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 알렉세이 우르체카의 사랑
널따란 등을 가진 남자가 호수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돌탑을 쌓고 있었다. 우르체카 공국으로 돌아가지 않은 지 몇 해째, 이제 카스피언 제국의 공기가 제법 익숙했다.
“……삼촌!”
다소 부정확한 발음이지만 분명 그를 부르는 음성에 알렉세이가 얼른 몸을 돌려봤다. 그때 작은 아이가 넘어질 듯 말 듯하면서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저런, 저런 천천히 오렴!”
목소리의 주인공은 그를 우르체카 공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만든 장본인이자, 이제 다섯 살이 된 마리에타였다. 그의 음성에 아이가 활짝 웃었다. 하늘거리는 은발에 호박색 눈이 꼭 누군가를 연상시키는 귀여운 외모였다.
“이 녀석 잡았다!”
돌부리 같은 것에 걸려서 넘어지기 전에 아이를 안아 든 알렉세이가 마리에타를 번쩍 들어서 몇 바퀴 돌았다.
“……꺄! 꺄!”
아이는 하늘을 나는 것 같다면서 깔깔대면서 신나서 소리를 질렀다.
“공, 공주님!”
그제야 쫓아온 유모가 두 사람 뒤에 서서 숨을 헐떡댔다. 그녀는 간신히 숨을 고른 후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송구합니다. 공주님께서 창 너머로 대공 각하를 보시고는 갑자기 달려 나가셔서…….”
마리에타가 혹 다치기라도 했으면 큰 문책을 받았을지도 모를 유모가 벌벌 떨었다.
“공주가 무사하니 그렇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바닥에 무사히 마리에타를 내려둔 그가 처음으로 유모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봤다. 달리느라 헝클어진 연한 금발에 푸는 눈, 상기된 볼 위로 진해진 주근깨가 퍽 인상적이었다. 알렉세이는 습관적으로 그녀를 향해서 한쪽 눈을 찡긋거렸다.
“……아.”
그의 윙크를 받은 여인은 곧장 고개를 푹 숙였다.
“삼촌, 이거 뭐예요?”
두 사람의 정적을 깬 것은 마리에타였다. 아이는 알렉세이가 만든 돌탑을 퍽 신기하다는 듯 구경했다. 그러면서도 무너뜨리지 않으려고 조심하는 모습이 어찌나 사랑스러운지 모른다.
“마리에타, 네가 올 것 같아서 삼촌이 이렇게 돌을 모으고 있었단다.”
“……덩말?”
“……정말이고 말고.”
제법 영특한 아이는 좀처럼 실수를 하는 법이 없었지만, 이렇게 흥분하면 가끔 아이다운 실수를 했다. 그 모습조차 귀여워서 알렉세이가 손을 들어서 마리에타의 머리를 쓸어주었다. 마리에타는 카스피언 제국의 유일한 후계자였고, 그에게 하나밖에 없는 조카이기도 했다.
결혼한 지 한참이 지나도 지오프리와 미오 사이에 아이가 생기지 않아서, 모두가 얼마나 속을 끓였는지 모른다. 그러다가 이렇게 예쁘고 건강한 아이가 태어났으니, 얼마나 사랑을 받는지 말할 필요가 없었다.
“오늘 내가 물수제비 뜨는 것을 알려주마.”
“……물수제비?”
알렉세이는 엄청난 관심을 보이는 마리에타를 보면서 싱긋 웃었다. 아주 오래전 미오에게 물수제비를 알려주던 때가 떠올랐던 탓이다. 그는 쌓아둔 돌을 하나 빼내어 쥐고 호수로 물수제비를 떴다.
-퐁당퐁당
얇고 평평한 돌은 물 위를 경쾌하게 미끄러지더니 몇 번 튕긴 후 자취를 감추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마리에타가 손뼉을 치더니, 제자리에서 폴짝 뛰었다.
“삼촌, 이거 배우면 나쁜 놈도 물리칠 수 있어?”
“마리에타, 그런 말은 어디에서 배운 거니?”
아직 어린아이가 하기엔 다소 부적합한 표현에 알렉세이가 인상을 쓰자, 뒤에 서 있던 유모가 갑자기 헛기침해댔다. 아무래도 범인은 그의 가까운 곳에 있는 모양이었다.
“삼촌! 나도 해 볼래!”
한번 본 것만으로 자신만만하게 팔을 걷어붙인 마리에타는 울퉁불퉁한 돌 하나를 호수에 던졌다. 하지만 그것은 한 번도 못 튕기고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실망할 법도 한데 아이는 씩씩대면서 돌멩이를 계속 던졌다.
“마리에타, 얇고 평평한 돌을 찾는 연습부터 해야겠구나.”
알렉세이가 몇 가지 요령을 설명하자 열심히 듣던 마리에타가 드디어 물수제비를 한 번 튕기는 데 성공했다.
“삼촌! 최고예요!”
그대로 알렉세이의 허리를 안은 아이가 애정 표현을 했다. 그의 관심을 한 몸에 받은 아이는 우르체카 대공을 피를 나눈 가족처럼 여겼다.
“대공 각하, 여기 계셨군요.”
“알렉세이! 마리에타와 놀아주고 있었네요!”
호수 근처에 나타난 미오가 그를 보자마자 꼭 안았다. 알렉세이는 그녀의 볼에 가벼이 입을 맞춘 후 한쪽 눈을 찡긋대 보였다.
“마리에타에게 물수제비를 알려주고 있었습니다.”
물수제비라는 말에 미오가 과거의 어떤 날을 떠올리면서 눈을 반짝거렸다. 그녀 역시 알렉세이에게 물수제비를 배웠었다. 미오에게 그는 소중한 은인이자, 친구였다.
“마리에타, 대공 각하는 물수제비로 이만한 짐승도 쓰러뜨린 적도 있단다.”
몸을 숙인 미오가 마리에타의 귀에 소곤대자 아이의 눈이 동그래졌다.
“역시! 그럴 줄 알았다니까! 나도 연습해서 나쁜 놈을 다 혼내줄 거야!”
“흠, 흠.”
뭔가 못마땅한지 지오프리가 연신 헛기침하더니 미오의 허리에 손을 감았다.
“대공 각하 때문에 마리에타가 버릇이 점점 없어지는 것 같아서 걱정입니다.”
지오프리의 진지한 말에 알렉세이가 콧방귀를 꼈다.
“아, 그래서 아이의 생일에 코끼리를 사주셨습니까?”
“……그건.”
마리에타가 동화책에서 본 코끼리를 갖고 싶다고 하자, 지오프리가 수소문해서 진귀한 짐승을 이곳에 데려왔다. 하지만 열대에서 살던 짐승은 이렇게 추운 카스피언 제국에서 도무지 살 수 없었다. 코로니스의 도움으로 원래 살던 곳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더라면 아마 코끼리는 금방 죽었을 것이다.
알렉세이의 지적에 지오프리가 이마를 잔뜩 찡그렸다. 그러자 미오가 그의 팔짱을 끼면서 다정하게 입을 열었다.
“아마 마리에타는 당신의 사랑을 충분히 느꼈을 거예요.”
“……미오.”
황제와 황후, 부모가 되었어도 미오와 지오프리는 변한 게 별로 없었다. 여전히 서로를 열렬히 바라봤고, 늘 사랑을 속삭였으니까.
“여기 다른 사람도 있습니다. 황제 폐하, 황후 폐하.”
알렉세이가 툴툴대자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이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참, 우리가 먼저 가서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조금 이따가 와요. 마리에타! 이리 오렴. 오늘 알렉세이 삼촌 생일 파티를 해야 하니까, 예쁜 드레스로 갈아입을까?”
진흙과 풀물이 들어서 엉망이 된 아이의 드레스를 바라보며 미오가 한숨을 쉬었다. 엄마의 부름에 치맛자락에 품고 있던 돌멩이를 죄 버린 마리에타가 그대로 몸을 돌렸다. 그리고 지오프리와 미오의 사이에 서서 부모의 손을 꼭 잡았다.
“삼촌이 선물해준 드레스를 입을 거야!”
마리에타의 말에 알렉세이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어렸다.
“마리에타! 삼촌 조금 이따 갈게.”
“응, 응!”
마리에타가 고사리 같은 손을 흔든 후 세 사람이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그림 같은 단란한 모습을 바라보는 알렉세이의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렇게 걷던 중에 고개를 돌린 미오가 그를 향해서 한 번 더 웃어주었다.
“……아.”
그제야 알렉세이는 지금의 감정이 진실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미오의 행복한 모습을 보는 것이 더없이 행복했으니까.
‘이제 정말 가족이 된 기분이야.’
가족을 가져본 적은 없지만, 아마도 이런 느낌이 아닐까 짐작해보았다. 바람이 불어와서 붉은 머리를 쓸어넘기는데, 옆에서 누군가 불쑥 손수건을 내밀었다.
“……아.”
워낙 조용히 있어서 있는지도 몰랐는데 마리에타의 유모가 그를 줄곧 보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알렉세이는 그제야 그의 눈에 촉촉한 것이 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고마워요. 눈에 뭔가 들어가서 말입니다.”
그가 애써 명랑한 음성을 내면서 눈물을 감추려 들었다.
“주제넘은 말인 건 알지만, 그렇게 애쓰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아름다운 아가씨, 무슨 말을 하는 거죠?”
손수건을 받아든 알렉세이가 어떤 숙녀도 함락시킬 만큼 매력적인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괜찮은 척하지 않으셔도 된다고요.”
알렉세이는 상대가 엉뚱한 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어디서 어디까지 간파를 당한 건지 알 수가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손수건을 쥔 그의 손이 가벼이 떨렸다.
“죄송합니다. 제가 왜 이런 말을 했는지…….”
마리에타 공주의 유모는 시렌치움 가문의 베아트리체였다. 그녀는 백작 가의 차녀로 학식과 무예까지 빼어나서 특별히 공주의 유모로 뽑혔다. 마리에타를 가까이에서 보살피다 보니 대공을 자주 볼 수밖에 없었다.
‘만인의 연인, 사교계 최고의 거물.’
우르체카 대공을 따라다니는 소문은 무척 많았다. 그는 우르체카 공국의 대공이면서, 부유한 미혼남이었기에 많은 여인이 알렉세이의 곁을 차지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대공 각하는 소문과는 좀 다른 분이야.’
오래 만나다 보니 그의 웃는 얼굴이 그저 남에게 보여주기 위함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대공은 마리에타 공주나 황후 폐하를 만날 때는 꾸미지 않은 얼굴을 했다. 무척 편안해 보였고, 가끔은 슬퍼 보였다. 그래서 알지 않아도 되는 사실을 그녀는 깨달아 버렸다.
‘각하는 황후 폐하를 좋아해.’
친척 간의 그런 감정이 아니라, 조금은 더 깊은 그런 것 말이다.
오늘 대공의 흔들리는 눈을 보자 전에 없던 용기가 났었다.
‘이렇게 곧 후회하게 되긴 했지만.’
베아트리체가 화끈 달아오른 볼을 쓸어내리면서 쭈뼛거렸다.
“저는 먼저 가보겠습니다.”
그녀를 빤히 바라보는 대공을 피해서 뒷걸음질하기 시작했다. 이상하게 평소와 달리 대공의 모습이 전혀 다정해 보이지 않았다. 주변의 공기마저 차갑게 만드는 이상한 기운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이런, 나는 대화를 하다가 말다가 달아나는 사람은 별론데…….”
알렉세이는 그에게 이런 식으로 말을 건넨 여인을 본 적이 없었다. 긴 세월 동안 거의 처음 있는 일이라 이상하게 피가 들끓는 기분이었다.
평소 마리에타에게 집중하느라 유모를 살필 겨를이 없었는데, 오늘 처음 그녀와 눈이 마주쳤을 때 묘한 기분을 느꼈었다.
“아, 아닙니다. 저는 이만 가서 공주 전하를.”
“그거 알아요? 자꾸 달아나는 사냥감은 꼭 잡고 싶어지는 거 말입니다.”
“……네?”
창백하게 질린 베아트리체의 다리가 휘청댔고, 성큼 다가선 알렉세이가 그녀의 허리를 붙들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베아트리체는 곧 귓불까지 달아올랐다.
“잡았다.”
나지막한 그의 음성에 호수 주변을 감도는 바람이 달콤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