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권-3화 (3/8)

꼬마 영애님은 주연들을 길들인다 2권

3.

저벅저벅.

수 명의 발걸음이 가로질러 가는 곳은 다름 아닌 우리 집의 정원이었다.

지금 나와 함께 걷고 있는 아이들은 제이크와 앨리스, 니나이나, 니콜라스였다.

한 명이 모자라지 않냐고? 그렇다! 없는 사람은 바로 세드릭이었다.

음, 아마 세드릭은 지금쯤 우리 집을 지키는 기사들이 훈련하는 연무장에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세드릭이 저택에 들어서자마자 연무장이 궁금하다며 가봐도 되냐고 물어봤으니까.

나야 당장에 따라가기 어려운 처지라서 집사님께 세드릭의 안내를 부탁드렸다.

아마 지금쯤 잘 구경 중이겠지?

‘그리고 분명 실망했을 테고.’

애초에, 제국 내 최고 기사 가문인 베드몬 공작가의 연무장과 그저 구색만 맞춰놓은 우리 후작저 연무장이 비교나 되겠냔 말이다.

‘기사로서 열정은 만점이네, 뭐.’

이내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리고 다른 아이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호오…… 황궁의 정원과는 다르구나.”

“…….”

열 명에 가까운 황궁 기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내 뒤를 따라오는 니콜라스와 니나이나.

그 둘은 한창 정원의 풍경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잘 따라오고 있나 싶어, 힐끗 돌아본 나는 이내 안심했다.

‘휴, 다행이다.’

사실 조금 걱정했다.

화려하고 웅장한 황궁에서 살아왔을 두 명이니까.

그래서 혹시라도 후작저의 모습이 성에 차지 않는다며 불만을 터트리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적어도 니나이나는 말이다.

‘저렇게 호기심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보면, 역시 황녀님은 황궁을 제외한 다른 이들의 집에는 방문해 본 적이 거의 없는 걸까.’

그리고 니콜라스 황자님은…….

‘으음, 평소 같은 무표정이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네. 뭐 찌푸리고 있는 건 아니니 괜찮은 건가.’

그리고 내가 멍하니 생각에 빠져든 사이 앨리스가 질문을 걸어왔다.

“저, 에미르 님. 저 꽃은 무슨 꽃이에요? 활짝 피어 있는 모습이 너무 예뻐요!”

“……네? 아, 저 꽃이라면…… 모란이에요. 저도 모란이 참 예쁘다고 생각해요! 우리 정원사들이 제일 아끼며 기르는 꽃이기도 하고요.”

“우와, 모란. 이름도 예쁘다! 그, 그럼…… 저 꽃은 뭐예요?”

앨리스는 정원에 보이는 모든 사물이 궁금한 양 이것저것 질문을 걸어왔다.

나는 앨리스가 대답을 들을 때마다 짓는 놀라워하는 표정이 꽤나 기껍게 느껴져서, 꼬박꼬박 대답해 주었다.

잠시 후, 앨리스는 작게 감탄사를 터뜨리며 나를 잔뜩 추켜세워 주었다.

“진짜로 에미르 님은 정말로 모르는 게 없어요. 똑똑하고…… 멋있어요.”

“아, 아하핫, 사실 그 정도는 아닌데…… 과찬이세요! 그래도 칭찬 감사해요.”

라고 겸손하게 대답하고는 있지만, 입꼬리는 정직하게 위를 향해 올라가 있었다.

흠흠, 아무래도 내가 칭찬에 좀 약해서 말이야.

하지만 그때!

우리 둘의 시야에 웬 이름 모를 아름다운 무지갯빛 나비가 등장하고야 말았다.

그 순간 나는 어떠한 이름 모를 불안감을 느꼈고, 그 불안감은 곧장 현실이 되어버렸다.

“우와! 저 나비도 너무 예뻐요! 나비가 무지개를 갖고 있나 봐요……. 에미르 님, 저 나비의 이름은 뭐예요?”

앨리스가 내게 질문을 던진 것이다.

“그, 그게…… 저 나비…… 음, 사실 저도 잘…….”

나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저 나비의 이름을 알지 못했으니까.

‘생전 처음 봐!’

식은땀을 삐질 흘리며 난감해하는 그 몇 초간의 시간이 어찌나 길던지.

‘어, 어쩌지. 뭐라고 대답하지.’

솔직하게 나도 모른다고 대답하기엔…… 바로 옆에서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당연히 내가 알고 있을 거란 얼굴로 쳐다보는 앨리스를 실망하게 하기 싫었다.

‘그렇다고 거짓말로 이름을 지어낼 수도 없잖아.’

나중에 앨리스가 진짜 나비의 이름을 알게 된다면, 나를 뭐라고 생각하겠어.

순 거짓말쟁이라 여기겠지.

하아, 어쩐담.

속으로 한탄하며 눈을 질끈 감은 그때, 등 뒤에서 들려온 한 마디.

“에졸렛이라는 나비다.”

나는 깜짝 놀랐다.

곤경에서 나를 구해 준 이 구세주는 대체 누구지?

“황자 전하?!”

돌아보았더니 보이는 것은 다름 아닌 니콜라스였다.

니콜라스는 자신이 아는 것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반사적으로 대답해 버린 듯 살짝 머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끼어들어서 미안하구나. 며칠 전 읽었던 곤충학 책에서 본 나비라서 그만.”

앨리스 역시 황자님이 대답하실 줄은 몰랐다는 듯 당황한 얼굴이었다.

그런 우리에게 니콜라스는 답지 않게 얼굴을 살짝 찡그리며 변명했다.

그보다 나는 조금 놀라웠다.

정치, 경제, 사회…… 뭐 이런 쪽의 책만 읽는 줄 알았던 니콜라스가 곤충학 책도 읽는 아이였다고?

‘흐음, 생각해보니 신수인 폴리를 본 이후부터 유독 마법이나 동물 쪽에도 관심을 쏟는 것 같긴 했지.’

나는 속으로 재빠르게 납득 과정을 마쳤다.

그리고 니콜라스를 향해 말했다.

“아뇨, 괜찮아요. 사실 저 나비, 저도 모르는 거라 궁금했거든요.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뭘, 천만에.”

착각일까? 감사 인사에 살짝 부끄러워하는 것 같다.

아무튼 니콜라스의 대답을 들은 나는, 마침 내 바로 옆 나뭇가지에 에졸렛 나비가 날아와 앉는 것을 보았다.

멀리서 봐도 아름다웠던 나비는 가까이서 보니 더욱 환상적인 모습을 뽐내고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나비를 향해 가까이 다가갔다.

“잠깐! 가까이 가면 안 돼. 저 나비엔 독이 있어.”

그런데 그런 나를 니콜라스가 가까스로 잡아채 만류했다.

나는 당황해 눈을 깜빡거렸다.

“……독이 있다고요?”

“그래. 날개에서 흩뿌려지는 가루에 사람을 마비시키는 독이 있어. 조심해.”

“아, 네! 조심할게요.”

나는 당황한 마음을 숨기지 못하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저 아름다운 나비가 독이 있다는 것보다 더 당황스러웠던 건.

‘니콜라스가 나를 도와줬어?’

그 무심하고 매사에 관심 없어 보이던 니콜라스가.

내가 같이 놀자고 몇 번이나 권유해도 됐다고 거절하던 그 니콜라스 황자님이 내가 다칠까 봐 ‘직접 나서서’ 나를 잡아채 줬다!

‘으음, 대체 뭐지.’

아까 내 곤란함에 구세주처럼 나서 줬던 것도 그렇고, 어쩌면…….

‘니콜라스 황자님, 그리 무뚝뚝한 것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네.’

* * *

마침내 정원을 지나 저택 안으로 들어온 우리는, 일단 응접실로 향했다.

물론 응접실로 곧장 향하는 게 불만인 듯한 이도 있었다.

이를테면 황녀님이랄지.

“에미르, 네 방에도 구경 가고 싶구나. 귀족 영애의 방은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

니나이나는 내 방에 가보고 싶어 안달 난 눈치였다.

아니, 그보다! 내 방을 보통 귀족 영애의 방이라고 생각하면 좀 곤란할 텐데!

‘……하아, 그래도 전날 밤에 미리 치워놔서 다행이지.’

나는 들리지 않게 한숨을 쉬며 생각했다.

마침 내 옆에 앉아 있던 앨리스가 맞장구쳤다.

“저, 저도 에미르 님 방이 궁금해요!”

어엇, 앨리스까지 이래 버리면.

곧장 내 방을 공개할 분위기로 흘러가게 되는 건가……?!

그때, 마침 조용히 내 옆을 지키던 제이크까지 한마디 했다.

“에미르, 나도 오랜만에 네 방 가보고 싶어. 많이 바뀌었나 궁금해.”

제이크는 이미 수없이 새런 후작저에 왔다 간 적이 있었고, 내 방에도 수십 수백 번 넘게 방문했다.

그래서인지 아까부터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별로 크게 놀라워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분명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제이크도 요즘 통 우리 집에 놀러 온 적이 없었지. 참.

결국 나는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았어요. 다들 이렇게 원하시니…… 제 방으로 가요.”

내 말에 다른 아이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섰다.

때마침, 다과를 가져오던 하녀가 깜짝 놀라 멈춰 서는 게 보였다.

“나, 친구들이랑 같이 내 방에 가려고.”

그녀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상황 설명을 했다.

“어머, 아가씨. 그럼 이 과자와 차는 어떻게…… 방으로 올려드릴까요?”

“응, 그렇게 해 줘!”

사실 내 방에는 따로 티 테이블이랄 게 없지만…… 아마 책상으로 쓰는 테이블 위에서 티타임을 즐겨야 할 거다.

때마침 연무장 구경을 마친 세드릭이 돌아와, 우리는 다 같이 응접실을 나섰다.

* * *

잠시 후 내 방에 도착한 아이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감상을 말하고 있었다.

“오, 보통 귀족 영애의 방은 다 이렇게 생겼구나! 소박한걸.”

저, 그건 아닌데요.

나는 차마 니나이나의 착각을 정정해 주지 못했다.

“어, 엄청 넓어요! 게다가 정말 아기자기하고 좋은 방이에요……!”

“뭐, 나쁘지 않네. 근데 내 방이 아주 조금 더 큰 듯.”

앨리스는 눈을 반짝거리며 감탄했고, 세드릭은 콧방귀를 뀌며 미운 소리를 해댔다.

그리고 니콜라스는, 내 방 한쪽에 있는 작은 책장을 관찰 중이었다.

그러더니 내게 질문을 던졌다.

“흐음, 읽을 만한 책은 없는 거냐?”

사실 아까부터 신경 쓰였던 건데, 니콜라스가 빈손이라는 점이었다.

아마 오늘 유치원에 가져왔던 책을 다 읽어버려서였겠지.

그래서였는지는 몰라도 니콜라스는 내 책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어, 여기 있는 책들 다 읽으셔도 돼요. 황자 전하.”

내 대답에 니콜라스는 고개를 끄덕이고서 책장에 꽂혀 있는 책들을 이것저것 꺼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동화책 말고 다른 건 없나? 후작가의 역사서라든지. 궁금해.”

그, 그런 게 내 책장에 있을 리가 없잖아요!

나는 순간적으로 당황했지만, 이내 순발력 있게 답했다.

“그런 건 아마 다른 서재에 가야 있을 거예요.”

내 대답에 니콜라스가 실망한 얼굴을 했다.

아아, 역시 동화책은 수준에 안 맞는다는 건가…….

“저, 혹시 여기 있는 동화책들은 이미 다 읽어보신 거예요?”

그러다 문득 나는 호기심이 생겨서 질문했다.

니콜라스는 진작에 이 책들을 모두 읽어봐서 흥미가 없는 걸까?

“……아니?”

그랬는데, 도리어 반문이 돌아왔다.

조금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동화책 같은 재미없는 건 읽어본 적 없다. 한 번도.”

태어날 때부터 천재는, 동화책을 건너뛰고 바로 다른 책을 읽는 모양이다.

‘잠깐, 읽어본 적 없다고?’

잠시 속으로 푸념하던 나는, 이내 그 말에서 허점을 찾아냈다.

“저, 한 번도 안 읽어보셨다면 이번에 읽어보시는 건 어때요? 황자님 생각보다 재밌을지도 몰라요.”

그리고 니콜라스는 답했다.

“……실질적인 지식을 얻을 수 없는 책이 어떻게 재밌을 수 있겠나. 뭐, 그래도 그리 권유하니 거절할 수 없구나. 한번 읽어는 보겠다.”

그렇게 말하고서 니콜라스는 내 책장에 있던 동화책 열댓 권을 동시에 빼내 테이블로 가져갔다.

아무래도 니콜라스는 티타임에는 관심이 없는 모양이었다.

마침 하녀들이 내 방 테이블에 먹음직스러운 과자들과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찻주전자를 세팅해 놓은 차였다.

“자, 차린 건 많지 않지만 많이 드세요.”

하녀들이 물러가고, 나는 하하 웃으며 말했다.

어쩐지 사교계에서 모임을 주최하는 발 넓은 귀족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었다.

실상은 그냥 유치원 동기들 여럿이서 소소하게(?) 티타임을 즐기는 것일 뿐이었지만…….

‘아니, 그런데. 따지고 보면 다들 장차 제국 사교계에서 한가락씩 하게 될 사람들 아냐.’

막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대던 나는 불현듯 깨달았다.

내가 요즘 너무 원작에 대해 생각을 안 하고 살았더니, 잠시 잊고 있었나 보다.

“차향이 좋아. 스콘도 맛있는걸?”

지난번처럼 음식을 가리면 어떡하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니나이나는 준비된 것들을 나쁘지 않게 생각하고 있었다.

“헤헤, 좋아해 주셔서 다행이에요.”

나는 웃으며 답했다.

내가 만든 게 아닌데도 불구하고 뿌듯했다.

우리 저택 주방장 손맛이 좀 괜찮긴 하지! 황녀님도 인정하실 정도라니까.

티타임은 화기애애했다.

제이크는 역시 우리 집 쿠키가 맛있다며 엄지를 치켜들었고, 세드릭은 그냥 말없이 많이 먹기만 했다.

세드릭과 앨리스 앞에 놓인 쿠키 접시가 거의 비워져 갈 때쯤, 나는 앨리스가 세드릭의 빠른 속도 때문에 많이 먹지 못했다는 것을 눈치채고 하녀를 불렀다.

“과자 말고 다른 간식도 부탁해! 젤리나 푸딩 같은 걸로!”

참고로 우리 저택 주방장이 만드는 젤리는 정말 맛있다.

단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조차도 그 젤리는 쉴 새 없이 입에 들어갔다.

잠시 후, 투명하고 조그마한 유리그릇 십수 개가 쟁반 위에 놓여 우리 앞에 대령되었다.

나는 우리 집에 처음 방문한 손님들을 위해 친절히 설명을 시작했다.

“이건 수박 젤리고요, 이건 포도 맛이에요.”

“이건?”

“그건 블루베리 젤리예요. 아차, 앨리스는 블루베리 좋아하죠? 황녀님은 딸기 맛 좋아하시고요. 자, 여기. 두 분 다 가져가세요.”

내 물음에 두 사람은 젤리를 받아 가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저 블루베리 좋아해요.”

“그래. 어떻게 알았어? 내가 딸기 맛을 좋아한다는 걸.”

책에서 봤으니 알 수밖에요!

……라고 답할 수는 없었다.

때문에 나는 두 사람의 물음에 곧장 대답하지 않고 그저 살포시 미소만 지었다.

“모를 수가 없죠. 전 다 알아요. 헤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제이크 앞에 슬쩍 우유 맛 푸딩을 밀어놓았다.

제이크가 제일 좋아하는, 항상 찾는 거니까.

“고마워, 미르.”

제이크가 귓가에 속삭였고, 나는 작게 웃었다.

“뭘.”

그리고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있던 세드릭이 조용히 질문해 왔다.

아니, 목소리만 조용하고 어쩐지 불만 있는 것 같은 얼굴이다.

“너, 내가 좋아하는 맛은 몰라?”

모를 리가 있겠니.

그렇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왜냐하면…….

세드릭이 좋아하는 맛이, 나랑 겹치니까!

‘내가 제일 좋아하는 거. 바나나 초콜릿 푸딩. 그리고 세드릭은 초콜릿 맛을 좋아하지.’

그런데 이것 중에 초콜릿이 들어간 건, 원래 내 걸로 찜해놨던 바나나 초콜릿뿐이다.

게다가 푸딩과 젤리는 각각 한 가지 맛밖에 없었다.

때문에 유치한 욕심쟁이 심보지만, 나는 입을 꾹 다문 채 손을 꼼지락거렸다.

그런 내가 답답해 보였는지 세드릭이 재차 질문했다.

“……정말 모르냐?”

아, 어쩐지 좀 상처받은 듯한 얼굴이다.

미안해지네.

결국 나는 대답하고야 말았다.

“……아뇨, 알아요. 제가 기억력이 좀 안 좋아서 생각하느라. 초콜릿 좋아하잖아요, 세드릭 님은.”

“하하, 정답이야! 난 초콜릿을 좋아하지.”

내 대답에 곧장 세드릭의 얼굴이 밝아졌다.

곧이어, ‘그러니까 어서 나도 줘’라며 눈빛으로 나를 재촉하는 세드릭이었다.

결국 나는 하는 수 없이 세드릭의 앞으로 푸딩을 건넸다.

흑, 내가 찜해놨던 내 소중한 푸딩…… 잘 가.

“……네, 여기 세드릭 님 거예요.”

“앗싸!”

세드릭은 내 속도 모르고 기뻐하며 푸딩을 막 먹으려 했다.

그때였다.

“잠깐! 미르 너도 저 푸딩 좋아하잖아.”

“……그, 그런데 분명 에미르 영애님이 자기소개할 때 바나나 초콜릿 푸딩을 좋아하신다고……!”

제이크와 앨리스가 동시에 날 보며 외쳤다.

곧이어 두 사람은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다, 이내 시선을 교환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새 둘이 친해졌나? 그보다 둘 다 내가 좋아하는 걸 기억해 주다니.’

나는 그만 감동이 벅차올라 뭉클해졌다.

그래, 그깟 푸딩 안 먹어도 배부르다! 나는 이런 좋은 친구들이 있는걸, 뭐?

그리고 그런 나와 저 두 명을 번갈아 보며 얼떨떨해하는 한 명이 있었으니, 바로 세드릭이었다.

“……나, 나는 영애도 이 푸딩을 좋아하는 줄 미처 몰랐어! 알았으면 안 먹었지!”

세드릭은 재빨리 스푼을 내려놓고서 빨개진 얼굴로 소리쳤다.

막 푸딩을 먹으려 했던 듯, 매끈했던 표면에는 약간의 스푼 자국이 남아 있었다.

세드릭은 내가 자신에게 하나 남은 푸딩을 양보해 줬다는 사실이 뭐랄까, 조금 믿기지 않고 고마운 듯하면서도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그러더니 이내 스푼 자국 남은 푸딩을 내 쪽으로 밀어놓는 게 아닌가.

“너 먹어. 이거.”

“괜찮아요, 저야 뭐 주방장에게 부탁하면 매일 먹는 게 이 푸딩인걸요. 어서 드세요.”

“하지만…… 그럼 넌?”

“아직 남아 있는 푸딩이랑 젤리는 많으니까 괜찮아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손에 집히는 푸딩 컵을 아무거나 집어 들고 황급히 먹는 시늉을 했다.

그런데 문제는.

‘우웁. 이거 민트소다 젤리잖아.’

하필이면 내가 고른 젤리에, 내가 제일 싫어하는 민트가 들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제엔장할…….

이걸 뱉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나는 이내 숨을 참은 채 젤리를 꿀꺽 삼켰다.

그와 동시에,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나를 만류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너. 잠깐…… 그거 민트 들어간 거 아니야? 너 민트 싫어한다며.”

그 목소리의 주인은 놀랍게도, 제이크도 앨리스도 아닌 세드릭이었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다.

“세드릭 님이 그걸 어떻게…….”

“날 뭘로 보고? 나, 나도 기억하거든? 네가 자기소개 했던 거 말이야. 민트 맛 싫어한다고 했잖아.”

아, 내가 싫어하는 음식도 말했었던가.

세드릭의 어쩐지 묘하게 우쭐대는(?) 듯한 얼굴을 보니 기억이 났다.

“……네, 맞아요. 싫어해요.”

“그런데 왜 그걸 먹고 있어. 어서 뱉어. 너 지금 똥이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 하고 있는 건 알아?”

그 물음을 듣고서 나는 두 손으로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으음, 표정 관리에 실패한 게 많이 티 났나.

그러고는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근데 이미 삼켰어요.”

내 대답을 들은 세드릭과 다른 아이들의 표정이 뜨악한 얼굴로 변했다.

곧이어 세드릭이 말했다.

“그럼 어서 토해!”

“아, 그건 좀…….”

나는 손을 내저었다.

다행히도 세드릭은 더는 토하라 권유하지 않았다.

대신, 답지 않게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

이윽고 세드릭은 조심스럽게 내게 권유했다.

“그럼 이 푸딩, 나랑 같이 먹어.”

그렇게 말함과 동시에, 세드릭은 제 스푼으로 푸딩을 푹 떠서 내 앞에 내밀었다.

“자, 아 해봐.”

“네에?”

채 거절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라, 나는 당황해 그저 손만 내저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완고했다.

“아, 나 팔 아파. 빨리 먹어.”

스푼의 무게가 얼마나 된다고, 팔이 아프다며 징징대기까지.

결국 하는 수 없이 받아먹으려다…… 코앞에 닿은 스푼에 정신을 차리고 질문했다.

“잠깐, 이 스푼.”

“왜?”

“입 대셨어요?”

내가 찌릿 쳐다보는 시선에, 세드릭이 아차 하며 황급히 변명했다.

“아냐! 아직 한 번도 안 먹었어. 봐, 새것이라니까.”

세드릭은 은으로 만들어진 스푼을 조명에 이리저리 비춰보며 제 말을 증명하고자 애썼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알았어요. 나눠 먹어요.”

그리고 세드릭이 건넨 푸딩을 먹었다.

아, 역시 이 맛이라니까.

부드러운 바나나와 달콤한 초콜릿의 환상적인 조화! 오천 번 먹어도 안 질릴 맛이다.

“으음, 최고.”

나도 모르게 혼잣말이 절로 나왔다.

그리고 다시 세드릭에게 스푼을 돌려주려는데, 문득 식기를 공유하면 병에 걸리기 쉽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그냥 새 스푼 쓰세요.”

그리고 하녀를 불러 새 스푼을 가져다주었다.

세드릭이 옆에서 ‘깔끔 떨기는’ 하고 투덜대는 소리를 냈지만 무시했다.

바로 그때.

“켁! 켈록!”

“뭐, 뭐야! 제이크? 괜찮아?”

갑작스레 제이크가 푸딩이 목에 걸리기라도 했는지 사레들린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기침을 내뱉었다.

나는 깜짝 놀라 제이크의 옆에 다가가 물을 건네주었다.

“……괜찮아진 거야?”

“응. 푸딩이 너무 달아서 그랬나 봐.”

다행히 물을 한 잔 마시더니 제이크는 다시 멀쩡해졌다.

시뻘게졌던 얼굴도 다시 평소대로의 낯빛을 되찾았으니까.

‘휴, 다행이다. 그나저나 조심해야겠네. 푸딩처럼 무른 걸 먹고도 사레들릴 수 있구나.’

안도의 한숨을 쉬고서, 다시 내 자리로 와서 앉았다.

방금 제이크 때문인지 테이블의 분위기는 한층 썰렁해져 있었다.

“저기, 에미르 영애님…….”

하지만 마침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그 정적을 깨 주었다.

앨리스였다.

앨리스가 내게 뻗은 자그마한 손끝엔, 푸른빛의 말랑말랑한 블루베리 젤리 한 스푼이 들려 있었다.

“이걸 왜 제게?”

“제 것도 한번 드셔보시라고…….”

당황해 질문하니, 앨리스가 햇살처럼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거절할 수 없는 미소였다.

“……감사합니다.”

결국 나는 앨리스가 내민 젤리를 우물우물 삼켰다.

그걸로 끝일 줄 알았는데.

“얘, 내 것도 먹어봐.”

“……네? 아.”

곧바로 옆에서 무심히 구경하고 있던 니나이나까지 가세해 제 딸기 젤리를 내 입에 넣어주었다.

이번에는 권유가 아니라 반쯤 명령이었다.

게다가 마지막으로, 제이크까지 내게 푸딩을 먹여주니 내 입은 더 이상 뭘 먹을 수 없을 만큼 볼이 빵빵해졌다.

우물우물…….

어째 젤리와 푸딩만으로도 배가 빵빵하게 차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녁은 안 먹어도 되겠네.’

그때였다.

푸딩 그릇을 다 비우고서 여유롭게 주변을 둘러보던 니나이나의 눈에 뭔가가 띈 모양이었다.

“이건 뭐지? 양말인가?”

니나이나가 보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린 나는 깜짝 놀랐다.

그러고 보니 저게 있었지.

어제 방 정리할 때 깜빡하고 안 챙겨둔 모양이었다.

니나이나가 본 것은 말 그대로 양말이었다.

하지만 절대로 그냥 양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저건 내가 손수 뜨개질한 거니까.

“네, 맞아요. 제가 만들었어요.”

“오, 그래?”

니나이나가 신기한 듯 감탄했다.

나는 일어서 니나이나의 곁으로 갔다.

마침 생각난 김에, 제이크에게 줘야겠다고 생각하면서.

그렇다.

이 양말은 다름 아닌…… 유치원 개원 첫날에 제이크에게 약속했던 바로 그 양말이었다.

‘고마워, 제이크. 이거 내가 만든 건데, 나중에 시간 나면 너도 하나 만들어 줄게.’

그때의 나는, 칭찬받았다는 기쁨에 들떠 앞일을 생각하지 않고 가벼운 마음으로 약속했었다.

유치원을 다니고 나서부터 이런저런 일들로 바빠 채 뜨개질할 시간이 나지 않을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했다.

몇 달이 지난 이제야 양말이 완성된 건 그래서였다.

“제이크, 받아. 내가 전에 주기로 했던 양말이야.”

뿌듯한 표정으로 제이크에게 양말을 건네자, 제이크의 표정이 환해졌다.

“고마워! 잘 신고 다닐게. 미르.”

“응!”

제이크가 기뻐하는 것 같아 덩달아 나도 행복해졌다.

다행히 처음 만들었던 것보다 훨씬 실력이 좋아져서, 자랑스럽게 선물할 수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둘을 본 나머지 아이들도 호기심이 생긴 모양인지, 근처로 모여들어 구경하기 시작했다.

“우와, 이, 이걸 정말로 에미르 님께서 직접 만들었어요? 대단해요!”

앨리스는 폭신한 털실의 촉감에 감탄하며 칭찬을 퍼부었고, 세드릭은 의심의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이 대신 만들어 준 거 아냐? 수상한데.”

그만큼 잘 만들었다는 뜻이겠지만, 같은 말도 저렇게 하면 칭찬으로 들리지 않는다.

나는 콧방귀를 흥 뀌며 으쓱였다.

“제 실력이 좀 나쁘지 않죠?”

니나이나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괜찮네. 나야 비단 양말만 신지만, 털실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 내게도 선물해 줄래?”

“앗, 그건.”

갑작스러운 물음에 나는 시선을 회피했다.

물론 불가능한 건 아니다.

아주 어려운 것도 아니고.

애초에 황녀님이 선물을 부탁하셨는데 거절할 수도 없는 노릇이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유치원 아이들 걸 다 선물해 줘야 할 것 같은데?

주변의 초롱초롱한 시선들을 의식한 나는 식은땀을 삐질 흘렸다.

‘양말 네 켤레라…… 유치원 졸업하기 전엔 다 만들 수 있을는지.’

이걸 대답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싶어서 고민하던 찰나.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그럼 이건 어때요? 제가 뜨개질하는 방법을 알려드릴게요. 다 같이 직접 양말을 만들어요.”

* * *

다행히도 내 제안을 다들 마음에 들어 해주었다.

나는 내 방 한쪽의 서랍을 열어 그 안에 보관해 두었던 털실들과 대바늘들을 꺼냈다.

“좋아하는 색깔로 가져가세요.”

“난 붉은색.”

“저, 전 이걸로 할게요.”

니나이나와 앨리스는 각각 붉은색, 하늘색 실을 챙겨갔다.

그리고 세드릭은 털실 뭉치 앞에서 한참이나 고민하더니 회색 실을 챙겼다.

“제이크, 너는?”

“나는 초록색으로 할게.”

그렇게 모두 털실과 바늘을 고르고, 내 앞에 일렬로 쪼르륵 의자를 세워두고 앉았다.

‘이러고 있으니까 내가 꼭 선생님이라도 된 것 같다. 히히.’

어쩐지 으쓱해져서, 나는 열과 성을 다해 뜨개질을 가르쳐 주었다.

내 설명이 나름 괜찮았던 걸까? 서투르지만 다들 잘 따라와 주고 있었다.

“신기하고 재밌구나. 양말을 직접 만들어 신다니.”

니나이나는 자신이 신을 양말을 제가 직접 만든다는 사실에 꽤나 즐거워 보였다.

힐끗 저편을 보니, 니콜라스는 아직 동화책을 읽는 중이라 딱히 뜨개질엔 관심이 없어 보였고.

제이크는 내게 보답해 주겠다면서 열심히 양말을 짜는 중이었다.

문제는 나머지 두 명이었다.

앨리스와 세드릭은 어쩐지 내가 떠준 양말에 조금 미련이 있는 모양이었다.

“저기, 에미르 님…….”

“왜 그래요, 앨리스? 어려운 거라도 있어요?”

아닌 게 아니라, 앨리스가 내게 조심스레 접선해왔다.

무언가 할 말이 있어 보이는 표정으로.

“그, 그게 아니라, 혹시 제가 뜬 양말이랑…… 지금 에미르 님이 뜨고 있는 양말이랑 나중에 바꾸면 안 되나 해서요.”

살짝 쑥스러워 보이는 얼굴로 앨리스가 웃었다.

“저도 제이크 공자님처럼 에미르 님이 떠 주신 양말을 갖고 싶어요.”

“좋아요, 그렇게 해…….”

“잠깐!”

내가 고개를 끄덕이려던 찰나, 세드릭이 끼어들었다.

“그건 안 돼. 왜냐하면 나도 네가 뜬 양말이 갖고 싶으니까. 앨리스 말고, 내 거랑 바꾸자.”

“안 돼요! 제가 먼저 말했다고요!”

당황한 앨리스가 손을 내저었다.

‘이런…….’

두 사람 사이에서 난감해져 버린 나는 뒷목을 잡았다.

어쩌면 좋지?

‘아, 그러면 되겠다.’

다행히도 좋은 생각이 곧바로 떠올랐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거 어때요? 두 분 중에 더 양말을 빨리 완성한 사람 거랑, 제 거를 바꾸는 거예요.”

내 제안에, 두 사람은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찬성하는 대답이 되돌아왔다.

“조, 좋아요. 저는 이길 자신 있어요.”

“하! 나야말로. 검술 훈련하는 시간 빼고 매일 뜨개질만 할 거다.”

“어쩌죠, 저는 따로 훈련하는 게 없어서…… 시간이 많으니 제가 더 빨리 완성할 거 같은데…….”

어쩐지 두 사람 사이에서 경쟁의 불꽃이 파박 튀고 있는 듯했다.

“흥, 그럼 나는 내 하인들에게 뜨개질을 시킬 거다.”

아, 이건 좀 아니지.

세드릭의 말에 내가 끼어들었다.

“다른 사람 시키는 건 반칙이에요. 들키면 탈락.”

“……아오.”

“검이 아니더라도, 뭐든지 간에 정정당당하게 승부하셔야죠.”

세드릭은 내 말에 더 이상 토를 달지 못했다.

그렇게 두 사람의 폭풍 같은 뜨개질 경쟁이 시작되었다.

세드릭과 앨리스는 각각 의자에 앉아 서로를 마주하는 자세로 고개를 숙인 채 한마디도 않고 뜨개질에 열중하고 있었다.

물론, 중간중간에 혼잣말처럼 서로를 견제하는 듯한 말이 들리긴 했다.

“흥, 앨리스. 아무리 네가 내 약혼자라지만 절대 봐주지 않을 거다.”

“세드릭 님이야말로 긴장해야 할 거예요. 저 역시 안 봐드릴 테니까요.”

저기, 이쯤 되면 서로를 쳐다보지만 않았지 혼잣말이 아닌 것 같은데…….

괜히 그사이에 낀 나만 뻘쭘해지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이제 슬슬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와버리고야 말았다.

“뭐?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다고? 거짓말이지?”

“조금 더 있고 싶었는데. 뭐, 다음에 또 오면 되니까. 초대해 줄 거지?”

모두 아쉬워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뜨개질에 열중하다 보니 시간이 속절없이 지나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다들 집에 돌아갈 준비를 하던 중, 니콜라스가 내게 다가왔다.

품에는 아직 채 읽지 못한 동화책 서너 권을 들고서.

“이 동화책, 내게 팔아라. 금화 500개를 주마.”

“……!”

니콜라스가 대뜸 한 말에 나는 말문을 잃었다.

금화 500개면 대체 얼마나 큰 돈이지? 아니, 그보다 그런 큰돈을 겨우 책 몇 권 사는 데에…….

금화의 가치를 계산하던 나는 머리가 아파졌다.

내가 말이 없자, 니콜라스는 뒤늦게 변명처럼 이유를 덧붙였다.

“황궁에는 이런 동화책이 없다. 나머지도 읽어보고 싶은데 시간이 다 되었으니.”

“죄송하지만 팔 수는 없어요, 황자 전하.”

나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니콜라스의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자 니콜라스가 당황하며 되물었다.

“어째서지? 돈이 모자라? 더 필요한가?”

니콜라스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리고 저는 달마다 꼬박꼬박 용돈을 받기 때문에 돈은 괜찮아요.”

사실 거짓말이었다.

금화 500개라니, 그런 막대한 금액에 욕심이 안 생긴다면 인간이 아닐 거다.

다만 저 동화책들은 대부분 유모나 부모님이 직접 골라준 것들이라, 아예 팔아버릴 수가 없었다.

추억과 사랑이 담긴 책이란 말이야.

“……그런가.”

니콜라스는 어쩐지 드물게 실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나는 니콜라스가 뒤돌아 가버리기 전, 재빨리 다음 말을 이었다.

“파는 건 안 되지만! 빌려드릴 수는 있어요!”

“……!”

“황자 전하랑 저는 같은 유치원 다니는 친구잖아요. 그러니까, 믿고 빌려드리는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씨익 웃었다.

그러자 니콜라스는 잠시 멍한 얼굴로 조용히 읊조렸다.

“친구…….”

“네, 친구요.”

나는 고개를 몇 번 끄덕여 줬다.

이내 니콜라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로 대답했다.

“알았다. 그럼 며칠만 빌려다오.”

“좋아요. 빌려 가세요.”

이윽고 책을 든 니콜라스의 뒷모습이 천천히 멀어졌다.

나는 잠시 멈칫하다, 이내 친구들을 배웅하기 위해 계단으로 내려갔다.

“모두, 뜨개질하다 어려운 게 생기면 내일 유치원에서 저에게 물어보세요!”

다들 품 안에 짜다 만 뜨개질감을 하나씩 안고 있는 모습이 어쩐지 미소를 절로 나오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노을 지는 하늘을 배경으로 마차가 하나둘씩 떠났다.

으음, 이제 나도 슬슬 여유로운 저녁 시간을 준비해야 할 때인가.

……분명 그런 줄 알았는데, 세드릭과 앨리스가 탄 마차의 문이 출발하기 직전 다시 열렸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린 앨리스가 이쪽으로 뛰어오는 게 보였다.

‘으응? 뭔가 두고 간 거라도 있나?’

의아해진 나는, 저택으로 들어가지 않고 멈춰 서 앨리스를 기다렸다.

마침내 앨리스가 숨을 몰아쉬며 내 앞에 다가섰다.

“……하아, 사실 오늘 에미르 님께 꼭 드릴 게 있었는데……. 못 드리고 그냥 갈 뻔했어요.”

내게 줄 것이 있다고? 금시초문이었다.

그리고 곧이어 앨리스는 제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이, 이 목걸이예요. 꼭 받아주세요. 꼭이요!”

그러고는 내가 목걸이를 확인할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돌아서 재차 뛰어가 버렸다.

나는 잠깐 멍하니 그런 앨리스의 뒷모습만을 바라보다, 마차가 떠나고 나서야 정신을 차리고 내 손 안의 정체불명 목걸이를 확인했다.

“……!”

다음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라고야 말았다.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 목걸이는 다름 아닌…….

‘이, 이건. 원작에서 앨리스가 니콜라스에게 주는 목걸이잖아!’

그렇다.

바로 작중에서 주인공 커플의 사랑의 표식으로 나오던 목걸이였던 것이다.

“……아니, 이걸 대체 어쩌지.”

나는 멍청한 표정으로 황망하게 마차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로.

다시 돌려주기엔, 앨리스의 꼭 받아달라는 당부가 신경 쓰이고.

그렇다고 그냥 냅다 가지기엔 원작이 신경 쓰이…… 고, 가 아니지?

‘생각해 보자. 어차피 내가 개입한 순간부터, 원작은 이미 어그러진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그리고 따지고 보면 내 목표는, ‘원작을 잘 보존하자’도 아니다.

내 1차 목표는 그냥 유치원 아이들과 모두 친하게 지내는 것.

그리고 최종 목표는 미래에 다 컸을 때도 평화롭고 연줄 끈끈한 인간관계를 유지하고 싶을 뿐이야!

‘그러니까.’

이 목걸이는 내가 가진다.

먼저 가진 사람이 임자 아니겠어?

‘피폐 원작 따위 알게 뭐람.’

그렇게 나는 앨리스와의 커플 목걸이를 획득하게 되었다.

유후!

* * *

그로부터 며칠 후.

유치원에 등원하자마자, 대뜸 내 앞을 가로막는 한 인영에 깜짝 놀라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나, 나! 벌써 반 가까이 떴어. 이 정도면 내가 이기겠지?”

알고 보니, 그 며칠 사이 빠르게 양말 한 짝을 반쯤 만들어낸 세드릭이 아침부터 내게 자랑하기를 벼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오, 정말 빠르네요. 잘하면 이길 수도 있겠어요.”

나는 예의상 미소를 지으며 세드릭을 격려해 주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기뻐하기는커녕 도리어 성을 냈다.

“뭐? ‘잘하면 이길 수도’라니? 당연히 내가 이기지. 그걸 말이라고.”

아무래도 세드릭은 그냥 칭찬으로는 만족을 못 하는 성미인가 보다.

무조건 자기가 최고여야만 한다는 건가…….

그때, 한발 늦게 가방에서 제 뜨개질감을 가져온 앨리스 역시 내게 다가왔다.

“……세드릭 님은 반 가까이 뜨셨지만, 저는 이미 반 넘게 떴어요! 에미르 님.”

“어머나.”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터뜨렸다.

그도 그럴 게 앨리스의 솜씨란 정말로 꼼꼼해서, 과장 조금 보태 공장에서 짠 듯 멋진 퀄리티를 자랑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로만 보면 진짜로 앨리스가 이길 것 같네요.”

내 대답에 앨리스가 밝은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세드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쩐지 앨리스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하게 올라간 것 같지만, 각도 때문에 생겨난 착시 현상일 거다.

“으으……. 더 분발하겠어. 이제 잠도 7시간만 잘 거야. 검술 훈련 제외 나머지 모두 뜨개질에 올인한다.”

그리고 세드릭은 혼자서 열등감 넘치는 말투로 무언가를 중얼중얼하고 있었다.

“……너무 무리하지 마세요. 세드릭 님. 어차피 지실 텐데…….”

직후, 앨리스는 고개를 갸웃하며 세드릭에게 뭐라 속삭였다.

끝 문장은 뭐라고 한 건지 잘 안 들린다.

무리하지 말라고 하는 것까진 들렸는데.

‘에이, 모르겠다.’

그런데 왜 세드릭이 저렇게 짜증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거지. 흐음.

그보다! 오늘은 아주 중요한 날이었다.

물론 뜨개질도 중요하지만, 그래도 기다리고 기다리던 날이라는 게 있잖아?

‘바로, 마니또 뽑기를 하는 날이라고!’

며칠 전, 내가 선생님인 에드몽 부인에게 직접 제안한 것이었다.

‘……이런 게임을 하면, 다 같이 친해지고 좋을 것 같아요!’

‘오, 좋은 생각이네요!’

전생에서도 학기 초면 서로 간에 더욱 친해지기 위해, 간혹 하고는 했던 마니또 게임.

내가 이걸 제안한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어째, 다들 나와는 친해도…… 서로 간의 사이가 조금 서먹서먹한 것 같단 말이지.’

그래서, 다 같이 친해져 보자고 계획한 거란 말이다.

음하하.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이왕이면 모두 다 함께 놀면 좀 좋아?’

* * *

마침내 마니또 뽑기를 할 시간이 돌아왔다.

에드몽 부인의 설명에, 다들 처음엔 낯설어했다.

“마니또가 뭐야, 오라버니?”

“그러게나 말이다. 나도 처음 들어보는구나.”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해를 마친 아이들은 신기해하며 어서 뽑고 싶다며 안달복달이었다.

“……마니또가 이런 거구나. 저는 에미르 영애님의 마니또가 되고 싶어요.”

“그럼 나중에 정체를 밝히기 전까지는 아무도 누가 내 마니또인지 알 수 없는 거네? 이거 좀 재밌겠다.”

그렇게 두근대는 뽑기 타임이 지나고.

각자 몰래 자신들의 마니또가 적힌 종이를 확인하게 된 아이들의 표정엔 희비가 갈렸다.

“호오, 정말이지 예상 못 했는데.”

제일 먼저 쪽지를 뽑은 니나이나가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에 당황한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황녀 전하, 마니또는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비밀로 해야 해요.”

“알고 있어. 말 그대로 예상 못 한 상대라서 그래.”

니나이나가 어깨를 으쓱였고, 이내 내 시선은 앨리스에게로 향했다.

“……어려워요.”

어렵다니? 앨리스는 아리송한 한마디와 함께 울상을 지었다.

잘은 몰라도 꽤 친해지기 어려운 상대가 뽑힌 모양이다.

‘힘내, 앨리스.’

그리고 마침 눈이 마주친 제이크는, 나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난가?

“아쉽네요.”

근데 아쉽다고 하는 걸 보니 나는 아닌 모양이다. 쳇.

그럼 어디 보자.

세드릭은 누굴 뽑았으려나? 또다시 시선을 돌려 세드릭을 보자, 피식 웃으며 중얼대는 게 들렸다.

“이건 뭐, 쉽네. 거의 매일 보는 얼굴 아니야.”

세드릭! 스포일러 금지야!

라고 외치려고 했는데, 생각해 보니 말이야.

‘거의 매일’이라면 어차피 여기 유치원 원생들 모두 해당하는 거 아닌가?

‘세드릭, 은근히 포커페이스인지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니콜라스.

어디 있지?

‘아, 저기 있다. 그런데…… 응?’

니콜라스를 발견한 나는 표정을 읽어보려고 했다.

그런데 대체 왜? 니콜라스가 나를 발견하자마자 곧바로 무표정을 한 채 고개를 휙 돌려버리는 게 아닌가.

‘뭐, 뭐지. 나한테 화났나……?’

하지만 화날 일이 없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그냥 착각이겠지, 뭐.

나는 별걱정 하지 않고 그냥 넘어갔다.

그리고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내 마니또는 누굴까?

다른 아이들이 뭘 뽑았나 확인하느라, 정작 내 걸 펼쳐보지 못한 나였다.

그리고 두근대는 마음으로 천천히 쪽지를 펼친 난, 이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니콜라스 황자님이네?’

이거, 아주 어려운 상대가 걸려버렸는걸.

마니또로서 뭘 해줘야 할지 벌써 난감하다.

아주아주 어려운 언어로 된 책이라도 사 줘야 하는 건가…….

‘고대의 무덤에서 발견된 서적이라든지 말이야.’

어쩐지 농담이 아니라, 그런 걸 선물이라고 갖다주면 니콜라스는 정말로 좋아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자님도 참, 취향이 독특하시지.’

일단 당장에 깊은 고민을 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마니또 기간은 일주일이니까, 그사이에 차근차근 방법을 생각해 내서 황자님을 향한 깜짝 선물을 해드려야지.

이 이벤트는 따지고 보면 내가 기획한 거나 마찬가지니까, 기획자로서 열과 성을 다해(?) 참여해 보겠다는 다짐을 했다.

‘아, 일단은 편지부터 써볼까.’

마니또로서 기본 중의 기본.

그것은 바로 직접 쓴 손편지가 아니겠는가.

그날, 집에 돌아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종이 중 가장 질이 좋은 걸 골랐다.

그리고 정성껏 편지를 쓰기 위해 오랜만에 책상에 앉아 만년필을 들었다.

‘글씨체로 미리 알아보면 재미없을 테니까. 왼손으로 써야지.’

참고로 나는 오른손잡이였다.

이런 게 또 마니또 게임의 묘미 아니겠어. 킥킥.

[안녕하세요, 황자님.

저는 황자님의 마니또입니다.

사실 저는 전부터 황자님이랑 꼭 친해지고 싶었어요.

하지만 쉽게 다가가지 못했습니다.

황자님은 노는 걸 싫어하고 책 읽는 걸 좋아하시니까요.

네, 저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하지만 오늘부터 어려운 책도 용기 내서 읽어볼게요.

황자님과 친해지기 위해서요.

다만, 아무리 그래도 수학책은 싫어요.

저는 수학을 못 하거든요.

황자님께서 이런 못난 저랑 친우를 해주실지 모르겠지만, 부탁드려요.

친구가 되어주세요. 꼭이요.]

“이 정도면, 너무 정보를 밝히지 않고 적당하네.”

편지보다는 쪽지에 가까운 글을 적은 나는 만족스럽게 펜을 내려놓았다.

다음 날, 제일 일찍 유치원에 도착한 나는 니콜라스의 서랍 안쪽에 쪽지를 넣어놓았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하기 직전.

서랍에 손을 넣은 니콜라스가 내 편지를 발견하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친우.”

니콜라스는 작은 입 모양으로 소리 없이 무언가를 중얼거렸다.

‘읽었다! 읽었다! 내 편지 읽었어!’

그 광경을 본 나는 속으로 뛸 듯이 기뻐했다.

너무 깊숙이 넣어놔서 발견하지 못하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도 기우였던 모양이다.

다만 겉으로 좋아하는 표정을 드러내면 머리 좋은 니콜라스가 금방 알아차릴 게 뻔한 일이었기에, 속마음과 다르게 나는 얼굴을 굳히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래도 너무 늦지는 않게 알아차려 줬으면 좋겠다. 히히.’

이런 아슬아슬한 재미라니, 역시 마니또는 최고다.

그러다가 나는 문득 생각을 전환했다.

‘그보다 갑자기 궁금하네. 나를 뽑은 내 마니또는 누굴까?’

일단 제이크는 아닐 것 같다.

내 얼굴을 보며 ‘아쉽다’고 말했으니까! 앨리스도 어쩐지 아닐 것 같고.

왜냐하면 나는 어려운 상대가 아니니까.

‘……아니니까! 당연히 아니지!’

하하.

그럼 혹시, 세드릭일까?

‘매일 보는 얼굴이라고 했으니까. 가능성이 아예 없진 않아.’

흐음. 어쩐지 내가 추리물의 탐정이 된 기분인걸?

하지만 난 추리 능력이 꽝이라는 게 함정이다.

……그래. 더 생각해 보자.

니나이나 황녀님일 수도 있어!

‘예상치 못한 상대라고 했으니까.

내가 나올 줄 미처 생각지 못한 거지.’

아니면, 니콜라스 황자님?

‘……황자님, 날 보고 고개를 휙 돌려버렸는데. 어째서였을까.’

하지만 반응이 너무 애매했기에, 확신하기 어려웠다.

결국 내 허접한 추리는 나를 더욱더 생각의 미궁 속에 빠져들게만 할 뿐이었다.

‘어휴. 이래서야 나는 절대 탐정은 못 하겠네. 탐정은 무슨, 탐정 보조의 하녀도 못 할 듯.’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느라, 제국어 초급 작문 수업을 통으로 날려 먹은 나였다.

잠시 쉬는 시간.

편안한 회장님 의자에 늘어져 멍 때리고 있는 나에게 앨리스가 다가왔다.

앨리스의 손엔 어느덧 완성된 양말 한 짝과 4분의 1 정도 만들어진 나머지 한 짝이 들려 있었다.

“중간 점검이에요!”

앨리스는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맑은 하늘 위에 떠 있는 햇살 같은 미소였다.

그래, 앨리스의 말대로 요즈음 내게 뜨개질감의 중간 점검을 맡는 두 사람이 있었다.

앨리스와 세드릭.

‘사실 딱히 내가 원해서 하는 건 아니지만. 좋아하니까 내버려 두자.’

세드릭은 오늘따라 중간 점검조차 않고 부지런히 의자에 앉아 뜨개질 중이었다.

검술 훈련으로 다져진 자그마한 손이 파바밧 빛의 속도로 움직이는 듯했다.

아무래도 앨리스보다 뒤처져 있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는 듯했다.

내 시선이 잠깐 세드릭에게 향한 사이.

앨리스가 잠시 고개를 갸웃하고서 내게 질문했다.

“그런데 에미르 님…….”

“왜 그래요, 앨리스?”

“제가 드린 목걸이, 평소에 하고 다니지 않으시는 거예요? 혹시 마음에 안 들어서 그러시는 거면…….”

앨리스는 짐짓 상처받은 듯한 얼굴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아아, 어쩐지 앨리스의 시선이 내 목덜미를 향한다 했더니만.

“아니에요! 오해예요, 앨리스. 마음에 안 들 리가 있나요.”

황급한 내 대답에 앨리스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나는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오히려 그 반대예요. 앨리스가 준 거라서 무척 소중하니까요. 막 매고 다녔다가 혹시라도 망가지기라도 할까 무서워서, 집에 있는 보물 상자에 넣어두고 왔어요.”

“다행이다…….”

내 말에, 앨리스는 진심으로 기쁜 듯한 얼굴을 했다.

그러고는 내 손을 꼬옥 잡으며 말했다.

“그렇지만 저는요, 에미르 님이 제가 드린 목걸이를 매일 걸고 다녔으면 좋겠어요. 사실…… 그 목걸이, 저도 똑같은 게 있거든요.”

말함과 동시에 앨리스는 제 옷깃 속에 가려져 있던 목걸이를 꺼내 보여주었다.

물론 나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다.

하지만 몰랐던 척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러자 앨리스가 빙긋 웃었다.

“예전에 유모가 줬던 건데, 좋은 친구가 있으면 이걸 나눠 걸라고 말했었어요.”

좋은 친구라고? 하지만 내가 원작에서 봤던 유모의 대사는 분명…… 아닌가, 뭐 비슷한 대사였던가.

아무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앨리스의 말은 제가 앨리스에게 좋은 친구라는 거네요?”

“네, 네. 맞아요. 그냥 좋은 친구가 아니라…… 아주아주 좋은 친구.”

앨리스는 내 문장 속의 단어를 살짝 정정해 주었다.

그러면서 덧붙였다.

“망가져도 괜찮으니까요. 매일매일 하고 다녀 주세요.”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 체인, 꽤나 낡아서 잘 끊어질 것 같던데.

그리고 그런 내 마음을 알아차린 건지 앨리스가 말했다.

“망가지면, 제가 나중에 커서 돈을 많이 벌어서 다른 걸로 사드릴게요. 엄청 큰 에메랄드와 엄청 굵은 순금 체인이 달려 있는 목걸이로요.”

“하하. 말로만으로도 고마워요, 앨리스.”

앨리스의 귀여운 미래 상상에 나는 그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사실 진짜로 미래에 앨리스는 돈을 많이 가지게 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앨리스는 여주인공으로서의 특별한 능력을 하나 가지고 있으니까.

‘그보다, 엄청 굵은 순금 체인 목걸이라니! 그런 걸 걸고 있으면 나 좀 알부자처럼 보일지도.’

그런 내 생각을 모를 앨리스는, 살짝 토라진 듯한 얼굴로 말했다.

“장난이 아니에요. 진심인데…….”

“물론 알아요. 진심인 거.”

“아, 아무튼 내일은 꼭 목걸이 걸고 오는 거예요! 목걸이 한 모습…… 보고 싶어요.”

“네. 약속해요.”

나는 앨리스와 손가락을 걸고 꼭꼭 약속을 마쳤다.

* * *

그리고 약속대로 목걸이를 걸고 유치원에 등교하게 된 다음 날.

“정말로 해주시다니, 감사해요.”

앨리스는 반짝거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고맙다고 말했다.

앨리스의 목에도 나와 같은 목걸이가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그 소박한 감동(?)은 오래가지 못했다.

교실 저편에서 소란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으악, 이게 뭐야?”

세드릭의 외침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놀라기도 했고 궁금하기도 해서, 나는 앨리스와 함께 세드릭의 곁으로 가보았다.

소란스러움에, 문틈으로 기사들도 우리를 주시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래서 뭣 때문에 놀란 건데?

어머, 단검?

“누가 내 서랍에 단검 넣어놨어?”

세드릭이 혼잣말로 경악했다.

세드릭이 꺼낸 그 ‘단검’이란 물체는, 은으로 된 칼날과 칼집, 엄청나게 질 좋아 보이는 나무로 만든 손잡이.

그리고 무엇보다 칼집 전체가 으리으리하고 화려한 보석들로 세공되어 있는 그런 검이었다.

좋은 말로 하자면, 완전 비싸 보이는 검.

아무나 가질 수 없어 보이는 예쁜 검!

그리고 나쁜 말로 하자면…….

“무슨 이런, 쓸데없이 장식만 주렁주렁 달려 있고 실용성은 없는 검이 다 있어?”

세드릭의 투덜거림이 대신해 준다.

세드릭은 진심으로 검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때.

세드릭의 투덜거림을 들은 니나이나가 벌떡 일어나, 버럭 소리쳤다.

“이런 고얀! 저 검이 무슨 검인 줄 알아? 황실의 검 장인이 직접 담금질하고, 가장 질 좋은 은과 가장 튼튼한 나무를 골라서 만든 귀한 검이란 말이다!”

갑작스레 벌떼처럼 파바박 쏘아진 말에, 잠시 교실이 조용해졌다.

몇 초 뒤, 니나이나의 기세에 얌전해져 있던 세드릭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황녀 전하께서 그걸 어떻게 아는지…… 요?”

그리고 세드릭의 말과 동시에, 나도 입을 열었다.

“이거 아무리 봐도 마니또가 선물해 준 것 같은데?”

눈치가 없어 보이는 세드릭을 위해 직접 나선 나다.

그런데 어쩐지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

또다시 교실이 조용해졌다.

심지어 니나이나까지도.

그리고 세드릭이 긴가민가한 표정으로 천천히 내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니까…… 이건 내 마니또가 선물해 준 거고. 황녀 전하께서는 이 검에 대해 매우 잘 알고 있고. 결론은…….”

그래, 세드릭 빼고 다들 몇 초 전에 눈치채 버린 것 같은 그 결론.

아쉽게도 세드릭은 사고가 느려도 한참 느렸다.

“전하께서 제 마니또네요?”

그래도 어찌어찌 정답에 도달하긴 한 모양이다. 휴우.

“……그, 그래! 내가 네 마니또다. 그래서 어쩔 건데?”

니나이나는 제 정체가 얼떨결에 들통나 버린 것이 꽤나 당황스러웠는지, 잔뜩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로 외쳤다.

그리고 세드릭 역시 당황했다.

“어쩔 건 아니고, 음, 어…… 귀한 검, 잘 받을게요.”

“그, 그래야지! 당연히. 그게 어떤 검인데. 내가 직접 마니또 놀이를 위해 황실 창고에서 구해 온 검이다. 영광으로 알아라.”

니나이나는 그제야 아닌 척 표정 관리를 하며 헛기침을 해댔다.

오, 맙소사.

니나이나 황녀님, 단 이틀 만에 마니또를 들켜 버리다니.

‘근데 어쩐지, 검이 보통 귀족가에서는 못 구할 만큼 좋아 보이더라.’

나는 속으로 납득했다.

한편 세드릭은 뒤늦게 제정신이 돌아왔는지, 또다시 투덜거리는 버릇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기사는 단검을 쓰지 않는데.”

“잔말 말고 쓰라면 써.”

“……옙.”

물론 곧바로 날아온 니나이나의 일침에 세드릭은 입을 닫아야 했다.

괜히 말했다가 본전도 못 건진 세드릭이다.

그 둘을 구경하던 나는 그만 웃음이 터질 뻔한 걸 참아야 했다.

‘역시 마니또는 재밌다니까. 막 싸우기도 하고, 오해도 하고 그러면서 친해지는 거지! 원래 다 그래!’

아무튼, 덕분에 재밌는 구경을 했다.

고집불통 세드릭이 저렇게 쩔쩔매는 모습을 보니 왜 속이 좀 시원해지는 것 같지?

이후 한바탕 소란이 잠재워지고, 나는 조용히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그런데…… 내 책상 안에 보이는 이 수상한 편지지는 뭐지?

‘내 마니또구나!’

나는 기쁜 마음으로 편지를 집어 가방 안에 재빨리 넣었다.

집에 가서 혼자서 몰래 봐야지.

* * *

그렇게 유치원이 끝난 후.

내 방에 도착해 편지를 펴서 훑어본 나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너무 쉽잖아.”

기대감이 푸시식 식었다.

허무하게 느껴지리만큼, 내 마니또가 누군지에 대한 힌트가 이 편지지에 대놓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편지를 쓴 당사자는 의도한 게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아니, 그래도 그렇지! 저기, 추리 왕초보인 제가 보기에도 이건 좀 너무한 것 같아요! 안 그래요, 니콜라스 황자님?

“누가 봐도, 황자님이 쓰신 편지인걸.”

일단 증거 하나.

편지지가 황궁에서만 쓰이는 은은한 금박을 두른 고급 종이로 되어 있다.

유치원에서 황궁 사람이란 니콜라스와 니나이나 둘뿐인데, 니나이나는 세드릭의 마니또니까 니콜라스가 내 마니또라는 사실.

그리고 증거 둘.

나는 애써 필체를 가리려 왼손으로 쪽지를 적었건만, 이 편지는 평소 쓰는 손으로 적은 듯 단정한 필체로 되어 있다.

그리고 그 필체는 누가 봐도 니콜라스의 것이다.

마지막으로 증거 셋.

……이 편지의 말투, 꼭 내가 전에 니콜라스에게 보냈던 거랑 비슷하다.

아무래도 내 쪽지를 참고해 쓴 게 아닐까.

아, 결국 마니또를 시작한 지 이틀밖에 안 된 시점에서, 두 명이나 정체가 밝혀져 버렸다!

다행히도, 마니또의 정체를 알아버린 탓에 생긴 허무함은 아주 잠시였다.

나는 이내 살짝 미소 지었다.

“……그래도 신기하긴 하네. 우리가 서로 쌍방 마니또였다니.”

아직 니콜라스는 내가 제 정체를 알아차렸다는 사실을 모를 거다.

‘그럼 역시, 힌트를 좀 줘야겠지?’

생각만 해도 벌써 두근거린다.

* * *

바로 다음 날부터 나는 작전을 개시했다.

은근 눈치가 없는 니콜라스가 나라는 마니또의 존재를 눈치챌 때까지 주변을 맴도는 작전이다.

자유 놀이시간.

책을 읽고 있는 니콜라스의 바로 옆 의자에 앉은 나는 뜨개질을 시작했다.

“……?”

니콜라스가 잠시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보더니, 이내 시선을 다시 책으로 돌리는 게 보였다.

사실 원래 니콜라스는 제가 책을 읽을 때, 옆에 누군가가 와서 방해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무언의 압박으로 쫓아내기를 몇 번, 니콜라스의 옆은 암묵적으로 공석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별소리 않고 눈감아주는 걸 보니, 내가 제 마니또라고 봐주는 건가?’

흐음.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 나는 신나게 뜨개질에 박차를 가했다.

물론, 중간중간에 옆에 앉아 있는 니콜라스를 곁눈질로 바라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한 10분쯤 지난 걸까? 마침내 내 시선을 눈치챈 모양인지, 니콜라스가 탁 하고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뭐 할 말이라도 있는 건가?”

그러고는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눈을 빤히 바라본다.

물론 나는 당황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있는 것도 같아요.”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확실히 말해.”

니콜라스는 내 모호한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듯했다.

그제야 나는 작게 웃으며 제대로 대답했다.

“제가 전하께 하고픈 말은…… 그러니까 전하랑 대화해보고 싶었어요.”

“대화라고?”

“네. 지난번 후작저에 오셨을 때 몇 마디 한 거 가지고는 좀 아쉬워서요. 유치원에 다닌 지 벌써 몇 날 며칠이 지났는데, 생각해 보니 황자님과는 별 이야기를 못 해본 거 있죠.”

아쉽다는 투로 휴 한숨과 함께 투덜거리니 니콜라스가 낯선 얼굴을 했다.

뭐랄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었을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그런가…….”

“아무래도 전하는 조금 다가가기 어려운 분이시니까요. 그래도 다행이에요. 혹시라도 전하께서 저를 싫어하면 어쩌나 했는데 그건 아닌 것 같아서요.”

지난번에 동화책도 빌려 가셨잖아요. 맞죠?

그렇게 물으니, 니콜라스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그러고 보니 마침 동화책에 대해 할 말이 있는데, 네게 빌려 간 것들 다 읽었다. 내일은 돌려주도록 하겠다.”

“앗, 벌써 다 읽으셨구나. 전하 완전 속독가시네요!”

내 짧은 감탄사에 니콜라스는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은근한 자기 자랑이었다.

“속독만 하는 게 아니라 다독도 한다.”

“황자님 짱.”

곧바로 간신배처럼 두 엄지를 추켜올려 줬더니, 니콜라스는 잠시 멈칫하다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너 정말 재밌는 애구나.”

으음, 몰랐는데 니콜라스는 유머 코드가 조금 독특한 것 같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 유머 코드도 그와 비슷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헤헤. 그보다 전하. 저 전부터 궁금한 게 있었는데 대답해 주실 수 있나요?”

“말해봐.”

은근슬쩍 질문을 던졌더니, 내 유머 감각에 살짝 느슨해진 니콜라스가 질문을 허락했다.

“황자님은 왜 유치원에서 항상 책만 읽으시는 건가요? 아, 물론 책을 읽는 건 아주 좋고 유익한 일이지만……. 저를 포함해서 다른 아이들과 놀지 않는 이유가 궁금해요.”

내 질문에 니콜라스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고, 잠시의 공백을 두고서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이 몸은 곧 아카데미에 조기 입학이 예정되어 있다. 수준이 안 맞으니 어울릴 수 없는 게 당연하지.”

“저, 그 ‘곧’이라는 건 언제인가요?”

“내년이다. 조기 입학 시험에는 이미 통과하고도 남지만, 조기 입학에도 제한 나이가 있으니까.”

“아하.”

니콜라스의 친절한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다.

수준이 안 맞는다는 말은 얼핏 듣기에 재수 없는 말처럼 들려도, 허풍이 아닌 사실이었으니까.

실제로 원작에서의 니콜라스도 그랬다.

남자 주인공으로서의 버프를 채우기 위해서인지 대단한 엘리트 황제로 설정되어 있었다.

물론 어느 한순간에 뿅 하고 엘리트가 될 리는 없으니, 어린 시절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보이는 것도 당연하겠지.

뭐 그런 건 차치하고서라도, 정말로 중요한 건 니콜라스는 내년이면 이 유치원을 떠나 아카데미에 있게 된다는 이야기였다.

‘어쩐지 서운한걸.’

어째서일까.

유치원 첫날 자기소개할 때부터 알고 있던 이야기지만 새삼 섭섭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그 속내를 감추고 또다시 질문했다.

“전하와 수준이 안 맞는다는 말, 무슨 말인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데요, 황자 전하. 정말로 이유가 그거 하나뿐이세요……?”

“그 질문, 무슨 뜻이지?”

니콜라스가 멈칫했다.

나는 재빨리 설명을 덧붙였다.

“말 그대로예요. 매일 혼자 지내시는 것이 정말로 그 이유뿐인가 해서요…….”

내 말에 니콜라스는 한참이나 말이 없었다.

대답을 듣게 된 건 1분 남짓이 흐르고 나서였다.

“겨우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함께할 뿐이다. 그 시간 동안 친해져 봐야 무슨 소용이겠어.”

그 대답을 들은 나는 깨달았다.

어쩌면 이게 처음의 말보다, 니콜라스의 본심에 더 가까운 대답일지도 모르겠다고.

니콜라스의 그 말을 듣고 나서, 우리 둘 사이에는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도, 니콜라스도 아무 말도 안 했다는 것처럼 다시 원상태로 돌아가 각자의 할 일을 했다.

하지만 그건 겉으로만 보이는 것일 뿐.

나는 손으로는 뜨개질하며 머리로는 분주히 생각하는 중이었다.

‘니콜라스는 모두에게 처음부터 안 보이는 선을 긋고 있었구나.’

‘그 선을 넘어서 친해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유치원에서 보내는 시간이 단 1년이라도, 아깝지 않은 좋은 추억이 될 수 있도록 해주고 싶은데…….’

나는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괜히 애꿎은 뜨개질감만 괴롭혔다.

하지만 계속해서 생각만 해봤자 달라지는 건 없을 거다.

역시,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대화를 해보자.

“황자님.”

아, 솔직히 말하자면 벌써 마니또를 밝히고 싶은 생각은 아니었는데.

“저는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아요. 아니, 솔직히 싫어하는 편에 좀 더 가까워요. 하지만 오늘부터 어려운 책을 읽어보기로 했어요. 황자님과 친해지기 위해서.”

“……너.”

내 혼잣말 같은 읊조림에, 여태껏 가만히 책을 읽는 척하던 니콜라스가 반응했다.

“네가 내 마니또였구나.”

“네.”

“허…….”

내 순순한 대답에 니콜라스가 허를 찔렸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역시 니콜라스는 내가 보낸 쪽지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구나.

“황자님도 제 마니또시죠?”

“그래, 맞다.”

뒤이어 내 물음에, 니콜라스도 순순히 제가 내 마니또임을 인정했다.

“제 편지를 따라 하시다니 너무했어요. 덕분에 너무 쉽게 눈치채 버렸는걸요.”

나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자 니콜라스가 변명했다.

“내 말투대로 썼다가는 금세 들킬 게 뻔해서, 네 편지를 조금…… 따라 했다.”

“하지만 말투를 제대로 숨기셨다고 해도 들통났을걸요.”

“어째서?”

“평소 쓰는 손과 반대쪽 손으로 써야 필체가 감춰지니까요.”

내 으쓱임에 니콜라스가 한 방 먹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후우. 앞으로 마니또를 하게 되면 참고하겠다.”

니콜라스는 제 실책이 꽤나 충격적이었던 모양인지 한참이나 말이 없다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런데 왜 갑자기 네가 마니또라는 사실을 밝힌 거지?”

“그건 제 진심을 알려드리기 위해서예요.”

“진심?”

“네. 편지에 쓴 대로 저는 황자님과 친해지고 싶거든요. 비록 황자님께서는 이 유치원에 1년만 계시겠지만, 그동안이라도 함께한다면 그걸로 괜찮아요.”

그러니까 우리 같이 놀아요.

이야기를 나누고, 가끔은 책도 읽어요.

책만 읽으면 지루하니까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밖에 나가서 뛰어노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저희랑 1년만 함께 놀아요, 전하.”

* * *

내 발언에 감동해서였을까, 그때를 시작으로 니콜라스는 몰라보게 달라졌다…….

같은 기적 같은 이야기는 아쉽게도 없었다.

하지만 확실히 달라지긴 했다.

적어도 이제 혼자서 책만 읽지는 않는다.

아니, 책을 읽다가도 내가 같이 놀자며 부르면 일어서서 와 준다.

비록 조금 안 내켜 하거나 ‘이번엔 또 무슨 일로 쓸데없이 부른 건가-’ 같은 생각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 있긴 하지만 말이다.

“종이에 왜 격자무늬를 그리는 거지?”

그리고 이번에도, 니콜라스는 내가 무언가를 열심히 종이에 그리는 모습을 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건 오목이라는 거예요.”

“오목?”

“네. 이렇게 하는 거예요.”

나는 니콜라스에게 오목 게임을 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다행히도 니콜라스는 뛰어난 지능만큼이나 이해력이 매우 좋아, 처음 들어보는 놀이인데도 두 번 설명하지 않고 이해시킬 수 있었다.

물론 간단한 게임인 것도 있지만 말이다.

‘내가 쭉 관찰해 본 결과. 니콜라스는 몸보다는 머리를 쓰는 쪽을 좋아하지. 나는 그 반대인데 말이야!’

그래서 결국, 전생에서 하던 놀이 중에 이곳에 없는 것들을 기억해 내서 니콜라스에게 알려주고 있는 거다.

간혹, 니콜라스가 ‘얜 제 입으로 머리가 나쁘다면서 어떻게 이런 듣도 보도 못한 놀이를 잘 알고 있지?’라는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긴 했지만 말이다.

그때마다 나는 평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놀이를 하녀들이 알려줬다면서 뻥을 쳤다.

“이번에도 내가 이겼구나.”

“……또 졌네요.”

하지만 정말로 슬픈 건, 알려준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니콜라스는 나를 족족 이기고, 나는 족족 지기만 한다는 것이었다.

정녕 타고난 두뇌는 환생으로도 어쩔 수 없다는 건가?

‘이건 진짜 자괴감 드는데.’

내가 울상을 짓자, 니콜라스가 펜을 내려놓았다.

“이런 놀이는 이제 그만하자.”

“재미없으신가 봐요. 제가 상대가 안 돼서.”

“그래, 맞아.”

“너무 순순히 인정하시니 마음이 아파요.”

하지만 재미가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기에, 하는 수 없이 게임은 중지되었다.

나는 니콜라스를 따라 일어섰고, 니콜라스는 그런 나를 뒤돌아보며 말했다.

“너도 나와 같이 책을 읽는 건 어떠냐.”

“저 책 싫어해요…….”

“어려운 거 말고. 네가 좋아하는…… 그, 동화책을 읽으면 되잖아.”

사실 동화책도 그리 좋아하는 건 아닌데.

나는 울고 싶은 기분이 되었다.

하지만 단언컨대 니콜라스가 즐겨 보는 그런 책들과 동화책을 비교해보자면 후자가 더 기꺼운 건 맞았다.

“알았어요. 같이 책 읽어요.”

배부르게 점심을 먹고, 의자에 걸터앉은 채 책을 보는 건 생각보다 나쁘지 않은 일이었다.

살짝 열린 창문 사이로 솔솔 들어오는 바람에 코끝이 간질거렸다.

“하암…….”

하지만 나는 동화책을 채 한 권도 읽지 못하고 하품을 내뱉었다.

잠 온다.

솔솔 온다.

나도 모르게 고개가 스르륵 떨궈지려 할 즈음, 니콜라스가 어이없다는 듯이 질문했다.

“벌써 자는 건가? 한창 대낮인데.”

어쩐지 저 뒤에 생략된 말이 있는 것 같다면 착각이겠지.

‘몹쓸 게으름뱅이 같으니라고’라든가.

물론 나는 신경 쓰지 않는다.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 버티고 있기에도 벅찼다.

“잠 와요……. 전하는 안 졸리세요?”

“책을 읽는데 졸릴 리가 없잖아.”

이상하네. 보통은 그 반대 아닌가.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황자님은 참 신기한 분인 것 같아요.”

“어떤 점이?”

“이것저것이요. 헤헤.”

내 실없는 대답에 니콜라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 저 표정도 이제 꽤 많이 본 것 같다.

매일 무표정 일색이던 니콜라스에게도 이렇게 다채로운 얼굴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요즘이었다.

“…….”

나는 눈을 끔뻑대며 니콜라스를 응시했다.

니콜라스는 언제 나를 향해 한심하다는 시선을 보냈냐는 듯 다시 원상 복구된 자세로 책을 읽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와중 내 눈에 띈 니콜라스의 동작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왼손으로 만년필을 빙그르르 돌리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책 읽을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하는 버릇인 듯했다.

나는 무언가를 깨달은 목소리로 작게 외쳤다.

“황자 전하도 특이한 버릇을 가지고 계시는군요!”

“뭐?”

“왼손으로 만년필을 돌리고 계시잖아요. 오른손으로는 책장을 넘기면서요.”

“아…… 내가 그랬던가?”

니콜라스는 자신도 처음 알았다는 듯 놀라워했다.

아무래도 사람의 버릇이 무의식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다 보니 자신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네. 근데 어떻게 그렇게 깔끔하게 잘 돌리세요? 전 해보려고 해도 자꾸 실패만 하는데요.”

“……나도 비결을 몰라. 그냥 어쩌다 보니 하게 된 거지.”

니콜라스가 난감한 얼굴로 대답해주었다.

나는 ‘흐음’ 하며 짧게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어디 한번 저도 다시 시도해 볼까 봐요. 으아아! 떨어졌다.”

하지만 한 번 둔재는 웬만해서 열 번 해도 둔재인 법.

데구루루,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에 들려 있던 만년필이 대리석 바닥을 굴러갔다.

“그렇게 하지 말고, 날 따라 해봐.”

몇 번이나 더 실패했을까.

옆에서 그런 나를 지켜보고 있던 니콜라스가 더는 못 봐주겠는지 한숨을 쉬며 시범을 해 보였다.

그러면서도 표정은 ‘내가 왜 이런 쓸데없는 것까지 해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라는 생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채였다.

“그래도 안 되네요. 뭐, 펜 돌리기 좀 못한다고 사는 데 지장이 있는 건 아니라서 다행이에요. 저는 이제 포기할래요.”

물론 그래봤자 소용없었다.

또 실패였다.

결국 나는 포기를 선언했다.

“포기할 거면 조금 일찍 하지 그랬어.”

니콜라스는 짧게라도 투자한 제 시간이 아깝다며 투덜거렸다.

그러더니 이내 네게 뭘 바라겠냐며 중얼거리고서 손을 휘저었다.

“됐다, 동화책이나 마저 읽어.”

“네에.”

사실 이 동화책 예전에 서너 번은 더 읽었던 건데.

내용도 다 아는데.

하지만 이거 말고는 딱히 볼 만한 것도 없다는 게 문제였다.

“저기요- 전하!”

그래서 또 채 5분을 버티지 못하고 니콜라스를 불렀다.

니콜라스는 이제 지겹지도 않다는 투로 대꾸했다.

“아, 또 왜 그래.”

오호라?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직 니콜라스 자신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니콜라스 특유의 할아버지 같은 황족 말투가 사라졌다.

‘그 정도로 귀찮은 건가…….’

흐음, 이번 질문만 하고 이제 더 귀찮게 하지 말아야겠다.

한 번 더 건드리면 짜증 낼지도.

“또 궁금한 게 생겼어요. 황자 전하는 이렇게 책을 많이많이 읽어서 미래에 무슨 사람이 되고 싶으세요?”

“무슨 사람이 되고 싶냐고? 장래 희망을 말하는 건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니콜라스가 고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제국의 황자이자 장차 황태자, 황제가 될 몸이지. 무슨 그리 당연한 걸 물어봐.”

역시 그런 건가.

하지만 너무 뻔한 답변이잖아!

“그럼 어떤 황제가 되고 싶으세요? 성군? 폭군? 희대의 천재 황제?”

“대담하네. 황자에게 그런 걸 물어보는 녀석은 네가 처음이야.”

“헤헤. 칭찬으로 들을게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또다시 니콜라스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일단 죽어도 폭군은 되지 않을 거다. 할 수 있는 만큼 성군이 되도록 노력해 봐야지.”

“멋져요. 전하.”

“……후우, 세상에 너 같은 백성들이 한두 명이 아니라고 생각해 보면 차기 황제로서 조금 갑갑하긴 하구나.”

니콜라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뭐, 뭐가 갑갑하다는 거지?

이건 아무리 봐도 욕 비슷한 것 같다.

“점심으로 먹은 생선 수프가 얹히기라도 하셨어요?”

“너 때문에 지금 얹히는 중이다.”

니콜라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황자님 지금 피식 웃으셨어요.”

“어이없어서 웃었어.”

“어쨌든 웃으셨네요.”

1년의 시간.

그중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도 상당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아직 남은 날이 더 많다는 거지.

“많이 웃어야 해요. 그래야 건강해져요.”

농담처럼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니콜라스를 바라봤다.

며칠 사이 눈에 띄게 달라진 모습이었다.

차가운 분위기에서, 한결 유해진 분위기로 바뀌었다.

‘니콜라스. 원작에서는 어땠을까. 어릴 때라도 한 번 웃어본 적은 있었을까?’

매일 책만 보다가, 커서는 황제가 되어 업무에만 시달리고…….

여주인 앨리스와 맺어진 이후에나 조금 행복했을 거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있는 이번 생에서는 다들 행복하게 웃었으면 좋겠어. 내가 그렇게 만들어 줘야지. 꼭.’

때문에 나는, 새삼 그렇게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 * *

그리고 마침내, 처음 마니또를 뽑은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고로 오늘 마니또를 발표하는 날이라 이거지.

“자아! 차례로 나오셔서 먼저 뽑았던 마니또의 이름을 말하고, 지난 일주일간 마니또에게 해주었던 선행을 발표해 주세요.”

에드몽 부인의 목소리와 함께, 제일 먼저 니나이나 황녀님이 앞으로 나섰다.

니나이나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입을 열었다.

“내 마니또는 다들 알다시피 세드릭이었어. 그리고 황실 최고의 검 장인이 만든 단검을 선물로 주었지.”

모두가 아는 사실이었다.

말하고 나서야 니나이나는 그때의 창피했던 기억이 되살아났는지 썩은 미소를 지으며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래, 뭐니 뭐니 해도 선행은 마음보다는 돈으로 하는 게 최고죠, 전하!’

나는 속으로 니나이나를 응원했다.

마침 그다음으로 앨리스가 일어서서 나오는 게 보였다.

‘누구려나?’

지난 일주일간 앨리스가 특별히 뭔가를 잘해주던 상대는 없었던 것 같은데 말이지.

아, 물론 나와는 여전히 끈끈한 우정을 자랑하긴 했다.

물론 내 마니또는 니콜라스였기에 해당 사항이 없었다.

“제, 제 마니또는…… 제이크 공자님이었어요.”

앗. 제이크였어?

이건 좀 의외였다.

“그리고 저는 제이크 공자님께, 일주일간 에미르 님의 옆자리를 특별히 양보해 드리는 선행을 베풀었어요.”

앨리스의 말이 끝나자 교실이 술렁댔다.

나 역시 당황했다.

아, 아니, 그런 걸 선행이라고 할 수 있는 건가?

“어쩐지, 그랬었구나. 친절에 감사해요. 앨리스 영애.”

그런데 제이크 넌 왜 또 고맙다고 하는 건데! 얘네들 좀 이상한 것 같아!

내가 얼떨떨해하고 있는 사이, 앨리스가 들어오고 다음으로 제이크가 나왔다.

“제 마니또는 황녀님이셨어요. 저는 황녀님께 마법 부채를 선물해 드렸어요.”

제이크의 말에 따르면, 그 마법 부채는 부쳐 주는 사람이 없어도 자동으로 펄럭펄럭 흔들리는 물건이라고 한다.

‘하지만 니나이나의 곁에는 항상 궁인들이 붙어 다닐 텐데.’

나는 조금 의아했지만, 이내 니나이나가 아주 마음에 드는 부채였다고 대답하자 납득했다.

그리고 세드릭.

“내 마니또는 앨리스였고. 같이 유치원 올 때마다 타고 다니는 마차 좌석에 특별히 푹신한 쿠션을 잔뜩 가져와서 깔아뒀지!”

아주 자랑스럽다는 표정으로 세드릭이 외쳤다.

그러자 앨리스가 깜짝 놀라며 중얼거렸다.

“……저, 하마터면 오해할 뻔했어요. 사, 사실 자리에 쿠션이 너무 높이 깔려 있어서 앉기가 힘들었거든요. 세드릭 님이 일부러 심술부린 줄 알았는데……. 오해해서 죄송해요!”

세드릭은 아이디어가 좋았으나, 배려심이 조금 모자랐던 모양이다.

그리고 이번엔 니콜라스의 차례였다.

“내 마니또는 에미르 영애였고, 일주일 동안 나는 영애에게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편지도 썼고, 심심해하는 영애를 위해 함께 놀아주기도 했지.”

으음, 어쩐지 뭔가 좀 거짓이 섞인 것 같은데요? 놀아주다니! 오히려 그 반대라면 반대였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가 발표했다.

“제 마니또는 니콜라스 전하셨어요. 저 역시 전하에게 정성껏 손편지를 적어드렸고요, 웃을 수 있게 도와드렸어요.”

“그걸 도와준 거라고 하기엔 좀.”

니콜라스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왜! 선행 맞잖아요!

* * *

그렇게 일주일간의 마니또 놀이는 막을 내렸다.

그동안 은근히 궁금하게 만드는 재미가 있었는데 말이지.

그래도 마니또 발표의 결과는 정말 예상치 못한 것이긴 했다.

그리고 마니또와 비슷한 시점에 마무리가 지어진 일이 또 하나 있었으니, 바로.

“완성했어요!”

“으아아, 드디어 끝!”

나조차 잠시 잊고 있었지만, 앨리스와 세드릭의 뜨개질 경쟁이 바로 그것이었다.

결과가 어떻게 되었냐고?

정말 놀라운 우연의 일치인지 뭔지, 두 사람은 점심시간이 끝날 무렵 거의 동시에 양말 두 짝을 완성했다.

“응? 너도 완성했냐? 이런!”

“……세드릭 님도 방금 다 하셨나 보네요.”

그리고 두 사람은 서로의 모습을 보고 당황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앨리스와 세드릭이, 내게 결과를 판정해 달라며 찾아왔다.

“에미르 님, 제가 이긴 걸로 해주세요!”

“무슨 소리! 우기면 다가 아니지. 승자는 나야. 그렇지?”

하아, 대체 어쩌면 좋지?

누구를 우승자로 선택해야 하는 거냐고.

‘잠깐, 두 사람 모두를 만족시킬 방법이 생각났어!’

난감하던 차에 좋은 아이디어가 떠올라, 나는 짝 하고 손뼉을 쳤다.

“두 사람 다 우승이에요!”

어쩌면 당연하게도, 앨리스와 세드릭 둘 중 누구도 기뻐하지 못하고 당황한 얼굴을 했다.

그도 그럴 게 양말은 한 켤레뿐이니까.

“그리고 상품으로 걸렸던 제 양말은, 각각 한 짝씩 나눠 가지는 걸로 해요. 어때요?”

하지만 이어진 내 제안에, 두 명 다 만족스러워하는 얼굴을 지었다.

“역시 에미르 님, 현명하세요!”

“오, 좀 천재 같네. 좋아. 그렇게 해.”

휴, 다행이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몰래 내쉬었다.

그런 게 어디 있느냐며 진짜 우승자를 뽑아달라고 했으면 진짜로 난감할 뻔했는데.

‘그보다 두 사람 다, 정말로 내가 만들어 준 양말을 갖는 것만이 목표였던 건가. 한 짝이라도 상관없이.’

그렇게 나는 앨리스와 세드릭과 양말 교환을 했다.

결과적으로 우리 셋은 모두 다 짝짝이인 양말을 가지게 되었다.

나는 하늘색과 회색, 앨리스는 하늘색과 하얀색, 세드릭은 회색과 하얀색.

‘뭐……. 다 기뻐 보여서 다행이네.’

세드릭은 짝짝이 양말로 바꿔 신고는 헤벌쭉한 미소를 지었다.

앨리스는 내가 준 양말을 바로 신지는 않고, 잠시 후에 바로 제 가방에 챙겨 넣었다.

* * *

그다음 날, 점심을 먹은 우리는 모두 들떠 있었다.

왜냐하면 오후에 야외 체험학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동안은 내내 실내에서만 수업한 탓에, 야외 수업은 거의 처음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안전과 보안 문제가 꽤나 커서였겠지.

그래도 오늘은 커다란 잔디 풀밭에서 즐겁게 뛰어놀 수 있겠다! 앗싸!

나는 피크닉이라도 하는 기분으로 겉옷을 챙겨입고 나설 준비를 했다.

그때 마침 제이크가 나를 부르더니, 완성된 양말을 주었다.

“이거, 아버지께 말씀드렸더니 마법을 걸어주셨어. 아무리 오래 걸어도 발에 땀이 차지 않는 마법이래.”

“우와, 진짜 고마워. 제이크! 최고로 유용한 마법 양말이야.”

그냥 줘도 그 정성이 갸륵해서 고맙게 받았을 텐데, 제이크는 무려 마법까지 걸린 양말을 선물해 주었다.

그것도 엄청 엄청 실용성 있는 마법!

어쩐지 제이크도 어제 분명히 완성하는 걸 봤는데, 바로 안 준다 했지.

근데 마법을 걸어줄 줄은 몰랐다.

‘아껴 신어야지. 헤헤.’

가방에 귀한 양말을 넣어놓고 돌아섰더니, 마침 외출 준비를 모두 끝낸 아이들이 보였다.

“우와, 황녀 전하. 이 모자 정말 예쁜데요?”

니나이나는 제 머리 크기의 서너 배는 되는 듯한 커다란 챙이 달린 외출용 모자를 쓰고 있었다.

내 칭찬에 니나이나는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내게 물었다.

“갖고 싶니? 줄까?”

“네? 아뇨!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니었는데…….”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었지만, 니나이나는 이미 제가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내게 건넨 참이었다.

“써봐. 아니, 내가 직접 씌워주지.”

니나이나가 그렇게 말한 직후, 환하던 내 시야가 커다란 모자로 가려졌다.

“아…… 감사합니다. 모자가 좋아요. 얼굴이 하나도 안 탈 것 같아요!”

게다가 뭘로 만든 건지는 몰라도 엄청나게 보드라워서, 보통의 밀짚모자처럼 살이 까질 일도 없을 것 같았다.

그러자 앞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그럼 네가 써, 그 모자.”

“하지만 제가 이걸 쓰면, 전하는 땡볕에 맨얼굴로 나가야 하실 텐데요.”

모자가 커서 여전히 니나이나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니나이나가 피식 웃는 소리는 들렸다.

“날 뭘로 보고? 챙겨온 모자는 이걸 빼도 다섯 개나 된다고. 뭐, 이 모자가 제일 마음에 들기는 했지만. 여봐라, 다른 모자를 가져와.”

니나이나는 내게 말하다 말고 옆의 시녀를 불러 심부름을 시켰다.

잠시 후 우리 둘의 앞에 모자 여러 개가 놓였다.

니나이나는 그 모자들을 둘러보면서 내게 다시 말했다.

“그 모자가 네게 제일 잘 어울리니 그건 네가 쓰고. 에미르. 네가 내 모자를 골라주도록 해라.”

헉.

졸지에 니나이나의 모자를 고르게 되어버렸다.

나는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고민에 빠져들었다.

‘이, 이게 좋으려나? 아니면 저거?’

아무래도 니나이나가 지금 진한 푸른빛의 원피스를 입고 있으니까, 하얀색이 잘 어울릴 것 같다.

그런 생각으로 나는 화사한 레이스가 달린 모자를 집어 들었다.

“이건 어떠세요? 전하가 입고 계신 옷에 잘 어울릴 것 같아요!”

“음, 좋아. 그걸로 하자.”

니나이나는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나는 마음속으로 조금 걸리는 것이 있었다.

‘말해보는 게 좋겠지. 에잇.’

아무래도 누군가에게 부탁하는 것은 영 서투른 나였기에 망설여졌지만, 곧 나는 니나이나에게 귓속말을 하기 시작했다.

“오, 그것참 좋은 생각이구나.”

그리고 니나이나는 미처 생각 못 했다는 얼굴로 내 말에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다행이다!’

첫인상과는 전혀 다르게 니나이나는 꽤나 여리고 마음씨도 넉넉한 면이 있었다.

곧 니나이나가 앨리스를 불렀다.

“앨리스 영애, 이리 와보겠어?”

마침 교실로 들어오던 앨리스가 영문도 모른 채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그런 앨리스에게 니나이나는 말했다.

“영애도 모자를 하나 골라보도록 해. 알다시피 오늘 야외 수업이 있잖아? 햇볕이 뜨거우니까 모자는 필수야.”

갑작스러운 제안에 당황해 굳어 버린 앨리스에게 니나이나는 망설이지 말고 빨리 고르라고 재촉해 댔다.

그래서일까, 앨리스는 ‘어, 어’ 하며 허둥대더니 이내 한 모자를 골라 들었다.

베이지 빛깔의 심플한 모자였다.

“저, 저는 이걸로…….”

아무래도 보석이나 깃털 같은 장식도 개중 제일 없고 해서, 제일 값싸 보이는 것으로 고른 눈치가 선했다.

아직도 앨리스는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는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런 앨리스의 선택에, 니나이나는 팔짱을 낀 채 삐딱한 태도로 되물었다.

“정말 이걸로?”

“네…….”

“이게 좋아? 바꿀 생각은 없고? 바꿀 기회 5초야. 5, 4, 3, 2, 1.”

기회라는 게 무색하게도 5초는 순식간에 빨리 지나갔다.

그리고 앨리스의 선택은 여전히 그대로였다.

그런 앨리스를 빤히 보며 니나이나는 말했다.

“앨리스 영애, 몰랐는데 안목이 꽤나 높은가 봐.”

“네?”

뜬금없는 소리에 앨리스가 당황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니나이나는 웃으며 설명했다.

“다른 모자들보다 이 모자가 제일 비싸거든. 동대륙에서 온 귀한 가죽 옷감으로 만든 모자야. 이걸 알아보다니 대단해.”

“그런……!”

제일 싸구려인 줄 알았더니 알고 보니 제일 비싼 것이었다.

그 진실을 뒤늦게 깨달은 앨리스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부담 갖지 말고 그냥 써. 이깟 모자는 내 옷방에 수십 개도 더 있으니까 말이야.”

니나이나는 굳어 있는 앨리스를 뒤로하고 시원하게 손을 흔들며 떠났다.

“그럼 이제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뒤이어 에드몽 선생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 *

유치원 근처, 귀족들의 저택이며 숲이 둘러싸고 있는 너른 들판.

그곳에 마차가 멈추고, 곧이어 마차에서 내린 우리는 하나같이 기쁨의 탄성을 질렀다.

“와아……!”

그 탄성의 이유는 저마다 다양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바깥의 자유를 처음 느껴봐서가 제일 큰 이유 아니었을까?

다들 제각각 황족, 귀족의 자제로 태어나 저택과 유치원 안에서만 자라났을 테니, 이런 자연은 또 처음이겠지.

게다가 마음껏 뛰노는 것을 싫어할 아이들은 없으니까.

물론 나도 포함해서 말이다.

“자, 다들 의자에 앉아주세요.”

마침 에드몽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풀밭 위엔 어느새 간이 의자 6개와 간이 테이블이 마련되어 있는 채였다.

나는 흘깃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를 지키고 있는 십수 명의 황실 호위 기사들이 보였다.

아주 든든한걸.

“오늘은 자연의 풍경을 감상하고, 짧은 동시를 써보는 수업을 할 거예요.”

선생님의 설명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풀밭과 어우러진 다양한 꽃들.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길러 놓은 게 아닌데도 이토록 아름다웠다.

이런 곳에서 동시를 쓴다면 좋은 문장들이 나올 게 분명했다.

“호위들이 지키고 있는 바깥으로는 나가시면 안 돼요. 그 안쪽에서만 자유롭게 돌아다녀 주세요.”

선생님의 신신당부를 끝으로, 우리는 흩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흩어져 봐야, 갈 수 있는 구역이 제한되어 있었기에 그리 멀리 가는 것도 아니었지만.

“미르! 나랑 같이 다니자.”

“그래, 좋아.”

때마침 제이크가 선생님의 말씀이 끝나자마자 내게 다가왔다.

제이크는 내가 쓴 모자를 보고서 말했다.

“아까 황녀 전하께서 주셨던 모자구나. 미르한테 너무 잘 어울린다!”

“진짜? 고마워. 전하께 네 모자도 좀 빌려달라고 할 걸 그랬나 봐. 얼굴이 타면 어쩌지.”

나는 화색을 띠다가, 이내 맨얼굴인 제이크를 보고 아차 하며 입을 막았다.

그러자 제이크가 고개를 저었다.

“나는 괜찮아. 원래 피부가 잘 안 타거든.”

“그래도…….”

나는 전생의 기억을 떠올렸다.

분명 자외선 차단을 안 한 채로 나이 들게 되면 피부가 망가진다고 했는데.

그래서 환생한 이후로는 웬만해서 양산 없이 외출하지 않았다.

‘아!’

제이크야 괜찮다고 했지만, 그래도 제이크의 소중한 피부가 걱정되었던 나는 이윽고 좋은 방법을 생각해 냈다.

바로 내가 입고 있던 망토를 양산 대용으로 제이크의 머리에 씌워주는 거다!

“자, 이거 써. 제이크. 우리, 피부를 소중히 여기자.”

조금 모양새가 우스꽝스럽긴 하겠지만…….

다행히도 제이크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 상태로 우리는 봄꽃들이 잔뜩 피어 있는 쪽으로 같이 걸어갔다.

‘음, 여기 앉으면 딱이겠는데. 마침 햇살 때문에 적절히 따끈하게 데워져 있어!’

그리고 그 옆에 덩그러니 자리한 평평한 바위를 한 번 만지작해 본 나는 이윽고 제이크에게 제안했다.

“여기 앉자, 제이크. 계속 서 있으면 다리 아프니까. 여기서 꽃 보면서 우리 같이 시를 떠올려 보는 거야.”

“다리 아팠어?”

“응? 아니, 아직은 안 아파! 그리고 나는 네 걱정해서 앉자고 한 건데?”

“앗, 내 걱정…….”

갑자기 제이크가 말수가 없어지더니, 순순히 내 손을 잡고 바위에 앉았다.

‘음, 살랑살랑 불어오는 산들바람. 역시 봄 날씨는 최고야.’

바위에 앉은 나는 눈을 감은 채 기분 좋게 바람을 만끽했다.

추운 겨울 즈음 입학하게 된 유치원.

그리고 그날로부터 벌써 한두 달은 지난 오늘.

어느덧 봄이 찾아온 듯했다.

“……어디서 꽃향기가 진하게 나네?”

그러다가 나는 다시 눈을 반쯤 떴다.

아닌 게 아니라, 바람결을 타고 은은하게 나던 꽃향기가 점점 진해지는 것 같아서.

‘그리고 웬 뛰어오는 듯한 발소리가…… 응?’

그대로 고개를 돌려 보니, 마침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구슬땀을 흘리며 뛰어온 듯한 기색이 역력한 앨리스였다.

앨리스는 한 손에 예쁜 들꽃을 서너 송이 들고 있었다.

분홍빛의 실크 옷감 같은 꽃잎이 바람결에 휘날렸다.

“앨리스? 그 손에 꽃은 또 뭐예요? 예쁘다!”

내 외침에 앨리스는 두 뺨을 꽃물 들인 것처럼 물들이며 웃었다.

“저쪽에 잔뜩 피어 있어요. 에미르 님께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몇 송이 가져왔어요.”

“응? 저한테요?”

내가 되묻자, 앨리스가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리고 내 머리를 향해 꽃을 든 손을 뻗으며 물었다.

“머리카락에 꽂아 드려도 돼요?”

“물론 좋아요.”

나는 망설임 없이 수락했다.

앨리스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없거니와 꽃이 너무 예뻤으니까.

“앨리스도 한 송이 꽂아요. 제이크에게도 한 송이 줘도 돼요?”

“……네, 영애님 뜻대로 하세요.”

앨리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그렇게 나는 앨리스의 머리에도 꽃을 꽂아주고, 제이크의 옷자락에도 한 송이 꽂아주었다.

“우와! 우리 이러고 있으니까 꼭 남매 같아요. 아하하.”

나는 우리 세 명이 똑같은 꽃을 장식하고 있는 걸 보고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깔깔 웃었다.

사실 남매라기엔 제각각 가진 빛깔들이 너무 다르지만, 그래도 같은 유치원을 다녀서 그런지 조금은 비슷한 분위기가 흐르는 것 같단 말이지.

내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우리는 서로 나란히 바위에 앉아 시를 쓰기 시작했다.

손에 들린 작은 종이와 펜이 서로 맞닿아 끄적거리는 소리만이 고요한 정적을 깨고 들려왔다.

‘으음, 좀 배고픈가.’

물론 나는 잠시 딴생각을 하는 중이었다.

야외 수업으로 마음이 들떠 답지 않게 점심 식사를 깨작거렸더니 이제 와 배가 고팠다.

‘으으, 티 내지 말아야지. 다들 나를 점심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먹을 것 타령하는 먹보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게 웬 창피람…….’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배가 고프면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나는 점점 짧아져 가는 자연에 대한 감상을 뒤로하며 살짝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때.

꼬르르르르르륵-

겨우 식사 몇 접시 안 한 것 치고는 상당히 요란한 뱃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소리의 출처는 당연히 내 배였다.

나는 눈을 감은 채로 그대로 모든 행동을 멈췄다.

지금 내 기분이 어떠냐고?

으음, 울고 싶었다…….

“어, 미르. 배고파?”

“에미르 님! 배고프세요?”

내 양쪽에서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득달같이 일어나 나를 붙잡고 질문을 해댔다.

나를 위해주는 마음씨들만은 만점인 내 친구들이지만, 하필이면 제일 원하지 않을 때 위해주는 것은 조금 슬펐다.

‘내심 못 들었으면 했는데 이게 뭐야……. 하하.’

나는 슬그머니 눈을 떴다.

그러자 아이들은 한바탕 더 호들갑이었다.

“미르, 낯빛이 초췌해…….”

“헉, 잠시 정신을 잃고 쓰러지셨었나 봐요. 어, 어떡하지.”

게다가 오해까지! 나는 결국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말해야 했다.

“저는 정말 괜찮아요. 사실 아까 점심을 조금밖에 안 먹었거든요. 그래서 그런가 봐요.”

“아, 그런 거였구나. 미르. 내가 아까 들었는데 선생님께서 야외 수업을 위해 특별히 간식을 준비해 오셨다고 했어. 한번 말해보자.”

“그래요, 에미르 님. 지금 같이 가요.”

그렇게 말하며 두 아이는 내게 각각 한쪽씩 팔짱을 꼈다.

나는 제이크와 앨리스의 부축 아닌 부축을 받으며 에드몽 선생님께 향했다.

“어머, 점심 식사를 제대로 하지 않으셨다니. 그럼 지금 간식을 준비해야겠네요.”

에드몽 선생님은 짐마차에서 간식 꾸러미를 가져와 간이 테이블에 내려놓으셨다.

잠시 후, 황실 기사들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씩 모여들었다.

“미르, 이것도 먹어. 샐러드야.”

“소스 그릇이 머니까, 에미르 님 쪽으로 옮겨드릴게요.”

제이크와 앨리스는 내 양쪽에서 조잘조잘하는 중이었다.

어쩐지 두 명 다 자신들이 먹는 것보다는 나를 먹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말이지.

“뭐? 에미르 영애가 아까 점심을 안 먹었단 말이야? 왜 밥을 굶어?”

그 와중에 황녀님께서는 누구에게 들은 건지는 몰라도 헛소문을 들으신 모양이다.

‘아, 이제 슬슬 좀 배부른데.’

그리고 간식 타임이 한 10분쯤 지났을까.

워낙 여기저기서 나더러 먹어보라고 권하는 음식이 많아서인지, 나는 금방 배불러졌다.

상큼한 과일 주스, 딸기에 생크림을 듬뿍 얹은 것들, 미니 포크가 꽂힌 사각 샌드위치…….

“저, 이제 그만 먹을게요!”

결국 마지막 남은 팬케이크 조각까지는 먹어 치우지 못하고 포기를 선언하며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랬는데.

드드드-

갑자기 이름 모를 진동음이 울렸다.

그리고 흔들림이 느껴졌다.

‘응? 뭐지? 왜 테이블이 갑자기 흔들리는 것 같지.’

설마 이거 깜짝 이벤트라도 하는 건가.

내가 포크를 내려놓는 순간 곧바로 흔들리게 되어 있는 마법이 걸린 테이블이라든가…….

하지만 그런 걸 리가 없지! 누가 그런 미친 이벤트를 해.

짧은 시간 동안 머릿속에 지나간 상상만 수십 개였지만, 현실은 그런 이벤트 따위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듯이 더욱더 진동 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이, 이게 뭐야?”

“따, 땅이 흔들리고 있어요!”

어느덧 나 말고 다른 사람들도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하나둘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외치고 있었다.

곧이어 테이블 위의 음식들이 진동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둘 바닥으로 떨어지거나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내 회색 원피스 앞자락에도 샐러드 소스가 담긴 그릇이 쏟아져 얼룩이 크게 졌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닦거나 신경 쓸 만한 상황도 되지 못했다.

‘……지진인가? 하지만 그렇다기엔 땅의 진동이 점차 커지고 있어. 아니, 굳이 말하자면 진동이 실체를 가지고 다가오는 느낌이야.’

마침내 다들 의자에서 일어나 어쩌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모여 서 있었다.

어느샌가 황실 기사들이 모두 모여 우리 주위를 둥글게 감싸고 있었다.

“습격인가?”

“젠장! 모두 황자, 황녀 전하 그리고 나머지 분들을 보호해!”

굳어 있는 내 손을, 제이크가 잡았다.

제이크의 손 역시 나처럼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쿵.

이윽고 이곳을 향해 무언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묵직한 발소리.

인간의 것이 아닌 게 분명했다.

그 무언가가 비명 같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질렀다.

“에, 에미르 님……. 저게 대체 뭐죠?”

잔뜩 겁에 질린 채 앨리스가 내 한쪽 팔을 끌어안았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와 함께 나온 질문.

그 질문의 답은 내가 아닌 다른 이들, 특히 황궁 기사들의 입에서 나왔다.

“마수잖아……!”

“대체 마수가 왜 여기 있는 거지? 모두 마탑 지하에 봉인되어 있을 텐데?”

그랬다.

우리의 간식 타임을 파투 내고 갑작스레 나타난 불청객은, 다름 아닌 마수였다.

검은빛의, 눈코입도 명확하지 않고 흉측한 형체를 가진 마수 한 마리.

다행히도 기사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들어보니 대형 마수가 아닌 초소형으로 개량된 마수인 듯했다.

원작에서 설명하길 대형 마수는 웬만한 대도시도 멸망시켜 버릴 수 있을 정도의 위력을 갖고 있다고 했으니, 초소형이라는 것만큼은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초소형이라 해도 마수는 마수.

이 잔디밭을 뒤흔들고 우리 모두를 위협할 정도의 위력은 충분했다.

아마 그 사실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알고 있을 것이었다.

사전에 마수에 대한 지식이 없더라도, 누구나 눈앞에서 이런 광경을 보면 깨닫게 될 것 분명했으니까.

압도적인 죽음의 공포를.

“어, 어떡해요. 어떡해…….”

앨리스는 숫제 혼잣말하는 것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울먹이고 있었다.

제이크 역시 겁에 질린 것인지, 고개를 숙이고 무언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저게 초소형이라니. 말도 안 돼. 웬만한 성인 키의 두세 배는 되는 것 같은데.’

‘갑자기 마수라니, 나 여기서 죽는 건가? 안 돼, 그건 싫어. 환생까지 했는데, 6살밖에 안 됐는데 벌써 죽을 수는 없다고!’

그렇게 마음속으로 외치고 있었다.

나, 몰랐는데 꽤나 겁쟁이였던 모양이다.

용감하게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도망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모두를 대신해서 희생정신을 발휘해 마수 앞으로 뛰쳐나가지도 못하고.

명색이 환생자면서, 다른 아이들과 다를 바 없이 울먹이며 겁에 질려 덜덜 떨고 있는 모습이라니.

-카아아아!

그 사이 마수는 고함을 질러대며 우리를 향해 더욱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동시에 원작에서 읽었던 내용이 떠올랐다.

마수는 사람이 있는 곳을 향해 공격하는 것이 본능이라고.

그래서 이쪽으로 오고 있는 걸까?

“저리 가! 저리 가버리란 말이야. 이 바보 같은 마수 놈아! 젠장! 내가 검만 있었어도 널 죽였어!”

문득 옆에서 들려오는 외침에, 시선을 돌렸다.

나처럼 눈물을 그렁그렁 단 세드릭이 외치고 있었다.

세드릭은 있지도 않은 허리춤의 검을 빼 드는 시늉을 하며 악을 질러댔다.

그런 세드릭을 황실 기사들이 만류했다.

“……조심하십시오, 세드릭 님! 절대로 다가가지 마십시오! 저 마수는 저희가 처리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도 깊은 수심의 그림자가 가득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황궁 기사들이 아무리 강하다지만, 그것은 인간을 상대로 할 때의 이야기.

보통의 마수는, 마법사나 인간의 경지를 넘어선 기사가 아닌 이상 제대로 상대할 수 있는 이가 없다.

물론 저 마수는 일반적인 게 아닌 초소형이라지만, 한 번도 마수를 상대해 보지 않았을 이들이니 두려울 수밖에 없었다.

하필이면 숲을 둘러싼 잔디밭인 데다 가장 가까운 저택도 저 너머에 있는 상황이라 더욱 답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오, 오라버니, 아바마마께 연락할 수 있는 통신구 있어?”

“……아니. 가져오지 않았다.”

한편 기사들의 가장 철저한 보호를 받으며 에드몽 선생님의 등 뒤에 서 있는 두 명.

그러니까 니나이나와 니콜라스의 대화를 엿들은 나는 절망했다.

혹시나 했는데, 황궁의 마법사 지원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분명했다.

-카아, 아아아아!

하지만 우리들의 사정 따위 마수가 알 게 무엇인가.

처음엔 어딘지 행동이 조금 서툴러 보이던 마수는 적응이 된 모양인지 더욱더 빠른 속도로 이곳을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침내 지척에 마수가 다가와 공격을 할 즈음, 기사들이 검을 빼 들고서 대열을 지어 나서기 시작했다.

“크윽!”

하지만 제일 선두에 서 있었던 기사를 시작으로, 마수의 거친 몸짓에 하나둘 나가떨어져 버리고 말았다.

그에 우리를 지키기 위해 남아 있던 후방의 기사들이 눈에 띄게 긴장하는 게 느껴졌다.

‘마수의 가죽은, 평범한 검으로는 뚫기 어렵다고 했는데.’

나는 내 양쪽에 서 있는 제이크와 앨리스의 손이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잡으며, 입술을 피나도록 깨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모두 물러서세요!”

“……제이크?!”

놀란 나는 제이크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공포심에 고개를 숙인 채 떨고 있지 않았었던가?

그런데 그런 제이크가, 갑자기 저렇게 큰 목소리로 모두를 향해 물러서라고 외치다니.

‘그것도 제이크답지 않게 무척이나 결연한 표정을 지으면서 말이야.’

아니, 어쩌면 아까 제이크는 떨고 있는 게 아닌 마력과 공격 주문을 준비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그런 제이크의 손끝에는…….

‘마력의 기운이잖아!’

예전 테이온 공작저에 갔을 때 몇 번 보았던 공작님의 마력과 비슷해 보이는 기운이 아스라이 맴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게 희미해 보이던 제이크의 마력은 곧 순식간에 제 형체를 키웠다.

꼭 공격할 준비를 마치기라도 한 것처럼.

아름답고도 고귀한 마법의 기운이 바로 옆에 서 있는 내게까지 여실히 느껴졌다.

‘제이크, 마법을 벌써 각성한 거야? 대체 언제……?’

나는 그대로 멈춰 입을 벌렸다.

이건 정말로 예상 못 했다.

갑작스러운 마수의 출현보다도 더욱 나를 놀라게 했다.

벌써 마법을 각성하다니.

물론 원작에서도 제이크는 어린 나이에 마법을 깨우쳐 시전했다고 언급되어 있긴 했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그럴 만한 기색이 없었다고!

“제, 제이크 공자님?”

그리고 마침 검을 들고 뛰쳐나가려던 다른 기사들 역시 그런 제이크를 보고 당황했다.

제이크를 막으며 보호해야 할지, 아니면 제이크의 말대로 해야 할지 난감해하는 게 분명했다.

아무래도 전자를 선택하기에는 제이크가 어딘지 믿는 구석이 있어 보이는 얼굴이었으니까.

그리고 나는 그 광경을 보며 내가 지금 해야 할 일을 깨달았다.

미각성 상태라면 몰라도, 확실히 마법을 쓸 줄 아는 제이크라면 아마 저 마수를 공격하고 물리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니 아이들과 선생님, 기사들에게 제이크의 말을 들어달라고 힘을 보태야 했다.

“모두! 제이크의 말대로, 저 마수의 앞에서 피해 주세요! 제이크는 마법을 쓸 수 있어요. 그리고 아시다시피 마수는 마법을 실은 공격만 통하니까, 어차피 검으로는 마수를 무찌를 수 없잖아요!”

젖 먹던 힘까지 짜내 쩌렁쩌렁 외친 내 말에, 기사들이 멈칫하며 웅성거렸다.

그리고 선생님을 비롯한 다른 아이들도, 내 말에 제이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그게 정말이야 제이크 공자? 정말로 마법을 쓸 수 있단 말이야?”

평소에는 앙숙처럼 티격태격하고, 간혹 모른 척하기도 일쑤던 세드릭은 자신이 언제 그랬었냐는 듯 구원자를 보는 눈빛으로 제이크를 응시했다.

제이크만 보느라 정작 중요한 말을 못 들은 듯한 사람들을 위해, 나는 한마디 더 외쳤다.

“마법에 휩쓸리면 크게 다치거나 죽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하세요!”

그 말을 함과 동시에 사람들은 모두 주춤댔다.

나가떨어진 기사들은 다행히도 죽지 않은 채였고, 그들은 이미 저 풀숲에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이윽고 제이크가 고맙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손을 꼭 잡았다 뗐다.

‘믿어줘서, 도와줘서 고마워.’

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입 모양이 꼭 그랬다.

곧이어 제이크는 짧은 주문과 함께 마법을 시전했다.

화염구로 보이는 것이 빛처럼 빠른 속도로 날아가 마물의 어깨에 명중했다.

“와아! 제이크 대단하잖아! 잘한다!”

그 광경을 본 세드릭은 어느새 제이크를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다.

기사들과 다른 아이들도, 그리고 나 역시 세드릭만큼은 아니었지만 아마 마음속으로 제이크가 마수를 물리쳐 낼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 게 분명했다.

멀리서 봐도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마법 화염구를 정통으로 맞은 마물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하지만 어깨는 급소가 아니라서인지, 역시 곧바로 죽지는 않았다.

오히려 고통으로 인해 치밀어오른 분노로 더욱더 날뛰었다.

마수는 공격을 한 상대인 제이크를 향해 달려오기 시작했다.

쿵쿵, 쿵쿵…….

다행히도 날개가 달린 마수는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벌게진 마수의 눈은 가까이서 보니 더욱 공포스러웠다.

하지만 나는 아까보다 덜 겁먹은 상태였다.

제이크를 믿어서일까.

“제이크, 조심해서 해! 그리고 이 못된 마수 놈아! 제이크 다치게 하면 가만 안 둘 거야!”

나는 세드릭을 따라 하며 외쳤다.

일단 제이크가 기사들보다 후방에 자리해 있긴 했지만 그래도 마수의 타깃이 된 이상 위험했다.

난 마음만은 이미 제이크를 위해 앞에서 지켜주는 기사였지만, 현실은 마법도 검술도 뭣도 못 해 옆에 서 있기만 하는 바람잡이였다.

그리고 연이어 다시 제이크가 화염을 날렸다.

이번에는 구의 형태가 아닌 여러 개의 작살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아직 나와 같은 6살인데, 제이크는 벌써 화염 마법을 쓸 수 있어.

게다가 화염의 모습을 자유자재로 바꾸기까지 한다니.’

나는 새삼 감탄했다.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역시 제이크도 다른 아이들 못지않은 천재 마법사였다.

화염 작살은 각각 마수의 왼쪽 눈, 목덜미, 배에 맞았다.

어느 하나 빗맞히는 법이 없었다.

한쪽 눈이 안 보이게 된 마수는 미친 듯이 날뛰었지만, 움직임이 이전보다 부정확해졌다.

-크오오오!

마수의 고성이 귀를 찢어낼 듯 크게 울렸다.

아까는 다소 먼 거리에서 들은 음성이었다면, 이번엔 거의 넘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서 들어서인지 귀가 너무 아팠다.

그때였다.

제이크가 미간을 찌푸리며 아까보다 한층 어려운 주문을 외우는가 싶더니, 밧줄을 던지는 것처럼 마수를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구도, 작살도 아닌 화염으로 된 밧줄이 제이크의 손에서 마법처럼 생겨나 마수의 목을 감았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목이 감겨 행동이 제한된 데다 당황한 마수가, 아주 짧은 시간 동안 멈칫했다.

제이크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곧바로 다른 손으로 화염 화살을 만들어냈다.

아까의 작살들을 전부 모아놓은 것보다 세 배는 더 굵고 긴 화살이었다.

그 화살은 활도 없이 마수의 심장을 향해 날아가 정확히 명중했다.

곧이어, 쿵-

육중하고 거대한 몸이 넘어지며 마수가 땅으로 쓰러졌다.

제이크가 마수를 물리쳤다.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은 채로, 혼자서 화염 마법을 사용해서 말이다.

다행히도 마수는 하나뿐이었는지 이후 다른 공격이 날아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마수가 쓰러지자마자 함성을 지르게 되지는 않았다.

아마 모두가 현실감 없던 방금까지의 상황에 짓눌려 있어서가 아니었을까.

그리고 정말로 마수가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모두는 그제야 기쁨과 안도감을 만끽했다.

“와아아아! 제이크, 너무 멋지잖아! 젠장! 저 흉악한 마수를 이기다니!”

“……제이크 공자. 대단하군. 공자가 마법으로 우리 모두를 구했어.”

어느새 제이크의 안티에서 열렬한 팬(?)으로 돌아서 버린 것 같은 세드릭과, 평소답지 않게 상당히 헝클어지고 망가진 행색을 한 니콜라스는 둘 다 손뼉을 치며 제이크를 칭찬하고 있었다.

“……구해주셔서 감사해요. 제이크 님.”

“제, 제이크 공자. 대체 어떻게 한 거야? 부채 같은 마법 아이템도 없는데 어떻게 마법으로 마수를 물리쳤어?”

평소 제이크와는 조금 서먹하던 사이인 앨리스도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고 있었다.

니나이나는 어쩐지 방금까지 꿈을 꾼 것만 같은 얼굴로 멍하니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황실의 기사들 역시,

“제이크 공자님. 공자님이 아니셨다면 저희는 모두 죽었을 겁니다. 모두를 지키라고 명받은 저희가 오히려 공자님께 구명받게 되어 부끄럽고, 또한 감사하기 그지없습니다.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황실 기사 중 부단장이 대표로 제이크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그렇게 모두의 진심을 전해 받은 제이크는 갑작스럽게 제가 이렇게 주목받게 된 상황이 낯설었는지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했을 뿐이에요. 오히려 미르에게 고맙다고 말하고 싶어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는데, 미르가 절 믿어주고 상황을 정리해 줘서 다행히 마법을 쓸 수 있었어요.”

응? 나?

나는 당황했다.

솔직히 난 바람잡이 말고 한 게 없는데.

“……내가 뭘 했다고. 어쨌든 저 흉악한 마수를 쓰러뜨린 건 제이크 너잖아. 막 불덩어리를 날리고 말이야. 엄청 멋있었어.”

나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제이크를 칭찬했다.

사실 이런 칭찬 릴레이 같은 일은 부끄러웠다.

게다가 정작 이 사태를 모두 해결한 장본인인 제이크가 해주는 칭찬이라니.

그런데 어쩐지 제이크는 진심 같았다.

“나야말로 미르 멋있었어. 솔직히 마법 쓰면서도 무서워서 다리가 후들거렸는데, 옆에서 미르가 마수한테 나 대신 실컷 화내 줘서 용기를 냈어.”

제이크가 나를 향해 환히 웃어주었다.

* * *

사태가 일단락된 후, 우리는 모두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 안정과 휴식을 취했다.

특히 연속으로 공격 마법을 쓴 탓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지친 제이크에게는 휴식이 꼭 필요했다.

그리고 황실에서는 갑자기 나타난 마수에 대해 곧바로 조사단을 파견했다.

조사의 결과는 얼마 걸리지 않고 밝혀졌다.

우리가 뛰어놀던 잔디밭 근처에 자리해 있던 한 귀족가가 바로 범인이었다.

아, 그러니까 범인이라는 말은-

다행히도 따로 우리를 해치기 위해 그 귀족가에서 마수를 풀어놓았다는 건 아니었다.

그런 거였으면 당장에 황족 시해미수죄로 공개처형을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알고 봤더니 그 귀족가의 주인이 마수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마탑에서 몰래 마수를 빼 와, 개인적으로 고용한 마법사와 함께 지하실에서 마수 실험을 하고 있었다고 밝혀졌다.

우리에게 달려들었던 그 마수는 관리 소홀로 인해 저택에서 탈출하게 된 것이었고 말이다.

하지만 어쨌든 마탑에 봉인된 마수를 개인이 따로 소유하는 것은 크나큰 중죄였으니, 그 귀족가의 사람들은 처벌을 받게 되었다.

지하실에서 실험하던 마수들도 모두 봉인 처분을 받았다고 했다.

“젠장, 나 그날 밤부터 마수가 나오는 악몽을 꾼다니까.”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는 그 마수 사태에서 완벽히 벗어나지는 못한 상태였다.

세드릭의 악몽 푸념이 그 증거 중 하나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제이크는, 황실로부터 마수를 물리치고 황자 황녀 전하를 비롯한 유치원 아이들을 구한 공로를 인정받았다.

톡톡한 상이 주어졌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의 삶에 그 마수 사건이 불러일으킨 가장 큰 영향은,

‘으악, 그렇다고 야외 수업 전면 금지라니…… 너무해!’

안전을 위해 유치원 부지 이외에서는 절대 수업을 할 수 없게 하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이 내려졌다는 것이 되겠다.

게다가 이제는 유치원을 지키는 이들에 황실 기사뿐만 아니라 마법사도 추가되었다.

그렇게 우리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야외 수업은 끝이 났다.

* * *

마수 습격 이후로 며칠 동안이나 주변이 혼란스러웠던 탓에, 나는 잠시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

바로 제이크의 마법에 대한 의문점을 말이다.

‘제이크, 대체 언제부터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거야?’

결국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제이크에게 질문해 보기로 했다.

정확히는 마법을 쓴 이후 앓아누운 제이크의 병문안을 가서 말이다.

다행히도 내가 공작저에 들렀을 즈음 제이크는 꽤나 혈색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며칠 사이 마력과 체력을 회복한 모양이었다.

“이거 먹어봐, 제이크. 건강에 좋은 약초즙이래.”

이 약초즙은 우리 엄마가 제이크에게 가져다주라고 하신 거였다.

엄청 쓰지만 먹으면 온몸에서 힘이 막 불끈불끈 솟는다고.

‘우리 딸을 구해준 친구잖니.

이 정도는 해줘야 하지 않겠어.’

……라고 말씀하신 걸 보면 분명히 되게 비싸고 희귀한 약초일 게 뻔했다.

으으, 나도 먹고 싶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제이크에게 양보해야 해.

“응, 잘 먹을게.”

쓴 걸 싫어하는 제이크가 웬일인지 내가 준 약초즙을 꿀꺽꿀꺽 잘도 삼켰다.

그 모습을 흐뭇하게 보던 나는 이윽고 달콤한 사탕 한 알을 선물로 주었다.

그러자 잠시 후 제이크가 환히 웃으며 말했다.

“고마워. 나 미르가 병문안 와줘서 많이 나은 것 같아.”

“그거 다행이네. 내가 네 인간 치료제인가 봐. 아하하.”

나는 머쓱하게 볼을 긁적였다.

그러다 이내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런데 제이크, 궁금한 게 있어.”

“뭔데? 물어봐.”

“……언제부터 마법을 쓸 수 있게 된 거야? 유치원 입학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직 각성하지 못했다고 했었잖아.”

고개를 갸웃하며 던진 질문에, 갑작스레 제이크가 당황했다.

그러고서는 황급히 변명을 시작했다.

“아, 그게 말이야. 절대로 미르에게 숨기려고 하던 건 아닌데. 사실 나 유치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돼서 마법을 시전할 수 있게 됐어.”

그렇게 시작된 제이크의 말들.

알고 보니 숨겨진 진실이 있었다.

“……멋지게 수련해서 화염으로 하트도 만들 수 있게 될 때쯤, 미르에게 보여주려고 했단 말이야.”

그렇게 대답하는 제이크는 몹시 아쉬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생각하자 더욱 후회된다는 듯, 스스로 머리칼을 헝클어트리기까지.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된 나는 도리어 감동하고 만 채였다.

세상에.

제이크가 다른 누구도 아닌 내게 제일 먼저 마법을 보여주려고 했다니.

어떻게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어.

“제이크, 넌 정말 내 최고의 친구야. 고마워. 비록 처음으로 보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최고로 멋있었다는 거 알지? 네가 다른 아이들도 구하고 나도 구했어.”

이내 나는 제이크의 두 손을 꼭 잡아주면서 눈을 반짝였다.

그러자 제이크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내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작게 중얼거렸다.

“……너를 구한 건 당연한 일일 뿐이었어.”

* * *

그 이후, 그러니까 ‘마수 사건’으로부터 일주일 하고도 며칠이 흐른 어느 날.

상당히 삼엄해져 버린 호위에다가, 유치원 외 출입 금지 등의 제한사항까지 생겨버린 탓에 유치원 안의 분위기는 다소 조용했다.

오랜만에 주어진 자유시간에도 무얼 하고 놀아야 할지 망설여지기만 하는 날이었다.

실내에서 할 수 있는 놀이여야 할 텐데, 뭐가 있으려나.

나는 의자에 걸터앉아 한쪽 팔을 걸친 채로 멍하니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이윽고 떠오르는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

숨바꼭질이 좋지 않을까? 유치원 안에 칩거 중인 우리에게 딱 적당한 놀이니 말이야.

생각을 마친 나는 곧장 벌떡 일어서 외쳤다.

“저기, 다들 저랑 같이 숨바꼭질하실래요?”

그러자 곧장 대답들이 돌아왔다.

“좋지.”

“숨바꼭질, 그거 재밌겠는걸? 한 번도 안 해봤지만 말이야.”

“……저 꼭 해보고 싶었어요!”

내 주변에서 각각 딴짓을 하고 있던 아이들은 내 제안이 기꺼웠는지 갑작스레 눈에 총기가 돌았다.

니콜라스마저도 읽고 있던 책을 내려놓고 나를 빤히 응시했다.

역시, 이 세계의 아이들에게도 숨바꼭질은 인기 있는 놀이라니까!

열렬한 반응에 기뻐진 나는 곧바로 가위바위보로 술래를 정하자고 말했다.

“가위, 바위, 보!”

여섯 명이서 몇 번이고 가위바위보를 한 끝에 술래가 결정되었다.

“……제가 술래네요. 아하하.”

그 술래는 바로 나였다.

하지만 뭐 괜찮다.

술래는 숨는 것과는 또 다른 재미가 있지!

이윽고 나는 교실 벽면을 향해 돌아서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정확히 1분 셀게요. 그사이에 다들 숨으세요. 아! 유치원 바깥으로 나가는 건 반칙인 거 아시죠?”

마음 같아서는 30초로 하고 싶지만, 이 넓은 유치원에서 다들 숨을 공간을 찾으려면 그 정도 시간으로는 모자라니까.

곧이어, 교실 바깥으로 우르르 뛰쳐나가는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60! 다 셌어요. 이제 찾을게요!”

마침내 숫자를 끝까지 다 말한 나는 큰 목소리로 시작을 알렸다.

그리고 조심스레 교실 문을 열고 복도로 나갔다.

복도로 나가자마자 마주친 건, 다름 아닌 두 명의 황실 기사들.

“저, 혹시 누가 어디로 숨었는지 아시나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나는 그들에게 다른 아이들의 행방을 질문했다.

하지만 두 기사는 꼭 다른 아이들과 짜기라도 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죄송합니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저희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어쩐지 두 번째 기사님은 너무 무언가를 감추는 티를 내고 계시긴 하지만 말이다.

흐음.

‘어휴, 반칙 쓰려던 거 실패…….’

하는 수 없이 나는 기사들에게 인사를 하고서 그대로 지나쳐갔다.

일단 물건 보관함이 있는 방부터 뒤져볼까, 그럼.

“여기 있나?”

물건 보관함은 생각보다 크고, 우리의 덩치는 생각보다 작으니 물건 보관함에 누군가 들어가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문을 하나하나 열어봤지만 아쉽게도 아무도 없었다.

“없네.”

나는 허탈한 마음으로 다음 방을 향해 나가려다…… 뒤돌아섰다!

“오호라, 그러고 보니 이곳이 있었지.”

과거, 세드릭이 비밀 공간을 발견해 그곳에 검을 숨겨두었던 기억을 떠올려 냈으니까.

나는 세드릭이 했었던 대로 비밀 통로로 통하는 곳을 건드렸다.

하지만.

“……엥? 세드릭이라면 여기 숨어 있을 줄 알았는데 없잖아.”

막상 열린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나는 실망하며 뒤돌아서 방을 나가야 했다.

그리고 내가 향한 다음 장소는, 바로 낮잠 공간이었다.

끼이익-

잘 안 쓰는 방이라 그런지 문의 경첩 소리가 살짝 낯설었다.

나는 조심스레 방의 불을 켜고 주변을 이리저리 살폈다.

‘이곳엔 숨기 좋은 침대가 여러 개 있지. 그러니 분명 이 중 하나엔 누군가가 숨어 있을 거라고!’

어쩌면 두 명일 수도 있고.

그러면 일거양득인 셈!

나는 씨익 미소 지으며 하나하나씩 침대 밑을 수색하기 시작했다.

“여긴 아니고.”

그렇게 네 번째 침대보를 들췄을 즈음, 아직 확인해보지 않은 옆 침대에서 갑작스레 부스럭 소리가 들렸다!

황궁에서 지은 최고급 시설, 제국 유치원에 설마 생쥐가 돌아다니는 건 아닐 테니.

“찾았다!”

나는 곧바로 그 침대 밑을 확인했다.

그러자 정말로 누군가가 있었다.

바로 앨리스였다.

그런데 문제는.

“……흐어엉.”

“……?!”

앨리스가 히끅대며 울고 있었다는 거다!

나는 당황해 입을 쩍 벌렸다.

대, 대체 왜지? 왜 앨리스가 울고 있는 거지?

앗, 혹시 내 얼굴에 무서운 거라도 묻은 건가!

“왜, 왜 그래요, 앨리스?”

설마 내가 너무 일찍 찾아버려서 그런 건 아니겠지.

내 물음에 이윽고 앨리스가 대답했다.

“너, 너무 늦게 오셨어요…….”

“네에?”

하지만 대답은 예상외였다.

“저, 저 아까부터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그런데 계속 안 와서, 그래서 저 빼고 다 찾은 줄 알았어요.”

앨리스는 내 얼굴을 본 이후 울음을 서서히 그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말했다.

침대 밑이 깜깜해서 너무 무서웠다고.

“앨리스, 다음부터는 밝은 곳에 숨도록 해요. 아니면 사람이 많은 곳도 괜찮고요.”

“흑, 꼭 그럴게요.”

“그리고 저 앨리스를 제일 먼저 찾았어요.”

“……아, 그, 그런 거예요?”

내 말에 앨리스가 당황하며 창피한 표정을 짓더니, 이윽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것도 모르고…… 괘, 괜히 울어서 죄송해요.”

“아녜요. 충분히 오해할 수 있는걸요. 아까 방에서 시간을 좀 지체했거든요.”

금세 눈물을 뚝 그친 앨리스를 데리고, 나는 다시 술래를 시작했다.

복도에 막 나왔을 때, 앨리스는 방금 막 기억났다는 듯 내게 소곤소곤 귓속말했다.

“……저, 사실 아까 봤어요. 세드릭 님이 2층으로 올라가시는 걸요.”

“어머, 그래요? 앨리스, 정말 고마워요!”

그렇다면 목표는 우선 2층이다!

* * *

2층은 1층보다 좁았지만, 대부분 빈방이었다.

애초에 여섯 명밖에 안 되는 원생들에 비해 유치원 건물이 큰 탓에 방이 많이 남는 편이었다.

“여기는 수업할 때 쓰는 물건들을 두는 방인가 봐요.”

앨리스와 나는 두 손을 꼭 잡은 채로 두런두런 이야기하며 빈 복도를 걸어가고 있었다.

그때, 복도 끝 방에서 문에 달아둔 커튼이 휘날리고 있었다.

창문을 열어둔 걸까?

하지만 어쩐지 휘날리는 폼이 좀 인위적인 감이 있다.

‘훗, 내 직감이 말해주고 있잖아. 저기 세드릭이 있을 거란 걸.’

나는 자신감 있게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문을 통과한 직후.

“으윽…… 으악!”

비명과 함께 세드릭이 갑자기 쿵 하고 하늘에서 떨어졌다.

아니, 마른하늘에서 세드릭이 떨어질 리는 없으니 천장에서 떨어졌다고 보는 편이 더 맞으려나.

“여기 있으셨네요! 혹시, 커튼으로 가려진 문틀 위에 올라가 계셨던 건가요? 근데 방금 쿵 소리가 난 걸 보니…… 많이 아프세요?”

구태여 찾지 않았는데도 제 발로 나타나 준 세드릭을 향해 질문했다.

그러자 마침 바닥에서 일어서며 똥 씹은 듯한 표정을 한 세드릭이 대답했다.

“아야야…… 그래. 문틀 위에 있었다. 어우, 아파. 아니, 방금 한 말 취소. 안 아파.”

“……네.”

세드릭은 얼굴을 찡그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곧바로 시치미를 뗐다.

나는 간단히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그보다 대단하시네요. 제가 올 때까지 계속 문틀 위에 계셨던 거예요?”

“당연하지! 솔직히 그 정도는 기본 아닌가?”

세드릭은 더 버틸 수 있었는데, 우리 둘의 발걸음 소리에 놀라 힘이 풀렸다고 주장했다.

일단은 믿어주기로 했다.

“자, 그럼 나머지 세 명을 찾으러 가 봐요. 우리.”

“좋아.”

세드릭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앞장섰다.

우리 세 명은 다시 1층으로 내려와서 다른 방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황실 기사들에게도 살짝씩 다른 아이들의 행방을 떠봤지만, 역시나 아까처럼 다들 입을 다물었다.

흥, 다들 황실 기사 아니랄까 봐.

모두 황자, 황녀님 편인 듯했다.

치사해!

“우리 여기서 이러지 말고, 바깥 건물로 가보는 게 어때. 조리실 말이야.”

그때, 웬일로 세드릭이 좋은 의견을 냈다.

맞는 말이었다.

1층을 계속 뒤져도 소득이 없는 걸 보면 별관 건물인 조리실에 나머지 아이들이 숨어 있는 것일 수도 있었다.

“좋아요! 갑시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경쾌한 걸음으로 앞장서 걸었다.

본 건물을 빠져나오자 기사들이 우리의 뒤를 호위했다.

잠시 후 우리는 식사를 준비 중인 건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고 있는 조리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곳에 다른 누군가가 오지 않았나요?”

이곳 조리실에서 음식을 만드는 이들은, 전부 황궁에서 오래 근무한 경력이 있는 일류 조리사들이었다.

잡일을 돕는 하녀들 역시 황궁에서 파견된 이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내 질문에 하나같이 고개를 저었다.

“저희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가요…….”

나는 말끝을 흐리는 척하며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사실, 그들의 태도에서 이미 무언가를 짐작한 나였다.

‘분명 이곳에 누군가가 숨어 있어. 우리가 갑작스레 방문했는데도 하나도 당황한 기색이 없었으니까. 너무 태연한 게 더 수상하다는 말씀.’

그도 그럴 게, 우리는 평상시에 이 조리실 건물을 방문할 일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를 보면 놀라거나 나가 달라고 해야 하는 게 정상이다.

일단 한참 조리가 진행 중인 조리실의 중심부에는 숨지 않은 듯했다.

어쩌면 당연하다.

조리사들의 업무를 방해하면 안 되기도 하고, 뜨거운 불과 팔팔 끓는 수프 단지 그리고 날카로운 칼날 같은 위험한 물건들이 가득 있는 곳이니까.

‘흐음, 그럼 역시 식료품 창고려나……?’

나는 한쪽에 있는 문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 문에는 ‘창고’라고 떡하니 팻말이 붙어 있었다.

수상함이 풀풀 풍기잖아!

“저, 이 창고에 들어가 봐도 될까요? 물건은 손대지 않을게요.”

“……예. 그러십시오.”

내 말에 일동 잠시 멈칫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속으로 후후 웃으며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나를 뒤따른 앨리스와 세드릭 역시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창고 안은 생각보다 넓었다.

교실의 반만 한 크기였다.

그리고 창고 안에는 밀가루를 담아 놓은 듯한 포대가 여럿 놓여 있었는데…….

들썩, 들썩.

그 포대 너머로 갈색의 무언가가 움직이는 게 보였다.

아싸, 찾았다!

“제이크, 찾았다!”

“아…… 들켰네. 그래도 나 꽤 오래 숨어 있었지?”

제이크는 우리가 이 창고로 들어올 때부터 몸이 가만히 있질 못했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우리 일행은 어느덧 4명이 되었다.

자유시간이 거의 끝나 가기도 했다.

“흐음, 이제 황자 전하랑 황녀 전하만 찾으면 끝인 건가?”

다시 조리실을 나와, 본관과 조리실 사이쯤에 멈춰 선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며 생각에 잠겨 들었다.

찾아볼 만한 구석은 다 찾아봤는데, 심지어 화장실까지 찾아봤는데 안 보인다는 것은…….

‘전생의 속담 중,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있었지.’

나는 곧 고개를 끄덕이며 추리를 완료했다.

그래. 분명 그 둘은 그곳에 있을 거야!

“모두 돌아가요, 교실로.”

“응? 아직 두 전하를 못 찾았잖아.

그리고 아직 자유시간 안 끝났는데?”

내 말에 아이들이 어리둥절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일단 돌아가자고 설득했다.

다들 내가 왜 저러는지 영문을 몰라 하는 얼굴이었지만 결국 내 뜻대로 다 같이 교실로 향하게 되었다.

“놀이는 잘 마치셨습니까?”

교실로 들어가기 직전, 교실 문 앞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황실 기사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우리를 향해 인사말을 건넸다.

“아뇨, 아쉽지만 아직 못 찾은 사람이 있어서요.”

내가 대답했다.

그러자 둘 중에 아까부터 표정 관리를 잘 못 하던 기사님의 입가가 씰룩이며 금방이라도 참고 있는 웃음을 터뜨릴 듯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결국 그의 표정은 다시 포커페이스를 되찾았다.

‘기사님, 안에 누가 있다는 게 너무 티 난다고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문을 열고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 안은 썰렁했다.

인기척 역시 없었다.

적어도 그래 보였다.

‘하지만, 저기 저 책꽂이 뒤로 언뜻 두 명의 그림자가 비치는걸? 역시 여기 있을 줄 알았다니까.’

도대체 어떻게 여기로 다시 돌아온 건지는 몰라도, 니나이나와 니콜라스 둘 다 머리를 꽤나 쓴 것 같다.

하기야 니콜라스는 똑똑하니까…….

사실 내가 교실로 들어옴과 동시에, 인기척을 줄이려는 듯 흡 하고 숨을 들이켜 참는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었다.

그걸 알면서도 나는 부러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행동했다.

우연한 척 책꽂이로 다가가 두 사람을 찾아냈다.

“두 분 다 여기 계셨네요! 하마터면 못 찾을 뻔했는데.”

“……벌써 찾아내다니. 자유시간이 끝날 때까지 못 찾기를 기대했는데 말이야.”

내 등장에, 니콜라스는 내심 아쉬워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니나이나는 오히려 기뻐했다.

그동안 숨어 서 있느라 다리가 아팠다면서.

“더 빨리 찾아드리고 싶었는데, 제가 처음엔 미처 이곳 생각을 못 했지 뭐예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니콜라스의 말을 들어보니, 두 사람은 처음에 내가 숫자를 세고 있을 때 곧바로 유치원 바깥으로 나가 기사들 사이에 숨어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내가 2층으로 올라간 이후 다시 실내로 몰래 들어와 교실로 돌아왔다고.

이윽고 니나이나가 투정했다.

“다음 자유 시간엔 내가 술래를 맡고 싶어. 숨어 있는 건 딱 질색이야. 다리 아프다고.”

“좋아요. 그럼 다음에도 또 숨바꼭질하는 거예요?”

내 말에 모두가 동의했다.

이렇게 모두가 어울려서 논 것은 거의 처음이었는데.

다들 즐거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문득 그 광경을 보며 생각했다.

처음 유치원에 왔을 때의 서로가 서먹했던 과거의 모습을.

그리고 그 과거의 모습에 겹쳐지는 지금의 잔상을.

‘나, 잘하고 있는 것 같아.’

처음엔 그저 원작의 주연들과 인맥을 만들어보려는 속셈이었지만, 점차 정이 들면서 나 이외에도 모두가 함께 친해지길 바라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소망…… 어쩐지 반쯤은 이뤄진 것 같다.

십 년 뒤쯤엔, 나를 포함한 모두가 행복해지는 미래를 볼 수 있을까?

* * *

유치원에 다닌 지 세 달이 넘었다.

어느덧 봄도 거의 저물어가고 있었다.

이곳 역시 신기하게도 사계절이 있는데, 여름과 겨울만 짜증 나도록 길고 봄과 가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꽃잎이 다 떨어져서 보기 흉해. 정원사들에게 치우라고 해야겠어.”

마침 창가를 응시하고 있던 니나이나가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들은 나는 무심코 창가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마침 창가 너머, 저 멀리에서 달려오고 있는 낯설지 않은 마차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저 마차는, 세드릭네 마차잖아?’

사실 요 며칠 세드릭의 자리는 내내 비어 있었다.

아파서 결석한 것은 아니고, 가족 여행 비슷한 걸 갔다고 했다.

기사 가족끼리 여행을 가면 뭘 하고 노는 걸까, 하는 의문이 든 것도 잠시.

며칠 동안 계속해서 한 자리가 비워지니 이상하게 허전했다.

매일 툴툴대며 불평불만을 쏟아내는 세드릭이지만 없으니까 묘하게 그리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침 그러던 차에 세드릭이 돌아온 것이다.

요란스럽게 마차에서 내리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세드릭을 맞이하러 교실을 우르르 나갔다.

“내가 왔다! 돌아왔다! 와하하!”

며칠 사이 얼굴이 조금 그을린 듯한 세드릭은 기쁜 얼굴로 두 손에 바리바리 무언가를 싸 들고 왔다.

“여행 다녀왔다면서?”

“흐음, 그 손에 든 건 뭐지?”

아이들의 질문이 세드릭에게로 쏟아졌다.

나도 그 사이에 끼어 고개를 내밀고 물었다.

“혹시 기념품 가져오셨어요?”

내 질문에 세드릭이 크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떻게 맞춘 거지? 독심술을 가진 건가.”

이윽고 세드릭은 손을 휘휘 저으며 말을 이었다.

“흐음. 뭐, 아무튼. 모두 기념품 하나씩 나눠드릴 테니 줄 서요.”

그 말에 아이들이 세드릭의 앞에 주르르 줄지어 섰다.

역시 아무리 귀족, 황족이라 해도 기념품은 거절할 수 없이 반가운 것이다.

“다 똑같은 건데, 이름 새겨진 것만 달라요.”

세드릭이 하나씩 나눠주며 중얼거렸다.

선물을 받은 아이들은 포장을 풀어보았고, 각자 짧은 탄성을 질렀다.

“검 모양 펜던트가 달린 목걸이와 방패 모양 반지잖아?”

그랬다.

선물의 정체는 바로 장신구 세트였다.

다만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그 목걸이와 방패 모양 펜던트가 다름 아닌 세드릭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것이었다는 점이다.

‘우와, 신기하다.’

나는 다른 아이들의 기념품들을 어깨너머로 훔쳐보며, 내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막상 내 앞에 선 세드릭은 보따리를 뒤지기만 하고 있는 게 아닌가.

급기야 밑으로 탈탈 털어보는데, 아무것도 안 나왔다.

나는 살짝 불안해졌다.

“공자님? 왜 그러세요?”

“……어, 그게. 좀 곤란하게 된 것 같은데.”

그 말을 들으니 어쩐지 안 좋은 감이 왔다.

곧이어 세드릭이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상하다, 분명 오기 전에 다 챙겼는데. 네 것만 깜빡하고 안 가져왔어. 어떡하냐.”

“……!”

나는 놀람과 실망이 가득한 눈빛으로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세드릭이 사과했다.

“미안. 나도 이럴 줄은 몰랐다. 아마 내 방에 두고 온 것 같은데.”

“……아뇨, 뭐 괜찮아요. 실수할 수도 있죠.”

그냥 조금, 아주 조금 아쉬운 것뿐이다.

그런 생각을 되뇌며 속상한 표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그때 세드릭이 넌지시 말했다.

“그럼 오늘 우리 집 와서 가져가.”

“네?”

“폴리도 보고.”

갑작스러운 제안에 의아했던 마음은, ‘폴리’라는 단어에 곧바로 사라졌다.

나는 고개를 마구 끄덕였다.

“가야죠, 가야죠. 물론 당연해요. 유치원 끝나고 바로 같이 가요.”

폴리라니.

벌써 몇 달 전, 세드릭이 처음 유치원에 데려왔을 때를 마지막으로 보지 못했던 폴리였다.

이런 제안은 절대로 놓칠 수 없었다!

“……그렇게 좋냐? 폴리 얘기하니까 바로 표정 바꾸는 거 봐.”

“그걸 말이라고 하세요. 너어무 좋네요.”

세드릭은 어쩐지 질린 듯하면서도 허탈해 보이는 표정으로 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뭐 그리 당연한 말을 하느냐고 되물었다.

사실 폴리를 보는 게 아니라면 딱히 세드릭네 저택에 갈 이유는 없었다.

가봤자 기사님들의 훈련 기합 소리만 잔뜩 듣고 올 것 같은데.

‘폴리한테 줄 간식이라도 사 가고 싶은데, 아쉽다. 유치원 끝나고 바로 가야 하니까.’

뭐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이 세계에 길 가다 편의점이나 마트가 있을 리도 없으니까 그냥 가기로 했다.

두 번째 방문하게 된 베드몬 대공가의 저택.

마차에서 내린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오오! 지난번 왔을 때랑 똑같아요.”

그도 그럴 게 대공저는 지난번 왔을 적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모습이었다.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물씬 풍겨오는 정체불명의 땀 냄새며, 저 멀리서부터 날아와 귓가에 꽂히는 ‘합! 합!’ 하는 견습 기사들의 기합 소리.

또 모래주머니를 찬 채 운동장을 돌고 있는 웃통 벗은 여러 명의 기사.

무엇보다도…….

“우리 막내 도련님 유치원 다녀오셨습니까!”

익숙한 대사와 함께 달려오는 낯익은 기사 한 명.

다만 오늘은 가죽으로 된 훈련복을 입고 있다.

저분 이름이 뭐랬더라.

아, 엘록스 경이라고 했던가?

“엘록스 경?”

“그 옆은 앨…… 아니, 에미르 님이시군요! 아닛! 제 이름도 기억해주셨습니까? 이거 영광입니다. 하하.”

나와 동시에 입을 연 그 기사는, 이윽고 기쁜 표정으로 나를 향해 순박하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 까칠하신 도련님과 유일한 친우를 해주시다니, 정말이지 감사드립니다.”

“방금 뭐라고 했어?”

“하하하, 농담입니다.”

곧바로 세드릭이 바락 소리를 질렀지만, 엘록스는 아무것도 안 말한 것처럼 너털웃음을 지으며 느물거렸다.

이후 그는 애초에 지나가던 길이었는지, 나와 세드릭에게 몇 마디의 인사를 더 하고서 바로 떠나갔다.

그리고 엘록스가 저만치 떨어지자, 작게 씩씩대던 세드릭은 내게 신신당부하듯 사실을 정정해 주었다.

“엘록스 말은 거짓말이야. 나 너 말고도 친구 많아.”

“네.”

“진짜야. 명심해.”

사실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지만, 뭐 유치원 아이들과도 잘 지내니 영 틀린 말은 아닌 듯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세드릭은 낯빛이 원래대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우리 둘은 저택 내부로 향했다.

어쩐지 오늘은 처음 방문했을 때와는 좀 달랐다.

분명 지난번엔 몇몇 지나가는 하인들과 하녀들만 보이고 조용했던 것 같은데…… 어라.

들어가자마자 누군가랑 마주쳐 버렸다?

‘세드릭의 가족인가 봐. 닮았어.’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눈앞에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우리의 시선으로는 고개를 꺾어 올려야만 머리끝까지 다 보일 정도의 큰 키에, 불타는 듯한 빨간 머리와 금안이 세드릭과 완전히 같았다.

황궁 기사단의 복장을 하고 있었고, 다만 세드릭보다는 조금 나른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나이는 20살 조금 못 되어 보이는 앳된 청년쯤으로 보였다.

내가 그를 올려다보는 만큼, 그 남자도 내 정체가 누구인지 궁금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행히도 내가 누구시냐고 묻기도 전, 세드릭이 먼저 남자에게 질문했다.

“큰형님이 왜 이 시간에 여기 있습니까? 황궁에 계실 시간 아닙니까?”

역시 남자의 정체는 세드릭의 큰형이었구나.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남자가 대답했다.

“오늘은 훈련이 일찍 끝나서 지금 왔다.

그런데 옆에 계신 그…… 꼬마 영애분은 누구시지?”

남자는 나를 부를 호칭이 마땅치 않은 표정으로 말을 살짝 더듬었다.

이윽고 세드릭이 어깨를 으쓱였다.

“제 친구, 에미르 새런입니다. 유치원을 같이 다니고 있어요. 에미르, 이쪽은 내 큰형님인 세이든.”

“안녕하세요, 새런 후작가의 에미르라고 합니다. 세드릭의 친구예요.”

나는 예의 바르게 인사했다.

그러자 내 인사를 받은 세이든이 갑작스레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친구…… 라고?”

“네에.”

나는 고개를 들어 세이든의 표정을 흘깃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 엘록스 경처럼 ‘세드릭 저 녀석이 친구가 있었어?’ 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 이윽고 아차 한 표정으로 마주 인사했다.

“……반갑군. 나는 베드몬가의 맏이이자 세드릭의 맏형인 세이든이라고 한다. 황실 제1기사단 소속이다.”

친절한 자기소개에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역시 기사님이셨군요! 멋져요!”

내 칭찬에 또다시 세이든은 멈칫했다.

“……큼. 고맙군. 아무쪼록 새런 영애, 재밌게 놀다 가도록.”

그러더니 몇 초 후 빠르게 대답을 마치고서, 곧장 뒤를 돌아 저만치 걸어갔다.

‘바쁜가? 아니면…….’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황실 기사단 소속이라 했으니 바쁠 가능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허겁지겁 떠나버리는 저 반응, 어쩐지 어디선가 많이 본 것 같단 말이지.

‘꼭 세드릭 같아. 형제라서 닮은 건가.’

아무래도 이 집안 사람들은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편인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을 하며 막 뒤를 도는데 세드릭의 표정이 좀 이상했다.

“……?”

쟤 왜 저렇게 혼자서…… 조용히 씩씩대고 있는 거지.

세드릭은 어느새 손톱 하나 크기 정도로 멀어진 제 형의 뒷모습을 보며, 분한 얼굴로 입술을 꼭 깨물고 있었다.

‘둘이 싸우기라도 했나.’

뭐 나야 별생각 없었지만.

그래서 그냥 아무 말도 안 하고 서 있는데, 갑자기 세드릭이 내게로 고개를 휙 돌리고서 쏘아붙였다.

“넌 왜 칭찬을 아무에게나 하냐?”

“……?”

무언가 마음에 안 든 게 분명한 비틀어진 입꼬리.

불만이 넘쳐 보이는 눈빛.

근데 그 불만의 이유가 나 때문이었다고? 그것도 세이든 님께 해드린 칭찬 때문에?

“아, 아무한테나 하는 건 아니에요. 꼭 해드리고 싶은 사람이 있을 때만 칭찬하거든요?”

나는 황급히 변명해 보았지만, 세드릭은 여전히 토라져 있었다.

“……거짓말. 지난번에 나한테 멋있다고 했으면서, 오늘은 큰형님한테도 멋있다고 하고. 이제 보니 그냥 네가 하는 ‘멋있다’는 ‘좋은 아침이에요’ 같은 인사말이랑 하나 다를 게 없잖아?”

세드릭은 하나하나 따져가며 물었다.

그 예리한 통찰력에 나는 그만 입을 다물어야 했다.

‘……이런. 어떻게 눈치챈 거지. 세드릭, 생각보다 똑똑하잖아! 내 인사말이 아부라는 걸 알아버렸어.’

근데 나, 세드릭에게 멋있다고 칭찬한 적이 있던가?

기억을 되돌려 봐도 그런 적은 없는 것 같은데.

대단하다고 한 적은 있었지만.

어쩐지 세드릭의 기억이 저 좋을 대로 왜곡되어 있는 것 같다면 기분 탓일까…….

“그, 그래도…… 세이든 님이 멋있는 건 사실인데요. 멋있는 걸 멋있다고 한 게 잘못은 아니잖아……요?”

나는 하하 웃으며 말끝을 얼버무렸다.

사실대로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세드릭은 더 씩씩댔다.

“큰형님이 멋있긴 뭐가 멋있냐? 원래 기사복만 입으면 다 멋져 보이는 거거든. 나도 저거 입으면 멋있어!”

“…….”

되도록 속마음을 얼굴로 드러내지 않고 싶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떨떠름한 데다 마음속에서 깊숙이 번져 나오는 불신은 감추기가 힘들었다.

그런 내 속마음을 눈치채고 만 세드릭이 허리에 두 손을 짚고 코웃음과 함께 다짐하듯 말했다.

“하아…… 내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내 말을 못 믿겠다 이거지? 좋아. 보여주면 되잖아.”

“네? 네에?”

세드릭은 단단히 꽁한 얼굴로, 거침없이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라갔다.

얼떨결에 나는 세드릭을 쫓아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뛰쳐 올라가야 했다.

“헉, 헉. 아, 숨차…….”

마침내 2층에 도착했을 때, 나는 난간을 붙잡고 거친 숨을 골랐다.

세드릭 쟤는 남들도 자신처럼 체력이 뛰어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으으.

그리고 곧이어 세드릭이 한 방으로 쏙 들어가는 게 보였다.

그러더니 이윽고 다시 고개를 뺀 채, 나를 보고 외쳤다.

“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어! 내가 얼마나 멋있는지 보여 줄 테니까.”

* * *

세드릭이 들어간 방은 드레스룸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철퍼덕 앉고 싶었지만 손님의 품격이 있으니 바른 자세로 문 앞에 서 있던 나는, 잠시 후 안에서 들려오는 세드릭과 하인의 아옹다옹 소리를 반강제로 들어야 했다.

“아니, 도련님! 도대체 왜 갑자기 그 제복을 꺼내 달라고 하시는 겁니까. 먼지 묻어요. 안 됩니다!”

“먼지떨이로 털면 되잖아! 그리고 그 옷 아니면 안 돼. 그걸 꼭 입고 나가야 한다고! 보여주기로 했단 말이야!”

저기, 난 보여달라고 한 적 없는데…….

“황실 행사 같은 중요한 날에만 입는 거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게다가 평소엔 풀을 발라 빳빳하게 깃을 세워 놓는다고요. 카라 깃에 찔려서 피 나고 싶으세요?”

“내 피부는 강철 같다고! 걱정 마! 그리고 오늘이 바로 그 중요한 날 중 하나거든?”

옥신각신.

투닥투닥.

‘하, 다리 아파…….’

두 사람의 말싸움이 길어질수록 귀도 아프고, 서 있는 다리도 아팠다.

그래도 다행히 5분이 채 흐르기 전에 결론이 난 듯했다.

엿들어보니 싸움은 세드릭의 승리로 마무리된 모양이었다.

그로부터 또 10분쯤 지났을까, 세드릭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문을 열고 나왔다.

“짜잔! 어때, 멋있지? 진짜 너무 멋있어서 숨도 안 쉬어지지?”

콧대와 어깨에 힘이 딱 들어간 모양새였다.

어깨를 으쓱이며 자아도취에 취한 미소를 짓는 세드릭.

솔직히 말하자면 멋보다는 엉성함이 더 많이 느껴지는데…….

“저, 근데 셔츠 단추를 하나 밀려서 잠그신 것 같은데요. 하하.”

나는 세드릭에게 조심스레 말했다.

하인의 도움 없이 스스로 급하게 입은 모양인지, 말 그대로 셔츠 단추가 밀려 있었다.

그 사실을 지적하니 세드릭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그래도 멋있어요. 네. 압도적으로 멋있네요.”

곧바로 나는 세드릭의 기분이 상하지 않게 두 엄지를 치켜세웠다.

세드릭은 그제야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멋있지? 셔츠 단추 정도야 재킷에 가리니 보이지도 않는다고. 이거 봐, 형님보다 내가 더 괜찮다니까?”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사실 이곳에는 폴리를 보러 온 건데, 어쩌다 세드릭의 패션쇼를 보게 된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보다, 우리 폴리 보러 가요.”

“아. 그렇지. 생각해 보니 폴리를 보여주는 걸 깜빡했네. 좋아. 가자.”

그리고 세드릭은 나를 복도 너머로 이끌었다.

그리고 한 30초쯤 뒤, 드레스룸에서 한 하인이 뛰쳐나와 외쳤다.

“도련님! 잠깐 입고 다시 갈아입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러고 어딜 가세요!”

“잠깐 내 방에만 갔다 오는 거야, 뭘 그리 걱정해? 깨끗하게 입으면 되잖아.”

“하아…… 금방 다녀오셔야 합니다. 꼭이요.”

결국 하인의 패배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집 안에서 입고 돌아다닐 만한 옷은 아닌데, 세드릭이 너무 기분 좋아하니 어쩔 수가 없는 걸까.

아무튼 우리는 세드릭의 방으로 향했다.

침실 바로 옆에, 폴리의 방으로 꾸며놓은 곳과 연결되는 통로가 있었다.

“폴리!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그곳에 가니 어느덧 쑥쑥 커버린 폴리가 자리하고 있었다.

분명 몇 개월 전에는 손바닥에 쏙 들어올 정도로 작은 아기 새였는데, 이제는 웬만한 사람 머리 크기 정도로 자랐다.

“안녕, 에미르. 오랜만이야.”

“……!”

“오랜만이야. 잘 지냈어?”

폴리의 인사에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야 말았다.

물론 신수가 사람 말을 할 줄 안다는 건 나도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아주 잠깐 봤던 사이인 나를 기억할 줄이야!

“날 기억해, 폴리?”

“당연히 기억해. 주인님의 친구잖아. 에미르.”

나는 계속해서 폴리에게 여러 질문을 던졌고, 폴리는 대답했다.

그뿐만 아니라 폴리가 내게 먼저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로 인해 알게 된 사실 하나.

정말로 폴리는 내 존재를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

내가 유치원에서 자신을 쓰다듬어 준 것도, 심지어 강아지의 몸에 갇혀 있을 적 내가 자신을 살리려 나섰다는 것도 알고 있다고 했다.

“……혹시, 세드릭 님이 폴리에게 저에 대해 알려주셨나요?”

“아니, 전혀. 내가 왜 그런 쓸데없는 일을 해? 난 폴리랑 놀아주기도 바빠.”

아닐 걸 알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넌지시 물어봤는데, 세드릭은 의자에 앉아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하긴 세드릭이 그런 일을 자처할 리가 없지.

그럼 결국 폴리의 기억력이 정말로 대단하다는 게 되려나.

그보다 세드릭의 대답을 들으니 부러움이 울컥 치밀었다.

‘아…… 나도 폴리 같은 신수랑 매일매일 같이 지내고 싶다…….’

세드릭 저 녀석, 검술 실력도 가지고 폴리도 가지고 조금 못된 인상이긴 하지만 커서 일취월장할 미모도 가지고 대체 못 가진 게 뭐람? 불공평해라.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무심코 세드릭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

세드릭은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씁쓸해 보이는 눈빛으로.

주인보다 저를 더 따르는 폴리 때문에 허탈한 기분을 느낀 걸까?

하지만 눈빛과는 반대로, 입꼬리는 뿌듯하고 만족스러운 듯 잔뜩 위로 올라가 있었다.

‘아하. 그렇단 말이지……. 폴리가 자기보다 나를 더 좋아하는 것 같아서 질투는 나는데, 그래도 폴리가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니까 웃음이 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건가.’

그런 복잡미묘한 기분 잘 알지.

나는 세드릭 몰래 고개를 끄덕끄덕해 주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하인이 폴리의 간식 시간이라며 여러 생과일과 야채를 가져왔다.

거기에 끼어들어 함께 간식을 야무지게 챙겨 먹은 나는, 뒤늦게서야 이 저택에 온 처음 목적을 기억해 냈다.

“헉! 그러고 보니 세드릭 님, 펜던트 목걸이와 반지는 언제 주실 거예요? 하마터면 까먹고 폴리랑 놀기만 하다가 갈 뻔했어요.”

내 다급한 질문에, 세드릭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무래도 세드릭 역시 잊고 있었던 모양이다.

“……젠장, 생각해 보니 그게 있었지! 잠깐만 기다려. 가져올 테니까.”

잠시 후 세드릭은 정말로 두 손에 각각 반지와 목걸이를 들고 나타났다.

“네 건 테이블 아래에 떨어져 있더라.”

그렇게 말하면서 세드릭은 내게 장신구들을 건넸다.

나는 받자마자 방패 모양 반지를 조심스레 손가락에 끼워 보았다.

다른 손가락에 끼우기엔 조금 헐렁하고, 중지에나 딱 맞는 크기였다.

다른 아이들의 것처럼, 작게 내 이름과 세드릭 가문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음은 물론이다.

“오! 진짜 방패처럼 완전 튼튼한데요? 화살이 날아오면 이렇게 손을 샥! 하고 세워서 막아도 될 것 같아요!”

나는 날아오는 화살을 반지에 달린 모형 방패로 막는 시늉을 하면서 농담을 던졌다.

그러자 세드릭이 피식했다.

“그럴 일 없을걸. 유치원 경비가 이렇게나 철저해졌는데 어떻게 그걸 뚫고 화살이 날아오겠냐?”

“……칫, 농담이었는데요.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시면 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세드릭이 짐짓 당황하는 표정을 지었다.

“……농담이었냐. 난 또. 그보다 나는 무기에 관해서는 농담 안 하거든? 그리고 만약에, 경비를 뚫고 화살이 날아오는 일이 생긴다 해도 내가 검으로 쳐내 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

이건 또 무슨 소리람.

나는 세드릭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순간 내가 뒤 문장을 좀 잘못 들은 건 아닌지 하고 생각했다.

“그날, 그러니까 마수…… 가 나타났던 날 이후로 더욱더 검술 훈련을 성실히 하고 있어.

지금의 나라면 아직 마수는 무리겠지만 화살 따위는 곧바로 쳐낼 수 있을 테지.”

그렇지만 이어지는 말들을 들어보니, 다행히 내가 아까 잘못 들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과거를 회상하며 그때의 좌절감을 다시 한번 기억해낸 듯 세드릭의 얼굴은 살짝 어두워졌다.

하지만, 곧이어 스스로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으려는 듯 굳게 다짐하는 말이 들려왔다.

웬일로 답지 않게 결연한 표정까지 지으면서.

“……제이크 그 녀석, 아주 조금 멋있긴 했지만. 내가 소드마스터가 되기만 하면 그깟 마수쯤은 마법보다도 더 쉽게 해치울 수 있다고.”

그러면서 뭐라고 중얼거리는 와중에 언뜻 제이크의 이름이 들린 것도 같았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질문했지만, 채 끝까지 내뱉지는 못했다.

“저기, 방금 뭐라고…….”

“세드릭! 여기 있냐?”

갑작스레 방문이 열리고 불청객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난데없이 노크도 하지 않고 문을 열고 들어온 소년.

세드릭을 호칭이 아닌 이름으로 막 부르는 걸 보면 확실히 하인은 아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했다.

‘……세드릭의 형? 그러니까, 둘째 형인가?’

문가에 서 있는 소년은 누가 봐도 세드릭의 혈육이라 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첫째 형은 아까 만났으니까, 둘째 형이겠지.

열 살 내외 정도로 보이는데, 첫째였던 세이든과는 다르게 인상이나 말투가 꽤나 개구쟁이 같았다.

“세르반 형님?”

세드릭이 영 반갑지 않은 기색으로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아하, 둘째 형의 이름은 세르반이었구나.

하지만 세르반은 정작 세드릭이 아니라 나를 향해 왔다.

얼떨결에 눈이 마주쳤는데, 얼굴에 반가운 기색이 가득한 게 보였다.

“오, 네가 바로 그 세드릭의 유일한 친구 녀석이야?”

……이쯤 되면 세드릭은 사실 진짜로 나와 유치원 아이들 말고는 친구가 없는 게 분명할지도 모른다.

가족들이 하나같이 저렇게 말하는 걸 보아하니 말이다.

“네, 아마도 맞을 거예요. 처음 뵙겠습니다. 에미르 새런이라고 해요.”

“오호, 그래? 난 세르반이라고 해. 세드릭이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녀석의 형이지.”

세르반은 갑작스러운 자신의 언사에도 당황하지 않는 내가 신기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아주 잠시였고, 곧바로 쾌활하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해오길래 흔쾌히 응해주었다.

‘손이 딱딱해. 세드릭처럼!’

이윽고 악수한 나는 속으로 깜짝 놀랐다.

세드릭도 그랬는데, 세르반의 손 역시 검을 쥐느라 생긴 굳은살과 잔상처로 딱딱해져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기사라서 그런 걸까.’

내가 작은 의문을 가진 사이, 세드릭이 재차 세르반에게 질문을 던졌다.

“작은형님께서 갑자기 여긴 왜 오셨습니까?”

“왜 왔긴. 황궁에 계신 아버지께서 기사를 보내오셨더라. 네게 갖고 싶은 생일선물이 무어냐 물으시던데?”

세르반은 빙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예상치 못했던 내용이었는지 세드릭이 잠시 멈칫했다.

그러자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세르반이 잽싸게 외쳤다.

“셋 셀 동안 말하지 않으면, 내가 가지고 싶은 거로 대신 말해버린다? 자, 하나…….”

사실 세르반의 말은 내 귀에 잘 와닿지 않는 상태였다.

나는 이미 ‘생일선물’이라는 단어에 꽂혀서, 짧고도 깊은 생각에 빠져 있었으니까.

‘설마 세드릭. 오늘 생일이었던 거야?’

아, 그러고 보니 생각난다.

분명 원작에서 세드릭의 생일은 여름이 되기 전의 늦은 봄날이라고 했었지.

딱 지금 이맘때쯤이고.

‘맙소사, 하마터면 축하도 못 해줄 뻔했잖아.’

나는 깜짝 놀라 멍해 있었다.

그래도 명색이 친구인데, 다들 생일 정도는 챙겨줘야 하지 않을까 하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단 말이야!

“……저는 별로 가지고 싶은 것도 없는데, 형님이 알아서 말씀하셔도 됩니다.”

“……뭐? 진심이냐?”

한편 세드릭은 관심 없다는 얼굴을 하고 기지개를 쭉 켜고 있었다.

그러자 원하던 대답을 얻게 된 세르반이 되레 당황했다.

“아니, 야. 진짜로 네 생일선물 내가 갖는다? 정말로 내가 갖고 싶은 거 대신 말해도 되지? 말 바꾸기 없기다.”

“네, 뭐. 형님 마음대로 하세요.”

세드릭이 이윽고 고개를 두어 번 끄덕였다.

세르반은 여전히 당황한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흡사 뒷걸음질하듯 방을 나갔다.

이후 펼쳐진 잠시간의 정적.

나는 생각했다.

‘세드릭, 나와 있거나 다른 아이들 앞에서는 개구쟁이 같고 성질이 좀 더러운데…… 의외로 제 가족들 앞에서는 차분한 편인 것 같아.’

게다가 더 의외인 건 물욕도 없는 편인 것 같다는 점이다.

제가 선물로 받은 검은 집착하듯 아꼈으면서, 대체 왜?

“저, 세드릭 님. 생일이셨어요?”

의문을 뒤로하고, 일단 가장 중요한 걸 재확인했다.

놀랍게도 세드릭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했다.

“그래. 오늘이 내 생일이야.”

“……몰랐어요.”

“모르는 게 당연한 거 아냐? 내가 안 말해줬는데.”

세드릭이 짐짓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밉지 않게 흘겼다.

나는 살짝 우울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미리 말씀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

“생일 날짜 같은 쓸데없는 걸 내가 뭐하러 떠벌리고 다니겠냐?”

“쓸데없다뇨. 저는 오늘이 세드릭 님 생일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선물을 챙겨서 왔을 거라고요. 축하도 해드리고요.”

내 말을 들은 세드릭은 잠시 멍해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되물었다.

“축하라고?”

“네.”

대답하는 내가 오히려 더 당황스러울 만큼의 반응이었다.

아니, 생일축하가 뭐 별건가? 왜 저러는 거지? 혹시나 해서 나는 조심스레 질문했다.

“저, 혹시 세드릭 님은 생일에 축하 파티라든가…… 그런 걸 한 번도 열어보신 적 없어요?”

“응.”

“생일 축하한다는 말 같은 것도 들어보신 적 없고요?”

“아마도?”

세드릭이 잠시 고민하는 듯싶더니 이내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연이은 세드릭의 대답에, 골치 아파진 건 나였다.

‘특이하고, 조금은 삭막한 가문인 것 같아. 가족끼리 생일축하도 해주지 않다니.’

세드릭의 부모님은 안 뵈어 봐서 모르겠고, 형제끼리는 엄청 친하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냥 보통의 형제 사이 같던데.

어째서?

“저, 그럼 축하를 받을 때는 주로 언제예요?”

“……검술 수련에서 드물게 특출난 기술을 연마했을 때라든가. 경합에서 이겼을 때? 그땐 저택에서 성대하게 파티도 열었지.”

“…….”

자랑스럽게 말하는 세드릭을 보며, 나는 그만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동시에 생각했다.

아무래도 안 되겠어!

‘그냥 축하만 해주려고 했는데,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어. 오지랖일지라도 좀 부려 봐야겠다.’

내 작은 두 주먹이 결의를 담고 꼭 쥐어졌다.

“세드릭 님. 저택 주방장에게 부탁해서 케이크 하나만 만들어 달라고 해주세요.”

“뭐? 갑자기 웬 케이크?”

세드릭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유는 묻지 마시고, 어서요! 네?”

나는 눈동자를 반짝이며 세드릭에게 간곡히 청했다.

그러자 세드릭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아, 그리고 가느다란 양초 여덟 개도 필요해요!”

세드릭의 빠른 대답에 화색을 띤 것도 잠시, 또 다른 준비물이 생각나 손가락을 여덟 개 꼽으며 외쳤다.

“대체 양초는 어디에 쓰게?”

세드릭은 아직 대낮인데, 쓸데없는 걸 필요로 하는 이유가 뭐냐며 투덜거렸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착실하게 하인을 불러 심부름할 것을 말하는 세드릭이었다.

잠시 후, 그러니까 약 10여 분 후 우리 앞으로 초콜릿 케이크 하나가 대령되었다.

내 쫙 편 두 손바닥을 합친 크기 정도 되는 케이크.

한마디로 파티용으로는 조금 모자란 크기였다.

하지만 위에 올라간 풍성한 크림과 신선한 과일 덕분에 허전함이 가려졌다.

“뭐야? 빨리 가져왔네?”

케이크를 가져온 하인을 향해, 세드릭이 흥미롭다는 얼굴로 질문했다.

그러자 하인이 하하 웃으며 대답했다.

“마침 주방에서 만들던 케이크가 있길래, 그걸 바로 가져왔습니다.”

“오호.”

세드릭은 휘파람을 짧게 불었다.

그러고는 이내 날 보며 물었다.

“그래서 이 케이크가 왜 필요하다고 한 건데? 이제 말해봐.”

“아, 그게요.”

나는 살짝 눈치를 보다가, 이내 대답했다.

“……세드릭 님 생일 축하 파티라도 해드릴까 싶어서요. 하하. 좀 뜬금없죠?”

“뭐?”

세드릭이 제 귀를 의심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동시에, 양초 여덟 개를 가져오던 또 다른 하인 역시 비슷한 반응을 보였다.

“예?”

그는 막 방에 들어오던 참이었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손에 들고 있던 밀랍 양초를 우르르 떨어뜨리고야 말았다.

데굴데굴.

양초 구르는 소리가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그만, 실수했습니다.”

하인은 다급히 사과하며 양초를 줍고 물러갔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그에게는 단 하나의 관심도 보이지 않고 오로지 세드릭은 나만 응시했다.

이윽고 날카로운 질문이 날아왔다.

“너 제정신이냐?”

“……아마도요. 그럴걸요.”

나는 민망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자 세드릭이 연신 ‘허, 허’ 하는 한숨 소리를 냈다.

골 때리는 인간을 보는 듯한 표정으로 날 보는 건 덤이었다.

“넌 진짜…….”

“헤헤.”

나는 실없이 웃었다. 그리고 되물었다.

“혹시 싫어요?”

“싫지는 않아! 그냥 이런 건 좀 별로…….”

세드릭은 곧바로 크게 부정했고, 잠시 멈칫하다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모순되는 말이었다.

싫지는 않은데 좀 별로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람.

잠시 후,

“그, 그러니까 이런 건 진짜 어색하다고! 생일 파티 같은 걸 대체 왜 해? 쓸데도 없이?”

아무 말 없는 내게 세드릭이 뜬금없이 변명하듯 외쳤다.

나는 곧바로 웃으며 대꾸했다.

“좋아하니까?”

“뭐, 뭐……?”

순간 세드릭의 낯이 쩡 하고 굳어버렸다.

그리고 나는 이어 외쳤다.

“챙겨주고 싶으니까요!”

“……!”

세드릭은 뭔가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뗐지만, 곧 고개를 푹 숙여버리고서 손으로 제 얼굴을 가렸다.

손가락 가장자리에서 어느새 빨개진 귀 끝이 보였다.

얼굴을 숨겨버린 세드릭에게, 나는 볼을 긁적이며 말을 마무리했다.

“……뭐 그런 이유가 보통 아닐까요. 그리고 쓸데없긴, 이런 거 빼먹으면 아닌 것 같아도 서운해요?”

세드릭은 참 이상한 성격을 가졌다.

막 대해도 화내고 무시해도 화내고 그렇다고 잘해주면 더 화내니까.

하지만 어쩐지 오늘은 세드릭이 많이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다.

하여간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말과 행동이 다르다니까.

잠시 뿌듯하게 세드릭의 두 손등을 바라보던 나는 이내 일어섰다.

창문들을 모두 커튼으로 가리고서, 성냥을 집어 들었다.

원래대로라면 위험하니 하인이 불을 붙여줬어야 맞는데, 아까 깜짝 놀라서 성냥까지 두고 나가버린 모양이다.

어휴, 그냥 내가 하자.

“자, 초에 불붙일게요. 그리고 제가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드릴 거예요.”

“……어.”

손 틈으로 짧은 대답이 되돌아왔다.

나는 이어 설명했다.

“그러면 여기 여덟 개 초를 한꺼번에 후우- 하고 부시면 돼요. 아니, 아니다. 한 번에 불기엔 숨이 찰 테니까 그냥 대충 불어서 꺼주세요. 그럼 끝!”

나는 방긋 웃었다.

물론 이 웃음은 세드릭에게 보이지 않겠지만.

이윽고 초에 불을 붙이고 있는 내게, 어느새 얼굴을 내보인 세드릭이 조용히 물어왔다.

“……남들은 다 이렇게 생일을 보낼까?”

“다…… 라고 말하기는 좀 그렇지만 보통 생일을 축하한다고 하면, 케이크와 생일 노래를 생각하게 마련이죠.”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다 쓴 성냥을 후 불었다.

속으로는 조금 후회하면서.

‘으으. 아까 말할 때, 케이크에 꽂을 양초를 가져다 달라고 할걸. 이건 그냥 불 밝힐 때 쓰는 양초잖아. 물론 개중에서는 가장 가느다란 거겠지만.’

물론 이미 초를 켜 버린 이상 소용없는 후회였다.

나는 잠시 초를 바라봤다.

케이크 옆 세워 놓은 여덟 개의 촛불을.

일렁였다.

바람이라고는 우리 둘의 가느다란 숨밖에 없을 텐데, 여러 방향으로 제멋대로 흔들리는 촛불이었다.

나는 잠시 세드릭을 바라봤다.

노란 금빛의 눈동자 안에서 붉은 촛불 여덟 개가 움직였다.

하지만 세드릭은 촛불도, 케이크도 아닌 내 눈을 마주 응시하고 있는 채였다.

‘보통 때의 세드릭이라면, 민망하고 껄끄럽다며 먼저 시선을 피했을 텐데.’

나는 문득 의아해졌다.

오늘 세드릭이 좀 이상한 것 같아서였다.

아니, 사실은 내가 이상한 건지도 몰랐다.

왜냐하면 나를 지그시 응시하는 세드릭의 눈동자가 꼭 내게 고마움을 품은 것처럼 보였으니까.

‘그럴 리가 없는데도.’

나는 잠시 멈칫하고서 이내 시선을 케이크로 돌리고, 작은 목소리로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합…….”

그때였다.

내가 채 노래의 첫 마디를 완성하기도 전,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우리 둘의 시선은 자연히 문을 향해 돌아갔다.

우리 둘의 조촐한 생일 파티에 난입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세드릭의 형 둘이었다.

“……헉, 헉. 아직 생일 파티 시작 안 했지?”

“……늦어서 미안하다.”

복도를 급하게 뛰어온 듯한 세르반과, 그런 세르반의 손에 이끌려 온 듯한 세이든.

예상조차 못 한 두 손님에, 세드릭과 나는 크게 놀랐다.

사실 나보다는 세드릭이 더 당황한 얼굴이었다.

당연하지만.

“혀, 형님들이 여긴 어떻게?”

“어떻게 왔긴. 아까 네 방에 들린 하인이 말해주던데? 네 친구와 함께 생일 파티인지 뭔지 하고 있다고.”

세드릭의 질문에 세르반이 답했다.

“그리고 나 혼자 오려다, 중간에 큰형님을 만나 같이 왔다.”

대답을 들은 세드릭은 멍한 얼굴이 되었다.

나는 생각했다.

사실 세드릭이 정말 궁금했던 건, 그들이 ‘어떻게’ 왔는지보다 ‘왜’ 왔는지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다들 바쁘지 않습니까.”

세드릭의 작은 중얼거림에, 이번엔 세이든이 대답했다.

“맞다. 세르반도, 나도 바쁘지. 각자의 수련이며 업무 같은 거로 말이다.”

그 말에 세드릭의 표정은 이상해졌다.

금방이라도 ‘그럼 왜 왔습니까? 쓸데없이. 가서 일이나 하지’라고 불퉁하게 내뱉을 것 같은 얼굴.

하지만 그러기 전, 세이든이 말을 이었다.

아까 봤던 무감각한 기사의 표정과는 달리 인간적인 표정을 하고 있는 그였다.

그러니까, 미안함이 가득한 눈빛과 충동적인 방문에 대한 민망함이 합쳐진 모습이라고 하면 되려나.

“……그래서 우리 가문에서는 한 번도 생일 파티를 한 적이 없었지. 아버지도, 어머니도, 우리 형제들도. 그런 파티는 형식적이고 쓸데없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렇지 않나?”

세이든의 말에 세드릭과 세르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 역시, 아까 세드릭이 쓸데없는 걸 뭐 하러 하냐고 하던 말을 되새겨냈다.

……으음, 분위기가 숙연하다.

나는 주변을 살펴보려 눈을 굴리다가 다시 눈을 깔았다.

나도 눈치란 게 있기 때문에 지금 상황에서 외부인인(?) 나는 나서지 않는 게 좋겠다고 판단이 되었으니까.

물음표를 끝으로 잠시 입을 다문 세이든을 대신해, 세르반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지. 생일 파티를 한다고 하니까 갑자기 가보고 싶더라고. 하하. 생일 파티에서는 뭘 하는 건지 궁금하기도 하고. 뭐, 별 이유는 아니지. 아마 형님도 나랑 같은 생각에서 온 걸 거다.”

끄덕.

세르반에게 동의한다는 듯 세이든이 고개를 짧게 주억였다.

그때 세르반이 갑작스레 깜짝 놀라 외쳤다.

“……어이쿠! 촛불 다 녹아 흐르겠다! 근데 초가 왜 이리 많아? 그러고 보니 낮인데 창문은 왜 닫아놨어?”

그의 말에 내 시선이 촛불을 향해 휙 돌아갔다.

정말이었다.

여덟 개의 초들은 바닥을 향해 촛농을 열심히 흘려보내는 중이었다.

으아아, 이러다 테이블보에 불붙겠다!

“저어, 이제 생일 축하를 해야 할 때예요! 원래 생일 파티 할 때는 노래를 부른 다음에 깜깜한 실내에서 초를 부는 게 중요하거든요. 초는 세드릭 님의 나이 개수예요. 자, 제가 노래 부를 테니까 따라 불러주세요!”

다급히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러자 다들 어어 하면서도 나를 따라 했다.

마침내 노래를 다 부른 나는 밝게 웃으며 외쳤다.

“……생일 축하해요, 세드릭 님! 자, 이제 초 불어요!”

사실 그다지 듣기 좋지는 못했다.

세르반, 세이든 둘 다 노래를 처음 불러보는지 군데군데 음 이탈이 나고, 박자와 타이밍이 달라 꼭 돌림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되었으니까.

하지만 확실한 건, 그런 조악한 노래에도 세드릭은 기뻐했다는 거다.

그리고 그거면 나도 만족했다.

“후우우우-”

“……와아아! 짝짝짝!”

놀랍게도 세드릭은, 단 한 번의 날숨으로 모든 초를 꺼버렸다.

나는 그 광경에 깜짝 놀랐지만 이내 함성을 지르며 손뼉을 쳤다.

역시 기사라서 폐활량도 좋은가 보다.

“생일 축하한다. 세드릭.”

“……나도. 축하한다. 생일.”

그리고 세드릭의 두 형은, 둘 다 세드릭이 아닌 엉뚱한 곳으로 시선을 돌린 채 축하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저기 이거, 두 명 다 부끄러워하는 거 맞지?

“다들…… 축하해 줘서 고마워요.”

세드릭 역시 이런 상황이 낯설고 쑥스러운 듯했다.

모두의 축하가 끝나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가만히 입을 열어 감사를 표했으니까.

망설이던 시간에 비해서는 짧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마음은, 적어도 내가 지금까지 봐온 세드릭의 감정 중 가장 깊은 고마움이었을 것이 분명했다.

나는 잠시 흐뭇한 기분으로 세드릭과 형제들을 바라보았다.

그저 세드릭에게 생일 축하라는 것을 알려주고 싶었을 뿐인데, 어쩌다 보니 세드릭네 가족의 화합 도모를 도와주게 된 것 같았다.

‘뭐, 나쁜 일은 아니니까.’

이윽고 맏형인 세이든이 나서서 케이크를 잘랐다.

그리고 그는 제일 먼저 내 앞으로 조심스레 케이크 접시를 건네주었다.

“……많이 먹도록. 영애.”

나는 케이크 조각을 빤히 바라보았다.

나름 신중히 자른 것 같긴 한데, 크림이 다 짓눌려 버린 채였다.

아하, 검은 잘 다루지만 빵칼은 잘 못 다루는 기사님이네.

하지만 포크를 들어 먹어보니, 지금까지 먹어 본 그 어떤 케이크보다 달콤했다.

예전에 세드릭이 제집 주방장 솜씨가 영 별로라고 했던 적 있었던 것 같은데.

그 말 이제 보니 순 거짓말이었어.

우리 네 명은 한동안 말없이 케이크만 먹어댔다.

그러다 침묵을 이기지 못하고 세르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세 명이 모인 건 오랜만이네? 오늘은 비록 손님도 함께지만 말이야.”

“그렇지.”

“그러네요, 형님.”

세이든과 세드릭이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세이든이 조심스레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 우리 삼 형제가 서로 너무 대화가 없었다는 생각이 든다. 앞으로는 종종 이렇게, 그러니까 꼭 생일이 아니더라도…… 티타임이라도 갖도록 하자.”

그의 말에, 세드릭과 세르반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심입니까, 큰형님?”

“……물론 진심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도 함께하시면 좋겠지만, 두 분은 워낙 바쁘시니.”

기사다운 무뚝뚝한 말투였지만, 그 안에 담겨 있는 후회 어린 감정.

그리고 어렴풋한 가족애를 나는 눈치챌 수 있었다.

아마 세르반과 세드릭도 알아차렸을 것이다.

나는 그들 사이에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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