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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23)화 (123/123)

외전 5 Happy Ever After

마리에타의 극적인 회복에 카스피언 황성에 감돌았던 어둑한 기운이 곧 가셨다. 그녀의 침실에 모인 사람의 얼굴 위로 안도와 기쁨이 번갈아 드러났다.

“코로니스, 정말 고마워요!”

미오가 그의 메마른 손을 붙들고는 세게 흔들었다. 남의 일에 무관심한 코로니스가 마리에타의 회복에 큰 도움을 줬다는 것에 가슴이 벅찼다. 아이가 태어나서 한 번도 직접 찾아온 적이 없던 그였다.

“카스피언 제국의 대마법사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군.”

누군가를 좀처럼 칭찬하지 않는 지오프리 역시 몇 번이고 감사를 표시했다.

“……아. 그게.”

코로니스는 이런 오해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몰라서 입만 헤 벌리고 있었다. 딱히 마리에타를 구할 생각 따위는 없었으며, 이곳에 온 것도 자의는 아니었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군.’

항상 내키는 대로 말했던 그였지만, 죽을 위기를 넘긴 마리에타의 앞인지라 망설여졌다. 이런 불편한 상황이 싫어서 곧장 숲으로 사라지고 싶었지만, 마리에타가 그의 망토 끝을 쥐고 있는 바람에 그럴 수도 없었다.

그때 약을 모두 먹은 마리에타가 침대 헤드에서 등을 떼면서 입을 열었다.

“모두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모두 그녀가 부주의한 탓에 벌어진 일이었다. 핼쑥해진 마리에타의 볼을 쓸어내리던 지오프리가 고개를 내저었다.

“이렇게 무사하니까 된 거야.”

“그래. 모두 너를 구하려고 최선을 다했단다. 로렌이나 아빠도 그리고 코로니스도 큰 도움을 주었단다. 그가 아니었으면 정말 무슨 일이 생겼을지 상상도 못 하겠구나.”

눈이 뒤집히면서 아이의 숨이 꺽꺽 넘어가던 때를 떠올린 미오가 어깨를 덜덜 떨었다. 지오프리가 곧 미오의 어깨를 감싸면서 괜찮다고 다독여주었다.

“감사합니다.”

얌전하게 인사를 건넨 마리에타가 미오를 똑바로 응시했다.

“엄마, 꿈에서 샤를로트를 만났는데, 안부를 전해달라고 했어요.”

지오프리는 마리에타의 엉뚱한 말을 열에 시달린 후유증이라고 치부했다.

“그래. 샤를로트라는 친구를 사귄 거로구나. 곧 봄이 오면 나가서 실컷 놀 수 있을 거다.”

아이의 부드러운 은발을 쓸어내리는 지오프리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그의 말에 마리에타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아빠. 샤를로트는 제 남동생이에요.”

“마리에타, 동생이라니?”

아이의 말에 미오가 당황했다.

그녀는 곧장 마리에타에게 붙잡힌 코로니스를 응시했다. 그는 고개를 슬쩍 돌린 채 답을 피했지만, 미오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이 무언의 긍정임을.

“맙소사!”

입으로 손을 틀어막은 미오의 머릿속에 알렉세이의 결혼식이 있던 날이 떠올랐다. 그날 유독 남달랐던 지오프리의 열정이 생생했다.

“코로니스! 이게 사실인가? 우리 미오가 마리에타의 동생을 가진 건가?”

놀란 지오프리가 무릎을 꿇더니 곧장 그녀의 배에 볼을 댔다.

“왕자님이 태어나실 겁니다.”

코로니스가 조용히 중얼대자, 지오프리가 놀란 눈을 했다.

“그나저나 마리에타가 예지 능력을 갖췄다니…….”

예지 능력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평범한 삶에서 한참 멀어져 버린 딸을 보면서 다소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자, 마리에타가 방긋 웃었다.

“아빠, 저는 괜찮으니까 가서 엄마를 보살펴주세요.”

둘째를 가졌다는 소식에 미오의 얼굴이 쓰러질 것처럼 창백했다.

“그럼 코로니스, 마리에타를 좀 부탁하지.”

지오프리가 미오를 번쩍 들어 품에 안은 채 침실을 빠져나가자, 방에는 마리에타와 코로니스만 남았다.

“나를 구해주러 와줘서 고마워요. 코로니스.”

그의 망토를 쥐고 흔들면서 마리에타가 속삭였다.

“……음.”

뭐라고 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마리에타의 열을 내리게 한 것은 그였지만, 이곳에 온 것은 반강제적이었으니까.

소환됐다는 사실을 아직 받아들이기 힘든 탓에 그는 침음을 ‘끙’ 내뱉었다.

“괜찮아진 것 같으니 이만 돌아가겠다.”

“벌써 돌아가려고요?”

상대는 허리에도 이르지 않는 꼬마였지만, 그 눈빛만큼은 그를 압도하고도 남았다. 그의 예언처럼 마리에타는 장차 네 개의 제국을 처음으로 통일할 위대한 지도자가 될 것이다.

“……그래.”

평정심을 잃는 법이 없는 코로니스가 말끝을 흐렸다. 그는 서둘러 창틀로 향했고, 그대로 뛰어내리려고 했다. 코로니스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리에타가 속삭였다.

“코로니스, 곧 만나요.”

“……귀찮게 할 생각하지 마라.”

퉁명스러운 마지막 말을 남긴 그가 한 줄기 빛이 되어서 사라졌다.

* * *

마리에타가 말한 것처럼 몇 달 후 샤를로트가 태어났다. 아이는 지오프리와 닮은 외모를 한 왕자였다. 게다가 드디어 마리에타의 본체가 드러났다. 거대한 늑대의 몸을 한 마리에타가 미오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마리에타 정말 멋지구나…….”

“누굴 닮았는지 진짜 그렇군.”

미오가 반짝이는 은색 털을 쓸면서 감탄했다. 샤를로트를 품에 안은 지오프리가 뭐가 그리 좋은지 싱글벙글 웃었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있을까.

감격에 찬 그의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당신 정말 지오프리 카스피언 맞죠?”

“미오, 사랑해.”

“엄마, 아빠, 샤를로트 사랑해!”

아이를 안은 채 그녀의 이마에 가만 입을 맞추는데, 금방 인간으로 변한 마리에타가 두 사람의 몸을 꼭 안았다.

항상 즐거운 일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세바스찬과 로렌을 노환으로 차례로 떠나보내야 했다. 두 사람은 단순한 고용인이 아니라, 가족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슬픔은 오래도록 가시질 않았다.

“그래도 샤를로트 왕자님을 안아볼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사무엘 베일이 조용히 입을 뗐다.

언제나 정이 넘치던 로렌다운 마지막 말이었다.

고개를 툭 떨구는 사무엘의 손을 붙든 그녀가 위로를 건넸다.

“로렌은 항상 당신을 칭찬했어요.”

베일 후작은 황제를 보좌하여 카스피언 제국의 번영을 일구는 데 큰 힘을 보태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를 위로하는 것은 지켜보던 지오프리는 두 사람이 당장 울음을 터뜨릴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둘 수야 없는 노릇이라서 허튼소리라도 해야 했다.

“설마 두 사람 아직 왈츠를 추고 싶은 건 아니겠지?”

로렌은 그에게는 돌아가신 어머니 대신 넉넉한 품을 내어준 이였고, 세바스찬은 아버지보다 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지오프리의 말에 미오가 황당하다는 얼굴을 했다.

“맙소사,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그녀의 핀잔에 지오프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데 괜찮은 시간이 따로 있나?”

사무엘은 로렌이 준 약을 꼭 안은 채 천천히 응접실을 빠져나왔다. 금실이 유독 좋은 황제와 황후 폐하를 보자 로렌의 잔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후작 나리, 도대체 언제 결혼하려고 그래요? 우리 도련님을 좀 봐요. 얼마나 보기 좋아요? 응?“

로렌은 이따금 그에게 결혼을 독촉하고는 했다. 하지만 사무엘은 첫사랑 실패 이후로 이성에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결혼 적령기는 훌쩍 넘어 있었다.

“……아, 죄송합니다.”

상념에 빠져있던 그가 앞에 오는 사람을 미처 보지 못해서 부딪힐 뻔했다. 그 바람에 손에 들고 있던 약재가 복도를 나뒹굴었고, 사무엘은 그것을 주우려고 무릎을 꿇었다.

“여기 있습니다.”

먼저 꾸러미를 주운 상대가 그것을 내밀었고, 그것을 받아든 사무엘은 그제야 상대를 알아볼 수 있었다.

“아, 당신은…….”

비앙카는 황제, 황후 폐하와 가까운 사이로 종종 황궁을 찾는 의원이었다. 신비로운 분위기의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일절 관심을 주지 않았다. 그래서 비앙카에게 호감을 느꼈던 사무엘이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댔다. 그의 거뭇한 눈 밑과 건조한 입술을 살피던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러다 쓰러질지도 모릅니다.”

그녀가 사무엘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것은 처음이었다. 더구나 그에게 관심을 보인 게 감격스러워서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염려를 끼치게 해서 송구합니다. 비앙카 님.”

“내게 미안할 게 뭐 있습니까.”

여전히 냉랭하게 구는 그녀였지만, 사무엘은 어쩐지 오늘은 비앙카를 이렇게 보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약 말입니다. 그냥 씹어서 먹으면 될까요.”

약 꾸러미를 불쑥 내밀면서 한 그의 질문에 비앙카가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종이에 쌓인 약재는 파사에서 온 것으로 달여서 먹어야 했다.

“………하.”

“제가 이리 아둔하여 죄송합니다.”

그러다 보니 두 사람은 정원을 함께 걷고 있었다. 사무엘은 계속 한심한 질문을 던졌고, 비앙카는 짜증을 내면서도 답을 해주었다.

“바쁘신 줄 잘 알지만, 베일 가에 들러서 한 번만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사무엘의 요청에 비앙카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상대가 누구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카스피언 제국의 베일 후작, 잘생기고 돈이 많아서 인기가 많다고 했던가.

’비앙카, 그 사람 정말 착해.‘

미오가 종종 그의 칭찬을 했기에 매정하게 뿌리치기가 주저되었다. 또 멍청할 정도로 한심해서 걱정되었다.

“한 번만입니다.”

“영광입니다. 비앙카 님.”

연신 허리를 굽히면서 크게 인사를 해대는 사무엘 옆으로 못마땅한 표정의 비앙카의 갈색 머리가 나풀댔다.

한편 2층 창밖으로 풍경을 감상하던 미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오프리, 여기 와봐요!”

“무슨 일이지?”

잠든 샤를로트의 이불을 덮어준 지오프리가 얼른 미오의 등 뒤에 섰다. 그러자 비앙카와 사무엘이 나란히 걷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에 지오프리 역시 말을 잇지 못했다.

“사무엘이 왜 그리 눈이 높나 했더니…….”

“우리 비앙카한테 반해서 그랬나 봐요. 사무엘이 은근 사람 보는 눈이 있다니까요. 왜 예전에 나한테도 막 볼을 붉히고 얼마나 귀엽게 굴었…….”

우스갯소리를 내뱉던 미오는 말꼬리를 흐렸다. 등 뒤의 강렬한 시선에 몸이 타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허리를 꽉 붙든 그의 손등 위로 굵은 핏줄이 꿈틀거렸다.

“나도 이렇게 옹졸한 사내가 되고 싶지 않은데 말이야.”

미오의 귓가에 더운 숨을 뿜어내는 그가 속삭였다.

“그대가 자꾸 나를 그렇게 만들어.”

지오프리의 손등을 쓰다듬던 미오가 머리를 그의 가슴에 깊게 묻자, 고개를 숙인 지오프리가 그녀의 어깨에 입술을 맞추었다. 짙어지는 입맞춤에 미오의 눈이 흔들렸다.

“이러다 샤를로트가 깨겠어요.”

“내 눈에는 미오, 그대만 보여.”

“진짜 못 말리겠다니까.”

그녀를 가장 사랑한다는 사내를 무슨 수로 밀어내겠는가.

“공작님, 황제 폐하, 지오프리…….”

몸을 돌린 그녀가 고개를 들어서 지오프리의 눈을 그윽하게 들여다봤다.

“그래. 미오.”

“사랑해요.”

수천 번, 수만 번 주고받았던 고백이건만, 항상 이리도 가슴을 뛰게 했다. 미오의 호박색 눈을 내려다보는 지오프리의 얼굴에 행복이 가득 어렸다.

“사랑해. 나의 여우.”

언젠가 듣고 싶었던 말에 미오의 눈에 촉촉한 것이 어렸다. 몇 번의 죽음을 반복하면서도 놓지 못한 이 사랑에 가슴이 벅찼다.

“공작님, 눈을 감아요.”

까치발을 든 미오가 지오프리의 목에 두 팔을 둘렀고, 그대로 그의 서늘한 입술을 훔쳤다. 창밖으로 이름 모를 꽃향기가 은은하게 실려 오는 완벽한 날이었다.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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