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은하수를 그대에게 주고파
카스피언 제국 최고 북단에 위치한 조용한 숲, 한 시간 전쯤부터 한 남자가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통나무를 톱질한 뒤 그것을 비슷한 길이와 두께로 다듬었다. 사방에 톱밥이 날렸고, 연장이 아무렇게나 널려 있었다.
“……흠.”
입술을 한일자로 다문 남자가 신중하게 나무 기둥을 세운 후 끈과 가죽으로 외관 마무리를 했다.
“도대체 뭘 만들려는 거지?”
근처 나무 그루터기에 앉은 미오는 지오프리가 하는 것을 지켜만 보다 길게 하품했다. 그녀의 생일을 맞아서 지오프리가 오늘 굉장히 특별한 일을 준비했다고 했다. 하지만 기대는 점점 실망으로 변했고, 미오의 표정은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도저히 못 참겠다!”
벌떡 일어선 그녀가 두 손을 모아 입으로 가져간 뒤 큰소리를 냈다.
“곧 밤이 될 테니, 돌아가는 게 어때요?”
“그래! 미오……. 나도 사랑해!”
흰 셔츠 아래 갈색 바지를 입고, 무릎까지 오는 검은 부츠를 신은 지오프리가 그녀를 향해서 가벼이 손을 흔들어주었다.
“뭐지?”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그만 가자고 했는데?
아무래도 너무 멀어서 그녀의 목소리가 채 닿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것도 하지 말고 나를 조금만 기다려줘. 응?’
그의 당부를 떠올린 미오가 다시 털썩 주저앉았다.
“……하. 숲은 진짜 싫은데.”
더더욱 겨울 숲에는 좋은 추억이 거의 없었다.
춥고 배고픈 기억뿐이니까.
-뽀드득뽀드득
눈을 파헤치는 작은 짐승을 발견한 미오가 솔방울 하나를 슬쩍 그쪽으로 굴렸다. 그녀를 발견한 다람쥐는 화들짝 놀라더니 솔방울을 내팽개치고 달아났다.
그녀가 여우 수인인 것을 알아보기라도 한 건가?
어깨를 으쓱한 미오가 멀어지는 작은 짐승을 보면서 중얼댔다.
“난 다람쥐 안 먹는데…….”
할 일이 없는 탓에 금방 지루해졌다.
구불구불한 은발에 작고 붉은 입술, 신비로운 빛을 띤 호박색 눈을 한 미오가 입을 삐죽거렸다.
‘오늘 그대가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것을 줄 테니 기대해!’
호언장담한 지오프리의 말을 떠올린 그녀가 짐을 구석구석 뒤지기 시작했다. 한참을 뒤졌지만 선물 비슷한 것을 찾지 못했다.
“도대체 뭘 숨겨둔 거야?”
지금껏 너무나 많은 선물을 받아서 이제 받을 만한 것도 없었다.
지오프리는 도르프 지방에 있던 성을 시작으로 세상에 귀한 것은 죄다 구해서 그녀에게 주었다. 보석이나 드레스, 귀한 말 같은 것은 선물 축에 들지도 못할 정도였다.
“아예 카스피언 제국 전체를 다 주고도 남을 기세라니까.”
혼잣말을 중얼대던 그녀는 하품하다 눈물까지 흘렸다.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아.”
그가 끝내기 전에는 어디도 가지 말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제 정말 한계였다.
툴툴대던 미오가 번쩍 일어나자 그 바람에 나뭇가지에 쌓여있던 눈이 그녀의 위로 후두두 쏟아졌다. 미오는 걸치고 있던 하늘색 망토의 어깨를 손으로 툭툭 털었다.
그러다 사위가 별안간 어두워졌다.
“이것 봐! 숲은 이렇게 밤이 일찍 찾아온다니까.”
미오가 얼른 모닥불을 피운 후에 찻물을 능숙하게 올렸다.
간단한 샌드위치와 과일을 준비해왔으니 이 정도면 저녁으로 충분할 것이다.
그녀는 지오프리를 부르려다가 멈칫했다.
“어두워서 뭘 하는지 이제 보이지도 않네.”
아까까지는 나무 기둥을 이리저리 세우던 그를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발걸음 소리와 바람 소리만 들렸다.
“지오프리! 와서 차 좀 마셔요.”
몇 시간 동안 먹지도 쉬지도 않고 일을 하느라 많이 지쳤을 게 분명했다. 그녀가 어두운 곳을 가만 바라보는데, 근처에서 발소리가 났다.
“……미오.”
언제 왔는지 건너편에 앉은 지오프리가 그녀를 강하게 응시했다. 이렇게 추운 데도 땀을 얼마나 흘렸는지 걸친 셔츠가 흠뻑 젖어서 속살이 훤히 비쳤다.
“뭘 좀 걸쳐요.”
그가 움직일 때마다 함께 꿈틀대는 근육을 바라보던 미오가 가만 헛기침했다.
“감기라도 걸릴까 봐?”
“……음.”
저런 남자를 두고 자존심만 남은 몰락한 귀족이라고 생각했을 때가 있었다. 고고하기 짝이 없는 병약한 도련님 말이다. 그때만 생각하면 얼굴이 절로 화끈거렸다.
사실 지오프리 카스피언은 네 개의 제국에서도 가장 부유한데다, 병약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남자였다.
‘하지만 나도 좀 억울해.’
그도 그럴 것이 걸핏하면 지오프리는 피를 토했고, 그녀가 보는 앞에서 약을 먹었으니까 말이다.
“아픈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긴 해.”
지오프리가 슬쩍 웃으면서 앞머리를 쓸어올렸다. 깊이를 알 수 없는 검은 눈에 불꽃이 피어올랐다.
“지오프리!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라고 했어요.”
“병간호를 받는 건 근사하니까 하는 말이야.”
그윽한 음성에 담긴 묘한 기운이 밤 공기를 뜨겁게 달구었다. 미오는 일전의 일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어깨 상처가 덧나서 말이야.’
상처를 봐달라던 그에게 붙잡혀서 사흘 동안 침실 밖을 나가지 못했었다.
‘얼마나 부끄러웠다고!’
다른 사람이 속사정을 알까 봐 겁이 났다. 허리에 두 손을 댄 그녀의 호박색 눈에 화가 어른댔다.
“당신 진짜 철 좀 들어야겠어요.”
저런 남자를 두고 늘 옳은 결단만 내리는 냉철한 황제라고 믿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물론 일과 관련된 면은 그런 부분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전혀 아니었다.
‘진짜 유치한 남자라니까!’
미오가 그를 잔뜩 노려보는데, 가느다란 입술을 손끝으로 쓸어내리던 지오프리가 속삭였다.
“미오, 나는 그대를 독점하고 싶을 뿐이야.”
“지오프리 카스피언, 여기 우리 둘밖에 없잖아요!”
사방에 뾰족하고 키가 큰 나무와 쌓인 눈, 머리에 닿을 만큼 낮게 뜬 밤하늘의 별을 제외하면 이 숲에는 두 사람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뭔가 불만족스럽다는 그를 보자, 자꾸 화가 났다.
어느새 다가온 지오프리가 그녀의 등을 꼭 안았다. 커다란 손이 미오의 목과 허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미오, 화 풀어. 내가 정말 사랑해.”
가끔 미오는 그가 늑대가 아니라, 여우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이렇게 귀에다 대고 잘못했다고 하면 화를 내기도 힘드니까.
미오는 허리에 감긴 그의 손등을 살짝 두드리면서 입을 뗐다.
“이럴 때 보면 정말 얄밉다니까! 아플 생각은 절대 하지 말아요!”
그녀의 눈가가 촉촉하게 젖었다.
앙겔라스와 전장에 찾아가서 지오프리를 목격했던 날이 아직 눈에 선했다.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고, 전장의 선두에 그가 서 있었다. 갑옷은 피로 물들어서 온통 붉었다. 그를 베려고 드는 무수히 많은 창과 검에서 풍기던 살벌한 기운이 생생했다.
“미오, 다시는 그렇게 무모한 일을 벌이지 마.”
그에게 화를 내려고 했던 말인데, 지오프리가 더 크게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미오가 머뭇대자 그가 그녀의 몸을 힘주어 안았다. 벤의 검에 쓰러진 그녀를 떠올린 지오프리의 어깨가 심하게 떨렸다. 그때 알렉세이가 내어준 조끼가 아니었다면, 미오는 크게 다치거나 죽었을지도 모른다.
한참 타들어 가는 불을 바라보던 두 사람의 입가에서 하얀 김이 연신 새어 나왔다.
“이제 슬슬 선물을 확인하러 갈까?”
얇은 천으로 미오의 눈을 가린 지오프리가 그녀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어디론가 향했다.
“이제 천을 풀어줄 테니까 직접 봐.”
“……와!”
눈을 가렸던 천이 사라지자 미오의 앞에 크지 않지만, 신비로워 보이는 작은 집이 서 있었다. 분명 아까 오전에만 해도 그냥 공터였던 곳이었다.
“파사에 다녀왔던 이에게서 만드는 법을 배웠는데, 게르라고 부른다고 하더군.”
“게르.”
이질적인 단어를 조용히 읊어보는데, 지오프리가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아직 놀라기는 이르지.”
그를 따라서 안으로 들어가자 포근한 내부가 눈에 들어왔다. 튼튼하게 세운 나무 기둥을 덮은 천만으로 이렇게 따뜻해지다니 정말 놀라웠다.
“미오, 이리로 와.”
그가 앉아서 손을 두드린 곳은 털가죽이 푹신하게 깔린 바닥이었다. 그의 옆에 가서 앉은 미오가 곧장 지오프리의 어깨에 기댔다.
“공작님, 정말 멋진 선물이에요.”
이제 지오프리는 황제였지만, 두 사람만 있을 때는 가끔 예전처럼 공작이라고 불렀다. 미오의 인사에 그가 손을 들어서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를 쓸어내렸다.
“천과 나무로 만들긴 했지만, 내가 손수 만든 집은 처음이니까 의미가 있을 것 같아서…….”
나란히 앉은 미오가 그의 손을 내려다보면서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에게 이걸 만들어주려고 설계도를 들여다보고 고민했을 지오프리를 생각하면 가슴이 벅찼다. 눈물이 흐르려는 것을 간신히 참은 미오가 입을 뗐다.
“손이 이게 다 뭐람.”
서투른 톱질로 손등과 손가락이 온통 상처투성이였다. 그의 상처 입은 손에 미오가 입김을 호 불었다.
“괜찮아. 하나도 안 아프니까.”
미오가 그의 손을 조심스레 쓸어내리려는데, 지오프리가 천천히 그녀의 몸을 뒤로 쓰러뜨렸다. 분명 입이라도 맞출 분위기라서 그녀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꺅! 뭘 하려고 또 이래요!”
두 손으로 가슴께를 가린 채 미오가 볼을 붉히자, 옆에 누운 지오프리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 무슨 생각을 하길래 얼굴이 빨개진 거지?”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를 오해했다는 생각에 미오가 얼른 그의 품을 파고들자, 지오프리가 그녀를 껴안은 채 속삭였다.
“이제 진짜 선물을 줄게 미오. 저 위를 봐.”
지오프리와 머리를 맞댄 채 고개를 들자, 한가운데가 뚫린 지붕 사이로 밤하늘이 보였다.
“비가 오지 않으면 이렇게 게르의 구멍을 늘 열어둔다고 하더군.”
“……아름다워.”
지오프리의 나지막한 설명에 귀를 기울이던 미오가 입술을 달싹거렸다. 연한 보라색이 감도는 하늘을 수놓은 은하수가 눈부셨다. 그녀에게 모조리 쏟아질 것만 같아서 미오는 눈을 깜빡대기만 했다. 한참 그녀가 황홀한 빛에 홀려서 말을 잇지 못하자, 지오프리가 미오의 귓불을 지분거렸다.
“이제 내가 하늘의 별까지 질투해야 하는 건가?”
질투쟁이 지오프리 때문에 은하수 감상조차 마음 편히 할 수 없었다. 하늘에서 눈을 뗀 그녀가 지오프리의 얼굴을 가만 들여다봤다. 촉촉하게 젖은 검은 눈, 오뚝한 코와 붉디붉은 입술은 언제봐도 새로웠다.
“보라고 할 때는 언제고 또 이러는 거예요? 선물을 받았으니 답례를 할게요. 눈을 감아봐요. 지오프리 카스피언.”
그녀의 은근한 음성에 지오프리는 얼른 눈을 감더니, 입술을 모아서 앞으로 내밀었다.
‘뭐야. 이렇게 귀여운 모습은 반칙이잖아.’
웃음이 터질 뻔한 것을 꾹 참은 미오가 그의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
그녀의 입맞춤이 끝나자 지오프리가 팔을 뻗어서 미오의 허리를 힘주어 안았다. 흥분으로 그의 음성이 유독 낮게 잠겼다.
“미오, 나를 도발하면 곤란하잖아.”
“하지만 여기는 바깥인데…….”
벗어나려고 몸을 뒤틀던 미오가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그녀의 말에 지오프리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이 숲에 생명이 깃든 것은 그대와 나뿐이다. 그 정도면 이제 허락해주겠어?”
미오가 뭐라고 답을 내놓기도 전에 붉은 입술이 그녀의 숨을 모조리 삼켰다. 게르 한쪽 벽에 자리한 난로가 뜨겁게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