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두 번째 프러포즈
같이 산책하는데 혼자 몇백 번을 걸었던 숲속 산책로가 너무나 새롭게 보였다.
아, 왜 이러지?
카딘 로네트가 곁에 있는 게 뭐라고, 왜 내 심장이 이렇게 빠르게 뛰는 거야?
“흐…… 헉. 흐, 허헉.”
“괜찮아? 앉았다 갈까?”
심각하게 날 바라보는 카딘에게 새침하게 대꾸했다.
“운동 부족이라서 그래요. 난 당신처럼 정기적인 운동을 하지 않는다고요.”
내가 밤에 3층 방 창가에서 카딘이 잔디밭에서 상체를 탈의한 채 운동하는 것을 지켜보았다는 것은 비밀이다.
카딘이 한숨 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 당신은 예전부터 체력이 약했지.”
맞아. 그래서 카딘과 섹스하고 나서 바로 곯아떨어졌지. 강철 체력을 가진 그에게 박자를 맞추다 보면 너무 피곤했으니까.
그 황홀했던 기억이란…….
입매가 부드러이 풀어지는데, 나는 깜짝 놀라 정신을 다잡았다.
잊으면 안 돼. 아침에 일어나 보면, 카딘은 내 곁에 없었어!
난 싸늘하게 쏘아붙였다.
“예전의 나를 아는 척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요. 난 과거를 잊고 싶거든요. 불행했던 결혼생활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지 않다고요.”
내 말에 그의 표정이 단단히 굳었다.
“그렇군…….”
그의 미간이 약간 좁아져 있었는데, 그건 화가 났거나 심기가 불편하다기보다는, 살짝 당황하거나 상심한 것처럼 보였다.
나는 너무나 선명히 보이는 그의 감정에 무척이나 놀란 상태였다.
그가 이렇게 감정이 풍부한 사람이었나? 갱년기가 찾아오기는 이른 나이인데. 아직 스물여섯밖에 안 됐잖아.
근데 어째서 이렇게 감정이 풍부해졌지? 정말 어디 아픈 건가?
그가 깊고 낮은 음성으로 날 불렀다.
“셀리아.”
쿠, 쿵. 내 심장이 속절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 당신, 왜 그렇게 감정이 듬뿍 담긴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거야?
당신은 나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잖아.
그래서 내가 이혼 서류를 내밀었을 때도, 날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한마디도 없이 간단하게 도장을 찍어 줬잖아.
근데 왜 지금은 눈빛에 미련이 가득해 보이지?
말을 해봐, 카딘.
난 왜 당신이…… 우리의 관계를 후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그가 진지하게 날 바라보며 말했다.
“저녁에 식사를 대접하고 싶은데, 참석해 주겠어? 정말로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
“…….”
저녁 식사? 오늘? 나보고 당신 집으로 오라는 거야?
난 그를 노려보다가 홱 뒤돌아서 내 집으로 뛰어갔다.
풉, 저녁에? 그것도 오늘? 저 인간이 미쳤나.
코웃음을 치면서 현관문을 열고 집에 들어간 나는 화내듯 소리질렀다.
“키티! 물 좀 데워주겠니? 샤워하고 싶어. 몸을 꼼꼼히 씻어야겠어. 아주 구석구석!”
어쩜 좋아!
너무 좋아!
당장 갈 거야. 저녁 식사는 여섯 시부터 시작이겠지? 1분도 늦지 않을 거야!
그가 미련 가득해 보인다는 점이 왜 이렇게 신나는지 모르겠다.
아, 연애할 때보다 더 짜릿한 기분이야.
* * *
나 이렇게 열심히 꾸며본 게 얼마 만이야?
정말 오랜만에 공들여서 치장했는데, 괜한 짓을 하는 건가 싶기도 했지만, 막상 카딘의 반응을 보니 옷차림에 신경 쓰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셀리아…….”
약간 쉬어 있는 목소리, 한층 탁해진 눈동자 색과, 울렁거리는 눈빛.
아, 익숙한 반응이다.
그래. 그는 저런 식으로 흥분하곤 했지.
평소에 행동이 절제되어 있다가도 밤이 되면 카딘은 몹시 적극적이었다. 먼저 내게 다가오고, 나를 몰아세우고, 내가 기겁할 만큼 짓궂은 행동을 했다.
극한에 몰린 내가 울다시피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가 매우 좋아했기에,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야한 신음을 내지르곤 했지. 그가 짓는 미소를 보려고.
“오늘 굉장히 아름답군.”
이다음에 카딘이 내게 할 짓이 자연스럽게 상상되어서, 환희인지 소름인지 불분명한 전율이 내 몸을 꿰뚫었다.
그는 이제 내게 다가올 거야. 큰 손으로 내 얼굴을 부드러이 잡고서, 일단 귓가에 입 맞추겠지. 그 부드러운 입술은 내 목덜미를 지나 가슴골 사이로 천천히 내려갈 거야.
카딘은 성급한 손길로 내 옷을 벗길 거야. 그러고서 내가 예민하게 느끼는 부분들을 익숙하게 매만지겠지.
아, 그가 내게 다가온다. 셀리아, 침착해.
역시 예상대로 그가 내 옷을…… 벗기지 않고 의자를 빼 줬다.
“저녁 식사에 응해줘서 고마워.”
아!
맞아, 우리 이혼했지?
그가 지금 내 옷을 벗길 이유는 없다.
난 그와 밤을 보내러 온 게 아니라, 저녁을 먹으러 온 거다. 그러니 정신 차리자. 카딘이 너무 섹시해 보이더라도 그에게 넘어가지 말자.
생각해봐. 전남편이랑 자는 법이 어디 있어?
그는 이제 내 사랑이 아니라 원수다. 날 외롭게 만들고는 결국 이혼까지 해 버렸잖아.
나는 그가 빼준 의자에 앉으며 식탁의 상차림을 냉정히 평가했다.
“이게 뭐예요? 내가 좋아하는 게 하나도 없네요?”
“미트볼 스파게티를 잘 먹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시간이 흘렀잖아요. 고기에 알레르기가 생겼어요. 전 이제 채식한답니다.”
“……그랬군.”
그의 잘생긴 얼굴이 그늘졌다.
난 흥미진진하게 그를 관찰했다.
그래, 카딘. 당신은 점수를 잃었어. 좀 더 슬퍼하란 말이야. 당신의 잘생긴 얼굴에 수심이 가득 드리운 게 마음에 들어.
살짝 한숨을 내쉰 그가 내 앞의 접시와 샐러드 접시를 바꿔주었다.
“과일 샐러드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야. 부족하지만, 이게 당신 입맛에 맞았으면 좋겠어.”
나는 실망스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채식주의자라고 샐러드만 먹는 건 아니란 말이에요. 좀 더 성의 있는 요리를 내어줄 수는 없었나요? 당신 식사하는 거 구경하라고 불러 놓은 거라면 정말 실망이에요.”
“미안해. 내가 미흡했어. 내일은 다른 걸 만들어 볼게. 당신이 잘 먹을 수 있는 거로.”
난 그의 말에 미간을 좁혔다.
만들어 본다고?
“이 음식들을 당신이 준비했어요? 하인이 아니라?”
그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대접한다고 했잖아.”
그렇다고 정말 요리를 직접 만들었어? 카딘 당신이? 공작성에서 요리를 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난 재빨리 미트볼 스파게티를 힐끔거렸다.
맛있어 보이는데…….
지금이라도 스파게티를 먹겠다고 할까? 그러면 이상해 보이겠지?
으, 왠지 억울해!
그가 처음 만들어 준 요리를 스스로 거절하고 말았다는 점에 화가 났다.
“으음. 샐러드 얻어먹자고 온 게 아니라서요. 그럼 전 이만 집에 가볼게요!”
속상해! 집에 가서 울어 버려야지.
다급히 일어난 카딘이 나를 따라와 내 팔을 잡았다.
“셀리아! 잠깐만.”
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쳐다보았다.
“아직 떠나지 마.”
“…….”
“원래는 식사를 마치고서 얘기를 꺼내려고 했는데……. 후식도 준비해 놓고, 당신이 좋아하는 치즈랑, 또, 레드 와인도 있는데.”
그가 이렇게 초조해하는 모습은 본 적이 없다. 그는 언제나 침착했다. 나와 다르게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 무심해 보일 정도로.
카딘이 숙녀를 대하는 법을 다 까먹은 사람처럼 굴고 있는데, 오히려 이 당황스러운 상황에 내 기분이 상쾌해졌다.
천하의 카딘 로네트가 평정을 잃을 정도라니. 내가 떠나는 게 그만큼 싫은가 보지?
지난 2년 동안 카딘은 정말 많이 바뀐 것 같은데, 내가 알지 못하는 모습을 더 보고 싶었다.
나는 미간을 좁힌 채 물었다.
“음, 그래서 무슨 용건인가요? 빠르게 말해 줘요. 긴 얘기를 들어줄 시간이 없어서요. 최대한 간추려서 딱 용건만 말해요.”
그를 몰아세우듯 재차 강조했다.
“딱 본론만요. 한마디를 넘으면 집중력이 깨지거든요.”
그가 입술을 깨물고서는 힘겨운 듯이 말을 꺼냈다. 내 팔을 여전히 잡은 채로.
“우리, 다시 시작해볼 수 있을까?”
아……!
와, 이거 뭐지?
나 설마 전남편한테 재결합 요구를 받은 거야?
생각보다 기분 째지잖아?!
입에서 튀어나오려는 비명을 억누르며 난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뭘요? 다시 뭘 시작해보자는 거죠? 설마 끔찍했던 결혼생활?”
카딘의 얼굴에 복잡한 감정이 서렸다.
“셀리아…….”
난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감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후회였다.
카딘 로네트는 지금 후회하고 있다!
“당신이 내게 돌아와 줬으면 좋겠어.”
“어머, 되게 당황스럽네요. 나보고 다시 로네트 공작성으로 돌아가라는 말이에요?”
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리며 덧붙였다.
“난 그곳에 정이 뚝 떨어졌어요. 좋은 추억이 하나도 없는걸요. 당신은 내가 필요로 할 때 내 옆에 있어 주지 않았잖아요. 항상 외로웠는데, 그곳으로 다시 돌아가라고요? 싫어요. 가지 않을 거예요.”
그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당신이 어떤 기분이었을지, 뒤늦게 알았어. 기약 없이 기다리는 게 얼마큼 사람의 피를 말리는 일인지……. 당신이 날 떠나고서야 알았어.”
“되게 황당하네요. 누가 들으면 내가 당신을 버리고 떠난 줄 알겠어요. 그때 이혼 도장 순순히 찍어준 사람이 누군데?”
“그래, 그때 당신을 보내는 게 아니었어.”
그의 눈가가 붉어지기 시작했다.
“어떠한 일이 있었어도 잡았어야 했는데. 어떻게든 내 곁에 두었어야 했는데. 내가 바보였어.”
나는 유심히 그를 지켜보았다.
설마 우는 거야? 응? 카딘 로네트, 당신에게도 눈물이 있어? 정말로?
“그때 당신은 황제 폐하밖에 몰랐잖아요. 전쟁이 날 수도 있다고, 언제나 바쁘다는 말만 했었죠. 나를 한 번도 돌보지 않았어요.”
“그때는…… 그게 내가 해야 할 일인 줄 알았어. 그게 내가 존재하는 이유라고.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했었어.”
카딘의 얼굴이 후회로 얼룩졌다.
“하지만 틀렸어. 셀리아, 나는 당신을 보살폈어야 했어. 내 삶에서 중요한 건 폐하가 아니라 당신이었어.”
“…….”
“당신 없는 침대에서 자면서, 매일 악몽을 꿨어.”
“…….”
“그동안 내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어.”
난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고 속으로 되뇌었다.
흥. 그래 봤자 소용없어. 뒤늦게 후회해 봤자 마차는 이미 떠났다고.
카딘, 나는 절대 당신과 재결합하지 않을 거야.
“셀리아, 부탁이야. 내게 기회를 줘. 나 당신이 너무 그리워. 당신 없는 공작성은 지옥 같아.”
절대 안 돌아가!
“앞으로는 당신을 최우선으로 둘게. 내 감정을 숨기지 않을게.”
……절대!
근데 나는 왜 자꾸 이 사람 앞에서 맹세하게 되는 걸까?
이런.
재혼 같은 건 절대 할 생각 없는데.
“그동안 표현하지 못해서 미안해. 내가 감정 표현이 너무 서툴러서, 당신의 사랑에 보답하지 못했어. 앞으로는 노력할게. 그러니까 다시 시작하자.”
“…….”
나는 정말 바본가 봐.
그동안 계속 맹세했잖아. 무슨 일이 있어도 내게 상처를 준 그에게 절대 돌아가지 않겠다고.
근데 왜 아직도 그에게 이렇게 쉽게 무너지고 마는 걸까?
“응? 셀리아…….”
세간에서 피도 눈물도 없이 잔혹하다는 평을 듣는 그가 우는 모습을 보면 신기할 줄 알았는데, 가슴이 아프다. 찢어질 것 같아.
어떡해? 아무래도 나 아직 이 남자를 사랑하나 봐.
나 정말 어떡하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