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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님, 깨물어도 될까요 (115)화 (115/123)

115화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2)

“……공작님. 왜―.”

어미 새처럼 그녀를 품은 지오프리 때문에 당황한 미오를 그가 강하게 쏘아보았다.

“미오, 이렇게 옹졸한 남자 따위는 버리고 나와 우르체카에 갑시다.”

눈치도 없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든 알렉세이가 다시 우르체카 여행 타령을 시작했다. 그는 미오를 데리고 가다 일이 틀어진 것을 내내 아쉬워했다.

“알렉세이……!”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대공 각하로 불러 주던 것도 잊은 지오프리가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눈앞에서 잃을 뻔한 그녀를 되찾은 것이 불과 사흘 전이었다. 그러니 다시 미오를 누군가에게 내줄 생각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두 사람이 정말 싸움이라도 할 것처럼 굴자, 미오가 얼른 그 사이를 막아섰다.

“알렉세이, 날 공격한 자는 벌써 그의 검에 죽었어요.”

그 말을 하는 미오의 얼굴이 약간 그늘졌다.

지오프리가 죽인 것은 카스피언의 황태자니까, 일이 그리 단순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당연한 일을 한 것이니 굳이 칭찬 따위는 하지 않겠습니다. 그나저나 카스피언 공작. 이제 한번 인사를 들어 볼까요?”

소파에 가서 앉은 알렉세이가 여유만만한 미소를 띠었다. 건너편에 자리한 지오프리가 잠시 말없이 미오의 손을 만지작댔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저 지긋지긋한 얼굴을 아주 오래 봐 왔으니까.

“그냥 원하는 것을 부르시죠. 좋아하는 보석이나 비단이나 말이면 되겠습니까?”

“대체 생명의 은인에게 그게 무슨 말투인가?”

알렉세이가 재미있어 죽겠다는 눈빛으로 그를 응시하자 지오프리는 다시 주먹을 꽉 쥐었다. 미오가 핏줄이 불거진 그의 손등을 토닥이자 험악했던 지오프리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앞으로 나를 형이라고 불러 주었으면 좋겠네만.”

“……?”

알렉세이의 요구에 응접실에 모인 모두가 할 말을 잃었다. 언제나 오만하기 짝이 없는 지오프리가 누군가를 형이라고 부르는 게 상상이 되지 않았다.

가장 먼저 웃음을 터뜨린 것은 미오였다.

“알렉세이, 정말 그게 소원이에요?”

“이보다 더 진심이었던 적이 있을까 싶은데.”

알렉세이의 집요한 요구에 지오프리가 거친 숨을 내쉬더니 힘겹게 입을 뗐다.

“알렉세이 ㅎ, 혀, 형.”

마치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어눌하기 짝이 없었지만, 알렉세이는 그것으로 만족했다.

“자네도 알다시피 영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 내가 나이도 더 많은 데다, 카스피언 공작 부인의 사촌 오빠이기도 하니까.”

“진짜 맞는 말이네요.”

그간의 사정을 알 길 없는 미오가 해맑게 웃으면서 맞장구쳤다. 그녀의 환한 미소를 바라보던 알렉세이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미오, 우리는 이제 진짜 가족이야.”

가족이라는 말에 코로니스가 헛기침했고, 비앙카 역시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붉어졌다. 응접실에서 행복한 사람은 미오와 알렉세이뿐인 것 같았다.

* * *

모두가 잠든 밤.

지오프리와 알렉세이가 은밀한 만남을 가졌다.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것은 잘 알 텐데, 앞으로 어쩔 셈인가.”

아마도 지오프리를 노리는 이들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술잔을 기울이던 알렉세이가 한숨을 쉬었다. 응접실에서 마냥 웃어 대던 모습과 달리 자못 진지한 얼굴이었다. 알렉세이의 표정을 살피던 지오프리가 손을 내저었다.

“그런 표정 지을 필요 없어. 사사로운 곳에 힘을 쓸 만큼 어리석지는 않으니까.”

빼어난 능력을 지닌 수인은 이제 몇 남지 않았다. 그들은 인간들이 알지 못하는 영역에서 제국에 힘을 행사해 왔다. 하지만 언제나 인간의 일에는 절대 관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자칭 중재자 알렉세이.’

제국의 지배자인 지오프리와 맞먹을 정도로 큰 힘을 지녔으나, 알렉세이는 긴 세월 동안 언제나 방관자였다. 하지만 지금 그는 지오프리에게 걱정스러운 눈빛을 건네고 있었다.

“이 전쟁만큼은 내 손으로 끝을 봐야겠지.”

매서운 눈길을 한 지오프리의 모습에 알렉세이가 휘파람을 불었다.

“오! 카스피언 제국을 모조리 불사르려 했던 사람답지 않은 눈빛이군.”

알렉세이의 비웃음에 지오프리는 대꾸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했다. 그의 말에 틀린 것은 하나도 없었다. 미오를 만나기 전 지오프리는 복수심에 잠식된 괴물에 불과했으니까.

그때의 그는 죽음에는 죽음으로 맞대응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다.

어차피 그들은 죽지 않는 불멸의 존재였으니 죽음이 두려울 리 없었다.

“알렉세이. 그대 말이 옳다. 나는 그런 어리석은 생각을 품었었지. 하지만 이제 나는 살고 싶어졌다.”

미오가 사랑하는 이곳에서 정원을 가꾸고 싶었다. 호수를 바라보면서 함께 대화하고, 비가 내리는 날에는 창가에서 그녀와 차를 들 작정이었다.

또 카스피언의 이곳저곳을 그녀와 다니는 것도 좋을 것이다.

‘아직 미오에게 보여 주지 못한 것이 너무 많으니까.’

마냥 신기해하는 미오의 얼굴과 한여름 밤처럼 달콤함 미소를 떠올리자, 그의 입술이 절로 휘었다.

“네 개의 제국이 곧 망할 징조인가 보군. 지오프리 카스피언이 살고 싶다니.”

지오프리의 묘한 표정을 확인한 알렉세이가 두렵다는 듯 벌벌 떨었다.

“진짜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알렉세이가 크게 비웃자, 지오프리가 들고 있던 술잔을 곧장 세게 탁자에 내려놓았다.

“당장 쫓아내 달라고 용을 쓰는군.”

“그 표정은 또 뭐지? 퍽 새침한 게 우리 미오에게 배운 건가?”

알렉세이가 배를 잡고 웃어 대자, 밤하늘을 누비던 새 떼가 놀라서 푸드덕거렸다.

* * *

미오의 걱정은 곧 현실이 되었다.

오전부터 창밖 까마귀가 소란스럽더니 결국, 황제와 황후가 카스피언 영지를 몸소 방문했다.

“죄인, 카스피언 공작은 황제의 명을 받들라.”

1층에 쳐들어온 황제의 전속 기사들이 사방을 에워쌌다. 하나같이 중무장한 이들은 곧 전쟁이라도 치르려는 듯 보였다.

1층 응접실에 있던 코로니스가 바깥에서 들리는 소음에 투덜댔다.

“소란스러워서 못 살겠군요.”

미오는 그의 손등을 찰싹 내려치면서 화를 냈다.

“황제가 직접 와서 그를 위협하는데, 지금 그런 말이 나와요?”

황제를 홀로 상대하겠노라고 한 지오프리는 그녀를 이곳에 머물게 했다. 그리하면 그는 안심이 되는지 몰라도 미오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알렉세이, 비앙카, 코로니스 모두 소중하고 듬직한 친구지만…….’

그녀의 관심은 온통 문밖의 남자에게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 앉아 있을 수가 없었던 미오가 벌떡 일어나 응접실을 서성였다.

문밖에서 지오프리가 저지른 죄를 읊는 시종의 낭랑한 음성이 들려왔다.

“황태자 살해는 속죄받을 수 없는 중죄로 이것은 제국에 대한 반역에 해당하는 바이다.”

“황제 폐하, 제게 죄가 있다면 재판으로 시시비비를 따져야 하는 게 옳지 않습니까?”

층계 난간에 몸을 기댄 채 황제와 황후를 맞은 지오프리가 물었다.

아무리 죄인이라도 함부로 처벌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재판을 거론하지 않고, 반역 운운하는 것을 보면 이 자리에서 죽여 버리겠다는 선전 포고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 중 최고 괴물은 황제일 테지.’

어린 날 그에게 환한 미소를 보여 주고는 했던 남자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한때는 그가 아버지처럼 훌륭한 황제가 되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때도 있었다.

‘어머니와 함께 영원히 행복할 줄 알았지.’

하지만 누군가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만들어 냈다.

‘지오프리 카스피언에게 늑대의 피가 흐른다.’

늑대가 세운 제국은 늑대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예언은 매우 민감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늑대의 피가 흐를 황족을 경계했었다. 이것을 반역의 구실로 삼은 카트리나가 아가타 황후와 지오프리를 공격했다. 타국에서 온 아가타는 카스피언 귀족들과 좀처럼 교류하지 못했고, 그녀를 지지하는 세력은 미미했다.

‘너를 아껴 주는 사람을 만나서 웃으면서 사는 거야.’

지오프리가 희생되는 것이 두려웠던 어머니는 스스로 죄인이 되었다. 그녀의 죽음으로 지오프리는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 카스피언 제국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 변방을 지키게 된 지오프리는 그날부터 이 모든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은밀하게 감추어진 정보를 구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인고의 세월을 보낸 그는 얼마 전에 어머니와 그를 나락으로 몰고 간 이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카트리나.’

범인의 정체를 알게 되었을 때도 그리 놀라지 않았다. 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그 증거를 찾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벤의 죽음에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았다.

“황제 폐하에게 그것을 보여 드리도록.”

지오프리의 지시에 사무엘이 얼른 서류를 황제의 시종에게 가져다주었다.

“이게 다 뭔가?”

지오프리는 카스피언 제국을 모조리 쓸어 버리는 대신에 아버지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것을 택했다.

‘이것이 당신과 나의 차이를 보여 주는 부분일 겁니다.’

힘으로 밀어버렸으면 진작 몇 번이고 죽였을 것이다. 하지만 무력을 행사하는 대신 지오프리는 오랜 시간 증거를 모았다.

그 서류에는 이제까지 카트리나가 저질렀던 악행들이 시간순으로 기록되어 있었다.

카트리나가 어떻게 아가타 황후에 관한 헛소문을 냈고, 어떤 식으로 귀족들의 지지를 끌어냈는지 적나라하게 적혀 있었다. 베일 백작과의 결탁으로 황제가 모르는 사사로운 재산을 축적했다는 사실도 있었고, 도르프 제국에서 벌였던 금지된 사업에 관한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황제 폐하.”

지오프리는 선택의 갈림길에 선 아버지의 얼굴을 살피면서 웃었다.

“누가 이딴 종이 쪼가리로 황후를 모함하는가! 이런다고 네가 저지른 죄를 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러자 곁에 서 있던 황후가 그것을 뺏어서 재빨리 읽더니 서류를 갈기갈기 찢어서 바닥에 내팽개쳤다.

“황제 폐하, 억울해서 못 살겠습니다. 저 살인마가 내 아들을 죽이더니 이제 저까지 죄인으로 만들 작정인가 봅니다.”

“황후, 내 모든 일을 공명정대하게 처리할 테니 울지 마시오.”

카트리나를 위로한 황제가 눈을 부릅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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