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16)화 (116/123)

116화 황제, 지오프리 카스피언

사실 서류의 내용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반 이상은 그도 확인한 것들이니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황제의 자리를 지키는 일만이 남아 있었다. 그런 연유로 눈앞에 있는 위협을 반드시 제거해야만 했다.

황제와 황후가 서로 위로하는 모습에 지오프리는 비릿하게 웃었다.

“누가 죄를 면해 달라고 구걸이라도 했나 봅니다.”

예상했던 상황이기는 하지만, 실제 눈으로 보자 씁쓸함을 금할 수 없었다.

‘괜한 짓을 했군.’

어머니가 사랑했던 한 인간에게 한 자락의 자비를 베풀고자 했던 것이 무색해지는 순간이었다. 황제는 어머니와 그를 버렸을 때부터 이미 가족이 아니었다. 어쩌면 인간이기를 포기했는지도 모른다.

“그거 아십니까. 금수만도 못한 인간이 존재한다는 거.”

“아까부터 자꾸 무슨 헛소리냐! 무엇들 하느냐! 죄인을 어서 결박해서 감옥으로 끌고 가도록 해라!”

황제는 지오프리의 말을 더 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황제의 명에 창과 밧줄, 사슬을 쥔 병사가 포위망을 좁혔다. 하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병사의 얼굴에는 긴장감이 역력했다.

“공작님! 분부만 내리십시오.”

어느새 검을 빼 든 사무엘이 용감하게 공작을 지키려고 앞을 막아섰다.

“사무엘, 제법이군.”

여전히 느긋하기만 한 지오프리가 그를 지키고 선 수하를 보면서 감회에 젖었다. 벌벌 떨면서 그의 꽁무니만 쫓던 게 엊그제 같은데 이제는 제법 전사다운 티가 났다.

그때였다.

응접실 문이 열리더니 웬 짐승 하나가 어슬렁어슬렁 걸어 나왔다. 공작을 체포하려던 병사 모두가 아연실색했다.

“맙소사! 저리 큰 여우는 본 적이 없다.”

“카스피언 공작님이 디아나 여신의 가호를 받고 있다는 게 사실이었군.”

전의를 상실한 병사들이 검과 창, 무기를 내던지고 뒷걸음질 쳤다. 그 모습에 황후가 버럭 성을 냈다.

“뭣들 하느냐! 반역자를 얼른 붙잡지 않고서!”

손수 검을 빼 든 황제가 병사를 헤치고 나와서 지오프리와 마주 섰다. 그러자 몸집이 커다란 여우 하나가 두 사람 사이를 막아섰다. 여우는 신비로운 호박색 눈을 빛내면서 지오프리를 잠시 응시했다.

‘지오프리! 나만 믿어!’

응접실에서 가만 듣고만 있던 미오는 초조해서 내내 손톱을 물어뜯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 지오프리를 도울 수 없다는 것이 그녀를 절망으로 밀어 넣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여우로 변할 수도 있을 텐데…….’

작은 주머니에 있던 보석을 꺼내서 닦던 코로니스가 중얼댔다.

‘내가 여우로?’

‘첫날밤을 치른 게 맞는다면 말이지.’

코로니스의 말에 비앙카를 비롯해서 모두 볼을 붉혔다. 헛기침하던 미오가 그에게 방법을 물었다. 그녀의 능력이 불안정했던 것은 각인열을 해소하지 못했던 탓이고, 이제는 괜찮을 거라고 했다.

그렇게 어렵지 않게 여우로 변한 그녀는 서둘러 이곳으로 달려 나온 것이었다.

“은여우를 길들이는 이가 황제가 된다는 소문도 있던데…….”

지오프리가 거대한 여우의 털을 쓸면서 중얼대자, 황제가 그의 말을 끊었다.

“헛소리하지 마라!”

“황제 따위 관심도 없었는데 말입니다.”

지오프리가 카트리나를 쏘아보자 그녀가 몸을 덜덜 떨었다.

“괴물! 괴물 주제에! 감히 어디서!”

카트리나의 저주 같은 말에 지오프리의 곁에 서 있던 미오가 으르렁댔다. 말을 할 수만 있었다면 황후를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크르르.

여우를 달랜 지오프리가 씁쓸하게 입을 뗐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나 같은 괴물을 왜 건드리셨습니까. 조용히 지내려고 할 때마다 자객을 보내고, 독을 먹이고, 불을 지르지 않았습니까? 말씀해 보시죠. 새어머니.”

“닥쳐라! 내가 언제―!”

사람들 앞에서 제가 저지른 악행이 까발려지는, 치욕스러운 순간이었다. 목숨처럼 여겼던 위엄이 무너지자 이제 카트리나는 거의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황후가 목을 쥐고 꺽꺽대자 황제는 더 이상 못 참고 검을 빼 들었다.

“카스피언 제국 황제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한다!”

번쩍이는 검날이 빠르게 아래로 휘몰아쳤다. 하지만 여우의 앞발에 막혀서 검은 그대로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은색 털의 여우는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냈다. 말을 할 수 없는 미오가 짐승 소리를 냈다.

―크르르.

“아들아! 나를 살려 다오! 목숨만 살려 주면 내가―.”

엄청난 공포에 사로잡힌 황제가 그대로 무릎을 꿇고 사정했다. 벌벌 떠는 모습에서는 어떠한 권위도 위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지오프리는 황제의 말을 제대로 듣지 않고 입을 열었다.

“목숨을 살려 주면 또 나를 죽이려 할 것 아닙니까?”

지오프리의 말에 황제는 절대 아니라고 했다.

“나를 돌려보내 주기만 해 다오. 그러면 내, 뭐든 약속하겠다.”

“뭐든……이라.”

마음 같아서는 이대로 황후와 황제의 목을 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 선 미오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

“마음이 바뀌기 전에 멀리 달아나시죠. 다음에 제 눈에 띄면 그때는 살려 두지 않겠습니다.”

바닥에 그대로 쓰러진 황후와 비참하게 빌고 있는 황제에게 마지막으로 말을 전한 지오프리가 그대로 등을 돌렸다. 사무엘과 은빛 털을 한 여우가 그의 뒤를 따랐다.

* * *

“베일 후작님, 누가 찾아왔는데 어떻게 할까요.”

카스피언 공작을 보좌하던 사무엘 베일은 새로 즉위한 황제의 명에 따라 직위와 영토를 하사받았다. 아무것도 없던 그가 후작이 되자, 연신 가문의 친척들이 사무엘을 찾아왔다. 그들은 사무엘에게 작위나 영토 같은 것을 부탁했고, 그들의 딸을 사무엘과 맺어 주려고 안달이었다.

“지금 몹시 바쁘니까 내가 없다고 하도록.”

“그게, 꼭 만나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라비니아 베일이라고 하면 알 거라고.”

라비니아라는 이름에 서류에 무언가를 적던 그의 손이 멈칫했다. 사춘기 숱한 밤, 사무엘의 잠을 못 이루게 했던 첫사랑 여인의 이름이었다.

“옆의 응접실로 모시도록.”

걸쳐 두었던 재킷을 챙겨 입은 사무엘이 천천히 응접실로 갔다. 그가 복도에 나서자 지나던 미혼 영애들이 흘끔거리느라 바빴다. 호리호리하지만 탄탄한 근육질 몸에 미소년 같은 얼굴이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데 부족함이 없었다.

‘후작 각하는 어쩜 저리도 잘생겼을까? 아직 미혼이니까 내게도 기회가 있겠지?’

저마다 볼을 붉히는 사람들을 지나쳐 사무엘이 응접실에 천천히 들어섰다. 그곳에는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있었다. 라비니아는 무슨 연유인지 몇 년을 앓았다고 했다. 게다가 가문에 변고까지 겹쳐서 퍽 고생을 했단다.

“사무엘, 오랜만이야.”

마치 어제 헤어졌던 이처럼 다정한 인사를 건네는 라비니아의 음성이 떨렸다.

“베일 영애,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소식 전부 들었을 텐데…….”

“제가 일이 바빠서 미처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사무엘이 자리에 앉아서 손짓하자 하녀가 금방 차를 내왔다.

“너는 무척 좋아 보인다.”

“그렇습니까.”

라비니아는 연신 입술을 짓씹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몇 년 전에는 꿈도 꾸지 않았다. 사무엘 베일은 땡전 한 푼 없는 자작의 차남에 불과했다. 작위도 영토도, 그 무엇도 없는 그는 그녀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였다. 하지만 지금 사무엘 베일은 부유한 후작으로 카스피언 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신랑감이었다.

‘반면에 나는…….’

베일 백작의 사업 실패로 그야말로 폭삭 망했다. 값비싼 드레스도, 보석도, 부리던 고용인도 모두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하지만 나는 라비니아 베일이야.’

라비니아는 사무엘이 얼마나 그녀에게 매달렸는지 잘 알고 있었다. 폐인이 다 된 아버지는 라비니아에게 단단히 당부했다.

‘가서 후작 각하의 마음을 사로잡는 게다. 그것이야말로 우리 가문이 살길이야.’

이미 망해 버린 베일 백작가에 누구도 혼담을 넣지 않았다. 혼인 적령기를 이미 넘어 버린 라비니아가 비참한 감정을 삼키면서 입을 뗐다.

“사무엘, 너만 좋다면 내가 결혼해 줄게.”

“……아. 결혼 말입니까.”

찻잔을 쥐고 있던 사무엘이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과거 어리숙해 보였던 때와 인상이 많이 달라졌다. 차분한 눈매와 길러서 하나로 묶은 단정한 머리가 그간의 세월을 가늠하게 했다.

“하지만 어쩌죠. 저는 아직 결혼 생각이 없습니다.”

사무엘은 커튼을 뜯어서 지어 입은 라비니아의 구식 드레스를 보면서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라비니아를 만난 것은 그녀에게 지금의 그의 모습을 한번 보여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잘난 척은 아니다.’

그저 더없이 순수했던 시절, 마음에 담았던 여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이제야말로 과거를 끊어 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구나.’

사무엘이 마음을 정리하는데 그녀가 일어나서 그의 소매를 붙들었다.

“당장 결혼이 싫으면 약혼부터 하는 게 어떨까.”

“라비니아…….”

그녀가 그에게 매달리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사무엘이 잡힌 소매를 보면서 눈썹을 꿈틀거리자, 그녀가 더욱더 세차가 그를 잡았다.

“일전에 네 고백을 내가 거절했던 것은…….”

“거절이 아니라, 정확하게 무시하셨죠.”

사무엘이 빙그레 웃으면서 그녀의 말을 고쳐 주었다. 술에 잔뜩 취한 라비니아는 그의 발에다 잔을 집어 던지면서 꺼지라고 했었다. 사무엘은 그녀와 결혼을 꿈꾼 적도 없었다. 다만 뜨겁고 간절한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 그것도 내 잘못이라면 잘못이겠지.’

상대가 원하지 않는 고백은 폭력이 될 수도 있으니까.

그녀를 뿌리친 사무엘이 라비니아를 향해서 서늘하게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저는 사무엘이 아니라, 베일 후작입니다.”

라비니아는 너무도 달라진 그의 모습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무엘은 천천히 책상에 다가가서 서류를 한 장 꺼내 들었다.

“이걸 백작에게 가져다주면 아마 조금 도움이 될 겁니다.”

“……이건.”

“베일 자작을 도와주었던 성의에 보답하는 것으로 해 두죠. 그럼 살펴 가십시오.”

사무엘은 그대로 축객령을 내렸다.

입술을 짓씹던 라비니아는 서류를 쥔 채 그대로 등을 돌려야 했다. 한때 한 사람의 생과 사조차도 쥐락펴락하던 여왕의 말로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