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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17)화 (117/123)

117화 깨물어도 될까요

도르프 항구 근처 시장은 여전히 인파로 붐볐다. 없는 것이 없다고 소문난 시장을 찾는 사람들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리고 골목 어귀에는 추레한 차림의 남녀가 동냥 중이었다.

“한 푼만 줍쇼.”

남자가 열심히 행인에게 돈을 구걸했고, 여인은 말을 하지 못하는지 손만 연신 내밀었다. 두 사람의 하루 벌이는 신통찮았다. 종일 동냥한 바가지에는 동전 몇 닢이 굴러다닐 뿐이었다. 해가 질 무렵 거처로 돌아온 두 사람은 뒤집어쓰고 있던 천을 벗었다.

“카트리나, 이리 와서 앉으시오.”

가려진 천 뒤로 숨겨진 얼굴은 고생을 꽤 했는지 눈 밑이 시꺼멓고 주름은 있었지만, 한때 미모를 짐작하게 했다. 여인은 금발에 푸른 눈, 남자는 검은 눈에 짙은 눈썹이 매력적이었다.

“잠시만 기다리면 금방 식사를 준비하겠소.”

루카스 카스피언은 여전히 멍한 눈을 한 그녀를 위해서 옥수수죽을 끓이기 시작했다. 솜씨는 형편없었으나 이게 아니면 두 사람은 종일 굶어야 했다. 냄비 안 옥수숫가루를 개는 그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죽는 것만도 못한 삶이 존재할까 했는데…….’

지금이 딱 그랬다.

처음부터 이리 비참했던 것은 아니다.

지오프리를 죽이려고 찾아갔다가 느닷없이 나타난 은여우 때문에 일에 실패했다. 하지만 황제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지오프리를 공격하려 했다.

‘그것들만 아니라면 말이다.’

궁에 돌아온 황제와 황후는 습격당했다. 범인은 도르프와 에카라오에서 보낸 자들이었다.

‘도대체 왜!’

황제가 그들에게 맞서면서 소리 지르자 상대가 음침하게 대꾸했다.

‘그러니까 왜 셈을 제대로 치르지 않으셨습니까. 황후 폐하.’

‘카트리나! 대관절 이게 다 무슨 소립니까?’

‘내가 대신 셈을 치르겠소. 얼마면 되나!’

하지만 상대는 목숨은 목숨으로만 셈을 치를 수 있다고 대꾸했다.

그제야 이 모든 일이 카트리나가 개인적으로 해 왔던 사업과 관련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은 궁의 병사들과 간신히 적을 물리쳤지만, 루카스는 알고 있었다.

저 거머리 같은 자들은 그들이 죽을 때까지 목숨을 노리리라는 것을.

설상가상으로 다음 날부터 귀족들은 비어 있는 황태자 자리에 카스피언 공작을 세워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여론이란 정말 우습게도 쉽게 변했고, 급물살을 탄 지오프리 황태자 복귀설은 황제의 힘으로도 막지 못할 정도였다.

‘카트리나, 이대로 있다가는 우리에게 큰일이 날 것 같소.’

도르프 해적과 에카라오 무법자에, 지오프리의 위협까지 받아 가면서 이 자리를 유지하기란 역부족이었다. 이러다 밤마다 목이 붙어 있는지 확인하느라 제명에 못 죽을 것 같았다.

‘아무리 권력이 좋아도 살고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두 사람은 제국의 황제, 황후의 체통도 버리고 한밤중에 달아났다. 많은 보석과 황금을 가지고 나와서 부유하게 잘살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평소 씀씀이대로 돈을 써 대자, 가지고 온 것은 어느새 바닥이 났다. 처음 두 사람은 믿을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죽으려고도 했었다.

“카트리나, 죽을 다 끓였습니다.”

죽을 끓여서 작은 탁자에 마주 앉은 두 사람은 말없이 그것을 떠먹었다.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두 사람의 주름진 얼굴위로 깊은 회한이 내려앉았다.

깍깍.

작은 집 창밖으로 까마귀 한 마리가 불길한 소리를 내면서 날아올랐다. 그것이 꼭 그들의 소리 없는 울음소리와 닮아 있었다.

* * *

“집사, 내가 여기 있다고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아요.”

갑작스레 카스피언가를 방문한 미오가 숨을 헐떡댔다. 그러자 서재에서 책을 읽던 집사가 부드럽게 웃었다.

“여기 물부터 좀 드시죠. 황후 폐하.”

“둘만 있을 때는 그냥 편하게 부르기로 했잖아요.”

“그래요. 미오. 피하고 싶은 누군가가 정확하게 황제 폐하신가요.”

“황제 폐하, 카스피언 공작. 그 사람 맞아요.”

황제와 황후가 야반도주한 바람에 카스피언 공작이 황제가 되었다. 전쟁 영웅이자 고귀한 핏줄인 그가 황좌에 오르는 데 누구도 이의를 달지 않았다. 게다가 은빛 여우의 비호를 받는다는 소문이 제국 전체에 퍼져서 지오프리 카스피언은 거의 신처럼 떠받들어졌다.

미오가 씩씩대자, 집사가 책을 덮으면서 일어섰다.

“하지만 이곳은 숨으나 마나 한 곳이랍니다. 제가 더 좋은 곳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집사가 안내해 준 곳은 3층의 누구도 쓰지 않는 방이었다. 크지 않은 방에는 작은 침대와 책상 하나뿐 별로 물건이 없었다. 벽에 걸린 초상화를 살펴보는 미오에게 집사가 고개를 숙였다.

“지난 몇 년간 누구도 들지 않았으니, 잠깐은 괜찮을 겁니다.”

집사가 나간 후 창가에 기댄 미오가 한숨을 돌렸다.

급하게 말을 타고 달려온 탓인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지오프리 때문에 내 명까지 못 살겠어.”

그들은 지금 이곳이 아니라 황궁에서 살고 있었고, 카스피언 영지는 종종 들르는 수준이었다. 자주 오지는 못했지만, 그녀는 이곳을 집으로 여기고 있었다. 카스피언 공작저에 오면 로렌과 집사가 있었고, 지오프리와 함께했던 추억이 곳곳에 숨 쉬고 있었다.

“진짜 지오프리 때문에 못 살겠어.”

그녀가 오늘 이곳으로 도망쳐 온 이유는 일종의 사랑싸움 때문이었다.

지오프리는 될 수 있으면 모든 일에 그녀와 동반하기를 원했다. 그럴 수 없을 때는 자주 소식을 전했다. 그래서 종일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그대가 보이지 않으면 내, 불안해서 살 수 없어 그런다.’

죽었다 깨어난 일도 있었고, 크게 다친 일도 있었기에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가끔 그의 지나친 사랑이 미오를 지치게 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오랜만에 그녀를 찾은 비앙카와 둘이서 정원에서 차를 마시며 밀린 이야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었다.

‘코로니스가 나를 아낀다고?’

비앙카의 말에 놀란 그녀가 펄쩍 뛰었다. 코로니스는 그녀에게 말 한마디 곱게 하는 일이 없었다.

‘숲에서 늘 챙겨 준 것도 그였고, 아마 카스피언 공작가에 갔을 때도 자주 미오를 찾았을 텐데.’

게다가 여우 사냥에서 위기에 빠진 그들의 위치를 알렉세이에게 알려 준 것도 코로니스였단다. 미오는 그녀만 보면 인상을 쓰던 까마귀의 어디에 그런 마음이 숨어 있었을까 곰곰이 생각해 봤다.

한창 대화가 무르익어 갈 때쯤 지오프리가 그들을 찾았다.

버럭 화라도 냈으면 그녀도 성질을 부렸을 것이다. 하지만 지오프리는 울먹거릴 뿐이었다.

‘내가 찾았잖아.’

피로 목욕하고, 시체 위에서 잠을 잔다는 그를 생각하면 믿을 수 없는 변화였다. 지오프리는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자주 웃고, 울었다. 그의 촉촉한 눈을 떠올린 미오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미남이 우는 모습은 진짜 아름답지.’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지오프리 때문에 화가 나서 여기에 온 건데 또 그의 생각만 하니 말이다.

“게다가 지금 그는 퍽 위험해.”

마침 오늘은 보름이었다.

만월의 밤 그에게 안긴다면 최소 사흘은 침실 밖에 나가지 못할 것이다.

‘……생각만 해도 아찔해.’

짐승 같은 남편을 떠올리던 미오가 손을 파르르 떨었다. 그와의 사랑은 언제나 즐겁고 기쁜 일이었지만, 이러다 정말 죽을 것 같았다.

“내가 수인이 아니었으면 벌써 송장이 됐을 거야.”

그때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에 미오가 숨을 죽였다.

“집사가 하녀를 보낸다고 했으니까…….”

분명 하녀가 차와 먹을 것을 가져올 줄 알았다.

“……누구예요?”

문으로 다가간 미오가 살며시 귀를 대는데, 문이 벌컥 열렸다.

놀라서 엉덩방아를 찧을 뻔한 그녀를 잡아 준 것은 지오프리였다. 그의 얼굴을 본 미오가 파랗게 질렸다.

“깜짝이야! 내가 여기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요.”

“꼭 유령이라도 본 얼굴이군. 대체 언제까지 달아날 셈이지?”

그의 커다란 손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비틀어 대는데 지오프리는 그녀를 꼭 안았다.

“달아난 게 아니라 그냥 조금 쉬고 있는 거예요. 지오프리, 숨 막혀요.”

급하게 달려왔는지 지오프리의 등은 온통 축축했다. 땀에 흠뻑 젖은 그의 셔츠를 가만히 쥐자, 지오프리가 은근하게 눈을 맞춰 왔다.

“미오, 그대의 뜻이 이런 건가? 응?”

‘이건 또 무슨 소리지?’

미오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지오프리가 책상 위에 놓인 책을 하나 펼쳤다. 거기에는 삐뚤삐뚤한 글씨로 적힌 이름이 하나 있었다.

“지오프리 카스피언?”

“내가 어릴 때 종종 머무르던 방이지.”

“그런데 그게 무슨 상관이에요?”

갑작스레 그녀를 번쩍 안아 든 지오프리가 미오를 침대에 가만 눕혔다. 어린 날에 쓰던 침대에 누운 미오를 보는데, 그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부드러운 흰 털이 장식된 푸른색 망토의 리본이 풀려 있었다. 안에 언뜻 보이는 단추가 많은 최신식 드레스를 살피던 그가 고개를 끄덕댔다.

“좋아. 그대의 뜻에 부합하려면 내가 최선을 다해야겠군.”

“왜, 왜 옷을 벗어요! 알아듣게 설명해요!”

“그대를 닮은 아이를 만드는 일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아서 말이야.”

“진짜 못 말리겠어요.”

사랑싸움에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고 하더니, 두 사람은 늘 이랬다. 미오가 방긋 웃으면서 그를 향해 두 팔을 벌렸다. 그러자 지오프리가 미오의 품으로 거칠게 파고들었다. 그는 재빨리 미오의 붉은 입술부터 머금어서 갈증을 달랬다.

“지오프리! 내 단추를 못살게 굴지 말아요.”

작고 반짝대는 단추를 풀던 지오프리는 성질을 못 이기고 그것을 북 뜯어냈다. 바닥으로 단추가 후드득 튀는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이내 드레스와 망토가 차례로 떨어졌다.

“미오, 카스피언 제국 모두를 그대에게 줄 테니…….”

하얀 슈미즈 차림의 그녀를 몽롱하게 바라보던 지오프리가 애원했다.

“글쎄요. 나는 이미 제국을 가지지 않았나요?”

슈미즈의 가슴에 매달린 새하얀 리본을 풀어 내리던 미오가 새침하게 속삭였다.

“그래. 그대는 이미 나를 모조리 가졌으니…….”

사랑스러운 아내의 모습에 이성을 잃은 지오프리의 폭풍 같은 사랑이 한바탕 몰아닥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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