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1)
하지만 저리 곧장 사과하자 더 따질 수도 없었다.
“그만 울어요.”
잘 울지 않던 남자가 내내 눈물 바람이라 그것을 지켜보던 미오의 음성에 물기가 어렸다. 지오프리는 눈을 크게 부릅뜬 채로 고개를 내저었다.
“울기는 누가 울었다고 그래.”
증거가 뻔히 있는데 아니라고 딱 잡아떼는 지오프리의 모습은 너무 사랑스러웠다.
“……진짜.”
그녀가 지오프리의 목을 와락 끌어안자, 떨리는 그의 두 손이 미오의 등을 더듬댔다. 미오가 그의 체향을 맡으며 속삭였다.
“그래서 아까 그 말은 뭐예요. 마법 주문 같은 거예요?”
코로니스가 그녀의 모습을 바꿀 때 들었던 그런 괴상한 언어 같기도 했다. 그녀의 물음에 지오프리가 맥없이 웃었다.
“난 마법사가 아니야. 미오.”
“그래서 뭐냐니까요.”
그가 계속 말을 돌리는 게 수상했다.
그녀의 추궁에 귀가 달아오른 지오프리가 헛기침했다. 그때는 미오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 말을 맨정신에 하자니, 지오프리의 음성이 자꾸 기어들어 갔다. 그때 미오가 그의 옆구리를 쿡 찌르자 지오프리가 그녀의 턱을 잡아 올렸다. 두 눈이 마주친 상태에서 그가 혀로 입술을 한번 축였다.
“그대와 함께 살고, 함께 죽기를 원한다.”
“……아.”
아주 작게 속삭이는 그의 음성에 이번에는 미오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런 말을 할 줄 누가 알았을까.’
낭만과는 거리가 먼 남자라고 생각했던 것은 그녀의 큰 오산이었다. 지오프리 카스피언은 아마도 네 개의 제국에서 가장 낭만적인 남자일 것이다.
한참 말없이 껴안고 있는 두 사람의 몸짓은 더없이 애달팠다.
심장 박동 소리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이리도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다시금 깨달았다. 서로의 숨결을 공유할 수 있는 이 순간, 더 바라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몸을 뗀 지오프리가 침대 위로 성큼 올라와서 앉았다. 아까와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내는 그의 모습에 미오가 슬그머니 몸을 물렸다.
“……왜요.”
“왜 거기 온 거지? 내가 분명히 우르체카에 가 있으라고 했을 텐데.”
더욱더 깊어진 눈매와 날렵한 턱선을 한 지오프리가 그녀를 추궁했다. 우물쭈물하던 미오가 이불을 방패 삼아 몸을 숨겼다.
“그러려고 했는데…….”
마음이 불안해서 그럴 수 없었노라고 중얼댔다.
“누구 마음대로 그 위험한 데를 온 거냐고 묻잖아!”
지오프리는 아까 벤의 검에 쓰러지던 미오를 떠올리면서 잔뜩 인상을 구겼다. 생각만 해도 온몸의 피가 죄 마르는 기분이었다.
“진짜 죽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그러는 당신은요!”
지오프리의 따져 묻는 음성에 그녀도 화가 치밀었다.
“당신이 죽고 나면 나 혼자 살아서 뭘 어쩌라고!”
그녀는 이미 쓸쓸한 시간을 충분히 보냈다.
그를 잊은 채 숲을 헤맸고, 굶주렸고, 추워서 몸을 웅크렸다.
두 번 다시 그런 외로움을 반복하고 싶지 않았다.
더구나 지금의 이 감정을 품은 채 그럴 수는 없었다.
미오가 불같이 화를 내자, 지오프리는 재빨리 표정을 바꾸었다.
“……내가 또 잘못했다.”
“하! 진짜…….”
미오는 주먹을 들어서 그의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전장에서 죽음의 사신처럼 검을 휘두르는 모습을 떠올리자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앞으로는 그런 일 혼자 결정하지 말아요.”
“그래. 뭐든 다―.”
그녀의 손목을 붙든 지오프리가 고개를 숙여서 미오의 손목에 입술을 댔다. 그의 입술은 손목을 타고 미끄러져서 미오의 팔과 어깨, 목을 훑었다.
“지, 지오프리?”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미오가 두 발을 버둥댔다.
방금까지 울던 두 눈에 당황스러운 감정이 깃들었다.
“저기, 나 아까까지 쓰러져 있어서 몸이―.”
“다른 말은 다 들을 테지만, 지금은 안 돼.”
“그런 게 어디 있어요.”
방금까지는 달을 따 오라면 따 올 듯이 굴어 놓고는 다시 독재자처럼 굴었다. 그에게서 벗어나려는 미오에게 지오프리는 진심을 입에 담았다.
“그대가 너무 보고 싶었어.”
눈을 뜨고 있는 시간 내내 그녀를 생각했다. 잠들지 못했으니 미오는 종일 지오프리와 함께하는 셈이었다. 빨리 이 지긋지긋한 전쟁을 끝내고 미오를 찾으러 갈 생각만 했었다. 그 갈망이 얼마나 깊었는지 황후나 벤에 대한 증오마저 희미해질 정도였다.
“……지오프리.”
그녀의 귓가에 더운 숨을 내뿜던 지오프리가 한 손으로 그의 셔츠를 찢었다. 탄탄한 근육 위로 새로 새겨진 상처가 생생했다.
“……흡.”
그는 그대로 미오를 넘어뜨리면서 입술을 겹쳐 왔다. 평소보다 더 서늘한 그의 입술 감촉에 미오의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떨어져 있는 동안 내내 그리던 입맞춤이었다. 기나긴 입맞춤 후 지오프리의 사랑 고백이 이어졌다.
“미오, 사랑해.”
“나도 사랑― 읍.”
그녀의 고백이 끝나기도 전에 미오의 여린 입 속으로 거친 욕망이 휘몰아쳤다. 그녀의 숨을 모조리 앗아 갈 작정인지 지오프리는 겹친 입술을 절대 떼지 않았다.
“잠, 잠시만…….”
숨을 헐떡대던 미오가 그를 피해서 손으로 입술을 가리려는 찰나, 지오프리가 순식간에 미오의 옷을 벗겼다.
“나 지금 급해.”
그 말만 남긴 후 지오프리가 그대로 거칠게 그녀의 몸을 파고들었다. 하나로 엉킨 두 사람의 몸이 열락으로 피어올랐다. 카스피언가의 2층에 짐승이 울부짖는 소리와 닮은 교성이 드문드문 터졌다.
* * *
전쟁은 금방 끝났지만, 승자는 누구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재산 피해가 막심했다.
일주일 남짓의 전투였지만, 복구는 몇 달로도 가능할 것 같지 않았다.
이 전쟁으로 카트리나 황후 역시 큰 슬픔에 잠기게 되었다.
“황태자의 몸에 누구도 손을 대지 말라.”
그녀는 벤의 시신을 궁에 가져와서 마법사의 도움으로 죽은 순간의 모습을 보존했다. 마정석의 힘이 있는 한 벤은 썩지 않고, 이렇게 고운 모습으로 황후의 곁에 있을 것이다.
“어쩜 이리 고운 금발일까.”
하지만 카트리나가 아무리 불러도 벤은 눈을 뜨지 않았다.
“황태자의 푸른 눈이 꼭 보석 같은데, 어째서 한 번 보여 주지 않는 겁니까.”
식음을 전폐하고 아들의 시신만 붙들고 있는 터라 장례를 치를 수도 없었다.
“황후, 이러다 그대의 몸이 상하겠소.”
황제가 전쟁 상황에 대한 회의를 마치고 급히 황후를 찾았다.
“그래, 제가 듣고 싶은 소식을 가져오셨습니까.”
아까까지 죽을 것처럼 흐느끼던 황후가 벌떡 일어나서 황제를 강하게 응시했다.
“……그건.”
황제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전쟁 수습하는 것도 골치가 이만저만 아픈 게 아닌데, 그는 후계자까지 잃었다. 그것도 그의 아들이 저지른 짓이라니,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어째서 그런 얼굴이십니까? 황태자를 죽인 죄인이 아직도 살아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당장 사형시켜야 합니다. 사지를 죄 잘라서 까마귀 밥으로 줘 버려도 이 분이 풀리지 않을 겁니다.”
분노에 몸을 떠는 카트리나를 끌어안은 황제가 다시 말을 머뭇댔다.
“내가 확실히 처리할 테니, 그대는 건강을 되찾는 데 집중하시오. 카스피언 제국은 그대의 손길이 있어야 하니까.”
분명히 그들 눈으로 지오프리가 벤을 찌르는 것을 봤는데,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죽은 사람은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 격이었다.
‘벤 황태자님이 용맹하게 싸우다가 전사하신 거라고 알고 있었습니다만.’
항간에 소문이 그리 떠돌고 있다는 말에 황제는 지오프리에 대한 처분을 강하게 언급할 수 없었다. 그의 두 아들이 서로를 죽이려 들었다는 것은 황실에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가뜩이나 전쟁으로 민심이 나쁜 상황에서 말이야.’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은 바로 지오프리였다. 귀족들은 오히려 지오프리의 공을 치하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어놓았다. 심지어 비어 있는 후계자 자리를 논하는 이까지 있었다.
‘그럴 수야 없지 않은가.’
황제는 그가 내친 모자를 다시 돌아볼 생각이 없었다.
사랑하는 카트리나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 정도의 각오도 없이 아가타를 죽이고 그 자리를 그녀에게 바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의 지오프리라면 더욱이 경계해야 했다.
‘……후계자?’
고개를 조아리는 척하면서 그의 목까지 노릴 것이다. 지금 귀족이나 민심 모두가 지오프리 카스피언을 추앙하고 있었다.
‘모든 일을 합법적으로 할 필요는 없지.’
게다가 그는 제국 황제의 몸으로 세상에 거칠 것이 없었다.
소중한 아들을 잃은 슬픔을 누릴 새도 없이 그가 가진 것을 지키자면 서둘러야 했다.
* * *
지오프리와 미오가 둘만의 회포를 푸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했다. 불청객이 찾아와서 내내 소란을 피웠기 때문이다.
‘당장 나오지 않으면 이 호수를 말려 버리겠다! 아니면 후원을 밀어 버릴지도 몰라! 자꾸 기다리게 하면 정원의 꽃을 다 뽑겠다!’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은 협박이 이어졌고, 참다못한 지오프리가 굳게 닫힌 침실의 문을 열고 나왔다.
응접실에 나오자 우르체카 대공과 비앙카, 코로니스가 함께 있었다. 지오프리를 발견한 대공이 못마땅한 표정을 지었다.
“손님 접대가 형편없군. 공작.”
“초대한 기억이 없습니다.”
지오프리와 대공은 보자마자 티격태격했고, 그것을 지켜보던 미오의 눈에는 촉촉한 기운이 스몄다. 잃어버릴 뻔하기 전에는 이런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지 알지 못했다.
“알렉세이!”
미오는 지오프리와 잡고 있던 손을 놓고 그대로 알렉세이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가 뛰어오는 것을 본 알렉세이가 일어나 두 팔을 벌려 미오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대로 몇 바퀴를 빙빙 돌리는데 두 사람의 얼굴에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당신이 준 갑옷이 날 살렸어요.”
“……누가 감히 미오를 공격했단 겁니까.”
반가운 인사도 잠시 , 알렉세이가 흥분해서 씩씩거렸다. 그러자 곁에 다가온 지오프리가 곧장 미오를 잡아채서 그의 품에 숨겼다.