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치원이 개원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나는 내일 유치원 갈 준비를 위해 몰래 가방을 챙기는 중이었다.
“아가씨, 뭘 하고 계셨길래 그리 놀라세요?”
그러던 도중 갑작스레 유모 캐리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오길래, 나는 내 손 안에 쥐고 있었던 것들을 재빨리 드레스 자락에 숨겼다. 물론 캐리는 그런 내게서 금세 수상함을 감지하고서 게슴츠레하게 눈을 뜨고 나를 바라보았다.
뒤통수가 따끔따끔, 찔렸지만 나는 끝까지 뻔뻔하게 주장했다.
“아무것도 안 했어. 유모. 나는 그저 어제 엄마가 새로 사 주신 가방이 너무 예뻐서 이 펜던트 장식을 보고 있었을 뿐이야.”
“……아, 그런가요? 하긴. 마님께서 사 오신 그 가방, 제가 봐도 참 예쁘긴 하더라고요. 주홍빛이라 그런지 요즘 같은 봄 날씨에 잘 어울리기도 하고요.”
결국 캐리는 내 의도대로 훌륭하게 화제를 돌리는 것에 넘어가고야 말았다. 내일은 가방에 어울리는 흰 드레스를 입고 가자는 캐리의 말에 동의해 주고서, 그녀가 사라지자 나는 겨우 한숨을 돌렸다.
“에휴. 유모는 왜 내가 이 돌을 가지고 있는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거람.”
나는 푸념하며 조심스레 드레스 자락을 뒤졌다. 그러자 잘 다듬어서 표면이 매끈매끈해진 손톱만 한 작은 돌멩이들이 다섯 개 굴러 나왔다.
공기놀이를 하기 위해, 내가 정성껏 뒤뜰 정원에서 주워 거친 숫돌에 손수 갈아 만든 것이었다. 그리고 나서는 깨끗하게 물로 여러 번 씻어내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번에 캐리가 이 더러운 돌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면서 뺏은 적이 있었다.
에잉, 내가 물로 닦았다고 해도 그래. 유모는!
아무튼 이번에 만든 돌은 절대로 빼앗길 수 없었다. 세 번이나 열심히 돌을 갈고 싶지는 않단 말이야, 흑흑.
나는 조심스레 작은 천 주머니에 돌들을 넣은 후, 그 주머니를 또다시 가방 깊숙이 숨겼다.
내일 이것들을 유치원에 가져가서, 아이들과 같이 공기놀이를 할 작정이었다.
다음 날, 나는 다행히도 유모나 다른 하녀들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히 가방 안에 있는 돌들을 유치원까지 가져가는 데에 성공했다.
그리고 수업이 시작되기 약 20분 전, 옹기종기 모인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돌들을 꺼냈다. 그러자 바로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던 제이크가 곧바로 반응하며 질문했다.
“어, 미르. 그게 뭐야?”
“으응, 내가 며칠 전에 열심히 갈아서 만들었어. 봐, 매끈하지?”
“우와. 정말이네.”
사실 아직까지는 제이크 말고 다른 아이들은 딱히 관심이 없었다.
앨리스는 어쩐 일인지 오늘 유치원에 나오지 않았고, 니콜라스는 언제나처럼 책이나 읽고 있었으며, 니나이나는 내 옆에 찰싹 붙어 있긴 했지만 별 볼 일 없어 보이는 돌에는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세드릭은 어젯밤 잠을 덜 잔 모양인지 책상에 엎드려서 코까지 골며 잘 자는 중이었다.
그래서 나는 내 절친인 제이크에게만 특별히 이 재미있는 놀이를 먼저 알려주기로 했다.
내가 부모님부터 유모, 저택의 막내 하녀까지 모두 찾아다니며 물어본 결과, 이 세계에는 공기놀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으니 아마 이곳에서 공기놀이를 창시한 사람은 내가 될 것이다.
나는 제이크에게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큰 목소리로 말했다가는 옆자리에서 자고 있는 세드릭이 벌떡 깨어날 것 같아서였다.
“나랑 이걸로 놀이하자.”
“미르가 하자는 거면 다 좋아! 그런데 무슨 놀이야?”
“자, 봐. 내가 하는 걸.”
나는 매끈한 돌 중 하나를 공중으로 휙 던지고 그사이에 바닥에 있는 돌을 휙 낚아채는, 공기놀이의 처음부터 끝까지를 제이크의 앞에서 시연했다.
제이크의 눈이 점점 커다래지더니 끝내 헤이즐넛색 부드러운 눈동자가 경악에 가까운 놀란 감정을 담고 있었다.
“미, 미르. 대체 어떻게 한 거야? 우와, 너무 신기해.”
“아니야. 제이. 너도 얼마든지 할 수 있어! 자, 따라서 해 봐.”
그렇게 내가 열심히 제이크에게 공기놀이를 가르쳐 주고 있을 때였다. 옆에서 ‘쟤들은 대체 뭐하나……’ 싶은 눈초리로 쳐다보고만 있던 니나이나가 드디어 흥미가 조금 생긴 듯, 나를 불렀다.
“새런, 아니, 에미르. 그게 뭐 하는 놀이라고?”
“아, 이건 공기놀이라는 거예요. 전하도 해보시겠어요?”
아무래도 운동신경이 조금 부족한 탓에 번번이 바닥의 돌을 건드리거나 공중의 돌을 놓치고 있던 제이크였다.
마침 제이크가 너무 어렵다면서 잠시 손을 놓은 터라, 나는 그 돌을 니나이나에게 건넸다. 니나이나는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선뜻 손을 내밀었다.
“줘 봐.”
“여기요. 제가 어떻게 하는지 알려드릴게요.”
그렇게 나는 또다시 니나이나에게 공기놀이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헉. 재능 있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니나이나가 하는 걸 지켜보았다. 내 옆에서 지쳐 있던 제이크도 슬며시 옆으로 와서 구경 중이었다. 제이크가 조심스레 내 귓가에 속삭였다.
“미르. 황녀 전하가 너보다 더 잘하는 것 같아. 어떡해……?”
그러게. 정말 어떡하냐.
불공평하게도 내가 전생에서 한 달여간 불나게 연습해 연마한 실력을 니나이나는 단 5분 만에 습득해 척척 잘해내는 중이었다.
인생은 불공평이라더니, 재력 권력 얼굴 다 가진 니나이나는 공기놀이마저 잘했다. 흑.
한참 집중하던 니나이나가 이내 우리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개를 들며 툭 한마디 했다.
“뭐, 별거 아니구나.”
그 별거 아닌 걸 못해서 제이크는 연달아 실패 중이었지만.
아무튼 제이크는 니나이나의 실력을 보고서 자극을 받았는지, 자신도 다시 해보겠다며 재도전을 신청했다. 니나이나는 잔뜩 의기양양해진 표정으로 공깃돌을 제이크에게 넘겨주었다.
그리고 이어진 몇 번의 실패.
“으으…….”
좀처럼 불만이 생겨도 화내지 않는 얌전한 제이크가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제이크에게 다가갔다.
“제, 제이크. 그러지 말고 손에 힘을 좀 뺀 다음 천천히 해 봐.”
“……알겠어. 미르. 그럼 다시 한번 해볼게.”
제이크는 비장한 표정으로 돌을 집어 다시 1단계부터 시작했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돌을 낚아채려는 순간…… 응? 돌이 날아갔다?
제이크가 실수로 마음이 조급해진 나머지 손동작을 헛짚은 바람에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날아간 그 돌은, 하필이면 세드릭의 정수리에 제대로 명중했다.
“아! 뭐야!”
당연하게도 곤한 잠을 자고 있던 세드릭이 머리를 감싸며 벌떡 일어났다.
세드릭은 잠이 다 달아나는 바람에 짜증을 가득 담은 표정으로 정수리를 매만졌다.
“나한테 이 돌을 던진 사람, 누구야?”
그리고 범인을 찾았다.
당연히…… 손에 돌을 들고 있는 제이크가 범인이지?
그 사실을 세드릭은 곧바로 알아챘다.
“아, 또 너냐! 너 나한테 원수졌어?”
“죄송합니다. 그만 놀다가 실수로 던져 버렸네요.”
그리고 제이크는 세드릭에게 사과했다. 어찌 되었든 실수긴 하지만 그 돌이 세드릭의 머리에 맞은 건 사실이었으니까.
세드릭은 분한 표정으로 떨다가 이내 코웃음을 쳤다.
“그럼 이 돌은 내가 가진다.”
어? 안 되는데. 그거 내 돌인데!
순간 내가 저 돌 한 알을 만들기 위해 거친 숫돌에 작은 손으로 낑낑대며 힘을 썼던 순간들이, 마치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아가씨, 여기서 뭘 그리 열심히 만드십니까?’
‘으앗! 깜짝이야. 놀라라! 아차차, 제발 유모에겐 비밀로 해 줘. 유모가 뺏어갈 게 분명해!’
저택 뒤뜰의 풀숲 사이에서 열심히 돌을 갈다가, 지나가던 기사에게 들켜 가슴이 아찔해지던 순간부터, 손이 새빨갛게 부르터 버려서 급히 차가운 연못에 손을 담가 진정시키고 있던 일들까지…….
그렇게 땀과 눈물을 흘리며 힘겹게 만든 돌인데, 이렇게 뺏겨서는 안 되지!
그래서 곧바로 나는 일어서 그건 안 돼! 라고 외치려 했다.
니나이나가 먼저 내 말을 가로채지만 않았더라면.
“뭐? 그건 안 돼. 세드릭 공자. 어서 그 돌 이리 줘.”
“흐음? 저는 전하가 아니라 저 자식의 물건을 뺏은 것뿐이거든요.”
세드릭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니나이나의 명령에 불복종하며 제 손에 있는 돌을 이리 굴렸다 저리 굴렸다 장난치고 있었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외쳤다.
“그 돌, 내가 만든 건데요! 제이크 거 아니고 내 거라고!”
“아, 네 거였어? 흐음.”
세드릭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이내 나한테 돌을 순순히 건네줬다.
“자, 받아.”
아니, 세드릭이 웬일로 이리 말을 잘 듣지?
어쩐지 잘 돌려받고도 수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세드릭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는 표정으로 내게 척척 걸어와서 내 손에 꼭 쥐어진 다섯 개의 돌을 내려다보았다.
“근데 이 길거리에 굴러다니는 돌들은 뭐 하러 주워서 갖고 있어?”
빠드득, 들리는가. 내 이가 갈리는 소리.
도대체 내가 한 말을 뭘로 들은 거람. 주운 게 아니라, 내가 만들었다니깐!
결국 나는 후우 한숨을 내쉬며, 세드릭에게 질문했다.
“그냥 돌이 아니에요. 공기놀이라고 들어 봤어요?”
물론 안 들어 본 게 당연하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서 공기놀이는 내가 처음이거든.
당연하게도 세드릭은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그건 또 뭔 놀이야?”
“이리 오면 제가 가르쳐 드릴게요.”
나는 속으로 악마의 미소를 후후 지으며 손짓했다.
자, 이제 너도 공기놀이에 빠져들어 보렴.
잠시 후, 역시나 세드릭도 내가 가르쳐 준 새로운 놀이에 눈을 반짝이며 달려들었다.
“뭐야, 이거 꽤 재밌잖아?”
“거봐요. 아, 모두가 다 잘할 수 있게 되면 그땐 함께 대결도 해 봐요!”
“오, 대결 좋지.”
장차 어른이 되어 소드마스터가 될 새싹답게 몸짓이 아주 재빨라서, 세드릭은 니나이나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놀이방법을 습득했다.
사실 세드릭이 바닥에 있는 돌들을 잡아채면서 이 귀한 유치원 대리석 바닥이 살짝 흠집난 것 같은데, 으음. 나는 모른 척해야겠다…….
“다들 거기서 무엇들 하나. 곧 수업시간이잖아.”
그때 갑자기 터벅터벅 걸어오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공기놀이를 하고 있던 우리 4인방을 방해하는 누군가의 그림자가 보였다.
오른쪽 귀에 깃펜을 꽂은 채 냉철한 붉은 눈동자로 우리를 내려다보는 니콜라스였다.
“전하도 한번 해보실래요?”
나는 그 무심한 7살 아이의 시선에 굴하지 않고 벌써 4번째로 공기놀이 시연을 보여주며 니콜라스를 꼬셨다. 그렇게 책만 읽지 말고 너도 같이 좀 놀자!
“……됐다. 난 그런 건 관심 없어.”
하지만 장렬히 실패했다.
내 손이 민망해지게, 니콜라스는 곧바로 자리로 되돌아가 앉았다.
그리고 그 이후 선생님이 들어오셨기에 아쉽게도 우리의 공기놀이는 끝나야만 했다.
수업 중간 쉬는 시간마다 우리는 말하지도 않았는데 약속한 것처럼 교실 뒤편의 휑한 대리석 바닥으로 모였다.
니나이나는 차가운 바닥이 영 별로였는지 제 의자에 깔린 융단 방석까지 끌고 와 앉았다. 세드릭은 자신이 계속하고 싶은데, 공깃돌이 겨우 5개밖에 되지 않는다며 불만을 터뜨렸다.
“어쩔 수 없어요. 5개밖에 안 만들었는걸요. 정 그러면 공자께서 직접 공깃돌로 쓸 만한 돌을 5개 챙겨오시는 수밖에 없어요.”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 물론 말만 쉽지 막상 찾으려면 이만한 돌 구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나만 해도 종일 정원을 뒤지면서 적당한 무게감과 적당한 크기 두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돌멩이를 구하느라 얼마나 목이 빠질 것 같았다고!
그러자 세드릭은 삐죽 입을 내밀며 되지도 않는 허세를 부렸다.
“흥. 이깟 돌멩이 5개가 아니라 수십, 수백 개라도 가져올 거다. 저택 시종들 모두 불러모아 시킬 거야.”
“……그럼 못씁니다. 공자님. 5개면 충분한 걸 왜 욕심을 부리세요?”
괜한 말로 세드릭네 시종들이 별 소득도 없는 생고생을 하게 될까 봐 나는 곧바로 세드릭에게 충고했다. 세드릭은 콧방귀를 뀌며 돌을 튕겼다.
그리고 제이크는…….
“내일은 꼭 연습해 올게. 나도 공기놀이 대결에 꼭 참가하고 싶어, 미르.”
유치원이 끝날 때까지도 채 5단계의 공기놀이를 끝까지 완수하지 못했다.
슬픈 일이었다. 나는 우울한 표정으로 그렇게 말하는 제이크를 토닥이며 잘될 거라고 말해주었다. 실은 나도 이거 한 달 걸려서 겨우 터득한 거란다. 네가 나보다 낫다.
그렇게 우리는 하원길에서 각자 가문의 마차를 타고 헤어졌다.
나는 정말로, 다음 날 아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그때까지만 해도 몰랐다.
* * *
다음 날 아침이었다.
나는 룰루랄라 아침의 맑은 이슬 냄새를 맡으며 마차에서 내렸다.
오늘도 일등은 내가 사수한다는 다짐을 굳게 다지며.
‘어……?’
그런데 이미 누가 와 있었네.
나는 언제나처럼 다리를 꼰 자세로 우아하게 책을 읽고 있는 한 소년과 바닥에 방석을 깔고 앉아 있는 한 소녀를 보며 잠시 그 자리에 멈췄다.
“안녕하세요, 전하!”
간단하게 니콜라스에게 인사한 후, 니나이나의 뒷모습을 향해 걸어가며 발랄한 목소리로 외쳤다. 그런데 니나이나는 무언가에 열렬하게 집중한 듯 대답을 하지 않았다.
“……전하? 뭐 하세요?”
내가 의아하게 니나이나를 부르자, 대신 니콜라스가 대답했다.
그냥 내버려 두라는 듯 여상한 태도였다.
“니나이나는 아마 지금 네 말이 들리지 않을 거다. 어제부터 손에 공깃돌이라는 걸 쥐기만 하면 저러고 있어. 시녀들도 꽤 애먹었다지.”
“아, 공기놀이 때문에 저러시는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니나이나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마터면 뒤로 넘어가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화, 화, 황녀 저언하……? 지금 손에 쥐고 계신 게 설마 공깃돌인가요……?”
나도 모르게 손이 벌벌벌 떨리고 있었다.
아니, 그도 그럴 게 지금 니나이나가 열심히 공중에 던졌다 손으로 쥐었다 하는 저 동그란 것들. 하나같이 세공이 잘 되어 있고 반짝반짝 빛나는 투명한 색깔 있는 돌들…… 이 아니라 보석이잖아!
그래. 누가 봐도 보석이다! 근데 보석을 무슨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취급하고 있어…… 세상에나.
“그래. 맞아. 그보다 에미르, 나 지금 열심히 연습 중이거든. 대화를 걸지 말아줬으면 하는데.”
니나이나는 내게 시선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루비, 핑크 사파이어, 토파즈 등등으로 보이는 보석들을 공중에 던졌다 잡았다 하는 중이었다. 어쩐지 나는 조금 머쓱해졌다. 내 주머니 속 자그마한 정원 출신 자갈돌들이 슬퍼하고 있어!
“……알겠어요, 전하. 그럼 연습 열심히 하세요…….”
나는 쓸쓸하게 뒤돌아섰다. 주머니 속에 있는 돌들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내 소중한 돌들아, 그래도 난 너희를 버리지 않을 거야.
우리 유치원 생활 끝날 때까지 계속 함께 가자꾸나!
“내가 왔다!”
때마침 교실 문이 쾅 소리를 내도록 세차게 열리며 세드릭이 들어왔다.
오늘은 뒤에 조용히 따라 들어오는 앨리스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앨리스가 안 와서 내심 걱정하고 있었다. 에드몽 부인에게 물어봐도 이유는 모른다고 해서, 더더욱.
“앨리스!”
때문에 나는 곧바로 세드릭을 지나쳐 앨리스에게 부리나케 달려갔다.
앨리스는 살짝 창백한 낯빛으로 내가 자신에게 오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설마, 어제 감기라도 걸려서 못 왔던 건가?
“어제 앨리스가 안 와서 걱정했어요.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거예요?”
“……그, 그게…… 해서.”
“네에?”
앨리스는 우물쭈물 손을 꼼지락대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잘 안 들린 나머지 한 발짝 앞으로 가니, 그제야 앨리스가 뭐라 말하는지 들렸다.
“……늦잠을 자서…… 타고 갈 마차가 없어서 못 왔어요.”
앨리스는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늦잠을 잤다는 게 나쁜 이유라고 생각하는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늦잠이 뭐가 나쁜가. 나만 해도 유치원 오기 전까지 거의 매일 중천에 해가 뜨도록 쿨쿨 잠만 잤는데!
심지어, 늦잠을 잤다는 건 공녀인 앨리스를 제때 깨워 줄 사람도 없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니까 앨리스가 잘못한 게 아니었다. 단지 잘못한 것은 원작에 나온 앨리스의 가족들과 고용인들…….
나는 차마 뭐라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냥, 밝은 미소를 지으며 쭈뼛거리는 앨리스를 저편 바닥으로 이끌었다.
앨리스는 겨우 하루 유치원을 빼먹은 것뿐인데 다시 어색해진 것처럼 발걸음이 딱딱했다.
“앨리스. 내가 재미있는 놀이 알려줄게요.”
가방에서 어젯밤 챙겨놓았던 두툼한 오리털 방석을 꺼내 바닥에 툭 놓은 나는 그 위로 앨리스를 앉혔다. 그리고 또다시 공기놀이를 알려주었다.
앨리스는 내가 하는 양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잘 지켜보다가, 이내 내가 건네준 돌들을 비장한 눈초리로 쳐다보고서 한 동작씩 천천히 따라 했다.
“우와, 앨리스. 꽤 소질 있는데요?”
나는 앨리스의 손동작을 바라보다가 감탄했다.
빈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비교하기엔 좀 미안하지만 제이크보다도 뛰어났고, 예전의 초보자였던 나에 비하면 완전 천재 수준!
“……그, 그게 사실…… 예전에 심심할 때면 한 번씩 작은 돌들을 가지고 놀았어요. 그래서 그런 것 같아요. 절대로 잘하는 게 아니에요.”
앨리스는 내 칭찬이 부끄러운 듯 손사래를 쳤다.
아니, 그렇다면 이 세계의 공기놀이 발명은 내가 처음이 아니라 앨리스가 처음이었단 말이야?
역시 미래의 주인공이 될 인물이라 그런지 떡잎부터가 다르다.
“아뇨. 앨리스는 정말 잘해요. 사실, 저는 한 달이 지나고서야 겨우 이 정도 할 수 있게 되었는걸요.”
나는 킥킥 웃으며 앨리스에게 숨겨두었던 비밀을 말해주었다.
그렇게 우리는 사소한 대화를 도란도란 나누며 공기 삼매경에 빠졌다.
“거기, 뭘 그렇게 사이가 좋으신가?”
꼭 엑스트라 불량배 같은 대사를 내뱉으며 다가오는 세드릭으로 인해, 그 단란한 분위기는 파사삭 깨져 버렸지만 말이다.
“나랑도 공기 같이해.”
그리고 세드릭은 의문의 돌멩이들을 바지 주머니에서 와르르 꺼내놓으며 말했다.
나는 그 돌멩이들을 보고 그만 말문이 막혀 버렸다.
맙소사, 세드릭.
“이런 걸 지금 공깃돌이라고 가져온 거예요?”
나는 조금 다른 의미로 입이 떡 벌어졌다.
그도 그럴 게 세드릭의 주머니에서 떨어진 돌들은 온통 크기도 제각각에 심지어 울퉁불퉁했다. 내가 했던 것처럼 동글동글하게 갈아 놓은 흔적은 전혀 없었다.
분명 정원이나 어디 길바닥에서 보이는 대로 주워 온 게 틀림없었다. 그래도 다행인 건 흙이 묻어 있지는 않다는 것?
“공깃돌 맞는데. 어제 나 그걸로 연습도 했어.”
“……세상에.”
세드릭의 뻔뻔한 대답이 들려올 때, 마침 나는 그 돌 중에서 끝이 매끄럽지 못하고 뾰족뾰족해서 손을 찔리기 딱 좋은 것들을 여러 개 발견했다. 이런 것들로 연습하면 손에 분명 상처가 생겼을 텐데?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세드릭이 입고 온 옷, 소매가 길어. 평소에 대공가의 자제답지 않게 대충대충 입고 다니던 것과 다르게, 남의 옷 입고 온 것처럼 우아한 소매의 셔츠라니.’
나는 마치 탐정처럼 가느다란 눈길로 세드릭을 탐색했다.
마침내 내 눈에 걸린 건, 치렁치렁한 프릴 소매 셔츠 밑의 손바닥에 난 자잘한 상처들!
이미 내 눈에 띄어버린 이상, 모른 척 가만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의자를 끌어다가 세드릭의 앞에 놓았다.
“소공자님, 잠시 여기 앉아보시죠.”
“뭐? 왜? 내가 왜 앉아야 하는데?”
“아, 잔말 말고. 일단 앉아봐요. 옳지.”
세드릭은 연신 물음표로 끝나는 말들을 내게 던지면서도 행동은 순순히 내 부탁 아닌 협박에 따라주었다. 의자에 앉고도 사실 세드릭은 내가 왜 여기 앉아보라 했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여기 반성 의자야? 나 뭐 잘못한 것도 없는데, 에이 씨. 일어날래.”
“아, 잠시만요. 기다려 보세요. 잠시 제가 어딜 좀 갔다 올 텐데, 그때까지 일어나지 말고 있어요.”
“빨리 갔다 와. 1분 센다. 그 안에 안 오면 일어날 거야.”
세드릭은 벌써부터 ‘1, 2, 3……’ 하고 숫자를 입 모양으로 세고 있었다.
성질 급하기는! 결국 나는 재빠른 걸음으로 달음박질해서 교실을 벗어났다.
‘내가 물건 보관함에 분명히 뒀었던 기억이 나. 의료 키트였지.’
지금이 수업 시작하기도 한참 전 이른 시간이라, 아직 과목을 가르치는 선생님은 물론이고 에드몽 백작 부인도 원에 없었다.
물론 기본적으로 우리를 호위해 주는 황궁 기사들은 정문 밖, 이 교실 문밖, 유치원 곳곳에 대기하고 있었지만 그 기사들에게 구급상자 같은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결국 나는 크리스탈처럼 투명한 내 물건 보관함을 열고 그 안에 쌓아둔 자질구레한 물건들 사이에서 구급함을 꺼내왔다.
“그거 뭐야. 수상해.”
“구급상자예요. 소공자님, 손 이리 주세요.”
“……뭐? 구급상자?”
나를 보고서 제한시간보다 5초 늦었다며, 그렇지만 특별히 기다려 줬다며 투덜대던 세드릭은 내 손에 들린 상자를 보고 움찔했다. 그러더니 이내 팔짱을 껴서 손을 감췄다.
“내 손은 왜 보려는 건데.”
어쭈? 이것 봐라?
왜 보려는 건지 정말 이유를 몰라서는 당연히 아닐 테고, 저렇게 돌에 긁힌 채 계속 놔두면 덧날지도 모른다고! 대체 뭔 배짱으로 버티고 있는 건데?
그래서 결국 협박했다.
“좋은 말로 할 때 손을 내놓으시죠.”
“……아씨.”
세드릭은 못 이기는 척 팔짱을 풀고 양손을 무릎 위에 턱 하니 올려놓았다.
환하게 비치는 교실 천장의 샹들리에 조명 빛에, 세드릭의 작은 손 곳곳에 난 생채기들이 붉게 제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절로 인상을 찌푸렸다. 이 정도면 물이 닿을 때마다, 아니, 그냥 천 자락에 살짝 스치기만 해도 꽤 아프고 쓰렸겠는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저런 몹쓸 돌멩이들로 공기놀이를 한 걸까.
아니, 그보다 대공가의 자제가 손이 저 모양인데 아무도 치료하지 않은 거야……?
‘아, 설마 원작에 나오던 앨리스의 집안에 이어 세드릭네 집안도 무관심 일색인 그런 곳은 아니겠지.’
순간 스쳐 가는 불안함에, 어찌 보면 오지랖으로 들릴 수도 있는 질문을 하고야 말았다.
“왜 손을 치료해 달라고 하지 않았어요? 아니, 목욕할 때 이 상처를 보면 어떤 시종이라도 당장에 의료원을 불러 상처를 감아줬을 텐데. 아무도 안 해준 거예요?”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나는 목욕 같은 거 할 때 시종 따위의 도움 받지 않거든.”
응? 나야말로 세드릭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다.
대공가의 막내아들이, 그것도 겨우 7살짜리가, 목욕할 때 시종의 시중을 받지 않는단 말이야?
내 황당한 표정을 읽어냈는지 세드릭이 툭 대꾸를 던졌다.
“원래 우리 가문은 그래. 두 형님도 나랑 같아. 목욕 시중? 그런 건 우리 가문 사전에 없는 단어라고. 훌륭한 기사의 소양은 강하게 길러지는 거니까. 자질구레한 것까지 시종의 도움을 받는 건 용감한 기사답지 않잖아. 그러니까 이깟 작은 상처들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 아얏!”
“듣자 듣자 하니 못 들어주겠어서요. 조금 따끔하겠지만 참아주세요.”
나는 인상을 잔뜩 구긴 채 입꼬리만 끌어 올려 가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세드릭이 가문에 대해 주절대는 동안 솜에 부어 놓았던 소독약으로 손에 난 상처를 하나하나 닦아냈다.
그래, 기사의 소양 좋다 이거다. 하지만 그게 왜 7살 난 작은 꼬마 아이의 손 상처까지 그냥 내버려 두는 것으로 연결되어야 하는지는 난 정말 잘 모르겠다.
봐, 안 아프다고 애써 말해봤자 아직 살이 하나도 안 아물었잖아.
정말 안 아파?
“으윽, 대체 뭔 약으로 내 손을 닦고 있는 거야. 약 맞아? 독약은 아니고?”
“독약이었으면 벌써 공자님의 손이 보라색으로 변해 버렸을걸요. 손가락 끝 움찔거리지나 마세요.”
대대로 황궁의 제일검으로서 대공위까지 받은 대단한 가문의 막내아들이면 뭐 하나.
나는 들리지 않게 작은 한숨을 쉬었다. 기사 가문의 핏줄들은 다 강철 피부를 가져서 안 다치고 고통을 덜 느끼는 것도 아니잖아.
“다 됐어요. 이제 붕대 감아줄게요.”
“아, 무슨 붕대까지 감아. 불편하게.”
“안 감으면 기껏 소독해 놓은 게 다시 더럽혀져요.”
티격태격 말다툼의 끝에, 결국 나는 세드릭의 손에 붕대를 감은 후 피가 적당히 통하도록 묶어주었다.
세드릭은 제 손에 감긴 하얀 물체가 어색한 듯 손을 이리 폈다 저리 폈다 했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가 생각난 듯 표정을 구겼다.
“아씨, 잠깐만. 지금 이렇게 붕대 감아버리면 나 공기놀이 못 하잖아. 오늘 대결하기로 했는데, 그래서 나 어제 검술 연습도 땡땡이치고 공기만 죽어라 연습했다고.”
어머나, 그런 사연이 있었어?
나는 살짝 세드릭이 안쓰러워졌다. 아니, 그 공기 대결이 뭐라고 저렇게 집착을…….
그래서 미래에 집착 서브 남주가 되는 거구나. 세드릭.
어쨌거나 세드릭이 아쉽다 못해 우울하게까지 보이는 표정으로 시무룩해 있었기에, 나는 세드릭을 달래주었다.
“그깟 시합, 오늘만 기회가 있는 건 아니잖아요. 내일도, 모레도. 일주일 뒤에도. 세드릭이 하고 싶을 때 저한테 대결 신청하세요. 기꺼이 받아들여 줄 테니까.”
“……됐어.”
세드릭은 바닥에 있는 돌들을 전부 주워 다시 제 주머니로 가져가 놓고 터벅터벅 힘없는 걸음으로 책상에 가서 턱 엎드렸다.
잠시 후, 자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자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붕대가 칭칭 감긴 손으로 얼굴이 하나도 보이지 않게 막아놓은 터라 나는 세드릭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미르! 나 왔어!”
“어, 제이크!”
하지만 세드릭에게 다가가 볼까 하던 때에, 마침 문이 열리고 제이크가 뒤늦게서야 등장했기 때문에 나는 잠시 세드릭의 존재를 잊고야 말았다.
제이크가 내게 이런저런 말을 거는 도중 왜인지 모르게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제이크가 가방에서 꺼낸 물건을 보느라 정신이 팔려 더는 신경 쓰지 못했다.
“봐봐, 미르. 어때?”
“우와. 이건 꼭 틀에 굳힌 것처럼 모양이 예뻐! 도대체 이렇게 예쁜 돌을 어떻게 만든 거야?”
제이크가 가방에서 꺼낸 건 다름 아닌 공기 알이었다.
니나이나 황녀의 보석 알도 아니고, 세드릭의 굴러다니는 자갈돌도 아닌 그 공깃돌들은 하나같이 내가 만들어낸 것보다 매끄럽고 모양이 고왔다. 심지어 무게도 딱 공기놀이하기 좋게 묵직함이 느껴졌다.
“아버지께 가서 만들어 달라고 했어. 마법으로 했더니 모양이 이렇게 예뻐졌어!”
“아, 테이온 공작님?”
테이온 공작님이야, 워낙 우리 집과 막역한 사이인 데다 얼굴도 자주 봐서 친근했다.
때문에 나는 제이크가 말한 이름에 곧바로 반응했다.
그러고 보니 제이크네 가문은 대대로 마법사를 배출했지. 제이크의 아버지이신 공작님은 제국에서 손에 꼽히는 실력자이기도 하고.
그래, 저렇게 모양이 예쁜 돌을 손쉽게 뚝딱 만들어내는 것은 마법 아니고서는 좀처럼 힘들다.
그렇게 제이크와 문가에서 이야기를 나누던 나는 이내 벽시계를 한 번 보고서 정신을 차렸다. 벌써 수업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제이크, 이제 자리에 앉자.”
“으응. 미르.”
그리고 자리에 앉은 나는, 방금까지 잊고 있었던 한 아이의 존재를 다시금 똑똑히 기억해 내게 되었다.
뎅, 뎅 하고 정각을 알리는 벽시계의 종소리에도 굳건하게 엎드려만 있는 세드릭을.
어쩐지 붕대 밑으로 꼭 쥐고 있는 주먹이 여리게만 느껴져,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 * *
다음 날, 나는 조금 들뜬 마음으로 유치원에 발을 디뎠다.
내 가방 안에는 다름 아닌 거금을 주고 산 힐링 포션이 들어 있었다.
‘어제 내게 이걸 구해다 준 유모가 대체 쓸데없는 걸 뭐 하러 사느냐며 타박했지만.’
들리는가, 내 꿀꿀이 저금통 깨지는 소리.
아니,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내 저금통은 예쁜 꽃이 그려진 도자기 화병이긴 한데.
아무튼 내 저금통의 절반이 갑자기 텅 비게 된 건 사실이었다.
‘아무래도 그 녀석, 자꾸 신경 쓰여서 안 되겠단 말이야.’
어제 집으로 돌아간 후 문득문득 떠오르는 세드릭의 손에 감긴 붕대의 잔상에, 나는 결국 내 용돈을 탈탈 털어 수도의 유명 마법 상점에서 힐링 포션을 구매했다.
목숨에 지장이 생길 정도의 큰 상처나 병이 아닌 이상 먹거나 바르기만 하면 곧바로 어느 정도 치유가 가능하고, 세드릭의 손에 있는 정도의 생채기라면 아마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게 분명했다.
‘물론 내 돈 털어서 샀다고 생색낼 생각은 아니지만, 그래도 세드릭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금 걱정되긴 하네.’
나는 의자에 앉아 아직 오지 않은 세드릭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이딴 거 필요 없다며 거절하려나. 그럼 안 되는데.
‘공기 대결이 그렇게나 하고 싶었다는데. 빨리 손이 나아야 하지 않겠어.’
세드릭이 오면 곧바로 이걸 먹이거나 아니면 손 위에 골고루 부어줄 생각이었다.
모처럼 기다리는 사람이 있어 시간이 조금 느리게 간다고 생각하던 그때였다.
조용히 문이 열리더니 세드릭이 들어왔다.
나는 눈을 의심했다. 세드릭 맞아? 오늘따라 왜 이렇게 조용하지.
그렇지만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손에 들린 포션을 쥐고 세드릭에게 다가가려 했다.
“저기.”
“…….”
하지만 돌아온 건 차가운 눈길이었다.
평소의 세드릭이 지을 법한 표정이 아니었다.
왜인지 현실감이 들지 않아 멍하게 서 있었더니, 세드릭은 나를 불편하다는 듯이 한번 흘겨보고 지나갔다.
“비켜.”
세드릭은 나를 그대로 지나쳐 책상에 앉았다.
평소처럼 엎드려 잘 법도 한데, 이상하게 턱을 괸 채 창밖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마침 시간 차를 조금 두고 따라 들어오는 앨리스를 보며 나는 마음이 살짝 불안해졌다.
앨리스 역시 세드릭이 오늘따라 이상하다는 걸 눈치챈 모양인지 표정이며 행동이 엉거주춤했기 때문이다.
“아, 새, 새런 영애! 좋은 아침이에요!”
“네에, 앨리스도 좋은 아침이에요.”
웬일로 앨리스가 나를 보더니 먼저 수줍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앨리스에게 답인사를 해주었다.
어쩐지 좋은 아침이라기엔, 저 창가 근처를 바라보고 있는 센치한 세드릭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지만…… 어쨌거나 좋은 아침.
‘헉, 그러고 보니. 어제 내가 감아 준 붕대, 풀어버렸네…….’
세드릭을 힐끔 쳐다보는데, 턱을 괸 손과 그 반대편 책상에 얹어놓은 손 모두에 붕대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치료 마법사라도 불러 치료한 건가 싶었지만 아니었다. 내 좋은 시력으로 뚫어져라 보니 아직도 그 손엔 생채기가 가득이었다.
‘……자꾸만 신경 쓰이잖아.’
나는 차마 주머니에 든 힐링 포션을 꺼내지 못하고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차라리 평소처럼 틱틱대면서 시비라도 걸었으면, 얘가 멀쩡하구나 싶었을 텐데.
원래 성격과 정반대로 저렇게 과묵한 세드릭은 정말이지 적응이 안 된다.
‘아, 그러고 보니.’
나는 앨리스를 바라보았다.
앨리스는 세드릭과 같은 마차를 타고 왔을 테니 세드릭이 저러는 이유를 알지 않을까.
“저, 저도 오늘은 공깃돌을 가져왔어요. 새런 영애, 같이 고, 공기놀이해요…….”
“그래요, 앨리스. 여기 앉아요!”
일단 당장은 앨리스의 조심스러운 호의에 답해주기로 하고, 세드릭이 저러는 이유에 대해서는 천천히 알아보기로 했다. 어차피 안다고 해서 내가 바로 해결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나도 같이하겠어. 자리 좀 만들어 줘.”
그리고 잠시 어두운 생각을 잊으려 앨리스와 열심히 1 대 1 공기 시합을 하고 있으려니, 언제 왔는지 니나이나가 우리의 앞에 서 있었다. 두툼한 융단 방석과 보석 알들을 각각 손에 쥔 채로 말이다.
니나이나의 말을 들어보니 어제 하루 내내 연습을 해서 이제 공기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데, 정말로?
“미르, 미르! 나도 끼워 줘!”
그리고 가장 마지막으로 도착한 제이크.
제이크 역시 매끈한 돌을 가지고 하루 종일 연습을 해서 이제야 조금 실력이 늘었다고 한다.
손을 보니 상처가 나 있지는 않지만 마찰열 때문인지 피부가 발개져 있었다.
‘진짜 열심히 연습했구나, 제이크.’
아무튼 우리는 그렇게 4명이서 사이좋게 공기 시합을 했다.
“어쩌나, 이번에도 내가 이겼는걸.”
벌써 3판째, 또다시 니나이나가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말했다.
아쉬웠다. 나도 나름 잘하고 있었는데, 막판에 손을 미끄러져 실수하는 바람에…….
그래. 솔직히 말하자. 자꾸만 이 와중에도 세드릭이 신경 쓰여서 도저히 놀이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나는 수업시간이 다 된 탓에 공깃돌을 정리하는 앨리스에게 다가가 살짝 물었다.
“저기, 앨리스. 혹시 세드릭이 왜 저렇게 있는지 알아요?”
앨리스는 갑작스러운 내 질문에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 이내 조심스럽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 그게. 가, 강아지가…….”
“강아지요?”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앨리스의 말을 들어보니, 세드릭의 애완동물인 폴리가 시름시름 아프다는 모양이다. 앨리스는 마차를 탈 때 대공가의 시종 중 한 명에게 귀띔받은 이야기라 자신도 자세히는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때마침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원작의 내용 중 무언가가 떠올랐다.
폴리,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인데. 아……!
‘기억났다.’
나는 입술을 잘게 깨물었다.
원작에서 짧게 언급되는, 세드릭이 어린 시절 키웠다는 신수의 이름이 바로 폴리였다.
‘하지만 세드릭은 그 강아지가 신수인지 몰라.’
어느 날 떠돌이 강아지처럼 보이는 폴리를 주운 세드릭은, 폴리를 애지중지하며 키운다.
하지만 세드릭이 7살이던 해의 어느 날 폴리는 죽고 만다는 게 원작에 나온 세드릭의 어두운 과거사였다.
사실 폴리는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나쁜 마법사의 저주에 걸려 강아지의 몸에 봉인되어 버린다.
마력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 보았을 땐 누가 봐도 그냥 강아지라서, 세드릭은 폴리가 신수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결국 그 봉인으로 인해 폴리의 신수로서의 생명력은 점점 깎여나갔고, 지금 시점에서는 봉인을 풀지 않는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을 맞게 될 정도의 생명력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한 원작의 내용을 떠올린 나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만약 폴리가 이대로 죽는다면, 세드릭은 흑화할지도 몰라.’
차후 줄거리에서 세드릭은 흑화한 집착 서브 남주 역할을 맡는다. 그리고 그 원인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지만 꽤 중요한 원인이었던 게 바로 폴리의 죽음이었다.
‘나중에서야 폴리가 사실 신수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 이후로는 전 대륙을 돌아다니며 신수를 수집하는 미친 수집광이 되잖아.’
나는 원작의 내용을 생각하던 중, 저 창가를 내다보는 세드릭을 한번 바라보았다.
저렇게 작고 틱틱대는 꼬마 아이가 앞으로 그런 무서운 수집광이 되도록 해서는 안 돼.
그래서 결국 나는 결심했다.
세드릭을 위해, 폴리를 위해. 내가 한 번 그 마법 봉인을 풀 수 있게 도움을 줘보자고.
‘아니, 잠깐. 그런데 나는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하지만 결심한 게 무색하게도, 다음 순간 나는 깨달았다.
원작을 잘 알고 있으면 뭐 하나. 마법도 못 쓰는걸.
* * *
쉬는 시간, 점심시간, 오후 수업이 진행될 때까지도 나는 어떻게 하면 세드릭을 도울 수 있을지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내 기적처럼 방법을 떠올렸다.
‘테이온 공작님!’
다름 아닌 제이크의 아버지이자, 우리 아빠의 절친이자, 대륙에서 손에 꼽히는 대마법사 중 한 명. 테이온 공작에게 가서 폴리에게 걸린 저주를 없애 달라고 해보는 것이다.
‘으으, 부탁을 어떻게 해야 할까. 꽤 바쁘신 분인데. 물론 나를 많이 아껴주시기는 하지만…… 대가는 뭘로 드리는 게 좋을까.’
물론 도와줄 사람을 안다고 해도 당장에 모든 게 해결되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테이온 공작님 이외에 내가 이 제국에서 친분이 있는 뛰어난 마법사는 전무했기 때문에, 당장엔 그 방법밖에 없었다. 방법을 생각해 낸 나는 이제 세드릭을 구슬려 폴리의 상태를 확인해 보기로 결심했다.
‘일단은 세드릭에게 어떻게 말을 꺼내 봐야 할지가 중요해.’
마침 하원하기 직전이라, 무표정으로 가방에 제 물건들을 쓸어 담고 있는 세드릭에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세드릭은 나를 보자마자 말했다.
“뭐.”
아우, 너무 차갑다. 차가워.
하지만 나는 용기 있게 말을 걸어보기로 했다.
“저어, 공자님이 키우는 애완동물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래서 뭐? 앨리스가 네게 뭐라고 말을 했나 본데, 신경 꺼줄래? 네가 상관할 일 아니거든.”
세드릭은 애완동물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흠칫 놀라며 나를 흘겨보았다.
그러더니 이내 가방의 잠금장치를 채우고 곧바로 나가버리려는 듯 뒤를 돌았다. 나는 그런 세드릭을 잡아야만 했다.
“잠깐만! 제 말, 한 번만 들어보세요. 어쩌면 소공자님 애완동물을 내가 안 아프게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내 말을 듣자마자 세드릭은 그 자리에서 우뚝 섰다. 그러더니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성큼 다가왔다. 눈동자가 잘게 떨리는 게 보였다.
“뭐? 너,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말해봐.”
“소공자님이 기른다는 애완 신, 아니, 동물. 제가 고쳐 줄 수도 있을 것 같다고요. 많이 아프다고 들었는데, 맞아요?”
세드릭은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속사포처럼 막혀 있던 질문을 쏟아냈다.
“정말, 네가 폴리를 고쳐 줄 수 있어? 대체 무슨 수로? 아버지께 보여도 나는 모른다며 알아서 하라고 했던 폴리야. 저택 내에도 왜 폴리가 이렇게 아픈지 아는 사람이 없었어. 심지어 동물에 대해 잘 아는 의원을 불렀는데도 고치지 못했다고. 그런데 네가 어떻게.”
“이런 말 하긴 부끄럽지만, 제가 한때 동물에 관해 관심이 많아서 책을 좀 많이 읽었거든요. 동물이 걸릴 수 있는 병들에 대해서도 잘 알아요.”
나는 입에 침 하나 바르지 않고 미리 생각해 둔 핑계로 거짓말을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세드릭의 강아지인 폴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바로 ‘사실 그 애는 신수가 분명해!’라고 말할 수 있겠어. 그렇게 된다면 미친 취급 받을 게 분명했다.
“저, 정말이지……? 정말 네가 폴리를 고쳐 줄 수 있다고?”
아까의 날 선 태도와 다르게 세드릭은 급기야 내 희망적인 대답에 힘입어 울먹이기까지 했다.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일단 한번 강아지가 어떤 상태인지 봐야 할 것 같은데……. 절 대공저에 방문할 수 있도록 해주실 수 있나요?”
“……알겠어.”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였다.
차마 더 묻지 못하는 세드릭의 눈빛엔 미약한 희망이 자라나 있었다.
부디 내가 그 희망을 현실로 만들어줘야 할 텐데.
잠시 후, 유치원에서 나선 우리는 각자의 마차에 올라탔다.
황실로 가는 마차와 제이크의 마차가 먼저 출발하는 걸 보고서, 나를 마중 나온 캐리에게 쪼르르 달려가 행선지 변경에 대한 말을 해주었다.
“유모, 유모. 있잖아. 나 오늘은 집에 바로 안 가고 베드몬 대공저로 가기로 했어.”
“베드몬 대공저요? 아가씨, 설마 그 베드몬가의 막내 자제분이신 세드릭 님과 친해지신 건가요?”
유모의 어리둥절한 물음에 나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어.”
사실 아직 따지고 보면 친해진 건 아니지만 말이지.
어쩌면 나중에 친해질 수도 있을 것 같긴 해.
뒤에 하고 싶은 말이 무척이나 많았지만, 나는 말을 아꼈다.
“그럼 마님과 주인님께 이 유모가 말씀을 드리도록 할게요.”
다행히도 유모는 별다른 걸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저 앞에 가는 세드릭의 마차를 따라 대공저로 향했다.
중간에 잠시 멈춰 앨리스를 로즈 공작저에 내려 주는 것도 살짝 구경했고 말이다.
“내려. 다 왔어.”
그리고 마침내 대공저에 도착했을 때, 나보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세드릭이 내 마차의 문을 열고 내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내리기 전 나는 유모를 살짝 돌아보며 귀띔했다.
“유모, 마차 여기로 다시 보내 줘야 해!”
“알겠어요, 아가씨. 잘 놀다가 오세요.”
그렇게 마차는 떠나고, 나는 어쩐지 비장해진 발걸음으로 세드릭을 따라 저택 내부로 향했다.
‘여기 어쩐지…… 귀족의 저택답지 않아.’
그런데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변을 돌아볼수록 자꾸만 미묘한 기분이 들었다.
대공가의 화려한 저택이라기보다는 뭔가 기사 훈련장에 가까운 듯한 모양새랄까.
그리고 작은 정원을 지나 웬 공터가 보이자 그런 내 의심은 이내 확신으로 바뀌었다.
아아, 어쩐지 땀 냄새가 갈수록 짙어진다 했지.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면 기사들의 체력 단련 훈련장을 꼭 지나가야만 하는 거였어?
웃통을 입지 않고 매우 내추럴한 복장들을 하고 계신 여러 남정네가 널따란 모래 운동장에서 힘차게 뜀박질을 하는 게 보였다.
그중 한 명의 기사가 세드릭을 발견한 모양인지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도련님!”
기사의 우렁찬 목소리에 나는 본능적으로 움찔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매우 익숙해 보이는 세드릭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여유롭게 손을 들어 설렁설렁 손을 저어 보이기까지 했다.
마침내 그 기사는 우리의 앞에 도착해 거친 숨소리를 내뱉으며 멈춰 섰다.
“헉! 헉! 아이고, 우리 막내 도련님 유치원 갔다 오셨습니까!”
“그래, 엘록스.”
“어이쿠, 그런데 그 뒤에 계신 영애님은 누구……? 앨리스 님은 아니신 것 같은데.”
엘록스라고 불린 기사는 나를 뒤늦게서야 발견했는지 화들짝 놀라며 주춤했다.
그러다 이내 자신이 웃통에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자각한 모양인지 목에 두르고 있던 젖은 수건으로 상체를 가렸다. 마치 오프숄더 드레스를 입은 것처럼.
나는 엘록스의 행동을 애써 모른 척하며 허공을 바라보았고, 세드릭이 대신 소개를 했다.
“새런 후작가의 에미르. 내 친구야. 그리고 이쪽은 기사단의 엘록스.”
“……!”
그리고 나는 세드릭이 붙인 사족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 앞에 서 있는 엘록스가 ‘도련님이 친구를 사귀셨다고요?’ 따위의 호들갑을 떨고 있었지만 전혀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중요한 건 세드릭이 나를 친구라고 불렀다는 사실이다.
갑자기 무슨 심경의 변화가 생겼길래.
아. 혹시 내가 도와준다고 해서, 갑자기 위치가 그냥 같은 반 애에서 친구로 변해 버린 거야?
“그보다, 내가 유치원 가기 전에 토미에게 폴리 잘 돌봐달라고 했었잖아. 지금 폴리 잘 있어?”
엘록스의 호들갑을 끊고 세드릭은 딱딱한 말투로 질문했다. 물론 그런 말투와 상반되게 세드릭의 눈동자엔 옅게 불안감이 깔려 있었고 손은 잘게 떨리는 채였다.
혹시라도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큰일이라도 났을까 봐 두려워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토미 녀석, 점심도 안 먹고 도련님 침실 옆방에서 계속해서 폴리만 돌보고 있으니 걱정 마시죠. 아니, 그보다 왜 이리 도련님 볼이 홀쭉합니까? 도련님도 점심을 거르셨답니까?”
엘록스의 뜬금없는 물음에, 솔직히 나는 그가 몹시 예리한 눈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알았지. 사실 진짜로 오늘 유치원에서 세드릭은 홀로 입맛이 없다며 식사를 거부했었다. 물론 그렇게 한 끼 빼먹었다고 해서 당장에 티가 나 보이지는 않지만 말이다.
“……잔소리 좀 그만해. 엘록스. 나 오늘 잔소리 들을 기분 아니거든.”
“에휴, 그래. 도련님 마음대로 하십쇼.”
세드릭의 목소리에서 피곤함이 뚝뚝 떨어지는 걸 느낀 모양인지, 엘록스는 어깨를 으쓱이며 다시 운동장으로 돌아갔다. 그 이후로 세드릭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잠시 먼 산을 바라보다 이내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우리 가문이 대대로 기사 가문이라 이래.”
“그 말 전에 한 번 들은 적 있는 것 같은데요. 아무튼, 지금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어서 폴리를 만나러 가야 하지 않아요?”
“아 참. 그렇지.”
세드릭은 내가 이곳에 온 목적을 잠시 잊고 있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약 5분 후에, 나는 그 폴리라는 강아지를 만나 볼 수 있었다.
“폴리! 나 왔어!”
방에 들어서자마자 세드릭은 폴리의 이름을 부르며 들어갔다.
방금까지 강아지를 돌보고 있던 토미라는 앳된 기사는 그럼 이만 가보겠다며 방을 나섰다.
때문에 이 방 안엔 나와 세드릭, 그리고 폴리뿐이었다.
‘잘된 일이지.’
왜냐하면 지금부터 내가 할 일은, 영화로 따지면 b급 영화쯤 될 어색한 발연기이기 때문이다.
나는 동물에 대해 박식한 척 폴리를 이리저리 관찰하면서 폴리가 신수라는 증거를 ‘우연히’ 찾아내야만 했다. 다행히도 원작에 나와 있던 신수에 대한 정보를 기억하고 있는 나는 증거로 댈 만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누가 봐도 발연기라서, 어느 정도 나이를 먹었거나 눈치가 빠삭한 아이라면 금세 눈치챌지도 몰라. 내가 연기하고 있다는 걸.’
새삼 우리 세드릭이 눈치가 없다는 것이 다행인 날도 오는구나 싶었다.
그리고 나는 저편 구석에 힘없이 엎드려 있는 내 종아리 정도 길이의 작은 강아지를 보았다.
저 강아지가 폴리인 모양이었다.
병색이 완연했다. 한때는 잘 빗어 윤기가 흘렀을 길고 흰 털은 푸석푸석해져 있었고 총명했을 눈동자는 총기가 사라진 채 멍했다.
세드릭은 폴리를 조심스레 쓰다듬으며 안부를 물어보았다.
대답이 들려올 리 없을 말들이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신수는 지성체이기 때문에, 아마 폴리는 그동안 세드릭이 하던 말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게 분명하다는 것을. 봉인이 풀리기만 한다면 대화도 가능할 것이다.
“잘 있었어? 밥은 오늘도 안 먹었구나. 그대로네.”
세드릭의 말대로였다. 폴리 옆의 그릇에 담긴 고기는 혀 한번 댄 자국 없었다.
괜스레 안쓰러워진 나는 이제 나서보기로 했다.
“제가 한번 폴리를 살펴볼게요.”
“……그래 줘.”
힘이 없어 꼬리조차 흔들지 못하는 폴리를 본 세드릭은 체념한 듯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리고 나는 폴리의 몸 구석구석을 세심하게 살폈다.
“제대로 보는 거 맞지?”
등, 배, 엉덩이, 꼬리. 대부분을 살폈는데도 아직 신수의 증표를 찾아내지 못한 나는 등 뒤에서 초조한 목소리로 세드릭의 재촉이 들려오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때였다.
“앗!”
“뭐야, 뭐라도 찾은 거야? 폴리가 좀 괜찮아지기라도 했어?”
드디어 찾았다.
나는 폴리의 귀 안쪽 분홍빛 살결에 선명하게 찍힌 별 모양의 점을 확인했다.
내 외마디 탄성에 황급히 옆으로 달려온 세드릭에게도 그것을 보여주었다.
당연히 세드릭은 이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지만.
“점? 이 점이 뭐가 문제인데 그래.”
“공자님, 일단 결론부터 말할게요. 폴리는 신수예요.”
일단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아 가장 핵심부터 말해주었다.
“……뭐?”
물론 그 말을 들은 세드릭의 반응은 그저 황당한 기색뿐이었다.
‘얘가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지?’라는 속마음이 얼굴에 척 쓰여 있는 듯했다.
저런 반응, 당연한 일이지. 예상했잖아.
나는 씁쓸하게 웃으며 기나긴 설명을 시작했다.
* * *
한 30분쯤 지났을까.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원작의 지식을 전부 활용해서 세드릭을 이해시키는 데에 성공했다.
“그래. 이해했어. 그러니까 폴리가 사실은 강아지가 아니라 신수고, 저주를 받아서 이 강아지의 몸에 갇혀 있는 거라는 거잖아.”
“네, 완벽히 이해했네요. 맞아요.”
사실 처음엔 세드릭이 ‘얘 미쳤어!’ 하면서 방을 뛰쳐나가 하인들을 부르기라도 할까 걱정되었지만, 다행히도 그 정도의 격렬한 반응을 보이진 않았다.
물론 어느 정도의 불신 어린 감정은 남아 있는 듯싶었다. 하지만 설득 끝에라도 믿어주는 게 어디야.
그리고 세드릭이 한 가지 의문이 생긴 듯 질문했다.
“그럼, 어떻게 저주를 풀 수 있는 건데?”
“마법 능력이 뛰어난 마법사에게 가서 저주를 파훼해 달라고 하면 돼요. 혹시 친한 대마법사님이라도 계신가요?”
내 물음에 세드릭은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 없어. 내가 아는 사람들은 다 땀 냄새 가득한 기사들뿐이라고.”
“역시 그런가요. 그럼 하는 수 없죠. 제가 아는 마법사님을 찾아가서 부탁해 봐야겠어요.”
“아는 마법사가 있단 말이야?”
세드릭은 처음으로 나를 대단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괜스레 어깨가 으쓱해지려 했다. 이게 뭐라고.
“……네. 아버지의 친구분이시자 이 제국에서 마법으로 손꼽으면 그 안에 꼭 들어가실 만한 대단한 분이세요.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있다면.”
“뭔데. 빨리 말해봐. 내가 무릎을 꿇어서라도 제발 우리 폴리 좀 살려달라고 빌 테니까.”
간절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는 세드릭을 보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후우, 제가 제이크 공자와 절친한 친구 사이라는 건 아실 테죠. 바로 제이크 공자의 아버지 되시는 분이세요. 테이온 공작님이요.”
“……제이크의 아버지?”
순간 세드릭의 표정이 굳어졌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런 세드릭을 떠보았다.
“혹시, 싫으세요? 물론 세드릭 소공자께서 제이크와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은 저 역시 잘 알고 있답니다. 그렇지만 이 이외에 따로 생각나는 방법이 없네요, 저도.”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세드릭이 평소의 고집대로 행동할 줄 알았다.
죽어도 제이크의 아버지인 테이온 공작에게 부탁할 수는 없다며 자존심을 챙기거나, 혹은 엄청나게 긴 고민 끝에 겨우 그러겠다고 대답할 줄 알았던 게 내 예상이었다.
“갈게. 테이온 공작가로. 지금 가면 돼?”
하지만 그런 내 예상은 깨졌다.
세드릭은 단 1초도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대답했다.
이미 마음을 굳힌 듯 벌떡 일어서서 폴리를 안고 곧바로 갈 채비를 하기까지 했다.
“자, 잠시만요!”
“왜? 따로 준비할 게 또 필요해?”
덕분에 당황한 건 나였다.
이렇게 빠르고 명료한 전개로 흘러갈 줄은 차마 몰랐으니까.
나는 손을 내밀어 ‘잠시 타임!’을 뜻하는 수신호를 만들고 급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일단 제가 통신구를 하나 갖고 있는데요. 이걸로 제이크에게 연락해서 테이온 공작님의 일정을 한번 여쭤볼게요. 그분은 대마법사라 바쁘시니까요.”
“……그래. 어서 해봐.”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에서 통신구를 챙겨오길 정말 잘했다.
비록 4살 때 생일선물로 받았던 비싸디비싼 마법 용품이긴 하지만, 이럴 때 써야지 또 언제 쓰냐는 마음으로 눈물을 머금고 나는 제이크에게 연락을 걸었다.
-미르! 미르! 진짜 미르야? 우와, 미르가 나한테 연락했어.
……조금, 아니, 많이 미안했다.
저렇게 기뻐하는 제이크인데 내가 제게 연락을 한 게 아니라, 세드릭의 일 때문에 연락한 것이라는 걸 알게 되면 얼마나 낙심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어.’
결국 나는 제이크에게 세드릭과 폴리에 대한 일을 설명하고, 그래서 테이온 공작님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말까지 모두 전했다.
나는 초조한 마음으로 통신구의 답변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마침내 답변이 왔다.
-……미르가 원한다면 어쩔 수 없지 뭐. 그럼 한번 아버지께 말씀드려 볼게. 오늘은 다른 날보다 한가해 보이셨으니 아마 들어주실 거야.
그리고 연이어 도착한 새 답변.
-아버지께 여쭤봤어. 된대. 지금 바로 와. 미르. 기다리고 있어.
* * *
내가 허락받았다는 말을 세드릭에게 전하자마자, 세드릭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리고 곧바로 폴리를 들쳐 안고 한달음에 1층으로 가서 마부에게 어서 마차를 준비하라며 재촉을 서둘렀다.
그렇게 우리는 곧바로 제이크의 저택, 그러니까 테이온 공작저로 가게 되었다.
세드릭이 마부에게 속도를 더, 더 높이라고 재촉하는 걸 말리느라 혼났다.
“미리 연락받았습니다. 베드몬 대공가의 세드릭 님, 그리고 새런 후작가의 에미르 님이시군요. 들어오시지요.”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테이온가의 저택으로 들어섰다.
‘한 달 만인가. 유치원 입학하고 나서는 처음 와보네.’
내가 옹알이를 했던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 저택에 와 본 것만 해도 족히 백 번은 넘을 것이었다. 한마디로 내 제2의 고향이라고나 할까.
“미르!”
그리고 내가 저택의 정문으로 들어서자마자 깔끔한 실내복 차림의 제이크가 부리나케 내게 달려왔다.
옆에 서 있던 이 저택의 집사는 으레 보는 풍경이라 그런지 이제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하긴, 제이크가 내가 올 때마다 이렇게 호들갑 떨며 반겨주는 게 어디 하루 이틀 일이던가.
제이크는 내 옆에 서 있는 세드릭은 아예 모르는 사람 취급하며 내게만 인사를 건넸다.
“유치원 끝나고도 또 볼 수 있어서 너무 좋아. 미르.”
“나도, 제이크. 비록 부탁이 있어서 온 거긴 하지만 거의 한 달 만에 다시 오니까 막 새롭고 그래.”
으레 하는 인사말이었지만 진심이었다. 겨우 한 달 안 왔을 뿐인데 그사이 철이 바뀌어 정원에 봄꽃들이 새록새록 피어나 풍경이 어여뻤다.
저택의 외벽 칠을 새로 했는지, 하얀빛의 저택은 과연 제국 제일의 마법사 피가 흐르는 가문의 것이라고 할 만했다.
저택 전반에 깔린 신선한 마력의 기운이 기분을 한결 상쾌하게 해주고 있기도 했다.
제이크와 나는 우정의 포옹 인사를 했다. 제이크는 신난 모양인지 내 귓가에 이런저런 말을 쏟아냈다.
“아버지도 널 기다리고 계셔. 오랜만에 미르 얼굴 보게 되었다면서. 지금 바로 2층 집무실 옆 작은 응접실로 올라갈래? 아니, 아니다. 나 그동안 미르한테 보여주고 싶었던 것들 엄청 많았는데. 내 방 먼저 가보는 것도 좋겠어.”
어쩐지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지는 건 기분 탓일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 역시도 제이크의 방에 올라가서 이런저런 마력으로 구동되는 신상 장난감을 가지고 놀아 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렇지만 지금 느껴지는 시선도 시선이고, 자칫 늑장을 부렸다가 폴리가 견디지 못하고 생명력을 모두 잃어버릴까 무서웠기 때문에 나는 먼저 응접실로 가보기로 했다.
만약 몇 분 차이로 그렇게 되어버릴 시에 생길 세드릭의 슬픔과 배신감과 예정된 흑화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테니까.
“미안해, 제이크. 일단은 저 강아지, 아니, 신수를 먼저 살린 다음에 같이 놀자.”
제이크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다 돌연 얼굴을 굳히며 내게 질문했다. 속삭이는 것처럼 손으로 깔때기를 만들어 말했지만, 사실 세드릭에게도 아주 잘 들릴 정도의 큰 목소리였다.
“……그런데 미르. 꼭 쟤가 우리 저택 안에 들어와야만 하는 걸까? 그냥 신수만 데리고 가서 아버지께 봐달라고 하고 싶다. 세드릭 소공자 같은 사람이 저택에 발자국 찍고 다니는 거 싫어.”
“누군 좋아서! 으…… 내가 정말 폴리만 아니었어도. 참자, 참아.”
세드릭은 제이크의 말에 발끈하며 샛노란 금빛 눈동자로 노려보았지만, 이내 제 품에 안긴 신수를 내려다보며 애써 분을 삭이는 듯 보였다.
그리고 순간 나는 헛것을 보고 말았다. 그건 다름 아닌 제이크의 입꼬리가 꼭 통쾌하다는 것처럼 스리슬쩍 올라가는 환상이었다.
“제이크, 방금 너…….”
“으응? 미르, 왜 그래?”
“아, 아니야. 아무것도.”
나는 말을 아꼈다. 다시 보니 제이크의 입꼬리는 멀쩡했다.
에구구, 내가 요즘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아서 헛것도 보이고 그러나 보다.
이렇게 어린 나이에 벌써부터 이러면 어쩐단 말인가. 흑흑.
* * *
테이온 공작님의 집무실 겸 마법 연구실 옆 응접실은, 작은 정원이 있는 테라스였다.
짹짹 작은 새들의 지저귀는 소리와 함께 나는 익숙하게 이곳 안으로 들어섰다.
반면 내 뒤를 따라온 세드릭은 세상에 이런 곳이 다 있다는 표정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하긴, 아까 가 보았던 베드몬 대공저와 이곳 테이온 공작저는 분위기가 아주 천지 차이긴 했다.
한쪽은 거의 기사단 숙소 수준의 열정이 넘치는 공간이고, 이곳은 기사단은커녕 사용인도 거의 보이지 않는 자연 친화적이고 화사한 공간이었다.
들어가자마자 보이는 건, 나무로 된 안락의자에 편하게 앉아 얼굴의 절반만 한 안대를 쓰고 있는 갈색 머리의 남자였다.
그가 바로 제이크의 아버지, 앨빈 테이온이었다.
인기척이 들리자 테이온 공작은 안대를 벗으며 순간 들어오는 빛에 눈이 부신 듯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설핏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빛을 받으면 금발과 헤이즐넛 색 그 중간쯤으로 보이는 머리칼과 눈동자, 휘어지는 눈꼬리까지 아주 부자가 똑 닮았다.
공작을 뵐 때마다 하는 생각은 항상 그거였다. 제이크랑 닮아도 너무 닮았어.
“에미르,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구나. 그동안 잘 지냈니?”
“으음, 잘 지냈어요. 아마도요. 공작 각하께서도 잘 지내셨나요?”
“나야, 뭐. 늘 잘 지내고 있단다.”
그리고 내게 안부를 묻고 나서야 뒤늦게 테이온 공작님은 내 뒤에 서 있는 세드릭을 발견했다.
“아, 그쪽이 혹시 세드릭 베드몬 공자인가? 안겨 있는 귀여운 강아지가 바로 그 신수고? 제이크에게 이야기는 들었는데 말이지.”
“네, 네. 제가…… 세드릭 베드몬입니다. 테이온 공작 각하. 처음 뵙게 되어 영광이에요.”
한껏 긴장해 있던 세드릭은 곧바로 인사를 건넸다.
아무튼 세드릭과 만나게 된 테이온 공작님은, 세드릭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이내 내가 이 동물이 신수라는 걸 알려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나는 식은땀 흐르는 얼굴로 공작님이 내게 주는 시선을 피했다. 솔직히 공작님은 우리 아빠랑 친해서, 내가 평소에 신수는커녕 동물 관련된 책조차 거의 읽은 적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을 게 분명했다.
내가 세드릭에게 거짓말했다는 걸 알아챘으려나…….
‘그냥 넘어가 주세요, 제발!’
다행히도 이런 내 텔레파시가 전달된 모양인지 테이온 공작님은 내 평소 독서량에 대한 언급은 하지 않았다. 때마침 세드릭이 그에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폴리에게 걸린 저주가 풀리게 된다면, 폴리는 어떤 모습이 되는 건가요?”
“그건 아직 알 수가 없고…… 그래, 봉인이 풀려야 알 수 있을 것 같군.”
환한 햇살이 가득가득 내리쬐는 테라스의 하얀 테이블 위에 얇은 쿠션을 깔았다.
그곳에 폴리를 조심스럽게 눕힌 공작님은 들려오는 질문에 저도 모른다며 고개를 저었다.
세드릭은 한층 초조해진 모양이었다.
“그, 그럼 확실히 이 저주를 풀 수 있는 건 맞죠? 제발 맞다고 해주세요.”
“……글쎄. 아마도 풀 수 있을 것 같기는 하지만.”
안 하느니만 못한 애매한 답변이었지만,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공작님은 마법진을 만드느라 집중 중이셨다. 그리고 테이온 공작님께서는 곧바로 저주 파훼를 진행했다. 애초에 이 저주라는 게 주술 같은 것보다는 복잡한 고대 마법에 가까워, 마법으로 파훼가 가능한 것이었다.
공작님의 손끝에서 마법진이 그려지고 그 문양이 폴리의 위에 닿았을 때, 갑작스럽게 눈부시다 못해 시린 빛깔의 빛이 퍼져 나갔다. 아마 세드릭도 비슷한 것을 보았을 것이다.
“으앗……!”
“다 됐군.”
응? 벌써 끝이야?
이렇게 쉽게 저주를 파훼할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던 나는 조심스럽게 감았던 눈을 떴다.
“와아…….”
그곳에는 다름 아닌 작은 알 모양의 무언가가 있었다.
세드릭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이, 이 알. 뭐예요? 이게 폴리에요? 신수라서 이렇게 된 건가요?”
“그렇지, 이건 신수의 알이니까.”
공작님은 여상한 눈빛으로 그 알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동안 봉인 안에서 생명력을 대부분 소진해 버린 탓에 봉인이 풀린 이후 모습이 태초의 알로 돌아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하루에서 길게는 일주일. 건조하지도 습하지도 않고 약 25도 정도의 온도에 가만히 놔두면 알아서 깨어나지. 던지거나 망치로 때려도 깨지지 않으니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지만, 충격을 주면 알에 스트레스가 가서 깨어나는 기간이 길어질 수 있고. 그 점은 유의하는 게 좋겠군.”
공작님의 설명을 전부 주의 깊게 들은 세드릭은 이내 알을 조심스럽게 제 품에 안아 들었다.
그러더니 꿈을 꾸는 듯 몽롱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따뜻해요.”
“신수의 알이니까.”
공작님께서는 웃으며 맞장구를 쳐 주셨다. 그래, 살짝 연한 분홍빛이 도는 그 알을 보고 있으려니 괜스레 나까지 몽글몽글한 기분이 들기는 했다.
아무튼 테이온 공작님은 바쁜 사람이기 때문에 용무가 해결된 나와 세드릭은 곧바로 인사를 한 후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건 바로 제이크였다.
“미르, 이제 내 방 구경하러 가자!”
당연하게도 제이크는 세드릭을 없는 사람 취급했다.
내게만 팔짱을 끼며 세드릭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는 제이크였다.
물론 세드릭도 제이크와는 이렇게 사적인 공간에서 만나 놀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지, 곧바로 폴리를 데리고 제 저택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그럼 난 이만 갈게. 내일 유치원에서 봐.”
폴리를 무사히 살린 탓인지 한결 유순해 보이는 얼굴과 목소리는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하긴 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세드릭을 배웅했다.
만약 대공저 앞에 있는 내 가문 마차를 보게 된다면 테이온 공작저 앞으로 목적지를 변경해 달라는 말을 전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세드릭은 순순히 내 부탁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세드릭이 떠난 이후, 제이크는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짐을 하나 던 것처럼 홀가분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가 쳐다보자 제이크는 언제 그랬냐는 듯 평온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며 말을 꺼냈다.
“그러고 보니, 미르. 어머니가 널 보고 싶어 하셔. 근데 난 미르랑 내 방에서 놀고 싶은데…… 미르는 어떻게 할 거야?”
제이크의 물음에 나는 눈을 반짝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테이온 공작 부인께서 나를 보고 싶어 하신다는데, 어떻게 안 갈 수 있겠어?
그녀는 나를 볼 때마다 항상 뒤뜰 정원에서 기른 신선한 산딸기를 비롯해 레몬, 체리 등등의 과일들을 한 아름 안겨주셨다.
친환경 농사가 취미인 공작 부인은 힐링을 좋아하는 나와 어느 정도 코드가 맞았다.
“치잇. 역시 미르는 나보다 어머니를 더 좋아하는 게 틀림없어.”
“응? 아, 아니야. 제이.”
아차, 너무 티를 많이 낸 건가. 제이크가 내 속마음을 알아채고 토라진 얼굴을 했다.
나는 손사래를 잔뜩 치면서 부정했지만 이미 늦었다.
제이크는 자신이 두 번씩이나 선택에서 밀려났다며 우울해했다.
결국 나는 속마음과 다른 대답을 내놓아야만 했다.
“아냐, 제이크. 난 정말 진짜 확실히 너랑 놀고 싶었다니까? 지금 바로 네 방으로 출발하자!”
“……좋아! 가자!”
제이크는 잠시 나를 바라보더니 곧이어 힘차게 외쳤다.
내 서툰 거짓말에 넘어가 버린 건지, 아니면 알면서도 속아주는 건지는 모를 일이었다.
“우와!”
“어때, 멋지지 않아?”
마침내 제이크의 방에 도착한 나는 작게 탄성을 질렀다. 잘 정돈된 이런저런 장난감은 대부분이 내가 이미 잘 알고 있는 것들이었지만, 새로 만들었는지 아예 처음 보는 것들도 있었다. 살아 있는 것처럼 자동으로 움직이는 마력 인형들은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하지만 내가 감탄한 것은 장난감 때문이 아니었다.
제이크의 방 한쪽 구석에 설치된 미끄럼틀을 보고 말았으니까.
원통형으로 생긴 미끄럼틀은 뚜껑이 달려 있었고, 그 뚜껑을 열어보면 일자가 아닌 배배 꼬인 모양으로 내려갈 수 있게 되어 있었다.
분명 막힌 공간이라 어두워야 할 텐데, 자체 조명이라도 달린 건지 공간 안은 환했다. 단 끝은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물이 나오는 마법까지 추가하면 워터 슬라이드가 되겠는걸.
굉장히 탐나는 아이템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끝이 어디와 연결된 건지 궁금해졌다.
“이거 타면 어디로 갈 수 있어, 제이크?”
“타고 내려가면 저택 안의 장소로 무작위 텔레포트되는 거랬어. 엄청 신기하지! 며칠 전에 생긴 건데 오늘 마침 미르가 와서 다행이야. 나 이거, 미르한테 꼭 보여주고 싶었어. 아버지가 만들어주신 장난감 중에 가장 마음에 들어!”
제이크는 기쁨을 숨기지 못하는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며 외쳤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어디로 가게 되는 건지는 타기 전까지 모르는 거네? 주방 한복판이나 수돗가의 빨래터로 떨어져 버릴 수도 있겠다.”
“으음, 그럴 수도 있긴 한데 대부분은 정원이나 푹신한 소파 같은 곳에 떨어져. 주방의 화덕 위처럼 위험한 곳에는 안 떨어지게 되어 있대. 미르도 한번 타 볼래?”
“그래, 좋아!”
마침 궁금했던 차에 제이크가 먼저 권유해 줬는데 사양할 리가 없다.
나는 곧바로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고 미끄럼틀에 올라탔다.
손잡이에서 손을 떼기 직전, 나는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제이, 너도 뒤따라 와.”
“으응, 미르. 근데 우리 똑같은 데로 안 떨어질 수도 있어.”
아…… 그러네?
하지만 이미 대답을 들었을 땐 내가 손잡이를 놓고 미끄럼틀 안으로 슈웅 내려가고 있을 때였다. 긴 원통 안에서 제이크의 대답이 메아리처럼 웅 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착실하게 내 몸은 아래로 떨어지는 중이었다.
빙글빙글, 천천히 내려가는 롤러코스터를 탄 것처럼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마침내 출구에서 빛이 보였다. 동시에 익숙한 어떤 여자의 외침도 들려왔다.
“어머나!”
그러고 나서 내 몸이 퉁 튕겨나가 사뿐히 어딘가로 안착하는 게 느껴졌다.
눈을 조심히 떠보니 다행히도 푹신한 건초 더미 위였다.
하나도 다치지 않은 채기는 했지만 이거, 정말 위험한 장난감이잖아…….
다시는 안 탈 거라 다짐하며 앞을 보니 쨍쨍한 햇살에 가려 제대로 얼굴이 보이지 않는 한 사람이 바로 앞에 서 있었다. 붉은색 리본 장식의 밀짚모자를 쓰고, 하얀 블라우스에 청색 스커트를 입고 있는 여자였다.
눈을 깜빡이자 다행히도 곧 시야는 또렷해졌다. 그제야 보였다. 나를 놀란 표정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는 다름 아닌 테이온 공작 부인이었다. 그녀는 나를 알아보고서 발그레한 볼로 한달음에 달려왔다.
“세상에, 이게 누구야! 미르 아니니? 제이크에게 들어서 오늘 방문한다고 듣긴 했지만, 이렇게 만날 줄이야!”
“아, 안녕하세요…….”
나는 재빨리 일어나 뒤에 묻은 건초 가루들을 털며 인사했다.
으악, 꼴사나운 모습을 보이고 말았어!
하지만 내가 창피해하거나 말거나 테이온 공작 부인은 나와의 재회를 몹시도 반가워하는 중이었다. 그녀는 손에 든 바구니 안의 레몬들을 보여주며 재잘재잘 이야기를 해주었다.
“지난번에 내가 레몬 나무와, 자몽 나무를 심었다는 말을 했던가? 이 레몬들, 오늘 내가 갓 수확한 거란다. 이따 레모네이드라도 만들어줄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테이온 공작 부인의 취미는 온실 농사였는데, 그 온실이란 게 현대의 비닐하우스처럼 생겼지만 마력으로 구동되어 각 작물에 맞는 온도와 습도가 유지되고는 한다.
덕분에 열대에서 자라나는 작물과 추위를 잘 견디는 작물이 바로 옆 온실에서 자라나는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는 곳이기도 했다.
‘그래서 내가 이 저택의 정원 구경을 좋아하는 거지.’
마침 저편에서 나와 다른 곳으로 이동되었던 제이크가 나를 찾아냈다.
테이온 공작 부인은 웃으며 나와 제이크를 정원 안쪽으로 이끌었다.
“마침 레모네이드 말고도 줄 게 생각났지 뭐니. 어젯밤 열심히 만들어놓은 향수가 향이 정말 좋단다. 과일을 통째로 짜서 만들었거든.”
그녀의 또 다른 취미는 수공예였다. 수공예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뜨개질을 비롯한 옷 만들기, 혹은 음식 만들기 등등. 테이온 공작 부인은 그 모든 것에 재주가 뛰어났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녀를 어느 정도 동경하고 있었다. 자연 친화적이고 평화로운 힐링 라이프라니! 내 꿈의 삶이다. 반드시 유치원 졸업 후에 우리 집 뒤편 정원에도 과일나무들을 잔뜩 심어놓고 말겠다고 꼭꼭 다짐했었다.
아무튼 나는 공작 부인의 큰 손 덕에 수제 레모네이드도 마시고, 양손 가득 바구니 안에 수제 향수며 뜨개 장난감들을 잔뜩 받아왔다.
이후로 노을이 질 때까지 제이크와 신나게 숨바꼭질을 하며 놀던 나는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어 아쉽게 발걸음을 돌렸다.
“내일 유치원에서 봐, 미르!”
작별 인사를 하는 제이크에게 창문으로 손을 흔들었다.
마차가 점점 저택에서 멀어졌다.
‘오늘 정말 유익한 하루였어. 결국 신수도 살리고, 세드릭의 미래도 바꿔주고, 어쩐지 좀 친해진 것도 같고. 그리고 오랜만에 이렇게 제이크네 저택에서 신나게 놀았으니까.’
피곤해진 몸을 마차에 누이며 나는 멍하니 오늘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봤다.
그러던 중 무언가 빼먹은 게 있는 것 같다는 사실을 희미하게 기억해 냈고, 이내 주머니에 들어 있던 힐링 포션을 뒤늦게 눈치채고야 말았다.
‘그러고 보니, 세드릭에게 이걸 전해 줬어야 하는 건데.’
세드릭이 폴리의 알을 안고 급히 돌아가는 바람에 미처 그러지 못했다.
뭐, 어쩔 수 없지. 내일 유치원에 가서 전해 주는 수밖에.
포션 병을 손에 꼭 쥔 나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요즘 들어 느끼는 거지만 내일이 이토록 기다려지는 기분은 6살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내일 유치원에 가면 그새 친해진 니나이나 황녀와 앨리스에게도 세드릭의 집에서 있었던 재미있는 일을 잔뜩 말해줄 생각이었다.
‘모두가 다 같이 친해지길 원하는 내 소박한 소망을 이루기 위한 첫걸음이랄까. 후후.’
아무리 유치원 아이들이 하나같이 미래의 악역, 주인공, 서브 남주라지만, 지금부터 친분을 잘 다져놓으면 원작과는 상관없이 모두가 행복한 해피엔딩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었다.
물론 진솔한 생각을 조금 더하자면, 그 해피엔딩 안에 머리만 빼꼼 내미는 거라도 좋으니 나도 그들 사이에 좀 끼어들고 싶은 바람이 제일 컸다.
나는 특히 제이크가 친구를 많이 사귀었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내가 없다면 제이크는 친구 하나 없는 혼자가 되어버리니까.
그렇다고 해서 나보다 더 친한 아이가 생기는 걸 원하는 건 아니지만, 흥흥.
‘아, 이게 무슨 치졸한 질투심이란 말이야! 나 진짜 못됐네.’
나는 무심코 떠올라버린 못된 본심에 얼굴을 붉혔다. 어휴.
그래, 아무튼 모두가 행복했으면 했다.
지금 내가 이렇게 이리저리 발로 뛰며 친해지려 노력 하는 게 부디 헛된 일이 아니었으면.
* * *
다음 날 나는 유치원에 조금 늦었다.
하필이면 어제 타고 간 마차 바퀴에 진흙이 묻어 굳은 탓에 손질이 채 끝나 있지 않은 탓이었다.
도착한 교실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고 웬일인지 소란스러웠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 같았다.
설마 나 빼고 다 같이 놀고 있는 건가?
“안녕하세요…… 으악!”
노는 거라면 내가 빠질 수 없지, 싶은 마음으로 문을 확 열어젖힌 순간 내 얼굴로 무언가가 날아들었다.
폭신하고 말랑한 감촉, 어쩐지 털도 달린 것 같고. 이게 대체 뭐야?
“폴리! 거기로 날아가면 안 돼!”
정체불명의 물체를 가만히 안아 든 그 순간, 세드릭의 외침이 화살처럼 날아왔다.
폴리? 폴리라고? 설마 그럼 지금 내가 안고 있는 이게…….
“안녕.”
“……?”
혹시나 하는 마음에 내려다본 그 미지의 물체는 제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따끈따끈했다.
심지어 사람 말도 했다.
물론 이 아이가 폴리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신수니까. 나는 얼떨결에 폴리에게 인사했다.
“어, 안녕.”
“안녕.”
강아지의 모습에서 벗어난 폴리는 작은 새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내 손바닥 반만 한 작은 아기 새.
아직 깃털도 아닌 솜털이 보송보송한 연분홍빛 새였다. 이런 신수도 있던가.
‘하긴, 알에서 나왔으니 새 신수인 게 당연하지.’
때마침 폴리를 데리러 세드릭이 내게 달려왔다.
세드릭은 곧바로 폴리를 안아 들고서 다독였다.
“쉬이, 폴리.”
“안녕!”
또다시 폴리는 내게 인사를 했다.
뭐지, 이건. 앵무새는 아닌데…… 옹알인가?
사람 말은 사람 말인데, 어째 할 줄 아는 단어가 ‘안녕’밖에 없는 것 같았다.
내 의아한 시선을 느낀 모양인지 세드릭이 다급하게 설명했다.
“오늘 아침 막 깨어났어. 저택에 둘 수는 없어서 데리고 왔는데 아직 어린 신수라 그런지 할 줄 아는 말이 안녕밖에 없더라.”
“벌써 깨어났어요?”
나는 놀라 되물었다.
폴리의 존재에 당황한 나머지 가장 중요한 사실, 어제 막 알이 생겨났다는 것을 잊어버린 나였다. 최대 일주일까지 걸린다고 했던 부화가 벌써 되다니.
“……테이온 영식이 말을 전해주던데. 주인과 더 친한 신수일수록 빨리 깨어난다고.”
세드릭은 묘하게 뿌듯해하는 표정으로 으쓱이듯 말했다.
제 신수와 친하다는 걸 자랑하고 싶었던 건가?
“네에. 축하드려요.”
나는 영혼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신수와 박치기한 이마가 꽤나 얼얼했다.
저 신수, 갓 태어났으면서 내구도가 무슨 쇳덩인 줄. 후우.
“네가 오는 소리를 듣고 바로 깨어났나 봐. 아직 폴리는 잠이 많아. 방금까지 내 품 안에서 푹 자고 있었다고.”
세드릭은 ‘얘가 원래 이런 얘가 아닌데……’라는 표정으로 으쓱이며 변명했다.
신수도 다른 동물들처럼 어린 시절에는 특히나 잠이 많은 모양이었다.
앞을 바라보니 아이들이 옹기종기 모여 신수를 향해 열렬한 눈빛들을 보이고 있었다.
평소 신기하고 새로운 게 생기면 호기심을 참지 못하는 성격인 니나이나는 물론이고, 소극적인 태도의 앨리스 역시 신수라는 걸 실제로 처음 보는 탓에 눈이 반짝반짝 별이 보이는 것 같았다.
예상외로 제이크는 무심했지만, 이내 이유를 알았다. 제이크의 아버지인 테이온 공작님이 지금보다 더 어릴 적 제이크에게 간혹 희귀한 신수를 보여주신 적 있었다고 들었다.
그리고 니콜라스는.
“……이 신수의 이름은 뭔가?”
“폴리입니다, 전하.”
뒤늦게서야 폴리에게 다가와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관찰 중이었다.
심지어 손에 있는 책조차 <신수의 유래>라는 제목이네?
내가 책을 빤히 쳐다보자 니콜라스가 말했다.
“방금 막 유치원 서고에서 가져온 책이다. 그보다, 나도 실제로 신수는 처음 보는구나. 신기하게 생겨서 말도 해.”
그렇게, 수업 시간 내내 과목 선생님들을 비롯해 우리 모두의 관심사는 오로지 폴리였다.
당연했다.
책 속이나 전해 듣는 이야기로만 알고 있었던 신수가 글쎄 같은 방에서 숨 쉬고 있다.
어떻게 신기하지 않을 수 있겠어?
심지어 이 아이들은 모두 6, 7살이라 한창 호기심이 왕성할 시기였다.
흠흠, 근데 왜 나도 자꾸만 관심이 가니.
“세상에나! 내 35년 인생에서 신수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군요. 신기하기도 해라. 그런데 지금 설마 잠들어 있는 건가요? 아아, 깨어 있는 모습도 보고 싶군요.”
심지어 제국어 기초를 가르치는 한 선생님께서는 수업이라는 본분도 잠시 잊어버린 듯했다.
신수를 보았으니 이젠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얼굴을 하시고서는, 한참 동안 폴리만을 쳐다보셨으니까.
물론 그분 외에도 다른 선생님들 역시 수업 도중 힐끔힐끔 폴리를 바라보고는 했다.
물론 모두의 열렬한 관심에도 불구하고 폴리는 오로지 잠만 잤다.
막 깨어난 어린 신수라서 그런 걸까?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고롱고롱 코 고는 소리가 들린다.
으아, 숨소리도 어쩜 이리 귀여운지 모르겠다!
마침 앨리스가 신수의 사랑스러운 숨소리를 바로 옆에서 듣고서는 놀란 듯 숨을 헙 들이마셨다.
“헉! 숨을 쉬어.”
“당연하지. 신수도 살아 있는 생물이거든.”
그러자 무릎 위에 폴리를 얹고 가만히 1시간째 부동의 자세로 인내 중인 세드릭이 우쭐해하며 대답했다.
꼭, ‘넌 이런 신수 없지?’라고 말하는 듯했다.
보이지 않는 콧대가 아주 천장까지 뚫게 생겼다.
어휴, 유치하다. 세드릭.
그렇게 폴리와 함께하는 기나긴 오전 시간이 끝나고 마침내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창밖에서 뭔가가 굴러떨어지는 소리가 나도, 선생님이 실수로 잉크 병을 떨어뜨려도, 니콜라스가 책을 탁 덮어도 일어나지 않던 폴리가 눈을 뜬 것이다.
다름 아닌 음식 냄새를 맡고!
‘하긴, 냄새가 좀 좋아야 말이지.’
언제나처럼 황궁 요리사들이 직접 만들어주는 만찬이었다.
그 화려하고 풍성한 식탁 위를 자꾸만 기웃대는 한 마리의 새, 아니, 신수인 폴리를 힐끔대던 니콜라스는 넌지시 제이크에게 질문했다.
“신수도 밥을 먹나?”
처음엔 폴리의 주인인 세드릭에게 질문하던 니콜라스였지만, 곧 깨닫게 된 것이었다.
세드릭은 이제 막 신수를 키우게 된 신수 문외한이라는 걸.
신수나 마법에 관한 한은 제이크가 차라리 더 잘 알고 있었다.
매일 책을 옆에 끼고 사는 니콜라스였지만, 차후 황제가 될 것을 생각해 그와 관련된 책만 읽다 보니 마법 쪽은 영 밝지 못한 모양이었다.
“먹을 수는 있지만, 신수는 음식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는 동물입니다, 전하. 안 주시는 게 좋습니다.”
제이크는 니콜라스의 물음에 공손한 태도로 대답했다.
그러고 보니, 이 둘 나중에 친우이자 군신이 되는 사이였지 참.
처음엔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사실이지만 니콜라스와 제이크는 이 유치원에 오기 전부터 안면이 있었다.
테이온 공작가와 황실의 친분 탓이었다.
원작대로라면 어릴 때부터 그냥 안면 튼 정도가 아니라 절친이었어야 했는데, 아무래도 내 등장이라는 변수가 둘의 관계를 변화시킨 모양이었다.
하지만 뭐, 나중에 성인이 되면 자연스레 둘의 사이가 절친으로 변할 것이라고 나는 믿었다.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다. 후후.
아무튼 제이크의 그런 대답에 니콜라스는 살짝 실망한 듯했다.
아무래도 디저트로 나온 라즈베리 푸딩을 주려고 했던 모양인데, 에이. 그럼 못쓴다.
신수도 어쨌거나 동물인데 벌써 단걸 먹이면 입맛이 완전히 변해 버릴 거라고!
“……아쉽구나.”
니콜라스는 푸딩 접시를 거둬들이고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그리고 세드릭 역시, 혹시나 폴리의 잠에 방해될까 계속 불편하게 앉아만 있던 걸 멈추고 편하게 식사 중이었다.
그럼 지금 폴리가 어디 있냐고? 궁금해?
“안녕, 폴리.”
“안녀엉.”
일찍이 식사를 마친 내 무릎 위에 있었다. 헤헤.
나는 연신 폴리에게 인사를 건넸다.
잔뜩 올라간 입꼬리가 좀처럼 내려가지 않았다.
그런데 그런 내 모습이, 어쩐지 자신보다 폴리와 더 친해지는 것처럼 느껴져서 심술이 났는지 돌연 세드릭이 포크를 내려놓고 내게 왔다.
“야, 폴리 다시 나한테 줘. 나 식사 다 했어.”
아니, 치사하게! 한참 뽀송뽀송한 등에 난 솜털을 빗겨 주고 있었단 말이다!
하지만 신수의 주인께서 내놓으시라는데 어쩔 수도 없고…… 휴.
사실 나는 한 번도 세드릭이 부러운 적 없었는데, 오늘 처음으로 부러운 감정을 느끼고야 말았다.
‘앗, 그러고 보니.’
나는 조금 더 폴리를 안고 있을, 정확히 말하자면 세드릭의 시선을 빼앗을 다른 방법을 순간 떠올렸다.
그건 다름 아닌 내 주머니 속 힐링 포션이었다.
계속 주머니 속에 가지고 있던 탓에 시원했던 액체는 거의 뜨끈뜨끈 수준이지만…… 내가 마실 거 아니니 괜찮다, 뭐.
“공자님, 죄송하지만 폴리는 아직 내줄 수 없어요.”
“뭐? 왜? 폴리는 내 신수라고!”
어이없다는 듯 나를 쳐다보는 세드릭을 살짝 가소로운 표정으로 바라봐 준 후, 나는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포션을 꺼냈다.
나머지 한 손은 여전히 폴리를 쓰다듬고 있는 채였다.
이런 사랑스러운 녀석 같으니, 처음엔 음식 냄새에 흥분해서 어쩔 줄 몰라 하더니만 이제는 적응이 되었는지 식탁으로 날아가려 하지도 않고 그저 얌전하다.
“……그게 뭐야?”
“포션이에요. 힐링 포션. 뭔지 아시죠?”
기묘한 녹색을 띠고 있는 꿀렁대는 질감의 액체에 순간 질색하는 표정을 지은 세드릭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포션의 코르크 마개를 똑 소리가 나게 땄다.
곧 스멀스멀 냄새가 밀려왔다.
오묘하고, 미묘하게 사람의 거부감을 느끼게 하는 냄새였다.
“알아. 아는데. 근데 그걸 뭘 어쩌려는 거야. 설마 그거 나보고 마시라고? 왜?”
당연하게 그 냄새는 짧은 거리를 퍼져 나가 세드릭의 코에 훅 꽂혔다.
세드릭의 표정이 ‘뜨헉’으로 바뀌어 버리는 그 짧은 순간을 확인하며 나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세드릭이 말했다.
“싫은데? 내가 왜?”
“손에 아직도 상처가 남아 있으시잖아요. 그거 치료해 드리려고 제가 가져왔어요.”
“…….”
나는 태연하게 병을 한 바퀴 흔들며 대답했다.
세드릭은 가만히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다.
싫다고 고집부렸지만, 자신을 위해 가져왔다 하니 그래도 마음이 조금은 약해진 것이 분명했다.
음…… 아닌가?
눈동자 굴러가는 걸 보니 물약 안 먹을 핑계를 찾고 있는 것 같기도.
“나 상처 다 나았거든?”
그러더니 이내 손을 자연스레 바지 주머니에 꽂으며 능청스럽게 말한다.
거짓말이 수준급이다.
물론 나에겐 통하지 않는다!
“마시는 거 말고 바르는 걸로 해요! 그럼.”
“바르는 거……?”
에휴, 내가 져 준다.
그런 마음으로 차선책을 제안했다.
먹는 게 효과가 빠르긴 하지만 바르는 것도 뭐 나쁘지는 않으니까.
결국 세드릭은 내 앞에 얌전히 양손을 내밀었다.
역시, 아까 한 말은 거짓말이었던 거다.
생채기는 살짝 딱지가 붙어 있었지만 붉은 기가 여전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그 위에 물약을 부었다.
쪼르륵-
이 작은 병에서 흘러내리는 액체들이, 마치 내 저금통에서 떨어져 내리는 은화들처럼 보인다면 착각일까?
아, 아니다.
나는 그렇게 쪼잔한 사람이 아니라고.
(미래의) 인맥이자 친구를 위해 저금통 하나쯤은 쿨하게 투자할 수 있어!
내 손끝이 마침내 물약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탈탈 털어 냈다.
어차피 한 병의 양은 개미 오줌만 해서 이 정도면 딱 적당하게 흡수될 것이었다.
“자, 다 됐어요.”
갑자기 확 새살로 변해버리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만 녹색 액체가 스며들면서 서서히 딱지가 옅어지고 붉은 기가 사라지는 게 보였다.
세드릭은 싫지 않은 표정으로 제 손을 바라보다가 이내 완전히 물약이 스며들었을 때 일어났다.
“뭐, 고, 고맙다. 흠.”
“뭘요. 고마우시면 폴리나 좀 더 안고 있게 해주시든지…….”
“그건 안 돼. 폴리 이리 줘.”
쳇, 안 넘어가네.
나는 아쉬운 마음으로 폴리를 세드릭에게 안겨주었다.
과연 신수와 주인의 유대는 남다른 모양인지 내게 안겨 있을 때보다 한결 폴리는 편안해 보였다.
섭섭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였다.
나는 저편에서 시선을 느꼈다.
제이크였다.
아까 내가 세드릭에게 물약을 발라주기 전부터 잠시 교실을 나가 있었던 제이크가 다시 돌아온 모양이었다.
왜냐하면 아까 폴리의 실수로 셔츠에 소스가 묻었었으니까.
그래서 옷을 갈아입으러 나갔었다.
‘아니, 그런데 표정이 왜 저러지……?’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내가 아는 평소의 그 제이크가 아닌 것 같았다.
제이크는 나를 충격받은 눈동자로 한번 쳐다보더니 이내 저편의 세드릭에게도 시선을 잠깐 주고서, 다시 문밖으로 나가버렸다.
소리도 내지 않고 조용히 닫힌 문을 멍하니 보던 나는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진짜 왜 저러지.
단추라도 잘못 잠갔나?
* * *
하지만 그런 내 의문점이 무색하게도, 곧바로 제이크는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1분 만에 돌아왔다.
그러더니 내게 와서 갈아입은 옷을 미르가 더 좋아할 것 같다는 둥 평소 같은 말을 해댔다.
“제이크, 일단 가서 식사 마저 해. 다 식어버리겠다.”
요리들이 막 나오기 시작할 때 소스가 묻어버려서, 지금 제이크는 점심 식사도 제대로 못 한 상태였다.
내 걱정 어린 말을 들은 제이크는 순순히 ‘맞다, 그래야지’라는 말을 남기고 식탁으로 돌아갔다.
평소의 제이크다운 행동이었다.
그래서 나는 제이크에게 별일이 없는 줄로만 알았다.
분명, 그랬는데.
“아얏!”
잠시 후, 식탁이 있는 방향에서 살짝 작위적으로 들릴 법한 날카로운 비명이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제이크였다.
나는 곧바로 제이크에게 뛰어갔다.
무슨 일이 생긴 거지?
“괜찮으십니까? 공자님?”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달려온 황궁의 기사들, 에드몽 백작 부인, 그리고 아이들까지.
모두가 제이크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이크는 고개를 푹 숙인 채였기 때문에 내가 볼 수 있는 건 제이크의 곱슬곱슬한 부드러운 갈색 머리카락밖에 없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하얀 손가락 끝에 무언가 붉은 게 맺혀 있었다.
피였다.
“제, 제이. 다쳤어?”
그걸 본 나는 곧바로 제이크에게 달려가 손을 확인했다.
내 외침에 주변의 아이들도 하나둘 상황을 눈치챈 것인지 술렁댔다.
제이크는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아니야, 좀 아프긴 한데…… 많이는 안 다쳤어. 실수로 손이 미끄러진 것뿐이야…….”
“무슨 소리야, 베여서 핏방울이 보이잖아.”
바닥에 떨어진 나이프를 보니 알 것 같았다.
마침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에드몽 부인이 식겁하며 구급상자를 가져오라 말하는 게 들렸다.
잠시 후 한 시종이 가져온 구급상자를 보고 나는 외쳤다.
“내가 할게요!”
“영애님께서 직접 하신다는 말씀이세요……?”
“그럼요. 어서 이리 주세요.”
내 외침에 당황스러워하는 에드몽 부인을 뒤로하고, 나는 곧바로 시종에게 구급상자를 건네받았다.
그러고서는 곧바로 붕대와 소독약 등을 꺼내 처치를 시작했다.
미처 부인이나 다른 기사들이 나를 말리기도 전에, 재빠르게.
‘찔린 도구가 더러운 나이프는 아니어서 다행이야.’
만약에 녹이 슬거나 했더라면 따로 약을 먹어야 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아직 사용하지 않은 새것 같은 나이프였다.
게다가 생각보다 상처가 그리 깊지 않았기에 나는 속으로 크게 안심했다.
다친 부위를 소독약을 묻힌 부드러운 거즈로 닦아낸 뒤, 또 다른 거즈를 꺼내 상처를 감싸고 그 위를 붕대로 감았다.
“후…….”
그제야 나는 한숨 돌릴 수 있었다.
어느새 관자놀이에 한줄기 식은땀이 흘러내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나는 깜짝 놀랐다.
‘운동한 것도 아닌데 땀이……?’
아, 아무래도 작은 몸으로 너무 재빠르게 움직이다 보니 그런 것 같았다.
하지만 피를 봤잖아, 피를! 어쩔 수 없었다고.
그때였다.
갑자기 박수 소리와 함께 탄성이 들려왔다.
니나이나의 목소리였다.
“멋진걸, 에미르?”
“아, 황녀 전하. 멋지다니요! 과찬이세요…….”
대단한 일을 해냈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니나이나와 그 옆에서 얼떨떨하게 서 있는 아이들, 또 감격한 얼굴의 선생님과 기사들이었다.
나는 살짝 머쓱하게 대답했다.
그러자 니나이나가 또다시 질문했다.
“그런 붕대 감기는 어디서 배웠지? 보통 솜씨가 아니잖아.”
“으음, 그게요…….”
그러게, 어디서 배웠을까?
그 질문의 답이 정말로 궁금해진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아마도 전생에서 배웠겠지만, 그게 정확히 언제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그냥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집안의 하녀에게 배웠을 거예요. 살다 보면 다치는 일이 많으니까요.”
“오, 과연 그렇지.”
별 뜻 없는 대답에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니나이나와, 그 옆에서 ‘좀 똑똑해 보이는걸?’이라고 작게 혼잣말하는 니콜라스를 번갈아 쳐다본 나는 이내 수줍게 고개를 내렸다.
어차피 별것도 아닌 일이다.
이런 걸 가지고 자랑을 해 봐야 뭐하겠는가.
그보다, 내가 방금 치료한 환자인 제이크가 중요했다.
나는 제이크의 자그마한 손을 응시하며 조심히 질문했다.
“제이크, 이제 안 아파?”
“으응…….”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도 제이크는 낯빛도 평소와 비슷하니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다만 약간 귀 끝이 빨개 보이긴 했지만 말이다.
‘가만, 제이크가 귀가 빨개질 때라면…… 거짓말을 했을 때밖에 없는데?’
나는 잠시 멈칫하다 이내 작게 고개를 저었다.
거짓말을 할 게 뭐가 있다고.
귀가 빨개진 건 틀림없이 칼에 베여서 깜짝 놀라버린 탓일 거다, 아마도.
그때 제이크가 제 붕대 감아 놓은 손을 만지작거리며 재차 대답했다.
“……미르가 고쳐줘서 하나도 안 아파.”
“거짓말 같은데, 그건.”
나는 그런 제이크를 밉지 않게 살짝 째려보았다.
아무래도 너무 과장이 심했다.
심지어 비명이 나올 것같이 아픈 소독약도 발랐는데, 아프지 않았을 리가.
분명 그걸 발랐을 때 살짝 인상이 찌푸려지는 걸 나는 봤다.
그러자 갑자기 제이크가 내 시선을 피하더니, 이내 중얼거렸다.
아니, 중얼거리는 척하면서 사실 모두가 들으라는 듯이 또박또박 말했다.
“진짜야. 그렇지만 미르가 호- 해준다면 완전히 다 나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응?”
순간 나는 당황했다.
아니 얘가 몇 살인데 호-를 해달라는 거야…… 가 아니라, 6살이었지. 참.
“……알겠어. 자, 손가락 이리 줘.”
결국 나는 고민 끝에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금세 제이크의 표정이 밝아졌다.
“응! 여기!”
“에휴.”
나는 짧게 한숨을 쉬고서 이내 제이크의 작은 손가락을 호호 불어주었다.
사실 손가락이라고 하기에도 뭐한 게, 붕대를 감아 놓아서 바람이 잘 통하지도 않을 것이었다.
과연 이게 효과가 있긴 한 걸까?
“고마워, 미르.”
“……뭘 이런 걸 가지고.”
그리고 결론적으로 제이크는 언제 다쳤었냐는 듯 활짝 미소 짓게 되었다.
그래, 이거면 된 거지.
제이크가 웃고 있으니 그걸로 만족했다.
나는 마음이 훈훈해지는 걸 느끼며 따라 웃으려 했다.
아니, 그런데 잠깐.
‘다쳤을 때 제이크가 울었던가……?’
나는 아까의 기억을 되짚어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제이크가 또래치고 평소 자주 우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예전에 실수로 정원의 장미 가시에 손을 찔렸을 때 울먹거렸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에이, 모르겠다.’
하지만 결국 나는 머릿속에서 그런 잡다한 생각을 지워냈다.
고민해 봤자 머릿속의 뇌 용량만 잡아먹는 쓸데없는 것일 뿐!
잠시 후, 식사 자리가 정리되고 다시금 수업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다행히도 아까의 아찔했던 소동은 모두에게 잊힌 듯 포근한 분위기만 느껴졌다.
나 역시 점심 식사를 배부르게 한 탓에 살짝 나른해져서, 의자에 앉은 채 졸고 있었다.
“으음, 따뜻해.”
막 깊게 잠들려던 순간, 무릎 위에 따뜻한 뭔가가 얹힌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 무언가를 잠결에 쓰다듬었다.
그랬더니 그 정체 모를 무언가가 갑자기 푸드덕거렸다.
“어? 폴리잖아?”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내 무릎에 폴리가 앉아 있는 게 보였다.
폴리는 동그란 눈을 뜬 채 연신 ‘안녕’이라고 말하며 내 손을 부리로 쪼았다.
분명 세드릭이 안고 있었는데…… 스스로 온 건가?
의아해진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몽롱하게 주변을 둘러보았고, 곧 모른 척 딴청을 피우고 있는 세드릭을 볼 수 있었다.
세드릭은 내 쪽으로 시선을 안 주려는 척하면서 곁눈질로 몰래 나를 보고 있었다.
‘뻔히 보이잖아.’
코웃음이 나올 정도의 얕은 수였지만,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아까 세드릭이 나에게 치료 포션을 받은 것에 대해 부끄럼을 타고 있는 것 같았으니까.
나는 씩 미소 지은 채 고개를 숙이고 무릎에 앉아 있는 폴리를 쓰다듬었다.
따뜻한 온기가 피부에 닿아 오니 다시금 솔솔 잠이 오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잠들기 직전,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때문에 다시 눈을 번쩍 떠야만 했다.
‘그러고 보니, 참 공교롭네. 내가 물약으로 세드릭을 치료해 준 다음에, 곧바로 제이크가 다치다니.’
한 번에 두 명이 다치다니 오늘은 대체 무슨 날인가 싶었다.
물약이 2개 있었더라면 제이크의 상처도 빠르게 아물게 해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별것 아닌 후회도 들었다.
‘뭐, 제이크 아버지께서 마법사시니 괜찮겠지. 저택에 돌아가면 치유 마법으로 치료받을 테니까……. 그것도 내가 샀던 물약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한 마법으로.’
물론 나는 금방 그 후회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 * *
내가 세드릭이 폴리를 살릴 수 있게 도와준 이후로 며칠이 지났다.
세드릭과 나는 그날 이후로 꽤나 가까워졌다.
‘뭐, 내 생각만일 수도 있지만.’
적어도 예전처럼 무턱대고 조잡한 시비를 걸어오거나, 짜증 나는 대꾸를 하지 않으니까 이 정도면 꽤나 친해진 거 아닐까.
‘심지어 이젠 내가 부르면 꼬박꼬박 대답까지 한다고.’
그러니까 역시 사이가 많이 가까워진 게 맞는 것 같았다.
나는 세드릭과 나 사이의 친분에 대한 생각을 잠시 멈추고, 가만히 저쪽에서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을 바라보았다.
‘뿌듯한걸.’
나는 흐뭇한 감정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게 내가 전파한 놀이가 유치원에서 유행한다는 것은 꽤나 소소한 행복감을 가져다주었으니까.
심지어 지고하신 이 제국의 황녀님까지 즐기시는 놀이라는 말씀. 후후.
‘물론 아직도 황자님은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이시지만 말이야.’
그러다 나는, 이내 구석 의자로 시선을 돌렸다.
창가에 맞닿은 곳에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는데, 그곳엔 니콜라스가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모범생의 정석이라고 말해도 좋을 법한 자세는 벌써 한 시간째 고정이었다.
발끝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사락사락 책장만 넘기고 있었다.
여전했다.
어려워 보이는 책만 쏙쏙 골라 읽는 것도, 어린아이들의 일엔 관심도 없다는 듯 초연한 태도로 일관하는 것도.
‘뭐, 어쩔 수 없지.’
니콜라스를 잠깐 보다 말고 나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나중에 황자님과 친해질 땐, 좀 더 흥미로운 놀잇감을 가져와야겠다. 고작 공기놀이로는 황자님의 관심을 끌 수가 없잖아.’
일단 니콜라스는 내게 아직 너무 어려운 상대였으므로, 잠시 생각은 접어두기로 했다.
나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아이들을 향해 다가가자, 금세 내 인기척을 알아차린 제이크와 앨리스가 내가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저도 다시 끼어도 될까요?”
한참 니나이나의 차례였다.
내 질문에 니나이나는 고개를 들지도 않고 공깃돌에 집중한 채로 ‘그래’라고 짧은 대답을 했다.
물론 다른 아이들 역시 흔쾌히 다음 차례부터 함께하자고 말해주었다.
‘역시 황녀님은 공기만 하면 사람이 달라진다니까…….’
살짝 씁쓸한 기분을 느끼며 나는 가만히 내 순서를 기다렸다.
그때였다.
내 얼굴을 향한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나는 고개를 들었다.
‘세드릭?’
시선의 주인은 세드릭이었다.
왜 저렇게 나를 빤히 보지? 궁금해진 나는 입 모양으로 왜 그러냐고 질문했다.
“…….”
그러자 세드릭이 무언가 말하고 싶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쉽사리 말하지 않는 게, 아무래도 단둘이서만 이야기하고 싶은 말인 모양이었다.
느낌이 왔다.
무언가 중요한 이야기일 것 같은 느낌이!
호기심이 생긴 나는 또다시 입 모양으로 말했다.
교실 밖에서 이야기하자고.
그러자 세드릭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세드릭이 동시에 일어나자, 제이크가 어딜 가냐고 나를 붙잡았다.
“금방 올게, 제이크. 1분만 기다려!”
나는 제이크에게 눈을 찡긋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교실 밖은 황실 근위대가 지키고 있었다.
음, 언제나 생각하는 거지만 정말이지 경비가 철통이라니까.
그럼에도 혹시 모르기 때문에 나는 주변을 휘휘 둘러보았다.
딱히 위험 요소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세드릭을 향해 질문했다.
“말하고 싶은 게 뭐예요?”
“……검이 있는데.”
“예? 검이요?”
뜬금없이 검 이야기를 꺼내는 세드릭에게, 나는 의아하게 되물었다.
그러자 세드릭은 한 손으로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재차 말했다.
“그러니까, 내가 어제 아버지께 검을 받았어.”
“그런데요?”
나는 살짝 김이 새려 하는 걸 느꼈다.
엄청, 엄청 중요해 보이는 낌새를 풍기더니만 갑자기 웬 검 자랑인지.
설마 축하해 줄 사람이 없어서 나더러 축하해 달라 부탁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세드릭은 성격이 괴팍해서 또래 친구가 있을 것 같지 않으니, 나라도 축하해 줘야지.
“축하해요. 대공자님. 검을 받으셨군요…….”
나는 영혼 없는 손뼉을 짝짝 쳤다.
세드릭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하지만 세드릭이 정말로 원한 반응은 그게 아니었던 듯하다.
잠시 후 망설이던 세드릭은 내게 질문했다.
“그 검, 보고 싶지 않아?”
그제야 나는 세드릭의 의도를 깨달았다.
‘자랑하고 싶었던 거구나!’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원래 이맘때 아이들은 자신에게 소중한 물건이 생기면, 가족이나 친한 친구에게 그것을 자랑하기를 좋아하고는 하니까.
아마 세드릭 역시 검을 얻고 나서 기쁜 나머지 그걸 자랑하고 싶은 마음에 벅찼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자랑 상대로 나를 고른 거고.
‘가만, 그렇게 따지자면 세드릭이 날…… 친한 친구로 생각한다는 걸까?’
생각하던 도중 깨달은 한 가지 사실에, 나는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때마침 세드릭이 재촉해왔다.
“빨리 말해. 보고 싶어, 안 보고 싶은 거야?”
“아, 당연히 보고 싶어요!”
나는 혹시라도 세드릭이 제안을 번복하기라도 할까 봐 곧장 대답했다.
그러자 세드릭은 내가 당연히 수락할 줄 알았다는 듯 오만한 태도로 말했다.
“흥, 그럼 그렇지. 자, 따라와.”
그렇지만 나는 보았다.
혹시라도 내가 거절할까 봐 눈치를 살피던 세드릭의 눈동자를.
‘진짜 뻔히 보인다니까…….’
그런 세드릭의 뒤를 따라가면서 나는 작은 뒤통수를 밉지 않게 살짝 흘겨보았다.
이 정도면 눈치 못 챘겠지?
물론 내가 순순히 세드릭의 부탁 아닌 부탁을 들어주는 건, 오로지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세드릭 저 녀석에게 내가 꽤나 친한 친구로 인식되고 있는 것 같다는 사실 때문에.
‘사실 좀 걱정했는데. 물약 일 이후로 세드릭이 자꾸 나를 피하는 것 같아서. 그런데 그건 그냥 부끄러워서였나 봐.’
그토록 바라던 세드릭과 친구 되기가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 들자, 기분이 좋아졌다.
나도 모르게 콧노래가 절로 흘러나오기까지 했다.
* * *
세드릭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은, 유치원의 물건 보관함이 있는 방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봐도 적응되지 않는 화려한 보관함의 광채에 그만 눈을 살짝 감았다 떴다.
내 몸집만 한 크고 투명한 크리스털 보관함 5개.
그 앞에서 세드릭은 멈춰 섰다.
“대공자님 보관함은 이거잖아요.”
그리고 나는 세드릭보다 먼저 나서서, 세드릭의 물건 보관함 위치를 짚어주었다.
세드릭이 좀처럼 보관함을 사용하는 걸 본 적이 없기에, 혹시나 위치를 까먹었을까 봐 도운 것이었다.
세드릭은 보관함은커녕 유치원에 올 때 가방조차 제대로 가져오지를 않는다.
“나도 알아. 그리고 검은 보관함에 안 숨겨뒀거든.”
그런데 세드릭이 콧방귀를 뀌며 갑자기 보관함이 아닌 그 옆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했다.
나는 의아하게 세드릭이 하는 걸 보고만 있었다.
왜냐하면 그 옆은 텅 비어 있었으니까.
‘대체 벽밖에 없는데 뭘 숨겨놓았다는 거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챈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다음 순간 크게 놀랐다.
“어……?”
왜냐하면 세드릭이 벽을, 정확히는 벽에 살짝 튀어나와 있는 듯한 부분을 꾹 누르자 갑자기 벽이 갈라졌기 때문이다.
드드드- 하는 작은 소리와 함께 마법처럼 새로운 방이 나타났다.
혹시 이거, 비밀 통로인 건가?
마침내 통로의 입구가 완전히 열리자, 세드릭은 망설임 없이 그 안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나는 그 통로로 연결되는 곳이 어두워서 차마 발을 디디지 못하고 멈춰 서 있었다.
“어서 들어와. 안 죽어.”
세드릭은 망설이는 나를 알아채고서 휙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제야 나는 한 걸음씩 조심스레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다섯 걸음쯤 걸었을까.
깜깜하던 통로에 반짝하고 불이 들어왔다.
놀라서 천장을 보니, 고급 마력석으로 추정되는 돌에서 빛이 환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와아……!”
“어때? 여기 정말 좋지?”
나는 아름다운 마력석의 광경을 보고 잠시 감탄했고, 세드릭은 그런 날 보며 우쭐대듯 질문했다.
꼭 자신이 이 비밀 방을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콧대가 잔뜩 올라가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멋지네요. 그런데 대공자님, 이 통로를 대체 어떻게 발견하신 거예요?”
내 질문에 세드릭이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대답했다.
“……그냥 어쩌다 보니. 유치원 구경 좀 하다가 찾아냈어. 우연히 벽을 누르니까 벽이 막 열리는 거야.”
‘우연히’라.
우연히 비밀 통로를 찾아낼 수 있었다는 게 정말이라면 세드릭은 운이 참 좋은 아이인 듯하다.
하지만 정곡을 찔린 듯한 저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 숨기는 게 있는 모양이다.
‘흐음, 굳이 숨기려고 하는 걸 알아내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기껏해야 화장실이 급해서 아무 데나 뒤지고 다녔겠지 뭐…….’
그렇게 생각한 나는 이내 표정을 가다듬었다.
때마침, 세드릭이 방구석에 놓여 있던 것을 가져왔다.
검이었다.
내게 보여주겠다고 자랑하던 바로 그 검이 분명했다.
“짜잔! 이거야. 어때? 엄청 멋지지 않아?”
“와…… 정말 멋진걸요.”
세드릭이 그 검을 집어 들고서 이리저리 조명에 비춰보며 내게 질문했다.
사실 질문한다기보다는, 이미 정해져 있는 답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물론 나는 진심을 가득 담아 대답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검은 아주 멋졌으니까.
‘사실 그냥 대충 칭찬해 주려 했는데. 진짜 좋아 보이는 검이잖아.’
검의 손잡이는 반짝거리는 금이었고, 그냥 매끈하기만 한 게 아니라 음각으로 고대어 글씨가 잔뜩 새겨져 있었다.
그 뜻이 무언가 하니 세드릭네 가문에 내려온 전사들의 이름이라고 한다.
마지막 글씨에는 세드릭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후계자 자격 시험에 통과했거든. 그랬더니 아버지께서, 나더러 멋진 전사다운 기사가 되라며 이 검을 하사하셨어.”
세드릭은 황홀해 보이는 눈빛으로 검집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아직 둘째 형님도 못 받은 검인데, 내가 먼저 받았어. 심지어 첫째 형님도 9살이 되어서야 겨우 받은 검이었다고. 어때, 대단하지 않아?”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말하니까 정말로 대단한 것 같았다.
아직 7살밖에 안 되는 꼬맹이 중의 꼬맹이가 벌써 후계자 시험을 통과하다니!
‘그러고 보니, 세드릭네 가문은 작중에서 유서 깊은 기사 가문이었지. 과거에 황족을 지켜낸 공로를 인정받아 대대로 승계 가능한 대공위를 받기도 했다고 알고 있는데.’
가만, 그럼 그런 가문의 세 형제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실력이라는 거 아닌가?
문득 떠오른 사실에 나는 그대로 멈춰 섰다.
내가 요즘 미처 의식하지 못했을 뿐, 사실 세드릭은 미래에 최연소 소드마스터가 될 재목이었다.
나는 지금 그런 검술의 귀재와 한 유치원을 다니고 있는 것이었다!
“진짜 대단해요. 세드릭 대공자님은. 벌써 후계자 시험을 통과하다니, 저희 가문엔 그런 게 없어서 뭔지는 잘 몰라도 대단한 거잖아요.”
그 사실을 자각하자, 감탄이 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세드릭에게 진심 어린 칭찬을 해주었다.
세드릭과 다르게 나는 검술은커녕 정령술, 마법 그 어떤 초현실적인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다.
반면 세드릭을 비롯해 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나 빼고 전부 뛰어난 재능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는 천재들이고.
지극히 평범하기만 한 나로서는 그들이 부럽고 대단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흑, 슬프잖아…….’
새삼 내 무능력이 체감되어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애써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랬다.
‘그래도 나는 미래를 알잖아. 이 책이 어떻게 진행될지라든가, 이후에 무엇이 유행할지 같은 거. 잘하면 미래 유행 아이템으로 사업해서 대박도 날 수 있어!’
물론 그 미래라는 건, 족히 20년은 기다려야 나오는 일들이지만.
아아, 역시 난 무능력한 사람인 건가.
위로해 보려 했건만 또다시 슬퍼졌다.
‘흥, 됐어. 나는 이 유치원에서 인맥이나 만들어 갈 거라고. 이왕이면 주연들이 미래에 치정 싸움에 얽히지 않도록 친해지게 도와주면 더 좋고.’
겨우 원래의 목적을 상기하고 나서야, 나는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제야 눈앞에 멍하니 서 있는 세드릭이 보였다.
언제부터 그러고 서 있었는지, 세드릭은 검을 꼭 쥔 채 나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세요?”
“진심이야?”
시선이 너무 뚫어질 것 같아서 넌지시 질문했더니, 세드릭이 대뜸 반문했다.
나는 잠시 그 질문의 뜻을 이해하려 노력하다가 이내 깨달았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한 칭찬이 진심이냐고 묻는 건가?’
표정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그런 것 같았다.
나는 대답했다.
“그럼요, 진심이죠.”
“……거짓말이 아냐?”
그러자 또다시 세드릭이 중얼거렸다.
이번엔 어쩐지 자신에게 하는 혼잣말 같기도 했다.
아니, 내 말속에 숨겨진 따뜻한 진심이 정녕 보이지 않는다는 건가!
내가 그렇게 미덥지 않아 보이는 건지, 아니면 세드릭이 유독 나를 불신하는 건지 모르겠다.
“제가 거짓말쟁이로 보이세요?”
장난스레 살짝 실망스러운 말투로 물었더니, 세드릭이 그답지 않게 당황하며 손을 내저었다.
“그럴 리가! 그런 뜻이 아니고…… 그러니까 나한테 칭찬해 준 사람이 너밖에 없어서!”
“……?”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세드릭은 자기가 말해놓고도 그런 말을 꺼낸 게 창피했던 듯 순식간에 얼굴을 붉혔다.
그러더니 표정을 들키기 싫은 것처럼 휙 고개를 돌렸다.
“……방금 했던 말은 신경 꺼. 헛소리니까.”
“……네, 신경 끌게요.”
사실 얼굴만 돌려봤자 이미 목이랑 귀까지 다 빨개져서 소용없는데 말이다.
까칠하고 툭하면 화만 내는 세드릭이 알고 보니 부끄럼쟁이라니 놀랄 일이다.
게다가 누가 들어도 안 믿을, 헛소리였다는 거짓말은 또 뭔데.
하지만 나는 배려심 있는 아이니까, 기꺼이 세드릭을 위해 고개를 돌려주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세드릭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내 얼굴 보지 마. 창피하니까.”
아무래도 진심을 말하는 게 세드릭에게는 꽤나 창피한 일이었던 모양이다.
그렇게 있다가 세드릭은 한참 뒤에서야 다시 입을 열었다.
그답지 않게 조용한 목소리였다.
“……아버지께서도 그런 칭찬은 안 해주셨어. 그냥 멋진 기사가 되라고만 하셨지. 솔직히 난 그렇게 안 대단해. 사실 네가 진짜로 대단하다고 말해줄 줄은 몰랐어. 거짓말 같아.”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안 대단하다니. 검술은커녕 검 잡는 것도 제대로 못 하는 제가 보기엔 대공자님은 엄청 대단한 것 같은데요?”
세드릭이 이렇게 자신감 없는 말을 하기도 하는구나.
순간 기분이 이상해졌다.
하지만 티 내지 않고 오히려 더 밝은 목소리로 칭찬해 주었다.
하지만 세드릭은 또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니까. 너는 기사 가문이 아니니까 검 못 쓰는 건 당연하잖아. 하지만 난 아니야. 나는…… 베드몬가의 자식인데. 겨우 이 정도로 잘한다고 하면 안 돼.”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왜? 왜 안 되는 건데? 잘하는 걸 잘한다고 말해주지 않으면, 여기서 얼마나 더 잘해야 세드릭은 칭찬을 들을 수 있는 거지?’
온갖 의문이 머릿속에 맴도는 그때, 세드릭이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베드몬가의 첫 가주님께서는 태어날 때부터 몸에 검을 품으셨대. 그리고 불과 12살에 최연소로 소드마스터가 되셨고……. 이후로도 우리 가문엔 대단한 기사님들이 많이 계셨어. 아주 많이. 그분들에 비하면 나는 전혀, 전혀 대단하지 않아.”
“……!”
“……솔직히 이 검을 내가 받아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 내가 가져도 되는 거야?”
울음기 섞인 물음이었다.
나에게 하는 건지, 자신에게 하는 건지도 모를.
이윽고 세드릭의 눈가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울지 마세요.”
“……흐윽.”
급히 달래봐도 오히려 더 울먹거리니, 나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일단 저 눈물을 좀 그치게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지만 가지고 온 손수건도 없는데 뭘로 눈물을 닦아주지?
‘아.’
고민 끝에 나는 고개를 숙여 내 소맷자락을 바라보았다.
일단은 이거라도…….
“자아, 뚝.”
나는 내 오른쪽 손목 소매 끝을 당겨, 세드릭의 눈물을 톡톡 닦아주었다.
이래 봬도 내가 칠칠하지 못한 성격은 아니라서 소매가 깨끗하다.
누구처럼 식사할 때 소스를 묻히거나 하지 않는다고.
물론 때도 타지 않았다.
“……왜 소매로 닦아주는 거야. 손수건도 아니고.”
잠시 후, 세드릭이 작은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눈물은 조금 멎었지만 눈가는 여전히 퉁퉁 불어 있었다.
‘어휴, 닦아줘도 난리네.’
나는 속으로 쯧쯧 혀를 찼다.
하지만 세드릭의 표정을 보니 진심으로 투덜대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단지 자신이 운 것이 창피해서, 부러 내 핑계를 대고 있는 것 같았다.
저렇게 못되게 말하면서도 내 소매를 쳐내거나 하지 않는 걸 봐도 그랬다.
어쨌거나 아무 말 없이 나는 손을 거둬들였다.
그러자 세드릭이 나를 가만히 쳐다보았다.
나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내 소매를 쳐다봤다.
세상에! 곱고 예뻤던 하얀 레이스 소매가 축축해져 있었다.
……이 옷 내가 진짜 아끼는 건데!
심지어 한정판으로 나왔던 옷감이라 또 장만할 수도 없는 블라우스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손수건을 챙겨 다니는 건데, 어휴. 그래, 착한 내가 봐준다.’
솔직히 조금, 아니, 많이 아까웠지만 나는 작게 휴 한숨을 쉬고서 세드릭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옷이 망가진 것에 대해서는 그냥 잊기로 했다.
“자책하지 마세요. 그리고…… 다른 사람과 대공자님을 비교하는 것도, 그러지 않으셔도 돼요.”
솔직히 뭐라 위로의 말을 꺼내야 할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우리 가문은 세드릭의 가문과 달리 대대로 이어오는 가업도 없는 평범한 귀족 가문이었으니까.
다만 돈이 좀 많을 뿐이지.
부모님께서도 내게 벌써 장래를 결정하라는 말씀을 하신 적 없었다.
사실 이게 당연한 거 아닌가.
‘실력 상관없이, 어릴 때부터 검을 잡고 수련한다는 것 자체로 엄청나게 대단한 건데…….’
나는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금 상기했다.
사실 그동안의 나는 계속해서 미래의 주역들 사이에서 지내다 보니 조금 감이 떨어진 부분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 세계에서 내 또래의 ‘평범한’ 귀족 아이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같은 것들.
요즈음 내 주변에 있는 아이들이 다들 어릴 때부터 능력치가 좋은 아이들이라서 문제였다.
그들의 모습이 보통인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어버리니까.
‘사실 나만 봐도,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점만 빼면 아주 평범하잖아.’
그러니까 역시 나는 세드릭을 위로해 줘야 했다.
세드릭 가문의 못된 어른들 대신, 잘했다는 말을 해줘야 했다.
내가 말재주가 별로 없어 상투적인 위로밖에 해줄 수 있는 게 없었지만 말이다.
이렇게라도 세드릭이 다시 자신감을 되찾을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았다.
“충분히 대단하잖아요. 대공자님 나이대에 검을 제대로 잡을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다고. 그것도 진검을. 대부분 팔이 후들거려서 놓치고 말걸요.”
나는 부러 호들갑을 떨며 자연스레 세드릭이 들고 있는 검을 넘겨 들었다.
과연 내 말은 틀리지 않았다.
순간 몸이 휘청거릴 정도의 무게였으니까.
이런 검을 아무렇지 않게 들고 다니는 세드릭은 정말로 보통의 범주를 넘어선 아이였던 것이다!
물론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알고 있긴 했다.
원작에서 세드릭네 가문이 대대로 일반인보다 신체가 강화되어 태어난다고 서술되었던 부분이 있었으니까.
물론 그걸 감안한다 해도 세드릭은 정말로 천재였다.
아주 짧은 시간 동안 생각을 마친 나는 능청스럽게 말을 이어나갔다.
“보세요. 저 같은 경우가 보통이에요. 그러니까 세드릭 님은 엄청 천재인 거…….”
그렇지만 나는 채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세드릭이 콧방귀와 함께 트집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네 힘이 보통이라니 무슨. 너는 보통 이하거든. 내가 봤을 때.”
아니, 진짜 칭찬해 줘도 저래. 저 싸가지.
나는 방금까지 세드릭을 조금이나마 가엾게 생각했던 것을 후회했다.
정말이지 얄미웠다.
받은 대로 보답해 주기는커녕 내게 똥을 주다니.
‘에잇, 물론 내가 평균 이하의 체력을 갖고 있긴 한데…… 그래도 너무하네. 빈말로라도 좀 보통 이상이라고 해주면 입에 뿔나나.’
솔직히 말하자면 이대로 그냥 입을 꾹 닫아버리고 싶으나…….
아무튼 원래 하려고 했던 말들은 다 해주기로 했다.
나는 큼큼 목소리를 가다듬고서 딴에 진지하게 말했다.
“제가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지금. 아무튼 대공자님도 미래에 분명 그런 대단한 기사님이 되실 수 있을 거예요. 이대로만 하면요. 이미 충분히 열심히 하고 계시잖아요.”
언뜻 들어봤을 때 헛된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것처럼 들리지만, 나는 내가 하는 말이 모두 미래에 이루어질 사실들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이게 모두 원작을 읽은 덕이다.
‘어디 대단하다 뿐이겠어. 제국 최고의 기사, 이후에도 다시는 나오지 않을 최연소 소드마스터가 되는걸.’
아무튼 그건 10년 정도가 지나야 일어날 일들이다.
지금은 좀 안 믿기는 말로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래도 세드릭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조금이나마 심어준다면 그걸로 된 일이 아닐까.
“……완전 헛소리잖아.”
세드릭은 퉁명스러운 척 중얼거렸지만 나는 그 말이 진심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입꼬리가 정직했다.
안 믿는다는 말 치고 숨길 수도 없을 만큼 올라가 있었으니까.
아차, 그러고 보니 이제 슬슬 돌아가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세드릭에게서 시선을 돌려 자연스럽게 시계를 꺼냈다.
그런데 아뿔싸! 내 생각보다 훨씬 시간이 지나 있었다.
이러다 수업에 늦어버리는 거 아니야?
“아무튼 이제 돌아가는 게 좋겠어요. 대공자님…… 아니,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되다니!”
나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세드릭을 이끌어 비밀 통로에서 나왔다.
우리가 나오자 비밀 통로는 언제 있었냐는 듯이 다시 스르륵 닫혔다.
닫히는 걸 확인하고서야 나는 세드릭과 함께 달음박질로 교실을 향해 뛰어갔다.
수업 시간에 늦는 것도 문제지만, 이곳 유치원이 장소가 장소다 보니 혹시라도 우리 둘이 사라졌다는 오해를 받게 될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도 그럴 게 세드릭은 제국에서 한가락 하는 귀족가의 자제이다.
나 역시…… 귀족 영애이긴 하지?
아무튼 그런 우리가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면 황실 경비병들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수색 작업을 벌일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괜한 걱정을 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다.
“미르, 왜 이제야 와? 엄청 오래 기다렸어. 1분보다 훨씬 더.”
다행히도 아직 수업은 시작하지 않았고, 경비병들 역시 우리를 찾아 나서지는 않은 채였다.
그렇지만 나는 아차 하고 가슴이 철렁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문 앞에서 안절부절못하며 기다리던 제이크를 만난 순간, 내가 했던 약속을 뒤늦게서야 기억해 냈으니까.
‘제이크에게 했던 말을 까먹다니!’
본의 아니게 거짓말을 한 셈이 되어버린 나는 몹시도 미안해졌다.
족히 10여 분은 넘게 안 오니 제이크가 걱정한 것도 당연했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미안해, 제이크. 많이 기다렸지…….”
솔직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제이크는 더 이상 묻지 않고, 딴소리를 하며 나를 교실 안으로 데려갔다.
그러니까 평소에 하던 흔한 이야기 같은 거 말이다.
유치원이 쉬는 날에 만나서 함께 놀자는 말에 나는 자연스레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자고 말했다.
‘안 그래도, 요즘 제이크에게 조금 소홀했던 것 같아. 괜히 미안해지네.’
아무리 이곳에 와서 친구를 많이 사귀기로 결심했다 해도, 내 오랜 소꿉친구는 제이크 하나뿐인데 말이다.
서운하게 해서는 안 될 일이다.
그렇게 제이크에게 온 신경이 쏠린 터라 나는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수업이 시작하고도 한참이나 세드릭이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그리고 며칠이 흘렀다.
세드릭이 내게 진솔한 마음속 고민을 털어놓은 그 날 이후로, 놀랍게도 세드릭과 나는 그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절친이 되어버렸다……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슬프게도.
‘으으, 이쯤 하면 좀 친해져야 하는 거 아닌가?’
그날 이후로도 세드릭과 나의 거리는 그다지 가까워진 것 같지 않았다.
왜일까?
굳이 이유를 따져보자면 일단 니나이나와는 다르게 세드릭은 나와 공통 관심사가 없기 때문이 아닐까 싶었다.
내가 가져온 공기에 잠시 관심을 가지는 듯하긴 했지만, 금방금방 질리는 타입인지 금세 공기를 지루해하는 세드릭이었다.
휴, 게다가 좀 친해졌다 싶으면 도로 얄밉고 쌀쌀맞게 행동하기까지 한단 말이지.
기껏 폴리를 살리는 걸 도와줬고, 자칫 제 실력을 몰라보고 좌절할 것 같은 세드릭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기까지 했는데도.
그 모든 친해지기 위한 노력이 소용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깨진 항아리에 물 붓는 것처럼 느껴지면 힘이 빠지게 마련이다.
게다가 나는 꽤나 끈기가 없는 사람이라서, 이쯤 노력한 것도 평소의 나답지 않은 일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세드릭과 친해지는 건 이쯤에서 포기하는 게 어떤가 생각하던 참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세드릭이 몹시도 울적한 표정으로 등원하지만 않았더라도 말이다.
“……앨리스, 세드릭 대공자님이 왜 저러는지 아세요?”
나는 세드릭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크기로 앨리스에게 질문했다.
앨리스는 잠시 세드릭의 눈치를 보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대답해 주었다.
“……그래서 결국 검을 빼앗겼다는 거군요.”
앨리스의 말을 듣고 나서야, 세드릭이 왜 답지 않게 저러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얼마 전 내게 자랑했던 그 보검을 뺏겼으니 저렇게 기운 없이 축 늘어져 있을 수밖에 없는 것도 당연했다.
아, 세드릭이 검을 빼앗긴 상대는 다름 아닌 세드릭의 둘째 형이라고 했다.
그냥 빼앗긴 것도 아니었다.
무려 ‘정당한’ 검술 대련을 통해 대가로 걸어놓았던 검을 내놓아야 했던 것이다.
때문에 이건 무효라고 응석을 부리거나, 아버지께 이를 수도 없는 일이었다.
‘이거 완전 사기 아냐.’
물론, 그 이야기를 듣고 난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아니 왜, 아무리 세드릭이 뛰어난 기사의 떡잎이라고 해도 말이지.
아직 세드릭은 어린아이인 데다, 체격이 확연히 차이 날 게 분명한 형과 대련을 하면 지는 게 당연하잖아!
듣기로는 세드릭이 먼저 형에게 대련을 신청했다는 모양이지만…….
“저, 대공저 집사님께 들었는데…… 사실 세드릭 님이 속은 거래요.”
소곤대는 앨리스의 말을 들어보니 사실 속사정이 따로 있었다.
세드릭의 둘째 형은 동생인 세드릭이 갖고 있는 검이 탐났다고 한다.
때문에 부러 기사로서 자존심을 건드리는 말을 해서 세드릭으로 하여금 먼저 대련을 신청하게 했다는 게 사건의 전말이었다.
‘못된 형이야, 정말!’
나는 혀를 쯧쯧 찼다.
형이 되어서 동생을 속여먹으면 되나.
그것도 명색이 기사 가문의 자제인데, 검이 탐나서 공정하지 않은 대련을 하다니! 기사도 빵점이었다.
나는 세드릭과 더 이상 친해지지 않기로 했던 생각을 지워버리고, 이번 한 번만 더 세드릭을 도와주기로 했다.
그도 그럴 게 나도 전생에서 여러 번 친언니와 저런 다툼을 한 적이 있었으니까.
얼핏 어린 시절의 사소한 다툼 같아도 그 앙금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 법이다.
……내가 지금껏 전생의 어릴 적 일을 기억하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잖아.
아무튼, 분명 지금쯤 세드릭은 형과의 대련에서 진 탓에 어이없게 검을 뺏겨버린 자신에 대해 자책하고 있을 것이다.
세드릭이 조금만 덜 단순한 아이였다면 애초에 형과의 대련이 말도 안 되는 내기라는 것을 알아차렸겠지만, 애석하게도 원작에서 나온 세드릭의 성격과 내가 겪어본 바에 따르면 그럴 리는 없었다. 전혀.
‘분명 또 자신이 명문 기사 가문의 수치라는 둥 자책하고 있겠지. 안 물어봐도 뻔한 일이야.’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곁눈질로 몰래 세드릭을 살폈다.
아까 우울해 보였던 표정은 보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책상에 엎드린 채였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처음 봤을 때랑 다를 게 없잖아. 조금 잘 어울려 노나 했더니만. 휴…….’
그 모습을 본 나는 한숨을 푹 쉬었다.
까칠한 데다 성질머리 더러운 세드릭이 요 며칠 들어 그래도 유치원에 잘 적응하는 듯해서 내심 마음이 편해졌던 나였다.
그렇지만 또 저 꼴을 보고 있자니 다시금 불편해져 온다.
‘그보다, 어떻게 도와주지?’
세드릭에게서 시선을 돌린 나는 곰곰이 생각에 빠졌다.
지금 당장은 내가 뭘 해줄 수 있는 게 없는 것 같은데…….
으음…… 아! 그거다!
‘아티팩트가 있었지.’
나는 내가 네 살 생일을 맞이했을 때 부모님께 생일선물로 받았던 아티팩트를 떠올렸다.
아 참, 아티팩트와 세드릭의 빼앗긴 검이 무슨 상관이냐고? 그거야…….
‘그 아티팩트는 사용자의 힘을 증폭시켜 주는 기능이 있는 물건이니까.’
아티팩트를 세드릭에게 빌려주고, 그걸 가진 채로 다시금 형에게 대결을 신청하라고 꼬드기는 거다.
물론, 아티팩트를 써서 이기는 건 좀 반칙 같긴 하지만…….
이미 그쪽에서도 저지른 거잖아, 반칙은.
‘그러니까 이건 정정당당하게 뺏긴 물건을 되찾아오는 것일 뿐!’
* * *
그다음 날, 나는 계획했던 대로 가방 속에 몰래 아티팩트를 숨겨서 가지고 왔다.
내 방 보석함 속의 보물 컬렉션 중 하나가 사라졌다는 것은 아마 아무도 모를 테지.
그렇게 유치원에 도착한 난 오늘도 변함없이 우울해 보이는 세드릭을 몰래 지켜보다가, 세드릭이 막 일어서려 할 때쯤 기회를 잡아 작게 소리쳤다.
“저기, 세드릭 공자님!”
“…….”
세드릭은 말이 없었다.
으음, 정확히는 말할 기운도 없어 보였다.
눈이 퉁퉁 밤탱이처럼 부어오른 걸 보니 밤새 이불 뒤집어쓰고 울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다시 질문했다.
“공자님?”
“……왜 불러. 나 혼자 있을 거야. 말 좀 시키지 마.”
세드릭은 눈가를 비비는 척 슬쩍 가리면서 나를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난 지난번처럼 가만히 있지만은 않을 생각이었다.
교실에서 나온 세드릭을 재빨리 뒤쫓아 걸어가자, 세드릭은 멈춰 서서 짜증을 냈다.
“자꾸 따라오지 좀 마! 귀찮아!”
그런데 어째서일까.
다음 순간 세드릭은 아차 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고, 뒤늦게야 세드릭이 제 말을 정정했다.
“……귀, 귀찮은 건 아닌데! 아무튼 따라오지 좀 마. 나 잘 거야.”
그렇게 말하면서 세드릭은 제 앞의 문을 휙 열었다.
문을 열고 나온 방은 다름 아닌 유치원 내부에 있는 낮잠 공간이었다.
작은 침대 6개가 줄지어 늘어서 있는 방.
혹시라도 유치원 안에서 잠이 올 때를 위해 마련한 곳인데, 자주 쓰지는 않아서 조금 낯설었다.
비단으로 만들어진 흰색 커튼이 쨍한 햇살을 가리고 있어 조금 어둡기도 했다.
아무튼 잘 거라는 말이 진심이었는지, 방에 들어오자마자 실내화를 벗고 곧장 제 침대 위로 올라가 버리는 세드릭이었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젓다가 대답했다.
“여기 있으시게요? 하지만 곧 선생님이 수업을 위해 교실에 오실걸요?”
“네가 나 잔다고 좀 전해주면 안 돼?”
“네에?”
그런 건 나한테 미루지 좀 말라고!
속으로 그렇게 외치며,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그랬더니 세드릭이 되지도 않는 불쌍한 척을 하기 시작했다.
“……나 어제 밤새워서 졸린단 말이야. 사실 어제…….”
세드릭은 어젯밤 있었던 일을 내게 말해주려는 듯싶었지만, 무언가 켕기는 게 있는 모양인지 끝까지 말을 이어나가지 않고 입을 다물었다.
어쩐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던 나는 슬그머니 떠보듯 질문했다.
“어제 잠 안 자고 울었어요?”
“……뭐? 그럴 리가! 가…… 아니라, 흠, 큼, 그래. 좀 울긴 했어. 그런데 그게 뭐?”
분명 정곡이 찔린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세드릭은 내 질문을 듣자마자 벌떡 일어나 곧바로 그 말을 부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몇 초 지나지도 않아 정신을 차렸는지 다시 말을 번복했다.
역시 세드릭 하면 자존심이다.
나는 약간 장난치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또다시 넌지시 질문을 던졌다.
“설마, 이불 뒤집어쓰고요?”
“……어떻게 알았……! 너, 대체 뭐야? 어떻게 내가 어제 한 일을 알고 있는 거야?”
그러자 세드릭은 엄청나게 동요하며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응시했다.
꼭, 내가 무슨 괴물이나 도깨비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지.
뭐, 잠깐이지만 초능력자라도 보는 것처럼 우러러보는 시선을 받는 것도 나쁘지 않은걸.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얼굴에 그렇게 쓰여 있는데요? 어제 잠 안 자고 이불 안에서 울었다고요.”
“뭐? 감히 어떤 자식이 써놓은 거지?”
“에이, 진짜 그렇다는 게 아니고요. 그 정도로 티 난다는…….”
내 말을 곧이곧대로 이해하고 분개하는 세드릭에게 두 손을 내저어 보이던 나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아차, 세드릭과 말씨름을 하다 정작 중요한 목적을 잊어버릴 뻔했지 뭐야.
나는 주머니 속 아티팩트가 무사히 있는지 확인하고서, 말을 돌렸다.
“공자님, 근데 왜 울었어요?”
“그건, 그냥…….”
세드릭은 말을 얼버무리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목덜미를 긁적이며 사실을 털어놓았다.
“……지난번에 네게 보여줬던 검.”
“아! 공작님께서 주셨다던 그 검이요.”
“그래, 맞아. 그거.”
세드릭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나와의 대화로 인해 안 좋은 기억이 떠올라 버린 것인지 표정을 굳혔다.
“그걸 뺏겼어. 아니, 뺏긴 건 아닌가. 둘째 형님과 그 검을 걸고 대결했는데, 그만 져버려서…….”
“역시 그러셨군요.”
나는 덩달아 심각한 표정이 되어 고개를 끄덕였고, 그에 세드릭은 허를 찔린 듯 미간을 찌푸리고 되물었다.
“뭐?”
“으음, 죄송해요. 사실 알고 있었어요. 앨리스 영애님께 전해 들었거든요. 대결에 관한 이야기를요.”
“……젠장, 그랬냐.”
내가 사실을 실토하자 세드릭은 어쩐지 머쓱해 보이는 얼굴로 머리를 헝클였다.
어쩐지 뻘쭘해진 분위기에, 나는 괜스레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대답했다.
“네, 어제 공자님이 너무 슬퍼 보여서, 그래서 걱정돼서 물어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내 말의 무언가가 세드릭의 기분을 거스르기라도 한 걸까?
세드릭이 별안간 잘못 들은 것 같다는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뭐라고? 다시 말해봐.”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나는 당황해 다시금 했던 말을 또 했다.
“그, 그러니까…… 공자님이 너무 슬퍼 보여서요.”
“그거 말고, 그거 뒤에.”
“그, 그래서 걱정돼서 앨리스 영애님께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어봤다는 말인데요…….”
제 말에 무슨 문제라도…….
나는 급격히 소심해진 태도로 말끝을 흐렸다.
그런데 어쩐지 세드릭의 표정이 이상했다.
“걱정했어?”
“네? 아, 네.”
“진짜, 진짜로?”
그럼 진짜지 가짜겠냐.
도대체 무슨 반응을 원하는 건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어쩐지 흥분한 것처럼 보이는 세드릭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더니 세드릭이 혼잣말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지난번엔 칭찬해 주더니.”
“……?”
“이번엔 또 걱정해 주고.”
그 말을 들은 나는 생각했다.
‘앗, 드디어 내 진실한 우정을 알아주는 거야? 무려 세드릭이?’
모든 걸 삐딱하게만 받아들이는 세드릭이 진심을 알아주다니, 정말이지 놀라웠다.
어쩐지 나도 세드릭의 미묘한 표정을 따라 마음이 뭉클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별안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세드릭이 코웃음을 내뱉으며 말했다.
“흥, 완전 쓸데없는 짓이야.”
“……네에?”
아니, 이게 갑자기 웬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소리람?
저기, 세드릭 너 내 맘 알아주는 거 아니었니……? 그런 거 아니었어?
그간의 내 노력을 모두 ‘쓸데없는 짓’이라는 단어로 바꿔 버리다니. 너무해!
‘으으, 마음의 상처가…….’
난방 따뜻하게 잘 되어 있는 유치원 내부인데, 어쩐지 마음이 시렸다.
그렇게 상처받은 표정을 지우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으려는데, 세드릭이 이어 말했다.
“나, 네가 걱정해 주거나 칭찬해 주지 않아도 되거든?”
“그게 무슨.”
“난 최고 강하니까.”
세드릭은 당당하게 외쳤다.
그래, 자신이 바로 최고로 강하다고…….
‘알긴 아네.’
난 어쩐지 씁쓸해졌다.
그래, 미래 최강자 기사님이 될 몸이니 나 같은 쩌리는 필요 없겠지.
나는 약간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강하다면서…… 근데 며칠 전 대결에서는 지셨잖아요.”
“으윽, 그건……!”
세드릭은 내 말에 말문이 막힌 듯했다.
그러더니 뒤늦게 변명을 시작했다.
“그땐 수련을 너무 많이 해서 힘이 없었어. 그, 그리고 형님은 나보다 세니까! 하지만 언젠간 반드시 형님보다 강해질 거라고.”
그때가 되면 다시 그 검을 되찾아올 거야.
그렇게 말하는 세드릭의 얼굴이 비장함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그런 세드릭을 가만히 바라보다 이내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런가요……. 그런데 공자님, 혹시 말이에요. 지금 바로 그 검을 되찾아 올 방법이 있다면 어쩌실 거예요?”
“뭐?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세드릭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곧바로 답했다.
나는 고개를 저어 보이며 속삭였다.
“아뇨, 있어요. 제게요.”
“……정말이야?”
세드릭은 여전히 못 믿는 눈치였지만, 지난번 나의 도움으로 폴리를 고치게 된 걸 떠올리기라도 한 듯 이내 수긍하는 표정을 지었다.
“뭔데.”
“짜잔! 이거예요.”
나는 마술사라도 된 것처럼 주머니 속에서 아티팩트를 꺼냈다.
조명이 어두운 방인데도 불구하고, 각종 휘황찬란한 보석으로 겉면이 장식되어 있는 터라 아티팩트는 눈에 띄게 빛났다.
“와아…….”
귀족이지만 상대적으로 기사에 가까운 생활방식을 가진 세드릭은, 이런 예쁜 아티팩트를 눈앞에서 본 게 처음인 모양이었다.
“만져봐도 돼?”
한참이나 넋 놓고 구경하더니, 조심스럽게 손을 뻗으려다 말고 나를 보며 세드릭이 질문했다.
애초에 내가 이걸 왜 꺼내게 된 건지는 다 잊어버린 모양이었다.
“네, 만져도 돼요. 아니, 이걸 공자님께 빌려드릴게요.”
“뭐!”
“잘 모르지만 엄청 비싸고 귀해 보이는데. 이걸 나한테 준다고? 왜?”
“아이참, 주는 게 아니고 빌려주는 거예요. 공자님 대결할 때 쓰시라고요.”
나는 세드릭에게 내 아티팩트가 가진 기능에 관해 설명했다.
아티팩트라는 게 마법 용품인지라, 그냥 보석 달린 돌 정도로 생각하고 막 다뤘다가는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 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아하, 알겠어. 그러니까 여기 있는 구멍에 체인을 끼워서 목걸이인 척 셔츠 안에 걸고 있으면 되는 거지?”
“네, 맞아요.”
“이걸 써서 대결하면, 내가 정말로 형님을 이길 수 있을까?”
“에이, 속고만 사셨어요? 진짜라니까요.”
나는 키득키득 웃으며 대꾸했다.
‘세드릭도 참. 물론, 자꾸 성능을 의심하는 것도 이해 못 할 건 아니지만.’
그래도 한 번만 더 나 믿고 해보라니까!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몹시도 믿음직스러워 보이게 어깨를 쭉 폈다.
“이거 쓰고, 꼭 이기세요. 그리고 다시 검을 되찾아오는 거예요.”
“……알겠어. 해볼게.”
“잘 생각했어요. 분명 잘될 거예요.”
나는 주먹을 꼭 쥐고 파이팅을 외쳤다.
그러자 세드릭의 긴장으로 굳어 있던 얼굴이 조금이나마 미소를 되찾는 게 보였다.
“……고맙다. 매번.”
“뭘요.”
나는 언제나처럼 아무것도 아닌 척 헤헤 웃어 보이기만 했다.
마침내 내 손에서 아티팩트를 가져가는 세드릭의 손은, 살짝 떨리고 있었다.
* * *
유치원이 끝난 오후, 하늘에 느지막이 드리워진 노을.
그 아래 베드몬가의 저택 연무장에도 역시나 붉은 기가 맴돌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뭐냐?”
그리고 그 연무장 한구석 벤치에 느슨하게 누워 있던 열 살 즈음의 소년이 입을 열었다.
소년은 베드몬가의 둘째 아들, 세르반이었다.
세르반은 제게로 다가오는 작은 인영을 눈치채고 짧은 낮잠에서 깨어난 것이었다.
“형님에게 정식으로 대결을 신청합니다. 제 검을 돌려받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 인영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세드릭이었다.
당돌하고 또 예기치 못한 동생의 대결 신청에, 세르반은 잠시 놀라 조용해졌다.
사실 세드릭은 아까부터 내내 세르반의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그렇지만 차마 대결을 또다시 신청할 용기가 나지 않아, 그냥 포기하고 되돌아갈까 하던 참이었다.
아무래도 한 번 뼈저리게 패배한 것의 충격이 아직 가시지 않았던 탓이다.
그렇지만, 막 발걸음을 뒤로하려던 찰나에 떠오른 한 마디.
‘분명 잘될 거예요.’
환하게 웃으며 용기를 북돋아 주던 그 애, 에미르.
꼭 미래를 아는 것처럼 똑똑한 그 앤 도대체 어떻게 매번 그런 말을 하는 걸까.
세드릭은 문득 궁금해졌다.
‘검을 다룰 줄도 모르면서, 나보다 용감한 것 같지.’
그 생각을 한 순간 세드릭은 결심하고야 말았다.
저보다 약한 에미르도 그토록 용감한 정신을 가졌는데.
무려 베드몬가의 후예인 자신이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세드릭은 앞으로 걸어 나가 당당히 제 형에게 대결을 신청했다.
처음엔 잠에서 덜 깨어나 얼떨떨해하던 세르반은, 다행히도 세드릭의 대결 신청을 받아주었다.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세드릭은 세르반에게 한 번 진 전적이 있었고, 그로부터 얼마 시일이 지난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세르반은 또다시 대결한다 해도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세르반의 느긋함은 얼마 지나지 않아 깨져버리고 말았다.
“으윽……!”
날이 무딘 대결용 검으로 시합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드릭의 검에 옆구리를 제대로 찔린 세르반은 신음을 흘렸다.
세르반은 황당함과 의아함이 가득 섞인 얼굴로, 한 손으로는 세드릭의 검을 힘겹게 받아내면서 생각했다.
‘젠장, 도대체 어떻게?’
그도 그럴 게 세드릭은 단 며칠 사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힘 자체가 미묘하게 더 세진 것도 있지만, 진짜로 달라진 것은…….
눈빛. 그리고 태도.
‘미친놈, 눈 돌아갔어.’
검을 부딪치는 긴박한 순간임에도 그만 세르반은 제 동생의 광기 어린 눈동자를 보고 허, 하고 한숨을 쉬고 말았다.
이미 그 눈동자를 본 순간 승패는 정해진 것일지도 몰랐다.
애초에 이건 이길 수 있는 대결이 아니었다.
사실 세르반은 진작 알고 있었다.
자신이 세드릭보다 세 살 차이가 나는 형이기에 당장 육체적인 힘은 조금 더 강하지만, 타고난 재능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세드릭 쪽이 우위라는 것을.
그리고 그 육체적인 힘 역시 자신들이 성년이 되어 더 이상 성장하지 않을 시기가 오게 되면, 그땐 세드릭이 자신을 압도적으로 넘어설 거라는 것 또한.
‘어쩌면, 나중이 되면…… 큰형님도 세드릭이 이길지 모르지.’
가끔 세드릭의 검술 훈련을 볼 때면, 세르반은 남몰래 그리 생각하기도 했다.
혹여나 큰형님의 귀로 들어가기라도 할까 무서워 입 밖으로 꺼내지는 못한 생각이었지만.
그리고 세르반 자신이 지난번 대결에서 세드릭을 이길 수 있었던 이유.
‘말로 슬슬 자극하니 금세 씩씩대며 앞뒤 안 가리고 대결을 신청하는 꼴이 볼만했지.’
차분한 분위기에서 대결했다면 아마 결과는 비등비등했을지도 몰랐다.
시합이란, 무작정 힘만 세다고 이길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그렇지만 극도의 흥분과 치기 어린 호승심으로 가득 차 있었던 세드릭은 평소보다도 빈틈이 많아 허술했다.
결국 그렇게 세르반은 세드릭을 이겼고, 보상으로 제힘으로는 아직 얻지 못한 검을 얻어냈다.
코흘리개 동생에게서 검을 빼앗았다는 것이 세르반의 죄책감을 약간 자극하기는 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아주 약간의 기분일 뿐이었고.
‘그런데 결국 며칠도 안 가서 뺏기게 생겼군그래.’
세르반은 짜증 어린 기분으로 검을 휘둘렀다.
사실 이미 승리는 반쯤 포기한 후였다.
세드릭 녀석, 잘은 몰라도 충동적인 대결 신청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미 어떻게 할지 다 생각해 놓았다는 듯, 자신의 움직임을 따라 끈질기게 따라오는 세드릭의 검 끝.
기어코 세드릭은, 제 형이 검을 쥐고 있는 손을 찔렀다.
끝이 뭉툭한 탓에 자상은 생기지 않았지만, 묵직한 금속에 타격당했는데 검을 계속 쥐고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세르반은 외마디 비명과 함께 검을 떨어뜨렸다.
한참이나 제 손을 잡고 끙끙대던 세르반은, 이내 제게로 다가온 세드릭이 ‘승부가 결정 났습니다, 형님’이라고 말하자 결국 항복의 말을 외쳤다.
“……젠장! 그래, 내가 졌다!”
“검도 당연히 돌려주시겠지요, 형님?”
“아, 알겠다고!”
며칠 전 대결과 정반대가 되어 버린 희비.
마침내 세드릭의 얼굴에 짧은 미소가 떠올랐다.
이겼기에, 그리고 검을 되찾을 수 있기에 웃은 것도 있지만.
‘그 녀석 말대로 됐잖아. 정말로 이겼어. 내가.’
승부에서 이겼다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떠오른 얼굴이 그 무엇도 아닌 에미르 새런이라는 것.
그 때문에 어이가 없어 절로 실소가 나온 게 제일 컸다.
세드릭은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게 속으로 에미르를 향해 질문했다.
‘에미르. 넌…… 도대체가. 행운을 달고 다니기라도 하는 거냐?’
* * *
세드릭에게 내 소중한 아티팩트를 빌려준 그다음 날 아침.
나는 일찍이 유치원에 와서,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홀로 중얼거렸다.
“이겼을까, 세드릭.”
사실 그렇게 말은 해도 분명 이겼으리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세드릭이 하는 짓들은 웬만해서 다 밉상이지만 그래도 세드릭의 검술 실력만큼은 정말로 인정해 줄 만하니까.
아티팩트의 효과도 분명 있겠지만 적당히 꼼수를 쓴 게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힘이 강해지게 설정해 놓았으니, 사실 진짜 승부를 가르는 건 세드릭의 실력일 것이다.
“어? 마차가 오나 보다.”
그리고 때마침 유치원 근처로 달려오는 마차 소리에 나는 생각을 멈추고 벌떡 일어났다.
원래 이쪽 근처가 마차가 자주 다니는 길이긴 하나 어쩐지 이 마차 소리는 세드릭과 앨리스의 것일 것 같았다.
내 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세드릭! 앨리스!”
재빨리 바깥으로 달려 나가 보니 정말이었다.
나는 이쪽을 향해 천천히 달려오는 마차를 향해 연신 손을 흔들며 그 마차 안에 타고 있을 아이들의 이름을 불렀다.
언뜻 투명한 마차 창 너머로 누군가가 손을 마주 흔들어 준 것 같기도 했다.
‘오면 바로 물어봐야지. 이겼냐고!’
사실 안 물어봐도, 세드릭의 표정만 보면 승패를 어림짐작할 수 있을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내 앞에 마차가 멈춰 섰다.
“좋은 아침이에요, 앨리스. 그리고 세드릭!”
나는 시원한 아침 공기를 양껏 들이마시며 밝은 얼굴로 그들에게 인사했다.
그리고 다행히도 앨리스와 세드릭의 얼굴은 둘 다 어둡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아주 기뻐 보였다.
“조, 좋은 아침이에요……. 에미르 영애님!”
앨리스는 아침부터 내가 신나게 인사를 건네서 덩달아 기분이 들떠 오른 것 같고.
세드릭은…….
“어이, 에미르! 나 어제 형님과 대결에서 이겼어!”
대뜸 내 얼굴을 보자마자 하는 말이 맞인사도 아니고 이겼다는 소식 전하기다.
하지만 그 소식이 바로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와! 축하드려요!”
정말 다행이다.
나는 진심으로 기뻐서 제자리에서 방방 뛰며 축하를 전했다.
“축하는 무슨…… 이기는 게 당연한데, 별것도 아닌 걸 가지고. 흠.”
그러자 세드릭이 살짝 쑥스러운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이참, 부끄러워하긴!’
보자마자 자랑하고 싶어서 말하더니, 막상 축하해 주니 저런다.
이럴 때 보면 세드릭도 꽤나 섬세한 성격을 가진 것 같단 말이지.
“세드릭 님, 그리고 앨리스 님. 내려오시지요.”
그리고 우리의 정겨운 아침 인사(?)가 끝나자, 아직 마차에서 내리지 않은 둘을 위해 유치원의 호위병들이 나서 발 받침을 가져다주었다.
참고로 발 받침은 별거 아니다.
여기 있는 다른 물건처럼 황금으로 만들어지지 않고 그냥 평범한 나무 사과 박스다.
그런데…… 어?
“어, 어?”
뭔가 이상하다 싶더라니.
세드릭이 그 발 받침을 밟자마자, 나무로 된 윗부분이 뽀각 소리가 났다.
“조심하십시오!”
다행히 세드릭이 앞으로 고꾸라지기 전 옆에 서 있던 호위병이 득달같이 달려와 받쳐 주었다.
아무래도 지난번 황녀님께 사고가 날 뻔한 일 이후로 바짝 긴장하고 있었던 듯하다.
“아, 다행…….”
호위병의 품에 받쳐져 놀란 듯한 세드릭의 얼굴을 보며 나도 모르게 다행이라고 중얼거렸는데, 채 말이 끝나기도 전 이상한 소리가 또 났다.
쨍-!
날카로운, 무언가가 바닥에 떨어져 깨진 듯한 소리.
‘으응? 이 소리는 설마…….’
그런데 어쩐지, 그 소리를 듣자마자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니, 설마, 아니겠지.
“헉…….”
호위병이 당황해 제 발 옆에 떨어진 ‘그 문제의 물건’을 확인하기 위해 한 발짝 물러섰다.
그러자 내 눈에도 떨어져 깨진 그 물건이 보였다.
‘꿈인가.’
나는 잠시 멍하니 서 있다가 도저히 이 상황이 믿기지 않아 두 손으로 뺨을 만지작거렸다.
두 동강 나 있는 건 그 무엇도 아닌…… 내 아티팩트였다.
“내…… 거……?”
나도 모르게 뜨악한 얼굴을 하고서 멍하니 중얼거린 것 같다.
그러자 잠시 얼음처럼 굳어 있었던 모두가 정신을 차렸다.
나만 빼고.
“어, 어떡해! 어떡해요……? 에미르 님 물건이……!”
제일 먼저 소리친 건 다름 아닌 앨리스였다.
앨리스는 제가 깨뜨린 것도 아니면서 벌써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했다.
“제, 제가 주워드릴게요……!”
그러고는 저렇게 말하면서 망설임 없이 마차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한때는 내 아티팩트였을 무언가의 잔해들.
날카로운 도기 재질이기에 맨손으로 함부로 줍다가는 상처를 입을 게 분명했다.
때문에 나는 그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입을 열었다.
“안 돼요, 하지 말아요! 다쳐요, 앨리스!”
“다치십니다, 앨리스 님!”
다행히도 나보다 가까이에 있었던 다른 호위병이 앨리스를 잡아주어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런 앨리스의 행동 덕분에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리고 현실로 돌아온 감각을 느꼈다.
나는 앨리스에게 천천히 다가가 중얼거렸다.
“……나, 난. 괜찮아요. 정말이에요. 앨리스, 도와주려 해서 고마워요.”
당황해서일까.
어쩐지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가 나오고 있었지만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내 아티팩트가 깨질 거라는 상상은 하지도 못했기에 갑작스레 닥친 상황에 잠시 굳었던 것뿐이었으니까.
물론 엄청나게 아깝고 허탈하고 약간의 분노가 차오르긴 했지만 그 정도의 감정은 괜찮다는 말로 대신할 수 있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거 엄청 비싸 보이는걸요……. 분명 에미르 영애님께서 아끼던 물건일 텐데…….”
앨리스는 내 옆에 붙어 선 채로 손끝을 잘게 떨며 중얼거렸다.
물론 맞는 말이었다.
부모님께 생일선물로 받은 이 세상 단 하나뿐인 아티팩트니까.
‘그렇지만, 물건 좀 깨졌다는 이유로 세드릭에게 버럭 화낼 수는 없잖아.’
더군다나 세드릭이 내게 악감정을 품고서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실수였는걸.
나는 시선을 돌려, 마침 기사의 품에서 내려온 세드릭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르게 낯빛이 창백했고 시선은 차마 나를 마주 보지 못한 채였다.
그리고 내게 뭐라 말을 건네고 싶은 듯 입이 작게 움직이고 있었다.
“미, 미…….”
나는 그런 세드릭에게로 천천히 다가갔다.
그러자 세드릭이 화들짝 놀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아무래도 당황한 것 같다.
나는 괜찮다는 뜻으로 손을 저어 보이며 말했다.
“공자님, 저 괜찮아요.”
그랬더니 갑자기 세드릭이 눈을 질끈 감고 외쳤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 실수였어. 일부러 떨어뜨린 건 아니야. 주머니에 넣어놨는데 그만…….”
군말 없이 세드릭의 변명을 들어주던 나는 이윽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실수였단 거. 일단 교실로 들어가요.”
* * *
잠시 후 우리는 모두 교실로 들어왔다.
그러나 아무도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아서 긴장감 어린 침묵만이 가득할 뿐이었다.
그러던 와중, 뒤늦게 호위병 중 한 명이 들어와 내게 무언가를 건넸다.
귀한 물건이기에 그대로 버릴 수는 없어서, 조각을 모두 주워 모아 상자에 넣어놓은 것이었다.
나는 고개를 숙여 상자 안을 들여다보았다.
“…….”
아끼면 똥 된다더니.
세드릭에게 빌려주기 전에 한 번이라도 써볼 걸 그랬다.
그런 약간의 후회를 하다 보니, 표정이 나도 모르게 굳어졌다.
그러자 내 주변에서 눈치 보며 엉거주춤 서 있던 세드릭이 흠칫하는 게 느껴졌다.
‘아.’
나는 재빨리 표정을 폈다.
세드릭에게 눈치를 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런데 고개를 들어보니 세드릭이 웬일로 쩔쩔매고 있었다.
말 그대로, 식은땀을 흘리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 내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는 거다.
“……세드릭 님?”
나는 조용히 세드릭을 불렀다.
사과도 했으니 이쯤 하고 상황 정리를 끝내자는 말을 하려던 차였다.
잘 생각해 보자.
애초에 나는 가지고 있었어도 안 썼을 물건이었다.
세상엔 두 가지 부류의 사람이 있는데, 아끼는 물건을 몸에 계속 지니고 다니며 사용하는 이들과 아끼는 물건은 손도 대지 않고 귀중하게 모셔만 두는 이들이다.
그리고 나는 명백히 후자였다.
‘세드릭이 유용하게 잘 썼으면 그걸로 된 거지, 뭐.’
나는 다시금 긍정적인 사고방식을 되찾았다.
“너무 미안해하지 않아도 돼요. 어차피 저는 잘 안 쓰는 거라.”
“……그, 그렇지만! 아끼는 거라고 했잖아. 생일선물로 받은 거라며.”
어쩐지 세드릭이 나보다 더 아까워하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내가 미처 대답을 하기도 전에, 세드릭이 말을 이었다.
“보상해 줄게.”
“네? 보상이요?”
“그래, 내가 아티팩트 비슷한 거 구해 올게. 나 용돈 많아.”
세드릭은 어쩐지 제 나이답지 않게 책임감 어린 목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나는 잠시 당황했고 이내 거절했다.
“으음, 감사하지만 괜찮은데요.”
“……뭐? 지금 내 호의를 무시하는 거야?”
세드릭은 내가 거절할 줄 몰랐다는 듯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는 이미 가지고 있는 아티팩트가 여러 개 있으니까요. 그리고 저런 종류, 그러니까 힘을 다루는 마법이 걸린 아티팩트는 워낙 희귀 소장품이라 새로 만들어지는 재고는 없을 거예요. 그리고 무엇보다…….”
‘비싸다고요.’
마지막 말을 속으로 삼키며 나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코 묻은 용돈이 많으면 얼마나 많겠어.
별로 내키지 않았다.
내 연이은 거절에 세드릭의 동공이 흔들렸다.
그러더니 나를 또다시 회유하려는 듯 붙잡았다.
“……그, 그럼! 내가 소원 들어줄게!”
“네?”
내가 방금 뭔 소릴 들은 거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드릭 역시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인 듯, 제가 한 말에 스스로 당황한 기색이 얼굴에 선연했다.
그러나 이미 한 말을 번복하지는 않았다.
“당장 필요한 게 없어도 나중엔 생길 거 아냐! 그때 나한테 소원 말하라고. 아, 알겠어? 거절은 안 받는다.”
세드릭의 얼굴이 터질 듯 붉었다.
아무래도 제 자존심 때문이겠지.
여기서 내가 또 거절하면 그땐 정말로 삐져버릴지도 몰랐다.
뭐, 이 정도 보상이면 나쁜 것도 아니니 그냥 받아 두는 걸로 할까.
“……알겠어요. 공자님이 이렇게까지 하시는데 안 받을 수야 없죠.”
“그, 그래! 언제든지 소원 있으면 말해. 꼭이다.”
“네에.”
내가 수락하고서야 세드릭의 얼굴은 원래대로 돌아왔다.
옆에서 우리 둘의 대화를 지켜보고 있던 앨리스가, 원만한 해결에 잘 되었다는 듯 안도감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잘 된 건가.’
아티팩트 조각이 담긴 상자를 가방에 넣어놓고 차분히 앉아 생각해 보았다.
소원권, 사실 몇 년만 지나도 배 째라 하고 안 지키면 그만인 구두 약속이긴 하다.
그렇지만 잘하면 유용하게 쓸 수 있을 것 같았다.
세드릭은 의외로 자신이 한 번 한 약속은 잊지 않고 꼭 지키는 성격이기 때문이다.
원작에서도 나왔다시피 말이다.
‘나중에 세드릭이 소드마스터가 되면, 귀한 검이나 하나 달라고 할까.’
나는 별 의미 없는 생각을 하며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하여간 세드릭은, 항상 예상대로인 다혈질 성격 같으면서도 은근히 허를 찌르는 구석이 있단 말이지.
* * *
이후의 시간은 평소대로였다.
다만 한 가지 달라진 점은, 세드릭이 다른 사람들에게 대하는 것과는 다르게 내 앞에서만 순한 양 같은 모습을 보인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빚진 것이 있어서겠지, 내게?
물론 좋은 말로 순한 양이지, 말하는 투는 여전히 세드릭 그대로였다.
‘그래, 역시 세드릭 하면 왕 싸가지지.’
그래도 예전처럼 귀찮게 하거나 신경을 건드리는 장난질은 하지 않아 오래간만에 평화로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어느덧 점심시간이 되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이 유치원의 호화로운 식사에도 적응해 버린 게 틀림없었다.
처음엔 접시 하나하나에 감탄사 한 마디씩 터트리고는 했는데, 이젠 약간 심드렁해졌다 해야 하나.
후식으로 나온 푸딩을 스푼으로 떠먹던 나는, 문득 폴리를 떠올렸다.
신수로 깨어난 첫날 유치원에 모습을 보인 폴리는 이 유치원의 초인기 스타였다.
하지만 그날 다음부터는 따로 저택에 신수 전문 관리인을 두었다는 이유로 폴리를 유치원에 데려오지 않았고, 말은 안 했지만 모두가 아쉬워했다.
‘흐음, 소원권으로 폴리 얼굴이나 보게 해달라고 할까.’
하지만 곧 그 생각을 접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 소원권이 어떤 소원권인데!
무려 이 제국의 미래 최연소 소드마스터가 내건 소원권 아니겠어? 그렇게 허투루 쓰기엔 아까웠다.
“……리, 보고 싶다.”
식사 도중 너무 깊게 딴생각에 빠져버린 탓이었을까,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 마침 반대편에 앉아 있던 니콜라스 황자님께서 나를 불렀다.
“에미르 영애, 거기 있는 겨자 소스 병을 건네줘.”
“아, 네!”
나는 정신을 차리고 소스 병을 집어 황자님께 건넸다.
그런데 아뿔싸, 이 테이블은 꽤나 지름이 넓은 원형이었고 그에 비해 내 팔은 너무 짧았다.
팔을 쭉쭉 늘리려다 보니 나도 모르게 으으, 하고 앓는 소리가 났다.
“여, 여기요.”
그래도 다행히 우리 둘이 손을 쭉 마주 뻗으니 얼추 닿을 위치였다.
병이 내 손에서 황자님 손으로 무사히 이동했다.
그런데…….
툭, 우당탕!
겨자 병에만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탓이 분명하다.
그만 황자님의 팔꿈치가 식탁 끝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던 주스 잔을 건드리고 말았다!
다행히 깨지는 소리는 나지 않았는데, 문제는 그 주스 잔이 앉아 있던 앨리스의 치맛자락을 흠뻑 적셔 버렸다는 것이다.
나는 깜짝 놀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세상에! 앨리스, 괜찮아요?”
“주스가 흘렀잖아?”
앨리스 옆에 앉아 있던 세드릭도 당황하긴 매한가지였다.
하필이면 색이 짙은 포도 주스였고, 앨리스의 옷은 연한 베이지 빛깔이었기에 그 대비가 더욱 확연히 드러났다.
앨리스는 너무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굳어 있는 게 보였다.
“……실수했어. 사과하지, 앨리스 로즈 영애.”
주스를 엎어 버린 범인인 니콜라스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앨리스에게 사과했다.
때마침 바로 바깥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이 소란을 눈치채고 들어왔다.
한동안 점심 식사 시간에 아무런 일도 없어서, 당연히 괜찮을 줄 알고 기미가 끝나면 시녀를 바깥으로 물리고 식사했던 게 문제였던 모양이다.
하아.
‘안전 불감증……. 앞으로는 주의해야겠다. 정신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꼭 이런다니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역시 어느 세계를 가나 유치원엔 자잘한 사건 사고가 많이 일어난다는 점은 비슷한 것 같았다.
다행히 시녀들이 곧바로 마른 수건을 가져와 앨리스의 치맛자락과 바닥에 흩어진 주스를 닦아냈지만 그래도 문제는 남아 있었다.
“여분 드레스가 없으시다니……!”
잠시 후, 시녀의 당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고 보니 앨리스가 따로 유치원에 여벌 옷을 가져다 놓지 않았다는 모양이다.
그녀의 말을 듣자마자 나는 재빠르게 나설 생각을 했다.
‘내가 빌려줘야겠다.’
* * *
이 유치원에서 앨리스를 제외한 또래 여자아이는 나와 황녀님뿐이다.
그리고 황녀님은 황족의 핏줄을 이어받았기 때문인지 또래보다 훨씬 키가 컸다.
반면 앨리스는 황녀님과 나보다 한 살 더 많으면서도 외형상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은 작고 마른 체형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앨리스가 내 옷을 입으면 아마도 적당할 것이었다.
약간 헐렁하긴 하겠지만.
몇 초 동안 빠르게 생각을 마친 나는, 아직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앨리스와 시녀를 향해 말했다.
“앨리스 영애, 괜찮다면 제가 옷을 빌려드려도 될까요?”
그러자 앨리스가 나를 바라보았다.
제가 주스를 쏟은 것도 아니면서, 소리 없이 울먹이고 있었는지 눈가가 빨갰다.
앨리스는 잠시 주저하다가 이내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 하지만 에미르 영애님의 귀한 드레스를 제가 입어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요……. 영애님의 드레스를 제가 더럽히기라도 하면 어, 어떡해요?”
“괜찮아요, 앨리스 영애. 더럽혀지면 빨면 되니까요. 그리고 귀한 드레스라뇨. 드레스가 아무리 귀해봤자 앨리스보다 귀하겠어요?”
나는 앨리스를 어르며 일단 드레스가 있는 물건 보관함 방으로 가자고 말했다.
다행히도 옆에 서 있던 눈치 빠른 시녀 언니들이 나와 함께 앨리스를 이끌어주었다.
앨리스는 당황하며 ‘어, 어……’ 하다가 이내 내 손길에 같이 교실을 벗어났다.
“앨리스, 이 세 벌 중에 뭐가 좋아요? 마음에 드는 걸로 골라요.”
그리고 이내 물건 보관함을 연 나는 그 안에 마련된 작은 간이 옷장에 걸려 있던 드레스를 꺼냈다.
이 드레스들은 내가 따로 골라놓은 건 아니었다.
아마 유모가 알아서 짐을 챙길 때 넣어준 것들이겠지.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내 취향과는 약간 거리가 멀긴 했다.
으음, 그러니까 부푼 퍼프 소매에, 레이스와 보석이 잔뜩 달려 있고 금방이라도 천에서 반짝반짝하고 별빛이 나타날 것만 같은 화려하고 귀여운 스타일이었다.
‘아이참, 유모도. 이런 거 싫다니까 그러네.’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이내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래도 잘된 일이었다.
유모의 취향대로(?) 성심성의껏 골라놓은 옷이 전부 앨리스에게 잘 어울릴 만한 것들이었으니까.
“저, 저는…… 어, 음, 잘 모르겠어요. 그냥 에미르 영애님이 골라주시는 걸로 할게요.”
내 물음에 앨리스는 어물거리다 이내 결정권을 내게로 넘겼다.
“앗, 정말요? 그럼…….”
앨리스의 대답을 듣고 옷을 골라줄 생각에 기쁜 것도 잠시, 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대체 무얼 빌려주는 게 좋을까.
앨리스에겐 이것도, 저것도, 저쪽 것도 너무 잘 어울리는데?
꿀을 발라놓은 것 같은 금발에 은색 눈동자.
그런 앨리스에게는 안 어울리려야 안 어울릴 옷이 없었다.
그냥 민무늬 흰색 옷만 입어도 얼굴이 빛을 발할 텐데, 옷이란 게 다 무슨 소용일는지.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거나 골라주기엔 더더욱 내 마음에 차질 않았다.
“으으…… 뭘 고르지…….”
“에, 에미르 영애님. 저는 정말로 아무거나 주셔도 괜찮은걸요…….”
내가 1분 넘게 끙 앓는 소리를 내며 고민에 빠져 있자, 옆에서 앨리스가 눈치를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그제야 아차 하고 정신을 차렸다.
드레스를 골라준답시고 앨리스를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할 뻔했다.
주스에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감기에 걸리기 쉬우니 어서 갈아입어야 할 텐데!
마침내 나는 결정을 마쳤다.
“자, 앨리스 영애님. 이거 입으세요!”
흰색 캉캉 드레스에, 포인트로 달려 있는 붉은색 리본, 그리고 동그란 프릴 칼라가 너무 귀여운 드레스였다.
분명 앨리스에게 찰떡처럼 잘 어울릴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 옷을 갈아입은 앨리스가 교실로 돌아왔다.
“저, 에미르 영애님, 이거…… 괜찮아요?”
앨리스는 드레스가 자신에게 잘 어울리는 건지 모르겠다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잘 어울리다 못해 빛이 나는 것 같았다.
역시 이 옷은 나보다는 앨리스에게 더 잘 어울린다.
그래, 역시 내 선택은 틀리지 않았어!
나는 앨리스를 향해 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워 주었다.
최고! 최고!
“너무 잘 어울려요, 앨리스.”
“아……! 감사해요. 에미르 영애님. 그, 옷을 빌려주신 것도 미처 감사하단 말을 못 했는데. 정말 고마워요.”
앨리스는 내 칭찬에 표정이 확 밝아졌다.
그러더니 이내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아차 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가 했는데, 내게 감사 인사를 하는 걸 잊어버렸다는 모양이다.
수줍어하고 있지만 그보다도 기뻐하는 모습이 더 커 보이는 앨리스를 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앨리스에게 선물을 해주고 싶어. 그렇지만 아무 이유 없이 선물을 주기는 좀 그러니까, 으음. 역시 생일선물이라는 핑계가 제일 적당하려나.’
그렇지만 문제가 있었다.
작중에서 앨리스의 생일은 눈 내리는 겨울이라고 했던 것 같다는 거다.
지금이 막 봄이 오려는 계절이니까, 앨리스의 생일까지는 앞으로 1년은 더 기다려야 하는 거겠지?
‘역시 본인에게 직접 물어보는 편이 나을 거야.’
결국 나는 넌지시 앨리스를 붙잡고 질문을 했다.
“저기, 앨리스. 좀 뜬금없긴 한데 궁금한 게 있어서요. 생일이 언제인지 알고 싶어요.”
평소와 다른 제 옷차림이 조금은 낯선 것처럼, 치맛자락을 조심스럽게 만져 보던 앨리스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제, 생일이요……?”
쉽사리 생각이 나지 않는 듯 잠시 머뭇거리던 앨리스는 이내 조그맣게 대답했다.
“12월이었던 것 같아요.”
“눈 내리는 겨울이네요!”
“……네, 맞아요.”
앨리스는 수줍게 미소 지었다.
그러더니 내게 되물었다.
“에미르 영애님은 생일이 언제세요?”
“저는 8월이에요. 헤헤.”
전생에서도 더운 여름이 생일이었던 나는, 환생해서도 생일이 여름이었다.
신기한 우연이었다.
하긴, 내가 더운 걸 좀 좋아하긴 하지.
아무튼, 이제 곧 오후 수업이 시작할 시간이었다.
점심시간에 있었던 겨자 소스 소동으로 유치원은 평소보다 들썩거리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의 자리로 가기 전 앨리스가 혼잣말로 자그마하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8월, 꼭 기억해 둘게요……. 에미르 영애님 생일.”
* * *
유치원이 끝난 시간, 언제나처럼 세드릭의 마차를 빌려 같이 타고 오는 길.
앨리스는 창밖에서 쏟아지는 햇살에 못 이겨 잠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있었다.
“커어어…… 코오…….”
마침 반대편 자리에서는 진짜로 잠들어 버린 자의 코골이 소리가 들려오는 중이었다.
앨리스는 잠시 실눈을 뜨고 반대편에 앉아 있는 세드릭의 모습을 확인했다.
고된 검술 연습에도 피곤해하지 않는 세드릭이건만, 신기하게도 유치원만 다녀오면 뭐가 그리 힘든지 매번 코까지 골아대며 낮잠을 자곤 한다.
그것도 심지어 마차에서.
뭐, 세드릭의 안부를 확인하려고 눈을 뜬 건 아니었으니 상관없었다.
앨리스는 이제 곧 자신이 마차에서 내릴 때가 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마차 틈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은은한 석류꽃 향내.
이 향은, 로즈 공작저 근처의 과수원에서 풍겨오는 것이었으니까.
“앨리스 영애님, 내리십시오.”
과연 앨리스의 짐작은 틀리지 않았다.
눈을 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마부의 목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앨리스는 마부 이외에 아무도 자신을 마중 나와 주지 않은 쓸쓸한 마차 앞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세드릭을 태운 마차가 떠나자, 이젠 정말로 혼자였다.
“…….”
공작가의 문지기는 앨리스에게 그 흔한 ‘오셨습니까’ 같은 인사조차 해주지 않았다.
그저 무뚝뚝하고 기계 같은 움직임으로 문을 열어줄 뿐이었다.
그리고 앨리스 역시 그걸 이상하다고 여겨본 적은 없었다.
다만 오늘따라 유독 혼자 발을 내딛는 저택 안이 쓸쓸하다고 느낄 뿐이었다.
저택 안은 황량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작가라는 그 위신에 맞게 분주한 고용인들의 움직임이 느껴졌고, 안을 꾸민 장식품들도 황량함과는 거리가 멀게 화려했다.
그 가운데서, 앨리스만이 오직 동떨어져 있는 것 같을 뿐이었다.
하지만 평소와는 약간 다른 점이 있었다.
앨리스는 저택 내부를 걸어가면서, 주변을 한 번 의식하고서 또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한 번 의식하고는 했다.
평소에 입던 옷과 달라서일까.
에미르 영애가 빌려준 멋진 드레스를 입으니, 정말로 자신이 이 공작가의 진짜 공녀가 된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된 까닭이었다.
앨리스의 방은 본채가 아닌 별채 가장 구석에 마련되어 있었다.
심지어 좁디좁은 골방이었다.
그 먼 곳까지 걸어가는 와중에도 여러 고용인을 마주쳤지만, 어느 하나 앨리스를 신경 써 주는 이가 없었다.
마침내 제 방에 도착한 앨리스는 침대에 누웠다.
‘에미르 영애님.’
침대에 누워 낡은 천장과 그 옆 벽에 달려 있는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조명등을 바라보던 앨리스는 이내 눈을 감고 한 소녀를 생각했다.
다름 아닌, 에미르의 얼굴을.
‘참 좋은 분이신 것 같아. 이런 보잘것없는 나에게도 잘해주시고.’
고마웠다.
어쩐지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슬픈 것도 아닌데 어째서일까.
앨리스는 저도 모르게 소매로 눈물을 닦아내려다, 빌린 옷이라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그만두었다.
사실 전에도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었다.
바로, 유치원에 입학했던 첫날이었다.
에미르가 선물이라며 봉투에 잔뜩 담아 건네준 캐러멜.
혹시나 녹을까, 망가지기라도 할까 무서워 제대로 손도 대지 않고 가방에 넣어놓았었다.
‘첫 선물이야. 내가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았어.’
앨리스는 그때 그렇게 생각했었다.
나도 누군가에게 선물이란 걸 받아보는구나.
……놀라워.
물론 에미르 영애는 유치원의 모든 사람에게 캐러멜을 준 것이었으니, 선물 자체에 엄청난 의미는 없겠지만 그래도 너무 기뻤다.
왜냐하면 앨리스는 항상 주변 사람들의 선택에서 제외되는 아이였으니까.
그리고 에미르 영애는 제게 선물을 준 것뿐만 아니라 무려 손수건을 주기까지 했다.
유치원에서는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으니까 울면 안 되는 거였는데, 그만 너무 감격스러워서 울어버렸던 거였다.
그런데 에미르는 그런 앨리스에게 화내거나 그만 뚝 그치라며 타박하지 않고 다정하게 달래며 손수건을 건네주기까지 했다.
‘천사님 같아…….’
저를 향해 환히 미소 지은 얼굴, 윤기가 흘러넘치는 아름다운 회색 머리칼.
그리고 동그랗고 반짝거리는 녹색의 에메랄드 눈동자.
에미르는 앨리스에게 꼭 작은 천사나 요정처럼 보였다.
이렇게나 친절하고 착하고 사랑스러운 이와 같은 유치원에 다닐 수 있다는 게 너무도 기뻤다.
어쩌면 앨리스는 그때부터 이미 마음속으로 생각했는지도 몰랐다.
에미르 영애와 친한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 * *
앨리스는 난생처음 받은 선물을 허투루 먹어버릴 수 없었다.
입에만 넣으면 사르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때문에 주변 아이들이 분주히 캐러멜을 먹을 때에도, 앨리스는 봉투에 손도 대지 않았다.
물론 집으로 가는 길엔 살짝 방심한 탓에 하마터면 마차에서 세드릭에게 빼앗길 뻔했지만, 다행히도 잘 사수했다.
그리고 제 방에 도착한 앨리스는 다른 이들에게 들키지 않게 낡은 침대 밑에 숨겨둔 보물 상자에 그 봉투를 넣어놓았다.
물론, 딱 한 개만 맛보고.
“맛있다…….”
유치원에서 점심 식사로 나온 진수성찬만큼이나 황홀하게 맛있었다.
앨리스는 저도 모르게 한 번 더 집어먹으려 하는 손을 멈췄다.
선물이니까 아껴 먹어야지, 라고 애써 되뇌면서.
그리고 지금에 와서, 에미르에게 캐러멜에 이어 드레스까지 선물 받은 앨리스는 마치 꿈속을 거닐고 있는 것처럼 기분이 들떠 있었다.
아, 정확히 말하자면 선물이 아니라 잠시 빌린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화사한 프릴이 잔뜩 달려 있는 흰색 드레스.
이런 예쁘고 비싼 고급 옷은 원래대로라면 절대로 자신이 입을 수 없는 것이었다.
부드러운 비단결이 아닌 거적때기 같은 헌 드레스만이 제게 주어진 전부였으니까.
앨리스는 침대에 앉아 두 무릎을 끌어안은 채 가만히 제 치맛자락을 쓸어 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이 가문의 오점이니까 당연한 거야. 하지만…… 부럽다. 클레어 언니는 매일같이 이런 예쁜 옷을 입고 다닐 텐데.’
로즈 공작가엔 두 딸이 있었다.
첫째인 클레어 로즈와, 둘째인 앨리스 로즈.
하지만 둘째인 앨리스만이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로즈 공작가의 오점’이라고 불리면서 말이다.
단지, 로즈 가의 사람들과 다른 용모를 가지고 있고 가문에 대대로 내려오는 능력인 요정 소환사의 자질이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작 부인과 공작은 이런 못난 것이 제 딸일 리가 없다며 앨리스를 방치했다.
때문에 앨리스는 공녀라는 신분을 지녔지만 전혀 그런 대우를 받으며 살아가지 못했다.
기본적인 예법 교육도 받지 못하고, 가족들과 한 식탁에서 식사도 하지 못했다.
매번 방에서 혼자 해야만 했던 식사.
5살 때까지는 그나마 앨리스를 가엾게 여기던 유모 겸 전담 하녀가 계속해서 챙겨주어 기댈 이가 있었지만, 그마저도 그런 하녀를 고깝게 여긴 공작이 하녀를 내쫓아 버렸다.
때문에 약 1년 전부터 앨리스는 식사도 늘 제가 직접 주방에 가서 챙겨야 했고, 의복이나 필요한 물건이 생겨도 쉽사리 요구하지 못해 늘 힘든 나날을 보냈었다.
베드몬 공작가와의 태중 혼약 역시, 이미 가문 간에 정해진 약속을 마음대로 파기하지 못해 성사된 것일 뿐이었다.
하지만 앨리스에겐 그 혼약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세드릭과의 혼약으로 인해 함께 유치원에 다니게 되었으니까.
‘그리고 그곳에서 에미르 영애님을 만날 수 있었어. 정말로 다행이야.’
사실 처음 유치원에 가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 앨리스는 기뻐하지 못했었다.
‘그곳에 가면 괜찮을까? 저택 안 사람들처럼, 나를 싫어하는 사람들뿐이면 어쩌지…….’
두려웠다.
낯선 이들 역시, 공작가의 사람들처럼 자신을 미워할까 봐.
그래서 유치원에 도착해서도 다른 아이들에게 쉽사리 말을 걸지 못하고 혼자서 쥐 죽은 듯이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다.
그랬는데.
‘저기, 앨리스?’
‘……네? 네? 저, 저…… 말이에요?’
누군가 그런 앨리스에게 먼저 말을 걸어주었다.
앨리스는 그때 크게 당황했었다.
아무도 자신을 찾지 않을 줄 알았는데.
다른 이들에게 선물을 주던 영애가, 자신에게까지 말을 걸고 있었다.
하지만 앨리스는 감히 자신이 선물을 받을 거라 상상하지 못했다.
‘맞아요. 저 앨리스 영애에게도 선물을 준비했어요. 보세요. 영애의 눈동자 색을 닮은 예쁜 은색 리본이에요.’
‘예뻐요…….’
하지만 그 예상은 깨졌다.
그리고 아마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앨리스가 매일 아침 일어나는 일이 즐거워졌던 것은.
또래 아이들과 놀게 된 것도 처음이었다.
매일 몰래 안 쓰는 정원 구석에 가서 흙장난을 하거나, 가끔 정원 구석으로 길을 잃어 들어온 다람쥐 같은 소동물과 대화 아닌 대화를 하면서 놀았던 게 전부였다.
에미르와 함께하면 늘 신나는 일들이 가득했다.
돌들을 가지고 혼자 놀면 지루하고 뻔하고 재미없었지만, 함께 놀면 ‘공기놀이’라는 이름도 붙여지게 되고 훨씬 의욕이 생겼다.
그리고 에미르 덕분에 다른 아이들과도 조금이나마 대화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정말로, 에미르 영애님이 먼저 다가와 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난 못했을 거야.’
기억을 되짚어보던 앨리스는 그만 벅차오르고 울컥하는 기분에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도, 에미르 영애님께 도움이 되어 드리고 싶어. 아니면 선물이라도 드리고 싶은데. 뭐라도 할 수 있는 게 없을까…….’
앨리스는 고민에 빠졌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에겐 가진 것이 없었다.
이 작은 방에 있는 거라고는 삐거덕거리는 침대와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 같은 낡은 나무 행거, 거기에 걸려 있는 두 벌의 옷.
칠이 다 벗겨진 테이블에는 온통 선물로 주기엔 쓸모없는 잡동사니들만이 굴러다니고 있을 뿐이었다.
‘진짜 없나.’
앨리스는 울상을 지었다.
아무것도 주지 못한다는 게 이렇게 슬픈 일이었구나.
예전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게 슬픈 일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사실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에미르 영애님에겐 아낌없이 다 베풀어주고 싶은데…… 그 베풀 것도 없다는 게 슬퍼.’
앨리스는 그만 우울해졌다.
“일단…… 옷을 갈아입어야겠지. 혹시라도 더러워지면 안 되니까.”
앨리스는 에미르가 빌려주었던 고운 드레스를 벗고 행거에 걸려 있던 볼품없는 자신의 드레스로 갈아입었다.
이 방엔 먼지가 많아서 잘못하면 흰색 드레스가 회색으로 변할 수도 있었으니까.
실제로 자신이 가진 드레스들도 원래는 연한 아이보리 빛깔이었는데, 지금은 잿빛이나 연갈색 비슷하게 때가 타 있었다.
‘잘 숨겨놔야 해. 안 그러면…… 자칫해서 운이 나빠 언니가 내 방에 들어와 보기라도 한다면 이 예쁜 옷은 뭐냐며 가져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언니인 클레어 역시 다른 공작가의 사람들처럼 앨리스를 좋아하지 않았다.
더군다나 클레어는 태어나면서부터 공작가의 첫째라는 이유로 많은 사랑을 받았고, 거기에 자기만 생각하는 오만방자하고 욕심 많은 성격이 더해져 좀처럼 앨리스에게 아량을 베풀 일이 없었다.
안 그래도 자신에 비해 가진 것 없는 앨리스건만, 조금이라도 괜찮아 보이는 게 있으면 무조건 빼앗아 가곤 했다.
때문에 앨리스는 유치원에 갈 때 챙겨가는 가방 속에 드레스를 개서 꼭꼭 숨겨놓기로 했다.
다른 건 몰라도, 이건 에미르에게 돌려주어야 할 것이었으니까.
‘침대 밑에 넣어놔야지. 그럼 절대로 모를 거야.’
앨리스는 만일의 경우를 대비해서 드레스를 숨긴 가방을 한 번 더 침대 밑에 넣어놓았다.
“콜록, 이 정도면 괜찮을 거야.”
침대 밑에 잔뜩 쌓인 먼지 때문에 기침이 났지만 그래도 뿌듯했다.
그리고 막 일어서려던 그때, 앨리스의 시선이 가방 옆 보물 상자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보물 상자가 있었지.’
앨리스는 왜 자신이 아까 미처 이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싶었다.
자신이 가진 것 중에 그나마 가치 있는 것들은 모두 이 상자 안에 담겨 있었다.
정원에서 주웠던 실크로 만들어진 작은 주머니, 그리고 1년 전쯤 클레어가 자신은 이제 작아져서 못 쓴다며 선심 쓰듯 적선한 헤어 리본 핀, 주방의 버리는 조개껍데기 안에서 발견했던 작은 못난이 진주, 그리고 또…….
상자를 살피던 앨리스의 눈에 무언가가 띄었다.
‘……이 목걸이가 좋을 것 같아.’
앨리스는 박스 안에서 무언가를 골라 집어 들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금속제 체인 끈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였다.
별 볼 일 없어 보였지만 특별한 점이 있었는데, 바로 똑같은 두 개가 한 쌍으로 되어 있는 것이라는 점이었다.
‘베시가 만들어줬던 물건.’
베시는 앨리스의 전 유모이자 전담 하녀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유독 손재주가 좋아 앨리스에게 이런저런 물건들을 만들어주고는 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 목걸이였다.
‘행운석’을 체인에 엮어 만든 목걸이.
길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보석이라, 사실 보석 취급도 받지 못하는 돌이긴 했다.
하지만 앨리스는 유독 아름답게 쪼개진 두 행운석 조각을 주웠고, 그걸 본 베시가 두 조각을 각각 목걸이로 만들어 앨리스에게 선물해 준 것이었다.
‘앨리스 아가씨, 나중에 아가씨에게 잘해주는 멋진 짝이 나타나면 이걸 나눠 가지세요.’
목걸이와 함께 농담처럼 건넸던 베시의 말을, 앨리스는 아직 잊지 않고 꼭꼭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앨리스가 생각하기엔 이걸 나눠 가질 수 있는 사람은 딱 한 명뿐일 것 같았다.
‘나한테 잘해주는 멋진 짝이라면, 에미르뿐이니까.’
앨리스는 미소 지으며, 목걸이를 가방 속 깊숙한 곳에 챙겨 넣었다.
* * *
앨리스에게 드레스를 빌려주었던 다음 날.
아침 일찍 유치원에 도착하자마자 앨리스가 내게로 쪼르륵 달려왔다.
“여, 여기 어제 빌려주셨던 드레스예요. 미처 빨지 못해서…… 죄송해요.”
아까부터 내게 이걸 돌려주기 위해서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미처 세탁을 못 했다면서 미안해하는 얼굴을 하고 있는 앨리스였다.
물론 나는 상관하지 않고 괜찮다고 말해주었다.
애초에 바라지 않았고,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던 바였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앨리스가 돌려준 드레스의 상태에 관심을 가질 여유가 없었다.
왜냐고? 어젯밤부터 쭉 생각해왔던 한 가지 재미난 계획 때문이었다.
그 계획은 바로, 앨리스를 내 집에 초대하는 것이었다.
‘바로 오늘 말이지! 뭐, 앨리스가 시간이 안 된다면 내일이나 모레도 좋지만 말이야.’
으음, 예전에 한번 이렇게 생각한 적이 있었던 것 같다.
앨리스와 친해지게 되면, 집으로 초대해서 함께 놀자고.
하지만 어젯밤 나는 문득 깨닫고 만 것이었다.
그 생각이 틀렸다는 것을.
‘순서가 바뀌었어! 친해진 후에 초대하는 게 아니야. 일단 집으로 초대하고, 맛있는 걸 잔뜩 먹여주고, 같이 재밌게 숨바꼭질도 하고, 근처에 있는 가게 구경도 하는 거야. 그러면서 친해지는 거지.’
아아, 왜 이제야 깨달은 걸까?
나는 속으로 한탄했다.
원래 앨리스처럼 조심성이 많고 여린 성격은, 좀처럼 마음을 쉽게 열지 않는다.
그리고 마음의 문을 여는 방법 역시 앞에서 한없이 기다리기만 하는 것은 정답이 아니었다.
직접 앨리스의 이름을 부르며 나와 달라고, 나와 친구가 되어달라고 외쳐야만 하는 거다.
때문에 나는 오늘, 앨리스에게 같이 놀자고 친구 신청을 할 참이었다.
다행히도 만나자마자 앨리스가 먼저 말을 걸어준 덕분에 일이 좀 쉬워질 것 같았다.
그렇게 막 말을 걸기로 생각을 마친 그때, 용건이 끝난 터라 막 돌아서려는 앨리스가 보였다.
아차, 너무 꾸물댔나?
나는 다급히 앨리스를 붙잡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 저기, 앨리스…….”
그런데 어째서일까.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었을 텐데, 제이크 이외에 다른 이를 집에 초대해 보는 게 처음이라서 그런 걸까…….
이, 입이 쉽사리 안 떨어진다…….
‘뭐라고 하지? 우리 집 올래요? 아냐, 그건 너무 직설적이야.’
그렇다고 해서 같이 놀자는 말을 사교계 언어처럼 배배 꼬아서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아, 어쩜 좋지? 고민하며 나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런 나를 보고서 앨리스가 고개를 갸웃하고 있는 게 보였다.
안 돼!
‘아아, 이러고 있으면 앨리스가 날 이상한 애라고 생각할지도 몰라.’
결국 나는 빠르게 결정을 내렸다.
그래, 그냥 고민하지 말고 막 질러! 뇌야, 입에 모든 걸 맡겨!
“애, 앨리스…… 오늘 유치원 마치고 우리 집에서 같이 놀래요?”
눈을 질끈 감고서, 질문을 던져버렸다.
이제 앨리스의 결정만이 남아 있는 상태.
나는 괜스레 심장이 두근대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좋지. 생일선물 상자를 열어볼 때보다 심장이 더 빨리 뛴다.’
대답이 쉽사리 들려오지 않았다.
여전히 눈을 꼭 감은 탓에 앨리스의 표정이 보이지 않는다.
낯을 많이 가리는 앨리스에겐, 아직 너무 이른 제안이었을까?
……거절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조금은 무서웠다.
아, 아니야! 그래도 그동안 유치원에서 앨리스와 가장 많은 대화를 나눈 게 나인걸.
나는 용기를 내어 실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 희미하게 보이는 건…….
“……!”
외계어라도 들은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앨리스였다.
그리고 점차 앨리스의 얼굴은 환하게 변해갔다.
난생처음 듣는 권유에 살짝 낯설기도 하지만 싫지는 않은 표정.
아니, 싫지 않다기보다 오히려 기쁜 것처럼 보였다.
그랬다.
앨리스는, 난감하거나 거절하고 싶어서 뜸을 들인 것이 아니었다.
‘그저,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랐을 뿐인 건가……?’
이윽고 앨리스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네, 네! 놀래요. 꼬, 꼭이요. 저어, 사실 전부터 계속 영애님이랑 같이 놀고 싶었어요!”
“정말요? 다행이다. 수락해 줘서 고마워요, 앨리스. 그럼…….”
이따 유치원이 끝나면 나와 같은 마차를 타고 가자고 말하려 했다.
그러나 나는 말을 채 끝맺지 못했다.
왜냐하면, 앨리스와 나의 대화를 몰래 엿듣고 있던 ‘불청객들’이 우리의 대화에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시작은, 세드릭의 투정 비슷한 목소리였다.
“야, 나도 갈래. 나도 끼워줘.”
“네?”
물론 난 당황했다.
요즘 수면 부족이랍시고 매일 아침 수업 시작하기 전까지 쿨쿨 자고 있던 세드릭이었기에, 오늘도 자고 있겠거니 했으니까.
그런데 버젓이 자는 척을 하며 우리 둘의 대화를 엿듣고 있을 줄이야.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게 된다면 다소 조용한 앨리스를 챙겨주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일부러 우리 둘만 듣고 있을 때를 골랐건만.
‘이러면 곤란하다고!’
하지만 거절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어쨌거나 이미 앨리스가 우리 집에 온다는 걸 세드릭이 들어 버렸으니까.
여기서 너는 안 된다고 하면, 세드릭이 뭐라고 생각하겠어?
자기만 빼놓고 치사하게 둘이 논다고 생각할 거 아니야.
‘겨우 가까워졌는데, 또다시 멀어질 수야 없지…….’
결국 나는 한숨을 머금고 대답했다.
“네에, 그럼 세드릭 님도 오늘 저희 집에 놀러 오세요.”
“앗싸! 흠, 큼큼…… 그래.”
내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세드릭이 기뻐하는 소리를 질렀다.
그러더니 곧바로 아닌 척 헛기침을 하는 거 있지.
‘흥, 그래봤자 좋아하는 거 이미 다 들켰거든?’
나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의자에 앉으려 했다.
하지만 채 의자를 빼기도 전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날 붙잡듯 들려왔다.
“얘, 에미르. 너 감히 이 몸을 빼놓고 초대를 하려고 하는 것이냐?”
“헉, 황녀님?”
하마터면 너무 놀라 엉덩방아를 찧을 뻔했다.
세드릭의 끼어듦보다도 더욱 예측하지 못했던 인물의 등장.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니나이나 황녀님이었다.
‘……언제부터 문이 열려 있었던 거지. 하아.’
나는 내 세심하지 못한 주변 관찰력에 한탄했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나를 향해 다가오는 작은 구둣발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졌다.
이윽고 내 앞에 멈춘 니나이나는 언짢은 듯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정말로 나만 빼놓고 가려고 했던 건 아니겠지?”
어서 아니라고 말해.
-라는, 무언의 압박이 느껴졌다.
하하.
사실 굳이 그런 신호를 주지 않았더라도 나는 아니라고 답했을 것이었다.
이미 내 계획은 세드릭이 대화를 엿들어 버린 것에서부터 어긋나 있었으니까.
‘어쩔 수 없지. 이번엔 유치원 애들 모두를 초대하고, 다음번엔 앨리스와 단둘이 노는 걸로.’
나는 머리를 재빠르게 굴려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곧바로 두 손을 내저어 보였다.
“그럴 리가요! 다, 당연히 황녀님도 초대하려 했죠! 다만, 저희 저택에 귀한 황녀님이 오시기엔 조금 모자람이 있지 않을까 하여…… 조오금, 망설이긴 했는데…….”
아, 내가 지금 무슨 헛소리를 지껄이고 있는 거람.
역시 나는 미리 정해놓은 대사를 외치지 않으면 삑 소리가 나는 타입인가 보다.
다행히도 니나이나는 내 말에서 앞부분 문장만 주워들은 모양인지 뒤의 변명 아닌 변명은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였다.
“그래, 당연히 나도 초대해야지. 그보다 언제라고? 오늘?”
“네, 오늘이에요. 유치원 마치고요.”
“알겠다. 호위에게 새런 후작가로 가겠다 일러두기로 하지.”
니나이나는 만족스러워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 니나이나가 제자리로 향하자 바로 뒤를 이어 나타난 아이가 있었다.
당연하게도 황자님인 니콜라스였다.
니콜라스는 이미 니나이나와 나의 대화를 다 들은 듯했다.
짧고 간단하게, 툭 한 마디만을 던지며 내 앞을 지나갔다.
“니나이나의 오라비로서 나도 동행하겠다.”
“앗, 네…….”
“그럼.”
그리고 잠시 후 마지막으로 나타난, 반가운 얼굴.
“제이크으! 좋은 아침이야!”
“미, 미르?”
나는 제이크가 나타나자마자 이름을 외치며 다가갔다.
갑작스러운 내 환대(?)에 제이크가 마주 반가워하면서도 조금은 의아해하는 게 보였다.
“무슨 일 있었어, 미르?”
“응? 아, 별건 아니고. 음…… 그러니까 여기 네 명. 너까지 포함하면 다섯 명이서 같이 우리 집에 놀러 가기로 했어. 오늘 유치원 마치고. 너도 올 거지?”
사실 이건 예의상의 질문일 뿐이었다.
묻지 않아도 제이크의 대답은 예스라는 걸, 난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근거 없이 자신하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제이크는 내 초대를 거절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단 한 번도.
‘오히려, 당연하다는 듯이 끼워주지 않으면 섭섭해할지도 모르지.’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었다.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제이크가 씨익 웃으며 대답했으니까.
“당연히 가야지. 그러고 보니 나 요즘 미르 집에 자주 못 간 것 같아.”
“으음,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그럼 더 잘됐다.”
내 말에 제이크는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어쩐지 의미심장한 말투였다.
제이크답지 않게도.
“맞아. 하지만 미르.”
“응?”
“……다음번엔 꼭 나만 초대해 줘야 해? 알겠지?”
“아, 난 또 뭐라고. 당연하지!”
혹시라도 난감한 부탁이라도 할까 봐 걱정했던 건 기우였다.
나는 제이크와 ‘꼭꼭 약속해’를 하고서 웃었다.
생각해보면 요즘 유치원 생활로 바쁜 탓에 제이크와 단둘이 노는 시간이 많이 줄어든 것도 같았다.
제이크가 가끔 나와 있을 때면 지나가는 말로 투덜거리기도 했고 말이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유치원 다니지 말 걸 그랬어.’
‘응?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미르랑 같이 둘이서만 놀걸. 우리 그때도 재밌었잖아.’
그렇게 아쉬워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제이크는 후회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 유치원에 다니기로 한 걸.
‘좋았어, 제이크. 내가 예전보다 더 재미있는 나날을 보내게 해줄게!’
결국 나는 다짐할 수밖에 없었다.
제이크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매일매일을 하하 호호 웃으며 지낼 수 있게 이 유치원을 놀이터보다 더 재미있는 곳으로 바꿔나가 보자고!
* * *
그리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
‘헉, 벌써 유치원이 마칠 시간이라니!’
오후가 되었다.
맙소사.
‘뭘 했다고 이렇게 시간이 빨리 지나가지.’
나는 머리를 감싸 안고 좌절했다.
사실 정말로 솔직하게 말하자면, 오후가 빨리 오지 않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게 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어 있었으니까.
무슨 마음의 준비냐고? 당연히…….
‘이렇게 한꺼번에 모두 우리 집에 초대하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이야!’
계산하지 못했던 상황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동안 계속해서 내 예측 범위 내에서 살고 있었다.
환생자니까.
겪어본 일들에 한해서는 어느 정도 예측이 가능했고, 그 안에서 안전하게 살아가는 것이 내 기본적인 생활 모토라고 말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소소하게라도 내 예측 범위에서 벗어나는 일이 생기면 골치가 아프다.
‘으으, 이런 걱정 이제 집어치울 거야. 뭐, 설마 별일이야 있겠어? 노는 게 다 거기서 거기지.’
방년 6세의 나이로 뒷골이 당긴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결국 나는 고개를 흔들며 머릿속에 떠돌아다니는 걱정들을 모두 지워냈다.
하지만 나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이 아이들의 놀이를 ‘다 거기서 거기지’라고 섣불리 말하기에는…….
이들이 다들 제국에서 한가락 하는 특별한 아이들이라는 점을.
‘에라, 될 대로 되라지. 가방이나 챙기자.’
잠시 내가 잊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아무튼 간에 유치원을 마친 아이들은 모두 각자의 마차를 타고 우리 집, 그러니까 새런 후작저로 향했다.
나는 앨리스, 제이크와 한 마차를 탄 채였다.
어떻게 된 일이냐고? 난 그저 세드릭과 앨리스가 한 마차를 타고 가는 걸 지겨워하는 걸 봤을 뿐이다.
그래서 앨리스에게 같이 마차를 타자고 제안했을 뿐이고, 그랬는데 거기에 제이크까지 딸려왔을 뿐이고…….
뭐 그렇게 된 이야기다.
우리 셋이 한 마차에 타느라, 정작 날 데리러 온 유모는 세드릭네 마차를 탔다는 건 안 비밀이다.
‘뭔가 이 분위기 좀 미묘해.’
그리고 마차 안에서 제이크와 앨리스 둘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어 앉은 나는 진땀을 흘리며 속으로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 둘, 어쩐지 은근히 나만 쏙 빼놓고 보이지 않는 기 싸움 같은 걸 하는 눈치다.
난감했다.
난 지금 왼팔로 제이크와 팔짱을 끼고 있고, 오른팔은 앨리스의 왼손에 내주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으악, 내 몸은 하나란 말이야!’
싸우지 않고 한 팔씩 잘 나눠주고 있는데, 대체 뭐가 문제냐고?
‘아니, 그거야 당연히…… 으악!’
또다.
나는 생각마저 끝까지 잇지 못한 채로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도 그럴 게 방금 마차가 골목 모퉁이를 돌면서 회전했기 때문이다.
회전과 동시에 내 몸은 앨리스 쪽으로 쏠렸고, 제이크는 그 균형의 어그러짐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몇 초 지나지 않아 나를 슬쩍 제 쪽으로 끌어당겼으니까.
‘그래, 바로 이런 게 문제란 말이야.’
그리고 이런 일이 방금만 일어난 것도 아니다.
오른쪽, 왼쪽 모퉁이를 돌 때마다 계속해서 이러고 있다고!
‘팔을 뺄 수도 없는 노릇이고, 휴.’
둘 다 아닌 척하지만 의외로 꽉 잡고 있어서 내 맘대로 빼낼 수도 없을 것 같다.
결국 나는 이 미묘한 눈치 싸움을 하는 둘 사이에 끼어서 집까지 가야만 했다.
내 신세야.
그리고 마침내 마차가 멈췄다.
집에 도착한 것이다!
마부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나는 두 사람 사이에서 부리나케 탈출했다.
방금까진 너무 어색하고 난감했어.
“끙차.”
그러고 나서, 크게 숨을 한 번 들이마셨다.
아, 이 바깥의 시원한 공기! 상쾌해!
“아, 아가씨! 뛰어내리지 마시고 제 손을 잡…… 이런, 이미 내리셨네요.”
나를 에스코트 해주려던 마부는 이미 한발 늦었다.
그리고 이어서 차례차례 앨리스와 제이크가 마차에서 내렸다.
“우와, 여기가 바로 에미르 영애님이 지내시는 저택……. 멋져요!”
“앗, 헤헤. 칭찬 고마워요. 앨리스.”
앨리스는 문 너머로 후작저의 정원과 저택을 올려다보고는 놀라 감탄했다.
때마침 다른 아이들이 탄 마차도 하나둘 도착했다.
‘웬일로 후작저가 다 붐비네.’
그 광경을 보며 나는 짧게 감탄했다.
우리 집안은 사교계와는 그다지 친하지 않은 편이라 파티 같은 것도 잘 안 여니까.
그래서 많은 손님 마차가 도착하는 일도 거의 없는 편이었다.
‘앗, 그러고 보니!’
나는 머릿속에 번뜩 스쳐 지나가는 생각에 아차 하고야 말았다.
‘우리 집사랑 고용인들 어쩜 좋아. 갑자기 황족 맞이 준비를 하게 생겼네.’
보통 황족의 방문 일정이 잡힌 귀족가에서는 며칠 전부터 준비를 철저하게 하는 게 관례이다.
미리 쓸고 닦고 광내고 음식 사고 해야 하잖아.
하지만 내가 미리 ‘황족’ 친구를 데려온다고 말하지 않은 까닭에, 오늘 후작가에서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게 뻔했다.
하지만 어쩌겠어.
나도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단 말이야! 흑흑.
“흐음, 여기가 새런 후작저인가…….”
그때 마침 니나이나가 마차에서 내리며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조금 늦게 마차의 도착을 안내받은 모양인지 저택의 문이 열리고 집사와 하녀장이 뛰쳐나왔다.
그들은 바로 앞에 서 있던 내 얼굴을 먼저 확인하고서, 말문을 열었다.
“아, 아가씨! 이 마차들은 갑자기 대체…….”
“에미르 님! 혹시 친우분들을 데려오신 건가요…….”
하지만 그들의 물음은 동시에 끊겼다.
당연하게도, 그 두 명이 내 뒤에 서 있는 아이들의 얼굴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확히 1초 뒤에 반응이 터져 나왔다.
“허, 허억……!”
“맙소사! 황자, 황녀 전하까지 오시다니!”
집사는 평소에 끼고 있던 돋보기안경도 떨어뜨릴 만큼 놀란 듯했다.
그리고 하녀장은, 내 친구들이 올 것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으나 황자와 황녀까지 같이 올 줄은 몰랐다는 눈치였다.
다행히도 그 두 명은 몇십 년간을 일해 온 베테랑이었기에, 그 당황이 오래가지는 않았다.
잠시 후, 저택 안으로 들어간 하녀장이 쩌렁쩌렁 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긴급! 다들 주목해! 황자 전하, 황녀 전하, 베드몬 대공자님, 앨리스 공녀님께서 방문하셨다!”
그 외침을 시작으로 우리 집은 한바탕 난리 나기 시작했다.
(2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