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21)화 (121/123)

외전 3 마리에타 카스피언의 비밀

따사로운 햇살이 쏟아지는 호수 근처에 알록달록한 천을 깔고 세 식구가 나란히 소풍을 즐기고 있었다.

“엄마, 저기 나비가 있어요!”

엄마와 꼭 닮은 아이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깔깔대며 웃었다.

“마리에타, 옷이며 손에 초콜릿이 잔뜩 묻었네.”

머핀을 양손에 쥐고 먹던 아이가 고개를 들자, 근엄한 지오프리의 얼굴이 한순간에 부드러워졌다. 그가 손을 뻗어서 아이의 볼에 묻은 초콜릿을 닦아내자, 마리에타가 일어나서 지오프리의 품에 안겼다.

“아빠, 나도 초콜릿 머핀 백 개만 더 먹으면 아빠처럼 키가 커져요?”

“마리에타, 그 전에 네 이가 전부 썩을 것 같은데…….”

손수건을 꺼내서 아이의 손을 닦아주던 미오가 간신히 웃음을 참았다. 마리에타는 일전의 생일에 지오프리가 손수 게르를 만들어줬던 날 생긴 아이였다.

‘아이만 생기면 행복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아이는 인간의 모습 외에 다른 모습으로 변하지 않았다. 마리에타가 행복하면 그만이지만, 부모로서 여간 걱정이 아니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황에서 갑자기 수인이 되면 아이가 혼란스러울 테니까.

마리에타가 일곱 살이 되던 해, 그들은 아이를 데리고 코로니스를 찾았다. 여전히 으스스한 숲속에 살던 코로니스는 흔들의자에 몸을 푹 묻은 채 그들을 맞았다.

‘코로니스, 이왕이면 그 미청년 얼굴이면 좋았잖아요.’

분명히 그들이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으면서, 기다란 머리를 덩굴처럼 늘어뜨리고 등이 심하게 굽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같은 기다란 손가락에는 보석 반지가 흘러내릴 것처럼 매달려있었다. 지오프리와 미오의 손을 꼭 잡고 있던 아이는 흥미로운 얼굴을 했다.

‘마리에타, 코로니스를 삼촌이라고 부르면 된단다.’

미오의 소개에 아이는 겁도 없이 검은 망토를 뒤집어쓴 코로니스에게 달려가서 안겼다.

‘코로니스 삼촌은 왜 마리에타를 보러 와주지 않았어요? 나는 늘 삼촌이 보고 싶었는데.’

아이의 말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코로니스 쪽이었다.

‘그게 내가 아파서 말이다.’

쩔쩔매는 코로니스를 보는 것은 처음이라서 미오는 괜히 속이 시원했다. 마리에타는 그에게 찰싹 붙어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 반지 진짜 예뻐요. 나한테 줄 수 있어요?’

‘마리에타, 코로니스 삼촌이 힘들어하시잖아. 안 그래요? 지오프리?’

진땀을 흘리는 코로니스가 불쌍해서 미오가 한마디 거드는데, 지오프리는 나 몰라라 하고 난로 앞에 가서 찻물을 올렸다.

‘마리에타를 말리지 않아도 되겠어요?’

‘우리 마리에타를 누가 말려.’

태연히 차를 따른 지오프리가 그녀에게 찻잔을 건넸다.

‘누굴 닮아서인지 아주 고집불통이거든.’

그의 은근한 말에 미오가 눈에 살짝 힘을 주었다.

‘뭐라고요?’

그때 더는 견디지 못한 코로니스가 망토를 벗어 던지면서 항복선언을 했다.

‘마리에타! 잠시만. 잠시만.’

그는 다시 원래의 준수한 미청년의 얼굴을 한 채 숨을 헐떡였다. 코로니스는 누군가와 이렇게 가깝게 접촉하는 게 처음이었다. 그리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아무도 근처에 오지도 않을뿐더러, 이렇게 어린아이라면 울기부터 하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이 아이에게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코로니스 삼촌, 예쁘다.’

음산한 기운을 뿜어내는 창백한 코로니스를 보면서 마리에타가 눈을 반짝였다. 이상한 느낌에 지오프리가 얼른 아이를 품에 안으면서 입을 뗐다.

‘우리가 왜 왔는지 잘 알고 있겠지.’

옷매무시를 단정히 한 코로니스가 선반에 있는 책을 몇 권 뒤적대기 시작했다. 그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우는가 싶더니 말린 꽃과 뿌리 같은 것을 한데 모아서 빻았다.

‘걱정하실 일은 없을 것 같습니다. 때가 되면 자연스레 모습을 갖출 겁니다. 게다가…….’

말린 꽃을 책상에 흩뿌린 그가 그 모양을 헤집더니 말을 이었다.

‘평범한 아이가 아닙니다. 네 개의 제국이 처음으로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엄청난 말에 지오프리와 미오가 손을 맞잡았다. 그들은 아이가 최대한 평범하고 행복한 삶을 살기를 기도했었다.

‘코로니스! 그러면 분명…….’

‘그렇습니다. 가시덤불을 헤치고 나가야 할 테죠.’

미오는 코로니스에게 다가가서 부탁했다.

‘제발 우리 아이를 도와주세요.’

아무것도 모른 채 숲에 내던져졌던 그녀에게 세상의 일을 이것저것 알려주었던 것처럼.

퉁명스러운 얼굴이었지만, 항상 그녀를 염려해주었던 것처럼.

‘엄마! 괜찮아. 삼촌이 도망가면 내가 잡으러 갈게.’

‘……?’

마리에타의 엉뚱한 말에 기가 막혀서 세 사람은 그저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여름이 시작되려는 어느 날, 알렉세이 우르체카와 베아트리체 시렌치움의 결혼식이 거행되었다. 예식이 끝나고 손님들의 축하 인사를 받던 중 지오프리가 새신랑 알렉세이의 곁에 다가섰다.

“긴 세월 독신만 고수하더니 별일입니다.”

알렉세이에게 약혼녀가 있다는 것은 그냥 편의를 위해서 지어낸 말이었다. 사실 그는 가정을 이룬 적도 누군가와 사랑을 나눈 적도 없었다. 지오프리의 물음에 알렉세이가 겸연쩍게 웃더니 입을 뗐다.

“글쎄, 카스피언 황제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아. 그렇게 됩니까?”

긴 세월 혼자 지냈던 것을 떠올린 지오프리가 헛기침했다. 그는 이제 미오를 만나기 전의 시간이 까마득하여 도저히 그 외로운 시간을 어떻게 이겨냈는지 생각조차 나지 않았다. 그는 잔뜩 긴장한 알렉세이를 보면서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위한 조언을 하나 해줄까?”

확연히 짧아진 말에 알렉세이가 잔뜩 인상을 썼다.

“형으로 깍듯이 모시기로 하지 않았었나?”

“하지만 결혼 생활은 내가 몇 년이나 선배니까 하는 말 아니겠습니까.”

“아, 그거야 그렇지.”

“무조건 잘못했다고 하십시오.”

“그게 무슨 엉터리 같은 소리지?”

“각하가 잘못해도 사과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잘못이 없을 때도 사과를 하는 것이 순탄한 결혼 생활의 지름길입니다.”

“……아니 그게 무슨.”

알렉세이 우르체카는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을 간직했다고 일컬어졌던 지오프리의 변한 모습에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처음에만 해도 미오를 황후가 보낸 첩자로 의심하기도 했고, 그녀의 정체가 밝혀지기만 하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르렁대기도 했었는데.

하지만 미오와 행복한 결혼 생활을 꾸려나가는 것을 보면 쉽게 무시할 말은 아니었다.

“아시겠습니까?”

“그래. 내 명심하지.”

그때 새하얀 면사포를 늘어뜨린 베아트리체가 다가와서 알렉세이의 팔을 붙들었다.

“대공 각하, 너무 떨려서 다리가 후들거려요.”

“숲을 달릴 때는 퍽 튼튼해 보이던데?”

능글맞은 알렉세이의 대꾸에 베아트리체가 볼을 붉혔고, 다정한 신혼부부의 모습에 지오프리가 싱긋 웃으면서 천천히 등을 돌렸다. 근처 웨딩 케이크 앞에서 폴짝폴짝 뛰어대는 마리에타와 아이를 말리려는 미오가 보였다.

“마리에타! 말썽부리지 않기로 했잖아?”

“하지만 저기 케이크 위에 있는 붉은 보석을 꼭 갖고 싶은걸!”

성큼성큼 걸어간 지오프리가 몸을 숙였다.

“마리에타, 아빠가 목말을 태워줄게.”

지오프리의 목에 탄 아이는 손쉽게 보석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아빠! 최고야!”

보석을 쥔 아이가 어딘가 쪼르르 달려갔고, 미오와 지오프리는 자연스레 손을 맞잡았다.

“그렇게 다 들어주면 진짜 버릇 나빠져요.”

“하지만 당신을 닮은 얼굴로 뭔가 부탁하면 거절할 수 없는걸.”

“누가 듣겠어요.”

“내가 내 아내를 아낀다는데, 누가 들으면 어때.”

미오는 이 남자가 숲에서 그녀에게 광견병에 걸렸냐고 묻던 그 사람이 맞는지 가끔 의심스러웠다.

“미오, 오늘 신부보다 당신이 더 아름다워.”

연한 하늘색 모슬린 드레스를 걸친 미오의 모습을 바라보던 지오프리의 눈이 깊이 잠겼다. 그의 눈빛이 변한 것을 알아챈 미오가 지오프리의 옆구리를 확 꼬집었다.

“지금 알렉세이의 결혼식인 걸 잊은 건 아니죠?”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나는 그대만 보이는데…….”

열정이 가득 묻어나는 음성을 내뱉은 그가 미오의 귓불을 가볍게 만지작댔다. 누가 볼까 봐 당황한 미오가 헛기침하자, 지오프리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우리 마차에 갈까?”

“아직 연회가 한참인데, 마차에 왜 가요. 게다가 우리는 마리에타를 돌봐야죠.”

유모였던 베아트리체가 결혼했으니, 그 자리가 공석이었다. 그녀의 말에 지오프리가 싱긋 웃었다.

“우리 마리에타는 저기 새로운 유모를 만났으니까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군.”

그의 말에 고개를 돌리자, 마리에타가 코로니스에게 보석을 건네는 게 보였다. 떨떠름한 얼굴로 그것을 받아드는 코로니스와 눈이 마주친 지오프리가 미오의 손목을 세차게 붙들었다.

“지금이야!”

“……뭐가 지금이에요?”

영문도 모른 채 미오는 드레스 자락을 말아쥐고 그와 함께 달리기 시작했다. 마차에 도착한 두 사람은 서둘러 안으로 들어가서,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지오프리, 도대체…….”

가슴께를 부여잡은 미오가 그를 향해 입을 떼는 순간 지오프리의 두 팔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

“아까부터 이렇게 안고 싶어서 혼났어.”

미오를 꼭 안은 그가 그대로 얼굴을 그녀의 목에 깊게 묻었다. 지오프리는 어깨와 목을 따라 가벼운 입맞춤을 퍼붓더니 곧 턱을 살짝 핥았다.

“땀도 이렇게 달콤하니 어쩜 좋지.”

아무도 없는 밀폐된 마차 안의 공기가 점점 텁텁해졌다. 미오는 그의 손길과 속삭임에 입술을 세차게 짓씹었다.

“지오프리, 당신 정말 못 말리겠어요.”

“그래. 나는 그대에게 완전히 미쳤으니까…….”

그녀의 볼을 강하게 감싼 지오프리가 그대로 미오의 입술을 머금었다.

“……으응.”

겹쳐진 입술 사이로 미세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결혼식을 축하하는 폭죽이 사방에 터지기 시작했고, 마차 안에서 터지는 거친 숨소리가 그 안에 녹아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