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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ologue (1/5)

Prologue

저 인간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난 창가에 서서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죽어도 제국의 수도를 떠나지 않을 것 같던 사람인데 어째서 이런 시골에 왔을까? 그것도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파리한 낯빛으로.

난 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하녀에게 말했다.

“옆 별장에 요양하러 온다는 사람이 저분이었구나? 카딘 로네트 공작.”

그런데 어쩜 내 시력은 날이 갈수록 좋아지는 것 같지?

내가 서 있는 곳은 3층인데도, 저 아래에서 나무에 등을 기대어 앉아 있는 카딘의 표정이 너무나도 잘 보였다. 그는 웃음기 하나 없이 썰렁한, 내가 기억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무표정을 띠고 있었다.

얼음을 깎아 만든 것처럼 잘생긴 미남. 한때는 내 남편이었던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데도 이렇게 별 기분이 안 든다니.

으음, 내 마음이 제대로 식긴 식었구나.

“마님…….”

내 냉랭한 얼굴에 놀랐는지 어린 하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날 불렀다.

“왜?”

고개를 살짝 돌려 바라보니, 하녀, 키티가 어쩔 줄 몰라 하며 두 손을 본인 얼굴 앞에다가 휘젓고 있었다.

“어, 얼굴…….”

얼굴? 벌레가 붙었다는 건가?

손가락으로 얼굴을 더듬어 보니 축축한 물기가 잔뜩 묻어났다.

뭐야? 나 울고 있었어?

“……알레르기가 있어서. 꽃가루가 날리는 날이잖니?”

냉담하게 말한 뒤에 키티가 건네준 손수건으로 코를 푸는 척하면서 눈가를 닦았다.

뭐, 아무렇지 않아. 재채기만 해도 나오는 게 눈물인걸.

눈물 따위로는 내가 저 인간을 못 잊었다는 증거가 절대 되지 않지. 그것도 소리 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이잖아? 만약 카딘이 정말 그리웠다면 오열해야지.

“크흐흡.”

난 손수건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마님…….”

침착하자, 셀리아. 저 인간을 보고서 이러는 건 좋지 않아. 볼썽사납다고.

스스로 안심시킨 후 나는 우아하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키티? 창문을 닫아 주렴. 꽃가루가 들어오는 모양이야. 그것도 무척 많이.”

안절부절못하던 키티는 내 명령에 쪼르르 달려와 창문을 닫았다. 나는 애써 창가에서 고개를 돌리고 방을 빠져 나왔다.

앞으로 한동안은 이 방에 들어오지 않는 게 좋겠어. 옆집이 이렇게나 잘 보이니 말이야.

참, 건축가들도 무심하지. 옆집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이렇게 잘 관망할 수 있도록 집을 설계했다니.

내가 정상이라서 다행이야. 만약에 이상한 취미가 있었다면, 앞으로 온종일 3층에 껌처럼 눌어붙어 앉아, 옆집을 구경했을 거 아니야?

밥도 여기서 먹고, 그림도 여기서 그리고, 화장실에 가지도 않고, 말 그대로 온종일 옆집 사람을 구경하느라 시간을 할애했겠지.

잠깐, 근데 왜 3층 방에는 의자가 없을까? 하나 갖다 놓는 게 좋지 않을까? 물론 나는 3층에 올라오지 않을 거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난 키티에게 등받이가 편한 의자 하나를 구해 오라고 지시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2층의 침실로 향했다.

카딘 로네트 공작. 조금 전 목격했던 그의 모습은 눈앞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그의 무심한 얼굴, 어딘가 지쳐 보이는 분위기가 자꾸 떠올랐다.

대체 어디가 아픈 거야? 그렇게 건강 체질이더니만.

설마 죽을병에 걸린 걸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가 이혼 후, 그의 안녕을 바란 적은 없지만, 그래도 죽을병에 걸리도록 저주한 적 또한 없었다.

그냥…… 살아 있길 바랐다. 너무 잘살면 내 배가 아플 테니, 그냥 적당히만.

하지만 저렇게 아픈 꼴로 갑작스럽게 나타나다니.

침실로 돌아오고 나서도 난 좀처럼 안정하지 못한 채 방안을 배회했다.

오른손 엄지의 손톱을 잘근잘근 물어뜯고 있는 것이 누가 보면 초조한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난 하나도 초조하지 않다고.

카딘 로네트, 그가 아프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휴…….”

난 큰 한숨을 쉰 후에 책상 앞에 앉았다.

짜증나게도 자꾸 신경이 쓰였다.

이건 물론 카딘 로네트가 내 바로 옆집에 요양 와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 옆집에 요양 온 사람이 환자라서 걱정이 되는 것일 거다.

왜냐면 나는 매일 아침 정말 산뜻하고 기분 좋게 집 주변을 산책하니까 옆집 사람과 마주치게 되는 것은 불가피하다.

매우 건강한 나를 보고 저 사람이 상대적인 박탈감, 속상함, 우울감, 하여튼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느낄 수도 있잖아?

그럼 저 사람은 기껏 조용한 시골로 요양을 온 보람이 없을 거야.

사람이 긍정적인 감정을 느껴야 몸 회복에도 큰 도움이 될 텐데, 매일 우울함에 빠져 있으면 컨디션이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다.

그러면 건강한 이웃 된 처지에서 조금 마음이 불편하다.

또, 아무래도 이웃이 되었으니 오다가다 마주치면 인사를 해야 할 텐데, 전남편이랑 어떻게 유쾌한 감정으로 인사하냐고.

나는 그가 꼴 보기도 싫은데.

“아픈 꼴 보기 싫다고……, 헛!”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진심에 깜짝 놀라 입을 틀어막았다.

왜 이래, 셀리아 크렌도티! 그는 네 원수라고. 그 끔찍하게 지루하고 외로웠던 2년간의 결혼생활을 잊지 마!

나는 슬며시 피어오르는 동정심을 떨쳐 버리려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잊을 수 없어. 그가 나에게 했던 짓을…….”

그래,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카딘은 내게…….

“늘 무심했지.”

그는 나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무슨 나쁜 짓이라도 해줬으면 더욱 미울 텐데, 늘 무심했다. 그래서 더욱 잊을 수 없다.

나는 고통스러웠던 결혼생활을 떠올리며 카딘에 대한 복수심을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내 결혼생활이 어땠더라?”

그동안 카딘을 잊고 살려고 부단히 노력했었다. 내 인생에서 그를 없는 사람 취급했으므로, 그와 얽혔던 과거 역시도 내 머릿속에서 많은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난 눈을 찡그리며 잠가 둔 서랍으로 손을 뻗었다.

“안 되겠어. 잘 기억이 안 나. 일기장을 봐야겠어.”

나는 일기를 매일 쓰는 꼼꼼한 성향이 아니다. 특별히 인상 깊은 일이 발생한 날에만 쓴다.

한평생 일기를 쓰지 않다가, 결혼한 그날부터 일상을 기록하기 시작했지. 그럼 그와의 결혼생활이 특별하게 느껴졌다는 소리가 되려나?

어쨌든 한동안 잊고 살았던 일기장을 꺼내어 봤다.

절대 살펴보지 않으려고 서랍에 자물쇠를 3개나 달아 놓았다. 매일 일기장을 들춰 보며 과거를 회상하면 되게 쓸쓸하고 미련 가득한 여자처럼 보이잖아. 난 그런 거 제일 싫어.

난 이혼해서 행복해. 별로였던 결혼생활을 청산해서 너무나 홀가분하다고.

그러니 일기장 따위 읽어 볼 이유가 하나도 없지.

근데 종이 질이 왜 이래? 왜 이렇게 구겨지고 닳은 거야?

마치 17373920번 열어본 것처럼.

그리고 왜 이렇게 종이가 우글쭈글해?

종이 색이 변해 있는 것이, 마치 말라붙은 눈물 자국처럼 보여서 꺼림칙했지만 나는 애써 무시하며 일기장을 넘겼다.

여기에 모든 기록이 있다.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났던 열아홉 살의 셀리아 크렌도티, 2년간의 결혼생활, 그리고 비참하고 슬프게 끝나 버린 나의 사랑 이야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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