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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18)화 (118/123)

118화 끝이 좋으면 모두 좋다

지오프리 카스피언은 네 개의 제국이 생긴 이래로 가장 훌륭한 황제로 명성을 떨쳤다. 그 명성만큼이나 유명한 것은 엄청난 소문들이었다.

‘늑대 수인이라서 전장에서도 막 본모습으로 변해서 적을 휩쓸었다던데?’

‘에이, 자네가 잘못 들었네. 카스피언 황제 폐하가 아니라 그를 지키는 호위 무사가 여우 수인이라고 하더군. 본체가 집채만 한 은여우라고 하던데, 직접 보면 무서워서 소변을 지릴 정도라더군.’

황성의 번화한 시장을 걷던 사내들의 대화를 우연히 엿듣게 된 한 여인이 웃음을 참느라 이상한 소리를 냈다.

“큭큭.”

“미오, 이러다가 들키겠어.”

“지오프리, 당신 얼굴만 잘 가리고 있으면 우리는 안전해요.”

팔짱을 낀 두 사람은 투박한 소재로 만들어진 갈색 망토를 푹 뒤집어쓴 채였다.

미오와 지오프리는 가끔 이렇게 시장 구경을 나왔다. 사람들의 사는 모습과 이야기를 가장 가까이에서 들을 수 있었고, 볼거리나 먹거리가 가장 많은 곳이기도 했다.

“예전에 떠돌던 소문은 죄다 과장되거나 믿을 게 별로 없던데…….”

피로 목욕하고 시체 더미 위에서 잔다는 지오프리는 소문과 전혀 달랐다. 그는 결벽증이 있어서 피를 묻히는 것도 싫어했으니 시체 더미 위에서 잠을 청할 리가 없었다.

“저 이야기는 들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요.”

사람들은 저 소문을 허황한 것으로 여기겠지만, 사실과 가장 가까운 이야기였으니까.

그녀의 말에 지오프리가 가만 핀잔을 주었다.

“아마 이게 전부 뭉치 때문이지?”

“……뭉치.”

오랜만에 듣는 이름에 미오가 걸음을 멈췄다.

전설에 나온다는 은여우에게 정말 어울리지 않는 이름이었다. 그녀가 불퉁하게 입을 내미는데, 지오프리가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그렇잖아. 그날 황제와 황후 앞에 그대가 모습을 드러내는 바람에 그 자리에 있던 병사들이 소문을 한가득 퍼뜨렸다고 하더군.”

“아니! 그럼 그걸 가만 듣고만 있어요?”

다시 생각해도 화가 나는 일이라 미오는 인상을 잔뜩 썼다.

“누가 누구더러 괴물이래? 웃기고 있어!”

그때 미오가 발로 땅을 툭툭 차면서 열을 냈다. 그 바람에 상념에서 벗어난 지오프리가 그녀의 몸을 꼭 안았다.

미오는 그를 위해서 화를 내고, 울어 주는 단 한 사람이었다. 또 모두가 그가 죽기를 바라는 순간에도 살라고 해 준 사람이었다.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귓가에 은근히 속삭이는 지오프리의 음성이 살짝 끈적해졌다.

“아이, 진짜 왜 이래요.”

미오는 오가는 행인의 눈치를 살피면서 몸을 비틀어서 빠져나왔다. 그는 이렇게 틈만 나면 애정을 과시했으며, 절대로 말로 끝나는 법이 없었다.

“늑대가 아니라 능구렁이야. 능구렁이.”

“어디서 능구렁이 수인이라도 만난 건가, 미오?”

“그럴 리가 없잖아요. 능구렁이 수인이 존재하기는 해요?”

미오는 그녀에게 푹 빠진 남편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분명 이런 일을 간절히 원하던 때도 있었다.

‘실컷 유혹해서 뻥 차 버리려고 했었지.’

그녀의 드레스 자락을 쥐고 우는 지오프리를 보면서 안녕을 고할 작정이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 보니 그녀의 시선이 항상 그를 좇았다. 지오프리가 다치면 그녀가 아픈 것처럼 가슴이 아팠다. 그의 슬픔을 보는 것이 싫었다.

“지오프리 카스피언. 난 당신밖에 없으니까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말아요.”

그녀의 단호한 음성에 그제야 지오프리는 괜한 일로 열을 냈음을 깨달았다.

“미오, 우리 저기 가서 새로 나온 고기파이를 먹을까?”

“……좋아요.”

두 사람은 손을 맞잡고 나란히 발을 맞췄고,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은 더없이 달콤했다.

* * *

화창한 봄날, 해가 저물 무렵 지오프리와 미오의 결혼식이 한창이었다. 두 사람은 혼인 서약서를 쓰고 신혼여행부터 다녀오느라 따로 예식을 치르지 않았다. 미오는 번거롭다고 거절했으나, 지오프리의 몇 년간 계속된 간절한 청에 결국 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식은 황궁이 아니라 카스피언 공작저 정원에서 진행되었고, 초대받은 하객은 극소수였다. 호수를 낀 정원은 화려하지 않았으나, 고즈넉한 느낌을 자아냈다.

“당신, 우는 거요?”

“울긴 누가 운다고 그럽니까.”

예식을 지켜보던 알프레드의 눈이 촉촉해지자, 로렌이 슬쩍 손수건을 건넸다. 그녀 역시 이미 얼굴이 젖어서 엉망이었다.

“우리 아가타 님이 하늘에서 보고 계시겠죠? 주인님이 저리 장성해서 귀한 분을 맞이하셨으니 얼마나 기쁘실까요.”

“그러게. 두 분이 정말 잘 어울리네.”

처음 집사는 미오가 재산을 노리고 카스피언 공작에게 접근했을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었다. 그때가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을 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다.

“저것 봐요!”

로렌이 가리키는 곳에 하늘 위로 순백의 비둘기 떼가 날아올랐다. 아름다운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하자 양쪽의 하객석 사이에 깔아 둔 스텔라리아 꽃길로 신부가 등장했다.

“알렉세이. 할 수 있겠어요?”

오늘 우르체카 대공은 신부 아버지가 해야 하는 일을 대신 맡았다. 그는 눈 부신 금색 의상을 걸치고 목에는 주렁주렁 보석을 달았는데, 얼마나 떨어 대는지 보석이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그, 그럼. 내가 누군데! 나만 믿어.”

영 미덥지 않은 알렉세이의 팔을 붙잡고 미오가 걷기 시작했다. 길의 끝에는 푸른 하늘 아래 조각상 같은 남자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직 지오프리를 담으며 천천히 그를 향하자, 이윽고 꽃길의 끝에 다다랐다.

“미오, 언제든 지오프리가 속상하게 하면 내게 와.”

지오프리에게 미오의 손을 건네면서 알렉세이가 한쪽 눈을 찡긋댔다. 그는 이런 순간에도 지오프리를 도발하는 것을 절대 잊지 않았다. 하지만 화를 내기는커녕 지오프리는 고개를 가벼이 숙였다.

“알렉세이 형, 고맙습니다.”

놀란 얼굴을 겨우 추스른 알렉세이가 근엄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두 사람 행복하길 바라네.”

지오프리와 미오가 잡은 손등을 가벼이 두드린 알렉세이가 자리를 떴다. 미오는 알렉세이가 비앙카와 코로니스의 곁에 앉는 것을 보고서 고개를 돌렸다.

그제야 두 사람만의 시간이 돌아왔고, 지오프리와 미오는 신관의 축사를 함께 들었다.

“디아나 여신의 이름으로 두 사람의 성혼을 선언합니다!”

신관의 공표 후 알렉세이가 동방에서 공수해 온 불꽃이 하늘 위로 피어올랐다.

펑펑~!

맞잡은 손을 한 번도 놓지 않았던 지오프리가 그 자리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의 얼굴에 긴장이 역력했다. 레이스가 치렁치렁한 흰 드레스를 입은 미오가 지오프리의 약간 흐트러진 앞머리를 응시했다.

“나를 그대의 남편으로 받아 주겠나?”

미오는 그의 모습에 눈물이 그렁그렁 차올랐다. 이미 두 사람은 부부였으며, 진심으로 서로를 사랑했다. 게다가 숱하게 청혼을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새롭고 떨려.’

울음을 간신히 삼킨 미오가 몸을 숙여서 그의 귀에 속삭였다.

“폐하, 저는 처음부터 당신의 팬이었답니다.”

그녀의 말에 지오프리는 미오와의 첫 만남을 기억해 냈다.

황태자 생일 연회에 갔다가 피곤해서 눈을 붙였었다. 잠시 방심한 사이에 연보라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그의 벗은 몸 위에 앉아 있었다.

‘황후가 보낸 자객이라고도 생각했었지.’

맨살에 닿던 부드러운 드레스의 촉감과 서로를 바라보던 시선, 방을 가득 채웠던 긴장감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쩌면 그날 지오프리는 그녀에게 첫눈에 반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터질 것 같은 흥분을 겨우 갈무리한 그가 미오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일어나서 큰 소리로 외쳤다.

“참석해 준 귀빈들께 무한한 감사를 전하는 바이다.”

“황제 폐하가 왜 저러시는 거지?”

갑작스러운 황제의 인사에 사무엘이 들고 있던 예식 순서를 확인했다. 다음은 황제 폐하와 황후 폐하가 하객들과 인사를 나눈 후 성대한 저녁 식사를 함께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밤늦게까지 일정이 잡혀 있었다.

“폐하, 뭐 하시는 겁―.”

놀란 사무엘이 황제에게 다가가려는 찰나, 지오프리가 미오를 번쩍 안아 들었다.

“우리는 급한 일이 있으니, 나머지는 자네가 좀 처리하도록.”

하객들 앞에서 이런 부끄러운 모습을 보이게 된 미오가 다리를 대롱대롱 흔들었다. 격렬한 몸부림에 머리에 걸치고 있던 면사포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지오프리 카스피언! 당장 날 내려 놔요.”

결혼식을 제대로 마치기도 전에 신혼부부가 방으로 사라진 것을 사람들은 두고두고 놀릴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보통 사람이 아니지 않은가. 미오의 말에 굳은 표정의 지오프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럴 수 없어.”

“도대체 뭐 때문이죠?”

“나를 책임져야 해. 이건 전부 내 팬이라는 그대의 말 때문이니까.”

“내가 알 수 있도록 설명해요.”

“그때는 할 수 없었고, 지금은 할 수 있는 게 있거든.”

그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본 미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오프리!”

“사랑해.”

잠시 멈춰 선 지오프리가 그대로 미오의 입술 위로 고개를 떨구었다. 맞붙은 입술은 한참 떨어질 줄 몰랐고, 이윽고 고개를 든 두 사람의 눈에는 오직 서로만이 담겨 있었다.

“나도 사랑해.”

미오의 고백에 그는 입을 떼지 못한 채 눈시울을 붉혔다. 지오프리의 머리 뒤로 밤하늘을 수놓는 화려한 불꽃이 터졌고, 미오는 불꽃보다 빛나는 남자의 가슴을 콕 찔렀다.

“서두르지 않으면 나 여기에서 당신 어깨를 물어 버릴지도 모르겠는걸요.”

내리깔린 미오의 속눈썹이 바람에 파르르 떨리고 있었고, 볼은 이미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

그녀의 은밀한 뜻을 제대로 알아들은 지오프리가 아예 뛰기 시작했고, 어두운 정원 속으로 사라진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행복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연신 터지는 오색찬란한 불꽃이 카스피언 제국의 미래를 암시하듯 아름다운 빛을 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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