조금 굳어 있었다.

‘왜 저러는 거지?’

의아했다. 그리고 그 답을 세드릭이 말해주었다.

“너 설마 우리 큰형님 생일에도 파티를 해주러 우리 저택으로 올 생각은 아니겠지?”

“……음, 글쎄요. 세드릭 님이나 세이든 님이 초대를 해주신다면 갈지도요?”

내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세드릭이 갑자기 벌떡 일어서며 내게 엄포를 놓았다.

“절대로 오지 마.”

“네?”

“초대 안 할 거니까 오지 말라고.”

“……?”

갑자기 왜 이래?

나는 세드릭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당황한 나머지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세드릭이 말을 이었다.

“넌 내 친구지, 우리 큰형님 친구가 아니잖아? 그러니까 내 생일만 축하해 주는 게 맞아.”

“……!”

아니, 그게 무슨 황당한 말이란 말인가.

꼭 친구여야만 생일 축하를 할 수 있다는 법은 없잖아!

“물론 큰형님이나 작은형님이 너도 초대하라고 내게 말할지도 모르지. 어쩌면 나 몰래 초대장을 보낼지도 몰라.”

“……예에.”

“그렇지만 잊지 마. 넌 무조건 거절해야 해.”

“으음. 생각 좀 해보고요…….”

얼버무린 말에 세드릭이 어이없다는 듯 대꾸했다.

“생각할 게 뭐 있어? 초대장은 태워 버려. 그리고 오지 마.”

“…….”

이쯤 되면 조금 의문이 들 법도 하다.

세드릭 사실 날 싫어했던 것일까?

하지만 또 말하는 걸 보면 그건 아닌 것 같고.

헛기침하며 은근슬쩍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흠, 뭐 정 우리 가문에서 열리는 생일 파티에 참석하고 싶다면 내년 내 생일에 오면 되잖아? 그땐 내가 초대장도 보내줄게.”

“초대장은 태워버리라면서요?”

내 뻔뻔한 물음에 세드릭이 버럭 화냈다.

“태워버리다니 미쳤어? 내 초대장은 당연히 예외지.”

“흥.”

어이없는 논리에 나는 콧방귀를 뀌었다.

그게 말이야 방귀야? 제 것만 예외로 해달라니 너무 심보가 고약했다.

“아무튼 뭐, 알겠어요. 세이든 님 생일 선물을 사러 가는 거라면 저도 따라갈게요.”

“그래, 좋아.”

세드릭이 그제야 마음에 든다는 얼굴을 했다.

그때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그럼 우리끼리만 시장에 가는 거예요?”

“당연하지.”

“호위기사도 없이?”

뭐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듯 도리어 세드릭이 어이없어했다.

“내가 있는데 뭘 걱정해? 내가 바로 기사잖아.”

“네에?”

나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랬더니 세드릭이 조금 상처받았다는 얼굴을 했다.

“……내가, 못 미덥냐?”

“……솔직히 말해도 돼요?”

“…….”

내 물음에 세드릭은 침묵했지만, 결국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좀 많이 믿음이 안 가요.”

한 십 년 후 미래에는 아니겠지만 지금 당장은 좀 못 미더운 게 사실이었다.

‘실력보다는 저 덤벙대고 발끈하는 성격 때문에 못 미더운 게 더 크지만 말이야.’

아니, 사실인 걸 뭐 어쩌라고.

“커헉…….”

그랬더니 세드릭이 털썩 주저앉으면서 외마디 신음을 흘렸다.

솔직한 대답이 꽤나 상처였나 보다. 기사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라도 났을까?

“그, 너무 상심하진 마시고요. 아무래도 우린 좀 어리니까요. 아무리 세드릭 님이 짱짱 세도, 아직 보호자가 필요한 나이라고 생각해요.”

“안 어린데. 7살이나 먹었는데.”

‘어유, 똥고집.’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살짝 진중한 말투로 물었다.

“만약 우리가 다 같이 시장에 갔어요. 그런데 거기서 아주 나쁜 놈을 만난 거예요. 그러니까 이를테면 납치범 같은? 우리 같은 돈 많은 귀족 자제들을 노리는 그런 범죄자요. 그렇게 되면 어떡해요?”

“뭘 어떡하긴 어떡해. 내 허리춤에 있는 롱소드를 꺼내서 그 잡놈을 썰면 되는 일 아냐?”

“음…….”

“설마 내가 그런 범죄자도 못 써는 겁쟁이 기사로 보이는 거냐?”

어쩐지 틀린 말은 아닌데 왜 이렇게 찜찜하지.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세드릭의 시선을 회피했다. 그랬더니 제가 이긴 줄 아는지, 세드릭이 제 주장에 근거를 추가했다.

“그리고 나만 있는 것도 아니지. 당장 제이크 공자만 해도 뛰어난 마법사잖아. 앨리스도 그 뭐냐, 소환할 수 있는 요정이 있고.”

“으음, 그래도 뭔가 좀…….”

“그렇게 안 봤는데 에미르, 너 꽤 겁쟁이구나?”

세드릭이 시비 걸기 전략을 사용하려는 모양이었다.

이것 참 어째야 해?

아무래도 세드릭이 얼마 전 황궁에서 우리끼리 숨어서 놀았던 것이 아주 감명 깊은 기억으로 남은 모양이었다.

물론 그땐 나도 재밌었지만. 휴.

그때였다. 우리 둘의 대화에 갑작스레 누군가가 끼어들었다. 제이크였다.

“미르, 너무 걱정하지 마.”

“……?”

제이크가 환하게 미소 지으면서 말을 이었다.

“나한테 좋은 방법이 있거든.”

“오오! 역시 마법사 제이크 소공자. 그 방법이 뭔데? 어서 말해봐.”

세드릭의 재촉에, 제이크가 하하 웃었다.

그러더니 우리만 들을 수 있도록 작게 속닥거렸다.

“그건 바로…… 예요.”

“……!”

“아주 좋은 방법이야!”

* * *

그 방법이 뭐였냐 하면.

“이게 바로 그 어린이를 잠깐 어른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아티팩트라 이거지?”

“맞아요.”

“우와, 신기하다.”

“어떻게 이런 물건이 있을 수 있지?”

바로 아티팩트의 도움을 구하는 것이었다.

제이크가 말하길, 마침 실험을 마친 아티팩트가 여러 개 만들어져 있어서 가져와 봤다고 한다.

게다가 몸에 지니기 좋은 팔찌 형태였다.

“딱 반나절 동안만 효과가 있으니까 너무 오랫동안 시장에 있으면 안 돼요.”

제이크가 주의사항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세드릭이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걱정 마. 큰형님께 드릴 선물만 사고 바로 돌아갈 테니까.”

하지만 벌써 잔뜩 들뜬 모습인데, 과연 그 약속을 지킬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다.

지금 우리의 모습이 어떠냐면, 다들 각자 평소에 비해 단출하고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 차림을 하고 있었다.

니콜라스는 흰 셔츠에 검은 바지, 니나이나는 어디서 구했는지 아카데미 학생들이 입을 법한 진회색 드레스를 착용한 채였다.

“저는 이 옷으로도 충분할 것 같아요.”

앨리스는 평소에 늘 입던 베이지색 옷을 입고 있었다.

제이크는 테이온 공작저의 꼬맹이 마구간지기가 입고 있던 옷을 빌려 입은 모양이었다.

세드릭은 상대적으로 조금 튀었다.

귀족이 아닌 평민 기사 종자들이 입을 법한 제복 차림이었으니까.

“난 언제 어디서나 기사여야만 한다고.”

세드릭이 저렇게 말하며 거들먹거렸다. 옆구리엔 튼튼해 보이는 검과 검집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나는…….

“크하하하! 에미르 너, 정말로 이 옷을 입고 다닐 작정인 거야?”

“하녀복이 뭐 어때서요…….”

세드릭의 폭소에 괜히 의기소침해진 나는 목소리를 작게 냈다.

그랬다. 내가 입고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새런 후작저의 하녀들이 입는 정복이었다.

몰래 고용인 빨래터에 잠입해 잘 빨아 건조된 하녀복 중 하나를 챙겨왔다.

물론 오늘 외출이 끝나면 곧바로 제자리에 돌려놓을 생각이었다.

“하녀복이 문제가 아냐. 엄청나게 커서 땅에 다 끌리잖아! 크하하!”

“…….”

“그 소매는 대체 어쩔래? 손을 뺄 수는 있겠어?”

그랬다. 사실 진짜 문제는 하녀복을 입었다는 건 아니었다.

가장 작은 사이즈를 골랐음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턱없이 컸다는 게 문제였다.

‘키 언제 커…….’

어쩐지 우울해졌다. 우유나 생선을 좀 더 많이 먹을 걸 그랬나?

그래도 편식은 잘 안 하고 살았는데. 민트맛을 제외하면…….

“괜찮아, 미르. 어차피 이 아티팩트를 쓰면 옷 사이즈는 맞춤으로 바뀌거든.”

“앗, 그게 정말이야? 다행이다.”

하지만 보다 못해 해답을 말해준 제이크 덕분에 나는 근심 걱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자, 이제 모두 아티팩트를 써보자.”

“그래!”

“좋아요.”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아티팩트를 팔에 찼다.

직후 무언가 변하는 느낌이 들었다. 내 몸 자체가 흔들리는 기분.

그리고 잠시 후 우리 모두 정말로 어른이 되어 있었다!

기본적으로 아티팩트가 만들어주는 성인의 모습은, 착용자의 미래 모습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했다.

정확히는 한 20대 초반쯤의 몸을.

“우와……!”

일단 나부터가 깜짝 놀라 탄성을 질렀다.

훌쩍 높아진 눈높이부터, 내 몸에 딱 맞아진 하녀복이 생소했다.

지금 우리가 있는 곳은 시장이 열리는 근처 풀숲이었는데, 흐르는 시냇물 줄기로 다가가 슬쩍 모습을 비춰보니 내 얼굴이 보였다.

“내가 스무살쯤 되면 이렇게 생기게 되는 걸까……?”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수면에 대고 이것저것 다양한 표정을 지어보았다.

익살스러운 얼굴, 찡그린 얼굴, 웃는 얼굴…….

“엄청 신기해.”

한편 니콜라스와 니나이나는 서로를 응시하며 재밌다고 웃고 있었다.

“오라버니 키 커졌다. 내 호위기사들보다 더 큰 것 같은데?”

“너도 만만찮다. 니나이나. 그런데 얼굴은 똑같아.”

아무래도 두 남매는 황실의 핏줄을 이은 만큼 꽤나 키가 큰 모양이었다. 물론 그 둘만 그런 건 아니었지만.

“오오, 나 어른이 되면 이렇게 생기게 되는 건가! 멋진 기사야!”

세드릭은 제 모습을 시냇물에 비춰보며 스스로 자아도취에 빠진 듯했다.

하긴 내가 봐도 좀 많이 멋지긴 했다.

떡 벌어진 어깨와 웬만한 낮은 집 천장들은 다 뚫어버릴 것 같은 큰 키라니. 제복과 검이 참 잘 어울렸다.

그리고 앨리스는 뭔가 달라진 제 모습이 어색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내게 다가와 물었다.

“에미르 님, 저 이상해요?”

“아뇨, 전혀요.”

나는 단칼에 고개를 저었다.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오히려 7살의 앨리스를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근사해진 모습이었다.

하긴 원작에서 엄청난 미모를 자랑하는 세계 제일미 여주인공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무심코 고개를 돌린 나는, 순간 그대로 멈춰버렸다.

“미르?”

그쪽에 있던 건 바로 제이크였다.

제이크가 우두커니 서 있는 내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나는 미처 대답하지 못하고 멍하니 제이크의 얼굴만을 바라보았다.

‘말도 안 돼. 제이크가 20살이 넘으면 저렇게 생기게 될 거라고? 진짜로 이건 반칙이야!’

그도 그럴 게 성인의 모습을 한 제이크는 엄청난 미남이었다.

내 생각으로는, 아마 남주인 니콜라스나 서브남인 세드릭보다도 더.

‘물론 어렸을 때도 비슷하게 생기긴 했지만 이렇게 자랄 줄은 몰랐다고!’

보통 소설에서 엑스트라나 조연의 외모는 주연들보다 조금 덜 튀게 설정되고는 한다.

하지만 어쩐지 내가 빙의한 이 소설은 밸런스의 패치가 제대로 되지 않은 듯 보였다.

설마 제이크가 내 오랜 소꿉친구라서 눈에 콩깍지가 낀 걸까?

‘그건 아냐!’

나는 내 의심을 곧바로 단칼에 부정했다.

하지만 그때, 계속해서 말이 없는 나를 이상하게 여긴 제이크가 다가왔다.

“미르, 무슨 생각해?”

“……제이크 네가 새삼 대단해 보여서.”

나는 이토록 엉성(?)하게 생겼는데 다들 엄청난 생김새를 갖고 있다.

어째서인지 억울해지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대단하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미르?”

“응?”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제이크가 싱긋 웃었다.

“내 눈엔 네가 언제나 제일 멋지고 대단한데.”

“……고, 고마워.”

“사실 오늘 이 아티팩트를 쓰기로 한 건, 네가 어른이 된 모습을 조금 더 일찍 보고 싶어서였어.”

“……!”

제이크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궁금하기도 했어.”

“응? 뭐가?”

“전에 내가 몇 번 이 아티팩트로 어른으로 변신해 봤는데, 그때마다 정말 궁금했거든. 어른이 된 내 모습을 미르가 좋아해 줄지.”

문득 느꼈다. 외견은 조금 달라졌지만 저렇게 고민하는 제이크의 표정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것을.

그 사실을 알고 나자 문득 웃음이 나왔다.

“왜, 왜 웃어, 미르? 설마 지금의 내가 마음에 안 들어?”

내 갑작스러운 웃음에 당황한 제이크를 보고 있으니 웃음이 또 연속으로 터져 나왔다.

가까스로 진정한 나는 대답했다.

“아냐, 그런 게 아니야.”

“그러면?”

“음, 제이 너는 네 모습이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겠지? 나도 처음엔 그렇게 여겼는데, 계속 뚫어져라 보다 보니까 원래 내가 알고 있던 네 표정이 그대로 나오는 거 있지. 그래서 신기하고 좋았어.”

내 말에 점점 제이크의 얼굴이 화색을 띠어가는 게 보였다.

제이크가 확인하듯이 내게 물었다.

“좋았다고?”

“응. 나는 지금의 네 모습도, 원래 네 모습도 정말 맘에 들어.”

그렇게 말하면서 내가 활짝 웃자, 그제야 제이크도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때, 세드릭이 모두를 향해 외쳤다.

“자, 자. 이제 시장에 가자고! 계속 이렇게 시간을 보내다가는 금세 반나절이 다 가버리겠어.”

“그래, 어서 가자.”

“서두르자.”

우리는 재빨리 옷매무새를 고치고 시장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 *

시끌벅적한 시장의 풍경에 우리는 눈을 뗄 새가 없었다.

나야 뭐 전생에서 시장을 많이 가 봤으니 덜했지만, 아무래도 귀족과 황족으로 자라 저택과 그 주변에서만 지내왔을 다른 아이들은 정말로 눈이 돌아가고 있었다.

“……세상엔 참 신기한 게 많네.”

평소 웬만한 거에는 눈 깜짝하지 않던 니콜라스도 주변을 휙휙 둘러보며 혼잣말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책으로 보고 다른 이의 입에서 듣기만 하던 것과는 달리, 실제로 걷고 보니 감회가 새로운 모양이었다.

“에미르 님! 저거 보세요! 해바라기 모양 사탕을 팔아요!”

그리고 앨리스는 유독 다른 물건보다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간식들에 관심이 많았다.

“앨리스, 혹시 저 사탕 먹고 싶은 거예요?”

“으음…….”

내 질문에 앨리스가 고민하는 듯 멈춰서 침음을 흘렸다.

아무래도 먹고 싶은 모양인데 내가 사줘야겠다!

‘가져온 용돈이 얼마였더라?’

가죽 주머니 속 돈이 얼마나 들어 있을지 가늠해 보았다.

딱 소매치기에게 털리지 않고 잃어버리지 않을 정도로만 적당히 가져왔다.

금화는 혹시 모르니 다섯 개 정도만, 나머지는 은화 열 개와 동화 열다섯 개였다.

그러니 사탕 하나쯤 사는 건 일도 아니었다.

“앨리스, 고민하지 말아요. 내가 저 사탕 사줄게요!”

“아녜요, 에미르 님! 오늘은 제가 사드릴게요. 저도 용돈을 가져왔거든요. 제가 고민했던 건 6명의 몫을 각자 한 개씩만 사 드려야 할지, 아니면 맛별로 각자 세 개씩 사 드려야 할지 고민한 것이었어요.”

“……!”

앨리스가 손사래 치며 슬쩍 제 옷에 보이지 않도록 찬 돈주머니를 가리켰다.

아까는 가려져 있어서 못 봤는데 정말로 반짝이는 금빛의 무언가가 들어 있었다!

“소매치기 당할까 봐 숨겨놨어요. 요정왕님이 ‘친구들이랑 놀려면 돈이 필요하지 않겠니’ 하면서 용돈을 주셨거든요. 그런데 너무 많아서…… 손에 들고다니다가는 잃어버릴 것 같았어요.”

과연 앨리스의 말대로였다.

하지만 좀 특별한 점이 있었다.

바로 주머니에 든 것의 정체가 은화나 동화, 심지어 금화도 아닌 무려 작은 순금 덩어리들이었다는 점이다.

‘아니, 잠깐. 순금 덩어리는 돈으로 사용하기 번거롭다고!’

하지만 이내 나는 당황했다.

저 덩어리 하나는 보통의 순금에 다른 금속을 섞어 만든 금화보다도 가치가 클 게 분명했다.

당연히 이런 소소한 개인 물품을 파는 시장에서 쓰기엔 알맞지 않은 화폐였다.

“아니에요, 앨리스. 그 금으로는 물건을 사는 게 어려워요.”

“네? 분명 에이비시 님이 이걸 돈으로 쓰라고 하셨는데요? 설마 가짜 금이에요?”

“아뇨. 요정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으니 분명 진짜는 맞을 거예요. 하지만 이걸로는 시장에서 물건을 사지 못한다는 뜻이에요.”

가게를 통째로 산다면 또 몰라도.

나는 뒤에 이어질 말을 삼켰다.

내 말을 들은 앨리스가 울먹거렸다.

“그, 그럼 저는 어떡하죠…….”

“괜찮아요! 사고 싶은 게 있다면 언제든지 내게 말해줘요. 앨리스.”

“에미르 님이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하지만, 저도 한 번쯤 맛있는 간식을 사드리고 싶었는걸요…….”

앨리스가 침울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방금 전과 다르게 확연히 의기소침해진 얼굴과 태도가 어쩐지 안쓰러웠다.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없을까?’

앨리스의 작은 소망을 들어주고 싶었다.

나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곧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것은 바로 물물 교환!

“그럼 우리 이렇게 하는 거 어때요? 제 금화 다섯 개와, 앨리스가 가진 금덩어리 중에 제일 작은 걸 바꾸는 거예요.”

내 말에 앨리스가 무언가를 셈해 보는 듯하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하지만 그렇게 하면 에미르 님이 손해잖아요. 금화는 다섯 개고 덩어리는 한 개, 그것도 가장 작은 건데요?”

“아니에요. 앨리스가 갖고 있는 건 비싼 순금이고, 제가 갖고 있는 건 금이랑 다른 금속을 섞은 화폐거든요. 금화 5개 정도면 그 정도 크기의 금을 살 수 있어요. 하지만 살짝 모자라니까, 은화 하나를 더 드릴게요.”

“우와, 에미르 님은 정말 똑똑하신 것 같아요. 대단해요.”

앨리스가 감탄했다. 사실 은화 하나를 더 줘야 셈이 맞다는 건 거짓말이다.

금화 다섯 개면 충분하겠지만, 분명 저 사탕들은 금화로 사기 어려울 테니까.

앨리스가 내가 가진 돈과 금덩어리를 바꾸었다.

“이제 저 사탕을 살 수 있어요!”

그러고는 환한 미소를 지으며 기뻐했다.

앨리스는 곧 가판대로 쪼르르 달려가 사탕을 샀다.

처음에 금화를 내밀자 가게 주인이 난색을 표하는 게 보였다. 나는 다가가서 귓속말했다.

“은화를 내요, 앨리스.”

“아, 네!”

사실 은화로도 이곳에 있는 사탕들을 절반 이상 사기에는 충분하고 넘쳤다.

앨리스는 우리가 모두 두 개씩 먹을 수 있는 양의 사탕을 사고 거스름돈을 받았다.

“자, 다들 사탕 드세요!”

앨리스는 생글생글 미소를 지으며 우리에게 사탕을 건넸다.

덕분에 우리는 각자 양손에 막대사탕 하나씩을 들고 걷게 되었다.

* * *

그렇게 걷던 중 세드릭은 한 가게 앞에서 멈춰 섰다.

넥타이와 모자, 벨트 등을 파는 잡화용품 가게였다.

“세드릭 님, 넥타이를 선물로 사시려고요?”

“응, 아마도. 큰형님은 넥타이나 크라바트를 자주 매거든. 선물하면 좋지 않을까?”

그렇게 말하면서 세드릭은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얼떨결에 우리도 같이 가게 되었다.

“어서 오세요!”

가게 주인은 6명이나 되는 손님이 한꺼번에 들어오자 아무 의심 없이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아무래도 겉으로 보기에 우리는 완전히 어른처럼 보일 테니 말이다.

심지어 목소리도 변성기가 지난 것처럼 들렸다.

말투나 행동만 주의하면 아티팩트를 사용했다는 걸 들키지 않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문제는 양손에 다들 얼굴만큼 큰 막대사탕을 들고 있다는 점이지.’

일단 세드릭이 발걸음을 내딛는 곳을 따라 가보기로 했다.

세드릭이 제일 먼저 구경한 곳은 다름 아닌 모자 코너였다.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세드릭 님, 넥타이를 산다고 하지 않았어요?”

“……아, 분명 그랬었지. 그랬는데.”

어쩐지 하는 말과는 다르게 세드릭의 시선이 한 모자에서 떨어지지를 않고 있었다.

단정한 스타일에 진한 청색이었는데, 유심히 보다 보니 어쩐지 세드릭이 지금 입고 있는 제복과 딱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앗, 혹시 그래서? 살까 고민 중인 건가?’

내 생각이 틀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잠시 후 세드릭이 조심스럽게 내게 의견을 구했다.

“저 모자 나한테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네. 지금 입고 있는 옷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역시! 나랑 같은 생각을 했어, 에미르.”

그러더니 뜬금없이 내게 손바닥 하나를 내민다.

나는 ‘갑자기 뭐하자는 거지?’ 하고 의아해했지만, 잠시 후 하이파이브를 하자는 것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세드릭의 손이 더 민망해지기 전에 나는 손을 마주 손뼉 쳐 주었다.

“네, 웬일로 의견이 같네요. 저랑 세드릭 님이랑.”

이후 세드릭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모자를 구입했다.

아니, 잠깐. 넥타이는 안 사?

“……맞다. 큰형님 선물을 사러 온 거였지, 참.”

내 지적에 세드릭이 화들짝 놀랐다.

아무래도 모자에 정신이 팔려 잠시 본래 목적을 까먹고 있었던 모양이다.

“넥타이 고르는 거 도와드릴까요?”

“네가 도와준다고? 뭐, 알아서 해.”

세드릭은 내 제안을 들은 체 만체하며 내가 뒤따라오는 걸 묵인했다.

나는 그런 세드릭의 뒤를 졸졸 따라갔다.

마침내 넥타이 코너에서 멈춰선 우리는 각양각색의 천들을 응시했다.

어쩐지 화려한 무늬 때문에 눈이 아파왔다.

‘심플한 걸로 골라주자!’

세드릭이 제 형의 취향을 잘 알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잘 모를 때 답은 무조건 무난한 것을 고르는 것이 최고였다.

‘그러고 보니 다른 아이들은 뭐 하고 있으려나?’

앞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세드릭을 잠시 제쳐놓고, 나는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으음, 다들 각자가 관심있는 소품을 구경하는 중이네.’

다시 고개를 돌려 세드릭을 응시했다.

세드릭은 꽤나 진지한 표정으로 두 가지 넥타이를 두고 고민 중이었다.

‘으음? 저건 좀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어쩐지 세드릭이 들고 있는 두 개 다 어째 영 아닌 것 같았다.

정확히는 놓아진 자수 문양이 너무 독특하고 튀었다.

“세드릭 님, 설마 그거 둘 중 하나를 선물하시게요?”

나는 선택을 물리라고 설득할 생각으로 조심스레 다가가 물었다.

그랬더니 세드릭이 무슨 소리를 하냐는 투로 되물었다.

“아닌데? 큰형님께 선물할 건 이미 골라놨어. 자, 이거야. 봐봐.”

“으음…… 괜찮네요.”

와인색 바탕에 따로 수나 장식은 없고, 대신 작은 보석이 달린 부토니에가 세트로 딸려 있었다.

의외로 멀쩡한 세드릭의 취향에 안심하려던 찰나, 세드릭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건 말이야. 나한테 어울릴 게 둘 중 뭘까 고민 중이었던 거야.”

“네?”

나도 모르게 떨떠름하게 반응하고야 말았다.

그도 그럴 게, 지금 드래곤 모양 수가 놓인 형광색 넥타이랑, 흰 색에 화려한 원색 꽃무늬 덩굴이 그려진 것 중 하나를 고르려고 한단 말이야?

내 반응을 본 세드릭이 눈을 가늘게 떴다.

“왜, 별로냐?”

세드릭은 아마 ‘아뇨’라는 대답을 원하겠지만, 나는 차마 선의의 거짓말을 해줄 수가 없었다.

끄응 하고 고민하다가 이내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별로예요.”

“……젠장.”

하지만 의외로 순순히 내 평가에 넥타이를 내려놓는 세드릭이었다.

아니, 내려놓는 줄 알았는데 미련이 남았는지 또다시 나를 휙 돌아보았다.

“둘 중에 덜 별로인 거 골라봐.”

“…….”

정말이지, 나를 미궁에 빠지게 하는 세드릭이었다.

좀처럼 대답하지 못하던 나는 이내 정말로 ‘그나마’ 나은 것을 선택했다.

“굳이 고르자면 흰색에 꽃무늬 쪽이 괜찮아 보여요. 그렇지만 이왕이면 돈을 아끼고 다른 걸 사는 게 어떨까요?”

나는 친우로서 마지막 의리로 충고의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세드릭은 내가 한 말 중 첫 번째 말만 귀로 흡수하고, 두 번째 말은 튕겨내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네가 봐도 꽃무늬가 예쁘긴 하지?”

심지어 왜곡까지 해서 들은 모양이다.

절레절레.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내 건 이걸로 하고, 형님 선물은 아까 봐뒀던 걸로 해야겠어.”

물론 내가 그러거나 말거나 세드릭은 헤벌쭉 미소를 지은 채로 계산대로 향했다.

그 뒷모습을 무심코 보던 나는 세드릭에게 해줄 말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

정확히는 다른 아이들에게도 해줘야 하는 조언이기는 했지만.

“저기, 세드릭 님! 잠깐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왜, 뭔데?”

“그러니까, 이 모습을 한 채로 계산원을 비롯해서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할 때 말이에요. 어른인 척해야 한다는 건 알고 계시겠죠?”

“……다, 당연히 알고 있었지!”

내 말에 세드릭이 자신을 뭘로 보냐며 발끈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반응을 보니 내가 붙잡지 않았더라면 무심코 어린아이의 말투를 썼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변장한 이상 위화감 들지 않게 행동하는 건 기본인데 말이다!

“그럼 잠시 테스트 하나 해볼게요. 만약 이 넥타이를 계산하면서 계산원이 ‘선물용으로 포장하시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그, 그야!”

세드릭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이내 내 귀에 속삭였다.

“……‘와인색은 내 형님 선물이니 포장해 주고, 꽃무늬는 내 거니까 포장 같은 거 필요없어’라고 대답하면 되는 거 아니야?”

“네에, 땡이에요. 틀렸다고요.”

“뭐? 그럼 뭐라고 해야 어른처럼 보이는 건데?”

“그건 말이죠.”

휙휙, 나는 잠시 주변을 둘러보고서 세드릭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일단, ‘내 형님’ 같은 단어는 빼야 해요. 그리고 일일이 사정을 말할 필요는 없어요. 안 그래도 돼요.”

“……그렇단 말이지?”

세드릭이 솔깃한 얼굴을 했다.

“네. 그리고 어른 말투를 흉내 내는 건 말이에요. 최대한 짧고 무뚝뚝할수록 티가 덜 나요.”

“무뚝뚝? 짧아야 한다고?”

“맞아요! 이를테면, ‘둘 다 포장으로’라든지 ‘포장은 필요 없다’든지 이렇게 대답을 하는 게 좋겠죠. 표정은 무표정으로.”

나는 근엄한 귀족 말투를 흉내 내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사실 얼핏 들으면 조금 싸가지 없어 보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세드릭의 현재 외모에는 저런 말투가 제일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실제로 원작 소설에서 세드릭이 저런 툭툭 내뱉는 듯한 말투를 쓰기도 했고.

내 말에 세드릭은 이해한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하,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런데, 나는 와인색만 포장을 할 거야. 그건 어떻게 대답하지?”

“……그냥 둘 다 포장해 달라고 하세요.”

“좋은 방법이네. 자, 그럼 이제 배웠으니까 도전하러 가겠어.”

세드릭이 로브를 푹 눌러쓰더니 뒤돌아섰다.

“파이팅이에요.”

나는 계산대로 향하는 세드릭에게 작게 주먹을 꼭 쥐고 흔들어 보였다.

그리고 곧 계산원과 세드릭의 대화가 들려왔다.

“총 넥타이 두 개, 그리고 부토니에. 다 해서 10실버 되겠습니다.”

세드릭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돈을 꺼냈다.

그런데 아니? 분명히 계산원이 말한 물품의 가격은 10실버인데, 세드릭이 꺼낸 건 반짝이는 금화였다.

“…….”

세드릭은 잠시 당황한 얼굴로 금화를 보다가 계산원에게 내밀었다.

아무래도 미처 시장의 물가를 몰라서, 금화만 챙겨온 모양이었다.

계산원은 금화를 보고 깜짝 놀랐다.

당연한 일이다. 금화 한 개가 은화 100개와 맞먹는 데다, 좀처럼 이런 평범한 잡화점에서는 금화를 볼 일이 드물기 때문이었다.

“소, 손님.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계산원은 당황하더니 계산대 아래 거스름돈 주머니를 뒤졌다.

가게 안에 짤랑짤랑 돈 세는 소리가 꽤나 오래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계산원은 어쩐지 녹초가 된 얼굴로 커다란 주머니를 내주었다.

“거스름돈 은화 90개입니다, 손님.”

“90개.”

세드릭이 되짚는 말에, 계산원이 살짝 겁먹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예! 정확히 90개입니다. 못, 못 미더우시다면 세어 보셔도…….”

아무래도 내가 딱딱한 말투를 쓰라고 조언했던 게 잘못이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성인의 모습을 한 세드릭은, 무표정을 하면 꽤나 살벌하게 생겼으니까…….

“필요 없어.”

“네? 넷!”

하지만 세드릭은 돈 세기가 귀찮았는지 쿨하게 대답했다.

이후 세드릭이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며 내게로 돌아왔다.

“나 잘했지, 에미르?”

그러고는 나를 보며 순식간에 다시 개구쟁이 같은 표정을 하고서 칭찬을 구했다.

그 간극이 너무 커서, 순간 내가 충고한 대로 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얼떨떨한 기분이 들었다.

“……음, 네. 잘하셨어요.”

“그래. 나는 한번 배우면 바로 잘 따라 한다니까? 하하.”

점원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잘난 체를 하며 세드릭이 웃었다.

나는 생각했다.

‘그래, 역시 세드릭은 이 모습이 제일 잘 어울리는 것 같아.’

아무리 어른이 되었다고 해도, 무뚝뚝하고 차가운 모습은 어딘지 괴리감을 불러일으키게 했다.

원작에서는 그 모습이 당연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성격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탓이겠지. 휴.’

나는 애써 잡념을 지웠다. 그리고 세드릭과 함께, 여전히 물건을 고르고 있는 다른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아니, 잠깐, 어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아이라고 하니 뭔가 좀 어색하다!

하지만 아이든 어른이든 일단 소중한 내 친구들이니, 뭐 상관없으려나?

“저기, 황…… 아니, 니나이나 님. 그리고 니콜라스 님.”

잠시 황녀라고 호칭을 말해 버릴 뻔했지만 이내 이름으로 정정했다.

아무리 변장하고 있고 작은 목소리로 부른다지만, 그래도 혹시 듣는 귀가 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말이다.

다행히도 둘은 그런 나를 눈치챈 모양인지 위화감 없이 답해주었다.

“왜 그러는데?”

“왜 불렀어, 에미르?”

“아, 그게요…….”

나는 세드릭에게 말해준 것처럼, 그 둘에게도 ‘어른 말투 흉내 내는 법’을 가르쳤다.

아무래도 이 둘은 황족이니만큼 특유의 말투를 티 내지 않는 게 조금 더 어렵긴 했지만.

앨리스와 제이크에게도 귀띔하고 나니 내 일은 비로소 마무리되었다.

다행히도 모두 잘 따라 해주었다.

“이 모자 계산하도록…… 아니지, 계산 부탁해요.”

물론 평범한 아카데미 학생 옷을 입고 있는 니나이나는, 입에 붙어 있는 명령조를 떼어내는 게 영 쉽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아무튼 우리는 나름 무사히 계산하고 가게를 나왔다.

‘분명 세드릭이 말했었지. 형의 생일 선물만 사고 돌아갈 거라고.’

그런데 세드릭은 제가 했던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린 모양인지, 헤벌린 표정으로 주변의 신기한 문물들을 두리번거리는 중이었다.

‘하여간 믿은 내가 바보지 뭐야. 휴.’

한숨을 쉬며 앞으로 걸음을 내딛으려는 그때, 갑자기 내 팔뚝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

뭐지, 하고 옆을 바라보니 앨리스가 있었다.

앨리스가 생긋 미소 지으며 물었다.

“에미르 님, 팔짱 끼고 걸어도 돼요?”

“네?”

“……조금 추워서요.”

앨리스가 살짝 파래진 안색으로 파르르 떨었다.

그러고 보니 지금 앨리스가 입고 있는 옷이 로브 안에 얇은 원피스 한 장뿐이었다.

나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그때, 나머지 한쪽 팔에도 온기가 느껴졌다.

이번엔 또 누구야.

나는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누군지 이미 약간 감이 온 상태였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제이크였다.

“반대편 팔은 나한테 빌려줘, 미르. 나도 추워.”

“……음, 좋아. 그렇게 해.”

“고마워.”

그렇게 나는 양쪽에 두 명을 매달고 걷게 되었다.

뒤늦게서야 내 곁에 남은 자리를 찾으며 세 명이 기웃거렸지만, 이미 한 발 늦은 뒤였다.

‘남들이 보기엔 다 큰 어른들 세 명이 옹기종기 팔짱 끼고 걷는 것처럼 보이겠지.’

다행히도 오늘따라 시장엔 돌아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리고 길이 워낙 넓은 터라 우리 세 명이 나란히 걷고 있어도 별문제는 없었다.

‘약간의 민망한 기분은 어쩔 수 없지만…….’

나는 아까 앨리스가 사주었던 사탕을 와그작 씹어먹으며 생각했다.

그때였다.

갑자기 제이크가 천천히 멈춰 섰다.

팔짱을 끼고 있던 나와 앨리스 역시 덩달아 따라 서게 되었다.

“제이크, 왜 그래?”

조심스레 물으며 제이크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무언가를 파는 가판대가 보였다.

다름이 아니라, 동물 귀 모양의 인형이 달린 머리띠를 파는 상인이었다.

‘우와, 이 세계에서도 저런 걸 파네?’

전생에서는 놀이공원 같은 곳에 가면 자주 볼 수 있던 물건이었다.

나는 잠시 신기하게 생각하고, 마저 발을 옮기려 했다.

그러나.

“……!”

제이크와 앨리스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졸지에 나 혼자 앞을 향해 헛발질하는 꼴이 되어버렸다.

아무래도 제이크, 그리고 앨리스까지 저 머리띠들에 단단히 꽂혀버린 모양이었다.

뒤에서 오던 세드릭과 니나이나, 니콜라스 역시 우리가 뭐 하는 건가 보다가 같이 구경을 시작해 버렸다.

‘……으음, 물론 내가 봐도 귀엽긴 해. 근데 문제는 저걸 사더라도 딱히 쓸데도 없다는 거지.’

다른 아이들이 그냥 지나치질 못하니, 나도 얼떨결에 같이 구경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때 머리띠 상점 주인이 우리의 시선을 알아채고 호객을 시작했다.

“머리띠 사세요! 귀여운 동물 귀 모양 머리띠가 하나에 단돈 동화 5개!”

“……동화 5개?”

제이크가 놀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른 아이들 역시 동요한 것 같았다.

동화 20개가 은화 한 개와 같은 값인데, 용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상당히 저렴한 가격이었다.

‘알고 보면 원가에 비해 바가지라든가, 뭐 그런 건 아니겠지. 설마?’

평소 시장에 가는 걸 좋아하는 유모를 통해 대략적인 물가에 대한 이야기를 접했던 나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생필품이 아닌 이런 자질구레한 액세서리들은 가격을 가늠하기 어려웠다.

“우와! 엄청 싸다!”

“…….”

물론, 세드릭의 저런 반응을 보니 만약 저게 바가지라 해도 냉큼 살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에이, 뭐. 그래. 본인이 사고 싶으면 사는 거지. 그냥 내버려 두자.’

나를 제외한 5명이 가판대로 다가가 물건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서 다들 맘에 드는 머리띠를 살 때까지 기다렸다.

“……늑대 귀와 표범 귀 중에 뭐가 더 낫지? 히야, 이건 뭐 둘 다 너무 잘 어울려서 큰일인데.”

세드릭은 부드러운 회색빛 인조 털이 달린 늑대 머리띠와, 표범 가죽 무늬가 프린팅된 머리띠를 놓고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 중이었다.

어쩐지 가판대에 놓인 거울 속 자신을 보고 자아 도취 중인 것 같기도 하고…….

‘으악! 네가 물론 잘생긴 건 맞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런 말은 속으로 하지 그랬니.’

나는 차마 하지 못한 말을 속으로 삼켰다.

가판대 주인이 ‘이 나르시시스트 기사는 뭐지?’ 하는 표정으로 애써 영업용 미소를 유지하는 게 보였으니까.

“…….”

한편 제이크는 유니콘 뿔 머리띠에 관심이 많아 보였는데, 분홍빛과 하늘빛 중 무얼 골라야 할지 고민되는 모양이었다.

각도에 따라 다른 색을 내는 비즈가 달려 있어 반짝거렸다.

‘제이크야 뭐, 분홍도 하늘도 다 잘 어울리는걸?’

물론 저 핫초코에 우유 섞은 빛깔의 갈색 머리엔 분홍빛이 조금 더 잘 어울릴 것 같지만 말이다.

내가 제이크를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앨리스가 말을 걸었다.

“에미르 님, 저 머리띠 좀 골라주세요! 양이랑 토끼 둘 다 좋은데, 둘 중 어떤 게 더 예뻐요?”

나는 앨리스가 내민 손을 보았다.

몽실몽실한 솜 모양에, 동그랗게 말린 뿔을 표현해 놓은 양 머리띠는 정말 귀여웠다.

옅은 금발의 앨리스에게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으음, 양이 예쁘…….”

무심코 대답하려던 나는 반대쪽 손에 들린 토끼 머리띠를 보고 말을 잃었다.

폭신한 솜이 가득 채워진 토끼 귀가 쫑긋하니 잘 표현된 분홍빛 머리띠였다.

‘으아, 고민되잖아! 내 것도 아닌데.’

고민하던 나는 이내 조심스럽게 토끼 귀 머리띠를 가리켰다.

“이게 더 예쁜 것 같아요. 물론 앨리스는 양도 잘 어울리지만요.”

“그럼 에미르 님 말씀대로 토끼 머리띠를 살게요.”

그렇게 말하면서 앨리스는 정말로 토끼 같은 상큼한 미소를 지었다.

7살의 앨리스는 유치가 빠지지 않아서 정말로 토끼처럼 보이는 그런 앞니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앨리스는 그런 소소한 귀여움을 찾아볼 수 없이 완전히 성장한 모습이었다.

조금은 아쉬웠지만, 그래도 미래의 얼굴을 한 채 저렇게 웃으니 정말로 보기 좋았다.

원작과는 다르게 행복한 어른 앨리스의 모습이라니.

그렇게 앨리스가 계산하는 것을 보고 있는데, 옆에서 남매의 투닥거리는 대화가 들려왔다.

“오라버니는 돼지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은데? 이거 봐, 여기 세트로 딸려 있는 돼지 코도 있잖아. 이것까지 달면 완벽하겠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불곰이나 얼룩말이 맘에 든다. 돼지라니? 그렇게 좋으면 네가 하도록 해.”

“싫어. 나는 고양이를 할 거라고.”

처음엔 무슨 상황인가 했는데, 니나이나가 니콜라스에게 돼지 머리띠를 추천…… 아니, 강요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니콜라스는 뚝심 있게 제 취향을 고집하고 있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로 둘은 남매 같아. 평소엔 잘 모르겠지만, 가족은 가족인가.’

그 둘을 보며 소리 없이 미소 짓고 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내 머리 위에 머리띠를 씌우는 게 느껴졌다.

“놀랐어? 미안. 미르에게 이거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범인은 바로 제이크였다.

내가 돌아보자 배시시 웃으며 장난스레 사과했다.

나는 내 머리 위로 손을 올려 머리띠를 만져 보았다.

‘무슨 동물이지?’

손을 더듬대며 감촉을 느껴 보았다.

살랑대는 모조 깃털이 달려 있고, 그 가운데는 엄청나게 기다란 뿔…… 이거 유니콘이잖아?

“유니콘 머리띠야?”

“응. 나는 분홍색으로 골랐어. 내 거 사면서 미르 것도 방금 같이 계산했고. 미르 건 하늘색이야.”

“……!”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여간 제이크, 똑똑하기는.

계산하기 전 물어보면 내 건 사지 말라고 대답할 걸 알고, 산 후에 이렇게 씌워주다니.

“안 사도 됐는데. 그래도 고마워, 제이.”

하지만 나를 위해 선물한 정성만큼은 고마워서 감사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제이크가 빙긋 웃었다.

“잘 어울려서 다행이야.”

그런 우리를 보고서 상인이 추임새를 더했다.

“하하, 잘 어울리는 한 쌍의 연인이네요.”

순간 뭐지, 했지만 이내 우리가 이십 대 초반의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냈다.

아마 저 상인은 우리를 사이좋은 커플 내지 약혼자로 착각한 것이 분명했다.

“연인이 아니…….”

내가 무의식적으로 반박하려는 찰나, 나보다도 빠르게 대답한 누군가가 있었다.

“그렇게 보여요? 고맙습니다.”

바로 제이크였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사실은 정정해 줘야 할 거 아니야!’

별거 아닌 거짓말이었지만 어쩐지 찔려서 안절부절못하는 내게 제이크가 속삭였다.

“……미르, 지금은 변장 중이잖아!”

아, 맞다. 그랬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 * *

잠시 후, 머리띠를 하나씩 쓴 우리는 다시금 길가를 거닐었다.

아무래도 검은 로브에 귀여운 동물 머리띠 조합이 특이한 데다, 그런 차림을 한 6명이서 함께 걸어가는 게 꽤나 신기한지 시선을 좀 받았다.

‘어쩐지, 나 빼고는 별로 신경을 안 쓰는 것 같지만.’

나는 슬쩍 로브의 후드를 써서 머리띠를 가리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머리띠에 달린 유니콘 뿔이 너무 길어서 후드가 씌워지지 않아 실패하고야 말았다.

‘쳇…….’

하는 수 없이 부끄럽지만 다시 후드를 벗었다.

그때, 마침 코에 솔솔 풍겨오는 맛있는 음식 냄새가 와닿았다.

‘이게 무슨 냄새지? 으아, 배고프다.’

킁킁.

나는 강아지라도 된 것처럼 집요하게 냄새를 분석했다.

그 결과, 이 식욕을 돋우는 냄새가 다름 아닌 스튜라는 것을 알아냈다.

“이 맛있는 냄새는 뭐야?”

“어, 정말이네.”

“아, 배고파진다…….”

그 냄새를 맡은 건 나뿐만이 아닌지 다들 한마디씩 해댔다.

하긴 물건도 사고 이것저것 구경하며 걸어 다니느라 에너지를 상당히 소모하긴 했을 것이다.

우리를 어른으로 만들어준 이 아티팩트 역시, 미미하게 체력을 빼앗아가는 느낌이었다.

우리의 시선은 냄새가 풍겨오는 곳으로 향했다.

낡고 허름한 여관이었다. 시장 내부에 자리한 곳이라 그런지 작은 규모였다.

‘아무래도 여관에 딸린 식당에서 스튜를 요리하고 있는 것 같아.’

아무도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자연스레 우리는 시선을 공유하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 먹으러 가자!”

세드릭이 힘차게 외쳤다.

덕분에 내 꼬르륵거리는 뱃고동 소리가 묻혔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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