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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22)화 (122/123)

외전 4 마리에타의 동생, 샤를로트

사슴 수인, 비앙카는 약초를 구하기 위해서 여행을 자주 떠났지만, 일 년에 몇 번 카스피언 제국을 찾는 일을 잊지 않았다. 그녀가 막 마차에서 내리는데, 누군가 멀리서 손을 흔들면서 달려왔다.

“비앙카 이모!”

이제 여덟 살이 된 마리에타가 비앙카의 품에 덥석 안겼다. 기다란 갈색 머리를 하나로 틀어 올린 비앙카는 허리까지 오는 아이를 따스한 눈으로 바라봤다.

“마리에타, 키가 이렇게나 자라서 못 알아볼 뻔했구나.”

“응! 조금만 있으면 키가 나무만큼 자랄 거야!”

마리에타가 이모의 칭찬에 씩씩하게 답했다.

“……사랑스러운 마리에타.”

마리에타의 머리를 몇 번 쓸어주던 비앙카가 몸을 숙여서 아이와 눈을 마주했다.

“이모가 멋진 선물을 준비했으니까 풀어볼래?”

마리에타가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기쁨을 감출 줄 몰랐다.

“비앙카 이모! 최고!”

비앙카는 보통 사람이 주지 않는 선물을 주고는 했다. 마물의 뼛조각이나 말린 독초를 넣은 보석 같은 것 말이다. 선물 꾸러미를 챙겨서 다람쥐처럼 사라지는 아이를 보면서 미오가 오랜 친구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잘 지냈어? 비앙카?”

마치 매일 만난 사람처럼 다정한 인사였다.

“그럼 잘 지냈지.”

조용한 비앙카의 음성에 미오는 한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약초를 캐다가 멋진 미남을 만나지는 못했고?”

비앙카는 어찌 보면 코로니스만큼이나 은둔생활을 즐기는 것 같았다. 누군가와 동행하는 법도 없었고, 이곳에 와서도 미오가 아니면 누구도 만나지 않았으니까. 아마 네 개의 제국에서 알고 지내는 것은 미오와 일행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끔은 그녀가 혼자 있는 게 조금 마음 쓰였다.

사람마다 행복의 기준이 다르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내 눈이 너무 높아져서 말이야.”

“그건 또 그래.”

그녀 주변에 있는 유일한 남자들이 지오프리, 알렉세이, 코로니스였으니 어쩔 수 없었다. 다들 어딘가 나타나기만 해도 기절하는 사람이 있을 만큼 빼어난 미모를 지녔으니까 그들을 능가하는 미남을 찾기는 힘들지도 모른다.

“비앙카, 보고 싶었어.”

“나도 그래. 미오.”

서로의 손을 맞잡은 두 사람이 얼굴을 가만 들여다봤다. 함께 있으면 시간을 거슬러 순식간에 과거로 돌아간 것 같았다. 작은 여우를 보살펴주던 사슴이 함께 지내던 작은 굴이 있었다. 추위를 모두 막아주지는 못했지만, 안락한 보금자리였다.

“오기 전에 코로니스에게 잠깐 들렀는데, 그가 퍽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던데?”

“겁에 질려있지는 않았어?”

코로니스라는 말에 미오가 큰 웃음을 터뜨렸다. 알렉세이의 결혼식만 참석한 후 숲으로 돌아갈 예정이었던 그는 몇 달 카스피언 황궁에 발이 묶였다.

‘코로니스 삼촌! 가지 마!’

그가 안 보이면 울음을 터뜨리는 마리에타 때문이었다. 아이는 새로 만난 삼촌이 퍽 마음에 드는지 그를 곧잘 따랐다. 물론 코로니스는 전혀 삼촌 노릇을 할 생각이 없어 보였지만.

“그는 힘들게 유모를 구해준 다음에야 숲으로 돌아갈 수 있었지. 가만 보면 마리에타는 나와 지오프리를 하나도 안 닮은 것 같아.”

마리에타는 사교성이 뛰어났고, 애교가 넘치는 성격을 지니고 태어났다. 하지만 그녀나 지오프리는 전혀 그런 편이 아니었으니까.

미오의 말에 비앙카가 싱긋 웃었다.

“아니야. 마리에타는 너를 똑 닮았는걸.”

“……응?”

미오가 고개를 갸웃하자, 비앙카가 그녀의 손등을 가만 두드렸다. 미오는 잘 모르지만, 비앙카나 알렉세이는 좀처럼 누군가에게 곁을 주지 않는 편이었는데, 그들의 마음을 단숨에 파고든 것이 바로 미오였다. 그녀는 귀여운 외모와 장난스러운 성격에 반하지 않을 수 없는 존재였다. 게다가 생명이 깃든 것이라고는 모두 질색하는 코로니스가 내내 미오를 돌봐주기까지 했다.

“미오는 누구도 가지지 못한 따뜻한 마음이 있어.”

“뭐야. 친구라고 너무 좋게 봐주는 거잖아.”

비앙카의 몸을 안은 미오가 손으로 친구의 등을 힘주어 안았다. 비앙카에게는 늘 기분 좋은 숲의 냄새가 났다. 잠시 후 마주한 비앙카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미오, 손을 다시 줘보겠어?”

미오의 손목을 붙든 비앙카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왜 내가 어디 아픈 거야? 응?”

남다른 의술의 힘을 가진 비앙카는 마리에타나 미오의 건강을 챙겨주었다. 덕분에 두 사람은 감기 한 번 앓지 않고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손을 뗀 비앙카가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고개를 살짝 저었다. 기쁜 소식이 있는 것 같지만, 아직 알릴 때가 아니었다.

“그냥 한번 확인해본 거야.”

“뭐야. 놀랐잖아. 이러지 말고 들어가서 맛있는 차를 마시는 게 어때? 도르프에서 진짜 좋은 차가 왔거든.”

팔짱을 끼고 궁으로 향하는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사라질 줄 몰랐다.

* * *

카스피언 제국에 연일 눈이 내렸다. 길이 온통 눈으로 뒤덮였고, 나무도 새하얗게 탈바꿈했다. 사정이 그렇다 보니 외출하기 힘든 날이 계속되었다.

“잠깐만 놀게요. 응? 책도 벌써 다 읽고, 숙제도 다 했어요.”

바깥에서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는 마리에타가 나가게 해달라고 졸라댔다. 사실 적당히 뛰어노는 것은 필요한 일이기는 했다.

“하지만 조심해서 놀아야 해. 외투를 벗어서도 안 되고!”

간신히 허락을 받은 마리에타는 물 만난 고기처럼 눈 위에서 팔딱대며 고용인들과 눈싸움하고 눈사람을 만들었다. 그리고 기분 좋게 돌아오는 길, 사고가 일어났다. 고용인이 방심하는 사이 마리에타가 꽝꽝 얼어버린 호수 위를 내달리다가, 마침 살얼음을 밟은 탓에 겨울 호수에 풍덩 빠진 것이다.

그날 밤 마리에타가 고열로 몸져누웠다. 늘 씩씩하던 아이가 축 늘어진 채로 열 경기를 해대자, 지켜보는 미오와 지오프리 역시 걱정으로 얼굴에 핏기가 하나 없었다.

“원래 아이 때는 아프면서 자란다니까, 너무 염려 마세요.”

마리에타의 곁에서 젖은 수건으로 이마를 닦아주던 로렌이 속삭였다. 황궁 의원이 다녀갔지만 열이 내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고 한 터라 여러 사람이 번갈아 마리에타의 몸을 닦아주었다.

“도련님도 어린 시절 이렇게 고열에 시달렸던 적이 있답니다. 그때도 제가 만든 특제 시럽을 먹고 이틀 만에 일어나셨어요. 그러고는 평생 얼마나 건강하셨습니까. 안 그래요?”

머리가 하얗게 센 로렌이 두 사람을 안심시키려 애썼다.

“로렌, 정말 괜찮겠죠?”

미오가 꼭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처음 카스피언 공작성에서 만났을 때부터 로렌을 줄곧 의지해온 터였다. 그녀는 미오에게 이모 같은 존재였다.

“이 모든 게 꼭 제 잘못 같아요.”

추운데 밖에 나가게 했던 것, 함께 나가서 아이를 지켜주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좋아하는 초콜릿을 못 먹게 했던 사소한 일들 모두가 후회되었다.

“이대로 우리 마리에타가 잘못되는 건 아니겠죠? 아직 해주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미오, 그런 일은 절대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두지 않아.”

아픈 아이의 손을 쥐고 있던 지오프리가 미오를 꼭 안았다. 아닌 척하고 있었지만, 마리에타의 힘겨운 숨소리에 그의 심장이 무너져내리고 있었다.

* * *

마리에타의 열은 좀처럼 내릴 기미가 없었다. 지오프리와 미오, 로렌이 그녀의 곁을 내내 지키고 있었다.

“이러다 황후 폐하가 쓰러지겠습니다.”

마리에타 걱정에 얼굴이 거칠해진 미오를 보면서 로렌이 지오프리에게 잠시 눈을 붙일 것을 권했다.

“제가 잘 지키고 있을 테니까요. 두 분이 건강하셔야 나중에 공주님이 깨어나셨을 때 안아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키지 않았지만, 로렌이 강하게 밀어붙인 탓에 두 사람은 마리에타의 침실 바로 옆 응접실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열 때문에 숨을 쌕쌕 몰아쉬는 마리에타의 곁에 촛불 하나가 위태로이 타올랐다.

“열이 빨리 내려야 할 텐데…….”

로렌의 걱정스러운 한숨에 창이 덜컹대더니 방이 뿌연 안개 속에 잠겼다. 로렌은 금방 스르르 잠들었고, 연기를 헤치고 익숙한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숲에서 평소처럼 고용한 시간을 보내던 코로니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가운을 느슨하게 묶은 차림으로 누군가의 침실로 소환이 되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감히 누가 나를.”

네 개의 제국에서 그를 소환할 수 있을 만한 이능을 지닌 사람은 없었다. 그가 지오프리를 인정했기에 부름에 응하는 것이었지, 강제로 코로니스를 나타나게 할 수는 없었다. 그는 태생부터 모든 것이 귀찮았다. 그래서 아는 사람도 없었고, 사람을 사귈 필요도 느끼지 못했다.

밝은 내부에 적응하지 못한 그가 커다란 눈을 몇 번 끔뻑댔다.

그때 열에 시달리고 있는 은발을 한 이를 볼 수 있었다.

“마리에타…….”

그를 불러낸 것이 마리에타라는 사실을 깨닫고 등줄기에 진땀이 주르륵 흘렀다. 순간 가끔 꾸고는 했던 악몽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상대는 그의 이름을 지어준 이였으며, 알렉세이보다 더 이 땅에 오래 살아온 존재였다. 아니, 존재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도 의문인 바람 같은 이였다.

‘너의 주인이 곧 나타날 거다.’

‘나는 이미 주인을 모시고 있다.’

‘그런 의미의 주인이 아니란다. 코로니스.’

‘그럼 어떤……? 아니 그게 누구지? 내가 그런 게 왜 필요하지?’

인상을 찌푸린 그의 물음에 바람이 코로니스의 발목을 스쳤다.

‘그녀를 만나면 바로 알 수 있을 거다.’

“설마 마리에타 네가…….”

충격을 받은 듯한 코로니스가 쓰러질 것처럼 마리에타의 곁으로 다가섰다. 온기라고는 없는 손을 뻗어서 이마를 쓸어주자, 아이가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마리에타, 인제 그만 일어나렴.”

놀란 것은 그가 알아서 추슬러야 할 일이고, 지금 마리에타를 치료하는 게 급선무였다. 코로니스의 음성에 마리에타의 전신이 반응하듯 몸이 덜덜 떨렸다. 그때 아이의 모습 위로 은색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의 그림자가 어른댔다.

“……아.”

마리에타의 본체를 처음 확인하게 된 코로니스의 눈이 잔뜩 흔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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