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권-1화 (1/8)

@Dime 공금 갠소

꼬마 영애님은 주연들을 길들인다 1권

1.

원래 지구별 사람이었던 나는 어느 이세계의 후작 영애님으로 다시 태어났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전생의 기억을 가진 채로, 다시 처음부터 모든 것을 시작했다.

기어 다니고, 걷고, 말을 트고…….

워낙 내 미모가 귀엽고 상큼하고 어여쁜 터라 이번 생은 몹시도 즐거웠다.

딱히 검을 잘 쓴다거나 마법이나 정령술에 재능이 있다거나 하지 않았지만 좋았다.

아무렴 뭐 어때.

가족들 좋고 돈 많고 신분 높으면 장땡 아닌가.

크게 신경 쓸 일도 없고, 하루하루가 평화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평화로운 삶을 살던 어느 날 나는 깨닫고 말았다.

이곳이 다름 아닌 소설 속이라는 것을.

‘물론, 다행히도 나는 조연조차 되지 못하는 쩌리지만.’

처음엔 여주도 악녀도 조연 친구도 되지 못한 내 처지가 조금은 서럽게 느껴졌었다.

하지만 나중에는 생각이 조금 달라졌다.

원작에 가까이 있으면 괜히 피곤하기만 할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원작과는 상관없는 평화로운 삶을 살다가 가자!’

라고, 다짐했는데.

어째서 이렇게 되어버린 건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 아마 그 이야기부터 시작하는 편이 좋겠다.

이 세계에서 내가 살고 있는 곳은 골드하르크 제국이라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 제국을 다스리는 황제 폐하께는 두 명의 자식이 있었다.

니콜라스 황자, 니나이나 황녀.

황자와 황녀는 연년생으로, 둘 다 황후 폐하의 소생이었다.

나이는 각각 7세, 6세.

그리고 문제는 한 달 전 터졌다.

니나이나 황녀가 또래 친구를 가지고 싶다고 한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자식 바보 황제께서는 친히 그녀와 격이 맞는 영애 몇 명을 골라 붙여 주셨다.

하지만 황녀님은 그걸로는 만족을 못 하셨다.

왜냐고?

듣기로 그녀는 제국 중앙 아카데미처럼 단체 생활을 하며 친우를 사귀는 걸 동경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아카데미 입학 가능 나이가 한참 남은 터라 불가능한 일이었다.

조기 입학을 하려면 까다롭고 어려운 시험에 통과해야만 했다.

황녀니까 그냥 규정 뜯어고치면 되지 않을까? 라고 난 생각했었는데 또 그건 싫은 모양이었다.

규정을 뜯어고쳐 봤자 그 나이 또래에 입학할 아이들은 황녀님 하나뿐일 테니까.

그래서였다.

황제 폐하께서 친히 ‘제국 아카데미’의 하급 학교인 ‘제국 유치원’을 설립하신 것은.

그런데 말이 유치원이지, 엄선된 가문의 자제 중 아주 극소수만 다닐 수 있게 만드셨다.

당연한 일이다. 너도나도 다 들어오게 된다면 황녀의 신변 보호에 어려움이 생길 테니까.

어차피 오래 갈 기관도 아니고, 황녀가 정식으로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는 나이가 된다면 저절로 사라질 곳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물론 그 소문을 들을 때만 해도 난 알지 못했다.

그 ‘제국 유치원’에 다니게 될 극소수의 인원 중에 내가 포함될 줄은!

“미르! 보고 싶었어!”

“어서 와, 제이크.”

그 소문이 내 귀에 들어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소꿉친구인 제이크가 찾아왔다.

제이크 테이온.

테이온 공작가의 외동아들이었다.

그리고 남주인 니콜라스 황자의 친구인 조연으로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물론 지금은 내 소꿉친구지만 말이다.

음하하.

사실 처음엔 같은 귀족이라지만 작위가 달라 친해지기 어려울 줄 알았건만, 어찌어찌 가문 간의 친분으로 연이 닿아 반말도 하고 소꿉장난도 하는 그런 사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아무튼 나는 아직 사교계 데뷔를 하려면 한참 남은 터라, 또래 친구는 제이크 소공자 하나뿐이었다.

여느 때처럼 제이크와 숨바꼭질을 하고 놀던 나는 이상한 소리를 들었다.

응접실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래서…… 유치원 입학을…….”

“에미르도 함께…….”

뭐라는 거지?

문이 꼭 닫혀 있어서 잘 들리지는 않았다.

희미하게 띄엄띄엄 들리는 단어의 조각들에 의아해졌다.

때마침 나를 찾던 술래, 제이크가 왜 숨지 않고 여기 있느냐며 다가왔다.

다행히도 제이크는 눈치가 비상해서 내가 지금 대화를 엿듣고 있다는 것을 다 알아채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여주었다.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마저 귀를 기울이다가 대화 주제가 다른 곳으로 흘러가자 귀를 뗐다.

‘이상하다. 방금 분명히 내 이름이 나왔던 것 같은데.’

워낙 띄엄띄엄 들어서 무슨 이야기인지 도무지 유추할 수가 없었다.

때문에 나는 고개를 흔들며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제이크와 함께 그 자리를 벗어났다.

잠시 후 모퉁이를 돌아 응접실이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제이크가 다시 한번 질문했다.

“왜 안 숨어 있었어, 미르? 오늘은 투명인간 컨셉인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저 안에서 공작님이랑 우리 부모님께서 얘기하고 계셨어. 근데 내 이름이 갑자기 나오는 거 있지.”

근데 뭔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달까.

나는 차마 뒷말은 이야기하지 못하고 입을 닫았다.

혹시라도 입 밖으로 말을 꺼냈다가, 그 불안한 예감이 현실이 되어버릴까 봐 무서웠으니까.

“아, 그거.”

“……?”

그런데 갑자기 제이크가 당당하게 입을 열었다.

물론 제이크의 입에서 나온 말은 나를 충격받게 하기에 충분하고 차고 넘쳤다.

“미르랑 나랑 유치원 입학한대.”

“뭐!”

나는 너무 놀라 다리에 힘이 풀린 나머지 그만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괜찮아, 미르?”

분명 넘어진 건 난데 나보다 더 놀라며 내게 손을 내민 제이크를 잡고 나는 일어섰다.

하지만 일어서기만 했을 뿐, 이미 내 정신은 몸과 분리된 것처럼 멍했다.

유치원이라니!

내가 유치원을 왜 또 가야 하는 걸까.

이미 전생에 졸업했는데.

“하아아…….”

결국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옆에서 제이크는 내가 엉덩이가 아파서 그러는 줄 알고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황당함이 고통보다 더 커서, 나는 아무런 느낌도 느낄 수가 없었다.

저기, 아무도 제 의견은 안 물어보신 거예요……?

제가 언제 유치원 가고 싶다 했나요!

하지만 결론만 말하자면 나는 유치원에 가게 되었다.

가기 싫었지만 갈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미르, 나랑 같이 유치원 가기 싫은 거야?”

“응……? 아, 아니. 그건 아닌데…….”

내 질색하는 태도를 보고 갑자기 제이크가 큰 갈색 눈을 글썽거리며 나를 바라보는 게 아닌가.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어야만 했다. 하지만 제이크는 눈치가 빨랐다.

“……미안해, 미르. 내가 유치원 미르랑 같이 다니고 싶었어. 그래서 아버지께 말씀드렸던 거야. 근데 미르가 다니기 싫다고 하면 그냥 안 가도 돼. 괜찮아.”

아이고, 이걸 어째.

순수한 6살 제이크와의 소중한 우정을 내가 짓밟아버릴 위기에 처해버렸다.

때문에 나는 아닌 척 천연덕스럽게 연기하며 부러 하하 웃었다.

“아냐, 나 사실 유치원 너무 가고 싶었어. 제이랑 같이 가는 거면 언제든 환영이지.”

“……정말이야?”

“응. 정말.”

그러자 제이크는 금방 울먹거리던 걸 멈추고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작은 새끼손가락이 내 앞으로 내밀어졌다.

내가 눈을 깜빡이자 제이크가 약속하라며 재촉했다.

“미르가 말했지. 이럴 땐 꼬옥 약속하는 거라고. 같이 가기로 약속해줘.”

헉, 나는 잠시 제이크의 비상한 두뇌에 감탄했다.

내가 알려준 ‘꼭꼭 약속해’를 이럴 때 써먹다니! 치밀한 녀석.

“응…… 약소옥…….”

어쩐지 내 목소리와 손에 힘이 쪽쪽 빠져버리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아무튼 눈앞의 제이크가 다시 해맑은 웃음을 되찾았으니, 그걸로 된 거라고 생각했다.

분명 그랬는데.

* * *

‘어쩌다 나는 이 마차에 올라타게 된 것인가.’

마차의 푹신한 보랏빛 벨벳 등받이에 몸을 기대면서 창밖을 보며 들리지 않게 한숨을 푹 내쉬었다.

지금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황궁에 가는 중이었다.

귀빈 자격으로 초대받았기 때문이다.

다름 아닌 황태자 전하와 황녀 전하의 예비 동급생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어머, 아가씨. 어디 아프세요? 볼에 식은땀이……!”

옆에 앉아 있던 유모 겸 내 전담 하녀 캐리가 창백해진 얼굴을 보며 놀랐다.

황급히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을 닦아주는 손길이 섬세하고 부드럽다.

나는 가만히 그녀의 손길에 볼을 맡겼다. 한 박자 늦게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고 답하면서.

“아냐, 아냐. 나는 아주 멀쩡해.”

너무 멀쩡해서 오히려 문제다.

마음속으로 차라리 어디 아파서 오늘 외출이 취소되기라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게 난생처음 황제 폐하, 황후 폐하…… 그리고 황태자와 황녀 전하를 만나 뵙게 되는 자리가 아닌가.

사실 이 나이 대의 어린이라면 아무리 예절 교육을 잘 받은 귀족 영애라 해도 어느 정도는 겁이 없는 게 당연했다.

하지만 문제는 내 정신연령이 6살이 아니라는 거다.

전생의 기억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황족이라는 이름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그 가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얼굴이 창백하고 손이 덜덜 떨리는 거다.

혹시 대형 사고나 실수라도 저질러서 목이 뎅강 날아가는 건 아니겠지.

……절대 안 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그때 소신 있게 안 간다고 말할걸.’

나는 며칠 전 제이크의 순수한 눈망울에 홀려 덜컥 입학하겠다고 약속한 걸 뼈저리게 후회하고 있었다.

때마침 앞에서 여유 있게 신문을 읽던 새런 후작님이 날 보고 자상하게 달래주었다.

아차, 새런 후작님은 내 아빠다.

“많이 긴장되나 보구나, 미르.”

“……아무래도 아니라고는 못 하겠어요.”

“하하, 그럴 만도 하지. 처음 가 보는 황궁이잖니? 하지만 미르는 이토록 예의 바르고 의젓하니 황제 폐하 앞에서도 잘 해낼 수 있을 거다.”

“…….”

그랬다. 나는 우리 가족들, 저택 고용인들 사이에서 의젓한 아이로 통했다.

아무래도 인생 2회차다 보니, 다른 아이들과는 다르게 해야 할 일과 하면 안 될 일을 잘 구분해 행동했던 탓이다.

그것도 적당히 눈치 봐 가면서 말이지.

다행인 건 아직까지는 그런 내 행동이 그냥 좀 타고나길 독특한 성격을 지닌 정도로 비쳤다는 것일까.

아무튼 그건 그거고, 아무리 인생 2회차라 해도 이런 경우에까지 태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대답했다.

“……모쪼록 잘해 볼게요.”

너무 긴장한 나머지 대형 실수 저질러서 우리 가문이 멸문되지 않을 정도로만요…….

나는 뒷말을 차마 잇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마차는 궁의 정문을 통과하고서도 한참이나 더 달렸다.

마침내 멈춰 선 곳에서 아빠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내린 나는 주위를 둘러보다 감탄사를 참지 못하고 내뱉었다.

“와아……!”

그도 그럴 게, 소설 속의 주요 배경으로 나왔던 황궁을 이렇게 실제로 보게 되니 감회가 새로웠던 탓이다.

온통 하얀 대리석에 눈부신 햇살에 반사되는 크리스털 유리들, 금빛으로 아름답게 발라진 장식들이 눈을 사로잡았다.

“미르, 신기하니? 그런데 어쩌지. 약속된 시간에 잘못하면 늦을지도 모르겠구나. 폐하께서 많이 기다리실 텐데…….”

“지금 바로 가요.”

하지만 눈 호강도 잠시.

아버지가 난처한 기색으로 주변을 둘러보는 나에게 넌지시 하는 말에 곧바로 등을 돌렸다.

황제 폐하와의 약속에서 늦을 수야 없지.

그것은 어쩌면 사망 플래그로 연결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그렇게 도착하게 된 황제, 황후 폐하와의 접견실.

아직 두 분께서는 도착하지 않으셨고, 그랬기에 나는 이 황홀하게 화려한 공간 안에서 입을 꾹 다물고 얌전히 앉아 있었다.

혹시나 발을 동동 굴렀다가 장식품이라도 실수로 차서 흠집을 내면 안 되는 일이니까.

장식품을 쳤다고 목이 날아가는 일은 후작가의 영애에겐 일어나지 않겠지만, 내 방정맞은 행동으로 후작가의 명예에 약간의 흠집이 생기는 건 가능할 터였다.

“새런 영애님께서는 참으로 우아한 기품을 지니셨군요.”

황궁의 시녀가 그런 내 태도가 신기했던 모양인지 넌지시 칭찬을 건넸다.

아냐, 우아한 기품 아니라고. 난 그냥 무서워서 굳어버린 거라고요.

“폐하께서 오고 계십니다.”

그때 마침 문이 열리며 시종이 정중하게 폐하의 방문을 알렸다.

황궁 시녀는 찻잔을 세팅하고서 조심스럽게 벽 쪽으로 물러났다.

곧 남자와 여자가 들어왔는데, 말을 하지 않아도 그분들이 폐하시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옆자리의 아빠와 함께 조심스레 일어났다.

“제국의 태양이신 황제 폐하, 황후 폐하께 인사 올립니다. 새런 후작가의 에미르 새런이옵니다.”

너무 긴 인사말이 아니라 다행이었다.

영화 같은 데서 보면 제국의 광명 어쩌고로 시작해서 최소 네댓 문장은 읊던데, 이곳 제국의 황실 인사말은 상대적으로 간소했다.

나는 다행히도 혀가 꼬이지 않고 무사히 인사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래, 앉거라.”

내 예상과는 다르게 두 분께서는 그 고아한 외모만큼이나 인자한 성품의 소유자셨다.

이 책 속에서 황제, 황후 폐하는 남주인 황태자의 부모로, 사실 별로 비중이 없던 캐릭터였던지라 두 분의 성품이 어떤지는 잘 알지 못했다.

그래서 더 겁이 났던 것도 있었다.

자식과 며느리에게는 친절하지만 생판 남인 후작 영애에게는 깐깐하고 무서운 폐하일 수 있지 않은가. 하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만인의 인자한 황제, 황후였다.

“영애가 흔쾌히 유치원에 입학해 준다고 하여 몹시도 기뻤다네.”

“……황송합니다, 폐하. 저로서는 폐하께서 친히 설립해 주신 유치원에 다닐 수 있는 영광을 얻게 되어 기쁨일 따름이지요.”

입에 기름칠한 듯 말이 술술술 나왔다.

몰랐는데 나는 인생 실전파였던 모양이다.

아까까지만 해도 손에 막 식은땀이 흐르고 그랬는데 지금은 마치 간신배처럼 입을 털고 있는 모양새였다.

대부분의 대화는 내가 황송하다고 하면 하하하 너털웃음이 되돌아오는 걸로 이어졌다.

“새런 후작, 이런 영특한 아이를 여식으로 두어 참으로 기쁘겠소. 부럽군.”

“감사합니다, 폐하. 하지만 폐하께서도 총명하고 아름다우신 황녀 전하가 있지 않습니까.”

아빠의 부드러운 답에 아주 짧은 순간 황제와 황후 폐하의 얼굴이 굳어지는 게 보였다.

내가 헛것을 봤나, 싶을 정도의 아주 짧은 찰나였고 그 이후로는 다시 인자한 미소를 띤 얼굴로 되돌아왔지만.

곧 황제 폐하의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크흠. 그보다 오늘 내가 이렇게 자리를 만든 것은 다름이 아니라 황자와 황녀를 소개해 주기 위함이라.”

어쩐지 말을 돌린 것 같지만 기분 탓이겠지?

황제 폐하는 곧바로 시종을 시켜 황자와 황녀를 데리고 오라 명했다.

그 명령이 떨어진 후, 나는 아까 두 분을 만나 뵙기 전보다 안색이 더욱 창백해지고야 말았다.

왜냐하면 황자와 황녀, 두 사람은 각각 이 소설의 남자 주인공, 악역이었으니까.

유치원에 다니기로 한 이상 언젠가는 만나게 될 인물들이었지만 나도 모르게 몸이 뻣뻣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 * *

황제 폐하께서 아까 ‘총명하고 아름다우신 황녀 전하’라는 말에 낯이 붉어지고 헛기침을 한 이유를 나는 뒤늦게 알아차렸다.

왜냐하면 소설 속에서, 황녀는 도저히 ‘총명하다’라는 말과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멍청하지만 악독한 성품을 지녀, 오라비의 마음을 빼앗아간 여주인공을 끈질기게 괴롭힌 악역이 바로 그녀였다.

‘소설 속에서 최악의 악녀라는 별명이 붙기까지 했던 사람이야.’

물론 아름답다는 수식어는 황녀의 이름 앞에 붙어도 틀린 말이 아니었다. 한 떨기 가시 장미꽃 같은 미인이라는 설명이 소설 속에 나왔었으니까. 물론 그 빛나는 외형도 황녀의 표독한 성질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고도 서술되었긴 하지만.

그렇게 소설 속의 내용을 떠올리던 중 문득 한 가지 생각에 멈췄다.

그것은 바로, 지금이 원작이 시작하기 10년도 더 전이라는 사실.

‘지금은 황녀가 6살일 시점이잖아.’

아무리 천성이 악독하게 설정된 인물이라 할지언정, 6살밖에 안 된 황녀가 악독하면 얼마나 악독할까? 황실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자랐다 해도 어느 정도는 어린아이임이 분명할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을 조금 고쳐먹기로 했다.

내가 알고 있는 소설 속 악역이 아닌, 그냥 6살의 나와 동갑인 황녀님을 만나는 거라 생각하자고.

‘편견은 나쁜 거야.’

그래, 그러니까 너무 겁내지 말자!

……라고 스스로 자기최면을 하면서 나는 홀로 빈 접견실에 앉아 그들을 기다렸다.

황제, 황후 폐하께서는 바쁘신 몸인지라 용건을 끝내고 곧바로 나가셨고, 아빠는 마침 황궁에 온 겸 아는 사람을 만나 일을 처리한다고 나갔다. 이곳에 남겨진 건 나뿐이었다.

‘침착하자. 그냥 내가 좋아하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과 팬미팅을 하러 온 거라 생각하자. 그래, 팬미팅……!’

그렇게 입술을 꼭꼭 깨물며 한 5분쯤 기다렸을까.

또다시 시종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자 전하, 황녀 전하 드십니다!”

또각또각 아이의 작은 발소리지만,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구둣발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마침내 문 너머로 보인 건 창백하리만큼 하얀 피부에 대비되는 붉은 핏빛 눈동자.

칠흑처럼 윤기 나고 검은 머리를 양쪽으로 땋아 동그랗게 옆으로 말아 붙인 우아한 머리.

‘니나이나 황녀……!’

황녀는 곧바로 시선을 내게 휙 돌리더니, 첫 만남부터 다짜고짜 나와 눈을 강렬하게 마주쳤다.

그러더니 대뜸 질문했다.

“네가 에미르 새런인 것이냐?”

“네에, 황녀 전하. 제가 바로 에미르 새런이옵니다.”

너무 돌직구라 순간 인사말도 빼먹을 뻔했다.

하지만 눈부신 순발력으로 곧장 일어나 고개를 조아리며 인사를 올렸다.

그러자 니나이나 황녀는 턱을 살짝 치켜들고 요리조리 나를 관찰하듯 바라보았다.

“흐음…… 그렇단 말이지.”

아니, 그런 눈빛으로 보지 마세요.

저 얼굴 뚫리겠어요.

‘……라고 말하고 싶은데 목숨이 소중해서 그럴 수 없다!’

자꾸 아이 콘택트를 시도하려 하는 황녀님 때문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아니면 부채라도 펴서 얼굴 가리고 싶었다. 근데 난 지금 부채조차 없었다.

다행히도 낯이 뜨거워지려 할 때 즈음 니나이나 황녀는 날 쳐다보는 걸 그만두고 자기소개를 했다.

“그래, 에미르 새런. 내 이름은 니나이나 클루아 베텔리우드이니라.”

“존귀하신 황녀님을 뵙습니다…….”

“인사말을 또 해?”

아차, 너무 갔나.

과도한 조아림에 황녀의 눈초리가 가늘어지는 게 보였다.

그리고 때마침 난처한 나를 구해준 것은 다름 아닌 황자의 등장이었다.

‘……니콜라스 황자.’

아니, 이걸 구해줬다고 하긴 좀 그렇다.

왜냐하면 황자는 내게는 영 관심 없어 보이는 태도로 느긋하게 문을 통과해 들어왔으니까.

심지어 시선은 내가 아닌 손에 들린 책에 가 있었다. 이런 자리에 책을 들고 들어온다고? 얼마나 재밌는 책이길래, 싶어서 책 표지를 눈으로 훑어봤는데, 글쎄 제목이 <제국 경제에 대한 이해>다.

……안에 그림책이 숨겨져 있는 거 아니지?

‘원작에서 남주가 워낙 독서광에 소년 천재라고 묘사되기는 했지만.’

이런 수준일지는 미처 몰랐던 탓에 나는 그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 어…… 존귀하신 황자님을 뵙습니다. 에미르 새런이옵니다.”

“그래.”

인사말을 올려 보았지만 쿨하게 짧은 대답만이 되돌아와 그만 민망해졌다.

다행히 때마침 니나이나 황녀가 소파에 우아하게 앉으며 쥘부채로 앞을 탁 가리켰다.

“앉아, 새런 영애.”

“아, 네.”

마침 등받이가 필요하던 참이라 나는 사양하지 않고 곧바로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이로써 나는 맞은편에 깐깐한 표정을 하고 있는 니나이나 황녀(6살이다……)와 경제학 도서를 정독하고 있는 단정한 차림의 니콜라스 황자(7살이다……)를 두게 되었다.

‘불편한 자리!’

하다못해 제이크라도 함께 왔으면 좋았겠지만, 제이크는 이미 이 둘과 어느 정도 안면이 있는 상태여서 따로 면담 자리는 만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때문에 나는 가시방석처럼 이곳에 앉아 있어야 했다. 그러다 이 어색한 분위기를 이기지 못하고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비록 신분은 더 낮지만 정신연령이라도 조금 높은 내가 먼저 대화를 이끌겠어.’

……라는 포부를 가지고 말이다.

음, 그러니까 어떤 대화 주제가 좋을까 고민하던 나는 결국 이 자리의 핵심이 되는 질문을 던지기로 결심했다.

“황녀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유치원이라는 곳을 설립하고 싶으셨던 건지 궁금해요.”

“나도 친우를 갖고 싶어서 말이야.”

“……듣기로는 황제 폐하께서 귀족가의 영양들을 전하께 붙여 주셨다고 들었는데요.”

“너 말 잘하는구나. 하지만 그건 친우가 아니야. 내가 원하는 친우는 시녀 따위가 아니라고. 동등한 위치에서 서로를 아낄 수 있는 그런 아이들이 필요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글쎄, 당신이 황녀 전하인 이상 이미 동등한 관계로 친구 사귀기엔 그른 것 같아요……. 어디 무서워서 다투다가도 ‘똥개 바보 멍청이!’라는 말 한마디 하겠습니까!

아무래도 황녀 전하는 유아용으로 재편집된 동화나 소설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동료 같은 것을 보고 동경하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헉, 생각해 보니…… 그럼 내가 황녀님의 그 ‘친우’라는 게 되어줘야 한다는 거야?’

갑작스레 번개처럼 떠오른 진실에 나는 입을 턱 막았다.

그렇다. 지금 헛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황녀의 저 친우 놀음에 기꺼이 어울려줘야 할 상대엔 다름 아닌 나도 포함이었던 것이다!

‘아아, 후작 영애로 환생했다고 다가 아니었어. 결국 황족의 비위를 맞춰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삶이라니, 이런 망할…….’

우울한 마음에 절로 고개가 푹 숙어졌다.

그때 지금까지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던 니콜라스 황자가 무심한 태도로 툭 말을 내뱉었다.

“나는 내년에 아카데미 조기 입학이 예정되어 있다.”

“……?”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하는 거지?

똑똑하다고 자랑하는 건가…….

그러고 보니 원작의 니콜라스는 여주인공인 앨리스를 만나기 전까지 자신이 잘났다는 것을 매우 잘 알고 있었고,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사실 오만한 성격이었다고 서술된 바 있었다. 그러니 7살임에도 이렇게 시니컬한 성격인 건 어쩌면 당연했다.

역시나 아니나 다를까였다.

유치원 따위 자신의 수준에 맞지 않는다는 투로 니콜라스는 말을 이었다.

“니나이나를 혼자 보낼 수 없다는 폐하의 명대로 다니게 된 것뿐이다. 그러니 내겐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아, 네. 전하.”

물론 그렇다면야 저는 매우 땡큐인데요.

……어떻게 신경을 안 쓰겠습니까. 무려 황자님에다 이 책의 남주인공님이신데.

‘나 잘 다닐 수 있을까, 유치원.’

아직 두 명만 만났을 뿐인데도 벌써부터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어찌어찌 면담은 잘 마쳤으나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 * *

하루하루 걱정 바람으로 지새우니, 어느새 유치원 입학하기 하루 전날이 되고 말았다.

“캐리, 내가 며칠 전 말했던 재료 다 준비됐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열심히 세수도 하고, 양치도 하고.

유모이자 하녀인 캐리가 내 머리를 곱게 빗겨줄 때 거울을 보며 넌지시 물어보았다.

그러자 캐리가 고개를 끄덕이며 부드럽게 얼렀다.

“네, 어제 아가씨께서 말씀하신 것 모두 주방에 준비해 놓으라 일렀답니다. 걱정 마셔요.”

“으응, 고마워.”

나는 작은 의자에서 발을 동동거리며 거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오늘은 내 비장의 무기를 만들 날이다. 내일 유치원에서 처음 만날 아이들에게 잘 보여야 하지 않겠는가. 첫 만남엔 먹을 걸로 꼬시는 게 제일 아니겠어?

“그런데 아가씨, 정말로 아가씨께서 손수 만드실 건가요? 주방에 말하면 언제든지 아가씨 대신 뚝딱 만들어드릴 수 있을 텐데요. 잘못하면 뜨거운 냄비에 고운 손이 델지도 몰라요.”

“아냐, 아냐. 이건 손수 만들어야 의미가 있는 거라니까.”

마침 캐리가 머리를 다 빗고 자그마한 리본으로 머리를 묶어주었기에 의자에서 폴짝 뛰어내렸다. 엄마가 말해주었던 유치원의 원생은 나 포함 총 6명. 소수 인원이기에 어차피 많이 만들 필요는 없었다.

“만드는 것도 내가 하고, 포장도 내가 할 거야!”

“그래요, 그래. 아가씨 하고 싶은 거 다 하세요.”

캐리는 이미 체념한 듯 너그러운 미소를 띠고 애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어차피 힘들면 금방 포기하시겠지?’라는 미래 예측을 담은 듯한 눈빛이었다.

하지만 난 그 정도로는 쉽게 지치지 않을 거라고요, 후후.

‘내 사전에 쉽게 포기란 없다.’

* * *

“아이쿠, 우리 아가씨 오셨습니까?”

주방에 가자마자 반겨 주는 우리 저택 주방장은 벌써 깔끔한 흰색 요리복에 모자까지 쓰고 있었다. 나는 그 옆에 단정하게 놓인 내 전용 요리복을 집어 들었다. 실내복 원피스 위에 그대로 흰 요리 가운과 앞치마까지 두르니 미니 주방장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모양새였다.

“딱 맞아. 다행이네.”

“허허, 아가씨가 웬일로 직접 요리를 하신다고 하셔서 급하게 맞춤 제작하느라 혼났지요. 아가씨가 워낙 아담한 체구이셔야 말입니다. 아, 그보다 조리도구를 쓸 때 주의사항을 들으셔야 합니다. 정말 중요해요. 아가씨의 안전에 관련된 문제니까요.”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주방장이 말하는 걸 한 귀로 잘 새겨들었다.

이미 잘 알고 있는 안전 상식이었지만 귀담아듣지 않은 걸 들킨다면 주방에서 뻥 쫓겨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자, 그럼 먼저 여기 설탕을 부어주세요. 아가씨.”

“으응.”

기나긴 설명을 다 듣고 난 후, 드디어 주방장이 내 작은 손에 설탕 종지를 쥐여 주었다.

아, 떨리고 설렌다. 이 세계에서 처음 내 손으로 만들어보는 요리인가.

계량컵에 꽉 차도록 다섯 번 맞춰 붓자 커다란 유리 볼에 반절 정도 설탕이 차올랐다.

그러자 옆에서 내가 하는 행동을 지켜보고 있던 주방장이 유리병 몇 개를 턱 하고 내려놓았다. 색색의 아름다운 천연 색소가 들어가 있는 과일 맛 시럽들이 분명했다.

“이건 키위 맛 시럽이야?”

개인적인 취향으로 키위가 좋았기에 초록색 병을 가리키며 물었더니 아니란다.

“그럼 뭔데?”

“허허, 이건 청사과 맛 시럽이랍니다. 아가씨.”

“아…… 청사과.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이며 나머지 병의 라벨들을 일일이 확인하며 맛을 살펴보았다.

노란 건 레몬 맛, 빨간 건 딸기 맛, 초록색은 청사과 맛, 파란색은 블루베리 맛, 검은색은…… 응?

‘계피 맛? 얘가 왜 여기 있어.’

나는 황급히 계피 맛 시럽을 들고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예민한 입맛을 가진 아이들에게 계피 맛이란 웬만한 취향이 아니고서는 잘 선호되지 않으니까.

나 역시 그랬다.

“이제 재료를 섞어야겠군요…… 으음.”

적당히 덜어낸 설탕에 시럽을 각각 따로 붓고 나서 주방장을 한 번 힐끔 쳐다보자 그가 아차 하며 황급히 무언가를 찾는 듯했다. 어머머, 설마 내가 열심히 일하는 동안 딴짓하고 있었던 거야?

“아가씨의 손에 딱 맞게 잘라낸 주걱입니다. 이걸로 잘 섞어주세요.”

그러더니 주방 한구석에서 일반 나무 주걱의 3분의 1쯤 되어 보이는 작은 주걱을 가지고 와 내밀었다. 자세히 보니 어설프게 깎아낸 흔적이 보였다. 멀쩡한 주걱을 나 때문에 깎다니, 주걱아 미안해…… 하지만 잘 쓸게. 흠흠.

작은 손으로 설탕을 휘젓는 건 생각보다 꽤 힘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하지만 나는 파워 업 상태로 금방 그 작업을 마쳤다. 이제 다른 부재료들과 함께 냄비에 넣고 녹여야 하는데…… 응? 주방장이 내가 화덕 쪽으로 못 가게 막는다!

“아가씨, 죄송하지만 불을 다루는 것만은 제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혹시라도 아가씨께서 다치시면 안 되니까요.”

주방장은 단호한 얼굴로 말했다. 내심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를 이해했다. 나 하나 즐겁자고 불을 다루다가 옷에 불이 붙어버리거나 뜨거운 냄비를 쏟아버리면 결과적으로 책임을 지는 건 내가 아닌 주방장이 될 테니까.

“알았어. 어쩔 수 없지. 잘 녹여줘, 나 대신…….”

“……아가씨. 대신 틀에 넣고 모양을 굳히는 건 제가 도와드릴 테니 아가씨가 하셔도 됩니다.”

“앗, 정말?”

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못내 안타까워 보였는지 그는 슬그머니 내게 거래를 제안했다. 뻔히 보이는 수작이었지만 나는 그냥 넘어가 주기로 했다. 뭐, 이 정도면 내가 손수 만든 거라고 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니까.

결국 나는 주방장이 녹여 준 액체를 조심스레 주방장의 도움을 받아 틀에 살살 넣어 굳혔다. 이쑤시개보다 살짝 굵은 크기의 나무 막대기를 꽂아 넣는 건 덤이었다.

“우리 아가씨, 천재신가 봅니다. 캐러멜을 들고 먹을 생각을 다 하시다니.”

주방장의 칭찬에 나는 슬그머니 손을 꼼지락거렸다.

막대 사탕에서 착안한 막대 캐러멜은 순수한 내 아이디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 세계에서는 처음일 테니, 뭐 오해하게 둘까.

‘캐러멜 완성!’

유치원 인맥 만들기 프로젝트의 첫걸음은 아마 이 캐러멜부터 시작하게 될 것이었다.

원대한 계획이 성공으로 한 발짝 나아가는 걸 느끼며 나는 남몰래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 * *

한 가지 맛을 두 개씩, 총 열 개를 작은 종이봉투에 나눠 담고 예쁜 리본으로 묶었다.

전생에서부터 타고나길 손이 야무져서, 이까짓 리본 묶는 것쯤은 일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 사실을 모르는 엄마, 아빠, 그리고 집사와 캐리는 내 주위를 둘러싸고 연신 감탄사를 터뜨렸다.

“세상에, 미르. 네 손재주가 이렇게 뛰어난 줄 미처 몰랐구나!”

“어머, 우리 아가씨. 못 하는 것도 없으셔요.”

“아가씨께서는 신의 손을 가지신 모양입니다. 허허.”

아, 뻘쭘해라.

이건 그냥 손에 익은 동작이라 그런 것뿐인데…….

아무튼 천재 취급(사실은 아니지만)을 받는 건 꽤 기분 좋은 일이라 나는 사양하지 않고 헤헤 웃었다.

색깔별로 알록달록 포장한 걸 들고 이리저리 집 안을 쏘다니면 다른 하녀와 하인들도 내 작품을 보고서 칭찬을 한마디씩 해주었다. 뿌듯했다.

“자, 아가씨. 이제 캐러멜도 다 만드셨고, 산책도 하셨고, 목욕도 하셨으니 잠드실 시간이에요.”

저택을 한 바퀴쯤 돌았을까, 캐리가 나를 어르며 가볍게 안아 침실로 향했다.

으음, 나도 발 있는데…… 라고 불만을 표할까 했으나 곧 캐리의 따뜻한 품에서 잠이 솔솔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어린아이의 몸은 잠을 많이 필요로 한다. 겨우 저녁 8시밖에 되지 않았지만 내게는 지금이 취침 시간이었다.

전생 같았으면 잠이 뭐야, 펄펄 날아다닐 시간대였지만 지금의 몸은 눈이 슬슬 감겨오는 때라는 것! 캐리가 굳이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어도 아마 알아서 침대로 가 잠들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만든 캐러멜, 여기다 둘 거야. 누가 실수로 먹어버리면 안 되잖아?”

침실 앞까지 안겨 온 나는 캐리의 팔에서 뛰어내렸다. 그러고는 내가 꼭 안고 온 캐러멜 봉투를 다시 정리해서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머리맡의 작은 협탁에 놓아둘 생각이었다.

다행히도 그런 내 행동이 재미있어 보였던 모양인지 캐리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작은 다람쥐 같아요, 아가씨.”

“응?”

“다람쥐는 볼에 자신이 먹을 음식들을 꼭꼭 숨겨 놓는답니다.”

캐리가 나를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은 후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되물었다. 그랬더니 저런 대답이 돌아왔다. 다람쥐라니…….

“무슨 소리, 나와 다람쥐는 비교할 수 없어. 유모. 다람쥐가 훨씬 귀엽잖아.”

“호호, 제 눈엔 아가씨가 더 귀엽답니다. 아 참, 이제 저는 나가 볼게요. 잘 주무세요.”

캐리는 웃으며 내게 작별 인사를 했다. 아, 그래. 이쯤에서 내 취침 습관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유모나 부모님과 함께 자지 않는다.

종종 이 세계의 6살 아이들은 귀족으로 태어났다 해도 유모와 함께 자고는 한다.

당연한 일이다. 어린 나이니까. 이곳에서는 열 살쯤부터 독립해서 자는 게 보통이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혼자 자는 걸 택했다. 내가 의사소통이 가능해졌을 때부터 고집을 부려 그렇게 했다.

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혹시 잠결에 헛소리를 내뱉을까 봐 그러지.

이곳이 책 속이네, 황자님은 남주인공이네 같은 잠꼬대를 잘못했다가 황실 불경죄로 잡혀가거나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는 의심을 받으면 안 되잖아?

그렇게 나는 혼자 침대에 눕고 손을 쭉 뻗어 불도 껐다.

“좋은 꿈 꾸세요, 미르 아가씨.”

“으응. 캐리도 잘 자아.”

그렇게 유모를 내보낸 다음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덮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자꾸만 머릿속에 내일 가게 될 유치원에 대한 생각이 떠올라서였다.

어떤 아이들이 있을까, 그곳에는?

‘일단 나, 그리고 제이크. 황자님과 황녀님.’

6명이라 했으니 남은 두 명이 누구일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과연 나를 반겨줄까 싶었다. 먼저 말을 걸어줬으면 좋겠는데…….

아니다, 아니야. 내가 먼저 이 캐러멜을 들고 다가가야지.

‘으음…… 첫 선물, 거절당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잘 해낼 수 있을까.’

며칠 전 보았던 그 황녀와 황자님이 과연 내 캐러멜을 받아줄지도 걱정이었고, 그 외에 내가 처음 보는 아이들 역시 내 호의를 잘 받아들여 줄까 싶었다.

그런 잔걱정들 때문에 나는 평소보다 한참이나 늦게 잠들었다.

* * *

“미르, 미르!”

잠결에 누군가가 나를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당연히 유모인 캐리일 거라고 생각하고 약하게 손을 내저으면서 잠꼬대를 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잘래…….”

“미르, 일어나. 오늘 유치원 가는 날이잖아.”

“……유치원!”

그러다 유치원이라는 그 단어 하나에 몸을 벌떡 일으켰다.

마법 같은 단어. 마치 내가 기다리고 기다렸던 택배가 왔다는 소식처럼 사람을 벌떡 일으키게 했다. 하지만 차이점은 있었다.

‘아, 오늘이 유치원 가는 날…….’

놀라서 벌떡 일어났지만 막상 정신 차리고 보니 가기 싫다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그런데 어째 내 앞에 서 있는 사람이 여기 있어서는 안 될 사람처럼 보이는데?

하지만 눈을 두어 번 비빈 다음 다시 봐도 똑같았다.

다름 아닌 내 소꿉친구, 제이크였다.

제이크는 눈을 깜빡깜빡 뜨며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옷차림은 말쑥하게 잘 차려입은 정장이었다. 나는 깜짝 놀라 질문했다.

“헉, 제, 제이크. 네가 왜 여기 있어?”

“응, 미르랑 같이 유치원 가려고.”

대답을 듣고 나서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니 그제야 제이크의 뒤에 있는 유모가 보였다.

유모는 뿌듯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아가씨 글쎄, 공자님께서 아침 일찍 오셨다가 아가씨가 주무시고 있다는 걸 아시고 응접실에서 한 시간 넘게 기다리셨다니까요.”

“……진짜야?”

나는 고개를 돌려 제이크를 보았다. 제이크는 보조개가 보일 정도로 밝게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처음 가는 거니까 미르랑 같이 가고 싶어서 일찍 일어났어.”

“몇 시에 일어났는데?”

“으음, 새벽 4시 반.”

“…….”

거의 안 잤다는 소리다.

한참 쑥쑥 커야 할 나이에 저렇게 적게 자면 안 좋은데,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해야지.

나는 제이크의 키를 지켜주기로 결심하면서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어, 제이크. 금방 옷 입고 갈게.”

연회 같은 곳도 아니니 머리는 그냥 단정하게 빗어서 하나로 묶고, 드레스도 단정하게 입고 가면 되니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 같았다.

내가 그렇게 말하자 제이크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으응, 미르. 그런데 있잖아.”

“응, 뭔데?”

“미르 양말 예뻐.”

제이크의 손끝을 따라 내려가 보니 내 발에 잘 신겨진 알록달록 색동 양말이 보였다.

다름 아닌 내가 취미로 손수 뜨개질한 양말이었다.

“……예쁘다고?”

“응, 예뻐.”

나는 못 믿겠다는 듯 되물었지만 제이크는 정말 진심인 모양이었다.

나는 그만 부끄러워졌다.

왜냐하면 이 양말은 지난 겨우내 작은 손으로 한 땀 한 땀 정성껏 짜낸 수제품이었으니까.

유모에게 뜨개질을 배워 처음 만든 작품이었기에 코 크기도 엉망진창, 색깔도 얼룩덜룩했다.

유모조차도 잘 만들었다고만 했지 예쁘다는 말은 안 했는데.

“고마워, 제이크. 이거 내가 만든 건데, 나중에 시간 나면 너도 하나 만들어 줄게.”

역시 제이크가 보는 눈이 좀 있다.

이 양말은 수제품이라는 것에 의의가 있으니 말이다. 내 예술혼을 알아본 게 틀림없어.

나는 뿌듯하게 미소 지으며 제이크의 손을 꼭 잡고 문가로 다가가 밖으로 내보냈다.

아무튼 양말은 양말이고, 나는 지금 빨리 준비를 해야 했으니까.

“금방 갈게. 따뜻한 차 한 잔 마시면서 기다려.”

* * *

나는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다.

전생이나 지금이나 그랬다.

때문에 시계를 보며 나를 꾸며주는 하녀에게 ‘그냥 단정하게! 꾸밀 필요 없어!’를 연신 외쳐야만 했다. 회색빛의 빛깔 고운 머리는 착착 빗어 노란 리본 끈으로 말아 하나로 묶었다. 드레스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란빛 개나리 드레스. 리본과 깔맞춤으로 입는 게 단정해 보인다는 내 신조였다.

“아가씨, 어휴. 이런 날 이런 드레스를 입으시다니요!”

“왜 그래, 유모. 이래 봬도 내가 제일 아끼는 드레스야.”

유모의 손사래에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유모의 속내를 모르는 척했다.

사실 유모가 왜 저런 반응을 보이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노란색이라 해서 무조건 발랄해 보이는 건 아니지.’

내 또래 나이의 영애들은 밝은색의 원단을 선호한다고, 맞춤 의상을 재단하러 왔던 재봉사가 전에 말해준 적이 있었다. 나는 재봉사가 추천하는 밝은 노란빛 원단을 집어 들고, 드레스 디자인 견본집에서 한 가지 디자인을 골라 내밀었다. 그때 재봉사의 낯빛이 어땠더라.

‘창백했던가…… 이 원단으로 고작 이런 옷을 원한다고? 라고 말하는 듯한 눈빛이었지.’

그럴 만도 했다. 내가 요청한 드레스의 디자인은 다름 아닌 노부인 층에서 제일 선호도가 높은 단정의 끝판왕을 달리는 디자인이었으니까. 간혹 엄청나게 법도가 깐깐한 가문의 영애들이나 주문해 입고는 한다는 그런 옷이었다.

재봉사와 캐리를 포함해 엄마, 아빠 모두가 내 그런 선택에 입이 쩍 벌어졌다.

하지만 사실 내가 그런 디자인을 원한 건 별 이유 없었다.

그냥 편하니까.

프릴과 리본이 잔뜩 달린 디자인은 보기에는 귀여워 보여도 불편하다. 연회장 같은 곳에 입고 갈 용도면 몰라도 일상생활에서는 무리가 있다. 이 튼튼한 두 다리로 맘껏 걸어 다닐 때 거치적거리잖아.

그래서 상의는 단추 여러 개로 잘 여며지고 소매는 펄럭거리지 않고 딱 붙는 디자인을 고른 것이다. 원단도 만져 보니 쉽게 때가 타지 않는 소재라 딱이었다.

아무튼 오늘도 이 옷을 골랐다.

유모는 처음엔 말렸지만 내 고집에 결국 패했다.

‘유모 마음은 내가 잘 알아. 하지만…….’

황녀님과 황자님께서 계시는 유치원. 아마 다른 원생들도 고위 귀족가의 자제들이겠지. 그런 자리에서는 무조건 단정하게 가는 게 최고다. 같은 원생들끼리는 몰라도 혹시 그들의 가족들을 볼지도 모르잖아.

‘아무튼 준비는 이쯤하고.’

다행히 그다지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겠다.

차 한 잔을 거의 다 마셔갈 즈음이려나.

응접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제이크를 생각하며 나는 탁자 위의 캐러멜 봉투들을 챙겼다.

이제, 정말로 유치원으로 갈 시간이었다.

* * *

“미르가 좋아하는 옷 입었네? 노란색 병아리 같아. 잘 어울려.”

응접실에 들어가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제이크가 말했다.

눈썰미도 좋지.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맞아. 그러고 보니 제이크, 네가 하고 있는 보타이도 노란색인걸.”

“어, 진짜네.”

제이크는 제 상의를 한 번 내려다보더니 볼이 발그레해졌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갸우뚱하며 시선을 내게 다시 돌렸다.

“그런데 미르가 안고 있는 것들은 뭐야?”

“응, 이건 유치원 가서 나눠줄 것들. 캐러멜이야. 내가 직접 만들었어.”

제이크는 내 대답이 이어지는 동안 멀뚱히 캐러멜 봉투를 응시하다 마지막 문장을 말할 때 슬쩍 내 눈치를 살폈다. 응? 왜 그러는 걸까?

나는 궁금해졌지만 곧 그 답을 알 수 있었다.

제이크가 약간 슬퍼진 듯 말했으니까.

“그렇구나. 미르가 새 친구…… 라고 했으니까 나는 아니겠지.”

“으흠? 무슨 소리야. 네 것도 있어.”

어쩐지. 그래서 우울해진 거였니.

나는 봉투 중 가장 두툼한 캐러멜 봉투를 집어 제이크에게 건넸다.

“넌 나랑 가장 친한 친구잖아. 빼놓을 수 없지. 가장 예쁘고 큰 것들로 담아놨어.”

“……고마워, 미르!”

다시 얼굴이 밝아진 제이크를 보고 나는 웃었다.

그 캐러멜 봉투로 인해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 줄도 모르고.

“다 왔습니다, 아가씨.”

제이크와 나는 각자 가문의 마차를 타고 유치원으로 출발했다. 도착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제국 유치원이라는 간단한 명칭을 부여받은 그곳은, 다름 아닌 수도의 중심가에서 살짝 떨어져 있는 곳이었으니까. 후작저와 아주 가까웠다. 황실 소유의 넓은 땅, 그곳에 무엇이 생길까 했었는데 그게 유치원이었다니.

‘이런 금싸라기 땅에 이렇게 작은 건물을? 아까워!’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내가 한 생각은 그것이었다.

속물적이고 자본주의적인 생각이었지만 잠시라도 21세기에서 살아 본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과연, 황제 폐하께서 따님을 많이 아끼시기는 하구나.

“화려한 건물이네.”

나는 멍하니 눈앞에 자리한 건물을 보고 중얼거렸다.

사실 내가 작다고 표현하기는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부지의 크기에 비교했을 때.

겨우 원생 6명의 소수가 다니는 유치원이라기엔 너무, 너무도 컸다!

웬만한 저택의 절반 크기에, 단층으로 지어도 될 것을 2층으로 지어놓았다.

심지어 그 앞에는 황금 동상이 장식된 분수대도 있었다.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얕은 수심의 인공 시냇물…….

‘이, 이건. 흡사 황녀님만을 위한 대형 인형의 집 같은데.’

그리고 그 안에 들어갈 인형 1이 바로 나인 듯하다.

나는 팔뚝에 오소소 돋아오르는 소름을 가까스로 진정시켰다.

“어서 오십시오, 제이크 테이온 공자님. 에미르 새런 영애님.”

그리고 그 입구를 지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황실에서 파견된 기사 두 명이었다.

헉, 자세히 보니 저 어깨의 빨간 술은 붉은매 기사단의 제복이잖아.

그냥 기사도 아니고 최정예 기사가 호위 중인 모양이었다.

‘하긴, 황족이 두 명이나 있으니 당연한 일인가. 그 두 분을 빼면 황실에는 남은 후계자도 없으니…….’

보안이 철저할 이유는 충분했다.

물론 그 이유에 내가 포함되어 있지는 않겠지만 어쩐지 귀빈이 된 것 같은 느낌에 기분이 좋아졌다.

* * *

하지만 실내로 들어가자마자 그 기분은 다시 안 좋아졌다.

아니다. 안 좋다는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그거와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으니.

굳이 따지자면, 경악?

‘……어째서.’

나는 멀쩡한 눈을 한 번 비벼 보았다. 하지만 눈앞에 있는 아이들은 그대로였다.

황자님과 황녀님 이외에 처음 보는 두 명. 한 명은 여자아이였고 한 명은 남자아이였다.

여자아이의 외모는 흡사 요정의 피가 흐르는 것 같았다. 금사를 엮어 만든 듯한 금발 머리카락, 호수에 쨍하게 비친 정오의 햇살 같은 은색 눈동자. 그에 비해 조금은 낡은 듯하고 몸에 맞지 않게 남아도는 품의 옷은 이질적이었다.

꼭 내가 보았던,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소설 속에서 묘사된 여주인공의 모습과 같잖아. 그러니까, 대대로 뛰어난 요정 소환사를 배출하기로 유명한 로즈 공작가의 천덕꾸러기 둘째 딸 말이야.

물론 아닐 거야, 아닐 수도 있어. 아니겠지?

‘……그렇지만 어디 은색 눈동자가 흔한가.’

애써 부정해 봤지만, 자꾸만 마음은 말하고 있었다.

겁먹은 모습으로 맨 구석에 앉아 있는 저 여자아이가, 이 소설의 여주인공이 틀림없다고.

그리고 그런 내 예상은 그 옆에 앉아 있는 남자아이를 봤을 때 더욱더 확실해졌다.

태양이 불타오르는 듯한 짙은 붉은색 머리를 가졌고, 노란 호박색의 눈동자. 딱 봐도 성격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 인상의 소년. 어딜 봐도 이 소설 서브 남주의 외모였다.

정말 이 모든 게 현실이라면.

이 공간에 있는 아이들은 나를 제외하면 모두 소설의 주역이었다.

남주인 니콜라스, 여주인 앨리스, 서브 남주인 세드릭, 악역인 니나이나.

그리고…… 니콜라스의 친구 역으로 나오는 제이크까지.

‘나만 엑스트라잖아! 그것도 등장하는지 안 하는지도 모를 존재감 없는 엑스트라.’

어쩐지 급격히 내 존재가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헉, 눈 마주쳤다.’

심지어 서브 남주인 세드릭과 아이 콘택트까지 해버렸다. 고의는 아니었다. 너무 놀라서 보고 있다 보니 저쪽에서 먼저 마주쳐 버린 거다. 소년은 나를 보며 알 수 없는 썩은 미소를 짓더니 이내 고개를 휙 돌려버렸다.

‘으으, 싸가지.’

저 성격 보니 확실했다. 소설 속 서브 남주, 세드릭 베드몬이 확실했다.

아닐 리가 없다! 비록 가문의 역사가 길지는 않지만, 황실에 큰 공을 세운 덕에 대공 작위를 얻은 소문의 베드몬가 막내아들 말이다.

주먹을 꽉 쥐고 있는데 갑자기 옆에서 제이크가 나를 톡톡 건드리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미르, 방금 저 애가 널 기분 나쁘게 쳐다본 것 같아.”

“……응, 나도 느꼈어.”

나는 억지로 마음을 억누르고서는 간단히 대답을 해주었다. 제이크는 잠시 침묵하더니 이내 내게 뭐라 속삭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귀를 의심했다. 방금 이거 제이크가 한 말 맞아?

‘미르가 싫다면 내가 가서 혼내 줄까, 라니!’

잘못 들었나 싶었다. 제이크의 성격에 맞지 않는 직설적인 말투였다. 아니, 얘 원래 이런 아이 아닌데. 그래도 하나뿐인 절친인 나를 아껴주는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이라 생각하니 조금 귀엽게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나는 만남 첫날부터 싸움을 붙이고자 하는 마음은 하나도 없었기에 그 제안을 거절했다.

‘혼내도 내가 혼낸다.’

사실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고도 있었고, 아무튼.

일단 간신히 정신을 붙잡은 나는 한 번이라도 면식이 있는 니콜라스 황자와 니나이나 황녀에게 인사를 했다.

그때처럼 니콜라스 황자는 이름 모를 외국어 제목으로 쓰인 두꺼운 책을 읽고 있었고, 내 인사는 짧게만 답해주었다. 니나이나 황녀 역시 전과 같았다. 의미 모를 눈빛으로 나를 훑어보더니 인사를 받아주었다.

‘아, 서 있으려니 다리 저려.’

아무튼 간에 나는 자리에 앉기로 했다. 선택지가 많았으면 좋았으련만 이 넓은 방 안에서 의자는 고작 6개였고, 슬프게도 의자 사이의 간격은 손을 쭉 내밀어도 닿지 못할 정도로 넓었다. 나와 떨어져 앉기 싫어하는 제이크의 손을 붙잡고 남은 두 좌석 중 하나에 골라 앉힌 나는 가장 왼쪽 구석 자리에 앉았다.

‘오오, 완전 회장님 의자.’

푹신한 벨벳 커버로 되어 있는 의자는 등받이의 길이만 내 키 정도 되는 듯싶었고 아래 방석 부분도 쓸데없이 넓어서 기대 눕기 좋았다. 이게 바로 소수정예 유치원의 특혜인 건가.

그때 때마침 문이 또다시 열렸다.

원생들은 이미 모두 와 있으니 새로운 아이는 아닐 게 분명했다. 선생님이려나.

얼핏 전에 듣기로 아카데미처럼 수업 비슷한 걸 가르치실 분이 온다고 듣기는 했었다.

과연 그 말이 맞았는지, 우아한 보랏빛 드레스를 입은 여자가 한 명 나타났다.

그녀는 앞에 놓인 칠판에 제 이름을 적으며 첫인사를 꺼냈다.

마가렛 에드몽 백작 부인이 그녀의 이름이었다. 마가렛 부인은 이 임시 유치원을 돌보게 될 사람이었다. 과거 황후 폐하의 시녀직을 맡은 적도 있었다고 한다.

“마가렛이라 불러 주세요.”

백작 부인인 탓에 이 자리의 원생들보다 신분이 낮은 마가렛은 정중한 태도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곧바로 우아하게 일어선 니나이나 황녀가 발언했다.

“아니, 마가렛 백작 부인. 이제부터 그대를 선생님이라 부르겠다.”

“……!”

황녀를 제외하고서 백작 부인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아이가 놀란 눈치였다.

단 담담하게 책을 읽고 있는 니콜라스만 제외하고. 니콜라스 황자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제 여동생을 힐끗 보고서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돌렸다.

“하, 하지만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가 어찌 황녀님께…….”

진짜 스승으로 온 것도 아니었기에 도저히 그런 귀한 호칭으로 불릴 수는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카데미에서는 그대 같은 사람을 선생님이나 교수님이라고 불러. 그래서 나도 그렇게 부를 거야. 이건 명령이다.”

“명령 받들겠습니다, 황녀 전하.”

명령이라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니나이나의 말에 따라 우리 역시 그녀를 선생님으로 부르게 되었다.

심지어 신분과는 관계없이 이 원 안에서는 그녀에게 존댓말을 하는 규칙까지 만들어졌다.

모두 황녀의 뜻이었고, 황자는 아무 말도 없었기에 모두가 그 규칙을 따르기로 했다.

선생님이라, 왜인지 익숙한 마음에 입에 착착 붙는 호칭이라 나는 마음에 들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은 아이가 한 명 보이는 것 같지만 일단은 무시하자.

“마가렛 선생님, 첫 수업은 무엇인가요?”

그러고 나서 용기 있게 가장 먼저 질문을 꺼낸 건 다름 아닌 제이크였다.

멋져, 제이크! 나는 마음속으로 손뼉을 쳤다. 왜냐하면 나는 은근히 소심한 면이 있어서 이런 분위기에서 쉽사리 먼저 나서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아닌가, 나도 전생에서 이맘때쯤엔 저랬던가. 흑흑, 내가 너무 세상의 물에 찌들어버린 모양이다.

“수업은…… 아직 결정되지 않았습니다. 먼저 서로 자기소개부터 해볼 예정이에요. 그, 자기소개를 시작해야 하는데. 어떤 분부터…….”

아무튼 마가렛 부인은 어색한 말투로 겨우 답변을 해주었다.

아무래도 아직 존댓말이 익숙하지 않은 스승님인 모양이다.

어휴, 그렇다면 적응되게 해드려야지!

첫 번째로 나서는 건 몰라도 두 번째로 나서는 건 자신 있다.

나는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아니, 외치려 했다.

“제가 먼…….”

“저 먼저 해보도록 하지요.”

니나이나 황녀님이 고아한 태도로 탁 팔을 짚고 일어서지만 않았다면.

덕분에 쑥 뻗어 올린 내 손은 민망하게도 스르륵 미끄러져 내려갔다.

아, 창피해. 창피하다고.

마치 길 가다 모르는 아이가 인사해서 나도 맞인사를 해줬는데 알고 봤더니 나한테 한 인사가 아니었던 기분이야.

‘으악. 5초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

다행히, 아무도 방금 전의 내 행동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 같다.

모두의 시선이 내가 아닌 황녀님께 향해 있었으니까.

니나이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니나이나 클루아 베텔리우드. 이 골드하르크 제국 황실의 1황녀이다. 나이는 올해로 6살이지. 그럼 이만 소개를 마치겠다.”

“…….”

좌중에 아주 잠깐 침묵이 맴돌았다.

나는 혹시나 이 침묵이 오래갈세라 곧바로 손을 들어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짝짝짝, 내가 손뼉을 치자 옆의 제이크부터 곧바로 따라 하고 저 끝의 앨리스나 세드릭도 슬쩍 눈치를 보더니 손뼉을 쳤다.

니콜라스 황자는 시선을 책에서 잠깐 떼더니 두세 번 치고 말았다.

‘오, 내가 눈치가 빠른 환생자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하마터면 침묵이 흐를 뻔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다들 어린아이들이다 보니 이런 소개가 끝날 때 적절한 반응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아무튼 이다음엔 다들 눈치를 보며 안 하려고 할 게 뻔하니, 내가 이번에야말로 나서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슬며시 한 쪽 손을 올렸다.

“그럼 이번엔 제…….”

“나는 니콜라스 클루니 베텔리우드.”

아까의 뼈저린 경험 탓인지 목소리를 조금 더 작게 해서 말했던 게 큰 운이었다.

왜냐하면 내가 채 말을 다 내뱉기도 전 책을 탁 덮고 불쑥 일어선 인영이 있었으니까.

자그마한 키지만 이 중에서는 가장 큰, 니콜라스 황자였다.

나는 또다시 손을 쓱 내리고 아무것도 말 안 한 척 시치미를 뚝 뗐다.

속으로는 ‘다음번엔 그냥 말 안 할래. 내 차례 올 때까지 가만히 있어야지……’ 같은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웬일로 두 번째?’

니콜라스가 나선 것은 조금 의외였다. 내 손의 뻘쭘함과는 별개로 말이다.

솔직히 끝까지 무시하고 앉아 있다가 나중에서야 느긋이 일어나서 대충 이름만 말하고 말 줄 알았던 게 내 예측이었다.

“나이는 7살이다. 이상.”

“…….”

할 말을 잃었다. 황녀의 자기소개보다 훨씬 짧았다. 어째 한 문장은 통째로 생략한 것 같은데? 아무래도 소개를 길게 하는 게 귀찮은 모양이었다. 니콜라스는 ‘이상’이라는 단어를 내뱉은 직후 의자에 도로 앉아 놓았던 책을 다시 집어 들었다.

아무튼 모두가 학습 능력이 뛰어난 모양인지 니콜라스 황자의 자기소개가 끝나자마자 우르르 손뼉을 쳤다. 마가렛 부인 역시 한결 안도 어린 미소를 지은 채 손뼉을 쳤다.

‘다음엔 누가 나서려나.’

나는 멍하니 손뼉을 치며 허공을 응시했다.

방금 두 번이나 마음에 크리티컬한 충격을 입어 도저히 세 번 손을 들 마음은 들지 않았다. 순서가 돌고 돌아 모두가 인사를 마쳤을 때 마지막으로나 할 예정이었다.

그때 때마침 저 오른쪽 두 번째 의자에서 일어나는 인영이 보였다.

싸가지 붉은 머리였다.

“세드릭 베드몬입니다.”

이름만 말하고 툭 의자에 걸터앉는 세드릭.

역시나였지만, 이름뿐만 아니라 성까지 들어보니 확실히 그 ‘서브 남주’ 세드릭이 맞긴 한 모양이었다.

10년하고도 몇 년이나 더 지나야 저 성격은 겉으로나마 친절의 가면을 쓰게 되겠지.

여주인공인 앨리스 덕분에 말이다.

‘그러고 보니 앨리스…….’

생각은 이내 앨리스에게로 향했다.

시선을 돌려 저 맨 끝, 나와 정반대 자리에 앉은 앨리스를 응시하자 고개를 푹 숙이고서 조용히 손뼉을 치는 모습이 보였다.

소극적인 태도였지만 나는 앨리스를 이해할 수 있었다.

소설 속에 나온 사연대로라면, 충분히 그럴 만했다.

때마침 앨리스가 살짝 주위의 눈치를 보며 일어서는 게 보였다.

“애, 앨리스…… 예요. 나이는 7살…… 이에요.”

앨리스는 잠깐 냈던 용기가 금세 사그라든 듯 잔뜩 붉어진 얼굴로 황급히 자리에 주저앉았다. 박수 소리가 들리는데도 앨리스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자, 이제 나랑 제이크만 남았나.’

예상외로 앨리스가 먼저 자기소개를 해주었다. 그렇다면 이제 제이크가…… 응?

“제이크, 무슨 할 말 있어?”

옆자리에 앉은 제이크에게 시선을 두자마자 제이크와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 보고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제이크는 내게 입 모양으로 ‘다음은 미르가 소개할 거야?’라고 물어보았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된 거 제일 꼴찌로 소개해서 모두의 주목을 받아버리자.

“제이크 테이온입니다. 잘 부탁드려요.”

내 대답이 떨어지고 나서 제이크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짓더니 일어나 자기소개를 했다. 평소의 가볍던 말투와 다르게 예의 바르고 정중한 문장은 제이크를 다시 보게 했다. 하긴, 얘 원래 이렇게 모범적인 아이였지.

좋아, 이제 내 차례였다. 후후, 전생에서 유치원부터 시작해 수년간의 학기 초 자기소개를 했던 짬밥을 보여주마. 나는 구겨진 노란 드레스 자락을 살짝 털고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새런 후작가의 에미르 새런이라고 해요. 특기는 달리기이고 취미는, 으음. 독서 하기라고 해둘게요. 또 뭐가 있지…… 아! 저는 노란색과 보라색을 좋아해요. 싫어하는 음식은 민트가 들어간 것, 좋아하는 음식은 바나나 초콜릿 푸딩이에요. 또…….”

몇 문장을 더 말하고서야 나는 자기소개를 끝마쳤다.

뿌듯하다!

“그럼 이만 줄일게요. 모두 잘 부탁드려요.”

“와아, 역시 미르!”

옆에서 제이크가 밝은 표정으로 손뼉을 짝짝 쳤다. 앞을 슬쩍 보니 에드몽 부인이 놀란 표정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고, 옆에 앉아 있는 아이들은 짝짝짝 손뼉을 치면서도 나를 슬쩍 바라보고 있었다.

‘아차, 그러고 보니…….’

마침 지금 딱 하면 좋을 것 같은 일이 생각났다. 나는 의자 밑에 놓아두었던 종이봉투들을 주섬주섬 꺼냈다.

아이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아닌 척하지도 못하고 호기심이 어린 눈빛을 숨기지 못하는 게, 아무리 귀족과 황족 예법을 배웠다 해도 어린아이들이긴 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겉으로 볼 때는 어린아이지만.’

내 행동에 에드몽 부인이 의아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어머, 새런 영애님. 그것들은 무엇인가요?”

“아, 이건요. 친구들에게 나눠주려고 가져왔어요.”

“세상에! 너무 멋진걸요.”

다가와서 내가 손수 한 겉 포장을 확인한 에드몽 부인은 진심으로 놀란 듯 손을 모아 입에 가져다 댔다.

그녀의 반응에 아이들 역시 하나둘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내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그 가운데 내게 미리 선물을 받았던 제이크만이 ‘나는 저 물건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다!’는 표정으로 의기양양하게 제 자리에 앉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에 든 게 뭐지?”

황녀님은 내 손에 들린 가지각색의 봉투들을 빤히 쳐다보다 못해 결국 질문을 하고 말았다. 나는 누군가가 질문을 해주기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헤헤 웃으며 답해주었다.

“선물이에요!”

“……내 것도 있어?”

그럼요, 당연하죠.

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나는 애써 내 방정맞은 입이 정답을 말하지 못하게 꾹 다물었다.

내 침묵에 괜스레 답답해진 모양인지 니나이나는 저도 모르게 손을 꼼지락대고 있었다.

“궁금하세요?”

나는 니나이나가 매우, 매우 궁금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아니, 보기만 해도 모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일부러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질문했다.

그랬더니.

“그래. 궁금해. 그러니 어서 보여줘 봐.”

“네에.”

성공했다!

나는 속으로 의기양양한 웃음을 터뜨렸다. 왜냐하면 지금 이 ‘캐러멜로 친구 만들기 프로젝트’는 매우 중요한 작업이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한 명씩 잘 꼬셔서 내 친구로 만들지 않으면 나는 이 유치원에서 놀 사람이 제이크밖에 없단 말이다, 흑.

그러려면 일단 나는 이 아이들과 조금씩 친밀도를 높여야 했다.

그리고 친밀도를 높이려면 지금 같은 ‘황녀님과 쩌리 영애’ 관계는 아니 된다.

왜냐하면 그건 군신 관계일 뿐, 친구가 아니니까.

아무튼 나는 기쁜 표정으로 리본 색깔을 척 보고서 붉은색 리본이 달린 봉투를 내밀었다.

그 봉투를 받은 니나이나 황녀는 또다시 궁금해하는 목소리로 질문했다.

“왜 이런 붉은색이야? 나는 이것보다 더 어두운 붉은색이 좋아. 아니면 짙은 벨벳 같은 보라색이라거나.”

알고 있었다.

소설 속에 나왔던 주요 등장인물들의 호불호 목록쯤은, 말해주지 않아도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굳이 이렇게 악수처럼 보이는 수를 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아부 아닌 아부를 하기 위해서지, 후후.’

사악한 속마음은 저 멀리 묻어두고 나는 예전 황제 폐하를 뵐 때 지었던 미소를 다시금 얼굴에 띠었다.

그러고는 니나이나의 눈동자를 살포시 바라보았다.

“지난번에 말이에요, 황녀님을 처음 뵈었을 때 저는 생각했어요.”

“……응? 어떤 거?”

“니나이나 황녀님의 눈동자가 마치 보석처럼 반짝 빛나는 것 같다고요. 마치…… 루비처럼요! 엄마가 가지고 계시는 루비 반지처럼 예뻤어요.”

마지막으로, 시선을 살짝 아래로 하며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눈동자가 보석처럼 빛난다는 칭찬을 받고 기분이 좋지 않을 사람은 인격파탄자가 아닌 이상 없을 터.

분명 기뻐할 거다!

“……그런가? 내 눈동자가 루비를 닮았어?”

과연 내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엄청나게 펄쩍 뛰며 기뻐하는 건 아니었지만 아닌 척 아까보다 마음에 드는 눈길로 내 선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입꼬리가 스리슬쩍 올라가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 틈을 타 물 흐를 때 노 젓듯이 나는 말을 이어나갔다. 끝에 살짝 내 솜씨 자랑도 덧붙여서.

“네. 그래서 황녀님의 눈동자처럼 맑은 붉은색 리본으로 포장한 거예요. 부끄러운 솜씨지만…… 제가 직접 포장했답니다!”

“세상에, 그게 정말인가요. 영애님? 놀라운 솜씨군요.”

옆에서 내내 나를 지켜보고 있던 에드몽 부인이 깜짝 놀라 끼어들었다. 나는 그녀에게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놀랍긴요. 그냥 손이 가는 대로 묶었을 뿐인걸요! 헤헤. 아, 아무튼. 황녀님께 먼저 드리기는 했지만 모두에게 주려고 준비했으니 드릴게요.”

마침 내 눈에 제일 먼저 띈 노란빛 리본이 달린 봉투를 집어 들었다.

이건 금안을 지닌 세드릭에게 줄 것이었다.

사실 나는 아부의 대상인 황녀님과 황자님, 제이크의 것 이외에는 따로 리본 색깔을 정해 놓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게 웬 우연의 일치인지!

마침 나머지 선물을 포장한 리본 색깔이 각각 세드릭과 앨리스의 눈동자 색과 같았던 것이다.

오늘따라 정말로 내게 행운이 따라주는 모양이다.

나는 황녀님께 했던 것보다 한층 무심한 태도로 툭 봉투를 건넸다.

절대, 아까 비웃음에 대한 복수라고는 말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자, 받아요. 세드릭 영식.”

“……쳇. 누구더러 영식이래.”

말은 저렇게 틱틱대면서도 얌전히 두 손을 내미는 행동이 웃음을 자아냈다.

하지만 여기서 웃어버리면 평생 세드릭과는 못 친해질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 나는 가만히 그 두 손에 봉투를 올려두었다.

세드릭은 봉투를 관찰하다가 뜬금없이 질문을 던졌다.

“내 건 노란 리본이야? 나도 눈동자가 노란색이라 리본이 이래?”

“글쎄요. 세드릭 거는 그냥 아무 리본이나 묶어서 잘 모르겠는데요.”

“……뭐?”

‘너에게 관심 없는데?’라는 뜻을 노골적으로 표현하며 흥 콧방귀를 뀌었더니 세드릭이 인상을 찌푸렸다.

저렇게 황당해하는 반응을 보고 있자니 속으로 킥킥 웃음이 나왔다.

다시 말하지만 절대로 쪼잔한 복수가 아니다.

‘저거 봐. 입이 댓 발 튀어나왔잖아.’

하지만 꼬맹이를 대상으로 이런 거짓말을 하는 것은 교육상 좋지 않기 때문에, 나는 말을 곧바로 정정했다.

“사실 거짓말인데. 헤헤.”

“뭐!”

“거짓말이라고요. 눈동자 색 맞아요. 아, 아무튼…… 저기, 앨리스?”

이쯤에서 말을 돌리자고 결심한 나는 재빨리 나를 둘러싸고 있는 아이 중에서도 저만치 뒤로 비켜나 있는 아름다운 금발의 아이에게 말을 걸었다.

앨리스는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다 화들짝 놀라 말을 더듬으며 되물어 왔다.

“……네? 네? 저, 저…… 말이에요?”

또래보다 키가 작은 앨리스는 아이들 틈 사이로 이마와 눈만 간신히 보이는 정도였다.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틈을 비집고 앨리스에게 다가갔다.

“맞아요. 저 앨리스 영애에게도 선물을 준비했어요. 보세요. 영애의 눈동자 색을 닮은 예쁜 은색 리본이에요.”

앨리스에게 건넨 봉투는 과연 예쁜 은사로 엮어진 리본으로 묶여 있었다.

진짜 은을 얇게 펴서 뽑은 실로 만들어서일까, 빛이 나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드는 리본이다.

“……예뻐요.”

앨리스는 제게까지 선물이 올 줄 몰랐다는 눈치였다.

그러고는 커다란 은안으로 멍하니 봉투를 바라보다 이내 내게서 가져가 제 품에 꼬옥 안았다.

“감사합니다…… 저 선물 처음 받아 봐요.”

순간 앨리스가 말한 대답에 가슴 속 무언가가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원작을 모두 읽은 독자로서 앨리스의 과거, 아니, 지금은 현실이려나. 아무튼 앨리스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더욱더 그랬다. 하지만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밝게 답했다. 여기서는 이래야만 했다.

“헤헤, 앨리스 영애에게 첫 선물을 준 게 저라니 저도 기뻐요.”

앨리스는 이내 눈을 깜빡이다 고개를 푹 숙였다.

하지만 그 짧은 찰나의 순간 나는 보고 말았다.

앨리스의 커다란 은색 눈동자에 이슬처럼 그렁그렁 눈물이 고여 있는 것을.

‘아, 내가 울린 건가…….’

나는 잠시 우물쭈물 망설이다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다행히 오늘은 쓸 일이 없어, 곱게 빨아 놓은 그대로 포근한 냄새가 났다.

“여기, 앨리스. 받아주세요.”

나는 다른 아이들과 선생님이 앨리스를 보지 못하게 슬쩍 몸으로 가리며 손수건을 건넸다.

자신이 우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아 하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항상 앨리스는 작중에서 눈물을 흘릴 때면 남몰래 구석에 숨어서 울고는 했다.

난 앨리스가 창피한 기분을 느끼게 하고 싶지 않았다.

앨리스는 그 흔한 훌쩍이는 소리 하나 없이 조용히 눈물을 흘리다 아무 말 없이 손수건을 가져갔다. 얼핏 작게 ‘고마워요……’라고 한 것 같기도 했다.

“뭐야, 앨리스만 선물 더 주는 거야? 나쁘네.”

뒤에서 그런 내 행동을 오해한 세드릭의 조잘거림이 들려왔지만 나는 앨리스의 눈가에서 눈물이 그칠 때까지 계속 앨리스를 가리고 있었다. 뭐, 그래 봐야 한 1분쯤이었지만.

앨리스는 언제 울었냐는 듯 발개진 눈가로 손수건을 만지작거리다 나를 향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눈길을 보냈다.

나는 앨리스에게 손수건은 가져도 된다고 말해주었다. 어차피 저 손수건, 캐리가 자수 놓는 게 취미라서 집에 한 100장 넘게 쌓여 있다.

나는 앨리스가 제자리로 돌아가 무릎 위에 놓인 선물을 조심히 쓰다듬으며 고개를 숙이는 것까지 확인한 이후에야 일부러 밝은 목소리로 돌아섰다.

“으음…… 마지막 선물이 남았어요. 저, 황자 전하?”

“그래.”

다른 아이들이 모두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을 때 홀로 시크한 태도를 유지하며 책을 보고 있던 니콜라스가 곧바로 답했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도 사실은 은근히 자신의 순서가 안 오니 신경 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직 내 손에는 두 개의 선물이 들려 있었는데 나는 그중 황녀님의 것과 같이 붉은 리본이 달린 봉투를 니콜라스에게 내밀었다. 니콜라스는 책에 시선을 고정한 채 가볍게 봉투를 가져갔다.

“고맙다.”

“네에, 별거 아닌걸요. 헤헤.”

그리고 마지막 남은 하나.

나는 황자 전하에게서 휙 돌아서며 아까보다 한층 밝아진 얼굴로 에드몽 부인에게 다가갔다.

그녀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나를 반겨주었다.

“어머, 어머. 새런 영애님. 설마 제 선물도 준비해 주신 건가요?”

“네에. 당연하죠. 제 선물을 받아주시겠어요, 에드몽 선생님?”

에드몽 부인은 기쁜 미소를 지으며 내가 건넨 봉투를 받아 들었다.

이로써 모두 공평하게 하나씩 뇌물, 아니, 선물을 돌렸다!

그럼 이제 할 일은…… 음? 쟤는 왜 또 우리 제이크에게 시비를 걸고 있대?

“어이, 테이온 공자. 혼자 선물을 못 받은 거야?”

어느새 세드릭은 봉투를 열어 그 안에 든 캐러멜을 먹으며 테이온에게 다가가서 묻고 있었다. 다분히 놀리는 투였다. 물론 제이크의 표정은 여유만만했다. 선물을 못 받은 게 아니라 먼저 받은 것이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그것도 모르는 세드릭은 ‘흐음’ 하고 한숨을 쉬더니 선심 쓰듯이 봉투를 뒤적거려 개중 가장 못난 모양을 한 캐러멜을 집어 들어 제이크에게 건넸다.

“자, 받아. 공자가 불쌍해서 특별히 주는 거니까!”

“……내가 불쌍하다고?”

제이크는 알 수 없는 미소를 짓더니 곧 의자 뒤편으로 돌아가서 그 밑에 넣어 둔 봉투를 꺼냈다. 척 보기에도 다른 아이들에게 나누어 준 것보다 배는 큰 봉투를.

제이크는 피식 웃더니 세드릭의 눈앞에 그 봉투를 달랑달랑 흔들어 보였다.

“이게 뭘로 보여?”

“……뭐야, 너. 못 받은 줄 알았더니. 게다가 네 것만 왜 이렇게 큰 거야?”

세드릭은 한껏 당황한 표정으로 주춤했다. 다른 아이들은 각자 제자리로 돌아가 선물을 뜯어보는 중인데, 어쩐지 두 사람 사이의 분위기만 유독 험악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물론 다 먼저 시비를 건 세드릭 때문이다.

‘그러니까 왜 우리 제이크를 건드리고 그러니. 얘 은근히 화나면 차가워진다고.’

제이크를 마음속으로 응원하는 것과는 별개로 싸움은 나쁜 거다.

혹시나 두 아이 간에 다툼이라도 일어날까 싶었기에, 슬쩍 일어나 둘 사이에 끼어들려 했다. 하지만 일어나기도 전, 제이크가 담담한 목소리로 대꾸했기에 일단 더 지켜보기로 했다.

제이크는 평소의 얌전하던 얼굴이 아닌 새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세드릭이나 말할 법한 얄미운 말투는 덤이었다.

“대공자는 모르겠지만 저는 에미르와 아주 친한 사이예요. 태어날 때부터 친했던 소꿉친구거든요. 서로 애칭도 불러요, 우리는. 그렇지, 미르?”

“으응? 아, 그렇지. 제이.”

제이크가 나를 바라보며 동의를 구했다. 얼떨결에 지켜보고 있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내가 그렇다고 답하자마자 제이크는 거보란 듯 콧대를 높였다. 세드릭은 입술을 깨물며 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쯤에서 나는 한 가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다.

제이크가 원래 저렇게 나와의 친분을 과시하고 다니던 아이던가……?

그렇지만 곧이어 이해했다.

하긴, 이맘때 아이들은 친구에 대한 집착도 꽤 강하니까 그럴 수도 있다고.

나 역시 제이크는 하나뿐인 소꿉친구로 어느 정도 가족 같은 애착을 갖고 있으니까…… 그런 종류의 애착 관계라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쳇.”

결국 세드릭은 캐러멜에서 막대기를 쏙쏙 빼내 한 번에 다 입안에 털어 넣은 채 꿍얼대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어찌어찌 싸우지 않고 일이 잘 해결된 것 같아 좋긴 한데, 제이크와 세드릭 사이는 과연 되돌릴 수 있는 걸까 싶다. 처음부터 이렇게 삐걱대면 어쩌자는 거니!

‘내 목표는 사이좋게 다 같이 친해지는 건데.’

목표를 이루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만 깨닫게 되는 것 같다.

……잘해낼 수 있을까.

* * *

아무튼 캐러멜로 인해 상당히 유연해진 분위기는 썩 기꺼웠다.

앨리스는 봉투가 무슨 가보라도 되는 양 소중히 품에 안은 채 하나도 손대지 않았고, 니나이나 황녀는 처음 맛보는 다과치고 나쁘지 않다며 딸기 맛을 집중적으로 골라 먹는 게 보였다.

세드릭은 아까 홧김에 한 번에 털어 넣은 캐러멜을 다 먹어버린 후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 니콜라스 황자는 책을 보면서 약 5장에 한 번꼴로 새 캐러멜을 꺼내 먹고 있었고, 제이크는…….

“자, 아- 해봐. 미르.”

“아……?”

양이 두 배라서 너무 많다며, 자신이 하나 먹을 때면 꼭 똑같은 맛을 골라 내 입에도 넣어주었다. 이런, 어제 만들면서 실컷 먹어서 이젠 조금 물리는 참이었는데.

‘그래도 제이크가 직접 주는데, 거절할 수도 없잖아. 으씨.’

덕분에 나는 꾸역꾸역 주는 대로 아기 새처럼 잘만 받아먹었다.

……사실 단 걸 너무 먹었더니 매운 음식이 자꾸만 당기는 중이었는데 말이다.

근데 이 세계는 매운 음식이 없단 말이지, 이런 젠장. 흑.

아무튼 앨리스를 제외한 모두가 캐러멜을 거의 다 먹었을 즈음, 나가 있던 에드몽 부인이 다시 들어왔다. 그녀는 난감한 표정으로 아직 교육을 담당하기로 한 교사들이 일정이 꼬인 탓에 오지 못했다는 희소식(?)을 우리에게 전했다.

아차. 이 나이에 뭐 벌써부터 교육인가 하면, 이 세계도 명문가 자제들에게는 조기교육이 있게 마련이다. 기초적인 사교 예법부터 시작해서 각종 기본 교양은 아카데미에 들어가기 전 미리 가정교사를 초빙해 배우고는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은 가정교사가 아닌 단체 수업을 받게 되었다. 아무래도 명색이 제국 유치원이라는 이름이 있는데 놀기만 하면 안 되기 때문이겠지.

그래서 결론은 오늘은 수업이 없다는 소리이다.

‘만세! 공부 안 한다.’

솔직히 말해서 속마음은 너무나도 기뻤지만 겉으로 그걸 티 냈다가는 앞으로 에드몽 부인이 볼 내 이미지가 상당히 손상되기 때문에, 나는 아쉽다는 표정을 연기하고 있었다.

“그럼 일단, 자유 시간을 갖도록 할게요. 또한 정오가 되면 점심 식사가 있을 예정이에요.”

‘점심 식사라고?’

에드몽 부인의 설명을 들은 나는 눈을 반짝였다.

마침 배가 고파오던 차였기에, 캐러멜로만 배를 채우던 우리에겐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래. 이런 성장기엔 많이, 자주 먹어줘야 한다고.

‘어떤 식사가 나올까…… 궁금하다.’

사실 아까 유치원 건물을 둘러보던 와중 저 한편에 주방으로 보이는 시설이 별도로 붙어 있는 걸 봤었다.

전생의 학교에서처럼 단체로 식판에 밥을 먹는 것인지, 아니면 도시락처럼 따로 특별 로얄 음식이 제공되는지 너무 궁금했다!

물론 우리 후작저의 요리도 훌륭하지만, 원래 이렇게 단체로 먹는 음식은 평소보다 더 맛있는 법이잖아.

‘기대된다.’

그렇게 내가 한창 식사에 대한 부푼 꿈을 가지고 상상을 하고 있을 때.

갑작스레 황녀님의 또박또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들 주목해 주길.”

“……!”

고개를 돌렸더니 어느새 의자에서 일어나 있는 니나이나 황녀가 보였다.

때마침 문이 열리고 황실의 시종 복장을 한 이들이 무언가를 가지고 오는 게 보였다.

그 묵직한 물체가 무엇인지 알아차린 나는 그만 놀라고 말았다.

‘아, 아니, 저건?’

물건의 정체는 다름 아닌 넓은 탁자였다.

하지만 그냥 탁자였으면 내가 놀라지도 않았겠지.

황금 칠이 되어 있고, 가운데엔 황실의 문장이 새겨져 있는 탁자.

다름 아닌 황실 접견실에 놓여 있던 것과 똑같은 물건이었다.

저런 귀한 물건이 어째서 여기에…… 아.

‘황녀님과 황자님이 계시지.’

나는 곧바로 수긍했다.

그래, 뭐 살다 보면 사적인 용도로 황실 용품을 사용하게 될 기회도 오고 그러는 거지.

이런 기회 흔치 않다.

“자리를 바꿀 거야.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줘. 이 책상을 중심으로 모여 앉을 거니까.”

황녀님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 1분쯤 지났을까. 아까의 널찍한 자리는 어디 가고 황실 탁자를 중심으로 빙그르르 둘러싼 형태의 의자에 모두가 앉게 되었다.

니나이나는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카데미에서는 이렇게 앉는다고 했어.”

어쩐지 아까 자리 배치를 보고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을 짓고 있더라니, 이것 때문이었구나!

아무래도 니나이나 황녀님은 아카데미가 정말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유치원이 아니라 거의 리틀 아카데미 수준이다.

아. 자리를 바꾼 이후로 어떻게 앉게 되었느냐면, 긴 직사각형 모양의 탁자 상석에 각각 니나이나와 니콜라스가 마주 보고 앉았다. 나는 제이크와 같은 편에, 그 맞은편엔 앨리스와 세드릭이 앉았다.

한마디로 매우 친해지기 좋은 자리 배치였다.

‘아까는 너무 자리가 떨어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차라리 잘됐어.’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친해지기에 딱이었다.

* * *

물론 처음에는 다들 얼굴을 마주 보고 있는 게 어색하게 느껴지는 듯했다.

하지만 내 시도로 간단히 소소한 대화들을 나누며 조금씩 분위기가 어수선해지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기다리고 기다리던 시간이 되었다.

뎅- 뎅-

벽 한쪽에 걸린 괘종시계가 정오를 알렸을 때, 나는 기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심시간이다!

“새런 영애, 왜 일어나는 거야?”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고 니콜라스가 들고 있던 책을 건네받아 읽고 있던 니나이나가 질문했다.

“점심시간이 되었으니까요!”

내가 밝게 대답하자, 니나이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로 몇 장 넘기다 만 책을 덮고 다시 니콜라스에게 건넸다. 아무래도 책이 재미가 없어도 너무 없었던 모양이다. 그러고는 또다시 같은 질문을 했다.

“그런데 왜 일어서? 점심은 이곳에서 먹을 건데. 아, 저기 마침 오는구나.”

황녀님의 말을 듣고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헉, 진짜다. 문이 조심스럽게 열리고 바퀴가 달린 흰 카트가 부드럽게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또, 식당에 가서 먹는 줄 알고!’

조금 부끄러워진 나는 그대로 슬그머니 주저앉았다.

첫인상이 중요한데, 먹을 걸 너무 밝히는 아이로 모두에게 인식된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뭐, 제이크는 내가 먹는 걸 좋아한다는 걸 이미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 제외.

“응……?”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황실 문양이 작게 새겨진 요리복을 입은, 황실 요리사들이 들어오는 건 그렇다 치자.

저 뒤로 들어오는 시녀들은 대체 누구란 말이야?

“혹시나 모를 암살의 위협을 위해, 아바마마께서 친히 허락해 주신 기미 시녀들이지.”

내 의아한 눈치를 알아챘는지 니나이나가 설명해 주었다.

나는 헉하고 입을 벌렸다. 세상에나, 후작 영애로 태어나서 기미 시녀를 보는 건 처음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내 입은 좀처럼 다물어질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줄줄이 들어오는 음식이 담긴 카트들이 끝이 없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황실에서의 레시피로 만든 특제 코스 요리들이란다.

“먼저 전채 요리입니다. 영애님. 기미를 마친 후에 드셔 주십시오.”

시녀들은 우리 6명에게 한 명씩 배정되어 기미를 해주는 한편으로 메뉴에 대해 하나씩 설명을 해주는 역할까지 해주었다.

나도 모르게 포크로 손이 먼저 가려던 찰나 시녀의 말을 듣고 민망한 기분과 함께 멈추었다.

전채 요리와 함께 나온 식전 음료는, 황실 정원에서 기른 포도로 만든 생과일주스였다. 이후로도 계속해서 나오는 요리들에 나는 끝도 없이 감탄했다.

‘우와, 수프에 금가루가 장식으로 얹어져 있잖아?’

역시 황실 요리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기미가 끝난 요리들을 맛보기 시작했다.

너무 맛있었다!

그리고 오늘의 메인 메뉴는 다름 아닌 해산물이었다.

남쪽을 제외한 삼면이 내륙과 인접해 있는 제국에서 좀처럼 맛보기 힘든 재료였지만, 오늘만큼은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아, 이렇게 말하면 뭔가 후작저의 요리를 별로라고 말하는 느낌인데 그건 절대, 절대 아니다. 믿어줘요, 주방장! 흑.

아무튼 나는 굉장히 만족스러운 점심 식사를 마쳤다.

하지만 내가 미처 눈치채지 못한 게 있었으니.

“영애는 굉장히 복스럽게 드시는군요!”

에드몽 부인의 감탄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주위에서 나를 신기한 눈빛으로 쳐다보는 아이들의 시선을.

또한, 내가 이 유치원에서 다름 아닌 먹보로 찍혀 버렸다는 걸.

……응? 내가 생각했던 내 이미지는 이런 게 아닌데.

망했다.

* * *

덜컹, 덜컹.

집으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나는 창밖을 보며 고민에 빠졌다.

내 유치원 생활, 이대로 먹보여도 괜찮은 건가?

‘에이, 몰라. 될 대로 되겠지.’

하지만 이내 고개를 털어버리며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대 누우며 흥 콧방귀를 뀌었다.

어차피 내 겉모습은 6살. 먹을 걸 조금 밝혀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니까.

‘제이크한테 물어보기도 했고 말이야.’

아까 점심 식사 이후에 조금 일찍 파하기로 결정 났을 때, 나는 슬그머니 제이크에게 다가가 물어보았었다.

‘제이크, 나 혹시 아까 걸신들린 것처럼 먹었니?’

‘응? 아니, 엄청 귀엽고 멋지게 먹었어.’

제이크는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었다. 딱히 거짓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는데…….

귀엽고 멋지게라는 말도 안 되는 수식어가 왠지 신뢰도를 조금 낮추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제이크의 말을 한번 믿어보기로 했다. 앞으로는 새런가의 명예를 위해 조금 더 차분하게 식사할 것을 다짐하면서.

“아가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다 도착했어요. 내리셔야죠.”

“아? 그러네. 벌써 도착했구나…….”

그렇게 생각에 빠져 있을 때 내 손을 슬그머니 톡톡 두드린 캐리의 손길에 정신을 차렸다. 뒤늦게서야 마차에서 내린 후 캐리는 아까부터 내가 조금 멍해 보인다며, 혹시 유치원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고 캐물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것도.”

“흐음. 그런 말 굉장히 수상하게 느껴지는 거 아세요, 아가씨? 아무것도가 아닌 것 같은걸요. 이 유모는 몹시 걱정되네요. 혹시…… 아가씨가 어제 말씀하신 걸 실패하신 거예요?”

캐리는 가느다랗게 눈을 좁히며 나를 보다가 이내 한숨을 쉬며 물었다.

안다, 그녀가 나를 부모님 못지않게 사랑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그러니까 이런 우울한 태도를 보이는 건 조심했어야 했는데.

‘걱정시키긴 싫어.’

결국 나는 입꼬리를 올리며 밝은 미소를 지은 채 답했다.

“진짜 아니라니까? 어제 말했던 캐러멜 나눠주기 프로젝트도 완벽하게 성공했어, 유모.”

“어머, 그래요? 그럼 친구도 많이 사귀셨어요?”

갑작스레 정곡을 찔러오는 질문에 그만 입이 다물어졌다.

생각해 보자, 오늘 한 일들을 과연 친구를 사귀었다고 할 수 있을까?

……첫 만남인 것치고는 많이 가까워지긴 한 것 같은데.

“으응, 다 친해진 것 같아. 헤헤.”

“다행이네요. 아가씨가 유치원에 가신 이후로 이 유모는 계속해서 걱정했답니다. 그래서 하원 시간이 되기도 전 미리 가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어쩐지 예정 시간보다 일찍 끝났는데도 곧바로 마차가 대기하고 있다 했는데, 그래서였어?

나는 어쩐지 코가 찡해지는 걸 느끼며 유모를 폭 끌어안았다.

“고마워, 유모.”

“아이참, 우리 아가씨가 오늘따라 왜 이러실까. 그보다 어서 들어가요. 주인님과 마님께서 아가씨를 기다리고 계세요.”

“앗, 정말?”

엄마와 아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소식에 나는 기쁘게 발걸음을 빨리했다.

저택 안으로 들어가자 보이는 고용인마다 모두 내게 안부를 물었다.

유치원 잘 다녀왔냐는, 그런 뻔하지만 다정한 안부였다.

“으응, 진짜 재밌었어!”

음식도 맛있었고. 하지만 덕분에 먹보가 되어버렸지 뭐야.

내 너스레에 하나같이 다들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엄마와 아빠 역시도…….

“칫, 그렇게 재밌으세요?”

“아니, 상상해 보니 너무 귀엽지 뭐니. 우리 딸이. 자꾸 웃음이 나오는구나.”

“하하, 어쩜 좋니. 우리 미르. 유치원에서 그런 일이 있었구나.”

내 이야기를 듣고 너무 웃은 나머지 눈물까지 비춘 부모님을 보며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뭐, 웃는 건 건강에 좋으니까. 웃음을 주었다면 그걸로 만족한다.

“아 참, 미르. 혹시 괜찮다면 오후에 함께 외출하지 않을래?”

“외출이요? 어디로 가는데요?”

그래도 살짝 꿍해 있던 그 찰나, 엄마가 넌지시 외출 제안을 해왔다.

집에만 있기엔 심심하기에 순간 눈이 번쩍 뜨여 꿍한 것도 잊어버리고 되물었다.

“어디냐면…….”

엄마가 내 귓가에 속닥인 그 비밀의 장소를 들은 순간 나는 기쁘게 외쳤다.

“네, 갈게요!”

* * *

한편 황궁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어린 황녀가 드레스룸에 갑작스레 찾아와 소파에 턱 걸터앉아 하는 주문에 의상 전담 시녀는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도 그럴 게, 평소 황녀의 취향에 맞지 않은 요구였기 때문이다.

“황녀님, 정말로 루비 반지보다 밝고 전하의 눈동자처럼 맑은 빛깔의 붉은빛 드레스를 말씀하신 건가요?”

“그래, 맞아.”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전하. 금방 찾아보겠습니다.”

말은 찾아보겠다고 했지만, 사실 그녀는 이미 반쯤은 예상하고 있었다.

‘하아, 어쩐담.’

이 광활하게 넓은 드레스룸에 ‘루비 반지보다 밝고 니나이나 황녀의 눈동자처럼 맑은 빛깔의 붉은빛 드레스’는 없을 게 분명하다는 것을.

‘평소 그렇게 짙은 색의 옷감만 선호하시던 분이, 어째서 갑자기 취향이 변하신 걸까?’

니나이나 황녀는 평소 어두운 붉은색이나 보라색, 혹은 남색 계열의 원단으로 된 의상을 즐겨 입고는 했다.

그것도 시폰 같은 가벼운 옷감보다는 벨벳이나 공단 같은 무게감 있는 옷감을 선호하는 편이었다.

노란색? 흰색? 분홍색? 그런 종류의 원단은 니나이나의 사전엔 존재하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심지어 붉은색이라니!

‘갑자기 취향이 변하셨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지. 오늘 유치원에 다녀오시더니 무언가 심경의 변화가 있으셨던 게 틀림없어.’

시녀의 추리는 아주 정확했다.

지금 니나이나의 머릿속엔 오로지 아까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뿐이었다.

그러니까…….

‘니나이나 황녀님의 눈동자가 마치 보석처럼 반짝 빛나는 것 같다고요. 마치…… 루비처럼요! 엄마가 가지고 계시는 루비 반지처럼 예뻤어요. 그래서 황녀님의 눈동자처럼 맑은 붉은색 리본으로 포장을 한 거예요.’

……라고 말하던 에미르 새런의 밝은 미소가 자꾸만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평소 밝은색의 드레스 따위 줘도 안 입는 니나이나였지만, 어째서인지 오늘부터는 밝은 붉은색을 좋아하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물론 절대로 그 새런 후작가의 영애가 한 말 때문은 아니었다. 적어도 니나이나 스스로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뭐, 그래도 보는 눈은 좀 있는 영애였지. 확실히 내 눈동자는 루비를 닮았어.’

드레스룸의 소파에 기대 거울을 보면서 니나이나는 생각했다.

왼손에는 작년 생일선물 중 하나로 받았던 작은 루비 알 반지를 낀 채였고, 니나이나는 시녀가 올 때까지 계속해서 그 반지에 달린 루비와 제 눈동자를 번갈아 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잠시 후 의상 시녀가 붉은 드레스 두어 벌을 가지고 돌아왔을 때, 그제야 니나이나는 고개를 들었다.

“황녀 전하, 제가 드레스를 모두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습니다만 전하께서 말씀하셨던 빛깔과 제일 비슷한 드레스는 두 벌밖에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일단은 이것들을 입어보시고, 곧바로 황실 디자이너에게 새로운 드레스를 만들라 명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뭐, 어쩔 수 없지. 일단 저 왼쪽 걸 먼저 입어볼 테야.”

니나이나는 기분이 그다지 나쁘지 않은 듯 피식 웃으며 왼쪽의 드레스를 가리켰다.

얼마 전 타 왕국의 상인이 황궁에 방문하면서 황녀를 위해 진상한 물품 중 하나였다. 서국의 비단으로 만들어 옷감이 하늘거리고 큰 붉은 리본이 가슴께에 달려 있는 드레스였다. 평소 같았으면 원단부터 시작해 리본 장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퇴짜를 놓았을 테지만, 이번엔 어째서인지…….

“리본이 마음에 들어.”

“마음에 안 드시면 어쩔 수 없, 아니. 네? 마음에 드신다고요?”

여차하면 리본을 떼어내 새롭게 수선할 예정이었던 시녀는 예상과 다른 말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니나이나는 드레스 중앙의 리본을 뚫어져라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휙 돌리며 답했다.

“그래. 꼭 그 리본처럼 생겼거든.”

에미르 영애가 준 선물에 달려 있던 거 말이야.

“뭐지.”

문을 열고 들어오는 한 인영에, 흔들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니콜라스는 혼잣말하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마주친 니나이나의 자신감 넘치는 표정에 한 번 더 고개를 갸웃했다.

항상 불만족스러워 보이거나 까칠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다니던 니나이나가 아니었다.

니콜라스는 저도 모르게 질문했다.

“니나이나? 아니면 니나이나를 닮은 주술 인형인가?”

“아니거든, 오라버니?”

뭔 소리를 하냐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되묻는 니나이나에 니콜라스는 ‘흐음, 아닌가’ 하고 한숨을 쉬며 다시 책을 보기 위해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그러고는 한쪽 손을 훠이훠이 저으며 툭 말을 내뱉었다.

“왜 찾아왔어, 니나이나?”

명백히 좀 가 달라는 압박이 가득한 말투에도 니나이나는 굴하지 않고 떡하니 그 자리를 지켰다.

니나이나가 이곳으로 온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 영애 때문에, 아니지. 오늘따라 밝은 붉은색 드레스가 끌린 나머지 처음으로 이 옷을 입어 봤는데 아무래도 객관적으로 봐 줄 사람이 니콜라스밖에 생각나지 않아서였다.

‘시녀나 시종은 하나같이 ‘고아하고 품격 있는 황녀 전하에게 너무 잘 어울리시옵니다-’ 같은 판에 박힌 칭찬만 해댄단 말이지. 그런 입에 발린 말들로는 객관적인 어울림을 판단할 수가 없어.’

그들은 아마 니나이나가 온몸에 다이아몬드를 몇천 개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도 비슷한 칭찬을 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시녀나 시종들이 잘못한 게 아니란 건 니나이나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저 나를 두려워할 뿐이지.’

하여간 그래서 아바마마나 어마마마께 가 보려고 했지만, 두 분 다 매우 바쁘시다기에 니나이나는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의 방향을 이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오라버니, 내가 지금 입고 있는 옷에 대해 어떻게 생각해.”

“……어떻냐고?”

솔직히 겨우 이런 질문을 하기 위해 제 독서 시간을 방해했냐고 되묻고 싶었지만, 니나이나가 이렇게 기분 좋은 채로 돌아다니는 건 정말로 손에 꼽을 일이라서 니콜라스는 이번 한 번만 너그러이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니콜라스는 책을 읽기 전 한쪽 귀에 꽂아놓았던 만년필을 뽑아 빙그르르 돌리며 생각에 잠겼다. 무언가 중요한 판단을 해야 할 때면 나오는 버릇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좀 평소답지 않다고 해야 하나.’

타인의 행색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는 니콜라스였으나 제 여동생이 평소에 어떤 차림을 즐겨 하고 다니는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저런 밝고 하늘거리는 옷은 원래 질색하며 저리 치우라 명하던 니나이나였다는 것도.

‘근데 왜 저걸 입고 저렇게 기분이 좋아 보이냐는 거지.’

니콜라스의 사고로는 도저히 원인(새 드레스)과 결과(기분이 좋음) 사이의 상관관계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니콜라스는 그냥 되는 대로 답했다.

“평소의 네 취향은 아니야. 하지만 네게 안 어울리는 것도 아닌데. 특히 지금 네가 하고 있는 반지랑은 잘 어울리는 것 같네.”

“아, 역시 오라버니도 그렇게 생각하지?”

니나이나의 목소리가 조금 커졌다. 기쁜 기색이 역력했다.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라 니콜라스는 놀랐다. 왜 그리도 성의 없는 답변을 하냐면서 화낼 줄 알았는데?

“그 영애 말이야.”

그리고 다음 순간 니나이나가 뜬금없이 언급한 인칭대명사에 니콜라스는 곧바로 대꾸했다.

“그 영애라 하면 누군지 몰라. 무슨 영애를 말하는 거야?”

“오늘 유치원에서 만난 영애. 그…… 에미르 새런?”

“아.”

에미르의 이름을 듣자마자 니콜라스는 곧바로 그 아이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었다. 새런 영애라, 맞다. 그 영애가 주었던 캐러멜도 생각났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서 그 영애 이름이 왜 나오는 거지?

“오라버니도 기억하지? 그 새런 영애가, 나더러 눈동자가 루비를 닮았다고 했잖아.”

“……그랬지.”

사실 니콜라스는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니콜라스의 기억은 책이나 유용한 지식 위주로 돌아갔기 때문에 일상의 사소한 대화는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아무튼 고개를 끄덕인 니콜라스에 니나이나는 신이 나 말을 이었다.

“근데, 돌아와서도 자꾸 그 말이 생각나고 그래. 그래서 오늘 드레스도 이걸로 입은 거야. 예전엔 입기 싫었는데 오늘은 예뻐 보여서 입고 싶더라.”

“아하.”

한마디로 그 영애가 해준 칭찬에 푹 빠져 취향까지 바뀌었다는 소리다.

니콜라스는 한 방에 니나이나의 상태를 이해했다.

“봐, 이 리본과 색깔이 비슷해.”

“……이건 캐러멜 봉투를 포장했던 리본 아닌가? 안 버려?”

니나이나가 내민 손안의 리본은 얼마나 애지중지하고 있었는지 꼭 5년도 더 된 리본처럼 보였다. 니콜라스가 의아하게 되묻자 니나이나는 확 표정을 굳혔다.

“이 리본을 버리라고?”

“그래. 붉은 리본이 갖고 싶은 거면 시녀에게 말하면 되잖아. 얼마든지 이보다 좋은 리본이 있는데 왜 꼬질꼬질한 걸 가지고 있는 거야.”

사실을 말해준 것뿐인데 니나이나는 아무 말이 없었다.

정말로 이상했다. 평소였으면 자신이 그 리본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 이유를 줄줄이 말할 니나이나였는데, 왜 입을 꾹 닫고 있는 것일까.

정답은, 니나이나 자신도 사실 몰랐기 때문이다.

왜 오늘 유치원에 갔다 온 뒤로 이상하게 기분이 좋은지.

왜 이 해진 리본을 버릴 수가 없는지.

“……그냥.”

그래서 니나이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그냥, 이라고.

* * *

한편, 어느 대공가의 마차 안엔 또래의 두 아이가 타고 있었다.

다름 아닌 세드릭 베드몬과 앨리스 로즈였다.

공녀임에도 불구하고 따로 가진 가문 마차가 없는 앨리스 탓에 세드릭은 앞으로 계속해서 유치원에 갈 때마다 앨리스와 함께 마차를 타야만 했다. 왜냐하면 앨리스와 세드릭은 가문 간 태중 약혼을 한 상태였으니까.

“아씨, 뭔 약혼자는 약혼자야. 어이가 없어서.”

창가에 기대어 잠든 앨리스를 한 번 힐끗 본 이후 세드릭은 푸념을 내뱉으며 괜스레 다리를 의자 위로 올려 삐딱하게 앉았다.

먼저 로즈 공작저에 내려 앨리스를 데려다준 후, 대공가로 가야 하기에 아직 집에 도착하려면 한참이나 남았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면 세드릭은 심심했다.

제 약혼자라는 앨리스 로즈라는 애는 약혼자는커녕 친구로 삼기에도 재미없는 아이였다. 차라리 저처럼 성질머리가 더러워서 치고받고 싸울 만한 아이인 편이 나았다.

열 번 말 걸면 한두 번 답할까 말까인데, 이제 유치원에 다닐 동안 이 재미없는 아이랑 함께 계속해서 등하원을 해야 하다니! 세드릭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심지어 만난 지 한 일주일밖에 안 되는 사이인데, 글쎄 아버지께서 ‘앨리스는 네 약혼자이니 잘 챙겨주어야 한다’ 따위의 명령을 내리셨다.

물론 그런 가주의 명령 따위 돈 주면서 부탁해도 안 할 세드릭이었기에, 이미 그 명령은 머릿속에서 지워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역시 아무것도 안 하고 있기엔 더 심심했다.

결국 이 재미없는 앨리스라도 깨워 뭐라도 말을 걸어야 이 답답함이 풀릴 것 같았다.

“어이.”

“…….”

“야, 일어나 봐.”

“…….”

세드릭은 큰 목소리로 앨리스를 불렀지만, 앨리스는 속눈썹 하나 떨리지 않고 계속 기대 잠든 채였다. 깊게도 잠들어 있었다. 품에 무언가를 꼬옥 안은 채로.

‘저건 또 뭐야?’

그러고 보니, 아까는 눈여겨보지 않아 몰랐는데 앨리스가 안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캐러멜 봉투였다. 몇 시간 전 유치원에서 에미르 새런이 모두에게 나눠주었던 것.

‘아직까지 안 먹고 뭐 하는 거지? 모셔두고 있는 거야, 뭐야.’

세드릭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고 보니…… 그 캐러멜, 꽤나 맛있었지.

세드릭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사실 그때 한 번에 남은 걸 털어 넣어 먹은 이후로, 아껴 먹을 걸 하는 후회가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조금만 달라고 해볼까.’

마침 마차가 흔들리면서 앨리스의 눈이 살며시 뜨였다. 세드릭은 삐딱하게 물었다.

“야, 앨리스 로즈.”

“……왜요?”

앨리스는 경계심 어린 눈빛으로 세드릭을 응시했다. 세드릭은 사실 그런 앨리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소심한 것도 소심한 건데, 왜요가 뭐야. 왜요가.

“반말하라니까? 왜 자꾸 존댓말하고 그러는데. 낯간지럽게.”

하지만 여전히 앨리스는 세드릭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아오.’

세드릭은 결국 앨리스와 말을 트는 걸 포기했다. 대신 원래의 목적대로 캐러멜이나 달라고 할 셈이었다.

“그래, 그럼 그 이상한 존댓말은 그렇다 쳐. 혹시 너 그거 안 먹냐? 안 먹을 거면 나 줘라.”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싫어. 이건 에미르 영애가 나한테 준 거야.”

처음으로 앨리스가 세드릭에게 의사 표현을 똑바로 하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반말로 거절을.

“아,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세드릭은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지만 앨리스가 자신에게 저렇게 적대적인 태도로 대답한 것이 거절 그 자체보다 더 놀라워서 순순히 물러났다.

그렇지만 한 5분쯤 지나니 정신이 차려지고, 뭔가 자신이 진 것 같은 기분이 든 세드릭은 혼잣말을 툭툭 내뱉으며 거짓말을 했다.

“하나도 안 아쉬워. 어차피 그런 캐러멜은 가게에서도 파는걸.”

“…….”

“아씨.”

하지만 역시 이런 자질구레한 변명을 덧붙일수록 자신이 더욱 초라하게 느껴지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세드릭은 속으로 인정해야만 했다.

캐러멜이 아쉬운지, 아니면 그걸 준 에미르 새런과 친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 아쉬운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마음이 허전하고 텅 빈 것만 같았다.

‘그때 시비 걸지 말걸 그랬나.’

살짝 후회하는 마음이 들 때쯤, 세드릭은 고개를 저어 생각을 떨쳐냈다. 세드릭 베드몬의 사전에 후회란 있을 수 없는 단어였다.

* * *

“헉, 세상에.”

나는 눈앞의 가게를 보고 입을 헙 틀어막았다.

기쁨과 감탄을 온몸으로 표현하는 내게 엄마는 넌지시 귀띔했다.

“역시 함께 오길 잘했구나, 미르라면 이곳을 좋아할 거라 생각했어. 워낙 디저트를 즐겨 먹잖니?”

“진짜 최고예요!”

나는 두 손 모두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그래, 엄마가 나를 데리고 외출한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수도에 이제 막 새로 생긴 디저트 가게에 나를 데려오기 위함이었다.

“어서 오십시오, 새런 후작 부인. 예약하신 자리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예쁜 로고가 새겨져 있는 앞치마를 입은 직원이 나와 우리를 어딘가로 안내했다.

지나가면서 둘러보니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대부분이 대리인 역할을 맡은 시녀나 시종들이었다. 다만 간혹 우리처럼 직접 방문하는 손님들은 2층으로 안내받는 듯싶었다.

‘우와아.’

빙글빙글 계단을 올라가는데 그 바로 옆 벽이 마력석을 사용한 홀로그램 수조였다. 가짜 물고기임을 뻔히 알면서도 아이 콘택트를 하다 나를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에 그제야 고개를 들고 부리나케 올라갔다.

“응?”

그리고 그 도착한 곳에서 나는 의외의 아는 얼굴을 마주쳤다.

얘가 왜 여기 있지?

내가 본 것은 다름 아닌, 제이크였다.

수많은 어른 사이에서 유독 부드러운 갈색 머리를 지닌 내 또래의 아이는 눈에 띄었다.

어쩐지 평소와 다르게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확실히 제이크가 맞았다.

그리고 내가 이름을 부르기 전, 제이크가 먼저 나를 발견했다.

“미르?”

그리고 날 보고 놀란 건 제이크 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제이크는 잠깐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이내 기쁜 표정으로 내게 걸어왔다.

나는 순식간에 바뀐 그 표정을 보고서 얼떨떨하게 답인사를 했다.

“어, 안녕. 제이크. 여기서 또 보네.”

“응, 나도 미르를 여기서 만나서 너무 기뻐.”

그때 제이크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하인 복장을 한 남자가 양손에 가득 포장된 디저트를 든 채로 헐레벌떡 다가왔다.

“도련님! 어휴, 말씀은 하고 가셔야지요. 사라지신 줄 알고 놀랐습니다.”

“미안. 앞으로는 조심할게. 미르가 여기 있는 걸 보고 그만 발걸음이 먼저 움직였어.”

“도련님도 참…….”

제이크는 가족이 아닌 공작가의 하인과 함께 이 가게를 방문한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왔을까? 나야 엄마를 따라 왔다 쳐도 제이크는 딱히 이 가게에 올 이유가 없는데.

공작가의 파티시에들은 전부 수준급 솜씨이고, 무엇보다 제이크는 디저트를 그다지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물론 나와 함께 먹을 때는 가리지 않고 다 먹긴 하지만.

“제이크. 근데 무슨 일로 여기 온 거야?”

결국 궁금해진 나는 제이크에게 넌지시 질문했다.

제이크는 살짝 고개를 기울이며 헤헤 웃더니, 이내 속삭이듯이 대답했다.

“미르가 디저트 좋아하잖아. 우리 집사가 새로 생긴 디저트 가게가 있다고 해서, 바로 미르가 생각났어. 오늘 사서 숨겨놨다가 깜짝 선물 주려고 했었는데. 이렇게 만나 버렸으니 실패야…….”

제이크는 마지막에 실패라고 말할 때, 몹시도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내 손을 잡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제이. 나는 네가 깜짝 선물을 주기로 했다는 것만으로도 기쁜걸. 거기에 이렇게 오늘 한 번 더 만나게 되어서 또 기쁘고.”

“진짜……?”

“으응. 아, 혹시나 해서 말하는 건데. 만약 네가 나한테 주고 싶어서 산 디저트가 있다면, 내일 유치원에 가져오는 건 어떨까? 다른 친구들이랑 나눠 먹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

나는 안다.

제이크뿐만 아니라 제이크의 공작가 사람들은 단 걸 좀처럼 즐겨 먹지 않았다.

아마 저 하인의 손에 바리바리 들린 디저트들은 쓰레기통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너무 아까웠다.

“아, 그러면 되겠네? 미르는 역시 똑똑해.”

우울한 표정을 짓고 있던 제이크는 곧바로 손뼉을 작게 치며 나를 칭찬했다.

나는 뿌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럼 내일 유치원에서 보자며 제이크를 배웅했다.

제이크는 나랑 헤어지는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지만 하인이 ‘공작 각하께서 도련님더러 빨리 오시라 했잖습니까’라고 닦달하자 하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그렇게 제이크와 헤어진 이후, 나는 가게에 있는 다양한 디저트들을 모두 종류별로 하나씩 골라 포장해왔다. 아마 오늘 첫 개점을 한 이후로 제일 많이 사 간 손님이 내가 아니었을까.

‘으음, 유치원에 가서 나눠 먹고 싶기는 한데. 이미 제이크가 가져온다고 말했으니 나까지 가져가면 안 되겠지.’

결국 이것들은 모두 내 차지가 되었다. 좋아, 두고두고 아껴 먹으면 되겠다!

그렇게 저택으로 돌아와 서늘한 음식 보관 창고에 디저트들을 맡기자, 지나가던 후작저의 파티시에가 슬픈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아직 제 실력이 많이 부족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아가씨께서 앞으로 후작저 바깥의 가게에서 디저트를 사시지 않아도 될 정도로 제가 실력 있는 파티시에가 될 때까지,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아니, 그러지 않아도 되는데.

아무래도 단단히 오해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우리 파티시에가 만든 빵이 제일 맛있는데.

‘다만, 가끔 색다른 맛을 위해 바깥 가게들도 들르는 것뿐이라고.’

아무튼 우리 저택 사람들은 내가 한마디만 해도 너무 과한 반응을 보여줘서 문제다.

‘에휴.’

혹시라도 토라져 버릴지도 모르니, 앞으로 한 일주일 정도는 우리 저택의 파티시에가 만든 빵을 먹을 때마다 꼬박꼬박 칭찬해 줘야겠다. 그러면 또다시 기뻐하겠지.

* * *

그날 밤, 나는 쉽사리 잠들지 못했다.

겨우 유치원에 다닌 지 하루밖에 되지 않았지만 참 하루가 다사다난했으니까.

내일 일찍 유치원에 가기 위해선 빨리 잠들어야 하는데 머릿속이 말똥했다.

‘나, 다들 잘 꼬셔낼 수 있겠지.’

솔직히 먹을 걸로 꼬셔내는 것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을 거라는 걸 예측하고 있었다.

아무리 6살, 7살짜리들이라지만 절대로 그 자존심들까지 어리게 보아서는 안 된다. 내가 환생한 후에야 깨닫게 된 사실이었다. 쉽게 생각하고 다가갔다가는 오히려 내가 큰코다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인걸.

‘친구 사귀기가 뭐 이리 어렵니, 에휴우…….’

그리고 생각해 본 건데, 아무래도 여러 명을 한 번에 타깃으로 잡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니까 한 명씩 차근차근 친해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누구랑 먼저 친해지지?

그 순간 내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니나이나 황녀의 얼굴이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늘 일관되게 까칠한 태도로 나를 대했지만, 어쩐지 자꾸만 신경 쓰이는 아이. 발톱을 잔뜩 세운 작은 고양이 같은데도 이상하게 나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면, 여주인 앨리스와 먼저 친해져 볼까?’

그다음 떠오른 건 앨리스의 모습이었다.

내게 선물을 받고서, 정말 별거 아닌 선물에도 눈가를 촉촉이 적시던 그 처연한 모습이 자꾸만 마음에 걸리는 아픈 손가락 같은 아이였다. 그렇지만 나는 곧이어 고개를 저어냈다.

‘안 돼, 안 돼. 아직은. 마음에 걸리긴 하지만…… 그래서 더 안 되는 거야. 왜냐하면 앨리스는 상처가 많은 아이니까. 섣불리 다가갈 수는 없어.’

그럼 다음은…… 세드릭.

이 소설의 서브 남주에 미래엔 무려 소드마스터씩이나 될 인물이지만, 지금은 7살이지.

‘근데 너무 성격이 나쁘다고. 난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사사건건 시비를 걸잖아. 안 돼. 이 애는 보류야. 나중으로 미루겠어.’

그렇게 세드릭도 패스한 나는 마지막으로 니콜라스 황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가끔 귓가에 만년필을 꽂고 있고, 항상 단정하게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넥타이나 크라바트를 한 채 정복 재킷까지 다 챙겨입고 다니는 모범생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아이.

‘그런데 매일 책만 읽잖아. 아마 니콜라스와 친해지려면 책 이야기를 하면서 다가가야 할 것 같은데…… 당장은 보류할래. 내가 어떻게 환생했는데, 난 아직 어린 시절을 맘껏 누리고 싶단 말이야. 아직 그런 어려운 책은 읽고 싶지 않아.’

결국 그 4명의 후보 중 내가 최종적으로 선택한, 첫 번째 대상은 다름 아닌…….

‘좋았어. 니나이나 황녀를 첫 번째로 꼬셔봐야지.’

이 소설의 악역이지만 지금은 겨우 6살로 나와 동갑인 자그마한 아이.

시작부터가 쉽지만은 않을 것 같았지만, 내일부터 시작해 보기로 했다.

무엇을?

잘 꼬셔서 내 친구로 만드는 걸.

‘……아, 졸려. 이젠 다 생각했으니 일단 잠부터 자자.’

머릿속으로 복잡한 계획을 세웠더니 어느덧 잠이 솔솔 쏟아지기 시작했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그 졸음에 몸을 맡겼다.

* * *

다음 날, 일찍이 일어난 나는 내 눈동자처럼 살짝 어두운 톤의 초록빛 드레스를 골라 입었다.

사실 평소 기상 시간에 맞춰 나를 깨우러 들어오던 유모가 내가 미리 일어나 세수까지 마친 걸 보고 경악하는 표정을 지었기에, 조금 억울했다.

내가 그동안 그렇게 잠탱이였던가…… 아, 그래. 늦잠을 자주 자긴 했었지. 미안. 유모.

물론 오늘처럼 어젯밤 늦게 잤는데도 이토록 쉽게 눈이 번쩍 떠지는 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긴 했다. 이런 기적이 일어난 이유는 단 하나였다.

빈 유치원에 제일 먼저 도착하고 싶다는 소망을 품고 잠들었기에 알람시계가 없어도 눈이 번쩍 떠진 것이다. 마치 기대되는 소풍날 아침처럼.

‘우와아.’

그리고 그런 내 준비는 헛되지 않았다.

황실 기사들이 내 마차를 맞아주고, 어제처럼 안내에 따라 건물 안으로 들어갔지만 그 넓은 방 안에 사람이라고는 오로지 나 하나뿐이었다.

“아아-”

목소리도 울렸다.

나는 다음 사람이 올 때까지 몰래 교실 구석구석을 구경했다.

“어, 뭐야. 너, 먼저 와 있었냐?”

“……안녕하세요, 새, 새런 영애.”

그리고 내 뒤를 이어 등장한 아이들은 다름 아닌 세드릭과 앨리스였다.

같은 마차를 타고 온 건지 같이 들어왔다. 아, 그러고 보니 둘이 가문 간 약혼 상태였지.

‘으음.’

갑작스레 원작의 줄거리가 떠오르려 했지만, 애써 고개를 저어 떨쳐냈다.

굳이 즐거워야 할 유치원에서 피폐하고 치정에 얽힌 원작을 생각할 필요는 없겠지.

뭐, 새삼 신기하긴 했다.

내가 읽었던 그 사랑싸움 가득한 어른들의 냄새가 나는 소설 속 주인공들에게도 이토록 작고 순수하던 시절이 존재하기는 했다는 사실에. 또, 그 주인공들의 어린 시절 속에 나 역시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도 놀랍긴 매한가지였다.

그렇게 하나둘 도착한 유치원은 금방 부산스러워졌다.

아직 데면데면한 사이라 그런지 대화가 많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이 나이 대의 아이들이 6명이나 있다는 건 숨만 쉬어도 그렇게 느껴지게 마련이다.

‘으악, 수업.’

그리고 난 곧이어 절망했다.

오늘부터는 예절과 기초 교양 수업을 담당해 주시기로 한 선생님들이 오시기로 한 날이었으니까. 물론 수업 첫날이라 그런지 곧바로 진행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나, 그래도 수업은 수업이었다.

‘내 환생 금수저 백수 라이프는 어디로 갔나…….’

기분이 참 그랬다.

그리고 다음 순간 굳게 다짐했다. 이 유치원에서 인맥 잘 다지고, 졸업한 이후로는 절대로 아카데미도 안 가고 저택에서 놀기만 할 테다.

원래 환생의 묘미는 꿀 같은 편한 인생을 즐기는 데에 있는데, 난 어째서 그 본분을 잊어버리고 이렇게 어린 나이부터 또다시 공부를 하고 있는지.

그래도 다행인 건, 내가 좋아하는 수업도 있었다는 사실이다.

다름 아닌 페를렌데 선생님의 그림 교양 수업이었다.

비록 앞으로는 화가 이름 외우기, 명화 속의 상징 알아보기 같은 내용을 배우게 될 예정이지만 오늘은 첫날인지라 간단하게 그림을 그려보는 시간을 가졌다.

손에 쥐어진 건 한 장의 넓은 흰색 종이와 목탄을 잘 가공해 만든 연필.

“이걸로 뭘 그리는 거예요?”

아직 주제를 말해주지 않은 터라 궁금해 질문했더니, 선생님께서 인자한 미소를 지으셨다.

“하하, 새런 영애님. 안 그래도 이제 오늘의 주제를 말씀드릴 참이었답니다. 오늘은 친우의 얼굴 그려보기를 할 예정이에요.”

선생님의 설명을 들어보니, 종이쪽지를 뽑아 나온 상대의 얼굴을 그려주는 간단한 수업이었다. 본 수업에 들어가기 전, 간단한 워밍업 같은 느낌이라 하면 되려나.

‘누가 나오게 될까.’

어쩌다 제일 첫 번째 순서로 뽑게 되어,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손에 든 쪽지를 펼쳤다.

‘아니?’

그런데 우연인지 운명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쪽지에 적힌 이름은 다름 아닌 니나이나 황녀였다.

아니, 아니다. 이건 분명 운명임이 틀림없었다. 왜냐하면 내가 어젯밤 첫 번째 친해질 상대로 정한 게 니나이나였는데, 오늘 이렇게 바로 기회가 생겼으니까!

‘좋아, 내가 멋지게 초상화를 그려서 니나이나의 마음을 사로잡아주겠어.’

쪽지를 손에 꼭 쥔 채로 굳게 다짐했다. 아, 사실 따지고 보면 내 그림 실력은 그다지 뛰어난 편이 아니다. 물론 이 또래에서는 또 말이 다르지만.

6살 아이는 눈 코 입을 섬세하게 그릴 줄 알기만 하면 평균 이상은 가는 것이다. 어쩌면 나, 꽤 그림에 재능이 있는 걸로 오해받을 수도 있겠다!

‘헤헤.’

괜스레 김칫국을 한 사발 들이켜고서, 한껏 들뜬 마음으로 다른 아이들의 상대는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그런데 뭔가 분위기가 이상한걸.

“아! 왜 하필 너냐?”

……왜인지 불길한 예감이 든다 했더니, 나 다음으로 쪽지를 뽑았던 세드릭이 제 손의 쪽지를 펼쳐보자마자 작은 불만을 터뜨렸다.

세드릭은 떡하니 ‘제이크’라고 쓰인 쪽지를 휙휙 흔들며 짜증 난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어제 캐러멜 일로 둘 사이가 많이, 좀 많이- 멀어진 것 같았다. 하하.

“누가 할 소리를 하시는지.”

그리고 그런 세드릭의 불만에 똑같이 맞불만으로 대응하는 제이크가 보였다. 제이크는 안 그래도 세드릭의 도발에 꽤 짜증이 난 상태에서 자신 역시 세드릭을 뽑는 바람에 얼굴이 굳어졌다.

‘어쩜 좋대. 둘이 앙숙이 되어버린 것 같은데, 얼굴을 마주 보고 그려야 하겠네.’

내심 제이크가 짠해졌다. 둘 다 똑같은 상황에 처한 것이긴 했으나, 아무래도 세드릭보다는 나와 막역한 친구인 제이크가 더 마음이 가는 법이었다.

그 둘의 신경전을 계속 보고 있으려니 머리가 지끈거려와,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니콜라스 황자가 평소처럼 무감한 표정으로 자신의 쪽지를 확인하는 게 보였다.

누구일까? 궁금했다. 흥흥,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오지랖을 부려 보겠어. 그다지 친한 사이는 아닌 우리였지만 궁금증이 도진 나는 뻔뻔하게 니콜라스에게로 다가가 질문했다.

“전하는 누굴 뽑으셨어요?”

“앨리스 로즈.”

오호라. 나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비록 원작의 타이밍보다는 한참 이르지만, 이렇게 원작 남주인 니콜라스가 원작 여주인 앨리스의 얼굴을 그려주면서 첫 반함의 계기가 찾아오는 건가? 어머, 왜 내가 다 설레는 거니.

‘아 참, 근데 얘네 아직 7살이지.’

하지만 뒤늦게서야 이들이 아직 반한다 뭐다 할 이성적인 감정이 찾아올 만한 나이까진 아니라는 걸 깨닫고 이 주책 어린 마음은 삼가기로 했다.

“난 오라버니를 뽑았어.”

그리고 니콜라스와 함께 있으려니 어느새 니나이나가 ‘니콜라스’라고 적힌 쪽지를 보여주며 다가왔다. 나는 이때다 싶어 내 쪽지를 니나이나에게 보여줬다.

“저는 황녀 전하 뽑았어요.”

“……그, 그러네? 흐음, 뭐어. 새런 영애. 잘 그려줘.”

갑작스레 살갑게 다가온 내가 약간 부담스러웠던 모양인지 니나이나는 평소와 다르게 화들짝 놀란 기색을 띠었다. 그렇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는다.

끝까지 아부와 진심을 섞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당연하죠. 다른 누구도 아닌 황녀 전하 얼굴인데요. 최고로 잘 그려 보이겠어요.”

“……!”

니나이나는 내 대답에 살짝 눈썹을 치켜세웠다.

그러더니 홱 고개를 돌리며 짧게 대답했다.

“뭐, 알아서 해.”

“네에.”

뭐 니나이나가 까칠하게 날 세우는 거 한두 번도 아니고. 이 정도로 마음에 상처 입을 만큼 내 멘탈이 약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난 입가에 살짝 미소를 띠었다. 이렇게 된 이상 진짜로 잘 그려줘야 해.

‘앗, 그러고 보니. 그럼 날 그리는 건 앨리스인가?’

어쩌다 보니 가장 후 순서를 맡게 된 앨리스. 모두의 상대방이 결정 났으니 날 그려줄 사람은 앨리스뿐이었다. 역시나 주변을 둘러보니 저쪽에서 쪽지를 꼭 쥔 채 내게 먼저 다가오지 못하고 우물거리는 앨리스가 보였다.

여기서 그냥 가만있으면 내가 아니지.

나는 너무 크지 않은 적당한 정도의 외침으로 앨리스를 부르며 다가갔다.

“앨리스!”

“새, 새런 영애?”

“네에, 앨리스 영애가 절 뽑으신 것 같아서 와 봤어요. 헤헤.”

아직 친밀한 정도는 아닌지라, 경계심이 높은 앨리스를 위해 일부러 웃음도 흘려주며 빈틈을 팍팍 만들어줬다. 아니, 그런데 돌연 앨리스가 내게 사과하는 게 아닌가? 대체 왜?

“……마, 맞아요. 죄송해요.”

“네에? 앨리스 영애가 왜 제게 죄송해요. 영애는 제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는걸요.”

“그, 제가 그림을 잘 못 그려서 영애가 실망할 것 같아요…….”

앨리스의 자신감 없는 대답을 들은 나는 조심스럽게 앨리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앨리스는 우물쭈물하다 내 손을 잡았다. 두 손 사이에 온기가 통하자 앨리스의 차갑던 손에 조금이나마 맥박이 느껴졌다.

그 상태로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영애가 나를 어떻게 그려도 나는 실망하지 않을 거예요. 눈이 세 개라던지 콧구멍이 하나인 괴물이라도 괜찮아요. 동화 속에 나오는 험상궂은 마수들을 그려놓고 그걸 저라고 해도, 그 그림을 영애가 그려줬다는 것만으로 전 행복할 거예요.”

“저, 정말인가요……?”

“그럼요.”

나는 웃었다. 그러니까 부담가지지 말고 편하게 그려달라고 덧붙이면서.

* * *

마침내 본격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시간이 되자, 아이들은 놀랍도록 조용해졌다.

저마다 집중해서 그리느라 미처 입을 열 생각도 못 하는 듯싶었다.

“흥, 못생겼어.”

“영식도 마찬가지로요.”

“…….”

물론 저 둘은 제외다.

티격태격하면서도 은근히 케미가 잘 맞는 게 아무래도 나중에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기도 하지만, 일단 지금은 아닌 것 같고.

아무튼 세드릭의 저 나쁜 말본새에 순수한 우리 제이크가 말려들어 버려서 큰일이다.

그건 그렇고, 앨리스는 잘하고 있을까.

문득 궁금해져 앨리스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랬더니 방금까지 내 얼굴을 열심히 관찰하고 있던 앨리스와 눈이 곧바로 마주쳐서, 앨리스는 놀라 그만 연필을 떨어뜨렸다.

“아……!”

내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서 놀란 건가. 순간 미안한 감정이 듦과 동시에 내 앞으로 앨리스의 연필이 데구루루 굴러왔다.

나는 곧바로 그 연필을 주워 앨리스에게 건네주었다.

“영애, 받으세요.”

“……고, 고마워요.”

“헤헤, 천만에요. 절 열심히 그려주시는 것 같아서 기뻐요.”

손을 저으며 환히 미소지었더니 앨리스가 수줍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꼭…… 최, 최고로 예쁘게 그릴게요!”

연필을 꼭 쥐고 다짐하듯 대답하는 앨리스는 어쩐지 평소의 소심한 모습과는 달라 보였다.

‘뭐, 아무튼 내 그림을 마저 완성해야 하니까. 이제 집중하자, 집중.’

나는 주변을 둘러보는 걸 그만두고 이제 그림에 열중하기로 했다.

내 그림은 지금 한 80% 정도가 완성된 상태였다.

니나이나 황녀가 저 옆을 바라보고 있는 모습을 어깨 정도까지만 그려놓았다.

황족 특유의 탐스러운 숱 많은 머리카락은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표현(하려고 노력)했고, 눈동자는 비록 붉은색 염료를 칠하지 못하지만 최대한 투명한 그 보석 같은 느낌을 살리고자 하였다.

이제 코랑 입만 잘 그려보면 되겠다.

“영애, 잘 그리고 있어?”

때마침 니나이나가 제 얼굴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흐음, 그래? 그럼 어디 한번 보여줘 봐.”

“죄송하지만 그건 어려워요. 전하.”

“……왜지?”

당당한 요구에 고개를 슬며시 저었더니, 니나이나가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나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느릿하게 대답했다.

“물론 전하께서 지금 얼마나 궁금하실지는 알아요. 하지만 원래 결과물은 모든 게 완성된 후 한 번에 보는 게 제일 멋진 법이랍니다. 유종의 미를 거둬주시기 위함으로, 조금만 기다려 주시겠어요?”

“그래? 영애가 그렇게 말하니까 뭐, 기다릴래.”

“네에. 감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주억이고서 다시 그림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슥삭슥삭, 연필이 흰 백지를 쉴 틈 없이 가르고 지나갔다.

마침내 한 20여 분쯤 지났을 때 나는 드디어 그림을 완성할 수 있었다.

‘어라, 내가 제일 꼴찌였어?’

그리고 고개를 들어보니, 다른 아이들은 모두 제각각 완성한 그림을 덮어 책상 위에 올려둔 것이 보였다.

이런, 너무 집중하느라 미처 눈치를 못 챘던 모양이다.

아무튼 선생님이 먼저 그림을 확인했다.

하나하나 차근차근 확인해 보며, 선생님이 마지막 차례인 나를 향해 다가왔다.

어쩐지 좀 긴장되는걸. 딱히 시험 성적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리고 마침내, 선생님이 내 그림을 보셨다.

“……새런 영애님.”

“네, 네?”

선생님의 투명한 안경알이 창가에서 들어온 햇살에 비쳐 반짝- 하고 빛났다.

동시에 살짝 딱딱하게 느껴지는 목소리에, 나도 모르게 바짝 몸이 굳어졌다.

혹시 무언가 잘못한 건가 싶어 마른침이 꿀꺽 넘어가려던 찰나.

“너무 잘 그리셔서, 사실 좀 놀랐답니다. 영애님 또래의 아이 중 이 정도로 그리는 아이를 찾아보기 정말로 힘드니까요. 수준급인데…… 혹시 따로 그림을 배워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하하, 칭찬 감사해요. 선생님.”

하지만 감사한 것과는 별개로, 어차피 계속 배우다 보면 내 형편없는 실력이 들통날 게 뻔했으므로 거절했다.

선생님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셨지만 이내 다시 본래 주제로 돌아가 모두를 응시했다.

“아쉽네요. 아무튼, 새런 영애님의 그림도 멋지지만 모두 잘 그려주셨어요. 이제 함께 그린 그림들을 공유해서 보는 시간을 가져볼 거예요.”

그렇게 탁자 위에 펼쳐진 그림들.

그중 나는 단박에 눈에 띄는 그림을 찾아냈다.

‘저게 나구나.’

다름 아닌 앨리스가 그린, 내 얼굴이었다.

‘헉, 예상외로 너무 귀엽잖아……!’

그리고 나는 그 그림이 마음에 매우 쏙 들었다.

전날 꼬불꼬불하게 머리를 말고 잔 탓에 딱 적당한 정도로 머리에 컬이 생겼는데, 앨리스는 그런 내 머리 모양을 마치 용수철처럼 탄성 있고 귀엽게 그려주었다.

거기에다 내 특징인 또렷한 눈썹까지 아주 잘 표현되어 있어, 농담 조금 보태 초상화로 써도 될 수준이었다.

“새, 새런 영애. 어떠…… 세요?”

옆에서 그런 내 눈치를 살피며 앨리스가 조심스레 질문했다.

나는 슬쩍 올라오려 하는 입꼬리를 내리누르지 못하고 살짝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정말 마음에 들어요, 앨리스!”

“다행이에요……!”

앨리스는 눈을 빛내며 진심으로 기쁜 듯 대답했다.

어쩐지 앨리스의 자신감을 북돋워 준 것 같아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그래서 사심을 듬뿍 담아 칭찬했다.

“헤헤. 너무 마음에 들어서 집에 가져가고 싶을 정도인걸요.”

“그, 그래 주실 거예요?”

앨리스는 자신의 그림이 그 정도냐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었다.

옆에서 마침 우리의 대화를 주의 깊게 듣고 있던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오, 물론. 이 수업의 결과물은 가져가셔도 된답니다.”

두 사람 모두 허락한다면야, 사양하지 않고 가져가겠어. 후후.

나는 마음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앨리스에게 말했다.

“그럼, 저 수업이 끝난 후 이 그림을 챙겨갈래요. 예쁜 액자에 담아 제 방에 걸어 놓고 싶어요.”

“……!”

“나중에 앨리스가 집에 놀러 오면 보여드릴게요.”

어른들이 대충 인사치레로 하는 놀러 오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정말로 진심으로, 앨리스가 내 집에 놀러 오게 될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맘때 귀족 아이들은 웬만큼 친분이 깊은 게 아니면 서로의 집에 잘 놀러 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앨리스가 만약 내 방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러 오게 된다면 우리는 서로 친해졌다는 뜻!

앨리스는 감동받은 눈으로 나를 응시하며 조용히 두 손을 맞잡은 채 대답했다.

“나, 나중에 꼭…… 보러 갈게요.”

“네에, 앨리스.”

사실 우리 둘이 친해졌다 해서 곧바로 앨리스를 초대할 수는 없는 일이긴 하다.

왜냐하면 앨리스의 가문이 원작대로라면, 흐흠.

아마도 앨리스에게 번듯한 친구가 생기는 걸 기꺼워하지 않을지도 모르니까.

‘아무튼, 그건 그때 돼서 해결할 일이야.’

지금은 일단 눈앞의 그림들에 집중하자!

때마침 우리 둘의 대화를 흐뭇하게 지켜보시던 페를렌데 선생님이 내 그림을 펼쳤다.

“자, 보세요. 새런 영애님이 그린 그림이랍니다.”

“와아……!”

누가 먼저 외친 탄성이었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내 그림이 공개되는 순간 아이들이 하나둘 놀라운 목소리로 달려들었다.

금세 이 탁자의 한쪽에 둥근 아이들의 머리가 옹기종기 모이게 되었다.

관심 없는 척하고 있던 황자님까지, 들고 있던 책을 탁 접고 걸어왔다.

“이게 나라고?”

그리고 그중 가장 고개를 길게 빼서 그림을 뚫어지게 보는 니나이나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로 물었다. 나는 한껏 뿌듯한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흐음…….”

니나이나의 붉은 눈동자가 그림의 구석구석을 훑을 때마다, 니나이나의 입꼬리는 보이지 않게 조금씩 올라갔다.

물론 본인은 미처 그 사실을 알아채지 못한 것 같긴 하지만 말이다. 만족도를 여실히 말해주는 표정과는 다르게 괜스레 마음에 별로 차지 않는 척 무심하게 대답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마음에 드시나요?”

“글쎄…… 난 잘 모르겠구나.”

니나이나는 연필로 그려진 자신의 눈동자 부분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그렇게 말했다. 때마침 옆에서 니콜라스가 툭 한마디를 내뱉었다.

“잘 그렸군. 6살치고.”

“……?”

순간 그 말을 듣고 외칠 뻔했다.

‘아니, 저기요? 황자님도 겨우 7살이시거든요?’

물론 니콜라스가 더럽게 긴 이름의 두꺼운 책을 식은 죽 먹듯이 휙휙 넘기며 읽는 천재긴 하지만, 그래도 그런 말을 하다니 너무 서럽잖아! 뭔가 진짜 내 정신연령이 6살로 평가되는 느낌이야…… 엉엉.

그렇지만 역시 난 황족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후작 영애일 뿐이라, 이렇게 답할 수밖에 없었다.

“칭찬해 주셔서 감사해요. 니콜라스 황자 전하.”

“뭘. 이런 것 가지고. 일일이 고맙다고 안 해도 괜찮다.”

“네에…….”

뭐 그러시다면야, 앞으로는 굳이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겠어.

나는 그렇게 다짐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마침 니나이나가 내 그림을 든 채 선생님을 보고서 말했다.

“뭐, 멋진 그림까진 아니지만 그런대로 봐줄 만한걸. 이 그림, 내가 가져가겠어요.”

“네, 그러십시오. 황녀 전하.”

“내 침실 정중앙에 걸어놓도록 해야겠어.”

“……?”

그리고 나는 니나이나의 혼잣말을 듣고 그만 놀라고 말았다.

내, 내가 그린 그림을 온통 황금색 일색이라는 황궁의 침실에 걸어놓겠다고?

안 돼. 이건 내가 너무 수치스럽잖아! 분명 황궁 시녀들이 지나갈 때마다 ‘황녀 전하 방에 있는 그 그림, 너무 이상하지 않아요?’라고 수군댈 게 분명하다고!

‘으윽, 하지만 니나이나 딴에는 꽤 마음에 들어서 그렇게 말한 것일 텐데…….’

그때 마침 니나이나가 나를 돌아보며 허락을 구했다.

“영애. 이건 내가 가져갈게.”

“……아, 넵.”

결국 나는 체념했다.

이미 내 손을 떠난 그림, 잘 가라. 어차피 그 그림에 내 이름을 적어 놓은 것도 아니니, 그 어떤 사람도 이 그림이 내가 그린 건지는 모르겠지. 괜찮아. 아무도 모를 거야. 흑.

나는 애써 니나이나의 연필 초상화가 황궁에 걸리게 될 미래를 잊으려 노력했다.

‘앗, 그러고 보니.’

마침 탁자에 모든 그림이 펼쳐져 있는 게 보였다. 가지각색의 개성이 드러난 그림들이었다. 아무 색 없는 연필로만 그렸는데도, 각자의 성격이 아주 잘 드러나 있었다.

모두 우열을 가릴 것 없이 훌륭한 그림들이었다.

그 타이밍에 나는 아주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멋진 그림을 그린 아이들에게 상을 줘야겠어!’

어쩐지 내가 선생님도 아닌데 상을 준다는 게 웃기지만, 이보다 더 좋은 핑계는 없었다.

내 사물함에 고이 숨겨져 있는 디저트들이 녹아내리기 전에 빨리 모두에게 나눠줘야 해!

나는 페를렌데 선생님에게 다가가, 수업시간에 디저트를 먹어도 되냐고 물어보았다.

그러자 선생님이 되물었다.

“어째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죠, 새런 영애님?”

“그게, 사실 친구들을 주려고 어제 새로 생긴 디저트 가게에서 사 온 것들이 있거든요.”

물론 내가 산 건 아니고 제이크가 사 온 거지만.

오늘 아침, 제이크가 디저트가 담긴 가방을 들고 오자마자 내 물건 보관함에 옮겨놓았던 걸 생각하며 나는 쿡쿡 작게 웃었다.

“오, 그런! 이 선생님은, 영애님의 넓은 마음씨를 생각하여 너그러이 허가하도록 하겠습니다.”

“헤헤, 감사해요.”

나는 웃으며 꾸벅 인사를 하고서, 곧바로 유치원 내 다른 방에 자리한 물건 보관함으로 달려갔다.

투명한 크리스털 재질로 되어 있어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훤히 보이는 보관함이었다. 놀랍게도 잠금쇠는 도금되어 있고, 열쇠에는 커다란 사파이어가 박혀 있었다.

이 화려한 유치원에는 아직도 적응이 힘들다, 에구.

* * *

“이게 뭐지? 또 캐러멜 같은 건가?”

내가 주섬주섬 가져온 것들에, 아이들의 시선이 내게로 휙휙 돌아갔다.

나는 그림을 한쪽 구석으로 밀어놓고, 테이블 중앙에 턱 디저트들을 놓았다.

“아니요. 이것들은 캐러멜이 아닌 다른 디저트예요! 마카롱, 크레이프 케이크, 슈크림, 그리고 맛있는 과일 타르트까지 종류별로 가져왔어요. 다들 드셔보세요.”

“오. 우리 저택 주방장이 만든 디저트들은 맛없는데. 이건 좀 먹어보고 싶게 생겼네.”

내 설명에 세드릭이 불쑥 앞으로 나서서 폭신한 생크림과 싱싱한 딸기가 올려진 타르트를 집어 들어 눈으로 살피며 말했다.

거참, 세드릭네 주방장이 들으면 섭섭할 소리였다. 나는 관심은 보이면서도 선뜻 다가올 생각을 못 하는 세드릭 외의 아이들을 손짓으로 불러모았다.

그러고는 디저트 중 가장 어여쁘고 커다란 왕 과일 타르트를 집어 든 후 쪼르르 페를렌데 선생님에게 다가갔다.

“선생님도 이거 하나 드셔보세요. 맛있어요.”

“오, 새런 영애님께서 제게도 권해주실 줄이야. 그럼 이 선생님은 맛있게 먹도록 하겠습니다.”

페를렌데 선생님은 몹시 기쁜 표정이었다. 그러고 보니, 첫 수업 자기소개에서 단걸 좋아하신다고 말씀하셨던가.

아무튼 선생님께 타르트를 드리고 뒤돌아 서 보니, 이미 세드릭은 탐스러운 마카롱을 한입 가득 베어 문 채였다. 그리고 앨리스는 멍하니 보고만 있을 뿐 차마 손을 못 대고 있었다.

나는 앨리스에게 다가가, 작중 앨리스가 제일 좋아하는 걸로 나왔던 과일인 블루베리가 잔뜩 들어 있는 조각 케이크를 건넸다.

“앨리스도 먹어보세요!”

“이, 이 위에 얹어진 건 뭐예요……?”

처음 보는 이상한 물건을 보는 앨리스의 시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아, 아직 앨리스는 이 블루베리가 무슨 과일인지도 모르는 시기구나. 하기야 작중 로즈 가문은 어린 앨리스에게 무관심하다 못해 가족처럼 대우해 주지도 않으며, 식사도 공녀가 할 법한 음식을 내주지 않았다고 나오기는 했었다.

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나는 마음속에서 울컥하는 걸 멈추고, 가만히 설명을 해주었다.

“블루베리라는 과일이에요. 새콤하기도 하지만 잘 익은 과실은 달콤한 맛이 나요. 분명, 영애가 좋아할 거예요.”

앨리스는 망설이다 내가 쥐여 준 포크로 케이크를 한 입 떠먹었다. 그리고 잠시 후 앨리스의 눈이 동그래졌다.

“……맛있어요! 정말, 새런 영애가 해주신 말대로 달콤한 맛이 나요. 그…… 한 번 더 먹어도 되나요?”

“얼마든지요. 그리고 앨리스, 물어보지 않아도 돼요. 그냥 앨리스가 먹고 싶은 만큼 마음껏 먹어요.”

한 입 더 먹는 것에 눈치를 보는 앨리스가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내가 20살만 되었어도, 아니, 적어도 10살만 더 많았더라면 앨리스를 더 확실한 방법으로 도와줄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아직 이렇게 어린 6살이라는 게 이럴 땐 싫었다.

혹시라도 내가 계속 시선을 주고 있으면 부담스러울까, 앨리스가 천천히 케이크를 먹기 시작하자 나는 고개를 돌렸다.

‘음?’

분명 세드릭은 게 눈 감추듯 먹고 있고, 제이크 역시 그중 가장 덜 단 맛의 바닐라 마카롱을 먹고 있는 와중 가만히 고아하게 앉아 있는 두 사람이 보였다. 나는 다가가 그들에게 질문했다.

“안 드세요?”

“……이것도 네가 만든 거야? 포장이 어제와는 다른데.”

그랬더니 전혀 엉뚱한 질문을 내뱉는다. 니나이나가 가리킨 고급스러운 포장을 보며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누가 봐도 내가 만든 핸드메이드 제품은 아니다.

“당연히 제가 만든 건 아니죠! 어제 수도에 새로 오픈한 호화 디저트 가게에서 사 온걸요. 아, 물론 제가 사 온 것도 아니에요. 사실 이건 모두 제이크가 사 온 거랍니다!”

“응? 나?”

갑작스레 불린 제 이름에 제이크가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어째…… 주변 반응이 싸늘하다?

“아, 뭐야. 제이크 녀석이 사 온 거였어.”

방금까지 쉴 틈 없이 먹어치우던 세드릭이 케이크를 찍어 내리던 포크를 멈추고 썩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니나이나와 니콜라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으로 가만히 손을 뗐다.

“……?”

아니, 왜들 그러지.

다들 제이크를 싫어하는 거야, 아니면 내가 만들지 않아서 문제라도 있는 거야?

“영애가 직접 만들었다면 먹었겠지만, 아쉽게도 일반 가게에서 파는 음식은 먹지 않아.”

내 의문을 해결해 주듯 니콜라스가 말했다.

나는 눈으로 ‘왜죠?’라고 되물었다. 그러자 니나이나가 머리 위의 꽃장식을 매만지며 대신 대답했다.

“혹시 모를 독살의 위험에 대비해서 어쩔 수 없어. 그렇게 배웠거든.”

“아…….”

그런 것까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그저 함께 먹으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한 것뿐이었는데.

“죄송해요. 제가 경솔했네요. 미리 알려드릴걸.”

내 사과에 니나이나는 옆에 있는 공작새 깃 부채를 흔들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이내 무언가가 떠오른 듯 부채를 탁 접고 일어섰다.

“뭐, 괜찮아. 아, 그보다 갑자기 생각났어. 마침 어제 영애가 준 캐러멜의 보답으로 나도 줄 게 있었으니.”

“주실 게 있다고요? 제게요?”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에미르를 보며 니나이나는 생각했다.

‘뭐야, 내게 선물을 준 게 보답을 받고 싶어서가 아니었어?’

어린 나이의 니나이나였지만, 신분이 황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동안 수많은 사람이 니나이나에게 선물을 보내왔다.

제 나이 또래의 어린아이 이름으로 날아온 것도 있었지만, 사실 대부분은 나이가 지긋한 귀족이나 타국의 왕족들이 보낸 것이었다.

그들이 제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것이 어린 니나이나에게도 너무 눈에 띄게 잘 보였다.

그리고 니나이나는 주변인들을 통해 그런 경우에는 적절한 보답을 해 줘야 한다는 걸 배웠다.

황실에 연줄을 대고 싶어 하는 한미한 가문의 선물들은 그냥 돌려보내기도 하고, 예로부터 황실과 깊은 유대가 있어 왔던 가문의 선물들은 비슷한 급의 보답으로 답신을 보냈다.

물론 그 일들을 정말 니나이나 스스로 모두 처리했다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니나이나의 이름을 빌려 시녀 같은 이들이 대신해 주었다.

그래서였다.

이번에 에미르에게 선물을 받은 후 니나이나는 사실 조금 고민하기도 했었다.

같은 유치원에 다니는 새런 후작가의 에미르라는 영애가 내게 선물을 주었으니, 나 역시 그에 대해 마땅한 보답을 해야 할 것 같은데 무엇으로 보답하는 게 좋겠냐고 주변의 시녀나 유모에게 물어볼까 했던 고민이었다.

정 좋은 해결이 되지 않으면 아바마마나 어마마마께 가서 여쭤볼까도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니나이나는 그 고민을 때려치웠다.

보석도, 저 멀리 타 왕국의 해변에 있는 별장 문서도 아닌 그저 한주먹거리 캐러멜일 뿐이었다.

그런 걸 가지고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다른 이들에게 들키는 건…… 왜인지 모르게 부끄러웠다. 평소의 자신이 아닌 것만 같아서.

‘흥.’

그래서 그냥 혼자서 보답을 생각해내기로 했다. 장장 5시간의 고뇌, 그 끝에 니나이나가 생각한 적절한 보답은 다름 아닌…….

‘캐러멜을 받았으니 캐러멜로 돌려주면 되지.’

똑같은 물건으로의 보상이었다.

단, 같은 캐러멜이 아니었다. 니나이나가 주려는 것은 오직 황실 요리사만이 만들 수 있는 특급 로열 레시피 캐러멜이었다.

시녀를 통해 황실 주방에 자신의 요청을 알린 니나이나는 열심히 빨간 드레스로 옷을 갈아입기도 하고 니콜라스의 방에 찾아가 보기도 했다.

그리고 마침내 한 시간쯤 지났을 때, 주방에 다녀온 시녀가 어느새 포장까지 곱게 완료된 캐러멜을 들고 왔다.

하나는 에미르에게 보답으로 주기 위한 것, 나머지 하나는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니나이나는, 황실 요리사가 그녀를 위해 만든 딸기 캐러멜을 먹고서 인상을 찌푸렸다.

옆의 시녀가 놀라 물었다.

“황녀 전하, 맛이 이상하신가요?”

“……이 맛이 아니야.”

니나이나는 고개를 저었다. 분명 훌륭한 맛이기는 했다. 만드는 데 들어간 설탕 한 알조차 허투루 만들어진 재료가 아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지만 무언가 결정적인 것이 빠진 느낌이었다.

분명 새런 영애가 주었던 그 캐러멜은, 모양이 조금 엉성할지언정 맛은 끝내주었는데.

‘틀림없어. 새런 영애에겐 자신만 알고 있는 특별한 비법이 있는 게 분명해.’

니나이나는 시무룩해졌다.

이래서야 아무리 화려한 포장을 해서 준다 해도, 그 새런 영애는 기뻐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왜냐하면 새런 영애가 만들어낸 캐러멜보다 맛이 없을 테니까.

‘아니, 잠시만. 내가 왜 새런 영애의 기분을 생각하고 있는 거야.’

다음 순간 니나이나는 화들짝 놀랐다.

상대방의 기분? 반응? 그런 것 따위 6살 인생에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자신은 그런 걸 자연스럽게 상상하고 있는 건가.

‘으으, 분명 그 캐러멜에 이상한 마법이라도 걸어 둔 게 분명해.’

그래서 니나이나는 괜히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생각을 지웠다.

어쩐지 유치원에 간 이후로부터, 정확히 말하자면 그 에미르 새런 영애를 만나게 된 이후로부터 자신이 조금 변한 것 같다고 니나이나는 생각했다.

나는 그냥 소설책에서 나온 아카데미의 멋진 학생들처럼 친우를 사귀고 싶어, 유치원을 만든 것뿐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더 짜증 나는 건 이게 별로 기분 나쁘지도 않다는 거야.’

결국 니나이나는 작은 주먹을 꼬옥 쥐고서는, 방구석 티 테이블 위에 그 캐러멜 상자를 가져다 두었다. 어찌 되었건 보답은 해주고 싶었다.

‘내일, 유치원에 가서 줄 거야.’

* * *

“마차 좌석에 놓아둔 상자를 가져와.”

“예, 황녀 전하.”

니나이나가 교실 바깥에 대기하고 있던 황궁 시녀를 불러 명령할 때까지도, 나는 그저 멍하기만 했다.

‘니나이나가 내게 선물에 대한 보답을?’

솔직히 상상도 못 했다. 그냥……모두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준 것뿐인데.

캐러멜에 대한 보답을 바란 적도 없었고 그럴 거란 예상조차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내 머릿속의 니나이나는, 그런 소소한 선물 따위 신경조차 쓰지 않는 성격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동안 난 이 아이들을 소설 속 모습으로만 생각하고 있었는지도 몰라. 그래서일까, 니나이나에게도 몰랐던 면모가 있다는 게 놀라워.’

그렇게 니나이나의 새로운 모습에 놀라 얼떨떨해하고 있을 때, 황급히 명을 수행하러 나갔던 시녀가 다시 돌아왔다.

시녀의 두 손은 텅 빈 채였다.

“죄송합니다. 황녀 전하. 타고 오신 마차를 확인해 보았지만 말씀하신 상자를 찾지 못했습니다.”

“뭐? 그럴 리가 없는데. 마차에 도둑이라도 든 거야?”

시녀의 대답에 니나이나는 당황스러운 목소리로 되물었다.

시녀는 송구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도둑이 들지는 않았습니다. 마차 주변을 항시 기사들이 지키고 있으니까요. 하오면 전하, 지금이라도 다시 궁에 연락을 취해 다시 똑같은 것을 내오라 전할까요?”

“……아니, 그러면 늦어. 궁에서 물건이 오는 시간보다 내가 유치원을 마치고 궁으로 돌아가는 게 더 빠를걸. 그보다 정말 잘 찾아본 거 맞아? 도둑이 들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그게 어디로 사라진단 말이야.”

초조한 표정으로 나와 시녀를 번갈아 보던 니나이나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다시 한번 가 볼 테야.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침 일찍이 물건 보관함에 갖다 두는 건데…….”

“어엇, 전하! 나가시려고요?”

저만치 벗어 놓았던 외투를 걸친 니나이나는 뒤에서 시녀가 따라오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유치원을 나섰다. 나는 살짝 눈치를 보다가 니나이나를 따라갔다.

절대, 절대. 황궁 마차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는 아니다!

유치원 바깥의 분수대를 지나, 유치원의 정문 바깥에 대기하고 있는 마차들을 향해 니나이나가 걸어가고 있었다.

이제 이 수업만 끝나면 집에 돌아갈 시간이었기에 가문에서 하나둘 마차를 보낸 것이다. 그중에는 내가 타고 다니는 새런가의 마차도 있었다.

‘아, 저건가?’

그리고 그중 유독 눈에 띄는, 눈처럼 하얀 몸체에 화려한 금박 장식으로 마치 신데렐라의 마차처럼 느껴지는 게 있었다. 나는 그게 바로 황실 마차라는 걸 누군가 말해주지 않아도 곧바로 알아차렸다.

“황녀 전하!”

“아, 새런 영애.”

니나이나는 내가 뒤따르고 있다는 걸 내 목소리를 듣고서야 알아차렸다. 니나이나의 발걸음이 나를 기다리기 위함인지 점차 느려졌다. 마침내, 유치원의 정문쯤에서 나는 니나이나를 따라잡을 수 있었다.

“황녀 전하, 그리고 영애님. 어디 가시는 겁니까?”

그리고 정문을 지키고 있던 황실의 기사들이 우리를 붙잡았다.

나는 니나이나 대신 답변했다.

“전하께서 황궁 마차에 두고 오신 짐이 있으시다고 해서요.”

“그래. 맞아. 잠시만 다녀올 테니 걱정 마.”

그 말을 마치고 니나이나는 정문 밖을 나가 황궁 마차의 문을 열어 안으로 쏙 들어갔다.

차마 따라 들어갈 수는 없었기에, 나는 마차를 겉에서 구경하며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으아, 마차가 많이 다니네.’

이곳이 워낙 수도의 중심가와 가까운 땅이라 그런지, 도로변에 마차가 잠깐 사이에도 서너 대나 지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곧이어 나는 무언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뭐지. 이 찝찝한 느낌은.’

하지만 그 예감이 무언지도 미처 눈치채지 못하게, 바로 다음 찰나에 니나이나가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그래, 여기 있을 줄 알았어! 마차 좌석 밑으로 들어가 버려서 안 보였나 봐.”

“아, 찾으셨군요!”

결국 마차 안에 상자가 있었구나, 싶던 차에 나는 보고 말았다.

상자를 찾은 니나이나가 에스코트 없이 혼자 높은 위치에서 마차에서 내려가느라 미처 뒤를 보지 못하고 그냥 발을 디디려 하는 것을.

그리고…….

“조심하세요! 전하!”

저편에서 한 마차가 무서운 속도로 니나이나가 있는 방향으로 달려오고 있는 것을.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갈 것도 같았지만, 잘못해서 니나이나와 부딪히기라도 한다면.

아.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본능적으로 조심하라는 말을 외치고서, 나는 그 어떤 것도 더 이상 생각하지 못하고 곧장 니나이나에게로 달려갔다.

니나이나가 나를 돌아보고, 마차가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황실의 기사들은 뒤늦게 이쪽으로 뛰어오는 그 긴박한 순간.

무턱대고 다다다 달려간 나는 곧장 니나이나의 어깨를 잡고 끌어당겼다.

졸지에 니나이나는 내게 안긴 모양새가 되었지만, 덕분에 무사할 수 있었다.

간발의 차이였다. 곧바로 옆으로 마차와 말이 미친 듯이 폭주하며 달려가는 게 느껴졌다.

동시에 나는 니나이나가 그 붉은빛 눈동자에 경악을 담은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걸 보았다.

“……!”

그리고 곧바로 내 뒤를 따라 황실의 정예 기사들이 달려왔다.

“괜찮으십니까, 황녀 전하!”

“영애님도 무사하십니까?”

사실 너무 급박하고 갑작스러운 일인지라, 미처 나조차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만 위험하다는 걸 깨닫고,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달려나가 니나이나를 붙잡은 것뿐이었다. 그들의 외침을 들으며 나는 멍하니 내가 안고 있는 니나이나에게 물었다.

“괜찮으세요, 전하?”

니나이나 역시 당황한 모양인지 상자조차 저편에 떨어뜨린 채로 눈가에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있었다.

니나이나가 우는 모습은 처음 봤기에 당황했지만, 이내 몇 명의 기사가 곧바로 말을 타고서 아까의 그 마차를 잡으러 가는 모습을 보고 안심할 수 있었다.

그래도 다치지 않았어.

……아무 일도 없어서 다행이다.

나는 여전히 니나이나를 붙든 채로 가만히 있었다. 문득 내 손을 내려다보니 나도 모르는 새 벌벌 떨리고 있었다. 마치 차가운 얼음장에라도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워.”

그때 갑자기 니나이나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입술을 달싹였다.

뭐라고 하는지 잘 들리지가 않아, 나는 귀를 가까이 댔다.

“저, 방금 뭐라고 하셨어요?”

“……고마워. 구해줘서.”

니나이나는 평소와 다르게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말을 고르는 사이 또다시 니나이나가 말을 이었다.

“그런데 영애도 다, 다칠 뻔했잖아.”

니나이나는 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알고 보니 훌쩍거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니나이나를 달래듯 말했다.

“그렇지만 안 다쳤잖아요. 전하도, 저도요. 그러니까…….”

괜찮아요.

나는 웃었다.

“만약 두 번 그런 일이 일어날 거라 해도, 저는 또다시 전하를 구할 거예요.”

* * *

그 이후로 일이 어떻게 되었냐면, 으음.

일단 니나이나를 다치게 할 뻔한 마차의 마부는 기사들에게 잡혔다.

알고 보니 대낮부터 술을 양껏 마시고 취한 채 음주운전을 했다는 모양이다.

그 마부는 황실로 불려가 처벌을 받았다고 하는데, 그 이후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받아줘, 새런 영애.”

그리고 니나이나는 정신을 차리고서 바닥에 떨어졌던 상자를 다시 주워 내게 건네주었다. 바닥에 떨어진 것치고 아무것도 묻지 않은 상자는 햇빛이 반사되어 멋진 금빛으로 빛났다.

“우와, 캐러멜에 금가루가 묻어 있어요!”

나는 니나이나의 선물을 풀어 보고서 놀랐다. 캐러멜은 캐러멜인데, 황실 정원에 놓여 있는 각종 천사상이나 동물 조각상 모양으로 정교하게 굳힌 모양이었다. 심지어 위엔 식용 금가루를 잔뜩 뿌려놓은 채였다.

니나이나의 정성 어린 보답에 나는 진심으로 고마움을 표했다.

그리고 뒤늦게 집에 가서야 깨달은 사실이지만, 이 선물 상자의 리본 색깔…….

“짙은 초록색이네.”

내 눈동자 색깔과 같은 빛깔이었다.

니나이나가 내가 예전에 했던 말을 잊지 않고 기억해 놓았나 싶어 괜스레 웃음이 나왔다.

그리고 또 무슨 일이 있었냐면, 마차 사고가 있을 뻔한 지 며칠 지난 이후로 나는 황실로 불려갔다. 다름 아닌 황제, 황후 폐하의 명으로 말이다.

‘……?’

그리고 아주, 아주 화려한 만찬을 대접받았다. 아찔하게 저 높은 천장에 달린 샹들리에에 한 번 시선을 주고, 고개를 내려 내 앞에 광활하게 펼쳐진 식탁 위의 광경을 한 번 보았지만 여전히 실감은 별로 나지 않았다. 내가 황제 폐하 내외께 식사를 초대받다니.

유치원에서 본 기미 시녀 언니가 내 옆에서 시중을 들어주고 바로 맞은편엔 황제, 황후 폐하가 앉아 계셨다.

“니나이나를 구해준 용감한 새런 영애에게 하사하는 것이니, 사양치 말고 들도록 하라.”

솔직히 양옆으로 불편한 자리에, 심지어 엄마 아빠도 함께하지 않고 오로지 나 혼자 황실로 불려 온 것이라서 조금 눈치가 보이긴 했다.

그러나 그것도 아주 잠시. 난 황실의 멋진 만찬에 감탄하며 금세 식사를 즐겼다. 황제 폐하께서도 내가 복스럽게 먹는다며 좋아하셨다.

사실 만찬도 만찬이고, 선물도 선물인데.

내가 느끼기에 가장 중요한 점은, 어쩐 일인지 내가 니나이나를 구해준 이후로 니나이나의 태도가 조금 바뀐 것 같다는 점이다.

“……새런 영애는 후작가의 영애인데, 어찌 나와 겸상을 할 수 있겠어?”

라며, 유치원 점심 식사 시간에 따로 황족 테이블을 가져오라고 말해 앉던 니나이나는 이제 아무렇지 않게 원래의 테이블에서 모두와 함께 식사를 한다.

또한 예전의 어둡고 다소 칙칙하게까지 보이던 옷들을 입고 오지 않고, 주로 밝은 붉은색 계열의 드레스들을 입고 오고는 한다. 물론 이 변화는 그 사건 때문에 생긴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에미르, 오늘도 유치원에 일찍 왔네?”

……그리고 어째서인지 모르겠지만.

평생 ‘새런 영애’라고 나를 부를 것만 같던 니나이나는 이제 은근슬쩍 영애 따위의 호칭을 부르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에미르’라고 부르는 횟수가 날이 갈수록 점차 늘어났다.

한마디로 니나이나가 나를 친근하게 여기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으음, 좋은 일인가……?

그래. 아무리 생각해 봐도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내가 구해준 일로 인해 니나이나가 내게 반해, 아니, 제대로 된 호감을 가지게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어째 내가 처음에 친해지려고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배로 결과가 멋져졌는걸.’

결국 나는 며칠 후, 내 비밀 노트에 적어 놓았던 니나이나 황녀와 친해지기 위한 이런저런 계획들을 깡그리 지웠다.

이제 이 계획들은 안녕이다. 애써 짜 놓은 맞춤형 계획들이 아쉽기는 했지만…… 결국 이 계획들을 사용하지 않고도 얼떨결에 친해지는 것에 성공해 버렸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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